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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밸런타인데이?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인식 확산

    밸런타인데이?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인식 확산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네티즌들 개념있네 14일을 ‘연인들의 날’인 밸런타인데이가 아닌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14일은 여성이 좋아하는 남성에게 초콜릿 등을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네티즌 등을 중심으로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이기도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날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이 날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를 저격한 뒤 러시아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는 6회에이르는 재판 끝에 이듬해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은 3월 26일 집행됐다.
  • [씨줄날줄] 안중근 의사와 밸런타인데이/서동철 논설위원

    솔직히 말해서, 초콜릿 한 쪽도 구경 못하는 밸런타인데이는 즐겁지 않다. 며칠 전부터 동네 편의점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온갖 종류의 초콜릿을 보면서 조금 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약삭빠른 상혼이 서양에서 들어온 근본 없는 이벤트의 의미를 부풀려 지갑을 털어가는 날이 바로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격 수입된 것은 몇십 년에 불과하다고 해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벌써 밸런타인데이에 반응한다. 적절치 않은 비유일 수 있겠지만,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신일도 처음부터 성대한 축제는 아니었을 게다. 애써 무시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이제 웬만큼 나이 먹은 이들에게도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날은 아니다. 하물며 한창 설레는 마음으로 두근두근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날은 어쩌면 연중 어느 명절보다도 중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올해는 모든 걱정을 잊고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기에는 조금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밸런타인데이인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의 추모 열기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빗나간 과거사 인식이 온 국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만큼 안 의사가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구나 일본은 동북아시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정당하게 사살한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밸런타인데이는 안 의사의 사형선고일’이라는 내용으로 그제 아침 도하 각 신문의 1면에 실린 경기도 교육청의 광고는 시의적절했다는 생각이다. 광고를 보는 순간 그동안 안 의사 사형선고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면 과장이지만, 조금 켕기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안 의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부각되고,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 또 하나의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 잡는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렇다고 ‘경건해야 할 안 의사 사형선고일에 초콜릿을 주고받으며 사랑놀음이나 하겠다면 창피하지 않은가’ 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안 의사 사형선고일과 밸런타인데이는 정월 대보름과도 겹쳤다. 어떤 이에게는 정월대보름의 의미가 더 클 수도 있다. 안 의사를 추모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고, 전통명절의 풍속을 이어가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선진 사회일 것이다. ‘애국’, ‘독립’, ‘용기’, ´의지’를 하나씩 담은 ‘안중근 초콜릿’을 남자친구에게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도 의미 있지 않은가.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이상화 때문에 ‘인기몰이’ 中 왕베이싱, 알고보니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이...

    이상화 왕베이싱 예니 볼프 2010년 밴쿠버에서 시작된 ‘빙속 여제’ 이상화(25·서울시청)의 금빛 질주가 러시아 소치까지 이어지다 보니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이번에도 2인자의 설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대회 2연패에 성공한 이상화가 또다시 시상대 꼭대기에 오른 12일 소치 아들레르 아레나. 한때 ‘여제’라고 자부했던 예니 볼프(35·독일)와 왕베이싱(29·중국)은 이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예니 볼프, 왕베이싱 두 사람은 이상화가 올림픽 2연패와 4연속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최강자로 떠오르기 전까지 당대를 주름잡았던 선수들이다. 실력에 앞서 미모로 국내에서 화제가 된 왕베이싱 선수는 사실 알고보면 역대 월드컵에서 12개의 금메달, 세계선수권대회 500m에서 은메달만 5개를 수확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왕베이싱 선수는 이번 대회 1차 레이스에서 37초82로 6위에 그친 뒤 2차 레이스에서는 오히려 37초86으로 뒷걸음질 치며 7위에 머물렀다. 왕베이싱 선수는 그러나 이상화의 2차 레이스 파트너로 접전을 펼쳐 이상화의 금메달 획득에 값진 도움을 주었다. 이상화도 금메달 획득 후 왕베이싱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왕베이싱은 지난해 결혼한 유부녀로 헤이룽장성 하얼빈이 고향이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이다. 예니 볼프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나 500m 세계기록을 갈아치웠다. 2002년 카트리오나 르메이돈(캐나다·37초22) 이후 5년 동안 멈춰 있던 기록의 시계를 다시 돌린 예니 볼프는 2009년 37초00까지 세계기록을 단축, 새 시대를 열어젖혔다. 1998~99시즌부터 16시즌 동안 예니 볼프가 월드컵 500m에서 따낸 금메달만 무려 49개. 이상화가 10시즌 동안 따낸 금메달 22개의 곱절이 넘는다. 2012년 캘거리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36초94를 기록하며 여자 500m 사상 최초로 37초의 벽을 무너뜨렸던 위징(29·중국) 또한 이상화의 2연패를 저지할 라이벌로 꼽혔지만 부상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지도 못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왕베이싱 장백지 닮은꼴, 한국 흔들었다...안중근 의사와 인연도 화제

    왕베이싱 장백지 닮은꼴 ’빙속여제’ 이상화의 금메달 획득에 큰 공을 세운 중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스타 왕베이싱(29)이 12일 국내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일단 왕베이싱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청순 미모. 홍콩 배우 장백지와 비슷한 외모로 국내 인터넷에서는 ‘왕베이싱 장백지 닮은꼴’이 하루 종일 검색어로 유지됐다. 하지만 이에 앞서 왕베이싱은 2010년 미국 스포츠 웹진 블리처리포트가 선정한 최고의 미녀스타에서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사실 왕베이싱은 외모 뿐 아니라 역대 월드컵에서 12개의 금메달, 세계선수권대회 500m에서 은메달만 5개를 수확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1차 레이스에서 37초82로 6위에 그친 뒤 2차 레이스에서 오히려 37초86으로 뒷걸음질 치며 7위에 머물렀다. 왕베이싱은 그러나 이상화의 2차 레이스 파트너로 접전을 펼쳐 이상화의 금메달 획득에 값진 도움을 주었다. 이상화도 금메달 획득 후 왕베이싱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왕베이싱은 지난해 결혼한 유부녀로 헤이룽장성 하얼빈이 고향이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이다. 왕베이싱에 대해 네티즌들은 ”왕베이싱 장백지 닮은꼴, 누군지 정말 잘 표현했다”, “왕베이싱 장백지 닮은꼴, 이상화와 선의의 라이벌 관계 잘 유지했으면 좋겠다”, “왕베이싱 장백지 닮은꼴, 앞으로도 172cm 훤칠 미녀 활약 기대한다” 등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아베 “안중근은 사형판결 받은 인물” 공식 답변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로 공식 지칭했다. 일본 정부는 4일 “안중근은 내각총리대신이나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로 알고 있다”는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 명의의 답변을 내각회의에서 채택해 중의원에 제출했다. 아베 내각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것이 정부의 공식 견해인지, 일본 정부의 인식은 어떤 것인지를 묻는 신당대지 소속 스즈키 다카코 중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또 중국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설치된 것과 관련해서는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협력 구상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나라(일본)의 우려를 지금까지 누차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에 전달했음에도 기념관이 건설된 것은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아베가 참배한 요시다 연구 전무… 한국역사가 日우경화 방조한 것”

    “아베가 참배한 요시다 연구 전무… 한국역사가 日우경화 방조한 것”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들(요시다 쇼인과 도쿠토미 소호)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가장 큰 피해국인 한국이 오늘 일본의 우경화를 방조하는 행위가 된다.”(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1905년 을사늑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원천무효였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에 의해 강박된 1907년 광무 황제의 황위 이양은 유효했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들도 좀 더 논리적 정합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김명섭 연세대 교수) 2010년 한일병합조약 무효 선언을 내놓았던 한·일 지식인들이 27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동북아역사재단에 다시 모였다. 이날 ‘2010년의 약속, 2015년의 기대’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 참석한 지식인들은 현 한·일 상황에 대한 문제를 진단하고, 제안을 내놓으면서 발전적인 양국 관계 설정을 모색했다. ‘근대 일본 한국 침략의 사상적 기저’를 주제로 발표한 이 교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관과 행보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요시다 쇼인과 도쿠토미 소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2013년 8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대신 요시다의 묘소를 선택한 것을 한국 언론들이 ‘개인적 취향’으로 판단한 것을 두고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요시다 쇼인은 기토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한국 침략에 수훈을 세운 인물들의 스승”이라면서 “그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정한론(征韓論)을 일본이 나아갈 길로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정한론은 1870년대 일본정계에 일었던 조선 침략론을 일컫는다. 그는 아베 총리가 지난해 말 야스쿠니 신사를 찾은 것에 대해서는 “기습적인 기획이 아니라 정확한 순서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요시다의 묘소를 참배한 뒤 그의 가르침으로 대외 침략정책을 수행하면서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가는 수순이었다는 것이다. 이어 일본 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평론가였던 도쿠토미 소호를 “요시다의 팽창주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 간 주역”으로 소개하면서 아베 총리의 역사관은 팽창주의 사관을 이어 가면서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는 역할을 해내겠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김영섭 교수는 국내 역사 인식과 역사교과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김 교수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은 원천무효라면서 1910년을 대한제국의 ‘역사적 종점’으로 설정한 현행 교과서의 서술은 논리적으로 상충될 수 있다”고 했다. 한일병합으로써 대한제국이 소멸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 한일병합조약의 영향력은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토론자로 나선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는 한·일 간 ‘새로운 21세기 패러다임’을 제안하면서 “아베 정권은 20세기 전반 제국주의시대 패러다임으로 돌아가 있다. 21세기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한·중, 한·미, 일·중 관계가 연동되면서 한·일 관계는 더 구조적이고 어려운 상태가 됐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다. 식민지 책임론을 가지고 논쟁하면 끝이 없다. 한·일 간극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는 대상을 놓고 대화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씨줄날줄]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최광숙 논설위원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安重根, 1879~1910년) 의사가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 날은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기상을 만천하에 알린 날이다. 안 의사는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여러 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 끝나는구나”라고 썼다. 응칠(應七)은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 점이 있다 하여 붙여진 안 의사의 아명이다. 뤼순 감옥으로 송치된 안 의사는 결국 1910년 3월 26일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며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낸 수의를 입고 순국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들에게 어머니는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편지를 적어 보냈다고 한다. 비록 재판 등에 참여했던 일본인들은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했지만 안 의사의 꼿꼿한 기상과 인품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토 암살 당시 함께 저격을 받은 다나카 세이지로 만주 철도 이사는 훗날 “지금까지 만난 가장 훌륭한 인물은 안중근”이라고 말했다. 히라이시 우지토 재판장은 “안중근처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감옥의 간수로 있던 지바 도오시는 안 의사가 집필할 수 있도록 붓과 종이를 넣어주기도 했다. 이 일본인 간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쓴 책이 바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이다. 동양평화론에서 안 의사는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평화기구를 설립하고 나아가 공동은행, 공동화폐, 공동평화군 등을 제안했다. 한국의 자주독립을 넘어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경제·군사적 협력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안 의사의 선구적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5년 전에 일찌감치 지금 유럽연합(EU)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제시한 것 아니겠는가. 하얼빈 기차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최근 개관했다. 지난해 6월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기념표지석’ 설치를 요청했는데 그보다 격을 높인 것이다. 중국이 불필요한 외교마찰을 피하면서 안중근 기념관을 통해 과거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연대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효창공원에 가면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노력으로 유해를 찾아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묘만 있다. 안 의사 묘는 유해를 찾지 못해 비어 있다. 안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안중근 의사 항일 의거 알려 일제 침략의 역사 직시 의도”

    “안중근 의사 항일 의거 알려 일제 침략의 역사 직시 의도”

    “일제 침략의 역사를 회고하고 직시하려는 것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에 개관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총설계사 겸 책임자인 쉬허둥(徐鶴東) 하얼빈시 문화·신문출판국 부국장은 20일 하얼빈 시정부 회의실에서 서울신문 기자와 만나 기념관의 설립 취지를 이같이 설명했다. 쉬 부국장은 “기념관은 안중근 의사의 항일 의거와 동양평화론을 널리 알림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세계 평화를 제창하고자 설계됐다”면서 “기념관 설치는 중국이 위대한 인물에 표하는 최고 수준의 예우라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그는 기념관이 지난해 11월 시공에 들어가 불과 2개월여 만에 전광석화처럼 완성돼 개관한 것과 관련,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때 표지석 설치 요청이 있은 이후 줄곧 설계 논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이 박 대통령의 요청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다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계기로 태도를 바꿨다는 추측을 부인한 것이다. 200㎡ 규모의 기념관 내부 전시물은 중국에서 안 의사와 관련된 사료를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던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에서 옮겨 온 것들이다. 쉬 부국장은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들이 안 의사의 의거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적 설계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기념관에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재현한 대형 수묵화 등이 걸려 있다. 모두 중국 1급 미술가들의 작품이다. 그는 기념관 개관뿐만 아니라 저격 지점인 하얼빈역 1번 플랫폼 위에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를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은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쉬 부국장은 안 의사가 중국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한학(漢學)에 밝았다는 점에서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항일투쟁이라는 공통분모뿐만 아니라 문화적 유대도 강하다며 양국 간 우의와 협력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기념관에 걸려 있는 안 의사의 서예 작품은 모두 한학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서 “중국 국부 쑨원(孫文)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 등 중국의 옛 최고 지도자들도 안 의사의 의거를 대대적으로 칭송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안 의사는 한국 근현대사 최고의 영웅으로 중국인들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한다”면서 중국은 이미 2006년부터 안 의사 기념 사업을 본격화했다고 소개했다. 안 의사가 거사를 치르기 전 들렀던 자오린(兆麟)공원(옛 하얼빈공원)에 안 의사의 유묵비를 세웠고,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에 별도의 ‘안중근 전시실’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하얼빈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하얼빈역 이토 저격 현장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서다

    하얼빈역 이토 저격 현장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서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인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19일 공식 개관했다. 외교부는 이날 하얼빈시와 철도국이 공동으로 역내 귀빈실을 개조한 200㎡(약 60평) 규모의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고 밝혔다. 개관식에는 헤이룽장(黑龍江)성 부성장, 하얼빈 시장 등 중국 측 인사들만 참석했다. 중국은 북한에는 개관식을 사전 통보하지 않았으며 건립 공사도 극비리에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기념관 내부에서 이토가 사살된 현장인 제1플랫폼을 볼 수 있게 설계했고, 안 의사의 일생 및 사상을 담은 각종 사진과 사료들을 전시했다. 제1플랫폼에는 ‘안 의사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특히 기념관 입구 상단에 설치된 대형 벽시계는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시간인 ‘오전 9시 30분’에 고정돼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우경화 아베 보란듯… 한·중 비밀리에 깜짝 개관

    한국을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중국이 역사적 현장인 하얼빈역에 19일 공식 개관한 건 한층 가까워진 한·중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 정부는 2006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중국 측에 안 의사의 의거 표지석 설치를 요청해 왔지만 그동안 진전을 보지 못했다.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의 정상회담 관례를 깨고 일본에 앞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먼저 정상회담을 했고,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안 의사의 기념 표지석 설치를 강력히 요청한 게 국면 전환의 계기가 됐다. 중국이 그동안 미뤄 왔던 표지석 설치에서 한 발 나아가 ‘안중근 기념관’으로 화답한 건 한국과 공동으로 일본 아베 신조 정부의 우경화와 퇴행적 역사 인식을 압박하는 ‘상징적 메시지’의 성격도 짙은 것으로 풀이된다.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하얼빈시가 기념관 건립에 나섰지만 외교적 민감성을 감안해 공사 현장에 대형 가림막을 설치하는 등 비밀리에 진행됐다. 중국 정부가 우리 측 외교 채널에 안중근 기념관 건립을 통보해 온 시점도 내부 조율을 마친 지난해 하반기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한국 정부에만 미리 귀띔한 채 북한에는 사전 통보조차 하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이번 기념관 건립이 한·중 양자 관계뿐 아니라 북한, 일본도 주시해 온 사안이라는 점에서 중국 정부가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개관식이 예고되지 않고 행사에 중국 측 인사만 참석한 것은 북한과 일본의 반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그동안 안 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 유적지를 조성하고 학술대회를 여는 등 기념사업에 관심을 보여 왔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중국과 공조하지 않더라도 사안에 따라 한·중이 자연스럽게 같은 목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양국이 일본에 노골적으로 공동 대응하는 건 역효과가 더 클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한·중 양국이 밀착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일본은 강력 반발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해 11월 한·중 간 안 의사 표지석 설치 협의와 관련, “안 의사는 범죄자”라고 주장해 우리 정부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일본 언론들은 이날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소식을 인터넷판 속보로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근거로 중국은 한국과 함께 역사 문제로 일본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일본, 안중근 기념관 애써 평가절하하면서도

    일본, 안중근 기념관 애써 평가절하하면서도

    일본 정부와 언론은 20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대해 반발 섞인 사실관계만 간단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한·중 관계를 폄하했다.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19일 한국, 중국의 주일 대사관 공사에게 각각 전화로 “매우 유감”이라고 항의했다. 요미우리신문은 20일 안 의사 기념관 소식을 간결하게 전하면서 “중국이 역사 문제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해 일본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아사히신문도 “중국 정부는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문제에 더해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면서 “한국과 중국이 아베 정권에 압력을 가하려는 목적인 것 같다”고 내다봤을뿐 별다른 분석을 내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우익지인 산케이신문은 “한국 정부가 기념관을 ‘반일의 성지’로 삼고,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역사인식문제로 대일(對日) 공세를 강화할 것이 확실하지만 중국 외무성은 개관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면서 “한·중 사이에 온도차가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산케이신문은 “중국의 신화사통신은 ‘해외뉴스’로만 다뤘다”고 평가절하했다.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시 철도국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에 안 의사 기념관을 설치하고,19일 개관식을 열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귀빈 대합실 개조해 ‘그날의 의거’ 기록… “중국인도 안중근 존경”

    귀빈 대합실 개조해 ‘그날의 의거’ 기록… “중국인도 안중근 존경”

    “안중근 의사는 중국인들도 가슴 깊이 존경하는 항일 의사다.” 중국 정부가 19일 개관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안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哈爾濱)역 내 플랫폼 바로 옆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해 만들었다. 기존 의거 현장에 조명이 설치되고, 의거를 알리는 안내판이 새로 세워졌다. 기념관 입구는 하얼빈역의 옛 입구 모습을 축소해 꾸몄다. 입구 외부 벽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시간인 ‘오전 9시30분’에 고정된 대형 벽시계가 걸렸다. 이날부터 무료 개방된 안 의사 기념관의 규모는 200여㎡에 이른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 바로 옆에 배치된 안 의사의 흉상과 안 의사가 옥중 집필한 동양평화론에 대한 소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기념관 측은 동양평화론에 대해 “당시 안 의사의 구상은 특정 국가의 이익을 벗어나 지역경제공동체와 블록경제론, 공동방어론을 주장한 것이었다”는 해석을 달아놨다. 기념관에는 “안중근은 조선반도 근대사에 저명한 독립운동가로, 1879년 9월 2일 현재의 조선(북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났다”는 설명을 시작으로 그의 가족관계와 가정교육, 신앙 등에 대한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양쪽 벽에는 일제 침략기의 상황과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의거를 준비한 11일간의 행적이 여러 장의 그림으로 전시돼 있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중국어와 한국어로 병기돼 있다. 기념관 내에는 ‘동양평화의 창의자’라는 설명이 붙은 안 의사의 사진을 걸어 눈길을 끌었다. 기념관 안에서는 통유리창 너머로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를 잘 볼 수 있다.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는 1930년대 일제가 이토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던 곳과 가깝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제는 안 의사 의거 현장에 이토 추모비를 세웠으나 중국 공산당이 이를 철거했다. 공산당은 추모비 자리에 안 의사 의거 개요만 적은 안내판을 세웠지만, 안 의사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었다. 이마저도 1990년대 후반 하얼빈역 보수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 이후 역에는 의거 현장을 표시한 바닥석만 남았다가 이번에 기념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중국은 이번에 기념관을 설치하면서 저격 현장 위에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를 내걸었다. 기념관 관람시간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다. 하얼빈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씨줄날줄] 안중근 논란/문소영 논설위원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자.” 갈등이 생기면 이런 설득을 적잖이 듣는다. 하지만 사실 남의 입장이 돼 그 처지를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려서는 이런 타이름을 들으면, 내가 모자랐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가르침을 따르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불혹을 넘긴 뒤로 맹자의 가르침은 대중이 그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임을 알게 됐다. 사람들은 제논에 물 대는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행동하기 십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지천명 부근에서야 더 깨달았다. 즉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역지사지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소한 일로 갈등하는 개인들도 어려운데, 국가 간에 역지사지하라는 주문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안중근 의사를 두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격렬하게 입씨름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일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최근 “안중근은 범죄자”라고 발언했다. 하루 지나고서 세코 히로시게 부장관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영웅을 향해 일본 장·차관이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의거 장소에 안중근 의사 표지석을 세울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일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중근이 식민지 한국의 영웅이었듯,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 일본의 영웅이다. 하급 무사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개항기에 ‘개천에서 난 용’의 대명사였다. 외세배척의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20살 무렵 영국 유학길에 올라 놀라운 서양의 산업 발전상을 지켜본 뒤 개화론자로 돌아서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해 총리에 오르고, 일본 최초의 근대 헌법도 제정하는 등 일본 근대의 초석을 쌓았다. 히로부미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이 클수록 1909년 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감정이 안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역지사지가 안된다 해도 일본의 태도는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이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등을 내세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을 포함해 중국, 필리핀, 타이완 등 아시아를 침략하고 수탈한 역사를 잊어선 안된다. 당시 일본의 영웅 대부분은 전범이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악인을 제거했다는 발언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세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환기시켰다. 일본이 반성하도록 압박하려면 아시아 침략 행위와 위안부 문제 등에 국제적 공감을 일으킬 섬세한 감각의 영화 등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일본은 ‘귀신’한테 제사 지내면서… 안중근 기념비는 왜 반대하나”

    “일본은 ‘귀신’한테 제사 지내면서… 안중근 기념비는 왜 반대하나”

    “일본은 귀신을 상대로도 제사(신사참배)를 지내면서 왜 한국의 항일열사 기념비 설치에는 반대하는가.”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0일 자체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서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서 갑오전쟁과 조선(한국) 침략을 획책한 책임자 중 하나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사”라는 점을 강조한 뒤 이같이 반문했다. 중국이 한국의 요청에 부응해 안중근 의사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한 데 대해 격분한 일본을 겨냥한 발언이다. 안중근 의사는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전날 공식화한 대로 중국에서도 널리 존경 받아 온 인물로 유명하다.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중국과 조선 인민들이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투쟁의 시초”라고 정의한 바 있다.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蔣介石)는 1972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들러 민족과 국가를 위한 그의 희생 정신을 치켜세우며 ‘충렬춘추’(忠烈春秋)라는 글을 바치기도 했다. 청나라 말기 혁명가인 장타이옌(章太炎)은 안중근 의사를 “아시아 최고의 의협(義俠)”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이 안정되면서 중·일 관계를 발전시켜야 했고 나아가 중국이 극도로 경계하는 테러를 미화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중국 내 안중근 의사 추앙 분위기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중국 당국이 2006년 허얼빈 기차역 인근에 4.5m 높이의 안중근 의사 동상 건립 추진을 무산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가운데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로 일본과 대립이 심화되고 일본의 대중 포위 전략이 구체화되면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설립 문제가 한국과 연합해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비장한 카드로 재부상한 셈이다. 미국에 서버를 둔 중문판 뉴스 둬웨이(多維)는 이날 중국이 안중근 의사를 치켜세우며 기념비 설립 사실을 확인하는 등 노골적으로 한국 편을 든 것과 관련, “중국이 한국과 연합해 일본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일본이 도전할수록 중국의 ‘한국 밀착’은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日 관방장관 “안중근은 범죄자” 망언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19일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선 “범죄자”라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스가 장관은 이날 오전 정례 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방한한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에게 지난 6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안중근 의사 표지석 설치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감사를 나타낸 데 대해 “이러한 움직임은 한·일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정면 비판했다. 그는 특히 “일본은 그동안에도 안중근에 대해 범죄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밝혀왔다”면서 “일본의 주장을 분명히 한국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스가 장관의 발언에 대해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나라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을 범죄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면서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시대에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와 일본이 당시 주변국에 어떤 일을 했는지를 돌이켜보면 스가 관방장관의 발언과 같은 발언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스가 장관은 오후 늦게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의 유감 표명을 “과잉반응”이라고 일축한 뒤 “기존 우리나라의 입장을 담담히 밝혔을 뿐이다”라고 다시 맞받았다. 이런 가운데 중국 외교부의 훙레이(洪磊)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안중근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저명한 항일의사”라고 치켜세웠다. 훙 대변인은 “중국은 외국인 기념시설 규정에 따라 안 의사 표지석 설치 관련 작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1) 남산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1) 남산

    남산 하면 벼슬길 진출을 위해 ‘열공’하던 딸깍발이 선비와 그들이 살던 낭만적인 남촌 풍경이 떠오른다. 조선 신궁과 통감부, 헌병사령부, 일본인 거주지 같은 좋지 않은 상념도 꽈리를 튼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구절이나 한때 ‘남산’으로 불리던 옛 중앙정보부의 추억도 있다. 케이블카와 도서관, 어린이회관, 서울타워도 빠지지 않는다. 한강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기에 이렇게 다양한 이미지가 겹쳐 떠오르는 것이리라. 남산은 사대문 안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산이기에 익숙하고 친근하다. 풍수지리학상 342m 높이의 백악(북악)이 조선 한양의 주산(主山)이었다면 265m의 남산은 안산(案山)이었다. 쉽게 풀면 나라(임금) 앞에 놓인 밥상이나 책상 같은 개념의 산이다. 팔도에서 올리는 봉수대의 마지막 종착점이어서 남산 5개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가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평화의 산이기도 했다. 남산 위에 오르면 도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했다. 덕분에 산림이 우거지고 울창해 서울의 허파가 되었다. 서울의 팽창에 따라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자연지리적인 요건을 갖췄다. 우리가 남산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아는 것도 있다. 일례로 남산 소나무이다. 산림청에 등록된 4440개의 우리나라 산 이름 중 남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31개에 이른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마을 앞산을 남산 또는 앞산이라고 불렀다. 남(南)자를 ‘남녘 남’ 자가 아닌 ‘앞 남’으로 썼다. 남산은 앞산을 한자로 쓴 것이다. 목멱(木覓)의 유래도 흥미롭다. 남산의 다른 이름은 ‘마뫼’였다. 마뫼의 ‘마’는 ‘앞’, 뫼는 산의 우리말이다. 독립지사이자 역사학자였던 안재홍에 따르면 목멱은 이두식 표기다. 목(木)은 ‘마’를, 멱(覓)은 ‘뫼’를 적었다는 얘기다. 남산=앞산=마뫼=목멱이 같은 뜻 다른 이름이다. 방방곡곡 동네 앞산의 소나무가 모두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인 셈이다. 샌님이 살던 남촌에 언제부터 왜색의 기운이 드리웠을까. 남산과 일본의 악연은 뿌리 깊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1592~1598) 이전까지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이 남산 기슭 인현동 2가에 있었다. 남산은 7년 전쟁기간 동안 왜군 진지였다. 마스다 나가모리 등 왜장이 살았다고 해서 왜장터(왜성대)라고 불렸다. 그들의 진지는 지금의 정동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그로부터 292년이 지난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를 영사관자리로 제공받아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곳에 일본공사관, 통감부, 총독부가 속속 들어섰다. 지금의 예장동, 주자동, 충무로1가인 진고개(본정)일대는 일본인 거주지였다. 진고개를 거점으로 남대문, 회현동, 명동(명치정), 을지로(황금정)쪽으로 주택가와 상가가 확장됐다. 화려한 남촌 일본인 상가는 북촌 조선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일본인 관광객이 유독 명동을 즐겨 찾는 까닭도 그들이 누렸던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회귀본능이 아닐까. 해방 직후 본정(本町)을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딴 충무로(忠武路)로 바꾼 것은 이를 차단하려는 속뜻이 작용한 것 같다. 남산과 남촌은 조선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일본인촌으로 변했다. 종로 우미관을 주름잡던 김두한 패가 청계천을 경계로 진고개 일본 건달과 세력을 다투던 시절이다. 19가구 89명(1885년)에 불과하던 일본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1986가구 7677명(1905년)으로 늘었다. 강제병 탄이후 8794가구에 3만 4468명(1910년)으로 무서운 팽창세를 보였다. 일제의 남산 잠식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 1898년 예장동에 대성궁(경성신사)이라는 작은 신사를 세우더니, 1904년에는 2만여 평을 임대해 필동에 헌병대사령부를 구축했다. 1908년에는 30만 평을 영구 무상임대,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조선 신궁을 세웠다. 그들이 잠식한 땅이 현재 남산공원(87만 6000평)의 3분의 1을 넘는다. 일제가 열도를 창조했다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와 명치 천황을 모신 조선 신궁은 한반도 전역에 있는 일본 신사의 총본부였다. 신궁은 사대문 안 어디에서나 보이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으며 시내에서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승객 전원이 일어서서 묵념을 올려야 했다. 1918년 남산중턱 13만평의 수목을 베어내고 조성에 들어가 1925년 완공됐다. 지금의 남산식물원 자리이다. 일본의 성지 조성을 위해 남산은 깔아뭉개졌다. 남산 중턱 힐튼호텔에서부터 384개의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도록 꾸몄다. 남대문에서 조선 신궁에 이르는 참배로를 조성하려고 남대문에서 남산을 잇는 성곽을 부수고 자동찻길을 냈다. 지금의 소월로이다. 남산생태계를 파괴한 주범이다.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서사탑은 광복 직후 서울시민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파괴할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남산의 동쪽 기슭 장충단은 명성황후시해사건(1895) 당시 일본자객에 맞서 순직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곳이다. 장충단(奬忠壇)이란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일제는 창경궁, 덕수궁과 함께 이곳을 공원으로 희화화하고서 장충단 동편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터에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웠다. 일본 1000엔권 지폐에 얼굴이 등장하기도 한 이토의 업적을 영구히 기념한다는 구실로 내선일체를 꾀했다. 당시 여행안내책자에서 경성 제일명소로 칭송했다. 총독부를 지을 때 헐어낸 경복궁 선원전을 부속건물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정문으로, 광화문 양옆 궁성벽 석재를 가져다가 담으로 쌓았다. 박문사 건물은 해방 후에도 동국대 기숙사로 쓰였고 흥화문은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에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구 필동 남산한옥마을은 악명 높은 헌병통치의 본산인 조선헌병대사령부 터였다. 조선 초 박팽년의 사저였던 한국의집은 조선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의 관저로 쓰였다. 이들은 남산 중턱 왜성대에 총독관저를 세우고 그 아래 조선헌병대사령부를 뒀다. 서울유스호스텔은 일본공사관과 통감관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와 총독관저가 각각 자리했었다. 남산은 경복궁 안에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 일본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남산꼭대기 N타워 옆 팔각정은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평범한 정자에 불과하지만, 내력은 간단치 않다. 이 자리는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부터 천하의 명당이었다. 태조가 남산의 산신을 모시려고 지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무속사당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민속신앙 터인 국사당이 일본 토착신앙의 대표인 신궁에 쫓겨 인왕산으로 강제로 옮겨진 것이다. 일제는 ‘일본 최고 신과 살아있는 신인 천황을 모시는 신궁에 식민지 나라의 굿 집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1925년 오백년 내내 있던 자리에서 내쳐버렸다. 한국의 무속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신도(神道) 역시 원시종교에 가깝지만, 정부나 국민이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을 건 야스쿠니 신사참배 행렬에서 엿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국사당을 원상회복시키자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 얘기를 꺼냈다간 종교전쟁이 일어날 판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보고 싶어하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명동을 거쳐 남산타워에 오른 일본인 관광객들이 국사당 축출 사연을 듣는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광복 후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남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국사당 터에 국사당을 되돌리기는커녕 자신의 호를 딴 우남정을 만들었고,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동상을 세웠다. 조선 신궁 터를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결정해 1959년 기공식까지 가졌지만 2년 뒤 5·16 쿠데타로 백지화됐다. 3500가구 2만 5000명이 정착한 서울 최초의 판자촌인 해방촌이 남산의 북쪽 기슭 12만 6000평을 차지하도록 사실상 허가해 남산의 피폐를 가속화했다. 이런저런 압력과 로비를 통해 숭의학원, 리라학교, 동국대학교가 남산에 틈입했다.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훼손된 곳은 장충단공원이었다.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타워호텔(반얀트리),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옛 재향군인회(동국대), 옛 중앙공무원교육원(동국대) 등이 줄줄이 들어선 것이다. 장충단공원은 21만평이 넘던 서울시내 최대 근린공원에서 9만평의 평범한 공원으로 쪼그라들었고 1984년 남산공원으로 흡수합병당하는 신세가 됐다. 1994년 외인아파트 2동이 폭파 철거되는 등 남산제모습찾기운동이 시작됐고 2009년 남산르네상스를 내세운 오세훈 전 시장이 찢어진 남산녹지축 연결을 시도했지만 마무리짓지 못했다. 남산에는 지금도 동상 10기, 기념비 14개를 비롯한 각종 시설물 28개, 체육시설 269개가 촘촘하다. 그러나 남산은 이들에게 마른 품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 아! 남산이여…. joo@seoul.co.kr
  • [김종면 칼럼] 역사지식 없이 역사인식 없다

    [김종면 칼럼] 역사지식 없이 역사인식 없다

    다시 꺼내어 말하기도 민망하다. 요즘 청소년들 중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운동가를 안중근이 아닌 안창호로 알고 있고, 3·1절을 ‘3점1절’로 읽는가 하면, 야스쿠니 신사를 ‘야스쿠니 젠틀맨’이라고 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개그가 아니라면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수백만명의 동족이 희생된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인 줄 모르는 고등학생이 태반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현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근현대사에 대해 이처럼 까막눈인데 고대나 중세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한국사 교육을 홀대한 업보라고 하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니다. 한국사 교육이 강화된 1977년 3차 교육과정부터 한국사가 고등학교에서 필수, 선택, 또다시 필수로 30년 넘게 공깃돌 신세를 면치 못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청소년의 역사인식 부재는 한국사 교육이 형식과 내용에서 부실했고, 더 결정적으로는 모든 것이 입시로 통하는 척박한 교육 현실 탓이 크다. 2011년 한국사를 고교 필수과목으로 바꿀 때 이미 대입수능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국사 교육의 한계는 충분히 예견됐다. 집중이수제라는 이름으로 한 학기에 벼락치기로 몰아 가르치고 무슨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겠는가. 2005년도 수능부터 한국사가 선택과목이 되면서 그해 전체의 27.7%였던 한국사 선택 비율은 2013학년도에는 7.1%로 떨어졌다. 인문계 대입에서 자국사를 필수로 하는 중국이나, 일본사의 대입 선택 비율이 40%나 되는 일본과 대비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으로 비치지 않을까 두렵다. 한국사 수능 필수 문제는 이 같은 맥락에서 접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기조 가운데 하나가 문화융성이다. 이를 위해 인문학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한다. 기업들도 인문경영에 나섰다. 가히 ‘인문학 르네상스’다. 그런데 정작 인문학의 핵심인 역사에 대한 대접이 초라하다. 청소년들은 ‘역사문맹’ 증상까지 보이니 이 무슨 조화인가.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 한국사가 수능 선택으로 남아 있는 한 아무리 역사교육을 강화한들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사를 수능 필수로 지정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수능 필수가 한국사 교육을 암기식으로 흐르게 해 역사의식을 키우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암기가 악인가. 어떤 학문이든 암기해 놓은 기초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더 넓은 응용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경(經)과 사(史)를 외우는 것이 흠이 아니듯 우리 역사의 사실을 암기하는 것이 잘못일 이유가 없다. 자잘한 지식의 조각들이 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모태요 역사인식의 근원이다. 청소년 스스로 자신의 역사인식 지수를 재어 본다면 수능 필수를 가외의 부담으로만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사회 과목과의 형평성도 문제다. 한국사를 사회탐구 영역에서 떼어내 필수과목으로 하는 선에서 정리해야 한다. 국가적으로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뿌리 내린 역사인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런 만큼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끝없는 역사교과서 정치편향 논란에 학생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른다. ‘정권사관’에 따라 근현대사 교육의 내용이 오락가락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좌·우 편향 논란을 빚고 있는 개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최종 검정 결과가 곧 나올 예정이다. 또다시 2008년 금성교과서 사태와 같은 ‘사관전쟁’이 재현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 몫이다. 한국사 수능 필수화의 참뜻은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통해 세계인식의 지평을 넓혀 보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사’ 교육은 일국사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사까지 아우르는 ‘역사’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사 수능 필수의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 그 이후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jmkim@seoul.co.kr
  • [조희선 기자의 블로그] 사죄하는 아베 포스터를 기대하며

    [조희선 기자의 블로그] 사죄하는 아베 포스터를 기대하며

    지난 23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 쾰른 등 주요 도시에 ‘마지막 기회 작전’(Operation Last Chance)이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 2000장이 곳곳에 붙었다.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최후의 나치 전범들을 추적하는 이 캠페인은 ‘나치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국제 유대인 인권단체인 ‘시몬 비젠탈 센터’가 주도하고 있다. 포스터에는 “늦었지만 너무 늦지는 않았다”면서 시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자는 글들이 적혀 있다. 문득 이 포스터를 보면서 지난해 가수 김장훈과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도쿄, 뉴욕, 상하이, 시드니 등 전 세계 18개국의 주요 도시 번화가에 붙인 위안부 광고 포스터가 떠올랐다. 이 포스터는 ‘기억하시나요?’라는 문구와 함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전쟁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처럼 독일 정부의 진정성 있는 과거사 청산 노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지난 1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기념일(27일)을 앞두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영원한 책임이 있다”며 진실된 반성의 자세를 보여줬다. 이탈리아,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도 해당 국가에 은신하고 있는 나치 전범들에게 범죄행위를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반면 그간 침략전쟁과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해 온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어떤가. 그는 사죄는커녕 “침략의 정의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토 히로부미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등의 망언을 쏟아내며 ‘눈뜬 장님’이기를 자처했다. 지난 21일에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우경화 정책이 더욱 노골화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설 뿐이다. 아베 총리가 허리를 숙이며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역사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무한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합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포스터가 세계 도시 곳곳에 붙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의 허무맹랑한 기대일까. hsncho@seoul.co.kr
  • “한·일 정상회담 구체적으로 생각 안해”

    “두 걸음 앞서 나가다가 세 걸음 뒤로 가는 식이면 (한·일 관계는) 의미가 없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1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결과적으로 일련의 행위가 역사 퇴행적이고 진정성에 반하는 것들이 많다”고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작심한 듯 여러 얘기를 쏟아냈다. 윤 장관은 우선 “현재 한·일 양자회담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김영삼 정부 이후의 양국 관계를 보면 정권 초에는 잘해 보자고 하다가 2~3년이 지나면 균열이 생기고, 정권 말이 되면 악화돼 싸우다 끝난다”며 “박근혜 정부는 한·일 관계 개선 의지가 강하지만, (일본이)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늘 얘기한 것을 다음 날 다르게 얘기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지난 5일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존경받고 있는 위대한 인물로 (한·일 양국이) 상호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일련의 망언을 지속하는 행위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윤 장관은 이날 “(양국 관계가)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있다”며 은연중 아베 총리를 한·일 관계 개선의 ‘장애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윤 장관은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며 “역사 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한·일 양국의 국민 교류나 북핵 문제는 긴밀히 협의하고, 하나(과거사)가 모든 걸 지배하는 단순 외교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느 시점에서 한·일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서대문형무소는 친일과 반독재의 살아 있는 현장이죠. 하지만 예전과 달리 친일파 청산과 민주화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입구에서 ‘친일인명사전 학교보내기’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수(47)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방문객 중 관심을 갖고 운동의 취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장년층이어서다. 자신을 86학번이라고 소개한 김 위원은 “시위에 나서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꼈던 우리 세대와 요즘 ‘1020세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오는 10월이면 문을 연 지 105주년을 맞는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역사 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이 형무소는 1998년 11월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관람객 수는 57만 9115명, 이 가운데 외국인도 6만 2888명으로 집계됐다. 박경목(42)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주로 부모님과 함께 체험 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과 단체 관광객이 많다”면서 “외부 강연을 나가다 보면 10·26이나 5·18은 물론 경술국치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누가 저격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휴일인 지난 9일 가족들과 함께 충북 청원군에서 상경했다는 윤종필(45)씨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직접 찾았다”면서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등한시하기 때문 아니겠나”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서울시나 문화재청이 아닌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관할한다는 점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춰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대문형무소는 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 9만여명이 투옥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천안 독립기념관만큼이나 민족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0월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곳은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87년 10월까지 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로 운영됐다. 박 관장은 “개발독재시대 정부의 역사인식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역사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체험장으로서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널리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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