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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軍 장성급 98명 진급·전보인사

    ◎대령 74명 준장으로… 하나외 1명 5년만에 별달아 정부는 22일 육군 군단장급(중장) 3명을 포함해 육·해·공군 소장 21명,준장 74명 등 모두 98명에 대한 정기 진급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 金熙中 1군참모장(54·육사 25기),鄭重民 국방부 군수국장(52·육사 25기),金勝廣 육군 교육사령부 전력개발부장(54·육사 25기) 등 3명의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군단장으로 발령됐다. 육사교장에 吳南泳 특전사령관(53·육사 24)기)이 보임된 것을 비롯,육군 교육사령관에 朴寧益 육군 참모차장(55·육사 23기),육군 참모차장에 姜信六 1군단장(55·육사 24기),국방정보본부장에 李鍾玉 중장(54·육사 24기),국방대학원장에 金熙相 1군부사령관(53·육사 24기) 등 중장 5명이 각각 수평 이동했다. 해군은 金成萬 해군본부 교육훈련감(해사 25기)등 2명이,공군은 張喜千 1전투비행단장(공사 19기)등 2명이 각각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했다. 정부 또 朴淸旭 육군 65사단장(학군 6기)등 11명을 준장에서 소장 진급과 동시에 사단장으로임명하고 許星 통신학교장(통신 51기) 등 6명을 임기제 소장 진급과 함께 해당 전문직위에 보임했다. 이와 함께 육군 48명과 해군(해병대 4명 포함) 16명,공군 10명 등 모두 74명의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새로 별을 달았다. 특히 문민정부 당시 대대적인 숙정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아온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 李모대령(육사 29기)이 군화합 차원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 하나회 출신이 장군으로 진급하기는 93년 이후 처음이다. 국방부는 다음달 초 후속인사를 단행할 계획이다. 국방부는 “당면한 국방개혁 및 국방업무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개인능력과 전문성,도덕성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국가와 군에 공헌할 미래지향적인 인재발굴에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 ‘별들의 이동’ 내주 將星 인사 시작

    ◎15일 준장 진급 심사… 육·해·공군 68명 대상/하나회 구제여부 관심… 중장·소장은 소폭 군의 정기인사가 오는 15일 장성급(준장) 진급심사를 시작으로 본격화될 것으로 알려져 그 규모와 범위에 군 안팎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직급에 따른 근무 연한(통상 2년)을 가능한 한 지킨다는 千容宅국방장관의 발언 등을 감안하면 이번 인사는 지난 4월의 대폭적인 인사와는 달리 소규모가 될 것이라는 게 군관계자들의 전망이다. 3성장군의 인사요인은 계급정년으로 연말쯤 물러나는 李鎬昇 국방대학원장,韓勝義 육사교장 등 두자리.여기다 소장이 대행하고 있는 국방부 정보본부장,합동참모본부의 직제개편에 따라 신설되는 인사군수본부장 등을 포함하면 4자리다. 이에 따라 보직근무기간이 1년6개월이 된 6·7·11군단장,특전사령관 가운데 적어도 2∼3명의 자리바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정보본부장 자리에는 마땅한 정보통이 없이 金仁鍾 정책보좌관이 조심스레 점쳐진다. 군단장으로 나갈 후보로는 소장인 李善珉 육군개혁위원회 부위원장(학군6기),崔東鎭 육본 전력기획부장(육사25기),金熙中 1군참모장(〃),朴英一 육본 정보작전부장(〃),鄭重民 국방부 군수국장(〃)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9명 가량의 물갈이가 예상되는 사단장은 육사 27기 5∼6명과 갑종·학군 3∼4명이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3사1기생의 사단장 진출 여부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준장진급으로는 육군이 48명,해군 12명,공군 8명 등 68명으로 육군의 경우 하나회 출신의 구제 여부가 관심사다.29기의 趙모대령,李모대령,朴모대령 등이 진급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2명은 구제되지 않겠느냐는 게 군관계자들의 분석이다. 한편 공군은 지난 4월 朴春澤 참모총장이 취임했고 해군 역시 柳三男 참모총장의 임기가 내년 4월까지여서 통상 총장의 퇴진에 맞물려 이뤄지는 소·중장급 진급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중부 물난리­피해 복구 구슬땀

    ◎“길잇고 닦고 치우고” 재기 온힘/군부대 굴착기·헬기 등 동원 대민지원/경찰인력 2,800명 유실도로·교량 복구/고대 병원 등 의료기관들 자원봉사 동참/공무원들 철도·도로재개통 밤샘작업 장대비가 주춤해진 7일 민·관·군·경은 손을 맞잡고 수마가 할퀴고 간 서울 및 경기 북부지역에서 본격적인 수해 복구작업을 펼쳤다. 특히 군은 이날 수해지역에 4,400여명의 병력과 발전기,방역차량,굴착기 등 장비를 긴급 투입해 파손된 도로와 제방 가옥 등에 대한 복구작업을 펼쳤다. 경찰도 2,800여명의 인력을 지원했다. 수도군단은 강화도와 인천,남양주시 등에서 제방 및 옹벽을 복구했고 1군단은 의정부와 금촌 전곡 일대에서 급수차와 양수기 굴착기 등을 동원해 침수된 주택과 공장,도로를 복구했다. 6군단 공병여단은 발전기 2대를 동원해 의정부 호암아파트의 전기공급을 재개했으며 16항공대는 500MD헬기로 가평 밤나무골에 고립된 주민들에 대한 구조작업을 지원했다. 57사단과 60사단,71사단 등 향토사단들도 굴착기와 트럭 등을 투입해 제방복구와도로 위 토사제거 작업을 했으며 화학단은 제독차 10대를 동원,하천의 쓰레기를 제거했다. 육군 특전사와 해군 SSU(해난구조대),UDT(수중파괴대) 등 인명구조 정예요원들도 함정과 발전기 방역차량 등을 긴급 투입,대대적인 피해복구 및 인명 구조활동을 전개했다. 군 당국은 이밖에 서울 경기 강원지역에 예비군 훈련을 전면 중단,이들을 수해 복구작업에 투입키로 했으며 병무청은 서울 경기북부 및 강원 영서지역의 징·소집 대상자들에 대해 수해복구가 끝날 때까지 입영을 연기해 주기로 했다. 경기도는 공무원 5,000여명과 굴삭기 등 중장비 191대,양수기 500여대를 동원해 유실된 도로와 교량 등을 복구했다. 이에 따라 통행이 두절됐던 도로 65곳 가운데 의정부 국도 3호선 등 36곳이 부분 또는 정상 개통됐으며 철도 피해지역 90곳 가운데 20곳이 복구됐다. 도는 또 침수지역 보건인력과 방역약품,장티푸스 예방백신 등을 총 동원,수인성 전염병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파주 의정부 등 침수지역마다 2∼3개 방역팀(팀당 3명)을 투입해 소독을 실시했다. 고려대 안암병원과 상계동 백병원 삼성의료원 수원성빈센트병원 등 민간 의료기관도 피해지역 자원봉사활동을 펼쳤다. 서울시는 중랑천 주변등 피해 지역에 소방차 84대와 양수기 1,280대 등 모두 1,365대의 장비와 2,000여명의 인력을 투입,침수된 건물 지하실의 물을 퍼내는 등 본격적인 복구작업을 했다. 시는 중랑천 제방 양쪽에 길이 15∼50m,폭 5∼10m 규모로 마대를 쌓아 하천의 추가 범람에 대비하는 한편 우이동 유원지 등 산사태가 난 9곳에 굴삭기와 트럭 등 16대의 장비와 300여명의 인력을 투입해 복구작업을 계속했다. 수해지역의 보건소들은 침수지역 가옥에 대해 살균소독 등 특별 방역활동을 벌였고 간이상수도 및 우물 등 불안전 식수에 대해서는 염소 소독을 실시했다. 이밖에 설사 고열 구토 등 수인성 전염병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발생할 경우 즉시 관내 보건기관에 신고할 것을 주민들과 의료기관에 당부하는 한편 오염된 물에 접촉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피부질환 등을 예방하기 위해 취약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실시하기로 했다.
  • 水魔현장의 의인들/張潤煥 논설고문(外言內言)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200여명이 사망·실종되고 2만여가구가 침수되어 5만여 이재민이 나왔는가 하면, 도로·철도·다리들이 끊기는 등 대란을 겪고 있다.사상 유례없는 수재를 당해 국민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가운데 위기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다가 목숨을 잃은 의인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경기 구리소방서 119구급대원 장순원 소방사와 1군단 군수처 전재진 소령, 김만호 상사가 그들. 6일 상오 5시쯤 경기도 남양주시 용암천이 범람, 주민 4명이 고립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장소방사는 비닐하우스 꼭대기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50대 부부를 발견하고 트럭에 로프로 몸을 묶은 다음 급류를 헤쳐나가 그들을 구조해서 물밖으로 대피시켰다. 뒤이어 도로쪽으로 헤쳐나오던 장소방사는 몸을 묶었던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급류에 휩쓸려 희생되었다.6일 새벽 3시쯤 사령부 일직사령실에서 당직근무중이던 전재진 소령은 김만호 상사와 함께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막사에서 허둥대는 사병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킨 다음, 부대정문앞 노부부의 구조요청을 받고 출동했다가 물에 잠겨가는 그 집으로 접근하던 중 역시 급류에 휩쓸려 희생되었다. 지난해 10월에 결혼을 해서 부인이 현재 임신 7개월인 장소방사는 평소 쾌활한 성격에 궂은 일을 도맡아 ‘미스터 의협심’으로 불리기도해서 동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으며, 전소령의 부대원들은 전소령과 김상사가 급류에 휩쓸려 간지 10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의 싸늘한 시신을 수습하고는 군인은 반드시 총칼로써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위하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절감했다고 한다.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이 희생된 의인들은 이번 말고도 지난번 지리산 참사때도 있었다. 이웃의 어려움 같은 건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급한데다 국제통화기금(IMF) 한파까지 곁들여 인심이 날로 각박해지는 나머지 ‘정글’을 연상시키는 세태지만, 의로운 일이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는 이런 의인들이 있어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물난리 피해를 직접 입지 않았거나 비교적 덜 입은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동포애로 돌봐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도리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의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정부는 수방대책 수립에 만전을 기해야 하고, 국민들 또한 실의와 낙담을 떨치고 수해복구에 팔을 걷고 나설 일이다.
  • 水魔현장에 의로운 희생

    ◎구리소방소 張舜源 소방사­비닐하우스 위 고립 50대부부.급류 헤쳐 구한뒤 로프풀려.4시간후 시체로… 신혼 꿈 접어/1군단 全재진 소령·金만호 상사­부대인근 가옥에서 시민 구조.귀대길 불어난 급류에 실종.살신성인의 군인정신 귀감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빛낸 119대원과 군인들이 이번 수해에서도 있었다. 구리소방서 교문소방파출소 소속 張舜源 소방사(28). 張소방사는 6일 상오 5시쯤 범람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용암천이 범람해 주민 4명이 고립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張소방사는 별내면 광전주유소 앞 비닐하우스 위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50대 부부를 발견했다. 그는 트럭에 로프를 연결,몸을 묶은 뒤 이들을 물밖으로 차례차례 구출했다. 하지만 물살을 헤치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로프가 풀리면서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張소방사는 4시간 뒤인 상오 9시쯤 근처에서 나무에 깔린 채로 발견됐다. 그는 지난해 10월 결혼,부인(24)이 현재 임신 7개월인 신혼이어서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또이날 상오 4시30분쯤에는 육군 1군단 소속 全재진 소령(38)과 金만호상사(32)가 경기도 벽제 사령부 앞에 있는 가옥에서 李재연씨(36)를 구조한 뒤 부대로 돌아가다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이들은 실종된지 9시간만인 하오 1시30분쯤 싸늘하게 식은 시체로 발견돼 동료들의 콧등을 시큰하게 했다.
  • 軍 부대·유원지서 산사태 잇따라/복구작업 군인 7명 참변

    6일 상오 3시쯤 경기도 고양시 벽제 육군 1군단사령부에서 산사태가 발생,통신복구작업을 하던 장교와 사병 등 7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벽제 부근 공군 방공포대에서도 산사태로 초소지반이 붕괴되면서 경계근무중이던 초병 2명이 흙더미에 깔렸다. 또 이날 상오 6시쯤 서울 강북구 우이동 계곡유원지에서 산사태가 발생,음식점 ‘영화상회’를 덮쳐 음식점 주인 임상업씨(39)와 부인 李영분씨(39),딸 효나양(5) 등 3명이 흙더미에 매몰돼 숨지고 아들 승돈군(12)과 종업원 崔성복씨(29) 등 4명이 크게 다쳤다. 아르바이트생인 姜정민군(18·경기공고1년)은 실종됐다. 이날 상오 4시쯤 서울 노원구 하계2동 동부간선도로 하계동 출구 도로에서 金원태(47·목사·광진구 구의동)·黃정란씨(46·여) 부부가 쏘나타승용차안에 갇혀 있는 것을 노원소방서 119구급대가 수색작업중 발견,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金씨 부부가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동부간선도로로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갇혔다가 차량 안으로 물이 차오르면서 익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 北 최고인민회의 물갈이/金正日 “믿을곳은 역시 軍”

    ◎대의원 12% 軍출신… 남북관계 경색 우려/온건파 延亨默 선출 총리 재기용 가능성 金正日은 믿을 곳은 군(軍)밖에 없다고 작심한 것 같다. 북한이 27일 발표한 제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687명중 군출신이 12%이다. 90년의 9기 대의원선거보다 비중이 배 가까이 높아진 비율이다. 金益鉉 당 민방위부장,全在善 1군단장,玄哲海 총정치국 부국장,朴在景 총정치국부국장,李찬복 판문점대표부 대표를 비롯한 신진 군 수뇌부들이 새로이 대의원 배지를 달며 전면에 등장했다. 金正日이 군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金正日은 군인 선거구에서 후보자로 나와 100% 찬성으로 당선됐으며 투표당일 군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金正日은 대의원선거 전에도 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올들어 지난 달 말까지의 공식행사 44건중 75%인 33건이 군과 관련됐을 정도다. 북한의 군은 건설현장과 농사에도 동원되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정부는 강경파인 북한군부가 득세하는 것은 앞으로 남북관계에 좋은 조짐은 아닌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全今哲 대외경제협력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해 대남(對南) 및 대외관련 인물들이 다수 탈락한 것은 군부의 전면 등장과 관련 있다. 남북관계가 유연한 쪽보다는 경색된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92년말 경질됐던 온건파인 延亨默 전 정무원총리가 대의원에 선출된 것은 총리로 재기용될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延 전총리는 자강도 당책임비서를 맡으며 자강도를 북한내 모범지역으로 가꾸어왔다. 영웅 칭호도 받아 중용은 예상돼왔다. 延 전총리와 같은 온건 개방파도 있지만 그보다 군부의 입김이 훨씬 거셀 것으로 보이는 점은 남북관계에 우려스런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육·해·공 장성 인사 단행

    ◎육군참모차장 權勝燦/해군참모차장 尹光雄/해사교장 張正吉/해병대사령관 李甲珍 국방부는 7일 육군 군단장·사단장급을 포함한 육·해·공군 장성에 대한 정기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 金鍾煥 합참작전부장,宣映濟 2군참모장,南在俊 육본인사참모부장 등 육사 25기 출신 3명과 洪淳昊 북한정보부장(학군 4기) 權勝燦 육본관리참모부장(갑종 190기) 등 모두 5명이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군단장으로 임명됐다. 육군참모차장에는 육본 인사제도연구위원인 朴寧益 중장(육사 23기)이 임명되고 합참정보본부장에는 朴賢鎭 소장(육사 24기)이 보임됐다.또 육사 27기출신 7명 등 모두 10명이 소장 진급과 함께 일선 사단장으로 임명됐다. 특히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출신인 黃震夏 합참C4I부장과 安光瓚 연합사작전차장 등 육사 25기 출신 2명이 소장으로 직위 진급했다. 해군에서는 참모차장에 尹光雄 작전사령관(해사20기·중장),작전사령관에 李秀勇 해사교장(〃)이 임명됐으며 해군사관학교장에는 張正吉 전투발전단장(해사21기)이 중장으로 승진,임명됐다. 해병대사령관에는 李甲珍 소장(해사21기)이 진급과 동시에 보임됐다.공군에서는 安秉杰 준장(공사20기) 등 2명이 전투비행단장에 임명됐다. ◎朴寧益 육군참모차장/최전방 밝은 야전통/제4 딸굴탐사 작업주도 중대장부터 군단장까지 주로 최전방에서 근무해 온 야전통.인사 정보 작전군수 분야에도 밝다. 90년 21사단 부사단장으로 제4땅굴 탐사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부인 梁明淑씨(52)와 2남.두아들 모두가 학군 장교를 준비 중. ▲경기 파주(56) ▲육사 23기 ▲7군단 작전참모 ▲25사단장 ▲1군단장 ▲육본인사제도연구위원장 ◎尹光雄 해군참모차장/전력운용 개념 정립/함대·작전사령관 거쳐 성품이 온화해 후배들의 신망이 두텁다. 저비용 고효율의 전력운용 개념을 정립했다.지난 2월 부산 해안 미 핵잠수함 충돌 사건 당시 미 7함대사령관과 전화통화로 협조를 구하는 등 영어 실력이 수준급. 부인 權永琪씨(54)와 2남. ▲부산 동래(56) ▲해사 20기 ▲해군본부 편제처장 ▲5전단장 ▲합참전략평가부장 ▲2함대사령관▲해군작전사령관 ◎李甲珍 해병대 사령관/상륙훈련분야 1인자/소탈한 성품 내실 중시 군사 전략·전술에 능한 손꼽히는 작전통.한미 연합 상륙훈련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라는 평을 듣는다.합리적이고 소탈한 성품으로 외형 보다는 내실을 중시하고 후배들의 신망이 두텁다. 부인 朴雨珠씨(51)와 2남. ▲경남 진주(54) ▲해사 21기 ▲해병대 연대장 ▲해병대 여단장·사단장 ▲해군참모총장 해병보좌관.
  • 12·12관련자들 퇴직금 반환소/황영시·허화평씨 등 6명

    12·12 및 5·18사건과 관련,지난 4월 내란중요임무 종사죄 등으로 징역 8년∼3년6월의 형을 확정받고 수감중인 12·12 당시 1군단장 황영시씨 등 6명은 8일 환수당한 퇴직금을 돌려달라며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을 상대로 퇴직급여 환수처분 취소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 황씨 등은 소장에서 “공단이 적용한 공무원연금법 31조는 공무원의 퇴직·질병·부상 때의 급여지급과 환수에 관한 규정으로 형벌에 의한 급여제한과는 무관한 만큼 공단측의 환수조치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소송을 낸 사람은 황씨를 비롯,12·12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씨,3공수여단장 최세창씨,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씨,합수부 수사1국장 이학봉씨,육사교장 차규헌씨 등이며 이들은 형이 확정된 뒤인 지난 6월 공단으로부터 이미 지급된 퇴직금 2억4천여만원을 환수당했다.
  • 군부위상 급부상…당·정은 약화/상반기 북 인명사전 증보자료 분석

    ◎군 10명·당 6명·정무원 3명 실세 형성/이을설·조명록·김영춘 “군부 3인방” 김정일 밑에서 북한을 움직이고 있는 실세들의 면면과 세력분포가 지난 6개월 동안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권력승계를 하지 않은채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초래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사통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의 대대적인 승진인사와 우대로 군부 실세들의 위상이 급부상한 것으로 나타났다.반면 당정쪽엔 인사가 단행되지 않는 등 당과 정무원 인사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서울신문 국제전략연구소가 올 상반기중 북한인명사전 증보용 주요인물들의 활동자료를 분석한 결과 부주석 이종옥을 비롯 당·정·군 주요인사 30명이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집계됐다.30명 가운데는 부주석들인 이종옥,박성철과 당 비서들인 전병호,한성용 등이 포함돼 있으나 이들은 원로 예우차원에서 서열만 높을뿐 핵심적인 일에서는 점차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으로 관측됐다. 이들중 김정일의 현지지도나 군부대시찰때수행하거나 국내행사 참석,외국인사들과의 회담등 기타행사에 참석한 것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볼때 ▲군부에서는 조명록 총정치국장 등 10명 ▲당에선 최태복 비서 등 6명 ▲정무원에서는 김영남 부총리 겸 외교부장 등 3명 ▲기타 최용해 청년동맹 제1비서 등 20명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으로 조사됐다.특히 이들 20명은 김정일이 나들이를 할때 동행하는가 하면 영향력이 큰 핵심요직에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일의 최측근 심복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이들중 상당수는 김일성의 3년상이 끝난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일의 공식승계 때 요직에 발탁되거나 신분이 격상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북한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김정일이 믿을 곳은 군밖에 없다며 군 우선,군사 중시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북한 군부의 최상층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은 원수인 이을설(호위사령관),차수로 총정치국장인 조명록,역시 차수로 총참모장인 김영춘 등 3인이다.이들은 지난 4월25일에 있었던 군창건 65돌 기념 열병식의 주석단 서열에서 5∼7위를차지,급부상하고 있다.북한의 특성상 권력서열이 높다고 해서 모두 실세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은 군부의 실력자들이기 때문에 정치국원에 임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이들 3인 외에 지난 4월 승진과 함께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에 기용된 김일철을 비롯 1군단장 전재선,평양방어사령관 박기서,부총참모장 이종산 등 차수 4인,총정치국부국장인 현철해 및 박재경과 군 작전국장 김하규 등 3인의 대장이 군 실세들이다. 당에선 김정일을 수행하는 것 말고는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김정일의 매제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인 장성택이 최실권자라는게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장은 북한 인쇄매체에 일체 사진이 실리지 않고 있는데,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장말고도 당비서들인 최태복(교육담당),계응태(공안담당),김기남(선전담당),김용순(대남담당),김국태(간부담당),김중인(근로단체담당) 등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정무원 쪽에선 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김영남과 총리대리로있는 홍성남부총리,사회안전부장인 백학림이 실세들이다.이밖에 김정일의 친위세력인 청년동맹 제1비서인 최용해가 김정일을 자주 수행하고 김정일보위에 앞장서고 있다.
  • 3군장성 승진·전보인사

    국방부는 15일 중장 승진 6명,소장 승진 10명 등 육·해·공군 장성급 승진및 전보인사를 단행했다. 이날 인사에서는 소장인 권영효 국방부조달본부장(육사 23기)과 강종필 제3사관학교교장(육사 23기) 등 2명을 현직위에서 중장으로 진급시키고,이종옥 교육사교육훈련부장(육사 24기)·김판규 육군대학총장(육사 24기)·오남영 육본관리참모부장(육사 24기)·노연웅 학생중앙군사학교장(학군 5기) 등 4명을 중장 진급과 동시에 군단장으로 보임했다. 이와함께 강광석 준장(학군 5기)등 8명을 각각 소장으로 진급시키면서 동시에 사단장으로 보임하고,이강수 2군수지원사령관(학군 5기)과 박호순 기무사참모장(육사 26기)을 현직에서 소장으로 진급시켰다. 국방부는 또 육군중장인 한승의 합참인사군수부장(육사 22기)을 육사교장,이호승 1군부사령관(육사 22기)을 국방대학원장,정영무 특전사령관(육사 22기)을 합참작전부장,박용득 11군단장(육사 22기)을 교육사령관,최돈걸 교육사령관(육사 21기)을 합참전력평가본부장으로 각각 전보 발령했다. 국방부는 이와함께 해군의 최낙성 소장(해사 20기)을 군수사령관으로,한광수 소장(해사 24기)·오승렬 소장(해사 24기)을 각각 함대사령관에 전보키로 내정했다.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북 체제 염증느껴 탈출/굶어죽는 사람 목격했다”/귀순 곽 중사

    13일 귀순한 북한군 곽경일 중사(25)는 북한의 궁핍한 사회실상과 군 복무에 염증을 느끼는 등 북한체제에 불신이 쌓여 귀순한 것으로 밝혀졌다.〈관련기사 6면〉 14일 국방부에 따르면 1군단 1사단 민경대대 1중대 부분대장인 곽중사는 최근 당원심사에서 누락되고 군관(장교)임관 선발도 취소되는 등 군 복무에 불만을 느껴 귀순을 결심했다. 곽중사는 관계기관의 합동신문에서 『고향인 신의주 등에서 식량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보았으며 먹는 문제로 자식들을 내쫓는 부도덕함이 북한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고 진술했다. 군 당국 등의 조사결과 곽중사는 지난 10일 4일간의 매복근무에 들어가 11일 하오 6시30분 북한군 전방 156 감시초소(GP)를 단독출발한 뒤 추격해오는 북한군의 총격을 받으며 12일 새벽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다.곽중사는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왼쪽 허벅지에 파편상을 입었으며 추격대와 총격전을 벌였으나 북한군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71년 6월 1일생인 곽중사는 주소가 평북 남신의주 유산2동 79반으로 황북 송림 인민학교를 거쳐 황주 삼정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민군에 입대,1사단 공병대대에서 2개월 가량 있다가 88년 10월부터 민경대대에서 근무해왔다. 미혼인 곽중사의 가족으로는 아버지 곽덕진씨(51·신의주 건설총국 노동행정 책임지도원),어머니와 남녀 동생 각 1명씩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군 당국은 『곽중사는 키 1백73㎝에 체중 57㎏으로 비교적 마른 체격』이라면서 『건강을 회복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황성기 기자〉
  • 군 “귀순 곽 중사는 「보물」”

    ◎북 전방부대 동향·월북루트 파악 도움/곽 중사,당원심사 누락… 군에 염증 남행 13일 동부전선을 통해 귀순한 곽경일 중사(25)는 군 당국엔 뜻밖에 얻은 「보물」이다.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대남보복」발언 이후 처음으로 귀순한 북한군이기 때문이다.북한군 사정에 밝은 군관이 아닌 하사관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잔당소탕작전과 보복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곽중사의 귀순은 큰 의미를 지닌다. 군 당국이 곽중사의 조사에 비중을 두는 대목은 ▲북한의 대남보복 발언 이후 변화된 북한군 전방부대의 군사동향 ▲월남,월북 루트상에 있는 북한 민경대대의 공비잔당 월북대비책이다.군 당국은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곽중사로부터 상당부분 진술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작전과 관련된 부분이 많아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다음은 국방부가 밝힌 곽중사의 귀순 동기와 경위,북한의 식량난 실태 등이다. ▷귀순 동기◁ 곽중사는 입대 3년만인 91년에 하사,다시 4년만에 중사로 진급했다.그러나 최근 출세를 보장하는 당원심사에서 누락된데다 하사관에서 장교로 임관되는 「직발군관」 선발도 취소되는 등 군 복무에 염증을 느꼈다.88년 10월 북한군 1군단 1사단 민경대대 1중대에 배속돼 비무장지대에서 근무,김만철·여금주·여만철씨 등 귀순자들의 풍요로운 생활상을 대북방송을 통해 들어오면서 남으로 내려가면 대접받고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귀순 경위◁ 10일 4일간의 3인 1조의 매복근무를 명령받고 진지에 투입된 곽중사는 11일 하오 6시30분쯤 동료들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북한군 전방 156 감시초소(GP)를 단독으로 출발했다.12일 새벽 북한군 추격대와 총격전을 벌인 끝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만 하룻동안 군사분계선 부근에 숨어있다가 남하,13일 낮 12시50분 아군초소로 귀순했다.왼쪽 허벅지에 입은 경미한 상처는 추격대가 던진 수류탄에 의한 파편상이다. ▷식량난 실태◁ 최근 고향인 신의주에서 식량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죽는 사람도 보았다고 진술했다.특히 북한사회에서 먹는 문제로 자식들이 부모를 내쫓는 부도덕이 널리 퍼져있을 만큼 북한의 식량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고 전했다.〈황성기 기자〉
  • 전씨가 말하는 「정승화 총장 군맥」

    ◎김재규 도움으로 총장에… 군인사 장악/장태완·이건영·김진기씨 등 요직 앉혀/신군부 동조 차규헌·황영시씨도 포함 “이채” 전두환 피고인은 20일 공판의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12·12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군맥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전씨는 「정승화계열 군부」라고 지칭했으며 정총장이 김재규의 도움으로 총장 자리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피고인은 거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비호와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추천으로 보안사령관에 임명 됐었다. 전피고인은 정총장이 김재규와 동향으로 평소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고 밝혔다.지난 77년 12월 정총장이 1군사령관에 보임된 이후 더욱 가까워졌다고 했다.김재규가 시국관이 같은 정 사령관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력히 추천,참모총장에 앉혔다는 것이다. 정총장은 79년 11월 중순에 단행된 인사에서 자신과 김재규 계열 장성들을 요직에 배치,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정총장 계열의 핵심장성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장태완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에 발탁했고,7사단장 시절 작전참모와 1군사령관 때 참모장을 지낸 하소곤 소장을 육본 작전참모부장에 임명했다. 3군사령관인 이건영 장군은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 때 1차장으로 임명한 측근이라고 밝혔다.김진기 육본 헌병감과 손길남 수도기계화사단장,배정도 26사단장,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정총장 계열의 핵심장성으로 분류했다. 특히 「신군부」 세력에 가담한 거규헌 수도군단장과 황영시 1군단장을 정총장 측근으로 분류해 이채롭다.거장군은 정총장이 방첩부대장 때 정보처장을 지냈고 참모총장의 직계장성이 맡는 게 관례인 장성진급 심사위원장을 79년에 지냈다는 점을 들었다.황장군은 정총장이 1군 참모장 시절 작전참모로 근무한 인연으로 의형제와 같은 친분을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윤성민 참모차장과 이재전 청와대 경호실차장,문홍구 합참본부장,윤흥기 9공수여단장도 정총장 계열 군부로 지목했다. 전씨는 대통령 시절 장태완·이건영·문홍구씨 등 정총장 계열 퇴역장성들에게 『12·12 당시 자기계보의 수장을 위했다는 인간적인 측면을 고려해 국영기업체 이사장과 마사회장등의 자리를 주었다』고 덧붙였다.〈박선화 기자〉
  • 시민 4천여명 즉각 “대통령 지지” 시위/파라과이 쿠테타설 안팎

    ◎미 “민주주의 위협” 오비에도 사임 요구 ○…오비에도의 전역명령 거부 및 군사반란 임박설이 나돌면서 파라과이 시민 4천여명은 대통령궁과 의회 앞에 모여 바스모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시위에 나섰다. ○…바스모시 대통령이 22일 오비에도 군 참모총장이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고 밝히자 미국은 『이같은 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면서 오비에도가 사임할 것을 요구.또한 브라질·아르헨티나등 미주기구 국가들도 이번 사태에 대해 바스모시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 ○…대통령의 사임 명령을 거부한 오비에도 군 참모총장은 현재 파라과이 교외에 주둔해 있는 제1군단으로 몸을 피신한 상태.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경비병들은 이날 오비에도 장군을 만나려고 이곳을 찾은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등 남미국의 대사들은 물론 로버트 서비스 미국 대사마저도 병영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 ○…바스모시 대통령은 아직 육군으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해군과 공군,카톨릭 교회,파라과이의 모든 정당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특히 파라과이의 상·하 양원은 위기가 해결될 때까지 회의를 열 것이라며 대통령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아순시온 외신 종합〉
  • “군권 찬탈 시나리오 없었다”/「12·12 」3차공판

    ◎차규헌·장세동씨 등 공소사실 부인/“정 총장 연행 불가피” 강변/검찰/4차 공판땐 비상계엄 확대 등 신문 12·12 및 5·18 사건의 3차 공판이 서울지법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25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렸다. 검찰은 2차 공판까지 이미 신문을 끝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피고인을 뺀 나머지 거규헌 박준병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신윤희 박종규 피고인의 순으로 검찰의 직접신문을 했다. 장세동 피고인은 당시 육군본부측이 9공수 여단을 동원하려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에서,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로부터 전화가 오자 『육본측이 병력을 동원하지 말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느냐는 신문에 『우리도 (병력동원을) 안 할테니 9공수여단 등의 이동을 막아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박준병 피고인도 『정승화 총장 연행사실을 안 직후 황영시 1군단장은 예하 30사단과 2기갑여단에, 노태우 9사단장은 예하 1개 연대에 병력을 출동하도록 지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솔,육본측의 병력동원을 막는 한편 신군부측은 병력을 동원했음을 시인했다. 장피고인은 그러나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소재가 불분명했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무모한 지휘를 자행하는 등 지휘명령 계통이 공백상태였다』며 병력동원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폈다. 허화평 피고인 등 이른바 「보안사 3인방」도 『정총장이 10·26사건에 깊숙히 연루된 혐의가 있어 연행이 불가피했으며,군권을 찬탈하기 위한 시나리오는 없었다』며 공소사실 부인 했다. 차규헌 피고인도 『최규하 대통령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2차례나 거부한 것이 아니냐』는 신문에 『최대통령이 노재현 국방장관이 배석해야 재가하겠다고 해,그런 줄만 알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 날 12·12사건에 대한 검찰신문을 모두 마무리,오는 4월1일 4차 공판부터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회해산 과정,5·18 내란 혐의 등을 심리할 방침이다.〈황진선 기자〉
  • 「12·12」 「5·18」 공판­신문 내용

    ◎변호인­“「12·12」 정총장 연행과정의 우발 사건”/검찰­공소시효 헌재서 합헌 결정난 사안/재판부­일시·주체 등 공소사실 일부 미흡/노태우씨­“합수부장은 혐의있으면 누구든 수사”/노씨 진술­경복궁에 모인 장성 3명외 모두 하나회원/황영시 1군단장 모셔오기로 전씨에 약속 ◆DB편집자주:본문생략 KHM­960312­04­1∼3 참조
  • 조선의용군 이홍광 지대(압록강 2천리:26)

    ◎중국인민군 조선족군맥의 뿌리/항일투쟁은 물론 중국 해방투쟁에 동참/주로 토비소탕 참여… 장개석군과도 혈전/의용군 1지대로 출발… 전사장군 이름으로 바꿔 오늘날 중국대륙의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떳떳한 요소들 몇가지를 지니고 있다.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닦은 동북 조선족들은 항일투쟁은 물론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도 동참했다는 사실을 가장 큰 요소로 지니고 있다. ○조선족출신 장군만 28명 그리고 단일민족으로 여러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 된 것도 그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해 전과를 올리고 공적을 쌓았다.1946년부터 1949년까지 희생된 조선족 지휘원과 병사는 3천5백50명에 이른다.그 시기에 숱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중국인민해방군의 조선족장군이 28명이었으니 조선족의 활약상은 알만한 일이다.중국인민해방군 전총후군부장 조남기 상장,전 공군부사령원 이영태 중장,전 모집단군 정위정술주 소장,전 성군구 정위 옥종환 소장 등이 그들이다. 옥종환 장군(65)은 지금 요령성 심양시에 살고 있다.일본이 허수아비로 세운 만주국 국무총리 자택 옆에 지은 자그마한 2층 양옥이 그의 집이다.1933년 고향인 경남 통영군 연초면 천곡리에서 부모등에 업혀 길림성 통화현대천원촌 신개령으로 이주해왔다.나이 열다섯살에 이미 참군한 그는 남전북전 빗발치는 탄우속을 넘나들었다.불치의 암으로 두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쾌활하고 소탈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전우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습네다.그분들에 비하면 오래 산 셈이야요.그러나 후회는 없다고 생각합네다.올바른 길이라면 가시밭 불길이라도 걸어갔으니까….나처럼 어린시절부터 전장에 뛰어드는 불행한 시대는 다시 오지 말아야 합네다.내 시대에 흘린 피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디요』 옥장군 댁을 찾은 날이 마침 토요일 하오여서 군시절 수하의 조선족 장병 등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었다.그 집의 인심을 읽을 수 있을 듯한데,부인께서 손수 차린 상이 들어왔다. 오징어볶음에 토장을 풀고 고사리를 넣은 개고깃국이며 김치와 깍두기가 입맛을 돋우었다.채소는 부부가 텃밭에서 가꾼 것이라고 했다.부인은 해마다 김치를 많이 담근다면서 명절날이면 집을 떠나온 조선족 장병들을 초청하기 때문에 여간 많이 담지 않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 조선족 장군들의 뿌리는 거의가 이홍광지대에 두고 있다.이홍광지대는 일본군에 대항한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로 19 45년 9월 하순 연안을 떠나 동북에 도착한 팔로군소속 조선인들도 뒷날 이 부대에 합류했다. 본래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였으나 1946년 2월23일 이홍광지대로 개칭했다.조선의용군은 총부를 심양에 두고 북한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소련군이 막아버려 동북3성 조선족 집거구로 파병되었다. 이홍광지대로 개칭되기 이전의 제1지대는 압록강 유역인 남만,제3지대는 흑룡강성 일대인 북만,제5지대는 연변,제7지대는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일대에 자리잡았다.제1지대가 이홍광지대로 개칭될 무렵의 지대병력은 1천2백명에서 자그마치 5천명으로 늘어났다.처음에는 토비소탕 임무를 맡았다가 그 다음에는 장개석 국민당군과 대항하는 피나는 열전을 벌였다. ○동북해방군에 편입돼 국민당군과의 전투는 아주 치열했다.당시 모택동의 팔로군에서 넘어와 이홍광지대에 배속된 주재덕선생(2월22일자 11면 참조)의 증언을 들어보면 중국 해방전쟁에서 조선족 활약은 컸다. 『내가 이홍광지대 제1영 제3련의 연장(중대장급)으로 있을 때 조성두라는 전사가 배치돼 왔디요.그 사람 나이가 스물두살인가 기랬는데 오자마자 전투가 벌어졌지 뭡네까.1947년 2월28일로 기억되는 그 전투는 휘남현을 포위공격하는 일이었디요.현성에는 국민당군 한 개의 정규사단과 보안부대,지방군 몇개 중대가 버티고 있어서 한치도 진군할 수가 없었습네다.단장(연대장)은 진군하라고 다그치고….그래서 나는 폭파대를 조직하고 조성두한테 진공명령을 내렸읍네다』 국민당군 토치카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1백70m.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없는 민둥산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조성두는 눈 쌓인 민둥산을 포복자세로 기어올랐다.국민당군 토치카 50여m까지 접근한 조성두는 날아온 총탄에 명중되었다.10여분이 흘렀을까.조성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눈위로 피가 흥건히 배었다.조성두는 필사의 포복으로 토치카에 다달았다.그리고 지뢰를 안은채 토치카로 기어들어갔고 이내 폭음이 진동했다.그는 중국인민해방군사에 빛나는 사실상의 첫 폭파영웅이었다. 이홍광지대는 이어 조선의용군에서 동북해방군에 편입되어 독립4사로 있다가 제164사로 들어갔다.활동지역도 동북지방에서 멀리는 장강을 넘어 해남도로까지 확대되었다.단동시 영예군인요양원 원장직에서 정년으로 퇴직한 송재조(68) 선생은 본래 경북 성주 사람인데 해남도에 상륙했던 동북해방군 출신이다. 『나는 1946년 5월에 참군하여 동북해방전쟁을 겪고 곧바로 남하했디요.여주반도에 이르러 몇 달을 두고 해남도를 칠 준비를 했드랬습네다.똑딱선 한 척도 없고 모두가 나무배였드랬는데,그거이 중국해방군 첫 해군이었디요.1950년 나무배를 타고 해남도 등륙전(상륙전)에 참가했더니 국민당군 비행기가 가만두지 않더란말입네다.다행히 살아서 등륙은 했으나 섬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말았수다.며칠 안되어 다리가 썩더니 구더기가 꼬입데다.그래서리 다리를 잘라버렸디요.스물세살 때 기랬습네다』 ○이홍광장군 석상세워 그러면 이홍광지대에서 보이는 이홍광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이홍광(1910∼35년)의 본명은 이의산이다.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항일연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었다.양세봉장군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했던 그는 1935년 5월의 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요령성 환인현 흑할자밀영에서 35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그러니까 남만일대에서 소문난 항일 명장이었다. 이홍광의 이름으로 조선의용군에 이홍광지대가 생긴 이후 압록강유역 중국땅에서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다.어떤 조선족 마을은 홍광촌이라 했고 요령성 관전현과 길림성 반석현에서는 조선족 학교를 건립한 뒤 각각 홍광중학교로 학교 이름을 지었다.그리고 반석현 홍광중학교 운동장과 요령성 신빈현에는 이홍광의 석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홍광지대의 군맥은 중국 뿐 아니라 북한군에도이어졌다.이홍광지대 제1임지대상 김웅은 인민군 제1군단 군단장이 되었다.1950년 전쟁을 일으키고 서부전선을 맡아 서울로 들어간 인물이다.또 이홍광지대 정치위원장이었던 방호산은 제1군단 6사단장을 거쳐 군사과학원장을 맡기도 했다.
  • “굶주린 북한군 차라리 전쟁 바란다”/귀순 3인 합동회견

    ◎집단농장 아편재배 외화벌이/교화소는 생지옥… 고문 예사로 북한군 병사로 배고픔과 무리한 전쟁준비를 견디지 못해 한달전인 지난해 12월23일 귀순한 최광혁하사(25)는 25일 『지든 이기든 96년엔 무조건 전쟁이라는 독려속에 대부분의 북한군 하전사들은 배가 너무 고파서 남한과 한번 붙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북한군 1군단 69포병여단 1대대 통신병으로 근무하던중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최하사는 이날 상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지난해 12월13일 중국을 거쳐 귀순한 이순옥씨(49·여)와 아들 최동철씨(29)와 함께 가진 합동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날 회견에서 이순옥씨는 87년 11월부터 5년 동안 「국가재산 탐오죄」라는 누명을 쓰고 평남 개천교화소에 수용된 뒤 그곳에서 받았던 인간이하의 고문과 수용소 생활을 폭로했다. 특히 이씨는 교화소생활을 「땅위의 생지옥」이라고 표현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임신한 여죄수들에 대한 강제유산과 태아 살해실상 등을 자세하게 진술,큰 충격을 주었다. 또 이씨와 함께 북한을 탈출한 최동철씨는 어머니 이씨의 죄로 다니던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퇴학 당한뒤 88년 4월부터 6년동안 함북 온성군 담배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지내며 경험한 북한의 아편재배 실태 등을 털어놓았다. 이씨는 『경작된 아편은 외화벌이를 위해 홍콩·일본과 중국교포들에게 밀매된다』며 『주민들은 밭에서 아편을 훔쳐 고위당원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말아서 몰래 피우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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