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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사무처 법원답변서

    지난해 소집된 국회는 회기 가운데 4분의 3 가량 공전했다.의원들의 상임위출석률은 70%를 간신히 넘었다. 국회사무처는 27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담당재판부인 서울지법 남부지원 민사합의1부(부장판사 金大彙)에 제출한 사실조회답변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2월25일부터 10월13일까지 국회의원들의 상임위(예결위 포함) 출석률은 평균 71.7%였다.이 기간 동안의 임시·정기국회 회기 123일 중 94일은 회의가 열리지 않아 공전율은 76.4%였다. 출석률이 100%인 의원은 19명으로 국민회의 金宗培 金珍培 金한길 朴正勳裵鍾茂 李康熙 李基文 李相洙 李協 張誠源 鄭泳薰의원,자민련의 金顯煜 車秀明 朴九溢 吳龍雲 李肯珪 李澤錫 韓英洙 金許男의원 등이다. 반면 지난해 7월 보궐선거로 당선된 한나라당 南景弼의원은 소속 상임위인문화관광위의 6차례 회의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경실련은 지난해 7월 시민 1,123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의원들이 민생법안을 제때 처리하지 않아 국민이 피해를 보았다며 의원 283명을 상대로 1인당 위자료 10만원씩 지급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남부지원에 냈다.
  • 경제청문회-속기록

    국회 IMF 환란 특위는 25일 李經植전한은총재,洪在馨전경제부총리 등 증인 4명을 상대로 환란 원인을 밝히기 위한 신문을 벌였다.林昌烈경기지사를 상대로는 경제부총리에 임명된 뒤 첫 기자회견 당시 IMF 구제금융을 받기로 한정부 방침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다음은 증인·참고인 신문 요지.■李經植 전 한국은행총재 증인신문▒(자민련 李健介의원)97년 11월 10일 오후 9시 30분쯤 金泳三전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실이 있나. 있다.▒金대통령이 뭐라고 했나.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金대통령은 “李총재,주식시장도 나쁘고 이자율도 올라가고,환율도 불안한 등 경제가 어렵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묻고,얘기해 달라고 말했다.그런데 나는 12일로 기억된다.▒뭐라고 답변했나. 다 어렵지만 더 긴급한 것은 외환사정이라고 했다.외환사정이 극도로 나빠잘못하다간 국가부도위기 사태가 올 수 있기 때문에 긴급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金泳三정권 탄생 당시 ‘동숭동팀’과 연계,경제정책의 아이디어를 많이낸 사람으로서,한은총재로서,당연히 국가원수가 전화하기 전에 찾아가 (외환위기에 대한) 분석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해야 되지 않았나.직무유기가 아니냐. 대통령 되기 전 그 어른과 관계가 있다는 말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金대통령이 당선된 뒤 공적으로 처음 만났다.11월9일 姜慶植 당시 경제부총리,金仁浩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얘기를 해 몇가지를 더 짚어본 뒤 (보고)할 생각이었다.▒외환시장 개입시 한은총재는 재경원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나,아니면 직무범위 내에서 상황을 판단해 아이디어를 내고 대책방안을 강구하나. 월별로 할 때는 보고서를 만든다.그러나 일건은 국제부장 보고를 받고 그때 그때 결정한다.▒97년 10월28일,11월6일 등 3차례에 걸쳐 姜慶植부총리가 한은에 전화를 걸어 외환시장 개입과 중단을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했나. 10월28일엔 국제부장이 얘기해서 대체로 우리가 2.25%로는 환율변동폭을 못지킨다고 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변동폭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외환을 쏟아부어야 했다.후퇴해가면서 방어하자고 했다.▒姜부총리가 국회에서답변하다 말고 전화로 지시했다던 데. 외환의 주무부서는 어디까지나 재경원이다.양측이 협의하다 안되면 재경원에 따른다.▒(국민회의 丁世均의원)한은총재로 있으면서 언제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97년 한보사건이 발생한 1월말쯤이었다.그 뒤 3∼4개월은 잘 넘겼다.그런데 기아사태로 곤란하다고 생각했다.이후 10월20일 홍콩이 못버티면 우리도 어렵다고 생각했다.구제금융 필요성을 느낀 것은 11월3일쯤이었다.▒97년 1·4분기 당시 한은이 안이하게 대처하지 않고 구제금융으로 갈 수도 있다고 느꼈어야 했다.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4∼6월 사태가 호전되고 환율방어를 위해 쓴 달러도 사들여 진정됐다.▒ 1·4분기에 위기를 인식했다면 환란으로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답변은 못한다.10월 하순 이후의 사태가 워낙 커 6∼7개월 전에대처했다고 해서 10월 하순 이후 대처됐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왜 대통령에게 제때 보고하지 않았나.대통령이 몰랐다면 재경장관이나 한은총재가 보고해야 하지 않았나. 보좌를 잘못한 것은 할 말이 없지만 한은에서 보고했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국민회의 千正培의원)97년 10월28일 姜전경제부총리 주재로 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李전한은총재 등이 대책회의를 가질 때 10월27일자 한은자료로했나. 자료를 내놓은 것은 사실이나 재경원에서 가져온 ‘토킹 포인트’(논의요점)라는 4개 사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얘기했다.▒ 이 회의에서 IMF행에 대해 얘기했나. IMF로 가는 게 주제는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외환위기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나.fm 연말까지는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자민련 金七煥의원)97년 11월 9일 한은 부총재가 국무총리실에 가서 高建 당시 총리에게 외환위기에 대해 보고한 적이 있느냐. 한은 부총재가 낮에 총리공관에 가서 보고한 것 같다.▒ 한은의 자발적인 보고였나. 아주 중요한 문제가 일어날 것인데 총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1월10일 金전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는데 한은에서 직보를 한 적이 있나. 없다.내 기억으로는 전화를 받는게 12일로 기억된다.▒ (자민련 魚浚善의원)한은은 7차례 정도 환란을 위험성에 관해 보고서를냈다.그런데 국제부를 중심으로 환란 가능성을 경고하고,조사부를 중심으로한 거시경제 지표의 건전성 등을 보고하는 등 양면성을 띠었다. 조사부가 낙관적인 것만 보고 한 것 아니다.▒96년 경상수지 적자가 460억달러를 넘었다.경쟁력 강화를 위해 구조를 고쳐나가야 했다.대책을 세워야 했지 않느냐. 10월에 환란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姜전부총리와 여러차례 회동했다.적극적으로 주장해서 대책마련을 이끌어야 했지 않느냐. 할 말은 없다.10월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면 대응도 달라졌을 것이다.▒외환위기인데 시중은행 해외점포에 돈을 꿔준 것은 잘못이 아니냐.종금사지원도 그렇다. 주식시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단기채에 대한 관리를 못했다는 데는 동의한다.▒(국민회의 張誠源의원)金전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金전대통령이 외환보유고가 얼마냐고 물은 것은 대통령 본인의 책임도 있지만 보좌진의 책임이크다. 보좌를 잘못한데 대해서는 옛날에도 말했다.▒(자민련 鄭宇澤의원)姜전부총리가 10월 28일 외환 개입을 총재에게 맡기겠다고 전화를 했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11월19일 신임부총리 기자회견을 보고 아떻게 느꼈나. 상당히 당황했다.구제금융에 대해 대통령 재가가 난 상황이어서 그랬다.■林昌烈전부총리 참고인신문(국민회의 千正培의원)IMF 구제금융신청한다는 걸 다르게 발표하거나 지시자체를 거부하거나 했을때 金전대통령으로부터 사후 질책이 있었나기자회견 이후 11월 20일 문서만들어 보고 들어갔을 때 아무런 질책 없었다.▒IMF행 언제 어떻게 처음 알았나. 재경원 간부들하고 신임 청와대 간부하고 토론회 가졌다.그때 金영섭신임수석은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다음날 金瑢泰비서실장이 전화해 IMF의 피셔부총재가 온다는데 IMF문제 어떻게 하려느냐고 해 IMF로 가는 문제도 검토하겠다고 했다.가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두분 말씀 종합해 가는 방향으로 상황 점검해보니까 이미 IMF로 가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었다.▒캉드쉬 면담보고와 11월16일 姜전부총리와 협의한 내용에 IMF로 간다는 얘기가 있었다는데…. 나도 이 문건 가지고 나왔다.합의서는 아니다.다음주중 2,3명의 금융전문가를 보내 실태파악 착수하겠다는 내용에 발표시기는 한국정부에 일임한다고돼 있었다.
  • YS에“換亂 없을것” 보고

    국회 ‘IMF 환란원인 규명과 경제위기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특위’(위원장 張在植)는 18일 여당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경제청문회 첫 회의를 열어 재정경제부를 상대로 기관보고를 받은 뒤 IMF 구제금융 신청 당시 상황을집중 추궁했다. 조사특위 위원들은 외환위기 도래 원인과 姜慶植전부총리 등 당시 경제팀이 취한 대처방안의 적절성 여부에 초점을 맞추며 ‘金泳三정부’의 경제실정을 부각시켰다. 회의에서 국민회의 丁世均·千正培의원등은 “金泳三정부의 집권 5년은 대외개방 및 자본자유화라는 대외 경제여건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데실패,오히려 국민경제의 불균형적 악순환구조를 확대 재생산했다”고 따졌다.그는 “姜전부총리를 필두로 한 경제팀은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상태였다”며 옛 재정경제원의 정책실패를 집중 추궁했다. 자민련 魚浚善·국민회의 張誠源의원등은 “당시 재경원이 IMF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한 시점과 대응책을 밝히라”면서 IMF사태로 인한 국민의 직·간접 피해액수를 따졌다. 재경부는 이날보고자료에서 외환위기가 확산되고 있던 지난 97년 10월27일 당시 재정경제원(현 재정경제부)은 대통령주재 경제장관회의에서 “외환시장의 불안은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때문이며 우리 경제는 기초가 건실하므로 외환위기를 겪지않을 전망”이라고 낙관적인 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재경원은 또 97년 3월에 외환수급을 전망하면서 97년말 외환보유고가 35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 것으로 밝혀졌다.8개월 뒤에 88억7,000만 달러로급감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 행자부 일부 추진업무 ‘빈수레’

    행정자치부가 지난 한햇동안 추진하기로 했던 업무의 상당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일부 사업은 담당 공무원들의 판단착오 등으로 아예 재검토해야 하는것으로 드러나 구태의연한 행정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행자부는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19개 중앙행정부처에서 다루는 인·허가 등 61종의 민원사무에 대한 주민반응을 측정하여 11월 중으로 개별 통보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통보는커녕 계획자체가 연기된 상태다.조사방법을 당초의 우편조사에서 전화조사로 바꾼데다 한참 동안이나 걸려 재작성한 설문지마저 내용이부실하여 폐기됐기 때문이다. 행자부는 또 지난해 7월 교체한 공무원증을 4개월만에 다시 바꾸는 ‘갈 지(之)자 행정’을 벌였다. 과거의 공무원증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새 정부 출범에 맞추어공무원증의 디자인을 바꾸었으나,이번에는 앞뒷면의 기재내용 배치를 잘못해 금융사고가 잇따랐다.앞면에만 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없어,금융관련 서류를 제출할 때 2명의 공무원증을 앞뒤로 한장씩 내도 구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개월만에 공무원증을 두번이나 바꾸는 데 따라 예산은 물론 적지 않은행정력이 소모되게 된 것이다. 공직비리 감찰도 생색내기에 그쳤다.행자부는 범정부차원에서 중·하위직공직비리를 대대적으로 파헤치고 있던 지난해 10월27일 뒤늦게 중·하위직공직풍토를 개선시키겠다고 나섰다. 행자부는 당시 “1차로 11월 초부터 서울 경남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13개시·도에서 감찰활동을 한다”며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했으나 다른 기관과 달리 실적 공개는 기피했다. 행자부가 역점을 두어 추진하고 있는 전자주민카드사업도 현행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부분적으로라도 지난 1일부터 시행이 됐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10월13일 시행시기를 2년 뒤로 늦추자는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따르지 못해 법적 공백상태를 불러왔다. 또 주민등록증의 위·변조와 분실여부를 지난해 12월1일부터 전화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으나,정작 시행은 23일에 가서야 시작되어국민들에게 혼란을 줬다. 이에 대해 세종로 정부 청사 주변에서는 정부가 한탕주의,보고위주,생색내기 행정에서 벗어나 보다 치밀하게 업무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무성하다.朴賢甲 eagleduo@
  • 정치·사회 통합(달려오는 ‘유럽합중국’:下)

    ◎21세기 외교전략/경제성장·실업해결 최우선 과제/독­불­영 3각축 형성 미국 견제/국제질서 다극체제로 ‘새판짜기’ 【브뤼셀 金秀貞 특파원】 유럽연합(EU)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 그곳의 최대 화두는 ‘실업’이다.10월 평균 실업률 9.8%대.유럽합중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유럽연합 최대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새유럽의 길’‘제3의 길’‘새로운 중도’.모두 유럽통합 장정의 대열에 새롭게 등장한 좌파지도자들의 슬로건들이다.최근 잇단 정상회담에서 이들은 실업문제 해결과 경제성장을 유럽통합의 우선해결 과제로 삼았다. 독일과 프랑스,영국 세나라는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 3각축을 형성,21세기 국제질서의 새로운 판짜기를 시도하고 있다.군사·외교 분야서 적극적이고 당당한 외교를 펼침으로써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대항,본격적인 다극화(多極化)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지난 9월27일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가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예견돼 온 일들.유럽연합 15개 회원국중 스페인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13개 나라가 좌파 단독정권 또는 연립정권.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유럽의 적극성은 두드러진다.독일은 지난 8일 나토 16개국 외무장관회의에서 나토의 선제핵공격 포기를 제안,미국과 불협화음을 냈다.앞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기구인 ‘유럽방위군’을 설립키로 합의했다.독일 피셔 외무장관은 중국 반체제인사를 접촉하는 등 개입외교를 강화하고 있으며 EU는 회원국 만장일치로 북한과 첫 공식회담을 개최,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11·12일 열린 빈 정상회담에서도 EU정상들은 ‘고용정책 강화’에 손을 모았다.또 이를 위한 공공투자 확대안도 공식 거론했다.좌향화한 정치노선의 본격적인 반영이다.또 폴란드 체코 등 가입예정 동구 국가들의 가입협상에 대해서는 함구했다.기존 15개 유럽지역의 안정화를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이는 헬무트 콜 전총리와 프랑수와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우파성격의 ‘대 유럽 계획’(Grand Europe scheme)이라는 유럽통합정책의 기조가 바뀜을 의미한다. 내년 1월엔 단일통화 유로가 출범한다.셍겐협정으로 이미 유럽연합 지역 대부분에서 국경은 사라졌다.통합의 실험지대인 국경도시들이 운영되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의 비아드리나 대학같은 유럽통합 전문 대학도 생겨났다.유럽연합 교통망을 하나로 묶는,총연장 7만8,600㎞의 트래뉴러피언 네트워크 플랜도 활발히 추진중이다. 좌파의 등장으로 완전한 통합 시간표는 늦춰지리란 전망.그러나 정상들이 ‘역사적인 과업’이라 한 것처럼 유럽합중국 건설은 유럽정치인들에겐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대명제로 이미 자리잡았다. ◎독일의 역할과 전망/내년 의장국… EU 재정개혁 등 현안 풀어야/공동세금­독 분담금 연계 정책 변화 시사 99년은 유럽 통합에서 기관차 역할을 해온 독일로선 큰 의미를 지닌 해다. 순번제 의장국으로서 1월부터 6개월간 유럽연합의 갈길을 주재하게 된다.특히 EU의 개혁과 동유럽 통합문제 등 민감하고 굵직한 사안,즉 ‘의제 2000’을 해결해야 한다.무엇보다 유럽합중국 건설의 토대인단일 통화 유로(Euro) 출범 초반기의 성공적인 운용은 독일의 어깨에 올려진 커다란 과제다.EU정상들의 합의사항인‘고용 협약’등 실업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마련도 현안이다. 사실 많은 유럽인들은 유럽통합을 추진해온 콜 총리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전후세대인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집권하자 이후 EU정책의 변화에 대해 주목했다. “회원국이 공동세금정책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독일은 재정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라퐁텐 독일 재무장관의 26일 발언은 슈뢰더 등장 이후 독일의 EU정책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 예다.앞서 슈뢰더총리도 구동독 재건비용이 엄청난 상황에서 과도한 유럽연합 분담금을 내지 않겠다고 경고하며 예산동결을 주장,역내 4대 빈국(貧國)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아일랜드 등의 반발을 샀다. EU내에서 최고 수준의 세율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은 영국 등 일부 회원국들이 낮은 세율로 유럽 단일시장내에서 자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유럽내 최대 경제대국으로 마르크화를 포기해가며 유럽통합에 힘써온 독일은 사실 농업보조금을 제외한 순 분담금으로 124억 달러를 내고 있다.전체의 70%선이다.프랑스의 분담금은 8억달러.농업보조금 지원은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독일이 EU 의장국을 맡는 내년에 세금조화및 분담금 조정 문제등으로 회원국간 첨예한 이해다툼이 벌어질 것이 확실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독일은 베를린 천도(遷都)작업을 시작했다.지역·정서적인 통합으로 완전한 통독을 마무리하려는 독일이 유럽 통합의 키를 어떻게 조정해나갈지 주목된다. ◎린쉐 EU의원 인터뷰/“중기 활성화로 실업 극복” “유럽연합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실업입니다.많은 난관들이 있긴 하지만 중소 기업들을 활성화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의회 건물 회의실에서 만난 귄터 린쉐 유럽의회 의원(68·독일)은 중소 기업 전문가답게 중소기업을 통한 실업극복 방안을 제시했다.독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 지난 89년부터 유럽의회내 유로피언 피플스그룹(기독민주당)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좌파 정부가 다수를점한 유럽연합이 확대보다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고용’과 ‘성장’문제에 주력할 것으로 예견했다. “유럽의 실업자는 자그마치 2,000만명이나 됩니다.또 중소 기업수도 비슷한 1,800만개가 있습니다.다행일 뿐더러 흥미로운 대목이지요” 유럽연합이 중소기업을 정치적·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이어서 실업자 1∼2명씩만 더 고용하게 되면 실업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란 설명이다.물론 이론적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으나 그는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 특히, 타이완이나 한국처럼 거대 기업을 갖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벤츠나 지멘스 등 대기업이 세계화전략을 추진,아시아에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신 유럽인들에게 일자리를 내주지 않는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모든 어려움은 기회’로 본다며 유럽통합의 난관과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해 낙관론을 편 린쉐씨.지난 79년부터 19년동안 유럽의회 아세안(ASEAN)·동남아·한국 분과위 단장을 맡고 있는 아시아통이다. ◎실험지대 ‘유로리전 니세’/환경정책 공동 추진 큰 성과/獨·波·체코 접경… 밀수 등 부작용 불구/의회 구성 지역현안 협의후 공동 집행/400여 프로젝트 삶의 질 향상에 역점 아름다운 강 니세를 사이로 폴란드 체코와 국경을 마주한 독일의 지타우시(작센주).통독전 섬유 공장이 즐비했던 지타우시는 이제 유럽통합의 생생한 현장으로 유명한 국경도시가 됐다.주말이 되면 국경을 따라 있는 검문소마다 지타우시에서 물건을 사가는 수많은 폴란드·체코인들로 북적인다. ‘유로리전 니세’(Euroregion Neisse).니세강 국경지역의 유럽통합 실험지대란 뜻으로 지난 91년 3개국가의 지역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통합 개념이자 협정이다.지타우시와 폴란드의 리베레크시,체코의 제레니아 괴라시 일대가 해당된다.국경을 마주한 만큼 공통적인 문제점과 이익도 함께 갖고 있는 지역.공동사안을 협의,집행하는 의회등 조직도 구성돼있다. 유로리전 니세의 총 인구는 170만명.독일의 경우 작센주 영토의 24%가 유로리전 지대에 속한다. 이 지역이 주목을 받는 것은 3개국이국경을 접함으로써 각 국의 빈부차,문제점 등이 명확히 드러나고 공동프로젝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유럽통합 발전에 생생한 참고서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에서 불법 취업문제,주류와 담배의 밀수 같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문화·스포츠 교류,통합 관광상품 개발,연계 고속도로및 철도 건설 등 추진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무려 400여가지.95년부터 99년까지 EU로부터 6억 마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유로리전 모델의 결과에 대해 얼마나 많은 금전적 이익이 났나를 따지진 않습니다.삶의 질이 얼마나 향상됐느냐가 문제이지요”. 위르겐 클로스 지타우시장은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감시기구등 공동환경사업을 실시한 결과,니세강의 수질이 지난 89년에 비해 괄목할 정도로 개선됐다며 독일측에서 가장 만족해하는 것은 바로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 서울 아파트 올 최고폭 상승

    ◎‘부동산뱅크’ 이달 5일∼중순 조사… 평균 1.06% 올라/강남 최고 3.27% 상승… 강북 1.27% 까지 내려/송파구 오륜동 57평형은 6,500만원 오른곳도/신도시 일산·평촌 오름세 주도… 군포·부천 하락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이달 중순에 올들어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27일 부동산 격주간지‘부동산뱅크251가 지난 5일부터 17일까지 약 열흘간의 아파트 매매가를 비교,조사한 결과 서울의 경우 매매가가 올들어 가장 큰 폭인 평균 1.06%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아파트 평형별 상승률은 16∼25평형 1.12%,26∼35평형 0.75%,36∼45평형 0.83%,46∼55평형 0.65%,56평형 이상 0.47% 등이다. 지역별로는 강동,송파,양천,강남,강서구 등 재건축이 예정된 저밀도 아파트소재지와 동작,종로,용산,노원구 등이 평균 0.46∼3.27% 오른 반면 강북,은평,구로,중랑구는 0.28∼1.27% 가량 떨어졌다. 가격 상승폭이 큰 아파트를 보면 서울 송파구 오륜동 O아파트의 경우 57평형이 6,500만원 올라 6억6,000∼7억7,000만원,강남구 대치동 S아파트는 55,57평형이 5,000만원 오른 6억∼7억원에 시세가 형성됐고 강남구 개포동 주공 13∼19평형,강동구 고덕동 주공 15평형,강서구 화곡동 주공 13∼25평형 등도 2,000만원 정도 올랐다. 신도시 아파트 매매가는 평균 1.71% 상승한 가운데 일산,평촌,산본 등이 1.2∼1.82% 올라 상승세를 주도했다. 수도권 지역의 매매가는 평균 0.64% 상승했고 지역별로는 과천,구리,고양시 등에서 1.79∼2.61% 오른 반면 군포,부천,평택 등은 0.14∼0.91% 떨어졌다. 한편 올들어 지난 10월까지 큰폭으로 감소했던 주택건설실적도 최근 주택경기 호조에 힘입어 11월부터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건설교통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 10월까지는 월별 주택건설실적이 지난해 같 은달에 비해 50%이상 감소했으나 11월에는 10월의 1만1,956가구보다 140% 가까이 늘어난 2만8,584가구의 건설실적을 보였다고 밝혔다.
  • 학생 수업료 압류 못한다/입학금·기성회비도

    ◎관련법 개정안 국회통과… 수업차질 안주게 내년 시행 내년부터 초·중·고 및 대학교의 수업료와 입학금·기성회비는 압류할 수 없게 된다. 교육부의 관계자는 27일 “초중등 학교 및 대학 수업료와 입학금·기성회비 또는 학교운영 지원비에 대해서는 채권자가 압류할 수 없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지난 1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며 “법은 공포후 3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학교법인의 채무에 따라 채권자가 학생들이 낸 수업료를 압류,수업에 차질을 빚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 교육부는 지난 11월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사전에 교육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학교법인의 채무행위에 대해 채권자가 학생들의 등록금에 대해 압류할 수 없도록 했으나 국회심의 과정에서 이같이 수정됐다. 한편 청주지방법원은 지난 8월 서원대 학교재단인 서원학원(이사장 최완배) 채권자 金모씨(42)가 서원대 학생 12명을 상대로 낸 ‘채권압류 및 추심 신청’을 받아들여 등록금 압류를 허용했으나 지난 10월 청주지법 항고심에서 원심파기 결정이 내려졌었다.
  • 납·월북문인­검열·삭제(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6)

    ◎좌익계열 문학인 1∼3급 분류/49년 첫 제한조치로 교과서서 삭제/50년 전향작가 원고심 사제 없앴지만/6·25 터지자 대부분 자의·타의로 월북 광복 직후 한국문단은 제대로 된 문인족보도 없는 황무지에서 이념적인 패가름에 따른 단체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분단 고착화가 조금은 미지수였던 1946년 2월8∼9일에 열렸던 조선문학자대회는 그 무렵까지의 단체중 가장 광범위한 명단을 과시했는데 그 대회 초청자에는 213명의 문인 이름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명백한 우익적 문학인도 약 60명이 포함되어 있는데,여기에는 널리 알려진 친일문학인이 빠져있다.이 명단중 월북이 확인되는 게 대략 80명 가량이고,신원 미상은 50명 전후,기타 사상적으로나 전공이 애매한 인사가 20여명이다. 조선문학자대회는 바로 이 행사를 고비로 급격하게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한편 불법화 조처로 분단 한국사에서 암매장당해 오다가 87년에야 해금으로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고 있다. 세칭 납·월북 문학인에 대한 금서조치는 일제 식민시기의 작품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한국의 근대문학사에 커다란 공백을 초래했었는데,일단 한번 뚫어진 가치의 공동화 현상은 해금 이후에도 그대로 흉뮬스럽게 남아있는 것 같다. 정부 수립후 좌경문학인에 대한 첫 제한조처는 49년 9월 중등국어와 글짓기 교과서에서 일체의 관련작품을 삭제한 것인데,이때 삭제당한 작품수는 8종의 교재에서 시 수필 소설등 총 55편이었다. 관계기관이 공식적으로 ‘좌익계열 문화인’에 대한 제한조처를 발표한 것은 49년 11월5일이다. ○조선문학인대회 초청자 215명 이미 월북한 문학인을 1급으로 분류하고 남한에 남은 문학인중 좌익적이라고 당국이 판단한 문학인을 2,3급으로 나눠 총 51명이라고 밝힌다. 이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창작과 발표 활동 제한 조처를 강화하는 한편 보도연맹 가입권유가 잇따랐다. 분단 한국 현대문학사의 주축을 이루게 될 한국문학가협회 총회가 열린 것은 49년 12월17일이다. 추천회원의 명단에는 151명의 문학인이 올라있는데 이중에는 김기림,정지용 등 이른바 ‘전향자’들이 약 20명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내 전향문필가들의 원고 심사제를 발표(50년 1월27일),이들의 작품이나 저서를 게재 혹은 출판하려면 “각 시도 경찰국장을 경유하여 발간 사전에 원고를 치안국장에게 보내어 심사를 거친 후 출판”하고,“신규 간행물을 치안국 사찰과 검열계로 2부씩 보내주길 바란다”고 지시했다. ○근대문학사에 커다란 공백 초래 이러한 조처가 내린 한편 친일문학인들의 활동이 전면적으로 자유화돼 신문에는 그들의 각종 저서 광고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좌경 문학인에 대한 실질적인 활동금지 조치가 우리 민족문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따져봐야 할 일이다. 정부는 50년 4월7일 전향작가 원고심사제 철폐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심사제가 정착도 안된 불과 석달만의 일이다. 그리고 두달뒤 6.25가 발발했고,전향문학인들 대부분은 자의,혹은 타의로 월북했다. 정부가 ‘부역자’란 개념을 정립,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한 것은 51년 10월1일로 대략 75명 정도인데 여기에는 이광수와 같은 우익인사들도 포함돼있는 반면 박승극이나 송완순같은 비중있는 문학인의 이름은빠져있기도 하다.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연구가 진척돼있으나 납·월북문학인 문제가 아직은 숫자나 인적인 초보자료도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 남북대화나 통일문학의 창출을 위하여 관계당국이 적극 대처해야 될 시급한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더구나 월북문학인중 상당수가 북한에서의 활동이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 북한체제에서 이들에 대한 연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자료의 소멸시한이 이미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 美,이라크 전격 공습­국내 경제 영향

    ◎국제금융시장/長期戰 아니면 ‘찻잔속의 태풍’/환율·금리 소폭 오름세속 비교적 안정/달러화 강세현상 오래가지 않을듯/엔화 약세땐 대외경쟁력 약화 우려 미국의 이라크 공습 소식으로 국제금융시장은 달러당 원화 환율과 국제금리가 소폭 오른 가운데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이다. 이라크 사태가 오래 갈 경우 우리 경제에도 타격이 예상되나 단기적으로는 별 영향이 없을 전망이다. 이라크 공습은 ‘보다 안전한’ 통화의 선호도를 높여 달러강세가 예상된다. 이에 따라 엔과 원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는데,그 영향에 대해서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17일 일본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달러당 엔화 환율이 전일 115엔에서 117엔으로 올랐다.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1,211원선에 거래됐다. 우리나라가 발행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가산금리(미국 재무부채권에 얹어주는 금리)는 16일(미 현지시간) 10년짜리 기준 4.6%로 전일 4.47%보다 올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王允鍾 세계경제실장은 “일시적으로 달러 강세와 국제금리 상승이 나타나지만 이라크사태가 장기화되지 않는 한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王실장은 “지금까지의 원화 절상 추세에서 단기적으로 달러당 원화환율이 오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우경제연구소 韓相春 국제경제팀장은 그러나 “이라크사태가 달러강세를 부추겨 엔화가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일 경우 우리의 대외경쟁력이 약화되는 측면도 있다”고 우려했다. 韓팀장은 “내년의 경우 무엇보다 세계무역 위축이 우려되고 있어 이라크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우리나라의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油價/단기적으론 기름값 상승/이라크産 원유 도입 없어 국내타격 없을듯 국제유가는 전체적인 하향기조는 유지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소폭 상승하리라는 게 정부와 업계의 전망이다. 다만 원유 도입은 이라크로부터 직접 들여오는 물량이 전혀 없어 당장은 직접적 타격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계획이 알려지기 시작한 16일 국제유가는 배럴당 1달러가 뛰어 11.3달러(두바이산 기준)에 거래됐다. 정부는 미국의 공격 정도와 이라크의 대응 여부에 따라 일시적으로 2∼3달러 정도 인상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국제원유시장에서 이라크가 차지하는 비중이 물량 기준으로 4%에 불과해 유가의 급등세는 오래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국제유가 상승이 국내 경제에 통상 한달 뒤에 반영되는 만큼 당장 유가완충준비금을 방출해 국내 유가를 안정시키는 등의 특별대책은 필요치 않다는 판단이다. 산업자원부는 한국석유개발공사 및 각 정유회사와 함께 17일 ‘이라크사태대책반’(반장 具本龍 산자부 석유가스심의관)을 구성,안정적인 원유도입을 위한 24시간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추가 공격 등 사태가 악화될 경우 정유 5사와 유개공 등으로 석유수급대책반을 구성,비상사태에 대비한 ‘국제석유위기 대응방안’에 따라 단계적 대응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具本龍 석유가스심의관은 “당장 원유도입이 차질을 빚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스타누라와 쿠웨이트의 미나사우드 등 걸프지역 선적항이 봉쇄될 가능성도 있는 만큼 해양수산부와 협의,원유도입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수출업계/직접피해 없어 ‘일단 관망’/확전땐 對중동수출 다소 차질 올수도 직접수출이 워낙 미미해 별다른 영향이 없지만,제3국을 통한 간접수출은 다소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월까지 올해 대(對)이라크 수출은 100만달러 정도에 그치고 있다. 타이어 튜브 의약품 승용차 전지 베어링 등의 품목이다. (주)대우 관계자는 17일 “일부 생필품을 요르단을 통해 이라크에 간접수출해 왔으나 미미한 규모여서 이번 사태에 따른 직접 피해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 LG상사 등 다른 종합상사들도 비슷한 상황으로 별도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건설부문 역시 이라크 진출 기업이 전무해 직접 피해의 우려는 없다. 현대건설 요르단사무소 직원 2명이 이라크 수리조선소 건설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에 체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이라크사태가 장기화된다면 대(對)중동 수출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유엔과 이라크 간 양해각서를 바탕으로 내년부터 이라크에 대한 수출을 본격화하려던 일부 수출업체들의 사업계획도 다소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무협 관계자는 “현대자동차가 아랍에미리트로 수출한 승용차 중 일부가 현지 중개상을 통해 이라크로 재수출되고 있고 건전지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을 거쳐 이라크에 간접수출되고 있다”며 사태 장기화로 중동지역이 불안정해질 경우 올해 호조를 보인 중동 수출이 일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주)대우도 오는 27일 바그다드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내년 초로 연기했다.
  • 출장 핑계대고 쇼핑…대낮 노래방도/‘한심한 공무원’ 아직도 많다

    ◎‘공무상 외출’ 신고뒤 증권사 객장에/9급 기능직 3명 근무시간중 고스톱/서울시,10∼11월 23명 적발 문책 대낮에 술을 마신 채 여자들과 노래방에서 근무시간 대부분을 때우는 공무원.공무상 외출을 핑계대고 나와 쇼핑이나 증권사 객장에서의 주식전광판 관찰로 일과를 보내는 공무원.거기다 절도와 노름까지…. 이는 서울시의 자체 감찰에서 드러난 시 산하 일부 공무원들의 행태다. 시는 비리를 척결하고 무사안일을 추방하기 위해 지난 10∼11월 두달 동안 직원들에 대한 자체감찰을 벌여 금품수수 8명,절도혐의 1명,근무태만 10명, 향응수수 4명 등 총 23명을 적발,문책했다고 15일 밝혔다. 공직사회에 불고 있는 구조조정과 사정한파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일부 배짱 공무원들이 보인 비위는 각양각색이었다. ●절도 K국 姜모씨(44·토목7급)는 지난 5월부터 11월까지 시청 서소문별관 관광과 등 문이 열린 3곳의 사무실에 들어가 4차례에 걸쳐 구내식당 식권 128장(23만여원어치)를 훔쳐 구내식당에서 환전하려다 들켜 직위해제되고 사법기관에 고발까지 됐다. ●근무태만 N사업소 요금과 孫모씨(행정7급)와 검침원 崔모·李모씨는 근무지를 이탈,숯불갈비집에서 여자 7명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소주 5병을 마시고 인근 노래방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다 적발됐다. 또 K사업소 文모(이하 기능9급)·金모·鄭모씨는 근무시간 중에 민간인 집에 모여 고스톱을 치다가 감찰반에 걸려들었고 H사업소 관리과 여직원 成모씨(행정7급)는 출장목적으로 외출,평화시장에서 쇼핑을 하는 등 사적인 용무를 보다가 발각됐다.E영업소 白모씨(기능직)도 출장목적으로 나간 뒤 집에서 개인용무를 보다가 감찰반의 눈에 띄었다. 그런가 하면 K관리실 金모씨(토목7급)는 서소문별관 근처 D증권 객장에서 주식시세를 관찰하다가 적발됐고 J국 金모씨(행정7급)도 10월27일부터 4차례에 걸쳐 D증권 객장에서 주식시세를 관찰하는 등 근무시간 중 객장출입이 잦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금품수수 Y구 총무과 吳모씨(행정8급)와 方모씨(행정7급)는 사무실에서 모업체로부터 회식비 명목으로 100만원을 받았다가 적발됐다. 한편시는 올해 초부터 지난달 말까지 자체감찰 결과 118명의 비리공무원을 적발해 중징계 12명,경징계 29명,훈계 77명의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이는 지난해 263명에 비해서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 수치다.
  • 金 중위 의문사 재수사 전말

    ◎유족 등 잇단 타살 의혹 제기에 ‘총격 자살’ 사건 원점서 재조사 金勳 중위 의문사 사건이 재수사에 이르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지난 2월24일 金중위는 권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고 군 수사당국은 金중위가 자살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었다.그러나 유족들은 金중위가 타살됐다는 확신 아래 국회 국방위에 탄원서를 내는 등 진상규명에 나섰다. 金중위가 타살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제기됐다.지난 9월 미국 뉴욕 주정부의 법의학자 루이스 에스 노 박사(한국 이름 노여수)는 金중위의 사망이 ‘자살로 교묘하게 위장된 타살의 전형’이라는 소견을 밝혔다.권총을 오른손으로 잡고 자살했으면 신체 구조상 탄환은 왼쪽 머리 위쪽으로 나와야 하는데 金중위의 경우는 아래쪽으로 나왔다는 것이다.모 주간지는 사망 현장에 있던 권총번호가 金중위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같은 의혹 제기에 따라 결국 육본 고등검찰부는 약 5개월 동안 사건을 재수사한 결과,지난달 27일 사망원인을 ‘격무와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구성된 국회 국방위 ‘金勳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 소위원회’ 비공개회의가 처음으로 열린 지난 3일 밤 金중위 소대의 부소대장인 金영훈 중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군기무사에 체포되면서 국면은 바뀌기 시작했다.국방위 소위의 조사와 유족들의 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金중위의 아버지 金拓씨가 그동안 확보한 전역 병사들의 증언도 타살 가능성을 내비쳤다.증언을 종합하면 金중위의 사망 시간에 있어서도 군 당국의 발표와 실제 상황에서는 차이가 났다.이들은 金중위의 사망 시간이 아침 10시35분에서 11시 사이라고 증언했다.하지만 군 당국은 오전 11시50분에서 12시20분 사이라고 발표해 1시간 가량 차이가 났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 후 조사차 방문한 1군단 헌병대 수사팀은 소대원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서로 상의하면서 그 날의 행적을 쓰게 했다.중대장 金모 대위도 ‘이미 자살로 결론이 난 사건이니 상의해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이 때 金중사는 ‘내가 사고 현장에도착해 시계를 보니 12시29분이었다’고 강조,소대원들은 이를 기준으로 진술토록 유도했다.그러나 金중사의 증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결국 金중사의 구속,전역병들의 증언,국방위 소위의 조사 등과 유족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사건은 9개월 만에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 경비병 北 접촉 10개월 방치/나사 풀린 民·軍 수사기관

    ◎귀순자 통해 2월에 ‘40명 포섭’ 알아/“과장 진술”“구체적 혐의 없다” 무시/관련자 소환 등 조사않고 미온 대처 민·군 수사기관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경비병들이 북한 대남심리전 특수요원들과 접촉한다는 귀순자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10개월이 지나도록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9일 국방부에 따르면 전 북한군 상위 변용관씨가 지난 2월3일 귀순한 뒤 JSA내 우리측 경비병 40여명과 접촉해 포섭공작을 했다고 진술했다.하지만 안기부 국방부 경찰청 기무사 정보사 등 5개 기관은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하는 등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변씨는 2월3일부터 9일까지의 5개기관 합동신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판문점내 2초소와 북측 4초소 부근 군사분계선상에서 남한경비병들을 몰래 만나 선물을 교환하는 등 포섭활동을 펴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한국군 경비중대 4개소대 152명이 북한 공작조의 포섭대상이며 개인적으로 A일병,B일병,C일병과 직접 접촉했다.98년 2월 현재 한국군으로 북측 공작요원과 접촉하고 있다.2소대 김모상병과 친숙하게 만나 공작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합동신문조는 ‘변용관이 한국군과 접촉,대화만 했음에도 실적을 인정받기 위해 포섭된 자라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변씨의 진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군 기무사도 2월12일 변씨를 독자적으로 조사,‘한국군 경비병 3명을 직접 만났으며 또다른 4명을 포섭했다는 동료 특공조원의 보고서를 봤다’는 내용과 함께 이들의 이름까지 진술받았으나 ‘아직 포섭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관련자들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무사 관계자는 “변용관이 우리측 경비병 3명을 1∼2회 만났지만 그 이상 접촉하려 하면 피했다고만 말할 뿐 구체적인 혐의 내용을 제시하지 못해 특이 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고 적극 수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JSA내 우리측 경비병들의 대공 근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지난 2월18일 유엔사측에 기무사 요원이 상주해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무사는 또 지난 6월부터 金勳 중위 사망사건에 대한 정밀 재수사를 실시한 육군 검찰부로부터 수사협조나 협의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해 군 검찰의 수사가 허술하게 진행됐음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군 수사당국은 JSA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병사들은 수사대상이 아닌 데다 구체적인 혐의나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군 수사 관계자는 “이번에 구속된 당시 부소대장 金모중사는 변용관도 전혀 거론하지 않아 조사하지 않았으며 지난 6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미18의 무사 행정관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고 말해 金중위 사망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극히 미온적이었음을 시인했다. ◎김훈 중위 의문사 일지 ●2월3일=판문점 대표부 소속 북한군 변용관 상위 귀순. ●2월24일=金勳 중위(JSA 소대장) 권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 ●2월25일=金중위 부대 공동경비구역에서 후방으로 빠지는 날. ●4월∼11월=金중위 아버지 金拓 예비역 중장,군 수사당국의 자살발표에 의혹 제기,국회 국방위에 탄원서 제출 등 진상규명 활동. ●10월26일=국회 국방위,金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 소위원회 구성. ●11월27일=육군본부 고등검찰부 金중위 사망사건 최종수사 결과 발표.자신의 권총으로 자살 결론. ●12월3일=국방위 소위,JSA 소속 金영훈 중사(28)가 북한군과 자주 접촉했다는 참고인 진술 확보. ●12월4일=기무사령부,金중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2월9일=국방부,金중위 사건 전면 재조사 착수.
  • 시일야방성대곡 전재(대한매일 秘史:8)

    ◎‘시일야…’ 영문 번역 호외 발행/을사조약 전말도 폭로… 日 침략 서방에 알려/황성·제국신문 정간 횡포/일제 언론 탄압 날로 기승/장지연 구속·신문과정 보도/대한매일 항일 강도 더해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가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1904년 7월20일에 공포된 이 ‘훈령’은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함은 물론 “신문은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하도록”(제2항) 하였다.8월20일에는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의 대표를 불러 검열을 통보하였고,10월9일에는 ‘군정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을 시달하여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했다.바로 이튿날인 10월10일 헌병사령부는 뎨국신문에 무기정간 명령을 내렸다.이는 한국언론사상 처음 내려진 강제 정간이었고,일본군이 한국 신문에 정간을 명령한 첫 탄압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8일에는 한국주둔 사령관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고시군령(告示軍令)’19개항을 공포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집회 결사 신문 잡지 광고 등 언론에 관한 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도록 돼있었다.또한 군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사형 구금 추방 과료(過料) 또는 태형에 처하도록 하는 엄격한 벌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지연은 이와같이 엄중한 일본의 군령을 어기고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을 검열받지 않은 채 아침 일찍 배포한 다음에 일본 순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침 5시가 되자 일본 순시(巡視)와 순사가 신문사로 와서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따라서 이제 그에 대한 후속기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알리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11월21일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찬양했다.같은 날짜에 ‘사장피착(社長被捉)’이라는 기사를 실어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하였다. 22일자에 실린 논설 ‘위재한일관계(危哉韓日關係)’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케 하며 학무를 감축하여 교육이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였다.을사조약의 체결도 황제를 비롯,정부관리들과 국민이 모두 반대하자 일본은 병사를 궁궐에 끌고 들어와서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논평했다.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인구가 2천만인데 2천만이 모두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를 가지고 국민을 모두 도륙할 것인가.이날부터 대한매일은 정간 당한 황성신문에 실렸던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3회에 걸쳐 다시 전재했다. 23일자에는 장지연이 경무청에 구속된 후 일인 경무고문의 심문에 의연히 맞서서 항변한 내용을 게재하였다.일인 경무고문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받지 않고 멋대로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는가.”라고 심문하니 장지연은 “이른바 치안방해는 내가 알 바 아니다.대저 나라가 있은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는 것인데 지금 나라가 없으니 치안을 논할 수 있겠는가.내가 붓을 잡은지 7∼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국가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이에 경무고문이 할 말을 잃었다고 보도했다.(1905.11.23,‘사장항변’) 대한매일은 25일자 논설 ‘황성긍린(皇城矜隣)’에서도 정간 당한 황성신문을 속간시키라고 촉구하였고,26일자에는 장지연은 무죄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했다.법률에 따르면 장지연을 24시간 이내에 평리원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되어있는 데도 이와같이 여러날 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905.11.26,‘시하율법(是何法律)’,또 1906.1.12,‘탄(歎 ),황성구폐(皇城久閉)’에서도 황성신문의 복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11월27일자에 순한문과 영문으로 된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이 호외는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고 이등박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전말도 실었다. 이렇게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사람들과 서방 여러나라에 알렸다.
  • “72시간 장군” 군복 벗고 정훈공보관 발탁/姜浚權 예비역 준장

    ◎국방부대변인 능력 인정/예편 3일 앞두고 별단 진기록/임무는 소장급 직책 姜浚權 국방부대변인이 ‘지상 최고의 계급’(대령)에서 ‘하늘의 말단 별’(준장)이 됐다가 다시 일주일만에 사단장급(소장) 직책에 올랐다. 북한의 침투 도발사건 등 국방부의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TV 카메라 앞에 서서 묵직한 목소리로 국방부의 입장을 대변하던 ‘군인’ 姜대변인이 8일 민간인으로 변신,정훈공보관(별정 2급)에 임명됐다.국방부의 공보 및 정훈업무를 총괄하는 정훈공보관은 전임 朴모 소장을 비롯,주로 현역 소장이 보임돼 왔던 직책이다. 전북 익산출신인 姜공보관은 지난 67년 갑종 212기로 임관 후 줄곧 정훈장교로 복무하다 지난달 27일 군 생활 31년만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진급이전에도 정책부서의 과장급인 대령이었지만 千容宅 국방장관의 공보 참모로서 차관보급(중장) 이상만 참여하는 주요 정책결정 회의에도 빠짐 없이 배석해 발언하는 등 ‘중장급 대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또 국방부 청사 지하 1층에 있는 ‘장군 식당’에서 매일아침 열리는 조찬 간담회 등에도 어김 없이 자리해 주요 현안에 대한 홍보방향 등을 건의하는 등 장군 식당을 이용하는 유일한 대령이기도 했다. 千장관은 지난달 30일자로 전역 명령을 받은 상태인 姜공보관이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때 보여준 탁월한 업무능력 등을 인정해 예편 3일을 앞둔 27일 극히 이례적으로 특별진급을 상신,‘72시간 장군’의 영광을 선사해 화제가 됐었다. 姜공보관은 지난 10월22일 장군진급 내인가를 시작으로 진급 결정(10월25일),진급 및 보직인사(11월27일),대통령표창(11월28일),장군 전역신고(11월30일),정훈공보관 보직(12월5일) 등 1개월17일만에 모두 6번에 걸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육본 정훈감실 기획담당과 1군사령부 정훈공보실장,합참 공보실장 등을 두루 거친 정훈공보통인 姜대변인이 앞으로 열린 국방의 시대를 헤쳐가는데 얼마나 기여할 지 주목된다.
  • 재벌들 차입경영 행태 여전/IMF 와중에도…

    ◎5대그룹 올해도 18조 융자… 총 금융여신 161조원/회사채 발행도 75%·유상증자도 47% 차지/시중자금 싹쓸이… 돈줄 왜곡·증시 압박 가중 5대 그룹의 차입경영 행태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올해 금융기관에서 18조원을 추가로 빌려 지난 10월 말 현재 금융권 총 여신이 161조원을 넘었다. 회사채 발행 뿐 아니라 유상증자를 통해 시중자금마저 *쓸이하는 ‘자금독식 현상’도 여전하다. 30일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계에 따르면 5대 그룹이 은행 종금 보험 리스 등 금융권에서 대출과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발행 등으로 조달한 자금은 161조1,000억원이다. 지난해 말 142조8,000억원보다 18조3천억원이 는 것으로 은행대출은 22조원이 줄었지만 회사채와 CP발행은 각각 34조원,6조원씩 늘었다. 특히 정부가 지난 10월28일부터 5대 그룹에 대한 금융기관의 동일계열 회사채 보유한도를 제한키로 하자 5대 그룹은 하루 전날인 27일 4조8,350억원의 신규 회사채 발행계획을 신고하는 등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그룹별 신고액은 현대 1조4,750억원,대우 1조200억원,삼성 1조600억원,LG 7,800억원,SK 5,000억원 등이었다. 이에 따라 올들어 11월20일까지 5대 그룹의 회사채 발행신고액은 37조7,775억원으로 총 회사채 발행물량의 75.3%를 독차지했다. 이어 증시에서 무더기 유상증자 신청계획을 내 증시를 압박하고 있다.올해 5대 그룹의 증자 발행규모는 6조8,596억원으로 전체 증자물량 14조,3838억원의 47.7%를 차지했다.
  • 올 지구촌 자연 재해 손실 ‘최악’

    ◎890억달러 발생… 96년보다 48% 늘어/사망 3만2,000명·중국 이재민 2억 최대 【워싱턴 AFP 연합】 올해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사상 최악의 경제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세계적 환경단체인 월드워치 연구소는 27일 올 자연재해로 890억달러의 경제 손실이 발생하고 3만2,000여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또 3억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고 밝혔다.경제 손실은 지난 96년의 600억달러보다 48%나 늘어난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재해의 상당수가 삼림과 습지대 감소로 악화된 ‘인재’(人災)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월드워치에 따르면 올 최악의 재난은 지난 10월 중남미를 강타한 허리케인 ‘미치’.1만1,000명의 사망자가 났다. 경제적 손실이 가장 컸던 재해는 중국 양쯔(揚子)강 홍수.피해액 300억달러로 3,700명이 숨지고 2억2,300만명의 이재민이 생겼다.방글라데시는 금세기 최악의 홍수를 겪어 국토의 3분의2가 물에 잠기고 3,000만명이 일시적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 ‘崔章集 교수 논문’ 월간조선 販禁결정 반응

    ◎“발췌왜곡은 언론자유 아닌 언론 폭력”/사회단체 “당연한 조치” 일제히 환영/대책위,조선일보 불매운동 강력 전개 崔章集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을 보도한 월간조선에 대해 법원이 판매 및 배포금지 결정을 내리자 고려대와 시민단체는 당연한 조치라며 환영했다. 고려대 대책위원회는 ‘조선일보 왜곡보도 근절을 위한 고려대 연석회의’(회장 김준형·고대대학원 총학생회장)를 오는 16일 열기로 하는 등 앞으로의 활동 일정 마련에 분주했다. 대책위 소속 위원들은 지난 10월16일 대책위가 결성된 뒤 27일만에 내려진 결정을 환영하며 학내 뿐 아니라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 대책위는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여 조선일보의 반성을 촉구할 계획이다. 조선일보사가 일제시대에 저질렀던 친일기사 등 과거 행적에 대한 고발형식의 전시회 등을 마련하기로 했다. 오는 30일에는 조선일보사를 추가 방문,항의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PC통신 동호인들로 구성된 ‘언론개혁 통신연대’(대표 김동필·29)도 동호인들간 연대를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金씨는 “월간조선의 왜곡보도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정당하다고 본다”면서 “조선일보의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여러 단체와 협의하여 유인물과 전단지를 배포하고 통신상에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자료를 폭로할 계획”임을 밝혔다. 시민단체도 대책마련에 분주하다. 13일 오후 1시 서울 마포구 불교방송 7층에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경실련,참여연대,전교조 등 20여개 단체가 대책활동 간담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경실련 魏枰良 연구위원(38)은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학문자유의 기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판결이라 생각한다”면서 “우리 사회는 이제 좌·우 대립을 넘어 개혁·반개혁의 새로운 구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林崇澤 사무총장(48)은 “문제점을 여러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일단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면서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19개 문제항목 중 16개에서 이겼으니 자신들의 승리라고 아전인수(我田引水)적 해석을 하는 조선일보의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동”혹세 무민의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柳初夏 민교협의장(50·충북대 철학과 교수)은 “이번 사건은 국민적 동력을 집중하고 합의해야 할 시점에 불필요한 논쟁을 종식시켜준데 의미가 있다”면서 “정치권,언론,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그 본질의 하나인 사상의 자유 원칙을 존중해야 하고 이에 반하는 수구세력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金起式 사무국장(33)은 “언론이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적 성과를 부분 발췌하여 왜곡하는 것은 일종의 언론 폭력이다”고 규정하면서 “이번 판결은 언론 자유의 범위를 벗어난 것임을 명확히 해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 李敏壽 대외협력부국장(37)은 “법원의 결정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라면서 “조선일보사가 崔교수의 저작에 대해 필요에 따라 짜집기하는 등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을 적극적으로 바로 잡는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소송 법적절차는/崔 교수측 ‘가처분’으로 정당성 확보/재판부 결정 번복 가능성 희박/명예훼손·사상검증 자유 맞서 조선일보사가 지난 11일 법원이 내린 ‘월간조선 11월호’ 발행·판매 및 배포 금지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키로 함에 따라 崔章集 교수의 논문해석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2라운드로 접어들게 됐다. 이의신청은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는 가처분 결정에 불복,정식 재판을 통해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는 절차다. 심리는 이번 결정을 내린 서울지법 민사합의51부(재판장 申暎澈 부장판사)가 맡는다. 다음달 초부터 열릴 이의신청 공판에서는 “공인에 대한 언론의 사상검증은 헌법도 보장한 자유”라는 조선일보측 주장과 “사실을 왜곡해 명예를 훼손한 행위까지 언론의 자유로 볼 수 없다”는 崔章集 교수측 주장이 맞설 것으로 보인다. 또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등 문제가 된 10군데에 대한 견해를 밝힐 정치학자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설전이 예상된다. 정치학자의 증언은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증인의 중립성’ 여부가 논쟁거리로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처분 결정을 내린 재판부가 자신의 결정을 뒤집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쨌든 양측은 이의신청 판결에 대해 서울고법에 항소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崔교수측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같은 법원 민사합의25부(재판장 李性龍 부장판사)에서 따로 진행된다. 심리에서는 월간조선 기사로 인해 崔교수의 명예가 훼손됐는지와 훼손됐으면 그 위자료는 얼마인지를 결정한다. 崔교수가 승소할 경우 위자료 액수는 보도 경위,매체의 영향력,기사 분량,월간조선 11월호의 판매 정도 등을 감안해 결정된다. 이의신청과 손해배상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가처분 결정을 얻어낸 崔교수측이 한층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상태다. ◎‘崔 교수논문’ 논쟁 전말/월간조선 ‘좌파적 시각’ 게재에 시민단체 등 “매카시즘” 강력 비난/崔교수측 손해배상 소송/국내 외 학자·단체들 조선일보 비난성명 봇물 崔章集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쟁은 조선일보가 10월 18일 발간한 월간조선 11월호에 ‘崔章集 교수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시작됐다. 월간조선은 96년 10월 출판된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이란 崔교수의 저서에 들어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해’란 논문을 문제삼았다. 이 논문은 崔교수가 90년 9월 ‘한국전쟁 연구’란 책에 발표한 것으로,월간조선은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南進은 민족해방전쟁,北進은 가공할 사태’라는 소제목 아래 崔교수의 논문이 좌파적 시각에서 쓰였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또 93년 4월에 발간된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이란 崔교수의 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崔교수가 “한국전쟁은 미국이 金日成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결과로 일어났다”는 내용의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 정치학의 연구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미치게 될 매우 복합적인책”이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崔교수는 월간조선의 보도가 논문 가운데 일부 내용만을 발췌해 왜곡했다며 지난달 23일 서울지법에 월간조선 11월호의 배포금지 가처분신청과 5억원 상당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崔교수는 24일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월간조선은 金日成의 6·25 개전 결정과 관련해 전후 맥락을 빼버린 채 ‘역사적 결단’이라고 인용함으로써 마치 내가 이를 찬양한 것처럼 표현하고,심지어 조선일보는 내가 쓰지도 않은 단어인 ‘위대한 결단’이라고까지 표현했다”고 반박했다. 조선일보는 연일 사설과 기고,우익단체들의 崔교수에 대한 비난 등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에 비례해 국내외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조선일보에 대한 비난도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정치학회는 성명을 통해 “월간조선의 기사는 공정한 인용에 바탕한 합리적 비판이 아니라 논지의 부당한 왜곡에 근거한 이념적 폭력”이라며 매카시즘적 마녀사냥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민주노총 등은 “월간조선이 崔교수의 논문을 왜곡보도해 사상논쟁을 유발하고 용공조작을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정치연구회,민족예술인총연합,국민승리21,4월혁명회 등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단체의 성명이 줄을 이었다. 특히 미국 UCLA의 신기욱 교수(사회학)와 존 던컨 교수(동아시아 언어문화사) 등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의 한국학 학자 22명이 성명을 통해 “(조선일보 보도는) 냉전시대에나 통할 단순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1월 3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성명을 냈고,국민승리21은 조선일보사 사옥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6일에는 경실련,흥사단,환경운동연합 등 50여개 시민단체가 가입한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조선일보사의 사상검증 시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언론개혁통신연대,고려대대책위 등 4개 단체는 이날 조선일보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우익단체들의 성명도 잇따랐다. 대한민국 건국 5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달 26일 ‘국가 정통성을 부인하는 崔章集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崔교수의 논문 논쟁은 11일 법원이 월간조선 11월호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지 않는 한 배포할 수 없도록 판결을 내림에 따라 1라운드는 崔교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논문 논쟁 일지 ▲10월18일 ­월간조선 11월호,‘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崔章集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에서 崔교수의 사상문제 제기. ▲10월20일 ­崔교수,월간조선 보도에 대한 반박문 발표. ▲10월23일 ­崔교수,서울지법에 월간조선 11월호 배포 금지 가처분신청 및 약 5억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제기. ▲10월26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고려대 정외과교수,조선일보 비난성명 발표 ▲10월27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조선일보의 과거 행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 발표. ▲10월2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조선일보의 사상 시비중단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 ▲10월30일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의 학자 22명,조선일보의냉전적 사고를 비판하는 성명 발표. ▲10월31일 ­예비역 영관 장교 모임인 대한청죽회,‘崔章集 건국사관 규탄 결의대회’ 개최. ▲11월2일 ­언론개혁시민연대,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참여연대,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학술단체협의회 등 5개 단체,‘崔章集 교수의 현대사 연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실태와 문제점’이라는 토론회 개최. ▲11월11일 ­서울지법,월간조선 11월호 배포 금지 결정.
  • 내년 국가공무원·지방고시 시행일정 확정

    행정자치부는 10일 99년도 국가공무원 채용시험 및 지방고시의 시행일정을 확정,발표했다. 행자부는 7급 및 9급 공채시험은 우수인력 채용을 위해 올해보다 다소 앞당기기로 했다. 또 지방고시 1차 시험은 행정직렬은 행정고시,기술직렬은 기술고시와 같은 날 시행한다. 행자부는 직렬별 선발예정인원은 오는 12월 초순 공고할 예정이다. 다음은 공무원 시험 시행일정. ▲사법시험 ·원서접수:1.6∼12 ·일정:1차­2월21일,2차­6월29일∼7월2일,3차­11월23∼24일 ▲행정고시 ·원서접수:1.25∼30 ·일정:1차­3월14일,2차­7월8∼13일,3차­11월9∼10일▲외무고시 ·원서접수:1.25∼30 ·일정:1차­3월14일,2차­4월7∼13일,3차­6월1일 ▲기술고시 ·원서접수:5.26∼29 ·일정:1차­7월27일,2차­10월4∼9일,3차­12월23∼24일 ▲지방고시 ·원서접수:행정­1.25∼30,기술­5.26∼29 ·일정:1차­행정직렬 3월14일,기술직렬 7월27일,2차­9월17∼21일,3차­12월14일 ▲7급 공채 ·원서접수:3.22∼27 ·일정:1차­6월20일,3차­9월29∼30일 ▲9급 공채 ·원서접수:2.24∼3.6 ·일정:1차­5월16일,3차­8월25∼26일
  • 막바지 투쟁과 폐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8)

    ◎‘1910년 國恥’로 끝내 스러져/재판·옥고 등 일제 탄압 裵說 36살나이로 타계/꿋꿋이 필봉지킨 梁起鐸 소유권 통감부이전되자 통한의 광고 낸뒤 퇴사 1904년 창간이후 일제배척과 국권회복에 앞장선 대한매일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6년여만에 결국 스러진다. 대한매일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일제는 사장인 裴說을 두차례 재판받게 하고,지면을 실질적으로 이끈 梁起鐸을 구속·기소했으며,배설의 후임사장에게서 신문을 매수하는 등 온갖 수단을 부렸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양기탁이 떠나는 그날까지 결코 붓을 휘거나 붓끝을 돌리지 않았다. 배설은 1907년 10월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영사재판정에서 ‘대한매일의 논설이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한매일의 논조는 강경해지기만 했다. 1908년 4월29일 일제가 신문지법을 개정,외국인 발행의 신문이라도 발매금지·압수할 수 있도록 하자 그날 ‘百梅特捏(백매특날)이 不足以壓(부족이압) 一伊太利(일이태리)’논설을 실었다.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매특날)가 100명 있더라도 이탈리아 하나를 억압하지 못한다는 이 논설은,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일제의 음모는 거듭됐다. 1908년 6월 배설을 두번째로 법정에 세웠다. 그 근거로 내세운 게 ‘스티븐스 포살사건’을 비롯한 반일 보도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치한 영국 고등법원의 판검사가 서울에 와 열린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을 언도받았다. 배설은 상하이에서 복역하지 않을수 없었다. 논조를 주도하는 양기탁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기소했다. 이 재판은 양기탁의 무죄로 끝났다. 그는 대한매일에서 일한 뒤로 치외법권지역인 사옥에서 생활함으로써 일제의 검속을 피할 정도로 철저한 인물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총괄처리하면서 일제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할 리 없었다. 또 배설­양기탁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탄압에 대한 영국측 반발도 한몫을 했다. 그후 대한매일에는 어려움이 잇따랐다.창간이후 울타리 노릇을 한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한 것이다. 일제에 맞서 싸우느라 심신을 소모했고 상하이에서 옥고까지 치른 그는 ‘심장확장’이 원인이 돼 서른여섯 나이로 눈을 감았다. 배설은 숨지기 전날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은 영원케 해 한국인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많은 한국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를 기렸다. 그 가운데 5월5일자 대한매일 1면에 실린 박은식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天遣公來又奪公(하늘이 보내 공이 오더니 다시 빼앗아갔네) 歐洲義血灑溟東(유럽의 의혈인이 조선의 어둠을 씻고자) 翩翩壹紙三千里(삼천리 곳곳에 신문을 뿌렸네) 留得芳名照不窮(꽃다운 이름 남아 끝없이 비추리)’ 배설은 가도 양기탁은 남았다. 대한매일의 필봉은 배설 사후에도 꿋꿋함을 지켰다. 1909년 10월26일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해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대한매일은 거사·체포·재판·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安의사가 밝힌 ‘저격 이유 15가지’를 그대로 실은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배설 사후신문사 소유권은 영국인 萬咸(Alfred W. Marnham)에게 넘어갔다. 배설은 2차재판을 앞둔 1908년 5월27일자로 발행인 명의를 만함으로 바꾼 바 있다. 배설이 타계하자 그가 소유권을 승계했고 일제의 압력에 못견딘 그는 1910년 5월1일 통감부에 신문사를 넘겼다.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가 6월14일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를 李章薰으로 바꾸었다. 이날 양기탁은 대한매일에 광고를 싣고 퇴사했다. 기자들 대부분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매일은 두달여 연명하다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라는 국치(國恥)를 맞아 종간한다.
  • 친일의 군상:11/여자 밀정 裵貞子(정직한 역사 되찾기)

    ◎伊藤博文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1885년 도일… 이등박문 만나 ‘스파이 교육’ 받아/러 견제·고종퇴우 막후활동… 만주지역서 독립운동가 탄압/태평양전쟁때 韓人 부녀자 100여명 위안부로 내몰아/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된뒤 후회의 눈물/시골 아전의 딸로 출생 대원군 실각후 집안 몰락/어릴때부터 조정에 반감/한때 官妓여승으로 전전 1949년 2월 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서울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姜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姜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을까?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裵貞子(1870∼1952).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중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살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 관청에 체포됐다.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安경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이름을 지어주었다. 裵貞子의 ‘貞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일본으로 간지 9년만인 1894년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아뢴 바 있다. 양장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 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安重根 의사에게 살해됨(10월26일)으로써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현 瀋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귀순공작을 담당했었다. 배정자는 1920년 일제가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할 때 배후인물로도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초대회장 崔晶圭는 대한제국 시절 참위(소위)출신이었다. 매국노 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崔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배정자는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00여평의 토지를 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여성 100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해방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배정자의 형량과 얼마동안 징역을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裵貞子의 남성편력/빼어난 미모에 화려한 경력 소유/결혼·동거 등 거쳐간 남자 7∼8명 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남자’는 田在植. 한 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현 외무부)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육군 참장(종2품·현 준장)으로 승진,농공상부 협판(차관)직을 맡았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까이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朴榮喆(일본육사 15기 졸업,함북도지사·중추원 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은행원 崔모,전라도 갑부 趙모,대구 부호의 2세 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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