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히틀러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중앙대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동해안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한·중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일자리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640
  • 일 민족주의 부활을 경계한다(박화진 칼럼)

    『근대 일본사의 일관된 목표는 일본민족의 우월의식을 바탕으로한 아시아 제패였다.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아시아 연대」로,메이지 시대에는 「대아시아주의」로,그리고 쇼와 시대엔 「동아연맹­대동아 공영권」이란 모습으로 나타났다.이름만 다를뿐 그것은 일본이 지배하는 아시아 건설이었고 일본의 번영을 위한 아시아의 희생을 의미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러한 목표의 추구가 결국 2차대전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아시아인과 일본인의 희생을 가져오는 좌절의 결과를 낳았다』 일본 근대정치사를 연구하고 있는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의 「일본의 국가주의」란 저서에서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다시 8월이고 우리에게는 광복절이지만 일본에게는 패전기념일인 51번째의 「8·15」를 맞으면서 점점더 공공연해지고 노골화되고 있는 일본민족주의 부활을 상징하는 총리·각료 및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정국)신사 참배및 종군위안부 대응,극우파의 독도영유주장 한국대사관 자동차테러 그리고 계속되는 각종 망언소동 등을 보면서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음미하게 되는의미심장한 지적이 아닐수 없다. 야스쿠니(정국)신사는 무엇이며 우리와 중국등 아시아 이웃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총리를 비롯한 일부 각료·정치인들은 해마다 기어이 그곳을 참배하려드는 것인가.야스쿠니신사는 도쿄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2백50여만명의 일본전몰자 위패가 안치된 말하자면 일본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다.메이지 유신 이듬해인 1869년 「초혼사」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야스쿠니신사로 개명된 것은 그 10년 뒤로 「국사로 죽은자」를 이곳에 합사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일본총리및 각료들의 참배가 아닌가.그런데도 해마다 이웃나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고 문제가 되는것은 그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와 배후에 숨겨진 불순한 의도 때문이다. 야스쿠니신사에는 도조 히데키(동조영기)를 비롯 군국일본을 주도하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패전후 연합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단죄당한 7명의 A급전범 위패도 지난 78년부터 합사되어 있다.현직총리나 각료가이곳을 참배한다는 것은 곧 군국일본의 침략전쟁을 공인하고 그 주모자들을 추도·추앙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독일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히틀러와 나치스를 공인하고 추모·추앙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특히 48년 처형 당하기전 45년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도조는 군국주의 일본이 범한 과오와 지은 죄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사죄나 반성도 없이 다음과같은 독기어린 유서를 남긴 인물이다.『일본은 힘이 모자라 졌을 뿐이다.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하지만 영미국인 당신들은 원자탄으로 죄없는 무수한 비전투원을 죽였다.나는 이 사실을 고발하지 않을수 없다.일본국민은 힘이 모자라 졌지만 조국은 불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일본은 앞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아시아를 위한다는 구실로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을 침략했는가 하면 그를 통해 확립한 아시아패권을 지키기위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아시아에 참을수 없는 재난과 희생을 강요한 일제는 전혀 잘못이 없다는 너무도 당당하고 오만한 자세가 아닌가.그러한 그의 78년야스쿠니신사 합사는 「사실상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총리와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곧 그들 전범과 그들의 생각,그들이 이끈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참배요 공인이며 「공식사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일본총리와 각료의 끈질긴 야스쿠니신사 참배노력은 입만 열면 사죄를 하고 곧바로 망언으로 그것을 뒤집는 오늘의 일본도 결국은 지난날의 군국주의·제국주의를 내심으로는 결코 잘못된 과오로 생각지 않고 있으며 도조가 지적한 것처럼 힘이 모자랐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행동의 증거라 할수 있다.과거를 잘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다시 그러한 행동을 되풀이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동안의 모든 행동이나 정황증거로 미루어 일본은 정치·군사대국화와 새로운 아시아지배의 패권추구를 지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그것은 이제 어느 누구도 어쩔수없는 방향으로 보인다.구미의 장벽에 막혀 탈구입아로 돌아선 일본은 다시한번 아시아를 기반으로 51년전의 좌절을 설욕해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를 갖게한다.이미 중국과의 아시아 패권경쟁은 시작된 조짐이다.우리에게도 냉전시대의 자유우방은 아닌 느낌을 주고있다.일본민족주의에 희생당한 구한말의 비극을 되풀이않고 우리와 아시아의 21세기 평화와 번영을 지킬수 있기 위해 무엇보다 긴요한 것은 오로지 정확한 일본파악과 부국강병의 빈틈없는 자강노력임을 명심해야 할것이다.총리·각료 등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최근 일본이 보이고있는 변화는 그것을 일깨우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 헤스 사망 9주년 시위준비/독­신나치 충돌 우려

    【베를린 연합】 독일의 신 나치주의자들이 나치 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의 사망 9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시위를 준비하자 독일 지방정부들이 1일 시위불허를 결정,양측간 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독일의 신나치주의자들은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헤스가 사망한지 9년째인 오는 17일까지 독일 전역의 90개 지역에서 기념집회를 열겠다고 밝혀왔다.정보기관에 따르면 독일에는 약 4만6천명의 극우주의자들이 있으며 이중 2천여명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올림픽과 미국인의 애국주의/임춘웅 논설위원(서울칼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열리고 있을때 필자는 때마침 미국에 있었다.지금 선수의 이름과 종목을 기억할 수는 없으나 육상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한 미국선수를 TV에서 인터뷰하고 있었다. 국가표시도 없는 옷차림으로 인터뷰에나선 그선수에게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귀하는 시합때도 미국유니품을 입지않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그선수의 대답은 의외였다.올림픽은 국가단위의 경기가 아니다.세계의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실력을 겨루는개인간의 경기일뿐이다.왜 국가표시가 필요한가라며 사뭇 반문조였다. 극히 한국적 애국심에 불타있던 필자에게 그선수의 대답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다.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의 의식이여기까지 와있는가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8년후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때는 취재를 하러 LA에 가있었다.다저스구장에서 열리는 한국대 미국의 아마추어 야구경기를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우리교포들이 특별히 많이 몰려사는 LA인지라 응원단이 적지않이 몰려들었다.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야구장의 한부분을 차지해 「아리랑」도 부르고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도 부르며 응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가 무르익어가자 미국의 관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파도타기 응원을 계속하며 야구장을 통체로 삼킬듯 미국응원단은 열광하기 시작했다.열광이라기 보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웠다.그 기세가 어찌나 무서운지 처음에는 장난기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교포들이 놀라 응원은 차치하고 혹시 집단폭행이나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형국이 돼버렸다.태극기를 감추고 숨을 죽인채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사태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합리적이며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리만큼 국제화된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였던 것이다. LA대회는 반쪽대회였다.미국이 80년의 모스크바 대회를 보이콧한데 이어 소련도 LA대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당시 미국인들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상당한 위기감에 몰려있었다.혹시 이런 배경이 이런 람보식 「애국주의」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이런 일은 야구장만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LA대회 내내 도처에서 나타났던 현상이었다.필자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독일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히틀러에게 그토록 광분했던가를 이해할수 있을 것 같았다.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국민들도 어떤 계기만 되면 언제나 이성을 잃어버릴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했던 것이다. 이번엔 서울에 있어서 미국의 분위기를 직접 볼수는 없으나 애틀랜타 올림픽대회를 취재보도하는 미국의 언론들이 미국적 「애국주의」에 빠져 올림픽정신을 해치고 있다는 자성의 소리가 미국의 언론계 내부에서 일고있는 모양이다.그 대표적인 예가 28일 있었던 올림픽의 꽃이라 할수있는 육상 1백m 남자결승에서 캐나다 선수가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미국의 언론들은 그보다 앞서 있었던 여자1백m 경기서 겨우겨우 우승을 한 미국의 데버스선수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는 것이다.우스개 소리겠지만 미국의 한시민은 중계권사인 NBC TV에 전화를 걸어 이번 올림픽에 미국이외의 다른 나라 선수도 참가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애국주의」라는게 있게 마련이다.그러나 이제 자라나는 성장도상국가들의 「애국주의」는 애교일수 있고 그것이 국제적으로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그러나 미국같은 지도적인 강대국이 이처럼 편협한 「애국주의」에 빠지면 결과는 매우 위험해질수 있다. 테러로 얼룩지고 극도의 상업주의가 판을친 올림픽,무질서와 운영미숙으로 점철된 애틀랜타 올림픽은 인류에게 우애와 평화를 심어온 근대 올림픽정신을적지않이 훼손시킨 대회로 기록될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이 미국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세계는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것이다.
  • 체첸의 비극(박화진 칼럼)

    옛소련 남부 카스피해와 흑해사이의 회랑지역 전체를 총칭하여 카프카즈라 부른다.영어로는 코카서스라 하며 아름다운 자연과 미남미녀의 고장으로 유명하다.톨스토이가 젊은 날 사관후보생으로 이곳 주둔 러시아 기병대에 근무했던 곳이다.그때 경험을 기초로 이곳을 무대로한 코사크 기병과 체첸족간의 갈등·마찰을 그린 것이 「코사크」란 작품이다.말하자면 톨스토이문학 개안의 무대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 사람들이 말 잘 타고 용맹하며 상무정신 강하기로 유명한 코카서스 기마민족이다.백색인종을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듯 백인의 뿌리라고도 할수 있는 유서깊은 민족이다.코카서스 내륙에 위치한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의 산악지역이 옛소련 붕괴후 분리독립을 선언,압도적인 러시아군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며 지금 현재 러시아를 상대로 무차별 인질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인구 1백20만의 체첸공화국이다.회교도인 이들은 1859년 러시아제국에 병합된후 기회있을때마다 독립투쟁을 전개해 왔다. 1944년엔 독립을 위해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군에 협력한 혐의로 스탈린에 의해 당시 80만의 온민족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스탈린사후 흐루시초프의 사면으로 1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비슷한 운명의 연해주 우리 한인들처럼 이주당시 약 24만명이 기아와 추위로 사망하는 약소민족의 비극도 치렀다. 옛소련의 붕괴가 또 한차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것은 너무도 당연한 순서라 해야할 것이다.그러나 러시아도 결코 양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체첸은 지정학적으로 석유 및 천연가스 자원이 풍부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의 남쪽 관문이다.다른 공화국들에 미칠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옐친으로선 러시아민족주의와 보수세력의 눈치도 살피지 않을수 없다.결코 그냥 물러날수 없는 상황이다.그러나 힘에 의한 제압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예상대로 94년 10월 무력침공이후 끝없는 산악게릴라전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게릴라전의 불꽃은 테러전양상을 띠며 체첸밖으로,러시아 본토까지 확산되고 전쟁양상도 점점더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의 월남전」이나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재판이 될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체첸만이라면 몰라도 배후엔 석유자금이 풍부한 아랍회교권이 버티고 있다.사우디,이란 등 회교권이 러시아의 무력진압에 분노를 보이고 있으며 돈과 무기로 체첸독립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게다가 체첸족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용맹무쌍한 코카서스 민족의 하나다.그들은 러시아의 인권및 노벨상수상 작가 솔제니친이 저서 「수용소군도」에서 지적했듯이 『절대로 복종하지않는 사람들』로 유명하기도 하다.무력침공 1년이 지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그들의 굽힐줄 모르는 게릴라전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이번 인질전을 진압한다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러시아는 이길수 없으나 이겨야 하는 골치아픈 전쟁을 하고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전쟁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러시아개혁에 대한 위협요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옐친 대통령은 체첸무력개입으로 내외의 인기가 폭락했다.무력개입이 예상했던대로 아프가니스탄개입때 처럼 장기 게릴라전화하고 희생이 늘어남에따라 옐친의 입지는 점점더 어려워지고 있다.작년 12월 러시아의회 총선에서의 옛공산당세력 복귀 및 극우민족주의 세력 급부상에는 체첸무력침공도 크게 한 몫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많은 희생자를 낸 인질사태와 무자비한 무력진압은 오는 6월 대통령선거에서 옐친 또는 개혁후보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결과적으로 그것이 미국 및 서방세계는 물론,우리와 러시아의 관계 및 탈냉전의 국제정치 분위기에 미칠 파장이 우려된다.
  • 아테너서 애틀랜타까지/올림픽 100돌 성화 타오른다

    ◎1896년 첫 대회… 13개국 311명 참가/31년 LA­상업주의 적중 “대성공”… 선수촌 처음 등장/72년 뮌헨­아랍테러단 「이」 숙소 기습… 선수 9명 사망/88년 서울­개도국서 첫 개최… 159국 참가 “화합구현” 아테네에서 애틀랜타까지 1백년.오는 7월19일 미국 남부도시 애틀랜타에서 개막되는 제26회 올림픽을 계기로 근대올림픽이 1백주년을 맞는다.「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남작의 올림픽부활운동이 열매를 맺으면서 1896년 고대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13개국 3백11명의 선수들이 제1회 대회를 연지 한 세기가 흐른 것이다.그동안 올림픽은 질적·양적으로 수많은 변천을 거쳤다.그 과정을 간추려보고 올림픽의 의의 및 앞으로의 과제 등을 살펴본다. ▷약사◁ 기원 3천여년전 그리스 제우스신전 근처 계곡에 있는 올림피아에서는 4년마다 한차례씩 헤라클레스 축제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렸다.달리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그리고 레슬링이었다.이 행사는 아테네 스파르타 마케도니아의 끊임없는 전쟁속에서도 10세기 이상지속되었다. 기록된 최초의 올림픽경기는 기원전 776년으로 서기 394년에 이르기까지 1천2백년 이상 이어졌다.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고 있던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정신에 어긋나는 이교도 의식이라며 올림픽을 폐지시켜 이후 근대올림픽이 부활되기까지 15세기 동안 자취를 감춘다. 1880년대 들어 쿠베르탱남작이 부활운동을 펼치면서 드디어 1896년 첫 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모두 10개 종목에 44개 금메달이 걸린 이 대회에서는 미국이 1위를 차지했고 그리스와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16·40·44년대회 취소 이후 미국 세인트루이스,런던,스웨덴 스톡홀름 대회를 거친 올림픽은 1916년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개최국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취소되고 만다.이때부터 올림픽의 정치오염이 본격화된다. 제7회 대회는 1920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렸는데 1차대전동안 벨기에 사람들이 겪었던 슬픔을 달래주는 대회였다.반면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파리와 암스테르담을 거친 올림픽은 32년 유럽대륙을 떠나 미국 LA로 옮겨간다.이 대회는 미국의 상업주의가 적중해 대성공을 거뒀다.처음으로 선수촌이 등장했고 거의 매일 6만명 이상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4년 뒤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올림픽은 나치의 들러리 역할로 전락했다.독일 베를린대회 주변에는 나치의 숨막히는 분위기가 감돌았고 결국은 40년 대회와 44년 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고 만다. 52년 헬싱키대회에는 볼셰비키혁명 이래 수십년동안 올림픽을 인정치 않던 소련이 마침내 대선수단을 이끌고 등장,동·서냉전시대에서의 미국·소련 초강대국 대결을 시작한다. 이후 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까지 11차례의 올림픽에서 미국은 4차례,소련은 7차례 1위를 차지했다. 올림픽은 56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돼 다시 한번 대륙간 이동을 했고 64년 일본 도쿄로 넘어갔다.도쿄대회는 패전국 일본의 부흥을 꾀하는 기폭제가 됐다. 68년 멕시코대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아프리카국가들의 보이콧위협,학생시위,시상식에서의 흑인시위 등 정치오염이 심각했다.시위폭동으로 2백60여명이 사망했다. ○올림픽정신 상처입어 72년 뮌헨대회에서는 9월5일 아침,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정신이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아랍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숙소를 기습,선수 9명과 테러리스트 2명,경찰 1명이 사망했고 올림픽은 34시간 중단됐으며 메인스타디움에서는 추모식이 열렸다.이때부터 올림픽의 슬픈 역사가 거듭된다. 76년 몬트리올대회는 뉴질랜드럭비팀의 남아공 여행을 꼬투리잡은 아프리카국가들의 보이콧으로 얼룩졌고 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64개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쪽대회로 전락했다. 84년 LA대회 역시 소련등 동구권의 보복불참으로 반쪽대회였다.한국은 이 대회에서 종합10위를 차지한 뒤 88년 서울대회 4위,92년 바르셀로나대회 7위 등으로 기염을 토해 올림픽강국으로 떠오른다. 서울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온세상에 자랑하면서 상처투성이의 올림픽을 되살려 놓았다.동·서 양진영 1백59개국이 참가해 「화합올림픽」을 구현했고 그동안 선진국이 독점했던 올림픽개최를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대성공으로 마무리했다.단일민족 북한의 불참이 「옥의 티」였다. 서울대회는 초강대국 소련과 스포츠강국 동독의 올림픽 고별무대였다.이후 지구상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나 독일통일이 이뤄지고 소련이 붕괴됐으며 동구권 전체가 몰락했다. ○소련·동독의 고별무대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옛 소련 국가들은 EUN이라는 어정쩡한 단일팀으로 참가했다.동독은 참가대상에 존재하지 않았다.EUN은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해 소련붕괴의 긴 여운을 남겼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경쟁상대를 잃은,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안마당이 될 것이다. 근대 올림픽이 19세기에서 21세기로 3세기를 옮겨가는 길목인 2000년 대회를 놓고는 중국 북경과 호주 시드니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 시드니로 돌아갔다.12억의 중국인들은 그들이 「천하의 중심」,즉 「중화민족」임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 땅을 쳤으며 2백5년전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호주땅을 밟은 곳이기도 한 시드니는 흥분의 도가니를 이뤘다. ◎의의·과제/세계평화·국제친선 구현 “이바지”/인간능력 한계 넓히는데도 도움/정치오염·상업주의 극복이 과제 올림픽헌장은 첫 머리에 올림픽의 본질과 목적을 내세우고 있다.즉 ▲육체적·도덕적 자질의 향상 ▲세계평화의 추구 ▲국제친선 등이 골자이다.올림픽은 1백년의 역사를 누리면서 이같은 올림픽정신을 구현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인종과 언어와 풍습·국적·민족·문화를 뛰어넘는 인류의 대제전으로 발전했다.인간 능력의 한계를 넓히는데에도 공헌을 해 인류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올림픽정신이 퇴색하고 있다.정치오염과 상업주의가 스포츠정신을 퇴색시키고 있다.금메달은 「돈방석」과 직결되고 있으며 대회 행사 자체도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치러진다. TV독점중계는 올림픽을 TV의 「시녀」로 전락시켰으며 공식후원업체의 횡포 역시 심각하다. 아마추어리즘도 프로페셔널리즘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테니스 축구 농구를 시발로 프로선수들의 출전은 현대올림픽이 종착을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뿐만아니라 옛 소련·동독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 중국,그리고 일부 권위주의국가에서 보여준 국가관리체육정책은 자본주의의 프로페셔널리즘 못지 않게 올림픽을 오염시켰다. 약물복용의 폐해 또한 심각하다.근육강화제 흥분제 진정제 호르몬제 등의 복용은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추구하는 올림픽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과 각국 스포츠지도자들의 「스포츠귀족화」 역시 올림픽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일반대중의 평등을 추구하는 올림픽에서 이들은 이미 스포츠 특권층으로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향유해 올림픽의 이질감을 부추기고 있다. 과대망상에 가까운 민족주의·국가주의 역시 장애요인이다. 전문가들은 21세기에는 다시 한번 「올림픽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WP지 1000∼1995년 분야별 「최고」 선정

    ◎가장 위대한 인물 칭기즈칸/그림­시스틴성당 천장벽화/발명­인쇄술/여배우­그레타 가르보/천재­셰익스피어 서기 1000년부터 1995년의 인류 두번째 「1천년」기간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몽고의 칭기즈칸(1112∼1227년)이 뽑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지난 송년호를 통해 2000년대 진입을 앞두고 아직 5년이 남아있는 서기 두번째 1천년 인류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대상 및 부분별 「최고」인물과 사건·작품들을 선정,특집기사로 소개했다. ▲대상=칭기즈칸(몽고).현대의 「지구촌」에 버금가는 동서양 연결의 대제국을 7백년전에 「실제로」 건설했다.컴퓨터통신망 인터넷이 발명되기 전에 광범위한 통신망을 구축했고 또 관세 및 무역 일반협정(가트) 못지않는 자유무역지대를 이루었다. ▲가장 위대한 책=새무얼 존슨(1709∼1784년·영국)의 영어사전.혼자서 9년만에 만들어낸 이 사전으로 인해 영어가 세계어로 발돋움하는 기초를 이루었다. ▲가장 위대한 그림=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틴성당의 천장벽화. ▲가장 위대한 발명=구텐베르그의 활자 인쇄술. ▲최고 여배우=그레타 가르보(1905∼1990년·미국).얼굴표정 하나로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세계 곳곳에 전달했다.한편 최고 남자배우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인 토끼 「버니」. ▲최고의 천재=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영국).「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단 한줄의 토와 함께 선정됐다. ▲가장 좋았던 시절과 장소=화가 티시언이 활약했던 1500년대의 베니스. 이밖에 인류 최악의 업을 남긴 인물로 히틀러,폴 포트 그리고 칭기즈칸,스탈린등 대학살자와 진화론을 통해 인종우열론을 이끌어낸 다윈이 거명됐다.
  • 세계에 가장 큰 영향끼친 사람/레닌­아인슈타인­쇤베르크순

    ◎김정환씨,「20세기를 만든 사람들」 눈길/각분야 120여명 삶 소개한 인물평전 20세기를 이끌어 온 정신은 무엇인가.21세기를 코앞에 두고 인물 중심으로 지난 한세기를 평가한 책이 나왔다.시인이자 소설가,평론가인 김정환씨가 최근 낸 「20세기를 만든 사람들」(푸른숲 출간)이 그것. 이 책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각 분야 인물 1백20여명의 삶을 소개함으로써 현대사 흐름을 되짚어 보았다. 인물평전 모음이라는 단순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남달리 눈에 띄는 까닭은 독특한 역사관을 담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등장인물들의 영향력에 따라 1위부터 74위까지 순위를 매겼다.객관성이 있느냐는 둘째치고 이같은 방법은 지은이의 지향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첫손가락에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을 꼽은데 이어 2위에 특수상 대성이론을 개발한 아인슈타인,3위에 12음계를 창시한 작곡가 쇤베르크를 선정했다.나머지 10위까지는 간디(비폭력운동 제창)­프랭클린 루즈벨트(미국 대통령)­스탈린(소련 지도자)­히틀러(나치 지도자)­처칠(영국수상)­카프카(「변신」의 작가)­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의 순이다. 이 가운데 현대음악의 막을 연 쇤베르크는 『그가 도입한 음악세계의 혁명이 다른 온갖 정치·사회적 혁명보다 더욱 근본적이기 때문』에 뽑혔다.히틀러에 대해서는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세계사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놓은」영향력을 높이 샀다.자본주의 세계는 히틀러를 통해 스스로 추한 모습을 깨달았고,덕분에 「겉모습이 추한」자본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평가이다. 지은이는 또 문화·예술계 인물들을 20세기 주역으로 대거 등장시켰다.제임스 조이스(작가),조르주 브라크(화가),바슬라프 니진스키(무용가),잉그마르 베르히만(영화감독),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들이 20위 안에 들었다.대중의 우상인 마릴린 먼로,비틀스,엘비스 프레슬리,스티븐 스필버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지은이는 21세기를 바라보며 『정치·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정치·이데올로기 또는 유토피아 전망은 뼈아픈 실패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 그는 예술이 21세기를 이끌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 「반인류 범죄」 처벌에 시효없다/과거청산 외국선 어떻게 했나

    ◎유럽/나치전범 86년까지 6,479명 단죄­독일/2차대전 유태인 학살 투비에 종신형­프랑스 집단학살등의 반인류 범죄를 처벌하는데는 시한이 없다.특히 2차대전당시 인류를 학살하고 괴롭힌 전범들에 대해서는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계 곳곳에서 단죄를 받고 있다. 반인류범 처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미·영·불·소 등 4개국이 2차대전 전범자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지난 45년 11월20일 개설한 이 특별법정은 지난 20일로 개설 50주년을 맞았다. 뉘른베르크법정이 열리자 히틀러의 측근인 헤스를 비롯해 24명의 나치 지도급인사를 처벌됐으며 46년 10월1일까지 1년 가까이 4백8명의 전범들이 법정에 서야만 했다. 독일은 특히 56년부터 루드스비히에 나치전범연구소를 세워 전쟁자료를 추적,구체적 죄목을 입증해 전범을 꾸준히 처벌해왔다.이에따라 86년까지 모두 6천4백79명이 날카로운 법의 심판을 받았고 이중 12명이 사형이 선고됐고 1백60명은 종신형,나머지 6천1백9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7천5백명 정도의 나치전범이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등지에 불안에 떨면서 숨어지내고 있다.그러나 이들을 찾아내 처벌하려는 노력은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어 시한이 걸리기는 해도 법의 심판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유엔은 반인류범을 집단학살은 물론이고 정치·종교·인종적인 이유에서 학대하거나 약탈행위·암살·포로나 인질을 괴롭히는 등의 행위로 규정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도 이같은 반인류범을 시한없이 끝까지 추적하고 있다.프랑스는 64년12월 반인류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치 않는다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지난해엔 형법을 개정해 집단학살범에 대해서는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폴 투비에.투비에는 리옹 등지에서 나치 비밀경찰에 협조해 유태인 추방과 학살등에 관여한 혐의로 45년9월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잠적해 버렸다.사면을 받는 등 우역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89년 붙잡혀 지난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 유태인 어린이50여명을 학살한 클라우스 바르비도 반인류적인 행위자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리옹지역의 게슈타포 지휘자였던 바르비는 52년 궐석재판을 받았다가 지난 83년 붙잡혀 4년뒤 종신형을 받았다. 스페인도 15년 동안의 작업 끝에 최근 인권 학대 등에 대해서는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뉘른베르크 특별법정 이후에도 반인류범을 처벌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유엔은 93년 결의안 808조에 따라 유고내전에 대한 특별법정을 헤이그에 설치,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을 처벌하고 있다.또 르완다내전에 대한 국제법정이 지난해 탄자니아의 아루샤에 설치돼 집단학살의 책임자들에 단죄를 가하고 있다. 이런 법정들은 특정사안을 다루는 특별법정이지만 항구적인 법정도 있다.유엔 사법재판소는 45년 헤이그에 설치된 항구법정이고 유럽연합(EU)은 51년 룩셈부르크에 사법재판소를 두고 있다.EU는 이것도 모자라 59년 스트라스부르에 인권법정을 마련해 반인류범에 대한 강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회,67년 군부행위 쿠데타 규정 특별재판서 주모자들 무죄징역 그리스의 쿠데타주모자 처벌은 비교적 순조롭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2차대전 종전과 함께 부활된 왕정을 무너뜨리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것은 67년.쿠데타 주역은 예오리오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영관급장교 24명.이들은 콘스탄틴 2세를 폐위시킨 뒤 68년 독재헌법을 마련,7년간의 군사정권이 계속됐다. 74년 키프로스사태가 군사정권 몰락에 크게 작용했다.키프로스공화국내 터키계 주민과 그리스계 주민 사이에 주도권 쟁탈을 놓고 벌어진 유혈사태에 그리스군을 파병하기 위해 군정실권자들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그동안의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일부 군장성과 민간정치인들도 합세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명목상 군정대통령을 맡고 있던 기지키스 장군이 7월22일 야당지도자들과 민선 이양에 합의했다.당황한 군정측은 군대를 동원,아테네시를 포위하는 무력위협에 나섰고 시내 의사당 앞에 군정에 반대하는 수십만 시민이 모여 일촉즉발의 대치상태를 연출했다.결국 대세에 굴복한 군정측이 3일만에 손을 들었고 7월24일 파리에 망명했던 야당지도자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금의환양했다. 그해 11월 총리직에 오른 카라만리스는 곧바로 67년 쿠데타주역들을 재판에 회부했다.75년초 의회는 67년 군부행위를 쿠데타로 규정하는 결의안 채택과 함께 특별법을 제정했다.군정기간중 60여명이 독재에 항거하다 숨졌고 수천명이 부상당했음이 재판을 통해 밝혀졌다.같은해 8월 끝난 특별재판에서 쿠데타주모자인 파파도풀로스와 마카레조스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여타 주모자들에게 최고 사형에서 최하 2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이후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쿠데타주역들은 지금도 복역중이다. ◎남미/쿠데타 집권 전대통령 등 법정에­아르헨/인권탄압자 사면조건 범죄고백 받아­칠레 ▷아르헨티나◁ 76년4월 이자벨리타 페론 대통령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라울 알폰신 민선대통령이 취임하는 83년12월에 이르기까지 최소 1만3천여명의 동족을 좌파타도의 슬로건 아래 납치·살해(실종 9천여명 포함)했다.알폰신 대통령은 취임 즉시 군 최고지도층 절반을 은퇴시키는 군개혁을 실시한 뒤 군부가 민정이양 4개월전 제정한 과거 10년간 군·경의 정치범죄에 대한 소급 사면법을 폐기,쿠데타주도의 혁명평의회 장군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쿠데타 장군들의 재판은 85년4월 시작돼 12월 혁명후 첫대통령 비델라 장군과 마세라 제독(종신형) 등 5명이 형을 받았고 4명은 석방됐다.포클랜드전쟁(82년) 당시의 갈티에리 대통령 등 3인혁명위원에 대한 재판은 따로 열려 갈티에리는 12년형을 받았다.그러나 알폰신정부는 87년 부분사면법을 통과시켜 인권침해 혐의로 기소된 3백70명의 군·경중 40명의 고위직을 제외한 나머지를 석방했다. 89년7월 취임한 카를로스 메넴 새 대통령은 이전 페론당으로서 군부에게 학대를 받기도 했지만 군부집권시의 좌파대상 「추악한 전쟁」이나 민정 이후 쿠데타기도에 연루된 2백10명의 장교·하사관들을 89년10월 사면했다.그리고 90년12월 2차 대통령사면령을 통해 군부정권 1,2번째 대통령인 비델라,비올라 장군및 마세라제독 등 군부지도자들을 「국민화합」을 이유로 석방했다. 당시 「추악한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 두명이 올 2월과 4월에 약물에 마취된 좌파인사들을 비행기에서 바다로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고 최초로 고백하기도 했으나 1만여 동포살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칠레◁ 세계최초의 민선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아옌데를 살해하고 73년9월 정권을 잡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국민투표 신임미달(43%)로 90년3월 파트리시오 아일윈 민선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했으나 자신이 오는 97년까지 육군참모총장에 재직할 수 있도록 했다.앞서 군부는 80년 헌법개정을 통해 자신들의 73∼78년 좌파대상 정치범죄를 일괄사면시켰으며 민정이양하면서 상원의 5분의1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졌다. 지난 17년간의 군부독재 아래서 자행된 인권탄압 범죄를 법적으로 처리할 힘이 부족한 민선정부는 90년4월 「진실과 화해 전국위원회」를 구성,가해자에게 사면을 조건으로 범죄고백을 받고,모든 피해를 확인·적시하는 문서작성에 들어갔다.91년3월 아일윈대통령은 2천2백79명의 정치박해 사망자에 관한 1천쪽 분량의 보고서 완성을 TV방송을 통해 발표하면서 「국민화합」을 강조했다.여기서 피해자는 인적사항을 명확히 기록했으나 가해자는 이름 대신 소속기관을 거명하는데 그쳤다.칠레의 이같은 과거청산 방식은 동유럽,남미,남아공 등 14개국이 모방하는 세계적 모델로 예시되곤 한다. 한편 76년 미 워싱턴에서 전외무장관을 살해한 범죄는 군부의 사면법에서도 제외되었는데 92년11월 장기조사 결과 군부의 정치탄압 실행기관인 국가정보국 소행으로 밝혀졌고 당시 국장인 콘트레라스 퇴임장군과 참모장 에스피노사 현준장은 각각 7,6년형을 선고받았다.이 선고는 올 5월 최고법원에서 확정되었지만 피노체트 장군과 장교들은 콘트레라스 장군을 해군병원으로 피신시켜 에스피노사 준장만 현재 수감중이다. ◎남아공/「진실 및 화합을 위한 위원회」 창설/과거 인종차별 범죄행위 조사키로 지난 7월20일 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은 「진실및 화합을 위한 위원회」를 창설한다는 법안에 서명했다.만델라는 이 위원회가 흑백 인종차별 정책 아래 저질러진 숱한 인권탄압 등 국가의 주도 아래 벌어진 범죄들을 조사·단죄하기 위해 창설되며 창설 후 18개월간의 한시적 활동을 통해 인종차별 정책 아래 저질러진 모든 범죄행위들을 철저히 조사,남아공의 어두운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공국민들은 대부분 이 위원회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인종차별정책에 따른 피해가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현재 남아공의 연정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나 국민당도 모두 겉으로는 이 위원회의 취지에 찬성하고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이들 정치인들이 이 위원회의 활동을 전폭 지지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과거의 범죄행위들이 정말로 철저히 파헤쳐지면 과거의 백인 소수정부를 이끌었던 데 클레르크 부통령의 국민당측은 물론 만델라 대통령의 ANC측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일부 관측통들은과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가져올 정치적 대가가 도덕적인 사기 앙양에 비해 훨씬 클 것이라며 과거의 범죄행위가 어디까지 파헤쳐질 수 있을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범죄가 밝혀지더라도 처벌에 있어 어떤 예외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만델라 대통령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며 과거의 범죄행위를 밝혀내는데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 “일 제국주의 환상 못버렸다”/독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 보도

    ◎경제대국 되자 “한반도 식민지배 정당” 망언/「미군 성폭행」 분노하면서 정신대문제는 발뺌 일본지도자들의 계속 반복되는 망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시대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고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가 15일 보도했다.다음은 「적대감을 조성하는 일본인들」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 요약이다. 지난 6개월 사이 벌써 3명의 일본각료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에토 다카미(강등륭미)전총무청장관도 그중의 한명이다.그는 일본의 한반도강점이 한반도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도 했다는 발언을 했다가 한국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사임했다. 그러나 일본 우파언론과 자민당내 우파세력은 한국측의 민감한 반응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며 에토장관의 입장을 두둔했다.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경제적으로 강대해진 일본이 아직까지도 제국주의시대에 가졌던 강대국으로서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국교정상화에 성공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국교정상화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지난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당시 총리가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에 대해 사과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일 때 일본내에서는 그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지난 8월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종전 50주년을 맞아 다시한번 일본의 침략전쟁을 사과할 때도 연정파트너인 자민당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그이후 한·일관계는 다시 냉각상태로 회귀하고 있다. 한·일관계의 긴장이 고조되던 중 에토장관이 사임했다.그의 사임으로 김영삼대통령은 일본의 오사카(대판)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할 것이며 무라야마총리와의 정상회담도 예정대로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하지만 양국간에 우호적이고 신뢰적인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고 있다. 한·일 양국은 지금 한·일합방의 합법성과 한반도분할에 대한 책임소재를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무라야마총리는 1910년에 체결된 한·일합방조약은 당시로서는 합법적인 조약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역사가들은(일본인을 포함) 당시의 조약이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다. 오늘날 당시의 한·일합방조약이 한국민의 이익을 위해 체결된 합법적인 조약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2차대전때 히틀러가 프랑스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비시 꼭두각시정권과 체결한 조약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역사의 왜곡이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기간에 한반도에는 학교·철도·항만등이 건설되었으나 한국인은 강제노동과 강제징집,그리고 한국여성은 정신대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지배는 결국 한반도의 분할을 가져왔다.한반도분할에 일본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무라야마총리도 시인했으나 일본내의 폭발적인 분노의 비판으로 곧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다. 일본열도는 최근 주일미군의 국민학생 성폭행사건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다.그러나 일본내 어느 언론도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정부가 7만여명의 한국인 정신대여성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해온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 흑인 50만 “대행진”/워싱턴 광장서 밤늦게까지 계속

    ◎콜린 파월 포함 흑인정치인 불참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흑인들의 각성과 화합을 촉구하고 결속을 과시하기 위해 마련된 「백만 흑인남성 대행진」이 16일 새벽(한국시간 16일 하오) 워싱턴 몰광장에서 시작돼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흑인 분리주의를 제창하는 강경 흑인회교지도자인 루이스 패러칸(62)이 주도한 이날 대행진에는 미전역에서 모여든 흑인남성 50여만명이 참가,최근 고조되고 있는 백인들에 의한 흑인 차별을 규탄하고 흑인들의 단합을 촉구했다. 이날 새벽까지 비행기 혹은 밤새 버스와 기차를 타고 도착한 참가자들은 몰광장 동쪽의 의사당 앞에 마련된 연단을 중심으로 워싱턴기념탑에 이르기까지 2㎞의 잔디광장에 모여들었으며 상오 5시 기도회를 시작으로 행사의 막이 올랐다.이어서 6시에는 초교파적인 에큐메니칼 기도회가 계속됐으며 본행사는 상오 11시부터 하오 4시까지 이어졌고,본행사가 끝난 후에도 밤9시까지 식후행사가 계속됐다. 이날 본행사는 패러칸과 대회 사무총장을 맞은 벤자민 채비스 목사에 의해 진행됐으며 패러칸은『흑인의 자립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이날을 「흑인 속죄와 화합의 날」로 선포했다. 이날 행사에는 제시 잭슨 목사를 비롯 매리온 배리 워싱턴시장,대니스 아처 디트로이트시장 등 많은 흑인지도자들이 참석했다.그러나 콜린 파월 전합참의장,존 루이스,J.C.와츠,게리 프랭크스 하원의원 등 흑인정치인들과 NAACP(흑인지위향상협회),인종평등회의,전국도시연맹 등 패러칸과 큰 견해 차이를 보내온 단체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던 O.J.심슨의 변호사 자니 코크란도 참석하지 않았다. ◎워싱턴 대행진 흑인 연대 일단성공/“복지축소 등 인종차별” 감정에 호소 주효/“화합보다 흑백·흑흑분열상 부각” 비판도 「화합이냐 분열이냐」의 우려 속에 강행된 「1백만 흑인남성 대행진」은 당초의 목적인 미흑인사회의 화합보다는 흑인간·흑백간의 분열을 더욱 부각시킨 채 막을 내렸다. 이번 대행진은 당초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의 암살 이후 내부 분열로 인해 세력이 크게 약화된 흑인들의 결집을 위해 수년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으나 새해들어 공화당 다수의회에 의해 소수민족에게 불리한 각종 법안의 통과와 최근 O.J.심슨 재판과정에서 불거져나온 인종차별 문제 등으로 형성된 흑인들의 폭넓은 공감대에 편승,극적인 효과를 연출해냈다. 특히 각종 복지정책의 축소로 흑인들이 생활에의 위협을 느끼게 된 상황에다 10대 흑인청소년의 3분의1이 전과자라는 최근 통계에서 뒷받침되듯 흑인들을 범죄집단시 하는 백인사회의 보편적 풍조마저 겹쳐 흑인들의 불만이 최고조로 높아진 상태에서 이번 행진은 열렸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흑인 회교단체 「이슬람나라」(Nation of Islam)의 루이스 패러칸 회장은 흑인들의 감성에 호소,연대를 이뤄내는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강경한 입장의 철저한 반유태주의자로 백인과 타인종에서는 물론 흑인사회 내에서도 대부분의 지도자들로부터 외면받는 처지의 그가 이번에 형성된 흑인들의 연대를 타인종과의 화합을 통한 지위 향상으로 끌어갈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백인중에서도 미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유태인들을 「흡혈귀」라고 원색적 공격을 가했으며 유태교를 「더러운 종교」,유태인을 무차별 학살한 히틀러를 위대한 사람으로 공공연히 칭했다.또한 『유태인들이 떠나간 자리에 들어오는 팔레스타인인,한국인,베트남인들도 흡혈귀』라며 타인종들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또 흑인사회 내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75년 말콤 X의 후계자인 엘리자 무하마드가 죽은 뒤 독자 세력을 키워온 그는 과격성 때문에 폭넓게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우선 가장 큰 흑인단체인 NAACP(흑인지위향상협회)가 이번 대행진 행사에 불참했으며 대부분의 흑인지도자들도 참석을 꺼렸다. 따라서 참석자는 많을지라도 지난 63년 『나는 꿈을 갖고 있다』는 연설로 흑인 뿐아니라 전미국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주도의 흑인 대행진에는 훨씬 못미치는 집회가 됐으며 결과적으로 미흑인사회의 내부 갈등만 더욱 심화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번 대행진에서 확인된 흑인들의 연대의식 만으로도 20여년간 사실상 공백상태에 있던 흑인사회의지도력 복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이번 행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 “지구촌 민족분쟁 비관할때 아니다”/메이네즈(해외논단)

    ◎냉전때보다 잔인성 덜하고 열강 패권의도 없어 냉전 종식과 더불어 고개를 내밀던 지구촌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민족분쟁등으로 어느새 많이 퇴색해지고 있는게 사실이다.하지만 미국의 계간 외교정책전문지 「포린 팔리시」의 총편집인인 찰스 윌리엄 메이네즈씨는 이 잡지 최근호에서 「비관할 때가 아니다」라는 글을 통해 이같은 비관적 태도와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그의 글을 소개한다. 많은 머리좋은 학자들이 미래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강력 표명하고 있다.로버트 카플란은 평화도 법도 없는 무정부의 세계를 전망하고 있고 매슈 코넬리와 폴 케네디는 이민과 인구동태를 바탕으로 이같은 무정부상태를 미국에 국한해 전개하는가 하면 새무엘 헌팅턴은 중국·동양의 황화와 회교과격주의에 대한 서양의 내재된 공포를 증대시켰다.존 미어스하이머에 따르면 냉전이후 국제관계가 한층 불안해져 유럽 주요국들이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냉전이 더 낫다는 생각이 강해진다는 것이다.그들의 생각이 옳은가. 물론 이런 사상가들은 시대를 이끈다기 보다는 세태를 반영한다.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보수적인 시대를 거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비관주의는 잘 살거나 정치적 현상유지를 바라는 계층이 선택하는 정조이다.비관주의는 자포자기할 수 밖에 없는 못 사는 사람들의 곤궁에 대한 상류계급들의 수동성을 정당화해준다.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대신 식량증가는 산술적으로 밖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맬더스나 자기외에는 만인이 모두 적이라는 홉스 등이 가장 고전적인 예라 할 수 있다.여기에다 어떤 것을 덧붙일까. 94년 유엔개발계획은 인간개발보고서에서 89년부터 92년까지 모두 82건의 분쟁이 터졌다고 밝히고있다.세계1,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에 비하면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중 79건이 내전 성격의 분쟁으로 수천명이 죽었다.비슷한 분쟁이 발발할 소지는 수없이 많은데 이를 방지할 대책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상황이 심난한 사고덩이로 보이는 것은 우리들의 기대치가 높은 탓도 무시 못한다.지나간 냉전을 너무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탈냉전과함께 갈등을 억누를 수 있었던 두 동맹체제가 사라진 연유로 새 민족분쟁들이 속출한다고 설명하는 정치학자들이 많다.그러나 실은 냉전은 지금 시기보다 훨씬 폭력적이었다.냉전기간 동안 두 초강국은 세계 이곳저곳에서 참혹한 대리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편리하게도 망각해버린다.3백만 이상이 한국전에서 죽었으며 베트남전에서는 2백만명 이상이,아프가니스탄에선 1백만명이 죽었다. 이 숫자에 중국내전으로 죽은 수천만명,지난 65년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산주의 소탕작전 희생자 30만명,중앙아메리카 여러나라의 내전과 중동지역 국가간 전쟁으로 죽은 수십만명,전쟁과 정부의 고의적 방치로 남부아프리카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수십만명 등이 보태져야 한다. 이들 숫자들을 배경으로 하면 지금의 세계는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인다.보스니아 같은 곳에서 잔인한 분쟁이 계속되고 르완다에서 말 그대로의 종족대학살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같은 종족갈등은 냉전의 대리전이 보여준 조직적인 잔인성에는 못 미친다. 냉전의 종식으로 잠재한 종족갈등을 가리고있던 담요짝이 들춰내졌지만 또 모든 인류의 머리 위를 감싸고 있던 공포의 먹구름도 걷혀졌다.더 이상 인간을 흔적없이 휩쓸어갈 청천벽력의 원자 천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예전의 백만명대 희생자 시대에 비해 현재의 숫자는 수만,수십만명에 그친다. 물론 쓸데없는 헛된 죽음은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최근래에 우리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대가 겪어야만 했던 끈질긴 살육전을 보지 않아도 된다.보스니아전은 처절한 비극이나 희생자 수는 중앙아메리카나 레바논에서 보다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또 앙골라와 수단 전쟁은 공포스러운 것이지만 현대전쟁의 사나움과 사정없음은 결여되어 있다. 우리에게 또 다행스러운 점은 전쟁승리의 과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전쟁은 잘하면 이문이 남는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왔다.그러나 아프가니스탄,캄보디아,이스라엘 점령지역 등이 예시하듯 요즘 전쟁은 이겨도 별로 큰 이득이 없다.이해다툼 전쟁이 최근 아주 드물어진 이유를 알수 있다. 패권주의 강국의 시대는 지났다.과거의 헤게모니 다툼은 이데올로기와 세력숭배에서 기인되었지만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설파했듯 적어도 예측가능한 미래에는 이데올로기는 죽은 신세다.세계를 휘어잡으려는 헤게모니 추진력을 주는 이데올로기를 찾기가 어렵다.한창 맹위를 떨치는 이슬람은 공격보다는 방어의 신조다.세력 숭배도 한물 갔다.특히 아시아에서 힘은 내부적 발전에서 오지 외부적 팽창에서 오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성공적 정권이 증명했다.예를 들어 중국은 베트남 필리핀 등과 함께 스프래틀리군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이 이 섬들을 힘으로 차지한다고 해서 중국의 아시아대정벌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사람은 소수다. 많은 시사평론가들은 세르비아를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히틀러 제3제국의 현대판으로 저주한다.분명 세르비아의 여러 행위들은 발칸반도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버렸지만 그렇다고 세르비아가 한때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 전체의 안보를 뒤흔들고 있는것은 아니다.독일의 침략행위는 단지 모든 독일인을 제3제국이란 한 국가에다 결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력숭배의염을 안고 이 강력한 제국을 이용해 유럽전체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날 표면적으론 더 많은 동란이 불거져 나오고 있지만 강대국중 어느 한 나라도 헤게모니를 움켜쥔 패자가 되고자 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국제간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아주 건전하다고 할수 있다.
  • “러시아 제쳐놓고 「유고 해결」 어렵다”(지구촌 칼럼)

    공산주의 시절 소련국민들은 유고를 지상낙원으로 생각했다.유고도 소련처럼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였다.하지만 그들은 소련과는 달리 상점에 물건이 가득했고 높은 임금,자유로운 해외여행의 자유를 누렸으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했고 서방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많은 소련사람들은 유고가 추구하는 길이 본받아야할 유일한 사회주의라고 말했다.제일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바로 유고였고 외교관들은 유고근무를 평생의 꿈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이 지상천국 유고가 생지옥으로 변했다.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련사람들은 말못할 충격을 받았다.그곳에서 진행되는 전화의 불똥이 언제 발칸반도를 넘어 옛소련영토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 충격은 증폭됐다.연방국가였던 유고의 시나리오처럼 옛소련도 언제 전장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많은 러시아인들의 뇌리를 짓눌렀다. 러시아가 이 발칸반도의 화약고에 깊은 관심을 갖는 또다른 이유는 러시아의 강대국 야망 때문이다.러시아정부는 미국,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유고문제해결에서 러시아를 동등한 논의 파트너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믿는다.최근에도 나토는 사라예보 인근 세르비아계 거점에 대한 공습을 결정하면서 러시아와 사전협의를 하지 않았다.옐친행정부는 서방이 러시아의 입장과 이해를 전혀 고려치 않고 공습을 결정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옐친대통령의 강경한 항의 이유는 야당의 압력 때문이기도 하다.야당 지도자들은 유고사태에 대한 정책실패를 이유로 안드레이 코지레프 외무장관의 경질을 끈질기게 요구한다.서방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과거 러시아영향권 지역에 대한 영향력 상실등이 질책 사유이다. 역사적 요인도 무시할수 없다.18­19세기에 걸쳐 러시아의 차르(황제)들은 오토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절대적인 후원을 보냈다.슬라브족으로 정교회를 섬기는 러시아인들은 인종·종교적으로 형제인 세르비아인들을 회교도 터키족 적들로부터 지켜주어야한다는 도덕적 의무감같은 것을 갖고 있다.같은 슬라브 정교도들을 보호하도록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던 러시아제국은 19세기 후반 마침내 세르비아인을 비롯,발칸반도에 살던 민족 대부분을 터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주었다.그곳에서 러시아는 영웅대접을 받았고 발칸반도 전역에는 지금도 당시 세워진 러시아 장군,병사를 기리는 기념비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독일,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손에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동원했다.이에 맞서 전러시아사회가 세르비아형제들을 구하자고 일어섰다.이렇게해서 뛰어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1천만명의 희생자를 냈고 결국 그 여파로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오랜 역사동안 소비에트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지냈다.세르비아 왕은 볼셰비키들을 경멸했다.그러다가 30년대 들어 스탈린이 가까스로 유고 공산당 창건에 성공했고 히틀러와의 전쟁중 공산당 유격대원들이 적군을 도와 파시스트들을 물리쳤다.그러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의 새 주인 티토는 크렘린과의 유대를 끊고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스탈린의 지시와 사상을 모두 거부했다.스탈린 사후 소련과 유고의 관계는 다소 개선됐지만 소연방이 와해되기까지 유고는 소련보다는 서방과의 관계유지에 더 비중을 두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갑자기 양국관계의 시계바늘이 19세기로 되돌아간 것같이 됐다.러시아의 야당세력들은 세르비아 지원을 줄기차게 요구한다.이들은 러시아가 형제요,같은 정교도인 세르비아인들을 적의 포위로부터 구해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무기와 돈을 지원하고 의용군을 보내야 한다고 외친다. 처음에 옐친대통령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특별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92­93년 사이 크렘린은 오히려 서방정책에 동의,친공산계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유고연방에서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보스니아공화국들을 방해하는 것을 비난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최소한 크로아티아,회교도들도 세르비아계 못지않게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러시아는 지금 세르비아에 대한 국제제재조치가 공평하지 못하며 평화해결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는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무력사용을 즉각 중지하고 외교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자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크로아티아·회교도들은 러시아를 비우호적인 약소국으로 치부한다.크렘린과 보스니아내 소수 세르비아인들과의 관계도 94년 단절됐다.서방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이해를 존중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러시아의 입장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유일한 동맹자는 세르비아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한사람뿐이다.사실은 그 사람마저도 미국·서방과 직접 담판하기를 원해왔다.그런데도 러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옛유고 땅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옐친대통령은 오는 10월 보스니아 관련 국제회의를 개최하자고 얼마전 제의한바 있다.옐친의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바로 12월 총선을 앞두고 국민들앞에 정부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세워보자는 것외에 다른 것은 없다.
  • 경주 「잡음」/송상옥 소설가(굄돌)

    제2차 세계대전 말 파리 철수를 앞둔 독일군의 현지 지휘관이 히틀러의 「파리 폭파」명령을 지키지 않아 결과적으로 파리를 파괴로부터 구할 수 있게 한 에피소드는 모두 잘 알고 있다.파리를 자주 가보고 아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이 도시가 50년전 그때나 30년전이나 10년 전이나,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있어온 파리를 건물의 때를 벗기고 수리하고 조심스레 단장을 하는 것 이상은 절대로 손대지 않고 보존하면서 필요에 따라 외곽에 초현대식 건물이나 아파트를 들여놓는 새 시가를 건설하고 있다.파리가 프랑스의 파리를 넘어 세계의 파리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 국민과 정부가 한 마음으로 이 도시를 그대로 간직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경부고속철도의 경주 통과를 둘러싸고 불필요한 마찰을 빚고 있다.정부의 소관부처를 포함한 한쪽에서는 지역발전 예산문제 등을 내세워 경주 중심부 통과를 고집하고 있고 우리의 역사 문화유산인 고도 경주를 훼손하는 것을 반대하는 학계 등 다른 쪽에서는 우회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그것을 불필요한 마찰이라고 한 것은 이 문제에 관한한 「마찰」이 있을 까닭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즉 우리의 경주를 경주로 후손 만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는(세계의 경주는 그 다음의 일이다) 고속철도의 우회 노선을 택하는게 마땅하다.거기엔 처음부터 예산이든 뭐든 다른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파리 폭파」를 이행하지 않았던 그 지휘관은 아마도 그 일을 자기 생애에서 가장 잘한 일로 여기며 눈을 감지 않았을까.그러나 그것은 파리의 이야기이고,우리의 경주를 더욱 잘 가꾸진 않고 오히려 흠집내려는 일은 철회돼야 한다.민족의 유산은 아무도 손댈 수 없다.또한 그 길이 경주의 진정한 발전과도 직결된다.
  • 자랑스런 밀리언셀러카 「엑셀」/채영석(자동차 이야기)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자동차는 고트리프 다이믈러와 칼 벤츠의 가솔린 엔진 발명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대중화를 재촉하는 최다생산 모델을 탄생시킨 것은 미국의 포드사가 만든 T형 포드 모델이었다.이 모델은 1908년 10월1일 첫 차가 출고된 이후 1927년까지 무려 1천5백만7천33대가 생산되는 대기록을 남겼다. 히틀러가 포르쉐 박사에게 의뢰해서 만든 폴크스바겐의 비틀(일명 딱정벌레)은 1939년부터 지난 78년까지 무려 39년 동안이나 디자인과 기술적인 큰 변화없이 생산을 계속했다.모두 1천9백만대를 생산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영국의 미니 자동차는 지난 58년에 발표된 이래 지금까지 영국인의 사랑을 받아오며 지금도 월 1천여대가 생산되고 있다.올해로 36주년을 맞이해 멀지 않아 비틀을 제치고 최장수 모델 기록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의 르노 4CV도 지난 81년에 밀리언셀러카의 자리에 올랐다.일본 도요타의 카롤라 모델은 지난 87년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다.지난 해까지 모두 1천7백92만여대를 생산해 큰 이변이 없는 한 멀지않아 최다 생산모델과,최초로 2천만대를 돌파하는 모델로 될 것 같다. 우리는 자동차의 도입이 비교적 늦어 이들만큼의 대기록은 없지만 그런 짧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밀리언셀러카가 있다. 현대자동차의 엑셀은 이미 지난 88년 7월7일 1백만대 생산을 돌파해 당시 자동차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우리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우리의 자동차 산업도 그만큼의 안정된 판로가 있고 대량생산에 의한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얘기다. 엑셀은 지난 75년 12월에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의 발전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몸체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이 했고,엔진과 섀시는 일본 미쓰비시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고유모델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포니로 시작해 엑셀로 마감한 이 차는 7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수출은 2백9만3천여대,내수판매는 1백28만1천여대였다.3백37만4천여대를 생산한 뒤 엑센트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 아나톨리 도브리닌 회고록 「극비」/요약

    ◎고르비의 경제 이해부적이 소 붕괴 불렀다/브레즈네프의 대미 스타워즈 군비경쟁이 파국 이끌어/체코침공때 서방측 미온적 대응이 아프간 침공을 고무 24년동안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를 지내며 미·소냉전의 최일선을 지켜봤던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대사의 회고록 「극비」(InConfidence)가 타임스 북스 출판사에 의해 최근 출판됐다.62년 후르시초프에 의해 임명돼 84년 고르바초프 대통령때까지 주미대사직을 수행한 도브리닌은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케네디로부터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미국대통령 6명의 소련에 대한 태도 및 정책등을 소개하면서 미·소냉전발생의 동기 및 양국의 오해등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했다.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미와 전쟁 불가능” 시인 62년 워싱턴으로 부임인사차 들렀을때 후르시초프 총리는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며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불과 수개월후 그는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 설치로 미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이 눈치채지 못하게 극비리에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운명적인 오산이었다.그 목적은 미국의 모든 도시는 물론 캐나다 국경까지도 미사일의 위협하에 놓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이로 인해 발생한 양국간의 전쟁위기는 워싱턴과 모스크바 지도자간에 미리 개설해놓은 비밀 대화창구를 가동,해결되었다. 그러나 본국정부가 쿠바정부와의 비밀협상을 나를 속이면서까지 추진해왔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결국 쿠바위기는 양국간 군비경쟁 레이스를 자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그후 양국이 수십조달러씩을 퍼부은 뒤에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93년 미국과 러시아는 겨우 케네디 당시의 수준으로 전략핵무기를 감축하자는 합의에 도달할수 있었다. 소련의 또하나의 오산은 70년대말 고도로 정교한 SS­20 미사일을 서부국경에 배치한 결정이었다.이로인한 서유럽에의 위협은 79년 미국의 퍼싱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 배치 결정을 불러와 모스크바를 당황하게 했다.크렘린의 큰 오산으로 미국과의 핵균형을 깨지게 만든 것이다. 또다른 소련의 큰 오산은 아프간 침공이었다.이는 소련 군부에 의해서도 반대가 제기됐던,전략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승산이 없는 작전이었다.브레즈네프 총리는 작전 개시후 얼마 안된 80년 1월 나에게 3­4주면 끝날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얘기했다.그러나 아프간 침공은 소련체제 전체를 뒤흔드는 「불명예스러운 실패」만을 남긴 소련판 베트남전쟁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의 핵균형 깨져 이 침공은 「2차대전 이래 최대의 위협」이라고 허풍만 떨어대던 카터대통령에게는 다음해 대통령선거에서 치명타가 되었고 레이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할수 있었던 것은 68년 체코 침공 당시 서방측의 미온적인 대응에서 고무되었던 것이다.이는 마치 2차대전 발발전 체코에 대한 공격에 영국과 프랑스의 무기력한 대응이 히틀러에게 39년 폴란드침공을 부추기게 한것이나 같은 논리다. ○“3∼4주면 끝날 것” 확신 독일의 통일은 고르바초프의 독단적인 협상에 의해 추진됐다.정치국원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고르바초프는 독일과 함께 유럽전체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안전보장체제 수립을 추진키로 했는데 독일은 안보체제 수립은 포기하고 통일만을 얻어냈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수년동안 소련 군산복합체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미국과의 군비경쟁을 유도했으며 급기야 이는 레이건 대통령때에 들어서 「스타 워즈」라는 미국의 대응을 불러왔다.이 스타워즈 경쟁은 마침내 소련을 마지막 파국의 길로 이끌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소련에 대한 이해심이 가장 많았던 사람은 레이건 대통령이었다.그는 특히 두번째 임기에 들어선 후에는 소련과의 「건설적 관계」 수립을 추구했으며 그같은 미국의 태도변화가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일련의 개혁을 가능케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붕괴로 이끈 가장 큰 책임이 있다.급격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그의 인식은 옳았다.그러나 그는 너무 빨리 서둘렀다.그의 원천적인 실패는 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다루는 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그가 글라스노스트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열수록 실제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레이건 이해심 가장 많아 나는 63년 쿠바미사일 위기로부터 83년 KAL 007기 피격사건까지 첨예한 냉전의 현장에서 냉전 당사자들간의 메신저 역할을 하며 수많은 오산을 봐왔다.이 책의 목적은 이 세기내에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오산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모두에게 경고해두자는데 있다.
  • 「독일의 양심」으로부터 배우자(해외사설)

    독일은 광신적 권력을 휘두른 히틀러에 이끌려 유럽 전역에서 5백만∼6백만명으로 추정되는 유태인의 생명을 빼앗았다. 일본을 방문중인 바이체커 전독일대통령은 전후 40주년을 맞았던 지난 85년5월8일 「독일 패전의 날」 연설에서 독일국민이 저지른 범죄에 언급,「과거에 대해 눈을 닫은 자는 현재에도 장님이 된다.비인간적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 하지 않는 자는 또 그러한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과거와 사실은 될 수 있는 대로 숨기고 싶어 한다.독일국민에게도 「우리는 언제까지 사죄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라는 기분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바이체커씨는 과거를 직시하는 것만이 유대민족과의 「마음으로부터의 화해」로 연결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때린 쪽은 곧 잊지만 얻어맞은 쪽은 언제까지 잊지 않는다.아우슈비츠에서 대량학살당한 유태인과 폴란드인은 잊어버릴 자유조차 박탈당했고 그 유족과 동포는 오랫동안 나치의 공포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과 중국·한국 사이에도 똑같은말을 할 수 있다.중일전쟁에서 일본군국주의에 희생당한 중국인은 과거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잊지 않았다.한국에서의 여론조사에서는 일본은 아직도 「싫어하는」 비율이 높은 나라다. 「만일 우리가 앞서 일으킨 일을 마음에 새기는 대신 잊어버린다면 이는 비인도적인데 머물지 않고 화해의 싹을 짓밟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바이체커 전대통령의 말이 독일인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의 공감도 얻은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자살하기까지 유태인 절멸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던 히틀러와 그를 지지한 독일국민,「팔굉일우」(온세상이 하나)식 확장주의로 이웃나라들에 커다란 고통을 끼쳤던 일본.과거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교훈을 현재에 살려야 과거로 된다.역사교육도 필요하다.과거에 집착하는 「독일의 양심」으로부터 배우고 싶다.
  • 「히로시마 원폭」 50돌… 2저서의 엇갈린 시각(쟁점)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지 6일로 만 50년이 된 가운데 원폭투하를 당시 상황아래 최선의 대안이었다는 입장인 「암호명 낙하」(Code Name Downfall,노먼 폴마르·토마스 앨런 공저)와 아시아에서 소련 공산주의의 예봉을 꺾기 위한 미국의 무모한 선수치기였다는 수정주의적 반대 견해의 「원폭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The Decision To Use Bomb,가르 앨퍼로비츠 저) 등 두권의 책이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이들의 요점을 소개한다. ◎긍정론/「암호명 낙하」/폴마르­앨런 공저/“미군희생 막기위한 최선의 대안”/트루먼 “소련군 가세해도 일에 쇼크 못줘” 판단 트루먼 대통령은 19 45년6월17일 일기에다 『대일 전략을 결정해야만 한다.일본 본토를 공격할 것인가,폭탄을 떨어뜨리고 봉쇄할 것인가』라고 썼다.여기서 폭탄은 당시 일본 도시들을 황폐화한 중단없는 미군기 공습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트루먼은 암호명 S1의 원자탄에 대해 곧 결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이 결정에 대한 도움을 얻고자 그는 최고위 군사정책 관계자들을 불러 45년11월1일로 임시 날짜가 잡혀진 일본 직접공략 계획안을 들었다.트루먼 대통령이 무엇보다 알고 싶었던 항목중의 하나는 공격감행시 예상되는 미군 전사자와 부상자 규모였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태평양전쟁을 마무리할 이 상륙공격은 예정대로 11월에 감행하지 않으면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서 피를 흘리지 않고 전쟁을 이길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12일 전인 그해 4월1일 개시된 오키나와전투는 3개월 사이에 미군 전사자 7천6백명을 기록했으며 3만2천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생겨 10만명의 투입전력중 사상률이 39%를 넘었다. 일본상륙의 첫 공략에는 총 34만명의 육군·해병대 병력이 동원될 계획이었다.트루먼은 합참에게 상륙 공격의 구체적 작전안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달 후 7월중순에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미국은 일본 암호전문의 체계를 해독한 덕분에 일본지도층중 일부가 협상은 원하고 있으나 항복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됐다.원폭투하냐 상륙 공략이냐의 선택을 미루고 단순봉쇄와 도시공습만으로 항복을 이끌어 낸다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하루에도 몇십명씩 죽어가는 이 전쟁을 트루먼 대통령은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트루먼은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일본도 소련이 지난 3개월간 극동군을 정비·증강했음을 파악하고 있어 쇼크효과는 별로 크지 않으리라 생각됐다.원자탄을 실제 사용하기 전에 이 폭탄의 위력을 일본에게 보여줘 항복을 유도하자는 몇몇 미국 과학자들의 제안은 일본에게 이용당할 많은 약점을 안고 있었다. 원폭투하 없이도 미국은 이겼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만∼수십만명의 미군과 수백만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을 것이다.트루먼 대통령의 원폭사용 결정은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이들 미군과 일본인들의 목숨을 건졌다. ◎부정론/「원폭 사용 결정」/가르 앨퍼로비츠 저/“소련 견제하려 무리한 선수치기”/45년 여름 일본은 이미 궁지에 몰린 상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헨리 스팀슨 당시 전쟁장관으로부터 원자탄이 곧 일본에 사용될 것이란 말을 듣고 의기소침해짐을 느꼈다고 뒷날 회고했다.아이젠하워는 이 계획에 대해 『일본은 이미 패배했으며 인명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견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는데 그말로는 성이 안차 퉁명스럽게 『이 무시무시한 것으로 그들을 칠 필요는 없다』고 내뱉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현재 아이젠하워와 같은 생각이다.19 45년 여름에는 궁지에 몰린 일본 형편이 뚜렷해졌다.미해군이 일본해상을 통제했으며 식량,원자재,석유 공급이 끊겼다.미공군은 일본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도시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해가고 있었다. 독일이 5월8일 항복해 미국과 영국은 히틀러를 쳐부쉈던 힘을 독일에 비해 뒤처지는 타켓에다 집중할 수 있었다.게다가 소련의 대군이 일본 끝내기에 가세할 예정이었다.분명 시간 문제였다.일본 암호를 해독한 미국은 7월13일 일본천황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직접 개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종전 조건은 미국이 완전 무조건 항복만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일왕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서 스팀슨 전쟁장관과 조셉 그루 국무장관대행은 천황이 영국왕과 같은 실권없는 지위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라고 트루먼에게 조언했다. 소련군 8월 공격의 쇼크에다 천황 지위 보장이 얹어지면 항복은 거의 기정사실이라는 조언도 있었다.또 미국엔 시간이 많았다.일본본토에 대한 전면침입은 46년 봄에나 시작될 것이고 규슈 상륙일도 11월이었다.러시아의 8월 공격이 종전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때 원폭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많은 비밀문건이 공개되면서 바이어니스 장관은 원폭이 소련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를,또 아시아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초래함 없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났다.여러 과학자들에게 원폭이 있으면 소련을 좀더 쉽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오래전부터 소련은 8월8일 부로 대일전에 나설 계획이었다.히로시마는 8월6일,나가사키는 8월9일 폭격당했다. 최근 공개된 당시의 1급비밀 문서는 하나같이 「소련군이 공격에 나서면 일본은 거의 틀림없이 항복할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 딱정벌레차 「비틀」의 부활/나인용 자동차칼럼니스트(자동차 이야기)

    인류역사에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자동차중 하나가 바로 「비틀」이다. 비틀보다는 딱정벌레란 이름으로 무려 57년동안 장수하면서 단일차종으로 2천1백만대이상이나 팔렸다.한햇동안에만 1백70만대이상 생산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비틀은 당시 자동차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된 것에서 탈피해 서민들에게 마이카의 꿈을 실현시켜 자동차대중화에 한몫 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최고의 설계자인 페르디난드 포스쉐박사의 천재성과 독재자 히틀러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졌다.히틀러는 지난 33년 등극과 함께 국민차개발을 발표했고 34년 포르쉐박사에 의해 설계가 시작됐다.설계후 4년만에 시작차로 첫 딱정벌레가 탄생한다. 39년9월1일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공장은 폐쇄되고 생산은 뒤로 미뤄졌다.그후 전쟁이 끝나고 45년5월부터 생산이 재개됐고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보완으로 60년대에는 비틀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그후 비틀은 VW1300,VW1300A,411 등 여러번의 모델변경속에 70년대 중반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최종모델인 412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마침내 지난 74년 서독(현 독일)에서의 생산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멕시코공장에서 생산을 하게 돼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반세기동안 생산된 비틀의 명성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있고 폴크스바겐사도 비틀의 부활을 시도하는 차세대비틀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북미 오토쇼에서 발표된 컨셉트Ⅰ.비틀의 캐릭터인 딱정벌레스타일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했으며 아울러 미래첨단기술과 신소재를 적용한 미래형 전기자동차다.3도어 해치타입으로 제원은 비틀과 거의 비슷하다.디젤과 전기에너지를 혼용한 이른바 하이브리드엔진형식을 갖추고 있다. 물론 컨셉트Ⅰ이 비틀의 후속으로 곧바로 생산될지는 미지수이나 비틀을 기억하는 많은 대중들은 비틀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다.
  • 승전 50주년과 미·러의 새역할(해외사설)

    유럽에서 파시즘이 패배한지 반세기가 지났다.우리가 승전50주년을 축하하기는 쉽다.하지만「승리의 날」「얄타회담」「아우슈비츠 해방일」 등 당시 비극의 시대가 남긴 기념일들은 보다 다른 방법으로 기념돼야한다.50여개국 지도자가 유럽에서 총성이 멎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모여든다.그러나 지금 세계는 히틀러가 어떻게 권좌에 오를 수 있었나,승리에 가장 큰 공헌자는 누구인가,전후 평화를 망친 주범은 누구인가 하는 논쟁에만 매달려 있다. 앞으로 수일간 모스크바에서는 정치인들의 입에서 그럴듯한 명연설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다.그들은 2차대전 당시 소련시민이 겪었던 희생,고통,그리고 영웅적 행동,영광에 대해 열광적으로 찬양할 것이다.정치인들은 떠들고 퇴역 참전용사들은 그들의 연설을 잠자코 듣고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이번 기념식과 관련,가장 잘못된 일이다.이와관련,한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다.2차대전으로부터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정치가·지도자들의 단견에 의해 가장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상대는 바로 병사들과 민간인들이라는 사실이다.붉은 광장의 단상에서 세계지도자들은 늙고 찌든 참전용사들의 퍼레이드 장면을 지켜볼 것이다. 모스크바시당국은 이번 50주년 기념식 준비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항공기 편대,21발의 예포,폭죽놀이,그리고 파클라나야 고리에 새로 건설된 전쟁박물관 등등…그러나 진짜 기념식은 병사들의 퍼레이드를 향해 박수치는게 아니라 끔찍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세계의 지도자를 찾아내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8일 소련을 찾는 클린턴 미대통령은 옐친 대통령은 「새 냉전시대의 정상회담」을 통해 마주앉는다.단순히 기념물을 둘러보고 승리를 자축하기 보다는 과거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 전쟁을 피하고 보다 안정된 세계를 위한 노력에 힘이 기울여졌으면 좋겠다.
  • 독일/외국에선:5(지방자치 총점검:5)

    ◎중간­기초단체.주민복지행정만 담당/중앙정치완 무관… 지역발전·살림에 치중/“지방의 원수 너무 많다”일부선 축소 주장 독일의 지방자치제는 정형이 없다. 최대인구를 자랑하는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는 오는 14일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열기가 뜨겁다.하지만 베를린의 선거는 10월로 다소 느긋한 편이다. 7개주는 이미 지난해 선거를 치렀다.이렇듯 각주마다 선거일이 다르다.선거집중에 따른 국력낭비와 과열 현상을 막으려는 거창한 이유로 중앙정부가 분리한 것은 아니고 각주마다 자치적으로 정한 것일 뿐이다. 독일 내무부의 관계자들은 『지방자치의 특성은 각주마다 달라 모두 파악할 수 조차 없을 정도』라며 『자세한 내용은 각주에 알아보는 수 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16개 주의 주의회 의원들이 받는 월급조차 주에 따라 2천마르크(한화 약 1백만원)까지 차이가 나고 함부르크 시의회 같이 기본급이 한푼도 없는 곳도 있다.주정부 수장의 명칭도 주수상에서 시장,제1시장 등 천차만별이다.물론 임기도 4∼5년으로 달리하고 있다.지방자치의 다양함은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다.독일에서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지 못한 적은 단한차례 있다.아돌프 히틀러가 나치정권을 세우며 헌정을 중단했을 때의 일이다. ○주마다 선거일 달라 대부분의 자치단체는 1871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룩했을 때 마련된 전통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독일 지방자치전문가들은 『독일은 여러 기초 자치단체라는 벽돌들이 연방정부라는 지붕 아래 뭉친 것』이라며 『연방정부도 자치주를 기둥으로 해 지붕을 얹은 형태』라고 비유하고 있다. ○경찰업무까지 맡아 자치제도는 다양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각주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점이다.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의 지방의회 선거가 시작된 지난달 23일 「거구」의 헬무트 콜 연방정부 총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소속한 기민당 후보들이 「약체」라는 판단 아래 사민당의 거물 요하네스 라우 현 주총리에 맞서 「기민당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지원유세였다.중앙당이 지방의회 선거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다. 주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정당이 주정부를 구성해 책임지고 주의 살림을 맡게 된다.때문에 주의회 선거 결과는 주정부의 장악과 직결되고 때문에 군소정당과의 연정이 곧잘 이뤄지기도 한다. 주정부의 역할 범위는 연방정부의 고유업무인 외교·국방만 빼고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경찰업무도 맡고 있으며 심지어 학교교과 과정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결정을 한다. 주정부의 위치는 빌리 브란트와 바이츠체커가 베를린시(주정부)의 시장을 지낸지 얼마되지 않아 연방정부의 총리가 됐다는 전례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주정부의 보다 강력한 힘은 지방자치에 그치지 않고 상원을 구성,하원을 견제하는데 있다.상원인 「분데스라트」의원은 모두 68명.주정부는 인구비례에 따라 3∼6명씩 지명해 상원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구성된 상원은 하원이 제정한 법률안이 각주의 권한에 저촉된다고 판단하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현재 사민당이 지배하고 있는 상원은 지난해 말 출범한 콜 정부에 이미 한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적이 있다. ○주정부서 상원 구성 또 헌법상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마약문제 등에 대해서는 법률개정안을 제시해 하원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그래서 주의회 선거 결과는 상원의 장악으로 연결돼 중앙정치무대까지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독일 지방자치전문가들은 『독일 의회정치의 경쟁과 협력,조정은 주정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지적한다.주정부의 막강한 권한과 주정부간 독립은 주와 연방정부,주 사이의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다. 분쟁이 생기면 사안에 따라 헌법위원회나 행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돼 있다.이때 「주정부는 연방제도에 충실할 의무를 지닌다」는 연방제의 불문율이 대원칙으로 작용해 주정부의 독주를 막고 있다. 중간자치단위인 슈타트(시)와 크라이스(농촌)및 기초단위인 게마인데(읍·면)는 중앙정치와는 무관하게 철저히 주민복지에 관련된 업무를 자치적으로 처리한다.독일에는 지난해 말 「한스 디트리히트 겐셔 전외무장관이 우리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지역신문 광고가 나와 눈길을 모은 적이 있다. ○주정부의 독주 막아 전외무장관 같은 이가 마을을 찾아 회고록을 집필할 정도로 쾌적한 마을이니 관광이나 투자를 할 만하지 않느냐는 내용이다.게마인데가 그야말로 지역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통일 이후 게마인데가 맡은 행정·재정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이에따라 게마인데의 행정감독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는 크라이스와 슈타트의 역할 및 권한이 점차 증대되고 있는 양상이다.법학자인 잉고 뮌히 같은 이는 『지방 및 연방정부의 긴축살림을 위해 운영이 방만한 지방 의원수를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