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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亞 국방예산 한푼도 안 깎는다”… 中 패권 견제 본격화

    美 “亞 국방예산 한푼도 안 깎는다”… 中 패권 견제 본격화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이 미국을 지배하던 1969년 7월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새 아시아 정책인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미국은 앞으로 아시아에 직접적·군사적·정치적인 과잉개입을 하지 않으며,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42년 만인 17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호주 캔버라에서 “아시아는 미국의 최우선 순위에 있다.”고 선언했다. 프리 개럿 시드니대 미국학 교수는 호주 언론 ‘컨버세이션’과의 인터뷰에서 “오늘 오바마의 연설은 새로운 오바마 독트린으로 기념비적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팔머 플린더스대 교수는 “오바마의 새 아시아 정책은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외교정책의 변화”라며 “미국의 유럽·중동 중심 외교가 아시아·태평양 중심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오바마 독트린이 나온 배경은 우선 중동과 유럽의 안보적 위협이 상당부분 감소한 데 있다.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라덴 사살 이후 크게 약화됐으며 중동 민주화 덕에 전쟁광으로 돌변할 만한 독재자가 거의 사라졌다. 러시아도 어쨌든 민주적 선거 체제다. 반면 중국은 강대국 중 유일한 일당 독재 체제다. 미국은 히틀러, 스탈린 등의 교훈을 통해 독재국가의 전쟁위협에 민감하다. 실제 중국은 항공모함과 스텔스기 등 첨단무기를 속속 개발하고 있으며, 남중국해 분쟁 등에서 덩치를 앞세운 패권주의를 노골화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유럽은 부채 문제로 빈사 상태이고 원유 공급원으로서의 중동도 최근 캐나다 등지에서 양산되는 오일샌드 등으로 전보다는 매력이 떨어졌다. 반면 아시아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중국, 인도 등 거대시장이 있어 ‘먹을 게’ 많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미래를 보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가 이날 “아시아에 할당된 국방예산은 한 푼도 깎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호주에 미군 기지가 새로 들어선 것은 미 해외 국방력의 중심이 60여년 만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아시아로 옮겨짐을 의미한다. 미국은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와 일본, 호주 등 우방, 새로운 친구인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묶어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을 통해 중국을 고립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이 작심하고 아시아의 안방에 떡하니 자리를 마련한 이상 중국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일전을 불사하자니 아직 힘에서 열세이고 머리를 숙이자니 남중국해 문제와 위안화 절상 등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1980년대 미국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가 나가떨어진 일본의 전철을 중국이 밟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온다. 그러나 미·중 대결이 격화되더라도 미국이 중국을 미·소 냉전만큼 몰아세우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이 아직은 우세하다. 미·중은 경제적으로 깊숙이 얽혀 있는 데다 세계 경제의 ‘성장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기왕이면 잘 길들여서 미국이 만들어 놓은 우리 안으로 집어넣는 전략을 선호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날 오바마가 아시아에서의 군사력 강화를 노골적으로 역설하고 태평양 ‘강국’(Power)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저돌적인 모습을 보인 것을 놓고 취임 초부터 견지해 온 ‘소프트 외교’를 사실상 폐기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준비안된 그리스 유로존 가입 실수” 사르코지 발언 논란

    유럽연합(EU) 정상들이 막판 합의를 통해 그리스를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서 구한 가운데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은 실수”였다고 언급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리스 “위기 원인 전가 발언”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 채널2 방송 인터뷰에서 “2001년 그리스는 잘못된 경제 수치를 갖고 유로존에 들어왔다.”면서 “준비가 안 된 상태의 그리스를 유로존 회원으로 받아들인 건 실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유로가 무너지면 유럽이 무너진다. 만약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후폭풍이 모든 나라를 휩쓸 것이기 때문에 재앙을 피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한 뒤 “지금의 그리스 정부는 위기를 헤쳐나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발언에 그리스 정부는 즉각 불쾌감을 나타냈다. 스타브로스 람브리디니스 그리스 외무장관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유럽 재정위기의 중심에 있지만 위기를 야기한 원인은 아니다.”라고 반박하면서 “어느 한 나라를 희생양으로 삼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野 등 구제금융안에 회의적 구제금융 지원 결정에 대한 그리스 내부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전날 EU 정상회의에서 그리스 국채 손실률 50% 확대와 10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에 합의하자 “그리스가 디폴트 덫에서 벗어났다.”며 반겼다. 그러나 야당 정치인과 시민들은 앞으로 수년 동안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침체를 견뎌야 한다는 점을 들어 심드렁한 분위기라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재정위기 해결책을 앞장서서 이끌어낸 독일에 대한 반발도 표출되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28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나치 완장을 찬 모습의 포스터가 그리스 거리에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 현지 신문 만평에는 독일 관리들이 나치 복장을 하고, 긴축정책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 관리들도 나치식 인사를 하는 모습이 풍자적으로 그려졌다. 신문은 “독일 정부의 간섭이 65년 전 히틀러 치하 독일에 의해 유린됐던 그리스의 과거를 사람들의 마음에 되살려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자식이름 ‘히틀러’로 지으면 아동학대? 美서 논란

    자식이름 ‘히틀러’로 지으면 아동학대? 美서 논란

    아이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로 지은 부부가 2009년부터 3년 가까이 긴 법정싸움을 하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켐벨 부부는 평소 히틀러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큰아들에게 아돌프 히틀러(Adolf Hiter·5), 둘째에게 아리안 네이션(Aryan Nation·‘위대한 독일의 아리안 네이션’이라는 히틀러의 구호), 셋째에게 혼즐린 힌러 제니(Honszlynn Hinler Jeannie)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켐벨 부부는 2009년 아들 아돌프 히틀러의 3번째 생일 케이크에 축하 메시지와 이름을 새겨 넣으려 했지만 베이커리 가게로부터 거절당했다. 이후 뉴저지 주 법원으로부터 소환돼 조사를 받기 시작했고, 결국 아이들을 학대 또는 방치했다는 혐의로 아동보호소에 세 아이를 강제로 맡겨야 했다. 켐벨 부부는 “우리가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것은 거짓 주장이다. 법원 측은 그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아 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법원 측은 지난 해 조사에서 부부 두 사람이 직업이 없는데다, 아이들을 학대하고 방치했다는 목격자를 찾아냈다며 켐벨 부부와 아이들이 분리 거주하도록 명령했다. 최근 인터뷰를 통해 다시 사건이 불거지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뉴저지주 법원 측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밟히고 잘리고… 독재자 시신 수난

    밟히고 잘리고… 독재자 시신 수난

    스스로 ‘아프리카의 왕’이라 칭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던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의 시신이 정육점 냉동창고 바닥에 나뒹구는 신세로 전락하면서 세계인들을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폭압에 분노한 시민들의 분노에 죽어서도 조롱거리로 유린당한 사례는 이전 독재자들에게도 반복돼온 역사였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대표적인 예다. 무솔리니는 1945년 연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스위스로 도주하다 이탈리아 유격대에 붙잡혀 즉석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이후 두 사람의 시신은 밀라노로 보내져 시민들에게 얼굴 형태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밟혔다. 로레토 광장의 주유소 지붕에 거꾸로 매달리는 수모도 겪었다. 무솔리니가 죽은 지 64년이 지난 2009년 11월 말 경매사이트 이베이에 무솔리니의 뇌 일부분과 혈액을 1만 5000유로를 최초 가격으로 정해 매물로 내놓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당시 이베이 측은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는 경매에 부칠 수 없다며 해당 경매를 삭제했다. 1989년 민중봉기로 축출돼 총살형을 선고받은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와 아내 엘레나는 160여 발의 총탄 세례를 맞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들의 시신은 지난해 차우셰스쿠의 자녀들이 신원 확인을 요청하면서 다시 파헤쳐지기도 했다. 빈민층의 사생아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1919~1952).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죽은 그녀의 시신은 포퓰리즘의 대표적 사례인 페론주의의 부활을 우려한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떠돌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코가 부러지고 발이 손상되는 등 심하게 훼손됐다. 후안 페론 대통령도 사망한 뒤인 1987년 손이 잘려나갔다.독일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무솔리니의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다음 날 권총으로 자살을 하기 전 측근들에게 시신을 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히틀러, 아르헨으로 탈출해 73세까지 살았다”

    “히틀러, 아르헨으로 탈출해 73세까지 살았다”

    나치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것이 아닌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73세까지 살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영국의 제라드 윌리엄스와 사이몬 던스턴은 최근 ‘그레이 울프: 히틀러의 탈출’(Grey Wolf: The Escape of Adolf)이라는 책을 통해 “히틀러와 애인 에바 브라운이 자살로 위장하고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73세인 1962년까지 살았으며 두딸을 뒀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히틀러의 최후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히틀러는 권총으로, 그의 연인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윌리암스는 인터뷰에서 “2차대전 말 히틀러와 브라운이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는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며 “미국 정보당국이 나치에 의해 개발된 군사기술 제공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의 탈출을 도왔다.”고 말했다. 또한 “히틀러의 두개골이라고 알려진 그 해골은 40세 이하 러시아 여성의 것” 이라며 “히틀러가 도망쳤다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무시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류 역사학자인 가이 월터스는 “이책의 주장은 2000%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월터스는 “히틀러가 1960년대 남미에서 살았다는 주장은 음모론에 기반을 둔 쓰레기 조합”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사설] 다문화사회 외치며 피부색 차별은 또 뭔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목욕탕에서 쫓겨난 우즈베키스탄 출신 귀화 여성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귀화한 한국인이라며 여권과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까지 보여줬지만 피부색이 다르면 손님들이 싫어한다며 목욕탕 주인이 탕에 들어가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렇다손 쳐도 곧 학교에 들어갈 아이까지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인종차별금지 특별법 마련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고 민사소송까지 제기하겠다고 이 여성은 밝혔다. 결론부터 말하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목욕탕 주인의 입장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우리는 외국인 130만명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 총인구가 4858만명임을 감안하면 37명 중 1명이 외국인인 셈이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다문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그래서 정부도 수년 전부터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관련 예산과 정책을 확충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단일민족 국가라는 자부심에 차 있는 우리 국민의 정서로 볼 때 다문화 사회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산을 늘리고 각종 정책을 편다고 해서 다문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하루아침에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다문화 사회에 대한 배려를 하면 할수록 자국민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배려는 하되 신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회에도 일부 의원들이 외국인 인종차별금지법안을 제출한 바 있다. 인종차별 시 징역과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법을 만든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법률 제정 이전에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법으로 강제해서가 아니라 히틀러의 ‘집시 청소’에서 보듯 인종차별은 죄악이라는 국민의 자발적인 인식 전환이 선행돼야 한다. 국내 거주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탈피하고 공존공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도 다문화 정책의 허와 실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보완책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됐다.
  • ‘히틀러의 찻집‘이 해외 관광 명소로

    ‘히틀러의 찻집‘이 해외 관광 명소로

    2차 대전 종전 전 히틀러가 이용하던 독일의 찻집이 해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떠오르고 있어 화제다. 미국 인터넷 매체 허핑턴 포스트는 7일 1930년대 나치 정권을 이끌던 히틀러 총통을 위해 건립된 한 찻집에 관광객들이 쇄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켈스타인 산 정상의 ‘독수리 둥지’가 바로 그 새로운 관광명소다. 이 찻집은 호전적인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침략전쟁에 나선 나치 군대가 행군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도록 하기 위해 해발 6000피트(약 1829m)의 산 꼭대기에 건축한 목조 휴양시설이다. 하지만 정작 고소 공포증이 있는 히틀러는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독일 관광청에 따르면 1인당 20 유로씩 입장료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한해만도 3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켈스타인 산 정상의 이 찻집까지 등정했다고 한다. 현지 언론은 히틀러를 위해서 건립된 이 찻집에 당시 나치와 싸웠던 미국, 영국 등 연합국 관광객들이 역사의 발자취를 보기 위해 대거 몰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퍽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보는 셈이다. 사진=허핑턴 포스트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에비타가 나치 전범들을 아르헨티나에 숨겼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애칭 에비타)이 2차대전 후 재물을 받는 대가로 다수의 독일 나치 전범들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는 것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2일 에비타와 그녀의 남편인 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이 같은 행적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고 보도했다. 즉 레안드로 날로치와 듀다 텍세이라가 공동으로 쓴 ‘라틴 아메리카로, 정치적으로 잘못된 안내’라는 책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에비타는 2차 대전 후 연합군의 전범 재판소 회부를 피해 도망나온 나치 전범들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는 것을 묵인했다. 그 반대급부로 유태인을 학살하던 시기에 돈많은 유태인들로부터 나치 정권이 빼앗은 재물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 때 아르헨티나로 숨어든 대표적 나치 인사가 아돌프 아이히만과 요세프 맹겔레.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강제수용소 운영을 관할한 아이히만은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로 피신한 뒤 가명으로 메르세데츠-벤츠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첩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납치돼 1962년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까지다. 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악명높은 생체실험을 자행해 ‘죽음의 천사’란 악명을 떨쳤던 멩겔레 또한 아르헨티나로 비밀리에 망명했다. 이후 67세로 죽을 때가지 남미에서 살았다고 한다. 책의 저자들은 생전의 에비타가 나치 전범들로부터 받은 펀드와 귀중품들을 감춰두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에 적어도 한 구좌 이상의 비밀 계좌를 개설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에비타는 남편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일 때 유럽순방에 동행하면서 스위스를 잠시 방문한 비화를 소개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페라 ‘에비타’의 실제 주인공인 에바 페론은 지금도 아르헨티나 일부 계층으로부터 ‘빈자(가난한 사람들)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으나, 전체 국민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남편인 페론 전 대통령과 함께 온갖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평가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nownews@seoul.co.kr
  • [이제는 공공외교다] 獨 “나치 반성” 국가색 벗기 佛 역사·문화 자부심… 정부 전면에

    [이제는 공공외교다] 獨 “나치 반성” 국가색 벗기 佛 역사·문화 자부심… 정부 전면에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대표적인 공공외교의 강국으로 꼽힌다. 독일과 프랑스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서로 적대적인, 그리고 상반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 공공외교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와 문화 등 소프트웨어를 통해 국가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펼치고 있는 공공외교의 특징과 공통점, 차이점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공공외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살펴봤다.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는 지금도 ‘장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독일은 과거 분단의 상처를 기억하고 분단의 계기가 된 전쟁과 나치 정권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치 정권이 조직적으로 수행했던 프로파간다(선전전)가 얼마나 가공할 결과를 가져왔는지 기억한다. 독일이라는 ‘국가’의 이름으로 수행했던, ‘거짓말도 개의치 않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독일 공공외교의 밑바탕을 흐르는 정서로 자리 잡았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1622년 교황청이 선교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포교성성(布敎聖省)을 만들면서 등장한 용어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진 가치중립적인 의미였지만, 전쟁 동안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기승을 부리면서 극도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게 됐다. 히틀러와 나치는 권력 장악과 전쟁 수행을 위해 거리낌 없이 프로파간다를 전개했다.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독일인이 패전 직전까지도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패전 뒤 독일 공공외교는 나치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립됐다. 무엇보다 ‘국가’라는 색깔을 최대한 지웠다. 독일 문화원인 괴테 인스티튜트는 외견상 국가로부터 독립해 활동한다. 심지어 문화외교를 수행하면서도 ‘독일의 문화’가 아닌 ‘반성하고 성찰하는 독일’을 더 내세울 정도다. 적극적인 문화외교를 펼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최근에는 변화 흐름도 감지된다. 특히 통일 이후엔 ‘독일 문화’에 대한 내부 토론이 활발해지는 추세다. 연방국가 독일에서는 상당한 자주권을 가진 주정부의 독자성이 강하다. 크리스티네 레구스 독일 괴테인스티튜트 대변인이 “여러 분야에 여러 기관이 분산돼 있다.”고 말한 것에서도 보듯 다양한 독립적 기구들로 분산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괴테 인스티튜트, 독일학술교류처(DAAD), 국제관계연구소(ifa), 세계문화의 집(HKW)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는 역사적 경험에서 독일과 정반대 길을 걸어 왔다. 신종호 경기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랑스 공공외교가 “국가의 개입과 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을 대표한다.”고 평가했다. 전통적으로 문화부는 국내 문화업무를 담당하고 문화외교는 외무부가 관장하는 것도 특징이다. 프랑스는 오랜 중앙집권 역사를 자랑하는 반면 독일은 19세기가 돼서야 통일국가를 형성했다. 공공외교의 제도적 특성에서도 프랑스는 중앙집권적인 반면 독일은 연방정부와 주정부로 분권화돼 있다. 유럽 대륙의 정치·외교·문화 중심지였고 영국과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는 역사적 자부심과 프랑스어가 영어 통용 이전까진 유럽에서 유일한 외교언어였다는 기억은 프랑스 공공외교가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어를 대단히 중시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국제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인 프랑코포니의 활성화에 외교 정책의 초점이 맞춰질 정도다. 하지만 한때 영어로 길을 물어보면 영어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외면했다는 프랑스 사람들도 영어와 직접 경쟁을 포기한 지 오래다. 파리에서 만난 로랑스 오에 프랑스 인스티튜트 사무총장 역시 “이미 영어가 대세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그런 점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프랑스어를 알리려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어는 여전히 제1, 제2의 외국어’라는 자부심이 읽힌다. 글 사진 베를린·파리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생명의 窓] 이런 지도자/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생명의 窓] 이런 지도자/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기원전 6세기에 중국의 노자가 썼다는 ‘도덕경’ 제17장에 보면 지도자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내성외왕(內聖外王)”, 곧 속으로 성인 같은 자질을 갖추어야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어 훌륭한 왕이 된다는 도가 특유의 정치철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밑에서부터 한번 생각해 보자. 최하질의 지도자, 즉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지도자는 스스로 도덕성을 상실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 정의니 인도주의니 하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부산하게 조석으로 법령·훈령을 내려도 사람들이 콧방귀를 뀔 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불신 사회, 혼동과 혼란의 사회가 있을 뿐이다. 그 다음 유형의 지도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법치주의(法治主義) 지도자이다. 법과 형벌로 다스려 백성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지도자들, 진시황제나 히틀러, 비록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는 독재형 정치 지도자들이다. “데려 가서 맛을 좀 보여주라.”는 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유형이다. 그 다음이 사람들이 친근감을 갖고 찬양하는 지도자들이다. 이른바 덕치주의(德治主義) 지도자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왕들이 지향하던 지도자 형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도덕경’에 의하면 이런 덕치주의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지도자도 최상의 지도자는 못 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칭송하고 좋아한다는 자체가 벌써 그 지도자를 의식하고 산다는 뜻이다. 사람이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든지, 자식이 어머니의 사랑을 의식하지 않고 지낸다든지, 무엇이나 너무 크고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의 일상적 감지 대상 밖이다. 그뿐 아니라 신발이나 안경이 꼭 맞으면 내 몸의 일부처럼 되어 별도로 의식되지 않는다. 의식된다는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최상의 지도자는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마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지도자, 백성들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이슬처럼 다스리는 이른바 ‘무위자연’의 다스림, ‘가만둠’의 다스림을 실천하는 지도자, 그래서 뭐든지 잘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노력 덕분이라 생각하게 하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장자’라는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노자에게 “명왕(明王)의 다스림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바꾸어,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떠받드는 강력한 지도자, 민첩하고, 박력있고, 두뇌 회전이 잘되고, 사물의 앞뒤를 훤히 뚫어 보고, 때에 따라 정의니 평화니 하는 말도 섞어 쓸 줄 알고, 적절히 자기 선전에도 신경을 쓰는 그런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냐 하는 질문에 노자는 이런 지도자는 잔재주를 부리면서 부산하게 설치느라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정치 기술자나 정치꾼일 뿐이지 결코 참된 지도자, 명왕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런 지도자는 제 꾀에 넘어지고, 자기 방귀에 자기가 놀라는 사람,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도가사상에 의하면, 결국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은 한마디로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 ‘무명’(無名),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무기’(無己), 자기의 공로를 의식하지 않는 ‘무공’(無功)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다스림을 ‘영적 정치’(spiritual politics)라 하고 이런 지도자적 자질을 ‘변화형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라 하는 서양 학자도 있기는 하지만, 오늘 같은 각박한 정치 현실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모두 잠꼬대 같은 일이 아닌가? 도대체 지금 이런 지도자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생각해보게 되고 그리워지는 지도자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메간 폭스, 마릴린 먼로 문신 지우기 왜?

    메간 폭스, 마릴린 먼로 문신 지우기 왜?

    연예인들 사이에서 문신은 그리 특이한 취향은 아니지만 메간 폭스(25)가 새긴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문신은 그간 많은 화제를 뿌렸다. 보통의 문신을 한 배우들과는 달리 메간 폭스는 오른팔에 큼지막하게 먼로의 얼굴을 새겨넣었기 때문. 국내 방한 시에도 이 먼로 문신은 큰 화제가 됐으며 폭스의 몸에는 총 9개의 문신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메간 폭스가 최근 레이저 시술을 통해 이 먼로 문신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폭스는 최근 한 해외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먼로 문신을 지우고 있다.” 며 “왜냐하면 먼로가 부정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먼로가 과거 세계적인 섹시 심벌로 인기를 얻었으나 결혼실패 등 불운을 겪다 1962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했기 때문. 해외언론들은 이에 대해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퇴출되며 위기에 놓인 폭스가 인기절정의 순간에서 사라진 먼로를 떠올리는 것 같다.”는 평가다. 한편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마이클 베이 감독을 히틀러라고 비난한 이유로 배역에서 퇴출됐으며 유명 브랜드 엠포리오 알마니의 모델에서도 하차했다 사진=멀티비츠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카다피 정권 몰락 계기로 본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카다피 정권 몰락 계기로 본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역사 속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자들의 말로를 되돌아본다. ●차우셰스쿠 등 도피중 처형 22년간 루마니아를 철권통치하며 김일성을 모방해 우상화 작업에 혈안이 돼 있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대통령은 1989년 카다피처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평소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군은 총부리를 차우셰스쿠에게 돌렸고, 북한으로 도망치려다 붙잡힌 그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연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따라 도망쳤던 베니토 무솔리니 전 이탈리아 총리 역시 유격대에 붙잡혔다. 메제그라라는 마을에서 페타치와 함께 처형당한 무솔리니의 시신은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매달렸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도 고향인 티그리트에서 숨어지내다 미군에 체포된 지 3년만인 2006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소모사 부자, 암살도 대물림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전 니카라과 대통령은 20년 독재 후 1956년 암살 당했다. 그 자리를 두 아들이 잇따라 차지, 소모사 일가는 1979년까지 62년간 니카라과를 지배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형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도 1980년 암살당해 권력뿐 아니라 죽는 방식까지도 대물림했다. 독립 이후 정권 전복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조제프 카빌라 현 대통령은 아버지 로랑 카빌라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가였으나 변절, 독재를 하다 2001년 쿠데타 과정에서 암살됐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이 17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정치적 이유로 살해된 이들이 공식적으로만 3197명이고, 1000여명은 여전히 실종상태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8년 뒤인 1998년 영국 런던에서 체포됐지만 건강상 이유로 석방돼 귀국했다. 칠레에 돌아와서는 가택연금됐고 2006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20세기 가장 부패한 지도자’로 꼽히는 수하르토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재직 중 부패혐의로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물러난 뒤 10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빼돌린 돈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피노체트·밀로셰비치 감옥행 ‘발칸의 도살자’라 불렸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연방 대통령은 2000년 실각한 뒤 2001년 4월 세르비아에서 체포됐다. 1999년 구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에 의하여 전쟁범죄와 학살죄, 반인도적범죄 혐의로 기소돼 같은 해 7월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송됐으며 재판을 받던 중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프리카의 히틀러’로 불리는 이디 아민 전 우간다 대통령 역시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 집권 기간 동안 전체 1000만명 인구 중 정적 등 최소 30만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79년 반군에 쫓겨 리비아로 도피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갔다. 죽는 날까지 우간다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엄청난 낭비벽으로 더욱 유명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1986년 2월 부정선거가 발목이 잡혀 집권 21년 만에 하와이로 쫓겨났다. 3년 뒤 가족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최장수 국가는 베네수엘라? 110세 유권자 수두룩

    최장수 국가는 베네수엘라? 110세 유권자 수두룩

    남미 베네수엘라 선거위원회에 비상이 걸렸다. 대책이 시급한 고민거리는 다름아닌 넘쳐나는 고령 유권자다. 베네수엘라에선 2012년 총선이 실시된다. 하지만 유권자 명단이 정리되지 않아 110세가 넘는 고령자가 수두룩하다. 15일(현지시간) 공개된 유권자 명단을 보면 111세 이상 남녀 유권자는 1만 7500여 명이 넘는다. 대부분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명단이 정리되지 않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경우다. 최고령 유권자는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127세 할아버지다. 사망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베네수엘라는 110세 이상 고령자가 가장 많은 국가로 기네스에도 오를 수 있는 일이다. 사실확인이 다급해진 베네수엘라 선거위원회는 부랴부랴 110세 이상 고령자에게 투표금지(?) 조치를 내렸다. 생존을 확인한 경우에만 투표권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늑장행정을 하다가 결국 원칙과 예외를 뒤바꾸기로 한 셈이다.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유권자 명단에 오른 110세 이상의 고령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위원회에 사망 또는 생존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한편 2006년 대통령선거을 앞두고 베네수엘라에선 슈퍼맨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권자 2명이 발견돼 화제가 됐었다. 선거위원회 확인 결과 두 사람의 이름은 실명이었다. 히틀러, 바비라는 이름을 가진 유권자도 발견돼 이목을 끌었다. 사진=헨테크리티카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히틀러를 순한 양으로?” 2차대전 英 비밀작전 공개

    “히틀러를 순한 양으로?” 2차대전 英 비밀작전 공개

    ”히틀러를 순한 양으로 만들면 2차 대전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스파이들이 독일 나치정권을 이끌던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야욕을 막기 위해 그에게 여성호르몬을 먹이는 방법까지 시도하려 했다고 15일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보도했다. 이 신문은 영국 카디프대 교수인 브라이언 포드 연구원의 말을 인용해 영국 스파이들이 히틀러의 음식에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약을 몰래 넣을 계획을 세웠었다고 전했다. 말하자면 호전적인 히틀러의 성품을 그의 누이이자 비서였던 파울라처럼 유순하기 짝이 없게 만들려는 공작의 일환이었다. 포드 연구원은 스파이들이 히틀러 감식가들의 혀를 속이려고 일부러 아무 맛도 나지 않고 효과도 조금씩 느리게 나타나는 에스트로겐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스파이들 가운데 일부는 히틀러가 먹을 음식에까지 접근할 수 있을 만큼 그와 가까운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포드는 스파이들이 히틀러를 단번에 죽일 수 있도록 그의 음식에 독약을 넣을 생각도 했지만, 히틀러의 음식을 미리 맛보는 전담 음식 감식가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에스트로겐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포드 연구원은 영국 당국이 그동안 기밀문서로 분류했다가 최근에 공개한 서류에서 이 같은 사실들을 찾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데일리 메일 캡쳐 서울신문 나우뉴스 nownews@seoul.co.kr
  •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 비해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유도 다양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기록이 갖는 한계 때문에, 패망한 국가의 군주는 승자가 지워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히틀러가 폴크스바겐의 스테디셀러 ‘비틀’을 만든 주역이라든가, 그가 얼마나 문학적인 인물이었는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누구도 말하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자연과학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인류의 삶을 바꿀 만한 발견이나 발명을 해낸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이거나, 은둔형 외톨이여서 앞으로 나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7세기의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피에르 드 페르마다. 그는 짧은 수식을 적은 후 “나는 이 문제를 풀 놀라운 증명을 찾아냈지만, 여백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라고 썼다. 인류가 흔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불리는 이 문제를 푸는 데는 그 후로 무려 357년이 걸렸다. 이 밖에도 “다 알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결과만 내놓거나 “이걸 어떻게 풀었는지 내가 왜 설명해야 하나.”라는 식으로 잠적해버린 천재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남긴 업적과 함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생물학자들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학자 중 업적에 비해 본인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그레고어 요한 멘델(1822~1884)’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유전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그는 왜 그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주 주인공은 지난달부터 전 세계 네티즌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전학자이자 수도사 멘델이다. 놀라운 발견을 한 그는 왜 철저하게 ‘재야의 과학자’로 머물러야 했을까. 그리고 최근 불고 있는 멘델에 대한 관심은 무엇 때문일까. 인터뷰가 진행되자 멘델은 오히려 “오늘날 내가 받고 있는 존경은 사실 어이없는 행운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는데…. →중·고등학교 생물교과서를 덮은 이후 사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나는 것 같다. 최근 전 세계 포털의 과학자 검색 순위에서 당신이 급상승했다. 완두콩도 검색어에 오르고 말이다. -나도 이상해서 좀 알아봤더니, 구글이 깜찍한 짓을 했더구먼. 지난달 20일이 내 생일이었는데 그날 구글이 로고를 ‘완두콩’으로 만들었더라고. 뭐 탄생 189주년이니 딱히 기념할 만한 시점도 아닌데, 워낙 엉뚱한 짓을 많이 하는 애들이니. →거 참 질문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답변이다. 검색어 덕분에 당신에 대해서 좀 찾아봤는데 의외로 알려진 게 없더라. 뉴턴이나 다윈 같은 과학자들은 몇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인데 말이다. 검색창에 당신 이름을 넣으면 ‘멘델의 법칙’이나 나오지 당신 얘기는 ‘수도사였다’ ‘유전학의 창시자다’ ‘완두콩을 가지고 실험했다’ 이 정도가 고작이던데. 궁금한 점 위주로 개인 신상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자. 무엇보다 수도사가 왜 과학실험을 한 건가. -그게 사실은 거꾸로란 말이지. 난 과수원집에서 태어났거든. 어렸을 때부터 나무 품종을 개량하면서 유전학자의 꿈을 키웠고 아버지도 내 교육에 열성적이었어. 문제는 집에서 내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안됐다는 거였지. 심지어 여동생 결혼자금까지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 근데 대학 교수가 나보고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별로 망설임도 없이 사제 시험을 보고 수도사가 됐지. 마침 내가 있던 성 토마스 수도원 원장은 신학 외에 과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근데 사실 당신 낙제생이었다는, 그것도 생물에서 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수도사들은 근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는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중학교 교사 자격시험에서 생물과목 과락을 해서 자격증을 못 땄다. 착한 원장님께서 날 밀어준다고 빈 대학에서 특별 과외까지 시켜 줬는데, 또다시 떨어져서 아예 교사의 꿈은 접었어. 근데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학설을 접했고 그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가 됐지. →아 당신보다 유명한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군. 다윈이 당신에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어. 수도원 안쪽 뜰에 있는 작은 정원에 완두를 심고, 만 그루 넘게 심고 키우고를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결과를 기록해나갔어. 생색을 좀 내자면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완두 꽃가루를 모두 손으로 수분시켰고, 내가 원하는 종끼리 수분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다 봉지를 씌웠지. 그 실험만 무려 8년을 꾸준하게 계속했고. 그 결과 1865년에 대를 물려도 변하지 않는 형질이 있다는 것, 형질 사이에 우성과 열성이 있다는 것, 독립적으로 유전이 되는 형질이 있다는 것 등을 밝혀낼 수 있었지.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부모의 형질이 왜 잡종인 자손에게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걸 알아낸 거다. 청출어람이라고 해야 하나. →왜 하필 완두였나. -뭐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완두콩이 번식이 잘되고 하나의 가지에 콩이 많아서였다고 해야 하나. 물론 실험이 망하면 먹을 수도 있었고. 근데 결과를 보면, 정말 운 좋게도 유전형질이 딱 갈라지는 재료를 우연찮게 선택했던 것 같다. →근데 당신은 동네 학회에서도 무참히 밟혔다. 허무하지 않았나. -조그마한 소도시에 있는 자연과학협회 회원들이 내 연구결과를 이해나 했겠나. 딱히 큰 학회에 발표하지도 않았고, 다윈한테만 우편으로 보낸 정도였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사실 더 열받는 건 내가 다윈한테 보낸 논문이, 다윈이 죽은 후에 방에서 뜯지도 않은 채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지. 만약에 다윈이 그걸 뜯어봤다면 창조론자들과 맞설 강력한 무기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기 복이 그 정도였구나 하고 생각해야지 뭐. 근데 나도 몇 년 뒤에 수도원장이 되고, 수도원이 세금 때문에 정부랑 싸우는데 앞장서면서 딱히 과학에 관심을 쓸 시간이 없어졌어. 결국 내 연구는 내 시대에는 개인적인 만족으로 끝난 셈이지. →당신 연구의 존재감이 얼마나 없었으면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 동료들이 논문하고 연구 자료까지 아무 생각없이 불태웠을까. 근데 이쯤에서 핵심적인 질문을 해야겠다. 당신의 논문에는 ‘유전’이나 ‘법칙’이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멘델의 법칙’은 어디서 나온 건가. -그게 사람 운인 것 같다. 내가 했던 연구가 한 35년 정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었는데 말이지. 과학자들도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1900년쯤에 과학자 세명이 나랑 비슷한 실험을 했거든. 그래서 결과를 얻었는데, 누가 먼저인지 당장 싸워야 할 판이 된 거야. 사실 과학자들이 ‘최초’ 어지간히 좋아하잖아. 그 와중에 어이없게 내가 예전에 썼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논문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이 도서관에서 발견된 거지. 싸우기 귀찮으니까 그 영예는 전부 이미 죽은 나한테 돌려버리기로 합의를 본 거고. 하긴 내용도 거기서 거기였다고 하더구먼. →당신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뒤늦게 빛을 본 건가. -근데 그건 또 아니고. 난 잘 몰랐는데, 내가 좀 글을 못 썼던 모양이야. 후대 학자들이 심지어 “멘델은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니고, 19세기의 학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건 글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했겠느냐고. →그래도 당신은 오늘날 위대한 유전학자로 좋은 점만 부각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어. 베이트슨은 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불명확한 대목은 손질하고, 원문도 좀 바꿔놓았지. 그 결과 당시 과학계를 주도하던 영국이나 미국의 연구자들은 절대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보이는 멘델만을 만나고 칭송하게 된 거지. 오히려 내가 사용한 독일어권에서는 인정받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지. →불운한 학자로 당신을 골랐는데, 듣다 보니 정작 엄청난 행운아 아닌가. -완두콩 1만 그루를 8년 동안 기른 정성은 보답받을 만하다고 생각해. 공부하기 위해서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런 노력을 하고도 내가 그 결과를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에 중학교 교사자격시험조차 떨어진 내가 교과서에 길이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참고문헌 -교과서를 만든 과학자들(손영운/글담)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에른스트 페터 피셔·전대호/해나무) -멘델이 들려주는 유전이야기(황신영/자음과모음) -멘델, 현대 유전학의 창시자(비체슬라프 오렐·한국유전학회/전파과학사) -유전학의 탄생과 멘델(에드워드 에델슨·최돈찬/바다출판사)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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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W]수도사 멘델의 고백...“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W&W]수도사 멘델의 고백...“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 비해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유도 다양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기록이 갖는 한계 때문에, 패망한 국가의 군주는 승자가 지워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히틀러가 폴크스바겐의 스테디셀러 ‘비틀’을 만든 주역이라든가, 그가 얼마나 문학적인 인물이었는지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누구도 말하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자연과학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인류의 삶을 바꿀 만한 발견이나 발명을 해낸 과학자들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이거나, 은둔형 외톨이여서 앞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7세기의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피에르 드 페르마다. 그는 짧은 수식을 적은 후 “나는 이 문제를 풀 놀라운 증명을 찾아냈지만, 여백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라고 썼다. 인류가 흔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불리는 이 문제를 푸는 데는 그 후로 무려 357년이 걸렸다. 이 밖에도 “다 알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결과만 내놓거나 “이걸 왜 풀었는지 내가 왜 설명해야 하나.”는 식으로 잠적해버린 천재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남긴 업적과 함께 전설처럼 전해내려온다. 생물학자들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학자 중 업적에 비해 본인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그레고어 요한 멘델(1822~1884)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유전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그는 왜 그같은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주 주인공은 지난달부터 전 세계 네티즌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전학자이자 수도사인 멘델이다. 놀라운 발견을 한 그는 왜 철저하게 ‘재야의 과학자’로 머물러야 했을까. 그리고 최근 불고 있는 멘델에 대한 관심은 무엇 때문일까. 인터뷰가 진행되자 멘델은 오히려 “오늘날 내가 받고 있는 존경은 사실 어이없는 행운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는데?   중·고등학교 생물교과서를 덮은 이후 사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나는 것 같다. 최근 전 세계 포털의 과학자 검색 순위에서 당신이 급상승했다. 완두콩도 검색어에 오르고 말이다. -나도 이상해서 좀 알아봤더니, 구글이 깜찍한 짓을 했더구만. 지난달 20일이 내 생일이었는데 그날 구글이 로고를 ‘완두콩’으로 만들었더라고. 뭐 탄생 189주년이니 딱히 기념할 만한 시점도 아닌데, 워낙 엉뚱한 짓을 많이 하는 애들이니. 거참 질문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답변이다. 검색어 덕분에 당신에 대해서 좀 찾아봤는데 의외로 알려진 게 없더라. 뉴턴이나 다윈 같은 과학자들은 몇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인데 말이다. 검색창에 당신 이름을 넣으면 ‘멘델의 법칙’이나 나오지 당신 얘기는 ‘수도사였다’‘유전학의 창시자다’‘완두콩을 가지고 실험했다’ 이 정도가 고작이던데. 궁금한 점 위주로 개인 신상에 대해 몇가지 물어보자. 무엇보다 수도사가 왜 과학실험을 한건가 -그게 사실은 거꾸로란 말이지. 난 과수원집에서 태어났거든. 어렸을때부터 나무 품종을 개량하면서 유전학자의 꿈을 키웠고 아버지도 내 교육에 열성적이었어. 문제는 집에서 내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안됐다는 거였지. 심지어 여동생 결혼자금까지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 근데 대학교수가 나보고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별 망설임 없이 사제 시험을 보고 수도사가 됐지. 마침 내가 있던 성 토마스 수도원 원장은 신학 외에 과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근데 사실 당신은 낙제생이었다는, 그것도 생물에서 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수도사들은 근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는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중학교 교사 자격시험에서 생물과목을 과락해서 자격증을 못 땄지. 착한 원장님께서 날 밀어준다고 빈 대학에서 특별 과외까지 시켜줬는데, 또다시 떨어져서 아예 교사의 꿈은 접었어. 근데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학설을 접했고 그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가 됐지. 아, 당신보다 유명한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군. 다윈이 당신에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지 확인해봐야 겠다고 마음먹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어. 수도원 안쪽 뜰에 있는 작은 정원에 완두를 심고, 1만 그루 넘게 심고 키우고를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결과를 기록해나갔지. 생색을 좀 내자면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완두 꽃가루를 모두 손으로 수분시켰고, 내가 원하는 종끼리 수분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다 봉지를 씌웠으니까. 그 실험만 무려 8년을 꾸준하게 계속했고. 그 결과 1865년에 대를 물려도 변하지 않는 형질이 있다는 것, 형질 사이에 우성과 열성이 있다는 것, 독립적으로 유전이 되는 형질이 있다는 것 등을 밝혀낼 수 있었지.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부모의 형질이 왜 잡종인 자손에게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걸 알아낸거야. 청출어람이라고 해야하나. 왜 하필 완두였나.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완두콩이 번식이 잘되고 하나의 가지에 콩이 많아서였다고 해야하나. 물론 실험이 망하면 먹을 수도 있었고. 근데 결과를 보면, 정말 운 좋게도 유전형질이 딱 갈라지는 재료를 우연찮게 선택했던 것 같다. 근데 당신은 동네 학회에서도 무참히 밟혔다. 허무하지 않았나. -조그마한 소도시에 있는 자연과학협회 회원들이 내 연구결과를 이해나 했겠나. 딱히 큰 학회에 발표하지도 않았고, 다윈한테만 우편으로 보낸 정도였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어. 사실 더 열받는 건 내가 다윈한테 보낸 논문이, 다윈이 죽은 후에 방에서 뜯지도 않은채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지. 만약에 다윈이 그걸 뜯어봤다면 창조론자들과 맞설 강력한 무기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기 복이 그 정도였구나 라고 생각해야지 뭐. 근데 나도 몇 년 뒤에 수도원장이 되고, 수도원이 세금 때문에 정부랑 싸우는 데 앞장서면서 딱히 과학에 관심을 쓸 시간이 없어졌다. 결국 내 연구는 내 시대에는 개인적인 만족으로 끝난 셈이지. 얼마나 당신 연구의 존재감이 없었으면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 동료들이 논문하고 연구 자료까지 아무 생각없이 불태웠다는 얘기는 들었다. 근데 이쯤에서 핵심적인 질문을 해야겠다. 당신의 논문에는 ‘유전’이나 ‘법칙’이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멘델의 법칙’은 어디서 나온건가. -그게 사람 운인 것 같다. 내가 했던 연구가 35년 정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었는데 말이지, 과학자들도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1900년쯤에 과학자 세명이 나랑 비슷한 실험을 했거든. 그래서 결과를 얻었는데, 누가 먼저인지 당장 싸워야 할 판인 된거야. 사실 과학자들이 ‘최초’ 어지간히 좋아하잖는가. 그 와중에 어이없게 내가 예전에 썼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논문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이 도서관에서 발견된거지. 싸우기 귀찮으니까 그 영예는 전부 이미 죽은 나한테 돌려버리기로 합의를 본거고. 사실 내용도 거기서 거기였다고 하더만. 당신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뒤늦게 빛을 본건가. -근데 그건 또 아니고. 난 잘 몰랐는데, 내가 좀 글을 못 썼던 모양이야. 후대 학자들이 심지어 “멘델은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니고, 19세기의 학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건 글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했겠냐고. 그래도 당신은 오늘날 위대한 유전학자로 좋은 점만 부각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베이트슨은 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불명확한 대목은 손질하고, 원문도 좀 바꿔놓았다. 그 결과 당시 과학계를 주도하던 영국이나 미국의 연구자들은 절대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보이는 멘델만을 만나고 칭송하게 된거지. 오히려 내가 사용한 독일어권에서는 인정받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불운한 학자로 당신을 골랐는데, 듣다보니 정작 엄청난 행운아 아닌가. -완두콩 1만 그루를 8년 동안 기른 정성은 보답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공부하기 위해서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노력을 하고도 내가 그 결과를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에 중학교 교사자격시험조차 떨어진 내가 교과서에 길이 남게된 것이 아닐까 싶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교과서를 만든 과학자들(손영운/글담)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에른스트 페터 피셔·전대호/해나무) 멘델이 들려주는 유전이야기(황신영/자음과모음) 멘델, 현대 유전학의 창시자(비체슬라프 오렐·한국유전학회/전파과학사) 유전학의 탄생과 멘델(에드워드 에델슨·최돈찬/바다출판사)
  • 메간 폭스, 알마니 모델 하차…성형 의혹도 재점화

    마이클 베이 감독을 ‘히틀러’라고 비난하는 등 끊임없는 구설로 논란을 빚은 메간 폭스가 유명 브랜드 엠포리오 알마니의 모델에서도 하차했다.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인기로 그간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알마니의 간판모델로 활약해 왔다. 메간 폭스에 이은 새로운 모델은 팝스타 리한나가 차지했다. 리한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같은 소식을 전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3’ 퇴출 논란에 이어 이번엔 성형 논란까지 일고 있다. 지난 7일 메간 폭스는 페이스북에 직접 촬영한 자신의 사진 4장을 올려 일각에서 제기한 성형 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외 연예매체는 성형외과 의사의 말을 빌어 “그녀의 주름은 보톡스 약효가 끝물일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라며 폭스의 주장을 부정하고 나섰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히틀러가 나치 병사들에게 바비 인형 준 까닭?

    나치 정권을 이끈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병사들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바비 인형을 지급했다는 역사적 고증이 제기됐다. 미국의 뉴욕 데일리 뉴스와 영국의 대중지 더 선은 11일 히틀러 정권이 1940년 최전선의 독일병정들에게 일종의 성노리개로 바비 인형을 공급할 계획을 세워 일부 시행에 옮겼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매춘부들의 접근으로 인한 병사들의 각종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같은 역사적 뒷얘기는 바비 인형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저술가 그램 도널드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도널드의 조사에 따르면 나치 정권은 이른바 ‘보르크힐트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유사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섹스 인형’ 공급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램이 입수한 비밀 문건에 따르면 SS, 즉 나치 친위대 책임자 하인리히 힘러는 “(점령지인) 파리에서 (나치병사들이 처한) 가장 큰 위험은 댄스홀이나 술집 등 어디에나 병사들을 유혹하려는 매춘부들이 득실거린다는 점”이라면서 “병사들이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건강을 해치는 모험을 감수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게 우리의 의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SS 측의 이런 상황판단에 따라 나치 정권은 독일병정들에게 바비 인형 공급계획을 세웠고 한 점령지에서 시험적으로 용법 테스트까지 실시했다. 테스트 직후 성능(?)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은 힘러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을 위해 50개를 주문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사용을 승인한 바비 인형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병사들의 배낭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사이즈였다고 한다. 그러나 ‘보르크힐트 프로젝트’는 1942년 전세가 기울면서 흐지부지됐다. 영국군에 체포됐을 때 당혹스러운 장면이 연출되는 것을 꺼린 독일병사들이 바비 인형의 휴대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를 폭로한 그램은 “나치의 이 비밀 계획이 흐지부지된 후 드레스덴 대폭격 당시 이 인형을 만든 장소와 생산된 인형들이 모두 파괴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트랜스포머3’ 샤이아 라보프 “메간 폭스와 연애” 폭로

    ‘트랜스포머3’ 샤이아 라보프 “메간 폭스와 연애” 폭로

    개봉을 앞두고있는 블록버스터 영화 ‘트랜스포머3’의 주인공 샤이아 라보프(26)가 이전 시리즈의 상대역인 메간 폭스(26)와 실제 연인사이로 발전했었다고 인정해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미국 매거진 ‘디테일’의 보도에 따르면, 샤이아 라보프는 “오랫동안 상대역으로 연기하면서 진짜 감정이 싹텄다. 우리는 촬영기간 동안 여러차례 데이트를 했다.”면서 “하지만 우리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시인했다. 이어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영화에서도 우리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들었다.”면서 “난 아직도 그녀를 멋진 친구로서 사랑하며,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매우 좋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메간폭스가 ‘트랜스포머’ 촬영중 만났으며 현재의 남편인 오스틴 그린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회피했다.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 시리즈 감독인 마이클 베이를 ‘독재자 히틀러’로 묘사한 사실이 알려진 뒤, 이에 격분한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가 하차를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상태다. 여기에 최근 결혼 1주년 기념으로 또 한번의 결혼식을 올릴 만큼 현 남편과의 돈독한 애정을 과시하던 차에 ‘불륜’을 예고하는 폭로가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깜짝 고백으로 팬들을 놀라게 한 샤이아 라보프는 현재 스타일리스트이자 학생인 캐롤린 포와 교재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왼쪽은 메간 폭스, 오른쪽은 샤아이 라보프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아슬아슬’ 임재범, 이번엔 나치복장 논란···“자유 갈망 표시”

    ‘아슬아슬’ 임재범, 이번엔 나치복장 논란···“자유 갈망 표시”

     가수 임재범이 콘서트에서의 나치 복장에 대한 오해를 해명했다.  임재범 측은 28일 “나치를 찬양한다는 일부 소문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나치 복장을 입고 집어 던지면서 자유를 갈망한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무대 내용을 설명했다.  이어 “나치는 죽었다는 의미의 퍼포먼스였다. 짜여진 기획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고 임재범이 즉흥적으로 펼친 것”이라면서 “록의 정신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임재범은 지난 25,26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다시 깨어난 거인’에서 독일 나치 군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공연 중 3곡의 노래를 부르면서 나치 복장을 입었다. 모자까지 갖춰 입은 임재범은 “프리덤(Freedom)”이라고 크게 외치며 상의를 벗었다.  콘서트 이후 나치 복장에 대한 뒷말이 무성했다. 임재범이 외친 “프리덤”이 ‘하일 히틀러’로 오인 받으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아무리 무대 연출이라지만 히틀러를 찬양하는 나치 복장을 입고 나오나.”라는 의견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의미할 것”이란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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