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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바경찰,서방공관 침입/스페인 대사관 피신자 1명 체포

    ◎양국,외교 마찰 조짐 【아바나 로이터 연합】 쿠바수도 아바나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망명을 요구하려던 쿠바인 한명이 13일 저녁 총을 발사하며 대사관 안뜰에까지 쫓아들어간 보안경찰에 의해 끌려갔다고 목격자들이 14일 말했다. 목격자들의 말은 스페인 외교소식통들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으며 이 소식통들은 스페인측이 쿠바 외무부에 이 문제를 항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4명의 쿠바 보안경찰은 스페인 대사관에 담을 넘어들어간 이 쿠바인을 뒤따라 담을 넘은후 그들 체포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사관 직원들이 『이곳에서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소리쳤으나 경찰은 이를 무시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한편 이미 3명의 쿠바인들이 스페인 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체코대사관에 들어가 있는 12명의 쿠바인 문제로 체코와 외교분쟁을 벌이고 있는 쿠바가 이날 사건으로 스페인과도 커다란 외교적 마찰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 쿠바인 2명 또 탈출/스페인 대사관으로/피신자 22명으로 늘어

    【아바나ㆍ프라하 AP AFP 연합】 2명의 쿠바인이 이미 다른 1명의 쿠바인이 서방국가로의 망명을 요구하며 피신해 있는 아바나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13일 피신했으며 이로써 지난 9일이래 아바나의 외국 공관에 피신한 쿠바인이 모두 22명으로 늘어났다고 아바나의 소식통들이 말했다. 아바나의 체코슬로바키아대사관에는 이미 14명의 쿠바인이 피신해 있으며 다른 쿠바인 5명도 12일 강제로 얀 도모크 체코 대리대사의 저택에 들어갔으나 도모크 대리대사는 그의 저택에 들어간 5명의 추방을 요구하고 있어 실제로 보호를 받고 있는 쿠바인 피신자는 17명인 셈이다.
  • 쿠바인 피신 확산/5명 또 체코대사 저택에/모두 20명으로 늘어

    【아바나 로이터 연합】 5명의 쿠바인들이 12일 아바나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대리대사 공관에 들어감으로써 쿠바주재 체코 외교대표부 건물에 피신한 사람수는 총 20명이 됐다고 쿠바외무부가 발표했다. 쿠바외무부는 이날 국영 TV방송 뉴스시간을 통해 발표된 성명을 통해 12일 상오 5명의 쿠마인이 얀 도모크 체코 대리대사의 저택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외교소식통들은 이들 5명의 쿠바인들은 남자 4명과 여자 1명이라고 전했다.
  • 피신자 출국 허용/체코,쿠바에 촉구

    【프라하 AP 연합】 체코는 13일 쿠바 수도 아바나주재 체코대사관에 피신중인 14명의 쿠바인들에게 자유출국을 허용해 달라고 촉구하고 소련 서독 이탈리아 등에 이 문제의 해결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 사유재산제등 도입/후속 대처방안 승인/체코의회

    【프라하 AP 연합】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이틀간의 격론끝에 시장경제로의 전환으로 인플레를 비롯,경제적 어려움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담한 경제개혁계획을 11일 공식 승인했다. 이와 관련,마리안 칼파 총리는 44년만에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총선으로 구성된 내각이 들어선지 4일만인 지난 3일 정부의 경제개혁안을 내놓았다. 국영 CTK통신은 이날 의회의 최종 결의안을 인용 보도하는 가운데 의원들은 개혁에 따르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정부가 개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개념을 정립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외국인들의 대체투자여건을 조성해 주도록 촉구했다고 전했다. 체코는 이번 경제개혁의 주안점을 사유화,새로운 예산규정 및 조세제도,가격자유화를 비롯,개혁에 따르는 사회적 충격에 대한 대처방안 등에 두고 있다. 지난 40여년간 공산체제하에 있던 체코는 정부 보조금에 힘입어 인위적이긴 하나 낮은 물가수준을 유지해 왔으며 실업률도 최소한도의 선에 머물러 왔었다. 그러나 물가앙등 현상은 이미일어나고 있으며 지난 9일부터 정부보조금 지급이 중단됨에 따라 식료품 가격이 평균 25% 인상됐다.
  • “평양에 변화 조짐”외신보도를 보고/박봉식교수 서울대ㆍ정치학박사

    ◎거스를수 없는 「1989년의 혁명」/고르바초프 실각 기다리는 시간 벌기 아닌지… 프랑스혁명 200년만에 유럽은 예기치 않았던 큰 격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1792년에 이르러 혁명전쟁으로 발전하였고 뒤이어 나폴레옹전쟁으로 번져 전후 25년동안 전유럽을 뒤엎는 전화를 당하게 되었다 작년에 일어난 유럽의 혁명이 200년전의 그것과는 달리 어떤 형태든 전쟁을 몰고올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그 혁명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겠다는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진원지와는 거리가 먼 아시아의 중국과 북한뿐이다. 유럽에서는 혁명을 거부하는 인사들은 고르바초프의 손에,또는 그 나라국민들의 손에 의하여 제거되고 말았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소련과 동유럽의 변혁을 막아야할 이유는 없었다. 혁명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혁명을 완성시킨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경우 비슷하게 적중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운동은 이미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시작된 혁명의 조용한 진행을 가속화시켰고 이것을 바르샤바 탈소동맹국 모두에 확산시켰다. 그래서 동유럽내에서는 여기에 저항할 세력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1989년에 유럽을 휩쓸고 또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혁명은 큰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넘어갈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역사에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에서 본대로 프랑스의 혁명이 전쟁을 몰고 왔고 1차대전과 2차대전은 패전국이나 패전국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번 동유럽의 혁명은 전쟁과 관계없이 일어나 예외적인 일이다. 한편 시각을 달리해 보면 한국전쟁으로 인해 동서냉전체제의 격한 대립이 체제화되어 지속되는 과정에서 소련이 군사대국으로서의 능력을 더 지탱할수 없는데서 생긴 일이라 할수 있다. 이렇게 보면 냉전에 패배한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주도의 혁명이 일어 났다고 할수 있다. 냉전도 전쟁이고 보면 소련이 서방측과의 냉전에 패한 것이며 그 결과 소련은 그의 지배하에 있던 바르샤바 탈소동맹국들에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게 되고 따라서 이 지역에 혁명이 일반화 되었다고 하겠다. 소련은 냉전에 패배한 것을 각성한 고르바초프의 지도하에 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혁명은 결코 조용할수 없는 모양이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결국 소련 제국의 해체를 가져 올 것이며 소련제국을 해체해 가면서 까지 고르바초프는 그의 개혁을 정당화할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의 개혁운동은 중도에서 머뭇거리게 될 것이며 그러는동안 그는 정치적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도중에서 하차한다고 하여 한번 시작한 개혁을 어느 선에서 정지시킬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시장경제체제와 민주화라고 하더라도 서유럽식으로 되기는 어려울는지 모른다. 체코나 헝가리 등은 서구화가 가능할지 모르나 소련은 서유럽을 완전히 본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치 한국이 구미의 영향을 40여년간 받고 있으면서 잘 흉내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선진화됐다고 하는 일본이 일본식 자본주의를 갖추듯이 소련식 개혁과 소련식 시장경제가 불가피하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200년전 20여년의 전쟁으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쳐부순 유럽이 혁명전의 정치명분을 되찾고 구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죽 전쟁이 승리했음에도 그 혁명의 영향은 막지 못하였던 예를 본다. 따라서 중국과 북한이 유럽서 시작된 또는 사회주의의 종주국에서 시작된 혁명의 바람을 거역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프랑스혁명의 바람을 보수주의국가인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제국들이 협력하거나 이합집산하면서 근 100년가량 막아왔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이들 제국 스스로가 망하고 말았다. 중국과 북한은 동유럽과 소련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힘이 없다. 오늘날 소련과 동유럽 변화의 물결은 소련의 변화하고 있는 힘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바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변화를 거부하려 할 때 분쟁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분쟁은 때로는 생사를 걸고 하는 분쟁일 수 있다. 동독의 호네커나 폴란드의 야루젤스키는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통화와 면담 한번으로 대권을 내 놓거나 국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등소평이나 북한의 김일성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이들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고르바초프의 실각을 기다려 그들의 정치노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는 것이 기본자세인것 같다. 물론 변화의 움직임에 전술적으로는 적응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일성은 그의 왕국을 고르바초프의 말한마디에 공중에 날려 버리게 될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방법이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그의 왕국을 지키려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온 세계는 데탕트를 구가하고 있는데,한반도에서 만은 냉전의 기본은 오히려 되살아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결국에 가서 그도 별도리없이 역사의 흐름앞에 무릎을 꿇고 말겠지만 그 사이 버티려고 몸부림 치는 동안 우리 민족의 성원들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할지가 확실치 않다. 많은 낙관론들이 난무하고 있으나 필자는 선뜻 이 낙관론에 동조되지 않는 것이다. 월남의 경우 연 30억달러의 원조를 받고있고 이것이 반으로 줄어들전망이라 캄란만을 도로 미군이 사용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수십년에 걸친 전쟁과 인명ㆍ재산ㆍ역사의 희생이 무엇때문이었던가를 월남의 경우 돌이켜 보게 된다. 북한은 6ㆍ25의 범죄적인 과실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1989년 동유럽의 혁명이 아시아에도 제대로 바람을 일으켜 온 인류가 환호하고 역사의 대열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쿠바인 7명,또 체코 대사관 피신/모두 14명으로 늘어

    ◎망명사태 확산 조짐/정부,보안 강화… 외교분쟁 일듯 【아바나 로이터 연합 특약】 쿠바 수도 아바나 주재 체코슬로바키아대사관에 11일 상오 또다른 7명의 쿠바인들이 들어가 현재 피신중인 사람수는 14명으로 늘어났다고 이곳 체코대사관의 한 관리가 밝혔다. 이 관리는 『대사관 주변의 엄중한 감시에도 불구,어떤 경로로 월담을 했는지 알수 없다』며 『이들은 다만 쿠바에서 떠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에 앞서 지난 9일 쿠바인 7명이 체코대사관에 피신,현재 학생 2명은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있으며 5명의 반체제인사는 유럽여행을 마친 뒤 쿠바당국의 보복을 받지않고 귀국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 쿠바인의 체코대사관 피신사건은 두나라간에 까다로운 외교문제로 번지고 있으며 쿠바당국은 알바니아인들의 외국대사관 피신사태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국민의 보안조치를 크게 강화하고 있다.
  • 알바니아 각료 5명 또 경질/난민 2진 40명 곧 헝가리행

    【빈ㆍ로이터 AP 연합】 일반 국민들의 전례없는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알바니아 지도부는 9일 각국 대사관에 몰려있는 약 6천명의 난민이 출국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3일만에 두번째의 지도층 개편을 발표했다. 알바니아 관영 ATA통신은 부총리겸 국가통제위 위원장과 경공업장관,식량산업장관이 퇴임하고 공공사업장관과 대내무역장관이 다른 직책에 전보됐다고 보도했다. 약 6천명의 난민중 반이상은 서독 대사관에 피신하고 있으며 기타는 이탈리아 프랑스,그리고 체코 폴란드 헝가리 및 터키 등의 대사관에 피신했는데 헝가리 대사관측은 그들의 대사관에 있는 40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체코 대사관 난민들의 예를 따라 곧 출국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으며 유고 대사관 당국자도 유고 대사관 난민들에게도 2일내에 출국에 필요한 서류가 발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라하 로이터 연합】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에서 출국을 요구하며 피신중이던 알바니아인 중 1진 51명이 10일 아침 체코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공항에까지 이들을 마중나간 체코의 지리 디엔체스트 비에르 외무장관은 『체코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알바니아인은 버스를 타기전에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 하벨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으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벨,하벨』을 연호하기도 했다.
  • 알바니아 피신자 51명 첫 출국/특별기편 체코로

    ◎6천명 전원 여권발급 방침 【빈 바르샤바 AP AFP 연합】 알바니아 당국은 9일 수도 티라나 주재 외국공관에 피신중인 자국 주민 6천명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대사관에 피신중인 51명에 대해 처음으로 출국을 허가했다고 체코관영 CTK통신이 보도했다. CTK통신은 보이체흐 바그너 체코외무차관의 말을 인용,이같이 전하고 『이들 51명의 알바니아인들은 이미 여권을 발급받았으며 오늘밤 특별기편으로 체코 수도 프라하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보도에 대해 알바니아 정부는 즉각적인 확인을 하지 않고 있으나 알바니아 정부는 앞서 지난 7일 티라나 주재 외국공관에 피신중인 자국난민들에게 사면조치와 출국비자 발급을 약속한 바 있다. 프랑스 외무부도 자국 대사관에 피신중인 5백50명의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여권신청작업이 빠르게 진행돼 이날중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티라나 주재 서독대사관 관리들은 서독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3천여명의 알바니아인들의 여권신청작업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 알바니아 탈출 사태속 민주화시위/외국공관앞 5천5백명 몰려

    ◎수도선 1만군중 이틀째 집회/“서방공관 피신 알바니아인 해당국서 동의땐 출국 허용” 【빈ㆍ본ㆍ아테네 외신 통합】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7일 외국대사관 피신자수가 5천5백명 수준으로 늘어나고 대규모 민주화 요구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알바니아 당국은 외국대사관에 은신중인 수천명의 피신자들이 대사관을 떠난다면 처벌하지않고 다른 모든 알바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여권을 발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유럽 최후의 스탈린주의 폐쇄국가를 이끌고 있는 라미즈 알리아대통령은 민주개혁을 앞당기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국내외일부 세력이 알바니아를 벼랑아래로 밀어내려 한다』고 비난하며 공산당이 다른동구국에서처럼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외국대사관에 피신중인 알바니아인들은 해당국이 입국을 허용할 경우 해당 대사관 요원들의 인솔 감독 아래 여행증명서를 발부받아 전원 출국할수 있다고 알바니아 외무부가 통보해온 것으로 헝가리의 한 외교관은 말했다. 그러나 출국일자는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티라나주재 서방국 대사관에는 이날 하오 현재 국외출국을 위해 인파가 계속 몰려들고 있으며 서독대사관 2천5백명,이탈리아대사관 1천5백명,프랑스대사관 1천명과 체코ㆍ헝가리ㆍ폴란드ㆍ터키대사관 등의 피신자까지 합치면 5천5백여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 외교관이 말했다. 또 외교공관지구 인근의 스칸더베그 광장에서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1만여명의 민주화요구 시위대가 집결,경찰과 충돌을 벌인 뒤 해산됐으며 시위과정에서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다른 외교관이 전했다.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사무총장과 겐셔 서독외무장관 등 서방측 관련인사들은 알바니아 망명자들의 인도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으며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제리주재 스타모 알바니아대사는 본국 정부가 피신자들의 출국을 위해 서방측 대사관으로 1천5백장의 여권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알리아대통령은 이날 전국으로 TV중계된 당중앙위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내년 가을로 예정된 당대회를 6개월앞당겨 소집해 알바니아사회의 모든 부문과 공산당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민주개혁의 청사진을 마련,실시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알바니아 “탈출자” 급증/서독대사관등에 2천여명 몰려

    ◎당국,외국공관 봉쇄 해제… 민주화개혁 조짐/당중앙위 소집… 지도부 개편 가능성 【파리 로이터 연합】 해외로 탈출하려는 알바니아인들이 비자를 얻기위해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외국대사관에 쇄도해 약 2천명이 각국 대사관에 진을 치고 대기중이며 이같은 이주희망대열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파리의 서방 외교소식통들이 6일 말했다. 이 소식통들은 티라나의 서독대사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약 1천5백명이 대사관에 머물러 있으며 프랑스대사관에 2백30명,체코와 폴란드ㆍ헝가리대사관 등에 2백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또 해외이주 희망자들에 대한 여권발급 방침을 밝힌 알바니아정부가 이주희망자들의 외국대사관 출입봉쇄를 해제해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있으며 시가지 경계에 나선 경찰들이 오히려 이들에게 길안내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탈리아 외무부 대변인은 티라나의 외국대사관 지구에 대한 알바니아경찰의 봉쇄가 해제된 것은 「새로운 자유화 방침의 시작」일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서독과 프랑스ㆍ이탈리아대사가 알바니아 당국에 외국 이주희망자들의 안전출국 보장을 촉구하는 EC의 요구를 이날 늦게 알바니아측에 서면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다시노 데르비치 이탈리아주재 알바니아대사는 알바니아 집권공산당의 정책결정기구인 중앙위가 이날 회의를 소집,당지도부를 개편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당중앙위 회의 개최일정이 이번 알바니아사태 이전에 정해졌다고 말했다. 이에앞서 5일 한 유럽 고위외교관은 지난 1일부터 촉발된 소요사태로 약20명에서 50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 “「시장경제」 서두른 나라가 잘산다”(차동세의 경제기행 동구:하)

    ◎헝가리,비교적 부유… 체코는 훨씬 궁핍/개방ㆍ개혁 이끌 「경영두뇌」없어 애태워 1인당 국민소득통계로 보면 폴란드가 소련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여야 하는 데도 공중에서 내려다 본 폴란드의 모습은 소련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농장의 집들도 제법 깨끗했고 길거리에 차들도 더 많았다. 만나본 사람들도 소련보다는 활기차 보였으며 어느 정도 개혁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시장경제에 대한 예비지식도 꽤 축적되어 있는 것 같았다. 동독 체코 헝가리 등 방문 5개국중 헝가리가 가장 잘 살고 그다음이 동독 체코 폴란드이고 소련이 가장 못사는 것 같았다. 국민의 실제 생활수준은 국민소득에 관한 통계와는 거의 정반대였다. 시장경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가 생활수준도 가장 앞서있고 시장경제도입이 늦은 나라는 가장 뒤져 있는 셈이다. 경제발전에 있어 시장의 힘이라는 것이 그토록 강한 것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 방문국중에서 폴란드의 농가가 유독 잘 살아 보였고 주택도 농장도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되어 물었더니 폴란드에서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도 농토만은 80%가 사유지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하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어떻든 현재 폴란드에서는 식량이 오히려 남아도는 이유를 알수 있었다. 동구권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동독사람들은 자기들이 언제 공산주의자였더냐는 듯 하였으며 그들의 머리속에는 이데올로기 대신에 독일민족의 위대함과 경제적 풍요에 대한 기대가 가득차 있는 듯하였다. 동독 사회과학원 간부급인사에게 독일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을 보니 같은 분단국의 국민으로서 대단히 기쁘다는 말과 함께 남ㆍ북한도 가까운 장래에 통일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가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았다. 그의 얘기인 즉,독일의 경우와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독일은 비유하면 사랑하는 남녀가 부모에 의해 강제로 떨어져 살아온 격이지만 남ㆍ북한은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을 부모들이 겨우 떼어말려 놓은 것과 같지 않느냐고 했다. 또 하나 동독은 오래전부터 서독과 교류를 실행해왔고 서로 내왕이 있었으며 김일성이 같은 독재자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ㆍ북한 통일에 대해 너무 성급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약이 올랐지만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무안을 당한 꼴이 된 채 겨우 늘어 놓은 변명은 베를린장벽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아무도 모르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의 휴전선도 어느날 갑자기 무너져 내릴지 모르지 않겠느냐는 말로 대신하였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동서독분계초소를 지나 서베를린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모처럼만에 김치를 실컷 먹고 나니 속이 얼얼하였지만 살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베를린의 번화한 모습과 바로 경제하나 넘어 동베를린의 침울하고 정체된 모습이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어 그것이 인간의 장난인가 아니면 신의 조화인가 실로 감회가 착잡하였다. 체코에서는 19세기에 지어진 왕궁의 하나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과학원산하 경제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서구세계 같았으면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써야할 왕궁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마루며 무너진 벽,망가진 화장실을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사무실로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획경제란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천장의 화려한 벽화가 부서진 난간이나 허물어진 벽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경제가 무너지면 문화도 긍지도 자존심도 다 무너지는 것인가. 체코경제연구소의 한 경제학자는 동구권국가들의 공통된 애로사항은 시장경제를 이끌어 갈 기업인이 없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경제건설을 위해 가장 다급한 것은 시장원리에 따라 상품을 만들어 국내에도 공급하고 세계시장에 수출하는 일인데 막상 그일을 수행해 낼 경험있는 기업인이 없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와는 퍽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부르주아계급으로 지탄받아야 할 사회주의 국가에서 파탄에 이른 경제를 되살려 내 줄 기업인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 마지막 체류국인 헝가리에서는 서구 여느나라와 별차없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상점마다 각종 소비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시내 번화가에는 세계유명브랜드 상품을 파는 패션상점도 즐비해 있어 사람사는 곳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모습도 한결 활기차고 무엇인가 하려는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이번에 돌아본 동구권국가들은 모두 지금 시장경제의 도입이라는 엄청난 개혁의 물결속에 휩싸여 있었고 서방의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개혁에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혁명적인 변화를 보고 지금은 경제가 어려우니까 시장경제니 개혁이니 하며 떠들지만 일단 급한 불만 끄고나면 다시 공산주의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로의 회귀가능성을 묻는 유도성질문을 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럴 가능성은 결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로 그들은 처음부터 공산주의가 아니었는데도 소련의 힘에 눌려 할수 없이 공산체제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소련은 줄곧동구권국가들을 침략하고 괴롭혀 왔기 때문에 비록 소련이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그들은 이번기회에 완전히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얘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의 계획경제가 참담하고 쓰라린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제도와 인간본성의 괴리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문제의 해결에 관한 한 정부관료와 정치인들의 치밀한 머리로 짜낸 그럴듯한 경제조치들이 엉성하고 결점투성이 같아 보이는 시장기능 보다 훨씬 못 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이윤추구와 개인의 욕망충족을 위해 일할 때는 보람을 느끼고 기운도 나지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때는 한낱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셈이다.
  • 새 실록 6ㆍ25 김학준:하

    ◎“핵투하도 불사”… 미 으름장에 DMZ설정 동의/“휴전 지체할 수 없다”… 투르먼,맥아더 해임/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 방위조약약 가조인/아이크 대통령 당선ㆍ스탈린 사망후 「정전협상」급진전 ▷제4기◁ 중국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맥아더는 과감한 보복조치를 마련했다. 그는 50년 12월30일 본국의 합동참모본부에 대해 ①중국해안의 봉쇄 ②중국본토의 군수산업시설 폭격 ③장개석 군의 파한 ④장개석 군의 중국본토에 대한 견제공격을 건의했다. 그는 미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전면철수한다면 중국군의 침공위협은 보다더 중요한 지역에 대해 가중될 것이며 그 결과 보다 많은 전력의 투입이 요청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합참은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 보존에 주로 유의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라』고 답변할 뿐이었다. 맥아더는 이 답변을 「명백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국련군의 전면철수를 피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든지,아니면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보존을 위해 한반도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51년 1월13일 『공산군의 침략행위가 시정될 때까지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침략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세계에 밝혀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최악의 경우 국련군은 제주도와 같은 남한 연안의 섬으로 철수해 전투를 계속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임에 리지웨이대장 맥아더와 본국정부 사이에 이견이 오가는 사이 국련군은 전세를 수습하고 공세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국련군은 51년 3월 초순 이후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했으며 3월30일께까지는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이로써 한국전쟁을 국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전황이 국련군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무엇보다 전전원상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이면서 국련에서는 다시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서방진영의 국가들도 국련군의 38도선 재북상에 반대하면서 만일 미군이 단독으로라도 재북상하기로 결정한다면 자신들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마저 나타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은 중국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휴전을 성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3월20일 맥아더에게 그러한 취지의 성명이 가까운 장래에 발표될 예정임을 통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이 결정을 좌절시키기로 결심하고 3월24일 본국정부와의 아무런 협의없이 중국에 대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는데 중국대륙에의 전면적 확전으로써 한반도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트루먼이 추구하려는 중국과의 협상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이 성명에 뒤이어 맥아더는 4월5일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조세프 마틴의원이 자신에게 보낸 3월2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공개하여 트루먼을 더욱 격분시켰다. 아시아 중시정책을 강조하면서 논평을 요구한 마틴의 서한에 대한 이 답장에서 맥아더는 우선 트루먼의 유럽 중시정책을,그리고 유럽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시아를 경시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결론적으로그는 『우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3월24일자 공식성명을 보고 그의 해임을 결심했던 투르먼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4월10일 라디오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한반도에서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제한전에 의한 제3차대전의 방지』라고 선언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8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됐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휴전을 향해 움직인다는 명백한 의사의 표시였다. 한편 공산군은 51년 4∼5월 춘계대공세를 폈으나 인명의 큰 손실을 겪었을 뿐이고,이 시점에서 전선은 완전히 교착됐다. 전선이 교착된 51년 5월 중순부터 미국과 국련에서 휴전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5월17일 에드윈 존슨 미국 상원의원이 국련이 휴전을 이끌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이 제의가 소련의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된 것을 계기로 휴전논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예컨대 국련에서 리 사무총장과 캐나다의 레스터 피어슨 외무장관 및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각각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선에서의 휴전안을 제의했다. 소련도 드디어 6월23일 국련대표 말리크의 연설을 통해 휴전에 동의했다. 통일을 염원하던 남­북의 한인들에게는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쌍방의 참전국가들의 거의 예외없이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제5기◁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과 소련이 정전의 원칙에 합의함에 따라 7월8일 개성의 중심지 북방에 있는 지난날 유명했던 유곽에서 국련군쪽과 공산군쪽의 연락장교단에 의한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어 7월10일 개성에서 본회담이 열렸다. 국련군쪽의 수석대표는 미해군 극동사령관 조이 제독이었다. 리지웨이 총사령관이 직접 뽑았다. 정전회담에서 공산군 대표들이 국련군 대표들을 자극해 국련군 대표들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화를 내게 하여 회의장을 뛰쳐나가게 만드는 「충동작전」을 쓰거나 정반대로 몇시간씩 끌면서 지치게 만드는 「권태전술」을 쓸 것이라고 계산한 리지웨이는 따라서 국련군 수석대표는 어떠한 도발적 언동에 대해서도 침착하면서도 강경하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판단했다. 즉 『6시간정도 앉아 있으면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오줌누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협상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리지웨이에게 조이는 적임이었다. 조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은 훈장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적을 굴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ㆍ소에 “전면전”통첩 조이 수석대표를 보좌할 대표로 리지웨이는 2차대전의 베테랑들로부터 뽑았다. 유럽전선에서 보병연대를 지휘했었고 이때 미8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호지스 소장,북아프리카에서 공중전을 지휘했었고 이때 미극동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크레이기 소장,태평양전쟁에서 구축함전투를 대담하게 지휘해 용맹을 떨쳤었고 이때 미극동해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버크제독이 선발됐다. 한국군으로부터는 제1군단장 백선엽소장이 선발됐다. 공산군쪽 수석대표는 남일중장이었다. 남일중장을 보좌하는 북한군대표는 전선사령부 총참모장 이상조 육군소장이었다. 정전회담에서 그는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꼼짝 않고 앉아 「강철같은 자기억제」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또 한 사람의 북한군 대표는 북한 육군 제1군단 총참모장 장평산 소장이었다. 중국군에서는 사방 소장과 등화 중장이 대표로 참가했다. 이들 가운데 사방이 사실상의 수석대표였고 남일은 이름이 수석대표였지 실제에 있어서는 사방의 지휘를 받는 것 같다고 국련군 쪽에서는 보았다. 회담도중 그는 동료 대표들과의 상의없이 발언했고 선전적인 문구 같은 것도 사용함이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양쪽 대표단들은 신경전을 거쳐 7월26일 다음과 같은 의제에 합의했다. ①전투행위를 정지하는 기본조건 아래 양군 사이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문제. ②정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하여 정전을 성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처들을 결정짓는 문제. ③포로에 관한 결정. ④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에 권고하는 문제. 의제에 대한 합의와 더불어 7월28일 첫번째 의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합의가 쉬울 것 같아 버크 제독 같은 이는 본국의 아내에게 『가을이 되어 사과가 익었을 때는 나는 과수원이 있는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썼는데 회담은 길어지면서 10월25일부터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긴다는 것 정도에 겨우 합의할 수 있었다. 회담이 이렇게 길어지면서 서방 참전국들은 초조해졌다. 이점을 간파한 공산군쪽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자신감에서 국련군쪽 대표들에게 모욕적인 용어마저 썼다. 호지스 소장을 「거북이 알」이라고 불렀고 조이 수석대표에 대해서는 『이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수석대표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지웨이는 견디기 어려웠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나오는 적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비단보다 강한 쇠가 필요하다』라고 본국정부에 호소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에게 『공산군쪽이 협상에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미국은 만주의 공산기지를 폭격하고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여 필요하다면 소련과 전면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공갈」을 전달했다. 이와 동시에 트루먼은 중국에 대해 핵무기를 쓰는 문제를 검토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강경한 자세를 보면서 공산군쪽은 한발 물러서 『현재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아래 앞으로 체결될 정전협정이 지정하는 시간에 쌍방은 이 분계선으로부터 2㎞씩 철수하여 그 지역을 정전 동안 비무장화 한다』는 국련군쪽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때가 52년 1월27일이었다. 이처럼 군사분계선에 관한 합의가 일단 이루어졌다는 것은 한국전쟁의 전체 흐름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군사분계선 문제에 매듭이 지어지면서 쌍방은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들에 권고하는 문제」를 다뤄 나갔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합의가 쉽게 이뤄졌다. 즉 정전회담 발효 3개월 안에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사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기로 한 것이다. 정전의 세부사항에 대한 협상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52년 5월2일 양쪽은 스웨덴ㆍ스위스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의 네 나라로써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산군쪽은 소련을 중립국이라고 우기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포함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나머지 문제는 포로교환의 문제였다. 정전이 성립되면 포로교환은 당연히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이 마당에 이 문제는 빨리 매듭지어져 정전협정이 곧 체결될 것으로 기대됐다. ○2년 1개월만에 매듭 국련군쪽은 우선 「자발적인 송환」의 원칙을 제의했다. 국련군에 포로로 잡힌 공산군에게 돌아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할 권한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쪽은 「자동송환」의 원칙을 내세웠다. 모든 포로들은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공산군쪽은 이 원칙을 관철시켜야 국련군쪽에 잡혀 있는 자신들의 장병들이 서방세계를 선택하지 않고 전원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협상이 오래 끌면서 공산군쪽은 국련군쪽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는 선전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이 포로수용소 사령관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이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련군쪽은 북폭을 강화하기도 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52년 11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져 「조기정전」을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이로써 53년 1월 공화당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휴전협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53년 3월 스탈린이 죽으면서 정전을 향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정전협상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자 이대통령은 통일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실망감 속에서 6월19일 국련군에 수용되어 있는 공산포로들 가운데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2만5천여명을 극비의 작전을 통해 과감하게 석방했다. 이대통령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을 대통령 특사로 파한했으며 이대통령이 요구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게 했다. 한­미간의 합의가 성립됨으로써 정전협정의 체결을 위한 길은 완전히 열렸다. 그리하여 7월27일 휴전협정은 판문점의 「평화의 천막」안에서 조인됐다. 2년 1개월 여의 긴 시간동안 5백75회의 공식회의를 갖고 1천8백여만 단어를 소비한 다음에야 매듭지어진 것이다.
  • 왜곡된 환율구조… 시장경제완 먼 거리(차동세의 경제기행 소련:상)

    ◎초라한 주택… 매점엔 상품 동나 텅비어/생활정도로 본 1인소득은 2천불선 최근 20일 동안 소련 동독 체코 헝가리등 동구권국가들을 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한창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는 이들 사회주의국가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어떤 애로에 봉착해 있으며,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방문기간중에 많은 곳을 돌아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우선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상부터 얘기한다면 대부분이 정부기관의 간부들이거나 학자들이라 그런지 대단히 예의바르고 친절하게,그리고 진심으로 환영하며 우리일행을 맞아주었다.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와 친절 덕분에 여러가지 제도와 관행의 차이에서 나오는 불편한 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보람있는 여행이 될 수 있었다. 제도가 사람의 근본을 바꾸어 놓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소 안심 되기도 하였다. 솔직히 말해 소련에 대해서는 평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김일성을 도와 6ㆍ25때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고,근래에 와서도 KAL기를 폭파하는등 우리와는 명백한 적대관계에 있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그들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우리의 「북방정책」이 맞아 떨어져 관계가 급속히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속의 응어리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련행 비행기에 올라 앉아 있을 때는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과 대등한 군사대국으로서 막강한 힘을 행사해 온 소련에 대해서는 궁금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호기심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선 소련에서는 무엇보다도 1917년 레닌이 공산혁명에 성공한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팽창주의원칙을 고수해 혁명을 세계각국에 수출해온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지금은 왜 상상을 초월하는 급격한 체제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나 하는 점과,과연 앞으로 소련은 어떻게 될 것이며 공산주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궁금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는 데는 결코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않았다. 비행기가 모스크바 공항근처에까지 왔을때 위에서 내려다 본 소련의 모습은 결코 미국ㆍ영국 혹은 일본과 같은 서방선진국의 상공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아니었다. 길에 다니는 자동차수도 너무나 적을뿐만 아니라 주택들과 농장들도 초라하고 볼품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모스크바 국제공항으로 들어갔을 때 공항청사며 기타 시설들이 형편없이 초라한 것을 보고 소련경제의 심각함을 금세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길 양옆의 많은 집들이 마치 오래전에 버려진 폐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깨끗하게 단장된 건물이라고는 멀리 보이는 크렘린궁과 몇몇 공공건물 뿐이었다. 지은지가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은 고층 아파트들마저도 베란다등이 부서진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사유물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저토록 냉담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고 새삼 실망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모스크바 최고급 호텔이라고 하나 숙박비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점을 빼고는 호텔의 시설이나 방안의 집기등은우리나라 최고급 호텔에 비길바가 못되었다. 특히 타월ㆍ비누ㆍ휴지 등은 질도 아주 낮은 것이었고 공급도 충분하지 못하였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우리나라의 명동이나 혹은 강남같은 다운타운이 없다. 경비가 삼엄한 금빛 크렘린궁 주변의 시내 중심지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대부분이 관광객이었고 모스크바 시민들이 쇼핑을 위해 북적거리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소비재를 파는 상점마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사기위해 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줄이 없는 상점이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무지하게 큰 닭 몇마리가 있을 뿐 그 안에서도 야채코너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는 텅빈 매장 뿐이었다. 소련의 1인당 국민소득은 발표하는 기관에 따라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소련정부에서 5천달러 정도로 발표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CIA는 9천달러 정도로 발표하고 있다. 사실 공산국가들의 국민소득을 계산하기란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세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가격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환율도 일정하지가 않으며 물량에 관한 통계도 명백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소련의 공항 주택 도로 전화 상점 상품 그리고 길에 다니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필자가 직감적으로 느낀 소련의 1인당 국민소득은 잘해야 2천달러 정도에 이를 것 같았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군사시설이라든지 군수품 등을 고려하면 국민소득은 그보다 크게 높아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국민생활의 윤택함을 나타내는 지표로서의 국민소득은 최후진국 수준을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소련경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가는 무엇보다도 환율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공식환율은 1달러에 0ㆍ6루블이다. 그러나 관광객에게 외화를 바꾸어 주는 환율은 1달러에 6루블이다. 그리고 암시장에서의 환율은 1달러에 15∼20루블이다. 그러니 공식환율로 거래를 해야 하는 상품수출입이 제대로 이루어질리가 없으며 시장경제에서와 같은 상품의 가격체계가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소련에서는 길거리에서 거지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활기차고 유쾌하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이 소련사람들을 저렇게 침울하고 웃음을 잃은 모습으로 만드는 요인일까 생각할때 정치란 것과 사회제도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볼쇼이극장에서 본 감명깊은 오페라에서,각종 기술연구소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기초기술,그리고 모스크바대학의 웅장한 모습에서 소련의 문화적 기술적 저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제도 공산주의의 실험장이 됨으로써 너무나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앞으로 개혁이 왼전히 뿌리내리는 경우 소련은 다시 세계무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신임대사 9명에 노대통령 신임장

    노태우대통령은 26일 상오 청와대에서 김좌수 주불가리아대사,노영찬 주프랑스대사,이현홍 주루마니아대사,선준영 주체코대사,한석진 주알제리대사,권영순 주몽고대사,김일건 주네팔대사,김항경 주미얀마대사,김승영 주에티오피아대사 등 9명의 신임대사에 신임장을 수여했다.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 바웬사의 승부수/강석진 국제부기자(오늘의 눈)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가 지난 20일 대통령출마를 선언했다. 현 대통령 야루젤스키의 임기가 5년이나 남아있어 바웬사가 대통령이 되려면 야루젤스키의 사임,조기총선(폴란드는 대통령간선제)이 이뤄져야 한다. 또 자유노조내의 분열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여 그의 출마선언은 이래저래 커다란 파문을 그려나가게 됐다. 특히 바웬사가 야루젤스키는 물론 마조비예츠키총리의 자유노조정부에 대해서도 「전쟁」을 선포한 것은 충격적이다. 바웬사는 자유노조정부가 공산주의자를 주요직책에서 제거하는데 너무 신중하며 『내가 만들어낸 개혁·발전의 길을 잘못가고 있다』는 이유로 자유노조정부와 결별할 뜻을 표했다. 하지만 바웬사의 출마를 보는 국내외의 시선은 따갑다. 지난해 자유노조 정부 출범직전 폴란드국민 90%이상이 바웬사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고 있을 때는 책임을 피하다가 이제 개혁에 따른 불안정이 많이 줄어들자 대권에 야심을 갖는 것은 바웬사답지 않다는 비난을 사기에 알맞다. 또 자유노조내에서도 바웬사가 지나치게 투쟁적이어서대통령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며 대통령이 되면 권력남용의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 5월초 자유노조 기관지 「가제타」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바웬사의 인기는 마조비예츠키는 물론 야루젤스키에게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바웬사가 왜 대권도전선언을 하고 나섰을까. 더이상 그의 위상이 퇴락하기 전에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동구개혁의 화신이었던 그가 한명의 현실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연초 체코의 하벨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바웬사는 하벨을 환영하는 바르샤바만찬에는 가지도 않은 채 『나를 보려면 그다니스크로 오라』고 고압적 자세를 보여 구설수에 오른 일도 있다. 고난속에서 동구개혁을 이끌어냈던 바웬사. 혁명가는 혁명가로 남아있을 때만이 「영웅」일 수 있다는 교훈을 읽는다.
  • 체코,연정구성 합의

    【프라하 AP 연합】 바클라프 하벨대통령이 이끄는 체코의 시민포럼과 동맹세력인 기독민주운동당 및 민주당 등은 22일 연정구성에 합의,40여년만에 처음으로 체코에 비공산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 소 군장성,개혁정책 격렬 비난/군은 이데올로기의 항복 수용 못한다

    【모스크바 AP 로이터 연합 특약】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19일 당의 분파주의를 경고하며 단결을 호소한데 이어 같은날 군의 한 고위장성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서 소련내의 보수ㆍ혁신세력간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이날 러시아공화국 공산당대회에서 알베르트 마타쇼프장군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소련을 무방비상태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하며 군은 결코 「이데올로기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크렘린 지도자들을 겨냥해 『독일이 재통일되어 나토의 일원이 되려하고 일본이 극동에서 핵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데도 배웠다는 친구들이 이제 우리를 공격할 자는 없어졌다고 떠들고 있다』고 공격,회담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이어 군은 레닌주의를 끝까지 받들 것이라고 말하고 이데올로기의 적들이 소련내 사병과 장교,관리들을 이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소련군의 68%가 러시아공화국에 배치돼 있다며 이들은 결코 이데올로기의 항복을 받아들이지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카쇼프장군은 또 금년들어 소련군이 체코와 헝가리로부터 철수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공화국이 소연방으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움직임도 부당하다고 공격,『군은 소연방과 러시아공화국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외언내언

    최근들어 부쩍 정말로 낯선 사람들이 서울에 오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북한의 전고위관리,6ㆍ25때의 북한군 장교,소련내의 유력 한국계 인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중에는 남북분단직후의 대남공작총책이 들어 있는가 하면 북한측 정전위대표,한국군과 6ㆍ25때 교전까지 벌인 인민군 고급간부,그런가 하면 소련군 전투조종사까지 끼여 있어 만감이 오고 간다. 재소동포들가운데는 북한에도 여러번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방한소감이 무척 기다려진다. 이들 소련거주 전북한의 고위간부들말고도 미국등 다른 나라에 있는 북한군 관계자들의 서울방문도 최근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의 방한목적은 대체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6ㆍ25」와 남북인사들의 근황및 생활상에 대해 증언하고 국내의 산업현장,전방의 격전지를 돌아보는 일.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것은 북한의 남침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고 한국의 발전상에 놀라고 있다는 것. 북한군의 전장교들은 물론 소련의 관계자,헝가리ㆍ체코와 같은 동구권의 당시 외교관들까지 실례를 들어가며 북한의 남침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주영복씨(67ㆍ전인민군공병소좌ㆍ미 로스앤젤레스 거주ㆍ호텔경영)의 경우가 무척 인상적이다. 주씨는 6ㆍ25때 춘천전투에 참전했고 서울의 인민군전선사령부공병부에서 소련군의 공병관련 작전서류의 번역및 통역으로 있다가 포로가 된 뒤 제3국을 택함으로써 뉴스의 초점이 됐던 사람. 최근 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아 마련된 학술회의 참가차 내한했다. 그는 『소련이 6ㆍ25남침을 주도했다』고 당시의 경험과 자료를 들어가며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유스런 왕래가 가능하게 됐는데도 못오는 재소한국인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때문. 보다 왕래가 폭넓게 이뤄질 때 한소교류도 본격화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서 오가고 싶어도 오갈 수가 없는 1천만 이산가족들의 그 아픔은 언제나 되어야 해결될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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