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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룡해, 인민군 충성맹세 모임서 단독으로 대표맹세…2인자 행보

    최룡해, 인민군 충성맹세 모임서 단독으로 대표맹세…2인자 행보

    북한에서 장성택이 숙청된 후 열린 북한군의 ‘김정은 충성맹세대회’에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충신의 자손’으로서 존재를 한껏 과시해 향후 그의 권력 행보에 더욱 관심이 쏠린다. 최 총정치국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2주기를 하루 앞둔 16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서 열린 인민군 충성맹세 모임에서 “1950년대 준엄한 시련의 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권위를 헐뜯으려는 반당분자들을 가차없이 쏴죽이겠다고 추상같이 외치며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들”을 본받아 김정은 제1위원장의 영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색출해 처단하겠다고 다짐했다. 최 총정치국장이 언급한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는 그의 부친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을 가리킨다. 김일성 주석 시절인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민족보위성(현재의 인민무력부) 부상이었던 최현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김 주석 체제에 반기를 든 ‘소련파’와 ‘연안파’의 기를 꺾었다. 김일성 주석과 항일빨치산 운동을 함께한 최현은 김 주석보다 나이도 많고 빨치산으로서 명망이 더 높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부친을 거론하며 자신의 ‘충신 혈통’을 내세운 것은 김일성 주석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으로 이어진 최고지도자 가계에 대를 이어 충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또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 찍혀 처형된 장성택과는 태생적으로 다름을 과시하면서 향후 김정은 유일 영도체계 강화를 주도해나갈 것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14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종파 나부랭이들의 숨통에 권총을 들이대고 불을 토했던 투사들”을 군과 인민이 따라야 할 ‘수령결사옹위’의 모범이라며 최현을 간접 치켜세운다 있다. 특히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이날 인민군 충성맹세 모임에서 단독으로 전체 인민군을 대표해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충성을 맹세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번 충성맹세 모임에서 발언을 통해 김 제1위원장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최 총정치국장이 유일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1주기인 작년 12월 17일 열린 인민군 충성 결의대회에서 최 총정치국장뿐 아니라 장정남 당시 1군단장, 리영길 당시 5군단장 등이 나서 연설을 한 것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고] ‘백선엽 장군 친동생’ 백인엽 예비역 중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친동생인 백인엽 예비역 중장이 지난 1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0세. 1923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임관한 뒤 1948년 육군 제17연대장에 임명됐다. 6·25 전쟁 때인 1950년 8월 27세의 나이로 수도사단장에 임명돼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제17연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서울 탈환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 이후에는 9사단장, 1군단장, 6군단장,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역임하고 1960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1958년 고인은 성광학원을 인수한 뒤 형과 자신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하나씩 따 선인학원을 설립했다. 유치원부터 대학(인천대·인천전문대)까지 16개 학교로 이뤄진 선인학원은 ‘비리 사학의 원조’ 격으로 논란을 빚다가 1994년 공립화됐다. 고인은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1981년 공금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3년(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고인은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육군장(葬) 대상이지만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지고, 장지도 국립묘지가 아니다. 유가족은 “고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묻혀 있는 천안 풍산 공원묘지에 안장토록 유언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주광숙(71)씨와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9시 30분. (02)2072-2010.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주요 군 수뇌부 프로필] 권오성 육군 참모총장

    [주요 군 수뇌부 프로필] 권오성 육군 참모총장

    육군본부와 국방부, 합참, 한미연합사 등의 근무 경험이 풍부한 육군 내 대표적인 작전·정책기획 분야 전문가다. 전략적·작전적 식견을 갖춘 데다 한·미 연합 업무에도 정통하다.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군사동맹 강화에 기여했다. 합참 작전본부장 재직 당시에는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비한 한·미 공동작전 계획을 발전시키고 각종 작전 계획을 완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부하들과의 격의 없는 토론을 통해 합리적으로 사안을 처리하는 등 소탈한 ‘소통 리더십’을 추구해 신망이 두텁다. 업무의 핵심을 꿰뚫는 능력과 판단력, 개혁성, 추진력도 갖췄다는 평이다. 신현희씨와 1남1녀. ▲경기 양주(58) ▲육사 34기 ▲국방부 정책기획관 ▲1군단장 ▲합참 합동작전본부장 ▲연합사 부사령관
  • [지상파 하이라이트]

    ■긴급출동 24시(KBS1 밤 10시 55분) 대한민국이 수해로 몸살을 앓던 1998년 8월.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서 한 가족이 폭우로 고립됐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두려움에 애타게 구조 요청을 하던 가족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곳은 육군 1군단이었다. 새벽 3시, 당시 근무 중이던 김만호 원사는 시간당 120㎜의 장대비를 헤치고 긴급 출동했는데…. ■월화드라마 상어(KBS2 밤 10시) 암살자 엑스는 이수(김남길)의 여동생 이현(남보라)을 납치한다. 엑스는 이수에게 전화를 걸어 천영보에 관한 문서 원본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이수는 이현을 살리기 위해 요시무라의 숙소를 뒤지기 시작한다. 한편 엑스는 인적이 없는 바닷가로 이수를 부르고 이수는 총을 집어들고서 혼자 바닷가로 향한다. ■MBC 다큐스페셜(MBC 밤 11시 20분) 소와 할아버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다. 프로그램은 땅을 가꾸는 운명으로 태어난 이들의 깊고 우직한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흙 위에서 펼쳐지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우정의 현장. 사고뭉치 일소와 농사의 달인 할아버지가 벌이는 좌충우돌 사고 만발의 일상을 통해 올여름 그들과 함께 시원한 산골 마을로 떠나보자.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SBS 밤 10시) 민재(손현주)는 회사의 위기 앞에 은행장 딸인 유진(진서연)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인다. 동진(정한용)은 며느리 윤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들 민재와 유진의 결혼을 반대하지만 민재는 동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한편 민재와 태주(고수)는 재건축 사업 협력을 약속하고 조필두(류승수)를 조합장 선거 후보로 내세운다. ■요리비전(EBS 밤 8시 20분) 과연 오징어를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오징어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지난 5~6월 약 한 달 동안 한 대형마트에서 수산물 매출량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한국인의 오징어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는 오징어, 그 추억의 맛을 찾아 동해로 떠나본다. ■경찰 25시(OBS 밤 11시 5분) 형사들에게 심상치 않은 무전이 들어왔다. 한 남성이 여성을 칼로 찔렀다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강력 6팀은 급하게 출동한다. 현장에서 알게 된 그들의 관계는 부부. 서로 아껴줘야 할 이들 사이에 칼부림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날 강력사건으로 정신없는 형사들에게 피해 금액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접수된다.
  • 감악산결사대 사당 등 5곳 6·25 유산 문화재 등록 추진

    감악산결사대 사당 등 6·25전쟁 사적지 5곳에 대해 뒤늦게 문화재 등록이 추진된다. 문화재청은 감악산결사대 사당, 노르웨이군 전시병원, 포천 방어벙커, 태극단 합동묘지, 순국경찰관 합동묘지를 문화재로 등록하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들 사적지는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국가수호사적지 조사보고서’에 실린 유산 가운데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곳들이다. 오는 8월 문화재위원회가 심의해 문화재 등재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감악산결사대 사당은 1950년 6월 25일 감악산 설마리 계곡 일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감악산결사대원 중 순국한 38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 동두천에 자리한 노르웨이군 전시병원은 6·25전쟁 중 미국 제8군사령부 지휘에 따라 동두천 주변에 주둔하던 미 제1군단 예하 각 사단에 의무 지원을 하던 곳이다. 포천 방어벙커는 국군이 북한군 전차 공격에 대비해 구축한 콘크리트 진지로 남침 때 북한군의 탱크 공격을 방어했다. 고양의 태극단 합동묘지는 1950년 6월 말 결성돼 다양한 유격 활동을 전개한 태극단에서 반공투쟁을 벌이던 전사자들의 공동묘지다. 충남 논산 소재 순국경찰관 합동묘지에는 1950년 7월 18일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순국한 강경경찰서 소속 경찰들의 시신이 안장돼 있다. 정부는 2002년 5월 강원 화천군의 ‘인민군사령부막사’를 6·25전쟁 관련 사적지로는 처음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10건의 관련 문화재를 등록했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10년에는 대한민국 육군기와 최초의 항공기, 최초의 전투함,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때 사용된 책상 등 4건이 무더기로 이름을 올렸다. 이번 조치도 박근혜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화재청이 앞장서 추진하는 사업으로 평가받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北 충성결의 軍간부 잇따라 요직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1주기를 맞아 지난해 12월 평양에서 열린 ‘육·해·공 장병 충성 결의대회’ 때 연설한 군 간부들이 연달아 주요직에 올라 눈길을 끈다. 당시 연설한 장정남 1군단장은 최근 우리의 국방장관 격인 인민무력부장에 발탁됐고 리영길 제5군단장은 지난 3월 총참모부 작전국장에 임명됐다. 함께 단상에 올랐던 야전 지휘관 4명 가운데 2명이 불과 3~5개월 만에 파격 승진한 것이다. 장정남과 리영길, 김형룡 2군단장과 최경성 11군단장 등 연설조 4명은 당시에도 군부 내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았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추가로 군 수뇌부가 나올 가능성이 제기된다.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인 11군단장을 맡고 있는 최경성은 2010년 9월 28일 제3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군단장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돼 관심을 집중시킨 인물이다. 그는 같은 해 4월 군 승진 인사에서도 당시 상장 진급자 5명 가운데 가장 먼저 호명됐다. 장정남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부터 일찌감치 낙점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1년 4월 실시된 군 인사를 통해 김 제1위원장의 핵심 측근인 오일정 당군사부장, 황병서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함께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 시점에 장정남이 김정은의 눈에 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편 정부 관계자는 북한 군부 내 세대교체와 관련해 “혁명 1세대가 가고 2~3세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빨치산 그룹의 권력구도를 모두 무시하고 대대적 교체에 나서기는 무리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北 인민무력부장 50대로 ‘세대교체’

    北 인민무력부장 50대로 ‘세대교체’

    북한이 75세의 노장 김격식을 인민무력부장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야전 출신인 50대의 소장파 장정남을 앉힌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젊은 새 인물을 기용해 군을 재정비하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군 장악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격 세대교체로 풀이된다. 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장이 단 7개월 만에 교체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전임자 김격식의 거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승진 발탁이 아니라 경질됐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격식이 지난해 인민무력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며 “김 제1위원장은 젊고 충성심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원했는데, 이를 충족하는 사람을 찾지 못해 김격식에게 과도기 직책을 맡겼던 게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군부 내 마지막 70대였던 김격식이 물러나면서 군 수뇌부에는 70대 노장파가 사라지게 됐다. 현재 북한군 서열 1~3위는 최룡해(63) 군 총정치국장, 현영철(64) 총참모장, 장 부장 등 50~60대가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세대교체 배경을 ‘젊고 강한 군’, ‘김정은의 군 장악력 강화’ 등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세대교체 작업은 지난해부터 시작돼 김정일 운구차를 호위했던 군부 4인방(이영호·김영춘·김정각·우동측)이 전원 좌천되거나 종적을 감췄고 최근 1년 사이 전방 군단장 9명 중 6명이 교체됐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이를 “김정일이 구축한 후견그룹 내 권력 재편”이라고 해석했다. 군부 서열 1위 최룡해가 신군부세력을 제거해 가며 군부를 김 제1위원장의 사람으로 바꿔 나가는 과정이란 설명이다. 최룡해는 당 관료 출신으로 김 제1위원장이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포진시킨 인물이다. 이와 함께 군부를 야전군 중심의 실전에 강한 군대로 변화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현영철과 장정남은 각각 8군단장과 1군단장을 지낸 야전 지휘관 출신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올해 1~4월 김 제1위원장의 군 시찰이 집중된 점에 미뤄 볼 때 이 기간 군 실태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현장 지휘관을 중심으로 군을 다잡기 위한 발탁 인사”라고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군 현대화에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 수석연구위원은 “지나치게 많은 군 병력을 줄여야 경제도 살고 외화벌이도 늘릴 수 있다”며 “전략무기에 의지한 첨단군으로 개편하기 위해 세대교체를 단행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힘 커진 軍 강경파 독주 차단… 강력한 ‘1인 리더십’ 구축 의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22일부터 사흘째 군부대를 시찰하는 등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배경이 주목된다. 김 제1위원장은 지난 22~23일 유사시 서울 침투 등 후방 교란 임무를 맡은 평안남도 지역의 11군단 산하 특수부대를 방문한 데 이어 24일 인민군 제1501군부대를 찾는 등 왕성한 군사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군사 도발 위협을 고조시키는 것이 군 현지시찰의 첫 번째 목표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군을 보다 확고하게 장악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의도도 크다는 데 주목했다. 군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 충성심을 강화하는 한편 3차 핵실험 이후 힘이 커진 강경파의 군부 내 독주 가능성을 차단해 실질적 권력 계승을 마무리하려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김 제1위원장이 현지 지도 때마다 2인자로 자리매김한 대표적 강경파인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을 늘 대동하는 것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살피고 견제하기 위한 의도일 수 있다는 분석을 제기한다. 군 강경파는 지난해 4월 노동당대표자회를 통해 당 정치가 부활하고 7월 리영호 군 총참모장이 전격 해임되면서 눈에 띄게 약화됐지만지금은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다.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 유고 시 체제 안정에 있어 군부가 큰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군부에 확실한 충성심을 심어 줘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며 “군의 입장을 지지해 줘서 배짱도 있고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북한이 군을 우선시하는 ‘선군(先軍)노선’으로 다시 돌아갈 조짐도 감지되고 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군의 운영상태와 대비 태세를 점검하는 것은 파행적으로 운영돼 왔던 선군정치를 바로잡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육군 1군단 23~27일 경기북부서 종합훈련

    육군 1군단은 23~27일 경기 고양·파주·연천 등 경기북부지역에서 국지도발 대비 종합훈련을 한다고 22일 밝혔다. 적 침투와 국가 중요시설 테러를 가정해 대비태세를 점검하는 이번 훈련에는 군단 예하 전 부대가 참가하며, 훈련기간 중 대규모 장비와 병력이 이동하면서 자유로와 국도 1호선 등 주요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일부 교통도 통제한다. 1군단 관계자는 “일부 지역에서는 군용 헬기 운항과 공포탄·조명탄 사격이 있을 예정”이라면서 주민 협조와 이해를 당부했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의정부 ‘미군기지 남북 관통로’ 새달 뚫린다

    경기 의정부시는 도심 정중앙에 위치해 시가지 전체 교통흐름을 왜곡시켜온 가능동 미군기지 캠프 ‘라과디아’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다음 달 4일 부분 개통한다고 30일 밝혔다. 남북축 도로 가운데 개통 구간은 착공 1년째인 신흥로(의정부의료원~가능로삼거리) 일부다. 캠프 내 흥선로에서 가능로까지 600m 길이다. 남쪽 구간은 3년여에 걸친 보상 끝에 폭 30m로 개설됐으며, 북쪽 구간인 가능로는 예산부족 탓에 폭 10m로 우선 개통하고 내년부터 보상에 들어가 2년 안에 폭 30m로 완전개통할 예정이다. 동서축으로 관통하는 도로(의정부경찰서~흥선로터리)는 지난해 10월 경기도내 미군 반환공여지 가운데 최초로 국비를 지원받아 먼저 개통했다. 캠프 라과디아는 6·25전쟁 직후인 1953년 미1군단 사령부의 지휘·통신을 목적으로 직속 항공대가 들어선 이후 60년간 주민 생활에 큰 불편을 끼쳤다. 구도심과 신시가지를 가로막아 도심 발전에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번 신흥로 개통으로 가능동 구시가지에서 의정부동 신시가지까지 이동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단축되는 등 의정부시내 전체 교통난 해소에 숨통을 확 터줄 전망이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軍, 北 침투대비 산악여단 창설 추진

    軍, 北 침투대비 산악여단 창설 추진

    우리 군이 북한 특수전 부대의 기습 침투와 국지 도발에 맞서기 위해 동부전선에 ‘산악 여단’ 창설을 추진한다. 또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전방 사단에 산악용 4륜 오토바이크 수십대씩을 보급해 운용한다. 국방부는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예하에 산악여단을 창설해 북한군 침투에 대비하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18일 밝혔다. 군 관계자는 “산악 지대를 통해 휴전선을 재빨리 넘어온 뒤 우리 후방에 진입할 목적으로 육성된 세계 최고 수준의 북한 특수부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북한군은 서북도서 및 군사분계선(MDL)을 돌파해 후방 교란작전을 벌이는 경(輕)보병 사단과 11군단(일명 폭풍군단) 등 20만여명의 특수부대원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은 또 좁고 험한 산악 지대에서 신속하게 기동할 수 있는 4륜 오토바이크를 전방 사단별로 20~30대를 배치, 2017년까지 모두 270여대를 운용할 계획이다. 이 오토바이크는 최대 탑승 인원이 2명이며 평지에서 최고 시속 80㎞(산악지형 25㎞)까지 낼 수 있다. 적재함에 250㎏까지 장비를 실을 수 있고 대당 가격은 약 1500만원이다. 평시에는 수색정찰용으로, 전시에는 보병부대에 탄약을 운반하는 용도로 활용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권오성 연합사 부사령관

    ▲경기 양주(56) ▲육사34기 ▲육군본부 계획편제처장 ▲15사단장 ▲국방부 정책기획관 ▲1군단장 ▲합참 합동작전본부장
  • 지뢰 주의보…과거 우면산 10여발 미제거

    ‘지뢰 주의보’가 발령됐다. 서울·경기·강원 등에 내린 집중호우로 군부대 탄약고와 지뢰 매설 지역 등이 유실된 데 따른 것이다. 북한에도 폭우가 내려 목함지뢰가 떠내려올 가능성도 높다. 군 당국은 28일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난 서울 우면산 일대에 과거 매설했다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지뢰 10여발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군은 1980년대 후반 이 지역에 일명 ‘발목지뢰’라고 불리는 M14 대인지뢰 1000여발을 설치했다가 1999년부터 8년간 대대적인 제거 작업을 통해 수거했다. 그러나 당시 10여발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이 지뢰들이 이번 폭우로 유실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트위터상에서는 전날부터 ‘우면산에 매설된 지뢰가 유실됐다.’는 말들이 퍼지기도 했다. 군 당국은 “지뢰 매설 지역은 산사태가 난 지역과는 떨어져 있는 방공포 부대”라면서 “혹시 모를 유실에 대비해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27일 오후에는 경기 양주 육군 25사단 예하 부대 탄약고가 산사태로 반파되면서 보관돼 있던 M16A1 대인지뢰와 KM18A1 클레이모어 지뢰, M15 대전차 지뢰, K400 세열수류탄 등 다량의 폭발물이 유실되기도 했다. 군은 사고 즉시 차단망을 설치하고 배수로를 막아 떠내려가는 것을 막았고 28일 오후 2시쯤 유실된 위험폭발물 전량을 회수했다고 밝혔다. 한편 최근 북한에도 호우가 집중돼 북한에서 떠내려오는 지뢰에 대한 경고등도 켜졌다. 육군 1군단은 지난 27일 “파주시 진동면 임진강에서 수색작업을 벌이던 중 북한군의 목함지뢰 1발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2000~2010년 지뢰 사고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는 모두 47명에 이른다. 지뢰 유실에 따른 피해 우려가 커지자 합동참모본부는 예하부대에 지뢰 탐지 및 수색작전을 긴급 지시했다. 군은 이에 따라 서울 우면산, 경기·강원 지역의 방공진지, 북한 목함지뢰가 발견되고 있는 임진강과 강화도 일대에 대한 집중 탐색에 착수했다. 합참 관계자는 “유실된 지뢰는 방아쇠 잠금장치 부식으로 약한 충격에도 폭발할 수 있다.”면서 “지뢰로 의심되는 물체를 발견하면 절대 만지지 말고 가까운 군부대나 경찰서로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홍성규·신진호기자 coo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를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 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한·미 전차부대 첫 연합 교전훈련

    한·미 양국의 전차부대가 처음으로 혼합 편성돼 교전훈련을 실시한다. 육군은 3일 “1군단 2기갑여단과 미 2사단 예하 1여단이 7일부터 10일까지 경기 파주시의 다그마노스 훈련장과 무건리 훈련장에서 연합 대대전술훈련을 한다.”고 밝혔다. 연합 대대전술훈련은 우리 군 기갑여단의 2개 전차대대에 미군 기계화보병 2개 중대를 섞어 두 개의 편으로 나눠 자유기동하며 교전하는 훈련이다. 훈련에 참가하는 장병이 모두 마일즈(다중통합레이저교전체제) 장비를 소지하고 전차에도 미군이 사용하는 전차용 마일즈 장비를 부착해 실시간으로 훈련 상황에 대한 정보가 수집된다. 또 실시간 영상정보를 제공하는 미군 무인정찰기(UAV)를 띄워 교전 상황을 실시간 파악하는 등 실전처럼 진행된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5·16 50돌] 5·16을 말한다

    [5·16 50돌] 5·16을 말한다

    ■ “8기 JP가 주도했다고? 5기가 핵심 세력이었지” 주역 중 1인 김재춘 前중앙정보부장 ‘삼국지’ 첫 대목으로 기억된다. ‘창장(長江)강은 뒤 물이 앞 물을 밀치면서 도도히 흐른다.’ 역사의 물줄기를 의미하겠다. 꼭 50년 전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하루였다.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은 사건, 이른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날이다. 최근 50주년을 맞아 5·16 그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주체세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필(85·육사8기) 전 자민련 총재가 5·16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재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육사8기생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니 혁명을 주도하려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그들에겐 따르는 휘하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 뭘.” 김재춘(84·육사 5기)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은 5·16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대령)이었다. 그는 거사 전야인 1961년 5월 15일 밤 육사 5기생 출신을 주축으로 30여명의 영관장교들과 대책회의를 주도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도 참석,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등의 역사가 있어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소위 ‘혁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그때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혁명의 발상지였어. 15일 밤 10시에 5기생부터 8기생까지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교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김 전 총리는 보이지도 않았어. 다들 목숨을 내놓고 온 장교들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지. 침묵으로 긴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3시 혁명군들이 여러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각자의 역할로 돌아갔지.”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에 장교들이 모인 까닭에 대해 그는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5기생 출신들이 5·16의 주도세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때 말야. 5사단장 채명신 장군, 12사단장 박춘식 장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1공수여단장 박치옥 대령 등이 5기생 출신이었는데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 출동해 말 그대로 일등공신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김 전 총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지만 당시 김 전 총재는 민간인 신분인 걸로 알고 있어.” 김 전 총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된 3700명 병력이 적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이사장에게 “당시 김 전 총재는 하극상 사건으로 민간인 신분인데도 권총을 차고 가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불법무기 소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허, 아마도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라 다급하게 권총을 찼나 보지 뭐.”라고 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이하 김 참모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긴박했던 그날의 참모장실 분위기를 개략적으로 재구성했다. 김 참모장은 5월 15일 저녁 9시 30분쯤 시내에서 6관구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특이상황 여부를 묻고 박정희 소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곧장 부대로 향한다. 잠시후 부대정문에 도착한 김 참모장은 대기 중이던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참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 10시쯤 되자 다른 장교들도 추가로 합류했다. 김 참모장은 장교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6관구사령부는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군단의 전신이다. 이 시간 박정희 소장은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과 함께 청진동 소재 서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청진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즐기다 보니 비밀장소를 서울호텔로 정했다. 이날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새벽 3시 6군단 포병단이 육본을 완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과 긴장의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갈 뿐이었다. 특히 새벽 3시 무렵, 참모장실에 영어를 구사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와 긴장과 초조함은 더했다. 백악관인지 미8군 관계자인지 영어가 짧아 되묻지는 못했지만 ‘거사의 주동이 박정희가 맞느냐.’고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김 참모장은 ‘맞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새벽 4시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참모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혁명 취지가 담긴 박정희의 친필 서신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인편을 통해 보냈다. 내용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전원 자결키로 맹세한다.’는 뜻도 담겼다. 장 참모총장은 육본 군수참모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어서 필동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마친 뒤 나중에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종합적인 상황보고를 받았다. “5·16 아침 박정희 소장 등과 함께 청와대로 갔어. 윤보선 대통령한테 정확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해서였지. 비서관이 먼저 나와 우리들에게 ‘각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묻더군. 앞으로 잘 모시고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만나게 해줬어.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해 있어서 금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박정희 소장한테 거사계획을 언제 들었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박정희 장군은 점조직을 통해 혁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부분 1대1로 만나 가담 여부를 타진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거사일을 5월 12일로 했다가 연기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우리 5기생들은 육사 때 박정희 장군이 구대장과 중대장을 했던지라 거사 제의 같은 것은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5·16 관련 내용은 인터뷰나 자료 등을 통해 대부분 공개됐다. 이 중 거사의 발상지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이며 주축세력이 육사 5기생과 8기생 출신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동안 왜 8기생 출신들의 역할이 더 부각됐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아마 김 전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여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김재춘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와 1955년 육군대를 졸업했다. 1957년 연대장을 지낸 뒤 1961년 5·16 당시 5·16 군사정변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방첩부대장 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지냈으며 1963년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이후 무임소장관, 자민당 최고위원 등을 거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김포·강화, 민중당) 1973년 제9대 국회의원(고양·김포·강화, 민주공화당)을 지냈다. 1974년 축산단체연합회 회장, 1975년 한·중예술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 “5·16前 JP가 찾아와 정치발언 하기에 내쫓아” 反혁명분자 몰렸던 김웅수 당시 6군단장 5·16 당시 육군 6군단장(소장)이었던 김웅수(88)씨. 수도권 요충지에 포진한 6만명의 예하 병력을 법을 어겨 가며 진압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반 혁명세력으로 몰렸고 1년 뒤 군사정권의 간접적 압력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시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라는 질문에 “쿠데타로 본다.”고 했으나, 답변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5·16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단장급 이상 야전군 지휘관 회의가 5월 17일 강원 원주의 야전군사령부에서 예정돼 있었어요. 16일 열리는 체육행사에도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25~26명의 지휘관들이 15일 원주에 다 모였어. 16일 새벽 4시쯤 잠을 자고 있는데 이한림 야전군사령관이 관사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거야. 그래서 가 보니 이 사령관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면서 “각자 부대로 돌아가 병력을 장악해라. 병력 이동의 빌미가 될지 모르니 부대에 비상을 걸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6군단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6군단의 작전지휘권은 내가 아니라 미 1군단장이 갖고 있었어요. 불법을 진압하려 불법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북한군 교신이 급격히 늘어나기에 비상을 걸었지. 비상을 걸면 자동적으로 1개 사단이 완전무장해서 특정지구로 출동하게 돼요. 이 일로 나중에 나는 반 혁명세력으로 간주되게 되었죠. →미군에는 조치를 요구했나요. -18일 나의 매부인 강영훈 육사교장이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행진을 불허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라이언 1군단장한테 “왜 1군단이 갖고 있는 서울 비상계획은 쓰지 않는가.”라고 따졌어. 그날 저녁 라이언 장군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매그루더 미 8군사령관이 이한림 장군을 찾아가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장군이 “I will do(하겠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제 그날 저녁 이 장군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 와 “도와 달라.”고 하더라고. 다음날 아침 이 사령관이 소집한 군단장 회의에 가려고 횡성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미군 대령이 “이 장군이 이미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면서 되돌아가라고 하더라고. →결국 미군이 묵인한 건가요. -매그루더 장군이 누구를 진압할 성격이 못 됐어요. 강직하지 않았어. →미국이 5·16을 사전에 감지했었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17일 마셜 그린 미국 부대사가 ‘군은 헌정에 의한 정통 정부에 귀속하라.’는 서한을 보내 왔거든. →6군단장으로는 언제까지 근무하신 겁니까. -20일 대통령 특사가 온다기에 군단 비행장으로 나갔어요. 도착한 비서 2명이 건넨 윤보선 대통령의 서신에는 ‘대립을 피하고 쿠데타에 협력하라.’라는 취지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그날 장도영 장군이 21일 오후 1시쯤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 서울로 떠나려는데 집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불길하다는 거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헌병 차량의 호송을 받으며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달려들어 막아서기에 내려보니 집사람이더라고. 그래서 “군인의 아내이니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아이들이나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는 차에 올랐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어. 의사당 앞에 도착하니까 어떤 장교가 다가오더니 권총을 옆구리에 대고 같이 가자고 해요. 차지철이었던 것 같아. 나를 마포 형무소에 집어넣더라고. →박정희 소장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나요. -잘 몰랐어. 하지만 그 사람이 청렴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함께 일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1957년 내가 군수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군수기지사령관에 추천했어요. →직접 본 박정희 소장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강직한 느낌이었어요. 군수기지사령관 취임식 참석차 부산 동래에 내려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숙소로 찾아와서는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이대로 되겠습니까.”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군인이 혁명한다고 나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있나.”라고 했지. →김종필씨와는 인연이 있습니까. -5·16 전에 김종필 소령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부패한 장성들은 군대에서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부패한 장성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소문으로 알지 실제로는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 정치적 발언하려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미국으로 떠난 이후 두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나요. -1972년인가 장모님이 위독하셔서 한국에 갔었어. 그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더라고. →청와대로 갔나요. -청와대에서 박정희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기에 “이제는 사회 문제보다 개인사정이 더 중요하다. 막내 아들이 대학 들어가는데 3년은 더 있어야 나올 수 있다.”고 했어. 그랬더니 박정희가 “기업체를 순방하고 군부대도 순방해 달라.”고 그래요. 내가 “장모님 병 때문에 어렵다.”고 했더니 “나이 든 사람의 병이란 늘 그런 것 아니냐.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되지 않느냐.”고 해요. 그래서 포항제철하고 과학기술연구원인가 두 군데 돌아봤어. →김종필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만났더니 “선배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나라가 부패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고 했지. →5·16은 필요했다고 보십니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오늘날 국민 전체가 수긍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걸 보면, 5·16이 나라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구나, 국민의 감정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김웅수는 192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청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 김조현의 거처로 옮겨 6살 때까지 중국 하얼빈 근처 독립군 부락에서 살았다. 일본 관동군 학도병으로 끌려간 뒤 일본 센다이 예비사관학교에 편입해 장교가 된다. 일본 야마가타 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지 몇 달 뒤 일본 패망으로 해방된 한국에 들어왔고, 국군 장교가 됐다. 5·16 당시 혁명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뒤 집행유예로 석방,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등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밟고 워싱턴 DC의 가톨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일했다. 여동생이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다.
  • 한국국방연구원장 방효복씨 내정

    한국국방연구원(KIDA) 원장에 방효복(61·육사30기) 전 국방대 총장이 내정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11일 “KIDA 원장에 방 전 국방대 총장이 내정됐다.”면서 “내일 이사회을 열어 이를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 내정자는 197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50사단장, 국방부 정책기획관, 11군단장, 육군 참모차장 등을 거쳐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국방대 총장을 지냈다.
  • “쏠까 말까 고민말고 先조치 後보고”

    “쏠까 말까 고민말고 先조치 後보고”

    “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선조치 후 보고하라.” 김관진 국방장관이 1일 북한군 도발 가능성에 대한 대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서부전선 최전방부대를 순시하면서 유사시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대응사격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북한군 도발에 망설이지 말고 즉각 대응하라는 취지로 풀이된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김 장관은 오전 7시 55분쯤 1군단 지하 벙커에 있는 지휘통제실에서 최종일 군단장으로부터 북한군의 최근 동향과 우리 군의 대비 태세를 보고받았다.”고 설명했다. 김 장관은 최 군단장의 보고를 받은 직후 “북한군이 도발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도발유형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끊임없는 토의가 필요하다.”면서 “작전 시행 시 현장에서 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선조치 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김 장관은 이어 “아무리 도발 대비 계획이 잘돼 있다고 해도 행동이 따라야 한다.”면서 “이에 대한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최 군단장은 “북한군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추적하고 있다.”면서 “북한군이 도발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하고, 적의 공격이 있다면 원점을 타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1군단은 남북관리구역 서부지구 및 임진각 일대를 관할하는 부대다. 김 장관은 이어 1군단 예하 포병대대의 다연장로켓(MLRS) 부대를 방문해 대비 태세를 점검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김 장관은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된 키 리졸브 연습과 독수리훈련 기간 북한군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하고 점검하는 차원에서 전방을 순시했다.”면서 “특히 북한군이 심리전 발원지를 조준 격파 사격하겠다고 위협하는 최근 상황을 반영한 조치”라고 말했다. 한편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연일 비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일 “정당방위를 위한 우리 군대의 물리적 대응이 불가피해지고 있다.”면서 “미국은 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격화시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이석·윤설영기자 hot@seoul.co.kr
  • 작전·야전통 ‘라인업’… 군대다운 군대로

    작전·야전통 ‘라인업’… 군대다운 군대로

    16일 단행된 전군(全軍) 장성 인사는 ‘작전통’의 전진 배치로 마무리됐다. 가장 규모가 큰 육군은 1·2·3군단장과 특수전사령관에 합동참모본부와 한미연합사령부 등에서 근무하던 작전형 장군들을 배치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이 취임 12일 만에 단행한 인사에 국군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도 만족한다고 평가했다. ●야전형 발탁… 공평인사는 글쎄 이번 인사의 특징은 야전 경험이 풍부한 작전통의 핵심부대 배치다. 중장으로 진급한 최종일(56·육사 34기) 1군단장, 박선우(53·육사 35기) 2군단장, 이용광(56·학군 16기) 3군단장, 신현돈(55·육사 35기) 특수전사령관 등은 전방에서 사단장을 지내고 현재 합참과 연합사 등에서 대부분 작전 분야에 근무하고 있다. 최 중장은 연합사 작전차장, 박 중장은 합참 군사기획부장, 신 중장은 합참 작전기획참모부장으로 근무했다. 이 군단장이 유일하게 육군본부 감찰실장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역시 최전방 사단인 15사단장 등으로 근무한 바 있다. 최 중장은 지난해 인사에서 누락됐지만 최근 남북한 관계가 급랭하면서 연합작전 분야의 전문성이 인정돼 발탁됐다. 중장 진급 막차를 탄 셈이다. 또 정보통인 연합사 정보참모부장을 지낸 윤학수(55·공사 25기) 중장의 국방정보본부장 승진 인사도 눈에 띈다. 북한의 잇단 도발로 확인된 우리 군의 부실한 정보 판단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윤 중장은 지난해 인사에서 탈락해 내년 1월 전역을 앞두고 있었지만 연합정보 및 대미 분야 전문성을 인정받아 진급했다. 공군 남부전투사령관을 지내고 현재 공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으로 근무하는 이영만(54·공사 27기) 중장의 공군 작전사령관 임명도 주목된다. 공군 내 최고 작전통으로 꼽히는 이 중장을 공작사 수장으로 앉혀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하겠다는 김 장관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직된 해군은 준장 진급자 13명 가운데 50%가 함정과 잠수함 등에서 잔뼈가 굵은 야전형 장군들로 채워졌다. 지역 안배와 관련해서는 중장 진급자 6명 가운데 충청 2명, 호남 2명, 영남 1명, 강원 1명 등으로 대체로 균형을 맞춘 모습이다. 하지만 육군 준장 진급자 59명 중 호남 출신은 8명이 포함됐다. ●MB “이번 인사 가장 공정” 인사에 대해 이 대통령은 “이번 인사는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해 국방장관이 가장 공정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청와대에서 김상기 육군참모총장, 이홍기 제3야전군사령관 등 신임 군 고위장성 14명으로부터 진급 및 보직 신고를 받는 자리에서다. 신임 김 총장이 이 대통령의 고교 후배인 데다 이번 인사로 육·해·공군 참모총장에 모두 영남 출신이 포진하게 된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학연·지연보다 능력 위주의 인사라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군 안팎에서는 ‘가장 공정한 인사’라는 평가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도 많아 조속한 국방개혁에 나서야 하는 김 장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진 것도 사실이다. 김성수·오이석기자 ho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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