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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견무용가 원필녀씨 창작춤판/내일까지 국립극장…「동천」등 3편공연

    중견무용가 원필녀씨(한국무용·한성대 강사)가 가을맞이 창작춤판을 벌인다.9일 하오7시,10일 하오4시 국립중앙극장 소극장. 「시적 이미지의 무용화」로 압축되는 이번 무대에 올릴 작품은 「남색끝동」「동천」「울음이 타는 가을강」등 세편이다.김영태씨가 대본을 쓴 「남색끝동」은 조선조 양반부녀층의 한을 다룬 작품.폐쇄된 심창에 갇혀 엄격한 일상을 보내야했던 우리 옛여인들의 곰삭은 한과 이를 극복하려는 무언의 의지를 원씨 특유의 유연한 춤태로 풀어낸다. 미당의 시「동천」을 춤으로 꾸민 「동천」은 시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운사 옆 생가에서 꾼 꿈을 소재로 한 독무.이제는 찾을 길 없는 첫사랑의 흔적을 춤으로 어루만진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은 박재삼 시인의 동명의 시를 토대로 한 서정성 넘치는 군무.붉게 타는 저녁노을의 심상풍경을 배경으로 울음도 원망도 노여움도 시샘도 모두 강물에 던져버린다는 심오한 내용을 계시적인 춤사위속에 담는다. 『미당·박재삼 시인의 흙내나는 토속마당이 주는 설움과 희열,남색끝동 자락에얼룩진 조선조 여인의 한을 뛰어넘는 고귀한 정신을 가장 한국적인 춤동작을 통해 드러내 보이겠다』는 것이 원씨의 안무의도이다.525­3999
  • 조수미로 해서 행복했는데…(송정숙칼럼)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윗논에는 차나락 심고 아랫논에 메나락 심어/울오라비 장가갈 때 찰떡 치고 메떡 칠 걸/왜 다 까먹느냐 네가 왜 다 까먹느냐…」 웬일인지 그때 문득 조수미의 「새야새야」가 입안을 감돌았다.한숨쉬듯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슴을 하비는 고통을 달래야 했다. 이 노래는 최근에 조수미가 귀국독창으로 부른 것이다.노래가 너무 좋아서 「저렇게 좋은 노래가 정말 우리 노래였나」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던 그 노래를 한숨처럼 떠올리게 한 고통이란,고3의 딸을 둔 한 어머니가 청와대로 보냈다는 편지에 관한 기사를 주간지에서 읽고서였다.예능계 입시에 합격하려면 여전히 수억대의 돈을 해당 교수에게 미리 써야 한다는 사실을 딸로 인해서 알게 된 어머니가,그 유혹과 싸우면서 그들의 가정이 겪은 실망과 조국에 대한 비애를 담아보낸 편지다.이 일로 오랜 외국생활 끝에 돌아와 자리를 잡은 그 가정은 「다시」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나가 살 결심을 하게 됐다는 내용도 있다.서술이 구체적이고 확실해서 과장이거나 거짓이라고 할 수없어 보인다.특히 당사자인 딸이 부모에게 했다는 말이 가슴을 하빈다.『회초리를 들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게 하던 아빠 엄마의 맹목적인 조국에의 환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거야.이제 외국에 가면 한국엔 절대 오지 않을래.한국말도 쓰지 않을거야.』하고 울부짖었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조수미의 노래가 떠오른 것은 그 아름다운 노래 자체가 위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조수미의 우리노래는 정말로 좋았다.우리누구나가 지닌 정서를 전율하듯 자극하여 그 깊은 곳에 있는 현을 떨게 하고 희열을 만나게 하는 우리노래.우리에게 유전되어오는 효성과 우애를 공감하지 않고는 나오지 못할 맛.우리가 낳았지만 믿기지않을 만큼 아름답게 노래부르는 세계정상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수미는 그런 노래를 불렀다. 특히 『울오라비 장가갈때 찰떡치고 메떡 칠걸…』하는 대목의 똑떨어진 모국어 발음은 일품이다.음악계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순국산』이라고 말한다.왜냐하면 그는 초중등은 물론 서울음대까지 노래부르기의 기초를 국내에서 다진 가수이기 때문이다.또한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에게도 모국어는 솔제니친이나 로스트로포비치에게처럼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조수미의 노래는 일깨워준다.우리노래도 클래식가수가 부르면 외국어처럼 못알아듣게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조수미는 안 그랬다.그것은 뛰어난 재능 탓이기도 하겠지만 「국산」기초덕이기도 할 것이다. 그가 우리가곡 「고향」을 부르고 났을 때의 장면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한 마지막 연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를 끝내고 났을 때다.열광적인 박수가 이어져 몇초가 족히 지났는데도 그는 눈을 감고 숙인 고개를 들지않고 서있었다.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염없이」서 있는 것같았던 그 모습에서는 북받치는 눈물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속으로 뜨겁게 흐르는 기쁘고도 서러운 그 통곡의 소리를 청중은 함께 할 수 있었다. 연전에 나는 북구의 한나라에 들렀다가 오래전 그곳에 가 그대로 주저앉은 한 동포를 만난 일이 있다.수십년을 그곳에서 산 그가 분위기가 무르익자 커다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일많아…』 이제는 고국에서도 별로 부르지 않는 이 노래를 그는 고향에 가고싶은 때나 서러워서 어쩔수 없을 때면 그렇게 목청껏 부른다고 했다.그와 더불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사안…」을 불러보며 우리 일행은 그 노래가 그토록 뜨겁게 고국애의 맛을 지닌 노래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었다.솟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먼산을 향해 부르던 그 타향인의 기억이 조수미의 「고향」노래 끝에서 불현듯 살아난 것은,우리노래가 「신이 점지한 목소리」를 가진 조수미의 서러운 객지살이를 얼마나 위로했는지를 알것같아서였을 것이다.그런 고통들을 이기고 마침내 우리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드는 경지를 그는 이뤄낸 것이다. 고국의 팬들에게 우리가곡을 들려주고 그 실연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내는 것이 조수미의 이번 귀국독창회의 목적이었다.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앞에서 우리 가곡을 부르면 자꾸 눈물이 나와서』실연을그대로 녹음하는 일이 불안했으므로 그는 할 수 없이 스튜디오 녹음을 겸행했다고 한다.동포 앞에서 고국의 가곡을 부르면 눈물이 나와 녹음을 실수할 수도 있는 세계정상의 오페라 가수.고국의 노래는 그렇게 자양분이 되어 객지삶을 지탱해주었을 것이다.그는 TV에 나와 이렇게도 말했다.자기가 듣고싶은 한마디 말은 『영원한 한국인 조수미』라고.그토록 자랑스럽게 성장한 한국인에게서 이런 찬미를 받는 일이 대한민국에는 얼마나 큰 기쁨인가.그런데 우리의 예능계 입시현실은 이런 제2의 조수미 탄생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생각하면 안타깝고 속상하는 일이다.「예술교수」들중에 있을 이 망국의 화신들을 아주 쓸어내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 마이너스 1의 세상/신재인 원자력연 소장(서울광장)

    우리는 그날이 그렇게 빨리 우리 앞에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종교적인 믿음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마치 현재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갑작스런 미래의 상황이 우리 눈앞에 전개 될 경우에는 당황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더욱이 그는 아직 젊고 건강했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사회사업을 했기 때문에 그날이 우리에게 던져준 아픔은 더없이 크고 예리했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곧고 굽지 않았다.남이 행하는 부정한 일은 보지못했고 그것을 못본체하고 회피해 버리는 우리의 허약한 자세도 그는 크게 비난했다.또 그는 과거의 틀에 얽매어서 새롭게 변화되지 못하는 사람,교회·사회·국가에 대해서도 매우 안타까워 했다.그러면서 실제로 그는 조그마한 어느 일이라도 새롭게 바꾸어 보려고 혼신의 정성을 쏟아 부었다.교회에서 매주 나누어주는 주보의 양식이나 예배절차,예배후 신도들끼리 나누는 친교의 시간까지 새롭게 개혁을 해보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며 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대해서는 온 열성을 바쳐서 실험을 해보고 그 결과를 연합회의에 발표해서 다른 복지단체에서도 참고하도록 도왔다.예를들면 고아들이 어느 연령에 차면 개별방을 주어 독립심을 키우고 방학이면 후원자의 집에 민박시켜 가정의 따뜻함도 가르쳐 보기도 했으며 고등학교 졸업반에게는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주고 운전실습도 시켜서 장래 고아원을 떠나 사회생활을 무리없이 할 수 있도록 키워냈다.원생들의 이력관리도 일찍 개인용 컴퓨터를 들여놓아 하나하나 세밀히 관찰한 기록과 교육훈련 내용을 그안에 담아 놓았다.정치과를 졸업한 그가 컴퓨터를 설치하고 배우고 거기에서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쓰고 할 정도의 실력을 얻기까지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그가 보인 맑은 웃음과 희열은 옆에서 보는 우리에게도 무척 고았다.그는 친구들에게도 매우 자상해서 남이 아픈곳은 같이 품어주고 소원해진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전화하고 불러 만나게 함으로써 맏형 같은 노릇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고민도 있었고 가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은 한번도 그일로 주변사람들에게 감정적인 표현을 하거나 싫은 소리를 한적이 없었다.그저 다정하고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곧고 그러나 부드러운 그러한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날 그는 우리를 영원히 눈을 감은채 홀연히 병원의 응급실로 불러들였다.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옥상에서 장마비를 대비해서 방수공사를 몸소 하다가 추락한 것이다.그다음 다음날에는 우리와 그곳에서 복지시설 운영계획을 보고하는 회의를 열 예정이었고 그래서 더욱 그는 손님맞이 단장을 하느라 서둘러 새벽에 방수공사를 강행했었다 한다.그리고 그는 갑자기 우리앞에 잔잔히 웃음을 띈 그러나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우리가 받았던 처음 느낌은 아무 것도 없었다.그는 피곤해서 누워있으며 조금후면은 일어나서 내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와서 친구걱정도 하고 돈걱정도 하고 어렵게 꼬여가는 우리 원자력계의 일도 걱정해 줄 것 같았다.응급실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중환자실에서 한동안 혈압이 급강하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 옆에 있을 것 같은 그가 영안실로 내려간뒤에야 이제는 우리옆에 그가 없다는 사실을 현실로 실감하기 시작했다.믿음직스럽고 내가 어려울 때면 언제나 옆에서 같이 힘을 모아 주던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이제는 가장 먼 어느 곳으로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그래서 내가 그 이전까지 보아왔고 생활했던 세상이 이제는 하나가 빠져버린 마이너스 일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 세상은 항상 지금처럼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마이너스 이도 되고 마이너스 삼도 되는 세상이라는,그리고 최종에 가서는 내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는 마이너스 모든 것이 되고마는 세상이라는 느낌이 가슴속 깊이 각인이 되었다.그렇게 보는 세상은 매우 순결해 보였고 거리에 서서 다정하게 얘기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천진난만하게 걸어다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그리고 악을 쓰며 부를 찾고 권세를 바라보며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거품을 입에 무는 주변의 사람들은 측은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안쓰러워 보였다.그것이 마이너스 일의 세상을 체험해 본 그날의느낌이었다.
  • 자기직장에 방화를 하다니…(사설)

    엊그제 공권력이 투입된 금호타이어 광주공장과 경북 달성군 소재 대우기전에서는 한때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고 한다.쇠파이프등으로 완전무장한 파업근로자들이 진압경찰에 맞서 미리 준비해둔 타이어더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는가 하면 그중 일부는 사무실집기와 공장안에 세워둔 승용차 1백50여대를 마구 때려부수거나 불태워 작업현장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참으로 괘씸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짓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단 말인가.폭력무뢰배들의 난동과 무엇이 다른가.자신의 일터에 불까지 지르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그러고도 민주노조라고 외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하루 24시간 가운데 보통 3분의 1이상을 일터에서 보낸다.그 직장에서 근로자들은 땀흘려 일하고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 생활한다.자신이 만든 제품이 유용하게 쓰이는 것을 보면 일한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열심히 일하는 동안 승진도 하고 그런 가운데 삶의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그래서 직장은 소중한 것이다.소중한 만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근로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울러 산업현장의 파업은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조등이 동원하는 최후수단임을 알아야 한다.그것은 얼마든지 법테두리내에서 할 수 있게 보장돼 있기도 하다.그런데도 근로자들이 아예 처음부터 법을 무시한 쟁의를 벌인다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게다가 불법파업을 막기 위해 공권력이 투입되면 방화와 파괴를 서슴지 않고 있다.방위산업체인 금호노조의 경우만 해도 파업에 들어가기 전에 실시하도록 되어 있는 쟁의행위 찬반투표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당초부터 불법으로 출발해 폭력행사로 끝난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나라경제가 어떻게 되든,국가의 명운이 걸린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중요한 시기이든 그들에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오로지 자기 몫만 더 챙기면 된다는 것인가.그렇다면 그런 생각은 지금 당장 버려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불법과 탈법행위는 하루빨리 몰아내야 한다.산업현장에선 더더욱 그렇다.또한 공권력에 맞서방화나 파괴등을 일삼는 극렬쟁의행위자는 끝까지 추적,검거해 응분의 처벌을 해야 한다.더 나아가 노조의 불법행위로 회사측이 입은 경제적 손실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받아내야 한다.그래야 그런 악습이 뿌리뽑힐 수 있다.그런 조치들은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법치의 원칙과 산업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세계 유명 페미니즘 단편소설집 출간

    ◎「19호실로 가다」… 영 도리스 레싱등 15인 작품 수록/여성문제 폭넓게 접근 여성의 존엄성과 구원을 주 테마로 하는 페미니즘 문학은 시대에 따라 형태와 양식을 달리하며 커다란 독자층을 형성해왔다.최근 국내에서도 페미니즘 문학이 점차 활기를 띠면서 올바른 위상찾기와 함께 접근방식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민음사가 펴낸 페미니즘 단편선 「19호실로 가다」는 세계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 15명의 단편소설 17편을 묶은 것으로 국내외 페미니즘 소설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말의 현재까지 1세기에 걸친 여성들의 삶의 모양새를 간추려 여성문제의 폭넓은 접근을 보여주는 이 책은 크게 세부류의 테마로 구성돼있다. 현대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도리스 레싱의 표제작을 비롯해 샬롯 퍼킨즈 길먼의 「누런 벽지」,에디스 와튼의 「뒤늦은 연인들」에서 보이는 결혼문제가 그 하나로 이들 작품은 여성 자아의 상실을 당연시하는 결혼생활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또 성의 문제에 치중한 작품들은 대개 여성의 자아추구를 성을 통한 육체적 욕망의 이해에서 찾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의 「희열」,케이트 쇼팽의 「소년과 집시」,질크리스트의 「복수」등이 그것이며 이와함께 앨리스 워커의 「닮은 꼴의 영혼들」류의 소설들은 가부장적 남성우월론적 이데올로기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 김하인 장편소설「똘물」/이승우에세이집 「길을 잃어야 새길을만난다」

    ◎일상속에 묻힌 진실찾기 “잔잔한 감동”/똘물/동시에 비친 어른들 세계 희화화/길…/평범한 얘기 35편 재치있게 그려 삶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해낼때 희열을 맛보게 된다.바쁜 일상에서 문학작품을 통해 평범한 진리와 맞닥뜨릴때도 이같은 즐거움은 찾아진다. 늘상 그곳에 있어왔고 또 영원히 변치않는 절대적인 가치인 진실은 평소엔 잘 드러나지않는 속성으로 인해 더욱 소중한 값을 지닌다. 최근 젊은 작가 2명이 다소 파격적인 문체로 나란히 펴낸 「진실찾기」작품들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이런 원칙들을 생활의 발견차원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것들로 시선을 모으고 있다.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으로 데뷔한 김하인의 장편소설 「똘물」(삶과함께간)과 올해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가 이승우의 에세이집 「길을 잃어야 새길을 만난다」(책나무간)­. 신춘문예와 국내 굴지의 문학상 당선으로 신선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는 두 작가의 이번 작품은 가장 쉽고 평범하지만,반복되는 일상속에 묻혀버린 가치들을 캐내어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가벼운 읽을거리들이다. 「똘똘한 아이」의 준말인 「똘물」을 제목으로한 김하인의 작품은 때묻지않은 5∼6세 어린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 세계를 희화화한 단편 묶음.작가의 어린시절 회상기이기도한 이 작품은 어렸을적 부모 형제 친구 마을사람 친척들에게서 일어났던 해프닝들을 짧은 이야기들로 재미있게 엮어나간다. 평소 어른들이 무관심한 살아가는 모습과 그 모순덩어리들이 코흘리개 동심을 통해 낱낱이 해부되면서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잊고 사는 삶의 아름다운 부분들이 향기있게 부각되고 있다.간혹 나이에 걸맞지않게 영특한 주인공 똘물의 허무맹랑한 좌충우돌이 튀기도 하지만 진실찾기 작업이 돋보이는 작은 이야기들임에 틀림없다. 이에비해 이승우의 「길을 잃어야 새길을 만난다」는 각기 다른 소재를 이용한 35개의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풀어간 에세이집이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해프닝 혹은 문학적 테마들에서 짭짤한 의미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자신이 「라」음정을 내지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노래를 「라」를 제외한7개의 음계만으로 다시 작곡하게 하는 통치자(사라진 음계중)나 자신이 지어준 이름이 최상의 작품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이름이 나쁘니 다시 지으라고 하는 엉터리 작명가(사람의 이름중)등 마치 이솝우화나 콩트를 연상케도 하지만 한국적 현실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나」와 「우리들」의 평범한 이야기들을 재치있는 필체로 다듬어내 재미를 얹어주고 있다.
  • 「델마와 루이스」/남성본위 사회구조 비판

    ◎흥미에 끌리다 여권문제 절로 반추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나면 역시 좋은 감독은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괜찮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SF영화의 교과서」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에이리언」「블레이드 러너」를 연출했던 리들리 스코트가 페미니즘류의 이 영화를 어떻게 그처럼 포장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남편에게 기대 살던 평범한 가정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독신생활을 즐기는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잔 새런든)가 주말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여행도중 들른 시골 술집 주차장에서 델마가 한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루이스가 남자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경찰에 쫓기게 된다. 델마는 쫓기는 과정에서 자신을 괴롭힌 남성이 저질렀던 강도짓을 태연히 재연해가며 여비를 보탤만큼 남자들로부터 독립된 자유의식의 희열을 맛보는 여성으로 깨어간다.결국 이들은 이같은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삶의 방법,즉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행복해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영화가 특히 눈길을 모으는 것은 무겁고 딱딱하기 쉬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있게 진행시킨다는 점이다.페미니즘과 대중성 또는 상업성과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종래 영화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재미에 이끌려 영화를 보다가 여성과 가정주부,성폭행등의 문제를 반추하고 뒤돌아보게 만든다. 델마와 루이스가 경찰에 쫓기는 장면은 아카데미각본상을 탄 작품답게 황량한 미국 남서부의 광야와 그랜드캐니언등을 배경으로 서부극·갱스터무비·자동차레이스·코미디와 멜로적 요소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이들은 포위망이 압축돼 경찰에 잡힐 위기에 놓이자 승용차와 함께 그랜드캐니언의 절벽아래 강물로 뛰어든다.이는 남성위주의 사회구조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이 마지막 신은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갱으로 분한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이 군인들에게 포위돼 무수한 총구를 향해 뛰쳐 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남자는 바보나 멍청이,여자를 섹스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속물들로 그려지지만 이들을 쫓는 형사 할(하비 키텔)이 가슴이 따뜻한 남자로 나와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 조각가 유영교씨(이세기의 인물탐구:39)

    ◎돌로 빚어내는 생명력… 인간미 “물씬”/풍만한 인체·단순화된 형태의 구상 즐겨 표출/연속 국전특선… 완벽한 조형술로 정상의 명성/요즘은 고난·번뇌 초월한 「평화의 표정」 형상화에 집착 「인생은 석재다.그것으로 신의 모습을 조각하든가 악마의 모습을 새기든가 모든것은 자유다.그러나 다만 생명이 깃든 조각인가?」이는 영국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말이다. 유영교는 강한 석재로 생명이 깃든,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을 만드는 작가다. 알찬 마스(양괴)와 신선한 정감표출의 단아한 나부상,예술가가 품은 그 어떤 상념도 돌이라는 재료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는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는 작품화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데생하고 데생한다.또는 수채화로 그리거나 유화나 파스텔로 그린다.그리고 하나의 회화로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였을때 이번엔 점토로 이를 빚는다. ○실패확률 거의 없어 형태의 완성과 완벽성을 석고 모형으로 경험한다음 비로소 돌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패의 확률은 거의 없다.표정조차도 이미 모형에서 이미지를 또렷하게 살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이 조각에 닮아있으면 그것은 대부분 성공적인 것이지만 만일 조각이 그림에 닮아있을땐 이건 낭패일수밖에 없을 것이다.작품에 관한한 완벽추구자이며 영원히 만족을 모를수도 있다. 작품에서 그가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테마는 언제나 인간의 이야기다.인간의 고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여러형태의 모습을 어디서 찾느냐는 것과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조각으로 표현하느냐는 것이 과제다. 같은 고뇌라도 성자의 고뇌인가 범상한 인간의 가족애적인 것인가.사랑도 신의 사랑과 남녀의 사랑,자비는 베풀때와 베풀음을 받은 은총일때가 다르듯이. 한때는 구도자나 수도자의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또는 어둡고 그늘진 어부나 농부의 삶에 찌든 표정이 그의 작품의 한 구릉을 이루기도 한다.그러나 「삶의 이야기」시리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아들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의 모습,가톨릭의 고통과 고난과 수난은 끝이 없음을 그는 새삼 느낄수밖에 없었나보다. 이에비해 경주 불상에서 온화한 평정의 모습을 발견했다.미술이론을 모르는 이름모를 석공이 원만함과 무심과 풍요를 그려낸 것이다. 이때부터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를 다시 읽고 노자·장자에 심취하면서 초탈·초월의 경지를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풍만감이 넘치는 인체에다 반가사유상의 양식을 적용한 극기와 무상,번뇌를 떨쳐버린 초월적 명상,마음의 갈등씻긴 평화로운 표정을 작품마다에 햇살처럼 아로새겨 나갔다. 유영교는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일류작가의 대열에서 한치도 뒤처진 적없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첫 개인전 찬사 일색 아직 대학2학년때인 66년 국전 3회 연속 입선,이어서 목우회 공모전서 문공부장관상 국전 국무총리상 국회의장상 국전 연속특선으로 삼십을 갓넘긴 나이에 국전추천작가·초대작가등 남보다 배나 빠른 정상가도를 똑바로만 달려왔다. 추천작가가 되던해인 77년 첫개인전과 함께 수많은 찬사·호평에 둘러싸여 다음해 이탈리아로 유학,국립로마미술아카데미와 르네상스 조각의 본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카라라에서도 거장 에밀리오 그레코와 페레클레 파시니를 사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때 「지중해」 「일드 프랑스」의 작가인 마욜과 아르프,오슬로의 후로그넬 공원에 있는 비게란드의 화강암으로 된 「조각군」을 보고 그는 자신의 구상조각에 대한 집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부조에서 환조에 다다른 아르프의 아르 콩쿨레(구체예술)를 수용하면서 구상·추상 사이를 넘나들다가 차츰 추상의 경지를 뛰어넘어 그만의 구상인체에 망설이지 않고 정착할수 있었다.진위를 가릴수없는 모호한 추상의 세계보다 손으로 만져지는 구상세계가 그의 투명한 성격에도 거부감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아끼는 재질인 대리석도 인체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사유와 풍요를 표현하는데 어떤 부족감도 없었다. 2년전 선보인 성숙·풍요·동반 시리즈에 이어 최근에는 점점 더 불교적으로 된 작품의 표정들이 무심을 지나 열반의 경지를 보이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더구나 밑그림이 철저하게 뒷받침된 표정들은 하나하나가 서로 다르고 하나하나마다에 생동감이 담긴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빈 무심이 아니라 청순이라든가 순백·환희가 눈부신 것도 특징이다. 고흐의 해바라기 같은 이미 다른 작가가 그려온 소재를 그는 그 나름대로의 천진무구를 강조하여 행복의 꽃다발로 재창조한 경우도 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이를 「회고」와 「번안」의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유홍준은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체의 덩어리』라든가 자신의 작품을 되물으며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자세는 『예술의 성실성』내지 『예술의 진지함』이라 평하고 있다. 그의 작업장은 금강 남쪽,충남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에 자리잡고 있다.그가 살고 있는 대전시내에서 버스로 20분거리.많은 조각가들이 교외별장과도 같은 아기자기한 건물을 지닌 것과는 달리 야산을 깎아 만든 2천평 대지에 세운 이 간이작업장은 거대한 석물공장을 방불케한다. 10t의 무게를 들어올릴수 있는 빔설치,돌을 썰거나 마광할수 있는 전기모터와 체인 블록,바이트와 드릴과 리머와 탭 등 수백가지의 절삭공구들과 마당구석구석에 사람의 키만한 대리석 화강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는 이리나 문경,여수를 돌며 자연석을 직접 사오기도 하고 이탈리아 대리석을 현지에서 주문해다 쓰기도 한다. 남들이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아침8시에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데생에서 흙반죽,석고 뜨고 돌자르고 드릴로 뚫고 다듬고 깎고 하루종일 돌가루와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채 중노동에 시달리다 밤9시가 넘어서야 귀가한다. 사방이 청명한 가을인 요즘,드넓은 벌판엔 외딴 작업실에서 내는 그의 기계소리 돌을 다듬는 소리외엔 주변은 온통 적막강산이다. 간간이 브론즈나 나무를 다루기도 하지만 돌만이 갖는 차갑고 강한 느낌,정발 하나하나로 확실하게 작가의 손에서 작업이 끝나는 확인은 돌이 아니고서는 맛볼수 없는 희열의 하나다. 유영교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세속에 물들거나 부당함에 타협하지 않는 결벽증이다. 일찍이 그가 국전추천작가가 됐을때 화단에서 까다롭기로 유명한 평론가 원동석씨는 「평론가 10인이 추천하는 신예작가」의 한 사람으로 유영교를 추천하면서 「아집이나 고집때문이 아니라 그의 천성적인 순결과 자신감은 세파에 쉽사리 물들거나 외세에 섣불리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대로다. 스승·선배들에게 예의 바르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관철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엉뚱한 말을 들으면 그의 의도를 명료히 제시하여 시정을 요구한다. 또 대학의 전임강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가르치는데 시간을 뺏기다보면 그의 예술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의 욕망을 거부 돈이 될수 있는 모뉴망이나 설치미술등의 주문에도 응하지 않는다.건물주의 몰취미에 억지로 맞추기도 싫고 번거로운 계약과정이나 브로커들이 중간에 끼는 것도 마땅치 않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온 몸과 마음으로 몰두할수 있는 대상에만 철저하게 파고든다. 그는 충북 제천군 청풍면장이던 유상종씨와 정효옥여사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면소재지이긴 하지만 국민학교 3학년때 마을에 들어온 버스를 처음 볼만큼 산골동네에서 투박하게 자라났다. 국민학교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충주고 2학년때 홍대가주최한 전국고교미술실기대회에서 1등상 수상.그날 조각실에서 작업복을 입고 흙을 만지는 선배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조각과를 지망하게 됐다. 이탈리아 유학중 그곳의 조각가들이 야외작업장을 가진 것을 부러워한 나머지 고향청풍에다 작업장을 짓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어 목원대교수인 부인 이은기씨(서양미술사)를 따라 86년 대전에 정착했다.슬하엔 3남매. 유영교조각은 양감의 풍요에서는 마욜,극도의 단순한 형태추구면에서는 때때로 아르프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그가 다다르고 싶은 것은 순연한 조각이다. 그러나 연전에 그의 작품전을 보고 이탈리아 카라라 아카데미 교수이자 평론가인 피에르 카를로 산티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형태면에서는 영혼의 영원과 가치에 대한 신념』,『작업의 전과정에서 보여주는 것은 투명한 영감의 세계』라고. 남보다 빨리 화단에 입문해서 일사천리로 예술의 정상에 이른 것처럼 그는 남보다 빠르게 그가 원하는 순정한 순연의 경지에 이미 이르고 있음을 산티니는 예고하고 있는것 같다. □연보 ▲1946년 충북 제천 출생 ▲1964년 충주 고교졸업 ▲1965년 홍대 미대조각과 입학 ▲1966∼68년 국전연속3회 입선(대학재학중) ▲1969년 홍대 미대졸업 ▲1975년 국전 특선 ▲1976년 국전 특선,홍대대학원 졸업 ▲1977년 국전 추천작가및 초대작가,전국조각가초대전 목우회초대전출품 ▲1977년 제1회 개인전(미술회관) ▲1978년 제2회 개인전(진화랑),이탈리아 로마 미술아카데미 유학 ▲1980년 제3회 개인전(로마) ▲1980년 제4회 개인전(진화랑) ▲1982년 제5회 개인전(미라노),국제청년작가 야외전(미라노) ▲1983년 제6회 개인전(현대화랑) ▲1984년 이탈리아 로마 미술아카데미 조소과졸업(거장 에밀리오 그레코 펠리클레 화시니 사사),한국조각가 13인전 한·이조각가교류전,재이한국조각가전출품 ▲1985년 재이한국조각가15인전,토스카넬로의조각전,국제청년조각가전 ▲1986년2월 귀국개인전(제7회·강남현대화랑) ▲1986년10월 제8회 개인전(현대화랑) ▲1987년 이탈리아 문화원개원기념 초대전,재이 한국조각가초대전(갤러리 현대및 이탈리아 뤼기 루소) ▲1988년 제9회 개인전(현대화랑),현대조각 초대전 ▲1991년 제10회 개인전(현대화랑) ▲1992년 제11회 개인전(갤러리 신현대)홍대및 목원대 서울교대강사 현재 충남대 예술대 출강 미술회관 개관기념초대전·한국 현대조각초대대전·목우회초대전·평론가10인이 추천한 신예작가초대전·한국구상조각회 로마전 주관·국제청년작가 야외전·한이조각가교류전·한국조각가협회전및 해마다 홍익조각회전·한국구상조각회전·국전초대작가전·현대미술초대전·원로중진조각초대전·MBC구상조각대전·대한민국 미술대전초대작가 국내외 그룹초대전에 수십차례 참가 목우회공모전 동아일보사장상·목우회공모전 문교부장관상·국전국무총리상·목우회공모전 최고상·국전 국회의장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어린이대공원 워커힐미술관 럭키·금성사옥 제천시청 한일은행본점 한흥증권본점 남해화학 대전교구장 아라리오미술관 신라호텔 야외조각 전시장
  • 피아니스트 백낙호씨(이세기의 인물탐구:38)

    ◎음악혼 불사르는 건반의 마술사/풍부한 예술감각·정상의 기량으로 청중 매료/연주회 2백여회… 베토벤곡 “환상적 해석” 평가 「스위스 루체른호에서 달빛을 받고 일렁거리는 조각배」. 이는 베토벤 월광소나타를 듣고 19세기 유럽시인들이 평한 찬사다. 한번 귀기울이기 시작하면 그곳에 흠뻑 빠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란한 음의 희롱과 꿈결같은 멜로디,우울과 불안과 기대와 사랑에 눈먼 쓰라림을 극복하려는 듯 4분의 4박자 프레스토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몸부림친다.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는 「사람의 혼을 조용히 일깨우는 아다지오 소수테누토와 격정의 프레스토 사이에서 행복감을 노래하는 제2악장」을 향해 가라앉은 분위기의 리타르단도와 점점 거세지는 크레센도의 「두개의 심연속에 놓여진 꽃」 또는 이 둘 사이의 「금빛 가교」에 비유하기도 했다. 백락호의 「월광」은 좀 더 영롱하다.처음엔 구름을 헤치고 활짝 드러낸 얼굴처럼 눈이 부시리 만큼 한점 티없이 휘황찬란하다.절제된 감정과 은은하고 환상적인 녹턴(야상곡)의 분위기는 듣는 이의 가슴을 진주 타래로 꾸며준다.그러다가 차츰 음 하나하나가 생동감있게 연결되고 종장으로 치닫는 속도가 거세지면서 달빛은 산산조각 분쇄되어 폭우로 퍼붓는다. ○확신에 찬 두들김 그의 연주는 어느 경우에도 애매하다든가 모호한 감은 찾아볼 수 없다.간혹 화창한 봄날의 청람같은 무드가 느껴지는가 하면 확신을 가지고 두들기는 건반은 청중에게 안심과 안도를 안겨준다. 음악평론가 이강숙씨는 그의 베토벤 연주는 「음악의 혼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화성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남다르다」고 말한다.음악적 진실에 과장이 없고 음악의 상을 명확하게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그의 연주는 그만큼 설득력이 강하다.한치의 오차없이 음색의 변화에 깊이 파고들어 곡의 완성과 함께 벅찬 감동과 품위있는 여운이 깃들어 있다. 그가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곡은 거의 없다.모차르트에서 베토벤,베버와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차이코프스키 스크리아빈에 이르기까지 지난 45년간 그가 애정과 정성을 쏟지않은 곡은 없다고 할 수 있다.그중에서도 베토벤과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해석은 「환상적 경지」란 평을 듣고 있다. 「노워크 아워」지의 에드워드 버가미니나 그와 두차례나 협연한 바 있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벌 세노프스키도 「어느 한 대목에도 허점이 없이 면밀한 주의력과 힘찬 핑거레이션」에 감탄한 바 있다. 대부분의 연주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5살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서울 가회동에서 의학박사 백태성씨(고)와 조은희여사(86)사이의 5남4녀중 장남으로 출생.외과의사인 부친은 플루트를 직접 연주하고 집안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는 병원에서 큰 수술이 있으면 시술하는 것을 눈여겨 보기도 했지만 폴란드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파데레프스키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월광에 호소하는 듯한 천상의 소리와 엘먼의 달콤하고 매력적인 바이올린 선율에 매료되어 장차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부친은 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장남이 음악에 심취하자 파데레프스키가 빈의 거장 레세티츠키 밑에서 피아노를 사사하던 이야기,베를린파리 런던 뉴욕에 진출하여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의 입지전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단 한번의 회의나 갈등없이 그는 음악의 길로만 똑바로 걸어왔다고 말한다.『음악은 이미 숙명이며 나의 생애였기 때문에』 그는 어떤 곡에도 당황하지 않는다.수많은 평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처럼 「확신에 찬 두들김」으로 청중의 가슴을 정확하게 두들길 뿐이다. ○음악을 숙명으로 75년 대구 영남대가 강당을 새로 짓고 그를 초청했을때 연주회가 시작되자마자 불이 나간 적이 있었다.그날의 첫 곡은 슈만 피아노 협주곡 2번. 빠른 템포의 알레그로 비바체로 힘찬 화음에 이어 제1테마가 나타나기도 전에 불이 나간 바람에 장래가 술렁거리는 중에도 그는 아름다운 안단티노에서 스케르초와 프레스토까지 17분의 연주를 완벽하게 끝냈다.물론 다음곡 다음곡에서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촛불이 출렁거리는 속에서 연주를 진행해나갔고 어느때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으나 그는 「연주자를 믿는 청중의 태도」에 박수를 되돌렸다. 지난해 런던 비숍스게이트홀에서의 피아노 독주도 마찬가지다.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연주중에 어디선가 벌이 날아들어 아무리 피아노를 두들겨도 그의 왼쪽 손등에서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벌에 쏘일 경우 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오로지 연주에만 몰두했다.청중은 이를 알리 없었고 그의 매니저인 찰스 핀치씨만이 이 사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그리고 그의 끈질김과 인내심과 암보에 감탄했다. 백낙호씨는 온화하고 겸허하다.정중하고 진솔한 성격으로 좀체 희비의 높낮이를 드러내지 않는다.다만 음악에서만은 좀더 공부하고 싶은 갈망에 목말라 했으나 유학의 길은 손에 닿지 않았다. 부친은 개성에서 경북등 도립병원으로 전전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했고 형제가 많은데 외국유학까지 가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날아들었다.당시 미국대사관부영사이자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던 마이클 베이츠가 그의 독주회에서 베토벤 「비창」과 「열정」을 듣고는 예일대 장학생으로 추천해준 것이다. 베토벤은 이처럼그와 인연이 깊다.후에 빈 교향악단의 지휘자 쿨트 뵈스와도 바로 「월광」연주가 계기가 되어 「황제」협연이 이루어졌다.그는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53년 예일대에서 1학년부터 다시 시작했다.그러나 크나이젤 하계 음악학교에서 아튀르 발삼교수를 만나 사사하고 예일대 관현악단과 협연을 하게 되기까지 그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낮에는 학교공부와 시간강사 피아노조교로,밤에는 접시닦이와 청소 아르바이트 그리고 새벽엔 연습등 예일에서의 6년은 인생의 전환이 될만큼 슬픔·고뇌·가난으로 점철되었고 비로소 뉴욕 줄리어드로 진출하면서 그의 앞길에 연분홍빛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첫번째 행운은 음악도의 선망인 에델마커스교수에게 지휘법·실내악·피아노문헌을 공부한 일이고 폴 주코프스키와의 줄리어드정기연주 협연,타운홀 WQXR(뉴욕FM)방송국에서의 독주회,그리고 잊지못할 일은 정명화·경화자매의 줄리어드 입시때 피아노반주를 맡은 일,루빈스타인·리히터·하이페츠연주와 뵈링의 마지막 「토스카」를 본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행운은 이어져 모교인 서울대가 그를 교수로 불러들였고 귀국독주회에서 특유의 베토벤 「열정」소나타 바하 「파르티타」 쇼팽·스크리아빈·드뷔시를 고루 선보여 유한철·박용구·김형주등 국내 평자들로부터 「진실한 예술성」 「세련된 의지」 「맑은 쾌감」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탁월한 테크닉」등의 화려한 평에 휩싸였다. 그해 KBS의 인기아나운서이던 이정희씨를 만나 결혼,1남2녀가 모두 빈음대 졸업후 음악가가 된 것도 행운의 하나다(장녀 혜영씨는 KBS 교향악단 제1바이올리니스트,차녀 혜선씨는 뉴서울 필하모니 첼리스트,아들 정엽씨는 빈음대서 피아노 전공후 연구과정중). 그는 요즘도 새벽5시에 일어나서 예일대 줄리어드 음대시절과 똑같이 연습에 임하고 있다.75년이후 런던 심포니 매니저인 찰스 핀치씨와 계약되어 동남아·유럽연주 스케줄을 짜기 때문에 그는 교수와 연주활동을 적절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따라서 하루 2시간씩의 매일 연습으로 해외연주 서울 지방연주 협연 등에 대비하고 있다.음악없이 어떻게 살 수있었을까.그는 피와 살과 그를 구성하는 세포하나까지도 음악으로 이루어졌음을 부인하지 않는다.입속에서 한소절의 허밍만으로도 벌써 몸속에 희열과 의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낀다. ○7년만에 독주회 91년 학교와 연주외에 모처럼 IMC(국제음악협의회)한국대표로 참여,지난 제25차 총회에서 동양권에서는 처음으로 임기 6년의 집행위원에 피선되었고 한달에 한번씩 예일대 재경 동문회 조찬에 나가는 정도.술은 맥주 한두잔에 애연가.선배인 전봉초,동료 이남수씨 등과 전람회장,연주회장 등에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그는 수많은 지방연주 해외연주 협연등 2백여회의 연주에도 불구하고 지난봄 호암아트홀서 7년만의 서울 독주회를 개최,그날의 「월광」소나타는 세월이 갈수록 영롱함과 격정이 진하여 피아노의 칸타빌레는 한층 우아하고 리타르단도와 크레센도는 정열의 다이내믹스로 절정을 이루었다. 마침내 그의 월광은 산산조각으로 분산되었고 청중도 연주자도 달빛의 폭우에 흠뻑 젖어 한동안 침묵에서 헤어 나올줄을 몰랐다.내년이면 대학교수 정년,그의 예술의 열정시대가 아마도 그때부터 막을 올리게 됨을 예고하고 있었다. □연보 ▲1929년 서울 출생 ▲1946년 개성 송도중 졸업 ▲1946년 서울대음대 입학 ▲1949년 서울대 음대관현악단 협연으로 「신인연주회」데뷔 ▲1950년 6월24일 백낙호 피아노 독주회(서울시공관) ▲1950년 해군교향악단 입단 ▲1952년 서울대 음대 졸업(김원복 윤기선사사) ▲1953년 서울대 강사·도미 ▲1957년 예일대 음대 졸업(예일대교향악단협연) 아튀르 발삼 사사 ▲1958년 예일대 음대대학원 졸업·예일대 강사·에델마커스 갈라미안 사사 ▲1962년 줄리어드 음대 연구과수료·줄리어드 정기연주회협연 ▲1962년 뉴욕 타운홀에서 피아노 독주회 ▲1963년 귀국 서울대 음대 재직 ▲1963년 서울시공관서 귀국독주회 ▲1964년 KBS교향악단과 협연(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1972년 대북 시립교향악단과 협연 ▲1972년 싱가포르에서 피아노 독주회 ▲1975년 빈교향악단과 협연,쿨트 뵈스지휘 ▲1975년 하와이대학서 피아노 독주회 ▲1976년 방콕서 피아노 독주회 ▲1977년 빈교향악단과 협연·서울시향협연(홍콩 시민회관)·말레이시아시향 협연(콸라룸푸르)·국향협연(국립극장) ▲1978년 방콕·싱가포르 피아노 독주·일본 도쿄교향악단 협연 ▲1979년 하와이대학서 피아노 독주회 ▲1980년 빈 교향악단과 협연·핀란드시향협연(81년)·미시간에서 피아노 독주회(82년)·빈교향악단·핀란드교향악단·서울시향협연(84년)·영국 아바딘 음악제서 서울대음대교향악단과 연주(85년)·KBS교향악단과 서울 수원 부산 인천 연주·대전 협연(87년)등 협연·해외독주등 2백여회 ▲1987년 서울대 음대 학장·LA심포니·춘천시향협연·이탈리아 우르비노 하기 국제대학초빙교수(88년)·KBS교향악단과 데뷔 40주년기념 연주회(89년)·이탈리아 페사로 하기음악제초빙교수(90년) ▲1992년 영국 런던 비숍스게이트홀서 피아노독주회및 런던음악제 초빙 교수 ▲1993년 3월 서울 호암아트홀서 피아노독주회및 부산 대구 대전서 독주회 서울대 음대 교수·IMC(국제음악협의회)한국대표(91년이후)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한국 피아노 학회 회장·IMC 집행위원 대한민국 문화예술상·80년 올해의 음악상(음협제정)·「월간음악」상·영창음악상·예술대상(예총)
  • 직장인의 내집마련 너무 힘들다/박대환(일터에서)

    내가 자란 곳은 워낙 시골인지라 자가용은 고사하고 자전거를 가진 집도 드물었다. 그렇지만 10년만 있으면 가정마다 TV를 갖게 될 것이고 수출도 1백억달러에다 우리나라는 완전히 선진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꿈을 먹고 살았었다.주위를 둘러보면 그 꿈은 현실에 나타난지 오래다.그런데 당시에 느꼈던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현실에서 느끼는 그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가난은 게으름의 대가」라고 혹평을 하는 이도 있다.물론 자기관리에 실패한 결과를 안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기형적인 사회구조하에서 피할 수 없이 빈곤상태로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다.그들을 특정논리를 앞세워 불성실의 소치로 몰아세우기엔 얄팍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의 빈정거림이다. 나도 2년여전쯤 부동산 시장이 거품처럼 끓던 때 40대1이라는 신청률을 뚫고 신시가지 아파트에 당첨된 일이 있었다.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이 주택문제였다. 방을 비우라는 집주인을 몹시 원망하며 끝없는 절망을 경험했다.화김에 우선 되고 보자는 심리가 나에게 엄청난 자금부담을 안겨주었다. 은행이며 제2금융권,그것도 모자라 사채까지 기천만원을 둘러대며 아파트입주라는 희열을 맛보았지만 복합적으로 맞물린 요소들이 그 기쁨을 오래가게 놓아두지 않았다.결국 전세를 주고 전세로 옮겼다.겨우 한숨을 돌리고 보니 갚아나가야 할 대출통장이 부담스럽다.2·3년후면 다시 내집으로 들어가 살기야 하겠지만 이게 무슨 고행인가.나는 결국 집한채로 빚을 산 셈이 됐다. 「신한국 창조」의 열풍이 불고 있다.캐치프레이즈가 아닌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진정한 새나라를 만들어야 한다.인간생활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주거문제에 신한국 창조의 주역이 되어야 할 젊은 직장인들이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한다면 이 세대는 슬픔을 먹고 살아야 한다.실현성이 있는 꿈을 먹고 사는 세상이 반드시 와야 한다.모두가 서로의 욕망을 조금씩 추스리며 한번 살다가는 세상에서 사람이 해야할 일을 하는데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
  • 대륙에 부는 「박정희열풍」(지구촌화제)

    ◎북경서 전기출간/당정 간부 「개발교과서」 애독 『박정희』라는 제목의 중국어판 박정희 전대통령전기가 북경에서 출판돼 북경·상해 등 대도시 큰 서점들에 진열되면서 때아닌 「박정희바람」이 일고 있다. 피터 현으로 잘 알려진 재미교포작가이자 언론인인 현웅씨(65)가 영문으로 쓴 박정희전대통령의 전기가 미처 출판도 되기 전에 중국어번역판 단행본이 북경에서 먼저 발행돼 독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젊은 신예작가인 번흘가 번역하고 홍기출판사가 발행한 이 책은 특히 중국 당정 고위간부들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될만큼 중국경제개발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1백67쪽짜리 단행본으로 「군인정치가」 「권력의 정상으로」 「청와대의 주인」「지평선 저쪽」 「반대파와 지지자」 「경제기적의 탄생」 「국가통일운동」 등 7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역자인 번흘는 『박정희집권시기에 한국은 세인들을 놀라게 한 「아시아의 4마리 작은 용중 하나」로 도약했으며 이 때문에 박정희는 이처럼 특수한 시대에 중요한 역사인물로 세인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책이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건설과 때맞춰 출판됨으로써 중국에 유익한 교훈이 되고 중국지도자들과 관리들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히고 있다. 역자는 특히 『박정희의 공과는 후세사가들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그가 재임중에 이뤄낸 경제발전과 한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공은 결과적으로 중산층을 육성,한국의 민주화를 이루는 토양이 됐다』고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고있다. 번역판 출판에는 고 이선념 전국가주석의 맏사위로 한중수교에 막후 역할을 한 유아주의 힘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김 대통령 결단의 6개월… 그 고뇌와 희열

    ◎“국민 뜻 따라” 혼신의 문민개혁 대통령은 고독하다고 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상은 늘 혼자있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취임 6개월동안 국민지지율이 80%아래로 내려가 본적이 없는 김영삼대통령도 그런가.『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모든 것을 고려해야한다.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야하고 그결과에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책임은 결국 나혼자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그생각이 나를 고독하다고 느끼게 한다』 최근 수석비서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대통령이 밝힌 이런 감정은 왕성한 지지율도 대통령의 홀로 선 기분을 어쩌지 못함을 설명한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대통령과 접촉이 가장 많은 사람이 김기수수행실장이다.그는 새벽 4시50분에서 5시사이에 관저로 올라가 함께 조깅코스로 내려온뒤 하오 7시 다시 관저로 돌아갈때까지 13시간을 대통령과 함께 있다.『큰 일은 내색을 안하시는 분이라 뭘 생각하시는지 알길이 없다.3당 합당때 대통령의 그런 결단을 눈치 챈 사람이 없었을 정도다.실명제도 우리로서는 전혀 평소와 다른 기분이나 표정을 느낄 수 없었다』 가장 근접한 측근이 실명제 같은 나라의 성쇠,가까이는 정권의 명운이 걸린 사안의 결정을 알 수 없을 만큼 대통령은 혼자서 일하고 결단할 수 밖에 없는 자리다. 취임 6개월간 대통령은 자신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로 중요한」결단의 연속에 살았다.정치권 사정,군부의 숙정,율곡비리감사,금융실명제에 이르기까지 그결단들은 하나하나가 「친위쿠데타」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그만큼의 위험성을 가진 것들이다.국민의 지지가 있다지만 결국은 청와대 담장밖 관중석의 성원.그래서 김대통령의 취임 6개월은 고독한 검투사의 생활과 다른 것일 수 없었던 것 같다. 김대통령은 취임이후 두번 쯤 긴장을 풀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군인을 향한 숙정의 칼이 후유증 없이 정확하게 표적을 맞췄을 때 대통령은 안도와 함께 옳은 것은 이긴다는 확신을 재확인했다.고뇌속에 이뤄진 금융실명제가 발표된 다음날 대통령은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의 87%에 이르는 정책지지를 확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정권을 걸고 한 승부가 다음날잘된 것으로 확인됐을 때 대통령은 스스럼 없이 즐거워하는 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1일 토요일 아침.조깅코스에 내려온 김대통령은 새마을 기관사의 이야기를 올리면서 무척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산사태가 난 철로 50m 앞에서 열차를 세워 대형참사를 막은 기관사 태인수씨의 이야기다.『이런 친구들이 많으면 나라가 잘 안될 수 있나』 김대통령은 참지못하고 일요일인 22일 관저에서 태씨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격려했다. 이런 일들이 대통령을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이었다. 김대통령은 종업원에게 주식을 모두 나눠주고 회초리를 들고 다니면서 종업원들을 단속하는 광림기계에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지난 20일 구로공단내에 있는 대륭정밀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김대통령은 『하,이렇게 잘할 수도 있구나』를 연발했다.위성수신안테나로 미국시장의 35%,유럽시장의 25%를 점유하고 있다는 회사의 설명앞에 국정의 최고책임자는 자신만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잘되게 하기위해 고생하고 능력있는 국민이 많다는 점을 고마워하는 듯 했다. 금융실명제의 조기정착 가능성을 느끼는 취임 6개월.김대통령은 그러나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냉해와 병충해가 대통령을 어둡게 한다. 『조깅장에 내려온 대통령의 첫 일은 하늘을 살펴 보는 일이다.새벽 별이 있나 없나를 보고 그날의 기분이 결정된다.별이 있으면 「오늘은 맑을 모양이다」라며 좋아하신다.날씨가 좋지 않으면 대통령의 기분이 그런 만큼 모두 힘들어한다』 한 조깅식구의 말이 요즘 대통령의 관심과 기분이 어떤지를 설명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가족들은 모처럼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는 참이다.가장이 하오 7시에 퇴근해 집으로 오는 일은 80년대 연금시대를 빼 놓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부인 손명순여사로서는 함께 8시·9시 TV뉴스를 함께 보는 행운을 누리고도 있다.그것은 대통령의 가족들 경우다. 김대통령은 얼마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등산을 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참,한번 가고 싶은데…』라며 말을 끝내지 못했다.청와대 식구들에 따르면 등산에 대한 대통령의 욕구는 조깅시간에 인왕산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고 한다. 김대통령의 체중은 67∼68㎏이다.대통령 취임전과 똑 같다.김대통령은 국정수행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그러한 노력이 그의 체중을 취임전과 여일하게 해주고 있다. 경호문제에 막혀 대통령의 발길은 많은 부분에서 거부당하고 있다.집권초기 대통령 승용차가 몇차례 청와대 앞에서 멈춰선 적이 있었다.대통령은 시민들과 악수하고 환담하기를 희망한다.그런 대통령의 강렬한 욕구는 더이상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경호에 관한한 대통령의 요구는 자주 거부당한다.김대통령이 중부전선 철책선을 방문하는 일도 경호실장에대한 오랜 설득 뒤에야 가능했던 일이다.일요일,청와대에 혼자 남은 시간 대통령은 외부로 전화를 한다. 대통령은 힘들고 외로운 자리,국민과 함께 살대기를 좋아하고 명분을 가장 우선시하는 김대통령에게 몇배 더 고통스런 자리인것 같다. 김대통령은 23일 민자당 원외지구당위원장과의 오찬에서 『지난 6개월이 고통스럽고,결단의 순간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 문민시대에 「예총」 필요한가(오늘의 쟁점)

    한국 예술단체를 대표하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장 신영균)의 존폐논의가 최근 예술계 일부에서 강력히 대두되고있다.지난62년 출범한 이후 많은 정권을 거치면서 예술인들의 공식조직으로 대표권을 행사해온 예총이 새 시대를 열어가는 문민정부에 들어 그 역할론에 대한 따가운 비난의 화살을 맞고있다.그러나 한편에선 예술인의 목소리를 집약시킬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 예총의 존립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이치라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다. 최근 예총해체를 주장하며 비판론을 거세게 내세우고있는 연극계의 중견과 예총의 순수한 역할론으로 존립의 당위성을 강변하는 예총관계자의 상반된 의견을 함께 들어본다. ▷존속론◁ ◎최절로 시인·예술 사무총장/창작활동 지원·권익신장 구심역할/문화예술 중흥위해 더 활성화돼야 예술이 필요한 사회는 예술인이 있게 되어있고 예술인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상호친목도모와 권익옹호를 위한 예술단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10개 예술단체(건축·국악·무용·문학·미술·사진·연극·연예·영화·음악)를 회원으로 구성하고 있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는 의연히 존재해야 하고 앞으로도 예술단체를 대표하는 구심체로서 이나라 예술발전을 위하여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그리고 국가나 사회는 예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예술문화의 중흥이 이루어지도록 예술단체를 적극 지원해주어야 할것이며 예술인들의 분열을 조장하는 어떤 조직의 탄생이나 음해행위에 동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예술이 없는 사회나 참다운 예술이 존재하기 힘든 사회는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이거나 인간의 행복을 맛볼 수 없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예술이란 깨끗한 정서의 표현으로 창작자나 감상자에게 청순한 감동과 희열을 안겨줌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라서 예술가는 스스로 물질적으로나 물리적 힘의 부강을 내세우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최근 몇사람의 연극인이 문화체육부장관에게 제출한 건의문에서 정부와 예총의 단절론을 펼침으로써 도하 몇몇 신문에서 추측과 과장까지 각색하여 마치 예총이 과거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정권안보의 도구역할을 수행해 온것인양 매도하고 있어 수십년을 예술창작에 전념해온 사람으로서 심히 불쾌하며 전체예술인을 모독하는 일이다. 몇몇 사람이 현실상황을 잘못 파악하거나 세속적인 개인의 공리때문에 전체 예술단체나 그 구성원에게 손상을 가하는 것은 참다운 예술가들의 집단에서는 제기될수 있는 일이 아니다.그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중에는 과거 예총의 부회장을 했거나 이사를 역임한 인물까지 끼어 있다는데 수치와 분노가 더 요동하는 것이다. 과거 어떻게 했기때문에 그시대를 존립했던 단체나 그 회원이 함께 싸잡혀 비판받아야하는 이 시대의 극한 논리가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에게서까지 성립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 예술인들은 아직도 깨끗하다.앞으로도 비굴하거나 추하게 세상사에 편승하지 않을 것이다. ▷폐지론◁ ◎정진수 연극연출가 성대 교수/분야다른 예술인 단일조직 구성 불요/자유세계 유례없는 군국주의 잔재 쾌도난마와 같은 김영삼대통령의 사정과 개혁의 서릿발은 엊그제 구총독부 건물의 해체 단안을 불러왔다.그동안 이 건물의 처리를 둘러싸고 설왕설래,좌고우면하던 소관부처와 여론도 숙연해진듯 하다.이제 문민개혁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거듭나야 하지만 그 안에는 구총독부 건물처럼 완전 해체,철거되어야 할 것들도 있다.예총,곧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그중 하나이다. 명칭부터 군국주의 냄새를 풍기는 이 조직체는 과거 군사독재치하에서 정권안보의 시녀역할을 자임해 왔으며 예술정상배들의 서식처였음을 모르는 이가 없다.가장 가까운 예만 들어보자.88년 정부의 4·13호헌조치에 맞서 소위 제도권 예술계에서는 최초로 중견 연극인 18인이 호헌반대 성명을 내고 이어서 1백여명의 연극인들이 가세하여 2차 반대성명을 내기에 이르자 예총은 황급히,자발적으로 호헌지지 성명을 도하 각 일간지에 게재했었다. 각기 분야가 다른 문학,연극,영화,음악,미술,국악,건축,사진,무용 등의 예술인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체를 형성해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공산권을 제외하고 그와같은유례도 없는 예총이라는 조직이 문민개혁시대에도 잔존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그런데도 새정부 출범 1백일을 훨씬 넘긴 시점에 이르도록 소관부처인 문화체육부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이마저 김대통령 자신이 발벗고 나서야 하는가? 소위 인치혁명이라 불리는 새정부의 사정과 개혁이 김대통령의 원맨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섞인 일부 국민의 시선이 있다.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금융실명제나 국가안보가 걸린 국가보안법개정은 개혁의 당위성만 가지고 감상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그러나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쉬운 예총의 처리문제야말로 새정부의 개혁의지를 짚어볼 수 있는 시금석인 것이다. 지금 문화예술과 관련하여 새정부는 6공의 뒤치닥거리 하기에도 황망하다.예술의 전당,국립예술학교,종합촬영소,서울시립극단,정동극장 등 모두 6공에서부터 넘겨받은 것들이다.얼마전 발표한 문화창달5개년 계획마저,거기다 사람들마저 모두 그때 그사람들이 자리바꿈만 하고 있지 않은가.자,이제 1백일도 지났다.새정부답게 새로운면모를 보일 때다.
  • 기획원 30년근속 오세민 관리실장(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산 편성때 외부압력 없었으면”/“내손으로 짠 나라살림 국회통과땐 보람”/신정부 경제의욕 돋보여… “기획원맨” 긍지 『경제정책은 각 부처간의 입장이 상충되게 마련입니다.특히 요즘처럼 국제화시대를 맞아 대내외 업무가 연계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기획원의 정책조정기능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입니다』 지난 22일 경제기획원 창립 32주년을 맞아 근속 30주년 표창을 받은 기획원 오세민기획관리실장(56)은 현재 기획원내에서 「최고참」 관료이다.최근 나돌았던 기획원 통폐합설을 의식한 듯 『대통령책임제 정부형태에서 조직의 원리나 업무의 능률상 정책조정기능을 청와대나 총리실에 주기가 부적절하며 기획원같은 부처차원의 조정기관이 필수적』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오실장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63년 5급 을류(현재의 9급)공채를 통해 기획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인재가 많기로 소문난 기획원에서도 베테랑 예산통이다.30년의 기획원 생활동안 공정거래위(1년8개월)와 국회 예결위(1년3개월)파견을 빼놓고는전부를 예산실에서 보냈다. 오실장은 『예산에 대한 최고 통치권자의 관심을 보면 기획원의 위상이 드러난다』고 전한다.과거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대통령 시절에는 예산문제만 갖고 부총리와 예산실장이 1년에 4∼5번이상씩 청와대에 올라가 보고를 했다.전두환대통령도 예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노태우대통령 때는 예산문제로 청와대 보고를 한 일이 거의 없었다는 회고이다.김영삼대통령이 취임이래 격주로 과천청사를 방문,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는등 경제활성화에 주력하는데 대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기획원은 과거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그러나 요즘 들어 성장뿐만 아니라 안정과 균형이 강조되면서 기획원의 위상이 옛날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오실장은 30년 봉직동안 23명의 역대 부총리를 거의 겪어 봤다.장기영·김학렬·남덕우씨등 개발경제시대 경제총수들의 막강한 추진력을 기억한다.자신이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며 모셨던 조순·이승윤전부총리에 대한 일화도 많다. 그는 『기획원이 강하고 약하고는 대통령이 경제를 보는 시각과 힘을 주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어도 기획원은 여전히 한국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예산실에 근무하면서 주로 총괄주사·총괄과장·총괄국장을 지냈습니다.내 손으로 짠 나라살림이 국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되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과 같은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오실장은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는 정권안보를 위한 예산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예산정책에도 굴곡이 많았다고 설명한다.그러나 이해관계가 다른 예산편성 작업을 하다보면 외부의 압력이 엄청나다고 털어 놓는다. 올 봄 기획관리실장(1급)직에 올랐으니 직업관료로서는 거의 정상에 오른 셈이다.대부분 고시출신인 기획원내에서 비고시 출신 관료의 「대부」로 통한다.『최하위직에서 순조롭게 중앙부처의 1급까지 오른 것만 해도 대단히 영광』이라고 직분에 만족하며 영원한 「기획원 맨」을 자부한다. 그는 『매사에 자기 업무에 성실하면그 보답은 반드시 있는 법』이라며 『30년 기획원 생활에 후회는 없으며 항상 기획원이 잘 되는 일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한국 과기 대표단/이스라엘 첫 방문

    【예루살렘 AFP 연합】 한국의 과학기술대표단이 한국대표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협력강화를 위해 이스라엘을 공식방문중이라고 20일 관리들이 밝혔다. 유희열 과학기술처 기술개발국장을 단장으로 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이스라엘의 과학연구소 등을 방문중이며 방문 1주일만인 오는 23일 출국한다.
  • 미대륙 감동시킨 휠체어 무용수

    ◎플레처,“동정은 싫다”… 장애인발레단 창설/맨해턴공연 성공… 프로 선언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룩해낸 장애자예술가는 많다.그러나 선천적인 장애,그것도 해당 예술활동에 치명적인 장애를 지녔으면서도 그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인간승리를 엮어낸 예술가는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발레리나 메리 베르디 플레처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위대한 인간승리의 신화이자 하나의 훌륭한 예술작품이라 하기에 족하다. 플레처는 선천적인 척추장애자였다.그래서 어린시절 대부분을 허리에 부목을 댄채 침대에서 보냈다. 침대생활 속에서도 비록 3류이긴 하지만 부모의 직업이 음악가·춤꾼이었던 것은 그녀의 행운이었다.술집을 주무대로 춤을 추던 어머니와 연주가인 아버지는 딸에게 자주 춤을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다. 4살의 플레처는 한눈에 발레의 우아함에 빠져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야 했다. 플레처는 10살이 되면서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로부터 몇년이 흐른 뒤 아주 우연찮게도 그녀의 꿈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찾아왔다.플레처의 휠체어를 밀던 남자친구 토드 구드먼은 디스코춤을 추자며 장난삼아 휠체어를 빙글빙글 돌렸다.그런데 놀랍게도 돌아가는 휠체어와 그 위에서 춤을 추는 플레처의 모습이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다.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고 플레처에게는 새로운 의욕을 살려내는 것이었다.플레처의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플레처의 집근처 주차장에서는 이때부터 라디오와 녹음기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졌고 이에 맞춘 두사람의 춤연습이 거의 매일 이어졌다. 이들의 춤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동작 하나하나가 다 독창적이었다.그래서 그 독창성을 믿고 전미「댄스피버」경연대회에 참가,2위를 차지했다.이를 계기로 두사람은 용기를 내 학교·클럽·장애인수용시설 등을 돌아다니며 대중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대중공연은 쉽지 않았다.재정문제는 차치하고 「불구」를 응시하는 많은 정상인들의 눈길을 플레처로서는 견디기가 어려웠다.관객들은 처음 예술성보다는 묘기를기대하는 눈치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심에서 우러나는 불편함이 역력했다.그러나 음악과 함께 율동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표정은 변했다.그들은 두 사람의 춤에 매료되고 감동했으며 공연후에는 칭찬과 격려를 잊지 않았다. 공연때마다 이같은 고통과 희열은 반복됐으며 그속에서 플레처는 인간으로서,또 예술인으로서 성장해갔다. 플레처는 마침내 82년 「댄싱 휠스(춤추는 수레바퀴)」라는 발레단을 설립했다.그리고 그로부터 8년뒤인 90년에는 클리블랜드발레단과 합작,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명칭을 「클리블랜드발레단 댄싱휠스」로 고쳤다. 이 발레단은 현재 장애자 4명이 포함된 10명의 무용수와 3명의 안무가로 구성돼 있다.물론 핵심단원은 플레처와 무용수·안무가·미술조감독등 1인3역을 맡고 있는 그녀의 친구 구드먼이다. 플레처에게 있어서 올해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한해다.지금까지는 같은 장애자들에게 뭔가 희망과 교훈을 준다는 사명감과 함께 발레단을 홍보하는데 주력했지만 올해는 「프로페셔널」을 선언한 원년이기 때문이다. 플레처와 그녀의 동료들은 최근 공연예술의 심장부 뉴욕 맨해턴에서 프로로서의 첫 원정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플레처는 한 무용전문잡지에서 「댄싱휠스­깨어진 꿈으로부터의 승리」라는 비평기사를 발견했다.
  • 연극인 강계식씨(이세기의 인물탐구:26)

    ◎“무대를 신앙으로” 외길인생 50년/열과 성으로 완벽하게 배역 소화 “관객 매료”/“40∼50년대 최고 명우” 「춘향전」 등서 불꽃연기/진실일념으로 삶 일관… 고 이해랑씨 “진정한 연기자” 칭송 햄릿이나 위대한 줄리어스 시저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관객의 감동과 갈채를 한몸에 받는다.하나의 연극에서 주역으로 발탁된 이들은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며 자신의 기량을 활기차게 펼친다.관객은 그때마다 환호하며 주인공의 희비에 침몰하듯 매료된다.그때도 이를 희생적으로 뒷받침하는 단역배우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그들은 있는듯 없는듯 미미하게 존재할 뿐,모든 영광과 기쁨은 주인공의 차지다. 원로 연극배우 강계식씨의 연극인생은 언제부턴가 단역에 머물러있다.흥분한 어조로 「정의」와 「불의」에 대하여 「사랑」과 「미움」에 대하여 열렬히 외치는 극중 주인공은 이미 아니다. 역할이 크든 작든 대사가 짧든 길든 한마디의 대사가 없을 때라도 그의 역할은 작품전체를 구성한다는 사명감에 투철하다.따라서 어떤 배역이 돌아와도 그 역할에 완벽하게 용해되어 한낱 연기가 아닌 무대의 한 모습처럼 형형하게 서있다.그리고 확실한 목소리와 움직임과 형상을 보여준다.그의 나이에서는 연극속의 각 배역과 그 배역들이 하나같이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섬세하게 보조하는 위치다. 어차피 하나의 역할은 무대에서 창조될 뿐 현란한 조명과 불꽃같은 연기는 폐막과 함께 속절없이 소멸된다.주역의 영광도 단역의 비감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아 또다른 다음 역할을 위해 새로운 삶속에 곤두박질치듯 파고들어야 한다. ○자신의 역할 예감 연극에 몸담은지 50년이 넘었건만 강계식씨는 지금도 첫무대에 서는 듯한 긴장과 설레임을 떨치지 못한다.무대는 그에게 있어 고통이자 환희다.삶이자 희망이며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대본을 받아든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역할을 귀신처럼 예감한다.그것이 누구의 작품이며 연출자가 누구냐에 따라 인물이 갖는 사회적 시대적 환경과 성격,인품과 직업,체질과 용모를 몸속에 형성한다. 동네노인으로 나와 서성거리는 역에 불과할 때도 자신의 움직임이 어떤 모양새로 연극을 바쳐주느냐.연극의 흐름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몸짓해준다.번뜩이는 열기와 광기,돋보이는 개성을 어필시킬 기회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다만 다른 연기자의 대사와 동작을 효과적으로 살려내고 대사와 대사사이,동작과 동작사이의 침묵을 묵시적인 연기로 다음 장면에 연결시킨다.그에게 있어서의 연극은 「신앙이자 종교」다.역할을 맡을 때마다 「내 생애 최고의 역할」로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연습시간에도 언제나 남보다 일찍 나온다.두시간 공연에서 맨 마지막 장면의 한 동작을 위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의 흐름에 호흡을 맞추고 있다.무대를 떠나지 않는 그를 가리켜 연출가 오사양씨는 「선생이 창출하는 역은 항상 진실과 신뢰가 뒤따르고 높은 격조와 깊은 함축을 시사하고 있다」고 존경해 마지않았다.그의 연극초기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함께 해왔던 고 이해랑씨는 「작은 역이라도 열과 성을 다해 몰두하는 진정한 연기자」가 있음을 언제나 자랑삼았다.그리고 「그의 나이와 그의 성격에 맞는 역할로 그의 노년을 빛내주고 싶다」고 별러왔으나 숙제를 마치지 못하고 먼저 길을 떠났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조역·단역배우는 아니었다.40년대와 50년대 우리 연극사에서 그는 단연 뛰어난 주역배우의 한사람이었다. ○토월회극 보고 꿈꿔 특히 유치진작 서항석연출의 「춘향전」에서의 이도령은 유치진씨가 살아생전에 「40년대 강계식의 춘향전은 지금까지 최고」였다고 손꼽던 무대다.그는 당대 명우였던 유계선 김양춘을 상대로 수차례의 「춘향전」앙코르 무대를 탄생시켰고 당시의 극단 현대극장 극단 민예와 청포도·신지극사·신청년·창조·상록극회에 이르기까지 각 극단의 간판배우로서 관객을 매료했다. 강계식씨가 연극을 하게된건 보통학교시절 고향인 충남 온양에 지방공연왔던 토월회의 연극 「디아블로」를 보고나서다.삭막하고 쓸쓸한 어둠을 가슴속에 뿌렸던 이 연극을 보고 그는 막연히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이백수같은 배우를 꿈꾸게 되었다. 후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실천상업학교에 다닐때도 연극구경에 미쳐있었고 북경에 있는 일인회사에 다니다가 연극을 포기할수없어 39년에 귀국,같은해 유치진 함대훈 이해랑씨가 주축이 된 극단 현대극장의 부설 연기자 양성소인 국민연극연구소에 들어갔다.3백명의 응시자중 10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본격적인 연기수업 받는동안에는 꿈에 그리던 토월회의 이백수씨와 「흑룡강」을 공연,연구소 수료후 41년 유치진작 서항석 연출의 「대추나무」에서 주인공인 「동욱」역을 맡아 부민관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그때 광화문 네거리까지 길게 늘어섰던 구경꾼의 행렬은 지금 생각해도 잊을수없는 감격이다.충청도 양반다운 예절과 겸손이 몸에 밴 그는 말과 행동이 한결같이 의연하여 연출자·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모든 공연에서는 주인공을 도맡았다.남부럽지않은 주인공시대를 마음껏 누린 황금기였다. 그러나 50년 극단 창조를 창립하고 「황진이」지방공연중 6·25를 만나 가족을 고향에 남겨둔채 부산으로 피란,피란지에서 영화배우 조미령의 남편인 이철혁을 비롯,변기종 김승호 최남현과 함께 박동근 연출의 중국고전인 「추해당」공연을 갖기도 했다.주인공엔 그와 유계선이 캐스팅됐다. ○전례없는 흥행 기록 다른 사람들은 단칸방이나 판잣집이라도 제집이 있었지만 그는 국제시장이나 남성여고 교실에서 합숙으로 새우잠을 자던 때여서 도무지 연극연습을 할수가 없었다.그는 몸이 달아 뜬눈으로 밤을 밝혀야했다.공연이 임박하자 이를 보다못한 유계선씨가 연출자에게 『연극을 살리기위해선 배역을 바꿀수밖에 없다』고 제의했다.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말에 눈앞이 아찔했다.배우가 배역을 뺏긴다는 건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단한번도 선배들을 거역해본적이 없던 그는 「죽을 결심」으로 연출자인 이철혁씨를 찾아갔다. 『개런티는 안줘도 좋다.연습할수있는 방만 해결해달라.나는 죽어도 이 연극을 해내고야 말겠다』고 사정했다.이렇게해서 남포동 해변가에 하숙방을 얻어 1주일을 앞두고 동작연습 대사연습에 들어갔다.이 연극은 부산극장에서 상연되어 전례없는 흥행을 기록했고 사람들은 『그의 진실한 몸짓은 바위라도 뚫을수 있다』고 호평해주었다.자존심을 굽힌것이 결국자존심을 지킨 결과임을 경험한 순간이다. 그는 충분한 연습으로인해 무대에서 실수한 적은 없다.동랑청소년극단의 「방황하는 별들」에서 손주뻘의 어린 연기자들과 공연할때도 충실하게 자신의 할바를 지키면서 미숙한 연기자들을 말없이 감싸주었다.「일체의 영합을 배격하며 연극의 공리적 속념을 거부하고 진실일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잃지 않은 것이다. 인생을 관조하는 노년의 노련미와 진실의 모순속에 방황하는 지성인,삶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지는 스산한 서민층,숱한 인생을 재현하고 체험하면서,그가 연극에서 확인한것은 인생은 「무상」이며 「고통이 할퀴고 간 사랑이라야만 진실하다」는 진리다.그리고 『언제 어느장소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있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선 연극을 위한 터득이었으며 연극은 그의 인생을 터득케해준 바로미터였음을 술회한 바 있다. 그는 극단 현대극장시절의 동료였던 이용남여사(68)와의 사이에 4남3녀. 『7남매의 등록금을 대느라고 돈도 많이 꾸러다녔고 울기도 많이 했다』『세 아이가 한꺼번에 대학에 다닐 때는 다른아이는 시험에서 떨어져으면 한적도 있으나』7남매가 모두 대학에 합격하여 장남(희열씨·47)은 서울대공대 졸업후 현재 미국 컴퓨터회사에 근무,6남매가 모두 출가하고 지금은 노부부가 이대미대를 졸업한 막내딸과 도봉동아파트에 살고있다. ○“연극인생 후회없어” 주역의 뒷자리,그의 생애가 헤아릴수 없는 시련과 고통 가난의 슬픔으로 얼룩졌다해도 그는 결코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황금이 정신을 지배하는 시대에서 그의 연극은 황폐한 인간사이에 구원의 빛을 뿌리고 있음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이제 더이상 자기자신이 적나라한 정오의 햇살이 아님을 그는 알고있다. 『이로스야!이 갑옷을 좀 벗겨다오.하루일이 끝났다』연극 시저에서의 마지막 대사처럼 어느날 그도 무대위에서 연극의상을 벗게 될지 모른다. 오로지 정직하게 천직을 지켜온 이 노 예술가의 가슴은 값지고 아름다운 금빛훈장으로 현란하게 장식되어도 다하지 못할것 같다. □연보 ▲1917년 4월21일 충남 온양출생(호 화방) ▲1937년 경성 실천상업학교 졸업 ▲1938년 지방 관리 양성소 수료 ▲1940년 극단 현대극장부설 국민 연극연구소수료(연수기간중 유치진작 서항석연출 「순정해협」「흑룡강」 함세덕작 허집연출 「전설」출연) ▲1941년 극단 현대 극장입단 유치진작 서항석연출 「대추나무」 정식대뷔,지방공연외 「청춘」「봉선화」「맴도는 남편」「춘향전」「에밀레종」「산적」「낙화암」「무장선샤먼호」외 ▲1945년 극작가 이광래와 극단 민예 극장 창단 「카츄샤」「젊은그들」「민족의 전야」「백일홍 피는집」「동학군」「피는 물보다진하다」「피어린 역사」「지옥과인생」외 ▲1946년 연출·극작가 이상백등과 극단 청포도 창단,「초원의 발전」 ▲1947년 극단 신지극사 창단 「태양의 그리워」「언덕에 꽃은피고」 ▲1947년 중앙극장 전속극단,극단 신청년 창단 「오남매」「혈맥」「사랑의 가족」「상해야화」「골든보이」「어머니와아들」「여죄수의 고백」「공작부인」「송화강의 애수」「반역자」「사육신」외 ▲1950년 극단 창조극단 창단「황진이」지방공연중 6·25 ▲1951년 상록 극회창단 ▲1953년 극단 신협 창단멤버입단 「빌헬름텔」「햄릿」「오델로」「맥베드」「줄리어스 시저」「붉은장갑」「마의태자」「원술랑」「맹진사댁경사」「나도 인간이 되련다」「한강은 흐른다」외 ▲1957년 국립극단입단 「인생차압」「딸들자유연애를 구가하다」「가족」「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대수양」「카라마조프의 형제들」「성웅 이순신」「죄와벌」「손탁호텔」「마을의 봉팔이」「순교자」 80년대까지 70여편 ▲1980년∼현재 극단 배우극장 소속 「천일의 앤」「정복되지 않는여자」「분노의 계절」「신장한몽」「어머니」외 「그래도 우리는 볍씨를 뿌린다」「이대감 망할대감」「붉은 카네이션」「밤주막」「출세기」등 타극단 공연 참가 ▲1986년 고희기념공연 윤정선작 주요철 연출「나는 어이 돌이되지 못하고」 등 2백여편 1946년부터 영화 「청춘의 행로」「쌍룡검」외 TV드라마등 1백여편. ▲국립극단 부단장·총무역임. 86,동아연극상 특별공로상 87,백상연극상 특별상 92,문화훈장 옥관장 서훈·고희기념문집 발간
  • 「중력렌즈현상」 첫 관측 경험/장경애 청주대교수·물리학(해시계)

    1979년 가을이었다.중력장에 의한 빛의 굴절현상으로 맺혀진 천체의 영상이 처음으로 관측됐다.OSO0957+561 A,B란 이중퀘자가 중력렌즈효과에 의한 쌍둥이영상이란 것이 관측에 의해 처음으로 공표된 해가 바로 1979년이다. 퀘자란 지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로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특징이다.그래서도 이 발견은 천체물리학계에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중력렌즈효과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과 관측자 사이에 또 다른 별이 놓여 있을 경우 이 별의 중력장을 통과 하는 빛은 직진하지 못하고 그 별을 향해 굴절하여 관측자는 그별 뒤에 있는 별의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굴절에 의해 맺혀진 두개 이상의 진짜 별의 영상을 동시에 보게 되는 것이다.이와 같이 별의 중력장이 렌즈와 같은 역할을 하여 중력렌즈란 이름이 붙여졌고 빛의 굴절에 의해 가짜 영상이 보이는 효과를 중력렌스효과라고 해왔다. 중력렌즈효과가 처음 알려진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그 동기였다.그러나 중력렌즈효과가 관측될 확률은 무한히적었기 때문에 이분야에 대한 이론적 연구만이 1979년 이전까지 거의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그러므로 이중퀘자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그당시 나는 이 분야의 제일인자인 랩스탈교수와 함께 학위논문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던 때였고 우리는 곧 1979년 12월5일 네이처란 학술 잡지에 세계적 공인을 얻기 위해 소중력렌즈효과이론의 원조인 창­랩스탈중력렌즈 모델을 발표했다.이 논문은 곧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우리는 곧 이 분야에서는 무시당하지 않을만한 학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그 후로 십수년이 흘렀다.아인슈타인 조차도 거의 관측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현상을 우리는 보았고 나와 랩스탈교수가 이른으로 정립해낸 소중력렌즈효과에 의한 영상까지도 관측에 의해 입증된것을 우리 생전에 겪었다.이제 나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을만한 그득함을 가슴에 안고 일에 임하고 있다.지금 돌이켜 보아도 진리는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평범한 어휘로 밖에 나는 1979년 그 때의 희열을 글로 표시할 수 없다.고학으로어렵던 함부르크 대학교 유학생활에서 우주는 나의 학문의 대상이었고 지금 나에게는 나를 찾는 정신과 마음 수양의 대상이 되고있다.가이없고 깊이 조차 헤아릴 수 없는 이 우주를 얇은 지식으로 도전하고 있는 자신이 때론 몹시 안쓰럽고 왜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대입낙방 비관자살

    【인천】 지난달 31일 하오3시쯤 인천시 남동구 만수4동 주공아파트210동 202호 윤희열씨(45·여)집 거실에서 윤씨의 장남 박정협군(17·인천D고교3)이 전기대 입학시험 낙방을 비관해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윤씨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박군이 시험에 낙방하고 외출도 하지 않은채 집안에만 있었다는 가족들의 말과 아파트 현관의 보조키가 안으로 잠겨있고 타살흔적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대입낙방을 비관,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 마음속에 희열의 성을(박갑천칼럼)

    지하도를 내려가는데 한 노파가 엎드려 손을 내밀고 있다.그 옆에 놓인 돈바구니 속 백원짜리 천원짜리가 쓸쓸해 보인다.짝을 지어 재잘대며 지나가던 여학생이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쨍그랑 얹어놓는 돈.백원짜리인가.대부분의 발걸음은 범연히 지나쳐 간다. 이런 광경을 볼때마다 한 염세 철학자의 야멸친 글귀가 되살아난다.『…그대,손 벌리는 걸인에게 동정을 보내지말라.그대의 그 감상주의는 걸인의 불행한 삶을 연장시켜 더욱더 불행하게만 할 뿐이니까』.이승을 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부를 때 므시외(Monsieur)라든가 서(Sir)라 부르기보다는 「고뇌하는 동지」라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했던 사람.그의 걸인에 대한 눈길은 12월의 설한풍만큼 차갑다.그의 글이라도 읽어서의 무심한 지나침들일까.썰렁한 돈바구니로는 선거판 얘기만이 어지러이 빨려들고 있을 뿐이다. 좋은일 하자고 하는 사람들 좀 많은 세상인가.그러자는 종교인만 해도 각 종교가 자기들 교세 자랑하는 숫자를 합치면 대한민국 인구를 웃돈다.그뿐 아니다.입만 열었다 하면 나라와겨레 위하는 지식인·지도층 인사는 또 좀 많은 세상인가.이로써 미루자면 벌써 지상낙원이 됐어야겠건만 불행한 그늘은 늘어만간다.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이러한 인생의 기미는 2백50년전의 지식인(현묵자 홍만종)과 「더불어 얘기할만한」종교인(속리사의 취미스님)사이 대화에도 나타난다(「순오지」오오). 현묵자=『…스님 말씀은 거짓입니다.오늘날 부처의 교리를 배우는 이들이 부처의 마음은 행하지 않고 부처의 자취만 행하며 입으로는 자비를 말하나 행실은 장사치 같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능히 고해를 초탈하여 극락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취미스님=『당신이 나를 조롱하는 것은 괜찮소만 나로서 본다면 이시대의 선비들이란 마음에는 양주(양주:춘추전국시대의 학자)·묵적(묵적:전국시대 사상가)을 품고 입으로만 주공·공자를 말함으로써 그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니 이러고서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소』 「지상낙원」을 공약하는 열변의 열기속에서 도리어 여느해보다 더 찬바람만 인다는불우이웃돕기 창구와 각종 구호복지시설에의 온정.좋은 일 하자는 사람들하며 나라와 겨레 위하자는 고담준론의 마음들은 영하의 고드름에 얼어붙어 버린 것인가.현묵자와 취미스님 사이에 오고간 반론이 오늘에 오히려 새로워지면서 부끄러워지기도 한다.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그 「입 따로 행동 따로」말이다. 자선을 느끼는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는 말이 있긴 하다.그러나 그말은 자선의 순수함을 강조하는데 뜻이 있을 뿐이다.떠벌려 공리를 노리는 자선이 아닌한 베풀며 마음속에 희열의 성을 쌓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그렇게 내 영혼 위로하는 세밑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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