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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비다!”… 전국이 “덩실”/상오 1시 현재

    ◎제주 85㎜·남부 30㎜이상/영호남 국지호우… 해갈 도움/기상청/“오늘 하오까지 1백㎜ 이상 올듯” 9일 하오부터 전국에 모처럼만에 비다운 비가 내려 대지를 흠뻑 적셨다. 이번 비는 상오 1시 현재 제주 서귀포 85㎜,전남 완도 52㎜를 비롯,남부 많은 지역에 20㎜이상의 상당한 강수량을 보였다. 비가 오자 들녘에는 환한 얼굴의 농부들이 비를 맞으며 한방울의 빗물이라도 흘려 보내지 않으려고 논두렁 손질을 하는 등 바쁜 하루를 보냈다. 기상청은 9일 『서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이날 중·남부와 제주도지방 전역에 비가 내렸다』고 밝히고 『이 비는 10일 하오까지 이어져 중부지방 10∼20㎜,남부지방 30∼60㎜,제주지방 40∼1백㎜ 정도의 강수량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상청은 『비를 몰고온 기압대는 계속해서 북동쪽으로 이동중』이라고 밝히고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당초 예상보다는 강수량이 적을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남부지방의 경우 평년의 저수량 확보와 밭작물 해갈에는 상당히 못미칠것으로 내다봤다. 기상청은 남부지방의 경우 완전히 해갈이 되기 위해서는 2백㎜이상의 비가 더 내려야 한다고 밝혔다. 기상청은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제주도 지방의 경우 10일까지 최고 1백㎜가량의 비가 내려 가뭄이 거의 해소될 것으로 보이며 가뭄이 극심한 영·호남 일부지역에서도 국지적인 호우로 지난해 가을 이후 가장 많은 최고 60㎜까지의 비가 예상된다』며 저수량 확보에 특히 신경을 써줄 것을 당부했다. 10일 상오 1시 현재 지역별 강수량은 ▲서귀포 85㎜ ▲성산포 80㎜ ▲완도 52㎜ ▲고흥 36㎜ ▲여수 31㎜ ▲장흥 30㎜ ▲남해·거제 34㎜ ▲산청 32㎜의 분포를 보였다. 한편 기상청은 12일쯤 또 한차례 비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 모처럼 많은 비가 내리자 오랜 가뭄으로 식수난과 농업용수난을 겪어온 호남 영남등 남부지역에서는 완전한 해갈에는 못미쳐도 제법 흡족한 비가 내렸다며 단비를 크게 반겼다. 특히 밤이 되면서 계속 비가 내리자 농민들은 영농철을 앞두고 조금의 물이라도 더 가두기 위해안간힘을 썼으며 비가 적게 내린 지역에서는 내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청예보에 기대를 걸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이날 상오부터 전지역에 걸쳐 풍족한 비가 내린 제주도에서는 농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밭으로 나가 흙을 갈고 잡초를 제거하는등 바쁜 손놀림. 또 이번 비로 한라산일대에 쌓였던 눈도 상당량 녹아 도당국은 어승생수원지의 저수량도 크게 증가했을 것으로 기대. ○…전남동부권 최대의 마늘생산지로 이름난 고흥군 도덕면 어영리 이장 김남수씨(60)는 가뭄으로 오그라들었던 새싹이 오랜만에 생기를 띠자 『이번 비로 마늘잎이 두세개 정도는 쑥쑥 돋아날 것』이라며 찢긴 비닐을 흥겹게 손질했다. ○…이날 50㎜이상의 비가 내린 완도읍 주민들은 당장의 식수걱정은 물론 마늘·보리 등 밭작물 해갈까지 기대하며 들녘에 나가 물가두기에 안간힘을 썼다. 죽청리 이장 김희원씨(57)는 『하오부터 빗줄기가 굵어지자 곧바로 삽을 들고 논밭에 나가 어두워질때쯤 돌아왔다』며 『모처럼 내린 비라 우산도 쓰지 않고 그냥 일을 해도 즐거웠다』고 말했다. ○…마산과 포항지역은 밤이 되면서도 많은 비가 내리지 않자 안타까워하는 모습. 그러나 이날 하오 논두렁을 손질하던 포항시 북구 흥해읍의 한 농민은 『기상대 예보와는 달리 비가 적게 와 실망했다』며 『그러나 내일에도 비가 온다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지난달부터 제한급수를 하고 있는 전주시는 20㎜이상의 비가 내리면 임실군 관촌면 방수리 취입보의 수위가 올라가 상수도난이 크게 해소될 것이라며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해 가뭄막이 댐공사를 실시.
  • 변화무쌍한 우주 작품화/핀란드서 활동 전상호씨 귀국도예전

    ◎흙·유리 사용 환상적 분위기 연출 핀란드에서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도예가 전상호씨(39)의 개인전이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721­5969)에서 열리고 있다.12일까지.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무한함을 작품 소재로 삼아온 작가는 이번 첫 국내 전시회에서 전통적인 도자기외에 도자기와 유리공예를 접합한 최근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은하수」「안개별」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핀란드의 변화무쌍한 자연환경과 그곳에서 작가가 보다 가깝게 느낄수 있었던 우주의 신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반복과 연속,그리고 집합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작업방식을 통해 나타나는 극도로 단순한 형태는 오히려 시각적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또 작가는 흙과 더불어 유리라는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자연광 및 인공광을 통한 새로운 시각효과를 얻고 있다.이질적인 두 소재,즉 지구를 상징하는 흙과 빛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이미지를 대신하는 유리를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결합함으로써 한층 풍부한 표정을 얻는다. 색채는 대부분 금속물질과 같은 중간색을 띠는데 이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우주를 연상시킨다. 국내에서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에서 세차례 특선을 차지했던 작가 전씨는 84년 핀란드에 유학,국립예술대학 및 대학원에서 유리와 도자기 접합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 신라 흙인형 여인상(한국인의 얼굴:18)

    ◎얼굴 형태 단순… 가늘고 긴 눈 인상적/젖가슴·성기 과장… 풍요·다산 상징 우리나라 고대 흙인형 가운데는 성징을 빌려 남녀인물상을 만든 경우가 있다.주로 성기를 과장해서 남녀를 구분했다.다만 여성은 성기 이외에 젖가슴이나 엉덩이에도 초점을 맞추었다.수적으로는 성기를 노출한 남성상이 더 많다. 신라 유물로 전해지는 성징표현 흙인형 여성상의 얼굴은 대체로 간략하게 제작되었다.어떤 여인상은 아예 얼굴 윤곽만을 뭉뚱그려 놓은 것도 있다.그러나 젖가슴과 성기,임산부를 강조한데서 여성을 빚고자 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몇가지 여인상 특징을 살펴보면 젖가슴 만을 드러낸 것,젖가슴과 성기를 함께 드러낸 것,임산부를 표현하면서 성기를 드러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윗옷을 벗어 젖가슴만 내보인 여인상의 눈과 입은 가느다랗다.마치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꾹꾹 눌러 자국을 남긴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웃음을 살짝 머금은 듯 표정 어딘가가 흐뭇해 보인다.오른팔을 구부려 손으로 봉긋이 튀어나온 젖무덤을 받쳤다.역시 왼팔도 구부려 손으로 아래쪽 허리를 가볍게 감싸았다.여인은 발등까지 내려온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히프부분은 꼭 맞게 밀착되었다. 젖가슴과 성기를 다 드러낸 또 다른 여인상은 찢어진듯 가늘고 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커다란 입을 약간 벌렸다.고개를 들고 무릎을 꿇은 여인은 왼쪽팔을 번쩍 치켜올렸다.그리고 오른쪽팔을 내려 손으로 옆구리를 쓰다듬는 자세다.두개의 젖무덤은 별도로 붙이고 성기를 눈에 잘 띄게 새겼다.비교적 정성을 들인 이 여인상은 고운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만든 사람의 지문이 선명히 남아있다. 이들 여인상은 여성의 육체적 성징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과는 달리 머리 매무새는 아주 단조롭다.어떤 형태의 헤어스타일은 물론 아예 머리카락으로 여길만한 아무런 표시도 해놓지 않았다.모자(관모)를 썼거나 상투 튼 머리모양을 한 흙인형 남성상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이렇듯 간략한 여인상의 머리모양은 청동기시대 조각품에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여인상을 통해 애써 젖가슴과 성기,임신을 강조한 까닭은무엇일까.이는 곧 땅의 풍요성과 다산성을 의미한다.인류는 아득한 옛날부터 여성을 대지로 생각하면서 그 생식기능을 풍성한 수확과 연관시켰다.특히 농경사회에서 여성은 지모신의 위치와 같은 것이었다.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는 남녀가 편을 갈라 외줄을 당기는데 여자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이 역시 여성의 풍요성과 다산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구석기시대 후기의 대표적 여인상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빈 자연사박물관 소장의 「빌렌돈프의 비너스상」도 예외가 아니다.양쪽 젖가슴과 성기에 이르는 삼각지대를 과장한 이 여성상은 생산력이 크게 부각되었다.그리고 고대 멕시코 알텍문화유물의 한 여성상은 아이가 세상밖으로 머리를 내민 출산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 굴업도 지역56만평/핵폐기장 지정 고시

    정부는 27일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서포3리 굴업도 일대를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의 촉진및 시설주변지역의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한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지구로 지정·고시했다.정부는 지난해 12월22일 굴업도를 방사성폐기물시설부지로 선정 발표한 이래 주민열람,공청회,지역협의회 개최등 주변지역 주민의견 수렴작업을 벌여 왔으며 지난 15일과 16일 원자력위원회및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추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과기처장관이 시설지구로 지정·고시하기에 이르렀다.지정·고시된 시설지구는 육지부 약 1백72만㎡(약52만평),매립부 약 14만㎡(약 4만평)등 총1백86만㎡(약 56만평)로 향후 이지역에는 토지의 형질변경이나 건축물의 건축,공작물의 설치 또는 흙 돌 모래 자갈의 채취,기타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 카자흐 자치주 이리계곡(서역 문화기행:12·끝)

    ◎천산 산맥자락 초원… 기마민족의 터전/18세기 들어 영·러 등 열강 각축… 중,54년 자치주 선언/아편전쟁 승리 이끈 임칙서 장군 동상 혜원성에 남아 밤낮을 부리나케 보름을 달리면서 겨우 서역의 중로와 남로를 말 타고 꽃 보듯 하였다.이제 남은 것은 사막에 논을 일구고 초원을 비단으로 가꾼,그래서 서역의 낙원으로 불리는 북로를 결코 빠뜨릴 수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이닝(이령)까지 공로 한시간은 정말 미의 여로였다.중로나 남로가 백색 아니면 적갈색의 질식적인 영토였다면 북로는 적갈색이 마르고 청록색이 살 찌는 낙원이었다.멀리 아이비호와 사이리무(새리목)호의 쪽빛 물결이 굽어 보이고 카자흐의 팔카스호로 흘러가는 이리강의 굽이치는 맥류조차 역력히 보인다.그보다는 하얀 만년설의 천산산맥과 파란 초원과 바둑판인양 구획 정리된 논밭들을 보면서 그 장관과 풍요를 읽고 있을 때 저 땅에 흥망과 공방이 오갔던 역사,그 소용돌이가 들리는 듯했다. ○꼬마들도 말타고 사냥 여기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흑해로부터 동점한 스키타이들이 유목하면서 행국을 형성하던 곳.기마민족의 마당은 초원이었었다.따라서 초원위에서 꼬마조차 말을 타고 새를 쏜다는 흉노와 한무제때부터 동맹을 시도했던 오손과의 밀고 당기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그래서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5년 사이의 일이었다.한무제의 사신 장건이 오손의 곤막왕을 찾아 명마 천필을 요구하자 오손왕은 한왕조의 공주를 소망하였다.오손과의 동맹으로 흉노를 치고 명마 천필을 위해 이를 응낙하였다.무제 조카의 딸인 세군공주를 구천리밖 오손에게 보냈다.공주가 왕의 우부인이 되었지만 멀지 않아 곤막조차 노환으로 죽었다.오손의 풍습대로 곤막의 손자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두었다지만 고향을 그리다가 끝내 백조가 되어 환고향하겠다는 슬픈 시를 남겼었다. 아름다운 이리계곡에 싸움은 쉬지 않았다.18세기에 들면서 이슬람교도의 반란으로 야기된 서터키스탄의 무장 침입을 비롯,영국·러시아등 열강의 침노로 영일이 없었다.19 54년 중국 중앙정부가 이닝에다 「이리지역카자흐자치주」를 선포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리강 유역은 뎅구리(카자흐말로 하늘이란 뜻)신앙에 뿌리 깊은 기마민족과 세계최대의 농업민족인 한족과 교전으로 얼룩진 「화성」이요,「백양성」이다. 「사기」,「대원전」에 따르면 오손은 흉노보다 작은 행국으로 준갈분지의 남역과 천산북로를 무대로한 천산유목민이었다.그들은 늘 몽골 고원으로부터 침노하는 흉노나 서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월씨,대원등과 쫓고 쫓기면서 혼혈을 거듭하였다.그래서 옛날 오손국을 점거한 카자흐사람이 혈맥상 오손의 후예일 가능성도 없지않지만 유목적인 생활모형만은 오손의 계승자임이 틀림 없다. 이닝지역의 인구는 비록 카자흐·위구르·한의 삼분천하였지만 카자흐의 자치주인 만큼 카자흐의 색깔이 진했다.거기서 손을 뻗치면 옛날 소련연방이었던 카자흐공화국과 맞닿는 국경이다.텁수룩한 수염에 뾰죽하면서도 결코 높지 않은 코.형상은 사뭇 위구르사람을 닮았지만 살갗은 흉노쪽,역시 알타이가 가까워선지 모르겠다. ○위구르사람 얼굴 닮아그러한 카자흐사람을 보면 옛날 한나라때부터 이곳에 죽치고 살았던 터주들임에도 그들이 뽐내는 천마를 기르고 천산 산마루나 초원을 질풍처럼 달리면서 함성을 지르는 기마술 말고 그들 스스로의 역사는 쓸쓸하리만큼 한산하다. 1978년 북경의 고고학자들이 이닝의 서쪽 고을 신웬(신원)에서 오손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필자는 그때 의아했었다.유목민에게는 성토해서 봉분을 만드는 습속이 없어서였다.오손족은 그만 두고 천하를 휩쓸었던 칭기즈칸의 무덤조차 알 길이 없지 않았던가? 그들은 시신을 풀밭에 묻고 그 위로 말이 달리고 새풀이 돋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풀밭이 되었었다. 그럼에도 차푸차알(찰포사이)에 있는 시보(석백)족 자치현에 오손 고분이 있다는 말을 듣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그 고분이 있는 진첸(김천)읍은 이닝의 동남쪽 4.8㎞지점.진쳰읍 이라치뉴루(의랍재오록)마을엔 크고 작은 고분 2기가 있었다.그들은 모두 만두모양의 대머리 무덤,그 위에는 풀 한포기 없는 황토의 언덕이었다. 진쳰 씨앗공장뒤편에 있는큰 무덤은 그 높이가 10m에 직경이 25m쯤,거기서 서쪽으로 4백m지점인 시보중학교 교문옆에 있는 작은 무덤은 큰 무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임은 마찬가지였다.다만 아무 곳에도 2천년전의 오손 무덤임을 증명하는 기록은 없었다.1978년,신웬고분의 발굴조사에서 이미 밝혀진대로 비록 2천년의 연조는 밝혀졌지만 그 속에서 고작 유골과 약간의 목기만 출토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다만 흙 둥주리뿐인 오손 고분을 답사하고 돌아오면서 결코 허행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차푸차알에 들러 시보족들의 마음을 참관하고서였다.그곳은 이닝 남쪽 20㎞지점,서역에서는 유일하게 시보족이 집단 거주하는 촌락이었다.그 마을 이름이 시보말로 「곡식의 창고」라는 뜻,그만큼 풍요로운 땅이었다. 필자가 서역을 떠돈지 스무날,이제 귀로에 올랐는데 뜻밖에도 타관서 동향을 만난 설렘이 있었다.글세,차푸차알을 거닐다가 거리에서 만난 얼굴들은 몹시 낯이 익었었다.작은 키에 둥글 넙죽한 얼굴,낮은 코에 가는 눈.그뿐이랴? 그들의 민속촌에서는 울긋불긋한 과녁에 활쏘기와 장사들의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거기다 서너근이 될법한 무와 빈대떡 비슷한 밀떡을 부침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2년여 남짓 귀향살이 그들은 벌써 백여년전,빈발하는 청로전쟁에 만주로부터 파견된 청군의 후예들이었다.그러니까 우리 민족과 가장 사촌민족인 만주족이었는데 그곳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만주어 보존 구역이었다. 그러나 풍운의 현대사가 남아 있는 곳은 역시 중·카국경옆 훠청현에 있는 후이웬(혜원)읍이었다.후이웬은 이닝 북서 40㎞지점.거기는 청대 이리장군(총통이 등진장군의 약칭)의 주둔지였다. 청나라는 1757년,준갈분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서역을 재통일하고,1762년,거기다 「이리장군」을 설치하여 신강지역 최고의 행정및 국방의 수장으로 천산산맥의 남북로는 물론 팔카스호 동쪽지구를 총관장했었다.1764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다 둘레 7㎞의 성을 쌓았지만 1871년의 러시아침략으로 무너졌던 것을 18 82년에 오늘의 후이웬성으로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이웬성이 역사의 무게를 지니게 된 것은 2백30년에 달한 연조 그 자체보다는 그를 다스리던 사람과 역사와 예술을 한 곳에 응집 표현한 몇채의 건물이 있다.그 사람은 임칙서(1785∼ 1850년)요,그 건물이란 후이웬루(혜원루)와 장군부·장군정이다. 임칙서는 애국의 장군이었다.광동광서의 총독으로 금연운동을 펼치고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군대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면서도 면직 당한 채,1842년12월부터 이리장군으로 전임,1845년1월 사면 받기까지 2년남짓 귀양살이하면서도 농지를 확장하고 농산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자취는 사방에 있었다.후이엔성안에 보존되고 있는 당시 이리장군의 거소요 지휘본부였던 「장군부」와 「장군정」이 중국 남방의 소박한 건축양식과 정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는가하면 후이웬성 북쪽 5백m쯤엔 임씨가 손수 심었다는 청강수 네그루가 「임공수」란 이름으로 빨간 벽돌담안에 모셔 있었다.거기에 그치지 않았다.이닝시 서북쪽 교외의 경제개발구역에는 이닝시문화국에서 1994년8월에 완공한 「임칙서기념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안에는 임씨의 동상과 사적전시실이 꾸며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리지역을 상징하는 마크는 뭐니뭐니해도 후이웬성밖에 북경의 고루를 본 떠서 1897년에 축조한 「후이웬루」다.벽돌 축대위에 날듯한 처마와 울긋불긋한 기둥의 3층 누각은 어쩌면 중국 서북단을 지키고 카자흐 자치주에 세워진 가장 한족적인 문화의 축도로 서 있다.
  • 겨울 난 자동차/손질 이렇게

    ◎증기·고압세차로 염화칼슘 제거/타이어 공기압을 알맞게 높이고/배터리·브레이크상태 점검해야 겨울을 지난 차량의 관리는 월동준비 못지않게 안전운행에도 중요하다. ▲겨울용품 정리보관=트렁크속의 모래주머니 체인등을 꺼내 흙 물기등을 제거한뒤 적당한 곳에 보관한다. ▲타이어점검=겨울철에는 노면상태가 미끄러워 타이어 공기압을 낮춰 놓는 경우가 많다.따라서 봄이 되면 공기압을 적정수준으로 높이고 겨우내 스노 타이어를 장착했던 차량은 일반용으로 교환한다.타이어중 마모가 적은 것을 앞에 끼워준후 정비업소에서 전체적인 타이어밸런스를 맞춰주는 것이 좋다. ▲엔진룸점검=보닛을 열어 엔진룸 상태를 확인한다.겨울철에는 배터리,엔진,각 레버,전기계통에 무리가 갈수 있다.우선 배터리상태를 점검,배터리액이 부족하면 보충해준다.전해질로 인한 부식으로 배터리 윗부분에 하얀 가루가 덮여있을 수 있다.깨끗이 닦아내고 그리스 등을 발라주면 된다.스파크플러그도 칫솔등으로 닦아주면 좋다.엔진룸에 기름때가 끼어 지저분하면 세탁용 연성세제를 물에 풀어 스폰지 등으로 가볍계 닦고 물로 여러번 헹궈주면 깨끗해질뿐 아니라 엔진 성능과 기계작동도 원활해진다.단 디스트리뷰터나 스파크플러그 터미널,카뷰레터 부근 센서 등에 물이 튀지 않도록 하고 세척후 시동을 걸어 물기를 말려준다. ▲각종 오일류 점검과 브레이크 상태 확인=엔진오일과 브레이크오일 트랜스미션 오일등의 점검은 수시로 한다.특히 겨울철은 엔진오일의 손상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교환주기를 짧게 잡아주는 것이 좋다.브레이크 액이 적정선 아래로 내려가 있다거나 페달을 더 깊이 밟아야 브레이크가 작동한다든지 핸드브레이크를 더 높이 잡아야 한다면 라이닝이 닳았다는 증거이므로 교환해주도록 한다. ▲세차=한번쯤 고압세차 혹은 증기세차로 차량하부에 묻은 염화칼슘·흙먼지를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가능하면 쉬프트 등으로 차체를 들어올려 직접 살피고 오일이 새거나 상처가 생긴 곳이 없는지도 살펴본다.
  • 입시에 멍드는 아이들에게「건강한삶」교육/이색 청소년캠프학교 생긴다

    ◎젊은교사들,「따… 또… 학교」 3월 개설/6개월과정… 소그룹 캠프도 마련/연극 실연·도자기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로 꾸며 학교수업과는 별도로 또래 청소년이 모여 음악회나 연극공연을 스스로 해보고 친구의 존재와 삶을 진지하게 확인하는 이색 캠프학교가 마련된다.수년간 학교교육의 문제 개선을 놓고 함께 고민해온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모여 구성한 「또 하나의 학교를 열어가는 모임」이 올 3월부터 개최하는 「따로 또 같이 만드는 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입시위주 학교교육의 단점 해결을 위한 대안 제시의 프로그램 성격이 짙은 「따…또…학교」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모두 10명.크리스천 아카데미 박상영·문홍빈 간사와 교육민회의 김혜수·조혜영씨,연극인 이두성씨,도예가 박종훈씨(단국대교수),이효성·신동준씨(경동교회 청년경동회)를 비롯,현직교사 신승혜·함지훈씨 등이다. 『교육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일단 실천으로 옮겨 한걸음 내디딘다는 마음으로 시작한겁니다』박상영씨는학생들이 이 학교를 통해 서로를 대학진학의 경쟁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주위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확인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흙과 음악속에서 부딪히고 어울리는 가운데 건강한 삶을 틀을 제시한다」는 이 「따…또…학교」에서는 자기표현을 위한 연극공연등과 도자기만들기,신문잡지 만들기,사진 슬라이드만들기등 다양한 분야의 체험들을 참가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들을 꾸몄다. 서울 중구 경동교회 여해기념관에서 열리는 「따…또…학교」는 6개월 과정.매주 토요일 하오 2시30∼4시30분까지이며 방학기간에 들어가는 마지막 주에는 4박5일의 일정으로 그동안 체험한 내용을 소그룹으로 나누어 발표하는 공동캠프도 마련한다.문의 745­8313.
  • 「승용차폭발」 2차 현장감식/파편 등 20여점 추가 수거…감정의뢰

    【순천=남기창 기자】 전남 순천 승용차 폭파살해사건을 수사중인 검·경합동수사본부는 8일 폭발물 종류를 밝히기위해 폭발물처리 전문요원을 투입,2차 현장감식을 실시했다. 수사본부는 이날 감식에서 폭약의 화약성분이 묻어 있을 만한 시트부분의 천조각과 타버린 물질이 섞인 흙 등 20여점을 추가로 수거했다. 수사본부는 또 숨진 이씨의 사체부검결과 채취된 체액과 오른쪽 엉덩이에 박혀 있던 파편 2∼3개도 함께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 불교거점도시 쿠차(서역 문화기행:9)

    ◎시원1백여채는 흙담만 남아/3세기 서역정치의 중심… 7백년간 영화/쿠차강 벼랑에 석굴 여러개 산재… 베제크리크 천불동 흡사 카슈가르에서 쿠차까지 사막 7백50㎞.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장장 15시간을 덜커덩거려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천산남로가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이란 장관들을 좌우에 놓고 그를 줄곧 볼 수 있는 데다 서역 역사의 중심을 이제사 찾아가는 길이어서 였다. 쿠차의 옛 이름으로 구자 굴지 고차등이 있지만 모두 쿠차라는 위구르말을 다르게 표기했을 뿐이다.서한때만해도 겨우 36국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는데 동한때 반초(반초·33∼103)가 서역을 확장하던 기원 91년엔 「서역도호부」를 두어 서역정치의 중심으로 부상,당나라때 「안서도호부」로 지속되었다. 쿠차는 기원3세기부터 11세기까지 서역에서 불교의 거점으로 가장 그 꽃을 피웠던 곳으로 스바시(소파십)에 두군데의 자오후리사원외에도 키질(극자이)석굴을 비롯하여 쿠무토라(고목토랍),키질가하등 세군데의 천불동이 있다.무엇보다 당나라의고승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할 때 여기서 두달을 머물면서 쿠차의 융성한 불교와 음악을 그의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한 바 있었다. ○혜초,한달 걸려 통과 필자가 쿠차를 특별히 동경했던 연유는 따로 있었다.신라의 혜초가 인도로부터 장안으로 돌아갈 때,바로 카슈가르에서 쿠차로 뚫린 이 코스를 장장 한달이나 걸어서 당시 정치·군사의 중심지였던 쿠차를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기록하였고,고구려 출신의 명장인 고선지(?∼755)는 당 천보(742∼755)연간에 서역방위 총사령격인 「안서도호」를 지내며 천하를 호령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서역의 악기,특히 쿠차를 대표하는 갈고는 꼭 우리나라의 장구를 닮았기에 똑같은 흥을 느꼈고,또 최근 필자는 돈황의 막고굴보다 한세기 앞서 착굴되었던 키질천불동의 벽화를 정리하여 일련번호를 엮었던(1946∼47)최초의 키질 전문가가 우리의 재중동포 한낙연(?∼1947)씨임을 발견했기에 그렇다. 쿠차의 가을은 상쾌했었다.길에는 온통 코스모스였고 호마와 노새가 끄는 마차가 한가로웠다.멀리 해발 2천m가넘을 법한 뻘건 암벽의 촐타크(확이달격)산,그리고 보다 멀리 만년설의 하얀 천산산맥이 둘렀건만 시가는 넓고 사람들도 훤칠했다. 옛날 「양서」의 「제이전」에 쿠차의 외성은 장안성에 견줄만하고 가옥은 장려하다고 기록되었다.그 외성을 찾으려 필자는 맨 처음 쿠차의 옛 성곽을 찾았다. 쿠차의 간선도로 서쪽에는 인민공원,그 건너편 7m 높이에 5m 폭의 토성,그 허무러진 폐허가 보였다.그 밑으로 작은 개울,개울옆으로 쿠차 고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그 토성은 40m 간격으로 넓은 장벽을 세운 채 옛날의 궁궐을 휘감았는데 자그마치 7∼8㎞에 달한다고 했다.그 안에서 출토된 기와나 벽돌의 무늬와 크기는 장안 대명궁에서 발굴된 그것들과 비슷했다는 르포를 본 일이 있었다. ○40m간격으로 토성 이곳이 한때 쿠차국 국왕의 궁궐임은 물론 당나라때 「안서도호부」의 주둔지였으니 1천2백50년전 우리 고선지장군이 호령하던 곳에 필자가 서 있는 셈이었다. 「산 깊숙한 곳에,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2개의 가람이 있었다.둘 모두 자오후리라 이름했지만 위치에 따라 동·서로 불렸다.…서문밖 좌우에는 높이 90여자의 불상이 서 있고,절은 백여채요 승려가 5천여명…사람들은 공덕을 다투어 쌓고,…불상의 장엄은 사람의 공력을 뛰어넘었네라.…」 위의 글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자오후리사원에 관한 기록을 발췌한 것이다.비록 자오후리의 확실한 명칭과 위치를 밝힌 바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오늘의 스바시(소파십)에 있는 자오후리사원을 지칭함에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필자는 쿠차 고성에서 북쪽으로 23㎞ 지점에 있는 자오후리를 찾았다.쿠차 시가를 벗어나 일로 정북을 향하여 지프를 몰았다.쿠차강의 긴 다리를 건너자 촐타크산이 화염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화염산의 머리가 타원형으로 다소곳한데 비해서 촐타크산은 들쭉날쭉한 적갈색 바위.위구르말로 「촐」이 「황량」을 뜻한다는 데 실상은 더 했다.더구나 촐타크의 아래로 뿌연 산등성이와 모랫벌,그 가운데로 쿠차강,강바닥의 하상조차 뿌옇게 말라 비틀어진 채 였으나 붉은 산등성이는 몹시 환상적이었다. 현장의 기록대로 「산깊숙한 곳」이요,「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가람이 있었 지만」,높이 90여자의 불상은 물론 백여채의 사원 건물들은 모두 풍화중인 흙담들로 침묵만 흘렀다. 필자는 서쪽 언덕에 있는 자오후리사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산기슭을 오르다가 문득 건너 동쪽 사원의 최북단에 절반쯤 무너진 탑신을 보았다.그쪽으로 건너가기까지 족히 반시간은 걸렸다. 그 탑의 중턱에 올라 동서 양쪽의 자오후리사원을 굽어보는 감격은 무너질듯한 그것이었다.자오후리 사원의 강역이 7천㎦.그러니까 투루판에서 보았던 교하 고성이나 고창 고성보다 넓었다.교하나 고창이 다목적용 성곽이었음에 비추어 자오후리의 성곽은 오직 사원용이었으며 그 범위은 서역 최대의 것이었다. 비록 그 연대를 확정할 순 없지만 1978년5월에 출토된 위진·남북조와 당대의 철·동·도기와 벽화·전폐·간찰등으로 미루어 멀리는 위진시대요,늦게는 당말연대까지 적어도 7백년의 영화를 누렸던 불교 사원도시였음이 틀림 없다. 서역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인류가 황량하고 척박한 자연과 고투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을 잃어버린 흙과 모래를 빚어 인류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 석양이었다.그 사양속에 자오후리 사원 유적지는 자욱한 언덕들.동쪽 사원은 산의 비탈따라 전개되었고 서쪽 사원은 사원의 본당이나 강원·승방등이 밀집된 모양이다.그래도 높이 10m의 담들은 동서에 널려 있다.서쪽의 본당으로 보이는 입구쪽 토담은 봉화대에 상당할만큼 중후했고,그 둘레도 어림잡아 3백m는 넘을만했다. ○흙·모래로 문화창조 안내자가 필자를 서쪽 사원 북단으로 인도했다.거기서 놀란 것은 쿠차강을 굽어보는 벼랑에 여러개의 석굴이 뚫렸는데 그 위치나 구조가 투루판의 베제크리크천불등을 방불케한 때문이었다.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었다.석굴에서 내려오는데 길 바닥에 방사선 모양의 파란 덩굴에 수박잎모양의 큼직한 잎새들이 싱싱하게 자라서 적어도 한평쯤의 땅을 휘덮고 있었다.들수박이라했다.서역의 사막만을 방황하는 나그네에겐 또 한가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쿠차로 돌아오는 도중,필자는 「키질가하토탑」을 굳이 찾기로 했다.쿠차 북쪽 12㎞지점에 있는 이곳을 찾기위해 쿠차에서 자오후리사원 중간쯤 도로에서 서쪽으로 돌아 작은 구릉을 한참동안 달렸다.그 왼쪽엔 염수계곡으로 수만년전 지구의 조륙운동으로 말미암아 벽해가 상전된 지질 변화로 만들어 진 곳이다. 염수계곡위로 우뚝 솟은 15m의 토탑.사막에서 자라는 풀인 소소초같은 것을 배합한 판축법으로 세운 흙탑인데 적어도 2천년을 견딘 이 탑의 툭불거져나온 위치와 상단의 망루적인 구조로 보아 봉화대로 단정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키질가하토탑에서 동쪽을 조망하면 불과 2㎞ 전방에 송송 구멍이 뚫린 벌집처럼 또 하나의 천불동이 보였다.이름하여 「키질가하천불동」.거기도 46개나 되는 석굴이 모여 촌락을 이루었는데 대체로 당대에 개착된 것으로 키질천불동보다 늦은 연대라했다. 서쪽으로 40㎞ 지점엔 또 하나의 천불동이 있다.이름하여「쿠무토라천불동」으로 그 휘하에 72개의 석굴을 거느리고 있다한다.필자는 키질가하토탑아래 우두커니 서서 성큼 다가오는 황혼에 쫓겨 지프에올랐다.어디를 보아도 천불동,누가 버린 땅이라하랴! 『선생! 제가 어릴적만해도 쿠차의 왕자가 어디쯤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위구르족 기사의 말이었다.정녕 그들 나름의 왕국이 청말까지도 실재했을지 모른다.
  • 신라 흙인형 기마인물상/말탄 주인공은 앳된 귀공자(한국인의 얼굴)

    ◎관모 갖췄지만 얼굴엔 장난기 가득/키작고 살찐 말… 재래종 과하마인듯 우리나라 고대 흙인형중에는 말을 탄 모습을 한 몇점의 유물이 전해오고 있다.흙을 가지고 빚은 이른바 기마인물상으로 부르는 유물들이다.경주 금영총에서 한쌍의 유물과 토기장식용으로 만든 김해 덕산리출토물 1점은 출토지가 확실한 기마인물상.이밖에 출토지가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신라의 기마인물상도 명품으로 꼽힌다. 이들 유물 가운데 출토지 미상의 기마인물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전체 높이가 15㎝에 불과하지만,말 잔등에 올라탄 인물상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다.말 위의 전방을 주시하는 주인공 눈에는 장난기가 어렸다.딴에는 말을 세차게 몰아서 숨이 가쁜 탓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약간 벌린 입과 눈이 묘하게 조화되어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관모를 갖추었는데도 마상인물에게 거들먹대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아직은 위엄을 부릴 줄 모르는 나이 어린 신라의 귀공자라는 생각이 든다.본래 있던 팔 한짝이 잘려나가 한손으로 말고삐를 잡았으나,말부리는 솜씨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이 기마인물상은 그만큼 균형감각이 살아 있는 조형미술품이라 할 수 있다.가을 말인 듯싶게 살이 통통하게 올라 마상인물이 아주 가벼워 보인다.그리고 말위에 앉은 인물은 실제 앳된 소년일 것이다. 말을 탄 소년의 다리가 아직은 짧아서 발거리는 생략되었다.말갖춤(마구)은 그런대로 차렸다.머리와 가슴에 띠를 두르면서 말방울까지 단 말잔등에는 안장도 얹혀 있다.이러한 말갖춤으로 미루어 말을 타기 시작한 기마의 역사가 꽤 오래된 시기에 만든 흙인형으로 여겨진다.하기야 서력기원 전후의 유적인 김해 조개더미(김해패총)에서 말뼈가 나오는 것을 보면,이 무렵 신라인들은 말타는 기술을 충분히 배웠을 것이다. 이 기마인물상이 탄 말은 키가 작다.키가 작다는 사실은 말다리가 길지 않다는 데서도 나타난다.삼국시대의 말들은 대체로 작은 종자라는 기록도 있다.3세기 무렵 고구려·백제·신라에는 이른바 과하마(과하마)라는 작은 말이 있다는 기록이 「삼국지」(삼국지)동이전(동이전)에 나온다.이기록은 「말의 체구는 작지만 산을 오르는데 편하다」고 과하마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과하마는 석자의 말(삼척마)이라고 적었다.일본인 학자 마쓰모토(송본구희)는 자신의 저서 「재래마」에서 동아시아의 재래마 기준측정치는 몸길이가 1백33.892㎝라고 밝힌 바 있다.그러고 보면 아시아의 말은 작았다는 이야기다.또 머리길이는 49.298㎝,목길이는 50·666㎝,무게는 2백75.9㎏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삼국시대에 작은 말만을 키운 것은 아니다.「삼국유사」는 「동쪽에 두 종류의 말이 있는데,북쪽에서 온 호마와 나라안의 향마」라고 기술함으로써 호마의 존재를 들추어냈다.이 호마는 몽골말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아라비아계통 큰 말과의 교배종이라는 설이 있다.
  • 「고열 구공탄」 사용 기피/화력 약하고 잘 부서져

    ◎석탄 적게 넣고 흙 많이 섞어 제조 북한이 연료난 해결을 위해 개발한 「고열 구공탄」이 주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귀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고열 구공탄은 북한이 부족한 석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개발한 것으로 석탄 30%에 하천이나 개울바닥의 검은 흙 70%를 섞어 만든 직경 15∼16㎝의 12∼16공탄이다. 북한주민들이 고열 구공탄 사용을 기피하고 있는 것은 생산과정에서 석탄을 적게 사용한 관계로 압착력이 낮아 잘 부스러지는 데다 흙이 많이 섞여 24시간 연소하기는 하나 화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공급된 구공탄을 파쇄한 후 1백㎏당 8∼10원에 별도로 구입한 석탄과 붉은 진흙을 첨가하여 구공탄을 자체로 만들어 사용하거나,아예 고열 구공탄 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공장을 직접 찾아가 구공탄 대신 석탄으로 공급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전체 가구를 「석탄 공급세대」와 「구공탄 공급세대」로 구분,가정연료를 공급하고 있다. 「석탄 공급세대」는 세대주가 화력발전소 등 석탄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공장 기업소에 근무하는 가정으로 연간 2∼2·5t의 석탄을 공급하고 있다. 「구공탄 공급세대」는 협동농장·상업관리소 등 세대주가 석탄과 관계가 먼 직장에 근무하는 가정으로서 시·군 연료사업소에서 연간 7백50여장의 구공탄을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석탄및 구공탄 공급은 단지 규정에 불과할 뿐 최근 탄광시설의 노후화로 석탄생산량이 격감함에 따라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저수/절수/용수개발/가뭄극복 3대운동 전개

    ◎농진공에 「지하수 기술단」설치 정부는 24일 가뭄 극복을 위한 1단계 대책으로 오는 2월말까지 개울물에서 지하수에 이르기까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저수운동·절수운동·용수개발운동등 3대 가뭄극복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정부는 하천수와 지하수를 퍼올리거나 끌어들여 저수지나 저류지 또는 용·배수로에 저장하고 논에 물을 가두는 저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생활및 농·공업용수를 아껴쓰고 건답직파,육묘상자 보급,집단못자리 설치,모내기및 급수시기 조절등 물을 적게 쓰는 농사짓기를 통해 절수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이와 함께 용수개발운동을 전개,영농기 이전에 관정등의 방법으로 지하수를 개발하고 지표수를 최대한 확보하며 저수지에 쌓인 흙을 파내기로 했다. 정부는 작목별로 가뭄에 대응할 수 있는 영농대책을 추진한다는 방침아래 광주호등 전라남도에 있는 4개 호수의 급수시작일을 5월10일에서 5월25일로 늦추는등 벼농사 모내기 시기를 지역에 따라 신축적으로 조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농어촌진흥공사에 지하수 기술지원단을 설치하는 한편 저수및 절수 방법을 1·2월에 실시되는 「새해 영농설계교육」등 농어민교육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 「공연예술의 메카」나윤도특파원 현장리포트(브로드웨이“새바람”:3)

    ◎월스트리트/국제금융 중심가서 「정오 콘서트」26년/고건축 벽조각과 현3대식 건물 조각물 조화 볼링 그린에서 힘차게 출발한 브로드웨이에 추진력을 달아주는 것은 월 스트리트다.국제금융의 중심지로 자본주의의 산파역이자 물질문명의 대명사로 불리는 월 스트리트와 약간 북쪽의 풀턴 스트리트에서 연결되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2백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브로드웨이를 동서로 떠받치고 있다. 북쪽 인디언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통나무 담(wall)을 둘러친데서 유래했다는 월 스트리트는 트리니티 교회와 마주하고 있는 브로드웨이 80번지(뉴욕은행)와 100번지(도쿄은행)사이 동쪽으로 5백여m 뻗어나간 폭10m도 되지않는 작은 골목길이다.고딕 양식의 웅장한 교회첨탑으로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일 정도로 트리니티 교회는 엄숙하게 월 스트리트를 내려다보고 있다.인간의 물욕에 대한 신의 심판을 가하는 형상이다. 뉴욕증권거래소와 연방준비은행을 중심으로 수많은 금융기관과 증권회사들이 몰려 있는 월 스트리트는 브로드웨이의 또다른 얼굴이다.하얀와이셔츠에 단정하게 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청년들과 무릎에 와닿는 우아한 투피스 차림의 단정한 아가씨들이 서류철등을 들고 골목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모습은 자유분방하고 느슨한 브로드웨이의 보통 모습과는 사뭇 큰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막상 미국인들에게 월 스트리트는 금융의 거리에 앞서 역사의 거리로 인식돼 있다.페더럴(연방)홀을 비롯,구석구석 초대 워싱턴 대통령의 체취가 흠씬 배어있다.그리스 신전처럼 8개의 석조기둥으로 전면을 장식한 이 홀은 1789년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1년동안 대통령 집무실이자 연방청사로 사용했던 곳으로 건국초기 미국의 틀을 짠 곳이다. 이 건물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둘레의 전시실에 워싱턴 대통령이 취임선서할 때 쓴 성경책,집무책상등이 진열돼 있으며 중앙홀에는 의자들이 놓여있어 각종 공연이나 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건물앞에는 워싱턴 대통령의 동상이 우뚝 서 있어 또하나 월 스트리트의 감독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간 아래 펄 스트리트 모퉁이에는 워싱턴 장군이 자주 다녔다는 선술집 프론세스 태번이 있다.붉은 벽돌 3층집인 이 집은 1783년 12월 파리평화회의후 전쟁영웅 워싱턴 장군이 지휘권을 대륙회의에 반납하고 마운트 버넌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면서 부하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했던 곳이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본인은 그 빛나고 위대했던 활동의 무대에서 물러나려 합니다….이렇듯 위엄에 넘치는 대륙회의에 대하여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작별의 인사를 드리며 아울러 본인의 임명장을 반납하고 모든 공직생활에서 물러나겠습니다』 ○2층엔 연설문 보관 ○…워싱턴이 연설했던 2층방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 낡은 연설문 종이 한장은 물러날 때를 아는 한 위인의 우렁찬 음성으로 후세에 남아있다.그러나 그로부터 6년후 워싱턴은 국민적 추대를 받아 초대 대통령으로 이곳에 다시 왔다.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인 이 집은 현관에 커다란 워싱턴 초상화와 독립당시 성조기를 걸어놓고 그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한편 브로드웨이를 건너 허드슨강 쪽으로 위치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110층 높이의 쌍둥이 건물로 1973년 완공,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세계최고 기록을 경신했다.그 파낸 흙으로 강을 메워 건설한 배터리 시티의 월드 파이낸셜 센터와 함께 월 스트리트를 압도하는 새로운 금융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의 브로드웨이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트리니티 교회와 그 두 블록 위쪽의 세인트 폴 교회가 있다.세인트 폴 교회는 1766년 트리니티 교회 지교회로 설립됐으나 모교회가 두차례 허물어지는 동안에도 굳건히 버텨와 맨해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교회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예배도 트리니티 교회의 화재로 이 교회에서 행해졌다. 두 교회의 위치를 유심히 보면 재미있다.트리니티 교회가 월 스트리트를 내려다보고 있듯이 세인트 폴 교회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내려다보고 있다.즉 트리니티 교회 강대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해 세인트 폴 교회는 강대상이 서쪽을 향해 나있는 것이다.2백년후의 상황에 맞게 향이 반대로 지어진 것을 보면 이곳에도 풍수지리와 비슷한 신의 계시가 있었나 보다. 1792년 이곳 플라타너스 나무밑에서 24명의 브로커들이 모여 시작한 이래 세계각국의 2천여개 상장 주식에 4천7백만 개인주주와 1만여 기관투자가를 거느리는 세계최대 증권거래소로 성장한 뉴욕증권거래소는 견학코스를 마련,증권의 모든 것을 이해시키고 마지막에는 중앙홀의 거래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유리회랑으로 안내한다. 각기 50여개의 텔레비전 모니터와 20여개의 시황안내 로보트팔을 갖고 있는 7개의 커다란 기둥이 서 있으며 그 주위에 기능에 따라 빨간색·청색·녹색·하늘색 재킷을 걸친 브로커들이 세계의 주가를 요리하는 뉴욕증권거래소 중앙홀은 긴장감과 열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가 브로드웨이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역사 때문도 금융 때문도 아니다.어느곳 못지않게 살아 숨쉬고 있는 예술성 때문이다.특히 세인트 폴 교회의 「눈데이(정오) 콘서트」는 이 지역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신성모독을 자비로 다스리는 위대함이다. ○5백여 관중석 “만원” ○…23일 낮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코프스키의 러시아 음악을 베이스 아나톨리 판초스니의 노래와 릴리야 코보트코바의 피아노 연주로 들려주는 눈데이 콘서트의 현장은 5백여석 교회 의자가 꽉찰 정도로 성황을 보였다.샐러리맨도 관광객도 쇼핑객도 고급연주의 클래식 음악을 이같이 생활의 일부로 할 수 있음은 브로드웨이만의 축복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정오 교회에서 맨해튼의 중견 연주자들을 초청,한시간씩 클래식 연주회를 갖는 눈데이 콘서트는 26년의 역사를 갖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3개월치씩 인쇄돼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 30일에는 앤젤리스 현악 4중주단의 하이든곡 연주,내달 2일에는 영콘서트 아티스트상 수상자인 마코토 나쿠라의 마림바(목금의 일종) 연주와 마리아 마틴의 플루트 연주,21일에는 특별 오페라 순서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중에서 「발퀴레」1막 공연등 다양하게 계획돼 있다. 이 지역에 살아 숨쉬는 또하나의 예술성은 조각품에서 발견된다.브로드웨이 양편에 늘어선 고건축물들의 벽 장식조각에서부터 현대식 건물들앞에 세워진 현대조각까지 다양한 조각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도리아식 기단을 8층까지 올리고 사이에 수많은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운 벽면에 파라오의 벽화를 조각한 AT&T건물(195번지),역시 도리아 양식에 8개의 여신상을 2층기단에 세워놓은 도쿄은행 건물등 구석구석을 모두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한 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동그란 구멍이 뚫린 빨간 정육면체를 모로 세운 브로드웨이 140번지 머린 미들랜드 뱅크 사옥앞의 이삼 녹치 작품 「레드 큐브」는 이지역 현대조각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체이스 맨해튼 은행 앞에는 거대한 4개의 버섯모양인 뒤뷔페의 「포 트리」와 역시 이삼 녹치의 「물위의 정원」등이 있다.특히 연방준비은행 옆 루이스 네벨슨 광장은 검은 철골 7개로된 「셰도우 앤드 플래그」조각이 서 있으며 작가의 이름을 따서 가로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유명하다. 한편 월드 트레이드 센터 쪽으로도 네벨슨의 「스카이 게이트」를 비롯,프릭 쿠닝,호앙 미로,다니엘 맨체스터등 세계적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잡아 자칫 삭막해지기 쉬운 이 거리에 늘 생동감을 뿜어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는 최근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20년래 오피스빌딩의 첨단화로 사무실의 지리적 원근개념이 없어지면서 20개 대형 증권회사중 1개만 남고 모두 이곳을 떠났고 딴 금융회사들도 떠나려 하고 있다.이곳의 낡은 건물로는 첨단설비가 어렵고 임대료도 비싸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떠나간 금융회사들을 월 스트리트로 다시 불러들이고 더이상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보려 5년동안 부동산 취득세와 영업세를 대폭 감해주고 건물 신축 및 개축 제한을 대폭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21세기 새로운 브로드웨이 건설의 원동력인 월 스트리트의 대변혁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 “인공섬「포트 아일랜드」는 무사했다”/일지진 견뎌낸 경이의섬 르포

    ◎진앙지서 20㎞… 「직격탄」 맞고도 “거뜬”/가재도구 일부만 넘어져 피해 경미 20일 상오 고베(신호)시 주오구 남단 1㎞에 위치한 포트 아일랜드. 세계최초의 국제해상도시이자 인공섬으로 81년 완공된 포트 아일랜드는 지난 17일 새벽 여명속에서 간사이(관서)지방을 덮친 진도 7.2라는 엄청난 지진을 맞았다. 포트 아일랜드의 입구에서 약 2백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한신고속도로는 허리춤이 주저앉아 여전히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앙지인 아와지섬에서 불과 20㎞정도 떨어져 있어 「직격탄」을 얻어맞은 포트 아일랜드. 그러나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첨단공법으로 지은 유선형의 고층빌딩가 다채로운 색깔의 위락기구의 온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지진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베시의 여느지역처럼 붕괴되거나 파손된 흔적은 어느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베시의 자랑거리인 「무인자동전철」포트 라이너(port liner)도 지면위 10m 높이에 떠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달리고 있었다. 총면적 4백36만㎡의 섬 전체를한바퀴 휘감으면서도 레일은 비틀림 하나 없이 온전했다. 붕괴·화재·부상 등으로 얼룩져 「무정형」의 도시로 돌변한 고베시의 상황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섬 중앙부에 있는 고베대학 유학생 기숙사에서 만난 노기덕(43)씨는 『지진이 일어난 순간 책장 등 가재도구 일부만 넘어졌을 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1시간여동안 순환도로를 따라 돌아보았지만 도로 중간중간 미세한 금이 가 있고 매립된 흙 아래에 있던 뻘이 땅위로 올라오는 「액상화」 현상만 도시이 미관을 조금 해쳤을 뿐이었다. 주민 히요유키(홍지·28)씨는 『지진에 놀아 자국으로 떠나간 외국인들도 곧 다시 찾아와 평소처럼 무역박람회 등 각종 전시회에 참가해 국제해상도시로서의 위상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 지진 나흘째 표정/고베민단에 하룻새 구호품 20t 밀물/애태이후 구조대 불러 노파 극적 구조도/일각료 월급서 갹출 1백만달러 모금 ▷민단고베지방본부◁ ○…20일 하룻동안 중앙구 민단고베본부는 모두 20t가량의 각종 구호물자를 전국의 각지부·지회로부터 접수. 지진발생이후 지난 3일동안 구호물자가 주로 식료품·생필품에 집중돼왔으나 이날은 대한기독교회가 발전기를 보내온 것을 비롯,교토·오사카·민단중앙부인회 등지에서는 심한 부족현상을 겪고 있는 유아·여성용품을 보내오기도. ○…고베총영사관에는 수십명의 한국인 불법체류자로부터 『본국에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쳐 영사관직원들이 당혹해 하기도. 이에 대해 배우근총영사는 일본정부에 대해 『공항에 임시법무부사무소를 만들어 이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당국은 『그보다는 하루빨리 도시기능을 회복,조사한뒤 내보내겠다』며 원칙을 고수. ▷피해지 표정◁ ○…히가시나다·나다·나가타구 등 대부분이 고베시지역은 「대지진」 나흘째인 20일에도 인명구출작업과 도로·통신보수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하루종일 인명구조차·경찰차 등이 사이렌을 울리며 길 곳곳을 누비는 등 주민들의 생활이 정상회되는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이웃도시로의 「피난행렬」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 ○…일 내각 각료 21명은 월급에서 일정금액을 갹출,이번 지진 피해를 입은 효고현에 총 1백만달러를 기부키로 결정했다고 한 TV방송이 19일 보도했다. 일내각은 19일밤 지진 현장을 시찰한 후 귀경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총리의 주재로 열린 긴급 각료회의에서 이같이 결정. ○…고베시 등에서 구조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구조요원들은 파괴된 건물속에서 3일간의 암흑과 공포를 이겨내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 다수의 생존자들을 구조, 그중 애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구조된 아마카와 지요코(65)라는 할머니가 화제. 지난 19일 히가시나다구 소재 아마카와 할머니의 목조주택붕괴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던 약40명의 경찰과 이웃주민들은 작업을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할머니의 애견이 구조요원들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구조작업을 계속,할머니를 기적적으로 구조한 것. ▷신원확인 교포사망자◁ ◇고베(신호)시=△김분남(70) △강창향(43) △김한연(84) △강연자(65) △김청자(58) △손오순(76) △고태윤(70) △남궁좌자(70) △배의신(66) △김전실이(70) △임희자(74) △장순직(62) △정우원(56) △정외선(56) △장게리카(50) △박연옥 △이정녀 △이진술씨 부부 및 딸 이혜 이려 △장미화 △성대경 △임미보자(57) △김춘자(59) △김중길(59) △김운학(68) △남묘(61) △임윤삼(62) △임희구미(63) △임야오이(64) △임유리(66) △김본현이(67)
  • 고신라 흙인형 남자상(한국인의 얼굴:14)

    ◎금방울음 터뜨릴듯 비통한 모습/주인사망 슬퍼하는 하인을 묘사/입벌린채 망연자실… 몸도 뒤틀려 신라의 흙인형은 조형술이 뛰어나 일찍부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과감한 생략기법을 구사했음에도 표정과 동작에서는 제작자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얼굴에 나타난 감정과 몸둥이를 통해 묘사한 율동이 그것이다.이러한 작품들 가운데는 별 다른 구분없이 그저 흙인형(토우)으로 부르는 한 떼의 유물들이 전해진다.말을 탔거나 끄는 사람,악기를 다루는 주악상,여러 표정의 남녀 인물상이 있다. 이들 흙인형들 중에서 슬퍼하는 남자인물상은 아주 감동적이다.무릎을 꿇고 슬픈 얼굴을 한 인물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서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상(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이들 인물상은 두손을 모아 한껏 예의를 갖춘 자세다.그러나 얼굴은 금새 울음을 터뜨릴 듯 비통해 보인다.슬픔을 못 견딘 나머지 몸 마저 뒤틀렸다.무릎을 꿇은 인물상이 더욱 그렇다. 무릎꿇은 인물상은 슬픔이 너무 커서 망연자실한 것인가,눈을 크게 뜬채 입도 다물지 못하고있다.우람한 어깨 한쪽이 올라간 것은 슬픔을 추수릴 수가 없는 탓이리라.손은 비록 대담히 생략되었을 지라도 그 끝에 까지도 슬픔이 포개어 졌다.소박한 솜씨 뒷전에 생동감 넘치게 살아난 동작과 표정은 가히 신라 흙인형미술(토우미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서 있는 인물상은 오랜 슬픔으로 해서 거친 모습이다.입을 다물 힘도없고,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기력을 잃었나보다.이들 흙인형은 주인을 평생 모셨던 봉사자들이 그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한다.죽음을 슬퍼하는 인물상 중에는 줄(현)이 달린 비파모양의 악기를 타면서 만가를 부르는 주악상도 있다.주인의 저승길을 탄주로 인도하는 이 인물상의 슬픔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자에 대한 봉사자들의 슬픔이 이쯤되고보면 주종관계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이들 흙인형은 불행히도 출토지가 밝혀지지 않은채 막연히 경주출토품으로 전해질 뿐이다.그러나 공식적인 발굴조사에서 흙인형들은 주로 신라 지배자급 무덤들에서 나온다.이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을 위해 껴묻거리로 만들었을 것이다.결국 흙인형은 죽은 주인공의 사후세계 동반자 구실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흙인형이 출토되고 있는 이른 시기의 무덤형태(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경주에서 널무덤(토광묘)이 사라지면서 4세기 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돌무지 덧널무덤은 고신라특유의 무덤이다.한반도 전체는 물론이고 영남지방에서도 경주분지에만 존재하고 있다.시신을 넣은 나무널 위에 다른 큰 나무덧널을 씌우고 돌멩이로 덮은 뒤 흙을 쌓아 만들었다. 이 돌무지 덧널무덤은 신라가 연맹왕국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나타났다.
  • 현암사/을유문화사/동아출판사/학원사/탐구당/창업 50돌 맞았다

    ◎현암,초판본찾기·시민강좌 마련/을유 등 4개사도 기념사업 계획 국내 출판사 가운데 현암사(대표 조근대),을유문화사(정진숙),동아출판사(김현식),학원사(김영수),탐구당(홍석우)등 5곳이 올해 창업 5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인다. 이 출판사들은 광복이후 「민족교육에 한몫을 맡겠다」며 출판업에 나서 갖은 어려움을 뚫고 오늘에 이르렀고 또 그만큼 출판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해 출판계는 이들의 「창업 반세기」를 큰 경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기념사업을 확정한 출판사가 현암사.현암사는 「50년의 전통,100년의 비전」이란 기치 아래 올 한햇동안 ▲초판본 찾기 ▲시민강좌 ▲환경생태 사진전및 환경답사 캠프 ▲유럽 자전거 여행 ▲독자 사은품 증정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초판본 찾기」는 현암사가 70년이전에 낸 도서 가운데 11종을 골라 그 초판본 소장자에게 내년 1년동안 출간하는 책을 모두 선물하는 행사.해당도서는 「건국공론」「한국공론」「처세철언」「법전」「흙 속에 저 바람 속에」「시장과전장」「한국문학」「신역사서」「신역삼경」「한국의 명저」「한국인」들이다. 이 중 「흙 속에…」는 이어령씨의 첫 에세이집으로,「시장과 전장」은 첫 전작 장편소설로,「한국문학」은 첫 계간 문학전문지로 출판역사에 남아 있다. 현암사는 또 「새로운 삶의 비전,21세기를 향하여」란 주제로 오는 3월17일부터 매달 한차례씩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시민강좌및 대토론회를 개최한다.이 시민강좌에는 김진현세계화추진위원장등 각계 전문가들이 나와 정보화사회·문명변화·통일전망·세계화들을 다룰 예정이다. 이밖에 환경보존 운동의 하나로 다음달 23일부터 서울 부산 대전 대구 광주를 도는 환경생태사진전을 열며 오는 8월에는 우리의 꽃·나비·새등 생태계와 별자리를 관찰하는 여름캠프를 개설한다. 한편 을유문화사를 비롯한 나머지 4개사는 현재 기념사업을 기획하는 단계이다.
  • 줄어드는 해녀… 지원책 편다지만(박갑천칼럼)

    「지봉유설」(제국부)에는 제주도 풍토에 대한 언급도 있다.거기에 남자들이 물에 빠져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흙에 묻히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써놓고 있다.그결과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아서 남자 가운데는 수십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그글은 『아내가 항상 힘써 일함으로써 그남편을 먹여살린다』고 덧붙인다.해녀(해녀:잠수)일도 그런 생활방법중 하나였다 할것이다. 이무렵의 해녀는 남자와 함께 바닷일을 했다.규창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의하면 해녀들은 나체로 물속에 뛰어드는 것으로 되어있다.그렇게 남녀가 어울려 해조류·조개류등을 잡아올린다.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남녀가 함께 바닷일을 할수 없다』고 엄명을 내렸다는 것이니 그보다 앞서는 지봉의 시대에야 더 말할 것이 없다.아랫도리만을 가리는 「소중이」는 그후에야 나온다.그랬으니 그들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산 청파 기건이 목사로 부임해가서 어느 추운날 순찰하다가 발가벗은 여인네들이 갯물에 뛰어드는걸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전후사정을 들은 그는 그로부터 전복·소라등을 먹지 않았다 한다. 제주도 하면 우선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 해녀이다.약2분동안 물속에 들어갔다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휴!』하고 내뿜는 「숨비소리」에는 세상살이의 비탄이 서린다.영국이나 일본의 해녀보다도 깊이 들어가고 오래 견딘다는 강인한 체력의 제주도 해녀.그들은 남해안 각처로도 진출한다.그뿐 아니라 일본·중국의 연안으로 원정나가기까지 했다.그만큼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3D업종이라는 말이 있지만 해녀야말로 으뜸 버금을 다툴만하다.잠수해서의 위험만이 아니다.그들은 고혈압(지난해의 조사결과 64.2%)·고지혈증등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그러니 먹고 살만하게 된 이 시점에서 누가 그일에 선뜻 나서겠는가.65년까지만 해도 2만3천이라던 해녀가 이제 6천인데 그나마 40세 이상 고령자가 대부분.무형문화재로의 지정등 여러가지 유인이 실효를 못거두고 있다는 증좌이다.20대는 고작 2∼3%라지 않은가.당연한 시대추이라 할것이다. 제주도는 『제주의명물 해녀를 지키자』고 또한번 소리를 높인다.건강진단·생활보조등 특별지원대책을 펴기로 하면서.그것이 「후계자 속출」로 이어질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명물」이 「유물」로 돼가는구나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 신라 널무덤 부장품 흙인형(한국인의 얼굴:13)

    ◎웃음 담긴 눈·입… 자애로운 영감님/광대뼈에 큰 귀… 이웃할아버지 보는듯/높이 10㎝에 오목새김… 3세기말 추정 인류문명에는 늘 가속이 붙어 청동기시대는 지난 어느 시대보다도 짧게 끝났다.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BC1000년경에 시작해서 BC700년경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다.그리고 쇠붙이를 비로소 사용한 초기철기시대가 서력기원 직전까지 약 3백년동안 이어졌다.이 초기철기시대는 바로 삼국건국의 기반이 된 동시에 역사시대를 개막시킨 힘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 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로육촌도 초기철기시대의 사회집단이었다.신라는 이 육촌을 바탕으로 BC56년에 왕국을 세운 것으로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신라 건국집단의 세력실상은 지난 80년대초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서 발굴된 AD1세기 전후의 널무덤(토광목곽분)을 통해 잘 드러났다.철제무기류를 비롯한 대량의 철제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신라 건국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나온 인물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AD3세기말 이후의 무덤에서는 껴묻거리(부장품)로 만든 흙인형인 토용이 출토되고 있다.다만 어디서 나왔는지 출토지가 불분명한 흙인형은 꽤 많다.흙으로 빚은 얼굴은 껴묻거리 인형 토용과 장식용 인형 토우 등 명칭이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두 종류를 구분할 경우 자칫 혼란스럽기 때문에 뭉뚱그려 흙인형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신라의 흙인형들은 때로 몸뚱이의 몇몇 부분이 생략된 채 제작되어 얼핏 유치한 느낌마저 안겨준다.그럼에도 신라인을 읽을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동그란 구멍을 뚫거나 좁고 긴 홈을 그어 눈과 입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비교적 눈과 입이 작고,덩치도 역시 아주작은 치수다.그렇듯 앙증스러운 인형이 풍부한 감정까지 전달하는 까닭 뒤에는 신라인의 기묘한 재주가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들 흙인형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이 현재 소장한 「영감님 얼굴」이 있다.경주지역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올 뿐 출토지가 알려지지 않은 얼굴 위주의 두상.높이가 9.㎝에 지나지 않지만 영감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나이 탓일까,가느다란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그래도 눈웃음이 자애롭다.입언저리에도 온통 웃음이 어린 이 노인상은 손주를 대견스러워하는 듯한 신라의 할아버지다. 눈과 입을 오목새김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웃음이 더욱 뚜렷하다.웃음을 함빡 머금은 입가의 인중과 턱 윗부분이 약간 합죽하게 보이는데,아마도 이가 성치 않아 그럴 것이다.그리고 여러 가닥을 새겨 노인임을 쉽사리 드러냈다.불거진 광대뼈와 큰 귀가 어우러진 노인의 얼굴은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풍긴다.한국인의 골격이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어느정도 정형화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신라의 흙인형이 언제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아직 없다.미루어 짐작하면 처음에는 별개의 흙인형을 노리개로 만들었을 것이다.그러다 작은 흙인형을 토기에 붙여 모양을 냈는데,이것이 장식인형(장식토우)이다.신라인은 뒷날 별개의 흙인형(토용)이나 장식인형이 달라붙은 토기(토우부토기)를 껴묻거리로 무덤에 넣었다.장례와 관련한 이들 흙인형은 당시 신라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 그래도 양력설을 쇠겠다(송정숙칼럼)

    나는 양력설을 쇤다.그래온지 30년도 넘었다.양력설에 4대조상 9위에게 차례도 지내고 집안의 세배행사도 치른다.차례술로 음복하고 떡국으로 아침을 치르고 덕담도 나눈다.『아무개는 새해엘랑 논문을 통과시키라』든가,『네가 이제 고3이 되는구나.고생문이 훤하네.그렇지만 누구나 치르는 공정한 경쟁이니까 일년동안 잘 대비하자』따위로 자라는 젊은이들을 격려도 하는 꽤 정착된 신년행사다.캐나다로 이민간 막내집으로부터 1백달러와 함께 『마음으로 보내는 세배』를 받은 올해도 양력을 쇠었다. 그런데 최근 몇년사이 우리의 이 신년행사가 외로워지는 것을 느낀다.「설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설의 연휴가 사흘씩이나 늘어나면서,함께 양력설을 지내던 주변사람들이 하나둘씩 음력설로 U턴을 하고 양력설을 지내는 일이 차츰 소외되는 분위기가 되고 있다.그 시작은 느닷없는 선심으로부터 왔다.설날 앞뒤로 휴일을 붙여준 것이다.그러자 방송같은데서는 『되찾은 우리설』타령을 거듭하며 음력설 쇠는 것이 민족정기의 회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추겼고양력설 지내는 일은 배반자라도 된 것 같은 소외감이 들게 하였다. 정말 우리는 음력설을 어디에 잃었다가 되찾은 것일까.눈만 뜨면 모든 것을 양력으로 생활하고 신년이면 세계의 정상들이 신년사를 주고받으며 모든 공공기관과 민간부분의 업무가 양력신년에 새로 출발한다.수출입이 시작되고 이른바 정보고속도로를 타고 지구촌의 정보들이 새해와 함께 흘러든다.우리끼리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하는 우리식 새해인사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우리가 이렇게 민족의 진운을 위해 양력생활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대한제국 시대에 황제의 칙령에 의해 정한 것이다. 식민통치를 받으며 양력생활이 강요되기는 했지만,그 강제방법에 잘못이 있었지 양력생활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이제와서 음력설을 『우리설 되찾기』로 호들갑스럽게 구는 것은 좀 이상하다.그런데도 30%를 넘던 양력설파가 줄어서 이제는 15%미만이 되었다니 할말은 없다. 음력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활 신년은 양력으로 맞고 차례나 세배같은 행사는 음력명절이래야 제맛이 난다고 말한다.그러나 새해 첫날을 「설」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설풍속이 가진 문화적 특성과 강점은 「차례」와 「세배」에 있다.새해를 맞아 조상앞에 자손이 모여 인사를 드리고 새해에도 열심히 정진하며 좋은 삶을 노력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이 두가지 행사가 빠지면 신년의 넋이 빠진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 제사는 집안간의 파티기회이고 설추석의 차례는 집안이 모이는 가장 명분있는 날이다.더욱이 혼례도 상례도 밖에서 지내게 된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는 이 기회가 친척의 얼굴을 익히고 아이들에게 「집안」구성원을 알리는 유일한 기회다.양대 기제를 모시는 우리집은 알 수만 있으면 제사를 양력으로 지낸다.양력생활을 하다가 음력날짜를 기억못해 본의아니게 불효하는 젊은이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무학이셨던 내 친정어머니께서는 생전에 커피를 좋아하셨고 초콜릿을 좋아하셨다.그래서 그분 제사상에는 커피와 초콜릿도 진설된다.그리고 그분 제사도 양력날짜로 모신다.「장화홍련뎐」같은 딱지본 이야기책보다는 이광수의 「흙」이나 「유정」「무정」을 젊어서부터 탐독하셨고 노년에는 신문연재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읽으시던 분이므로 이런 제사에 그분은 불만이 없으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명절문화를 우리는 매우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그러나 그러기 위해 양력이 합당하지 않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그렇다고 음력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맞설 생각도 없다.그러나 음력 지내는 사람이 대다수니까 아예 양력설은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양력 정월 초하루가 공휴일에서 취소된다 하더라도 지구촌이 함께 지내는 양력설에 우리전통을 복합시켜 지내는 우리식의 「설쇠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그것이 세계화와도 합당하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으므로.
  • 투루판분지 고창고성(서역 문화기행:5)

    ◎서한군이 지은 토성… 내·외성 2중구조/성복판에 망루… 인도식 원형불탑 남아/서쪽 사막지대엔 고분 5백여기… 고대문서·미술품 등 유물 20년간 1만여점 출토 아테네가 로마의 폐허에 들어서면 보이느니 돌기둥에 돌계단이지만 서역의 폐허에 들어서면 모두가 흙의 덩어리요 흙의 동굴이다°그 황색의 폐허는 중국의 감숙·섬서는 물론 산서·하북·하남·산동 등 황하가 흐르는 그 언저리였다. 걸핏하면 토성의 자드락길이요,때로는 치열하게 활싸움을 벌였던 보루의 주춧돌이었다.그런 흔적들을 보면 흙은 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러한 폐허가 결코 앙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된다.투루판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두군데의 고성이 있다.하나는 서쪽 13㎞지점에 있는 교하고성이요,다른 하나는 동쪽 40㎞ 지벙에 있는 고창고성이다. 고창고성은 바로 베제크리크천불동이 있는 무르룩계곡을 빠져나와 승금구에서 약간 남쪽의 언덕위,그러니까 멀리 화염산이 병풍처럼 북쪽을 가린 나직한 오아시스에 세워진 성곽이다. 교하고성과 비슷한 역사배경을 지닌 고창고성은 교하보다 1세기,차사왕국에 주둔한 서한둔전부대가 축조한 것이다. 그곳은 적어도 한 두개의 사단 병력이 훈련을 받다가 세워총을 하고 휴식중인 연병장을 방불케 했다.5㎞의 둘레에 2백20만㎡의 넓이,바로 그러한 광장인데 그 유적들은 모두 올망종망한 높이로 유적과 유적사이의 길조차 좁고 꼬불꼬불 하였다.그것은 교하의 토성이 흙 자체의 판축인데 반해 고창의 것은 흙벽돌의 축조라서 무너지기로 말하면 와르르 붕괴되었기게 그렇다. ○외성엔 4개문 설치 그들 설계의 구도도 달랐다.교하의 그것이 남북의 중앙대로를 중심한 동서의 정연한 분포임에 비추어 고창의 그것은 불규칙한 정방형의 외성이 있고 한 복판에 내성이 있는 이중구도로서 그 내성의 주위로 사원이나 민가들,다시 변두리로 무덤들이 산발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보였다. 온전한 외성은 12m의 높이며,그 두께도 넉넉했다.그동안 출토된 기록에 따르면 외성 4면에 「현덕문,「금복문」,「금장문」,「건양문」,「무성문」등의 성문이 가설되었다고 한다.과연 외성의 풍모는 당당했다.내성 어디쯤으로 보이는 복판에 국기대나 첨성대인양 높다란 축대가 솟았는데 거기에 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으로 보아 당시 둔병을 총지휘하던 교위의 청사나 말대쯤으로 쓰였을지 모른다.보다 분명한 유적은 동남쪽과 서남쪽에 남은 불사의 폐허였다.동남쪽의 그것이 인도식 불탑의 원형층탑이라면 서남쪽의 그것은 사각의 튼튼한 기초위에 원형의 건물이다.그 언저리로 널따란 마당에 우두커니 선 필자에게 적어도 천년전 서로 다른 피부에 서로 다른 언어와 복장들이 오락가락하면서 희희낙락했을 그 소리들이 들리는 듯 했다. 명나라 초엽의 명시인이었던 진성의 「화주성」이란 시가 바로 이 자리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창구치월씨서, 성곽숙조시사희. 유적상존당제도, 거인쟁도한관의. 범궁영락류금상, 신도류량와석비. 정마불지풍토이, 격화유자인시」. (고창은 옛날 월씨의 도성 너녘, 성곽은 썰렁한채 저자도 한산해. 폐헤엔 아직도당나라 법도, 주민들은 다투어 한관을 쳐다보네. 절터엔 스산하게 공부처가 뒹굴고, 신도엔 황량스레 돌비석이누웠네. 전마는 달라진 풍토에 영문 모른채, 꽃 그늘에 사람보고 소리지르네) ○현장법사도 머물러 지금부터 6백년전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때만해도 성곽이나 사원은 무너졌어도 유물은 즐비한데다 아직 주민들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고창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고창성을 다스렸던 회골의 마지막 고창국왕인 훠츠할(화적합이)이 몽골군의 위공에 못견디어 전사하고 그 전화로 소실되던 1275년까지 고창은 1천4백년동안 때로는 군현의 치소로,때로는 와국의 서울로 그 나름의 번영과 웨세를 부렸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는 서한 둔병들의 주둔지로,기원 327년엔 전향(전량)의 군현으로,기원 460년엔 원주의 함·장·마·국씨 등이 서로 번갈아 「고창국왕」을 1백40년이나 누리다가 640년에는 당나라의 군현으로,840년에는 회골족이 와국을 세워 가장 강력한 왕권을 부리다가 훠츠할에 다다른 것이다. 무덥고 낮은 투루판에도 많은 와국이 엎치락 뒤치락 흥망을 반복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흥성했던 와국으로 두말할 것 없이 서로 쿠처(고차),동으로 하미(합밀),북으로 천산의 북록 창지(창길)까지 넓은 영토를 4백년이 넘게 떵떵거렸던 회골의 「고창왕국」을,그리고 가장 흥성했던 군형시기로 한·당(한·당)두 조대를 들수 있겠다.그것은 고창이란 지명이 곧 한나라때 대완국을 원정하던 이광장군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지세가 높고 넓은데다 백성이 창성하다(지세고창 인서창성)는 뜻으로 미뤄보아 그렇고,당나라 때인 630년 2월경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던중 고창왕 국씨의 요청으로 한달이나 머물면서 불법을 강론했다는 데서도 문물이 성행했음을 알게한다. 당나라와 당나라 이전의 문물이 출토되어 「투루판문서」로 불리는 지하박물관은 바로 고창고성의 서단 하라허줘촌 사막에 있었다.이름하여 「아스타나(아사탑나)고분」.50년대말에서 70년대까지 계속된 발굴탐사에서 드러난 5백여 고분은 10여㎦의 넓은 모랫벌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흡사 우리나라 한강변 고수부지에 쌓아 둔 동그란 모래 둥지 같았다.도시 이토록 삭막한 사막에 무덤은 웬 일이며 더구나 거기서 2천7백여점의 고대문서를 포함한 만여점의 미술품·농기구·생활구등이 쏟아져 나왔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부부합장 묘 필자가 답사한 세걔의 무던은 그 구조가 대체로 비슷했는데 지상에서 비스듬히 팬 1·20m의 묘도를 따라 묘실에 들어가면 안창에는 묘주의 시신,그 중간에는 두개 혹은 네개의 이실이 사랑방처럼 양쪽에 설시되어 있었다.삼면의 묘벽에 벽화를 두르고 누운 시신은 대체로 부부,그것도 미라로 누웠고 그 미라 가운데로 장난감같은 헌금함,그 뒤로 삶인지 죽음인지 알수 없도록 희미한 불빛에 묘실을 지키는 소년이 졸고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소년은 웬걸『시원해서 좋다』며 빙그시 웃었다.하긴 서역 사막에서 미라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건조한 기후와 토질 때문에 시신도 얼른 수분을 뺏긴 채 건시로 남는다 했다. 진나라에서 당나라때까지 고창 주민들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무덤에는 뜻밖에 북량의 장군으로부터 당나라의 도호같은 고관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부부합장,혹은 가족합장이었고,관목보다는 초석이나 목판같은 간소한절차를 따랐음에도 그 속에 벽화와 문물을 시설허가너 부장한 것이 특기할만 했다. 특히 필자가 보았던 인물화나 동물화같은 벽화는 진·남북조시기의 사실적이면서 전원적인 생활의 단면이 생동하게 표현되어 있었다.그것들은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살았을 때의 생활이요 윤리였을 것이다. 아스타나고분에서 투루판으로 돌아오는 도중,투루판 동쪽 2㎞지점에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건축물인 「에민탑(액민탑),속칭 소공탑을 답사했는데,1777년 투루판 군왕이었던 에민의 수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수라이만(소래만)이 청대의 이름난 위구르족 건축사 이푸라인(이포랍음)을 시켜 세운 높이 37m 72단 사다리의 이슬람식 탑이다. 커다란 강당크기의 예배당 입구에 우뚝 솟은 탑신에는 삼각·물결·꽃잎·마늘덩굴등 열몇가지 무늬가 적갈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얼핏 단조로운듯 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마주보고 있다.이 탑은 그 탑기에 새긴 비문이 한문과 위구르문자인 것처럼 또 한가지 성공적인 동서 융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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