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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귀정양 1주기/성대서 추모행사/사노맹 현수막 등장

    성균관대를 비롯한 서울시내 대학생 2천여명은 25일 하오2시쯤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김귀정양의 1주기 추모식을 갖고 김양이 숨졌던 중구 퇴계로4가 쪽으로 나가 거리굿을 가지려고 교문을 나서다 경찰에 막히자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집회에는 「모진 탄압에도 굽힘없이 항상 민중형제들과 투쟁한다」는 「사노맹」의 대형플래카드와 「사회주의」라고 쓴 깃발을 흔드는 모습을 그린 「사노맹 수도권위원회」의 대형 그림이 나붙기도 했다.
  • “사노맹 선봉은 「공장소조」·「전민학련」”/안기부 발표

    ◎노사 극렬투쟁·대학 과격시위 선동/69개 기업 침투,조직활동/공장소조/70개대 1천2백명 포섭/전민학련/전국에 「고교생실천위」 구성도 착수 「남노당」이후 최대규모의 좌경지하조직으로 드러난 「사노맹」은 전국 각지의 공장과 대학,심지어 고등학교까지를 혁명의 요새로 만들 계획을 세워온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안전기획부가 15일 발표한 수사결과 이른바 「공장소조」로 불리는 「사노맹」의 혁명전진조직은 현재 구로·인천·성남·마산·창원등 전국 69개 공장에 침투,3백10명의 조직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노맹」은 사회주의혁명의 완수를 위한 1단계 작업으로 조직원들을 공장에 위장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조직한뒤 2단계로 「공장위원회」를 건설하며 94년초까지 지하혁명지도부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한다는 단계별 계획을 수립해왔다고 안전기획부는 밝혔다. 임금과 후생복지등에 불만을 가진 근로자들이 중심이 돼 조직된 「공장소조」는 노사분규때마다 극렬투쟁을 선동해왔으며 특히 올해초부터는 노조중심의 투쟁활동에서 벗어나 「공장사회주의운동」으로 전환,대기업침투를 기도해왔다는 것이다. 「사노맹」이 「공장소조」를 조직한 전국의 산업체는 수도권에 아남산업 동부기계 한라중공업 영창악기 해태제과 대우자동차등 30개공장에 1백40명이며 중부권에 태평양화학 맥슨전자등 14개 공장 46명,영남권에 현대자동차 풍산금속등 14개 공장 69명,호남권에 아시아자동차 광양제철등 11개 공장 55명등이다. 「사노맹」은 이들 산업체의 노동조합을 혁명투쟁의 교두보로 삼고 조직원을 침투시켜 노조원들에게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을 불어넣어 기업주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고 투쟁에 앞장서도록 선동했다는 것이다. 포섭된 조직원들로 하여금 「노동해방선봉대」와 「사회주의선봉대」라는 투쟁조직을 만들어 지난해 5월 강경대군 치사사건 시위현장,아시아자동차 노사분규현장,지난해 8월 광양제철 노사분규,지난해 11월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노동자집회」등에 개입,과격 폭력시위를 배후조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사노맹」은 이와함께 투쟁선봉대 역할을하는 전국의 학생조직을 장악할 목적으로 각 대학의 「비주사파」 학생들을 규합,「전민학련」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현재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등 전국 70개대학에 1천2백여명의 조직원을 확보,「사노맹」의 조직이념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수사결과 밝혀졌다. 지난 1월에는 총책 백태웅씨(29)의 지시로 「전민학련」을 「사노맹」체제에 맞게 「남한 사회주의 학생동맹」으로 바꾸어 사회주의 혁명조직임을 명백히 했으며 조직원을 추가 포섭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민학련」이 극렬투쟁을 벌인 시위는 지난해 2월 서울 신답전철역 앞에서의 집회와 다음달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정치집회가 끝난 뒤의 폭력시위,지난달 강경대군 사망1주기 추도식에서의 시위등 여러건이 있었으며 오는 19일의 「민자당」전당대회일에도 화염병 5천여개를 준비,폭력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안기부는 밝혔다. 안기부는 또 「사노맹」이 「고등학생 정치활동을 위한 공동실천위원회」를 구성하는등 고교생들까지 조직원으로 포섭하려했다는 사실을 중시,집중 수사를 벌이고 있다.
  • 의경아버지의 자살을 보며(사설)

    숨진 의경 아들을 묻고 온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한 채 슬퍼하다가 끝내 음독자살해 버렸다.그 아들 최성기의경은 1년전 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에 맞고 치료를 받아오다가 지난 23일 숨을 거둔 터였다.우리의 현실을 한번 더 되돌아보게 하는 처연한 죽음이다. 최의경이 숨진 23일은 또 한 사람의 의경이 자살한 날이기도 하다.서울 종암 경찰서 본관 4층 상무관에서 10여m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죽은 노봉섭 상경이 그 사람이다.노상경 또한 1년전 시위를 진압하던 중 시위군중쪽에서 날아오는 돌에 머리를 맞고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은 건졌으나 후유증에 시달려 오다가 괴로움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대학생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젊은이이듯이 의경 또한 우리의 미더운 젊은이이다.다 같이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주역들이다.그러한 우리의 젊은이들끼리 대치하다가 목숨까지 잃게도 되는 자기소모를 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우울하게 한다.그뿐 아니라 시국문제로 해서 대학생이 죽었을 때는 소리 높여 규탄하던 일부 인사들이 똑같은 우리의 젊은이인 의경의 죽음에는 무관심한 것 또한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우울하게 한다.아들의 죽음을 뒤따라간 부정의 음독자살속에는 그러한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야속한 마음도 얹혀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교육부가 얼마전 발표한 바에 의하면 대학가의 시위는 지난해에 비해 3분의1 정도로 줄어들었고 과격성에서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이는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시위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화염병이나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시위는 끊이지 않고 있고 그 현장에는 또 어김없이 의경이 투입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강경대군 1주기 추모행사를 전후하여 부쩍 늘어난 시위도 과격성을 띠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29일에 있은 성대생들의 이화파출소 습격사건도 그것이다.몇십명이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시위과정에서 학생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7명의 의경이 부상했고 2명의 의경은 그들에게 끌려가 10시간 가까이 감금되기도 했다.다쳤던 의경이 죽고 죽은 의경의 아버지가 자살한 뒤의 사태라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사건이었다. 최근에 대학생들의 시위를 시민들이 나서서 말린 일이 여러번 있었다.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국민들은 명분이 희미해진 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넌더리를 내고 있다.더구나 폭력을 동반한 시위에 대해서는 더말할 것이 없다.국민들은 대학생들의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면학의 자세를 바라고 있다.또 그길이 대학과 대학생의 본령이기도 하다. 이번 두 의경의 죽음과 한 아버지의 자살이 대학사회에도 보다 심각한 성찰의 계기를 지어줌으로써 폭력시위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면 한다.대학이 대학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될 때 슬프게 죽어간 이 죽음들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 「강군 1주기」행사 밤샘준비/명지대직원 과로사

    명지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과장 조용씨(50)가 지난23일 고 강경대군 1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던중 과로로 쓰러져 이틀만인 25일 낮12시30분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명지종합병원에서 숨졌다. 조씨는 지난22일부터 시작된 강군 추모행사 준비를 위해 이달초부터 거의 매일 철야근무를 해오던 중 지난23일 하오8시쯤 명지대학생들의 가두시위를 지켜본뒤 본관앞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다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명지대 법대를 졸업한 조씨는 지난69년부터 모교의 교직원으로 일해왔으며 지난90년 3월부터는 학생과장을 맡아 지난해 강군 치사사건당시에도 학생들과 학교사이의 조정역할을 수행하느라 어려움을 겪었었다.
  • 강군추모 학생들/화염병 격렬시위

    【광주】 명지대등 서울지역 대학생과 전남대등 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남총련)소속 대학생등 1천여명은 26일 하오4시부터 전남대 5·18광장에서 「고 강경대열사 혁명정신 계승과 5·18 성지순례단 실무자 파견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졌다. 강군 폭행치사 1주기를 맞아 열린 이날 대회에는 강군의 모교인 명지대생을 포함 서울지역 대학생 3백여명이 참석했으며 서울지역 학생들은 대회를 마친뒤 버스에 나눠타고 망월동 5·18묘역의 강군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대학생들은 대회를 마친뒤 『민자당 박살』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행진을 벌인데 이어 정문과 후문으로 가두진출을 시도,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2시간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강경대군 추모대회

    명지대학생 강경대군의 1주기 추모대회가 명지대를 비롯,25일 전국 10곳에서 열렸으나 별다른 사고없이 끝났다. 학생·근로자 등 4천5백여명은 이날 하오2시 명지대 운동장에서 강군의 1주기 추도식을 갖고 교문밖으로 진출,모래내까지 1.5㎞의 도로를 따라 행진했다.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 명지대생 2천명/강경대군 추모굿

    명지대학생 2천여명은 24일 하오2시쯤 학교운동장에서 「강경대군 제1주기 거리추모굿」을 가진뒤 교문밖으로 나가 연희동 홍남교와 성가병원등을 거쳐 다시 학교까지 4.5㎞구간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 대학가 화염병 재등장/동국·광운대생 도로점거 시위

    대학가 시위에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이던 화염병이 다시 등장,서울 일부에서 격렬한 시위양상을 보였다. 동국대생 4백여명은 23일 하오 4시부터 서울 중구 충무로 4가 대한극장앞 6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화염병 시위를 벌여 이 일대 교통이 2시간여 동안 큰 혼잡을 빚었다. 학생들은 학교앞 6차선 도로를 점거,「안기부·기무사 해체」 「정권타도」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청앞까지 행진하려다 경찰이 저지하자 화염병 3백여개를 던지며 시위를 벌인뒤 자진해산했다. 또 광운대생 1백여명은 23일 하오 3시부터 교내 민주광장에서 「강경대열사 1주기 추모식및 등록금투쟁 보고대회」를 가진 후 학교앞 4차선 도로를 점거한채 화염병을 던지며 1시간여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현정권은 국민의 생존권을 외면한채 추악한 대권다툼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비난하고 ▲국가보안법 철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연기 철회 ▲양심수 석방 등을 주장했다.
  • 판화선구자 강국진씨 49재행사(미술화제)

    ◎18일 마석 모란공원묘지서 추도모임/한성대선 15일부터 스승추모전 열어 지난3월1일 한창 일할나이인 54세에 병사한 서양화가 강국진씨의 49재 추모행사가 주변친지들에 의해 조용히 추진되고있다. 49재 당일인 오는18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행사를 치른후 바로 맞은편에 있는 모란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기리는 추도모임이 있게되는데,절친한 동료이자 화가인 김차섭 김한씨등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또 생전에 그가 재직하던 한성대학미술과 제자들은 강씨 주도로 올해 창립된 그룹 「제삼의 장」의 창림전(8∼14일 관훈미술관,15∼25일 한성대학내 우촌미술관)을 갖고 이 전시회를 스승을 기리는 추모전으로 바치고 있다. 1939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서울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온 강씨는 지난60년대후반 국내에서는 거의 접할수없었던 행위미술을 선보였고,당시 판화공방을 차려 판화제작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강씨는 70년대에 들어 유화와 판화작업을 병행하며 11회에 이르는 개인전과 20회를 넘는 단체전 출품등으로 서양화단의 입지를 굳혀왔다. 7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형성작업의 제일선에 서있었던 작가로 평가되고있는 강씨의 작업은 15년여의 독특한 선작업과 최근 5년여에 걸친 「역사의 빛」작업으로 대별된다. 평소 건강하던 강씨의 예고없는 급사에 아직도 충격을 씻지못하고 있는 미망인 황양자씨는 『그분의 자료와 유품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것 같아 유작전은 1주기에 가서 마련될것같다』고 밝히고 미술학도로서의 전공을 뒤늦게나마 살려 먼저 간 강씨의 예술정신을 자신의 작업속에 되살려나가겠다고 말했다.
  • 천씨 1주기,후학들 펴내/「천관우 산문전」(화제의 책)

    「천관우 산문선」 언론인과 사학자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고천관우씨의 산문집.지난해 1월14일 작고한 고인의 1주기를 맞아 56년부터 84년 사이 신문·잡지 등에 실렸던 글 76편을 한데 모았다. 고인의 전집을 기획하고 있는 후학 몇이서 전집간행에 앞서 고인의 1주기를 기념해 펴낸 것으로 비록 소책자이지만 지은이의 대가적 편린들을 엿보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제1부 시상·수필편에는 「나의 학문의 길」등 40편을,제2부 기행문편에는 「남한강 천삼백리」「8월의 동해안」「그랜드 캐년」등 국내외 기행문 36편을 실었다.심설당 4천원.
  • 해위 1주기 추도식

    해위 윤보선 전대통령 1주기 추도식이 18일 상오 서울 정동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 최규하·전두환전대통령과 김영삼민자당대표·이우정신민당수석최고위원 등 각계인사 1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 분신 고교생 숨져/광주서… 16일만에

    【광주=최치봉 기자】 지난달 18일 교내에서 5·18 11주기 추모집회 도중 분신,전신 3도 화상을 입고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전남 보성고등학교 3년 김철수군(18)이 입원 16일 만인 2일 상오 11시30분쯤 아버지 김종국씨(51) 등 가족과 학교친구 등 1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졌다.
  • 20대 시위연행자/이틀째 혼수상태

    【제주 연합】 지난 18일 광주민주항쟁 11주기를 맞아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돼 유치장에 구류중이던 북제주군 조천읍 농민회 교육부장 전우홍씨(29·조천읍 신촌리 195)가 지난 20일 하오 두통과 함께 구토증세를 일으켜 제주시 한국병원으로 옮겨진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 병원측의 진단 결과 전씨는 뇌좌상과 뇌부종이 확인됐고 뇌출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시위자제” 호소/광주시장 회견

    【광주】 이효계 광주시장은 20일 금년 5·18 11주기 기념행사와 강경대군 장례시위로 지역불안이 가중되고 인명과 재산피해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등 시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다며 시민과 학생들에게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 “대결서 수습으로” 정국 가닥잡기 부심

    ◎「5·18고비」 넘긴 여·야의 움직임/「광역」 앞세워 장내유도… 막후대화 모색/민자/당분간 장외집회 공세… 투쟁수위 고심/야권/분신악재 돌출에 긴장… 재야의 움직임이 변수 노제공방,5·18 기념행사 등과 관련한 시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감각을 찾지 못했던 정치권이 「5·18」을 고비로 정국수습의 실마리를 찾을지 정가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여권은 주초부터 종합적인 국정쇄신방안 제시 등으로 장외정치를 장내로 끌어들여 국면전환을 시도한다는 방침이다. 신민·민주당 등 야권은 장외집회 등을 통해 국민여론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장내진입여부를 타진할 것으로 보이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민자당◁ ○…그 동안 노태우 대통령과 각계 원로 및 김영삼 민자당대표와의 회동 등을 통해 민심수습방안의 윤곽 및 수순이 정리돼 가고 있어 이번 주초부터 관망과 모색의 「수세」에서 벗어나 시국치유책을 단계적으로 제시할 경우,국면전환을 이룰 것으로 기대. 그러나 강경대군 장례식과 5·18 기념행사 등으로 시국관련 시위가 피크에 이른 18일에도 고교생 등 2명이 또다시 분신자살을 기도하는 등 「치사정국」의 진정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악재가 돌출하자 일부 시국처방전의 제시시기에 다소 혼선을 빚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며 여론의 향배를 예의주시. 시국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는 상황에서 보안법 위반사범 등의 대폭적인 가석방이나 사면조치 등이 발표되더라도 「약효」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데다 반사적으로 재야의 목소리가 계속 수그러들지 않게 되면 야권을 장내로 끌어들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 민자당은 그러나 최근 시국상황 등과 관련,잇따른 분신기도 및 과격시위 등에 대해 국민들이 크게 불안해하고 우려의 눈빛을 보이고 있는 만큼 신민당과 민주당 등 야권도 19일의 대전 부산집회를 가진 뒤 광역의회선거에 대비한 여권의 막후대화제의에 응할 것으로 관측. 민자당이 이날 신민당의 장외집회를 강도높게 비난한 것도 대화의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야 쪽에 발목이 묶인 야당을 측면 지원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당주변의 설명. 민자당은 이와함께 노태우 대통령의 국정쇄신 방안제시가 이번주부터 본격 가시화된다는 점을 의식,시국처방 등과 관련,당정간에 인식 및 견해차이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내각개편 가능성을 포함한 구체적인 방안이나 수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 20일 시국수습방안과 관련 임시당무회의를 가질 예정이던 계획을 김영삼 대표가 취소토록 한 것도 청와대 등과 불협화음이 제기되는 듯한 오해를 불식하고 당정간의 일체감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 ▷신민당◁ ○…청와대·총리실 등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노재봉 내각 사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신민당은 내각사퇴 이후의 원외투쟁의 방향과 「수위」를 벌써부터 고심하는 분위기. 신민당측은 『느낌과 모종의 정보에 근거를 두고 있다』(박상천 대변인)며 노 내각 사퇴를 시간 문제로 간주하고 있으나 내각사퇴 이후 곧바로 여권이 바라는 대로 시국수습에 「동참」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 왜냐하면 이우정 수석최고위원을 비롯한 친동교동계 재야가 신민당에 합류함으로써 신민당의 재야에 대한통제력이 현저히 약화됐을 뿐만 아니라 신민당으로서도 광역선거를 앞두고 제한적인 여야대결분위기를 지속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계산하고 있기 때문. 이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신민당은 내각사퇴가 이뤄질 경우 『신민당의 요구로 얻은 최소의 전리품』이라는 식으로 대국민 선전효과를 겨냥하는 한편 ▲후임 총리의 성격 ▲내각사퇴의 폭을 문제삼아 『완전한 「공안통치」 종식이 아니다』라며 대여공세를 계속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김대중 총재가 이날 「5·18」 11주기 기념식에서 『민주인사로써 내각을 만들도록 노 대통령에게 강력히 충고한다』고 밝힌 것이나 『단순히 노 총리 한 사람이 바뀌는 것보다 후임자의 성격·개각폭 등을 종합 고려해 장외투쟁방향이 결정될 것』이라는 김영배 총무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 다만 이번 대결분위기가 장기화되는 것이 불리하지는 않다는 정세분석을 하고 있는 신민당으로서도 김대중 총재의 대권도전 「3수가도」에 결정적으로 차질을 빚을 「파국」을 원하지 않는 것도 사실. 이날 광주현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에 이우정 수석최고위원과 광주·전남 출신 의원들만 보낸 것이나,서울역 앞 강군 노제에 일부 의원과 당직자들만 참석시키고 김 총재 자신은 불참한 사실이 이를 반증. 이렇게 본다면 신민당은 우선 19일 대전장외집회를 예정대로 치른 뒤 나머지 장외집회 일정과 방식은 공권력과 재야운동권의 「격돌」을 지켜보는 여론의 향배에 따른 재조정할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대두. 즉 군중동원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 장외집회에 재야운동권이 대거 가세해 예기치 않은 불상사를 초래할 경우 광역의회선거는 물론 김 총재의 대권전략에 커다란 역기능을 초래할 것을 우려,장외집회 일정을 상당부분 축소하거나 옥내집회로 변경할 것이라는 예측. ▷민주당◁ ○…18일 광주항쟁기념식과 강군 장례식의 거당적 참석과 19일 부산집회를 통해 시국분위기를 「정권퇴진」 쪽으로 몰아간다는 계획 아래 당력을 집중. 이기택 총재는 이날 상오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민자당 해체 및 획기적인 민주화 조치인 제2의 6·29선언이 선행되지 않으면 정권퇴진운동을 강력히 전개해 나가겠다고 주장.
  • 여인·고교생·버스기사/어제 3명 또 분신/여인은 죽고 고교생 중태

    【광주=최치봉 기자】 18일 상오 10시20분쯤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이 학교 3학년5반 김철수군(18)이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전남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으나 중태다. 병원측은 『김군이 이날 하오 4시30분부터 상태가 극도로 악화돼 현재로는 소생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고 밝혔다. 이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에 따르면 이날 상오 9시30분쯤부터 학생회 주최로 『5·18 11주기 추모행사를 열고 있던 중 김군이 3층 본관건물 동쪽에서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채 행사장 쪽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치며 30여 m 뛰쳐나오다 쓰러졌다는 것이다. ○기사,생명 지장없어 또 이날 하오 5시50분쯤 광주시 북구 신안동 전일여객(주) 주차장에서 이 회사 소속 버스운전사 차태권씨(32·전남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가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복부 등에 2도화상을 입고 광주시 북구 중흥동 효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병원측은 차씨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밝혔다. ○철길서 인도로 투신 18일 상오 11시40분뜸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정문 앞 철길 위에서 이정순씨(39·여·송파구 가락본동 170의2)가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인 뒤 12m 아래 인도로 뛰어내려 숨졌다. 이씨는 유서에서 『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랑스러운 자녀에게 바칩니다』 『광명과 사랑으로 평화통일 이루소서』라고 적었다.
  • 광주선 7만명 추모집회/금남로 일대서 산발시위도

    【광주=임정용·최치봉 기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11주년인 18일 광주시내는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에 이어 전국으로 확산된 분신자살 파문으로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추모식과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상오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 묘역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항쟁 11주기 추모식에는 전규랑 유족회장(56) 등 유족과 시민·학생 등 참배객 1만여 명이 참석,고인들의 넋을 기렸다. 추모식에 참석했던 유족과 시민·학생들은 보성고교 김철수군의 분신소식이 전해지자 하오 3시쯤부터 광주시 동구 금남로3가 광주은행본점 사거리를 중심으로 금남로·중앙로·충장로 일대에 모여들어 「고 강경대열사 폭력살인규탄 및 박승희 학생 광주전남대책회의」 주최로 열린 5·18 광주민중항쟁 계승 및 노 정권 퇴진을 위한 제5차 국민대회에 참석했다. 경찰의 집회허가를 받아 열린 이날 대회는 7만여 명의 시민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이광우 「5추위」 회장의 기념사와 오종렬 대책회의 공동의장의 대회사,도시빈민 노동자 학생 등 각계 대표의연설·결의문·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대회를 마친 시민 학생 2만5천여 명은 이날 하오 8시50분쯤 집회장소인 광주은행 앞 4거리에서 5백여 m 떨어진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려다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광주시 동구 충장로1가 시내 중심가 곳곳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강군 운구행렬 도심진입 불허/광주시장 강조

    【광주=임정용 기자】 이효계 광주시장은 17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의 장지가 망월동 5·18 묘역으로 결정돼 강군의 운구행렬이 18일 광주에 도착할 것으로 보이나 운구행렬의 광주도심 진입만은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시장은 이날 상오 11시 관내 4개 구청장과 98개 동장·출장소장을 긴급 소집,5·18 11주기에 따른 지역안정대책을 제시하는 자리에서 외지인이 광주에 와서 시위를 하는,소위 광주시위 장터화의 의도를 지역안정과 질서유지 차원에서 단호히 배격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강군의 운구행렬이 광주에 도착해 도심진입을 시도할 경우 시민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겠다고 말했다.
  • “18일 강군운구 도착해도 광주에선 추모제 어렵다”/광주 대책회의

    ◎「5·18」 기념행사 겹쳐 곤란 【광주=최치봉 기자】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규탄 및 박승희 학생 분신 광주전남대책회의」는 16일 강군의 장례일과 관련,『5·18 11주기를 맞아 추모제와 각종 집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19일 강군의 시신이 광주에 도착하더라도 추모행사를 실질적으로 갖기 어렵다』고 밝혔다. 「대책회의」는 이날 『강군의 장례일이 5·18행사와 겹쳐 혼란이 우려되므로 장례일정 조정 등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 「범대위」측에 대표 2명을 파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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