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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레 훈련 몇살이 적기?

    ◎러 바가노바아카데미 9세 입학 3년간 ‘실험’/“표현력 한계” 비판 밀려 당초 10세로 되돌아가 【모스크바=柳敏 특파원】 러시아의 발레명문 ‘바가노바아카데미’가 최근 이학교의 입학연령을 9살에서 10살로 다시 조정,고강도 발레훈련 시기를 놓고 발레계가 논쟁을 벌이고 있다.바가노바아카데미는 볼쇼이극장과 쌍벽을 이루는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마린스키극장 단원을 키워내는 러시아 2대 발레명문학교 가운데 하나. 이 학교는 ‘발레리나 특히 솔로이스트는 조기훈련을 받을수록 훌륭한 주자가 된다’는 발레철학에 따라 지난 3년간 당초 입학연령을 한살 낮춰 9살로 ‘실험’했으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발레계 비판에 눌려 결국 10살로 되돌렸다.그러나 바가노바아카데미는 조기에 고강도의 훈련을 받은 자만이 솔로이스트로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당초의 철학은 견지,8단계 과정의 고강도 프로그램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같은 조기 고강도훈련과 관련해 러시아 발레 2대명문인 볼쇼이학파와 마린스키학파가 다소 다른 발레철학을 갖고 있다는점이 흥미를 끈다.모스크바 발레계를 대표하는 볼쇼이극장계의 ‘모스크바발레학교’는 서서히 강도를 높여가는 연습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반면 상트페테르부르그 발레계를 대표하는 ‘바가노바발레학교’는 입학 2년차까지의 기초훈련 과정이 엄한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바가노바아카데미에서는 약 50명의 입학생 가운데 졸업생은 50%를 밑돈다는 것이 학교측 설명이다. 또 모스크바발레학교는 가급적 시녀(고학년) 주자를 연습무대의 주인공으로 선발하는 반면 바가노바발레학교는 저학년이라도 솔로이스트의 기질이 보이면 거침없이 주인공으로 발탁한다. 커리큘럼도 다르다.모스크바발레학교는 기초연습 자체에 무게를 실는 반면 바가노바아카데미는 발레곡을 발췌,‘실전발레’ 연습에 중점을 둔다.이들 철학을 종합하면 바가노바아카데미는 조기교육을 지향,졸업연령인 17,18세에 이미 대가로서의 전성기를 구가시키려 든다. 반면 철저히 ‘시녀우대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스크바발레학교는 17,18세에 신체적 아름다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고 보지만,특히 여성의 경우,역시 기교·표현력은 그이상 나이에서나 가능하다고 본다는 사실이다.바가노바아카데미가 입학연령을 한때나마 낮췄을 때 모스크바발레학교와 일부 비평가그룹에서는 “실험에서 끝나야 된다”는 지적이 높았었다. 비록 ‘조기입학실험’은 중단했지만 1738년 이반 4세때 세워진 바가노바아카데미 출신자들이 모스크바발레학교 출신자보다 전통적으로 ‘비교우위’에 있는 것으로 발레비평가그룹들은 보고 있다.사망한 루돌프 누레예프,현대발레계의 거장으로 우뚝선 미하일 바리쉬니코프,나탈리야 마카로바 등이 모두 바가노바아카데미 출신이다.그러나 볼쇼이극장의 선임발레가인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조기교육이든 그렇지 않든 훌륭한 발레리나에는 오직 훈련 밖에 없다.춤을 위해 살고 춤만 생각하는 자만이 프리마돈나가 된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강조한다.
  • 서예가 楊鎭尼(이세기의 인물탐구:165)

    ◎물 흐르듯 힘찬 ‘友竹 서체’ 창출/10살때 쓴 ‘송매루’ 현판·경복궁 ‘경성전’ 편액 유명/‘서예교육 정상화안’ 제기,대학에 학과 신설 주도 友竹 楊鎭尼의 서예는 글자를 생성할 때의 의상(意象)이나 미적 요소를 이미 함축하는 것이 특징이다. 글씨의 점이나 획, 글자의 짜임과 장법에서 ‘생체리듬, 음악의 리듬’같은 율동성으로 한순간에 대작을 이루어내고야 만다.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명필 종요가 연못에다 붓을 찍어 글씨연습을 했듯이 우죽은 그가 어렸을때 종이가 귀해서 청마루에 물을 떠놓고 먹물 대신 물을 찍어 마룻바닥에서 대필(大筆)을 훈련했다. ○남성적 호흡­맥박 특징 이른바 그의 행필은 한획을 긋는데 붓의 모든 털이 사용된다는 남성적인 만호제착(萬毫齊着)과 호흡과 맥박이 뛰는 옥루흔(屋漏痕)으로 필획의 원활함이나 생동감을 표현해낸다. 어릴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고향인 창녕에 가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여정(吾與亭)이라는 정사(精舍)에 그가 10살때 쓴 ‘송매루(松梅樓)’ 현판, 7살때 쓴 이의재(二義齋)가 남아있고 최근에는 경복궁 복원에 따라 TV드라마 ‘용의 눈물’의 배경으로 비치는 ‘경성전(慶成殿)’이 그의 글씨다. ‘차고 오묘한 서체는 전통서체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조형예술로 승화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우죽이라고 하면 먼저 지난 74년 글씨 한두개의 해석차이로 국전을 벌집쑤신듯 뒤흔들어놨던 ‘대통령상수상’소동을 빼놓을수 없다. 대통령상수상이있기 전까지 그는 14차례의 연입선과 두차례의 연특선으로 이제는 국전 추천작가가 되기 위한 한번의 ‘특선’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날 아침 조간신문은 ‘대통령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고 일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대행운에 놀라 그는 하루 동안 플래시 세례와 축하전보 전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기쁨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다음날 신문은 ‘국전대통령상에 오자(誤字)가 있었다’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서릿발을 퍼부었다. ‘대통령상 수상’과 ‘대통령상수상 취소’라는 극단적인 좌절과 허탈감에 시달려 그는 졸지에 벼랑끝으로 내몰릴 수밖에없었다. ‘노래를 부를때 리듬이 틀리고 가사만 맞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반박과 ‘내용이 틀린데 글씨만 잘쓰면 대수냐’는 비난, 심지어는 서예계의 원로요, 당시 국전운영위원장이었던 소전 손재형을 빗대놓고 ‘심사위원들이 글을 해득하지 못하고 글씨만 뽑았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대통령상 수상 시비 그가 써낸 작품은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의 시 2수중 한수를 ‘초서칠언절(草書七言絶)’이란 제목을 붙여 출품한 것이었으나 원문과 비교해본 결과 둘째행의 ‘酒債尋常(隨)處有’의 ‘수’가 ‘행(行)’자이고 넷째행의 ‘傳(與)風光共流轉’의 ‘여’는 ‘어(語)’자가 돼야한다는 지적이었다. 서단이 발칵 뒤집혔으나 당시 현대미술관장 尹致五씨는 서예에 능통한 月灘 朴鍾和, 한학자 安朋彦씨며 대만대사관의 한문학자들의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수렴한 결과 臺北판도 무방하며 우리나라의 목판대로도 얼마든지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서적은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따를 수’와 ‘다닐 행’은 같은 뜻으로 가능하고 ‘더불 여’와 ‘말씀 어’도 해석이 같다는 해명이었다. 황망중에 소전이 몸져 눕게되자 月田 장우성이 우죽이 보고 쓴 臺北판 ‘천가시(千家詩)’를 문공부에 제출하도록 권유해주었고 ‘칠언율(七言律)’이나 ‘칠언절(七言絶)’등 우리 서단의 해석이 단적이었음을 입증할수 있었다. 이 대통령상에 대한 시시비비는 결국 ‘오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국전을 가운데 둔 국전비리에 얽힌 것이며 ‘서예계의 풍토쇄신’을 위한 호된 비판이었다고 할수있다. ‘대통령상 수상’시비는 싱겁게 수면밑으로 가라앉아버렸고 그의 작품은 현재 역대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품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충격을 받고 몸져 누웠던 소전은 6년여만인 81년에 타계했다. ○안진경 등 각체 두루 섭렵 그와 소전과의 관계는 학맥이나 지맥, 인맥과도 관계가 없는 순수한 사제간이다. 부산 동아대학이 주최하는 전국 민전서화전람회에 소전이 심사위원으로 내려왔다가 우죽의 ‘흐르는듯 힘찬 웅필’을 보고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으로 격려하여 제자를 삼았고 그는 스승을 따라 중앙서단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어떻게 부산사람이 소전 선생의 제자가 되어 총애를 받을수 있느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그는 본래 창녕에서 한학자인 楊孝周씨의 딸만 넷이던 집안의 만득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공자를 만난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孔子의 자인 중니(仲尼)의 ‘니’를 이름에 넣게 되었고 부친은 사십을 넘겨 늦게둔 아들을 귀하게 여긴 나머지 6살이 되기전에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0대 후반부터 부산의 명필이던 오제봉 김광업을 사사,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혹독한 수업을 자처하고 안진경(顔眞卿)체와 서체의 유사성이 많은 하소기(何紹基)에 의존하여 각체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59년부터 국전에 출품하는 동안에는 소전의 체본을 가지고 초서체를 공부하긴 했지만 스승의 ‘만족한 얼굴을 보지못해’ ‘눈물을 흘린일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갖기 위해 ‘밤을 낮삼아’ 팔뚝이 붓도록 글씨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그가 서예계에 끼친 공로는 문공부에 ‘서예교육의 정상화안’을 제기하여 대학에 서예과를 신설한 일이다. 부인 金玉姬씨도 같은 서예가로 93년 미국 시애틀에서 부부전을 연 바 있다. 그는 79년부터 종로구 인사동의 우죽서실에 머무르면서 한·중·일교류전 등 주요 단체전에 출품하고 하오에는 후학을 가르친다. 연약해보이나 날카로운 안광은 지금도 칠순이라고 보기엔 지칠줄 모르는 정열이 가슴속에 살아있다. 아프고 잡다한 인생사를 거친 그의 글씨는 이제 법의 한계를 떨쳐버리고 짜임과 운(韻)과 품(品)을 갖추면서 자연스러운 획으로 우죽체인 청려경(淸麗境)을 곡강이 흐르는듯 써내려가는 시기다. □연보 ▲1928년 경남 창녕출생 ▲1946년 초등교원검정시험 합격 ▲1948년부터 부산경남상업중 및 부산한성여대·교육대,서울한성여대강사 ▲1959­73년 연12회 국전입선및 연2회(65·68년)국전특선 ▲1965년 전국교육자 휘호대회특선 ▲1968년 서예개인전(부산) ▲1971년부터 소전 孫在馨 사사 ▲1974년 국전 대통령상수상 ▲1981년 국전 초대작가 ▲1982­88년 국립현대미술관초청전 ▲1983년 국전및 전국대학미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심사위원장 ▲1988년 국전 심사위원장, 88국제서예올림픽전(예술의 전당)·한국서예100년전 출품, 부산개인전 ▲1990­96년 대한서예대전 운영위원장, 한국서예국전 30년전 ▲1994년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1997년 한·중문화교류전 ▲1998년 예술의전당 초대 초서전 ◇수상 예총회장상(65년) ◇작품 충렬사 ‘昭萃堂’휘호 및 효창공원 ‘彰烈門’‘道義門’ 경복궁‘慶成殿’ 대편액 등 현판비문 다수
  • 연극인 김의경(이세기의 인물탐구:164)

    ◎10년 앞 꿰뚫는 공연 예술의 선지자/초대형 청소년 뮤지컬 ‘슈퍼스타’ 기획 공전의 히트/청소년공예술진흥회 등 구성,연극계 입지 넙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분과 결부된 감성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다’ 극작가이자 발군의 연극기획자인 김의경의 연극인생을 두고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나 김의경은 극작가 이전에 먼저 ‘조직의 천재’다.단체를 조직하고 그 조직을 움직이는데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획 능력을 타고 났다.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포착하여 그 시대의 연극을 탄생시키는가 하면 그때의 활약상으로 한 시대의 영욕과 투철성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극단 실험극장 창립 동인 그가 조직한 단체의 면모를 살펴보면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시절의 서울대 연극회를 필두로 지난 60년, 이낙훈 김동훈 등과 만든 극단 실험극장을 들 수 있다. 창단 당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노력하는 천재를 발굴하고 미래의 참된 예술인을 위한 가교가 된다’는 것이었으나 이 극단이 10년이상 지속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그러나 당시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던 소극장 중에서도 실험극장은 최근까지 단연 돋보인 단체로 손꼽혀 왔다.사무실도 없고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던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그들은 연극을 향한 열망만으로 종로 2가 아세아제과점에 죽치고 앉아서 ‘행운의 여신’이 오기만을 베케트의 고도처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끝내 여신은 손짓하지 않았고 그대신 사회 각층의 연극애호가들을 모아 ‘실험극장 후원회’를 만들었다.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때는 연극계의 원로 여석기 이진순 이해랑이 원경씨와 의논하여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축전’을 기획했고 스스로 사무간사가 되어 고급 관객을 위한 티켓을 제작한 것이 연극 페스티벌 사상 공전의 히트를 성취시킨 첫번째 예이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76년,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신만의 현대극장을 창단했고 춤과 노래와 연기의 총체적 예술에 눈뜨게 되었으며 창작뮤지컬 ‘빠담빠담빠담’과 ‘백설공주’‘피터팬’‘올리버’‘오즈의 마법사’ 등청소년 연극과 어린이를 위한 어른의 뮤지컬로 연극의 대형화,형태의 다양화, 관객의 광역화에 성공했다.그중에서도 청소년을 위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관객 2백만을 동원한 초대형 호화판으로 정력적이면서도 주도면밀한 그의 기획력은 단시일에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을 발휘해 냈다. ○극작가로도 활동 활발 실험극장이 자기세계를 위한 위대한 준비기간이었다면 뮤지컬공연은 전문연극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군소극단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대형 뮤지컬에 승부를 걸면서 청소년층에 ‘연극을 보는 것도 수업’이라는 캠페인을 벌여나갔고 이화여고 강당인 류관순기념관과 능동 어린이회관의 무지개극장 등 공연장을 확대한 것도 그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 그가 어린이·청소년연극을 만들게 된 동기는 지난 75년 국제극예술협회(ITI)총회에서 만난 미국의 저명한 연출가 해럴드 클로먼이 ‘한국연극사’ 토론중에서 ‘한국연극의 영세성과 낙후성’을 타개하려면 ‘먼저 어린이연극을 시작하라’는 충고에서부터다.김의경 특유의 냉철한 투쟁정신과 정확성의 힘은 지난 80년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ASSITEJ) 한국지부를 유치하는가 하면 한국청소년공연예술진흥회를 발족하여 연극계 입지를 강화하는데 추호의 빈틈이 없는 완벽성을 기하고 있다.이후 대학로극장 개관과 함께 ‘대학로의 타락과 황폐화’를 막기 위한 대학로지역 극장연합회,서울시립극단의 초대단장 겸 예술감독으로서 지방의 시립극장의 모임인 한국공립극단연합회 등은 결국 연극인의 단합과 연극의 퇴보를 검속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극작가로서 그가 쓴 ‘함성’‘북벌’‘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와 ‘남한산성’ 등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고난사, 민족정신에 깔린 간독을 갈파하면서도 당대의 정사를 이지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론 정연한 원칙주의자 그런 가운데 극의 반전과 드라마투르기로 어둡고 슬픈 이야기에 진지하게 파고들고 억지웃음이 아닌 투명한 웃음을 무대에 부조하여 관객 공감의 밀도를 더하고 있다.이런 창작의지는 미국의 명배우 윌리엄 워런이 말한 것처럼 ‘기계가 인간의 웃음을 앗아가는 시대’에서 ‘진정한 웃음은 우리들 인생의 시’라는 차원과 서민의 애환을 보다 간박하게 펼치는데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그는 평남 순안에서 의명학교에 재직하던 교육자 김연묵씨의 9남매중 여섯째로 태어났다.해방후인 10살때 월남하여 서울대 사대부고에 다닐때는 교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고 일찍이 소설가 허윤석씨로부터 문재를 인정받기도 했다.그만의 사업적인 두뇌는 아무도 뮤지컬의 붐을 예견하지 못할때 청소년 연극인 ‘수퍼스타’를 무대에 올렸으며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 연극계는 뮤지컬의 회오리에 휘말려 있다.연극계의 편협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선험적으로 ‘연극산업’을 시도한 셈이다.그런 한편으로는 ‘한국 연극의 홀로서기’를 위해 ‘뉴욕­런던­파리­도쿄’로 이어지는 세계적 극단의 공연일정속에 서울공연이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는 것을 끈질기게 주장해 왔다.‘서울은 마치 호적이 없는 무적자’‘우리의 현실은 빈자의 왕자’라는 자조가 그의 예술적 고뇌를 뒷받침한다.성격은 원만하지만 능소능대보다는 이론이 정연한 원칙주의자이다.능력있는 ‘걸물’로 불리는 부인 최문경씨와의 사이엔 남매.서울시립극단의 봄공연인 입센의 ‘민중의 적’을 준비중이다. 그의 감성은 연극무대에서 항용 ‘이성과 지성의 갈등’을 교직시키면서 어느때는 ‘노도와도 같은 웅변’을 뿜지만 그의 영혼의 뿌리는 한국연극의 10년 앞을 재단하는 연극의식이 누구보다 총달하다.지금도 희곡·기획·조직에서 이시대 삼장장원의 면모를 마모시키지 않는 그는 연극계의 기수로서 시들 줄 모르는 기백과 예각적 혜안으로 언제까지나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세다. □연보 ▲1936년 평남 순안 출생 ▲1960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업 ▲1960­72년 극단 실험극장 창립동인·운영위원·대표 ▲1961년 MBC창설멤버(PD1기) ▲1963년 희곡 ‘애욕의 우화’공연 ▲1964년 희곡 ‘갈대의 노래’공연, TBC창설 멤버 ▲1964­94년 국제극예술협회(ITI)한국본부 사무국장·부위원장 ▲1967년부터 캐나다 ITI총회 참가 ▲1968­70년미 브랜다이스대학원 수료, 연극학 석사 ▲1973­76년 중앙국립극장 공연과장 ▲1976년 현대극장 창설, 대표 ▲1980년 한국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ASSITEJ) 초대 이사장 ▲1983년 미 하와이대 연극학과 수학 ▲1986­89년 한국연극협회이사장, 서울올림픽문화축전 서울국제연극제 상임위원 한국청소년공연예술진흥회이사,ITI한국본부 회장,서울시립극단 초대단장 겸 예술감독, 동국대 고려대 서울대 중앙대 출강 ‘세계신경향희곡선’(76년) 희곡집 ‘남한산성’(77년)‘경극과 매난방’ 번역(93년) 외 백상예술상 희곡상(75·86년) 눈솔상(85년) 문화훈장 ‘관훈장’(89년) 서울연극제 희곡상(91년)
  • 격동의 대한제국 이면사/철없는 임금(비록 남가몽:1)

    ◎고종 첫 어명 “계동 군밤장수 처형하라” 대원군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해가면서 와신상담 집권의 기회를 노리다가 1863년 마침내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위에 올려 놓는데 성공하였다.이 분이 바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다.고종의 즉위식 날이 음력으로 12월13일이었으니 양력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취임식 날인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는 열두살 철없는 어린아이였다.만으로 따지면 10살 밖에 안되는 아이였으니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다.그러나 고종 앞의 철종이 18살이었고 그 앞의 헌종이 8살,그 앞의 순조도 11살 나이로 등극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 둘째 아들… 12세 즉위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왕위에 올랐느냐 하면 순조,헌종,철종 등 3대 60여년에 걸쳐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가 의도적으로 어린 왕을 세워 권력을 전단하려 했던 탓이라 한다.그런 세도정치하에서 흥선군(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에 부른 존칭)처럼 난처한 사람은 없었다.흥선군은 영조대왕의 현손(증손자의 아들)이었으니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그러니 그는 안동 김씨들의 일급 요시찰 인물이었다.까딱하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 몸이었다.말이 세도정치지 사실상 군사독재보다 더한 공포정치였다.그러니 철종 14년간은 대원군으로서는 살얼음 밟듯 조심하여 살아야 했던 눈물의 재야시절이었다. 흥선군의 사저는 최근 복원된 운현궁이다.말이 궁이지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흥선군이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던 초가 삼간이었다.이 초가 삼간에 왕기가 서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집터 때문이었다.터 좋은 데를 명당자리라 하지만 운현궁 자리는 그보다 더 좋은 왕후정승이 나는 터,대지였다. 운현궁 터에는 본시 관상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관상대는 일명 서운관이라 했으므로 서운관의 구름 운자를 따서 운현궁이라 했다는 것이다. 관상대라면 천기를 엿보는 기관이다.왕이 되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천기를 엿보는 고개마루의 초가집에서 왕이 났다.운현궁에 왕기가 서린다느니 또 성인이 난다느니하는 소문은 벌써 철종 초년부터 났었다.그러면 그럴수록 흥선군의 처신이 더 어려워져 마침내 탁질양광,옛날 양녕대군이 그랬듯이 온갓 미친 짓을 다하며 정신병자처럼 행세하여 안동 김씨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고종이 왕좌에 오르게 된 데에는 집터 말고 고종의 관상이 좋았다는 설도 있다.경상북도 청도에 사는 박유붕이라는 애꾸눈 관상쟁이가 있었는데,어느날 운현궁에 와서 고종 얼굴을 보더니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난 뒤 “왕이 될 관상이니 이 말을 절대 누설하지 마십시요”라고 했다고 한다.이 사람은 그 공으로 고종이 즉위하자 이듬해 경기도 남양부사와 수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관상보는 것도 출세의 한 방편이었다. 1863년 말 강화도령으로 이름난 철종이 나이 32살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게 되니 흥선군은 극비리에 조대비와 내통하여 전격적으로 후계자를 자신의 둘째 아들로 결정해 버렸다.즉위식은 지금의 창덕궁 안에 있는 인정문에서 거행되었다. ○“운형궁에 왕기 서린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누가 대통을이을 것인지 논란이 많았다.중론이 분분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사슴(대권)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와같이 의론이 분분하게 갈려 있는 시점에 조대비가 특별히 처분을 내려 운현궁의 흥선군 제2자 재황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명령을 내리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그리하여 12월 길일 양신에 고종이 보위에 오르니 만조 백관들이 모두 축하하고 만세를 불렀다.한쪽에서는 철종의 장례를 치르고 한쪽에서는 즉위식을 거행하니 조정의 백관들은 눈코뜰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철없는데다가 평소 굶주리며 자라온 고종이었기에 옥좌에 앉자마자 제일성으로 하는 소리가 계동에 사는 군밤장사를 잡아다 죽이라는 것이었다. 놀란 대신들은 황급히 제지하였다. “전하가 지금 보위에 오르시어 성선의 덕으로써 정치를 하셔야 하는데 어찌해서 주살의 위엄을 먼저 보이십니까” 이에 고종은 반박하여 말하기를 “다른 이유는 없다.내가 여러 번 군밤 하나를 달라고 하였으나 한번도 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인심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이같이 이익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자는 죽어 마땅하며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어찌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대신 한 사람이 아첨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시여.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는다는 교를 내리시니 과연 임금의 도량에 알맞습니다.그러나 일개 하찮은 군밤장사를 효수하라는 것은 전하께서 처음 등극하신 자리에서 혹 국가의 화평한 기운에 미안한 일인 듯 생각됩니다.” 이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대비(신정왕후)는 교를 내리기를 “대신이 말씀드린 것은 금석과 같은 말입니다.그 효수하라는 명령은 거두어 들이시는 것이 타당할 것 같으니 짐짓 그만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했다. 이 말을 한 대신이 다름 아닌 안동 김씨 핵심인물이었는데 그 아첨하는 말솜씨는 후세의 정치인들에게 으뜸 가는 귀감(?)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모 자격증/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굄돌)

    오늘따라 유난히 내담자(상담을 하려고 온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많이 딸려 있다. 이런 날은 아이 울음소리,떠드는 소리,칭얼대는 소리로 상담소 전체가 떠들썩하다. 그러나 철없는 아이들 눈에도 부모 표정이 심상치 않은지,그들은 한결같이 불안해 하며 부모 눈치를 본다. 내담자 한분이 10살정도된 아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왔다.남편의 의처증과 폭행때문에 이혼하려는데 아이는 남편에게 두고 가겠다고 한다.행여나 놓칠세라 엄마 팔을 꼭 붙들고 옆에 앉은 아이의 눈빛이 자못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일렁거린다.그 아이의 가슴이 ‘쿵’하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순간 남편때문에 얼마나 고통받았으면 저럴까 생각하면서도 말귀를 다 알아듣는 아이를 옆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내담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는 분명 어느 한편만의 자식이 아니다.부모에게는 아이를 낳은후 기르고 보살필 의무와 권리가 똑같이 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혼하게 된다면,그래서 부모중 한사람이 아이를 맡아 길러야 한다면 양육자는 아이의장래와 의사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아이를 낳는 것만으로는 부모 구실을 다할수 없다. 아이를 낳되 어떻게 기르는가에 따라 그 부부가 부모 자격이 있는지를 진정으로 가려낼 수 있다. 앞으로는 아이를 낳은 부부가 당연히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잘 길러낼지를 알아보는 시험을 거쳐 ‘부모자격증’을 주면 어떨까.답답한 심정에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 “후지모리 일서 출생 대통령 될 자격없다”/페루 지 폭로 논란

    【리마 AFP AP】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은 일본에서 태어났을 것이며 사실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간지 카레타스가 24일 보도했다. 이 잡지는 후지모리 대통령의 모친 마쓰에 후지모리가 지난 1934년 일본에서 건너와 페루로 입국했음을 기록한 공식 등록부 마이크로 필름 사본을 공개했는데,마쓰에는 당시 이 등록부에서 10살이 안된 아이 2명을 데리고 왔다고 신고해 후지모리 대통령과 함께 입국했음을 암시했다. 페루의 법률은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에 대해 대통령직 출마를 못하도록 하고 있으나 후지모리 대통령은 자신이 1938년 7월28일 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팰코 전 미 마약담당 차관보 ‘전자저널’ 기고문 요지

    ◎“마약공급차단 한계… 예방에 비중을”/청소년대상 훈련 프로그램 활성화로 효과 한국에서도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마약,불법약물 복용은 미국에서 아주 심각한 사안이다.미국의 대 마약정책과 관련,지난 카터 행정부때 국무부 국제마약담당 차관보를 지낸 매씨 팰코는 공급보다는 수요,그리고 청소년에 포커스를 맞춘 사전예방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미 공보원 발행 전자저널 최근호에 기고한 그의 ‘예방은 효과를 거둔다’를 요약한다.미국은 마약 문제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두 사람중 한명 꼴로 주변에 불법 약물에 중독된 사람을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미국정부는 마약문제와 싸우기 위해 몹시 큰 돈을 써왔다.1980년 이후 연방과 지방정부를 포함해 2천9백억달러가 반 마약 시책에 들어갔다.1년에 약 2백억달러(참고 한국 국방비의 1.5배)가 들어간 셈인데 이는 연방정부가 심장병·암·에이즈 등 생의학 연구에 쏟은 예산의 곱절에 해당한다. ○두사람중 한명꼴 중독 미 정부의 마약정책은 일관된 것으로 미국내로의 마약 공급을 줄이는데대부분의 예산이 소요됐다.불행히도 이 노력은 실패해왔다.지난 86년 이래 공급 축소를 위한 정책시행에 들어간 돈이 5배나 늘어났음에도 코카인은 10년전보다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헤로인은 90년엔 순도가 30%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순도 60% 이상 짜리를 길거리 골목에서 봉지당 10달러면 구할수 있다.94년에 마약소지죄로 붙잡힌 사람이 1백만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3년전보다 30%가 급증한 것이다. 이같은 통계에 접한 많은 사람들은 마약공급 축소가 과연 해결책의 하나로서 추구할 만큼 현실성이 있는지에 회의를 표하게 된다.미 정부의 적극적인 대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아편과 코카인 생산이 지난 10년간 배로 늘었다.마약 생산국도 역시 배로 불어 진짜 지구적 사업이 되어버렸다.어느 한 나라에 생산중단,감시철저를 촉구하면 이웃 나라의 생산량이 늘어나는 형국이다. 단 65㎢의 땅(서울의 10분의 1)만 있으면 미국에서 소모되는 아편의 전량을 재배할 수 있는 마당에 마약생산을 중단시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DC­3A기 한대면 미국에서 필요한 헤로인 1년치를 몽땅 공수해올수 있고 트레일러 트럭 12대로 1년치 코카인 필요량을 모두 싣고 올수 있는 상황에서 미국 국경선을 아무리 틀어 막아본들 별 수가 없는 것이다.그래서 미국내로의 마약공급을 차단한다는 정책이 성공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생산중단 가능성 희박 그러나 공급은 축소시킬수 없을지 몰라도 수요는 줄일수 있을 것이다.이같은 생각과 깨달음에서 마약 예방,치료 및 마약에 대항해 시민들을 조직시키려는 공동체의 노력에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폭넓은 조사를 통해 마약 예방 노력은 효과가 있다는 실증을 얻고 있다.‘인생기술 훈련’이란 프로그램은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흡연과 마리화나 흡입을 반으로,음주를 3분의1 정도 줄였다.중3,고1때 증폭훈련을 실시로 이같은 효과는 고교시절 내내 유지되었다. 효과적인 예방 프로그램과 조치들은 교도소 증축,첨단 탐색장비,담배·알콜·불법약물 관련 의료비 등과 비할때 비싸지 않다.인생기술 훈련을 예로 들면 1년에 한 학생당 교육기구,교사 훈련비까지 포함,7달러에 그친다. ○공동체 차원 노력 주효 성공적인 예방 노력은 교실을 넘어 약물에 관한 태도를 형성시키는 가정·마을·사업체·미디어 등을 포함하게 된다.최근 10살부터 14살까지의 학생들에 관한 연구를 실행해던 학술기관에 따르면 마약사용과 다른 문제행동들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에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아이들이 사춘기를 성공적으로 겪어내는데 도움을 주는 핵심적 ‘보호 요소’에는 교육 성취,사회적 기술,가족구성원,선생님및 다른 성인들과의 강한 유대감,그리고 뚜렷한 행동원칙 들을 포함하고 있다. 부모들이 나서 약물복용을 나쁘다고 하면서 이를 금지하려는 노력 또한 중요한 보호요소에 속한다.부모들의 개입은 비록 청소년 후반기라 할지라도 약물복용을 저지시키는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다.미래에 대한 낙관를 심어주는 긍정적 진로선택은 청소년들의 약물에 대한 취약성을 상당히 예방해준다. ‘위기의 아이들 돕기’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보자.뉴욕 빈민층 도심지 학교들과 그 인근 주거단지 3곳에서 펼쳐진 이예방활동에는 부모,학교,공동체 조직,주거단지 관리자,인근 경찰,종교인들이 참여했으며 가족 합동모임,학교내 질병치료,개인교습,방과후 및 주말 과외활동,청소년 리더십훈련 등이 2천500여 학생들에게 행해졌다.이 결과 해당 학교 중2 학생들의 약물복용이 25% 감소했는데,반면 이 기간 전국적으론 중2의 약물복용이 증가했다.또 이 프로그램 결과 음주는 반으로 줄었다.〈정리=김재영 워싱턴 특파원〉
  • 쿠바 도탄은 아버지 카스트로 탓/서방망명 딸 알리나 회고록 출간

    【멕시코시티 DPA 연합】 가짜여권과 가발을 이용해 쿠바를 탈출한 피델 카스트로 쿠바대통령의 딸 알리나 페르난데스(41)가 스페인에서 회고록을 출간했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피델 카스트로 딸의 회상’이란 제목의 이 회고록은 쿠바에서 보낸 알리나의 생애와 부녀관계를 상세히 그리고 있다. 알리나는 카스트로와 의사를 남편으로 둔 유부녀 나티 레부엘타간의 짧은 로맨스에서 태어난 딸로 10살이 돼서야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여유있는 중류생활과 안정된 결혼생활을 희생하고 카리스마적 혁명지도자를 택한 어머니로부터 카스트로가 생부임을 전해들은 알리나는 처음 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처럼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나중에는 자신을 속박하는 짐으로 여기게 됐으며 결국 아버지를 배신하고 망명길을 택했다. 알리나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항상 바쁜 일정에 쫓기는 아버지를 만나기가 어려웠다고 이 책에서 고백하고 있다.그럼에도 카스트로는 딸의 직업 선택,결혼 등에 일일이 간섭했다. 알리나는 카스트로가 평생을 바쳐 추구해온 쿠바혁명에 대해 그가 변덕스런 기질로 공산주의를 갖고 장난을 쳐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주장하고 쿠바의 경제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 “운동능력도 유전”/미 마에스 박사 발표

    ◎쌍둥이 105쌍­부모 조사/팔힘 75·도약력 66% 영향 【워싱턴 AP 연합】 운동능력은 유전되는 것 같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버지니아정신행동유전연구소의 허민 마에스 박사는 미국스포츠의학학회에서 발행하는 메디신 앤드 사이언스 인 스포츠 앤드 엑서사이스에 발표한 연구보고서를 통해 아이들의 운동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훈련을 통해 체육적 기량을 발전시키는 후천적 요인보다 유전자가 관련된 선천적 요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마에스 박사는 10살짜리 쌍둥이 1백5쌍과 그 부모를 대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운동능력을 측정한 결과 이같은 사실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마에스 박사는 이들과 부모들에게 여러가지 종류의 운동테스트를 받게하고 그성적이 얼마나 비슷하게 나오는가를 분석한 결과 팔로 물건을 잡아당기는 힘과 팔굽혀 매달리는 힘은 75%,제자리 높이뛰기는 66%,에어로빅 테스트에서는 남자는 75% 여자는 90%가 유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 「팔」 게릴라,「이」 정착민에 난사

    ◎6명 사상… 네타냐후 “좌시 않겠다” 【예루살렘 AP AFP 연합】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인접지구에 이스라엘정부가 132가구의 아파트 정착촌을 건립한다는 발표로 이·팔레스타인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1일 하오 이스라엘 일가족이 타고 있던 차량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총기를 난사해 2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0여발의 총기난사로 일가족중 어머니(41)와 12살난 아들이 숨지고 아버지와 4살에서 10살 사이의 자녀 4명이 부상했으며,게릴라들은 이스라엘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인근 라말라시로 달아났다. 남부 휴양도시에서 가족들과 휴가중이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총리는 사건 직후 휴가를 취소한 채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발표한 성명에서 『이 사건을 조용히 넘기지 않을 것』이라면서 팔레스타인당국은 이 유아살해범들을 체포해 즉각 이스라엘당국에 인도하라고 촉구했다.
  • “서울까지 반세기 걸렸소”/탈북 김경호씨 일가 입국

    ◎가족들과 감격의 상봉 지난 10월26일 북한을 탈출한 김경호(61)·최현실(57)씨 일가족 16명과 북한 사회안전부 안전원 최영호씨(30) 등 17명이 9일 하오5시17분쯤 대한항공 618편으로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씨 일가족은 김포공항에 도착,5시45분쯤 17번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와 서울에 사는 김경호씨의 친형 경태씨(70)와 조카 흥석씨(33),최현실씨의 작은아버지 최전도씨(78)와 사촌조카 최철욱씨(43·서울 베델의원원장) 등 가족 7명과 눈물로 상봉했다. 김씨 형제는 6·25가 일어난지 얼마후 경호씨가 인민군에 징용되면서 헤어졌고 최현실씨도 10살때인 50년 월남한 아버지 최영도씨(79·미국 뉴욕거주),작은아버지 최전도씨와 헤어졌다. 최현실씨는 이어 가진 기자회견에서 『따뜻하게 받아줘 정말 감사하다』면서 『일행 17명이 빨리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행동했기 때문에 이렇게 서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최씨는 『북한에는 상당수 주민이 생활고 등을 이유로 중국으로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나당국의 검거를 두려워해 막상 실행에 옮기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탈북경위 등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회에 밝히겠다』고만 말했다. 이들은 44일동안의 대탈주기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관례에 따라 귀순동기 등을 조사받고 귀순절차를 밟기 위해 하오6시쯤 서울시내 모처로 출발했다. 공항 관계당국은 이날 김씨일행의 신변안전을 위해 공항경찰대 5개 중대를 배치,일반인의 접근을 막는 등 경비를 강화했다. 김씨일행은 이에 앞서 이날 상오 16일동안 머물던 홍콩 상수 보호감호소를 출발,하오1시쯤 홍콩 카이탁공항에 도착했다. 이어 홍콩정청 이민국 직원의 안내로 공항보안구역을 통과,서울행 대한항공기에 탑승한 뒤 우리측 호송요원에게 정식으로 인계됐다. 김씨 일가족은 부인 최현실씨의 부친인 재미교포 최영도씨의 도움으로 지난 10월26일 새벽 함경북도 회령의 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재미 친척들이 고용한 조선족의 안내로 심양∼북경∼광주∼심천을 거쳐 28일만인 지난달 23일 홍콩에 밀입국,한국망명을 요청하며 상수보호소에 수용돼왔다. 김씨는 6·25당시 인민군에 강제징집돼 월북,평양에 거주하다 최씨와 결혼했으나 남한출신이라는 이유로 중국과의 국경지역인 회령으로 추방되는 등 심한 억압을 받고 식량난까지 겹치자 탈출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 탈북 일가족 서울 도착­입국 이모저모

    ◎“자유의 땅 안착 꿈만 같아요”/최현실씨 작은아버지 “몰라볼까 걱정”/김경호씨 친척 TV보며 밤새 얘기꽃 북한을 탈출한지 44일만인 9일 서울에 도착한 김경호씨 가족 등 일행 17명은 무사히 「자유의 땅」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감격스러워 했다 ○…일반 승객 290명이 먼저 내린 뒤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하오 5시45분쯤 김포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경호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목소리로 『가족이 모두 무사히 한국 땅에 도착해 너무나 감격적이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들은 환영나온 관계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서로 손을 잡고 『가족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동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고마움을 표시. 김씨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해 부인 최현실씨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탑승구를 걸어나왔다.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중국대륙을 횡단한 넷째딸 명순씨(28)는 긴장이 풀린 듯 어머니의 손을 꼭잡고 남편 김일범씨(28)에게 기대는 모습. ○…46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김씨와 친형 경태씨는 서로 얼싸안고 어쩔줄 몰라해 보는 이들의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휠체어를 타고온 경태씨가 먼저 『나 몰라』라고 묻자 김씨는 감격에 겨운 듯 『형님』하고 부르짖으며 서로 『정말 살아있었구나』라며 거듭해서 얼싸안았다. ○…10여분동안 공항 보안구역내 입국장에서 동생 김경호씨를 만난 뒤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온 김경태씨는 아들 흥석씨(33)의 부축을 받으며 하오 5시50분쯤 귀빈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등 감격스러워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태씨는 45년만에 상봉한 동생 경호씨와의 짧은 만남이 못내 아쉬운 듯 『다시 한번 동생을 봐야 한다』며 휠체어를 출입구로 되돌려 기다리다 경호씨 일행 17명이 하오 5시55분쯤 같은 출구를 통해 빠져나오자 박수를 치면서 재회를 기약. 이어 경호씨 일행은 잠시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뒤 관계당국이 마련한 승합차에 탑승. 휠체어에 탄 경호씨는 큰아들 금철씨의 부축을 받아 버스에 오른 뒤 차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경찰차의 호송을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간 경호씨 일행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계속 손을 흔들기도. 이날 상봉한 가족은 김경호씨 쪽에서는 형 김경태씨와 조카 김흥석씨,경호씨의 둘째 형수 김원순씨(61),계수 박금자씨(53),조카딸 김선옥(40)·김선미씨(29),최씨 쪽에서는 작은아버지 최전도씨와 사촌동생 철욱(43)·철훈(47)씨 등 7명. 상봉이 있기전 최전도씨는 『현실이가 10살때 6·25가 터지면서 평남 강서에서 헤어진 후 만나지를 못해 제대로 알아볼지 걱정』이라고 말하기도. ○…김경태씨 일가는 하오7시30분쯤 경기도 의왕시 내손2동 한신빌라 경호씨의 둘째형 경백씨(76년 사망)의 딸 인옥씨(36·교사)집에 모여 재회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TV를 지켜보며 밤새 얘기꽃을 피웠다. 인옥씨(36)는 『큰아버지에게 6·25때 가난 때문에 작은아버지를 비롯,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내년 신정때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얘기를 할 수 있게 됐다』며 상기된 표정. 공항에서 연신 눈물을 닦던 경태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흥분한 뒤에 피곤한 탓인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동족사기에 조선족사회 “만신창이”/중국 조선족 울리는 사기 실태

    ◎초청장·산업연수 미끼 3만여명 3백억 피해/빚독촉에 시달려 가족 뿔뿔이… 충격에 자살도/한국정부 대책마련 소극적… 반한감정 폭발직전 『이젠 우리 어떻하나요.집도,소도 다 빼앗기고….돈벌어 아이 다리를 고쳐 걷게 해주고 싶었는데…』영하의 날씨속에 얇은 여름옷 차림의 권신애할머니(60·돈화시 대신진 대구촌)는 흘러내리는 눈물로 목매어 말을 잇지 못했다.지난94년10월 친척방문 초청으로 한국에 가게 해주겠다는 말에 빚낸돈 2만5천위안(1위안은 약 1백원) 등 3만위안을 한국인 김모씨에게 사기당한 권할머니와 남편 조용환씨(62)는 2년만에 불어난 이자로 집도 빚쟁이에게 빼앗기고 땅도 내놓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연명중이다. ○평생 일해도 못갚을 돈 불편한 다리의 손녀가 수술받으면 건강하게 걸을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내외가 한국에 가서 돈벌어 손녀다리를 고쳐주겠다는 꿈은 산산조각났다.연5할대 고리채로 빚감당이 어렵자 두아들은 돈갚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빚쟁이에 쫓겨 도피중이다.「한국행초청장」에 속아 빚더미에 올라 집날리고 가족이 흩어져 사는 일은 이제 연길과 동북3성 조선족동포에겐 일상화된 삶의 형태가 됐다.그만큼 많이 발생하고 조선족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지난달 한국인 사기꾼들에게 당한 사람들로 조직된 「피해자협회」 이영숙 회장(연변제2중학교사)은 한국 초청으로 사기당한 길림·요령·흑룡강성 거주 동포들은 3만명에 달하며 피해액도 최소 3억위안가량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지난 92∼93년도엔 친척방문 초청으로 접근하더니 94년부터 각종 연수단 명목이나 위장결혼,산업연수생형식으로 동포 돈을 울거내고 있다는 설명이다.액수도 1만위안에서 시작돼 최근엔 5만∼6만위안대가 일반적이다. 사기당한 돈은 대부분 빚내 마련한 것이어서 생존자체를 위협당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한달 2백∼6백위안가량 버는 피해자들이 1년에 5천위안도 모을 수 없는 현실에서 5만∼6만위안의 빚은 중국에서 평생 일해도 갚을 길 없는 액수다.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은 이들의 숨통을 죄어 간다.가정불화와 이혼외에도 이로인해 충격받고 사망하는경우와 자살도 잇따른다.『집에 들어와 행패부리는 빚쟁이들이 세간살이 모두를 가져간 것은 물론 입고 있던 옷과 신발까지 빼앗긴 사람도 있다.농촌지역에선 가산날리고 토굴을 만들어 생활하는 사람도 생기고 있다』는게 이회장의 설명이다. 빚쟁이들의 위협은 이들의 정상적 생활을 불가능하게 한다.연길 경제체제개혁위 상업과장이던 공상일씨(40·하남가 전진로)는 21일도 집으로 쳐들어온 빚쟁이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다.95년에 한족(한족)빚쟁이에 의해 폭행당해 쇄골이 부러지고 다리 등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던 그는 22일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며 집을 등졌다.지난 94년2월 한국농업개발원 중국지사장을 자처하는 김종일씨(58·강릉시 송정동)에게 속아 유학생 40명 모집을 대행해줬다가 사기꾼 빚을 떠맞게 됐다고 부인 김해금씨(39)는 흐느낀다. ○범인 잡아도 보상 못받아 공씨 경우는 조선족지도층 인사를 한국행 인원모집에 앞장세워놓고 자신은 돈을 챙겨 도망가는 전형적 사기 수법의 예다.전 연변자치주 주장 김동기씨,전인대대표 조용호씨 등이 참여,설립된 연변서광경제무역공사도 가짜 서류와 도장에 현혹돼 500여명의 선원송출에 나섰다가 15만5천달러를 떼어먹혔다.서광이 이 빚을 떠맡자 김동현씨(61·전 오금공사 업무과장)는 서광에 일한 죄로 빚쟁이 아닌 빚쟁이에 시달리고 있다. 장기화되는 빚독촉에 시달려온 적잖은 가정에선 병자가 속출하고 연길·하얼빈 근교 일부 농촌 조선족 집단촌은 집단적인 피해로 분해되고 있는 실정이다.가족·친척 등이 한꺼번에 걸려든 예도 적잖다.하얼빈 조선족 성년직업학교 최영철 교장(45·하얼빈시 도리구)은 『아성시·상지시근교에서 만 400명의 농민들이 1인당 1만위안씩 400위안을 사기당했다』면서 『이들중 절반가량이 집과 땅을 버리고 북경등 대도시에 날품팔이와 막노동을 위해 흩어졌다』고 말했다. 최교장은 『한국에 범인 김영호(32·이태원동)를 고소했지만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는 회답만 받고 돈을 한푼도 돌려받지 못했다』며 한숨쉰다.피해자중 상지시 일만중 교사 서용주씨(49)부인은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렸다.범인은 잡아도 돈과 피해는 보상받을 수 없다는데 피해자의 절망감은 깊어간다.이같은 증오와 절망은 한국인과 정부에 대한 미움·반감으로 변해 폭발직전이다.연길시 모방직공장 직원 김길춘씨(54)는 『피해자대표들이 지난해 3월 북경 한국대사관을 직접 찾는등 계속적인 요구에도 한국정부는 「사적인 문제」라며 대책마련을 외면하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다.김씨는 올 8월 돈떼어먹은 김창록(41·대구 동양트레이드대표)에게 국제전화를 했더니 『나는 돈없다하며 6개월만(감옥에)살면 그만이다.너는 평생 빚쟁이에 시달릴 걸』이라며 욕을 해댔다고 분노했다. ○대사관 점거시위 계획도 연길주재 한 한국인은 식당에서 이 문제가 개인간 문제라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가 주위에서 『머리통을 부서놓겠다』는 욕설을 들었다.일부 연길 청년들은 『어떤 한국놈이든 혼내주겠다』고 벼르는등 사기꾼들에 대한 감정이 한국인전체에 대한 악감정으로 바뀌고 있다.한 피해자는 『한국에서 전쟁나면 아들들을 북한에 보내 한국놈들을 죽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들 피해자중에는 북한국적출신의 조교들도 포함돼 있다.피해자모임의 김동현씨는 『11월말까지 한국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북경대사관 점거나 무기한 시위를 계획중』이라며 더 극단적인 한국정부의 대책마련촉구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가짜 초청장을 받자마자 대부분 직장을 그만두기 때문에 앞날이 더 막막하다.이들은 사기를 당하고도 빚갚을 돈 마련을 위해서라도 다시 한국행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김길춘씨도 그러다 두번이나 사기를 당했다.연길시 유영공사에 근무하는 김선희씨(40).동료3명과 함께 기술경제대표단 한국연수단에 넣어주겠다는 말에 속아 지난 7월 1만5천위안을 주었다가 떼었다.김씨는 『한달 450위안의 월급으론 빚을 갚을 길이 없다』며 『서울행 기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피해자들은 92년 수교이후 불어닥친 한국바람으로 인한 사기와 빚사태가 이제 극한상황에 와 있다면서 자신들은 보상을 받거나 한국에 가는 방법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피해자 한영수씨댁/식구들 빚 있는대로 끌어모아/노부는 중풍… 3남매는 이혼당해 연길시 조선족집단주거지역인 연서가 원결 호동(골목).21일 저녁무렵 「팔집」이란 표지가 붙어 있는 10여평 남짓한 허름한 주택에 들어서니 집주인 한영수씨(65)가 중풍에 몸을 떨며 구석에 누워 있고 부인 김채순씨(61)와 맏딸 정자씨(45),셋째아들 정선씨(35)는 울어 퉁퉁부어 오른 얼굴로 망연자실해 앉아 있다.조금전에도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망치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집기를 부수고 김채순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어 놓으며 행패를 부리다 돌아간 뒤였다. 『한국으로 초청해주겠다』는 한국인 이정석씨(34·서울 구치소 복역중)에 속아 정선씨 등 4형제가 빚을 끌어모아 수속비로 건네주기전까지 한씨네는 단란한 가정이었다.지난해 1월 한씨네는 몸이 아픈 이씨를 약값까지 대가며 치료해 주었고 건강을 회복한 이씨는 가짜초청장을 드리밀고 한씨네 가족의 9만위안 등 한씨가 소개한 사람들 돈 21만위안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간 뒤 소식을 끊었다. 빚더미에 오른 한씨네는 뿔뿔이 흩어졌다.큰아들 정철(39),둘째 정삼씨(38)는 집을 빚쟁이에게 빼앗기고 이혼까지 당한 뒤 빚쟁이의 협박에 못이겨 잠적했다.독집앨범까지 낸 작곡가인 딸 정자씨도 집을 날리고 의사 남편에게 이혼당했다.지난해 11월 사기범은 잡혔고 사기사실도 확인됐으나 돈을 변제할 방법이 없다는 한국경찰청의 회신을 받고 한씨는 충격으로 쓰러져 중풍환자가 됐다. 『식구와 극약을 먹고 죽을 방법밖에 없어요…』 경기도 양평군 서정면 문호리에서 10살때 부모손을 잡고 중국에 와 원적이 고스란히 양평에 남아 있다는 한씨.이제 한씨가족은 한국에 들어가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다며 절망하고 있다. ◎전문가 2인 진단/중국교포 법적보호 서둘러야/출입국과정 투명하게 관리를 ▲이석연씨(변호사)=대법원이 최근 「조선족을 우리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린 만큼 중국교포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 마련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법원이 이들의 지위를 나름대로 확인했음에도 행정기관이 이를 방치할 경우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법을 마련,우리국민과 똑같은 대우는 아니더라도 일반 외국인 노동자들과는 다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출입국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사기피해를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 ▲강영식씨(재중국동포문제 시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대 중국교포 사기의 85% 가량이 취업사기다.돈만 있으면 한국에 취업할 수 있다는 그릇된 관행 때문이다.이를 개선하려면 교포들의 출입국과정을 투명하고 엄정하게 관리하는 제도적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취업희망자가 많다면 자유경쟁을 토대로 한국을 잘 알고 실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입국시키는 원칙을 수립해야 한다.중국 현지에 상담센터를 설치,조선족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일도 효과적일 것이다.
  • 화학조미료 사용 줄이자/한기옥 서울시 환경보전과(발언대)

    어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는 짜고 텁텁해도 늘 입맛에 맞는다.중국이 자랑하는 8진미도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사람의 입맛은 10살 이전에 형성된다는 것이 요리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부들은 화학조미료를 좋아하기 시작했다.특히 라면·과자·청량음료 등 화학조미료가 든 가공식품이 일반화되고 인스탄트음식에 익숙해졌다.이제 젊은 어머니들의 음식솜씨는 그저 화학조미료에만 매달리게 된지 오래다. 지난 16일 「환경운동연합」이 서울 종로구 YMCA앞에서 소비자단체들과 함께 화학조미료의 유해성을 알리고 천연조미료 사용을 권장하는 캠페인을 벌여 눈길을 끌었다.국제소비자기구가 만든 「제11회 화학조미료 안먹는 날」을 맞아 펼친 이 캠페인은 화학조미료의 사용량을 줄이자는데 초첨이 맞추어진 것이다.조미료를 만드는 회사들은 아직까지도 그 유해성에 대해 솔직히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화학조미료는 1908년 일본에서 개발된 「아지노모도」에서 비롯됐다.우리나라에서는 6·25를 전후로 값싼 덕에 급격히 확산됐다.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틈을 타고 혼란스러운 당시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듯 무분별한 광고와 선전에 휘말린 주부들은 이들 제품의 유해성을 미처 생각지 못한채 그 맛에 서서이 중독이 되고 말았다. 이들 화학조미료의 원료 가운데는 많은 양을 섭취하면 두통과 천식,뇌세포 손상 등을 일으키는 물질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식품연감에는 흥미로운 조사자료가 수록되어 있다.지난 91년 우리나라 사람의 하루 화학조미료 사용량이 평균 3.9g이라는 것이다.미국의 0.47g,일본의 1.98g에 견준다면 우리나라 국민이 화학조미료를 얼마나 많이 먹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멸치·다시마·들깨 등으로 맛을 내는 우리고유의 음식이 그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 명창과 달인의 ‘공감’/안숙선­김덕수씨 한 무대에

    ◎새달 4일 예술의 전당서 흥겨운 한판/다양한 장르 화합… 다채로운 묘미 만끽 우리시대 최고의 명창 안숙선(47)과 사물놀이의 달인 김덕수(44).두사람이 한 무대에 선다. 「공감」.40여년간 각자가 구축해온 음악 세계의 교감을 시도하는 첫 무대이다. 오는 9월4일 하오7시30분 서울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펼쳐지는 「공감」무대는 벌써부터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다른 장르와의 화합을 시도하는 등 국악의 현대화,대중화 작업에 힘써온 두 명인의 합동 공연이 국악계 사상 유례없이 완성도 높고 신명나는 한판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 두사람은 지난 59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남원대표(안숙선)와 충남대표(김덕수)로 첫 만남을 가졌다. 두사람이 10살,7살때의 일. 그 뒤 40여년간 각별한 오누이 사이로 서로의 예술세계를 격려하고 존중해왔다는 것은 국악계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 7개 무대로 구성된 이번 공연은 관객과 출연진이 하나가 되는 흥겨운 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연시작 전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두사람과 전출연진이 길놀이를 시작,놀이판의 시작을 알리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어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흥겨운 사물놀이 판굿을 벌이고,안숙선이 특유의 기개 넘치는 판소리 「춘향가」중 「사랑가」대목을 선사한다. 김덕수가 설장고 독주로 이어받는다. 덩덕궁이 세산조시 구정놀이 호드래기 굿거리 등 여러가락의 변주로 설장고가 울려내는 다채로운 묘미를 제시한다. 이어 안숙선은 최근 음반으로 출시,호응을 얻고 있는 박귀희류 「가야금 병창」을 들려준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6번째 무대로 안숙선과 김덕수가 함께 꾸미는 단막극 「수궁가」. 「수궁가」중 「토끼와 자라」 대목이다.「용왕의 득병과 자라의 선발장면」「자라의 세상구경과 자라가 토끼를 꼬드기는 장면」「토끼의 기지를 보여주는 장면」「토끼의 수난 장면」등 모두 4장면으로 구성된 것으로 풍자와 해학으로 유명하다. 안숙선이 「토끼」역을,김덕수가 「자라」역을 맡았다. 김덕수의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 김덕수·안숙선은 둘 다 명창 박귀희를 사사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호흡에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마지막 순서로 전 출연진의 판굿에 이어 안숙선의 흥겨운 농부가가 이어진다. 두사람은 내년 봄 호주·베를린 등에서도 합동공연을 할 계획이다.
  • 조각가 김영중(이세기의 인물탐구:100)

    ◎선과 면의 결합으로 「인간주의」 실현/구상서 추상까지 고루 섭렵… 작품마다 실험정신/대형건물 미술품설치 의무화 등 미술발전 앞장/광주 비엔날레 「경계를 넘어」·세종문화회관 「비천상」 등 대표작 연대 정문에서 명지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연희조형관.건물 베란다를 둘러싼 청청한 송죽과 추상조각으로 이뤄진 하얀 돌기둥이 눈에 띈다.이 건물은 해방후 조각 1세대로서 이 시대 대가의 한사람인 우호 김영중의 미술관이다. ○해방이후 1세대 조각인 화단경력 40년에서 그가 쌓은 업적과 작업량은 엄청나다.우선 세종문화회관 외벽부조인 「비천상」,독립기념관의 상징조형물인 「강인한 한국인」군상,서울신문 외벽부조인 「질서」가 그의 작품이다.서울 어린이대공원내 소파 방정환을 비롯해 인촌 김성수,의제 허백련,고하 송진우,일민 김상만,가인 김병로,용인 호암미술관의 이병철,명창 임방울초상등 등 시비·화비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동안 홍대·이대·중앙대 교수를 거쳐 한국미술가협회이사장,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심사위원장을 지냈고 63년 원형조각회를 창립한 이래 한국현대조각연합 상파울로비엔날레 한국현대미술전과 도시의 환경조각,음악과 무용미술전 등 대대적인 그룹전·기념전에 그는 빠짐없이 작품을 출품해왔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개인전을 연 적이 없고 자전적인 화집 한권도 갖지 못했다고 하면 아무도 곧이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지난해 고희기념으로 후배들이 화집발간을 권유했을때도 그는 『내 화집을 내손으로 만드는 것은 쑥스럽다』면서 후학들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미술도서,미술전문잡지,팸플릿과 각종 슬라이드·비디오테이프등 2만5천여점을 내놓아 그의 조형관에 미술자료실을 먼저 만들었다. 실제로 80년대 그는 재능있으나 가난하여 전시회를 갖지 못하는 35세미만의 젊은이들에게 작품발표의 장을 열어주었고 대형건물에 미술품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서는등 누군가 해내지 않으면 안될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미술을 발전시킨 역력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호라고하면 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몇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이른바 한국성을 강조하면서도 국경을 초월한 「생명주의 추구」가 그것이다. 첫째 그는 면과 면의 만남이 선을 형성하고 선과 면의 결합에서 한국적인 형상을 발현한다는 확신이 투철하다.여인의 버선목에 나타나는 유연하고 완만한 곡선미는 예리하고 차가운 석질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만져질듯 부드러운 감촉을 만들면서 빛의 농도와 조사 각도를 통해 조각에다 발색과 채도 조명기법을 도입하고 있다.또 모뉴망 하나라도 그것이 사면팔방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광선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작품으로서 완벽할뿐만 아니라 면은 물론 표현의 성격도 달라진다는 것을 면밀하게 계산해낸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성취하기 위해 구상에서 추상,반추상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헤프닝과 실험과 조형양식을 고루 섭렵해왔다.그리고 어려움이 닥칠때마다 피하지 않고 「홀로 선다」는 각오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중고차 한대를 사서 해머로 두들겨 부수고 구겨서 이를 새로운 조형물로 재생한 적이 있고 널빤지에다 새끼줄을 이용한 입체적인 콜라주기법을 부조에 응용하는가 하면 풍경과 종을 환조에 달아 바람이 불면 종소리를 내는 「소리나는 조각」을 시도하기도 했다. 미술이란 무엇인가,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천착하는 중에도 부르델과 마이욜의 지중해적 고요와 격정,슬픔의 상황고조를 극복해냈고 부랑쿠시와 아르프의 현대추상작품에서 보이는 유기적 생성표현에 집착하면서 미지의 어떤 것,보이지 않는 진실에 독해가능성을 부여하는 작업에 치중해 왔다. ○경력 40년… 개인전 연적 없어 먼저 그의 릴리프들은 우아하면서도 모던한 회화성이 새롭다.흰 벽면 전체를 캔버스 삼아 양각과 음각으로 터치된 세종문화회관의 거대한 「비천상」은 그 것이 돌조각인데도 승천하는 천사의 움직임을 율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거대한 빌딩의 외부 혹은 내부벽면 부조 역시 밤의 조명속에서 마치 백색 유화물감만으로 마감한 싱그러운 마티에르와 볼륨을 살린다.초상작품도 마찬가지다.각 인물의 명철과 청념,정한과 인자,고매한 인품과 꿋꿋한 지조를 형형한 눈빛와 미소에 담아 그들의 지나온 역정을 고백성사처럼 들려준다. 기념조형물중에는 광주비엔날레 상징물인 「경계를 넘어」가 김영중 모더니즘의 압권으로 손꼽힌다.원형으로 휘어진 붉은 무지개다리는 하늘의 푸른 색과 조화를 이루면서 우주를 향한 교량답게 극적인 긴장감과 지성미를 품고 눈부신 창공에 고고하게 걸쳐져 있다. 「단순히 조각을 위한 조각은 예술로서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주의 실현이며 인간의 행복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때 비로소 예술가의 긍지가 빛난다」고 그는 말한다. 우호는 광주농림고시절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점토로 작품을 만들게 하고 그중에서 우수작품에 선발되자 그때부터 그림과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조선조 중엽의 성리학의 태두인 하서 김인후의 13대 직계손이며 부친 김요흠씨는 전남 장성의 대지주로 그는 한서와 서예와 시조의 풍류가 있는 지적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실수 용납않는 완벽주의자 해방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홍익대 조각과로 옮겨 대학을 졸업,58년 제7회 국전에서 「장갑낀 여인」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을 때도 국전출품을 계속하지 않고 있다가 75년 국전의 재야영입 케이스로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나이와는 상관없이 10살에서 30살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만년 미래지향형이다.요즘은 오는 11월4일로 잡힌 동아일보초대 첫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그의 조형관 지하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족은 디자이너출신의 부인 임원순씨와의 사이에 8남매,위로 딸 7형제중 3녀 명수씨가 현대무용가이고 외아들 경수씨는 올봄 예일대 졸업후 귀국해 있다. 우호의 성격은 대체로 예의가 바르고 겉으로 부드러우나 일을 앞세우면 사적 애정을 떠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다.속물적인 타협이나 시세에 편승하는 법도 없다.다만 정이 많고 친구를 좋아하는 다감한 일면이 그의 예술가적 기질이다. 미술평론가 김남수씨는 『조각가,교수.미술행정가로서 화단에서 쌓은 수많은 업적중에도 지난해 60일간에 걸쳐 무려 1백90만명의 관광객을 동원한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은 당연히 우호의 몫』이라고 평가한다.조각가 조성묵씨는 『생명이 있는한 그 삶의 정의로움과 사랑을 어찌나 중요시하시는지 거기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그의 후배사랑을 주변에 전한다. 대문호 괴테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한 것처럼 이제 그의 형태는 「견고하고 명확하고 한정된 볼륨과 외부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균형잡힌 고요」를 성취한 가운데 절대를 향한 내면에 깊숙이 접근되고 있다.그리고 현대적인 균제미와 구상주의를 절충한 그의 상황조각은 최상의 배경인 자연의 풍광속에서 언제 어느 면에서 보든지간에 낯의 빛과 별들의 빛을 수용하면서 살아숨쉬는 생명주의를 실천해 내었고 결국 예술의 끝인 「휴먼」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연보 ▲1926년 전남 장성 출생 ▲46년 서울대 미대 입학 ▲56년 홍대 미대 졸업 ▲58년 제7회 국전 「장갑낀 여인」으로 문교부 장관상 수상 ▲62∼63년 홍대,서라벌대 출강 ▲63년 원형조각회 창립기념전 ▲73∼78년 이대 및 중앙대출강 ▲75년 국전추천작가 ▲77∼현재 동아미술제운영위원회 의장 및 심사위원 ▲80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86∼현재 서울신문사주최 서울현대조각공모전 운영위원장 및 심사위원 ▲92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및 심사위원장 ▲93∼현재 서울특별시예술위원 ▲94년 광주비엔날레조직위부위원장 ▲95년 「미술의 해」조직위원 〈작품출품〉한국현대연합조각전 서울미술대전 현대미술초대전 원로조각초대전 상파울루비엔날레 구상조각전 한국현대미술 어제와 오늘전 등 1백여회 출품 〈대표작〉독립기념관 「강인한 한국인상」,세종문화회관외벽 「비천상」,13도 창의군탑,서울시시설관리공단 「일하는 사람들」,광주어린이대공원 어린이탑 「희망」,마산종합운동장 상징탑,해남 명량대첩기념탑,서울신문사 내벽부조 「질서」,중앙일보사외부조각 「배달소년상」,동아일보 충정로사옥앞 「기수」,광주비엔날레상징 무지개다리 흉상및 동상등 수점 〈현재〉한국조각공원연구회장·한국미술협회고문·홍익조각회회장·한국성미술연구회 고문 〈수상〉대통령 표창(82년) 서울특별시문화상(88년) 예총 예술문화상(91년) 청곡문화상(93년) 옥관문화훈장(94년) 호암예술상(95년)
  • 이철수 대위 증언 계기로 본 전쟁준비 실태/전문가 좌담

    ◎“북한구 파괴력 6·25때의 80배”/느슨한 국민안보의식 새롭게 다져야/특수부대요원 10만명 언제라도 기습 가능/정규사단 75% 평양·원산이남에 전진 배치/평양측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는 미의 한반도개입 차단 속셈 최근 미그 19기를 몰고 온 이철수 대위의 귀순은 우리의 안보 상황에 다시 한번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했다.이대위는 특히 지난 28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24시간내 서울함락」이라는 북한의 전쟁수행 전략을 밝혀 그동안 해이해진 우리의 안보태세에 경종을 울렸다.북한 군사문제 전문가인 정영태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장명순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과 지난83년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공군대령(공군대학 교수)의 정담을 통해 북한의 군사 동향과 우리의 대응태세를 점검해보았다. ▲이웅평 대령=이번에 귀순한 이철수 대위는 북한 공군에서 제 13년 후배가 됩니다.이대위는 국민학교 때인 10살무렵부터 김정일우상화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그런데도 귀순을 결심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이대위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북한도 그동안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예전에는 『이웅평이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못했다는 데 지금은 『이웅평이가 남쪽에서 악질로 논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답니다(웃음). ○김정일 군부 장악 제가 보건대 요즘 우리 사회에서 북한문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김정일이 군부관리 능력이 있느니 없느니」,「북한군부에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 있다느니」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맞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북한의 장교들은 노동당 당원이고,자신의 손으로 혁명을 이루겠다는 혁명의 주체세력이지 당을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김정일의 군부관리 능력은 확실합니다.반란이 일어나 1만명이 죽어도 김정일이 통치합니다.또 5만명이 굶어죽어도 김정일이 통치합니다. ▲장명순 위원=금년 들어 김정일은 일선 군부대를 12번이나 방문하는 등 군부의 동향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또 현재 군단장 20명 가운데 19명과 전체 장령 가운데 70%가 지난 73년 김정일이 김일성으로 부터 체계적인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승진됐습니다.이대령 말씀처럼 북한 군부에 대해 매파니 비둘기파니 하는 분류는 적절치 않습니다.현재로서는 김정일이 북한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봅니다. ▲정영태 박사=김정일이 실제로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지는 잘 알 수는 없습니다.다만 소요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추정을 할 수는 있습니다.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당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보듯 북한에서도 당과 군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가 아닙니다.북한 역시 체제유지가 당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당을 전체로 보고 군은 부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군이 당체제를 무너뜨리고 개혁 등 반란을 꾀하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지요.구소련은 예외지만 동구개혁에서 나타났듯 아무리 부패부정이 만연해도 군이 당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기본적으로 혁명 주체인 군부는 기존 당 체계를 깨뜨리지는 못 할 것입이다. ▲이대령=북한의 보통 사람들은 김정일을 호칭할 때 「장군님께서…」라고 합니다.그러나 김정일과 동년배 혹은 더 나이많은 사람은 「김정일이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북한에 그동안 작은 변화가 있다면 김정일의 권위에 「불손」한 행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럼에도 김정일은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장위원=앞에서 말했듯 김정일은 지난 73년 군부 통제에 나선 뒤 20년이 넘게 군부를 장악해 왔습니다.이후 군부 안에 자기사람을 심어놓고 또 그 사람관리에도 탁월한 테크닉을 보여왔습니다.북한의 친김정일 세력은 혁명 1세대에 업혀 지내왔지만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정박사=북한 군부는 국가안전보위부 사회안전부 호위총국 등과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모든 사항을 김정일에게 개별적으로 직보하는 등 상호 견제가 이뤄지고 있지요.김정일도 자기 명의로 상당한 「시혜」를 베풀어 군부의 환심을 사서 충성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북한의 군부 장교는 당원이어야 될 수 있고 진급하려면 열성분자일 수 밖에 없지요.따라서 당 기본체제에 이입되고 따라 갈 수 밖에 없습니다.북한내에 군사 소요사태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김정일의 군부통제는 문제가 없어 보이며 김정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지도자가 나와도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는 북한에서 군을 통치하기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봅니다. ▲장위원=이대위가 말한 「7일안에 남한을 완전점령한다」는 북한의 전략에는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북한군의 대남 전략은 기습전략,속전속결,정규전과 비정규전을 혼합한 세가지 양태로 정의할 수 있지요.북한은 또 경·보병을 통한 특수 8군단을 강화하고 있습니다.60개 정규사단의 75% 이상을 평양·원산성 이남에 전진 배치시킨 상황입니다.남침을 하려고만 하면 전력을 재배치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요.현재 북한군의 편성 구도로 봐서 기습전략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6·25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는 데는 불과 3일이 걸렸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현재 북한군의 파괴력은 6·25때의 80배에 달합니다.또다시 전쟁이일어나면 2백40만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와있습니다.전술적 무기외에 일본 옴진리교에서 사용했듯 「사린가스」등 화생방무기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이대령=현재 북한에서 보유하고 있는 「자린」이 바로 「사린」과 똑 같은 신경질식제지요.한 세미나에 참석해보니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의 전력을 1로 볼 때 당시 이라크군을 0.6,현재의 북한군을 0.7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그렇게보면 오산이지요.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은 실제 전투력보다 정신력이 더 크게 좌우합니다. ○화생방무기 갖춰 ▲정박사=일주일안에 남한을 완전 점령한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북한군부를 선동하기 위한 정치구호로 풀이됩니다.북한이 새해가 되면 항상 내놓는 「통일원년」에 다름아닌 「캐치프레이즈」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다만 우리는 북쪽의 기습 공격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장위원 말씀처럼 북한이 대부분의 전력을 평남·원산 이남선에 배치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합니다.북한군은 현재의 위치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기습 공격이가능하다는 뜻입니다.전투기는 6분안에 수도권 공격이 가능하고 2백40㎜ 방사포는 현 진지에서 수도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10만명의 특수 부대도 언제든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7일안에 점령한다기 보다는 북한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대령=화제를 좀 돌려볼까요.이대위가 하고 온 발싸개를 북한이 보급품 공급이 어려워진 증거로 보아서는 안됩니다.저도 귀순 당시 발싸개를 하고 왔으니까요.발싸개를 하고 있으면 행군능력이 좋아집니다.따라서 북한군이 평상시에도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 증거로 보아야겠지요.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지만 전쟁수행에 필요한 쌀과 기름·소금·천의 비축은 70년대 중반부터 계속해서 강조해왔습니다.반면 이대위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인민군의 사기는 막말로 막가는 집안의 형편인 것 같습니다. ▲장위원=북한의 군수산업은 50년대 기반을 닦아 60년대부터 보강에 들어갔고,70년대부터 자체 개량생산에 들어갔습니다.북한군의 무기체계는 서구와는 다르게 성능위주의 개량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특히 한반도 지형에 맞는 토착화된 무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박사=북한군의 사기를 단순히 경제적 궁핍과 연관시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정치적 목표가 뚜렷이 주어질 때 「오기」나 「악」에서 나오는 단말마적인 정신 상태도 배제할 수 없지요.남쪽에서 위협을 조성한다는 식으로 부추겨 모든 불만의 타깃을 남쪽으로 돌리면 위험이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이렇게 볼 때 북한 군의 사기는 낮지만 도발 가능성은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장위원=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사실 동구권 붕괴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전사에서 예고된 전쟁은 찾아 볼 수 없지않습니까.북한이 세계 4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도발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정박사=세계제체의 변화,사회주의의 붕괴,러시아 탈자본주의 등 세계적 조류와 경제적 어려움을 감안할 때 북한의 군사도발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판단해 봐야 합니다.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앉아서 흡수통일을 당하지만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이대령=이대위는 『여기와서 보니 확실히 남쪽은 전쟁을 하려고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이처럼 북한이 주민에게 선전하기는 먼저 공격한다는 개념은 아니예요.6·25때도 먼저 했다고 안하잖아요.미국의 공격에 대해 보복에는 보복,전면전에는 전면전이라는 식으로 교육하지요. ▲장위원=북한이 최근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정전협정을 무력화 시키려는 기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은 지금까지 4번 바뀌었습니다.그런데 북한이 최근 남한에 대해 휴전 협정 당사자가 아니므로 빠지라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당시 미국은 유엔군의 대표로 협정에 서명했습니다.북한은 협정당사자와 서명자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지요.주한미군 철수 등 요구는 한·미 동맹관계를 와해시키려는 의도에 다름아닙니다.북한의 최근 움직임은 김정일의 지도력을 과시하면서 대미협상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돌발사태 대비를 ▲정박사=북한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끊기 위한 수단입니다.또한 남한을 빼놓고 미국과만 대화를 하겠다는 것이지요.해외에서 북한 학자들과 만나면 『평화협정이 미군철수가 목적이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국내 일부에서 이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평화협정이 수립되면 북한은 미군철수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올 것입니다.일단 협상이 성사되면 처음부터 새로운 요구를 하는 것이 북한의 협상 전략입니다. ▲이대령=우리의 안보의식 문제로 결론을 삼고 싶습니다.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군요.서울 사람들은 집을 이사하면 현관 열쇠부터 갈아치우면서 안보에는 신경을 쓰지않는다고요.지금 전세계에서 한반도만큼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지역은 없습니다.있다해도 느슨한 갈등이 있을 뿐이지요.거의 각각 1백만에 가까운 병력이 양쪽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보가 너무해이합니다.저는 강연이 있을때 마다 『이러다간 임진왜란 또 일어납니다』라고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군의 위치를 너무 저하시키는 사회적 여론이 있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사관학교의 수준도 크게 떨어졌다지 않습니까.정말 곤란한 일입니다.〈정리=서동철·김성수 기자〉
  • 브라질 원주민 인디언 자살 급증

    ◎82년이래 236건 발생… 대부분 10살 안팎/전통문화 상실에 가난·학대 못 이겨/“영혼안식의 길” 문화적 배경도 한 몫 브라질 남부 작은 마을에 살던 9살박이 인디언소녀 루시아나 오르티즈양은 최근 별다른 이유 없이 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칠 뒤에는 20세의 안드레 파울로군이 동이 틀 무렵 같은 방법으로 목을 맸다. 브라질 원주민인 구아라니 인디언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수년래 이런 자살사건이 그치지 않고 있다.82년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2백36건의 자살사건이 일어났고 자살자 대부분은 루시아나 또래의 어린이들이었다.지난해만 보더라도 2만3천명의 구아라니 인디언 가운데 54명이 음독이나 목을 매는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인디언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브라질 국립인디언보호기구등 정부당국은 원인규명에 나서는등 바짝 긴장하고 있다.당국은 인디언들에게 번지는 자살현상을 「조용한 반항」이라고 부르며 대책마련을 서두르고 있다.일단 인류학자등 전문가들은 인디언들의 자살이 선조로부터 내려온 토지의 박탈과 전통문화의 상실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한 탓으로 풀이하고 있다.더욱이 인디언들이 겪는 학대와 가난도 주요원인일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한마디로 인디언들은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 자살을 도피구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아라니 인디언들의 생활은 처참하기만 하다.26만명에 이르는 이들 인디언은 파라과이 이웃에 위치한 섬에서 대부분 살고 있다.이들의 집은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움막들이다.수입이라고는 하루종일 콩이나 사탕수수 농사일을 하고 받는 3달러16센트가 고작이다.이들은 이 돈을 맥주를 마시는데 다 써버리고는 돈이 떨이지거나 할 일이 없으면 자살을 통해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이들에게 풍부한 것은 오로지 아침에 나무잎새로 비치는 햇살뿐이라고 한 관계자는 말했다. 인디언들의 자살에는 문화적 배경도 한 몫을 하고 있다.이들은 자살만이 그들의 영혼을 「악마없는 땅」(Terra Sem Mal)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생활고와 문화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인디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자살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브라질정부는 이에 따라 인디언들에게 더 넓은 땅과 생활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그러나 인디언들의 자살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인디언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도 산업화도 아닌 자연속의 조용한 삶이기 때문이다.
  • 볼쇼이 오페라 「하반쉬나」 10년만에 무대에

    ◎피터대제 왕위계승 둘러싼 궁중음모 고발/세계적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지휘·감독 17세기 후반.러시아 피터대제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왕정내의 음모를 고발한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하반쉬나(왕위)」가 볼쇼이극장에서 10년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져 세계음악인의 관심을 끌었다.음악적 관점에서 보면 「하반쉬나」는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다룬 「문제오페라」로 어지간한 감독자가 소화해내기 힘든 수준높은 오페라라는 것이 음악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오페라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활동을 재개한 세계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음악감독을 맡은 데다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관현악곡으로 편곡.또 페테르부르크의 세계적인 마린스키극장 소속의 일류성악가들이 모두 출연,아름다운 목소리로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지난 50년 초연된 「하반쉬나」는 지금까지 무소르크스키의 피아노오페라곡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관현악 편곡한 것만을 무대에 올려왔는데 쇼스타코비치의 관현악곡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처음으로 발견해 내 최근 연말무대에 다시 올려진 것이다. 「하반쉬나」는 차르 왕위계승을 놓고 피터 대제가 10살 때인 1682년부터 7년간 이복형인 이반과 벌이는 왕정내의 각종 음모와 배신,신하들의 암투 등 권력투쟁을 다룬 것이다.이 오페라는 그동안 극적인 구성에 집착해 있고 역사적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오긴 했다.하지만 가사와 음계의 조화,옛 러시아와 새 러시아의 적절한 대비,등장인물 개개인의 생생하고 심오한 인물 특성 등은 이 오페라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 지휘자들의 얘기다. 일부 음악평론가들은 쇼스타코비치의 편곡은 훌륭하다고 평가를 내리면서도 음악을 총감독한 로스트로포비치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지휘자로서는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음악적인 영감 표현이 아직 성숙된 것같지는 않다는 것이다.반면 그는 오페라 출연자들의 훌륭한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솜씨있게 끌어내 관중과 무대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공연은 결국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무대감독인 보리스포크로프스키는 『하반쉬나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출연배우들을 단지 가사와 음악에만 몰두하도록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면서 『무소르크스키의 영감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 배우들에게 복잡한 스토리를 명확하게 이해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하반쉬나는 1월초 볼쇼이극장의 자체 캐스팅을 통해 본격적으로 일반에 선보일 예정이다.
  • 일재 식민사관 맞선 애국계몽 사상가/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채호선생

    ◎자주적 한국 고대사 재구성,민족사관 확립/연해주서 광복활동… 「조선혁명선언」도 집필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정언을 지낸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살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살때 행시를 지었으며 12살때 사서삼경을 독파,신동으로 불렸다.18살때 한말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천원군 목천 사저를 출입하면서 신·구서적을 섭렵,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키워간다. 26살때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위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당시의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던 상황에서 실력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방법이었다.그러나 같은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됨에따라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자 황성신문은 압수조치와 함께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1906년 영국인 베델이 사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참가,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조선사」등을 저술,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의 초기식민주의사관을 퍼뜨리면서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에 광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같은 일제의 거짓학설에 대한 학문적 투쟁을 전개,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먼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한 뒤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생은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선생은 연해주에서 광복회를 조직하고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는 박은식 등과 박달학원을 세우는 등 국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임시정부 발기회의 참가했으나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윌슨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고 퇴장했다.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를 묶어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역시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반 임시정부의 노선을 걸었다.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한 선생은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이 선언은 일제의 요인과 기관을 암살·파괴할 폭탄·단총과 함께 의열단원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였을 정도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일제당국을 공포에 빠뜨렸다. 1924년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를 집필,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들 역사서를 통해 제시된 선생의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사관은 당시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대응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과에 따라 대만에서 화폐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순국했다.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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