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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손 장영자 “구형량은 多多益善 아닌데…”

    1982년 수천억원대 사기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큰 손’ 장영자(60) 피고인이 21일 세 번째 사기사건으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국공채 투자 등의 명목으로 42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2000년 4월 함께 기소된 남편 이철희(79)씨는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 이현승)심리로 열린 이날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이 현재 서부지법에서 200억원대 사기사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이 피고인은 최후진술을 통해 “집사람은 80년대에 정치적 사건으로 구속된 뒤 2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면서 “여자로서 겪기 힘든 고통을 당했으니 더 억울한 일이 없도록 살펴달라.”고 호소했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 정장 치마를 입은 장 피고인은 먼저 검사를 바라보며 “구형량이 상상을 초월한다.”면서 “구형량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닌데 (형량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다고는 못하겠다.”고 비꼬았다.이어 돋보기를 꺼내 자신이 직접 써온 최후진술서를 10여분간 읽어 내려갔다.그는 재판과정에서 증인을 신문하는 등 직접 변론하기도 했다. 장 피고인은 “갑작스러운 금융실명제 실시로 투자자들에게 약속했던 이익금을 주지 못했다.그러나 돈을 의도적으로 가로챈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또 “80년대를 감옥에서 보내면서 시대에 낙오된 우리 부부는 피해자”라면서 “가해자는 시대의 변화”라고 눈물을 흘렸다. 올해 환갑인 장 피고인은 82년부터 구속과 석방을 반복해왔다.83년 희대의 어음사기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92년 3월 가석방됐다.94년 1월,140억원의 차용사기로 또다시 구속,4년형을 받았다.98년 8·15 특사로 풀려났으나 2000년 5월 200억원대의 구권(舊券)화폐 사기사건으로 다시 구치소에 갇혔다.구권화폐 사건의 재판은 서울서부지법에서 진행중이다.선고공판은 다음달 18일 오전 10시다. 정은주기자 ejung@˝
  • 儒林(9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두루마기 바깥으로 흰색 버선을 신은 조광조의 두발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그 발을 보자 나는 문득 갖바치가 직접 만들어 보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이 떠올랐다.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의하면 조광조는 죽기 직전 양팽손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신발을 신겨 달라고 유언하였으며,양팽손은 이를 지켜 그대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저 흰색 버선발 위에 신겨졌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비단신.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조광조가 죽어 이미 500년이 흘렀음에도 갖바치가 마지막으로 쓴 참위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영정 앞에는 붉은 색 제단이 놓여 있었고,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나는 그 물건을 감싸고 있는 뚜껑을 밀어 올려 내용을 확인하여 보았다.그 나무 조각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贈領議政文正公靜菴趙先生神位” 이것인가. 나는 그 초라한 신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조광조의 신위인가.신위라면 죽은 조광조의 영혼이 의지하여 머물러 있는 자리.이 한갓 초라한 나무막대기 위에 조광조의 영령이 머물러 있단 말인가. 사당 안 동쪽으로 또 하나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그곳에는 영정도 보이지 않고 다만 붉은 색으로 칠하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나는 다시 그 나무상자의 겉면을 벗겨 보았다.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 있었다.“學圃梁先生神位”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조광조의 시신을 고향 앞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들짐승의 밥이 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은인이었다.두 사람이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1506년 중종원년 양팽손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였다. 그 무렵 조광조는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는데,도가 지나쳐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친구들마저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열중하던 조광조에게 그러나 여섯 살이나 어린 양팽손은 소문을 듣고 조광조를 찾아간다.이때의 기록이 양팽손의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선생이 개연(慨然)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 의리를 연구하고 경제(經濟)에 마음을 두었으나 지식을 개척해 나가지 못함을 허물로 여겨 드디어 정암 선생을 찾아가 더불어 경지(經旨)를 강구하고,사물을 토론하니,정암도 그 깊이 있는 학식과 재능을 인정하여 세상에 필요한 큰 그릇이라 하였다.” 이처럼 양팽손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광조를 불원천리하고 능성에서 용인으로 찾아간 붕우였으며,마침내 조광조가 진사시험에 방수(榜首)되고,양팽손이 생원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강론하고 질의하여 빠진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정암이 일찍이 ‘내가 양팽손과 더불어 이야기함에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하였고,또 그 기상을 일컬어 ‘비갠 뒤의 가을하늘이요,구름이 막 걷힌 직후의 밝은 달이다.인욕이 깨끗이 다 없어졌다.’ 하였다.”
  • [산악문학인 아재홍의 산 오르記] 양평 백운봉

    백운봉(白雲峰 940m)은 양평에서 바라볼 때 뾰족하게 보이므로 일명 ‘경기 마터호른’이라고 불린다.용문산 줄기가 남쪽으로 함왕봉을 지나 크게 한 번 솟구친 봉우리다.용문산이 거느리고 있는 많은 산봉우리 중의 하나다. 용문면 소재지에서 6㎞ 거리인 산행 들머리 연수리는 전원주택 전시장 같은 분위기다.곳곳에 주택과 펜션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연안마을 버스 종점에서 백운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백운암 앞에도 펜션공사가 진행중이다.신축한 백운암의 축대가 무너져 흉한 몰골로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다. 개울 건너 산길이 싱그럽다.깨끗한 오솔길은 어제 내린 비를 먹어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진다.개울을 서너번 건너자,경사가 급한 너덜길 옆으로 금낭화가 만발했다.금낭화와 함께 참나물이 드문드문 나 있다.미나리과인 참나물은 독특한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참’ 나물이다. 숨이 턱에 닿을 즈음 형제약수에 올랐다.암자인가 아니면 움막이 있었던가.건물철거 잔재와 쓰레기더미로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약수터에는 밥그릇이 굴러다니고 있고 샘 옆에는 시멘트 발라놓은 제단에 촛농이 그대로 쌓여 있다.좀 치울 일이지.나,원,참! 약수터를 지나 정상 오르는 길에 철쭉이 흐드러졌다.고산 철쭉은 흰 것이 특징이다.키가 큰 나무에 촘촘히 핀 꽃이 무거워선지 가지가 휘었다.바위와 어우러져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위험한 곳에 철 계단과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을 돕는 등산로를 따라 철쭉은 정상까지 이어졌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사람 키만한 화강암에 ‘백운봉’이라고 새겨져 있고 원두막 같은 전망대가 서 있다.전망대 앞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가져왔다는 돌과 흙으로 ‘통일암’을 세워 놓았다.사위가 운무에 덮여 있다.산 아래에서 보면 백운봉이 운무 속에 있을 터이지만 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온통 희미할 뿐.쉴 사이 없이 사람들이 오르내린다.모두 즐거운 모습이다. 양평에서 올라온 산악회원들이 간식을 먹고 일어서더니 손을 모아 외친다.“우-여-이!” “백운봉!” 서너번을 외치더니 하산한다.매주 백운봉을 등산하는 동호회원들인 것 같다.전망대에 모인 사람들이 산 아래 자리잡은 군부대를 보며 말한다.“저,군부대를 다른 데로 옮겨야 돼.” “군에서 사격하느라 산불도 자주 나고,시끄럽고!” “저 계곡이 깊어 등산하기 좋을 텐데,부대 쪽으로 등산도 할 수 없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나가는 운무 사이로 간간이 용문 마을이 보이고 양평 시가지와 한강이 펼쳐진다.그러나 용문산 정상은 두 시간을 기다려도 결국 볼 수 없었다.하산은 새수골 방향으로 잡았다.급경사 길엔 밧줄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철 계단이 기역자로 꺾이는 곳에 오니 전망이 훌륭하다.내려가야 할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볼 때 꽤 멀리 느껴지던 헬기장에 30분만에 닿았다.생각보다 가깝다.헬기장에서 올려다보니 백운봉이 하늘을 찌른다.서쪽으로 길게 늘어진 암릉은 용천리로 흘러내리고 있다.백운봉 뒤로 용문산 정상은 아직도 나그네에게 자태를 보이지 않는다. 헬기장에서 새수골 길을 버리고 동쪽 연수리 방향으로 들어섰다.꽃이 진 철쭉이 군락을 이룬 길은 가끔 하늘만 보일 뿐 길고 긴 터널을 만들고 있다.철쭉 숲을 빠져 나왔다.배나무가 검은 망사그물을 뒤집어쓰고 있고,복숭아가 대추만하게 달려 있는 과수원을 지나니 연안마을 버스종점이다. ●볼거리·먹을거리 백운봉 들머리는 네 곳이다.연수리에서 형제약수를 거쳐 정상에 오를 수 있고,서쪽 용천리에서 사나사를 거쳐 주 능선에 오른 후 남으로 백운봉을 오를 수 있다.양평읍 백안리에서 오르는 길이 많이 이용되는데 마을버스로 새수골 입구까지 갈 수 있다.어디로 오르나 2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용문사 쪽에서도 오를 수 있는데 상원사와 윤필암 터를 거쳐 남릉을 따르는 코스는 상당한 체력을 요구한다.백운암은 점안한 지 6년밖에 안 된 절이다.형제약수에서 기도하던 이가 10년째 공사를 진행중이다.용문산과 백운봉이 처마 위로 보이는 곳에 지었다. 백운암 앞에 밥집,‘모시는 사람들’의 숯불구이 쌈밥이 맛있다.1만원.더덕백반(9천원)도 먹을 만하다.(031)774-8910.솔골가든(031-772-7735)과 버스종점 부근의 쌍둥이 민박(031-773-4078)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뾰족하게 백운봉이 보인다.용문면 소재지로 들어선 후 연수리 마을길로 6㎞ 들어가면 연안마을 버스 종점이다.백운암을 거쳐 등산이 시작된다.서울 상봉버스터미널이나 강변터미널에서 홍천행 버스를 타고 용문에서 하차한 후 연수리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 儒林(9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두루마기 바깥으로 흰색 버선을 신은 조광조의 두발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그 발을 보자 나는 문득 갖바치가 직접 만들어 보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이 떠올랐다.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의하면 조광조는 죽기 직전 양팽손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신발을 신겨 달라고 유언하였으며,양팽손은 이를 지켜 그대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저 흰색 버선발 위에 신겨졌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비단신.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조광조가 죽어 이미 500년이 흘렀음에도 갖바치가 마지막으로 쓴 참위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영정 앞에는 붉은 색 제단이 놓여 있었고,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나는 그 물건을 감싸고 있는 뚜껑을 밀어 올려 내용을 확인하여 보았다.그 나무 조각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贈領議政文正公靜菴趙先生神位” 이것인가. 나는 그 초라한 신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조광조의 신위인가.신위라면 죽은 조광조의 영혼이 의지하여 머물러 있는 자리.이 한갓 초라한 나무막대기 위에 조광조의 영령이 머물러 있단 말인가. 사당 안 동쪽으로 또 하나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그곳에는 영정도 보이지 않고 다만 붉은 색으로 칠하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나는 다시 그 나무상자의 겉면을 벗겨 보았다.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 있었다.“學圃梁先生神位”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조광조의 시신을 고향 앞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들짐승의 밥이 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은인이었다.두 사람이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1506년 중종원년 양팽손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였다. 그 무렵 조광조는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는데,도가 지나쳐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친구들마저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열중하던 조광조에게 그러나 여섯 살이나 어린 양팽손은 소문을 듣고 조광조를 찾아간다.이때의 기록이 양팽손의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선생이 개연(慨然)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 의리를 연구하고 경제(經濟)에 마음을 두었으나 지식을 개척해 나가지 못함을 허물로 여겨 드디어 정암 선생을 찾아가 더불어 경지(經旨)를 강구하고,사물을 토론하니,정암도 그 깊이 있는 학식과 재능을 인정하여 세상에 필요한 큰 그릇이라 하였다.” 이처럼 양팽손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광조를 불원천리하고 능성에서 용인으로 찾아간 붕우였으며,마침내 조광조가 진사시험에 방수(榜首)되고,양팽손이 생원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강론하고 질의하여 빠진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정암이 일찍이 ‘내가 양팽손과 더불어 이야기함에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하였고,또 그 기상을 일컬어 ‘비갠 뒤의 가을하늘이요,구름이 막 걷힌 직후의 밝은 달이다.인욕이 깨끗이 다 없어졌다.’ 하였다.”˝
  •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효종이 직접 쓴 ‘심곡서원’의 현판을 우러러 보았다.검은 색 바탕의 흰 글씨로 양각된 효종의 어필은 능숙한 솜씨의 달필은 아니었으나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공들여 쓴 필치였다. 일찍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가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계획을 세웠던 강골답게 글자 하나하나에는 혼이 깃들어 있었다.3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송시열과 같은 반청파를 등용한다.또한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얼마나 효종이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효종은 ‘심곡서원’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蔡之沇)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다.이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李時楷). 이시해는 선왕이었던 인조의 실록을 편찬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효종이 형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효종은 이시해로 하여금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는 한편 채지연을 보내어 조광조의 신위 앞에서 이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이 치제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국왕은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 조광조의 영령(英靈)에 제를 드리노라(國王遣臣禮曹佐郞蔡之沇 諭祭于先正臣文正公趙光祖之靈).” 치제문의 내용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이시해의 작품답게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경의 기상(氣象)은/산악(山嶽)의 정신(精神)인 듯 북두(北斗)의 결정(結晶)인 듯/영봉(靈鳳) 같은 상서(祥瑞)며 금옥같이 윤택(潤澤)하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대도(大道)를 탐구(探究)했네.역법(曆法)은 하정(夏正)쓰고 면류관(冕旒冠)은 주(周)의 제도/일찍부터 지닌 포부 왕좌지재(王佐之才) 그 아닌가? 이 나라 동녘 땅에 문화가 싹튼 것은/기자(箕子)가 우리 땅에 오면서 시작됐네. 그 덕화(德化) 그 교훈이 그 뒤로 침체되어/신라(新羅) 고려(高麗) 지나면서 큰 발전 없었도다. 두절된 그 학문을 문경공이 창시하고/경 또한 분발하여 정통(正統)을 받았도다. 방향을 제시하고 앞길을 알려주니/문왕(文王)이 아니어도 그침 없이 분기(奮起)한다. 흉중(胸中)에 쌓인 지식 자연히 대도(大道)와 부합되며/언어와 동작은 법도에 어김없다. 조용히 생각하고 밤낮으로 신칙(申飭)하여/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한 그 위의 어긋남이 없었도다. 굳건하고 엄밀하게 다듬고 갈고하여/영화가 밖으로 발하여/선명한 그 광채가 옥(玉) 같고 물과 같네. 법도(法度) 있는 품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나타나고 고고한 학의 맑은 울음 구천(九天)까지 들려주어 임금께 신임(信任)받아 천재일우(千載一遇) 되었도다.” 나는 내삼문의 협문을 거쳐 사우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사당은 장대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두르고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었는데,문은 닫혀 있었다.어쨌든 서원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므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관리인을 불러 안내를 받을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가려진 조광조의 영정이 보였다.나는 그 커튼을 젖혀 보았다. 검은 관모에 양손을 소매 속으로 찔러 넣고,흰색 관복을 입은 조광조의 영정은 이미 지난 가을 능주의 적중거가에서 본 그대로의 동일한 전신상이었다.
  •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효종이 직접 쓴 ‘심곡서원’의 현판을 우러러 보았다.검은 색 바탕의 흰 글씨로 양각된 효종의 어필은 능숙한 솜씨의 달필은 아니었으나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공들여 쓴 필치였다. 일찍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가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계획을 세웠던 강골답게 글자 하나하나에는 혼이 깃들어 있었다.3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송시열과 같은 반청파를 등용한다.또한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얼마나 효종이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효종은 ‘심곡서원’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蔡之沇)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다.이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李時楷). 이시해는 선왕이었던 인조의 실록을 편찬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효종이 형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효종은 이시해로 하여금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는 한편 채지연을 보내어 조광조의 신위 앞에서 이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이 치제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국왕은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 조광조의 영령(英靈)에 제를 드리노라(國王遣臣禮曹佐郞蔡之沇 諭祭于先正臣文正公趙光祖之靈).” 치제문의 내용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이시해의 작품답게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경의 기상(氣象)은/산악(山嶽)의 정신(精神)인 듯 북두(北斗)의 결정(結晶)인 듯/영봉(靈鳳) 같은 상서(祥瑞)며 금옥같이 윤택(潤澤)하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대도(大道)를 탐구(探究)했네.역법(曆法)은 하정(夏正)쓰고 면류관(冕旒冠)은 주(周)의 제도/일찍부터 지닌 포부 왕좌지재(王佐之才) 그 아닌가? 이 나라 동녘 땅에 문화가 싹튼 것은/기자(箕子)가 우리 땅에 오면서 시작됐네. 그 덕화(德化) 그 교훈이 그 뒤로 침체되어/신라(新羅) 고려(高麗) 지나면서 큰 발전 없었도다. 두절된 그 학문을 문경공이 창시하고/경 또한 분발하여 정통(正統)을 받았도다. 방향을 제시하고 앞길을 알려주니/문왕(文王)이 아니어도 그침 없이 분기(奮起)한다. 흉중(胸中)에 쌓인 지식 자연히 대도(大道)와 부합되며/언어와 동작은 법도에 어김없다. 조용히 생각하고 밤낮으로 신칙(申飭)하여/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한 그 위의 어긋남이 없었도다. 굳건하고 엄밀하게 다듬고 갈고하여/영화가 밖으로 발하여/선명한 그 광채가 옥(玉) 같고 물과 같네. 법도(法度) 있는 품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나타나고 고고한 학의 맑은 울음 구천(九天)까지 들려주어 임금께 신임(信任)받아 천재일우(千載一遇) 되었도다.” 나는 내삼문의 협문을 거쳐 사우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사당은 장대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두르고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었는데,문은 닫혀 있었다.어쨌든 서원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므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관리인을 불러 안내를 받을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가려진 조광조의 영정이 보였다.나는 그 커튼을 젖혀 보았다. 검은 관모에 양손을 소매 속으로 찔러 넣고,흰색 관복을 입은 조광조의 영정은 이미 지난 가을 능주의 적중거가에서 본 그대로의 동일한 전신상이었다.˝
  • 계간지 ‘시평’ 여름호 아시아의 저항시인 특집

    “(전략)우리들은 함경도 남자와 여자/착취자의 반항에 대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이 고향의 이름에 맹세코/온 조선땅에 봉화를 올렸던 몇 차례 봉기에/피를 쏟은 이 고향의 흙에 맹세코/고개를 처박고 염치없이 진지를 적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민족시인 누구인가가 썼음직한 이 시는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 시인 마키무라 고( 村浩·1912∼1938)가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조선인의 입장에서 쓴 ‘간도 파르티잔의 노래’라는 시다.그가 이 시를 썼을 때는 고작 열 아홉살이었으며,어릴 때부터 ‘고치(高知)현의 천재’로 불렸던 이 소년작가는 그러나 ‘군국 일본’에의 맹종을 거부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스물 여섯에 정신병원에서 병사하고 말았다.이 시는 당시에 빛을 보지 못하고 출판사주가 기름종이에 싸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가 죽은지 25년 만에야 세상에 내놓았다.일본의 시인 사가와 아키(佐川亞紀)는 그를 두고 ‘반전과 아시아 침략 반대를 관철한 시인으로,일본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전한다. 시전문지 ‘시평’ 여름호는 마키무라 고를 비롯,항일 중국시인 따이왕수(戴望舒)와 히우 로안,프랑스에 저항한 베트남의 부 까오 등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저항시인들의 시편을 묶은 특집을 꾸몄다.그 시편에 드러나듯 전란에 휩싸인 지난 세기의 아시아 대륙은 살육과 착취,억압과 강탈이 이어져 어둡고 참혹했지만 그 속에서도 시인들은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찢어진 나의 손바닥으로/이 광활한 대지를 어루만진다/이 쪽은 이미 잿더미로 변했고/저 쪽은 피와 진흙뿐이다(후략).” 이 시는 중국의 시인 따이왕수가 1942년 일제에 의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뒤 자신이 겪은 중일전쟁의 기억을 담아낸 항일시로,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렇듯 거칠 것 없이 내닫는 일본의 침략 행보였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심지어는 일본 내에서조차 저항과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3년 전의 여름/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3000개의 뼈를 보았다/반 세기 전 그 마을에 일본 군대가 와서/마을 사람들을 벼랑 아래 모아놓고 총살시켜(중략)/나는 가끔 생각한다/그 뼈를 부러워하고 있어서/내가 살해당할 때도/그랬으면 좋겠다(후략).” 전후 세대로,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전시인 도쿠히로 야스요(德弘康代)는 이렇게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양심으로 통렬한 자기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절체절명의 싸움을 벌여야 했던 베트남의 저항시도 처절하고 강인하다.“(전략)들판 가운데 흰 비석에/당신이 열사라고 써놓았다/당신을 그리며 나는,당신!동지!라고 불러본다/수 만의 마음중 일편단심이라고.” 베트남의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시는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웠던 ‘시인 전사’ 부까오의 ‘도이산’이라는 시다.시편은 지난 세기 저항시들이 의도를 앞세워 포기해야 했던 문학적 미감(美感)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는 순수이면서 동시에 이념일 수 있고,싸움이면서 또한 화해이기도 하다.최근 다시 군국화하는 일본,그리고 모든 강대국에 대해 아시아인이 이 시에 담아 보내는 메시지는 ‘화해 그리고 끝없는 저항’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儒林(9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차에서 내리자 오월의 햇살이 한꺼번에 플래시를 터뜨리듯 작열하고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낮은 울타리를 따라 피처럼 붉은 영산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서원 뒤편의 숲 속에 아카시아 꽃들이라도 만발한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 주위는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까뭉개고 그곳에 새 아파트를 짓고 싶지만 명색이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돼 있는 유적지라 어쩔 수 없이 보존하고 있는 듯 서원의 건물들은 흥부네 집 아이들의 헤진 옷을 기운 누더기처럼 간신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원래는 야산을 등 뒤로 하고 양지바른 명당자리에 세워진 서원이었지만 이제는 볼썽사나운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서원은 데리고 온 의붓자식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서원의 입구는 세 칸의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외삼문(外三門)으로 돌계단 위에 우뚝 서 있었다.홍살문처럼 역시 붉은 칠을 한 대문에는 각각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고,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그러나 그것보다 강렬하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서원 바깥에 있는 작은 못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스스로 못을 파고 그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하는데,그렇다면 이 못자리가 조광조가 만들었다는 그 연지(淵池)가 아닐까.그러나 철책으로 둘러싸인 못자리는 물조차 없는 메마른 구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개발,개발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그러나 그들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이와 같이 무신경하다.아파트 한 채에 들어가는 주방기구의 값만으로도 조광조가 만들었던 연못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아파트 거실에 매달린 고급 샹들리에의 조명 값만으로도 그 못에 연꽃을 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미친 것은 우리들이다.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며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미치광이는 조광조가 아니라 후세를 사는 우리들인 것이다.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귀한지 모르고 오로지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이익을 좇고 프리미엄에 미쳐 있는 미치광이들. 그 메마른 구덩이가 조광조가 직접 만든 연못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못자리 위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잣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위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조광조가 심었던 잣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그 나무들이 연못 위쪽에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나무들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세 그루. 나는 연못가에 있는 느티나무로 올라가 보았다.나무 밑둥 옆에는 이 느티나무가 경기도에 의해서 보호수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고,수령 5백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5백년이 된 느티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높이는 17m,밑 둘레가 4m에 이를 만큼 거목으로 자라 있었다.조광조가 죽고 왕이 바뀌고 왕조가 멸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5백년 동안 그가 심은 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역사의 진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노래하였던가. “나무는 신성한 것이다.나무와 이야기하듯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나무는 교의(敎義)도 처방도 듣지 않는다.나무는 개개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준다.” 조광조가 심은 느티나무.조광조가 죽은 이래 5백 년 동안이나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주는 느티나무.조광조의 혼백은 저 느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남아 역사의 진리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교의를 가르쳐주고 있지 아니한가.
  • 儒林(9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차에서 내리자 오월의 햇살이 한꺼번에 플래시를 터뜨리듯 작열하고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낮은 울타리를 따라 피처럼 붉은 영산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서원 뒤편의 숲 속에 아카시아 꽃들이라도 만발한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 주위는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까뭉개고 그곳에 새 아파트를 짓고 싶지만 명색이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돼 있는 유적지라 어쩔 수 없이 보존하고 있는 듯 서원의 건물들은 흥부네 집 아이들의 헤진 옷을 기운 누더기처럼 간신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원래는 야산을 등 뒤로 하고 양지바른 명당자리에 세워진 서원이었지만 이제는 볼썽사나운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서원은 데리고 온 의붓자식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서원의 입구는 세 칸의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외삼문(外三門)으로 돌계단 위에 우뚝 서 있었다.홍살문처럼 역시 붉은 칠을 한 대문에는 각각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고,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그러나 그것보다 강렬하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서원 바깥에 있는 작은 못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스스로 못을 파고 그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하는데,그렇다면 이 못자리가 조광조가 만들었다는 그 연지(淵池)가 아닐까.그러나 철책으로 둘러싸인 못자리는 물조차 없는 메마른 구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개발,개발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그러나 그들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이와 같이 무신경하다.아파트 한 채에 들어가는 주방기구의 값만으로도 조광조가 만들었던 연못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아파트 거실에 매달린 고급 샹들리에의 조명 값만으로도 그 못에 연꽃을 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미친 것은 우리들이다.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며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미치광이는 조광조가 아니라 후세를 사는 우리들인 것이다.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귀한지 모르고 오로지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이익을 좇고 프리미엄에 미쳐 있는 미치광이들. 그 메마른 구덩이가 조광조가 직접 만든 연못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못자리 위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잣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위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조광조가 심었던 잣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그 나무들이 연못 위쪽에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나무들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세 그루. 나는 연못가에 있는 느티나무로 올라가 보았다.나무 밑둥 옆에는 이 느티나무가 경기도에 의해서 보호수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고,수령 5백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5백년이 된 느티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높이는 17m,밑 둘레가 4m에 이를 만큼 거목으로 자라 있었다.조광조가 죽고 왕이 바뀌고 왕조가 멸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5백년 동안 그가 심은 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역사의 진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노래하였던가. “나무는 신성한 것이다.나무와 이야기하듯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나무는 교의(敎義)도 처방도 듣지 않는다.나무는 개개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준다.” 조광조가 심은 느티나무.조광조가 죽은 이래 5백 년 동안이나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주는 느티나무.조광조의 혼백은 저 느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남아 역사의 진리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교의를 가르쳐주고 있지 아니한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9)한국의 찻그릇 - 우동진의 백자 찻사발

    백자는 청자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그릇이자 조선시대의 유교이념이 투영된 세계적 미술품이다.중국의 당·송 시대에서 비롯된 백자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고려 중엽 이후부터였다.불교사상을 상징한 청자시대의 화려하고 우아한 멋이 백자의 단아함과 고결함을 껴안게 되면서 고려시대라는 정신사를 아름답게 장식했다.주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귀국하는 길에 선물용으로 사오거나 중국 정부의 예물로 들여오기 시작하다가 고려백자라는 이름의 흉내낸 그릇이 제작된 적도 있었지만,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게 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순백자 예찬론자였던 세종대왕의 고급 문화정책에 힘입어 경기도 여주,이천,광주에 관요(官窯)가 세워졌고,조선의 왕실,귀족,양반 관료들만의 전유물인 고급 백자가 엄격한 체제와 관리 아래서 생산되었다.조선시대 민중들은 이같은 백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그릇은 곧 신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백자시대였지만 정작 차문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찻사발은 그리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다.차문화가 불교문화의 핵심인 헌공다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사상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지배자들이 차문화를 숭상하기 어려웠던 탓이다.차 대신 술이 지배한 시대가 조선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조선시대는 차 대신 술이 지배 그런 중에도 아주 적은 양의 찻그릇들이 제작되어 사용된 사실은 있었다.찻사발도 마찬가지였다.백자 찻사발은 백자 특유의 차갑고 엄격한 선과 색깔을 아름다움의 핵심으로 삼았다.날카롭다고 볼 수 있는 찻사발의 전이 지닌 얇고 경직된 선,단조롭고 정형화된 굽,허리와 중배에서 전으로 이어지는 차가운 선,조선 선비의 이상향을 상징하는 절개와 무욕의 흰 색깔로 된 찻사발은 매우 적은 양만이 전해지고 있다.백자는 민중들과의 신분 차별을 뜻하기도 해서 역사적인 의미로나 미학적 접근에서 난해하고 제한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현대사회에 와서도 백자를 빚는 이들이나 사용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경남 양산시 웅상읍 매곡리 매곡요(梅谷窯) 주인 우동진(46)씨가 최근 발표한 백자를 주제로 한 찻사발의 재해석은 백자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크게 변화시켜 줄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그의 작업장으로 찾아가 작품 세계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문:기본적으로는 백자의 미학적 토대를 유지하면서도 민중적 정서와 체취를 느끼도록 시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떻게 이같은 발상이 가능했을까요? 우동진:찻사발에 대한 관심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특히 최근 들어 도자작가나 차인들에게 크게 회자되고 있는 정호(井戶) 찻사발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백자에다 정호를 응용하고 싶어지더군요. 문:언제부터 도자기를 빚게 되었지요? 우동진:27세 때부터였습니다.처음엔 산어도자에 관심이 있었지요.타일,전기애자를 생산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는데 이 분야는 기술과 자본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더군요.흙의 문제도 있었고요.생활도자기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흙을 만지게 되었습니다.벌써 20년째가 됩니다. 문:가마의 불은 어떤 재료를 주로 사용합니까? 우동진:석유가마,가스가마를 거쳐서 현재의 장작가마로 밟아왔습니다.이 가마는 스승이신 천한봉 선생께서 터를 잡고 지어주신 것입니다.가마가 곧 저의 스승인 셈입니다. 문:대학 학부에서는 도자공예를 공부하고,대학원에서는 도예디자인과 광물학 두 과정을 공부했거나 현재 공부하고 있는데,학문이 도자 실기에 도움이 됩니까? ●흙의 성질 알고 그릇 만들면 희열 우동진:굳이 찻그릇을 만드는데 석사 박사 학위가 필요한 조건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요.다만 제가 광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흙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도자기는 한마디로 흙의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곳곳에 도자소가 산재했다는 점,선조들이 흙의 분석에 철저했다는 점 등은 우리나라 지층 구조가 다양했기 때문이라 봅니다.흙의 맛과 멋을 제대로 알고,흙의 성질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알고 그릇을 만들면 훨씬 자유롭고 깊은 정신적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흙의 성격은 복합적인 화학적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구성 요소마다 못된 놈 좋은 놈들의 상호작용이 존재하지요.그 작용이 조화인데,이를 잘 이해해야만 흙의 질서를 배울 수 있거든요.따라서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이 그냥 그릇을 만들어 돈을 받고 팔아서 먹고 사는 경우와 먹고는 살되 흙의 질서를 배워 나도 흙이 되려고 하는 경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제딴에는 후자에 속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문:백자 찻사발 세계를 들여다보면 박지원 선생의 양반전을 떠올리게 됩니다.조선의 양반제도가 지닌 모순과 폐해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꾸짖는 양반전의 통쾌함이 우 선생의 백자 찻사발에서도 감지된다는 말입니다.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이 무논에서 쟁기질하는 것 같은 묘한 맛과 함께,조선시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백자를 민중들의 정서에 맞도록 재구성한 것은 확실히 놀라운 실험정신의 소산으로 보입니다.그런 것을 의식했을까요? ●양반제 폐해 신랄하게 풍자해 통쾌 우동진:꼭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다만 우리 시대의 삶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백자라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줄곧 해왔습니다.임진왜란으로 한국 도자역사 500년을 일본에 빼앗겼지만 우리에게 미래는 무궁합니다.미래의 세대가 21세기 한국의 도자 역사를 물을 때 대답해 줄 최소한의 몇 마디라도 준비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도자기 만드는 이들이 실험정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재료도 부족하지 않으냐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만 저는 그 지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상업적인 도자 제작 판매에 매달려서 남의 우수한 창작품을 베끼기하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그렇지 않은 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은 하나 하나가 다 도전정신의 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문:우 선생께서는 평소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요. 우동진:남 욕하고 허물을 들추지 말자는 것이지요.작가로서 이름 얻는 수단만 좇을 게 아니라 내가 할 몫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최선을 다하다 흙이 되자는 것입니다. 문:우리나라 찻사발의 문제점이 뭐라고 보십니까? 우동진:찻사발 만드는 작가들이 먹고 사는 일에 너무 급급하다 보니 실험정신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실험정신은 도자 교육과정에서 강조되어야 옳은데 이를 소홀히 하면 미래로 향하는 작가의 발목이 현실 안주라는 마귀에게 붙들리게 됩니다.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지요.부족함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이 실험정신이고,아름다움 아니겠습니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9)한국의 찻그릇 - 우동진의 백자 찻사발

    백자는 청자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그릇이자 조선시대의 유교이념이 투영된 세계적 미술품이다.중국의 당·송 시대에서 비롯된 백자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고려 중엽 이후부터였다.불교사상을 상징한 청자시대의 화려하고 우아한 멋이 백자의 단아함과 고결함을 껴안게 되면서 고려시대라는 정신사를 아름답게 장식했다.주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귀국하는 길에 선물용으로 사오거나 중국 정부의 예물로 들여오기 시작하다가 고려백자라는 이름의 흉내낸 그릇이 제작된 적도 있었지만,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게 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순백자 예찬론자였던 세종대왕의 고급 문화정책에 힘입어 경기도 여주,이천,광주에 관요(官窯)가 세워졌고,조선의 왕실,귀족,양반 관료들만의 전유물인 고급 백자가 엄격한 체제와 관리 아래서 생산되었다.조선시대 민중들은 이같은 백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그릇은 곧 신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백자시대였지만 정작 차문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찻사발은 그리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다.차문화가 불교문화의 핵심인 헌공다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사상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지배자들이 차문화를 숭상하기 어려웠던 탓이다.차 대신 술이 지배한 시대가 조선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조선시대는 차 대신 술이 지배 그런 중에도 아주 적은 양의 찻그릇들이 제작되어 사용된 사실은 있었다.찻사발도 마찬가지였다.백자 찻사발은 백자 특유의 차갑고 엄격한 선과 색깔을 아름다움의 핵심으로 삼았다.날카롭다고 볼 수 있는 찻사발의 전이 지닌 얇고 경직된 선,단조롭고 정형화된 굽,허리와 중배에서 전으로 이어지는 차가운 선,조선 선비의 이상향을 상징하는 절개와 무욕의 흰 색깔로 된 찻사발은 매우 적은 양만이 전해지고 있다.백자는 민중들과의 신분 차별을 뜻하기도 해서 역사적인 의미로나 미학적 접근에서 난해하고 제한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현대사회에 와서도 백자를 빚는 이들이나 사용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경남 양산시 웅상읍 매곡리 매곡요(梅谷窯) 주인 우동진(46)씨가 최근 발표한 백자를 주제로 한 찻사발의 재해석은 백자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크게 변화시켜 줄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그의 작업장으로 찾아가 작품 세계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문:기본적으로는 백자의 미학적 토대를 유지하면서도 민중적 정서와 체취를 느끼도록 시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떻게 이같은 발상이 가능했을까요? 우동진:찻사발에 대한 관심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특히 최근 들어 도자작가나 차인들에게 크게 회자되고 있는 정호(井戶) 찻사발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백자에다 정호를 응용하고 싶어지더군요. 문:언제부터 도자기를 빚게 되었지요? 우동진:27세 때부터였습니다.처음엔 산어도자에 관심이 있었지요.타일,전기애자를 생산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는데 이 분야는 기술과 자본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더군요.흙의 문제도 있었고요.생활도자기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흙을 만지게 되었습니다.벌써 20년째가 됩니다. 문:가마의 불은 어떤 재료를 주로 사용합니까? 우동진:석유가마,가스가마를 거쳐서 현재의 장작가마로 밟아왔습니다.이 가마는 스승이신 천한봉 선생께서 터를 잡고 지어주신 것입니다.가마가 곧 저의 스승인 셈입니다. 문:대학 학부에서는 도자공예를 공부하고,대학원에서는 도예디자인과 광물학 두 과정을 공부했거나 현재 공부하고 있는데,학문이 도자 실기에 도움이 됩니까? ●흙의 성질 알고 그릇 만들면 희열 우동진:굳이 찻그릇을 만드는데 석사 박사 학위가 필요한 조건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요.다만 제가 광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흙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도자기는 한마디로 흙의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곳곳에 도자소가 산재했다는 점,선조들이 흙의 분석에 철저했다는 점 등은 우리나라 지층 구조가 다양했기 때문이라 봅니다.흙의 맛과 멋을 제대로 알고,흙의 성질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알고 그릇을 만들면 훨씬 자유롭고 깊은 정신적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흙의 성격은 복합적인 화학적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구성 요소마다 못된 놈 좋은 놈들의 상호작용이 존재하지요.그 작용이 조화인데,이를 잘 이해해야만 흙의 질서를 배울 수 있거든요.따라서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이 그냥 그릇을 만들어 돈을 받고 팔아서 먹고 사는 경우와 먹고는 살되 흙의 질서를 배워 나도 흙이 되려고 하는 경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제딴에는 후자에 속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문:백자 찻사발 세계를 들여다보면 박지원 선생의 양반전을 떠올리게 됩니다.조선의 양반제도가 지닌 모순과 폐해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꾸짖는 양반전의 통쾌함이 우 선생의 백자 찻사발에서도 감지된다는 말입니다.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이 무논에서 쟁기질하는 것 같은 묘한 맛과 함께,조선시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백자를 민중들의 정서에 맞도록 재구성한 것은 확실히 놀라운 실험정신의 소산으로 보입니다.그런 것을 의식했을까요? ●양반제 폐해 신랄하게 풍자해 통쾌 우동진:꼭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다만 우리 시대의 삶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백자라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줄곧 해왔습니다.임진왜란으로 한국 도자역사 500년을 일본에 빼앗겼지만 우리에게 미래는 무궁합니다.미래의 세대가 21세기 한국의 도자 역사를 물을 때 대답해 줄 최소한의 몇 마디라도 준비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도자기 만드는 이들이 실험정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재료도 부족하지 않으냐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만 저는 그 지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상업적인 도자 제작 판매에 매달려서 남의 우수한 창작품을 베끼기하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그렇지 않은 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은 하나 하나가 다 도전정신의 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문:우 선생께서는 평소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요. 우동진:남 욕하고 허물을 들추지 말자는 것이지요.작가로서 이름 얻는 수단만 좇을 게 아니라 내가 할 몫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최선을 다하다 흙이 되자는 것입니다. 문:우리나라 찻사발의 문제점이 뭐라고 보십니까? 우동진:찻사발 만드는 작가들이 먹고 사는 일에 너무 급급하다 보니 실험정신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실험정신은 도자 교육과정에서 강조되어야 옳은데 이를 소홀히 하면 미래로 향하는 작가의 발목이 현실 안주라는 마귀에게 붙들리게 됩니다.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지요.부족함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이 실험정신이고,아름다움 아니겠습니까?
  • 5월에 떠나는 5감 여행-하동

    매화부터 벚꽃,배꽃까지.달포 넘게 꽃멀미를 앓은 섬진강의 5월은 차분하고 그윽하다.이맘때 하동의 향기는 5할이 다향이다.지리산 화개골 30리.가파른 산기슭마다 여린 찻잎을 따는 아낙의 손놀림이 바쁘고,그 아래 다원에선 고소한 냄새 솔솔 풍기며 차를 덖는다.나머지 향기 5할의 진원지는 섬진강가 식당이다.재첩을 끓이면서 나는 달큰한 냄새.예전의 ‘재첩국 사이소’란 정겨운 목소리는 없지만,뼛속까지 시원한 국물맛이 어디가랴.강변 백사장엔 지리산에서 날아온 패러글라이더들이 내려앉고,평사리 들녘엔 자운영이 보랏빛 물결을 이루는 5월의 하동,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곳이다. 글 하동 임창용기자 sdragon@ ●다향 가득한 화개골 “올핸 일교차가 심해 찻잎이 예년만 못하네요.” 화개골에 자리잡은 ‘도심다원’ 대표 오시영씨는 ‘아쉽다.’는 말과 달리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아마도 30년 이상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산사람’의 여유가 몸에 밴 듯하다.2만여평의 자생 차밭을 갖고 있다는 오씨와 함께 산에 올랐다. 하동의 차밭은 거칠다.정원처럼 가꾼 보성이나 제주의 차밭과는 영 다르다.강변의 일부 차밭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기슭을 따라 듬성듬성 성긴 모양을 하고 있다.대부분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지 않고,예로부터 내려온 자생차밭이기 때문이다. 요즘 이곳에선 세작이나 중작용 찻잎을 딴다.곡우 전후에 잎을 따는 우전이 첫물차라면,세작은 두물차,중작은 세물차쯤 된다.중작 이후엔 대작을 딴다.굵은 찻잎이 대부분인 대작은 숭늉 대신 끓여 마시는 차로,또는 티백용으로 나간다.물론 가장 먼저 따는 우전차가 귀한 만큼 값도 비싸다.그중에서도 대숲 아래서 자란 찻잎으로 만든 죽로(竹露)차를 최고로 친다.그러나 막상 차를 만드는 오씨는 “차 맛은 오히려 두물차인 세작이 더 은근하고 향도 좋다.”고 귀띔한다.갓 나온 순보다는 찻잎이 제모양을 갖추었을 때 우려내야 향과 맛이 제대로 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그는 “우전차가 비싼 것은 적게 나오는 데 따른 ‘희소가치의 값’”이라고 했다. 화개장터를 지나서부터 간간이 보이는 자생 차밭은 녹차시배지와 차문화센터,쌍계사,칠불사 입구를 지나 화개골 30여리에 걸쳐 퍼져 있다.산기슭 중에서 경사가 덜 가파른 곳엔 어김없이 차밭이 자리잡고 있다.말이 밭이지 멀리서 보면 그저 잡초 무성한 잡목숲이나 다름없다.수건을 쓰고 찻잎을 따는 아낙들은 꼭 나물을 뜯는 것처럼 보인다. 하동의 차밭 면적은 500㏊에 달한다.그중 화개 지역에만 350㏊의 차밭이 있다.면적만으로 따지면 전남 보성보다 넓다고 한다.화개천을 따라 길을 오르다 보면 다원들이 계속 이어진다.대부분 자체의 차밭에서 나온 찻잎으로 차를 생산해 판다.시중보다 30∼40% 싸게 구입할 수 있다.차 구입뿐만 아니라 차 시음,차를 만드는 과정도 구경할 수 있다. 하동의 차는 수제 덖음차다.찻잎을 일일이 손으로 무쇠솥에서 덖어 만든다.솥에서 덖은 찻잎은 차의 성분이 잘 우러나도록 손으로 비비는 과정,건조와 끝덕기를 거쳐 차로 완성된다.보성이나 제주에서 대량생산하는 녹차는 대부분 찻잎을 수증기로 쪄서 말리는 증제차다. 차시배지와 차문화센터에도 가보자.차시배지는 신라 흥덕왕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차씨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곳.그러나 최근 구례 화엄사 뒤 차밭이 시배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하동군이 최근 건립한 차문화센터는 차의 역사와 함께 차문화 발달,차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곳.녹차 무료 시음장도 있다. ●섬진강의 진객 ‘재첩’ 5월 이후 섬진강은 재첩잡이꾼들의 차지다.해 저물녘 작은 배들을 띄워놓고 가슴팍까지 몸을 담근 채 재첩을 잡는 풍경은 종종 ‘한국의 미’로 소개될 만큼 아름답다. 섬진강변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김상모(66)씨는 “예전에 먹고 살기 어려웠을 때는 재첩을 식량 대용으로 썼다.”며 “보릿가루와 함께 죽을 쑤어 춘궁기를 넘겼다.”고 말했다.“5,6월에 잡히는 재첩이 맛도 있고 영양가도 높아요.7월 하순이 지나면 산란을 시작하기 때문에 알이 빠진 재첩은 진기가 빠져 제맛이 안 납니다.” 60년대만 해도 이맘때 섬진강에 들어가면 모래 반,재첩 반일정도로 재첩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광양제철소 건설 등 섬진강 하구 일대의 환경 변화,해수면 상승 등으로 재첩 어획량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서식지도 점차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래도 국내 생산량의 70%는 섬진강에서 난다.아직 물이 깨끗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수요가 많다 보니 섬진강변에서도 중국산 재첩을 쓰는 식당이 있다.요즘은 운반기술이 발달해 산 채로 옮겨온 것을 쓴다고 한다.식당이나 상인들 스스로 ‘국산만을 써 섬진강 재첩의 이미지를 지키자.’는 움직임도 있으나 워낙 가격 차이가 커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섬진강에서 잡은 재첩은 1㎏에 5000원(껍질째) 정도로 인근 식당에 팔린다.따라서 인근 식당이나 길가 판매소에서 그 이하의 값으로 일반인들에게 파는 것은 대부분 중국산이라고 보면 된다. ●악양 들판의 보리와 자운영 이맘때 악양면 평사리에 가면 자운영이 보랏빛 꽃물결을 이루며 들녘을 가득 메운다.맥주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풍광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논둑을 사이에 두고 자운영 꽃밭과 맥주보리 물결이 끝없이 이어진 풍광은 이맘때 하동의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평사리 들판은 예전에 만석군이 서넛은 나올 정도로 땅이 기름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의 문전 옥답이 바로 이곳이다.하동군에선 소설의 유명세를 빌려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지세 좋은 곳에 소설속 최참판댁을 그럴듯하게 재현해 놓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이곳에 오면 가장 궁금해하는 게 바로 자운영이다.맥주보리야 벼농사가 시작되기 전 수확하는 이모작으로 심었다고 하지만 자운영은 왜 키웠을까.‘자운영 쌀’을 위한 것이란다.꽃이 질 무렵 논을 갈아 엎으면 자운영 줄기와 꽃이 거름이 되어 기름기 잘잘 흐르는 ‘자운영 쌀’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가을엔 맛좋은 쌀을 수확하고,봄엔 곱디고운 자운영 꽃밭을 이루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섬진강 재첩은 알맹이가 꽉 차고,국을 끓이면 맑은 우윳빛이 돈다.이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염도가 적당하고 강바닥의 모래알이 보일 정도로 깨끗한 물에서 자라기 때문이다.또 곱게 발달한 모래톱과 각종 먹이생물이 풍부해 고품질의 재첩을 길러낸다. 하동군청 직원 지이우씨는 “6,7월이면 인근 주민들이 새까맣게 몰려 잡는다.”며 “그래도 재첩이 계속 나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재첩요리는 국과 회 두가지.재첩국은 예전엔 껍데기까지 함께 끓였으나 요즘엔 알맹이만 가려내 만든다. 먼저 재첩을 깨끗이 씻어 가마솥에 넣고 2∼3시간 정도 삶아 국물을 우려낸다.국물 빛깔이 맑으면서 뽀얘야 제대로 우려낸 것이다.이어 재첩을 건져 알맹이와 껍데기를 분리해주는 선별기에 넣어 알맹이만 골라낸다. 재첩 알맹이를 씻어 처음에 우려낸 국물에 넣어 다시 한번 푹 끓이면 재첩국이 완성된다.재첩국엔 양념을 넣지 않고 천일염으로 간만 맞춰 먹는다.부추나 파를 잘게 썰어 넣어 먹으면 향과 함께 맛을 더해준다. 재첩회는 국을 끓일 때 분리된 재첩알맹이에 몇 가지 야채와 과일을 채로 썰어넣고 과일식초로 만든 초고추장으로 버무려 만든다.미나리,부추,당근,양파,상추,쑥갓,사과,배 등이 들어간다. 새콤달콤하면서 재첩의 쫄깃함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이때 ‘손맛’에 따라 업소의 명성이 달라진다.대접에 밥을 덜어 참기름과 잘 버무려진 재첩회를 얹어 비벼서 먹으면 재첩의 또 다른 참맛을 느낄 수 있다.하동에서는 섬진교 인근 하동읍내 초입에 나란히 붙어 있는 ‘동흥식당’(055-884-2257)과 ‘여여식당’(884-0080)이 재첩 전문집으로 유명하다.읍내리 청탑예식당 건물 1층의 ‘청탑한식’(882-9988)의 재첩회 맛도 괜찮은 평가를 받는다.재첩국 5000원.재첩회는 3만원짜리 1접시면 서넛이 먹을 수 있다.하동읍내 시외버스터미널 입구에 가면 야외에 할머니 몇 분이 큰 통을 걸어놓고 재첩국을 끓여 판다.한그릇에 2000원. 섬진강 참게를 맛보고 싶으면 남도대교 인근의 ‘은성식당’(884-5550)에 가보자.주인 이동수씨가 자연산만을 고집하며 운영한다.고소한 참게와 시원한 국물이 어우러진 참게탕을 특히 잘한다.이씨는 “양식은 자연산에 비해 다리가 길고 등껍질에서 흰 빛이 난다.”고 구별법을 귀띔해준다. 하동 글 임창용기자 sdragon@ ●가는 길·숙박 서울에선 경부 또는 중부고속도로∼대전-진주 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를 차례로 갈아타야 한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빠져 19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 섬진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하동읍 입구,평사리 벌판,화개골 입구가 차례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하동 시외버스터미널(055-883-2663)까지 하루 6회 고속버스가 출발한다.4시간30분 소요.부산에선 하동까지 40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다.하동읍내에서 화개장터,쌍계사,평사리공원,최참판댁까지 가는 버스가 수시로 있다. 하동엔 아직 관광호텔이 없다.섬진강변이나 화개골의 여관을 이용하거나 최근 많이 지어진 황토방 민박을 이용해야 한다.화개면 일대에 덕은리 ‘온천모텔’(883-6434),탑리 ‘황토방 별장’(883-7605),평사리 ‘섬진강변의 미리내’(884-7292) 등이 묵을 만하다. ●쌍계사와 칠불사 하동 화개골에 가서 쌍계사와 칠불사를 빠뜨릴 수 없다.쌍계사는 다양한 문과 전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매혹적이다.경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계류,적당한 높낮이와 아기자기한 동선을 따라서 걷다보면 쌍계사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신라 성덕왕 21년(722년) 세워졌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인조 10년 다시 지은 것이다.부도와 대웅전,팔상전 등 보물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눈길을 끈다. 쌍계사 서쪽 반야봉 남쪽에 자리한 칠불사는 불교 남방전래설의 근거로 내세워지는 사찰.AD 97년 가야 수로왕의 7왕자가 수도끝에 성불했다고 해 칠불사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임금이 사찰을 찾자 7왕자가 나타났다는 연못 ‘영지’,한번 불을 때면 100일동안 따뜻함을 유지한다는 온돌 ‘아자방’이 눈여겨볼 만하다. ■ 패러글라이딩대회 15일 개막 하동 섬진강 재첩국과 화개골의 향기 좋은 햇차를 마셨다면 지리산으로 눈을 돌려보자. 15일부터 22일까지 악양면 지리산 형제봉과 구제봉 활공장에서는 ‘제1회 아시아 패러글라이딩 선수권대회’가 열려 볼거리를 제공한다.‘항공 스포츠의 꽃’으로 불리는 패러글라이딩의 아시아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다.이번 대회는 한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 8개국과 호주·러시아·독일·헝가리·마케도니아·우크라이나등 총 14개국 104명의 선수가 참가해 진검승부를 가린다. 아름다운 섬진강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형형색색의 낙하산을 타고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새가 나는 것 같다.또 모터패러의 축하비행과 무료로 행글라이딩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시뮬레이션 체험 등 다양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패러글라이딩 선수 참가자격 아시아권 국가들의 경우 국가별로 최대 23명(남자20,여자3명)까지 출전이 가능하고,비아시아권 선수들은 세계랭킹 순으로 출전이 허용된다.또한 세계랭킹 1000위 이내에 등록되어 있는 선수이거나 패러글라이딩 경기에서 30㎞ 이상 거리를 2회 이상 비행한 경력이 있는 선수에게만 출전자격이 주어진다. ●경기방식 ‘크로스컨트리’라고 하는 장거리경주 방식이다.이륙장을 출발해 지정된 몇 군데의 포인트를 돌고 정해진 목표지점에 빨리 도착하는 레이스이다.마치 육상종목 중 마라톤과 같은 이 크로스컨트리 경기는 보통 40∼60㎞ 코스에서 길게는 100㎞가 넘는 장거리를 날아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출전선수 중 보통 10∼30% 정도만 완주에 성공한다. 골까지의 비행거리 점수와 도착순서에 따른 비행시간 점수가 합산되어 부여되지만 완주에 실패하고 도중에 불시착선수에게는 각자 착륙지점까지의 비행거리 점수만 인정된다.점수계산 방식은 가장 먼저 골인한 선수에게 1000점 만점이 주어지고,나머지 선수들은 승자와의 시간과 거리 차이에 따라 각각 점수를 부여받는다. 선수가 코스를 완주했는지는 지정된 턴 포인트에서 자신의 GPS(자동항법장치)에 체크를 해서 심사관에게 제출해 완주여부를 검사받게 된다. 이렇게 그날그날의 기상에 따라 경기코스를 달리 해가며 비행을 거듭해 각 선수가 6일 동안 여섯 번의 비행에서 얻은 득점을 종합한 총점으로 챔피언을 가리게 된다. 우승국을 가리는 단체전의 경우는 국가별 상위 3명의 점수를 합산한 점수를 그날의 국가득점으로 계산해 전체 경기에 따른 총점 순으로 국가 랭킹을 결정한다. ●관전 포인트 이번 대회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강세가 예상된다.그러나 일본이 최근 대표선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에 들어간 상황이라 한국이 다소 유리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주목할 만한 선수는 2003년도 한국리그 우승자 ‘피수용’,2003년 한국챔피언 ‘원용묵’ 등과 국제경기경험이 풍부한 ‘정세용’,세계적인 패러글라이더 디자이너이자 백전노장인 송진석 등은 강력한 남자 우승후보이며 2002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프레월드챔피언십대회에서 여자부 1위를 차지한 ‘박정훈’ 선수는 여성부 우승후보 1순위로 우리가 눈여겨 볼 선수들이다. ●각종 이벤트와 볼거리 16일 오후 3시부터 모터패러글라이더 10여대가 연막을 뿌리며 묘기를 부린다.행사장에 설치된 30m의 타워크레인에 행글라이더를 매달아 일반인들이 행글라이더의 묘미를 맛 볼 수 있게 한 시뮬레이션도 볼 만하다. 완주점을 통과한 패러글라이더들이 공중에서 수직하강,나선형 비행 등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는 묘기도 좋은 볼거리다.또한 직경 1m의 원안에 착륙하는 ‘정밀착륙시범’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윤청 홍보단장은 “우리나라는 약 15년 전부터 전 세계 패러글라이딩 장비시장을 주도하고 있어 패러글라이딩 종주국으로 공인받고 있다.”며 “대회기간에 열리는 하동의 ‘녹차축제’와 더불어 관광한국을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 한준규기자 hihi@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 20일부터 23일까지 화개골 운수리 차시배지 및 쌍계사 일원에서 펼쳐진다.올해로 9회째.20일 개막 전야제를 시작으로 하동차 다례 시연,어린이 차예절 경연,야생차 글짓기 및 그림 그리기,야생차 학술 세미나,찻사발 전시회,세계차박람회,햇차 무료시음회 등이 진행된다. 녹차 목욕,야생차 마사지,야생차 농가 방문,야생차밭 사진촬영 등 체험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준비했다. 이밖에 향토음식 요리경연대회,민속놀이 경연,영호남 화합 찻잎따기 등 이벤트행사도 다채롭게 펼쳐진다.대회기간중 우전차 1통 4만원 등 하동차를 대폭 할인 판매한다.문의 하동군 문화관광과(055-880-2371∼4). ˝
  • [산악문학인 안재홍의 산 오르記]포천 운악산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포천군 화현면 운악산(雲岳山·935.5m)은 이맘때 산행들머리인 현등사(懸燈寺) 입구 주차장부터 빈틈이 없다.신록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매표소를 지나면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2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만경로’란 이 나무 계단길은 능선까지 이어진다.눈썹바위에 이르러 전망이 트이기 시작한다.바위 아래에서 쳐다보면 눈썹을 닮은 오버행 바위가 보인다. 눈썹바위 상단에 오르면 푸른 잔디로 장식한 골프장과 꽃동네가 잘 보인다.이어지는 암봉은 우회로가 있고 위험한 곳엔 밧줄을 매놓았다.고인돌을 지나 암봉에 오르면 운악산 전경이 잘 보이고 현등사도 보인다. 암봉이 우뚝한 미륵바위(725m)가 버티고 있는 곳에 ‘병풍바위 촬영소’라는 안내판이 있다.병풍바위는 흰 바위에 소나무를 수놓은 듯하다.미륵바위와 병풍바위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풍광은 가히 선경이다.운악산에서 경치가 제일 빼어난 곳이다.금강산의 만물상이나 설악산의 천화대를 축소한 것 같다. 여기부터 등산로는 더욱 험해진다.바위에 쇠줄을 쳐놓고 발 디딤까지 만들어 놓았다.어른들의 놀이터 같은 길을 조심조심 오른다.‘48계단’을 오르면 노송 두 그루가 있는 암봉이 나온다.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분재 같은 소나무 두 그루가 한 폭의 그림같다.앉아 쉬며 내려다보는 세상도 볼만하다.산으로 둘러 쌓인 조종천 변의 상판리와 현리가 시원하게 펼쳐진다.동북쪽으로 명지산과 멀리 화악산이 하늘과 닿아 있다.남쪽으로 이어진 한북정맥의 산들이 몸을 낮춰 운악산을 경배하는 듯 하다. 정상을 향하여 철 계단을 내려간다.철쭉 밭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헬기장이다.족구를 해도 될 성싶은 넓은 헬기장 북쪽 끝에 정상비가 있다.‘운악산·935.5m·하판리 산162-1·1998.8.1 설립’.정상비 옆에 큰 바위가 있다.바위에 음각으로 ‘결사돌파대’라고 다섯 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여기는 정상이 아니다.정상은 여기서 한북정맥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더 가야 한다.서쪽으로 47번 국도를 따라 일동과 이동으로 이어진 마을이 보이는 곳,이곳이 한북정맥의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 중간 운악산의 정상이다. 하산은 절고개를 지나 동쪽 현등사가 좋다.현등사로 내려가는 길 왼쪽에 코끼리바위가 있다.코끼리 머리에 길게 늘어진 코가 웃음을 머금게 한다.너덜지대를 30분 내려가면 현등사다.천년고찰 현등사는 불사중이다.석탄일이 다가와 연등으로 장식해 놓았다.석양빛이 단청과 어우러져 고색이 창연하다. 구한말 궁내부대신이었던 민영환 선생이 기우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는 무우폭포(舞雩瀑布)에 ‘閔泳煥(민영환)’이라고 새겨진 암각서(岩刻書)가 있다.그 아래 이어지는 백년폭포를 지나 30분쯤 내려오면 주차장이다. 옛날부터 운악산은 가평 화악산(1468.3m),개풍 송악산(488m),파주 감악산(675m),서울 관악산(629m)과 더불어 ‘경기5악’으로 꼽는 산이다. 만경로로 정상에 올라 절고개를 거쳐 현등사로 내려오는 코스의 산행거리는 7㎞,네 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경춘 국도로 청평을 지나 청평 검문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3㎞ 가면 현리다.현리 중심을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온다.여기서 오른쪽으로 8㎞ 정도 가면 현등사 입구인 하판리다.왼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넓은 주차장이 있다.구리시에서 47번 국도로 내촌 베어스타운을 지나 신팔리 사거리에서 오른쪽 청평 방향으로 37번 도로로 현리까지 가도 된다. ●볼거리·먹을거리 현등사는 신라 22대 법흥왕(514~539)때 인도의 마라가미(摩羅呵彌)라는 승려가 신라를 찾았는데 이 때 그를 위해 세운 절이라 전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인 범종이 전해지는데 현등사의 본사인 봉선사에서 만든(광해 11년·1619년) 범종을 말사인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경기도문화재 자료 제17호인 삼층석탑이 축대 아래,해우소 옆에 있다. 현등사 입구는 식당가다.손두부 집들이 두부 맛을 겨룬다(할머니손두부집 031-585-1219).닭백숙과 민물매운탕집들이 즐비하다.민박도 많이 있고 주차장도 널찍하다.현리 중심을 벗어나 삼거리에 있는 양평해장국집(031-585-8008)의 선지해장국은 선지와 천엽을 많이 넣는다.천엽을 소스에 찍어 먹으면 별미다.멀리서 단골로 찾는 이가 많다. ˝
  • “다툼을 통합해 곧은 길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어 발표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은 불기 2548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중생을 요익(饒益)케 하고 구제하는 것은 부처님 서원이요,다툼을 통합하여 일미(一味)를 이루게 하는 것은 다스리는 자(者)의 본원(本願)”이라는 내용의 봉축법어를 12일 발표했다. 법전 종정은 “눈 앞에 법신(法身)의 묘용(妙用)이 나타나 있고 지나가는 바람이 진리(眞理)의 문(門)을 열고 있다.”며 “오늘은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날이요,모든 생명이 진리의 법왕(法王)으로 태어나는 날”이라고 부처님 오신날의 참뜻을 되새겼다.천태종 도용 종정도 법어를 통해 “중생의 마음에 부처님이 오시니 사람마다 공덕의 숲이며 곳곳에 극락이 전개된다.”며 “온 법계의 원수거나 친한 이나 흰 소 수레 함께 끌고 곧은 길로 나아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이경형칼럼] ‘뉴 노무현’의 조건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선고일이 14일로 지정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복귀가 초읽기에 들어 갔다.2달 남짓한 대통령 직무 정지는 사실상 끝난 분위기다. 이제부터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단순히 탄핵소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지나간 임기가 여소야대의 극히 제한된 행동반경에서 국정을 꾸려왔다면,향후 임기는 여대야소로 국정운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여건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노 대통령은 다음달 17대 국회가 개원한 뒤,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장악한 집권당 대통령으로서 정국을 강력하게 운영할 수 있다.이처럼 집권 2기는 정국 주도권을 쥔 막강한 ‘뉴 노무현 체제’가 된다.새 체제는 마음먹기에 따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다.국회 다수결의 이름으로 어떤 입법도 가능하다.그래서 집권 2기는 역설적으로 국정을 더욱 신중하고 안정적으로,예측 가능하게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이념의 깃발을 너무 높이 들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이념과 노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우선 국정 현안을 푸는 데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이다.적어도 지금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당면 경제위기를 푸는 해법을 싸고 정부 기관 간에 엇박자를 보이는 것도 그 바탕엔 노선 대립이 깔려 있는 것처럼 들린다.노 대통령이 ‘실용적 개혁주의’ 입장에서 가르마를 타주어야 한다.노 대통령이 직무 복귀 후 던질 제1성이 어떤 것이냐에 전 국민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까닭이다. 둘째,노 대통령이 되도록 말을 아끼기 바란다.즉흥 연설보다는 준비된 원고에 충실했으면 한다.‘준비된 원고’란 아랫사람이 써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비전,정책의 일관성이 절제된 언어로 정리되어 있는 말씀을 말한다.관객들은 열변보다 판토마임에서 더 정감을 느낀다.백 마디 대사보다 아리아 한 곡이 더 감동을 주는 이유를 곱씹어 봐야 한다. 작년 연말 한국정치학회 학술대회에서 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발표한 노 대통령의 성격 분석도 같은 맥락에서 경청해 볼 만하다.시시비비를 잘 가리고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외향적 사고형이며,상황 판단과 현실 적응능력은 뛰어나지만 외부 자극에 민감한 충동적 감각형이라고 분석했다고 한다. 셋째,실세 측근이나 이너서클의 조언보다 공식기구의 메커니즘을 존중해야 의사 결정이 왜곡되지 않는다.역대 대통령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이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는 않다.과거 제왕적 대통령 시절,호가호위하는 실세의 전횡이 결국 대통령에게 큰 부담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던가. 대통령이 한때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고집한 것도 측근의 부패 연루에서 비롯된 것이다.벌써부터 ‘뉴 노무현’시대의 측근들이 설칠 조짐이 보인다는 볼멘소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당과 국회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앞으로 국정 수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되면 참모들은 대통령의 집권당 친정(親政)체제를 끊임없이 주문할 가능성이 크다.그래야 여당을 통해 국회를 장악하여 입법 뒷받침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친정체제는 상생의 정치 실현 등 정국 운영의 유연성을 저해하며 국정을 조감하는 눈을 흐리게 하기 십상이다.명화를 너무 가까이서 보면 그 작품성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지금 많은 국민들이 ‘뉴 노무현’시대의 도래를 자못 기대하면서도 조바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한번쯤 생각할 필요가 있다. 편집제작 이사 khlee@˝
  • 儒林(8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8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서울 외곽의 신흥도시인 분당을 향해 직통하는 도시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 줄곧 떠오르는 단어 하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였다.’는 단순한 뜻이지만 그 표현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한적한 교외의 들판이었던 이곳은 완전히 빌딩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거대한 아파트 빌딩으로부터 이들을 유혹하는 상가들,서울에서부터 이전해 온 관공서와 대기업의 사무실들….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의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차를 몰고 100㎞에 가까운 속도로 달려가는 내 머릿속으로 문득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노래하였던 시 한 구절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는 고향도 어머니도 없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야회(夜會)에 나가는 동안 그 옷깃 속에서 떨어진 장미꽃 냄새를 맡아가며 고독 속에서 잠이 든다.마치 등불을 들고 홀로 잠든 노예처럼.” 뽕나무 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를 이룬 거대한 신도시는 릴케의 시처럼 고독을 키우고 고향을 잃어버리게 한다.어머니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아이들을 노예처럼 홀로 잠들게 한다. 상전벽해. 원래 상전벽해는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마고선녀이야기’가 출전으로 어느 날 선녀 마고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제가 선생님을 모신 지가 어느새 뽕나무밭이 세 번이나 푸른 바다로 변하였습니다.이번에 봉래(蓬萊)에 갔더니 바다가 다시 얕아져 이전의 반 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하고 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그러나 상전벽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당나라의 시인 유정지(劉廷芝)가 ‘흰 머리를 슬퍼하는 노인을 대신해서 지은 시’라는 의미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데에서 비롯된다. “낙양성 동쪽 복숭아꽃,오얏꽃 날아오며 날아가며 누구의 집에 지는고. 낙양의 어린 소녀는 제 얼굴이 아까운지 가다가 어린소녀가 길게 한숨짓는 모습을 보니 올해에 꽃이 지면 얼굴은 더욱 늙으리라. 내년에 피는 꽃은 또 누가 보려는가.뽕나무 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이다.” 유정지가 노래한 것처럼 강남의 신도시는 복숭아꽃,오얏꽃들이 만발한 5월의 신록이었다.그러나 프랑스의 시인 코페가 ‘신은 촌락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라고 말하였듯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으로 신이 만든 촌락은 파괴되고 결국 인간이 만든 신기루의 도시로 인해 ‘뽕나무 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인 것이다(實聞桑田變成海)’. 낯선 도시의 풍경은 사람을 고독하게 한다.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였지만 공중에 떠 있는 누각 같은 신도시를 달려가다 보면 어디가 어딘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한 치의 머뭇거림도 용납지 않는 드넓은 신작로는 오직 성난 말처럼 질주하는 속도만을 허락할 뿐. 따라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쏜살같이 스쳐가는 도로의 표지판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이러한 불안과 고독이 낯선 신도시를 달려가는 내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오게 한다. “사막이군.” 나는 도시고속도로를 달려가면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대도시는 대 사막이로군.”
  • 儒林(8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서울 외곽의 신흥도시인 분당을 향해 직통하는 도시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 줄곧 떠오르는 단어 하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였다.’는 단순한 뜻이지만 그 표현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한적한 교외의 들판이었던 이곳은 완전히 빌딩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거대한 아파트 빌딩으로부터 이들을 유혹하는 상가들,서울에서부터 이전해 온 관공서와 대기업의 사무실들….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의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차를 몰고 100㎞에 가까운 속도로 달려가는 내 머릿속으로 문득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노래하였던 시 한 구절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는 고향도 어머니도 없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야회(夜會)에 나가는 동안 그 옷깃 속에서 떨어진 장미꽃 냄새를 맡아가며 고독 속에서 잠이 든다.마치 등불을 들고 홀로 잠든 노예처럼.” 뽕나무 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를 이룬 거대한 신도시는 릴케의 시처럼 고독을 키우고 고향을 잃어버리게 한다.어머니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아이들을 노예처럼 홀로 잠들게 한다. 상전벽해. 원래 상전벽해는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마고선녀이야기’가 출전으로 어느 날 선녀 마고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제가 선생님을 모신 지가 어느새 뽕나무밭이 세 번이나 푸른 바다로 변하였습니다.이번에 봉래(蓬萊)에 갔더니 바다가 다시 얕아져 이전의 반 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하고 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그러나 상전벽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당나라의 시인 유정지(劉廷芝)가 ‘흰 머리를 슬퍼하는 노인을 대신해서 지은 시’라는 의미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데에서 비롯된다. “낙양성 동쪽 복숭아꽃,오얏꽃 날아오며 날아가며 누구의 집에 지는고. 낙양의 어린 소녀는 제 얼굴이 아까운지 가다가 어린소녀가 길게 한숨짓는 모습을 보니 올해에 꽃이 지면 얼굴은 더욱 늙으리라. 내년에 피는 꽃은 또 누가 보려는가.뽕나무 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이다.” 유정지가 노래한 것처럼 강남의 신도시는 복숭아꽃,오얏꽃들이 만발한 5월의 신록이었다.그러나 프랑스의 시인 코페가 ‘신은 촌락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라고 말하였듯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으로 신이 만든 촌락은 파괴되고 결국 인간이 만든 신기루의 도시로 인해 ‘뽕나무 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인 것이다(實聞桑田變成海)’. 낯선 도시의 풍경은 사람을 고독하게 한다.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였지만 공중에 떠 있는 누각 같은 신도시를 달려가다 보면 어디가 어딘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한 치의 머뭇거림도 용납지 않는 드넓은 신작로는 오직 성난 말처럼 질주하는 속도만을 허락할 뿐. 따라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쏜살같이 스쳐가는 도로의 표지판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이러한 불안과 고독이 낯선 신도시를 달려가는 내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오게 한다. “사막이군.” 나는 도시고속도로를 달려가면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대도시는 대 사막이로군.”˝
  • 儒林(8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양팽손에 의해서 그대로 지켜진다.유언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사약을 들이켰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보다 못한 군졸이 밧줄을 들고 조광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 졸라 교살시키려 하자 조광조는 ‘무엇을 하려 드느냐.네놈은 내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한다.성상께서 나의 몸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셨는데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하고 호통을 치고는 남은 사약을 단숨에 들이켠 후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조광조의 얼굴에는 이승에서의 한을 차마 끊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이 활짝 열려져 있었는데,이 눈을 감겨준 사람이 바로 양팽손. 그러고 나서 양팽손은 우차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마을 골짜기에 가매장하였는데,조광조가 남긴 유언대로 갖바치가 준 태사혜를 시신의 발에 신겨주었으며,초라한 시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만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조광조의 시신이 한겨울 동안 가매장되었던 자리에는 ‘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란 작은 비석이 서 있다.송시열이 쓴 명필인데,조광조의 사후 그의 무덤자리에 세워졌던 서원의 흔적도 사라져 버리고 한겨울 그곳에서 가매장되었던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리로 이장되는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한겨울이었으므로 양팽손이 신긴 태사혜도 아직 썩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지난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시신은 모든 것이 썩어 백골만이 남아 있을 터인데,하면 조광조가 신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의미를 알 수 없는 짝짝이의 가죽신 역시 썩어 진토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나 아직 500년의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갖바치가 남기고 간 두 줄의 문장 중 마지막 문장인 것이다. “천년 세월에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문장의 수수께끼는 조광조의 생전에도,조광조의 사후에도 풀리지 아니하였다.아니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내용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갖바치의 참언이 정확하다면 아직 500년의 세월이 더 필요한 것일까.500년의 세월이 더 흘러 마침내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조광조의 역사적 평가는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조광조는 1519년 12월 16일,34세의 젊은 나이로 정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알성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로 임명됨으로써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불과 4년 만에 일찍이 전제 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조광조는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광조는 누구인가. 실패한 정치가인가.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 목숨을 잃은 권력의 희생양인가,아니면 이율곡이 내린 ‘아깝다,공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로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라는 평가처럼 현실정치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던 아마추어 정치가였던가. 조광조가 실패한 정치가이든 아마추어 정치가이든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부활하여 살아 있는 정치적 모델이니,그렇다면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갖바치의 예언은 도대체 조광조의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 儒林(8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8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남긴 수수께끼의 유언은 양팽손에 의해서 그대로 지켜진다.유언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사약을 들이켰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보다 못한 군졸이 밧줄을 들고 조광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 졸라 교살시키려 하자 조광조는 ‘무엇을 하려 드느냐.네놈은 내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한다.성상께서 나의 몸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셨는데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하고 호통을 치고는 남은 사약을 단숨에 들이켠 후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조광조의 얼굴에는 이승에서의 한을 차마 끊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이 활짝 열려져 있었는데,이 눈을 감겨준 사람이 바로 양팽손. 그러고 나서 양팽손은 우차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자신의 고향인 쌍봉마을 골짜기에 가매장하였는데,조광조가 남긴 유언대로 갖바치가 준 태사혜를 시신의 발에 신겨주었으며,초라한 시신이었지만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만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조광조의 시신이 한겨울 동안 가매장되었던 자리에는 ‘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란 작은 비석이 서 있다.송시열이 쓴 명필인데,조광조의 사후 그의 무덤자리에 세워졌던 서원의 흔적도 사라져 버리고 한겨울 그곳에서 가매장되었던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리로 이장되는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한겨울이었으므로 양팽손이 신긴 태사혜도 아직 썩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지난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덤 속 조광조의 시신은 모든 것이 썩어 백골만이 남아 있을 터인데,하면 조광조가 신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의미를 알 수 없는 짝짝이의 가죽신 역시 썩어 진토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나 아직 500년의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갖바치가 남기고 간 두 줄의 문장 중 마지막 문장인 것이다. “천년 세월에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문장의 수수께끼는 조광조의 생전에도,조광조의 사후에도 풀리지 아니하였다.아니 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내용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갖바치의 참언이 정확하다면 아직 500년의 세월이 더 필요한 것일까.500년의 세월이 더 흘러 마침내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조광조의 역사적 평가는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조광조는 1519년 12월 16일,34세의 젊은 나이로 정쟁에 휘말려 아까운 목숨을 잃는다.알성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로 임명됨으로써 정식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불과 4년 만에 일찍이 전제 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조광조는 이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광조는 누구인가. 실패한 정치가인가.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 목숨을 잃은 권력의 희생양인가,아니면 이율곡이 내린 ‘아깝다,공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로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라는 평가처럼 현실정치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던 아마추어 정치가였던가. 조광조가 실패한 정치가이든 아마추어 정치가이든 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부활하여 살아 있는 정치적 모델이니,그렇다면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갖바치의 예언은 도대체 조광조의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 儒林(8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과연 양팽손의 말은 사실이었을까.갖바치가 준 한 쪽은 검고,한 쪽은 흰,짝짝이의 태사혜는 김안로의 표현대로 꽃잎이 짙고,옅은 차이에 불과하였던 것일까. 갖바치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문장.‘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세월도 검은 신은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참언 역시 단순히 매계 조위의 옛 고사를 빌려온 인용문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요동의 점쟁이가 남긴 점술도 매계가 살아 생전에는 그 마지막 문장인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글을 해독하지 못하였다. 죽은 후 관이 쪼개어져 부관참시를 당한 후 연산군의 명에 의해서 사흘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후에야 사람들은 그 점괘의 정확함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그렇다면 ‘천년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마지막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광조가 중종의 명에 의해서 사약을 받은 것은 12월16일.기록에 의하면 눈이 강산처럼 내리던 한겨울날이었다고 한다.조광조가 능주에 도착한 것이 11월26일이었으니,도착한지 한 달도 못되는 20여일 만에 금부도사 유엄이 갖고 온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갖바치가 남기고 간 참언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아니하였는데,‘정암집’에는 조광조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어찌하여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느냐’고 묻고 남곤이 그 동안 정승이 되고,금부당상에 심정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 ‘그러면 나의 죽음이 의심이 없다’고 대답한 후 ‘죽는 것이 오늘을 지나치지 아니하면 될 것이 아닌가.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내고 또 분부할 일이 있으니 이를 처리하고 죽는 것이 어떠한고’하고 물었다. 유엄이 이를 허락하자 조광조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 아내에게 조용히 편지쓰기를 마치고 마침내 그 유명한 절명시를 쓰기 시작한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정을 밝게 밝게 비추리.(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절명시를 다 쓰고 나서 제자 장잠을 불러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으니 꼭 이를 실행하여다오.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해다오.무겁고 두꺼운 것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 길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반드시 얇은 것으로 장만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문 밖에 있는 양팽손을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야사로만 전하는데,뒤늦게 들어온 양팽손을 향해 조광조는 사기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양공,어째서 이토록 늦게 오셨소이까. 태산이 무너지는가. 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哲人)은 시드는가.”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공자가 남긴 유언을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아아,천하에는 도가 없구나.” 이 말을 들은 양팽손이 왈칵 눈물을 쏟기 시작하자 조광조는 양팽손의 손을 잡고 ‘양공,안녕히 계십시오.신이 먼저 갑니다’라고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부탁이 있소이다.양공,나 죽은 후에 반드시 걸망 속에 들어 있는 태사혜를 신겨주시오.내 두 발에 신발을 신긴 채 매장시켜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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