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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회하라!…이 땅의 불교와 친일의 야합

    전북 군산엔 동국사라는 독특한 절집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백수십 개의 사찰 중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일본 최대의 불교 종파인 조동종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해 역시 이 땅의 수탈과 황국신민화에 앞장섰던 절이다. 지금은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인 동국사 스님과 신도들이 “뼈 아픈 과거사도 엄연한 역사”라며 일제강점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애쓰고 있고 이런 동국사 측의 입장에 동조해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일본인 단체까지 생겨났다. ‘조선 침략 참회기’(이치노헤 쇼코 지음, 장옥희 옮김, 동국대출판부 펴냄)는 바로 그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의 대표인 일본 아오모리현 조동종 운쇼사(雲祥寺) 주지가 지난해 일본에서 펴낸 책의 한국어판이다. ‘일본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나’라는 부제 그대로 이 땅에서 불교, 특히 조동종이 일제와 어떻게 결부해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를 직접 발로 뛰어 발굴한 자료들을 토대로 절절하게 엮은 참회록이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 불교 역시 구한말 외세 강점기 다른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포교의 명분을 내걸고 일제의 수탈과 황국신민화의 적극적인 앞잡이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895년 5월 조동종 종무국이 간행한 ‘조동종무국 보달전서’는 “청일 교전에서 황은에 보답하고 교화를 선포하여 종문의 군사에 대한 충성을 선양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러일전쟁기인 1904년 2월에도 일제의 선전 조칙을 받은 조동종은 즉각 종령을 내려 ‘천황폐하의 옥체강녕·성수무강과 군인의 신체건전·무운장구를 기도할 것’과 ‘충용의 정신으로 군인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설파할 것’ 등을 명령했다. 특히 책을 통해 처음 밝혀지는 몇몇 사건들은 충격적이다. 저자는 명성황후 살해에도 조동종이 깊숙이 관여했으며 살해만행에 참여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라는 조동종 승려는 후에 살해사건의 보상으로 조선 조동종 총괄 자리인 조선포교관리에 취임했다고 밝히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이 아버지의 처형 직후 중국 상하이에 은신해 있던 중 조동종 압력을 못 이겨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의 죄를 눈물로 사죄한 사실도 추적했다. 이것 말고도 경복궁 위패당인 준원전을 옮겨 세운 박문사의 요사채가 80년이 지난 지금 신라호텔 영빈관 파티장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도 고발하면서 가슴 아파한다. 1만 8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아베 시대 한일관계/이춘규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아베 시대 한일관계/이춘규 선임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말 5년 만에 총리에 재취임한 뒤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71%의 높은 여론 지지율도 있다. 강한 일본을 외쳐 온 아베는 취임 뒤 엔 약세와 2% 물가상승 목표를 밀어붙이고 있다. 최근엔 “엔저 과실을 근로자와 함께 나누라”며 재계에 임금 인상을 압박해 장기불황에 찌든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아베의 엔저 유도에 의한 가파른 원화 강세는 자동차나 전자 등 한국 수출 대기업들의 채산성을 위협하고 있다. 식민통치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관련 새 담화를 만지작거리고, 이웃 나라를 배려하는 근린제국 조항을 수정하려고 해 한국인을 자극한다. 북핵을 빌미로 우경화로 치달을 우려도 있다. 아베시대 한·일 관계가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아베(59)가 다시 총리가 된 배경에는 좋은 집안과 출신 지역도 작용한 것 같다.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지역구는 부친이 물려준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 출신 요시다 쇼인은 현대 일본의 틀을 짠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서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다. 극우의 본산 야마구치현은 이토 히로부미에서 아베까지 총리를 8명이나 배출했다. 광역단체 중 최다이다. 아베는 야구선수나 형사를 꿈꾸었지만 가풍 영향으로 정치인이 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 정치가 있었다”고 밝혔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 친조부는 중의원 의원, 부친은 외무상을 지냈다. 이런 지역·가문 출신의 아베는 강한 외교를 추구, 주변국과 충돌 가능성이 크다. 실제 아베노믹스는 미국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지하지만 실패를 경고하는 전문가도 많다. 아베와 비슷한 연배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오는 25일 취임한다. 두 사람은 모두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지지기반도 보수이다. 북핵 상황의 변화는 한·일 협력의 촉진제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의 북한 관련 군사정보는 요긴해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북핵을 구실로 핵무장으로 치달으면 한·일 관계는 최악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뒤흔들린 박 당선인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도 새 틀을 짜야 한다. 역시 북핵은 한·일 관계에 새롭게 떠오른 난제 중의 난제다. 환율 갈등도 한·일 관계 해법을 복잡하게 하는 변수다. 최근에는 변하고 있지만 1980년대 이후 엔고 때는 한국경제가 좋았고, 엔저 때는 나빴다는 실증적 분석이 있을 정도다. 박 당선인은 한 여론조사에서 48%의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인사 논란에 불통 지적까지 겹치며 지지율이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집권 초 낮은 지지율은 쓴 약이 될 수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지지율이 52%로 2차대전 뒤 재임한 미 대통령 중 최저수준이었다. 위기감에 국민과 소통을 강화, 퇴임 직전에는 63%로 빌 클린턴과 선두권을 다투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전한다. 박근혜 리더십도 환율 리스크와 북핵 관리로 시험대에 섰다. 통합과 소통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한·일 관계의 긴밀한 대처에는 국민들의 지지가 절실하다. taei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소금의 격동기 : 쓰러진 사람과 뜬 사람 소금이 넘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소금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러나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소금 1석에 쌀 1석이 맞교환되던 때가 있었다. 소금을 구하기가 어렵고 비싸다 보니 소금에 울고 소금에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특히 구한말은 소금 시장을 둘러싸고 극한 변동이 있었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소금과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 밀려왔고, 일제는 우리나라 소금을 재원으로 하여 식민지 경영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러한 염업사의 격동기는 온몸으로 저항하다 쓰러진 사람과 시류에 편승하여 뜬 사람을 갈라놓았다. 삶의 선택이 자유로운 만큼 역사의 평가가 냉혹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이토 통감 마차 가로막은 꼿꼿한 소금장수 김두원 1907년 10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원산항에 사는 김두원씨가 일인에게 소금값을 찾으려고 여러 해를 호소하더니 일전에 경시청에 잡히어 갇혔다더라.” 소금값을 받으려는 김두원을 경시청에서 잡아 가둔 까닭은 무엇인가? 김두원은 비록 항일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일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고 단단한 육각형의 결정체인 소금처럼 그는 일관되고 굽힘 없이 일제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 저항 방식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핵심 인물을 찾아서 호통을 치는 일이었다. 구속되기 불과 3개월 전인 7월 10일에도 그는 오른손에는 직소(직접 호소한다)라고 쓴 종이를, 왼손에는 편지를 들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마차 앞을 막았다. 일곱 번이나 시도를 하였지만, 한국통치를 위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와의 직접 대화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환갑을 몇 해 앞둔 노인을 이렇게 꼿꼿한 집념의 사나이로 만든 자는 일본인 사기꾼이었다. 때는 8년 전인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소금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거상이었다. 함경도에도 영흥·문천과 같이 소금 생산지가 있었지만, 원산의 거상들은 경상도를 넘나들었다. 강원도와 영남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소금 생산지는 경상도의 김해와 울산이었다. 김두원은 이곳에서 소금을 사서 원산에서 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당대의 소금 시장에서는 파는 자나 사는 자 모두가 신뢰를 기반으로 하였다. 믿음이 한 번 깨진 사람은 다시 상대하지 않았으니 소금 매매는 정말 짜디 짠 상거래였던 것이다. 이런 신뢰의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는 개항 이후였다. 개항 이후로 일제의 전오염(우리나라의 자염처럼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 부산과 원산 등 개항지로 유입되었고, 일본인 상인들도 조선의 소금 시장에 직접 나섰다. 속칭 포대가리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간수가 많은 일본의 저질 소금을 조선의 가마니에 담은 뒤에 조선 소금이라 속여 팔았다. 이런 일본인들을 믿은 것은 김두원의 큰 실수였다. 1899년 5월에도 김두원은 동해안과 낙동강을 오가면서 소금을 매입하여 한 포구에 모아두었다. 이렇게 모은 소금이 자그마치 1088석이었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약 5100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무라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형제가 객줏집에 머문 김두원에게 다가섰다. 고기 절이는 데 소금이 급하게 필요하여 소금값을 후하게 줄 테니 자신들의 배에 소금을 싣고 울릉도까지 가자고 속였다. 보름간의 항해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자 기무라 형제는 김두원에게 소금 짐은 다음 날 하역하고 뭍에 내려 푹 쉬라고 하였다. 순진했던 김두원이 깊은 잠에 든 사이에 사기꾼 형제는 배를 띄워 유유히 동해를 건너 시무라 현으로 사라졌다. 희대의 ‘소금 먹튀’ 사건에 김두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조선의 외부대신에게 청원해 보았지만 이미 쇠멸해 가는 조선 정부는 자국민의 피해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후 김두원은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기꾼들이 이미 징역을 살고 있고, 소금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분기탱천한 김두원은 1903년 일본 공사인 하야시를 직접 찾아가서 소금값을 내놓으라고 고성을 질렀다.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놀란 하야시는 그만 종로의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김두원은 일본 공사뿐만 아니라 조선 통감, 일본 총리, 중의원을 상대로 청원하고 투쟁하였지만, 일제는 소금값을 지불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휼금 얼마를 주겠다며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김두원에게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구휼금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는 경시청 총감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 선박이 홍주군 바윗돌에 부딪혀 파손된 것을 그 바윗돌이 조선에 있다 하여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배상금 3000원을 받아가고, 공주군에 있던 일본인이 조선의 군인과 시비하다 구타를 당하였다고 치료비로 5000원을 받아간 즉, 전례와 같이 나의 소금값도 일본 정부에서 물어내는 일이 당연하다.”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장 20여년에 걸친 배상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정당히 받아야 할 소금값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소금이 물에 녹듯이’ 사라져 갔을 것으로 보인다. ●탁지부 대신 고영희, 소금세 높여 염민에 큰 고통 1907년 10월 김두원이 영문도 모른 채 경시청에 잡혀간 이유는 일본 황태자의 조선 방문 때문이었다. 일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김두원이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고 ‘소금값 배상하라.’고 외칠 것이라 여겼다. 김두원이 일제에 의하여 불법 구금된 동안, 일본 황태자를 극진히 모시고 환영행사를 주관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탁지부 대신 고영희이다. 1849년생인 고영희와 김두원은 서로 나이도 엇비슷했으나 황태자 방문 앞에서 전혀 다른, 반대편의 삶에 서 있었다. 차가운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던 김두원에게 그해 10월은 지옥과 같은 반면, 황태자 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授章)까지 받은 고영희에게는 천국과 같았다. 1867년 역과에 합격한 고영희는 일제의 부상으로 호기를 맞았다. 1876년 김기수 수신사 일행으로서 일본어 통역을 맡아 일본을 시찰한 이후로 그는 순탄한 등용의 길을 걸었다. 1885년 연천 현감에서 사직하면서 잠시 가시밭을 만나는 듯하였으나 1895년 주일공사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관대작의 지위를 한껏 누렸다.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 관리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07년 5월에 출범된 이완용 내각에서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간 쌓아온 탁지부 스펙 때문이었다. 탁지부 대신인 고영희의 주요 임무는 일제가 식민지 재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파견한 고문들을 충실히 돕는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소금을 가지고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1907년 9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4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 4대신이 당시 한적한 어촌인 인천 주안리에 행차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행사를 주관한 자는 탁지부의 고영희와 탁지부 소속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였다. 1907년 우리나라의 인천 주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일염 시험장이 건설되었다. 수천년간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 왔던 조선에서 바람과 햇볕으로 결정되는 천일염업의 등장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천일염 시험장을 건설한 내막에는 ‘불편한 진실’이 깔렸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재원이었다. 일제는 자국에서 담배, 소금 등의 전매제도를 통해서 침략전쟁의 군비를 마련했고, 식민지 타이완에서도 아편, 소금 등을 전매시켜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렇게 상품을 전매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일제에 늘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동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는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었다. 중국산 천일염에 대항하는 방법은 천혜의 갯벌이 깔린 조선의 서해안에서 직접 천일염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공업과 무기산업의 원료가 되었으므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제에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이때 고영희와 메가타 다네타로는 서로 합심하여 주안에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장을 건설함으로써 일제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다. 또 하나, 고영희는 일제의 의도대로 충실히 소금세를 걷어줌으로써 재원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는 소금세가 궁내부에 귀속되어 왕실의 금고로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의 금고를 빼앗기 위해서 먼저 왕실의 금고에 들어가는 소금세를 국가의 금고로 들어가게 했다. 소금세를 많이 매기기 위하여 탁지부를 시켜 염세 규정도 치밀하고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영희의 취임은 일제에는 희소식이었지만 소금 생산자인 염민들에게 큰 악재였다. 소금세가 갑자기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백성의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순사들이 염민들을 잡아들이자 대규모 시위가 뒤따랐고, 이내 일본 군인들의 총칼 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와 탁지부의 강압적 소금세 징수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다. ●매국노 고영희 후손, 친일재산 환수 반환소송 나서 고영희는 일제에 수많은 재원을 넘겨 준 덕에 한평생 영화를 누렸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에 앞장선 그는 이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매년 1600원의 연금을 받기도 했다.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일제가 준 자작 작위는 장남인 고희경에게 세습되었다. 고영희 집안이 대를 이어서 호의호식할 때 소금장수 김두원은 여전히 소금값을 받지 못하고 허망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뜬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영희의 증손자가 국가의 친일재산 환수에 반발하여 반환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반환 소송이라면 억울하게 1088석의 소금을 일인에게 강탈당한 김두원의 후손들이 일본 법정에 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자는 떠들고, 당당한 자는 조용하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란 말인가.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박영효(1861~1939·왼쪽)와 유길준(1856~1914·오른쪽). 두 사람은 19세기 말 조선을 대표하는 개화파였다. 두 사람은 모두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주도한 핵심적 인물이었으며 이미 갑오개혁 이전에 구체적이며 명확한 개혁안을 담은 ‘상소문’과 ‘서유견문’을 각각 집필했다. 당시 조선 내의 권력 지형에서 개화관료들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갑오개혁 기간 내내 협력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대립했다. 왜 그들은 협력이 아닌 대립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남아 유학생활을 하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유길준이 포도대장이던 한규설의 집과 민영익의 별장에서 유폐생활을 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민영익이 유길준을 청과 조선의 보수 세력으로부터 보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유길준은 당시 왕실의 비밀창구로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규설의 숨은 자문역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주로 집필에 전념하여 1889년에 ‘서유견문’을 탈고, 한규설을 통해 고종에게 제출하기도 하였고 몇몇 외교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기도 했다. 이후 유길준은 1894년 6월 당시 민씨 척족을 대표하던 민영준에 의해 ‘일본당’을 대표하여 외아문의 주사로 발탁됐다. 민영준은 일본당을 등용하여 일본 측과의 관계를 개선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유길준은 일본 공사관 측에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한편, 공식적으로는 외아문의 주사로서 일본의 개혁 요구와 속방론 철폐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공사관 측에서는 그가 일부러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려 했다고 파악했다. ●군국기무처를 주도한 유길준 1894년 7월 23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군국기무처를 수립했다. 이때부터 유길준은 갑오개혁의 핵심 브레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격적으로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된 그는 총리대신 김홍집을 직속으로 보좌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본 측에서는 당시 유길준이 군국기무처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찡그린 얼굴, 냉소적인 말, 기염 높은 논의, 대담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로 ‘내정의 신법’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7월부터 10월까지 군국기무처가 진행한 개혁안은 190개에 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했다. 일본의 군사교관을 초빙하는 한편 일본의 화폐 유통권을 허가하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동학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초기에는 일정 정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농민군이 2차 봉기의 움직임을 보이자 10월 중순부터는 무력탄압에 들어가게 됐다. 그 밖에도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를 분리시켜 왕권을 약화시켰으며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시켰다. 사실 이 모두를 유길준이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군국기무처 내에 유길준만큼 근대국가를 직접 체험했거나 체계적인 저술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유길준은 이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대원군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유길준은 10월 일본에 파견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의 파견 및 차관 제공을 요청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무쓰 무네미쓰 외상을 만나 ‘세 가지 수치(三恥論)’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혁이 진행됨으로써 조선 국민, 세계 만국 그리고 후대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을 보전하고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박영효의 귀환 갑신정변 실패 후 박영효는 10년간 일본 망명생활을 하다가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은 박영효를 귀국시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대원군 세력과 개화관료 세력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길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박영효는 개화세력의 대표인물이면서 부마라는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왕실과도 일정한 소통이 가능했고, 망명 중 대원군과도 수차례 접촉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박영효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 후 고종을 알현하여 자신에게 개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원로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이 일본 공사관 측에 항의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단 제물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파견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노우에는 10월 27일 부임하자마자 대원군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조선 왕실의 고문관 또는 ‘외신’(外臣)으로까지 불리며 왕실과 손을 잡았다. 이와 함께 박영효의 기용을 요청했고 결국 12월 17일 김홍집-박영효 연립정부가 출범하게 됐다. 이때 박영효는 내무대신에 임명됐다. 박영효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조선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박영효는 이 시기 개혁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추구한 것은 동학 농민군에 대한 확고한 진압과 일본을 모델로 한 개혁의 추진이었다. 박영효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고하게 하려고 종속관계의 상징물을 파괴하고 태극기를 사용하며 공문서에 한글을 사용하게 했고 독립기념일을 제정했다. 그는 이때 내무대신 직권으로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자를 역적으로 처벌하는 건’을 ‘내무대신령’ 1호를 통해 발표했다. 또한, 그는 지방제도 개편에 심혈을 기울여,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와 331개의 군으로 개편했다. 아울러 경무청관제를 발표하여 무장경찰을 육성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려 했다. 그런데 박영효는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일본 측의 기대와는 달리 김홍집을 ‘줏대 없는 소인배’라며 내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리대신이 될 생각으로 권력투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박영효는 자신의 세력을 지방관은 물론, 군부와 경찰의 요직에 임명했다. 더욱이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맞서 일정하게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박영효는 김홍집을 5월 17일에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총리대신의 자리는 박정양에게 돌아갔다. 다만, 박영효는 내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왜 대립하였을까? 박영효와 유길준. 어찌 보면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일 법한 이들은 실제로는 처음부터 첨예하게 대립했다. 윤치호의 당시 일기에 보면, 유길준은 철저하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박영효와 전면적인 대립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그 사상적 이유는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에서 찾을 수 있다.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을 ‘허명의 개화’를 주장하는 자들로 비판하면서 ‘실상개화’를 제시한다. 그는 허명개화를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혹은 두려워서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비용은 많이 들이면서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분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다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외국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 있는데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개화의 죄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개화하는 데 있어서 폐해는 지나친 것이 모자란 자보다 더욱 심하다고 말하면서 “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개화의 병신”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둘 사이의 정치적 차이도 존재했다. 유길준은 민영익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그를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데려가 미국에 유학까지 시켜 준 사람 또한 민영익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민영익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길준 자신이 갑신정변 후 미국에서 보낸 편지 안에서도 그는 “그들이 군왕에게 충성하고 국가에 진실할 때에는 내 친구들이었으나 그들은 역적이고 나라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큰 원수”라고 써서 보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유길준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1894년 박영효가 다시 등장했을 때 그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길준이 박영효 세력을 ‘개화의 병신’으로 비판한 부분은 1889년에는 없던 내용으로 6년 뒤인 1895년 출간 당시에 새로 써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유길준은 박영효가 개혁을 주도하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개혁관료들의 결집이 절실하던 시절에 치열하게 대립함으로써 결국 모두 몰락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데스크 시각] 동아시아의 슬픈 자화상/박홍환 국제부장

    [데스크 시각] 동아시아의 슬픈 자화상/박홍환 국제부장

    4괘(卦) 대신 바퀴벌레가 그려진 태극기, 불타는 일제 전범기와 짓밟히는 일장기, ×표시가 선명한 오성홍기…. 지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풍경들이다. 서로를 증오하고, 헐뜯고, 밟으려는 동아시아 각국 국민들의 적개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다. 동아시아의 슬픈 자화상이다. 일본과 중국은 센카쿠열도, 한국과 일본은 독도 및 일본군 위안부, 중국과 한국은 역사문제와 탈북자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어느 누구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영토와 역사문제라는 점에서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3국 내부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민족주의로 포장되면서 확대된 측면도 있다. 지금 중국, 한국, 일본은 모두 권력교체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중·일 간에는 전쟁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동중국해에서는 센카쿠열도 주변 해역에 중국과 일본의 관공선들이 몰려들고 있다. 중국이 군함을 파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맞대응에 나섰다는 보도가 꼬리를 문다. 중국의 제1호 항공모함 바랴크함이 오색깃발을 펄럭이며 취역하게 되면 첫 번째 임무는 일본 위협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곧 매캐하고 기분 나쁜 화약 냄새가 동중국해에 진동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들이다. 한·일 간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한국이 일본 선박의 독도 해역 진입을 경계하는 가운데 일본은 한국 군의 독도 훈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양측이 독도 해역에서 맞닥뜨리면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한·중은 또 어떤가. 2010년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한국 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항모를 동원한 대규모 서해 훈련에 나서자 중국은 그들의 ‘황해’ 상에서 대규모 맞불 훈련을 실시해 긴장감을 높였다. 중국인들은 그들 것이 조금이라도 다칠 수 있다는 판단이면 “몽둥이로 때려잡자.”며 상대국 성토에 나서고 있다. 돌이켜보면 100여년 전의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중·일 3국은 서로 상대국을 불신하면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했다.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감췄고, 중국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며, 그리고 ‘대한제국’은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떨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인 2009년과 2010년 랴오닝(遼寧)성 뤼순(旅順)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100주년과 서거 100주기 취재를 위해서였다. 안 의사의 행적을 그대로 뒤쫓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작렬시켜 막 플랫폼에 내려선 일본 군국주의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 이토가 쓰러지자 안 의사는 소리 높여 “만세”를 외친 뒤 저항 없이 러시아 경찰에 검거됐다. 안 의사는 곧바로 뤼순으로 압송돼 일제 형무소의 차가운 1평 남짓한 독방에 갇혔다. 그러곤 재판 과정에서 “이토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이라고 역설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비록 사형집행으로 완성은 못 했지만 자신의 구상이 오롯이 담긴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체 구성,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이 핵심이다. 이 같은 선구적인 안 의사의 구상은 그러나 여전히 뤼순 감옥의 철창 안에 갇혀 있다. 3국은 여전히 불신하면서 언제라도 총구를 겨눌 태세이다. 가해자의 뼈아픈 과거반성이 없었고, 그래서 아픈 역사를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안 의사는 최후의 순간에도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불신의 장막을 걷어내고 서로 보듬으며 동양평화를 이루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까지 동양평화를 희구했던 그의 처절한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언제까지 적대적이고 슬픈 자화상만 그려대고 있을 테냐!”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아 더 슬픈 동아시아의 살풍경이다. stinger@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7월16일부터 18일까지 쓰시마에 다녀왔다. 제주도보다 가까이 있는 이 섬은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풍광이 좋은 고요한 섬으로 남아 있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의 슈젠지(修善寺)에서 고 황수영 선생께서 발의해 세운 ‘대한인 최익현 순국지비’를 보고는 울적해졌다. 정토종의 이 절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는데, 순국비는 그 납골원 어구에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관광 안내문이나 답사 보고문은 대개 최익현이 슈젠지에서 순국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최익현이 함께 갇힌 문생들에게 치포관을 만들어 쓰라고 권했던 엄수영(嚴戍營)은 아니다. 최익현은 엄수영에 갇혀 있으면서 문생들이 상투를 드러낸 채 염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투를 싸맬 크기의 검은 베 조각을 구해 머리를 덮으라고 했던 것이다. 엄수영은 이즈하라에 있던 병영이었고, 슈젠지는 최익현의 시신이 일단 안치됐던 절이다. 광무 10년인 1906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의 감옥에 갇혔다. 최익현은 일본의 문물이 크게 흥성한 것을 눈으로 보았고, 일본의 온순한 통역과 보병들을 만나 보고 타국에도 이웃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최익현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단식을 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쓰시마로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고 훈령을 내렸다. 일본 병사들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오자, 최익현은 사흘 만에 일단 단식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울화증과 풍토병 때문에 반 년 뒤에 병사했다. 슈젠지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최익현의 시신은 부산 초량으로 운구됐다. 1907년 1월 11일의 일이다. 나는 최근 ‘국왕의 선물’을 집필할 때 최익현이 고종의 뜻을 따라 대원군을 탄핵해 고종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지식인들과는 소원해져서 의병을 일으킬 때 호응이 낮았던 사실을 적었다. 위정척사의 논리는 같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적 파벌 의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편 쓰시마 와니우라(鰐浦)의 한국전망대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 정역과 부역이 탄 배가 조난하면서 112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져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쓰시마 도주 소게(宗家)의 문서에서 실려 있는 기록을 근거로 했다면서, 격군은 물론 성씨 없는 많은 종자들의 이름을 추도비 앞의 부비(副碑)에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거기에는 112명 이외에 기록에 없으나 시신을 수습한 한 사람의 이름을 추기해 두었다. 그런데 ‘숙종실록’의 숙종 29년(1703) 2월 19일(갑오)의 기록에 “일본 도해선이 침몰하여 역관 한천석 등 113명이 모두 빠져 죽었는데,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별도로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돼 있다. 곧 한천석 등 113명은 계미사행 때 풍기포(?崎浦)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왜인이 우리 측의 지참 물품을 조사하려 하자 한천석 등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크게 일어나 조난을 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거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을 번역한 책에는 계미를 인조 21년 즉 1643년으로 잘못 설명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는 와니우라에 우리 통신사들이 오가며 조난자들을 제사 지낸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추도비가 선 것은 저들의 호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공동체든 공통의 역사 기억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 결속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은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 학교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게티즈버그의 전몰자 수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게 할 만큼 자잘한 사실까지도 공통의 기억으로 형성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쓰시마는 왜구의 거점이었고, 동아시아 감합무역의 중개 지점이었으며, 교린외교의 흑막 지역이었다. 우리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섬에 대한 역사 기억들을 뚜렷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 “약기편람은 박은식의 ‘한국통사 초고본’ 맞다”

    “약기편람은 박은식의 ‘한국통사 초고본’ 맞다”

    작자 미상으로 1904년 쓰인 것으로 알려진 ‘약기편람’(略記便覽)이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백암(白巖) 박은식(1859~1925)의 ‘한국통사 초고본’으로 최종 확인됐다. <서울신문 3월 14일자 2면> 쓰인 시기는 ‘한국통사’(韓國痛史)가 출간되기 5년 전인 1910년 12월 이후인 것으로 밝혀졌다. ‘약기편람’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김학수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 실장은 26일 “연구원이 소장한 약기편람은 박은식 선생이 1915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통사의 초고본이 맞다.”면서 “써 내려갈 목차에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사건,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 기도 사건 등을 잡아놓은 것을 볼 때 아무리 빨라도 1910년 12월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통사 출간 5년 전 작성… 1915년 출판”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서 서양의 근대적 역사서술 방식을 받아들여 쓴 역사책이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했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달았다. 약기편람은 한국통사 가운데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동학란, 명성황후 폐비 후 복위, 지방의병, 아관파천과 김홍집 정권 등장 등을 써 놓았고, 박승환 순국, 장인환·전명운 의거, 안중근 의거 등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책자다. 김학수 실장은 “지난 3월 14일 서울신문이 보도한 이후 약기편람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해제도 필요 없고, 망설일 것도 없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다만, 백암이 손수 약기편람을 정서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켜 정성스럽게 필사한 것인지는 더 검토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백암의 글씨는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고, 그의 후손들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밝혀, 친필 여부를 감정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기획처장은 “약기편람의 글씨가 아주 가지런한 것이 행서나 초서체로 흘려쓴 백암의 글씨체와는 아주 달라 보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직접 쓴 초고본들도 해서체로 정서해서 아주 가지런하므로, 평소 글씨체와 다르다고 친필이 아니라고 성급하게 단정지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수록 내용 대부분 한국통사와 동일 서울신문은 지난 3월 14일자에서 “약기편람은 현재 저자 미상으로 알려졌지만, 수록 내용 대부분이 한국통사와 동일한 만큼 저자는 박은식이 분명하다.”는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의 주장을 보도한 바 있다. 김 교수는 한국통사(아카넷 펴냄)를 번역해제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우연히 발견해 번역해제본에 이 사실을 발표했다. 김 실장은 “이번에 발견한 초고본은 백암 선생의 한국통사 저술의 과정을 밝힐 수 있으며, 백암 전집을 총체적으로 꾸밀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실장은 약기편람에 대한 서지정보(저자, 출판사명, 출간연도 등 책에 관한 정보)도 이른 시일 안에 바꿔놓겠다고 약속했다. 김 실장은 “학자들을 위해 무엇보다 약기편람에 대한 서지정보를 빨리 바꿔놓고, 열람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면서 “장서각의 보유목록 인쇄물의 수정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터넷 서지정보는 빨리 바꿔놓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훼손된 그리고 사라진 안중근 유묵 미스터리

    훼손된 그리고 사라진 안중근 유묵 미스터리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遺墨)은 200점가량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숫자는 백암 박은식 선생이 1914년 중국 상하이의 대동편집국에서 ‘창해로방실’이라는 필명으로 써낸 전기 ‘안중근’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안 의사가 뤼순(旅順)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5개월간 유묵을 써 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하루에도 몇 점씩 써낸 것으로 전해진다. ●日측 확인에 “천천히 얘기하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 유묵은 57점. 이 가운데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유묵은 50점 정도이며, 기념관이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유묵은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보물 제569-22호) 등 7점에 불과하다. 나머지 현존하는 유묵은 개인이나 대학교, 일본인 등이 소장하고 있으며 총 26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몇해 전 경매에 나왔던 유묵 ‘담박명지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개인 소장)은 5억 2000만원에 거래된 적이 있는데, 글씨 상태가 깨끗한 유묵은 7억~8억원을 호가한다. 문제의 ‘일한교의선작소개’(日韓交誼善作紹介)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2010년 펴낸 ‘대한국인 안중근’의 유묵 현황에 실려 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1986년 원소유자의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인데도 소장인은 ‘일본인’, 보관 장소는 ‘일본’으로 돼 있는데 이는 편집 과정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도록은 유묵에 대해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확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고 적고 있다. 도록에 실린 사진은 윤병석(82) 인하대 명예교수가 2001년 엮어 낸 ‘대한국인 안중근-사진과 유묵’(안중근의사기념관 출간)에 있던 것을 그대로 썼다고 기념관 측은 밝혔다. 2001년판 도록을 보면 유묵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심지어 유묵 왼쪽에 써 있는 ‘경술2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근배´(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경술년 2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삼가 씀)란 글은 원본이 없다면 어떤 문장인지 알 수 없게 훼손돼 있다. 게다가 안 의사가 글을 써 주고 찍었던 수장인(手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도록을 엮은 윤병석 교수는 “2001년 당시 이 사진을 어떻게 입수해 도록에 넣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최 원장과는 잘 아는 사이이지만 유묵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소노키의 둘째 딸 도시코(사망)는 기증 이듬해인 1987년 유묵의 보존 여부를 확인하러 도쿄 미나토구 미타에 있는 연구원을 찾아갔으나, 연구원이 없어져 유묵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묵의 행방을 추적해 온 일본인 작가 쓰루 게사토시(68)도 “소노키 도시코가 기증 이후 유묵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러 연구원을 몇 차례 찾아갔던 상황을 도시코의 딸에게 2009년 직접 들었으며 유족은 ‘연구원 측에 속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쓰루는 ‘천주교도 안중근’(1996년 출간)이란 책을 펴낸 안중근 연구가다. 쓰루는 “3년 전 최 원장에게 전화로 유묵의 소재를 물었더니 ‘한국의 대학 도서관에 있다’고 말해 어느 대학이냐고 재차 물었더니 ‘그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했을 뿐 행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안 의사 유묵 공적관리 필요” 유묵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최 원장은 ‘걸어다니는 박물관’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한·일 관계 서지 수집과 연구의 1인자로 꼽힌다. 안중근 연구에도 조예가 깊다. 최 원장은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안위노심초사’ 등을 원소유자인 일본인을 설득해 기증받은 뒤 기념관에 넘긴 바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최 원장 측에 유묵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현재도 보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고 밝혔다. 최 원장은 ‘일한교의선작소개’ 유묵의 행방을 묻는 서울신문과의 두 차례 전화통화에서 “얘기가 길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밝혔다. “유묵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최 원장이 함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이혜균 기념사업부장은 “유묵의 일한교의(日韓交誼)란 글이 한국보다 일본을 앞세워 일(日)자를 쓴 것에 대해 안 의사가 친일로 매도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말을 최 원장이 하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쓰루 게사토시는 “보관 실수로 유묵이 훼손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사실이 안중근 연구의 대가라는 명성에 먹칠을 할 수 있어 자세한 경위를 밝히지 못하는 것 아닌가.”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최 원장에게 몇 차례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 유묵에 대해 묻자 편지를 보내라고 해서 유묵을 보고 싶다는 취지로 써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고 말했다. 채내희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처장은 “안 의사 서거 102주년을 계기로 최 원장이 ‘일한교의선작소개’의 행방 등에 대해 밝혀 주기를 바라며, 경위야 어찌 됐든 안 의사 유묵 등 관련 자료는 공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성기·문소영기자 marry04@seoul.co.kr ■‘일한교의선작소개’(日韓交誼善作紹介)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체포돼 처형당한 1910년 3월 26일까지 취조, 재판 등에 입회해 통역을 맡았던 소노키 스에키에게 처형 전달인 2월에 써 준 것이다. 유묵은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의거가 이토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한·일 양국이 단결해 동양 평화 유지에 힘써야 한다는 재판 과정과 사형집행 순간의 증언과 일치하는 귀중한 유묵으로 평가된다.
  • 혜문스님이 들려주는 조선왕실 의궤 환수 뒷얘기

    경복궁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이곳 2층에서는 ‘다시 찾은 조선왕실 의궤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7일부터 2월 5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전에는 1922년 조선 총독부가 일본 궁내청에 기증한 뒤 89년 만에 돌아온 조선왕실의궤 81종 167책과 기타도서 69종 1038책 등 조선왕조 도서 150종 1205책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됩니다. 추운 날씨에 평일인데도 전시실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의 표정은 무척 진지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반출도서 앞에서는 안타까움과 안도가 섞인 한숨을 쉬기도 하고 규장각 내부를 재현해 놓은 전시실 앞에서는 방대한 책의 분량에 놀라기도 합니다. 조선왕실의궤가 돌아온 지 한 달 째 되는 5일에는 작지만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의궤를 환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스님과 관계자들이 직접 나와 관람객을 맞았습니다. 특히 혜문스님은 구수한 입담으로 의궤의 의미를 설명하고 반환과정에 있었던 뒷얘기를 들려줘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왕실의궤는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설명해 주는 궁중 의식과 행사 등을 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뤄진 의궤 귀환의 의미는 더욱 큽니다. 조선왕실의궤의 환수와 전시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를 되찾을 수 있는 전기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글 / 이호준 선임기자 sagang@seoul.co.kr 영상 / 장고봉PD goboy@seoul.co.kr
  • “安의사 31살때 이토 저격… 저는 안중근役 꿈 이뤘죠”

    “安의사 31살때 이토 저격… 저는 안중근役 꿈 이뤘죠”

    지난 25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 2년 만에 뮤지컬 ‘영웅’의 조연 ‘조도선’에서 주연 ‘안중근’이란 새 옷을 갈아입은 배우 조휘(30·본명 조성범)의 공연이 시작됐다. “극 중 거사(이토 히로부미 저격)를 치른 뒤 교도소에서 어머니가 직접 지어 주신 수의를 입고 장부가를 부르며 혼자 사형대로 걸어가는데 평소보다 더 눈물이 나고 힘들더라고요. 커튼콜 때는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노래를 못 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초연 멤버 정성화와 더블 캐스팅 된 안중근 역은 그가 데뷔 9년 만에 따낸 대형 뮤지컬의 첫 주인공이다. 2009년 안중근 역을 노리고 ‘영웅’ 오디션에 응시했지만 돌아온 배역은 조연(안중근의 동지 조도선)이었다. 안중근의 커버 배우(주연배우가 부득이하게 무대에 오르지 못할 때 대신하는 배우)로 기회를 엿본 지 2년 만에 주연으로 당당히 선 것이다. ●뉴욕 공연길 제작사에 “기회 달라” 고려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조휘에게 부모님은 안정적인 교사의 길을 걷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반드시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했고, 스스로도 이를 악물고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 그와 그의 가족이 2011년 크리스마스에 10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휘는 “초연 때 커버 배우를 한 만큼 앙코르 공연 땐 내심 안중근 역할을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정성화 선배, 양준모 선배, 신성록씨에게 주인공이 돌아가 다시 한번 열심히 커버 준비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8월 ‘영웅’ 팀이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했을 때도 내심 기대를 했단다. 정성화 단독 주연으로 공연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없었다. “뉴욕 공연 길에 오르기 전에 제작사에 얘기했어요. 안중근으로 무대에 오를 기회를 달라고요. 제가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2012년 새 시즌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오디션에 응모했다.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20대 후반에 안중근 역에 처음 도전하고 실패한 뒤 결심했어요. 안 의사가 31살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듯 저 또한 31살이 됐을 때 안중근 역을 꼭 꿰차기로 말이죠.” 그는 우리 나이로 31살 끄트머리에 그토록 바라던 안중근이 됐다. ●‘지킬 앤 하이드’ CD 튕겨날 때까지 노래연습 “오디션에 합격하고서 안 의사의 사진을 전부 휴대전화에 저장했어요. 걸을 때마다 꺼내 봤지요. 유년 시절, 청년기, 결혼식 직후, 독립운동 시기, 거사 직후, 사형당하기 직전의 모습들을 보면서 안 의사의 얼굴이 매번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닮아 가려고 노력했는데 사람들이 진짜 닮았단 말을 많이 해요.” 그러고 보니 수염부터가 안 의사와 무척 닮았다. 처음엔 분장용 수염인 줄 알았는데 안 의사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수염을 그렇게 길렀단다. 걸음걸이도 대한의군 참모중장(안 의사의 생전 직책)처럼 씩씩했다. 차분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안 의사가 거사에 성공하면 (자신이 죽인)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허락해 달라고 나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더라고요.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라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판단해 천주교 교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천도교 신자이지만 3개월째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천주교 교리 수업을 듣고 있단다. 조휘의 ‘안중근’에 호평이 쏟아지는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2002년 데뷔 이후 오디션에 수없이 떨어졌다.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는 2년 동안 노래와 춤 연습에 매진했다. 언젠가 꼭 도전하고 싶다는 ‘지킬 앤 하이드’도 CD가 튕겨 나갈 때까지 듣고 또 들으며 노래 연습을 했다. 소속사 연습생으로 들어가서도 매일 연기 연습을 한 뒤 밤 11시가 넘어 집으로 향했다. ●오디션 숱하게 낙방… 눈에 띄려 이름 외자로 “삼각김밥으로 뒤늦은 저녁을 때우며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면서 울기도 많이 했다.”는 그는 “전략적으로 지은 예명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며 웃었다. “숱하게 오디션에 떨어지면서 느낀 건 응시자들 이름이 대부분 세 글자란 거였어요. 외자로 하면 눈에 띄겠구나 싶었죠. 빛날 휘(輝)를 선택했지요.” 이름처럼 그는 ‘빛나는’ 배우가 됐다. “더 갈고닦아 사람들이 이름만 듣고도 표를 예매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조선왕실의궤 등 6일 반환 완료… 107책 유일본 추정

    조선왕실의궤 등 6일 반환 완료… 107책 유일본 추정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강제 반출된 조선왕실의궤 등 147종 1200책이 6일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로써 앞서 돌려받은 3종 5책을 포함해 일본 궁내청 소장 우리 도서 150종 1205책이 100년 만에 완전히 돌아오게 됐다. 이 가운데는 조선왕조 의궤도 81종 167책 포함돼 있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5일 “일본 정부가 한·일 도서협정에 따른 반환 시한인 오는 10일에 앞서 6일 오후 도서를 반환하겠다고 알려 왔다.”며 “양국이 합의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반환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8월 간 나오토 당시 일본 총리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도서반환계획을 발표한 지 1년 4개월 만이다. 도서는 두 차례로 나눠 6일 오후 일본 나리타 공항을 출발해 3시 35분과 4시 35분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대한항공 KE702편과 KE704편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온다. 1차분이 도착하면 항공기 계류장에서 ‘하역도서 영접’을 하고 이어 국군의장대와 전통의장대, 취타대 등 90여명으로 구성된 행렬단의 환영 속에 ‘환영의전 및 안착식’이 열린다. 박석환 외교통상부 1차관과 무토 마사토시 주한 일본대사가 인수인계를 확인하는 구상서도 교환한다. 영접행사가 끝나면 도서는 문화재 전문 무진동 수송차량에 실려 경찰 호위를 받으며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운송된다. 이번에 돌아오는 의궤는 192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기증하는 형식으로 실어 낸 것이 80종 163책으로 가장 많으며 나머지 1종(진찬의궤) 4책은 궁내청이 사들였다. 특히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실어 낸 도서가 66종 938책으로 절대다수다. 이토는 1906~1909년 ‘한·일 관계상 조사 자료로 쓸 목적’을 내세워 규장각본 33종 563책과 통감부 채수본(采收本) 44종 465책 등 77종 1028책을 실어 냈다. 이 가운데 이미 11종 90책은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에 따라 반환됐으며 이번에 남은 66종 938책이 반환된다. 이로써 이토 반출 도서는 모두 반환된다. 이들 중 5종 107책은 유일본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조선왕실의궤 등은 프랑스에서 얼마 전에 ‘5년 단위의 대여’ 형식을 빌려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와는 달리 그 전부가 문화재보호법 적용대상이다. 이들 도서를 반환하는 형식을 둘러싸고 양국 정부는 줄다리기 끝에 ‘인도’로 정했다. 일본 정부가 모든 소유권을 한국 정부에 넘겨주는 것으로 프랑스 정부가 여전히 소유권을 쥔 외규장각 도서와는 다른 부분이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실 도서가 100년 만에 무사 귀환했음을 알리는 환수 고유제를 오는 13일 오전 11시 종묘 정전에서 연다. 이어 27일부터 내년 2월 5일까지 고궁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어 일반에 공개한다. 김미경·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열린세상] 국회에 예산안 심의 권한 줘야 하나/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열린세상] 국회에 예산안 심의 권한 줘야 하나/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 국회의 막장은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지난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최루탄을 투척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단독 처리를 막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국회의원에게는 국회 내에서 직무상 발언과 표결에 대한 면책특권만을 인정할 뿐 국회가 치외법권 지대도 아닐진대, 국회의원들의 폭력적 몰상식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그런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본회의장에서 최루탄까지 터지는 사상 초유의 경색정국에서 과연 내년도 예산안이 법정기한 내에 정상적으로 처리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겪어 왔던 국회의 예산안 심사 파행의 악몽이 또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당장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한·미 FTA 단독처리를 이유로 모든 의사일정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고, 지난 21일 가동됐던 예산결산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가 본격적인 논의를 해보지도 못하고 중단된 상태이다. 알다시피 예산안 심사는 해당 상임위와 예결특위,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법에 명시되어 있는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 2일까지이다.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예산안 처리의 법정시한을 지킨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헌정 사상 최초의 준예산 편성사태 직전까지 갔던 18대 국회는 결국 마지막 예산안 심사까지도 법정시한을 지키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법정시한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라는 형식적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산안 처리가 법정절차를 지키지 못하고 파행적으로 처리된다면, 예산안에 대한 철저한 심사는 기대조차 할 수 없고 결국 막판에 시간에 쫓겨 졸속처리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는 것이다. 예산안 심사는 국민들이 납부한 세금이 국가살림에 어떻게 쓰이게 되는지를 심사하는 것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가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역할 중 하나이다. 예산안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부실하게 날림 심사를 하는 것은 나라 살림을 적극적으로 거덜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 국가예산은 민생경제 및 서민생활 안정, 서민복지, 일자리 창출 등 서민·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사업 예산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예산안의 심사는 지원이 필요한 분야에는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예산이 편성·집행될 수 있도록 하고, 과대 계상되거나 당장에 불필요한 분야는 예산을 줄이거나 없애는 조정을 통하여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한의 서민복지가 실현되도록 하는 첫 단추이자 마지막 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예산안 처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날림처리하는 것은 국민생활안정과 서민복지실현을 직접 방해하는 무책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우리나라 경제사정 역시 어렵고 내년에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정책의 집행과 국가성장동력 산업에 대한 적시적 지원을 위해서라도 예산안의 안정적 처리가 매우 중요하다. 이처럼 중요한 예산안을 법에 따라 처리하지 못하고 파행적으로 처리한다면 이미 만연해 있는 국회무용론에 더욱 힘이 실릴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쏜 열사의 심정으로 최루탄을 던질 것이 아니라 예산안 처리에 자신들의 열정과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만 급급하고 예산안 처리를 정치적 이해득실로만 여기는 국회에 예산안의 심의 권한을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법학자인 필자로서도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권한 행사의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권한 행사를 포기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차제에 헌법을 개정하여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된 예산안 처리기관을 창설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권력분립 원칙과 국회의 역할을 연구하는 공법학자인 필자 스스로도 이 주장이 얼마나 과격한 것인지 잘 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까지 할 정도로 국회는 예산안 처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파렴치한 모습들을 보여 왔다. 필자의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될 수 있도록 이번만큼이라도 여야가 뜻을 모아 예산안을 법정시한 내에 꼼꼼히 심사·처리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최루탄 터뜨린 김선동 “무력한 소수 야당…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최루탄 터뜨린 김선동 “무력한 소수 야당…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22일 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직권상정, 강행 처리에 반대하던 도중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려 현장에서 체포된 김선동(44) 민주노동당 의원은 민노당 사무총장 출신의 강경파다. 김 의원은 최루탄을 터뜨린 뒤 기자들과 만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심정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라고 희희낙락하는 한나라당 체제의 국회를 폭파하고 싶다.”면서 “독약이 가득한 한·미 FTA를 통과시킨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을 응징해 달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무력한 소수 야당이지만, 경제사법주권이 유린당하는 현실에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국회의원으로서 역사와 국민 앞에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면서 “망국적 협정문이 통과되지 않도록 국민 여러분이 힘을 모아 달라. 처벌은 기꺼이 받겠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의 최루탄 투척은 형법상 ‘국회 회의장 모욕죄’에 해당한다. 형법은 138조에 국회 심의를 방해 또는 위협할 목적으로 국회 회의장이나 그 부근에서 모욕 또는 소동을 일으킨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전남 고흥 출신의 김 의원은 지난 4·27 재·보궐 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전남 순천에서 당선,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다. 1988년 ‘광주학살진상규명을 위한 미 문화원 점거 투쟁’을 벌인 바 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일본인들 “사흘간 한국인 죽일수 있게 해달라”

    일본인들 “사흘간 한국인 죽일수 있게 해달라”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격분한 일본인들이 사흘동안 한국인들을 죽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자국 정부에 촉구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4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고문서 전시회에는 안 의사의 의거 이후 극명하게 갈린 한국과 일본의 반응, 러·일 관계 등 국제정세까지 묘사된 러시아 역사기록보존소(RGIA)의 문서 111건이 전시됐다. 이에 따르면 서울 주재 소모프 러시아 총영사는 1909년 11월 6일 자국 외무부로 보낸 비밀전문에서 “한국인들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만족스러워했지만 그 감정을 터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또 다른 전문에서는 “이토 저격 사건이 한국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크게 고무시키고 있다.”고 썼다. 반면 일본 도쿄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 직원이 보낸 전문에는 “일본인들은 이토라는 위대한 정치인을 잃은 데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일본 언론들은 사흘간 한국인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러시아 외교관들은 이 저격이 러·일 관계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중국 베이징 주재 공사는 “일본이 러시아를 비난하지는 않고 있지만 러·일 관계의 냉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면서 자국이 이토의 장례식에 조문단을 보내야 한다고 건의했다. 러시아의 문서들은 대체로 안 의사를 ‘살인자’ 또는 ‘범죄자’라고 표기했다. 반면 친러 정책을 취했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는 ‘공작’ 또는 ‘희생자’라고 표현했다. 한편 이 문서들은 러시아 고문서 전시회를 계기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받았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서울신문 보도 그 후] 안중근 의사 시복시성 본격 추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숨지게 한 안중근(1879-1910) 의사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31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 따르면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551명을 천주교 최고 명예인 성인 반열의 전 단계인 시복 대상자로 선정해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 명단을 제출했다. 주교특별위에 건네진 시복 추진 대상자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24명과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527명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천주교 안팎에서 시복시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안 의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층 더 활기를 띨 전망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은 이와 관련, 서울대교구 주간 소식지 ‘서울주보’ 최근 호를 통해 “서울대교구 시복시성 준비위원회가 기초 조사와 여러 차례의 회의를 거쳐 551명을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천주교 주교회의 주교특별위가 “서울대교구로부터 받은 명단이 최종 명단은 아닌 만큼 자료 수집 과정에서 대상자에 변동이 있을 수 있다.”고 밝힘에 따라 교황청에 제출할 시복시성 대상 최종 명단에 안 의사가 포함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교구가 의욕적으로 주교회의에 안 의사를 대상자로 올린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안 의사는 1895년 세례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한 뒤 황해도 해주와 옹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가된다. 그런 신앙 활동과는 달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살인 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천주교에서 배척되다 순국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3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임이 공인됐다.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집 나간 부처가 돌아왔다’를 사자성어로 하면 뭘까.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이승에서 본래의 자리가 어딘지 몰라 우왕좌왕 헤맨다고 한다. ‘금강경’에 그 뜻을 풀이해놨다.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그에 따른 조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 이른 시일에 인도하겠다.” 이는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4년간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한·일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협력해 이루어 낸 한·일관계의 중대한 일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 스님이 있었다. 일본 최고 두뇌 집단이라고 하는 도쿄대를 끈질기게 상대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고, 일본 권력의 중심인 일본 왕궁에 직접 들어가 조선왕실의궤를 목격한 뒤 반환의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혜문 스님은 이 밖에도 도쿄 시내 오구라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 ‘평양율리사지 오층석탑’ 환수 등 북한까지 포함시켜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문제로 그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오류 바로잡기’ 운동가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예가 있다.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잘못된 번역이다. 하여 당국에 정정 신청을 내 ‘송어’라고 교과서에 고쳐놨다. 국보146호 청동방울은 당초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추적 끝에 강원도가 아닌 충남 논산으로 올바르게 돌려놨다. 안동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은 안동군수가 심었다는 것도 그가 새롭게 밝혀낸 일이다. 도산서원 준공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서 금송을 심었는데 겨울이라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겁을 먹은 안동군수가 몰래 금송을 사다가 심었다는 것. 또 있다. 명성황후가 생전에 쓰던 표범가죽 양탄자의 행방을 찾아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던 조선시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과 백백교 교주 머리의 보존 중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렇다면 스님이 이런 일을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나 그 까닭을 먼저 물었더니 ‘환지본처’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다시 “그래도 꾸준히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을텐 데요.”라고 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교수나 공무원이 독립운동하는 것 봤냐고 말입니다.”라며 크게 웃는다. 그렇다면 문화재 환수를 위해 그동안 일본에만 40여 차례 오갔는데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했다. “다 부처님 것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구, ‘도 닦은 스님’에게 괜히 물어봤나 보다. 이렇게 그의 말은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그랬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은 어떻게 벌이게 됐을까. “2003년 저희 은사 스님인 철안 스님께서 경기도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 철안 스님은 불교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셔서 봉선사의 관할 사찰 중 27개의 전통사찰에 대한 문화재 현황 파악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멸실된 문화재의 현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지요. 예를 들어 현등사 사리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됐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유통경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흩어진 문화재를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탄력을 받은 혜문 스님은 ‘한·일협정 문서공개’와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1432점의 문화재를 돌려받고 문화재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한·일협정 문서는 일부만 공개됐다가 2004년 완전 공개되는 과정에서 과연 1432점의 반환 문화재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 문화재적 가치가 의심되는 것들을 보고 졸속 협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다. “때마침 그 무렵 일본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요. 신물(神物)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문득 느꼈습니다. 일왕 궁내청에서, 1922년 진상품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버린 ‘조선의궤-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를 봤을 땐 더욱 그랬습니다. 원래의 소장처를 나타내는 ‘오대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요. 색을 화려하게 배합해 그려진 갖가지 그림은 1895년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무려 2년 2개월에 걸쳐 치러진 생생하고도 슬픈 ‘국장의 기록’들이었습니다.” ‘보인소의궤’란 책이 눈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단다. 고종 13년(1876),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발생한 화재로 조선의 옥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종은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도록 명령, 각종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의 제작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바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로 이는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국새’ 제작도 ‘보인소의궤’에 근거해서 제작된다고 한다. 스님은 또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의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의궤인 ‘대례의궤’란 책을 봤을 때도 ‘신물의 부름’으로 울컥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한·일 간 피로 피를 씻었던 사건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의병,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반일운동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살고 있는 봉선사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신물의 부름이 아니겠습니까.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도’를 후쿠오카에서 봤을 때는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국부검사를 자행한 기록 ‘에이조 보고서’를 입수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고종의 갑옷과 투구 반환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대로 내려오던 임금의 투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군대가 싸울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것과 같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스님은 여러번 강조한다. “조선시대 군사권력의 최고 상징인 투구, 정치권력의 최고 상징인 임금의 관모 익선관(翼善冠·높이 19㎝)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아직까지 인질처럼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스님이 던지는 말문마다 조목조목 비장함이 서려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까지 친일 논쟁만 했습니다. 누가 친일을 했느니 안 했느니 말입니다. 일본에서 들은 얘기지만 2000년 이후에야 직접 도쿄에 와서 ‘우리 문화재 내놓으라’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당국은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장본인이거든요. 사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북·일 수교 때 대대적인 문화재 반환을 약속받아야 하는 것도 지금부터 바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은행에 있는 징용 노무자 공탁금 4조원이나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 등도 말입니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50가지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10가지밖에 못 했다.”며 웃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조경과 석등이 일본식으로 돼 있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중국 갑옷과 일본도를 차고 있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실의궤도 원소장처인 오대산 제자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무렵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오늘 화장을 하는데 염불하러 가야 한다.”며 바삐 자리를 떴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혜문 스님은 1998년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에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1년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에서 진제 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를 한 이래 봉선사에서 정진하고 있다. 2004년 일본 교토 유학 중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음을 확인한 후 ‘조선왕조실록환수위’를 구성, 반환운동에 앞장섰다. 2006년 9월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조직해 4년에 걸친 운동을 전개, 일본 정부로부터 1205점의 문화재를 반환받게 했다. 그 외에도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약탈했던 ‘표범카펫’의 행방에 문제를 제기, 60년 동안 박물관수장고에 있던 것을 찾아냈으며 보스턴미술관 소장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운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과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등을 맡고 있다.
  • 눈물 흘린 박근혜, 조카 은지원 만나다…

    눈물 흘린 박근혜, 조카 은지원 만나다…

    내년 총선·대선의 바로미터가 될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인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2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날이다. 1979년 궁정동 대통령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 외에도 1909년엔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대선급 광역단체장 선거로 불리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포함해 전국 42개 선거구에서 재·보선이 실시된 날로 기억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와 동생 지만씨 등 유족들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인 나경원 후보와 친박(친 박근혜)계 의원 30여명이 참석해 고인을 추념했다. 박 전 대표는 추도식 시작 10여분 전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식장을 찾았고, 뒤이어 나 후보가 도착하자 반갑게 악수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박 전 대표는 옆자리의 지만씨를 한 칸 옆으로 이동하게 한 뒤 나 후보를 유족석에 앉도록 배려했다. 초박빙의 선거구도로 인해 살인적인 선거일정을 소화해낸 나 후보는 전날 저녁 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추도식 참석 의사를 밝힌 데 이어 이날 오전 중구 신당2동 장수경로당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한 뒤 선대위의 강승규·이두아 의원 등과 함께 현충원을 찾았다. 그는 선거전 ‘강행군’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꼿꼿한 자세로 추도식을 지켜봤다. 지만씨는 유족 인사말을 통해 “아버지는 부의 양극화를 염려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생각했다.”며 “국민 모두에 공평한 기회를 통한 선진 복지국가 건설이 아버지의 꿈이었다.”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이어 박세환 재향군인회장이 울먹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거 사례를 말하자 박 전 대표도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입술을 굳게 깨물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다. 박 전 대표는 추도식 전후 간간이 나 후보와 대화를 나눴고, 유족 인사말이 끝난 뒤 묘소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나 후보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등 예를 갖췄다. 박 전 대표는 헌화와 분향을 마친 뒤 “(유족 대표로서) 저는 여기 남아서 오신 분들 손을 일일이 잡아드려야 한다.”면서 나 후보를 배웅했다. 특히 추도식에는 박 전 대표의 조카인 가수 은지원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은지원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 누나의 손자로, 박 전 대표가 은지원의 5촌 당고모다. 이외에도 이해봉 허태열 안홍준 유정복 이성헌 이혜훈 정희수 최경환 구상찬 김옥이 배영식 손범규 이진복 이학재 이한성 조원진 허원제 의원 등 친박계 의원 30여명이 참석했고 조문객도 4000명에 육박하는 등 예년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전광삼·이재연기자 hisam@seoul.co.kr
  • 잔존 친일파 한국을 위협한다

    한·일 과거사 청산은 가해자 일본의 반성과 그에 따른 보상·배상의 요구가 주를 이룬다. 침탈과 유린의 죄가에 대한 물음이고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그런 청산 요구의 한켠에는 늘 ‘그러면 우리는?’이라는 자문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부터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과거의 아픔과 잘못에 대한 자책인 것이다. 물론 그 자책은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친일파의 건재와 후유증 때문이다. ‘친일파는 살아 있다’(정운현 지음·책보세 펴냄)는 정색하고 친일파의 문제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언론사에서 20여년간 근무하다가 2005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3년간 맡았던 언론인 출신. 줄곧 친일 문제 연구에 천착하며 ‘친일파’ ‘창씨개명’ ‘증언 반민특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반민특위 재판기록’ 같은 친일 관련 저작을 세상에 발표해 온 친일 문제 전문가로 유명하다. ●친일청산 실패 후 활개치는 친일파 고발 새 책 ‘친일파’는 정씨가 지금까지 발표해 온 친일 관련 책들의 종합 편이다. 친일파가 생겨난 배경과 친일 행적이 낳은 해악, 그리고 여전히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친일의 잔재들을 날 선 글로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생소한 이야기가 아닌 춘원 이광수와 평론가 김문집의 창씨개명을 둘러싼 변절을 비롯해 신사참배에 앞장서거나 방조했던 종교계, 그리고 일제에 조력하거나 등에 얹혀 몸집과 세력을 키웠던 기업인들…. 물론 그 많은 친일의 등장과 활보를 가능하게 했던 바탕은 위정자들이다. 세상의 변화에 가파르게 몸을 돌려 타협하고 살아남은 그 사람들을 정씨는 서슴없이 ‘민족반역자’로 부른다. ●“일제통치를 축복이라는 사람 한둘이 아냐” 책은 단순히 친일파를 까발리거나 색출해 열거하는 고발의 측면에 머물지 않는다. 책 제목 그대로 해방 후 친일의 단죄와 처벌에 실패했던 ‘반민특위’의 좌절 이후 그 잔존 세력들의 부활과 기세등등한 활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특유의 꼿꼿한 필치로 풀어 나갔다.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와 일평생을 독립 투쟁에 바친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자가 버젓이 행세하고 대학교수 가운데는 ‘일제 통치는 축복이었다’고 해괴한 주장을 늘어놓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장삼이사는 어떠하겠는가.” 서문에서 밝힌 저자의 변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청산한 중국과 북한, 또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나치 협력자를 처단한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이런 문제로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는 저자는 그래서 대한민국을 ‘친일공화국’이라고 말한다. 1만 9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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