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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셔요] 10여편에 겹치기 시나리오 쓰는 최지희(崔智姬)양

    [안녕하셔요] 10여편에 겹치기 시나리오 쓰는 최지희(崔智姬)양

    「스크린」을 떠난지 4년만에 한국 여배우중 가장 멋장이가 되어 돌아온 최지희(崔智姬)양(30). 돌아오기가 바쁘게 10여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가 하면 어느틈에 두편의 「시나리오」를 써 내놓고 제작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때마침 한국처음의 한(韓)·미(美)합작영화에서는 미국배우 「아니타·에크버그」와 공연할 한국쪽 주연여배우로 뽑혔고-. 컴·백 반년에 20여편 출연 한·미 합작영화에도 뽑혀 한마디로 맹렬 「스타」. 복이 터졌다는 주변의 찬사에 최지희는 일복이 터졌다고 그 나름의 해석. 「스크린」에 돌아온지 반년이 조금 지난 이제 그녀는 이미 20편이 넘는 영화를 해치웠다. 출연작품이『남대문 출신 용팔이』는 이른바 왈가닥「액션」영화들. 어쩌면 최지희의 셩격을 미리 작품 속에서 설정하고 나선 것같은 것들이다. 이 왈패「스타일」의 인상은 사실상 최지희가 지닌 특이한「개성」으로 평가되었고 그것이「컴·백」이후에도 계승되었다고 보는게 좋을 것 같다.「스크린」을 떠나기 전에 해낸 주요작품이『말띠 여대생』『7인의 난폭자』『회전의자』『김(金)약국집 딸들』- 대개가 억센 말같은 여자로 최지희는 소개되었다. 한·미합작영화『서울의 정사(情事)』에「픽·업」된 것은 그녀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줄 안다는 점과 「액션」이 가능하다는 점이 무기가 된 것같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역은 여자첩보원. 「갱」의「아지트」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기지와 솜씨를 자랑하는 역할이다. 이 영화가 제대로 성공해서 예정된 구미각국의 극장에 상영된다면 최지희는 일약 국제급 한국배우로「클로스·업」되는 셈. 최지희가 한국 여배우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영어해독자라는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60년도에 미국에 가서 1년가량 영화공부를 하고 왔다. 가기 전에는 개인교사를 두고 영어회화를 익혔고 다녀온 뒤에도 영어공부는 계속했다. 남편 윤영세(尹英世)씨(사업가)가 일본에 있기때문에 일본 왕래가 잦은데 외국에서 그가 쓰는 말이 주로 영어. 공연하게 된 「아니타·에크버그」의「쇼핑」을 도와주며 서울 안내도 해주는등 최지희가 이『서울의 정사』에 쏟는 관심은 상당히 큰 것 같다. 그녀 정도의 발음이라면 영어 대사를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미국쪽 감독도 인정했다는 얘기. 짓밟히는 여인을 주제로 시나리오도 두편씩 쓰고 그럼「액션」영화『서울의-』에는 즐거히 출연하지만 최지희는 자신에게 붙은 그 「왈가닥」의 상표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같다. 그 이유는? 『이제는 좀 차분하고 깊이 있는 연기를 하고싶어요. 여성들의 애정심리, 내면세계를 깊이있는 연기로 표현해보려는 겁니다』 이 말을 뒷받침이나 하듯 최지희는 최근 몇개의 비「액션」영화에 주연을 하고있다. 『숲속의 여인』(김기덕(金基悳)감독)이 그렇고 최인훈(崔仁勳)소설이 원작인『웃음소리』의 주역이 그렇다. 『웃음소리』의 감독 최하원(崔夏園)은『최지희에게는 다른 배우에게서 찾을 수 없는 그늘이 있다. 그 짙은 음영을 개발하면 또다른 특이한 개성이 될 것이다』라고. 최지희가 「시나리오」에 손을 댄 것은『내가 생각하는 여인상을 스스로 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단다. 2편의 제목은 『낙엽의 입술』과『처녀설(處女雪)』. 두개 모두 임시로 붙인 제목이고 요즘 직업「시나리오」작가에 의해 윤색되고있다. -최양이 생각하는 여인상이란? 『향락세계에 내던져진 노리개같은 여인입니다. 비밀요정 비밀도박장에서 남자들의 발길에 짓밟히는 여인, 육체를 물질과 교환하는 여인이지요. 그 여인들의 세계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강인한 정신과 윤리감을 지키는 여자가 있읍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사회가 잔인한 악의 소굴로 느껴질 것입니다. 한 여인이 그 비정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나가는가를 그린 것입니다』- 이것이『처녀설』(가제)이 담은 「테마」. 『낙엽의 입술』은 반대로 좌절당한 여인의 얘기란다. 기계문명에 휘말려서 자신도 모르게 떠돌다가 낙엽처럼 허망하게 떨어지는 여인, 여기서는『한 여인을 망쳐버린 사회를 풍자적으로 고발해보았다』는 것. -적지않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언제 글 쓸 시간이 있는지? 『차속에서도 생각하고 식사 하면서도 생각해요. 그때마다 「메모」를 해뒀다가 시간 나는대로 정리를 했읍니다. 「아마추어」니까 그것이「시나리오」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작에 손댄다는 소문이던데? 『못할 것도 없잖아요? 나는 국산영화가 망하는 이유를 알고있어요. 순전히 지방장사돈으로 공짜로 만들려고 하니까 실패하는거죠. 제작비를 가지고 생활하고 용돈쓰고 하니까 자연 졸작이 나오고 졸작이니까 흥행도 안되는거죠』 작품쓰고 출연하고 제작도 하고 싶어 -돈은 많이 있읍니까? 『한두편 만들 정도는-』 1백65cm의 키에 스스로 「디자인」했다는 「맥시」차림. 흔들 흔들 걷는 뒷모습은 흡사 사내들의 걸음걸이 그 것이다. 걸음걸이뿐 아니라 일욕심도 남자 못지않는 성격. 그의 「매니저」격인 오(吳)모씨의 표현을 빌자면『치마 입었으니까 여자지 속은 남자 열몫지게 틔어 있다』 그러나 본인의 말은 조금 다르다. 『영화해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미련을 못버려요. 멋진 작품을 쓰고 출연하고 제작하겠다는 생각이 생활의 전부거든요. 저로서는 인생의 전부를 마지막으로 걸어보는 겁니다』※ 부군 윤영세씨는 사업관계로 일본에 있을 때가 더 많고, 그래서 빈 방을 지키는 처지가 영화에의 욕심을 더욱 가열시키는거 아니겠느냐고 그녀나름의 편리한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 『잘 될지 못될지는 해보아야하는것이고 어쨌든 시시한건 딱 질색이니까요…』 『실력있고 의욕있는 젊은 감독이 마음대로 찍고싶은 영화가 있다면 밀어주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제작자나 지방흥행사의 간섭을 전혀 받지않고 문제작을 내놓을 자신이 있는 감독이라면 얼마든지…』 외국물을 먹고와서 그런지 퍽 세련되고 멋장이가 되어서 돌아왔다는게 요즘 최지희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꽤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성장한것만은 알수있다.[선데이서울 70년 10월 18일호 제3권 42호 통권 제 107호]
  • [이종현의 나이스 샷] 부티를 벗자

    지난 토요일 저녁 ‘그린콘서트’가 서원밸리골프장에서 열렸다. 이번 콘서트는 무려 1만명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뤘다. 콘서트를 못 보고 돌아간 사람도 수천명에 달했다.2000년 첫 그린콘서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1000여명의 관객이 찾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관객이 늘더니 올해에는 교통 체증을 일으킬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모았다. 지난해엔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도 2000명의 관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 공연을 관람해 오히려 주최 측이 더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린콘서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 골프장들은 이 행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주말 영업을 포기하고 또 수억원이 들어가는 비용이 들어가는 한편, 많은 사람들이 잔디를 밟는 것도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전국 골프장 CEO 50여명이 참가해 벤치마킹할 만큼 그린콘서트는 ‘골프장을 대표하는 축제’, 나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골프잔치’로 발전했다. 아직 발을 잘 떼지 못하는 돌배기부터 칠순이 훨씬 넘은 부모님을 모시고 싱그러운 골프장 잔디코스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골프장 코스 중간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을 만들어 맘껏 뛰놀게 했다. 배드민턴, 배구, 축구를 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그것도 무료 자선콘서트여서 감동은 더하다. 바자회를 통해 얻은 수익 1300여만원과 캘러웨이 이벤트로 300여만원, 그리고 서원밸리 최등규 회장이 500만원을 보태 ‘사랑의 휠체어 보내기 운동본부’에 1500만원, 파주 보육원에 500만원을 전달했다. 그동안 골프장은 1000억원의 많은 돈을 들여서 만들어 부자들만 이용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 틀을 깬 것이 바로 그린콘서트다. 어린 학생, 지역 주민, 일반인들도 골프장 잔디를 밟아보고 그것도 홀 한가운데서 공연을 보고 어려운 이웃에게 성금을 전달할 수 있어 의미가 깊다. 마지막 순서로 불꽃놀이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내년에도 꼭 오겠다.”,“주말 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골퍼와 가족, 지역 주민을 위해 공연을 해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들의 뒷모습은 앞으로 골프장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프로 120명을 위해 오픈 대회 1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만명이 골프장을 찾아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레저신문 편집국장huskylee1226@yahoo.co.kr
  • “늘 죽음 가까이 하니 치열하게 살게 돼요”

    “늘 죽음 가까이 하니 치열하게 살게 돼요”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게 돼요. 항상 죽음과 가까이 있고 죽음을 생각하다 보니 허투루 살 수가 없죠.” 스물넷 젊은 여성이 매일 ‘상(喪)’을 치른다. 화장품과 향수 대신 매캐한 향과 알코올 냄새가 몸에 밴 국립의료원 장례지도사 김효정(24·여)씨가 주인공이다. 그의 희고 가녀린 손으로 편안히 눈을 감은 고인만도 2000명을 넘어섰다. 서울보건대학 장례지도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장례지도사와 시신위생처리사 자격증으로 무장한 뒤 2004년 3월 국립의료원에 합류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씨는 국립의료원 장례지도사 6명 중 ‘홍일점’이다.24시간 맞교대의 열악한 근무여건과 험한(?) 일이라는 편견 탓에 주로 40대 남성들이 장악한 ‘금녀의 영역’을 김씨가 파고든 셈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특색있는 직업을 꿈꿨던 그는 2002년 장례지도학과를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학과가 신설된 지 얼마 안돼 장의사 혹은 장례 사업을 하던 40∼50대 아저씨들이 과동기들이었다. 장례지도사를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나 ‘장의사’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장례 상담부터 수시(收屍·시신이 굽은 채 강직되기 전에 바로 잡아두는 일)∼염습(殮襲·시신을 씻긴 뒤 옷을 입히는 일)∼입관∼발인∼운구로 이어지는 시신 관리, 빈소 및 조문 예절 등 장례에 관한 전 분야를 코디네이트하는 것이 장례지도사의 일이다. 일부 병원에서는 요절한 시신의 경우 곱게 보내길 원하는 유족들의 바람에 따라 색조 화장을 하기도 한다. 어느덧 일이 익숙해졌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죽음을 대하는 일은 가슴 서늘할 때가 더 많다. 특히 아이들의 죽음이 그렇다. 한 번은 아동학대로 죽은 여자 아이가 응급실에 들어왔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데다 맞은 자국이 선명했다. 부검을 지켜보던 부모들이 울지도 않아 이상하다 싶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아동학대로 경찰에 검거됐다는 뉴스를 보고 김씨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이들의 죽음은 더 안쓰러워 관 속에 푹신한 이불이나 솜을 깔아주죠. 잘 가라는 인사도 잊지 않습니다.”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30대 남자가 응급실로 실려왔는데 냄새가 진동하니까 바로 장례식장에 보내졌다. 뒤따라온 경찰은 ‘완전무장’을 하고 왔지만 근처에도 가려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김씨가 시트를 벗기자 살이 짓무르고 수포가 터진 상태였다. 알고보니 에이즈 환자였다. 물론 김씨와 동료 장례사가 꿋꿋하게 일을 처리했다. 나이답지 않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성숙해졌다. “입관하고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볼 때 실신할 정도로 우는 할머니들이 계세요. 그러면 눈물 떨구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죠. 속설에 고인의 몸에 눈물 흘리면 몸이 무거워 좋은 데 못 가신다고요.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가를 닦으시죠.” 걱실걱실하게 일을 잘해 팀내에선 물론 안치실을 찾는 형사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친절한 효정씨’지만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24시간 맞교대 근무라 꽃단장(?)하고 나가는 것도 일이지만 소개팅이라도 나가면 다들 “안 무서워요. 그런 일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 통에 아예 아는 사람만 만나는 게 속편하다고 효정씨는 귀띔했다. 유족들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상주들이 와서 고인을 안치도 하기 전에 ‘빈소 큰 거 얼마예요. 저건 얼마예요.’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어요. 고인보다는 조문객이나 체면이 우선시되는 게 안타깝죠.” “저처럼 여자 장례지도사들이 많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좀더 편안히 모셨으면 합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에서 죽음을 대하는 경건함이 느껴졌다. 글 사진 임일영 정서린기자 argus@seoul.co.kr
  • [문화마당] 꽃이 져야 열매가… /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교정에 만발했던 철쭉조차 어느새 져버렸다. 이래저래 꽃 진 자리를 남기고 계절은 신록으로 무르익겠지만 꽃이 져야 결실의 시절이 다가오므로 분분하게 날리는 이 봄의 낙화가 늦가을을 휘몰아가는 낙엽처럼 쓸쓸하지만은 않다. 천체의 운행은 만고(萬古)에 변함이 없어, 때가 되면 풍화설월(風花雪月)을 어김없이 흩날려 변함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옛 시에 “산중에 달력이 없어도 꽃과 잎이 봄 가을을 알린다.”고 했던가. 그리하여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요, 그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사의 질서조차 우주의 맥박에 실려 있음을 깨우치는 일이다. 낙화(落花)는 동백이나 능소화처럼 망울째 툭툭 꺾어져 버리는 것도 있지만, 목련이나 철쭉처럼 어질러진 꽃잎자리가 너저분해지는 경우도 많다. 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므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에게 무수한 찬탄을 받아왔다.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은 청초·결백·냉담·애상 등의 속성을 지닌 ‘배꽃’을 제재로 봄밤의 애상을 사무치게 노래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라고 시작되는 그의 시조는 고독과 애련의 심리가 배꽃의 흰색에 표백되어 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인의 심경을 그림이듯 환하게 펼쳐 보인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 한 구절도 떠오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작품은 지는 꽃의 숙명을 노래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섭리로도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이별은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낙화조차 여기서는 분별하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심미적 영상으로 아름답게 되비춘다. 꽃은 져야 하므로, 지기로서니 어찌 바람을 탓하랴. 꽃이 저렇듯 사람 사는 이치도 그러하리라. 대체 인품이란 놓인 위치에 따라 평가의 기준과 판단이 달라지겠지만, 그것도 겪어보아야 아는 것이라면, 그가 남긴 뒷자리로 그 됨됨이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비운 자리가 깨끗하고 넓을수록 그는 인격이 남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도량이 큰 그릇이었으리라. 그릇은 텅 비어야 수확물들을 다시 갈무리할 수 있다. 높은 공직을 살았거나 거나하게 한재산 모은 사람이라도 뒤가 너저분하다면, 그가 누린 평생은 오물(汚物)로 뒤덮였을 것이다. 꽃이 져야 비로소 열매가 맺힌다. 꽃이 열매를 갈무리하려 드는 모순을 본 적이 있느냐. 누려야 할 시절을 제대로 누린 뒤에 깨끗이 꽃자리를 비워줄 때, 비로소 나무는 튼실한 열매를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이치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낙화가 없는 삶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억지로 꽃 시절을 이어가려 한다면 결국 살아온 일생의 뒷자리마저 넝마로 만들 뿐이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어느새 대선의 파장이 시정(市井)에까지 소용돌이치고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전·현직 대통령들까지 저마다의 정략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려고 혈안들이다. 국민은 안다. 사욕과 책략으로 얼룩진 정치가 나라를 안락하게 이끈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말로써는 누굴 위한다고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형편없는 궁리로 제 잇속을 차리거나, 언젠가는 탄로날 복심을 감춘 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대는 오합지중들이 자칭 지도자라며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맺지 않아도 좋다. 한번 옹골차게 국민을 감동시키고 흔쾌히 물러나 앉는 배꽃 같은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인가. 열매를 거두는 것은 꽃의 몫이 아니라 그 열매를 추수하는 농부, 곧 국민의 몫이다. 떠난 자리조차 오래 향기로운 나라의 사표(師表)가 진정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우수파’시인 박철 연시집 ‘사랑을 쓰다’

    ‘우수파’시인 박철 연시집 ‘사랑을 쓰다’

    “그대를 골목 끝 어둠 속으로 보내고/내가 지금까지 살아온/삶의 의롭지 못한 만큼을 걷다가/기쁘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울다가/슬프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취하여/흔들거리며 가는 김포행 막차에는/손님이 없습니다/멀리 비행장 수은등만이 벌판 바람을 몰고 와/이렇게 얘기합니다/먼 훗날 아직도/그대 진정 사람이 그리웁거든/어둠 속 벌판을 달리는/김포행 막차의 운전수 양반/흔들리는 뒷모습을 생각하라고”(‘김포행 막차’ 전문) 곁에 아무도 없으면 불안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지 않으면 미치도록 고독해지는 사람들이다. 곁에 누군가 있다면 그 ‘누군가’에게 쏟는 이들의 정성은 각별하다 못해 유별나기까지 하다.‘치댄다’는 표현이 적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마저도 사랑이라고 부른다. 박철(47) 시인은 그런 ‘사랑 중독증’ 환자이다. “그동안 해온 일은 사랑이 전부였다.”고 스스럼 없이 말할 정도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지내왔다. 시인은 동인이라야 달랑 자기 혼자뿐인 ‘우수(憂愁)파’를 자처한다. 모처럼 출간된 연시(戀詩)집 ‘사랑을 쓰다’(박철 지음, 열음사 펴냄)에는 이런 우수파 시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76편이 담겨 있다.1987년 등단 이후 20여년간 써온 사랑시들인 만큼 한 시절 두루 걸치는 사랑이 있다. “우리가 사랑을 퍼다가/산을 만들고/그 위에 집을 짓고 산다면/그대, 신림동이나 봉천동/꼭대기쯤에 살겠네//(‘산’ 가운데) 사랑을 퍼다가 산동네를 만들겠다니, 도대체 지금 이 땅에 사랑이 그렇게 지천에 널려있다고 믿는 시인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시인은 “흔들리는 그네의 몸짓 하나, 한밤의 클랙슨 소리, 국밥집의 불빛조차도 오늘로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아니 사랑하고 배기지 못하겠다.”고 토로한다. 연시집에는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온갖 사랑이 다 담겨 있다. 특히 시인의 사랑시에는 돌아오길 기다리는 말이 많다. 시인은 “사랑은 기다림이며 기다림은 희망이며 희망은 내가 살아가는 힘의 전부”라고 말한다. 슬픔에서 희망의 메아리를 듣는 역설을 담아 ‘슬프므로 슬프지 않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아내의 심부름으로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를 찾아가다가 한번은 맥주를 마시고, 한번은 재스민 화분을 사들고 온 일상을 노래한 대표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를 통해 힘든 일상을 따뜻하게 위로해 줬던 시인은 이번에도 찌든 일상에 안개 같은 아련함을 선물하고 있다. 1990년대말 없어진 서울 탑골공원 뒤편 ‘탑골’에서 시인은 멋들어지게 피아노나 기타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면 소설가 현기영 선생 등이 나와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이제 영 볼 수 없게 됐지만 아직도 문인들에게는 시인의 음악적 재능(?)이 종종 화젯거리로 등장하곤 한다. 97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도 등단한 시인은 지금까지 시집 6권과 각각 한권씩의 소설집과 콩트집을 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씨줄날줄] 로봇헌장/진경호 논설위원

    ‘그녀’를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피부, 육감적인 몸매, 백치를 연상케 하는 표정….(중략)사라의 육감적인 뒷모습도 더이상 자극을 주지 못했다. 언제나 같은 온도, 같은 촉감의 인조피부,…똑같은 톤으로 흘려대는 녹음된 비음 따위…. 로봇인간을 소재로 한 단편집 ‘창작기계’에 실린 작가 이상운씨의 ‘권태증후군’에 나오는 대목이다. 소설은 가까운 미래, 한 독신남자가 섹스로봇을 구입한 뒤 겪는 성 체험과 심리적 변화를 그렸다. 최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로봇자동화학회에서 ‘로봇 매춘이 인간 매춘부의 대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한다.‘머지않아 성인용품처럼 섹스로봇(섹스봇)이 대중화할 것’이라는 게 영국 인텔리전트 토이 대표 데이빗 레비의 주장이다. 그는 5년 안에 이 섹스봇이 보급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간을 닮은 로봇, 즉 휴머노이드 개발은 일본을 비롯해 각국이 심혈을 쏟아붓는 분야다. 지난해 일본 아이치로봇박람회에 선보인 실리콘 피부의 ‘리플리Q1’은 섹스봇 출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윤리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섹스를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은 불행하게도 이미 승부가 끝난 듯하다. 지난해 유럽로봇연구네트워크가 내놓은 로봇윤리 로드맵에서도 이 섹스봇을 규제하는 항목은 배제됐다.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로봇윤리헌장’도 궤를 같이할 모양이다. 친인간적 로봇문화와 로봇산업 발전의 조화를 추구하는 만큼 이를 가로막는 과도한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로봇산업 진흥을 위해 전 세계가 앞을 다투는 상황에서 윤리를 내세우는 규제장치는 설 땅이 없는 상황이다. 섹스봇 옹호론자들은 성폭력과 매춘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줄이는 데 섹스봇이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적 능력은 접어두고라도 성욕 해소를 로봇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의 인권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는다. 진화생물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섹스가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섹스봇이 정녕 21세기 인류의 바수밀다(婆須蜜多)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아버지와 아들/우득정 논설위원

    아버지는 거대한 바위였다. 피해 갈 수는 있어도 도저히 뛰어넘을 수는 없는 존재처럼 비쳤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항상 아버지의 일방적인 감정 전달만 있었을 뿐 소통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를 대하는 내 가슴에는 항상 칼날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대학 시절 여름방학도 다 끝나갈 무렵, 고향집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했다가 끝내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낚싯대를 챙겨 들고 대문을 나섰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벽으로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초라한 그림자를 보았다. 굽어진 어깨가 그렇게 무기력해 보일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곤두섰던 칼날이 절로 사그라졌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이틀 연속 술잔을 기울였다. 무엇이 신나는지 연신 재잘거린다. 이따금 아비의 눈치를 힐끔 보며 동의를 구한다. 갑자기 어미의 곧추선 눈심지가 어른거린 모양이다. 일어서잔다.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상상을 불허하는 희대의 ‘변태 살인광’ 등장

    그 사내는 1977년생으로 이제 서른살이다.중국 동북부 허베이(河北)성 스자좡(石家庄)시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97년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그는 공산당으로부터 허베이성의 한 공장으로 취업 허가를 받아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공장에서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한 덕분에 윗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승승장구하고 있다.특히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고 결혼을 해 아내와 4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을 정도로 다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 사내를 한꺼풀만 벗겨보면 상술한 프로필은 머리 속에서 모조리 ‘딜리트(Delete)’해야 한다.그의 소행이 너무 천착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이라는 사실이 한없이 미워지는 까닭이다.해서 그 사내에게는 ‘고결하고 우아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짐승같이 취급해 ‘종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인터넷신문 인민망(人民網)은 그 사내,아니 종자가 지난 7년동안 8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뒤 6명을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거리낌 없이 유방마저 도려내버리는 희대의 변태 살인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최근 보도했다. 인민망에 따르면 종자의 이름은 류젠(劉健).지난 99년 4월13일 첫번째 범죄를 저질렀다.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뒷모습이 아름다운 쑤산(가명)씨의 지하실 방으로 뒤쫓아가 성폭행한 뒤 비닐 노끈으로 목졸라 죽였다.성폭행하고 살해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유방마저 잘라내 내다버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1년 6개월여가 지난 2000년 9월10일 밤 11시쯤 두번째 범행을 자행했다.거나하게 한잔 걸친 종자는 자전거를 타고가다 해끔한 모습의 우웨이(吳薇·가명)씨를 발견했다.구미가 동한 종자는 몰래 뒤따라가 한적한 곳에 이르자 한마리의 야수로 돌변,성폭행을 자행한 뒤 유방을 떼어내 야산에다 내다버렸다. 한동안 자숙하던 종자는 2003년 들어 또다시 천하의 몹쓸 병이 도졌다.그해 10월20일 오전 아침 댓바람부터 한잔 거나하게 마신 종자는 한 고등학교 여학생 기숙사를 지나가고 있었다.이때 기숙사 창문에 여고생의 아리따운 모습이 얼비쳤다.이를 본 종자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장 기숙사로 짓쳐 들어갔다.주위에 있던 쇠파이프로 잠자고 있던 류싱(劉星)씨를 위협해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이후에도 종자의 야수성은 그치지 않았다.2004년 7월11일,2005년 2월6일,2005년 10월11일,2006년 3월9일,2006년 7월22일 등 아름답고 꽃다운 젊은 여성들만을 골라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유방을 잘라내 내다버리는 짐승보다 더한 못된 짓을 계속 저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교묘하게 범죄를 저질렀지만 증거는 남기는 법.지난해 7월22일 비참하게 숨진 멍멍(萌萌·13·가명)씨의 아버지는 너무나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스좌좡시 유화(裕華) 공안분국에 신고를 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유화 공안분국도 사건의 심각성을 중시,특별기동팀을 편성해 대대적인 체포작전에 나섰고 류젠이 용의선상에 올라 결국 체포됐다.공안 조사결과 종자는 모두 8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살인 강력 범죄를 저질러 그중 6명이 죽고 2명이 부상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시간에 대하여

    [한승원 토굴살이] 시간에 대하여

    1월부터 다음해의 봄에 출간될 장편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는 나에게, 왜 쉴 줄을 모르고 그렇게 달려가기만 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대답한다.“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완벽하게 갖추어져야 시간일 수 있다. 과거와 현재만 있고 미래가 없는 것은 소멸된다. 나는 미래가 있는 존재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이다.” ‘늙은 젊은이’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다. 퇴직하고 나서, 하루 쉬고 하루 노는 사람들. 지금의 젊은 대통령님도 한 해 뒤에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이 헬스클럽에 다니고 골프나 치듯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퇴임하자마자 자기의 일을 접어버리는 ‘늙은 젊은이’들의 삶은 안타깝고 슬프다. 전직에서 퇴임한 그들의 삶은 역사 속에 골동품으로 저장되는 것이고, 그들의 시간은 현재에서 슬프게 정지되는 것이므로 더 크고 가치 있는 미래가 형성되지 못한다. 아직 젊은 힘이 있으므로, 찾아 보면,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도, 그들은 찾아 하려하지 않고 무위도식하기만 한다. 책도 일도 던져버리고. 나는 퇴임하고 난 학자들이 해오던 연구를 죽는 날까지 계속하고, 책을 거듭 출간하는 것, 외국의 퇴임한 노정치가들이 국내의 현실 정치에서 초연한 채 세계평화와 인류 미래의 복지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80세가 넘어서까지도 좋은 소설을 꾸준히 쓰다가 환원되는 외국의 소설가들, 고희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작품을 꾸준히 읽고 평을 해주는 한 선배의 건강성을 나는 존경하고 귀감으로 삼는다. 연못가의 매화들이 꽃샘바람 속에서 향기를 뿜느라 분주하다. 그들에게는 늘 딴 짓하고 있을 틈이 없다. 겨울 혹한 속에서부터 오직 꽃피울 준비만 하여 왔다. 어떤 추위가 닥칠지라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여느 꽃나무들보다 꽃을 일찍이 피워야 그들은 향기로운 매화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관례로 되어 있는 과거와 현재의 시공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확실한 시간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미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12년째 나를 유폐시킨 작업실의 현판 ‘해산(海山)토굴’을 쳐다본 한 스님이 “이 집 주인은 날마다 해산(解産)을 하겠네.”하고 농담을 했다. 그렇다. 얼마 전에 후배들 몇이 일본의 한 지방을 배낭여행하자고 졸랐는데, 나는 ‘해산’ 때문에 거기 다녀올 틈이 없다고 거절했다. 한 지인이, 내가 낸 소설책들을 대충 헤아려 보더니 “50권도 훨씬 넘는데요.”하고 나서 “아이고 그만큼 썼으면 됐는데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십니까?”하고 말했다. 그것은 오해이다. 나는 결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계절은 바야흐로 늦가을쯤일 터이다. 아직 추수 덜한 전답들이 남아 있으므로 나는 바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처럼 눈이 쌓이고 나의 시간이 정지되면, 비지땀 흘리며 지어놓은 것들을 거두어 들이지 못한 채 썩히게 될 터이므로. 그것들을 착실하게 거두어 들인다는 것은 내가 확실한 ‘미래’를 갖춘 시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는 당연한 귀결이어서 슬프다. 꽃이 떨어짐은 죽음이 아니고 또 다른 성숙이다. 꽃은 피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때 확실하게 피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이 피는 것은 꽃망울로부터의 성숙이고, 낙화한 다음 열매를 맺는 것은 꽃으로부터의 성숙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 그것은 아쉬움 없는 이승과의 작별의 낙화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있는 꽃인 것이다. 소설가
  • [잘 가거라 2006년] 나의 올해는 행복했다

    [잘 가거라 2006년] 나의 올해는 행복했다

    글 송정림 소설가, 방송작가 KBS TV 소설 <너와 나의 노래> <약속> 등의 드라마와 <출발 FM과 함께> 등의 방송, 그리고 작품집 《슬픔이 아름다울 때》 《라디오 러브스토리》 등과 단상집 《마음풍경》과 자녀교육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꼭 해줘야 할 46가지, 성장 비타민》을 펴냈다. 하얗게 망각한 이름 하나가 차가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와 내 가슴에 박힌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친구 하나가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와 내 어깨를 감싼다, 절대 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용서 하나가 거리를 달려와 내 손등을 어루만진다…. 한 해가 뒷모습을 보이는 요즘은 주의하시라,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환상, 착오, 오해, 상상….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해를 살아온 나를 위로해 주는 따뜻한 착각이 아닐까. 언제나 한 해를 돌아보면 단어 하나가 풍선처럼 솟아오른다. 다사다난! 올해라고 다를까. 나라고 다를까. 일도 많고 탈도 많고 그런 만큼 많이 배웠고 많이 깨달았고 많이 컸다(늙었다는 표현은 싫다. 죽는 순간까지 사람은 큰다). 그런데 아주 행복한 사건 하나가 있었다. 다른 안 좋은 일은 다 잊어버리게 즐거운 사건이다. 아들 재형이와 함께 책을 냈고 그 책이 뜻밖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냥 추억 하나 만들자고 한 일인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 세상일이 그런 것 같다. 이건 꼭 잘 돼야돼, 어깨에 힘주면 잘 안 되고 그냥 즐겁게 하자, 힘 풀면 그 일은 잘 된다. 제품디자이너가 꿈인 고등학생 아들이 삽화를 그리고 내가 아이를 기르는 동안 느낀 점을 쓴 책 《아이가 자라는 동안 꼭 해줘야 할 46가지, 성장 비타민》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것만으로 한 해의 캘린더가 온통 푸른색으로 색칠이 된다. 그것뿐인가. 올 한 해 얻은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아들 재형이 키가 더 자랐고, 그 애 마음이 더 자랐으며, 시험공부다 뭐다 하는 동안 그 애의 지식이 늘었고, 밤새는 엄마에게 타주는 커피 맛이 더 향상되었으며, 그 애 친구가 더 늘었고, 성격 아직 안 버리고 대한민국 고교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올 한 해 얼마나 감사해야 하랴.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땅에 엎드려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게다가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남편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으며 형제자매들이 응원해 주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또 올 한 해가 보람찼노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일 아침 방송(KBS 1FM <출발 FM과 함께>) 원고 쓰는 일을 하루도 펑크 내지 않고 무사히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아주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다.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즐겁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고 팀웍이 좋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해피하고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었으니 입이 천 개 만 개 있어도 그 고마움 다 말할 수 없다. 또, 친구들이 곁에 있고, 새롭게 좋은 사람들을 알았고,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했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니 올 한 해도 나는 대박을 친 셈이다. 통장 잔고는 비었어도 마음의 창고에는 수확물이 가득하니 올해도 남는 장사한 것이다. 리차드 바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기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가장 가치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은 ‘나는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에밀리 디킨슨도 “아픈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게 아니리”라고 노래했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위해 온 마음을 다했다면 올해도 보람찼노라, 자랑해도 된다. 잃은 것 헤아리면 끝이 없다. 나 역시 가슴 아픈 상실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잃은 것은 헤아리지 않는다. 얻은 것 헤아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인생 셈법이다. 흰 머리카락만 세지 말고 사람을 세고, 몸무게만 달지 말고 마음무게를 달아본다면 올 한 해도 누구에게나 대박이다. 한 해가 뒷모습을 보인다. 이제 남은 일은 사랑의 힘으로 한 해를 추억하는 일, 그리고 역시 사랑의 힘으로 새해를 꿈꾸는 일이 아닐까.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 스노보드 타는 래퍼 화랑

    스노보드 타는 래퍼 화랑

    “은빛 설원을 박차고 파란 하늘로 뛰어 오를 때 나는 비로소 살아난다. 무대에서 나를 따라 열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뛰고 삶의 에너지가 샘솟는다.” ‘보드 타는 래퍼’ 화랑(28·본명 임경섭)이 사는 이유다. 하늘을 새처럼 날고 싶은 것은 인간의 오랜 욕망. 하얀 설원을 제비처럼 달리며 온몸을 창공에 내던지는 자유를 만끽하는 스노보드 마니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케이블 영화오락채널 XTM의 리얼리티 드라마 ‘점프’(매주 토요일 낮 12시 방영)의 주인공 화랑을 만났다. ●보드와 노래는 나의 인생 스노보드는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앨범 수록곡 ‘프리스타일’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화랑이 랩을 작사·작곡하고 스노보드를 시작하게 된 것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이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가지를 꼽는다면 랩과 스노보드다. 그래서 나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보드 타는 래퍼’가 아닌가 싶다.” 화랑은 자신은 노래에 무엇보다 스노보드의 도전과 열정의 정신을 담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화랑은 단지 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사와 작곡은 물론 노래까지 하는 멀티 플레이어다. 오는 14일 4번째 디지털 싱글 앨범이 나온다. 모두 3곡이 담겨 있다. 스노보드에 대한 사랑을 그린 ‘스놉송’, 청춘의 열정을 그린 ‘오픈 하트’ 등의 노래가 실렸다. “랩에는 자신의 세계가 담겨야 해요. 나는 노래에 스노보드의 모든 것을 담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도 스노보드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크다.”는 화랑은 앞으로 힙합뿐 아니라 펑크 록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밝혔다. ●화려한 스노보더들의 뒷모습 은빛 슬로프에선 누구보다 화려하고 주목받는 프로 스노보더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열리는 스노보드 대회는 고작 5∼6회. 우승상금도 기껏해야 몇 백만원 선이다. 그것도 1위를 했을 때 이야기다. 스노보드에 빠져 사는 프로 스노보더들의 일상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가스비가 없어 생쌀로 끼니를 때운다. 강습이라도 있는 날이면 강습생들 틈에 끼어 라면 국물을 먹으며 온기를 얻는다. 몸은 고달프지만 설원에서 공중으로 치솟아 오를 생각을 하면 육체의 허기짐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화랑은 “이번 드라마 ‘점프’에도 나오지만 스노보더들의 화려함 이면에는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점프대를 뛰어 오르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수십m를 뛰어올라 딱딱한 슬로프에 떨어지니 부상을 입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부상의 위험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다. 시즌이 아닐 때는 몇 달 동안 주유소에서 ‘총’을 잡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돈을 번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 해외로 나간다.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에게 뒤를 봐줄 변변한 스폰서는 하나도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더욱 고민에 빠지게 된다는 화랑. 그는 조금씩 기술이 향상되고 목표를 이뤄나가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펀박∼스, 두려움을 이겨낸 키∼커, 인생을 깨달아 하프 파이프. 나의 삶은 너로 인해 이렇게 변해가∼. 난 니가 너무너무 좋다.” 화랑은 오늘도 보드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며 은빛 슬로프를 질주한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길섶에서] 비정상의 경계/이목희 논설위원

    뒷모습이 깔끔한 여인이 동네 상가 앞에서 뚝배기에 담긴 음식찌꺼기를 손으로 훑어 먹고 있었다. 상인들이 배달시켜 먹고 내놓은 그릇인 듯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장면, 여인이 돌아봤다.30대 중반쯤 되었을까.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섬뜩한 느낌…. 며칠 후 멍하니 서있는 그녀를 봤다. 차림새는 여전히 단정했으나 머리가 아주 짧아졌다. 소식이 끊긴 지 25년쯤 된 대학선배가 떠올랐다. 점잖고 후덕했던 이였다. 그런 이가 갑자기 “후배 ○○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면은 멀쩡한데, 후배 관련 피해망상은 설득이 불가능했다. 어느 날 칼을 들고 후배의 하숙집 담을 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방의 선배 부모님이 오고, 선배는 결국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후배가 자기를 해코지하려는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던 선배 모습이 선하다. 그게 꾸민 것이란 사실을 아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남을 속이거나 뒤통수를 치는 사람을 보면 선배를 생각한다. 정신이 올바른데도 저럴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세계 최대 도자벽화

    [거리 미술관 속으로] 세계 최대 도자벽화

    서울 청계천 도자(陶瓷)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광교부터 삼일교까지 벽면을 병풍처럼 휘감고 있다. 청계천 반차도는 높이 2.4m, 길이 18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자벽화이다. 벽에 붙은 도자타일(30×30㎝)만 4960장이다. 반차도는 고증한 작품인 동시에 창작품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200년을 넘나들며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원본은 정조가 1795년 2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갑을 맞아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과 현륭원(사도세자 무덤)을 다녀와서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나왔다. 이 책에 단원 김홍도 등이 창덕궁에서 광통교를 지나 화성으로 가는 왕의 행차 모습을 흑백 목판화로 그렸다. 1994년 한영우 전 서울대 교수가 목판화에 채색을 입혔다. 세월 탓에 색이 바랜 채색 목판화와 뒷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행렬도를 고증해 작품의 색깔을 하나하나 정했다. 가로 15m, 세로 18m의 반차도를 청계천 도자벽화로 확대 제작하면서 강석영 이화여대 교수가 채색의 명암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헌정 작가가 조선시대 백자를 재현해 타일 원판을 제작하고, 여기에 17가지 안료를 써서 인물 1779명과 말 779필을 그렸다. 도자를 빚어 굽고 채색하는 일은 모두 손으로 했다. 이로써 과거의 유물이 생명력을 지닌 현재의 미술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작품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정조는 왕의 가마 정가교(正駕轎)를 타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한 터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앞에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의 자궁가교(慈宮駕轎)에 이어 정조가 탔다는 좌마(座馬)가 보이지만 정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왕을 대충 작게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반차도는 한 폭의 풍속화이기도 하다. 나인의 웃는 표정, 찡그린 표정조차 생생히 살아있다. 작품을 제작, 기증해 도자벽화에 이름을 새긴 조흥은행도 이제 역사가 됐다. 신한은행과 합병하면서 그 이름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영우 교수는 “왕조의 위엄, 질서와 더불어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면서 “정조 반차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독일 나치군이나 북한 인민군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경제플러스] 삼성 ‘두얼굴의 휴대전화’ 공개

    삼성전자는 8∼1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릴 세계 가전제품 전시회(CES)에서 울트라뮤직과 울트라비디오의 뒷모습을 최초로 공개한다. 앞면은 기능키와 키패드없이 화면과 터치키로만 구성됐고, 뒷면에는 별도의 LCD 창이 있다.
  • [서울신문 신춘문예-희곡당선작] 문득, 멈춰 서서 이야기 하다- monologue Quartet/김정용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 잠시 휠체어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 사람: (동시에)저기……. 짧은 암전. 명일: 그녀를 처음 본 건 두정: 치악산이었습니다. 신흥: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신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신흥: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명일: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해질무렵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요. 두정: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명일: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 뭐라하건 전 그때 운명을 느꼈습니다. 두정: 이렇게 될 운명이라 그랬던 걸까요? 신흥: 앞이 깜깜하더군요 신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사람 모습만 보이는 거 있잖아요. 신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수습해야 할지, 그때만 생각하면……. 두정: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일은. 명일: 그날이 제 생애에서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난 날입니다. 신내: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죠? 신흥: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어떻게 마누라 얼굴을 봐야 할지,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두정: 술요?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산행하는 날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내려와서 마시면 모를까. 명일: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명일 주변이 밝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명일: 이 말이, 제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어요,‘술 한 잔 하실래요?’ 참 바보 같았죠, 머릿속에 별별 말이 다 떠돌았는데, 막상 나온 말이 그거였어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한잔만요?’(미소) 그렇게 시작 했어요. 우리들.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은 일만 계속 생기면 왠지 불안해지고 그러는 거. 육상 경기복 차림의 신내 등장. 얕은 숨으로 몸을 푼다. 명일: 하지만 그런 불안도 그녀의 미소 앞에선 힘을 잃고 말았죠.(신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어요,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마음만은 늘 붙어 있었죠. 신내: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래서 대학 떨어지면 누구 탓하려고?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많이 놀랐어요, 원래 말씀을 거침없이 하시는 편이시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일에 반대 한번 안 하셨던 분인데, 아빠도 제가 고3이 되는 게 스트레스가 되셨나봐요, 사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육상하면서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으실 생각조차 안 하세요 명일: 그런 우리를 하늘이 시샘했는지 신내: 그만해 명일: 불안함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신내: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명일: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신내: 낼 모레가 마지막 시합이에요. 오빠가 와 줄까요?(호루라기 소리) 예, 가요! 암튼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급하게 달려 나간다.) 명일: 다 제 잘못이에요, 급하게 달려 나가는 연수를 잡았어야 했는데, 연수가 제 눈앞에서 붕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나뒹굴었어요,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그렇게 몇 바퀴를 굴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명일: 수술실 앞에서 내내 기도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정: 멀리서 누군가 절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얀 천장, 그보다 더 하얀 형광등뿐이었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일: 잠깐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저 세수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나간다.) 두정: 이제 에베레스트는커녕 문턱하나 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설령 잘못 되더라도 열심히 재활하면 될 거라고 말했지만, 제 몸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저는 걷지 못할 겁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제게 있어 그림엽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일 뿐입니다. 신흥: (통화하며 등장)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내 말을 못 믿어,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마……,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깟 일로 안 무너져……, 여보 나 믿지? 그래 내가 알아서 잘할게, 그리고 내 전화 말고는 다른 전화는 절대 받지마……, 알아, 알아 당분간 친정에 가 있어, 애들은……, 그래, 너무 걱정마.(끊는다.) 두정: 너무 걱정마, 모두들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한 법이니까요. 이렇게 되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관대함이란 게 무관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요,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도 다 여러분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사이)저도 며칠 전까진 여러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하고 있었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절망이란 놈은 순식간에 저를 이곳에 앉혀 놓고는 두 다리를 옭아맸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신흥: “너무 걱정 마”,“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이 말을 몇 사람에게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걱정 말라고 당부하는 꿈을 꿀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웃긴 건, 그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저인데도 말이죠. 가해자 취급만 당했어요, 물론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 잘못 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저만 좋자고 프로젝트 진행시킨 겁니까! 다 같이 잘되자고 한 일인데, 일이 틀어지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로 돌변하더군요, 같이 진행한 동료들까지도 말이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두정: 다 필요 없습니다. 신흥: 다 필요 없어요. 신내: (등장)꽃이 필요할 거예요, 그쵸? 신흥: 그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두정: 전……,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입니다. 신흥: (약병을 꺼낸다)저만 없어지면 됩니다. 두정: 제가 없어지면 모두들 걱정하는 척하다가 금세 잊어버릴 겁니다. 다리병신 하나쯤 없어졌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신내: 아니야, 그건 아니야.(두정 나간다.) 여자가 먼저 꽃을 주는 건 좀 그렇겠죠? 신흥: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이게 왜 이래. 신내: 어떡하지? 신흥: 어떡하지? 신내: 오빠가 와주긴 할까요? 신흥: 깨버릴까? 신내: 용기내서 말하긴 했는데 대답을 못 들었거든요 신흥: 용기가 깨질 때 유리 파편이 섞이면 먹기 힘들 텐데.(열심히 뚜껑을 돌린다.) 신내: 다시 한 번 말해 볼까요? 이상한 애로 보이면 어쩌죠?(사이) 안 되겠어요. 신흥: 안 되겠어. 수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신내: 무슨 수를 써야지……. 명일, 나가는 신흥과 교차되며 들어온다. 신내: 아하! 다시 말하기는 그러니까, 편지가 좋겠어요. 그렇죠? 좋은 생각이죠? 마지막 시합에 오빠가 와주면 더 힘내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쓰는 거예요. 역시 솔직한 게 좋겠죠? 그래, 그래야겠어요. 명일: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신내: 편지 명일: 편지 얘기는 아직 안 하지 않았나요? 신내: 우선 펜하고 종이가 필요하겠죠? 명일: 적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듣기만 하시면 안 될까요?(신내,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신내, 나간다.) 그럼 얘기가 나왔으니 편지 얘기를 할게요.(잠시 머뭇거리다) 사귀기로 한 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연애편지를 쓴 건 아니고요, 일기 쓰듯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나 써서 메일로 보냈어요. 하루도 빼먹지 않았어요, 단 하루도.(웃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셔서 떡이 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하루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거든요, 늦었지만 변명이라도 해볼 양으로 부랴부랴 컴퓨터 앞에 앉았죠, 그리고 메일을 쓰려고 로그인을 했는데 수신 확인 창이 뜨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하고 봤더니, 글쎄 제가 전날 밤에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무슨 말을 썼는지 궁금해서 메일을 열어 봤는데(피식거린다.) 그게,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fhufhㅈ뎌???ㄷew 이런 거 (웃는다.) 더 웃긴 건,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fhi롤fwqo어ㅈㅇ……. 명일, 말을 잊지 못하고 정신없이 웃는다. 무대 뒤에서 두정과 신흥의 절규가 들려온다. 명일: (무안해 하며)죄송합니다. 신흥, 두정 서로 반대편에서 등장 신흥, 두정: 이럴 순 없어 두정: 병원 정문도 못가서 잡혀버리다니. 신흥: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신흥, 두정: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아무리 이런 꼴이 됐어도 두정: 병원문턱 하나 신흥: 병뚜껑 하나 신흥, 두정: 내 맘대로 두정: 넘지, 신흥: 열지-못하다니, 왜 하필 이런 일이 나한테 닥친 거야, 왜 하필이면 나냐구, 내가 뭘 잘못했게!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명일: 다시 시작하죠. 두정: 그만하자, 그만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 꼴만 더 우스워지지. 두정, 신흥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신흥: (병을 내밀며) 저……, 이것 좀. 명일: 네? 두정: 뭘 봐! 휠체어 탄 사람 처음 봐! 명일: 네. 신흥: 죄송합니다. 이것 좀 열어 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병을 건넨다.) 두정: 씨발.(술병을 꺼내 마개를 따려한다.) 이건 왜 이렇게 안 열려 신흥: 잘 안 열리죠?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명일: 무리라뇨, 전 괜찮아요.(사이) 알겠습니다. 내일 오면 되는 거죠? 같은 시간에 두정: (술병을 집어던진다) 젠장, 젠장, 젠장! 신흥: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사이) 안 열리면 할 수 없죠 뭐(병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아련한 음악 다시 흐른다. 명일, 천천히 무대를 돌고. 신흥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쓰며 퇴장, 두정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퇴장, 신내 편지를 들고 등장, 음악이 끝나면 명일과 신내 각자 자리를 잡는다. 신내: 편지 다 썼어요, 들어 볼래요?(편지를 꺼내 읽는다.) 오빠 명일: 연수야, 야! 신연수 신내: 잘 지내고 계세요? 명일: 난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신내: 전 무지무지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며칠 전에 오빠에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명일: 기억난다. 너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신내: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쳐 버려서, 놀라셨죠? 명일: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붙잡아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지. 신내: 그래서 말인데요. 오빠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 얘기를 못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써요. 저, 내일모레 있을 시, 도 대항 육상 대회에 시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아마도 제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아빠가 육상을 못하게 하시거든요. 마지막 경기를 오빠가 꼭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이 불끈 불끈 날거 같아요 어쩌면 한국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빠도 더는 반대 못하시겠죠.-제발 그렇게 됐으면-, 자라나는 한국 육상 꿈나무의 앞길을 열어 주세요, 네 오빠! 우리가 대기하는 곳이 3번 게이트 쪽이거든요, 그쪽 스탠드 앞쪽에 계시면 제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꼭 와주셔야 해요, 오빠가 오지 않으면 저는 실망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꼴찌를 할지도 몰라요, 꼭 와야해요, 꼭 꼭 꼭. 명일: 가고 싶어, 그곳에…….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들려온다, 신내 재빨리 편지를 감춘다. 명일: 저 소리 들려? 우는 소리가 괴상하니까 분명 생긴 것도 이상한 새일 거라고, 확인해 보고 싶다고 몇 시간이나 헤매고 다녔었잖아. 결국 확인도 못해보고…….(목이 멘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걸어서 등장. 두정: (버럭)지금 뭐하는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신내 얼른 뛰어 나간다.) 그런 정신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야, 응!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정말 실망이다. 네놈만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 같은 녀석은 에베레스트를 입에 담을 자격도 없어! 명일: 미안, 그때 널 잡았어야만 했는데. 두정: 에베레스트는 고결한 자에게만 허락된 곳이다, 약해 빠지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하얀 살결을 허락하지 않아! 명일: 그렇지 않아, 다 내 탓이야. 두정: 그깟 집안일 때문에 술에 절어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네가 말했던 꿈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어? (사이) 그래, 나 이해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얼빠진 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바로 너 같이 환경 탓, 상황 탓 하는 것들이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야. 별것도 아닌 일에 주저앉아 버리는 너 같은 놈은 필요없어!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무슨 염치로 훈련장에 나타난 거야, 나타나길. 다른 팀원들이 너 보면 사기 떨어지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명일: 제발 나타나줘,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내 앞에 나타나줘. 암전. 빛 속에 홀로 있는 신흥 신흥: (반쯤 줄어든 약병을 들고 허탈하게 웃으며)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겨우겨우 열어가지고 스무알을 넘게 먹었는데……, 뭐? 고통 없이 갈 수 있다고? 나쁜 새끼들.(꺽꺽댄다.) 이딴 걸 20만원씩이나 주고 산 내가 미친놈이지.(전화 벨이 울린다, 병을 내려놓고 전화를 확인하고는 배터리를 빼버린다.) 미안해 여보. 날 용서하지 마.(사이) 한심하죠? 저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한심한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보니까,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한심해지는 거지.(사이) 돌아가신 저희 아부지께서 술만 드시면 어린 저를 붙잡고 늘상 하시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두정: (빛 속에서 등장)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사라진다) 신흥: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알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부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넌 어른이 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동물이 바로 어른이란 동물이다.”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사이)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야 하죠? 수습할 수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빌어먹을 죽지도 못하고, 어떡해야 하죠? 신내: (빛 속에서 등장) 그럴 땐 초콜릿을 먹으면 돼요,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 초콜릿, 아무리 우울해도 한두 조각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고 뭐. 괜찮아요. 초콜릿 하나면 땡이에요.(사라진다.) 신흥: 그 생각도 안해본 건 아닙니다. 근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예? 그건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제가 아픈건 딱 질색이라. 명일: (목소리) 연수야, 연수야 신흥: 쉿! 지금 누가 제 이름 부르지 않았나요? 설마 놈들이 여기까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명일: (목소리)아! 꿈이었구나. 신흥: 윽!(배를 움켜쥔다.) 아 배야, 갑자기 왜 이러지? 뭐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 화장실……, 크 아퍼, 먹은 거라곤 이것뿐인데,(무언가 떠올라.) 약! 이 약! 개새끼들.(배를 부여잡고 달려 나간다.) 빛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약병. 빛이 점점 번져 공간을 환하게 만든다. 밝아지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신내. 신내: 이 시간이면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데 (두정 등장) 어! 태령 오빠! 두정: (신내의 맞은편에 앉는다.) 왜 불러낸 거야? 신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드릴 게 있어요. 두정: 뭔데 신내: (편지를 건네며) 이거 두정: (받으며) 이게 뭔데? 신내: 나중에 읽어 보세요(얼굴이 붉어진다.) 두정: (읽은 후) 각서……, 야! 지금 너 장난하냐? 신내: 아니에요, 안 빨개요 두정: 이딴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어? 신흥 한손에 휴지를 들고 등장,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테이블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신내: 전엔 죄송했어요, 제 말만 하고 멋대로 가버려서. 두정: 죄송하다면 다야? 신내: 예, 그치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두정: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신내: 오빠. 두정: 이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이상 난 네 대장이 아니다 신내: 호, 혹시……, 여, 여자친구……, 있으세요. 두정: (단호하게) 없어, 추호도. 난 한번 결정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널 죽도록 패주고 싶지만 옛정이 있어 참는다. 신내: 다행이다.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두정: 더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훈련중이었거든, 네놈이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그 훈련 말이다. 신내: 그러세요, 예, 가보세요, 편지 꼭 읽어 보시고요, 두정: 두 번 다시 널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란다.(각서를 구겨 테이블에 던진다.) 신내: 저도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신내 꾸벅 인사하고는 떠나는 오빠(두정)의 뒷모습을 눈으로 는다. 두정 나간다. 신내는 오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신흥 허겁지겁 등장, 숨을 곳을 찾는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고는 몸을 숨긴다. 신흥: (숨을 몰아쉬며)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마주칠 건 뭐야, 그나마 나오는 길에 마주쳤기에 망정이지 들어가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했어봐. 아유아유 죽겠네.(두정이 버렸던 병을 발견) 뭐야? 새거잖아.(너무나 쉽게 병을 열고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는다.) 햐 시원하다.(허탈하게 웃으며) 안좋은 일만 생기는 것 만은 아니구나.(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제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아부지 말처럼 어른이 돼버려서 이렇게 된 걸까요? 가장 더럽고……, 후후후.(사이) 네? 어른이 되기 전에요? 글쎄요, 어른이 되기 전이라……. 그러고 보니 제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땐 뭐, 다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샐러리맨 따위가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때의 저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드네요,(사이) 그럼요, 뭐였냐면요……, 막상 말하려니까 쑥스럽네요, 웃지 마세요, 가수예요, 가수 (웃음) 웃기죠? 가수를 꿈꾸던 청년 도망자 되다! (웃음 소리속에 점점 슬픔이 담긴다.) 명일: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 꿈이었어, 꿈. 연수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연수야.(컴퓨터를 켠다, 윈도 시작음악) 언제까지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언제 와서 이 편지 읽어 줄래,(창 뜨는 소리, 몹시 놀란다.) 어, 어! 신흥: 아, 아! (배를 움켜쥐고) 또야? (뛰어 나간다.) 명일: (흥분) 틀림없어요. 그녀가 읽은 거예요. 그녀가 읽은 거라고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일을 읽어요, 안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게 아니었던 거예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짧은 사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신흥: (등장) 지독한 놈들, 왜 화장실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야, 아, 미치겠네.(반대쪽으로 달려 나간다.) 명일: 봤죠, 네 봤어요, 근데 제가 본건 사고 나서 실려 가는 것까지였어요, 죽은 연수를 본 건 아니잖아요. 장례식요? 어……, 그건……, 아 그래그래, 필요했던 거예요 장례식이, 연수는 큰 사고를 당했어요, 죽지는 않았겠지만 몸이 성치는 않을 거예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영화나 소설 보면 죽은 걸로 하고 숨어서 지내는 거, 그래 그거야, 그거.(짧은 사이) 비약요? 그건 선생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연수가 살아있어요! 제 우울증 따위는 한방에 끝났다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수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요 살아 있기만 하다면요, 신흥: (퀭한 얼굴로 등장) 살았다……. 두정: (목소리) 야! 야! 신흥: (소리 나는 쪽을 보며) 젠장! (도망친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낮은 목소리로) 거기 서! 뭐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틀림없어,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뭐야? 사실대로 말해봐. 뭐야 대체? 명일: 예? 두정: 뭐라고 했어 지금? 다시 한 번 말해봐. 명일: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지금은 연수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짧은 사이) 선생님! 왜 자꾸 그러세요? 선생님은 연수가 살아 있는 게 싫으세요? 비밀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연수밖에 없어요, 그런 건 철저한 애였어요, 수신확인이 됐다는 건 연수가 열어 봤단 소리예요.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두정: 그래 알았어, 너희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이해한다. 알았어, 알았어,(짧은 침묵) 잘 가라, 참 그리고 앞으론 문병 같은 거 오지마라, 훈련에만 전념해, 나 들어간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연수를 찾아봐야겠어요.(나간다.) 두정: (가다 멈춰서) 개자식들! 신흥: (온 몸엔 상처, 옷은 쥐어뜯겨 엉망인 채로 등장) 개새끼들! 두정: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자식을 끌어들여? 신흥: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패냐 두정: 씨발, 씨발 씨발,(거친 웃음) 신흥: 아, 진짜 아프다, 돈 몇 푼에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먼, 도망치지 않았으면 골로 갈 뻔했네.(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씨발 새끼들, 아부지, 여보, 나 아퍼.(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두정: 그만해, 그만해!(울먹인다.) 두정과 신흥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메운다. 신내 허겁지겁 들어온다. 신내: 뭐하는 거예요 대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얼른 일어나요 (두정, 신흥 울음을 그친다.) 자 초콜릿 (두정과 신흥 앞에다 놓는다.) 이거 먹으면 힘나거든요, 씹어 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요.(사이) 자 가요, 가서 멋지게 1등하고 돌아오면 되잖아요. 그럼 분명 코치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우리 몸도 풀겸, 경기장까지 뛰어 가요! 오케이.(나간다.) 두정, 신흥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신흥은 두정의 자리로, 두정은 신흥의 자리로 간다. 둘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집어든다. 신흥: 아깐 음료수 이번엔 초콜릿? 두정, 신흥: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초콜릿을 본다.) 뭐야? 둘,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는다. 마법같은 음악 잠깐. 알 수 없는 미소가 둘의 얼굴에 감돈다. 두정, 신흥: 그래, 힘내자, 신흥: 약을 스무 알씩이나 먹고, 그렇게 맞았는데도 안 죽었는대. 두정: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발버둥 쳐 봤자지. 두정, 신흥: 뭔가 길이 있을 거야. 두정: 그렇지? 신흥: 그렇지. 둘, 서로 반대편으로 퇴장, 신내 다른 곳으로 들어온다. 신내: 자! 우리 파이팅하는 거예요! 코치님도 병원에서 틀림없이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몸을 풀며 두리번거린다.) 아직 안 왔어요, 조금 있으면 시작인데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죠? (관중석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엄마, 아빠 여기, 여기.(사이) 차가 막히나?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래, 그래. 오빤 틀림없이 올 거야. 자! 힘내자 연신내. 멋지게 달려서 일등 하는거야, 알았지? (더욱 열심히 몸을 푼다.) 명일 등장. 신내: 어! 오빠! (명일에게) 여기에요, 여기.(환하게 웃으며 인사) 오빠가 왔어요, 오빠가 왔다고요. 좋았어, 아자아자! 명일: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친구들은 모를 테고,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그래, 일단 아이피 추적부터 해보자, 좋았어, 아자아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소리: 여자 800미터 예선전 참가자들은 본부석 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오빠 쪽을 향해) 꼭 일등 할게요! (나간다.) 두정 등장, 휠체어를 세우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 재활운동을 시작한다. 각자의 일에 열심인 두 사람. 명일: 안 되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두정: 헛 둘, 헛 둘. 한참을 하다 지친 둘. 명일: 아,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야? 두정: (숨을 몰아쉬며) 두고 봐 꼭 해내고 말 테니까. 기다려라 에베레스트, 내 네놈을 꼭 밟아주고 말 테다. 소리: 딩동댕동.601호 특실 환자분 면회객이 와 있습니다. 속히 병실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서 공사하나?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집중을. 두정: 면회? 누구지? (휠체어에 오른 후 퇴장.) 명일: 도저히 안되겠다. 누구 컴퓨터 잘하는 사람 없나? 아 그렇지! (휴대전화를 꺼내 건다.) 여보세요? 문정이냐? 응, 나 명일인데·…….(통화하며 나간다.) 나가는 명일과 교차하며 신내 등장. 긴장을 풀기 위해 몸을 턴다. 소리: 여자 800미터 세번째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선수들은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앞으로 나와 몸을 푼 다음 놓여 있는 병을 들고 마시고는 (두정이 버렸던 병) 출발선에 선다. 소리: 차렷, 준비. 소리2: 거기 서 개새끼야! 소리: (총소리) 탕 출발과 동시에 터지는 응원과 환호성 속에서. 슬로 모션으로 출발하는 신내.“안 서면 죽어!” 소리를 등지고 신흥 슬로로 뛰면서 등장. 신내와 신흥 같은 방향으로 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두 사람. 신흥이 점점 신내를 따라잡아 이윽고 나란히 뛰게 된다. 신흥이 신내를 앞서가려는 찰나. 신흥의 발이 꼬여 중심을 잃고, 그런 신흥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는 신내. 신흥은 얼른 추스르고 멀리 달아난다. 엎어진 채 그대로 있는 신내에게 빛이 모아진다. 빛은 점점 작아진다. 암전. 다시 서서히 밝아지면 신내의 자리에 서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신흥 신흥: 하하하,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한번은 잡혀도 두 번은 안 잡힌다! 이래 봬도 왕년에 한달리기 한 사람이야 왜 그러셔.(사이)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떡해야 하지?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전전긍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만 안 샀더라도 좀 더 나았을 텐데 (뒤적거려 지갑을 꺼낸다.) 육 만원. 육 만원이라, 이걸 갖고 뭐해……, 인생 허무하다, 나이 서른여덟에 가족 버리고 수중에 딸랑 육 만원 들고서 고민하는 꼴이라니……, 아니다, 아니다. 돈 한푼 없는 것 보다 낫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육 만원으로 새출발하는 거야! 까짓 인생 대역전이 별거야, 나라고 뭐 육 만원의 신화 만들지 말라는 법 있어? (절규한다.) 젠장, 근데 뭘 하냐구! 세 개의 빛이 동시에 들어온다. 빛 속에 나란히 있는 명일, 신내, 두정, 신흥. 명일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신내, 입 주변이 피에로처럼 초콜릿이 범벅인 채로 무지막지 멍하게 앉아 있다. 두정은 한 곳을 응시한 채 얼어있다. 지하철 환승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린다. 소리: 이번 역은 전동차를 갈아타실 수 있는 환승역입니다. 다른 전동차를 이용하실 손님께서는 빠뜨리신 물건이 없나 잘 살펴보시고 다른 열차로 갈아타시길 바랍니다. 넷. 각자의 자리를 떠나 각기 다른 사람이 있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정과 신흥 쪽의 빛이 어두워진다. 명일: 틀림없다니까요, 증거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돼요, 제가 보낸 메일이 수신 확인이 되어 있었다고요, 왜 그게 증거가 안 되는 건데요, 비밀번호는 연수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사이) 그러니까 한번만 조사해달라는 거예요, 저기요, 무슨 얘긴 줄 알겠는데요, 사망신고가 됐다고 해서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사이) 말이면 답니까! 제가 미친놈으로 보입니까? 당신들 시민의 요청을 거절하는거 그거 직무 유기야 알아? 민중의 지팡이라며? 친절봉사라며! 이따위로 일할 거야! (사이) 제발요,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조사해 주세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 살리는 셈치고 아니, 정말로 죽은 사람 살릴 수 있는 일이니까 한번만 도와주세요? 네? 한번만요. 신내: 안 돼! 안 돼! 아무리 초콜릿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아,(흐느낀다.)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다시는 달릴 수 없는데……, 오빠가 보고 있었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끝이야, 전부 끝장나버렸어. 명일: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신내: 코치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입원하실 정도로 열심이셨는데. 명일: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신내: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모두들 나한테 손가락질할 거야, 부모님도 친구들도 오빠도 모두들 한심하게 생각할 거야. 내가 전부 망쳐버린 거야. 어떡해. 멀리서 신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한 손에 낡은 기타를 들고 등장하는 신흥 미친 듯 웃으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신흥: 하하하, 이거야 이거! (기타를 튜닝하며 흥얼댄다.) “나는야 돈 한푼 없이 기는 도망자라네 하지만 나에겐 낡은 기타와 노래가 있어 둥기둥가.”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육 만원으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더군요, 이럴 때 의지할 마땅한 친구도 없는 내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갈 곳은 없고 배는 고프고, 그러고 있자니 일단 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오뎅을 집어 들었습니다. 터진 입술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웃음) 오백원짜리 오뎅이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사실 길거리에 서서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질 했었는데……, 아! 이래서들 먹는 거구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막 세 개째 꼬치를 집어드는데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어요, 포장마차 앞에 있는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어요, 렛잇비였는데, 너무 유명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졌던 그 노래가 전혀 다르게 들리는 거예요, 길거리 오뎅과 렛잇비, 저한테는 그냥 그저그런 뻔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뭐 암튼, 오뎅을 질겅거리며 노래를 들었어요. 렛잇비가 그대로 두라는 뜻이라면서요? 어렸을 때는 왜 그대로 두라는 건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 순간에 아!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래서 그길로 곧장 중고 악기상으로 달려가 이놈을 장만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거라곤 이 녀석과 단돈 삼천원이 전부입니다. 기타와 삼천원이라 뭔가 고독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20년 만에 만들 노래의 제목.“기타와 삼천 원” 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완벽한 제목을 만들어 내다니, 제목부터 뭔가 확 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명일: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신흥: 기타와 삼천원 명일: 설마……. 신내, 신흥 쪽을 바라보다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뛰쳐나간다. 신흥: (신내가 나간 방향에 대고) 놀라시긴……, 노래가 완성되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열배는 더 놀라실 겁니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사이) 흥신소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 때문에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이사를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거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흥: 일단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노래로 시작할 겁니다. 장소는 뭐, 찾아봐야죠, 설마 서울 하늘아래 제가 노래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가숩니다. 불행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어릴적 꿈을 이룬 멋진 사람이 된 거죠. 하하하. 자! 그럼 저를 기다리는 무대를 찾으러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흥, 큰 소리로 웃으며 퇴장, 명일 쪽지와 주소들을 확인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두정: (놀람을 감추며) 웬일이냐? 명일: 여기가 16-28번지 맞죠? 두정: 용케도 올 생각을 했구나. 명일: (떨리는 목소리로) 연수네 집 맞죠? 두정: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건 왜 물어. 명일: 저는 연수 남자친구 명일이라고 합니다. 두정: 팀을 맡게 됐다고, 축하한다. 명일: 힘드시겠지만 저도 어렵게 마음먹고 온 것이니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두정: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그만 가봐. 명일: 그 심정 이해합니다. 하지만……. 두정: 사실대로 말하지, 네 얼굴 두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 찾아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두정: 꼴 좋다고 웃고 싶겠지, 웃고 싶으면 웃어. 명일: 연수……, 연수 살아있죠? 네? 두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명일: 사실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사고 이후에도 매일같이 연수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며칠전 그 메일이 모두 수신 확인이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 하실 때 도망치듯 떠났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수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정: 상상력이 풍부하구먼.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 보시다시피 난 글러먹었어. 명일: 그렇다면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연수 찾는 걸 포기하지 못합니다. 두정: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그래 그런 말을 했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상황 탓, 환경 탓 하는 게 아니야,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더 이상 널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조심해서 가라.(나가려 한다.) 명일: 거짓말……, 거짓말이죠? 그럴 리 없어, 저를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얘기죠? 그렇죠? 두정: (멈춰서서 혼잣말로) 고결한 자만이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다·……, 고결한 자라…….(쓴웃음) 에베레스트.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나간다.) 명일: (절망적으로) 잘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나가려다 멈춰서서) 연수야……, 너 정말 없는 거야? 명일이 나가자마자, 박수 소리와 함께 현란한 조명이 무대를 훑는다.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글라스를 쓴 신흥이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신흥: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 들려드릴 곡은 지금의 저를 있게한 바로 그 노래입니다.20년 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수의 꿈을 가득 품고 며칠 밤을 새우며 코피를 쏟아가면서 만든 노래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좋은 노래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는 얘기가 있죠, 그게 바로 이 곡을 두고 한 얘기란 걸 요즘 들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럼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빌어먹을 인생.” 신흥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단조롭고 유치한 느낌의 멜로디. 신흥: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각각의 빛을 받으며 세 사람 나타난다. 약통을 들고 있는 명일, 휠체어 위의 두정, 경기 중에 쓰러져 있는 신내. 신흥: 그것이 뭔지 몰라도 신내: 이건 아니야, 명일, 두정: 이건 아니야 신흥: 목적도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순위가 매겨지고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모두: 이건 아니야. 간주. 두정 굳은 표정으로 한곳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다. 명일: 전부 제 착각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혹시나 하고 비밀번호를 쳤는데 열렸대요, 계정을 없앤다고 그러더군요, 그렇다고 앞으로는 메일 보내지 말라고……, 근데 비밀번호가 뭐였는지 아세요? ‘엠, 와이, 유, 엔, 지, 아이, 엘’이었대요. 명일, 제 이름이었어요.(허탈하게 웃는다.) 연수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약병을 바라본다.) 신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떡하지, 일어날 수가 없어, 오빠, 엄마, 아빠, 코치님……. 일어나 달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모두들 저만 바라보고 있겠죠,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신흥: 이른 아침, 아니 그건 해도 안 뜬 새벽이야. 흔들어 깨우며 하시는 말씀, 얼른 일어나, 얼른 일어나. 늦은 밤에, 아니 그건 달도 지는 새벽이야 지친 나에게 하시는 말씀, 공부 하다 자, 공부 하다 자,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제발. 잠도 못 자가며 난 무얼 하는 걸까.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간주. 명일 결심한 듯 약을 꺼내 털어 넣는다. 신내는 여전히 그대로 엎드린 채다. 등이 들썩거린다. 두정,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수건을 감은 숟가락을 꺼내 입에 문다. 명일 쓰러진다. 두정, 있는 힘껏 일어나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온힘을 다해 일어나려 한다. 신흥: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 말씀.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일어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신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어나려고 애쓰는 두정 신흥: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명일 갑자기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명일: 아 배야! 눈물을 흘리며 일어난 신내, 이를 앙다물고 슬로로 뛰기 시작한다, 두정 간신히 몸을 지탱해 휠체어에 오른다. 신흥을 제외한 나머지 빛이 사라진다. 신흥: 인생이란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모두들 다 그렇게 살아 일어나, 일어나.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가 빌어먹을! 일어나, 어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기쁨에 차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여, 여보……. 무대 밝아진다. 신흥 머뭇거리는 사이 신내 천천히 등장한다. 신내: 오빠 신흥: 여, 여보 신내: 어쩐 일이세요? 신흥: 당신이 어떻게 여길……. 신내: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할말 있었는데. 신흥: 그러니까……, 그게 신내: 아무 말 마세요, 부탁이에요, 제가 얘기할 테니 듣기만 하세요. 신흥: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신내: 사실 저 오빠 좋아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에요. 신흥: 그게 무슨 소리야? 신내: 말 그대로예요, 이젠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신흥: 여보, 그러지 마,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신내: 고마워요, 진작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저 꼴찌해서 이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어 버려서 그런 거예요. 신흥: 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죽는다는 소리는 말아줘, 부탁이야. 신내: 그러지 마세요, 오빠답지 않아요. 신흥: 난 이미 끝난 놈이지만, 당신하고 우리 창신이 수진이는 아니잖아. 남편,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잖아, 여보, 그러니까 그런 소리 두번 다시 하지마. 신내: 괜찮아요? (사이) 저요? 보세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신흥: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 신내: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신흥: 이혼하면 놈들도 더는 못 괴롭힐 거야, 자리잡히는 대로 연락할게,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생활비랑 애들 교육비는 최대한 노력해 볼게. 어떻게든 아빠 노릇은 하도록 할게. 미안해 여보. 신내: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오빠도 조심해서 가세요. 안녕……, 안녕.(자리를 옮긴다.) 신흥: 놈들이 위치추적을 해서 전화기 못쓰니까, 내가 연락할게. 신내: 오빠도 제가 좋대요, 우습죠? 기껏 마음 정리했는데 고백을 받다니……, 조금만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사이) 저 끝까지 달렸어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목소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이후엔 아무 생각도 안나요, 어떻게 결승점을 통과 했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정신이 들고 보니까 제 방에 덩그러니 앉아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먹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고, 입 주변은 초콜릿이 번져서 피에로처럼 되어 있더라고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대고 웃어버렸어요,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눈을 감고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 봤어요, 자세히 들어 보니까 제 목소리더라고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 보면 처음엔 자기 목소린 줄 모르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였어요, 조금 익숙해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제 목소리인지. 신흥: 그랬어? 그거 다행이네. 알았어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사이) 내 걱정은 하지마, 당신하고 애들이 힘들지 나야 뭐……. 그만 가봐, 수일내로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여보! (사이) 아, 아니야.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사이. 혼잣말로) 잘 살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평소에 안해 버릇해서 힘드네. 신내: 근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는 이미 끝나버렸는데, 레이스를 마치라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흥: 자! 이젠 나의 무대를 찾아가 볼까,(기타에게) 가자 로시난테, 갈 길이 멀다. 서두르지 않으면 날이 저문다고.(나간다.) 신내: 800미터 경기는 트랙을 2바퀴 도는 거예요, 작전도 중요하긴 하지만 페이스 조절과 순간의 판단력이 그 어떤 종목보다 중요해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려도 안 되고 페이스 조절한다고 천천히 출발해도 안 되죠, 작전대로 달리다가도 상황에 따라 작전을 포기하고 감으로 스퍼트하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해 봤어요, 나는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달려온 것보다 달려야 할 트랙이 더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알람이네요.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나간다.) 텅 빈 무대. 멀리서 전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로 들려온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무대를 가로지른 후 점점 멀어져 간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빈 휠체어를 끌고 등장한다. 휠체어를 세우고 한두 걸음 떨어져 선다. 두정: (휠체어에 대고) 너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위로해 주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잔인하게 들려도 할 수 없어. 다 네 잘못이야, 한 번 더 점검했어야지, 한 번 더 살폈어야지. 그 정신 상태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면 너 때문에 동료들 모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 너 이렇게 된 거,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목숨과 다리를 바꿨다고 생각해, 어찌 보면 이렇게 된 거 너한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인생 선배로서 하는 얘기니까 귀담아 듣는 게 좋아, 휠체어 생활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괜히 재활한다고 힘 낭비하지 말고 그 다리에 적응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나같이 바른 말을 하는 선배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이제 가봐야겠다, 돌아가서 합숙 준비를 해야 하거든, 들어가서 한 숨 자는 게 어때? (휠체어를 밀고 나간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두정이 나간 반대편에서 피골이 상접한 명일이 다리 힘이 풀린 채로 등장 명일: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정말 특이한 약이야. 고통스럽냐고 물었을 때 왜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이해가 돼.(힘없는 웃음) 왜 죽으려고 했는지, 죽기로 결심한 내가 원망스러워지다니……, 아픈 배를 감싸고 변기 위에 앉아 있자니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연수를 잃었을 때보다 변기 위에서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웃음이 나왔어요, 눈물은 줄줄 흐르고 웃음은 멈추지 않고, 아래도 멈추지 않고 (힘없는 웃음) 제가 연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배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요?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명일: 저 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까요? (고개를 숙인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신흥, 신내, 휠체어 탄 두정. 각자 자리를 잡고 선다. 네 사람: 요 며칠 정말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버려져, 혼자 어딘가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나한테 달려든 것 같은 느낌,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죠. 두정, 신흥: 왜 하필 나야? 명일, 신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네 사람: 속으로 원망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 봤습니다. 근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연한 얘기죠, 고민하고 소리 질러서 일이 해결 된다면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신흥: (큰 목소리로) 가수가 되기로요! 두정, 명일: (바로 이어) 받아들이기로요 신내: (이어서) 다시 달리기로요. 네 사람: 많이 겁나고 솔직히 자신 없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어나야죠, 신흥: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네 사람: 변하는 건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두정: 저, 결국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휠체어를 뒤로 돌리자 자동차 번호판 모양의 판에 ‘에베레스트’라고 쓰여 있다.) 썰렁했나요?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지하철이 다가오는 소리, 멈추는 소리, 문 여는 소리. 모두 한발씩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힘찬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기타를 정성껏 보듬으며 어디론가 간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한다. 네 사람: (동시에) 저기……. 암전. 어둠 속에서 신흥의 목소리 신흥: (목소리) 드디어 완성했습니다.‘빌어먹을 인생’을 이을 평생의 역작.‘기타와 삼천원’ 조명을 받으며 멋지게 등장한 신흥. 노래한다. 신흥: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가수를 꿈꾸는 소년이 살았다네 매일 밤 꿈속에서 노래하던 소년은 매일이 너무나 행복했다네 그러나 어느 샌가 소년은 노래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 가수를 꿈꿨던 남자가 살고 있다네 꿈을 잊은 채로 살아가던 남자는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노래하던 꿈을 떠올렸다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아, 가진 건 사랑스런 기타와 단 돈 삼천 원뿐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네, 아, 가진 걸 모두 잃어 남은 것 하나 없어 불행하지만 나에겐 기타와 삼천원 있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세상에 내 것이 하나 없어도, 노래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있어 너무 행복하다네. 너무 행복하다네. 박수 소리에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던 신흥, 키스를 날리며 퇴장한다. 무대 한쪽에서 연수, 차분한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태령,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약장수,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연수가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약장수, 태령,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세사람. 연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약장수: 종로 5가입니다. 태령: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연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약장수: 주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고객이죠. 혹시 필요하신가요? 태령: 네, 그녀를 사랑했거든요. 연수: 사랑했어요, 그래서 많이 미안했고요,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약장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태령: 그녀는 떠났지만 전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연수: 이제 떠날 거예요, 명일씨를 놓아주려고요, 마음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거예요. 약장수: 그 약을 먹게 되면 죽을 각오로 살게 되죠, 태령: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열심히 달리는 신내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하고요 연수: 뒤에서 지켜본다는 거 그리 쉽지 많은 않더라고요,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약장수: 그것이 문제죠, 부작용이 너무 심해요, 설사가 장난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하하하. 세 사람 모두 정지. 두정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무대 중앙에 휠체어를 놓고 나간다. 휠체어 홀로 빛을 받는다. 휠체어: 전 에베레스틉니다. 제 주인님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전 어디를 가나 주인님과 함께 하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인님이 제게 이름을 붙여주고 난 뒤로 가끔이긴 하지만 웃는 모습을 보이시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제 이름이 좋습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휠체어: 지하철이 왔네요, 못다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저는 지금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거든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암전. ■ 등장인물 명일(25세, 대학생) 신내(18세, 고등학생, 육상부) 두정(32세, 산악인) 신흥(38세, 샐러리맨)
  • [서울신문 신춘문예-소설당선작] 그들만의 식탁/황시운

    뼛조각을 쥔 남자의 손가락에 양념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댔다. 엄마는 간혹, 맨밥만 끼적이고 있는 내 쪽으로 슬며시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밀어주었다. 그러나 꼬리찜의 기름이 둥둥 뜬 나박김치, 허연 밥풀이 앉은 겉절이, 되는 대로 헤쳐 놓은 나물들까지, 어느 것 하나 남자의 흔적이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된장찌개로 수저를 가져가려다 또다시 멈칫했다. 밥풀이 잔뜩 묻은 남자의 숟가락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찌개냄비를 휘젓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자의 수저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 시선을 의식한 엄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양 볼이 메어져라 우겨 넣은 음식들을 우물대다 말고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의 수저를 흘끔댔다. 남자도 쥐고 있던 자신의 수저를 내려다봤다. 수저엔 여전히 밥풀과 음식의 양념들이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커다란 식탁 앞에 둘러앉은 우리 세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남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남자는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엄마 역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찌개를 떠먹었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맞은편의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기엔 우리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커다란 식탁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와 엄마의 얼굴이 차츰 흐릿해졌다. 나는 잠시 멀거니 찌개 위에 뜬 기름기를 바라보았다. 찜 그릇이 다 비워지자 남자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남자의 시선은 엄마가 덜어놓은 내 접시 위 꼬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속이 울렁댔다. 나는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왜, 좀 더 먹지 않고…….” “그러지 그러냐. 이거, 오늘 고기가 유난히 단데 말이다.” 엄마의 걱정에 남자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이미 내 접시 위의 꼬리를 덥석 집어 들고 있었다. “전 다 먹었어요. 마음 쓰지 말고 더 드세요.” 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엄마를 향해 짐짓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집안 가득 밴 음식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뼈에 붙은 고깃점을 다 훑은 남자가 크게 트림을 하며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급히 남자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그러나 남자는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손가락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닦는 대신 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과 목덜미를 훔쳐냈다. 남자는 엄마의 네 번째 남자였고 내게는 세 번째 저기요였다. 엄마의 남자들에게 나는 단 한번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게 아버지는 엄마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흰 피부의 키가 큰 남자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흰 피부와 큰 키를 가진 엄마의 다른 남자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호칭을 생략하려 애썼지만 부득이한 경우 나는 늘 그들을 저기요, 라고 불렀다. 저기요, 식사하시래요. 저기요, 전화 받으세요. 저기요……. 코끝을 쏘는 고추냉이의 냄새와 생선 비린내를 감지하는 순간, 경화제를 섞은 실리콘을 휘젓던 팔에서 힘이 쑥 빠지고 말았다. 독한 경화제 냄새 속에서도 용케 부품들의 생생한 냄새를 찾아내고야 마는 유난스러운 후각에 진저리가 쳐졌다. 모두들 퇴근하고 난 토요일 밤, 휑한 제작실의 공기가 후각을 한층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충분히 저은 실리콘을 골판지 틀 안에 천천히 붓자 후각을 자극하던 부품들의 냄새도 실리콘 반죽 속에 갇혀 버렸다. 드라이어의 온도를 최대한 낮춰 틀 위에 가져다 댔다. 원칙적으로 실리콘 틀은 자연건조시켜야 하지만 납품기일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제작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지금쯤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 아내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별스러운 걸 기대했던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대수로울 것 없는 잡담이나 나누며 함께 밥 먹는 일상을 원했던 것뿐이라고.” 오 년여의 시간을 정리하던 날 그가 말했다. 시종일관 차분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던 나와 달리, 그날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놓았다. 도저히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할 땐 눈물이 그렁하게 맺히기도 했다. 그 뒤로도 서너 번쯤 더 그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막막한 심정으로 마주 앉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 헤어졌다. 나는 누군가와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잡담이나 늘어놓으며 보내게 될 일상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얼마 후, 그는 결혼을 했다. 드라이어를 내려놓은 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러나 곧 담배를 담뱃갑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제작실 문에 걸린 금연 푯말을 일별한 후 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를 서성이다 빈 사무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과식 소화불량에 파라나 정―변비 식욕부진에 카이셀 과립’. 맞은편 건물 위에 세워진 전광판의 글자들이 색깔을 달리하며 우르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자신들 사이에 괴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좁은 사무실은 전광판이 뿜어내는 빛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다. 볕에 널어뒀던 북어껍질을 거둬들이는 엄마의 손이 붉게 빛났다. 노을은 엄마의 손뿐만 아니라 부엌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엄마는 나무 도마 위에 북어껍질을 뒤집어 올려놓고 절굿공이로 타닥타닥 두드렸다. 좁고 동그란 엄마의 어깨가 유연하게 들썩였다. 엄마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북어껍질을 물에 담가둔 뒤 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살짝 데친 숙주를 잘게 썰고 으깬 두부를 면포에 싸 꼭 짜냈다. 핏물을 뺀 소고기까지 다져낸 엄마는 준비해둔 재료들을 한데 그러모아 양념하고 치대기 시작했다. 얇은 면 티셔츠가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엄마의 뒷모습엔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음식을 만드는 순간의 엄마는 다른 어떤 때보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뒷모습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언제나 그늘져 있었고, 그늘 속의 엄마는 날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엄마는 물에 불린 북어껍질을 건져 비늘을 긁어냈다. 물에 분 북어껍질은 탱탱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그러고는 반듯하게 잘라낸 북어껍질에 소를 넣어 아물린 뒤 계란 옷을 입혀 지져냈다. “너무 기름지면 개운한 맛이 덜하니까 주의해야 해. 소고기 대신 북어대가리로 육수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지.” 지져낸 전은 한 김이 빠지자마자 냉동실에 넣어 식혔다. 잠시 뒤 엄마는 북어대가리와 무, 그리고 파만으로 우려낸 육수에 나박나박 썬 호박과 함께 식혀뒀던 전을 넣었다. 엄마는 국물이 한소끔 끓자 된장을 풀면서 다시 말했다. “된장은 마지막에 풀어라. 처음부터 장을 풀고 끓이면 떫은맛이 나기 십상이거든. 맑게 끓이려면 국간장으로 간을 해도 괜찮고.” 엄마는 썰어놓은 파와 미나리를 끓고 있는 탕 속에 집어넣으며 처음으로 내 쪽을 돌아봤다. “지금이야 쓸데없는 소리 같겠지만 들어둬라. 들어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있겠지.” 신문을 뒤적이던 저기요가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식구가 쓰기엔 너무 큰 식탁은 곧 엄마의 음식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저기요는 벌써부터 커다란 식탁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뒀지만 어글탕의 비릿한 냄새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다시 위가 저릿대기 시작했다. 엄마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엄마보다는 엄마가 만든 음식에 홀려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엄마가 야물게 차려내는 음식에만 열중할 뿐, 엄마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엄마의 남자들이었지만 솜씨 좋은 요리사를 찾는 단골손님들 같기도 했다. 엄마 역시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틈에서 나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차려내는 요리사의 딸로서 그들 모두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엄마의 남자들과 엄마 사이에 음식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따위도 문제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마치 잘 차려진 음식상에 어울리지 않게 놓인 이 빠진 종지 같았다. 나는 날마다 타들어 갔다. 엄마가 만들어내는 온갖 맛깔스러운 음식들도 나를 살찌우진 못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이렇게 대단하신데 어떻게 넌 그렇게 비쩍 마를 수가 있었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어머니, 한영이 얘, 다이어트 한답시고 걸핏하면 굶고 그러죠?” 처음 인사를 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날 그가 말했다. 엄마는 말없이 엷게 웃어 보였고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서글서글한 성품의 그는 식사를 하는 내내 감탄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엄마와 나의 세 번째 저기요는 흐뭇한 얼굴로 그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음식 타박 없이 무엇이든 잘 먹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날, 두 남자가 게걸스레 먹어댄 음식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나는 저녁 내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야, 어머니 음식 솜씨 정말 대단하시더라. 나 완전히 횡재한 기분인 거 있지? 어머니 닮았으면 너도 보통 솜씨는 아닐 거야. 그렇지?” 그 뒤로도 그는 종종 벌쭉벌쭉 웃어가며 만족스러워하곤 했다. 자신의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실망하는 기색은커녕 넉살 좋게 객쩍은 농담을 던지며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딸은 엄마 닮는다는데, 그 피가 어디로 가겠냐? 안 해봐서 그렇지 너도 했다 하면 보나 마나 끝내줄 거라니까.” 그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의 말이 사실이면 어쩌나 싶어 한동안 몹시 불안했다. 엄마는 그 유난스러운 손맛 때문에 한순간도 자신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손가락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쭉 고르고 하얗던지, 처음 봤을 땐 꼭 멀미라도 치밀 것처럼 속이 다 울렁댔더랬지. 그렇게 훤칠한 양반이 매번 앉은 자리에서 해장국을 두 사발씩이나 뚝딱뚝딱 비워내는데,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던 건지 볼 때마다 속이 짠한 게….” 결국 나는 솜씨 좋은 해장국집 외동딸이 자신의 가슴을 짠하게 한 남자를 위해 뚝배기에 아낌없이 퍼 담아줬던 선지 덩어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었다. 한번도 묻지 않았고 엄마 역시 이후의 일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었지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기가 치밀 만치 하얀 피부를 가졌던 그 훤칠한 양반은, 사실 선지 해장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혼기 놓친 해장국집 외동딸 따위가 눈에 찰 리 만무했을 것이다. 입에 맞는 해장국을 먹기 위해 일생을 걸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엄마의 첫 번째 남자이자 나의 아버지였던 양반은 머지않아 해장국보다 더 나은 먹거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끝. 통속적이지만 명쾌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가정식 백반으로 식당의 메뉴를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음식 장사에 매달렸다. 타고난 손맛 때문인지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볐고, 덕분에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리 생각해 보려 해도 엄마는 그때 음식 장사를 시작해선 안 되는 거였다. 선지 덩어리를 퍼 담아 주다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들쳐 업고 기껏 다시 시작한 일이란 게 음식 만드는 일이었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해도 엄마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무책임했다. 생의 대부분을 음식 냄새 속에 갇혀 지내는 동안, 엄마는 요리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해져 갔다. 엄마가 찾아낸 새로운 삶이었을 저기요들조차 모두 엄마의 백반 집과 갈비 집의 단골손님들이었다. 이를테면 엄마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남자들과 살림을 합칠 때마다 엄마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행동했다. 간혹 내 의견을 물어오기도 했지만 내가 보이는 반응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물론, 단 한번도 엄마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돼먹지 못한 심술을 부려 엄마와 저기요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사실, 엄마의 방으로 옷가지 몇 벌을 옮겨왔을 뿐인 단골손님들에게 내가 불손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각자 어딘가 조금씩 불편하고 거북하긴 했지만 우리들의 동거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만만한 게 뭐라고, 아무튼 제작팀을 무슨 개똥대가리로 안다니까! 납품기한 하나 제대로 조절 못하는 즈이 놈들 책임은 간데 없고 허구헌날 나만 들볶으면 안 될 일이 된대? 에이, 썅!” 작업가운을 벗어 던진 제작팀장이 담배를 빼물었다. 그러고는 서너 번쯤 신경질적으로 빨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진 뒤 제작실을 나가버렸다. 부서져라 닫은 문에 걸린 금연푯말이 덜렁댔다. 팀장은 종종, 자신이 늘 하는 말처럼 제작팀을 개똥대가리 취급하는 이 개 콧구멍만 한 회사를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말 기세로 성깔을 부려대곤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지, 그는 덜렁대는 금연푯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다시 제작실 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와 나머지 팀원들을 몰아치곤 했다. “다들 들었지? 개 썅! 드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어, 까라면 까는 수밖에. 자, 분발들 하자고!” 결국 그는 이 개 콧구멍만 한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퍽 유능한 관리자인 셈이었다. 예열 된 오븐 안에 모형들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타이머를 조절한 뒤 새로 작업할 음식의 부품들을 정리했다. 팀장은 조금 전 오더가 넘어온 열한 가지나 되는 스테이크의 메뉴와 자료들을 내게 넘기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까지는 완성해야 된다고 지레 숨넘어가는 소리를 해댔다. 물컹대는 스테이크의 표면을 마른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아낸 뒤 작업판 위에 접착했다. 골판지로 스테이크와 부품들의 주변을 두르고 파라핀으로 테두리를 마무리했다. 온갖 음식 부품들과 화공약품의 냄새가 뒤섞인 작업실은 마치 거대한 냄새창고 같았다.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환풍기 소음 때문에 골이 지끈거릴 지경이었지만 이 지독한 냄새를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스테이크의 틀을 완성한 뒤 성형이 끝난 초밥 부품들의 착색 작업을 시작했다. 날 생선을 주로 쓰는 일식은 무엇보다도 색감의 표현이 중요하다. 각각의 생선부품들에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한 스프레이 작업 후, 보다 세밀한 표현을 위해 붓을 들었을 때 작업대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의 램프가 깜빡였다. 발신번호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램프는 한참을 더 깜빡이다 꺼졌다. 칠 개월 만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망설임 없이 뛰어넘어도 괜찮을 만큼 달라진 상황들이 단순한 것도 아니었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졌다. 잠시 후, 다시 램프가 깜빡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붓을 쥔 채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붓에 묻은 물감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너 통에 붓을 헹군 뒤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 나야.”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좀 만났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전보단 확실히 낮아진 목소리도 조심성 없는 그의 성품을 감춰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달라진 상황들로 인해 망설이고 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결국, 아직은 서로의 목소리를 잊어도 좋을 만큼 멀리 오진 못한 셈이었다. 모형음식이 필요한 이유와 그것의 가치는 일맥상통한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량생산으로 맞춘 듯이 찍어내는 싸구려 모형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모형음식의 예술적 승화 운운하며 걸핏하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해대는 제작팀장이나, 직원들 보너스조차 변변히 챙겨주지 못하면서 소규모 주문제작만을 고집하고 있는 회사의 오너조차도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모형음식은 신기한 볼거리도, 획기적인 전시 아이템도 아니라는 점이다. 가짜들에 대한 환상 따위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환상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모로 열악한 여건들을 감수하면서까지 뒤늦게 이 일을 시작한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모형음식은 음식을 포함한 모든 환상들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했다. 유일했고 완벽했다. 착색을 마친 모형에선 금방이라도 물기가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붓을 내려놓은 뒤에야 참았던 숨을 조심스레 몰아쉬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전화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언제고 그가 연락을 해오리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가 나를 떠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을 쏘이자 딱딱하던 생선 모형들이 노골노골해졌다. 고추냉이를 표현한 초밥 위에 접착제를 바른 뒤 부드러워진 생선을 얹었다. 손으로 초밥을 꼭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헛헛하던 속이 비로소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애초부터 나는 혀를 홀리는 음식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남자들과 살림을 합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과 헤어질 때 역시 나는 별다른 감응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헤어짐의 원인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저기요가 짐을 꾸리며 내뱉은 말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저놈의 자식이랑 같이 밥상머리에 앉아 있다 보면 내가 무슨 개, 돼지가 된 것 같단 말이야! 더러워, 아주 더러운 기분이야!” 그는 순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식당근처의 보험회사에서 근무하던 남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의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다. 엄마도 단 음식을 유난히 싫어하는 그를 위해 음식의 간을 따로 할 만큼 그에게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그는 또, 엄마와 살림을 합친 후부터는 나에게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나는 그가 엄마 모르게 쥐어줬던 약간의 용돈을 매번 무척 요긴하게 쓰곤 했다. 물론 그런 그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와 함께 한 밥상머리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을 만큼 별나게 굴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지만, 사춘기를 무기 삼아 공연한 심술을 부려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아저씨는 그저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야.” 엄마의 위로도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언제나 웃었다. 엄마에게도, 저기요에게도, 심지어 엄마의 음식들에게조차 나는 웃어 보였다. 엄마의 집으로 많지 않은 짐들을 옮겨오던 날, 세 번째 저기요는 말했다. “너랑 불편하게 지내게 될까봐 은근히 마음이 쓰였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보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응?”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함께 산 지 오 년이 넘도록 그는 내가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종종 헛웃음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 하지만 그도 어쩌면, 그것이 헛웃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거라면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유가 뭐냐? 오 년씩이나 잘 만나던 사람이랑 느닷없이 헤어졌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냔 말이다. 집에 인사까지 시켜놓고 이제 와서 결혼 못하겠다고 나자빠진 이유가!” 뒤늦게 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다그쳤다. 하고 싶은 말도 해줄 말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엄마와 엄마의 남자들에게 담담했던 것처럼 엄마도 내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게 알고 싶은 거죠? 엄마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구요? 도무지 결혼이라는 게 현실 같지가 않아서 싫었어요. 당연한 일 아니에요?” 엄마의 삶을 비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엄마의 삶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비록 엄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내 지난 시간들이 상한 음식처럼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그늘 속에 방치되어 왔다 해도 말이다. 그때, 엄마의 선택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엄마 혼자만의 탓이 아니었다. 게다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가장 괴로웠을 사람은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었을 테니, 나까지 거들지 않는다 해도 엄마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의 문제였을 뿐이다. 엄마도 그걸 이해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초밥모형의 주문처는 확장이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회전초밥 집이다. 주문량은 회전용 접시 스물두 개 분량이다. 모리작업을 위해 색색의 접시들을 꺼내 깨끗이 닦았다. 회전초밥 샘플의 경우엔 특별한 데커레이션이 필요 없다. 자료사진과 비교해가며 각각의 접시 위에 초밥모형들을 접착했다. 그러나 업체 쪽에서 넘겨준 자료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초밥 집에서 판매되는 음식들은 모형에 훨씬 못 미칠 것이 뻔했다. 그런 지경으로 어떻게 가게를 확장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접착제 튜브를 내려놓고 뻣뻣해진 뒷덜미를 꾹꾹 주물렀다. 잠시 후 그를 만나면 함께 식사를 할 것인지 얼른 결정을 해야 했다. 그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는 일은 보나마나 고역일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음식을 먹든 안 먹든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코팅작업을 위해 클리어래커에 래커시너를 배합하고 있을 때 휴대폰의 램프가 깜빡였다. 작업실을 가득 메운 시너냄새를 뚫고, 이미 휘발되었던 그가 온전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순간, 약속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장소이기도 한 레스토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긴,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난 칠 개월은 그와 나, 우리 두 사람을 변하게 하기에만도 벅찰 만큼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점심시간인데도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네가 만드는 음식모형쯤으로 생각하면 돼. 어차피 너에게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잖아?” 그는 빈정대고 있었다. 앞에 놓인 음식이 다 식어빠지도록 끼적대고만 있는 내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널 다시 만나고 싶어, 라고 말했다. 나는 칠 개월 만에 다시 연락을 해온 그가 조금쯤은 초췌해졌거나, 적어도 이전보다는 깊은 눈을 갖게 되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전보다 훨씬 부예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타이핀과 커프스버튼의 디자인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음 직한 동창생 아내의 흔적까지 덕지덕지 바르고 나타났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빈정거리고 있었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스테이크의 붉은 속살을 포크로 쿡쿡 찔러대고 있던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아직도 내게 기대하는 게 남았다는 뜻이야? 도대체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겠어.” 부지런히 음식을 씹고 있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쥔 채 말했다.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내. 차라리 쥐고 있는 포크로 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버려. 제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사람 좀 질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넌 늘 그런 식이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이미 결정해 놓고도 망설이는 척……. 그런 식으로 너 자신을 방어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나본데, 웃기지 마. 넌 그냥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딱딱한 음식모형을 만드는 여자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표정이 뭘지 항상 궁금했다. 회사를 나서기 전에 한 움큼이나 되는 약을 먹어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목구멍을 타고 신물이 역류했다.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주말에 전화해. 주중엔 당신뿐 아니라 누구와도 잘 수 없을 만큼 바빠. 그리고 다시 만날 땐, 제발 그 타이핀이랑 커프스버튼은 빼고 나타나 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이 흔들렸고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동시에 뺨이 얼얼해졌다. 아프긴 했지만 화가 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나이프의 날엔 스테이크소스가 지저분하게 엉긴 채 굳어 있었다. “진정해. 혹시 포크로 내 얼굴을 찌르고 싶더라도 참아 줘. 우린 칠 개월 만에 만났어. 그 사이 당신은 결혼을 했고, 당신 말대로 난 여전히 마주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소한 잡담이나 나눌 만큼 편한 상대가 못돼. 당신도 알잖아.”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연락을 해올 것이다. 그때 가서 그를 다시 만나건 만나지 않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일을 두고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봉합해두지 않았던 탓에 꾸덕꾸덕해진 클리어래커에 시너를 다시 배합해 접시 위에 가지런히 데커레이션 된 초밥의 코팅작업을 했다. 래커의 양을 조절해가며 최대한 얇고 고르게 펴 발랐다. 실제 음식이건 모형음식이건 간에 실없이 번쩍대는 음식이 입맛을 돋울 리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음식모형도 그렇고, 그와의 관계도 그렇고, 엄마나 저기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자칫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그 모든 것들은 대책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오후엔 사무실에 다녀온 제작팀장이 다시 한번 작업가운을 벗어 던지며 길길이 날뛰었고 망할 놈의 환풍기는 아예 규칙적인 박자까지 맞추며 덜덜 돌아갔다. 나는 완성된 초밥모형만을 간신히 넘긴 뒤 서둘러 퇴근했다. 한번 뒤집힌 속은 다시 약을 먹어도 쉬 가라앉지 않았다. 어둠에 잠겨 있는 방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주무시지 않고,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묵직한 머리를 흔들어 남은 잠을 털어내며 물었다. “아저씨가 들어오지 않으셨다.” “겨우 그것 때문에 이 밤에 주무시지도 않고 그러고 계신 거예요? 곧 들어오시겠죠. 좀 늦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며칠 전부터 꽃게가 잡숫고 싶다고 하셔서 수산시장에 다녀왔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점심때가 다 돼서야 돌아왔지 뭐니. 돌아와선 또 한참이나 게를 손질하고 찜통에 쪄냈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않으시는구나.” 그러고 보니 미처 맡지 못했던 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순간 비어 있던 위가 저릿해졌고 동시에 신물이 올라왔다. 처음엔 그저 감전된 것처럼 저릿하기만 하던 위의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버렸다. 허리를 구부린 채 통증을 참아내고 있는 나를 향해 엄마는 말했다. “어쩐지 영 안 들어오실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하긴, 오 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 그동안 너나 그 양반이나, 참 용케도 견뎌내는구나 싶었다.” 웅크린 몸 구석구석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한동안 말없이 이불을 덮어쓴 내 몸을 토닥이던 엄마가 이불을 걷어내고 나를 바로 눕혔다. “약 어디 있니.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닌데, 어디 약이 있을 거 아니냐.” 엄마는 비칠비칠 일어나 약을 찾아 먹고 다시 누운 내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만 하면 됐지 않니. 그게 다 뒤숭숭한 에미 팔자 같이 겪어내느라 얻은 병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만, 너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그만 마음을 풀었으면 좋겠구나. 도대체 내가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네가 먹어줄는지……, 정말이지 모르겠다. 네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차진 속을 덥혀 줄 음식이야. 이런 약 따위로 나아질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니.” 엄마는 전에 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뒤틀리던 속도 차츰 가라앉았다. 배를 쓸어주던 엄마가 이불 속을 더듬어 내 손을 찾아 쥐었다. 목구멍이 따끔댔다. 딱히 뭐라 단정지을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식탁을 바꿔야 해요. 지금 건 너무 커……. 너무 커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엄마가 도무지 보이질 않아요. 그 커다란 식탁 앞에 앉아 있으면 온통 엄마의 음식들만 보여. 나뿐만이 아니라 거기선 누구도 엄말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엄마는 땀으로 끈적이는 내 얼굴을 한번 더 쓸어준 뒤 방을 나갔다. 나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위는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림자만 가득한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만큼 완벽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은 끊임없이 사물을 굴절시키고 왜곡한다. 속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굴절된 삶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피곤이 밀려왔다. 다시 잠들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몸으로 익힌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사소하기만 한 몸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그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낯설었다. 망설이듯 주춤대는 손길이나 어딘지 불편한 듯한 신음을 내뱉는 목소리까지. 하지만 어쩌면 그는 줄곧 같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고 가슴을 그러쥔 아귀의 힘은 너무 강했다. 삽입 전의 행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태도는 지루했다. 서너 차례 타이밍을 놓치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조급해하기까지 했다. 삽입 이후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치골이 부딪힐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유난히 건조하고 까슬까슬한 그의 피부가 불편했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연속되는 천장의 무늬와 삐걱대는 매트리스의 소음에 몰입했다. 마치 커다란 식탁 위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는 순식간에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마지막 타이밍만은 놓치지 않고 정확히 페니스를 빼낸 그는 내 아랫배 위에 사정했다. 끈적끈적한 정액을 뒤집어 쓴 아랫배가 환한 형광등 아래서 번들대고 있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앙다문 입술을 파고드는 그를 힘껏 밀쳐냈다. 쫓기듯 욕실로 들어간 그는 비누의 향이 너무 강하다며 한참동안 투덜댔고, 결국 비누를 사용하지 않은 채 샤워를 마쳤다. 어쩌면 그는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조금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함께 있는 내내 우리는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댔다. 지난 밤, 샤워를 마친 그는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셔츠에 물을 뿌리고 단정하게 걸어놓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천연덕스레 잠들어 있는 그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었다. 방을 나오기 전, 화장대 위에 놓인 타이핀과 커프스버튼을 가져다 변기 속에 빠뜨리고 물을 내렸다. 그의 동창생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단숨에 삼켜버린 변기는 크릉크릉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마도 그는 사라진 타이핀과 커프스버튼 때문에 한동안 몹시 곤란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을 것이다. 간혹 단순한 몸의 문제가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므로 어쩌면 나는 그런 그가 조금쯤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래 전의 내게 그러한 사실은 분명히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흉터로 남은 일은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잊혀졌던 흉터를 확인하는 일이 괴롭긴 하겠지만 역시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엄마의 짐작대로 세 번째 저기요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째 남자의 귀가를 포기한 엄마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엄마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음식을 만들거나 권하지 않았다. 그것은 식당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과거와는 달리 최종적으로 음식의 간을 보는 일 외엔 주방 일에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엄마가 네 번째 저기요를 찾는 일까지 그만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크 전문점에서 주문한 케이크 모형은 총 열세 가지이다. 생과일주스를 비롯한 음료까지 합하면 모두 스물다섯 가지나 된다. 나는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음료를 만들 젤라틴에 첨가할 색을 결정하기 위해 색상표를 들여다보고 있다. 테스트용 물감을 풀어 샘플을 여러 개 만들어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색을 찾아내지 못했다. 가스레인지 위에선 중탕한 젤라틴이 끓고 있었다. 감색 수채물감에 흰색을 약간 섞어 젤라틴과 혼합했다. 역시 너무 들떠 있었다. 견본의 색과 별 차이는 없어 보였지만 여름 음료의 색감이 힘없이 들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심해(深海)와도 같은 색을 만들고 싶다. 한여름, 뜨겁게 달궈졌던 머리꼭지까지 서늘해질 만큼 강한 색감이어야만 한다. 완성된 샘플들을 모두 버리고 또다시 불려둔 젤라틴을 중탕했다. 건조 테이블 위에선 케이크의 틀이 천천히 굳고 있었다. 엄마는 끝내 커다란 식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사 엄마가 다섯 번째 남자를 만나, 그를 다시 커다란 식탁 앞에 앉힌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끝내 엄마가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건 엄마 몫의 삶일 뿐이다. 누구나 그렇다.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은 단순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음은 한 곳을 향해 있게 마련이고 그걸 흔들어놓을 만한 몸의 문제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불필요한 갈등은 몸의 균형마저 깨뜨리고 말 뿐이다.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거른 탓인지 비어 있던 속이 다시 저릿해졌다. 또다시 한 움큼의 약을 삼키며 엄마의 말을 돌이켜봤다. 엄마는 내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차진 속을 데워줄 음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속을 데워 줄 수 있는 것은 혀를 홀리는 음식이 아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색감의 음료모형이다. 애초부터 나는 혀를 홀리고 배를 채워주는 음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으므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밖의 것들은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진짜보다더진짜같아야한다진짜보다더진짜같아야한다진짜보다더…….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주문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저릿하던 속이 가라앉고 포근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사설] 대통령은 사과하고, 군원로는 자중하길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보면 평지풍파란 말이 꼭 들어맞는다. 안 해도 될 얘기를 해서 정치판을 흔들고, 국론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 어제는 역대 군수뇌부들이 모여 노 대통령의 ‘군대 발언’ 취소와 사과를 요구했다. 현 군통수권자와 전직 군수뇌부의 대립은 안보를 불안케 할 수 있다. 잠잠해지던 전시 작전통제권 갈등이 다시 격화할 가능성 역시 우려되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어제 국무회의 석상에서 “표현 과정에서 좀 절제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여러분 보기 미안하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미안하다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역대 군수뇌부들은 “군대에 가서 몇년씩 썩히지 말고…”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신성한 국방의무를 폄하했다고 지적했다. 또 격한 용어로 한·미동맹에 찬물을 끼얹고, 북한 미사일 사태를 오도했으며, 군원로들을 국방비 낭비의 주범으로 몰아붙인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군원로들의 개탄은 일리있는 측면이 있다. 노 대통령은 안보관과 국토방위 의무에 대한 인식을 절제된 표현으로 정리해서 밝혀야 한다. 그리고 잘못 언급했던 부분이 있으면 깨끗하게 사과함으로써 논란을 끝내야 한다. 노 대통령은 ‘군대 발언’과 달리 고건 전 총리 부분은 집요하게 따졌다. 국무회의에서도 ‘뒷모습이 좋지 않다’고 다시 고 전 총리를 비판했다. 앞으로 공격에 하나하나 대응하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모든 대권주자들이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게 불쾌할 것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일일이 반격해 정쟁의 한가운데 서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대 군수뇌부들도 자중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하야운동, 명예훼손소송 제기 주장이 나오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 노 대통령이 남은 임기를 잘 감당하도록 돕는 게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지금은 모두가 절제해야 할 시점이다.
  • “대통령이 동네북된 것도 민주주의 비용”

    # 평통 발언의 표현 해명 대통령이 할 말은 한 것 같은데, 표현 과정에서 좀 절제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이리저리 시비에 휘말린다. 여러분들 보기 미안하다. 또 이제 앉은 자리 대화체 연설을 하게 될 때는 가끔 표현이 좀 이렇게 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후보 때도 그랬고 대통령 돼도 그렇다. 변하지 못해서 탈이다. 탈인데, 변하지 않았으니까 계속 사랑해 달라.# 고건 전 총리와의 대립 고건 총리하고 자꾸 싸운다 싸운다 이렇게 보도가 되고 있고 한데, 실제로 제가 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한 것뿐이다. 지금까지도 그분을 비방하거나 비판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두 번 세 번 해명을 했는데도 전혀 미안하다는 표정이 없어서 섭섭하다는 말씀을 꼭 좀 드리고 싶다. 나는 술뿐만 아니라 사람도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대통령이 동네북이 되어 있다. 저는 이것을 제 잘못이라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을 동네북처럼 이렇게 두드리면 저도 매우 섭섭하고 때로는 분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 제 강연 자료나 연설 자료에 다 남아있지만 끝까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변호했고 국민의 정부를 변호하는 말만 그렇게 해 왔다. 재직 중에는 제가 좀 할 말을 하고 할 말 못할 말 해서 좀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지만 그만두고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무위원에게 내각, 정부라는 것은 뜻이 같아서 같이 일하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계실 때 많이 해달라. 뭐 때로는 자리를 걸고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헤어진 뒤에 우리 뒷모습을 서로 아름답게 관리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서울광장] ‘희망 격차사회’의 공포/ 황성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희망 격차사회’의 공포/ 황성기 논설위원

    격차 사회. 이달 초 일본에서 발표한 2006년 유행어 톱10에 든 말이다. 일본인이라면 올 한해 질리도록 접했을 터이다. 전 국민이 중산층이라는 자부심에 똘똘 뭉친 ‘1억 총(總)중류’ 일본이 거품경제와 붕괴의 20년을 지나면서 계층간 격차가 벌어지는 바람에 생활에서도 실감하는 일상어이다. 몇년 전 일부 학자들이 이런 현상에 주목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 일본 사회를 보는 하나의 틀이 됐다. 마이니치 신문이 연초 보도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64%가 ‘격차사회가 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나아가 71%는 ‘향후 격차사회가 확대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일본에서 자신을 ‘중의 하’층 이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6%나 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의식 면에서 일본의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음을 이 조사는 보여준다. 완만히 진행돼 온 일본의 격차사회가 5년 넘게 집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시절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글로벌화로 인해 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심화됐다는 데 이론을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고이즈미 정권을 승계한 아베 신조 총리는 ‘재도전 가능한 사회’가 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국민을 달래고 있지만 격차사회를 개선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본이 패전 후 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쳐 거품 경제가 붕괴되기 전까지는,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사회를 지향하고 그 목표를 실현했다. 그러나 거품이 붕괴해 주가와 부동산의 대폭락, 은행·기업의 줄도산에 이어 구조조정이 전 부문에서 이뤄지면서 노력하면 희망이 실현되는 사람과 노력해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으로 분명히 나뉘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이를 두고 야마다 마사히로 같은 사회학자는 ‘희망 격차사회’라고 이름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미국도 뒷모습을 들춰 보면 상위 5% 미만이 전체 부의 60%를 소유한 것이 엄혹한 현실이다. 한때 전 국민의 60∼70%가 중산층이라고 자랑하던 미국은 의료보험조차 못 드는 사람이 3억명에 가까운 인구 중 4500만명에 이른다.70년대 이후 중산층이 상당수 해체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맹국으로 따지면 미국의 빈곤층은 17.1%로 세계 2위, 일본은 15.3%로 5위이다. 일본은 아직 고용과 소득 면에서의 격차만 문제시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를 넘어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자산의 집중과 세습에 의한 격차의 확대까지 겹쳐 계층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의 길을 걷게 됐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여러 해결책이 제시됐으나 양극화가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는 양상이다. 초기의 양극화가 고용과 소득 면에서 버는 자와 못 버는 자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면 최근의 양극화는 자산, 특히 부동산을 지닌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를 크게 벌리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일본형 격차사회와 미국형 계층사회가 지닌 모순이 동시에 진행되며 양극화라는 단순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계층의 분화와 고정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한국사회학회의 의식조사에서 나타난 ‘월 소득 500만원, 자산 보유 10억원 이상’이란 중산층의 잣대는 빈곤층으로 인식하는 국민을 양산시키고 있다. 노력을 해도 희망을 갖지 못 하는 ‘희망 격차사회’의 공포가 병술년 세밑,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드라마속 기생 한복 만드는 디자이너 김혜숙

    드라마속 기생 한복 만드는 디자이너 김혜숙

    “조선시대의 패션 리더가 바로 ‘기생’이에요.” 방송 드라마 ‘황진이’가 몰고 온 새로운 문화코드가 바로 기생이다. 술과 춤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던 기생이 춤에 대한 열정과 순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영화배우 하지원의 흡인력 있는 연기, 현란한 춤과 배우들의 표정을 담아내는 감각적인 영상, 탄탄하고 밀도 있는 이야기 전개 등이 맞물려 황진이가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다. 드라마 황진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한복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우리 천의 색상, 날아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고리의 고운 선, 연꽃을 연상케 하는 치마의 화려함, 가슴에서 분리된 치마와 저고리에서 주는 섹시함과 도도함, 가녀린 상체에 풍만한 가슴을 단단히 죈 천…. 아름다움에 금세 취하고 만다. 매회 장면마다 바뀌는 황진이의 곱고 아름다운 한복. 누구나 한번쯤은 ‘저거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이 든다. ●전생이 기생이었던 디자이너 그 아름다운 황진이의 옷을 만든 이는 한복 디자이너 김혜숙(50)씨. 그녀는 “원래 저는 기생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너무 예쁘잖아요.”라며 “그녀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패션 리더들이었어요. 하루 종일 방에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어떻게 하면 좀 예뻐 보일까, 이렇게 옷을 올리면 더 섹시할까.’ 고민하며 화장을 바꾸고 옷도 고쳐 입지 않았을까요.”라고 웃는다. 아마 자신도 전생에 기생이 아니었나 싶다고 한다. 지금까지 드라마 속의 한복을 무려 500벌이나 만들었단다. 앞으로 100벌을 더 만들어 줄 예정이다. 처음 드라마를 시작할 때 제작진은 200벌 정도를 원했지만 기생에 빠져 있는 김씨가 거의 밤을 새며 만들다 보니 어느 새 500벌이 넘었다. “저는 요즘 작두를 타는 신들린 기분이에요. 그냥 밤을 새우며 만들고 그 한복이 화면에 나올 때마다 힘이 불끈 솟아요.” 그녀는 정말 황진이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보다. ●밤 새우며 만든 기녀복만 500여벌 한복을 몇백 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도대체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 시나리오를 봐야 느낌을 살린 옷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드라마 제작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몇 시간 전에 대본이 나오는 것은 예사다. 김씨는 ‘아마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올 거야. 그럼 이런 느낌으로 옷을 만들어야지.’하고 옷을 밤새 만들어 보내면 드라마 진행에 딱 맞는 한복이 된단다. “저고리와 치마도 예쁘지만 우리네 여인들의 속옷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지 아세요.”라고 반문한다. 아니, 할머니의 ‘몸뻬’바지만 보았던 기자에게는 충격이다. “옛날 기방에서 기생들이 춤을 추며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면 돈을 던져주는 퇴폐적인 문화가 성행했어요. 그래서 기생들의 속옷은 화려할 수밖에 없고 몇 개씩 겹쳐 입었어요.”라고 설명한다. 다리속곳, 속속곳, 속곳, 단속곳 등 거의 5개 이상을 입었다. 그래야 치마의 풍성함이 살아나 뒷모습이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곧 드라마에서 이런 속옷들을 볼 수 있을 거란다. ●3년간 전국 돌며 저고리 자료 모아 그는 지난해 ‘아름답고도 슬픈 이름 기생’이란 기녀복 전시회를 가질 정도로 기생에 관심이 많다.“기녀복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예요. 자료가 있다면 그저 김홍도, 신윤복의 민화에 나오는 정도가 다예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자료에 목이 말랐겠어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저고리의 변천사를 모은 ‘우리의 아름다운 저고리’란 책을 만들기 위해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는 그녀는 정말 ‘우리 옷’과 ‘기생’에 미쳐 사는 사람이다.“옷에 자신의 마음을 덧입혀야 진정 자신의 옷이 됩니다. 황진이가 되어야 황진이 옷이 빛이 난다.”고 하지원에게 얘기했다는 그녀는 기생을 사랑하는 흔치 않은 한복 디자이너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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