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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의진씨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 완간

    ◎소설로 태어난 허유의 삶과 예술/막치 그림 그리던 시골 환쟁이에서 남종문인화의 대가로 우뚝 서기까지/불꽃같은 사랑·운명적인 만남 등 자전실록 ‘몽연록’ 바탕 담당히 그려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가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 작가 곽의진씨(51)가 소치의 불꽃같은 예술혼과 사랑을 그린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전5권,해냄출판사)를 펴냈다. 그동안 역사소설들이 많이 나왔지만 문화예술 쪽에 초점을 맞춰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본 작품은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꿈이로다…’는 적극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야기는 시·서·화에 능해 삼절(三絶)로 불렸던 선비화가 소치가 예술가의 생애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한 축으로,비련의 여인 은분과의 사랑을 또다른 한 축으로 전개된다. 초의선사 장의순,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화필 하나로 19세기 조선문화의 중심권에 선 허유. 그는 은분과의 애틋한 사랑을 뒤로한 채 고난의 길을 걷는다. 사랑도 미움도 없는 세상을 갈구하던 은분은 불도를 닦는 여승이돼 소치 앞에 선다. 소치가 조선시대 문화의 중심부를 걸을 수 있었던 데는 초의선사와 추사 그리고 다산 정약용 등 지적 거인과의 직간접적인 만남이 큰 몫을 한다. 예술이란 완성된 인성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인문행위라는 소신을 지닌 추사는 소치가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새롭게 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재주는 있어 보이나 견문이 부족해 궁벽하다’는 그의 첫 논평은 소치로 하여금 발분망식(發憤妄食)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소치는 초의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막치그림이나 그리는 한낱 ‘시골 환쟁이’신세에서 벗어난다. 다성(茶聖) 초의는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한 멋쟁이 승려. 소치는 그에게서 고요함과 정갈함의 미학을 배운다. 이 소설은 소치가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책 ‘몽연록(夢緣錄)’을 바탕으로 했다. ‘몽연록’은 소치가 허망하고 쓸쓸해 마치 꿈과도 같은 자신의 삶을 담담히 써내려간 작품으로 훗날 ‘소치실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작가가 소치의 예술세계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10년전 ‘남종문인화의 산실을 찾아서’라는 한 지방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면서부터. 곽씨는 “당시 소치에 관한 자료를 모으면서 놀랐던 것은 허씨 일가가 세계 미술사에서도 드물게 화맥 5대를 잇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고향 진주에 있는 ‘채운토방(彩雲土房)’이란 자신의 집필실에 머물며 새로운 소설을 구상중이다. 고려인의 대몽 항쟁의지를 다룬 장편 ‘삼별초’(가제)를 원고지 1만장 분량으로 써낸다는 계획이다.
  • 통일외교통상위/國監 하이라이트

    ◎‘北 핵보유 가능성’ 다시 도마위에/‘이홍구 대사 정년’ 추궁/독도에 순수비 건립 주문 5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외교통상부 국감(2차)에서는 지난달 24일 1차 국감때의 최대쟁점이던 독도 영유권 문제가 다소 시들해진 대신 북한 핵이 초첨으로 부각됐다. 국민회의 趙淳昇 의원은 “카트먼 미 한반도 평화담당 특사의 방북 때 북한지하시설이 핵시설로 판명되면 미국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한나라당 金德龍 의원은 “미국은 금창과 태천 지하시설의 핵의혹 수준이 이미 지난 영변 핵 사태의 초반 수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민련 李健介 의원도 “미 군사 전문가는 북한이 이미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의 안보가 취약할 때 한강 이북을 기습점령,핵을 담보로 휴전·통일회담을 제의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에 대해 洪淳瑛 외교부장관은 “북한 지하시설이 핵시설로 판명될 때까지 과도한 대응은 자제할 방침”이라고 답변했다. 李洪九 주미대사의 정년문제도 끄집어 냈다. 한나라당 李信範 의원은 “盧泰愚 전 대통령은 88년 朴東鎭 李源京 대사를 임명하기 위해 특임공관장의 연령제한을 배제하는 ‘특임공관장 인사관리 지침’을 제정했으나 3년후 이 지침을 삭제했다”면서 “朴定洙 전 장관이 10년전의 불법임명 전례를 원용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權翊鉉 의원이 “金大中 대통령이 독도를 직접 방문,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것처럼 독도에 ‘金大中 순수비’를 세우라”고 이색주문을 했다. 이에 洪장관은 “독도는 국제법적으로나 역사 적으로나 우리 영토가 분명하므로 특별히 대통령이 방문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했다.
  • ‘노약자석’ 이름 바꾸자/沈雨晟 공주민속박물관장(서울광장)

    지난 한가위 명절을 전후해서 ‘노인공경운동’을 펴는 한 동아리에서 ‘노인(老人)’보다 더 좋은 호칭으로 ‘어르신’이 거론된 적이 있다.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다면 노인들의 모임인 ‘노인회’는 뭐라하며,‘노인복지회’는 뭐라 할 것인가에 이르고 보면 머리가 갸우뚱거려 진다. 오랜 세월 관습적으로 써 오는 말을 하루 아침에 고친다는 것이 간단치 않음을 실감케 했다.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에도 ‘노인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노약자·장애인석’이다.‘노약자·장애인석’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인 아래에 ‘노약자·장애인을 위하여 비워둡시다’라는 토까지 달아 놓았다.그런데 이 자리에는 대부분 멀쩡한 젊은이들이 발을 꼬고 앉아 있다.낯뜨거운 나체사진 표지의 주간지나 주로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있는 젊은 남녀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그들을 보는 노인들은 곤혹스럽다.차라리 ‘노약자·장애인석’이라고 써 붙이지나 말았더라면 싶다. 벌써 오래전부터의 일인데 실제 노약자나 장애인들은 이 자리를 애써 피하고 있다.그 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과 눈 마주치는 것이 송구해서이다. ○일선 우선석이라 불러 기왕 말이 나왔으니 ‘노약자·장애인석’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한말씀해야겠다.노약자는 늙어 병약한 자이고,장애인은 신체가 불구인 사람이다.꼭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할까. 궁상스럽지만 남의 나라 예를 들어보자.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우리의 ‘노약자·장애인석’을 ‘우선석(優先席)’이라 적고 있다.연세 많으신 분,몸 불편하신 분들이 우선 앉으시는 자리라는 뜻이다. 배워야 할 것,흉내 내야 할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장애인에 대해서는 몇일전 경상남도 밀양에서 있었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다시금 느낀 바가 있다.거의 모든 민속놀이에 장애인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 형상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이른바 온갖 장애인이 다 모여있다. 벌써 10년전 쯤인가 싶다.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한 많은 작품의 연출을 맡기도 했던 나의 친지 한분이 그 무렵 인기있었던 ‘병신굿’이라는 이름의 놀이굿을 가지고 외국의 연극제에참가했다가 큰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도대체 역사와 문화가 찬란하다는 한국에 이처럼 몰인정하고도 참혹한 연극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라는 빗발치는 비판으로 해서 도망치듯 돌아오고 말았었다. ○가정교육 소홀히 한탓 노인을 공경하고 장애인을 보살피자는 뜻으로 착안되어 특별히 자리까지 마련한 것이 ‘노약자·장애인석’임은 더없이 가상한 일이다.그렇지만 그 호칭이나 또 그 자리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쓰여지고 있느냐에 이르면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 문제는 젊은이들만을 탓할 것이 아니다.바로 이 젊은이의 어버이가 가정교육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나이가 많아서 늙고 병든 병약자나 몸이 부자유스런 장애자 보다도 나이는 어리면서도 노약해 버린 젊은이,몸은 멀쩡하면서도 정신장애증을 앓고 있는 젊은이들을 고치기 위하여도 ‘노약자·장애인석’은 이름도 기능도 바꿔져야 하겠다. 부드러우면서도 예의 바르고 간절한 이름을 찾아봐야 하겠고,꾸짖어야 할때는 당당히 꾸중하는 노인의 위엄도 되살아나야 한다. ‘노약자·장애인석’을 멀리서바라보는 노인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 日帝 징용 한인 후손 380명 터전/우토로 마을을 지켜주세요

    ◎40년 교토비 행장 건설당시 한인 합숙소/지주 서일본 식산 “14억엔 안내면 철거”/기독교교회협 등 김 대통령에 청원서 ‘우토로 마을을 지켜주십시오’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일본의 한인 집단거주지 ‘우토로 마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인권단체들이 발벗고 나섰다. 우토로 마을은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남쪽에 있는 한인 집단거주지.1940년대 초 일제가 전쟁용으로 교토비행장을 건설할 당시 한인 및 중국인 징용자들의 합숙소가 있었던 자리다.전쟁이 끝난 뒤 한인징용자 1만3,000여명 가운데 일부가 그대로 눌러앉으면서 집단거주지가 됐다. 50여년동안 이곳에서 오순도순 살아온 동포 380여명(80가구)은 10년전부터 이 땅의 소유주인 서일본 식산회사를 상대로 주거권 수호를 위한 외로운 투쟁을 펴오고 있다. 서일본 식산회사는 지난 88년 닛산자동차로부터 땅을 사들인 뒤 89년 주민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토지명도 및 건물철거 소송을 제기했다.재판부는 주민들에게 떠나기 싫으면 14억엔을 모아 토지를 매입하라는 내용의 화해안을 내놓았지만 전 재산을 합쳐봐야 7억엔에 불과한 주민들에겐 이 또한 허울 좋은 대안일 뿐이다. 주민들은 50년이상 거주한 점을 들어 사활을 걸고 지상권 수호 투쟁을 했지만 올해 6개 구역 가운데 5개 구역에 대한 1심 재판에서 잇따라 패소,2심에 항소해 놓은 상태다.오는 12월 1심 선고공판이 열릴 나머지 한개 구역도 승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 노동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주민들은 징용자 집단막사를 부수고 개량주택을 하나 둘 지어 제법 마을의 틀을 갖췄다.이 땅은 일본정부가 전쟁 직후 닛산자동차에 불하한 뒤 87년까지도 수도조차 공급하지 않는 등 행정보호의 ‘사각지대’이다.주민들은 대부분 귀화를 거부,법적인 신분보장도 취약하다. 이같은 사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지난해 천주교인권위원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이 주축이 돼 조직한 ‘한국 우토로지역 동포후원회’는 7일 일본을 방문하는 金大中 대통령에게 외교적 해결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 물류비 절감 최우선 정책과제

    ◎국가 총물류비 年 64조… GDP의 16%/인천공항·부산·광양 종합 유통 도시로 심각한 물류난이 우리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최근 정부관계자나 업계는 물론 일반서민들까지 ‘물류비’‘물류개선’‘물류혁신’등 물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그러나 최근 경제난의 심화와 함께 물동량이 급감함에 따라 물류에 대한 투자액은 줄고 있어 물류 투자확대를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올해는 정부가 지난 94년 10개년 장기종합계획인 “물류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한 지 5차년도가 되는 해.그동안 정부의 추진 성과와 향후과제를 살펴보고 IMF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주요 물류 업체의 현황을 알아본다. 우리 기업들이 겪고 있는 경영상의 대표적인 애로요인으로 생산요소의 가격상승과 과다한 물류비 부담을 손꼽을 수 있다. 물류비는 노력에 따라 절감효과가 크게 기대되기 때문에 기업이나 학계,정부차원에서 물류 효율화에 대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물류관련 부서를 신설하고 물류혁신을 위한 경영상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정부도 나름대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물류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추진하고 있다.그러나 지난해말부터 밀어닥친 IMF한파로 오히려 물류분야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등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물류문제를 등한시 하면 결국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어려울 수록 정부,기업,학계가 함께 연구하고 필요한 정책들을 하나하나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물류의 개념◁ 물류란 화물의 흐름(流)즉,화물의 공간적·시간적 이동을 말한다.물류는 유통과 유사한 개념이나 거래활동과 같은 상업적 유통을 제외한 물적 유통을 일컫는 것으로 물자의 수송·보관·하역·포장과 이와 관련된 물류표준화및 정보화를 포괄한다.물류라는 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물자의 계획적이고 효율적인 조달·보급·수송을 위한 병참술에서 유래됐다. 물류는 당초 물품판매를 위한 수·배송을 의미하는 좁은 개념이었으나,최근에는 물자의 효율적인 조달·생산·판매·반품·폐기 등을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따라서 사실상 기업 활동의 전 과정에 물류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물류관리의 개념이 기업 경영에 도입되어 물류합리화가 이루어져 왔지만,우리나라는 8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기업들이 물류 관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고,정부도 90년대에 들어와서 전담 조직과 법령을 정비하여 본격적인 물류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현황과 문제점◁ 우리나라는 물류시설,운영,제도 등 여러 면에서 발전 초기단계에 머물고 있다.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늘어난 수출입 및 국내 물동량을 처리하지 못해 물류난이 심화되고 있다. 기업들의 물류비 부담액 추이를 보면 물류난의 심화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우리나라의 국가물류비는 지난 96년에 연간 약 63조 8천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6.3%에 달하고 있다.이는 10년전인 86년 총물류비 14조원에 비해 4.5배로 증가했다.이 기간에 연평균 16.3%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는 미국 등 선진국의 물류비가 GDP 대비 10.5%인 것과 비교할 때 1.5배에달하는 높은 수준이다. 총 물류비중 수송비가 66.5%를 차지하고 있으며,88년 이후 그 비중이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그 다음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재고유지관리비로서 총물류비의 21.7%이다.이 두가지 비용을 더하면 88%로 총물류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류비 내역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물류문제의 근본원인은 수송부문에서 기인하고 있다.도로가 92%를 차지하는 편중된 수송분담 구조로 인해 도로체증에 따른 교통혼잡 비용이 16조원에 달하고 있다.철도는 주요 노선이 용량한계에 도달해 열차의 추가투입이 어려운 실정이다. 또 항만시설도 만성적인 체선 체화현상을 빚고 있으며 물류거점 기능을 담당하는 화물터미널은 47개소에 불과하다.일본의 3% 수준에 머물어 거점간 대량 연계수송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물류 운영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물류 표준화와 정보화도 미흡하며 공로수송을 직접 담당하는 화물자동차 운송업도 대부분 영세해 수송 수요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물류정책의 방향◁ 정부에서는 물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94년 7월부터 “화물 유통체제 개선 기본계획(94∼2003)”을 마련해 추진중이다. 이 계획은 신속·저렴·편리·안전한 물류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에 따라 △고도산업사회에 대응하는 선진물류체제의 구축 △기업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지원형 물류서비스 제공 △국제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 및 역할 강화 등을 전략 목표로 설정하고,11개 주요 정책과제를 추진 중이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대내적 물류체제의 개선과 함께 대외적으로 인천국제공항과 부산 및 광양항에 화물의 수출입 외에 유통·가공·보관 등 종합 물류기능을 부여하여 동북아시아의 국제 물류 중심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건교부 물류심의관 金棅云씨/새로운 물류정책 개발에 주력/종합정보망사업 12월중 본격 서비스 “물류의 중요성을 정부내 뿐만 아니라 기업체나 국민에게 널리 알려 물류혁신을 위한 정부·기업·학계간의 역할 분담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고 물류 체제 전반에 대한 개선 방향을 잡아 나갈 것입니다”건설교통부 金棅云 물류심의관은 최근 물류에 대한 정부나 기업의 관심이 멀어지는데 대해 안타까워 하며 새로운 물류정책 개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물류정책에 역점을 두는 분야는.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물류의 역사가 워낙 일천하기 때문에 그동안 거점 물류시설의 확충이나 물류정보망의 구축 등 물류 체제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데에 주력해 왔다. 앞으로 물류업체나 제조업체가 물류 활동의 과정에서 겪는 물류상의 실제 애로사항,즉 ‘체감물류 또는 생활물류’를 개선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할 계획이다. ­IMF 이후 가장 타격을 받고있는 부문이 물류업계가 아닌가 생각한다.정부 차원의 지원책은 없는가. ▲국가물류비의 66.5%를 차지하고 있는 수송분야중 가장 중요한 화물자동차운송업의 경영난과 물류애로를 극복하기 위해 세제,경영,차량 운행제도의 완화 등 화물운송업계 지원대책을 마련,관계부처와 협의중에 있다. ­물류 정보화 활성화 대책은. ▲지난 96년부터 추진중인 종합물류정보망 사업은 현재 시범서비스 중이다.본격적인 상용서비스는 올 12월부터 실시할 계획이다.현재 사용중인 무선데이터통신뿐 아니라,단말기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PCS 통신방식을 도입해 업계의 단말기 가격부담을 줄이겠다. 일반인들이 종합물류정보망에 화물운송요청을 할 수 있는 특수 전화번호를 배정받아,종합물류정보망 가입업체의 물량확보를 손쉽게 할 계획이다. ­건교부가 발족한 물류정책자문단이 다소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앞으로 자문단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 계획인지. ▲그동안 운영상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앞으로 그 이름에 부합하게 실질적인 역할과 기능을 하도록 할 계획이다.
  • 오페라 ‘원효’와 ‘이순신’을 보고/金文煥(기고)

    ◎세계화의 문화적 접근 ‘결실의 계절’인 가을로 접어든 길목에서 우리는 이제까지보다 매우 참신하고 성공적인 문화기획을 접할 수 있었다.지난 18일 경주 불국사에서 열린 ‘원효’(장일남 작곡)와 아산 현충사에서 공연된 ‘이순신’(니콜로 이우콜라스 작곡),두 공연은 모두 오페라이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흥미롭게 대비된다. ‘원효’는 1971년에 이미 초연됐고 ‘이순신’은 이번이 초연이다.‘원효’가 서양의 전통 음악적 기법을 구사하면서 선율을 중심으로 다소 단조롭고 평이한 느낌을 주었다면,‘이순신’은 이른바 현대음악 기법을 기초로 5음계를 활용하면서도 좀더 풍부하고 다양한 느낌을 주었다. ‘원효’는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배경으로 큰 나무들 사이에 만들어진 무대와 대형 스크린을 활용,실감있는 장면 묘사를 가능케 했다.‘원효’는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제작하고 대구필하모니오케스트라와 경주시립합창단이 출연했다.‘이순신’은 공주대 백기현 교수가 이끄는 민간단체 성곡오페라단이 주관하고 부산시향과 충남도향,대전시립합창단 등이 출연했다. 이런 식으로 대조해 보자면 아직도 한참 길어지겠지만,본격적인 오페라 관극평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오히려 IMF 금융지원으로 상징되는 경제적 난국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대형 야외예술공연이 가능했던 배경이 주목돼야 할것이다. ○인적 자원 투자 높여야 첫째,무엇보다도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에 주목해야 한다.그동안의 관심이 대형 문화공간을 건립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반면,이 두 공연은 그보다는 소프트웨어적 접근이라는 사실이다.물론 두 공연 모두 예술적 축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앞으로 좀더 나은 발전을 기대한다면,인력자원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주민들의 호응이 관심대상이 되어야 한다.두 공연의 경우,객석의 반응은 과히 수준급이었다.아직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할지라도,넓은 의미의 문화 교육적인 노력은 그런 뜻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셋째로 기획의 집중도가 지니는 의미가 제대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원효’가 문화엑스포를 표방하는 여러 행사의 하나로 이뤄진 공연이었던 것에 반해,‘이순신’은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집중기획이다.때문에 ‘원효’보다 ‘이순신’의 공연성과가 결과적으로 앞선 이유중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역민 문화 자긍심 고양 ‘원효’가 세계문화유산인 경주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면,예컨대 10년전에 이루어졌던 ‘빛과 소리’ 공연을 다각도로 지속시키면서 이번 공연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유보사항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자신과의 연고를 활용해 국가적,아니 세계적 의의를 지닌 인물들을 예술공연을 통해 기림으로써 지역주민의 문화적 자긍심과 공동체성을 높이는 한편,지역이 지닌 매력을 더해주고자 한 것은 참으로 치하할 만하다.당장은 경제적인 손익계산에서 적자가 나더라도 이같은 기획이 뿌리를 내릴 경우 장기적인 측면에서 지역경제의 활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문화의 결실은 당장의 입장객 숫자가 아니라 삶의 질에 미치는 성과로 헤아려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그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다.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세계화란 결국 민족적인 소재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보편화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획득하게 마련이다.그런 의미에서 성급한 경제주의적 접근을 잠재울 문화적 접근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개의 공연이 지닌 의의는 실로 중대하다 할 것이다.
  • 신안산업/철선 생산(한국경제 여기에 길이 있다)

    ◎고품질­고기술로 ‘고성장’/직원 21명 ‘초미니기업’… 매출 4년만에 9배로/원자재­환율영향없게 국산 사용.안정된 제조원가 유지/기술력­일서 첨단기술 전수 받아 세계 최고 0.08㎜에 도전/수출력­매출의 절반이상 차지.일에 독점적인 활로 개척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주)신안산업에 전화를 하면 교환원 목소리에 뒤이어 88년 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가 흘러나온다. 金禮式 사장(51)이 이 노래를 93년 창업때부터 회사 로고송처럼 여기는 것은 올림픽때 우리 국민이 보여줬던 저력을 가슴에 새기고 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창업 당시 4억원이었던 신안의 매출액은 지난해 36억원을 넘어서 4년만에 9배나 늘었다.IMF한파에도 아랑곳없이 올 상반기 매출도 25억원을 기록,연말까지 60억원을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특히 수출이 매출액의 절반을 차지,3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단연 ‘금메달’감이다. IMF사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고속성장을 거듭하는 신안의 비결은 무엇일까. 총 직원 21명의 신안은 철선(鐵線)을 만드는 회사다.말이 철선이지 0.9∼0.28mm 두께가 주종이어서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유연하다.철선은 철골을 묶기도 하고 컴퓨터나 선박에 내장된 케이블을 둘러싸는 피복으로도 쓰인다. t당 30만원대의 원자재를 열처리 가공해 200만원대의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집약형 고부가가치 업종이다.바로 이 대목에서 ‘원자재’와 ‘기술’이 관건임을 알 수 있다. 金사장은 먼저 “가급적 원자재가 국산인 아이템을 고르라”고 충고한다.국산인 경우 환율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아 안정적인 제조원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IMF이후 수입 원자재 값이 급상승,하루 아침에 부도를 맞은 업체들에게는 뼈져리게 와닿는 말이다. 신안의 경우 세계 최고 품질의 포항제철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때문에 경쟁국인 중국이나 동남아 업체들보다 품질면에서 우위에 있고,환율변동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다음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 확보.이 부분은 신안의 성장사 자체가 그대로 대변해준다. 경영학을 전공한 金사장이 철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삼성건설 과장으로 재직하던 88년.당시 공사현장에서 쓰는 철선을 일본에서 비싼 돈에 사오는 것을 본 金사장은 기술도입 자체가 사업성공임을 확신했다.다른 업체들은 일본에서 기술전수를 꺼려 쉽게 포기한 상태였지만 金사장은 개인적으로 발이 닳게 돌아다녔고,결국 일본과 교류가 있던 인천지역 라이온스클럽을 통해 일본의 철선 제조회사 사장을 소개받았다. 극적으로 기술을 전수받은 金사장은 직접 회사를 설립,0.9㎜ 철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金사장은 일본 정부가 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모든 건물 유리에 미세한 철선을 끼워넣도록 의무화함으로써 수요가 늘어난 점을 간파,이번에는 0.9㎜ 이하 두께의 철선 제조기술 도입을 추진했다. 결국 무료로 기술을 전수해주면 신안제품 전량을 일본업체에 고정적으로 넘기겠다는 ‘기발한’ 제안으로 기술도입에 성공하면서 수출활로 개척과 함께 고속성장을 하게 됐다. 현재 월 1,000t의 생산 능력을 가진 신안은 국내외 주문이 밀려 물건을 못댈 정도다.앞으로도 15년 이상은 이같은 추세가 이어지리라는 전망이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이번에는 세계 최고 수준인 0.08㎜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올림픽은 10년전에 끝났지만 신안의 목에 걸린 금메달은 여간해서 내려올 것 같지 않다.
  • 위안부 할머니의 ‘首丘初心’

    ◎中 훈춘 趙 할머니 남동생 60년만에 극적 상봉/고향땅 밟는 것 마지막 소원… ‘북한국적’ 걸림돌 중국 길림성 훈춘시에 사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 趙允玉 할머니(73)는 20일 평생 소원을 풀었다. 꿈에 그리던 언니 玉述씨(76·대구 남구 남산동)와 남동생 容直씨(69·서울 도봉구 쌍문동)를 60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것이다.지난 3월 趙할머니의 생존 소식을 들은 국내 가족들은 이날 비행기를 타고 훈춘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소원이 이뤄질 지는 미지수다.국적이 북한이기 때문이다. 趙할머니는 한국정신대연구소(소장 鄭鎭星)가 지난 3월 중국에 사는 것으로 확인한 위안부 피해자 7명 가운데 유일한 북한 국적자.해방 소식을 듣고 고향에 가려고 청진까지 갔으나 38선이 그어져 못간다는 말을 듣고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이때 북한에서 넘어온 것으로 오인받아 북한 국적을 갖게 됐다. 3남3녀중 다섯째인 趙할머니의 인생 역경은 고난의 연속이었다.집안이 어려워 8살 때 북청에 양딸로 팔려갔고,15살 되던 해에는 양어머니가 350원을 받고 청진으로 다시 팔았다. 공장이라고 해서 따라간 곳이 ‘청진위안소’였다.위안소에서 일본군들이 수은이 든 알약을 강제로 먹였고,이 후유증으로 아이도 낳지 못하게 됐다. 만주에서 결혼을 했지만 남편을 중풍으로 잃은 뒤에는 허드렛일을 하며 혼자 외롭게 살아왔다. 10년전 어깨를 다쳐 거동도 불편하다.동생 容直씨는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 귀국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 9급 공무원 고학력자 급증세

    ◎올 공채 합격자 전문대졸 이상 97.4% IMF관리체제 이후 고학력자의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올해 9급 공무원시험 합격자의 학력과 나이가 예년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자치부는 6일 지난 2일 발표된 제39회 9급 공개경쟁 채용시험 결과,대졸이상 72.1%(대학원졸 0.4%포함),대학 재학중 17.6%,전문대졸 7.8%로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는 97.4%인 반면 고졸이하는 2.5%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올해 대졸이상의 합격자 비율은 88년에 비해 3배가 높아졌으며 지난 해의 63.4%보다도 8.5% 포인트가 높다. 고졸이하 합격자는 10년전인 88년 과반수에 약간 못치는 48%였으나 그 이후 계속 감소,지난 해에는 6.4%,올해는 2.5%로 뚝 떨어졌다. 또 연령 분포도 88년에 45%였던 18∼20세 연령대의 합격자가 올해는 한명도 없었고 88년에 각각 28%,13%에 머물렀던 24∼26세와 27∼28세가 53.6%,35.2%를 차지,20대 후반 합격생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올해 27∼28세의 합격자는 지난 해(26.4%)와 비교할 때 8.8% 포인트가 증가했다. 이와 함께 남녀비율면에서 볼 때 남성 합격자는 여성파워에 밀려 그동안 감소추세에 있었으나 IMF 사태이후 남성 고학력자의 지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난 해 65%에서 79%로 높아졌다. 여성합격자의 비율은 88년 10%에서 97년 35.3%로 큰 폭으로 늘어났으나 올해는 21.3%로 증가세가 둔화됐다.
  • 油化업계 대도약 이끈 ‘재계총리’/타계한 崔鍾賢 회장은 누구인가

    ◎전경련 회장 3번 연임… 과도기 화합다져/그룹 수직계열화 모범… 문민정부땐 설화 26일 타계한 崔鍾賢 회장은 1929년 경기도 수원 평동에서 중농이었던 崔學培씨의 4남4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 농대 4학년이던 56년 미국으로 유학,위스콘신대 화학과를 졸업한뒤 59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땄다.박사과정을 준비하던 62년 그룹 창업주인 친형 崔鍾建 회장을 돕기 위해 귀국,선경직물 이사로 처음 경영일선에 나섰다. 崔회장은 73년 崔鍾建 회장이 폐암으로 타계한 뒤 경영대권을 이어받는다.이때부터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수직계열화가 시작됐다.자신의 공부를 바탕으로 ‘SKMS’(SK선경관리체계)와 최고 수준을 추구하자는 ‘수펙스(SUPEX)운동’을 주창,기업문화를 앞장서 이끌어왔다. 崔회장의 경영 수완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현 SK(주)) 인수.당시 그룹 전체를 합한 것보다도 매출이 많았던 유공을 인수해 대도약의 기틀을 다졌다.이어 본격적인 수직계열화 작업을 가속화해 선경기계등 에너지·화학의 큰 얼개에서 벗어난 군소계열기업을 모두 정리하고 유공해운(82년) 유공가스(85년) 선경화학·유공옥시케미칼(87년)을 차례로 세웠다. 89∼91년 나프타 분해공장의 완성으로 ‘석유화학=SK’의 공식을 정립시켰다.94년 7월에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인수에 성공,정보통신을 제2의 중심축으로 확보했다. 崔회장은 93년 2월 ‘재계의 총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3기 연속 회장을 맡아 왔다.이 기간동안 재계화합,국가경쟁력 강화,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강화 등에서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특히 재계 원로들을 명예회장이나 고문으로 추대하고 회장단 회의를 활성화해 재계의 화합을 다지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95년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는 ‘설화’(舌禍)를 입기도 했고 盧泰愚 전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점 때문에 이동통신사업 선정과정과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서 잡음에 휘말리기도 했다. 중·고교 시절 축구선수를 지내고 10년전부터 심취한 단전호흡으로 남다른 건강을 과시해 왔으나 지난해 봄 서울대병원에서 폐암선고를 받고 6월 미국 뉴욕에서 수술을 받았다.이때 간병의 과로로 쓰러진 부인 朴桂姬 여사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崔회장은 건강 악화로 지난 6월17일 金大中 대통령과의 오찬회동을 마지막으로 金宇中 대우회장에게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을 맡긴뒤 워커힐 자택에서 지내며 기(氣)수련 지침서인 ‘심기신(心氣身)수련’의 집필에 전념해 왔다.
  • 젖먹이 버리고 10년전 가출/非情의 어머니 親權 박탈

    ◎남편실종 보상금 노려 귀가/법원 시댁식구에 승소 판결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장기 출항하자 생후 100일도 안 된 딸을 두고 가출한 지 10년 만에 남편이 사고로 실종되자 거액의 보상금을 노려 뒤늦게 친권을 찾으려던 비정(非情)의 여성에게 법원이 “어머니 자격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가정법원 가사2부(재판장 李敎林 부장판사)는 24일 “시댁식구들이 부당하게 딸에 대한 친권을 행사하고 있다”며 A씨(30·여)가 낸 친권행사 변경 소송에서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갓난아이를 버린 뒤 거의 10년 동안 한번도 찾아보지 않다가 뒤늦게 남편의 보상금 문제로 딸에 대한 친권을 주장하는 것은 인륜을 저버린 행위”라고 지적하고 “시댁식구들이 원고의 딸을 잘 키우고 있으므로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고 밝혔다.
  • 민주열사 열전:3/崔鍾吉 서울 법대 교수(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 사죄” 외친 참지식인/법학자답게 ‘정의의 저울’로 독재에 항거/반공주의자… 간첩혐의 조사받다 의문사 崔鍾吉은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그는 70년대초 유신독재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그러던 어느날 그의 비판의 소리가 사라졌다.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 속에 죽었기 때문이었다.공작정치를 자행하던 중앙정보부는 그를 간첩이라고 발표했다.독재권력에 의해 그는 간첩으로 왜곡됐다.그러나 죽은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수사중이었던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25일 “구속수사를 받던 崔鍾吉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崔교수가 사망한지 6일 뒤의 발표였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은 물론 崔교수를 아는 사람중 중앙정보부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대부분 고문으로 죽자 자살로 위장했을 것이라고 믿었다.가족들은 검시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장례마저도 소리없이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그의 죽음은 張俊河 선생의 죽음과 더불어 유신시대 최대 의문사 사건이다.그의 의문사는 독재권력의 인권유린과 민주화 탄압 및 공작정치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건 1년여 뒤인 74년 12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崔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조작 실수로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그러한 의혹은 당시 모 신문사 기자가 취재도중 입수해 사제단에 알려온 정보를 바탕으로 제기됐다”고 사건 당시 정보부 직원이었던 P씨가 전한다.P씨는 사제단에 있던 한 신부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그는 “앞서 열린 1주기 추도식때도 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제기됐었으며 몇개 신문의 초판에 실렸던 관련 기사가 밤사이 누락됐었다”고 전했다. 사제단은 88년 10월6일 서울지검 김두희 검사장 앞으로 崔교수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고발장을 제출했다.사제단은 “崔교수 사인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건 관련자로 이후락 정보부장 등 22명을 고발했다.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사건발생 15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민의 관심사로 등장했다.고발은 사건 당시 정보부 감찰실 직원으로 있던 崔교수 동생 종선씨(미국 거주)가 비밀리에 작성했던 수기가 바탕이 됐다.그는 사건 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구가 있던 세브란스 정신병동에 약 1주일간 입원하며 수기를 썼다. 그러나 수사는 겉돌았고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일인 10월18일 “崔교수가 타살됐다는 증거도,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족들과 사제단의 자료,88년 검찰 발표 등을 종합하면 당시 정보부 발표는 의혹 투성이다.먼저 정보부는 “崔교수는 퀼른대학 유학중 중학동창생인 이재원·노봉유(미체포)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유족들은 “주범이 체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섭된 사람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사고이후 시체를 현장에 두지 않고 급히 국립수사연구소로 옮긴 점,가족이나 변호인·의사의 검시 참여를 불허한 점,한장 뿐인 사체사진이 투신 자살(뒷머리가 깨지고,양쪽 손발이 부러졌다는 정보부 발표)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 점 등도 정보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했다.떨어진 지점이라는 곳도 종선씨가 그날 새벽 몰래 가본 결과 핏자국이나 이를 씻어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崔교수가 뛰어내렸다는 화장실 구조도 투신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지적됐다.162㎝의 작고 뚱뚱한 그가 수사관들을 6m 거리에 둔 채 잠긴 창문을 열고 150㎝ 높이의 창문턱을 잡고 올라 투신한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이것은 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면서 건물구조를 잘 아는 동생 종선씨가 제기하는 최대 의혹이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10년전에 지났다.그러나 진상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정부나 국회의 적극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국민들은 당시 관련자들이 참회의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종선씨는 수기에서 “그들도 언젠가 증언대에 서면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착한 형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진실규명에 대한 희망을 나타냈다. ◎외아들 光濬씨/“역사의 진실에 공소시효는 없다” 崔鍾吉 교수의 외아들인 光濬씨(34·부산대 법대 조교수)는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학술회의 때문에 갔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부친 행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그러나 이번에도 새로운 것은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부친 모교인 퀼른대 출신인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알게 됐고,그 이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답답함만 더해 갔습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왜 간첩누명까지 써야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 부친의 은사였던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 등 아버지가 만났던 교수 동료들을 만나 부친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시절 만났던 코헨,박스터,라이샤워 교수들에게도 전화나 편지로 도움을 청했다.“그들은 한결같이 부친의 결백을 믿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고 光濬씨는전한다.특히 세계적인 민법학자 케겔 교수는 75년 독일 슈피겔지에서 崔교수 관련 기사를 읽고 당시 법무장관에게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光濬씨의 어린시절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1주기 추도식 때였어요.당시 명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는데 정보부에서 막아 어머님이 저와 동생을 끌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사람이 많은 시장거리 등을 몇차례씩 통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때문에 여러번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를 옮겨 조금만 있다보면 자신을 보는 친구나 선생님들의 눈치가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고.그는 결국 고등학교만 마치고 유학길을 택해야 했다. 사건 이후 미망인 백경자씨(62·의사)는 “오로지 남편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고 했다.그녀는 당시 열살,여덟살이던 光濬·希晶 남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이사다니기를 반복해야 했고 ‘자랑스런 아버지’였다는 점을 심어주어야 했다.덕분에 光濬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민법학자가 됐다.希晶씨(32)는 성신여대를 나와 출가해 미국에 살고 있다. ◎왜? 촉망받던 그가 죽음을 당했나/권력핵심부 거침없는 비판/독재정권의 ‘눈엣 가시’ 崔鍾吉 교수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이자 의식있는 지식인이었다.그는 모교인 독일 퀼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남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그러나 “모국에서 배움의 의지에 불타는 법대생들 앞에 서는 것이 내 소망이요 소명”이라고 뿌리치며 귀국했다고 가족과 당시 동료교수들은 전한다. 하버드 대학의 코헨,라이샤워,박스터 교수 등은 崔교수에 대해 ‘그는 애국자였으며,위대한 학자요,우리들의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코헨 교수는 후일 미국의 한 신문에 ‘우울한 한국(Gloomy Korea)’이란 기고를 통해 崔교수 죽음을 애도하고 한국 공작정치를 비판했다고 아들 광준씨가 전한다. 간첩혐의에 대해서 가족들은 “본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했다.아들 光焌씨는 “아버님은 학도병 출신입니다.학도병시절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기 전 일본에서 몇개월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한국말을 쓰며접근하는 사람을 매우 조심했다고 당시 친구분들에게서 들었어요.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고 해요.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崔교수를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간 시대적 상황은 무엇일까.사건 2달여전인 73년 8월8일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아울러 조용하던 대학가에서 반 유신시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서울법대에서도 연이어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교내에 진입해 시위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이에 대해 崔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된다”“서울대 총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보부는 결국 수사중이던 간첩사건(崔교수 출두전 간첩사건은 거의 수사가 종결돼 있었다고 사제단은 판단)에 崔교수를 엮어 반유신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던 것 같다.동생 종선씨는 88년“공공연하게 정권을 비판하는 형님을 손보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조사도중 사망하자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 어거지로 간첩혐의를 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崔鍾吉 열사 연보 ▲1931년 충남 공주에서 4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 ▲1950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51년 학도병 입대 통역병 근무 ▲1957년 서울 법대 대학원 졸업 ▲1962년 독일 퀼른대학 법학박사 ▲1964년 서울대 법대 전임강사 ▲1970년 2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수 ▲1972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73년 11월16일 중앙정보부(남산)에 출두 ▲1973년 11월19일 새벽 1시30분 사망
  • “한국정치는 日 정치의 복제품”

    ◎강태현씨 ‘일본 자민당 파벌투쟁사’서 주장/日은 黨·한국은 인물중심 권력 독점/거물 퇴장후 파벌정치 출현 등 예상 유별난 반일감정과는 달리 일본의 그늘을 벗어날수 없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이다. 유권자보다는 유력자에 줄을 서고 계파를 만들어 계보정치를 하는 양태의 뿌리는 일본이다. 일본은 종전 이후 자민당이라는 다수당이 지배해 온 일당 지배체제였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일인 체제의 몇개 정당의 생성소멸로 점철돼 왔다. 비록 당과 인물이라는 서로 다른 축으로 움직여 왔지만 독점적인 측면이 강했다는 것에서는 일치한다. 일본은 우리미래상을 반추해주는 자화상적 성격이 강하다. 일본동아시아통합연구소 부소장 강태현씨는 ‘일본 자민당 파벌투쟁사’(무당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정치적 미래를 조망한다. 그는 1945년부터 94년까지 일본정치사를 자민당이라는 거대 정당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이 책에서 일본은 한 개의 정당안에서 많은 파벌이 존재하고 그들의 투쟁에 의해 당이 유지돼 왔다며 거물들이 퇴장한 이후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파벌정치가 출현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예상은 최근 우리정치사의 흐름을 지켜 볼 때 단순한 예단이 아니라 사실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본에서 10년전,20년전 발생할 일이 우리에게 낯익은 모습으로 다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복제품을 살펴보자. 70년대 중반 자민당 총재선출을 위한 대의원선거의 부패상도 빼놓을수 없다. 당시 자민당 보스들은 표를 얻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는 대의원을 역에서 납치하거나 호텔에서 불러내 자기편에 투표해달라고 강권한다. 이 과정에서 돈이 오갔음은 물론이다. 개,고양이가 당원이 된 것을 꼬집는 ‘개·고양이 당원’,‘유령당원’이 나온 것도 이 때다. 의원들의 부패사건이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봉합되는 것도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이 책은 일본정치를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1차 자료라고 할수 있다.
  • 한국현대판화가협 창립 30주년 기념전

    한국현대판화가협회(회장 한운성) 창립 30주년 기념전이 12∼22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창립기념전은 ‘창립원로작가초대전’‘한국현대판화 30년전’‘제18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공모전’‘호주현대판화 10년전’으로 꾸며진다. 지난 68년 창립한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단순 인쇄물이나 디자인의 한 부분으로 치부돼온 판화를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해온 단체. 그동안 국내외에서 33회의 협회전과 13회의 공모전을 개최함으로써 판화의 영역을 넓히면서 신진작가들의 발굴을 통해 판화인구의 저변확대에 힘써왔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판화를 이끈 1세대 작가로부터 3세대 작가들까지 작품을 고루 출품,한국판화의 현주소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독도는 우리땅’ 정광태(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6)

    ◎“홀로섬” 사랑이 韓·日 외교에 희생/꼬마부터 노인까지 불러 국민가요 대접/日 교과서 파동에 감정악화 우려 판금/문공부차관에 간청… 넉달만에 ‘복권’ “울릉도 동남쪽/뱃길따라 이백리/외로운 섬하나/새들의 고향/그 누가 아무리/자기네 땅이라 우겨도/독도는 우리 땅”(독도는 우리 땅) 지난 80년대 초반,어눌한 말투와 친근한 인상으로 ‘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세를 탔던 가수 鄭光泰(43)씨. 개그 노래를 처음 소개하며 연예인 생활을 시작해 ‘독도는 우리땅’으로 일약 스타가 됐던 인물이다. 노래명이 전국의 음식점 간판에 즐비하게 등장할 정도로 폭 넓게 불려지던 노래 덕분에 인기의 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에 얽힌 끈에 매여 살고 있다. 동네 꼬마부터 칠순 노인까지 부담없이 따라부르던 국민가요가 한 순간 금지곡으로 묶인 충격 탓에 적지않은 좌절을 느껴야만 했다. 1983년 7월말.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좋은 노래를 불러 감사한다”는 뜻의 감사패를 받고 한창 들떠 있을 때였다. 방송에서도 앞다투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내보냈고 鄭씨도 방송 출연 섭외를 감당못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독도 가수’ 鄭光泰는 그 날도 어김없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 나타났다. 지난해 1월 ‘독도는 우리 땅’ 레코드 취입후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방송에 깊숙이 빠져살 만큼 방송국 일은 그야말로 신바람 그자체였다. 녹화에 앞서 담당PD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던 순간 사무실 입구 게시판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인기절정이던 노래 ‘독도는 우리땅’이 금지곡 명단 맨 꼭대기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금지곡으로 묶이고 나면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도 없던 시절. 방송에서 일단 금지곡 지정이 되면 항의조차 할 수 없이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가사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누구나 부담없이 입에 올리던 노래를 갑자기 부를 수 없게 될 때정작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느끼는 좌절감이란…” 그 길로 방송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10년전 연예인이 되고 싶어 명동의 한 카페에서 시작한 자신의 연예계 생활도 그것으로 끝이 나는 줄 알았다.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과 맺어지게 된 것은 10년전인 73년 고교졸업후 명지대 입학전 명동 르시랑스 카페를 찾은데서부터 시작된다. 음악 평론가 李白天씨가 운영하던 이 카페는 가수 宋昌植 어니언스 李秀滿 蔡恩玉씨 등이 고정적으로 출연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던 곳. 아마추어 무대가 매일 마련됐는데 여기서 토크송 ‘한심이’를 불렀다. 李章熙씨의 노래 ‘겨울 이야기’를 우스꽝스런 가사로 바꿔 부른 노래였는데 李白天씨의 눈에 띄어 주1회씩 사회자로 무대에 서게 됐다. 이후 방송가에 알려지게 돼 최초의 개그프로인 TBC ‘살짜기 웃어예’에 토크송과 개그를 선보였고 78년 새로 만들어진 KBS 개그프로 ‘유머1번지’에서 본격적인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林河龍 張斗碩 金正植과 함께 포졸 옷을 입고 KBS 朴仁浩 프로듀서가곡을 쓰고 직접 만든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불렀던 것. 방송에서 인기를 끌자 대성음반 徐喜德 사장이 레코드 취입을 의뢰해 왔다. 코미디 프로에 함께 출연했던 林씨 등 4명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가 徐씨가 늦는 바람에 鄭씨 혼자 기다려 결국 鄭씨만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게 됐다. 레코드가 나오면서 이 노래는 계속 상승세를 타 전국에서 불려졌고 鄭씨는 83년 KBS TV ‘젊음의 행진’ 프로에서 독무대를 맡기까지 됐다.. 鄭씨가 금지사유를 알게 된 것은 해금이 되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비록 83년 7월말부터 그해 11월말까지 4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지의 삶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사연을 알고난뒤 허탈감까지 느껴야만 했다. 82년 일본 열도와 한국의 정계·학계를 발칵 뒤집은 일본 중고교 교과서 파동이 그 발단이었다. 84년부터 새로 사용될 교과서에서 한·일 과거사 왜곡이 문제되자 83년 6월,문제발생 1년만에 왜곡 내용을 고친다면서 한국에 시정내용을 알려와 양국간에 긴장감이 돌았다. 국내에서도 이 개선시안을 놓고 첨예한 의견대립이 일었다. 이와 맞물려 83년 8월29일 제12차 한·일 정기각료회담,9월6일 한·일 의원연맹 제11차 합동총회가 예정돼 있어 당국에서 반일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이 되자마자 鄭씨는 자연스럽게 방송에서 퇴출당했고 그 때부터 방송국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독도는 우리 땅’이 다시 불려지게 된 것은 83년 11월말쯤이었다. 느닷없이 방송국 간부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許文道 당시 문공부차관이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귀띔이었다. 용기를 내서 문공부로 許차관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許차관이 “평소 독도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격려했고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로부터 1주일뒤 각 방송매체에선 ‘독도는 우리땅’이 다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독도는 우리땅’은 그렇게 부활했다. 그해 연말 KBS 방송대상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역시 KBS 가사대상에서동상을 탔다. 96년 鄭씨는 또 한번 ‘독도는 우리 땅’과 연을 맺게 된다. 이번에는 독도 분쟁이 첨예하게 불거졌다. 1960년부터 6년동안 친구가 운영하던 샌프란시스코 한인방송인 ‘한미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국내 선후배와 레코드사들이 귀국해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을 해왔다. 방송을 중단하기가 힘들었지만 서둘러 돌아왔다. DJ DOC과 함께 옛 ‘독도는 우리 땅’ 리메이크곡을 취입했다. 반응은 별로 신통치가 않았지만 83년 금지곡 사건 때의 악몽이 어느정도 씻어진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사연들/“독도의 가치 희석” 주장도/‘대마도는 일본 땅’은 잘못/“바꿔 불러라” 항의 받기도 개그 가수 鄭光泰씨가 털어놓는 독도관련 사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뒤부터 스타가 된뒤 독도 명예군수 위촉, 느닷없는 금지곡 판정으로 인한 실망, 해금후 신인상 수상, 미국생활중 귀국 등 연쇄적으로 겪은 일들이 극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 ‘국민가요’로까지 인식되며 애창되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으로 전락한 것이나 문공부장관이 금지곡 가수를 직접 만나 해금을 약속한 것이 아이러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 크게 유행하자 이 노래에 대한 평도 갖가지였다. 팬 레터가 답지하더니 가사를 문제삼은 편지·전화공세가 이어졌다. 광복회와 향토사학자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왜 노래를 불러 독도의 가치를 희석시키냐”“역사적으로 볼 때 대마도도 우리 땅인데 왜 일본 땅이라고 하느냐” 등 강도높은 항변이 쏟아졌다. 어느 향토사학자는 서울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관련자료를 제시하며 鄭씨를 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鄭씨는 96년 귀국해 리메이크한 노래에서 “하와이는 미국 땅,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으로 바꿔 불렀다.(원래 가사는 “…/대마도는 일본 땅/…”)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현실비판적으로 불려진 ‘독도는 우리 땅’ 개사곡도 적지 않아 이 개사곡들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일본의 교과서 파동으로인한 반일감정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꼬집은 것들. “…일제 패망 이후 임자없는 땅이라고 공짜로 삼키면 정말 곤란해…한반도는 우리 땅”“꼴뚜기가 뛰면은 망둥이도 뛴다고 군국주의 역사왜곡 패망지름길 미국신경 쓰다보니 일본신경 못쓰네 조선사람 조심해”“대한민국 노동자 부지런한 노동자 조출에 잔업에 특근에 철야 장시간 노동에 기아임금 받으며 선진조국 좋아하네…”. 모두 당시 사회상과 정치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길 ▲55년 서울 출생. ▲74년 서라벌고 졸업. 명지대 무역학과 입학. 명동 르시랑스 카페에서 토크송으로 주목받기 시작. TBC TV ‘살짜기 웃어예’ 출현. ▲78년 KBS TV ‘유머1번지’ 출현. ▲82년 대성음반서‘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독도는 우리 땅 수록) 취입. ▲83년 ‘독도는 우리 땅’ 금지곡 지정·해금. KBS 신인가수상 수상. ▲84년 KBS 가사대상 동상 수상. ▲88년 무용가 김일현씨와 결혼. ▲90년 한미라디오 방송 진행맡아 도미. ▲96년 귀국.‘독도는 우리 땅’리메이크. ▲현재 댄스그룹 ‘벅’ 매니저로 활동.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4­1/보안법 문제(정직한 역사 되찾기)

    ◎보안법 상처의 흔적들/시행 50년… 멍든 인권 곳곳에/曺奉岩 등 수많은 政敵에 간첩죄 적용/사회 전반에 올가미… 한해 수백명 구속 영화 ‘레드 헌트’는 제주 4·3항쟁때 양민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지난해 9월 홍익대학교에서 열린 인권영화제와 한달 뒤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검찰은 이 영화 상영과 관련,인권영화제를 주최한 인권사랑방 대표 서준식씨를 지난해 11월 구속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반포 혐의였다. 그러나 부산영화제(조직위원장 문정수 부산시장) 상영과 관련해서는 구속된 사람이 없었다. 같은 영화 상영을 둘러싸고도 보안법 적용은 이렇게 다르다. 검찰은 당시 “서씨는 비전향 사상범으로 고의성 여부가 문제된다”고 밝혔다. 사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법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논리다. 국제사면위원회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석방노력으로 서씨는 얼마전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논란과 시비는 끊이질 않았다. 보안법과 관련,서준식씨의 경우처럼 세인의 주목속에 논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조용히 처리되는 사건이 훨씬 많았다. 올해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50주년을 맞지만 보안법 역사의 뒷면에는 대한민국 인권의 상처투성이 흔적들이 가득하다. 우리 사회에서 보안법을 비켜갈 수 있는 분야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보적인 정치인,지식인,학생,노동자 등이 보안법의 올가미에 걸려 죽기도 하고 감옥에도 갔다. 진보적 정치운동과 관련, 보안법에 의한 최대의 피해사례로는 조봉암과 진보당사건 및 2차 인민혁명당 사건,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을 들 수 있다. 1958년 1월11일 밤 경찰은 조봉암 위원장 등 진보당 간부 10여명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야당 당수 조봉암은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다음해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심 재판장인 유병진 판사는 이승만 정권의 간첩조작에 저항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유병진 판사는 우익세력들에 의해 용공판사로 몰렸고 2년후 법복을 벗어야 했다. 2차 인혁당사건은 1974년 전국적인 반(反)박정희 투쟁을 준비하던 민청학련을 용공으로 몰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던 배후조직을 조작한 사례로 비판받고 있다. 10년전 1차 인혁당 사건에서 이미 경미한 혐의로 판명됐던 인혁당이 10년 뒤 재건되어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것. 그러나 2차 인혁당 사건은 1차 때보다 더 증거가 없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75년 대법원에서 상고는 기각됐고,24시간도 못되어 8명이 처형됐다. 보안법과 관련,현대언론사에서 최대의 필화사건으로 꼽히는 것은 1961년의 ‘민족일보’ 사건이다. 진보적 혁신 언론을 표방한 민족일보는 용공언론으로 몰려 조용수 발행인의 사형집행과 함께 폐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공소장에 용공으로 단정돼 예시된 것들은 ‘통일에의 전진을 위하여’‘남북교역 시기는 성숙하였다’ 등의 제목하에 실린 기사들이다. 보안법 위반 사건 가운데 한가닥의 온정도,최소한의 법적 기본권과 인간의 존엄성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게 바로 간첩사건이다. 공안기관은 월·납북자의 친·인척,정보사법 전과자,조총련의 연고가족,납북 귀환어부 등의 신상 정보를 모두 입력해 놓고 있다. 이러한 신상 정보는 언제라도 ‘간첩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자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작 의혹이 적지않았다. 78년 귀국중 간첩혐의로 체포돼 20년째 갇혀 있는 조상록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소조항/반국가단체 구성·가입죄­노동·학생단체 등 민주화 운동 조직 파괴/찬양·고무죄­개념 모호해 자의적 해석 가능… 남용 심각/불고지죄­‘침묵의 자유’ 침해… 반인륜적 행위 강요 치안유지법,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국방보안법,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불온문서임시취체법…. 일제가 군사파시즘의 길을 걸으면서 국내외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했던 대표적인 법률들이다. 이중 치안유지법은 일본 및 식민지의 사회주의자와 반체제주의자,독립운동가 등을 처벌한 대표적 악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탄생(1948년 12월1일) 과정부터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빼닮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형법의 특별법인 이 법이 형법 제정(1953년 9월18일)보다도 빨리 만들어졌다는 것은 당시 반대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 법이 얼마나필요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국가보안법은 제2장의 제3∼10조가 범죄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처벌을 정하고 있는 핵심적인 조항들이다. 이중에서도 제3조·7조·10조가 가장 독소적이고 남용될 소지가 많다고 비판받는 조항들이다. 제3조는 반국가단체 구성 및 가입,가입권유 등에 대한 처벌로 제7조 3항의 이적단체 구성·가입죄와 함께 민주화운동 조직을 파괴하는 주요한 조항으로 지목돼 왔다. 형벌도 반국가단체 수괴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혹하다. 그러나 막상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힌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단순한 반정부적 노동·학생운동 조직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운동조직인 전민학련과 민청학련,기독교 청소년들의 신앙공동체인 한울회 등이 대표적 사례다. 제7조는 반공법 제4조를 그대로 승계한 것으로 찬양·고무 및 이적단체 구성과 가입,이적표현물 제작·반포·판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심각하게 남용돼온 조항으로 일반 형법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보안법의 ‘상징’과도 같다.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그 문언상 위헌이나 한정적 해석하에 합헌”이라는 한정 합헌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먼저 찬양·고무·동조라는 개념이 너무 애매모호해 지극히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집을 철거하려는 당국자에게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했다가 구속되고(1978년), “북한이 남한보다 중공업이 더 발달되어 있다”고 했다가 이 조항에 걸려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1976년). 10조는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불고지죄 조항이다. 모든 보안법 위반자에 대한 불고지를 처벌하다가,91년 개정때 3조·4조·5조의 죄에 한해 성립하도록 범위를 축소했다. 또 친족관계일 때는 죄를 감경(減輕)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에도 불구하고 불고지죄는 ‘침묵의 자유’를 침해하고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직업윤리를 저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반사회적인 행태를 여전히 강요하고 있다. 수년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에서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가 인터뷰중 알게된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구속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김동식 간첩사건과 관련,불고지죄 혐의로 구속됐다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씨는 “설사 보안법 위반자라는 것을 알아도 친구나 친척을 당국에 신고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라며 불고지죄의 반인륜성을 비판했다. ◎北 형법은 가혹한 反인권적 악법/유추해석 인정·중벌위주 형벌체계 적용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것이 북한의 반국가사범에 대한 가혹한 형법체계다. 보안법보다 훨씬 가혹한 법조항들이 북한내 통일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안법만을 폐지하면 ‘남쪽만의 무장해제’가 아니냐는 시각이다. 북한 형법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의 기본 원칙인 법치주의 원리를 무시한 가장 비민주적인 악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북한 형법은 유추해석을 인정해 죄형법정주의를 무시하고 있다. 제10조에 “형사법에 동일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이 없을 때는 종류와 위험성으로 보아 가장 비슷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에 따라 형벌을 정한다”고 돼 있어,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범죄인으로 규정,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소시효에 대한 명문규정도 없다. 제42조는 “반국가범죄와 고의적 살인죄에 대해서는 기간에 관계없이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로 규정,범인은 죽을 때까지 형사소추를 받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방하거나 그들에게 저항하는 행위는 반국가범죄(제44∼55조)로 규정,사형이나 전재산 몰수형으로 처벌하게 돼 있다. 또한 은닉범,불신고범,방임범의 처벌규정을 두고 있고,반국가범죄의 경우 이를 예외없이 적용하고 있다. 형벌의 종류를 규정하고 있는 제21조에는 반국가범죄의 경우 ‘○○년 이상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돼 있어 우리법의 “○○년 이하의 형에 처한다”는 형식에 비해 중벌위주의 형벌체계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한없는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반인권적 형벌체계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앰네스티와 보안법/“국제인권기준에 맞게 개정해야”/매년 인권보고서 통해 개폐 촉구 “양심수를 양산해온 국가보안법은 국제인권법에 크게 미달하는 수준입니다. 이는 국제인권기준에맞도록 개정돼야 합니다”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로스 대니얼스 집행위원은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테러단체를 조직하거나 폭력혁명을 공개적으로 추구하지 않은 이상 구속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앰네스티의 인권보고서를 통해 “보안법 위반으로 매년 체포되는 수백명 중 상당수가 폭력이 아닌 단지 ‘고무찬양’과 ‘이적행위’ 등으로 구속됐다”고 지적했다. 앰네스티는 매년 인권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국가보안법 개폐를 주장해왔다. 또한 주요 보안법 위반 사건마다 항의성명과 함께 피해자 석방을 촉구했다. 지난 96년에는 보안법 개정과 안기부의 권한 남용 방지 장치 마련을 촉구하는 편지를 우리나라 정당 대표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정보화는 국가경쟁력 원천/高鍾文(기고)

    브라질이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프랑스에 3대0으로 패한 후,한 선수가 눈물을 머금으면서 “개인기,조직력은 우리도 갖췄다.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머리를 써서하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자성하며 축구의 정보화를 외쳤다고 한다.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정보화는 21세기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요소다.金大中 대통령은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2002년까지 2,500만명의 정보화 교육을 실시하여 5년안에 현재 세계 22위인 우리나라의 정보화 수준을 세계 10위권으로 진입시켜 지식정보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이는 성공적인 21세기 지식정보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대단히 바람직한 정책이다. 정보화 투자에서 우리는 지난 80년대 미국과 일본의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 지난 80년대 일본이 미국의 빅3(GM,포드,크라이슬러)를 누르고 컬럼비아영화사,록펠러빌딩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끝났다’ ‘일본인들이 미국의 영혼까지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정보화 투자를 연평균 4.9%씩 늘렸으며,심지어는 경기가 최저점이던 91년애도 3.4%의 투자를 증가시켜 ‘회수 가능한 투자’로 인식했다.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불황기에 이르자 정보화 투자를 대폭 감소시켜 92년의 정보화 투자 증가율은 마이너스 4.5%에 달했다. 90년대에 접어들자 미국은 정보화 투자에 힘입어 10년전에 비해 2배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세계1위의 국가경쟁력을 되찾았다(스위스 IMD).반면,현재 일본의 생산성은 미국을 100으로 할 때 83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저성장,불황기의 흐름에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분야에 관한 한 미국에 10년 이상 뒤지고 있다는 한탄의 소리가 일본 식자층에서 나오고 있다. ○美­日 사례 좋은 본보기 한국은 자본도,자원도 별로 없는 나라다.‘인적자본’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난 30여년간의 압축고성장도 오직 이를 바탕으로 이뤄졌다.다가오는 21세기는 지식집약적 산업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연구에 의하면 세계정보통신시장에서 한국의 비중은 현재의 8.0%에서 2001년에는 9.9%로,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의 3.8%에서 2001년에는 4,6%로,경제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의 13.4%에서 2001년에는 19.4%로 증가될 것이다. 기술투자에 앞서,더욱 더 중요한 것은 정보화를 이루기 위한 인적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다.교육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는 미국 25%,세계적으로는 0.8%∼25%까지로 밝혀졌다.우리나라도 약21%로 나타났다.교육의 경제성장에 대한 중요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인적자본 최우선 투자를 그러나 IMF이후 민간교육기관의 사정은 매우 심각하다.약 60%이상의 교육시설을 축소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시점에서 공공교육기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국가정책의 방향은 ‘21세기 지식정보사회’를 당당하게 맞이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포석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일본형을 닮아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필연적으로 다가올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아니면 미국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미국의 미래 운명은 정보통신 기반 구축에 달려 있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말을 깊히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장기적 비전을 가진 정책적 안목이 아쉽다.
  • 국고 살찌운 조달청 모범공무원·부서/잠자던 外貨 7억 찾았다

    ◎외자1과 安秉宣 서기관 조달청이 국민재산 400억원을 찾아서 국고로 환수해 칭찬에 인색한 감사원으로부터 ‘극진한 칭찬’을 받았다. 특히 구매국 외자1과의 安秉宣 서기관(49)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조달청 소유 휴면계좌를 뒤져 7억6천만원 어치의 외화를 찾아내 국고에 입금,적자재정과 달러난에 시달리는 정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安서기관은 71년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외국 물자를 구매하는 업무를 맡아온 조달통. 잠시 다른 부서 근무를 거쳐 지난해 4월 외자1과로 돌아온 安서기관은 연말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오래전의 기억에서 ‘외화 거주자 계정’이란 것을 생각해 냈다. 조달청이 각 기관으로부터 요청받은 자재를 외국에서 구입하다 보면 신용장을 개설하고 달러와 원화를 바꿔가며 물품대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자투리 돈이 남기 마련이다. 지금은 개인도 외화를 소유할 수 있지만 10년전만 해도 개인의 외화 소유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 당시 발생했던 자투리 잔액은 그대로 은행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安서기관은12월16일부터 외환은행 등 12개 금융기관에 조달청 명의의 예금 잔액이 있는가를 확인했다. 지난 70년 2월부터 87년 8월까지 외화예금을 한 뒤 중단된 휴면예금이 228건이나 됐다. 미화가 44만3,483 달러,일본화가 143만9,373엔,독일화가 1,953 마르크,스위스화가 9,137 프랑 등이었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니 무려 7억5,678만2,790원이었다. 어떤 통장에는 단 25센트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安서기관이 발견한 외화는 모두 조달특별회계 세입으로 입금됐음은 물론이다. ◎물자비축국 물자관리과/기관보유 미술품 382억 확인 물자비축국의 물자관리과(과장 申三澈)는 지난해 5월부터 조금씩 경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자 ‘물자 사랑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물자 사랑 운동의 하나로 중앙 행정기관을 상대로 소장 미술품도 조사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정부 각 기관의 청사에 가보면 좋은 그림들이 많지만,관리 실태가 엉망이란 지적을 들어왔던 것이다. 각 기관이 기증받은 그림을 기관장 등 개인이 소유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1년 정도 각 기관의 구석구석을 조사하니 3만135점의 미술품이 발견됐다. 그림값을 따지면 382억2,000만원에 이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이번에 조사된 대부분의 그림이 85년 이후의 작품이었다. 그전에 정부가 소유했다가 사라진 그림은 문서가 남아있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물자관리과는 지난해 11월14일 정부미술품보관관리규정도 만들었다. 정부가 소유한 모든 그림은 물론 그림에 찍힌 낙관까지도 별도로 촬영하고,전시 공간이 변경될 때마다 일일이 보고하도록 했다. 물자관리과의 이같은 노력으로 지난달 9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부가 소장한 우수 미술품 전시회가 열렸던 것이다. 물자관리과는 지난 2월 부산과 경인 지역에 정부물품 재활용 센터를 설치한 뒤 4,234점을 수집,판매해 4,337만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 공기업 민영화­직원 표정

    ◎고용승계 잘 됐으면/“올것이 왔을뿐…” 비교적 반응 담담/“구조조정 불가피”… 인원감축 촉각/포철 “경제난 극복위한 결정” 환영 3일 11개 공기업의 민영화 계획이 발표되자 해당 기업 직원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민영화가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데는 대부분 공감했으나 실업이 걱정이었다. 고용조정을 통해 직장을 떠날 수 밖에 없다면 퇴출이나 다름없다는 반응도 있었다. 1차 민영화 기업인 포항제철 직원들은 올 것이 왔다며 담담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구조조정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광양제철소 제강부 金成光 대리(33)는 “새 경영진이 선임되면 더 이상의 구조조정은 없다고 했던 약속이 지켜질 지 걱정”이라고 말했다.李慶雨 노조위원장(44)은 “민영화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데는 많은 직원들이 공감한다”면서 “그러나 이미 10% 임금삭감과 구조조정을 감수한 직원들이 다시 고용조정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중공업 창원공장 직원들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삼삼오오 모여 고용 문제를 걱정했다. 趙景濟 총무과장(42)은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겠지만 고용승계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부인 閔모씨(41)는 “남편이 20년 동안 근무한 직장을 잃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종합화학 기획부 직원은 “그동안 10% 정도 인원을 줄였는데 30%를 더 줄인다고 하니 걱정이 앞설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충남 연기군 국정교과서 직원들은 민영화에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였다. 회사 관계자는 “10년전 인구 분산 명목으로 지방으로 회사를 옮길 때 민영화를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경쟁력을 잃은 상태에서 민영화한다는 것은 문을 닫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차 민영화 대상인 성남시 분당 한국가스공사 직원들은 90년대 초부터 민영화가 꾸준히 거론됐기 때문인지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인원 감축이 따르지 않을까 우려했다. 직원들은 “과거 유공이 민영화 3년만에 직원들을 대부분 교체했듯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한국통신 본사 직원 300여명은“통신산업의 중요성에 비춰 정부가 완전히 손을 떼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국민기업화할 가능성이 커 두려움이 덜하다”고 전했다. 조직관리팀 金모과장(40)은 “영국의 브리티시 텔레콤처럼 정부가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 개인이 회사를 좌지우지하지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 대덕구 한국담배인삼공사 본사 직원 400여명은 민영화 이전에 7,000여명 중 2,000명 이상을 감축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끼리끼리 모여 장래를 걱정했다. 특히 외국기업에 매각될 때는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봤다. 경영기획부 朴光一씨(31)는 “국민주로 지분을 분산시키는 등 개인이 경영을 전횡하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다가온 금강산­鄭 회장 문답

    ◎“9월 방북 김정일 면담”/소떼 이외 추가 농업 지원계획 없어/고향에서 보고싶은 사람 모두 만나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23일 7박8일간의 북한방문을 마치고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내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평화의 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르면 올 가을에는 금강산 관광을 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鄭명예회장은 기자회견을 하면서 “金正日 장군께서……”라는 거북스런 말도 했다.일문일답을 간추린다. ­방북(訪北)동안 누구를 만났나.성과는 어떤 게 있나. ▲金正日 총비서가 내세운 대표자와 만나 모든 합의를 하고 계약서에 서명했다.이르면 올 가을부터 (정부의)승인을 받아 매일 1,000명 이상 금강산 관광이 가능할 것이다. ­현대자동차 조립공장 건립 문제도 논의했나. ▲그렇다.북쪽 관계자들과 앞으로 실무협의를 해야 한다. ­金正日을 만났나. ▲(金正日이)이번에는 너무 바빠서 못 만났다.9월에 다시 방북해 만나기로했다. ­소 떼 지원 외에 추가 농업지원계획이 있나. ▲없다. ­10년전방북 때와 달라진 게 무엇인가. ▲그 때보다 발전한 것을 느꼈다. ­고향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났다. ­북한 잠수정 발견소식을 들었나. ▲여기 와 신문을 보고 알았다. ­이번 방북의 최대성과는. ▲자주 만나면 통일이 될 것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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