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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동·서도 매립 유인도 건설 하자”(조약돌)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독도의 동·서도 사이를 매립해 유인도로 만들자는 이색 주장이 제기돼 눈길. 부산의 극일운동시민연합(의장 황백현)은 13일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본의 망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독도를 매립해 공간을 넓힌 뒤 사람이 1년 내내 거주하여야 한다고 주장. 황의장은 『한국인이 상주하고 있는 섬에 대해서는 일본측도 더이상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상징적 의미로 전국 각지의 흙과 돌을 옮겨 독도의 동·서도를 매립하자』고 제안.
  • 북경의 최대공원 「이화원」… 새 관광명소로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 장관/공원넓이 87만평 규모… 시내서 16㎞ 거리/곳곳 서태후… 주변에 고건축물 즐비 8백년전 중국의 금나라는 민둥산에 흐르는 강조차없는 척박한 땅 북경에 여름 별장을 짓기 위한 엄청난 역사를 시작했다.수만명을 동원해 땅을 파고 물을 채워 곤명호라 이름붙인 거대한 인공호수를 조성했다.파낸 흙으로는 만수산이라는 인공산까지 만들었다.그곳에 호화창연한 누각 전당 문 다리 등의 건축물을 줄지어 세우고 향연을 즐겼다. 중국 북경시내 북서부에 자리한 북경 최대의 공원 「이화원」의 유래다. 이곳은 청나라 건륭제때 대보수됐고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프연합군에 의해 파괴됐다가 청조말기 절대권력을 누린 서태후(1835∼1908)가 은 3천만냥의 거액의 해군경비를 유용해 재건,현재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이는 결국 막대한 재정 압박으로 청조의 멸망을 재촉했으나 서태후는 이곳에 매료돼 1년내내 머물며 내정과 외교를 지휘했다. 현재 2백90만㎡ 규모로 인공호수가 공원의 4분의3을 차지하는 북경 시민들의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북경의 만리장성 자금성 명13왕릉 등 신비롭고 놀라운 유적들이 그렇듯이 이화원도 당시 백성의 고혈로 이룩된 것이기는 하나 오늘날 후세들에게 선조가 남긴 자랑거리가 됐다. 이화원은 짧은 일정에 쫓긴 관광객들이 지나쳐 버리기 일쑤인 곳이지만 북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이다. 시내에서 16㎞쯤 떨어진 이곳 초입에는 초라하고 색바랜 대문옆 매표소에 내국인 2원(한화 2백원),외국인 35원(3천5백원)이라 적힌 글이 먼저 눈에 띈다.중국 대부분지역이 외국인에게는 내국인 요금의 2배에서 수십배까지 차등요금을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입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돌면 거대한 호수가 드러난다.여름철에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기지만 요즘은 호수가 꽁꽁얼어 내·외국인들이 스케이트와 썰매타기에 한창이다. 동궁내를 들어서면 곧바로 보이는 인수전은 서태후가 정치를 하던 곳이고 그 안쪽 만수산을 배경으로 볼 수 있는 낙수당은 주거가 있던 곳이다. 만수산 정상에 오르면 넓게 펼쳐진 곤명호 서호 남호 등이화원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어 올라가보는 것이 좋다. 서태후가 뱃놀이를 즐기던 나루터 입구에서 지붕형의 유람선으로 건너편 언덕으로 간다.자세히 살피다보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다.개방시간은 상오 7시부터 하오 5시까지이다.
  • 정치범 11개 수용소에 20만명 복역/북한 탈출 3인 일문일답

    ◎“96년안에 무력통일 된다”… 군사훈련 강화/작년 10월 노란부대 쌀 배급… “남한산” 수군 ­귀순동기는. ▲이순옥=나는 함북 온성군 상업관리소 간부물자공급소 책임자였고 남편 최정학(56)은 온성남자고등중학교 교장이었다.85년 10월쯤 옷감구입을 위해 중국에 다녀온뒤 온성군 안전부장 김병준이 아들 혼수용 양복을 상납하라고 요구,불응하자 「국가재산 탐오죄」라는 누명을 씌워 13년형을 받고 평남 개천교화소에 수감됐다.6년간 갖은 고초를 겪다 출소한 뒤 충성으로 섬겨온 중앙당에 억울함을 호소했더니 오히려 재수감하겠다고 협박하고 남편과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아들마저 모두 쫓겨나 그 동안의 믿음이 사라져 죽더라도 외아들인 동철이만은 자유롭고 보람된 곳에서 살게 하고 싶어 탈출을 결심했다. ▲최동철=평소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아 몰래 들은 남한방송을 통해 경제가 발전되고 자유로운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됐으며 김일성대학의 학생들 수준이 너무 형편없어 실망을 하고 있던중 어머니의 누명으로 강제 퇴학당했다. ­아편 재배실태는. ▲최동철=91년부터 담배농장의 부업토지의 아편재배 현장에서 근무했다.북한은 「도라지(양귀비)를 심어 생활필수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아편농장을 운영,외화벌이에 나섰다.안전원들의 철저한 감시속에 대규모로 재배되며 주로 홍콩·일본 등지에 밀반출되거나 중국교포들과 생필품을 직접 바꾸는 밀매가 성행하고 있다고 들었으며 재배중인 아편을 몰래 뜯어 당간부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몇몇이 모여 몰래 피우기도 한다.최근에는 중독자도 크게 늘었다고 들었다. ­당간부의 부패실태는 어떤가. ▲이순옥·최동철=어려운 식량사정에도 불구하고 당간부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어 최근 빈부차가 더욱 극심해 졌다.고위간부인 1호간부는 한달에 육류4㎏·기름 3㎏·담배 30갑이 지급된다. 몰수당한 우리재산이 중앙당에 귀속되지 않고 컬러TV는 형을 내린 재판장이,냉장고는 검사가,자전거는 도안전원이,외투는 감찰간부가 중간에서 차지한 것에서 부패의 실상을 알았다.「당일꾼은 당당하게먹고,안전원은 안전하게 먹고,보위원은 보이지 않게 먹는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정치범의 숫자 등 실태는. ▲최동철=함남·북지역에만 11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었다.한 관리소에 2만여명이 수용된 것으로 미루어 20여만명이 있는 것 같았다. ­북한 교도소내의 인권실태는. ▲이순옥=인간 이하의 처참한 생활이다.개천 여자교화소의 경우,수용능력은 6백명정도이나 80년대 중반이후 사회범죄가 크게 늘어나 1천8백∼2천여명까지 수용하고 있었다.나는 수용소에서의 고문으로 이 4개가 부러졌고 수용생활 중 입이 돌아가고 허리와 다리 통증이 심해 거동도 할 수 없었으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북한군의 갱도적응훈련이란. ▲최광혁=지난해 12월 두차례 실시했다.많은 용도의 갱도 가운데 남한으로 통하는 것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1개 군단의 2개 연대가 합동으로 갱도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고 전쟁준비와 관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핵·화학무기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최광혁=핵무기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남한에 핵무기가 많으니 우리도 핵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특히 간부들은 지구를 깨뜨릴 수 있는 무기가 있으니 신심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북한의 식량난은. ▲최광혁=지난해 10·11월 평소와는 달리 노란부대의 쌀이 1차분 들어와 남한쌀이란 수군거림이 있었다.휴가를 가도 직접 얼굴을 보이기 전에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이대로 가면 곧 폭동 등 변화가 예상되는 분위기다. ­북한군의 사기,특히 김정일 체제이후의 상황은. ▲최광혁=최근 식량난과 보급품부족으로 하사관들의 사기가 낮다.하루 식량배급량이 8백g이지만 수송도중 간부들의 편취로 6백50g정도밖에 안되고 부식도 시래기국·미역국·염장무 3쪽정도가 고작이다. 지휘관들은 『96년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이제는 무력통일이다』라며 훈련을 강화하고 작년 11월에는 『조국통일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무기관리를 잘하라』는 말도 들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의 입학자격과 생활상은. ▲최동철=출신성분이 좋은 중앙당 간부의 자식들은 공부를 잘 못해도 입학하고 학교생활에 별 문제가 없다.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실력은 너무 낮다.27살에 입학하는 제대군인의 경우 수학과 영어 기초가 모자라 예비반을 만들어 가르친다.정치사상에 대한 교육이 많고 모내기와 건설사업,행사에 동원되는 일이 너무 많아 전공을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다. ◎이순옥씨,북 교화소 실상 폭로/“신생아 태어나면 즉시 살해·암장”/우는 여죄수는 7일간 독방에 수감/물고문에 화로 고문… 억지 자백 강요/수형자 거의 영양실조… 흙까지 먹어 25일 귀순자 3인의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정치범과 일반죄수들은 인간 이하의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순옥씨는 우리로 치면 구치소인 함북 청진 농포집결소와 교도소인 평남 개천 사회안전부 제1교화소에서 자신이 6년 2개월동안 겪은 참상을 폭로했다. 이씨는 지난 86년 10월 농포집결소에 수감돼 1년여동안 지내면서 벽돌을 굽는 뜨거운 노속에 갇혀 극심한 호흡곤란 속에 화상을 입는 등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 또 ▲담요를 온 몸에 씌우고 집단구타한 뒤 실신하면 짐승처럼 질질 끌고가서 물을 뿌리는 고문 ▲형틀 의자에 묶어놓고 채찍을 휘두르는 고문 ▲감옥 창살에 양손·발을 묶고 고무호스로 손가락을 때리며 발로 차고 몽둥이로 구타하는 고문이 되풀이됐다. 그래도 말을 안듣자 주전자로 물을 강제로 먹인 뒤 실신하면 배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밟아서 먹은 물을 토하게 하고 의식이 회복되면 재차 반복하기도 했다. 3백㎏짜리 벽돌을 4명이 들것으로 나르게 시키고 제대로 못 움직이면 무차별 구타하거나 잠을 안재우며 공포·억압적 분위기에서 억지 자백을 강요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혹한에 알몸으로 1∼2시간 무릎을 꿇도록 해 동상에 걸렸고 남자들 앞에서 알몸이 된 채 채찍질을 당할 때는 여자로서의 수치심 때문에 차라리 죽고싶었다고도 말했다. 하루 3백g의 소금국으로 연명하거나 「감식처분」이라는 명목으로 2∼3일 동안 굶기는 일도 흔했다. 87년 11월 개천교화소로 옮겨져 겪은 일은 더 참혹했다. 이 교화소에서는 임신 7∼8개월이 된 여죄수는 위생원이 주사를 놓아 사산시키고 아이가 살아 태어나면 목졸라 죽이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시체는 인근 야산에 암매장됐으며 이 과정에서 임산부가 울면 「당에 대한 반감」이라며 7일동안 독방에 수감됐다. 생활고가 가중되면서 특히 가정주부 수감자들이 급격히 늘어 20명을 수용하는 한 감방에 70∼80명씩 수용돼 겨울에는 한 이불을 10여명씩 덮고 「다른 사람의 발을 안고」 자야 했다.작업복 한 벌,죄수복 한 벌로 10년정도를 버텨야해 옷감이 절어 살이 베어질 정도였다. 작업에 필요하거나 질문에 대답하는 것 말고는 말을 할 수 없고 화장실 용무도 단체로 감시하에 봐야했다. 이러한 참혹함 때문에 대부분 척추뼈가 굽어 곱사등이가 되고 다리가 「문어처럼」 휘어지는 등 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일부 수용자는 극심한 영양실조 때문에 외부작업을 할 때는 진흙을 파먹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북한에서는 수용소를 「땅위의 지옥」이라고 부른다』고 전하고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 지도업체대표 초고압펌프 개발 화제/박세준우성실업대표

    ◎흙에서 물 분리… 폐수처리에 큰 효과 지도제작 전문 중소기업인이 초고압 펌프를 만들어 화제다. 지도제작 업체인 우성실업 대표 박세준씨(51).박씨는 93년 2월부터 2년간의 연구개발끝에 지난해 고압펌프를 개발,상품화했다.상품명은 자신의 이름을 딴 「세준고압펌프」.개발비로 들어간 2억원은 본업인 지도판매 대금으로 충당했다. 박씨가 고압펌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경기도 여주에서 제토공장을 경영하는 동생의 얘기를 듣고서다.도자기나 타일용 분말흙을 만들때 흙에서 물을 분리하기 위해 고압펌프가 사용되지만 피스톤식 펌프등은 쉽게 고장나고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말에 개발에 착수했다고 한다.16건의 발명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발명가이기도 한 박씨가 개발한 고압펌프는 컴프레서로 압축한 공기를 원통형 피스톤에 가득찬 물에 균일하게 분산시켜 높은 압출력을 얻는 원리를 이용했다. 외장재를 스테인리스 강판으로 사용한데다 배출구의 구경을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 10∼50㎏/㎠ 범위의 저·중고·초고압의 출력을 낼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박씨는 설명한다.따라서 자갈 등 이물질이 함유된 고온,강산성 오·폐수처리에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현재 대구 폐수처리업체와 서산의 도예공장 등에 20여대가 팔렸다.대당 가격은 1천2백만원. 박씨는 앞으로 물로 바위를 자를 수 있을 만큼 2백㎏/㎠까지 높은 출력의 고압펌프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02)534­1114.
  • 실향민 배분 북한산 흙/언론공개로 반입 무산

    【인천=김학준기자】 실향민에게 나눠주기 위해 들여오려던 북한 흙의 반입이 무산됐다. 인천지방 해운항만청과 (주)효원물산(대표 김영일)은 북한 9개도의 2백여곳에서 채취한 흙 3백t을 싣고 인천항으로 입항할 예정이던 싱가포르 선적 2천6백t급 이알코호가 지난 1일 남포항을 출발,3일 상오 인천항 외항에 도착했으나 흙은 싣고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항청 관계자는 『북한이 흙을 비공개로 제공하려다 한국 언론에 공개되자 선적했던 흙을 내리고 계획을 백지화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쥐·부·다산·현명의 상징/쥐띠해…전문가에 들어본 쥐에 얽힌이야기

    ◎십이지 맨앞 동물…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정월 쥐 피해 막고 풍년 기원하는 쥐불놀이 병자년 새해는 쥐가 주인인 쥐띠의 해이다.쥐는 십이지의 맨앞에 있는 동물로 부와 다산,그리고 현명함을 상징한다.그러나 쥐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해를 많이 끼치는 동물이기도 하다. 쥐는 두더지의 「둔」에 어원을 두고「줄」로 구개음화되어 현재의 「쥐」로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쥐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삼국유사」의 조로서,비처왕이 거문고에 활을 쏜 후 안을 확인하니 사통하던 중과 궁주가 있었다.이때에 언질을 준 것이 쥐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쥐날은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쥐는 우리 민족에게 다양한 상징을 부여받아 왔다.먼저 쥐는 생태적으로 한달도 안되는 임신기간,한번에 7∼9마리를 낳는 다산성 등 번식력이 매우 뛰어나다.이러한 점은 우리 민족에게 쥐가 다산의 상징적인 동물로 이해하도록 작용하였다. 또한 쥐는 먹이를 모으는 습성을 지니고 있어 부를 가져다주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우리의속신 중에서 「쥐가 집안의 흙을 파서 쌓으면 부자가 된다」거나,「쥐가 발을 물었을 때 천석 하고 외치면 부자가 된다」등의 내용은 쥐가 재물을 가져다주는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함경도의 창세무가에서는 쥐가 현명한 동물로 등장한다.즉 미륵님이 여러 동물들에게 물과 불의 근원을 물었을 때 쥐만이 명쾌하게 대답을 하였다는 것이다.이 보상으로 미륵님은 세상의 뒤주를 쥐에게 주었다고 한다.그러나 이 현명함도 도가 넘칠 경우 약삭빠르다는 식으로 쥐를 풍자하기도 한다. 쥐가 사고를 예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예도 있는데,배의 안전운항과 풍어를 가져다 준다는 배서낭의 경우 충남지방에서는 쥐소리를 낸다고 한다.즉 풍랑이 오거나 배에 이상한 일이 생길 경우 찍찍 하는 소리로 그것을 알린다고 하는 것이다. 쥐와의 관련민속으로는 정월 첫 쥐날(자일)과 쥐불놀이를 들 수 있다.정월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쥐날에는 일이나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 그만큼 쥐가 곡식을 축내고,옷감들도 더 많이 쏠아놓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날 밤중에는 논둑 등에 불을 놓는 쥐불놀이를 한다.이것은 농작물에 병충해와 쥐로부터의 피해를 막고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놀이의 하나이다.최근까지도 정월 보름날 밤의 횃불놀이와 겸해서 불을 놓기도 하였다. 또한 한밤중인 자시에 맞춰 방아를 찧으면 쥐들이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이 많이 찧었다고 한다.방아찧을 곡식이 없으면 빈방아로 찧어 소리를 낸다. 민담에는 쥐가 둔갑을 하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매일 아침에 밥을 풀 때마다 쥐에게 먼저 밥을 주었더니 둔갑하여 진짜주인을 쫓아냈지만,고양이를 이용해서 그 위기를 극복했다는 내용이다.속신에도 쥐가 사람의 손톱이나 발톱을 먹으면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하여 이를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이외에도 쥐의 생태적인 특징을 반영하여 「고양이 앞에 쥐」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등의 속담도 많은데,이는 쥐의 왜소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쥐는 우리에게 긍정과 부정을 공유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쥐가 부와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하는 긍정적인 상징을 더욱 선호한다.새해엔 쥐가 샘이 나서 발을 물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여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한해가 되기 바란다.
  • 태백산 목장주변에 맹수 발자국/“호랑이 비슷” 주민이 신고

    ◎어른 주먹 크기… 3마리 이상 추정/30㎏ 염소 물고 1.2m 철조망 넘어/「앞 발가락 4개­뒤꿈치 하나」 고양이과 강원도 태백산의 흑염소 목장 주변에서 맹수들의 발자국이 발견됐다.흑염소도 3마리가 잡혀갔다. 태백시 화전동 김부래(54)씨는 27일 아침 태백시 동점동 태백산 흑염소목장 주변에서 3마리 이상인 맹수들의 선명한 발자국을 눈 위에서 발견했다. 첫번째 우리 주변에 찍힌 발자국들은 앞 발가락 4개와 뒤꿈치 하나의 형태인 고양이과 동물(호랑이나 표범)의 것으로 추정됐다. 맹수들은 우리 속에서 흑염소 한마리씩을 물고 높이 1.2m의 철조망을 넘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간 듯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두마리는 사군다리 연화광업소 광미침전지 남쪽 기슭을 따라 1.5㎞ 정도 함께 가다가,한마리는 연화봉으로 올라갔고 다른 한마리는 침전지 앞에서 북쪽으로 틀어 수한촌,속칭 무랭이골로 내려갔다.나머지 한마리는 목장 앞 금천골 860봉으로 올라갔다. 광미침전지 위에는 이들이 흑염소를 끌고 가며 남긴 발자국과 흔적이 눈과 흙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발자국의 크기도 어른 주먹만한 것에서 훨씬 작은 것까지 있어 한 무리로 추정됐다.보폭은 1m로 일자걸음이었다. 김씨는 『30㎏이 넘는 흑염소를 문 채 울타리를 넘고,가파른 연화봉을 올라갈 수 있는 짐승은 호랑이나 표범밖에 없으며 그 발자국의 생김새도 호랑이 등 분명히 고양이과 동물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한줌의 북한흙/반영환 논설고문(외언내언)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한 줌의 고향땅 흙은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고향의 풀 나무,바람과 햇볕,그리고 이웃들의 푸근한 얘기들을 담고 있다.고향이 가지 못할 곳이라면 그 흙이 전하는 정한은 더욱 간절할 것이다.조국을 떠난 사람에게는 고국의 흙이 그대로 고국의 상징이 된다.외국에서 오래 살던 사람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는다.고향에 묻힌다는 건 곧 어머니의 품에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흙의 상징성은 본향이다.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 않았는가.「풍기는 흙 냄새에 귀 기울이면/뉘우침의 눈물에서 꽃이 피누나/마지막 돌아갈 이 한줌 흙을/스며서 흐르는 산골 물소리」(조지훈의 「흙을 만지며」).1930년대 식민지 조선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광수의 소설 「흙」은 살여울이라는 농촌을 지켜나가는 한 젊은이의 삶을 담고 있다.이 소설은 학생들의 농촌운동의 교본이 된다. 북한땅의 흙 3백여t이 배에 실려 처음으로 수입된다.9개도 2백여 지역에서 채취된 북한 흙은 이북5도민회를 통해 실향민에게 나눠줄 것이라고 한다.신청자는 이미 6천여명.고향의 흙냄새를 맡아 보려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실향의 설움을 살다 돌아간 부모님 묘소에 바치겠다는 것.이 통한의 아픔을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인 우리들 외에 누가 짐작인들 할수 있겠는가.고향의 흙을 움켜쥐고 망향에 눈물지을 실향민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북녘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3일의 약속」만으로 월남한 1세대들은 이제 고령이 되었다.생전의 귀향에 조바심하는 그들에게 북한은 내왕은 고사하고 편지왕래마저 굳게 거부하고 있다.실향민들에게 한 줌의 고향흙은 고향의 부활이며 실체이다. 연전에 대전 엑스포때 백두산 천지물을 길어다 천지 모형에 채우고 한라산 백록담 물도 부어 합수시킨 일이 있다.통일을 고대하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의식이었다.북에서 온 한봉지의 흙이 실향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래주었으면.
  • 작가 박경리(이세기의 인물탐구:88)

    ◎삶과 문학에 당당히 맞선 “대지의 어머니”/암수술·사위구속 시련속 25년만에 「토지」 완간/인기영합 두려워 80년 원주 정착,은둔생활/「일본론」 집필 구상… 체험 바탕의 문학강의 큰 인기 「글을 쓸 때는 살아 있다/바느질할 때 살아 있다/풀을 뽑고 씨앗뿌릴 때/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서쪽에서/빛살이 들어오는 주방/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나는 내가 죽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88년 「산더미 같은 「토지」에 파묻혀」 다른 잡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 작가 박경리는 자신을 추스르고 위로받기 위해 시집 「못떠나는 배」를 낸 적이 있다. 그때까지 「토지」3부가 「열가닥의 씨올로 짠 피륙」이라면 4부의 무대는 「인간이 소모품으로 파괴되고 영혼과 육체가 참살되는 가공할 전쟁의 광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나락같이 깊은 내용과 엄청난 양감」으로 인해 어디서부터 소설을 허물어나가야 할지 망연자실하던 시기였다.그만큼 「토지」는 그를 비웃는 태산이었으나 내면의 아우성과 전진과 기록의 난무속에서」 그는 스스로 황폐해가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천형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사마천) 「우리는 시시각각 자신과도 이별하며 살아간다」(매)는 무명 같은 시들을 남기게 되었다. 평소 「작품을 쓰는 일은 자기속에 있는 악과의 싸움」이며 「쓰기 때문에 살아 있고 살아 있으면 써야 한다」는 그는 「진실을 위해 생명을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성서의 잠언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사잊고 창작 몰두 이른바 한번 쓰기 시작하면 세사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몇년이고 칩거하여 창작에만 몰입하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그는 본래 투명하도록 맑고 연약한 인상이지만 「운명적으로 맡겨진 역할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똑바로 해내는 동안 「못 하나 박는 일」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이 되었다.또 어떤 탁류에도 휩쓸리지 않으면서 만약 작은 상처를 입더라도 이를 창조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줄 아는 섬광의 혜지를 타고났다.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외롭고 참담한 현실 앞에 어쩔 수 없이 견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선 끈질긴 여인의 일면이나 풍상에 시달린 마모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신기하다.오히려 작가로서 준열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여 「독자에게 영합하려는 붓을 깊이 경계하고」 약자에게가 아니라 강자를 향해 안으로 도도하고 마음속으로 굽히지 않는다.그런 그를 시인 정현종은 「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독한 사람에 틀림없는 것은 한 작품에 25년간이나 매달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파악된다.남들은 5년에 한번 쓸까말까한 장편을 58년 첫장편 「애가」와 59년 현대문학에 「표류도」 연재를 필두로 「내마음은 호수」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등 어느때는 1년에 두편이상을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처럼 끊임없이 집필하고 있었고 문학지에 발표해온 중단편이 그때마다 평자들의 호평에 오른 것은 작가가 정교하게 책임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토지」1부를 쓸 때는 암으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고 2부때는 사위인 김지하시인의 구속사태로 가족이 온통 고통을 겪으면서 그의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던 외손자 원보(군입대중)를 등에 업고 구치소 면회를 다니던 정릉시절이 눈에 선연하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그러나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거나 도망치지 않고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삶과 문학에 그는 언제나 정면대결로 마주서 있다.그리고 구약의 욥이 가산도 자식도 다 잃고 악창에 시달려 환부에 흐르는 고름을 사금파리로 긁어내면서도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고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내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면서 악마의 시련을 신앙으로 극복한 의인의 발아래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싶어했다.이 자세는 고통과 의지의 절대세계라고 할만한 작가의 구도적 혈흔이 선명히 와닿는 육성으로 그의 문학을 논할 때마다 인용되어지는명문이다. 그는 사람이 행불행을 수월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때론 노여움을,때론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것이 비겁」하기 때문이다.또한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그렇게 가치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것과도 나와는 별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외면해버린다. ○7백여평에 농사 지어 그의 주장은 작가의 선민의식을 시속기로 천시하여 「작가는 철저한 에고이스트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그래서 「토지」3부를 끝내고 「인기라는 물결로부터 자기가 썩고 있는 일에 빗장을 지르기 위해」 80년 아무런 연고지도 아닌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정릉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흙을 주무르고 나무를 가꾸고 온갖 새와 동물을 거두어 그의 7백여평의 드넓은 뜨락을 「억조창생」이 머무는 생명의 근원지로 만들어나갔다.그의 생명에 대한 겸손은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나 배추 한포기라도 갓난아기를 안듯이 정성껏 보듬고 나무를 꺾으면 나무에 깃든 생명이 피를 흘리며 슬퍼한다는 것을아는 심심상인의 경지다.철이 되면 고추를 따서 햇볕에 말리고 날씨가 궂을 듯하면 다시 방에다 군불을 때어 바짝 마른 고추를 하나하나 헝겁으로 닦아내는 그의 정성은 한시도 쉬지 않는 또 다른 창작의 일면인 것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겉보기엔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는 것도 같고 인고를 타고난 것이나 아닌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의 노동은 수확의 기쁨을 아는 농부의 그것일 뿐 그에게 있어 일이란 삶의 확인이자 생명의 신비와 경이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다. 이제 그는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의 자신과의 언약에서 결국 「도전함으로써 비약」했다. 따라서 「토지」는 그의 대명사이자 분신 이전에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찬란한 광망」을 그었으나 「진실은 내 심장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고 그는 심상한 의미를 예감시키고 있다. 「토지」 이후 그는 연세대 강의 외에 일간지에 시론을 쓰고 일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한 일본론을 구상중이다.특히 그의 문학강의는 어디선가 읽은 듯하거나들은 듯하거나 한번 들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생한 체험이 말마다에 살아 있어 대학생 사이에서 명강의로 소문나 있다. ○내년 봄 매지리로 이사 요즘은 단구동일대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는 바람에 그가 살던 집이 헐릴 위기에 있었으나 토지개발공사의 배려로 「박경리기념관」으로 남게 되었고 그는 이른 봄쯤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있는 승업면 매지리로 이사할 예정이다.아마 그때도 그는 농부가 될 것이다. 글 한줄도 쓰지 않으면서 「작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많다.글 한줄도 쓰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쓰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문단의 수많은 모임에서 사교적인 활동만으로 문인을 빙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모든 허세는 작가 박경리 앞에서 무색하다.작품의 질이나 분량에서 이미 남에게 비교될 수 없는 그를 두고 「모든 찬사는 미흡하다」는 문단의 평은 옳다.그의 손은 농사 외에도 바느질과 그림과 나무를 조각하고 돌담을 쌓느라고 거북등처럼 갈라졌으나 그의 미소는 작가의 웃음이며 그의 글은 단한번도독자를 배반하지 않는다.범접할 수 없는 결곡한 기상,금과 옥을 품은 거대한 푸른 산 같은 그 앞에 서면 왠지 작아지고 부끄러워진다는 최일남의 말은 한치의 과장 없이 모든 사람의 공감을 산다. □연보 ▲26년 경남 충무 출생 ▲45년 진주여고 졸업 ▲55년 단편 「계산」 「흑흑백백」 김동리 추천(현대문학)데 뷔 ▲58년부터 장편연재 「애가」(민주신보) 「표류도」(59년 현대문학) 「내마음은 호수」(60년 조선일보) 「노을진 들녘」(경향신문) 「가을에 온 여인」(62년 한국일보) 「파시」(64년 동아일보) 「타인들」(67년 주부생활) 「겨울비」(여성동아),69년부터 대하소설 「토지」1부(현대문학) 연재시작,「죄인들의 숙제」(경향신문) 「창」(70년 조선일보) 「단층」(74년 동아일보) ▲80년 원주시 단구동 정착 ▲84년 한국전후문학 30년 「최대의 문제작」으로 「토지」 선정 ▲86년 북경 연길 백두산여행 ▲90년 프랑스어판 「토지」(파리 벨퐁출판사)출간,중국기행 ▲91년 연세대원주캠퍼스 객원교수 ▲94년 민족사에 길이 남을 걸작 「토지」전5부 16권 완간(도서출판 솔),이대 명예문학박사 「김약국의 딸들」(62년 을유문화사) 「내마음은 호수」(63년 신태양사),단편집 「불신시대」(63년 동민문화사) 「시장과 전장」(64년 현암사),수필집 「거리의 악사」(77년 민음사) 「Q씨에게」(79년 풀빛사) 「박경리문학전집」전34권(79년 지식산업사) 「토지」사전(93년 도서출판 솔),시집 「못떠나는 배」(88년 지식산업사) 「자유」(94년 도서출판 솔)등 60여권 현대문학상(57년) 내성문학상(61년) 한국여류문학상(65년) 월탄문학상(72년) 인촌문학상(90년)
  • 도시가스폭발 7명 사상/부산/가스관 누출 여부 시험중 발생

    ◎차량 20여대 전복… 유리창 수백장 파손 【부산=이기철 기자】 13일 하오 3시10분쯤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1동 로얄프라자 볼링장앞 도시가스관 매설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가스를 운송하던 김영호(35)씨가 숨지고 현장소장 박동식씨(41),인부 노두문씨(57)와 행인 김수진씨(21·여) 등 7명이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박씨 등 4명은 위독하다. 또 길옆에 서 있던 트럭과 지나가던 택시 등 차량 5대와 오토바이 2대가 크게 부서지고 20대는 뒤집어졌으며 길이 70여m가량의 아스팔트도로도 파손됐다. 반경 3백m이내의 건물유리창 수백장도 깨졌다.현장에는 깊이 3m·지름 5m가량이 파였으며 흙 등 파편이 반경 50m까지 흩어져 마치 폭격을 당한 모습이었다. 사고는 부산도시가스(주)로부터 하청을 받은 부산도시가스개발(주)이 직경 50㎜짜리 가스관을 설치한뒤 내압 및 이음새의 기밀 시험을 하기 위해 길이 2백4m의 관 양쪽을 막고 질소가스를 넣던중 일어났다.
  • 우솔레 시비르스코예 소금요양원(시베리아 대탐방:54)

    ◎지하 암반서 퍼올린 소금물로 질병 치료/1ℓ에 염분 45g·유황 등 천연성분 45종/진흙에 섞어 몸에 발라… 소아마비 등 특효/한해 1만명 치료가능… 노인·전상자들엔 무료 시베리아 중부 이르쿠츠크에서 앙가라강을 따라 1백㎞쯤 가면 우솔레 시비르스코예란 도시가 나타난다. 취재진은 이 도시가 암염생산으로 유명하다는 얘기를 듣고 차를 대절해 이곳에 도착했다.이 암염을 응용해 갖가지 질병을 고친다는 정보는 취재진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곧 도심 한 복판을 조금 벗어나 있는 「사나토리(휴양지라는 뜻)우솔레 시비르스코예」에 도착했다.간판은 휴양지였으나 요양원 같은 곳이었다.이곳 1층에는 5∼13세 정도의 어린 환자들이 흰 가운을 입고 좁은 복도를 메우고 있었다.간혹 나이든 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는 이들은 갖가지 병을 가진 환자였다.소아마비에 걸린 아이에서부터 허리를 쓰지 못하는 아이들,선천적으로 뼈가 무른 아이들도 있었는 데 어른들은 대개 혈압과 류머티즘·부인병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었다. ○소금물요법 죄수가 발견 의사의 진료를 받은 아이들이 어떤 치료를 받는 지 따라가 보았다.이들은 옷을 모두 벗고 칸칸이 마련된 욕탕속으로 각각 뛰어들었다.욕탕에는 이 지역 4백m 땅속에서 퍼올린 소금물이 담겨 있었다.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욕탕물의 온도가 39도정도에 이르도록 온도를 조절했다.이들은 30분동안 욕탕찜질을 하고 난뒤 다음 코스로 향했다.침상 20여개가 양쪽에 놓여져 있었다.탄산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한쪽 모서리에는 검은 빛깔의 진흙덩이를 담은 양동이가 여럿 보였다.이 어린 환자들이 베드에 눕자 간호사들이 이 진흙을 어린아이들의 환부에 발랐다.어떤 아이는 다리쪽에 진흙을 바르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눈에·팔에·전신에 바르는 등 진흙을 바르는 부위가 서로 달랐다.몸에 문제가 되는 부위에 집중적으로 진흙을 바른다는 것이 간호사들의 설명이었다. 이들 환자가 사용한 물과 진흙은 바로 병의 치료제였다.「신비의 소금물」 「신비의 흙」으로 불린 이 치료제에 가장 많이 담긴 것은 염화나트륨,그러니까 그냥 소금이었다.다만 소금의 성분이 여느 다른 지역과 좀 틀리다는 얘기다.예를 들면 이곳 지하에서 퍼올린 물에는 1ℓ에 45g정도의 염분이 들어있고 유황 마그네슘 브롬 리튬등 무려 45가지의 천연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치료에 쓰이는 진흙은 이곳에서 약 30㎞ 떨어진 한 늪지대에서 실어온 것이다.치료할 때는 이 진흙과 이곳에서 퍼올린 소금물을 섭씨 70도로 데워 버무린 뒤 사용한다.물론 몸에 바를 때는 섭씨 40도정도로 식힌 뒤 사용한다. 이런 식의 치료기법은 1826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당시 이곳에는 영국의 기술자들이 와 땅속에서 소금을 캐기 위해 파이프를 박고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당시는 소금이 귀했으므로 정부는 반정부활동가들인 데카브리스트를 포함,죄수들을 이곳 시베리아로 차출해 소금공장에서 일하도록 했다.지하 깊숙이 작업하면서 죄수들은 갖가지 질병에 걸렸다.특별히 병원이 따로 없던 이들 죄수는 파상풍 때문에 죽는 일도 많았다.한 죄수가 일하다 다친 상처부위에 이곳의 진흙을 발라보았다.그러자 신비하게도 상처는 빠른 시간에아물었다. ○1회 최대 450명 치료 20년뒤인 1848년.니콜라이 1세때 이곳 시정부는 이곳에 정식 요양원을 세우고 진료에 들어갔다.이것이 「사나토리 우솔레 시비르스코예」의 탄생이다.이곳의 치료용 건물은 190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우솔레 시비르스코예」는 러시아말로 「소금이 있는 시베리아」라는 뜻이다.1회 최대 치료인원은 4백50명,연 1만명을 치료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당시 파상풍이 고쳐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러시아 전역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각종 질병을 가진 환자들이 모여들었다.이들 환자 가운데 가장 치료가 잘되는 질병은 소아마비환자와 파상풍환자라고 요양원측은 말했다.이러한 질병말고도 심지어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인병 환자들도 이따금씩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취재진이 이곳을 방문하기 직전 아이를 갖지 못하는 스웨덴의 30대 여성 두명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이곳 요양원에서 만난 세르게이군(7)의 어머니(38)는 『여름방학을 이용,1년에 18일씩 3년동안 치료끝에 소아마비를 고쳤다』면서세르게이의 다리를 가리켰다.18일동안 입원치료비용은 1백50만루블,우리나라 돈으로 약 30만원정도.연금을 타는 노인이나 전상자들은 무료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요양원 원장인 마리나 자이체바씨(48)는 『2차대전 때 무려 1만3천7백여명의 전상자들이 이곳에서 치료받고 나갔다』면서 『현재 이 요양원을 종합병원으로 바꾸기 위해 폴란드와의 합작을 추진중에 있다』고 말했다. ○의료용 소금 개발 박차 이곳 이웃에 있는 소금콤비나트의 역사는 소금휴양지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3백25년전인 1670년.당시 동쪽으로 진출하던 코자크들은 앙가라강줄기를 따라 이르쿠츠크지역을 가다 시커먼 물이 하늘로 치솟는 광경을 목격했는 데 이 지역이 바로 현재의 소금콤비나트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이곳은 현재 깊이 1천4백m되는 곳에 파이프를 넣어 소금물을 퍼올리는데 1ℓ당 3백g의 소금이 포함돼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순도 99.9%의 이곳 소금은 지난 7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최고 식품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데 현재는 링거 주사약등 의료용 소금을개발하고 있다.이 콤비나트의 산하기관으로 페테르부르크의 소금연구소는 바로 소금을 의약용으로 쓸 수 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레오니드 니콜라예비치 사장은 『소금의 순도가 좋아 몽골·노르웨이등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면서 『연간 13만t의 소금을 생산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1백년간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이곳.서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는 일반 저수조 물탱크청소용과 가축 사료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인다고 그는 말했다.이 콤비나트도 한국으로부터 투자자를 물색하고 있다.현재 있는 시설들이 모두 스탈린 시대의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 “환경교육은 말보다 실천이 중요”/안현자 교사(발언대)

    인류의 미래는 환경보존의 승패에 그 흥망이 달려 있다.이에 발맞추어 학교교육도 환경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다.우리들은 『환경을 지키는 교육은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지만 내가 먼저 실천한다는 자세에는 인색하다.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실천하려는 마음가짐이 소중하다고 본다.환경오염은 인간생활에서 꼭 생겨난다.그래서 인간은 환경오염의 제공자들이다.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환경을 지키고 만들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기도 하니 행복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에따라 환경교육은 자녀교육 처럼 중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95년도 환경주임과 환경소년단 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우리학교 실정에 맞게 쓰레기장 관리를 잘 하려고 매일 출·퇴근시 2회씩 확인하며 잘못된 것은 개선안을 내놓았다.때로는 다른 교실을 방문했을 때 분리수거가 안된 반은 허심탄회하게 충고하고 같이 실천하자고 권유 했다.처음 몇번은 귀찮다고 했지만 지금은 모두 다 한마음이 되어 학교가 깨끗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1회용은 쓰지않고,분리수거 잘 되고,재활용은 깨끗이,판매대금은 환경도서를 구입해 학년별 독후감쓰기 지도를 통하여 실천할수 있는 정신을 심어 주고 있다.이는 학교측의 관심과 지원이 컸다. 또 단체 활동에서는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와 실천하는 모임이 상부상조할 때 어려운 일이 쉽고 알차게 수확됨을 알았고 학교에선 환경소년단의 모범적 실천으로 내집같이 산뜻해진 우리학교를 지켜보면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백마디 말보다 한가지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또 환경에 관계되는 연수활동에 참여하여 정보를 듣고,배우려는 노력과 태도 또한 중요하다.반면에 학교의 경영자는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 지원해주는 것이 후세의 자연사랑(흙·물·공기)의 밑거름이 될것이다.
  • “저공해 첨단산업 키우자”/김세환(발언대)

    이기주의자인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그 인간이 나만의 것이 아니고 만물의 주인인 대자연을 마구잡이로 자기편의에 맞게 훼손해왔다. 그러다 보니 이제 그 응보를 받게 되어 너도 죽고,나도 죽고,만물이 다 죽게 됐다.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은 자연의 다섯가지 은혜를 입고 있다.즉 부모에게서 태어난 은혜,공기로 숨쉬는 은혜,물을 마시는 은혜,햇볕을 쬐는 은혜,흙에서 자란 생물을 먹는 은혜다. 이 은혜를 모두 저버렸으니 초목은 말라 죽고 오존층이 파괴되는등 자연의 변화에 의해 기형아가 탄생하는등 각종 불치의 병이 만연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첫째,아파트를 건축할 때는 자체내의 생활하수와 쓰레기처리시설을 설치해 오물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쓰레기소각로로는 열도 얻어 자체의 생활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천혜의 우리나라 서해안을 이용,조력발전소를 만들어 핵이나 화력의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공해에서 벗어나야 한다.셋째로는 공해중에 제일 심한 자동차매연을 줄이기 위해서 가격이비싸더라도 저유황연료를 사용하도록 해야한다. 마지막으로 공업입국도 중요하지만 중공업이 공해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하루빨리 이들에 대해 공해발생을 강력히 억제해야 한다.그리고 저공해로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산업으로의 방향전환이 시급하다.이런 정책이 시급히 이뤄져야만이 자연은 본래의 모습으로 소생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도 행복하게 될 것이다.
  • 능산리 사리감/창왕의 누이가 바친듯

    ◎부왕 명복 빌어… 백제 절 축조연대 처음 밝혀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지난 93년말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는 세기적 보물이 나온데 이어 백제시대의 절 가운데 처음으로 축조연대를 밝혀주는 화강석 사리감이 발견돼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사리감은 능산리지역을 발굴중인 국립 부여박물관에 의해 출토됐다.사리감은 탑의 가운데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을 깊이 74㎝,세로와 가로 각각 50㎝씩을 파서 만들었고 감실 양쪽에는 「백제창왕십삼계태세재」와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라는 글씨 20자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새겨져 있다.이 글씨는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에 보이는 글씨체와 흡사해 더욱 주목을 끌었다. 이 새김글씨는 능산리에 있던 절을 누가 언제 지어 사리를 봉안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위덕왕으로도 불린 창왕 재위13년 정해년에 형이라는 이름의 공주가 사리를 바친 것으로 돼있다.여기 「형」은 오늘날의 「형」의 고어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 역사연표에는 창왕 13년은 서기 566년이고 정해년은 서기 567년이어서 1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창왕은 신라군과 오늘날 충북 옥천땅인 관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성왕의 아들.그래서 이번에 발견된 절터는 창왕의 누이가 비명에 간 부왕(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새김글씨가 들어간 탑의 가운데 기둥 주춧돌은 1m깊이의 흙 아래서 기울어진 상태로 출토되었다.이같은 파괴를 겪는 과정에서 사리를 담았던 사리구는 없어져 찾지 못했다.그러나 탑 가운데 기둥에 사리감을 별도로 만든 경우는 동아시아 어느지역에서도 지금까지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에 함께 출토된 다른 5백95점의 유물과 함께 백제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됐다.
  • 해인사 대장경 판고 지붕·천정 긴급보수

    문화재관리국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소재 국보제52호인 해인사 대장경판고(수다라장·법보전)에 대한 정밀조사에서 지붕기와의 골 일부가 흘러내리고 건물안팎 천장에 바른 흙이 일부 떨어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19일 긴급보수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 서울 구의동 유적·아차산 보루성 “백제 아닌 고구려 유적”

    ◎서울대 박물관 최종태 연구원 기존 학설에 반론/움집터·출토토기 고구려 양식/몽촌·풍납토성과 마주한 요새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한강유역 고대유적들을 종래의 학설과 다른 각도로 조명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그 대상은 서울 광진구 구의동유적과 이웃 광장동 아차산 보루성인데,종래의 백제유적설을 부정했다.이같은 해석은 서울대박물관 최종택 학예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논문 「한강유역 고구려토기 연구」에서 제기되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유적은 지난 1976 ∼ 77년까지 발굴된 한강 북안의 고대유적.해발 54m의 언덕위에 자리잡았던 이 유적은 택지개발로 지금은 흔적 조차 없다.발굴작업 당시 백제계 고분으로 보고되어 학계가 이를 정설로 굳힌 바 있다.그러나 이 연구는 구의동유적에서 출토된 19개 기종 3백69점의 토기를 검토한 결과 모두가 고구려 계통 토기라는 점을 들어 우선 백제유적이 아니라는 반론을 폈다. 그리고 구의동유적이 고분이라기 보다는 생활유적의 성격이 강한 고구려의 남방 전초기지로 해석했다.그 증거로 항아리,단지,접시,대접,시루 등 토기류 거의가 실생활 용기일 뿐 아니라 둥근 움터 안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들추어냈다.특히 출토유물 중에서 무기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군사들이 생활을 하면서 상주한 유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 구의동유적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건너로 한성시대 백제의 거성으로 알려진 몽촌토성 일대가 조망되는 것도 전초기지에 접근 할 수 있는 이유로 들었다. 이와 더불어 구의동유적이 아차산 산줄기에 흙을 쌓아 만든 진지(보루)들과 곧바로 연결되어 아차산보루성 역시 고구려 요새라는 주장이다.또 아차산 일대 지묘조사에서 구의동 유적에서 나온 것과 같은 고구려 토기가 계속 채집된다는 것이다.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구의동유적에서 처럼 오늘의 서울 강동구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을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도 가려냈다. 이들 유적의 축조시기를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차지하기 이전인 4세기 중엽으로 추정했다. 이 연구는 삼국시대 토기의 그릇 생김새(기형)분석 및 과학적 성분분석을선행하고 나서 이를 근거로 당시 고대유적의 강역을 추적했다는 점에서 학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특히 구의동유적의 경우 출토된 토기 수량을 중심으로 이 요새지유적에 상주한 병력을 10여명 안팎으로 추정해 더욱 주목을 끌었다.
  • 자연 휴식년제 5년째… 「설악」의 두 모습

    ◎등산길 “중병” 휴식구간 “울창”/등산로­인파에 나무뿌리 노출… 곳곳 쓰레기/휴식구간­원시림 복원속 희귀식물 등 회생 5부능선까지 곱게 물들어 만산홍엽의 절정을 이룬 설악산이 수많은 등산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그러나 5년째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고 있는 일부 등산코스는 어느덧 원시림의 자태를 찾아가고 있어 현행 등산로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남한 제1의 명산 설악산의 두 모습을 르포로 구성해본다. 10월 초순의 설악산은 뼈대를 자신만만하게 드러내고 있는 기암괴봉과 절정에 이른 단풍 옷을 껴입은 능선,능선과 능선 사이 고적한 계곡,높고 맑은 하늘이 얽혀 가을 한복판에 접어든 명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러나 내설악·외설악·남설악을 합쳐 3백73㎦에 이르는 설악산을 들여다 보면 군대의 행군같은 등산객들의 무수한 발걸음으로 곳곳이 심한 중병을 앓고 있다. 지난 8일 낮 12시쯤 설악산의 정상인 1천7백8m 대청봉에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인 오색코스 매표소 앞은 원색 차림의 등산객들로 시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이날 설악산을 찾은 6만명 가운데 1만4천여명이 이곳을 통해 대청봉을 올랐다. 예상했던대로 5㎞의 이 구간의 대부분은 등산로라고 하기보다는 잘 닦인 비포장 길 같았고 어떤 곳은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너비가 5m이상 될만큼 훼손돼 있었다. 수많은 발걸음으로 흙이 파여 곳곳에 나무 뿌리가 드러나 있는가 하면 이들 뿌리를 지팡이로 쓰려고 서슴없이 꺾어대는 사람도 있었다. 5부능선까지 내려와 곱게 물든 단풍을 기념품 삼아 꺾기도 하고 계곡에서 음식을 먹어가며 노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친 발길을 쉴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담배꽁초는 물론 사탕이나 초콜릿 봉지,나무젓가락,심지어는 쓰레기 비닐봉지등으로 어수선하기만 했다. 자연을 보존한다는 취지로 지난 91년부터 등산로를 폐쇄하고 5년째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고 있는 대청봉∼권금성간 8㎞ 등산로. 북동쪽으로 난 이 구간 초입은 길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죽이 수북이 덮고 있어 아주 보기 좋았다.만경대로 내려가는 갈림길의 칠성봉∼집선봉∼권금성 구간은 불과 5년의휴식에도 불구하고 원시림의 원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등산로 같으면 손길이 닿아 벌써 따갔음직한 빨간 마가목 열매가 그대로 달려 있었고 한해에 8㎝정도 자란다는 단풍나무도 40㎝남짓 크기로 오솔길 같은 등산로를 덮고 있었다.금강초롱도 사람의 발길에 채이지 않아 보라빛 꽃자태를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었다.길도 몇년째 낙엽이 쌓이고 쌓여 어떤 곳은 길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기고 나는 짐승들의 움직임도 어느곳보다 활기찼다. 나무와 풀은 물론 바위·흙까지도 자연의 휴식이 왜 필요한지를 실감케 하는,세계적 자연보존지구 설악산의 두 모습이었다.
  • 고대 철생산 노적 10기 발굴/충북 진천 석장리서

    충북 진천 석장리 유적에서 3∼4세기경의 고대 철생산공정을 보여주는 대규모 유적이 발굴됐다.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6월9일부터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381일대 7백평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고대 제철로의 흔적인 화덕자리(노적) 10기를 새로 발굴하고 흙으로 만든 쇠도끼,주조용 거푸집(범심)과 쇠도끼 실물,달구어낸 쇠부스러기(단조박편)등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발굴된 화덕자리 10기 가운데 2기는 네모꼴 움터 안에 화덕이 설치된 형태로 독자적인 제철기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 도자기 시제(외언내언)

    우리나라는 「도자기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일찍부터 자기가 유명했다.세계적으로 예술성이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의 비색은 청자의 원산지 송나라에서 조차 「천하제일」로 인정했을 정도.청자를 이은 조선백자와 분청사기도 도자예술의 극치로 일컬어진다.일본인에게 최상급의 보물로 예찬되는 「자왕」은 조선초기 만들어진 막사발같은 수수한 그릇. 그동안 세계도자기시장에서 중국자기에 가려져있던 한국의 도자기가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지난해 크리스티국제경매장에서 24억원에 팔린 조선시대 청화백자 접시는 도자기값으로는 세계최고의 기록.조선초 분청사기의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그림은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의 그림에 견주어지고 있다. 18세기초까지도 유럽에서 자기는 귀족이나 왕실등 상류사회의 전유물이었다.자기를 만들줄 몰라 주로 중국에서 수입해 충당했는데 형평저울에 금과 같이 달아서 팔았다고 한다.그야말로 「금값」이었다.17세기초 일본 지방제후들인 다이묘(대명)의 경제적 번영은 임진왜란때 납치해간 조선도공들의 도자기 덕분이었다는게 지배적 설이다. 조선후기에 단절된 도자의 전통은 최근 30년동안 전국 도처에서 되살아나 전통도자의 맥을 잇고 있다.청자의 지순탁,백자의 유근영 같은 뛰어난 도공들도 배출했다.옛 전통을 되살리는 지역 가운데 이천의 도예마을은 가장 유명하다. 1백40여개의 도자기가마가 밀집해 있고 매장과 전시장이 즐비한 한국전통도예 1번지.한국을 찾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필수코스로 돼있다. 이곳에서 오는 10일까지 「흙과 불의 잔치」인 도자기 축제가 열리고 있다.도자기를 문화관광 상품으로 육성하기 위해 문화체육부가 기획한 관광이벤트다.도자기 제작과정도 볼 수 있고 재래식가마에 장작불 지피는 모습도 보여준다.세계적인 도자기 수출국인 일본과 영국의 도자산업을 부러워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도자 종주국」의 체면과 전통을 되살려야 할게 아닌가.
  • 노벨 문학상 수상 히니의 삶과 작품 세계

    ◎고통받는 아일랜드인 그린 민족 시인/자연친화적 간명한 시어로 비평가 극찬/「시의 아버지」 예이츠 시 세계에 큰 영향 9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머스 히니(56)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래 가장 중요한 아일랜드 시인으로 꼽힌다.그는 지난 23년 예이츠가 첫 수상자가 된지 72년만에 노벨문학상을 탄 세번째 아일랜드인이 됐다.또 한사람은 69년에 상을 탄 극작가 베케트.그의 수상으로 92년 데렉 월코트 이후 3년만에 노벨상이 시인에게 돌아갔다. 자연친화적인 시로 아일랜드 분쟁의 피맺힌 역사를 은유해온 그는 지난 39년 북아일랜드 캐슬번에서 소수파 가톨릭 농부의 9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공교롭게도 아일랜드 시의 아버지 예이츠가 숨을 거둔 해이다.그의 정서에 깊이 각인된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광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찾기와 함께 뒷날 그의 시세계를 형성한 두 축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야 지역신문 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그는 첫시집 「자연주의자의 죽음」을 27세때 냈다.잡다한 농기구 따위를 끌어들여 소소한 시골의 삶을 보여준 이 시집은 자연이나 흙과의 강한 교감속에서도 그 배면의 어둠과 침묵을 경외심으로 응시하는 켈트문학만의 특성을 드러내 히니 시세계의 앞날을 예고한다. 그의 시세계속엔 아일랜드 정치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은 드물다.몇몇 예외적인 시집을 빼곤 엄숙한 자연의 모습과 소박한 나날이 시집의 전면에 드리워져 있다.그러나 꿰뚫어보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극심한 분규현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내밀한 은유로 부조돼 있음을 알수 있다.아일랜드 민족의 토속정신을 끝까지 파들어가 고통받는 아일랜드 상황에 대한 간접적이지만 농도짙은 고발을 길어낸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최고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그의 모국어는 아일랜드어지만 영어로 쓴 시가 더 많이 읽힌다.그는 시속에 민족적 공감과 연민을 담으면서도 사석에서는 시가 과연 사회와 역사를 바꿀 유용한 틀이 될지 회의를 토로하기도 한다. 이처럼 두개의 세계 사이에서 부대끼며 움터나온 그의 시는 그러나 간명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시가 난해해지고 푸대접받는 20세기에 그는 드물게 비평가와 일반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말을 아끼면서도 많은 것을 말하는 그의 뛰어난 시는 초급학교 교과서에 실리는가 하면 대학교재로 널리 채택되는 등 영국에서도 대접받고 있다. 89년엔 아일랜드인 최초로 옥스퍼드대 교수로 임명되기도 한 그는 지금은 더블린에서 작품활동에 전념중이다. 한편 그의 시는 지난 87년 문학정신 10월호에 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 김종길 시인의 번역으로 3편이 번역,수록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소개됐다.그의 중요시들을 묶은 시집도 김시인의 번역으로 곧 민음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올해 히니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쓴 청주대 홍성숙교수는 『지역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함의를 지닌 그의 문학은 식민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에게도 공감과 각성의 기회를 줄것』이라고 말한다. ◎시머스 히니 연보 ▲1939년 북 아일랜드 데리주 캐슬도슨에서 출생 ▲51∼61년 세인트 컬럼대·퀸즈대에서 수학 ▲65년 매리 델빈과 결혼 ▲70∼71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초빙강사 ▲84년부터 하버드·케임브리지·매사추세츠대 등에서 수사학 및 웅변학 교수 ▲89년부터 옥스퍼드대서 시학 교수 ▲66년 에릭 그레고리상,68년 모옴상,71년 아일랜드 학술원상,75년 E.M포스터상 85년 펜(번역부문)상 등 수상 ▲주요작품집으로는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첫시집·66년),「암흑으로 들어가는 문」(69년),「겨울나기」(72년),「북쪽」(76년) 「들일」(79년),「순례의 섬」(84년),「산사나무 등불」(87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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