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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러 대신 美 견제역 할까/江澤民 22일부터 러·日 순방

    ◎다원적 국제질서 필요성 강조… 러시아와 공감대 강화/첫 訪日 서먹한 과거 청산… ‘중국붐’으로 우정 다지기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이웃 나들이가 이어진다. 22일 러시아로 떠났다가 25일부터는 6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찾는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돌아온 직후에 이어지는 해외 순방이다. 덕담이나 주고 받기 십상인 정상회담. 내막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장쩌민 외교’의 핵심이 감지된다. 차제에 이웃들과 유대를 다져 세계 맹주자리를 굳히려는 미국을 나름대로 견제하겠다는 속내가 엿보인다. 옛 소련이 무너지면서 미국을 견제하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다. 소련붕괴 이후 6번째 회담을 갖는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이번에 ‘정치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다원적 국제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전보다 더욱 미국 견제의 공감대를 두텁게 하고 군사기술 등 각종협력 강화의 다짐이 발표될 전망이다. 두나라는 코소보 사태나 이라크 사태와 관련,미국의 정책을 함께 견제해 왔다. 일본 방문에선 미국에 밀착,중국견제를 강화하고 있는 ‘의심많은 이웃’의 경계늦추기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이 96년 미국과 함께 중국을 겨냥 한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마련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벌어져 왔다. 장쩌민의 방문은 국가주석으로서는 첫번째고 올해는 중·일 평화우호조약체결 20주년까지 겹쳐 우호분위기를 확산시키는데는 적기. 장 주석은 6일이나 머물며 일본에서 ‘중국붐’을 일으켜 보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비위만 맞추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준다고 했지만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1차대전때 중국에 굴욕적인 외교를 강요했던 오쿠마 시게노부 당시 총리가 세운 대학이기 때문이었다. 타이완 문제,역사 인식문제 등 껄끄러운 현안은 제기하되 쟁점화는 시키지 않겠다는 게 중국의 계산이다. 중화(中華)의 자부심을 애써 감춘채 떠나는 장쩌민 국가주석의 외교 행로가 얼마나 빛을 발할 수 있을 지는 좀더 지켜 볼 일이다.
  • 포르투갈 첫 노벨문학상 작가 사라마구 작품세계

    ◎우화형식 빌려 현실 폭로/신문기자 출신… 시·희곡 등 여러 장르 섭렵/‘돌 뗏목’ ‘밤’ 등 대표작… 소외계층 입장 대변/단락 없애고 쉼표·마침표만 사용 문체 독특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인 주세 사라마구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사이의 교차로에 위치한 작가로,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의 살아있는 교과서 같은 작품을 쓰고 있다.그의 작품은 우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는 것이 특징.출세작인 ‘돌뗏목’‘발타사르와 블리문다’‘리카르도 레이스가 죽던 해’‘예수 그리스도 찬가’ 등은 바로 그런 유의 작품들이다.사라마구는 1947년 ‘죄악의 땅’으로 문단에 나왔다.그후 20년 가까이 침묵을 지키다 66년 ‘가능한 시’라는 시집을 내며 문학활동을 재개했다.문학을 다시 시작하기 전 사라마구는 번역자,신문기자,자유기고가 등 여러 직업들을 거쳤다.그때 ‘세아라 노바’에 문학비평을 쓰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그러나 1966년 이후 그는 시 이외에 수필,희곡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쏟아냈다.그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80년 ‘바닥에서 일어서서’란 소설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사라마구는 “80년대 초 포르투갈 문학은 시나 다른 장르의 문학이 아니라 소설이 주를 이루는 문학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실제 80년대로 접어들자 포르투갈 문학계에서는 수많은 소설이 발표됐다.그 역시 문학성 높은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포르투갈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인정받는 작가가 됐다. 그의 문학세계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추구하는 혁신적 문학정신이다.그는 문장부호로서 단지 쉼표와 마침표만 사용할뿐 아니라 직접·간접화법을 구분하지도 않는다.때문에 그의 텍스트는 일반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독자들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외국어대 송필환 교수(포르투칼어과)는 “사라마구 문체의 특징은 한마디로 ‘언어의 부주의성’ 즉 부주의한 일상적 대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80년대 사라마구는 주로 포르투갈의 소시민이나 소외계층에 관한 소설을 썼다.이를 통해 그는 유럽과 이베리아반도에 예속돼 있는 포르투갈의 모순을 일깨워준다. 그의 소설 ‘돌뗏목’은 그 좋은 예다. 이베리아 반도가 초자연적인 이유로 인해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대서양으로 떠내려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사라마구는 여기서 포르투갈이 EC(유럽공동체)에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이는 포르투갈 정부당국과 정치인들 특히 권력정치의 주역들에 대한 문제제기로,일종의 서사적 문학제안이라 할만하다. 사라마구의 작품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돼 있다.그는 또한 숱한 문학상을 받았다.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79년 포르투갈 비평가협회가 뽑은 올해의 희곡상을 받은 ‘밤’,1980년 리스본시 문학상을 받은 ‘바닥에서 일어서서’,1982년 포르투갈 펜클럽상과 리스본시 문학상을 받은 ‘수도원 비망록’,등을 들 수 있다.최근에 발표한 소설로는 ‘모든 이름들’(97년)이 있다. ◎주세 사라마구 연보 △22년 리스본 근교 아지냐가 마을에서 출생 △47년 ‘죄악의 땅’이란 소설로 등단 △66년 시집 ‘가능한 시’ △70년 시집 ‘아마도 행복인가’ △75년 시집 ‘1993년’ △77년 ‘회화와 서예에 관한 매뉴얼’ △79년 희곡 ‘밤’ △80년 희곡 ‘이 책으로 무엇을 할까요’·소설 ‘바닥에서 일어서서’ △82년 ‘발타사르와 블리문다’‘수도원 비망록’ △84년 ‘리카르토 레이스가 죽던 해’ △86년 ‘돌뗏목’ △87년 희곡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두번째 삶’ △89년 ‘리스본 포위의 역사’ △91년 ‘예수그리스도 복음’ △95년 ‘무지에 관한 에세이’ ◎나라별 역대 수상자/프랑스 12명으로 최다/미국·영국·스웨덴 등 순 아시아권 작가 4명뿐 1901년 프랑스 시인 쉴리 프뤼돔이 첫 수상한 이래 98년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까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은 모두 95명.1차대전과 2차대전중 모두 일곱해를 제외하고는 수상자를 냈으며,2인 공동수상이 네번 있었다. 가장 많은 수상자를 낸 국가는 프랑스로 12명이고,다음은 미국이 10명,영국과 스웨덴이 7명,이탈리아와 독일이 6명씩을 차지해 이른바 노벨문학상 대국으로 꼽히고 있다. 다음으로는 스페인이 5명,폴란드·아일랜드·구소련이 4명,덴마크·노르웨이가 3명,일본·그리스·칠레·스위스 등이 2명을 차지했다.그밖에 1명씩 배출한 국가는 16개국으로 모두 32개국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2명(94년 오에 겐자부로,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인도 1명(13년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이스라엘 1명(66년 요세프 아그논)을 배출했을 뿐 여전히 노벨문학상 불모지대로 남아 있다. 한편 이 상은 장 폴 사르트르(64년),윈스턴 처칠(53년),버트런트 러셀(50년),앙리 베르그송(27년)과 같은 비문학인에게도 수여된 바 있으나 70년대이후 들어서는 순수 문학인들로 국한되고 있다.
  • 독일의 격동기 바이마르 사회상/판화로 版찍듯이

    ◎9월30일까지 워커힐미술관 ‘독일 바이마르시대의 판화전’이 9월30일까지 서울 광장동 워커힐미술관(450­4666)에서 열린다. 이 전시회에는 1920년대 신즉물주의의 거장 게오르게 그로츠,케테 콜비츠,오코 딕스 등 작가 24명의 판화와 드로잉 146점이 선보인다. 바이마르공화국시대(1919∼1933)는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격변으로 극단적인 사상과 주의들이 대립과 반목을 보였던 시기. 예술가들은 갈등과 모순의 사회적 환경속에서 작품을 통해 독일 바이마르시대의 사회상을 고발했다. 펜과 연필,철침을 이용해 긋고 찌르고 파내면서 사회를 거칠게 공격했다. 특히 판화는 사회비판적 주제를 뚜렷히 표현해냈다. 당시 신즉물주의를 표방한 작품은 두가지의 대조적 경향을 띠었는데 1차대전후에 몰아친 극심한 경제불황과 고도의 실업률을 소재로 한 사회비판적 내용과 전원풍경같이 현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들은 이처럼 평화스러운 풍경을 통해 낭만주의적 이상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 국제형사재판소의 창설(사설)

    인류역사상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대량학살이나 전쟁범죄를 단죄할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창설될 길이 열렸다는 반가운 소식이다.지난주말 120개국의 찬성으로 로마에서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 창설을 위한 유엔협약은 인도주의의 중대한 진전이자 인류평화실현을 위한 또 하나의 위대한 발걸음으로 환영할 일이다.우리 정부가 이 협약에 찬성하고 서명을 검토키로 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앞으로 국가 단위로는 처벌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대량학살이나 강간·고문·어린이 강제징집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른 책임자들을 국제사회의 이름으로 기소하고 재판하게 된다.과거는 물론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종족 또는 민족간의 반목이나 종교·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크고 작은 분쟁들이 계속되고 있다.‘킬링필드’라는 악명으로 잘 알려진 캄보디아내전을 비롯하여 알제리 르완다 보스니아사태가 그랬고 세르비아의 코소보사태,인도·파키스탄간의 카슈미르분쟁,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의 충돌등이 지금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처참한 고통을 주고 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내전이나 국지적인 분쟁은 더욱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유엔이 평화유지군을 보내는 정도가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수단은 유엔이 평화유지군을 보내는 정도가 고작인 형편이다.국제형사재판소가 상설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파괴하는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이다. 이러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설치되기까지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어려운 장애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는 2000년까지 찬성국들의 서명을 받아야하며 60개국의 비준을 거쳐야 협약이 발효된다.재정문제,재판관할권문제,유엔과의 관계등도 과제다. 미국의 반대를 어떻게 무마하는냐도 큰 과제이다.냉전종식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사실상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세계 여러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군이 정치적 목적으로 기소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ICC의 설치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미국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ICC가 자칫 1차대전후의 국제연합과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비관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어려운 과제들이 많다하더라도 국제형사재판소는 반드시 창설돼야 한다.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인류의 바람이기 때문이다.협약에 대한 일부 이해충돌은 세계평화와 인도주의의 실현이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적절한 조정이 가능할 것이다.반인륜적 범죄의 종식을 위해 국제형사재판소가 꼭 설립돼 제 역할을 다 하기를 기대한다.
  • EU의장국 오스트리아의 감회/潘基文 주오스트리아 대사(특별기고)

    요즘 빈은 10여년전 우리가 88올림픽을 치르던 시절의 서울처럼 분주하고 흥분돼있다.음악제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행사가 있어서가 아니다.7월부터 올해말까지 6개월동안 오스트리아가 유럽연합(EU)의 의장국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인구 800만의 작은 나라인 오스트리아는 95년에 EU의 일원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의장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 기간동안 EU 15개국 수반이 참석하는 정상회의만도 두차례 주최할뿐 아니라 40여회의 각료회의와 1,500여회의 실무급 회의등을 개최한다.이를 통해 오스트리아는 의장국으로서 지난 58년에 처음 시작된 유럽통합(European Integration)의 과정을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번 의장국 수임을 1차대전 발발전까지 근세 200여년간 국제질서의 기본틀을 수립한 1815년의 빈회의에까지 비교할 정도로 이번 의장국역할에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통합유럽 운명 조정역 과거 유럽대륙의 큰집으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1차대전후 산산조각이 나면서 군소국가로 다시 탄생한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등장으로 잠시 독일에 병합됨으로써 다시 2차 대전의 패전국이 된 불운한 운명을 겪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런 오스트리아가 냉전종식후 통합유럽의 운명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됐으니 옛영광을 되새기는 이들의 감회를 이해할 만하다. 현재 유럽공동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만큼 급속도로 통합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4월부터 ‘쉥겐협정’을 통해 대부분 EU국가간 국경통제가 폐기됨으로써 실제로 국경선이 없어진 셈이 됐다.또 경제분야에서는 경제주권을 포기할 정도로 각국의 상이한 경제정책과 제도를 조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자국 주권의 상징인 마르크화 프랑화 등을 버리고 공통의 통화를 도입하고 있다.큰 흐름으로 볼때는 유럽 국가간에 각 경제 사회부문간 또는 집단간 이익에 기초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국가주권의 벽까지 허물어 가면서 글로벌시대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구조조정을 펴가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구조조정 추진 그런데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떤가.6·25이후 최대 국난이라고 하는 IMF시대를 맞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엄중한 현실임에도 불구,각 기관 및 경제부문간 이기주의와 지역간 대립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필자가 주오스트리아대사로 부임한 이후 두달여동안 관찰한 바로는 유럽중에서도 오스트리아가 국제정세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지리적 이점을 잘 살려 경제적 확장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큰 역할을 맡기 이해 전국민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이다.소국(小國)에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있으면서도 서구와 동구의 가교지점에 위치해있는 오스트리아가 정치 경제 안보면에서 국익증진을 위해 펼쳐가는 활동을 보면서 우리도 배울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 모두가 유럽통합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당면한 경제구조개혁과 각 부문의 개혁 요구는 더이상 우리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며 더이상 늦출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을 국민들이 느껴야 할 것이다.
  • 히틀러 평전/안인희씨,페스트가 쓴 평전 번역 출간

    ◎히틀러 그는 누구인가 히틀러 평전의 결정판으로 꼽히는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전2권,푸른숲)이 독문학자 안인희씨의 번역으로 나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 마이너’지 발행인을 지낸 지은이는 이 책에서 한 인물의 전기를 넘어 그 시대의 역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히틀러(1889∼1945)는 성(姓)도 불확실한 보잘것 없는 집안 출신이다. 그의 56년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30년 동안 뚜렷한 삶의 목적 없이 방황하던 시기와,그 이후 정계에 들어가 감전된 듯 격렬하게 활동한 시기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돋보인다. 히틀러는 가장 먼저 선전효과를 인식한 정치가로,자신의 연출 재능을 이용해 ‘예술가 정치가’가 되고자 했다. 그는 내적인 동류의식을 느꼈던 바그너의 서사시적인 오페라의 효과를 모방,국가적 이벤트를 기획했다. 특히 제3제국의 거대한 제례의식들은 그의 탁월한 연출능력을 보여준다. 히틀러는 합리적인 계산과 대중심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특별한 연설양식을 개발했다. 듣는 이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최면효과를 일으키는 그의 연설의 힘은 ‘치정살인 같은 연설’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 책은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데도 적잖은 지면을 내준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을 빼고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채식주의에 금욕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그가 사랑한 여인은 이복누이의 딸인 어린 조카딸 겔리 라우발. 에바 브라운과는 죽기 직전에 결혼식을 올리기는 했지만 평범한 관계였다. 히틀러는 단순하고 우직한 하류계층 사람들을 주변에 두기 좋아했으며,기념 동상의 모습으로 자신을 양식화했다. 또한 자신에 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과거의 흔적들을 지웠다. 히틀러의 전기는 한 개인의 삶의 역사로만 씌어질 수 없다. 그것은 20세기 전반부 유럽사,부분적으로는 세계사의 가장 큰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야사(野史)보다는 정사(正史)를 주로 다뤘다. 이 책은 이전의 히틀러 전기들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른 관점을 보여 준다. 히틀러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 시대의 요청을 구현한 인물이며,권력만을 추구한 공허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집요하게 자신의 이념을 추구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히틀러 이념의 핵심은 반유대주의와 생존공간 정책,즉 게르만족을 위한 세계제국 건설 정책으로 요약된다.
  • 애낳다 죽는 경우는 지금도 있다(박갑천 칼럼)

    청(淸)나라때 유희주인(遊戱主人)이 썼다는 (笑林廣記)에 이런 우스개가 있다.애를 낳으면서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아내가 곁에 있는 남편에게 내뱉는다. “이 원수야,나죽겠어.인젠 당신 싫어.애는 필요없단 말야”.계집애를 낳고 이름을 지어주게 됐을때 아내는 눈웃음으로 숙설거린다.“얘이름을 초제(招弟)라 해요”.‘초제’라니.사내동생 보자는 뜻 아닌가. 우스개기는 해도 이것이 여성의 출산과 부부관계.조물주가 그렇게 마련해놓은 것이리라.어쨌거나 출산의 고통은 세상어머니 누구고 겪는다.그를 두고 은 그 은혜 잊지말라고 세상자식들에게 가르친다.“…잉태하여 열달이 지나니 해산의 어려움이 다가오네.그 두려움 어찌 다 기억하리.…슬픔 머금고 친족에게 하는말은 오직 죽지나 않을까 두렵다는 것이네.…자애로운 어머니께서 그대를 낳으신 날 오장이 열리고 벌어졌네.몸과 마음이 까무러쳤고 피는 흘러 양을 도살한것과도 같았네.…” 이런 아픔속에서도 순산만 한다면야 오죽 좋으랴.하건만 지난날에는 산모만 혹은산모·태아 함께 죽는일이 어디 한둘이던가.그랬기에 우리 옛어머니들은 아기낳으러 산실로 저적거리고 들어서면서 벗어놓은 신발 다시 신을수있을까하는 비감에 젖어들었다.왕실에서도 조선 단종(端宗)어머니(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죽었으니 하물며 민간에서 심봉사마누라가 沈淸을 낳고 죽은일이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가슴아픈 여운을 긋는 작품이 헤밍웨이의 아닌가 한다.소설로 영화로 세계인의 마음을 슬프게한 비련 아닌가.세계1차대전때 이탈리아 동북부전선에서 전상자 운반대의 중위로 근무하는 미국인 프레더릭 헨리.그는 어느날 영국인 종군간호사 캐서린 버클리를 소개받는다.열렬한 사랑끝에 캐서린은 임신하고 로잔의 병원에서 난산으로 제왕절개수술을 받았으나 산모와 아기가 함께 죽고만다. 얼마전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바에 따를때 애낳다가 죽는 여성이 전세계적으로 하루 1천600명 꼴이라고 한다.과학 난만한 이시대에도 의료혜택의 사각지대 많은 아프리카쪽에서는 출생아 10만명에 1천명꼴이라는 높은 사망률을보인다.이에비해 북유럽은 12명이고 우리나라는 20명(95·96평균)이다.지지난해 출산중의 자부를 잃고 그 손자를 키우고있는 부산 친구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 우드로 윌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3)

    ◎‘민족자결주의’ 제창 국제평화 기본틀 다져/독점기업·세제 등 개혁… 노동자보호 앞장/‘이상주의자’ 평가속 20년 노벨평화상 수상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민족자결주의로 한국민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28대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른바 ‘버지니아왕조’,즉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 8명중 마지막 대통령 이다. 프린스톤대 총장을 지낸 학자 출신의 이상주의자로 알려진 윌슨 대통령은 1차대전의 와중에서 미국익의 성실한 수호자역을 맡아 국제정치의 무게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대통령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명실공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는 온화한 외적 분위기와는 달리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의 생가가 있는 스톤튼은 애팔래치아산맥 동부의 빼어난 절경인 셰난도계곡 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윌슨의 도시로 유명하다.이 작은 도시에서는 도시 설립 250주년을 기념,지난해 9월부터 올 1월말까지 5개월 동안 생가에서 ‘스톤튼의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가졌다. ‘윌슨시대의 도시(1855­1912)’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회에는 윌슨이 이곳 장로교회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자라고 대통령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났던 때까지,사진과 각종 유품 등 당시의 생활상을 상세히 진열해 윌슨을 키워낸 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잘 살펴볼수 있게 했다. ○한국독립 운동에 침묵 이곳의 윌슨 사적지에는 그의 생가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새로 지은 박물관과 부친 조셉이 시무하던 교회,설립한 대학 등이 시가지 곳곳에 그대로서 있다.우드로 윌슨 재단에 의해 사적지 내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윌슨의 존스 합킨스대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낸 ‘의회 정부론’를 비롯,‘민주주의 국가론’‘분열과 통합론’‘조지 워싱턴’‘미국 민중사’ 등 그의 명저들을 비롯,1차대전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프린스톤 총장에 이어 뉴저지 주지사를 역임했던 윌슨 대통령은 총장 당시 리승만 대통령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써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그러나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수반으로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리승만의 거듭된 주장에 그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한국민에게는 섭섭한 감정을 남기고 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내 일기 시작한 혁신주의운동은 정당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윌슨에 의해서도 계승됐다.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사회적 침체와 함께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일소하여 미국을 진정한 민주사회로 개혁하자는 이 운동의 가장 큰 목표는 당시 모든 폐해의 근원이 되고 있던 국내의 독점기업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윌슨이 내세운 정강은 바로 이같은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기업의 독점을 와해시켜 시장원리에 따른 자유경쟁을 부활시키자는 이른바 ‘신자유(New freedom)’였다.‘신자유’는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재선을 꾀하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대중을 독점기업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개개인을 모든 형태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 개혁주의자들을 전면에 포진시켰다.대표적인 정책으로는 관세인하,연방소득세 신설 등 세제개혁과 연방지불준비법 등 은행제도의 개혁이 있었다.루즈벨트 시대의 셔먼법보다 훨씬 강화된 독접 규제법인 ‘클레이턴 트러스트 금지법’도 제정했다. ○전쟁중 경제활황 재선 윌슨 대통령이 이같이 국내문제에 심혈을 쏟고 있는 동안 191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인해 발발한 1차대전은 미국에 국제정치의 중심역할을 맡게하는 계기를 가져왔다.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급증하는 군수수요는 미국의 경제활황을 가져다 주었다.이같은 상황에서 16년 그의 재선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러나 독일군 잠수함의 집요한 미국 상선 공격은 1917년 4월 마침내 미군의 참전을 불러오게 했다.미해군과 육군의 참전은 전세를 급속히 반전시켰으며 이듬해 1월 윌슨은 1차대전 이후 국제평화의 기본틀이 된 유명한 ‘14개항 원칙’을 발표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전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공개외교 ▲평화시나 전쟁시 항해의 자유 ▲군비축소 ▲자유무역의 원칙 ▲식민지 요구에 대한 공정한 판결 ▲영토본전을 위한 국제연맹 창설 등으로 돼있다. 이 선언은 파리평화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에서는 국제연맹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이유조약을 도출해 냈다.그러나 집단안전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윌슨에게 뜻하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었다.공화당이 가맹국의 내전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표방했던 먼로주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을 밝혔다. 윌슨은 국민들에의 직접 설득을 통해 이를 돌파하려 애썼지만 국제연맹 가입안은 미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막상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가입을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이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여러차례 윌슨은 겪어야 했고 이때문에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는 평을듣고 있다.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는 1920년 노벨문화상수상으로 보상 받은 셈이 됐다. ◎룰라 브룩스 윌슨박물관 큐레이터/“도덕정치·개혁 실천한 지도자”/“이상주의 추진” 용기와 노력 본받을만/첫부인 앨런과 사별… 재임중 재혼 기록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스톤튼의 이야기들’전시회를 주관했던 우드로 윌슨 박물관의 엘렌 시아 큐레이터는 “5개월간의 전시기간중 많은 관람객들로 붐벼 윌슨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놀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윌슨 대통령의 성품에 대해 설명해달라. ▲윌슨을 흔히 미국의 마지막 지성인 대통령이라고 한다.그는 높은 도덕정치와 과감한 개혁을 동시에 행한 지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이때문에 그는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서 42명중 6위라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오늘날 생각하면 그의 생각들은 모두 옳은 것이었다.한 예로 그의 세계정부론은 선견지명이 있던 것이다.그러나 당시의 수준에서는 너무 앞선 것이어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이상을 실현하려는 그의 용기와 노력은 우리가 본받을만 하다.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가.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 였기 때문에신앙이 좋고 매우 검소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 남부의 여러곳을 다니며 성장했다.그러나 출생지인 스톤튼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성장후에도 틈틈이 찾아왔던 기록이 있다. ­.가족관계는 어떠했는가. ▲첫부인인 앨런과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대통령 취임 2년만에 그녀가 죽고 불과 9개월만에 에디트 갈트와 재혼,재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하는 측근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타일러,클리브랜드와 함께 대통령 재임중 결혼의 기록을 남겼다.
  • 허버트 후버(미국의 대통령 문화:12)

    ◎‘영웅’으로 취임 ‘무능’ 비난속 퇴임/29년 임기시작 7개월만에 대공황… 경제 파국/퇴임후 대외구호 활동… 부정적 이미지 씻어내 【웨스트브랜치(미아이오와주)=나윤도 특파원】 “영웅에서 희생양으로.” 미국민을 절망과 분노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멍에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한채 백악관을 떠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그의 전기작가 조지 나쉬는 이같이 표현했다. 1929년 10월,그의 대통령 임기 시작 7개월만에 주가 폭락으로 비롯된 대공황은 당시 1차대전 이후 사상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던 미국경제를 파국으로 빠트렸으며 국민들은 단임으로 물러나는 그에게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역사가들은 후버 대통령을 ‘가장 많은 박수를 받으며 등장했다 가장 많은 비난을 받으며 퇴장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계최고 광산기사’ 명성 그러나 그는 58세로 대통령을 퇴임한 후 90세까지 살면서 30여년 동안 활발한 퇴임후 활동을 통해 대통령 당시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을 수 있었다.1차대전후 식량원조 책임자로 유럽 구호에 나섰던 전력을 살려 후버는 트루만·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대외식량원조 책임자로 발탁되어 2차대전 종전 이후 국제적 기근을 해소하고 유럽부흥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함으로써 국민들의 평판을 긍정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중서부 대평원 한 복판에 위치한 아이오와주 사람들은 미시시피강 서쪽에서 최초의 대통령을 배출한 주민이라는데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특히후버 대통령의 출생지인 주도 데모인 인근의 작은 시골인 웨스트브랜치 마을은 후버 도서관과 생가 등을 포함한 일대를 사적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며 가로등 마다에는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출생지’라고 쓴 깃발이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다. 1874년 8월10일 웨스트브랜치 마을의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후버는 6세때 부친,8세때 모친의 병사로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다행히 친지들의 도움으로 성장,스탠포드대 졸업 후 광산기사가 되어 세계 40여개국을 돌아다녔다.그는 세계 최고의 광산기사로 명성이 높았으며 1898년 청황실 광산국의 수석기사로 초빙돼 만주 일대는 물론 조선,일본 등도 광범위하게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 무렵,그는 광산기술회사를 소유한 백만장자가 돼있었다.조상들의 퀘이커교 전통에 따라 근검절약이 생활화 돼있던 후버는 돈에의 집착보다는 자선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1차대전이 발발했을때 유럽내 미국인들의 구호 및 본국 송환으로 시작된 그의 본격적인 구호활동은 독일의 침공에 고립돼 있던 벨기에 구호활동으로 이어졌다.그는 어떠한 직책에서도 보수를 받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하딩­쿨리지때 상무장관 1917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서부터 윌슨 대통령에 의해 식량청장으로 임명된 후버는 “식량은 전쟁을 이기게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연합군측 국가들에의 식량지원을 차질 없이 해냈다.이같은 탁월한 추진력으로 그는 하딩 대통령에 의해 상무장관으로 임명됐으며 후임인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서도 그대로 상무장관에 유임,2대 8년에 걸쳐 상무장관을 역임하고 또 상무장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는 등 많은 새로운 기록들을 세웠다.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한 1929년 3월 미국의 도시들은 자동차의 물결로 덮였으며 백화잠에는 물건이 가득차는 등 국민들은 전후 최고의 소비생활을 만끽할 정도로 경제호황을 이루고 있었다.그때문에 대공황이 일어나기 불과 두달전의 연설에서도 후버는 “이제 가난은 우리사회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공황은 갑자기 찾아왔고 후버는 사태의 심각성을 바르게 깨닫지못했다.그는 국민들에게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상품 생산과 분배는 여전히 건강한 기반위에 있다”면서 60일의 시간을 요구하며 회복시킬수 있음을 자신했다.더우기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경제 전반의 침체는 후버의 약속을 무위로 돌렸다.곧 대량실업이 발생하고 빈곤이 미전역을 뒤덮었다. 후버에 실망한 국민들은 빈민가를 ‘후버촌’,공원벤치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덮은 신문지는 ‘후버담요’라고 부르며 후버의 실정을 비난했다.그러나 후버는 끝내 연방차원에서의 구호계획보다는 시장원리에의한 회복을 꾀했다.결국 3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후버는 공화당후보로 재지명을 받았으나 강력한 연방정부의 개입을 의미하는 ‘뉴딜정책’을 구호로 내세운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후버는 취임식 이틀전까지도 경제회생을 위한 정책마련에 몰두할 정도로 우직하고 충실한 대통령 이었다.그러나 국민이 자신을 믿고 따라 주리라는 그의 국민에 대한 생각은 큰 오산이었음을 깨달은채 그는 백악관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티모시 월치 후버도서관장/“재임기간 아닌 전생애 평가해야”/루즈벨트의 뉴딜 성공은 후버가 닦은 기반 덕분/야구 좋아하고 낚시즐겨 저서 12권중 낚시책도 【웨스트브랜치(미아이오와주)=나윤도 특파원】 미 대통령도서관 중 세번째로 1962년 개관된 후버도서관의 티모시 월치 관장은 대통령의 평가는 전생애에 걸쳐서 이뤄져야 한다며 대통령 재임기간 중심의 현 평가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후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인가. ▲별로 높지 않다.라이딩스의 평가에서는 42명의 역대 대통령중 24위로,다른 평가들은 더 낮다.그러나 대통령의 평가는 임기 전후의 기간까지 종합적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사실상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성공할수 있었던 기반은 후버 때에 닦여진 것이다.또 퇴임후의 활동 등을 감안할때 후버에 대한 평가는 불만족스럽다. ­후버 사적지는 어떻게 구성돼 있나. ▲후버 도서관은 내셔날 아카이브(국립문서관리소)에서,박물관을 중심으로 생가,부친의 대장간,학교,교회,부부 묘소 등은 국립공원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학자들과 관람객뿐 아니라 주민들의 휴식공원으로도 개방되고 있다. ­대공황 당시 후버 정책의 실패 원인은 무엇인가. ▲상무장관을 8년 동안 역임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공황 해결에 가장적임자 였다고 볼수 있다.그러나 후버는 단기처방 보다는 장기적 근본적 처방을 택했다.그리고 자신의 신념이었던 자유기업정신과 역동적 개인주의 신장의 대원칙 하에서 해결을 시도했던 것이다. ­후버의 개인적인 생활은 어떠했나. ▲“미국인들에게 종교 다음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야구다”라는 말을 남길정도로 야구를 좋아했다.여가생활로는 낚시를 좋아해 그의 12권 저서중낚시책이 한 권 있을 정도다.
  • 유라시아 한인의 역할(중앙아시아를 가다:16·끝)

    ◎“21세기 동서교류의 주역 한민족”/경주∼파리 로마 철도 고속도로가 실크로드 구실/중앙아시아 교민이 유럽∼아시아 교이 연결고리 그 동안 우리는 세계사의 중심지역인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세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그 하나는 중앙아시아를 통해서 일어난 동서문화교류의 흐름이었고 다음은 문화교류의 세계사적 과정에서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보는 일이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에 사는 우리 교포의 문제를 미래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끝맺아야 할 단계에 왔다. 동서문화교류의 주통로는 물론 중앙아시아였다.이 지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정복전쟁이 연이어 일어났다.대규모 정복전쟁은 기마술의 계발로 가능했다.19세기말까지 기마술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19세기엔 비단길 끊겨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무대로 대규모 민족이동과 정복전쟁이 전개되었다. 그 영향은 필경 동서문화의 활발한 교류로 이어졌던 것이다.아리안의 동진과 기마족의 출현,그 영향아래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일어난 흉노와 투르크 제국의 형성,8세기 이슬람의 팽창,13세기 몽골제국의 형성.실로 숨막히는 사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 세계사를 가름하였다. 몽골제국은 특별히 비단길에서 상품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류를 방해하는 지방관리를 중벌로 처벌했고 갖은 수단을 써서 교류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몽골제국 이후에는 포르투갈이 선두로 개발한 해상루트를 통하여 중국으로 직접 서양문물이 들어왔다.그래서 여러 번에 걸친 중개상을 통하여 이루어진 멀고 먼 비단길의 상품교류가 그 빛을 잃게 되었다.그리고 동투르크스탄과 서투루크스탄이 각각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하여 점령되던 19세기에는 비단길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20세기초에 철도가 개설되면서 전체 유라시아가 철도로 새롭게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다.유라시아의 동쪽 끝,서울에서 짐을 실은 기차가 시베리아를 거쳐 파리에서 하역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세계 제1차대전 직후 동서 투르크스탄이 공산권에 편입되면서 이지역이 모두 철의 장막속에 들어갔다.그리고 철의 장막은 1991년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역사에서 그 막을 서서히 내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유라시아 대륙이 새로운 동서교류와 교류질서를 기다리는 단계에 왔다.그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21세기에 맞이할 유라시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한민족은 이 역사적 과제에 어떤 사명과 역할이 주어진 것인가. 그 하나가 길고 긴 동서문화교류의 과정에서 한국이 지닌 역사적 역할을 살펴 보는 일일 것이다.한국사회에는 유교·불교·기독교와 같은 전형적인 세계종교들이 모두 들어와 공존하고 있다.유교는 한문문화권의 세계관을,불교는 인도문화권의 세계관을,그리고 기독교는 유태교와 이슬람과 한 형제로서 유일신관의 세계관을 대표한다.이처럼 세계문화권을 형성한 중요한 고전문화들이 모두 한국에서 공존한다. ○세계 고전문화의 창고 그러나 더욱더 중요한 사실은 이미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 고전문화가 한국에 아직도 살아 기능한다는 점이다.예컨대 유교의 고전적인 모습은 중국에서는 이미청대에 사라졌다.이때문에 중국이 개방되면서 공자에 대한 춘추 제사인 석전제를 한국의 성균관 유학자들이 공자묘가 있는 산동성 곡부에 가서 복원시켜 주었다.대승불교는 당대에 그 고전적 꽃을 피웠었는데,고전적 대승불교는 중국에서 송대에 이미 사라졌다. 밀교화한 티베트 불교는 처음부터 고전적 모습에서 벗어났었다. 다만 한국의 대가람에서 아직도 당대의 고전불교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늦게 해상루트를 통해 들어온 기독교의 경우만 해도,한국교회는 매일 새벽 4시 예배를 드린다.이런 예는 기독교 2천년사를 통해서 한국밖에 없다. 그만큼 한국기독교는 고전적 신앙의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이처럼 한국사회에는 동서 고전문화가 모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고전적 모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마치 한국은 세계 고전문화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고대 비단길을 타고 서방의 문화가 한반도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석굴암의 불상이 말해준다.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서북부까지 원정하면서 희랍의 조각양식이 간다라지방에 전해졌다.이 지방의 미술형식이 대승불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으로 펴졌다.석굴암의 불상 역시 간다라 미술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다만 간다라 조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걸작이 석굴암의 불상이다. 그 중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으로 생명과 화평이 흘러내리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미소가 중생을 자비의 품으로 안아준다.그것은 간다라 미술형식이 한국인의 감각으로 재구성된 결과이다.멀고 먼 서방,희랍의 예술이 비단길을 따라 동쪽으로 와서 유라시아의 동단 토함산의 불상으로 현신하여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고 앉았다.석굴암은 한국이 동서문화의 보고이며 동시에 앞으로 올 새로운 동서교류의 동방기지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21세기에는 동서문화가 다시 한번 더 새로운 형태로 활발하게 교류할지도 모른다.경주에서 로마와 파리까지를 철도와 고속도로를 통해 문물을 교류할 것이다.그 통로는 중앙아시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 세기에 우리민족이 필요한 모든 자원이 그 지역에 있다.그리고 그 방대한 중앙아시아 전지역에 골고루 퍼져사는 우리의 교포 고려인들은 한국의 대외교역의 현지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중국과 일본은 그런 조건을 갖지 못하고 있다.19세기 말에 국운이 쇠하여 북방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고,다시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실려갔어야 했던 그들이다.우리 형제 고려인들은 이제 전형적인 세계인으로 성장해서 동서문화교류에 크게 공헌할 수 있게 되었다.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세계사 중심은 유라시아 그리고 한국사회는 동서문화의 보고라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역할을 넘어서 동서문화의 동방기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국내외에서 익어가고 있다.세계사의 중심무대는 유라시아 곧 구대륙이었으며,21세기에도 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세계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유라시아인들은 동서교류가 본궤도에 오를 때 세계교역량을 주도할 것이 자명하다. 그때 유라시아의 동방기지가 어디일 것이며,그 주역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현해탄은 교역통로를 위해서는 너무 수심이 깊고,중국은 동서문화유산의 수용이라는 세계화의 수순에서 한 발짝 우리보다 늦다.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천운을 허락하여 새로운 희망과 각오로 21세기를 맞이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 아니한가.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미국의 대통령문화:10)

    ◎한국전 휴전 등 성사… ‘국제평화의 전도사’/후르시초프 방미 실현… 냉전해소 노력/동남아조약기구·IAEA창설 결정적 역할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1952년 34대 미 대통령선거전에 나선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장군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이 한마디 였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이미 탁월한 지도력이 입증된 아이젠하워 후보를 온국민들은 풀 네임보다도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그리고 그들은 빨강·하양·파랑 바탕에 이 글귀가 쓰인 캠페인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이같은 아이젠하워의 치솟는 국민적 인기는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인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재치,세련된 언변,화려한 공약 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선자 신분 한국전선 시찰 선거결과는 선거인단수 442대 89라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더우기 공화당에 상하양원의 압승까지 안겨주어 루즈벨트­트루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20년의 종지부와 함께 새로운 공화당 시대의 개막을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대공황­2차대전­냉전­한국전쟁의 사슬에 얽매여 한시도 긴장을 풀수 없던 미국민들은 하루빨리 정상상태로의 복귀를 열망했고 아이젠하워는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줄 최적의 인물로 추대됐던 것이다.아이젠하워는 또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런닝메이트로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고령이던 자신의 나이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당시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는 수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국전쟁의 종식과 관련된 것이었다.아이젠하워는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선거가 끝난후 당선자 신분으로 아직 포화가 멎지 않고 있던 한국전선을 방문,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취임연설에서는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모든 국가와 협력하겠다”고 강조,평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염원에 답했다.실제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성사시켰으며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했다.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역설,국제원자력위원회(IAEA)의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소련과의 대화도 시도했으며 장차 군산복합체 대두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방만한 정부 예산의 감축을 위해 국방비의 절감,감세,정부사업의 축소,각종 규제의 완화 등 연방정부의 활동을 대폭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갔다.그리고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보좌관을 선임,그에게 상당부분의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세세한 문제에는 관여치 않는 당파를 초월한 정치를 추구했다. 미시시피강 서부 대평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인구3천명의 캔자스주 애빌린은 아이젠하워의 도시로 유명하다.도시 중앙에 위치한 아이젠하워센터에는 중앙에 그의 동상을 중심으로 성장기의 집과 묘소,박물관,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어 커다란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1898년부터 46년까지 아이젠하워 패밀리가 살았던 사저는 캔자스의 평범한 시골집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센터 입구에 ‘명산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형태로 생긴 그의 묘소는 경건의 장소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박물관은 2차대전및 냉전시대의 전쟁박물관으로,도서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8년간은 물론 그가 군사령관으로 남긴 것까지 모든 자료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다.특히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관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편지에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항상 ‘장군님’이라고 존경의 호칭을 사용했고 맥아더는 ‘사랑하는 아이크’라고 적고 있는등 두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는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횡단 철도가 지나기 때문에 텍사스등지에서 동부로 수송을 위해 수백만마리의 젖소들만 몰려들던 황량한 시골마을인 이 도시는 오늘날 인구 3천명의 소도읍으로 성장했으며 아이젠하워를 키워낸 자부심에 가득차 있다. 19세기에 출생한 마지막 미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1890년 텍사스 데니슨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부친이 애빌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초,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니는 등 애빌린을 실질적인 고향으로 간주해왔다.낙농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대학진학은 엄두에 두지도 못하던 아이젠하워는 21세때 뒤늦게 웨스트포인트에 진학,군생활을 출발하게 됐다. ○흑백차별엔 단호한 입장 1차대전때 군훈련교관을 역임하고 파나마운하 주둔군으로 활약하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0년초 필리핀 주둔군사령관 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였다.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조지 마샬 참모총장에 의해 전쟁성의 태평양전략 담당관에 임명돼 탁월한 기획능력을 발휘했다.마침내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연합군측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됐다. 전쟁이 끝난후 군을 떠나 콜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잠시 외도한 그는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때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민주 양당에서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타진해 왔으나 그는 공화당을 택했고 압승을 거두게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재임중 사회복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담당할 보건부,교육부,복지부 등의 부서를 창설했다.특히 흑백차별 문제에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57년 아칸사스주 리틀록의 백인 고등학교에서 흑인들의 입학을 거부하고 주지사가 민병대까지 동원,이를 옹호했다.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천명의 낙하산부대를 투입,흑인학생들을 호위 등교케하고 한학기 동안 학교를 순시케 하는 등 단호히 맞서 마침내 차별론자들을 굴복시켰다. 대외정책은 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위임시켜 행하게 했으며 동남아조약기구(SEATO),를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또 후르시초프의 방미를 실현시키고 소련에 영공 공개와 공중 군사설비 조사에 관한협정 제안등 냉전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는 남북전쟁의 격전지 였던 펜실바니아주 게티즈버그에 농장을 짓고 퇴임후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오늘날 애빌린 못지 않게 게티즈버그의 아이젠하워 하우스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곳에는 링컨 워싱턴 등 인물화와 각종 풍경화 등 그가 남긴 수십점의 작품들이 진열돼 예술가대통령으로서의 푸근함 또한 느끼게 하고 있다. ◎다니엘 홀트 아이젠하워 도서관장/“정치인·군인 모두 성공적 삶”/“62년 도서관 개관… 220만점 소장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아이젠하워 도서관의 마틴 티즐리 관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두가지 생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적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의 하나로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센터 중앙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평화의 챔피온’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그는 전쟁에 피곤해있던 미국민들에게 평화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도서관의 연혁및 활동은. ▲대통령 도서관으로는 네번째로 1962년 개관됐으며 초기 120점 이던 소장 자료가 이제 220만점으로 증가됐다.주로 2차대전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400여명의 등록 학자들을 비롯 수많은 연구자들이 찾고 있다.특히 NATO 콜렉션은 미국내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돼 있다. ­지역에의 기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탄생일과 2차대전* 각종 기념일 등에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애빌린 주민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다.특히 묘소가 있는명상의 집은 주민들의 경건의 장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모든 운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로서의 참여가 없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민들과의 관계는. ▲TV시대가 개막될 무렵이어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들과 접촉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볼수 있다.특히 그는 골프와 낚시 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대통령과 아놀드 파머와의 골프경기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였다.
  • 가상의 역사/영 역사학자 10명 공저(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역사적사건 반대 시각 재조명/영국 명예혁명·고르비와 구소 붕괴 등 다뤄/지식과 상상과 세계 똑같은 비중 접근 시도 ‘가상의 역사’는 학술적인 용어다.역사를 전공하는 모든 학생들과 역사가들이 생각해보는 것이다.이를테면,만일 고대 그리스 마라톤전쟁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이겼다면,러시아 혁명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볼셰비키들을 쫓아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가정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적 사건들이 실제 어떻게 일어났는 가를 알아보는데 매우 좋은 수단이 아닐 수 없다.이 질문들은 또 역사연구가들이 흔히 갈팡질팡하는 문제,즉 어떤 현상을 반드시 인과관계에 따른 법칙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하는 기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때 무척 유용한 도구가 된다.결정론자와 비결정론자 사이에 때때로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학자들사이에 ‘가상의 역사’라는 장르는 역사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전문가의 의견에 빠져들지 않게하는 마력을 지닌다.‘진실추구’를 하지 않는다면 해당역사가나 그 역사서는 권위를 그만큼 떨어뜨리는 것이 될 것이며 때때로 독자가 작자들과 영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할 것이다. 역사해석에 대한 이같은 ‘함정’을 메우기 위해 나온 책이 ‘가상의 역사’라는 책이다.‘대안과 가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책은 영국의 소장 역사학자 10명의 글을 모았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정확히 반대되는 사실에 입각한 가정들,즉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에서부터 ‘고르바초프가 소련에 없었더라면’까지 큰 줄기의 역사사건을 반대로 가정해봄으로써 역사적 사건의 진실에 보다 가까와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단편 논문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너선 클라크의 ‘미국혁명이 없었다면’부분이다.미국 독자들은 클라크가 미국을 세운 이들을 ‘원칙주의자’보다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화잘내는 문제아’로 묘사한 사실에 놀랄 것이다.하지만 건국이후 미국을 끊임없이 괴롭혔거나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는 노예문제,인종문제,일부 인디언들의 처리문제 등은 “만일 미국이 제국으로 남아있었다면”모두 해결되었을 것으로 결론지은 클라크의 혜안에 감탄할 것이다. 마크 알몬드의 ‘고르바초프가 없는 1989년’도 현대 역사학자들에 매우 유용한 테마였다고 본다.그의 말을 빌리면 최근세사에서 공산주의 붕괴만큼 필연적인 사건은 없다고 결론 짓는다.물론 공산주의 경제체제와 정치적모순에 고르비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이라는 지적이다.알몬드는 그러나 공산주의 붕괴같은 역사상 획을 긋는 현대의 어떤 빅이벤트도 예견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예를 들면 소련연구가인 미국의 제리 휴조차도 1990년에 “소련정권은 지구상 가장 안정된 다국적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알몬드는 소련내 어떤 정치·경제·사회세력도 소련을 무너뜨리지 못했으며 서방의 대처나 레이건같은 인물이 소련에 있었다 하더라도 소련의 붕괴를 가져오게 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단정한다.유럽의 정치인들도 당시 동방의 핍박받는 사람들의 자유보다는 소련의 안정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알몬드는 특히 소련의 반체제인사 작품들 조차도 프라하의 지하철역이나 라이프치히의 전차역에서보다는 미국의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오히려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그 정도로 소련의 붕괴는 예견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붕괴는 어떻게 온 것인가.알몬드는 바로 고르바초프의 ‘순진한 노력’이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 블럭을 서방과 연결시키려 한 노력이 결국 소련을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서방과의 관계강화가 소련의 정치·경제시스템을 해치리라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조종간을 잡고 바위를 향해 힘찬 행진을 한 사람­고르비­때문에 소련은 무너졌다”는 것이 알몬드의 주장이다. 위 두 사람과 형식은 달리하지만 다이언 쿤츠의 역사해석도 재미있다.쿤츠는 케네디를 헐뜯는데 초점을 맞추지만 흥미진지함도 가져다 준다.이 책은 앵글로 색슨족 중심주의가 어렴풋히 베어있고 논문들의 이슈도 방만하게 선택된 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가 이전에 해왔던 역사에 대한 의미부여를 아주 새로운 각도에서 접하도록 해줌으로써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이 1차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유럽대륙이 유럽연합과 같은 기구를 일찌감치 탄생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지금도 인기가 여전한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암살사건이 결국 존슨대통령의 ‘위대한 사회’캐치프레이즈 아래에서 시민권의 신장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누가했겠느냐는 것이다.‘가상의 역사’가 밀리언셀러가 될 가능성이 큰 것도 이같은 이유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 출판사를 책임지고 있는 퍼거슨씨는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실에 반대되는 각도에서 역사를 조명,가정적인 역사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역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실제로 이 책의 편집자이기도 한 퍼거슨은 “영국 찰스1세가 1639년 6월 스코틀랜드 반군과 전쟁을 하고 또 승리했다면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겠는가”하는 가정을 예로 든다.1939년의 ‘스코틀랜드 반란’은 찰스가 군사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영국의 명예혁명을 앞당긴 일련의 사건이다. 이 책은또 미국과 프랑스,러시아에서 혁명이 없었을 경우,아일랜드의 분리가 없었을 경우,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이 없었을 경우의 여러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지식과 상상의 세계를 똑같은 비중으로 접근하는 이같은 역사의 지혜에 놀라울 수 밖에 없다.역사는 사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원제 Virtual History:Alternatives and Counterfactuals.Niall Ferguson,Picador.548쪽.32달러
  • 재벌 대신 중소기업을…(우홍제 칼럼)

    새정부의 실물산업 관련정책의 새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말뿐인 육성방안의 장막에 가려진채 멀찌감치 소외당했던 중소기업군을 크게 일으키는 쪽으로 마련돼야 할 것이다.새삼스레 무슨 이야기인가 하는 시각도 있을수 있겠다.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시대에서 우리 국민경제가 살 길을 마련하고 활력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재벌기업 연쇄도산으로 생길 1백20만명 추산의 대량실업과 산업활동 공백상태를 메워줘야 하며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정책이 이러한 과제해결에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생각된다.바꿔 말하면 IMF시대 개막은 재벌중심 성장전략의 폐해와 한계를 여실히 반영한 것이다.실제로 요즘 IMF에 의해 수술대에 뉘어진 국내재벌들의 초라한 모습은 방만함과 탐욕의 끝이 어떠한가를 잘 말해준다.희화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처럼 좋은 시절은 이제 맛볼수 없게 된 것이다. 자기 돈은 다른데로 돌려 흥청대며 써버리고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무턱대고 많은 돈을 빌려서 경쟁적으로 계열회사와 사업을 늘리는 식으로 몸집만 부풀려 오다 갖가지 병에걸려 대수술을 받게된 것이다.비대해진 공룡의 말로 같다고나 할까. ○대기업 중심전략 폐막 물론 재벌기업들이 그동안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견인차역할을 해온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그럼에도 짜임새없이 방만한 과다차입 경영으로 중복·과잉투자를 일삼은 것은 한정된 국가 자원을 낭비하고 비효율적 산업구조를 고착화시켰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도리가 없다.게다가 권력의 비호아래 경제력집중과 국내시장의 지나친 독과점으로 건전한 중소기업이 자랄수 있는 기반을 빼앗고 시장경제의 최대장점인 경쟁을 할 수 없게끔 단층을 만든 것은 쉽게 지나쳐 버릴수 없는 과오 가운데 하나다.평균 자기자본비율이 겨우 10%대에 머물고 나머지는 각종 부채로 메워진 취약하기 짝이없는 재무구조의 몇몇 재벌그룹들에 국운이 좌우되는 위험성은 더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묵은 재벌구조에 대한 개편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계에서 제기됐던 것이지만 그때마다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측의 거센 입김과 정부의 우유부단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타율의 IMF수술에 의존케 된 것은 깊이 두고 두고 반성해야할 대목이다. ○중기는 충격완화 역할 어쨌든 건전한 국민경제발전을 위한 재벌역할의 실패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우리산업의 초토화현상을 막으려면 중소기업을 적극 우대하며 키워나가는 정책이 필수적이다.만약 오늘과 같은 경제위기가 닥쳤다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견실한 중소기업들이 튼튼한 자력생산기반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위기에 대한 쿠션역할을 함으로써 충격과 피해는 크게 덜수 있었을 것이다.이번의 국난을 계기로 재벌 몇개 쓰러지면 국가가 흔들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산업구조의 획기적인 차별화전략이 요청된다.하기야 미국도 1930년대를 휩쓴 대공황의 체험결과 중소기업역할을 중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그 이전에는 세계1차대전등의 영향으로 공업생산이 급속한 증가세를 보이고 자본집중이 빨라지면서 독점적 대기업중심의 경제구조로 발전하고 있었다.그러나 대공황이후 특히 내수시장에서 중소기업이 대기업 횡포에 시달리는 것을 막는 독과점 방지법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대기업의해외시장진출을 촉진시켰던 것이다.이처럼 작지만 단단한 중소기업의 많은 무리는 경제위기의 충격에 완충장치가 될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는 건전한 중산층을 형성케 하는 안전대기능을 한다.자생적 산업생산기반과 건전한 산업자본의 원천이기도 하다.급변하는 국제경제의 흐름에 순발력있게 대응,다품종 소량생산수출의 이점도 어렵잖게 취할수 있고 노동집약적인 분야가 많아 고용효과가 크다. ○중기청 부로 승격해야 수치로 본 우리의 중소기업은 전체사업체 가운데 99%,근로자는 77%,수출비중은 41%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서 경쟁력이 없고 대기업과는 수직적관계의 하청업체 정도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그동안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위성화,이들의 저임기반을 통해 자본축적을 해오거나 중소기업영역에 침범함으로써 경쟁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앞으로 IMF시대를 앞당겨 끝내려면 대기업들은 구조조정과 특화사업전략을 강도높게 추진,경쟁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나라처럼 해외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경제구조에선 몇 대기업이 국민경제를 장악하는 것보다는 중소기업의 층이 두텁고 튼튼해야만 충격에 잘 견디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따라서 새정부는 현재의 중소기업청도 부로 승격시켜서 소속부처의 영향받지 않고 정책집행에 독자적 기능과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토록 하는 방안도 깊이 검토해야 할 것이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중(미국의 대통령 문화:4)

    ◎‘대공황’ 늪서 미국 건진 행동주의자/‘공황탈출’ 정열적 활동… 수백만 실업자 환호/국민에 새정책 배경·방향 설명… 전폭적 신뢰 허드슨강변 언덕에 위치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적지 한복판에 위치한 루즈벨트 도서관에 들어서면 첫 전시실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실이다.한 실업자가 일자리를 달라는 피켓을들고 서있으며 그 옆으로는 대공황과 관련된 각종 사진자료들이 가득 차있다.이같이 루즈벨트는 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탈출’시킨 대통령으로 대부분의 미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이는 링컨 대통령이 미국을 남북 분열의 위기에서 구출한 업적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1932년 11월8일.‘뉴딜’바람을 몰고온 FDR(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애칭) 뉴욕주지사가 32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그러나 그의 당선 자체가 사태 해결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선거전문가들은 “유권자들이 루즈벨트를 선택한것이 아니라 후버를 반대했던 것”이라고 선거결과를 분석했다.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새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될 이듬해 3월까지 아직 4개월이 남았으며 이 기간은 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이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였다.실업율이 최고로 치솟았고 대부분의 기업은 도산됐으며 설상가상으로 농산물 가격까지 급락했다.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경제상황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당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현직대통령 후버와 당선자 루즈벨트사이의 불화였다.자신의 신념에 대한 편집증적인 고집을 갖고 있던 후버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힘으로 공황을 극복해보려 했다.그래서 루즈벨트 당선자에게도 그같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지원만을 구하려 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국면전환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후버에게 협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자신이후버의 실정에 개입된 인상을 줄것을 두려워해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정권이양기 4개월 동안 현직 대통령과 당선자와의 공식적인 만남은 두차례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두사람의 사이는 소원했다.당선 2주후인 11월22일 가진 첫만남에서 후버는 당면 경제현안이 아닌 ▲유럽의 대미 전쟁채무상환 ▲제네바 군축회의에서의 미국역할 ▲세계경제회의 개최 등 대외문제에 대한 지원을 구했다.대공황의 원인을 세계 경제침체 등 대외적 요인때문으로 생각한 후버는 대외문제 해결을 통한 공황 탈피를 추구했다.그것도 후임자에게 협조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었고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려 했다. 따라서 공황극복의 해결책을 국내적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루즈벨트와는 협조가 불가능했다.마침내 두사람은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의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루즈벨트는 자신의 임기전이라도 균형예산과 농민지원을 위한 입법을 추진하려 했다.그러나 번번이 후버의 거부권에 부딪혔다.그때까지도 정부개입의 최소화만을 고집했던 후버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의미하는 루즈벨트의 보수주의 회귀를 비난하며 뉴딜정책 공약의 포기 압력을 가해왔다. 두사람 사이의 관계개선을 위해 당시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은 외교문제의 협조를 구실로 하룻길이 넘는 백악관과 허드슨파크를 몇차례 오가며중재에 나섰다.그 결과 이듬해 1월20일 두번째 백악관 회동이 성사됐다.그러나 이자리는 두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후버는 레임덕현상에도 불구하고 퇴임날까지 스스로 끌고 나가겠다고 다짐했으며 루즈벨트는 냉각기를 갖기위해 측근들과 11일간 플로리다 크루즈여행을 떠났다. 후버는 그해 2월18일 루즈벨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뉴딜정책의 포기를 다시한번 권유했다.지난해 여름까지 상승세에 있던 경기가 지난 겨울부터더욱 악화된 것은 루즈벨트와 민주당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편지는 답장도 없이 묵살됐다. 사태는 더욱 악화돼 후버의 대통령 퇴임 1주일전에는 은행 인출이 급증,전국의 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리는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그는 사흘전인 3월1일 다시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다.은행의 지불유예 선언을 위한 지지 부탁이었다.취임식을 위해 루즈벨트가 워싱턴에 도착한 2일까지도 사람을 보내 그 선언에 동의해줄 것을 간청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완곡히취임전의 모든 정치적 행동을 사양했다. 이들 두사람의 인연은 1차대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해군성 차관보로 있던 루즈벨트는 당시 상무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8살 위인 후버를 존경,1920년 그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서주기를 원할 정도였다.후버가 공화당을택한 후에도 루즈벨트의 그에 대한 존경은 계속됐다.그러나 28년 선거과정에서 두사람의 사이는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더욱 벌어졌던 것이다. 33년 3월4일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후퇴에서 전진으로 돌아서려는 우리의 노력을 마비시키는 공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라며 온국민의 ‘두려움’에서의 탈출을 강조했다.그리고는 먼저 은행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다음날인 5일부터 4일간의 전국적인 ‘은행휴업’(bank holiday)를 선포했다.국민들은 51세의 보다 젊고 힘있는 새대통령의 자신에 찬 목소리를 환호했으며 그가 펼칠 새정책에 대한 기대를 갖는 모습이 역력했다. 루즈벨트는 그동안 은행개혁입법을 마련,9일 의회를 소집해 통과를 얻어냈다.그리고는 보완을 위해 은행휴업을 13일까지 연장했다.12일에는 첫 라디오연설 ‘노변정담’에서 이번 조치에 대한 배경및 경과를 설명하고 다음 단계의 추진방향을 밝히면서 국민들의 협조를 구했다.국민들은 진솔한 대통령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이같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다음날 은행이 업무를 재개하자마자 끝없는 예금행렬로 나타났다.첫날 예금 수신고는 수년내 최초로 인출액을 앞섰으며 그같은 현상이 계속되면서 은행들은 정상영업으로 돌아서게 됐다. 루즈벨트는 9일 시작되어 6월16일까지 계속된 의회의 특별회기 동안 뉴딜정책의 골격이 된 수많은 법안들을 만들었다.국민들에 대한 대통령 자신의 직접 설득도 계속됐다.의회의 심의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이같은 ‘100일’동안의 행정부와 입법부의 박력에 찬 행동주의는 기업가들 뿐 아니라 대공황의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돼온 수백만 실업자들로부터도 큰 환영을 받게됐으며 국민적인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FDR 취임 100일 주요입법 내용/청년 30만명 자원보존 업무 투입/조직범죄 양산하는 금주법 폐지/예금보험공사 설립… 저축자 보호 1933년 3월 FDR의 대통령 취임직후 소집된 100일 동안의 의회 특별회기중 통과된 뉴딜정책의 핵심이 된 대표적인 입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간자원보존단(CCC)창설:18∼25세의 빈민가정 청년 30여만명을 1차적으로 전국의 각지에 파견,도로건설·식목·홍수통제 등 자원보존 업무에 투입.뒤에 300만명까지 확대됨. ▲연방긴급구호법(FERA):주정부와 시정부 등에 빈민 구제사업을 위한 자금으로 5억달러를 직접 지원. ▲금주법 폐지:그동안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급지함으로써 밀수와 밀주제조 및 유통을 둘러싼 조직범죄를 양산하는 등 사회문제화 됨.맥주 판매 개시. ▲테네시계곡 개발공사(TVA):독립된 공사인 TVA에게 테네시강 유역 7개주의 홍수관리시설 개발권을 부여,댐과 발전소를 건설하고 삼림보호,수운확보,토양개선,싼 전기공급 등의 사업을 하도록 함. ▲국가산업부흥법(NIRA):이 법의 시행을 위해 국가부흥청(NRA)을 설립,정부 감독하에 산업의 자율적인 규제를 통해 경제를 소생시키려 했음.규제에 대한 협력의 상징으로 ‘푸른 독수리’(Blue Eagle) 마크를 붙이도록 했으며 이 마크가 없을 경우는 불매하도록 함. ▲농업조정법(AAA):정부가 농산물에 대한 가격통제를 할 수 있고 과잉생산을 막기 위해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함.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은행의 파산시 일반 저축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주택소유자 자금 대부회사(HOLC):저당권에 대한 재융자 및 저당물 반환권 상실 예방을 목적으로 함.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상(미국의 대통령 문화:3)

    ◎휠체어 앉아 ‘미국’을 일으킨 영웅/맥빠진 국민에 “무엇이든 해보자”/노변정담 설득… 공황극복 견인/국민신뢰 대단… ‘대통령학’ 모델/정계입문 초기 잇따라 선거 패배/소아마비로 “정치생명 끝장” 중평/목발 짚고 민주 전대 웅변 감동적 “나는 여러분에게 맹세합니다.또 나 스스로에게 맹세합니다.미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펼 것을 말입니다” 1932년 7월2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장.대통령후보지명 수락연설에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뉴욕주지사가 처음으로 ‘뉴딜’을 외쳤을때 아무도 그 한 단어가 미국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세계최고의 번영으로 인도할‘키워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후 ‘뉴딜’은 ‘대공황’의 반대어로 자리매김했으며 미국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나타내고 승리를 대표하는 어휘가 됐다. 루즈벨트는 선거운동과정에서도 대공황 여파로 자신감을 상실한 채 무기력해져 있는 미국민들을 향해 외쳤다.“어떤 방법이든 택하여 그것을 해봅시다.만일 실패한다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것을 해봅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해보자는 것입니다” 워싱턴 중심의 몰공원 남쪽 포토맥강가에 지난 여름 개장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기념공원은 어린 학생부터 노인들까지 하루종일 수많은 관람객들로 붐빈다.미 역사상 훌륭한 대통령 빅3에 들면서도 수도 워싱턴에 이렇다할 기념관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아 워싱토니안(워싱턴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로부터도 많은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던 참이어서인지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이 공원에는 그의 재임 4기를 시기별로 네개의 공간에 나누어 각종 상징적 조형물을 세우고 또한 대표적 어록을 벽에 새겨놓아 당시의 시대상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업적 등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시간주에서 관광온 테드 모간씨(74)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국민 설득을 위해 자주 사용했던 라디오연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면서 한 실업자가라디오 앞에서 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있는 상징물 앞을 떠날 줄 몰랐다.‘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시도됐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연설은 당시 절망감에 사로잡힌 국민들에게 최고의 인기있는 복음이었다고 모간씨는 회상했다. 1차대전 이후 호황기의 절정에 다달았던 29년 말부터 갑자기 몰아닥친 대공황은 3년동안 5천개의 은행을 문닫게 했으며 그에 따른 기업과 공장들의 연쇄도산이 뒤를 이었다.근로자들이 땀흘려 저축한 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전체 노동력의 40∼50%에 달하는 3천4백만의 실업자가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거리를 배회했다. 이같은 암흑기를 지나면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눈덩이처럼 커진 미국민들에게 루즈벨트는 공황의 종식을 위한 ‘뉴딜’을 외치며 균형예산과 실업자 구조,금주법의 폐지 등을 공약으로 제시,무기력한 후버 행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루즈벨트가 실의에 빠진 유권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선거공약의 내용및 실현성 여부를 떠나 ‘의욕’이라는 심리적인 자극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그는 희망이 사라진 곳에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확신이 상실된 곳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선거결과는 루즈벨트가 유효표의 57%를 득표,선거인단 472명을 확보함으로써 40% 득표에 선거인단 59명을 확보한 후버 현직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승리했다.이렇게 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4선 대통령 루즈벨트시대가 개막된 것이다.초대 워싱턴 대통령 이래 불문율로 지켜져온 중임 전통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로부터 네차례나 대통령직을 부여받을 정도로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경제위기와 전쟁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미현대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의 모델로 기록되고 있다. 1882년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허드슨강변 동쪽 언덕에 위치한 하이드 파크에서 출생한 루즈벨트는 부유한 가정형편 덕분에 개인교습을 받고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어려서부터 유럽여행을 다니는 등 풍족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그의 성장기에 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26대)는 먼 친척 형(12촌)뻘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의 부인이 된 일리노어 루즈벨트는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부친을 일찍 여의였기때문에 1905년 그들의 결혼식에는 현직 대통령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바드 대학과 콜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정계입문한 루즈벨트는 각종 선거에서 여러차례 낙선을 경험하는 등 초기에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우드로 윌슨 대통령(28대)에 의해 해군성 차관보로 임명돼 1차대전 당시 중요한 해군전략 수립에 관여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이같은 1차대전때의 그의 경험은 대통령으로 2차대전을 맞았을때 십분 활용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1920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제임스 콕스 대통령후보의 런닝메이트로 출마해 고배를 마시는등 중앙정치무대와는 인연이 없는듯 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잠시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정치를 떠나 있을때 그는 엄청난 개인적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 8월 캐나다 해안에서의 휴가중 찬물에 빠져 감기에 걸린 것이 척수성 소아마비로 발전,양다리를 못쓰게 됨은 물론 팔과 손에까지 부분 마비가오게 되었다.당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조지아주의 웜스프링스로 가서 3년동안 기적적인 투병으로 그는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다. 1924년 그가 휠체어를 타고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타났을때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그가 목발에 의지해 단상에 기대서서 연설할 때는 그의 인간승리 모습에 감동적인 환호를 보냈다.결국 그는 1928년 뉴욕주지사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루즈벨트 도서관 사서 레이몬드 타이크만/“항상 국민과 함께한 지도자”/4연임,전쟁 마무리 위한 국민의 선택 FDR(프랭클린 D.루즈벨트의 약자 애칭)학의 권위자인 뉴욕주 하이드파크 프랭클린 루즈벨트 도서관의 선임 사서레이몬드 타이크만 박사는 그가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 대통령이었다고 소개했다. -FDR이 미국민들로부터 빅3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공황으로 잃은 정부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그는 국민들과의 직접대화를 택했다.라디오 연설시간인 ‘노변정담’을 통해 그는 정부정책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이해를 구했다.국민들은 그가 국민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뉴딜정책이 국민들에게 어필한 이유는. ▲후버 대통령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제퍼슨적인 자유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면 FDR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해밀튼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대공황으로 의욕을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정부와 대통령의 적극적인 유도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불문율로 돼있던 중임 전통을 깨고 3연임에 도전하게된 이유는. ▲FDR도 처음에는 주저했다.그러나 대공황의 그늘이 아직 걷히지 않은 가운데 2차대전이 발발했고 불과 수개월만에 프랑스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의연임은 국민적 합의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연임 역시 전쟁의 성공적 마무리에 대한 국민의 기대 때문이었다. -FDR에게 4연임까지도 허용했던 미국민들이 1951년대통령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22차 헌법수정안을 서둘러 마련한 이유는. ▲국민들이 경제위기및 전쟁위기 상황하에 있을때는 강력한 정부,강력한 지도력을 원했지만 일단 모든 것이 정상상태로 회복된 후에는 큰 정부의 필요성도,집중된 권력의 필요성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동서문화 장벽 ‘천산’(중앙아시아를 가다:7)

    ◎당,751년 ‘천산전투’ 이슬람에 패배/중의 중앙아 포기,이슬람화 가속 천산을 넘었다.우루무치를 떠나 알마아타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설산은 장관이었다.사막을 풍요로 가꾸어주는 만년설을 인 설산 준봉들이 끝없이 늘어섰다.그 천산은 알마아타공항에 내렸을때도 마치 군림하는 자세로 여전히 우뚝했다.카자흐말로는 티엔산이다.옛 소련연방시절에도 그랬지만,자연풍광이 수려한 천산을 넘으면 늘 푸근한 감회가 안겨왔다. 그것은 천산너머 첫 도시 알마아타에 사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들 카자흐인들은 우리민족과 아주 가까운 친연관계의 문화를 지녔다.그래서 문화에서는 친근감이 우러나고 사람들은 정겨웠다.처음 알마아타를 찾았을때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전화교환원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들은 ‘차이나(중국)’가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구르족도 불교서 개종 그들은 중국을 러시아말로 ‘기타이’라 했다.이말은 알고보면 우리말에 뿌리를 두었다.우리말의 거란을 중국식으로 발음한 ‘기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그러니까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인을 요나라 사람들인 거란족으로 알고 있었다.우리 역사속에서 비중있게 조우한 중국 동북지방의 그 거란족이다.중국인들이 회홀 또는 회골이라 부르던 위구르족들의 종교라는 뜻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 했다는 것은 지난번에 밝혀 두었다.그러나 위구르족이 불교에서 실제 이슬람으로 완전 개종한 시기는 14세기의 일이다. 이들 두가지 사례는 참으로 놀라운데가 있다.중국은 한대이후 22세기 동안의 역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유목기마민족의 침략을 받았다.그렇다면 중국은 기마민족의 주무대인 서역의 정보를 언어체계 안에제대로 반영했을 법도 하다.하지만 중국의 언어문화체계는 이러한 상식적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기마민족들 역시 22세기동안 교역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국역사의 실체에 무지했다.얼마나 몰랐으면 중국인을 거란족으로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화의 장벽은 천산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천산을 넘으면 중국은 없었다.751년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와 지아드 이븐 살리히 휘하의 이슬람군이 천산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맞붙었다.닷새간 벌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당군이 패배했다.이는 중국세력이 천산너머의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부추겼다. 그렇듯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한획을 그었고 또 천산의 문화장벽을 한층더 높였다.중앙아시아에 가면 한문은 실제 신화에 나오는 문자에 불과했다.중국문화가 배어들어 온 흔적이 없는 것이다.다만 한무제가 서역정벌에서 남긴 차를 마시는 습관만이 있을뿐이다.그 천산너머의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발효한 검은차를 마셨다.검은차를 마시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몽골이나 알타이,또 중국과의 국경지대가 아니면 중국과 직접 교역하던 민족의 후예다.그들 문화가 얼핏 이슬람 일색인듯 하면서도 문화전통과 인종학적 혈통이 다른 까닭도 여기 있다. ○한문은 신화속의 문자로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는 참으로 혼돈스럽다.그 혼돈의 문제를 중앙아시아 종교사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보았다.인종과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가장 두드러진 까닭은 기마민족 탄생에 있다.청동기시대에 나타난 기마민족은 기마술을 이용한 민족의 대이동을 재촉했다.기원전인 BC 13세기쯤 인도유럽족의 한 갈래인 힉소스족의 기마병이 이집트를 쳤을때 이집트인들은 기마병을 처음 목격했다.그래서 말을 괴물로 여겼다. ○기마술로 민족의 대이동 인도유럽족이 기마술을 선도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보다 앞서 BC15세기말에 말을 처음 보고 산에서 자란 큰 당나귀로 여겼다는 것이다. 어떻든 BC2000년쯤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에 와서 아파나시에보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인도유럽족은 일찍 기마술을 터득했다.이는 정착농경이나 반농경생활로 삶을 꾸려오던 스텝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했다.농경 대신에 가축으로 부를 가늠하는 유목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활동무대도 차츰 넓어졌다.그리하여 그리스어로 스키타이,이란어로 사카라는 왕조들이 BC8세기부터 기원후인 AD4세기까지 스텝지방과 북인도를 지배했다.그무렵 동서인종의 혼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몽골지역에서는 BC4세기부터 흉노가 일어나 서쪽으로 나갔다.AD5세기 중엽에는 아틸라왕이 중부유럽 전역을 완전히 휩쓸어 동서로마제국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몰아넣었다.흉노의 서진은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을 가져왔다.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돌궐 또는 투르크제국이 등장하고,오스만터키는 세계1차대전까지 유럽을 위협하는 대제국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흉노의 후예가 돌궐이다.이들은 여러 종족이 혼합한 정치세력이어서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하다.그러나 언어만큼은 동양어족의 말인 투르크어를 썼다.그러니까 인종으로 보아서는 복합적이었지만,문화적으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투르크족이 8세기쯤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얼핏 투르크민족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특히 중국과 유럽 양쪽 눈에 비친 투르크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어로,때로는 인종적 혈연을 매개로민족의 정체성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다.그들 투루크족들에게는 아직도 같은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 늘어나는 외채(눈높이 경제교실)

    ◎“환율급등으로 상환부담액 1조3,000억 증가” 최근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급등하면서 올해 우리나라는 환율상승 요인만으로 1조3천억원 가량의 외채 상환부담액이 추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주식시장이나 금융시장의 안정을 기하는 것은 물론 외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도 환율안정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민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10원 오를 경우 외채 상환부담액은 2천40억원이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따라서 지난해 달러당 842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이 올해 평균 900원선에만 이르러도 외채상환 부담액은 1조3천억원 가량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외채 위기가 닥칠 것인가. 금융 당국은 외채 수준을 평가하는 각종 지표들을 제시하며 우려할 수준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지난 96년말 현재 총외채(1천47억달러)나 총외채에서 대외자산을 뺀 순외채(3백47억달러),경상GNP 대비 총외채 비율(22%) 등의 지표를 제시한다. 재정경제원 관계자는 “경제력이나 교역규모가 커지면 외채규모도 증가하게 마련”이라며 “우리나라의 GNP대비 총외채 비율은 21.8%로 채권국인 일본이나 독일보다도 훨씬 낮다”고 말했다.총외채 원리금이 1천억달러가 넘는 외형만을 보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급변하는 대내외적 여건들을 감안할 때 불안요인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우경제연구소 한상춘 국제경제팀장은 “경제력이 커지면서 외채의 절대 규모를 줄이기는 힘들지만 올 총외채 규모는 GNP의 27∼28%인 1천3백5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며 외채 증가속도도 빨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저축률이 떨어지는데다 대외 신인도 하락으로 1년 미만의 단기외채 비중이 96년 58.5%에서 올해에는 60%로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따라서 정부가 금융기관을 포함한 국내기업의 대외 이미지 제고에 총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라고 주문했다.〈오승호 기자〉 ◎종류와 계산법 ○상환기간따라 ‘단기’ ‘중장기’로 분류 외국과 거래하기 위해서는 외국돈(외화)이 필요하다.외화는 물건을 팔거나 외국인 관광객의 지출로 수입이 이루어진다.이렇게 벌어들인 외화는 외국물건을 수입하거나 외국관광,유학 등의 비용으로 지출된다.이 때 외화의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빚을 들여와 메워야 한다.이처럼 한 나라가 외국에서 경상수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꾸어온 외화 빚이 외채이다. 외채는 이것 뿐이 아니다.기업이 영업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외국은행에서 빌리거나 외국에서 채권을 발행하여 들여오는 자금도 외채에 포함된다.또한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개인과 기업들에게 외화를 공급해 주고 외국에서 국제금융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도입한 자금도 외채다.이와 같이 외채는 정부 뿐만이 아니라 기업과 은행 등이 외국에서 들여온 빚까지 모두 포함하는 ‘나라의 채무’이다.우리나라의 경우 60·70년대 말까지 정부와 기업이 IBRD,ADB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 도입한 차관이 외채의 주축을 이루었고 90년대 들어서는 금융기관이 영업을 위해 도입한 외채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순외채는 총외채중 대외자산 뺀 금액 한편 개인의 경우 은행에서 대출받은 빚이 있는 동시에 여유자금을예금하는 등 채무와 채권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나라 전체로도 외국에 빚도 있지만 동시에 정부나 기업(개인 포함)이 은행에 맡긴 여유 외화가 있고 은행들이 외국에 예금하거나 해외채권에 투자한 자금이 있다.이들 여유 외화자산과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모두를 합친 것을 그 나라의 대외채권 즉 대외자산이라고 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꾸어온 빚의 합계를 ‘총외채’라 하고 여기에서 해당국이 보유하는 대외자산을 제외한 것을 ‘순외채’라고 한다.또한 상환기간에 따라 1년 이내에 상환해야 되는 것은 ‘단기외채’,1년을 초과하는 것은 ‘중장기외채’라 구분한다.일반적으로 단기외채는 안정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가까운 시일내에 상환해야 되기 때문에 매우 부담이 되는 외채로 간주한다.한편 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행하는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는 상환의무가 없기 때문에 외채에서 제외된다. ◎최대 채무국·채권국 주요 국가별 외채와 대외자산 규모를 보면 경제규모가 큰 미국,일본,영국,독일 등의 선진국이 역시 외채와 대외자산을모두 많이 갖고 있다.OECD발표에 의하면 95년말 현재 총외채는 미국(4조1천2백66억달러),영국(2조4천2백90억달러),일본(1조8천8백75억달러),독일(1조4천8백45억달러)의 순이다.대외자산은 미국(3조3천5백29억달러),일본(2조7천2백48억달러),영국(2조5천62억달러),독일(1조6천7백19억달러)의 순이다.총외채 및 대외자산 기준으로는 미국이 모두 세계 최대의 채무국인 동시에 채권국이다.그러나 순외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이 7천7백37억달러로 여전히 세계 최대의 순채무국이며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은 8천3백73억달러의 순자산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다. ○미·영·일순 빚 많아… 일은 채권 수위 선진국들의 외채는 매우 크지만 경제규모도 크고 대외자산도 많기 때문에 선진국 외채문제는 우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외채문제는 주로 개발도상국에 국한되어 논의돼 왔다.이러한 관점에서 IBRD는 일정소득(95년 1인당 GNP 9천3백85달러) 이하의 개도국만을 대상으로 외채통계를 발표하고 있다.우리나라는 94년까지 외채통계 대상국에 포함되어 왔었으나 95년 1인당 GNP가 1만37달러를 기록,고소득국가로 분류됨에 따라 제외되었다. IBRD의 총외채 통계에 의하면 95년말 현재 개도국중 멕시코가 1천6백57억달러로 제1위이며 그 다음으로 브라질(1천5백91억달러),러시아(1천2백5억달러),중국(1천1백81억달러),인도네시아(1천78억달러),인도(9백38억달러),아르헨티나(8백97억달러)의 순이다.우리나라는 95년말 7백84억달러로 터키를 다소 상회하고 있다. ○개도국선 멕시코·브라질·러순 ‘빚덩이’ 우리나라는 60년대 초 이후 해외차관을 도입하여 경제성장을 성취함으로써 ‘외채에 의한 고도성장국가의 본보기’로 국제적 평가를 받고 있다.이처럼 외채는 재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수 있다.그러나 외채는 빚이고 빚은 원금에 더하여 이자까지 갚아야 한다.외채가 능력 이상으로 크게 늘어나면 원금과 이자를 갚기 어려워지고 이들을 상환하기 위해 추가로 돈을 빌려야 하기 때문에 외채가 누적적으로 증가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외채가 적정하며 위험한 수준인가.나라마다 경제규모와 사정이 다르기 대문에 외채의 절대규모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이 수준을 평가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지표는 경제규모와 총외채를 비교하는 지표와 외채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 등이다. IMF,IBRD 등 국제금융기구에서 주로 이용하는 지표는 다음 세 가지로 각각에서 정한 기준을 넘지 않으면 해당국의 외채가 안정(sustainable)수준이라고 평가한다.①국제수지표상 수출액과 무역외수입액을 합친 경상외환수입액에 대한 총외채의 비율(DER;Debt to Export Ratio)기준 220% ②GNP에 대한 총외채의 비율(DGR;Debt to GNP Ratio) 기준 80% ③경상외환수입액에 대한 외채원리금상환액 비율(DSR;Debt Service Ratio)기준 20%.이밖에 단기외채가 많으면 외채구조가 불안정한 것으로 보아 총외채에서 단기외채가 차지하는 비중 또는 외환보유액에 대한 단기외채 비율 등도 이용되고 있다. ◎국가는 파산하나 ○기업과 달리 국가자산 강제처분 불가능 기업이 지급불능으로 부도상태가 되면 모든 것을 처분하고파산하게 된다.그러나 국가는 외채의 상환불능으로는 파산하지 않는다고 본다.해당국가를 처분하여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1930년대 초 영국 및 프랑스가 1차대전중 미국에 진 빚을 상환할 수 없게 되자 일부 미국인들이 그 대가로 영국령인 버뮤다와 프랑스령인 캐리비언 군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80년대 초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 등 과다 채무국들은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 외채상환불능을 선언하기에 이르러 국제적인 외채문제를 야기시켰다.이때 채권국들은 채무국의 자산을 강제로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IMF,IBRD와 같은 국제금융기구와 채권은행 등을 중심으로 원리금 상환을 늦춰주거나 원금 일부를 삼각해주는 방법으로 해결하였다.즉 국제적인 협조체제하에 구제금융을 통해 채무국이 장기적으로 외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실제로 80년대 초 개도국 외채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한 이후 채권자들은 파리클럽을 통해 96년말 70여개국의 외채 원리금상환액 및 만기일을 재조정(Rescheduling)해 주고 있다.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정책수립 애로 부도난 기업이 채권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경우 영업 및 인원감축 등의 자구노력을 취해야 한다.이와 마찬가지로 국제금융기구나 채권국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과다채무국은 정기적으로 이들과 협의를 거쳐 재정지출을 축소하는 등 구조조정을 위한 경제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이 과정에서 성장률 둔화,금리 상승,실업률 증가 등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된다.더욱이 외채상환불능 등 외채문제의 어려움에 처하면 대외신인도가 크게 하락하여 향후 해외에서는 자금차입이 상당히 어려워진다.따라서 무엇보다도 외채가 과다한 수준이상으로 늘지 않도록 정책당국은 유의하여야 할 것이며 국민들도 해외지출을 억제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 착각속의 아이덴티티/장 프랑수와 바야르(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미 주도 세계화’가 남긴건 불안/주관적 시각으론 내전 등 분쟁이면 못읽어 ‘착각속의 아이덴티티’이라는 구름잡는 듯한 제목의 이 책은 저자인 쟝 프랑수와 바야르의 의도가 주체성의 본질에 대한 의견 제시가 목적이 아니라는 느낌이다.이는 부수적이고 이른바 ‘앵글로 색슨’식의 세계화 즉 초강대국인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세계화가 미래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말하고자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랑스의 석학들의 본산지인 국립과학연구센터 CNRS 소장을 최근까지 지냈고 프랑스 최고의 인재들이 몰리는 그랑제콜인 시앙스포(국립 정치과학대학)의 국제연구센타 소장인 저자가 비교정치학의 대가이며 현실정치에 관한한 프랑스 최고의 전문가라는 사실도 이에 대한 심증을 더욱 굳혀준다. ○나치 탄생도 동일선상 저자는 이 책에서 우선 현세계는 아이덴티티에 대한 착각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이는 최근 최선의 조류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주도의 세계화를 도마에 올렸다.주장의 논거는 다소 미국식의 획일화된 세계화,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통일화 또는 획일화로 블록화로 귀결되는 현 시대적 조류에서 찾고 있다.특히 앵글로색슨 문화에 대해 문화적 국수주의 색채가 강한 프랑스 지식인의 주장이지만 논리의 전개가 문화적 이론에서 출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저자는 지금의 세계화를 사회조직체에서 벗어나는 잘못된 세계화로 보고 자신의 논리를 이어나가고 있다.이는 자신의 것을 보호하자는 각 조직체의 문화주의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오히려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을 내리고 있다.21세기에 세계를 위험에 몰아넣는 최대의 요인인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고 있다. ○주체성 살리는 길 돼야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시장 경제의 확장,서구사회의 근간인 민주주의의 강요,무역 및 정보전쟁의 가속화,미국의 다문화주의 이슬람 종교분쟁 인도의 종족분쟁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1차대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나치주의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한다. 그는 진정한 세계화는 다양성의 창조라고 해석하고 있다.즉 다양한 주체에 의한 아이덴티티의 형성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라는 것이다.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시점에서 최고의 선으로 비치고 있는 세계화가 지역화 동일화 블록화 등의 복합개념으로 오도되고 있다는 평가다.문화의 다양성이나 독창성에 대한 변화는 보다 크게 동일화 또는 통일화 되는 형태로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유고나 알제리 내전 등이 세계주의에 대항한 아이덴티티 때문에 일어난 분쟁으로 보고 있다.하나의 연방이나 국가를 똑같은 문화 또는 정치 등의 동일한 아이덴티티로 묶는다는게 오히려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책의 제목에서 말하듯이 아이덴티티에 대한 환상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며 미래사회 최대의 불안 요인이라는 저자는 주장한다. 그는 제각기의 주체성 아이덴티티를 정치적이나 이데올로기적인,결국 역사의 창조에 이르는 문화창조에 훌륭한 역할을 하는 요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렇지만 이는 유교주의가 아시아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게 아니듯이 태생적이거나 운명적인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이처럼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현재 서구사회의 큰 형식중의 하나가 종교개혁에서 비롯됐다고 알고 있는 것도 너무 일반화시킨 아이덴티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이는 사회변화의 개념을 규범적이며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으로만 보기 때문이라는게 저자의 설명이다.민주주의의 변천사에 대한 추론이나 시장경제의 과정 등으로 현대화로 대변되는 서구사회를 평가해온 결과라는 것이다.대표적인 반론의 증거로 저자는 미국달러의 세계적 규범화를 들고 있다.달러는 역사의 흐름 속에 정제되어 새로운 세계적 화폐의 아이덴티티가 없다는 대목을 들었다.실제로 저자의 주장대로 달러의 강세는 유로통화 등 반대적 화폐 아이덴티티 형성 즉 분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문화의 영속성 즉 아이덴티티를 역사의 흐름으로 이어가는데는 다른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불확실한 부분이지만 확실성 부분은 이보다 더 많다고 말한다.아이덴티티의 문화 그 본질의 개념은 이율배반적으로 경제적인 발전이나 정치적인 활동을 문화적인 차원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는 이색적인 논리다. ○전략·환상·악몽이 지배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볼때 우리들에 힘을 부여하는 고유의 아이덴티티는 없는 셈이다.저자도 단지 아이덴티티를 이용한 전략,이를 만드는 요소,그리고 아이덴티티에 대한 환상이나 악몽만이 그시대에 존재할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따라서 21세기를 앞둔 현시점에서는 주체성의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시급한 문제는 없는 셈이다.저자는 전세계의 각 조직이나 정파는 이른바 ‘아이덴테테의 전쟁’으로 명명된 그들만의 자발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러면 저자의 해결책은 무엇인가.아주 간결하다.‘현대화의 창조와 같은 전통의 창조’,‘세계화의 개념과 같은 문화주의’의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원제는 ‘L’Illusion Identitaire’,프랑스 파야르출판사 발행,306쪽 130프랑.
  • 새 한은법 입법 순조 예상/재경원,금통위와 분리안 철회

    ◎한은,오늘 2차회의 참석키로 ‘중앙은행 제도와 금융감독제도 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재정경제원이 낸 수정안에는 원안보다 한국은행의 입장을 수용한 내용이 적지않아 통과가능성이 종전보다 높아졌다. 한은으로선 가장 바람직한 내용이 금융통화위원회와 한국은행(앞으로는 한국중앙은행)이 분리되지 않는 것.새로 생기는 무자본 특수법인인 한국중앙은행내에 금통위와 집행부(현재의 한은)를 두게 돼 한은이 그동안 주장한 것과 같다.재경원은 그동안 금통위를 한은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은은 무자본 특수법인이어서 통화신용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게 재경원의 논리였지만 번복됐다. 재경원장관이 금통위에 의안을 제안할 수 없도록 하고 재경원 장관과 금통위 의장(한국중앙은행 총재 겸임),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간의 월 1회 정례협의 조항을 삭제한 것도 통화신용정책 중립성에는 보탬이 되는 대목이다. 한은 한 부장은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을 위해서는 개선된 안”이라고 평가했다.물론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한국은행을 없애고 한국중앙은행이라고 한 것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다.감독기능이 사실상 없어진 것도 불만사항이다.그럼에도 강경식 부총리는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위해 더 나은 안은 없다”고 했다.이경식 한은총재도 “이제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만족해 하고있다.문제는 국회다.국민회의와 자민련 등은 그동안 차기 정부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그러나 한은도 12일 열리는 법령작업반의 2차회의부터는 참석키로 하는 등 한발 물러서 야당이 한은의 불만을 일부 수용하면서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도 있다. 재경원과 한은은 지난 30여년간 한은법을 놓고 지루하게 싸워왔다.87∼89년의 ‘1차대전’과 95년의 ‘2차대전’에서도 국회통과가 안됐다.‘3차대전’ 결과가 그래서 주목된다.
  • 윌리엄 페리 미 전 국방장관 국제교류재단 초청강연

    ◎한·미·일 협력강화가 아태안보 핵심/북핵위협 상존… 미군주둔 통해 전쟁방지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은 27일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국제교류재단 초청 강연회에서 『한국·일본과의 안보협력은 계속될 것이며 이것이 아시아 태평양지역 안보의 핵심』이라고 밝혔다.「아시아 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안보정책」이란 주제의 그의 강연을 요약한다. 50년전 나는 젊은 군인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처음 찾았다.그때에는 2차대전으로 피비린내나는 참상이 보여지는 시기였다.나는 그것을 잊을수 없다.1차대전이후 세계 불간섭을 부르짖었으나 한세대도 못가서 다시 2차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보고 반성한 미국은 2차대전시 이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즉각 개입했다. 미국은 지금 전쟁수행보다는 전쟁방지에 몰두하고 있다.인류의 말살이라는 엄청난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핵무기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정책은 한국과 일본의 동맹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그리고 우리의 안보전략은 지난94년 한국에서,95년 일본에서,그리고 96년중국에서 보여진 예를 통해 왜 미군이 이지역에 주둔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의 예는 북한의 위협이다.북한은 1백만명이 넘는 병력과 비무장지대 100㎞이내에 엄청난 화력을 집중,한국을 위협하고 있다.그러한 북한군은 병력수에서 절반도 안되는 한국군,작지만 화력이 강한 미군,그리고 미국의 신속배치군등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그런데 지난 94년 북한은 사용후 핵연료로 플루토늄을 추출,5∼6개의 핵폭탄을 제조한다는 으름장을 놓았고,미국은 이에대해 이를 그냥 놔두느냐 아니면 재래식 전쟁을 수행하느냐에 대해 심각한 선택을 해야했다.이때 평양을 방문중이던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백악관은 북한과 제네바핵헙정을 맺었으며 이후 북한은 그 약속을 유지하고 있다. 냉전시절 일본과 이지역의 안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그뒤 기술부문에서 앞서가는 일본과 미국은 경쟁상태에 놓였고 이것은 이 지역 안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일본은 반도체 등 기술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앞서나간 반면 미국은 민간기업과 대학 연구소,그리고 많은 벤처기업 등을 바탕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정보기술쪽으로 발전해가고 있다.이같은 일본과 미국의 경쟁은 95년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미군의 일본인 여성 강간사건으로 더욱 고조됐었다.이에 미국은 오키나와 특별조사단을 만들자고 일본에 제안했고,그들은 그 임무를 잘 수행했다.이에따라 하시모토 일본총리와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도쿄에서 만나 마침내 공동안보선언을 하게됐다. 중국의 예는 96년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정규훈련을 내세우며 미사일발사훈련을 해 긴급한 상황이 전개됐었다.「하나의 중국」정책을 가진 미국은 중국에 대해 훈련중단을 요구한데 이어 이 지역에 항공모함을 보내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그러나 대만해협에는 보내지 않아 전쟁의 의지는 없음을 보였다.그 결과 중국은 미사일발사를 중지했다.이들 예는 미군이 이 지역에서 주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결론을 말하면 이 세가지 예는 미국의 다음세기 아·태지역 안보정책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우리는경제적 이득을 위해 이 지역 안보에서 계속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다.미국의 안보전략은 이 세나라와의 강력한 동맹관계에 기초하며 강력하고 즉각 대처 가능한 미군의 유지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정리=최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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