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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공이산/이원종 서원대 총장(굄돌)

    북경에 있는 서비홍 기념관에 들어가면 그림들중에 강렬한 느낌을 주는 대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중국에서 말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이지만 「우공이산」이란 제목의 이 그림은 건장한 나체의 남자들이 힘차게 땅을 파고 흙을 나르는 모습의 길이 4m가 넘는 그림이다. 북산의 우공이란 사람은 나이 90으로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큰 산에 이웃하여 살고 있었는데 나들이에 불편하다 하여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이것을 본 지수라는 사람이 산의 한 귀퉁이도 허물기 어려운데 어떻게 큰 산을 옮길수 있겠는가 하고 비웃었다.우공은 설사 내가 죽더라도 아들이 있고 아들은 손자를 낳아 자자손손 일을 한다면 언젠가는 산이 평지가 되고 말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두 산의 주인인 사신이 그 말을 듣고 놀라 천제에게 호소하니 천제는 우공의 우직한 결심에 감복하여 산 하나는 삭동으로,다른 하나는 옹남땅으로 옮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끝까지 노력하면 아무리 큰 일이라도 해낼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세상이 타산적이고 계략화하면서 혼을 불어놓던 장인정신과 죽음을 불사하고 올바른 길을 지켜오던 이땅의 우공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눈앞의 작은 이익에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원칙과 인격이 돈 앞에 무력해지고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이대로 좋은가.작은 일이라도 대를 이어 가며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인들이나 단순한 제품도 수십년씩 연구 개량하여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독일 사람들을 어리석다 할 수 있겠으며 눈치빠른 타산만으로 그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이 땅에도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는 우공들의 정신이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 “등산로 나무살리자”2만명 구슬땀/「뿌리흙덮기」수락산 캠페인현장

    ◎서울신문사·서울시 주최/“자연 가꿔 후손에…” 5㎏ 흙주머니도 가볍게/등산객들 자진 동참… 하산길엔 쓰레기수거도 『등산로 주변에 드러나 있는 나무 뿌리에 한 줌의 흙을 덮어 줍시다』 서울신문사와 서울시가 지난 해에 이어 두번째로 주최한 「등산로 나무뿌리 흙 덮어주기 수락산 현장 캠페인」이 18일 상오 10시 30분부터 서울 노원구 상계1동 수락산 배드민턴장∼정상에 이르는 수락산 등산로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 이날 현장캠페인에는 손주환 서울신문사 사장·김학재 서울시 행정2부시장·김용채 노원구청장·임채정 국회의원·김선회 노원구의회 의장·윤종웅 조선맥주 전무·탁병오 서울시 환경관리실장을 비롯,서울신문 환경운동본부 환경감시위원과 등산객·학생·연예인 등 2만여명이 참가했다.수락산 등산로 나무뿌리 흙덮기 캠페인은 연중 실시된다. 손주환 사장은 개회사에서 『지난해 서울시와 관악산에서 등산로 나무뿌리 흙덮어주기 행사를 처음 시작한 이후 관악산 등산로 주변이 훨씬 좋아졌다』면서 『시민들이 즐겨 찾는 수락산을 아름답게 가꾸어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강조했다. 김학재부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자연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하게 살수 있다』면서 『이번 행사를 계기로 자연을 더욱 사랑하고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상오 11시부터 시작된 본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배드민턴장 주변에 흙 5㎏을 넣은 주머니를 하나씩 메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앙상하게 모습을 드러낸 나무 뿌리에 흙을 덮어주고 발로 다지는 등 자연사랑을 실천했다.혜성여고,재현고 상계고 상명여고 등 1천여명의 학생들은 직접 흙을 담아 나무 뿌리를 덮어줬다.하산할 때는 쓰레기를 수거했다. ○…이날 행사를 협찬한 조선맥주측은 등산로 입구 시립요양원 앞에 하이트 맥주 시음대를 설치,행사를 마친 등산객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무료로 제공했다. ○…인기 댄스그룹 영턱스와 인기 연예인 진재영양도 행사에 동참,서울신문이 주최하는 환경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다짐했으며 서울시 소방본부와 산림청 소속 헬기 2대가 수락산 정상에 마련된 헬기장까지 1.5t 가량의 흙을 날라 하산객들이 캠페인에 참여하도록했다.
  • 설치미술가 전수천(이세기의 인물탐구:130)

    ◎자연을 캔버스로 상상을 형상화 한다/평면·입체·설치 등 장르파괴 끝없는 모색/시·공문 넘나들며 삶의 문제 근원적 접근 강물을 캔버스로 하여 그 위에 뗏목을 띄우고 흐르는 물줄기에 따라 뗏목이 교차되는 수상드로잉.88올림픽 1주년 기념으로 한강에서 펼쳐진 전수천의 행위미술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강렬한 이벤트였다.잠실 메인올림픽 스타디움과 여의도 63빌딩에 이르는 12㎞구간에서 그는 자연과 인간대응의 장려한 퍼포먼스로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이에 앞서 지난 84년에는 뉴욕 103번가와 73번가 사이,배터리 파크에서도 신문잡지를 가루처럼 잘게 오려서 바람에 날려 뿌리는 「시간의 추적」을 시도하여 일상적인 것을 외면하는 뉴욕시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다.1천여명의 관람객이 운집한 이 행사에서 「아트 인 아메리카」의 부편집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재닛 코플러스는 「그의 예술은 인간론적이고 철학적」임을 전제,『수많은 다른 아시아 예술가들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포맷이나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전생애에 걸쳐 눈부신 변형으로 그는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설립하고 있다』고 논평한 바 있다. ○한강서 충격적 퍼포먼스 세계최고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95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방황하는 혹성들속의 토우­그 한국인의 정신」 역시 현대의 무질서와 방약무인에 대한 섬뜩한 경고였다.이른바 흙으로 빚은 1천300여개의 토우들은 TV모니터와 네온 등 산업폐기물 위에 꼿꼿이 도열하여 옛한국인의 엄숙함과 도도한 기상을 유감없이 도출해내었다. 그해 봄 「올해의 작가­전수천전」을 주관했던 국립현대미술관장 임영방씨는 『전수천은 재료의 가소성·일회성을 대담하게 체험하여 신화와 역사,우주의 운행에 얽힌 질서(logos)와 혼돈(chaos)을 초월하는 장대한 스케일과 독창적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그는 왕성한 창작의지로 평면 입체 설치등의 장르를 붕괴하면서 인간의 역사와 삶의 문제에 근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작가다. 호암갤러리의 김용대씨는 『전수천은 전수천이라는 화면의 대지위에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난다』고 표현한다.따라서그의 회화와 회화에서 출발된 인스털레이션(설치)과 퍼포먼스는 자연이라는 공간에 격랑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분출하는 용암같은 위협적인 피안의 세계를 형성하기도 하면서 「정신적 무풍지대를 방황하고 있는 인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작은 체구에 비해 한번 작업에 들어가면 두들기고 달구고 칠하고 매달고 설치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는 끈질긴 극기를 감내하고 있다.실제로 이 작가는 작은 혹성처럼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고 행성주위를 방황하다 충돌로써 존재를 마감하는 수많은 별똥별(혹성)의 운행과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빗댄 동기를 작업에 부여해왔다.뉴욕의 평론가 루시 리파드가 「이세상을 변형시키기 위해 산책나온 신의 사절」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과장이 없어 보인다. 주로 일본과 뉴욕을 무대로 작품활동을 하면서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도쿄·교토 국립근대미술관과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이 동시에 기획한 「형상의 사이에서」초대전에서는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이례적으로 그의 대작 「대지의 저편에서」를 구입하여 미술관에설치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한국 화가로서는 다루어지기 힘든 뉴욕타임스의 존 러셀,빌리지보이스의 킴 레빈 등 권위있는 평론가들로부터 「오리지널리티와 풍부하고 강렬한 상상력」에 대한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일본과 뉴욕에서 고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그의 삶 자체가 치열한 인간승리의 드라마틱한 내력이 아닐수 없다. 전북 정읍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에 태어났으나 중학졸업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학비를 벌기위해 베트남 백마사단의 통신병으로 근무하다가 서양미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일본에서도 도로공사와 페인트공 등 허드렛일로 무사시노(무장야대)미대를 졸업,그림에 대한 야심찬 계획으로 일본활동 7년만인 83년 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에 정착했다.그의 작업장이 있는 맨해튼 하층부는 소호미술구역과 중국인촌,리틀 이탈리안이 밀집한 예술의 온상으로 그는 수시로 예술가들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행위예술을 펼칠수 있었다.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한 유행적 사조인 신표현주의 회화에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뉴욕이라는 독특한 사회적 상황은 그의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면서 의식의 심층을 온통 뒤흔들어 놨다고 할수 있다. 그의 작품은 때때로 시퍼렇게 노한 파도가 지구를 집어삼킬듯 공포적 장관을 연출하는가 하면 대지위에 부유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힘에 유도되는 신비한 기운을 내뿜기도 한다.과거와 현재,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적 상상력에 기초한 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착취가 몰고올 자원고갈의 무질서와 엔트로피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한다.도쿄에 있을때는 베트남에서 제대날짜를 기다리던 군인들의 「기다림」에 지친 인간의 갈등이 작품에 반영되었고 뉴욕에서는 표현주의적인 색채와 매재로 현대인의 허망한 환상을 불식시키고 있다. 정체됨을 거부하는 그의 미술은 간혹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미술과 일상,미술과 사회,미술과 문명」의 접점을 찾아 변신과 모색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아픔이 배어나온다. ○일·뉴욕서 고학으로 우뚝 국내에서보다 일본과뉴욕에서 먼저 성공하고 역으로 국내에 들어온 그는 지금도 남들앞에 나서기를 꺼릴만큼 내성적이고 나약해 보이지만 아무리 중병에 걸려도 진통제 한알 먹은 적이 없는 강단이다.이상시대의 마지막 시인같은 인상이지만 그의 작업스케일은 남성적으로 광활하고 무변하다.결혼이나 가족은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독신주의.오로지 화가로만 살면서 요즘은 일산 구산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오는 7월 노르웨이 콩스버그미술관 초대 신작전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뉴욕에서나 도쿄,서울에서나 빈에서 그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종횡무진의 코스모폴리탄이다.가장 첨단적인 세계를 구축하지만 체삽이 없고 오히려 볼때마다 청렬한 경이로움을 발산한다. 이세상을 변모시키기 위해 산책나온 예술의 신사,불꽃같은 정열을 자연에 사르면서 그는 언제까지나 높고 넓게 그리고 자유자재롭게 우주를 넘나드는 광채일 것이다. □연보 ▲1947년 전북 정읍 출생 ▲74년 대입검정시험 합격 ▲76년 서울 개인전,도일 ▲76∼83년 일본 무사시노(무장야)미술대 및 와코(화광)대 졸업 ▲79∼81년 도쿄개인전 ▲83년 도쿄개인전(화이트아트갤러리·갤러리 큐·갤러리 제로 개인전),도미,뉴욕개인전 ▲84년 뉴욕 플랫인스티튜트석사과정 수료,뉴욕개인전 「시간의 추적전」(뉴욕 바테리파크 및 맨해튼문화센터) ▲85년 플랫인스티튜트초대 개인전,도쿄개인전(화이트아트갤러리·후쿠오카 애리아­듀화랑) ▲86년 뉴욕개인전(히긴스홀) ▲87∼88년 개인전(뉴욕 22우스터갤러 및 도쿄 화이트아트갤러리) ▲89년 88서울올림픽 1주년기념 한강수상드로잉전 및 개인전(과천국립현대미술관·가나화랑),도쿄개인전(화이트아트갤러리),뉴욕개인전(수연 이갤러리) ▲90년 도쿄개인전(화이트아트갤러리) ▲91년 LA개인전(앤드류사이어화랑),도쿄개인전(화이트아트갤러리),서울 「움직이는 문화열차」기획 ▲92년 서울개인전(가나화랑),도쿄개인전(무라마스화랑 및 화이트아트갤러리) ▲93년 대전 엑스포상징조형물「비상의 공간」제작,도쿄개인전 ▲94년 서울개인전(가나화랑) ▲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대표,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선정,「방황하는 혹성들속의 토우­그 한국인의 정신전」 ▲96년 미국 힐우드미술관 초대전 〈현재〉국립예술종합학교 교수 〈수상〉국민문화훈장 은관·일신문화상(95년)
  • 날림공사… 완공 2년만에 “폭삭”/돈암동 「한진」 축대붕괴

    ◎며칠전 주민 안전진단 거의 묵살/“멋대로 설계변경” 준공검사 못받아/무리한 증축·호우에 하중 못견딘듯 서울 돈암2동 한진아파트 축대 붕괴 사고도 부실공사 및 사후 안전관리 미흡때문에 일어났다. 한진건설과 한신공영 등 이름난 건설회사가 지은지 2년밖에 안 된 아파트의 축대가 3일동안 내린 비에 주저앉았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어떤 식으로든 사고는 이미 예고됐었다는게 주민들의 주장이다.입주 당시부터 내·외부 벽면과 복도 등에 균열이 생기는 등 부실의 냄새가 짙었다는 것이다. 지상 20층짜리로 지어진 이 아파트는 완공 직후인 95년 6월부터 주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준공검사는 물론 가사용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관할 성북구청은 건설사가 계단 등을 설계도와 달리 시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준공검사를 내주지 않았다.하지만 시정조치도 없이 입주를 시키자 해당 건설회사와 재개발 조합을 고발해둔 상태다. 이 아파트는 「동소문재개발조합」에 의해 91년에 착공됐다. 하지만 무너진 축대 바로 앞 209동은 시공사인 한진건설이 당초 「­」자 설계와 달리 「ㄴ」자형으로 구조를 변경,60가구 규모의 건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증축,문제가 되기도 했다. 주민 지모씨(38·가정주부)는 『무너진 축대는 이번 비가 내리기 전에도 벽면이 약간 기우는 등 이상징후를 보여 건설회사와 아파트 관리회사,구청측에 여러차례 진정했으나 이를 무시해 사고를 불렀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두차례나 안전진단이 실시됐으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정이 내려져 당국의 사후관리도 허점을 드러냈다. ◎축대붕괴 이모저모/“아파트도 붕괴될까” 공포감 확산/유가족 “어떻게 지었길래…” 통곡 휴일 낮 아파트단지에서 발생한 축대붕괴 사고는 주민들을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폭격을 맞은 듯한 엄청난 굉음에 주민들은 가재도구도 챙기지 못한채 긴급대피했다. ○…붕괴 지점은 209동에서 불과 1m밖에 안되 아파트는 마치 낭떠러지 바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 숨진 김미성씨(27·여)는 과외를 하러왔다가 전화부스에서 전화를 걸다가 변을 당했으며 공중전화 부스는 종이가 구겨진 것처럼 부서져 있었으며 축대 아래에 있던 상가는 뒷부분이 완파됐다. ○…한편 숨진 김미성씨의 아버지 김영호씨(62)와 남편 채완석씨(29) 등 유가족들은 이날 하오 사고현장에 달려와 『도대체 아파트를 어떻게 지었길래 축대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느냐』며 통곡. 남편 채씨는 결혼 1년6개월째인 아내가 중학생 과외수업을 다녀오다 참변을 당한데 대해 『열심히 살아보려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면서 사고현장에서 찾아낸 아내의 흙묻은 갈색 가방을 껴안은 채 울먹였다. ○…축대 붕괴 직후 우촌·돈암초등학교 등으로 긴급대피했던 209동 428세대 주민 1천5백여명 가운데 붕괴 지점과 가까운 곳에 사는 100여세대를 제외하고는 저녁이 되면서 대부분 귀가.그러나 귀가하지 못한 주민 250명은 아파트 단지내 노인정과 유치원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조순 서울시장은 사고 발생 1시간여뒤인 하오 3시20분쯤 현장에 도착,우촌초등학교에 대피해 있던 주민대표를 만날 것을 희망했으나 주민들은 『조시장이직접 우리 쪽으로 오라』고 요구하는 등 평소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당국에 대해 분노를 표출.
  • 경선참여 고민 최병렬 의원(오늘의 인물)

    ◎“직접 나서야” 잇단 권유/속내 안보이며 저울질 신한국당 최병렬 의원이 6일 장고끝에 당내 경선참여 결심을 굳힌 듯하다.이날 기자들과 만나 그는 결심의 일단을 강하게 내비쳤다.『한보·대선자금 파문 등으로 나라가 위기상황인데,적절한 후보가 보이지 않는다』는 간접화법이긴 하지만,자기가 「대안」임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이어 주변에서도 『직접 나서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고 했다. 최의원은 그동안 당내 예비주자들로 부터 숱한 유혹을 받아오던 터이다.그의 보수·원칙주의자로서의 대중적 이미지와 숱한 선거를 치러본 경험을 감안,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손짓이 끊이지 않았다.그의 영입이 당내 경선판도를 바꿀수 있는 폭발력을 의식한 결과다. 그는 말미에 『지연이나 학연,혈연을 붙들고는 현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고 강조,새로운 전략을 구상중임을 시사하기도 했다.『손에 흙을 묻힐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그가 언제 공식 출사표를 던질지 관심이다.
  • 어린이에 푸른꿈 심어주자/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기자(서울논단)

    동양인들 정신속에 큰 자리를 차지해 온 공자(BC 552∼479년)는 어린아이들을 어여삐 여겼던 모양이다.그는 어느날 나들이를 나갔다가 한길을 가로막고 흙장난을 하는 아이를 만났다.흙으로 성을 쌓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에게 넌지시 길을 비켜달라는 말을 건넸다.그러나 아이는 도리질을 쳤다.『사람이 성을 돌아가야지,어찌 성이 사람을 피하나요』라는 것이 도리질을 친 이유였다. 천하의 공자도 손을 들었다.그리고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쌓아놓은 성을 비켜서 가던 길을 재촉했다.부모와 어른을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를 실천 덕목으로 가르쳤던 당대의 사상가가 어린아이 의견에 선뜻 동의한 것이다.어린아이의 지혜가 물론 번득이거니와,이에 적절히 대처한 공자의 행동에서는 인간중심주의 사고가 엿보인다. ○공자도 아이의견 존중 어떻든 동양의 성인은 어린아이의 꿈을 뭉개버리지 않은채 장난으로 쌓은 성을 부러 돌아갔다.그는 어린아이에게서 아직은 다 영글지 않은 예지와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그래서 어린아이 의견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오히려 어린아이에게 희망을 걸고 그 자리를 떠났을 공자는 어린아이들을 존중한 성인이 아니었나 한다. 우리도 어린아이들을 인격체로 존중한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어린아이를 높여 어린이라고 불렀던 까닭도 여기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그분이니 저 분이니 할 때 「분」과 같은 높임말 「이」를 붙여 어린이라고 했다.어린이라는 말은 오늘로 75돌 째를 맞는 「어린이 날」에서 비롯되었다.1923년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었던 선각자의 모임 색동회가 「어린이 날」을 만들고 난 이후였다는 것이다. 오늘 「어린이 날」은 어린아이들의 명일이다.처음에는 5월5일이 아닌 5월1일을 「어린이 날」로 기렸다.그러나 이날의 뜻은 변함이 없다.어린이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는데,1957년에 선포한 「어린이 헌장」에서는 어린이를 어떻게 올바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몇 가지 길을 제시했다.사회와 가정의 애정어린 교육 등을 강조한 이 헌장은 공부나 일이 어린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어린이만을 위해 특별한 날을 제정한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그러면 우리는 「어린이 날」이 있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얼마만큼의 배려를 했는가.한 여론조사기관이 얼마전에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어린이 응답자의 84%가 한가지 이상의 걱정거리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일본·태국·미국·프랑스·영국과 동시에 실시한 이 조사는 걱정거리를 지닌 어린이 숫자는 한국이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우리 어린이들은 참으로 걱정이 많다.이 조사에서 60%의 어린이가 「공부와 성적」을 고민거리로 꼽았다.이에 비해 미국은 16.9%,영국은 13.1%에 지나지 않았다.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자신의 창의성이 무시된 가운데 공부 하나에만 시달리고 있다.이는 어른들의 출세지향적 욕구를 어거지로 뒤따른 어린이들의 대리희생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성·창의력 길러줘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높은 교육열은 익히 알고 있다.다만 시민정신이나 실용성,창의성이 빠져버린 교육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전통사회의 어린이교육에서도 가문의 명예와 출세의 기반이 되는문자교육을 중시하기는 했다.그러나 사생활에서 자기행실과 사회생활에서 자기역할,인간이 추구할 가치관 교육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명예와 출세만을 위한 공부를 교육의 전부로 여기는 시대로 변했다.이를 또 이 시대 교육의 정도로 그릇 알고 있다.이제부터라도 인성과 창의력을 심어주는 교육에도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그것은 꿈을 먹고 사는 작은 인격체를 생각하면서,21세기를 대비한 교육이기도 할 것이다.
  • 전겸익·증박의 상숙(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7)

    ◎청의 말발굽에 굴절한 목재의 회한 가슴저미고/공자의 수제자 자유·개혁주도한 증박의 숨결도 상해에서 서북쪽으로 두시간쯤 달리면 양자강 건너기 앞서 황소처럼 누워 있는 육중한 산을 만난다.제주도 모양의 그 산더미,이름하여 우산,9㎞의 길이에 260m의 높이.이만한 산도 장강 하류에서는 「지상대장군」이다. 북으로 남통,남으로 소주,서로 무석과 연접한 요충지.역사적으로 춘추때 오문화의 발상지,경제적으로 강남의 옥답.지금도 전국 10대농공단지의 하나,이름 그대로 「곡식이 늘 익는 곳(상숙)」이다. 산을 보면 신이 났다.한바퀴 돌 작정인데 웬걸 70리 순환도로는 2천500년이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상숙시는 우산 동쪽에 펼쳐 있기에 우산의 순례 코스로 먼저 우산공원을 기점 삼았다.거기서 잠시 달려 오른편을 보면 우산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스카이웨이의 입구.그 입구를 지나 고개를 산쪽으로 돌리면 거기 언덕배기 파란 상록수.숲속으로 석계와 석물이 층층이 뵈는데 무덤들이 즐비했다. 그중에 공자의 제자 72인중 그중에도 열손가락에 꼽히는 십철의 한분인 자유(BC506∼443 성은 언,이름은 언)의 묘,「언자묘」로 불린다.우산 동쪽 그 반산에 있는 언자묘는 그 묘도나 묘갈,묘표,묘각 등 모두가 창연하고 숙연했다.비록 2천400년이상의 세월이 흘러 그 실체가 한가닥 바람이나 한줌의 흙이 되었을지라도 남송때부터 설단한 묘비와 그 석물들,특히 높이 4.6m,너비 9.7m의 세칸 방문,그 정면에 씌어진 「언자묘도」를 비롯,청나라 건융황제가 남순때 세운 석정이나 어서정 등 자유를 기리는 뜻이 역력했다.자유의 뛰어난 언행에 특히 예악을 강조,이 고장을 현가의 고을로 만들고 줄곧 「남방부자」로 추앙받았던 그 지체를 실감케했다. 언자묘 건너편으론 상숙서 제일 가는 우산관광호텔.그 호텔서 약간 동쪽으로 남송 건염4년(1130)에 세워진 높이 67m의 4면 누각형 9층탑­방탑이 훤칠한 용모로 하늘에 치켜 서 있다. 다시 순환도로의 남단을 돌아 북으로 한참 달리다 차를 멈추었다.오른쪽으로 우산 산정을 보면 하얀 바위들이 엎치락뒤치락 모임을 이루고 그 옆으로 추녀가 날개치는 누각이 아스라히보였다.그게 검각이요,검문기석이라 했다.전설로는 오왕 부차가 그 보검을 시험키 위해 산을 한번 쪼갠 것이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순환도로에서 필자를 안내하던 상숙박물관 학예관 장웨이꿔(장위국)는 도로 서켠으로 내려 서서 필자를 귤밭 건너 풀밭으로 데리고 갔다.필자가 오랫동안 연민하던 전겸익(호 목재 1582∼1664)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언제나 그렇듯이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만날 때면 살포시 흥분할 수 밖에.그는 여기서 낳아 명말청초의 시단을 이끌었던 「동남문종」이요,「우산시파」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었지만 그의 말년은 힐난과 조소로 추락의 비운을 겪었었다. 그 힐난이란 그가 명말에 예부상서의 높은 벼슬을 누린데다 「초학집」 「유학집」 등의 저서에 「두시전주」나 「열조시집」 등의 편주서를 남겼고,더구나 애국우민과 요산요수의 명시를 남겨 동남 제일의 선비였건만 청병이 남하하자 그 말굽에 눌려 그만 반년쯤 예부우시랑이란 감투를 둘러쓰므로서 굴절하고만 것이다. 그 조소란 그가 명말때 당쟁에 휘말려 잠시 은퇴,「명사」를 저술할 무렵,당시 오강」땅 명기였던 유여시(1618∼1664),글쎄 아무리 시재에 뛰어나고 미색이 수려하지만 서른여섯살 아래의 기생에게 홀딱 반해 그를 소첩으로 맞고 「백두홍분지기」의 러브스토리를 남긴 것이다. 유여시는 목재에게 자결을 권했지만 목재는 이를 듣지 않고 다만 칭병끝에 청조의 벼슬을 내던지고 물러났지만 그 굴절을 참회하면서 아프게 살았다.그 일단이 「낙엽」이란 시에 담겨 있다. 추로종산만목희, 조상총속겁진비. 부지옥로양풍급, 지도김능왕기비. 의월소아도유수, 이상청여정무의. 화림참담여사막, 만이한공일안귀. (만추의 자금산에 나무마다 우수수,영락은 본시 억겁의 순환일세. 이슬 방울이 하늬바람에 지는 까닭을 모른채,사람들은 금릉땅 왕기가 쇠진했다하네. 당나라 명황은 가더라도 달속에 소아와 계수나무만 남았고,서리 밟던 여인네는 옷조차 없구려. 궁중의 비원은 모랫벌처럼 참담한데,만리 추운 하늘로 기러기 한마리.) 필자는 그토록 아프게 참회하면서 세상을 등진 목재의 무덤앞에 한참 섰었다.우산으로부터 줄기차게 뻗은 지맥의 한자락을 잡은지라 그 품위도 당당했다.그 묘갈 또한 「명증광록대부궁보례부상서경행전공지묘」청나라의 작록은 한자도 올리지 않았다. 목재의 무덤 서남쪽 30m.열평남짓의 좁은 묘역에 잡초가 무성한 무덤.이것이 350년전,강남의 명기요 전목재시인의 소첩이었던 유여시의 묘,무덤앞 석비에는 「하동군지묘」,하동군은 그녀의 아호였다.목재옆에 나란히 누울수 없었지만 목재와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 숨은듯 누운 작은 무덤앞에서 필자는 왠지 축축함을 느꼈다.그러나 이 고을 화원촌이란 이름은 우연치 않았다. 화원촌에서 다시 북상,십분쯤 달렸을때 바른편 산자락에 청말 4대 견책소설가의 하나로 꼽히는 증박(1872∼1935)의 무덤이 있다.그는 동아병부의 필명으로 청말의 부패사회와 관료를 폭로하고 국제경험을 썼던 장편 「얼해화」를 발표하여 봉건 타파와 정치 개혁에 공헌하였다. 증박의 무덤에서 다시 10분쯤 북상,우산의 북단쯤 길가에 우뚝 선 「원고사황대치선생묘도」란 방문,옳지! 원대 4대화가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화가 황공망의 무덤.그의 쓸쓸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를 끔찍히 좋아했던 필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수년에 걸쳐 긴긴 두루마리의 산수화 「부춘산거도」가 자꾸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냉방 시스템 석빙고 원리 실용화 가능

    ◎계명대 공성훈 교수 과학ㅇ의 달 학술대회서 밝혀/돌·흙·잔디·공기 활용… 온도 조절 거의 완벽/빙축열·지중 냉방 튜브시스템의 「원조」 주장 석빙고는 신라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조선시대까지 겨울철 하천의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한 얼음 저장 창고로 널리 알려져 있다.이같은 석빙고의 장기적인 얼음 저장 원리는 현재 유럽 등지서 새로운 냉방 시스템으로 연구가 활발한 「지중 냉방 튜브시스템」「빙축열 시스템」의 원조라는 주장이 나왔다. 계명대 공대 건축공학과 공성훈교수는 26일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린 과학의 달 기념 ’97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논문 「경주 석빙고의 여름철 실내환경 조건에 관한 연구」를 통해 『석빙고는 구조와 기능,효과 면에서 우리 조상의 온·습도 조절기술이 완전 정착단계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밝히고 『이 원리를 이용하면 아직 실용화가 안된 각종 천연 냉방시스템 개발에 새로운 전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교수는 이번 연구를 위해 전국(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석빙고 6개의 내외부 구조를 조사하고 경주시 인왕동 반월성 안에 있는 보물 66호 석빙고에 대해서는 온도와 습도의 조건 및 분포,변화상태,온·습도 조건의 상관관계를 측정·분석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석빙고는 내벽은 열저장 능력(축열능력)이 가장 좋은 돌로 돼 있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으며 태양열로 인한 복사열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부에 잔디를 심은 구조로 돼 있다.겨울철 얼음은 차게 얼린 석실안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얼음을 넣고 빼는 출입구는 작업자가 겨우 들어갈 만큼의 구멍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봉분 형태로 덮었으며 출입구 상단부에는 바위로 턱을 두어 공기유입을 되도록 적게 함으로써 출입구를 통한 열손실을 최소화했다.또한 출입구 양옆에는 날개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겨울철 찬바람이 효과적으로 내부에 유입될 수 있도록 했고 천정에는 내부의 습기와 더운 공기를 배출하는 3개의 통풍구를 두고 있다.또한 바닥은 비탈지게 해 얼음 녹은 물이 밑으로 원활하게 빠지도록 했고 외부 바람에 의한 내부의 공기 유동 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부 봉분 형태는 유선형으로 만들었다. 연구팀이 96년 8월말 실내 온·습도를 4일간 측정한 결과를 보면 실내 온도 조건의 분포 범위가 19.0℃∼20.3℃로 나타났다.이는 최고온도와 최저온도와의 차가 1.3℃에 불과한 것으로 실내 기온이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통풍구 실내 온도의 교차범위도 2.7℃로 외기 온도의 교차범위 6.9℃보다 월등히 낮아 얼음의 장기 보관이 가능했음이 입증됐다. 공교수는 『석빙고 구조체의 축열성능과 잔디 식재에 의한 복사열의 효율적인 산란작용 등이 효과를 거둔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히고 『현존하고 있는 6개의 석빙고가 동일한 구조인 것을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일찌기 이 원리에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현재 외국에서는 겨울철의 냉기나 여름철의 온기를 6개월간 땅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하는 계절간 열저장시스템,지하에 열전도성이 좋고 내습성이 양호한 통기관을 매립해 여기에 공기를 통과시킨후 시원해진 공기를 여름철 실내 냉방에 사용하는 쿨링 튜브 시스템,값싼 심야전기를 이용해 얼음을 얼려 지하에 저장했다가 낮시간에 얼음을 통과한 찬공기를 이용하는 빙축열시스템 등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공교수는 『앞으로 공기유동 현상 해석등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석빙고의 원리를 규명,새로운 냉방 시스템의 실용화에 적용해 보고 싶다』고 밝혔다.
  • 목단강유역 발해유적(송화강 5천리:25)

    ◎발해 도읍지 오동성터에 푯말만 외로이…/일제,성터 뭉개고 대규모 공장 건립/400m 성곽 간곳없고 남은흔적 고작 80m/23개 강동괴석에 역마울음 들리고 옛 암자터에 세운 정각사만 한때 영화 말하듯 송화강은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었다.그 가운데 가장 큰 지류가 목단강이다.길림성 돈화시 목단령에서 발원한 목단강은 흑룡강성으로 접어들어 경박호에 이른다.그리고 나서 의란현 서쪽에서 흑룡강 본류와 만나는데,길이는 670㎞를 헤아렸다.당나라때는 홀한수라 불렀던 이 강은 왕조가 바뀌면 이름도 따라 바뀌었다. 청나라때 목단울라라 한 것이 목단강으로 강 이름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그 목단강유역은 옛 발해의 강토다.강의 상류 오동성에서 발흥한 발해는 오늘날의 영안시 동경성에서 멸망하기까지 220년 동안 찬란한 역사를 꽃피웠다.「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이며,성은 대씨다.고구려가 망한 다음 그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모산을 지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따라 강이름도 바뀌어그러면 동모산은 어디인가.오늘날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촌의 산이라고 한다.해발 600m밖에 안되는 산이었지만,돈화분지 넓은 평야 한 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터라 제법 웅장했다.동모산 동쪽으로 10리 안쪽에 목단강이 남으로부터 북으로 흘렀다.그리고 대석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들어와 목단강과 합류했다.이들 물줄기야말로 동모산을 지켜주는 천연의 호성하 그것이었다. 그 동모산에는 성산자산성이 있다.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 흔적이 보였다.성은 본래 반월형으로 길이가 2천m였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않았다.동문으로 들어서자 50여기의 반움집터와 군사 조련장이었을 것이라는 넓은 마당이 나왔다.조선족 고고학자 엄장록 선생은 「연변지구 발해시기의 옛 성터 고찰」에서 이렇게 썼다.「역사기록과 지리적 위치에 근거하면 성산자산성은 대조영이 698년 진국을 세운 동모산으로 추정된다」 오동성은 오늘의 돈화시 고성거리에 있다.동모산 성산자산성을 근거로 국력을 키운 대조영이 새로 성을 쌓고 도읍을 옮긴 곳이 오동성이다.돈화임업국의 사택이 꽉 들어차서 성터를 찾는데 힘이 들었다.한참만에 사택 나무울타리에 가린 오동성유적지 팻말을 가까스로 찾아냈다.그러나 팻말 뒤쪽은 장작더미가 쌓여있는 바람에 새겨놓은 글귀는 읽어 볼 처지가 못되었다.아쉬울 뿐이었다. 오동성은 길림성의 성급보호문물로 되었다.팻말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서글픈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오동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발해유적들이 종종 수난을 당했다.지난 1995년 4월에는 화룡시 서성건 북고성촌 서고성이 큰 피해를 입었다.곽보위(34·화룡시 두도건 명성촌)라는 사람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자리인 서고성 동쪽 토성벽 5㎡를 허물어 못자리판 객토로 썼다는 것이다.사실이 탄로나 5천원의 벌금을 물기는 했다. 오동성 역시 흙을 다져 쌓아올린 이른바 판축의 토성이다.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졌던 오동성은 본래 동서 400m,남북 200m에 이르는 토성이었다고 한다.지금은 겨우 80m 정도가 남아있다.그것도 성터였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야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오동성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다.일제는 성터를 뭉개버리고 대규모 목재공장을 지었다. 오동성과 동모산 성산자산성의 거리는 15㎞다.그러니까 도성과 산성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구려 도읍지인 집안에 평지성인 국내성과 그 외곽에 산성인 환도성이 자리한 이치와 똑같다.도성과 산성을 가까이 배치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발해가 오동성을 수축할 당시 당나라와의 관계는 전쟁상태였던 것이다. 연변조선족 사학계에서는 더러 오동성이 발해의 첫 도읍지가 아니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그러나 1949년 육정산에서 발해의 무덤떼가 발견되고,그 무덤의 일부는 왕실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오동성이 발해의 수도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킨 것이다.그리고 청나라 연호로 광서 11년인 1885년에 조정걸이 쓴 「동삼성여지도설」에서도 여러가지 지리적 여건을 감안,오동성을 수도로 보았다. 발해의 무덤떼가 나온 육정산은 돈화시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강동향 승리촌에 자리했다.동서로 6개의 봉우리가 낙타등처럼 이어졌다.해발 603m의 두번째 봉우리가 주봉이다.그 주봉 동남쪽 산길 동서 양쪽의 평지에 무덤떼가 있다.동쪽 무덤떼는 신분이 낮은 계층의 무덤이고 서쪽 무덤떼는 발해 전기에 묻힌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밝혀졌다.이 육정산 무덤떼에서 가장 유명한 무덤은 제3대 문왕인 대흠무의 둘째딸 정혜공주묘다. ○성급 보호문물로 지정,유지 정혜공주묘는 북으로 육정산 주봉을 등지고 남으로는 활짝 트인 광활한 목단강 충적평야를 바라보고 있다.그리고 강 서쪽 연안은 사원유적을 품에 끼었다.무덤에서 동모산까지는 시오리가 채 안되었다.그러고 보면 정혜공주묘는 배산임수의 좋은 땅을 차지한 것이다.1950년대 이 무덤 발굴 당시 참여했던 전 연변대 사학부 교수 방학봉선생은 정혜공주묘를 이렇게 묘사했다.「무덤은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들을 향했다.무덤의 주인이 마치 북쪽 산에 기대고 누워 남쪽 벌판을 멀리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공주의 묘는 무덤방,무덤 안길과 바깥길로 이루어졌다.무덤방인 묘실은 네모꼴이다.무덤방 네 면의 벽은 크기가 서로 다른 용암석과 현무암을 다듬어 8∼9층 정도를 쌓아 만들었다.무덤에서는 비석·돌사자·구슬·청동못 따위의 유물이 나왔다.돌사자는 암수 한쌍이었다.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린채 앞을 바라보고 앉은 돌사자는 날쌔게 보이면서도 의젓했다.발해무덤에서 돌사자가 나온 것은 당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밖에서 볼 수 있는 발해의 유물이 있다면 24괴돌유적이다.흑룡강성에 2군데,길림성 연변지역에 6군데 남아있다.돈화시에만 3군데가 있는데,그중 하나가 강동괴석이다.돌 하나는 없어지고 지금은 23개가 남았다.목단강을 사이에 두고 오동성과 마주한 강동괴석은 강에서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위치했다.한 줄에 8개씩 3줄에 모두 24개의 돌을 나란히 세운 이들 돌유적은 발해시대의 역참으로 추정하고 있다. 돈화시에는 새로 지은 정각사라는 절이 있다.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이 절은 발해시대부터 광복 이전까지 명맥을 유지한 한 암자터에 다시 세운 것이다.해방 이전까지는 이씨 성을 가진 한 보살(여자신도)이 암자를지켰다고 한다.그러다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보살은 싱가포르로 가서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보살은 암자에 큰 절을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그 유언은 손자대에 이루어져 중국돈으로 2천5백만원을 들여 정각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 호텔업계 환경친화 상품 개발붐

    ◎「한라산 흙나르기」 참여고객에 요금 할인/쇼핑백 재활용·음식 쓰레기 줄이기운동/스페인 조각가 초청… 야외환경전 등 열어 새봄을 맞은 호텔가에 고객 참여형 환경친화 상품이 붐을 이루고 있다.환경보호운동에 참여한 고객에게 요금을 할인해주거나 쇼핑백 재활용,음식쓰레기 줄이기 운동을 펼치는 등 이색적 상품들이 줄을 잇는다. 제주 신라호텔은 등산객 발길에 등산로 흙이 무너져내려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한라산의 제모습찾기 운동의 하나로 지난 1일 고객들을 참여시켜 1천500고지 윗세오름까지 「한라산 흙봉지 나르기 운동」을 실시해 예상외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이 호텔은 8일에도 2박3일 일정으로 2차 환경캠페인을 벌이고 성과를 보아 앞으로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제주 신라호텔은 이 운동에 참여하는 고객에게는 왕복 항공료와 2박3일 숙박료,식음료 등을 패키지 상품으로 엮어 평소의 3분의1 수준인 19만9천원에 제공한다. 또 그랜드하얏트 서울 호텔은 가져간 쇼핑백을 다시 갖고와 상품을 담아가면 상품가격을 10% 할인해준다. 르네상스 서울 호텔은 「그린 코리아,그린 르네상스」 운동을 펼치면서 환경단체인 녹색연합과 연계해 「그린 실」을 팔아 환경기금을 마련하고 있다.이미 음악가 정명훈씨를 비롯해 많은 고객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 식량 6월께 바닥… 7∼8월 최대고비

    ◎“길거리에 아사자 시신” 목격담 잇따라/외부원조 없인 대량난민·폭동 가능성 북한의 식량사정이 갈수록 악화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현재 북한의 식량사정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대규모 외부지원이 없는한 6월쯤 재고가 바닥이 나 7·8월쯤에는 중대한 고비를 맞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 북한 주민들의 식량실태를 살피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국제기구 요원및 친척을 만나기 위해 방북했던 재일교포나 북한에 식량을 실어나르는 중국의 트럭운전수들은 주민들의 생활상이 참담하다고 전하고 있다.길거리에 굶어죽은 사람의 시체가 덮여있고 흙까지 먹는 어린이를 보았다는 것이 이들의 비참한 목격담이다. 북한의 식량사정은 김정일이 지난해 12월에 행한 비밀연설에서 『식량문제로 무정부상태가 조성되고 있으며 군량미도 바닥이 났다』고 실토했을 정도로 절박하다.또 지난 2월초 북한의 큰물피해대책위원회는 작년말 현재 식량재고가 24만6천t 뿐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이같은 북측의 발표에 대해 대부분의 북한문제전문가들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외국으로부터 더 많은 식량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북한이 의도적으로 재고량을 축소했을 것으로 보았다.이러한 발표가 사실이었다면 지난 1월중에 이미 재고가 바닥이 났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시점에서의 북한의 식량사정은 심각하지만 다수의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정부당국이나 대다수의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세계식량계획(WFP)의 보고서나 중국 등이 추정한 자료를 분석하고 북한이 지난해 외국에서 도입했거나 원조를 받은 곡물량을 감안해볼 때 아직도 적지않은 재고가 남아있고 비축미도 상당하리라는 추정이다. 이와관련,정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의 연간 곡물수요량을 5백70만t으로 볼 때 지난해 생산량이 3백69만t으로 어림되고 있고 도입량이 1백만∼1백10만t에 이른 점을 감안하면 북한의 양곡연도인 지난해 11월부터 8개월간은 지탱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관계당국은 그러나 올들어 외국의 지원과 외국으로부터의 도입량이 12만t에 불과해 식량사정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북한의 농업과 식량문제를 계속 추적하고 있는 농촌경제연구원의 김운근 박사는 지난해 곡물생산량량을 2백50만∼3백만t으로 추정하고,11월 이전에 70만∼80만t을 앞당겨 소비해 재고가 많이 줄었들긴 했으나 배급량을 최소량으로 줄인다면 금년 상반기까지는 재고와 햇감자등으로 북한주민들의 연명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김박사는 그러나 옥수수가 나오기 직전인 7월쯤 위험한 고비를 맞게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식량난이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해도 북한체제가 당장 붕괴될 것으로는 보지않고 있다.그러나 배급체제가 무너지면서 사태수습이 불가능하거나 대량난민 또는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고 있다.가뜩이나 식량난으로 사회일탈현상이 팽배한 가운데 식량난의 장기화에 따른 영양실조로 사망자가 늘고 당장 먹을 것이 없을 경우 극한행동으로 나올수 밖에 없을 것이란 설명이다. 북한은 연내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일의 권력공식승계를 앞두고 이처럼 식량사정이 절박해지자 유럽과 미국등지에 대표단을 보내 식량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식량지원을 보장한다면 4자회담에 참석하겠다고 하는 등 식량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 페루 수도 리마(세계 문화유산 순례:28)

    ◎침략자 유적에 가려 잉카의 영화는 전설로/정복자에 유린된 찬란한 「황금의 도시」/태양의 제전에는 이방인유적 번듯이/산마르틴 광장에는 유럽·남미문명이 함께 호흡 중남미 광대한 대륙에는 마야문명 말고 또다른 신비의 잉카(Inca)문명이 있다.그 문명의 중심지 페루로 떠나기에 앞서,마야문명을 뒤로 한다는 아쉬움에서 선인장으로 만든 술 데킬라 몇잔을 마셨다.지도로 본 리마는 멕시코시티에서 그리 멀지않은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멕시코시티를 떠나 페루의 수도이기도한 리마까지는 비행기로만 꼬박 7시간이 걸렸다. 밤늦은 시각리마에 닿았다.경제사정이 어렵고 사회가 안정되지 않은 탓인지 숙소로 가는 도중에 만난 사람들 표정은 밝지 않았다.그러나 리마라는 도시 자체는 날이 밝은뒤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리마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역사유적지구라서 그야말로 고색창연했다.그런만큼 많은 유적들을 간직했거니와,스페인 식민지시절(1532년∼1824년)만들어진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리마는 크게 산 마르틴(San Martin)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구시가지와 20세기 들어 개발한 신시가지로 구분됐다.지금은 일종의 우범지역으로 변해버렸지만 구시가지는 한때 리마의 중심지였다.산 마르틴 광장 한가운데는 당당한 모습으로 말위에 올라앉은 남미 해방의 영웅 산 마르틴 장군의 동상이 우뚝했다.잉카와 스페인,오늘의 남미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산 마르틴 광장은 「히론 데 라 우니온」(Jiron de la Union)이라 이름붙여진 길을 따라 남쪽으로 통했다.약 1㎞에 이르는 이 길 주변에는 각종 상가건물이 빼곡히 들어섰다.마치 서울 명동거리가 연상됐다.길이 끝나는 곳에는 대통령궁·시청 청사 등이 관아가를 이루었고,바실리아 대성당 등 주요 건물들도 함께 자리했다. 대통령궁은 식민지시대 건축물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1532년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처했던 곳이기도 했다.대통령궁은 항상 걔방돼 관광객들이 늘 붐볐다. 입구를 지나 중앙통로를 따라 들어섰다.2층의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 양쪽으로 남미 해방의영웅 볼리바르 장군과 산 마르틴 장군의 흉상이 서있다.두 사람은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에서 각각 독립운동을 일으켜 남미대륙 전체에 해방의 기쁨을 안긴 인물들이다.그리고 그 아래 로비 대리석 바닥에는 잉카의 상징인 태양 문양이 각인돼 있었다.300년에 걸친 속박의 사슬을 끊어냈던 해방 당시의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왼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갔다.중간쯤에 170여년전 페루 최초의 대통령이 타던 프랑스제 마차가 고풍스런 모습으로 진열됐다.그리고 여러 개의 고급스러운 방이 주위를 빙둘러 이어졌다.1535년 스페인 특산물 타일로 장식한 화려한 벽화가 있는 접견대기실,남미 최고품인 니카라과산 나무 장식장 등으로 치장한 기자회견실도 그 주위에 있다.기자회견실에는 잉카제국 마지막 왕 망코의 둘째아들로 스페인에 맞서 최후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호세 가브리엘 곤도르칸키 케초아의 대형초상화가 걸렸다.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 장엄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꾸몄다는 귀빈대기실은 관광객들이 탄성을 자아낼 만큼 호화스러웠다. 대통령궁 앞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위병교대식은 흥미로운 것이었다.매일 상오 11시30분이면 푸른색과 흰색 위주의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먼저 등장했다.어린이들이 전통민속춤을 추고나면 위병교대식이 진행됐다.그 의식은 근엄하기 보다는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려는 페루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페루 역시 남미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성당 건축물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대통령궁 왼쪽에 자리잡은 바실리아 성당도 그중 하나다.1535년에 시공돼 남미 최초·최대의 성당이기도한 바실리아 성당은 1586년과 1746년·1940년 등 세차례에 걸쳐 지진을 겪고서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리마 사람들의 자랑이 대단했다. 이 성당에는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의 미라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채 유리관 안에 전시됐다.피사로는 1546년 자신의 심복의 손에 죽음을 맞았는데,미라 옆에는 고향에서 가져왔다는 한줌의 흙을 보관했다.정복자의 수구초심을 읽으면서 흥망성쇠를 안고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소리를 듣는듯했다. 대통령궁에서 3블럭 정도 동쪽의 산 프란시스코(San Francisco)성당과 부속 수도원 역시 장관을 연출했다.1620년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한 이 성당은,남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성당 전면을 장식한 돌조각은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들여온 것으로 그 아름다움은 극치를 이루었다.이 성당의 지하무덤 카타콤(Catacombs)은 유명했다.1788년에 지하 4층 규모로 만든 카타콤에는 성당건립에 기여한 사람들이나 성직자 4만여명이 잠들어 있다. 식민지시대 유적들에 가려 잉카의 흔적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황금이 많아 엘도라도로 불렸다는 잉카제국.시내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황금박물관」을 맨 먼저 들렀다.풍요로웠던 잉카문명의 역사가 어렴풋이나마 마음속에 들어왔다.태양이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었던 잉카인들에게 황금은 태양이 흘린 눈물을 의미했다. 잉카의 황금유물은 기원전(BC) 4세기에서 기원(AD)2세기까지 융성했던 비쿠스 문명에 뿌리를 두었다.그후 차빈·모체·나스카·와리·치무를 거쳐잉카문명기에 접어들어 더욱 활짝 피어났다.박물관에 전시된 목걸이·반지·코걸이·귀걸이·옷핀 등 장신구와 왕관·악기 등이 모두 황금제품이다.심지어 우의까지 금으로 제작한 것을 보면 황금을 다룬 솜씨인 연금술은 고도의 경지에 이르렀던 모양이다.그러나 풍부한 황금은 유럽 정복자들을 유혹했고,그 문명을 정복자들에게 내주는 비극을 불러들였다. ▷여행가이드◁ 페루의 화폐단위는 솔(Sol)로 미화 1달러당 2.2솔 정도다.시내에 크고작은 숙박시설이 많으나,안전을 고려해 호텔에 투숙하는 것이 좋다. 세비체·로모살타타·안티쿠초 등 페루 전통음식은 15달러로 조금 비싼 편.그러나 일반식당에서 당일 내놓는 메뉴를 주문하면 3달러 정도면 해결할 수 있다.한국식당의 웬만한 음식은 15달러 이상.물론 음료수와 물은 별도 주문이다.팁은 음식값의 10%.리마는 사막위에 세워진 도시인 탓에 지하철이 없고,출퇴근시간에는 교통난이 심한 편이다. 재미있는 것은 리마 시내를 돌아다니는 자동차의 30%정도가 한국산 자동차라는 사실이다.대통령궁이나 성당 등에 들어갈 때는 4∼5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 「음식물 및 유기성 폐기물의 퇴비화처리기술」 심포지엄

    「음식물 및 유기성 폐기물의 퇴비화 처리기술」을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25일 서울 은평구 국립환경연구원 대강당에서 한국·미국·일본·벨기에의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국립환경연구원(원장 심영섭)이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종합대책의 하나로 한국유기성 폐자원학회와 공동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미국 보스턴대 엘리어트 엡스타인 부교수의 「미국 퇴비화 하부구조의 개관:현황,정책 및 기술」,정재춘 연세대교수의 「퇴비화를 통한 쓰레기의 감량화 방안」,남궁완 건국대교수의 『난지도 음식물쓰레기 퇴비화공장의 현황」 등 3편의 논문을 요약,소개한다.〈편집자 주〉 ◎퇴비화를 통한 쓰레기 감량화 방안­정재춘 교수/퇴비염분 가축분뇨 섞으면 희석 음식물쓰레기 퇴비화시에는 종종 톱밥과 같은 팽화제 부족의 문제가 제기된다.이의 해결방안은 다양하다.첫째 폐가구,포장재를 파쇄하여 사용한다.또 도시가로수의 전정목과 산림의 간벌목을 톱밥재료로 사용한다.부숙퇴비를 10∼30%,또는 50%까지 팽화재료를 이용해 계속 재순환시킨다.폐타이어를 파쇄해 그 조각의 일부를 팽화제로 사용할 수도 있다.왕겨,볏짚 등 농업부산물을 이용해도 된다. 또 음식물쓰레기 퇴비시 염분문제가 제기되는데 이것도 용도에 따라 사용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원래 음식물쓰레기에는 염분함량이 최대 1%인데 물기를 짜내면 0.5∼0.8%가 감소된다.또 물로 헹구면 염붐함량은 더욱 내려가 3분의 1정도로 낮아진다.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할 때는 톱밥과 같은 팽화제를 50%가량 섞기때문에 최종 생산된 퇴비에는 염분함량이 0.4%가 된다.이것을 가축분뇨와 함께 섞어서 퇴비화하거나,사용할 때 다른 퇴비와 혼합하면 염분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음식물쓰레기 퇴비는 그대로 사용하더라도 논이나 토지,산림,폐광,간척지등에 사용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이곳에서는 고인물이나 빗물에 염분이 씻기며 통상 표토의 1%미만의 퇴비를 살포하게 되므로 연용에 의한 피해도 거의 무시할 정도다. 음식물쓰레기는 탄소함량이 45.9,질소함량이 2.52%이다.인산함유량은 하수오니와 분뇨잔사보다 낮은 1.62%이며 카리함량은 0.82%로 위의 두가지 폐기물보다 높다. 음식물쓰레기 퇴비는 일반 농가,과수원,원예농가 등에 이용할 수 있다.채소,곡식,과수,화분,잔디 등에 이용할 수 있으며 고급작물에 줄때는 다른 퇴비와 섞어서 사용하면 된다. 또 녹지나 산지에 이용할 수 있다.특히 산지의 이용은 방대한 수용처를 제공해준다.퇴비에 마그네슘이나 칼슘을 첨가하고 펠릿형으로 조제하여 살포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또 간척지를 농경지로 이용하기까지 약 10여년동안 음식물쓰레기 퇴비를 사용하면 간척지에 유기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골프장에의 이용도 녹지에의 이용과 마찬가지다.골프장은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다량 살포로 수질오염이 문제되고 있는데 음식물쓰레기 퇴비를 사용함으로써 화학비료의 살포를 조금이라도 줄일수 있고 퇴비가 갖는 비료성분의 저장능력에 의해 지하수로의 오염물질 유입량을 줄일 가능성도 있다.또 여름철에 스키장의 사면에 퇴비를 사용하여 잔디를 생육하면 겨울철에는 눈이 잘 달라붙고 쉽게 녹지 않게 된다.운동장에 이용할 경우에는퇴비에 모래와 표토를 혼합하여 사용한다. 퇴비는 또 폐광이나 황무지의 재생에,독일이나 네델란드에서는 축사의 깔개물질로도 이용되고 있다. 음식물쓰레기 퇴비는 이밖에 흙과 20∼30% 섞어서 쓰레기 매립지의 복토재로 사용할 수 있다.이 경우 복토재난도 덜고 침출수 발생도 줄이며 매립지의 사용기한을 늘일수 있다.김포 수도권매립지의 경우 하루 1천t처리 규모의 음식물쓰레기 퇴비화시설을 설치하면 10년이상 더 사용할 수 있다. 어쨌든 재활용 퇴비생산은 음식물쓰레기의 감량화,지력의 회복,자연생태계의 회복등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므로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적극 기술지도를 해야 한다.퇴비화기술은 고도기술이 아니라 비교적 저급의 기술이므로 기술지도에 있어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선진국처럼 도시민과 농민을 위한 퇴비화지침서를 개발,보급하고 시범공정의 운영,호별방문 기술지도등의 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퇴비사용을 증대하기 위한 홍보활동을 병행하여야 한다. ◎미국 퇴비화 하부구조의 개관 현황­엡스타인 교수/발효과정의악취 제거기준 마련 퇴비화는 생슬러지와 정원쓰레기에 대한 매우 효율적인 관리전략으로 평가되고 있다.반면 도시고형 폐기물의 퇴비화는 낮은 매립 가격과 열악한 시설에 의한 경험때문에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미국의 많은 주들은 나름대로의 재활용목표를 설정해놓고 있는데 적어도 35% 이상을 재활용하려는 지역은 고형폐기물 처리계획에 퇴비화를 포함시켜야 한다.많은 주들과 지역사회들은 비록 비용이 더많이 들더라도 다른 처리 방안보다 퇴비화를 선호할 뿐 아니라 좋은 시설의 건설과 운영을 장려하기 위해 규제를 바꾸나가고 있다. 퇴비 제품들 또한 큰 호평을 받고 있다.다만 원예상들에 대한 판로를 확대하려면 보다 품질향상을 꾀해야 한다.고속도로 관리청의 최근 퇴비사용 명세서는 퇴비화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퇴비화위원회와 여러 대학들에서 실시하는 각종 연구결과는 농업과 원예에서 퇴비를 활용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퇴비화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방해물은 악취이다.때문에 새로운 시설들은 악취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도록 설계되고 있고 주정부들은 이제 악취의 허용기준을 준수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퇴비화시설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가면서 퇴비화과정의 악취는 이제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퇴비화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음식점이나 공공기관등에서 발생하는 생슬러지와 음식물쓰레기이다.만일 훌용한 시설들이 설계되고 설치된다면 도시 고형폐기물의 퇴비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많은 주들은 퇴비화시설이 높은 환경기준을 만족시키고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각종 규제조치를 마련,지역사회의 불만에 대비함으로써 퇴비화를 더욱 확대해 나가고 있다. ◎난지도 음식물쓰레기 퇴비화 공장­남궁완 교수/중금속 함량 기준치이하로 나타나 난지도 퇴비화공장은 국내 최초의 대규모 음식물스레기 퇴비화시설로서 난지하수처리장 부지에 설치돼 지난해 7월부터 가동을 시작,현재 하루 6t가량의 음식물쓰레기와 8t가량의 공극 개량제(폐목재)를 트입해 처리하고 있다.투입되는 음식물스레기의 물리적 조성을 음식류,채소류,과일류로 분류한 결과 음식류가 60% 정도를 차지했고,채소류와 과일류는 발생 송파·동작·강동구별로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각각 20% 내외를 차지했다.수분 함량은 82% 내외였다. 퇴비화가 진행되는 동안 수분함량은 30∼40%로 줄었으며 전기전도도는 최대 3.5mmhos/cm까지 증가했다. 최종 생산퇴비의 중금속 함량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의 퇴비품질 기준과 비교했을때 분석한 모든 항목에서 기준이하로 나타났다.수분의 경우도 미국의 일반적인 퇴비범위인 40∼60%,일본의 퇴비범위인 60% 전후보다 훨씬 작은 값이지만 우리나라의 퇴비기준 30% 이하에 적합한 26%였다.전기전도도는 3.1mmhos/cm로 매우 민감한 작물에 한에서만 영향을 받을 것으로 평가됐지만 이러한 퇴비를 실제 토양에 살포할 경우 상당한 희석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됐다.휘발성 고형물질 함량은 59%의 값을 보여 우리나라 퇴비기준(유기질 함량 25%이상)에 만족했다. 난지도 퇴비화공장 시설의 개선방안으로는 투입폐기물 저장조의 크기를 현재의 2배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또 1차트롬멜 스크린도 운전시 소음이 나고 체인이 늘어나기도 하며 혼합된 물질이 통과되고 난 이후 막힘현상으로 인해 스크린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개조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퇴비단의 경우 자동온도 측정기로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온도를 측정함으로써 공기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개조되어야 할 것이다.또한 수분함량의 정기적인 분석에 의한 적정 수분함유량을 유지하는 방안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 남통에 묻힌 두시인 김택영·낙빈왕(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3)

    ◎한많은 일생 만년을 떠돌다 낭산에 흙이되어…/한말 망명시인 김택영­붓끝으로 토해낸 망국의 설움… 문집 「소호당집」 남겨/당대 「초당4걸」 낙빈왕­측천무후에 맞서다 투옥∼사면∼반란∼객사 파란의 삶 1만5천리를 도도하게 굽이치던 양자강이 황해 5백리를 앞두고는 강인지 바다인지 분간키 어렵게 넓어진다.바다같은 양자강 북쪽에 항구처럼 떠있는 부두가 있다.남통.상해에서 서북쪽으로 상숙을 거쳐 호포까지 거의 두시간.다시 호포에서 북안의 남통까지 페리로 양자강을 건너는데 꼭 한시간이 걸렸다. 옛날에는 아득한 모랫벌이었다.오대 후주때부터 마을을 이루고 행정의 구역을 이루었으니 고작 1천년의 역사를 가졌다.그 1천년의 역사도 소조하기 짝이 없다.서쪽으로는 양자강으로부터 밀려오는 모래,동쪽으로는 황하,바다는 바다로되 누우런 바다,하지만 5대양 6대주로 떠나는 무역선이 남통까지 부산하다. 남통은 양자강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황해에서 밀려온 모래로 이룩된 삼각주.하지만 삼각주에는 이름도 사나운 낭오산이 있다.그것은 남통시에서 남쪽으로 8㎞지점,거기에 주봉인 해발 107m의 낭산,그 동쪽 한참 떨어진 곳에 나직한 군산,검산,그 서쪽 가까운 곳에 마안산,황이산,그것들은 황해를 향해 ㄴ자형으로 늘어서 있다. 낭산은 남통의 머리요 가슴이다.그 머리에는 북송 태평흥국(976∼983) 연간에 지은 광교사의 지운탑이 35m 5층의 훤칠한 키로 서서 장강과 황해를 멀리 조망하고 있다.그 가슴에는 비록 시대와 혈족은 다르지만 만년을 떠돌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친 네사람의 나그네가 묻혀 있다.그중에 두 사람의 시인이 있어 남통을 차마 근대방직공업의 집산지로만 기록하지 못하게 한다. 그 하나는 당나라때 「초당4걸」로 추앙받았던 낙빈왕(638?∼684?)이요,또 하나는 우리나라 한말 마지막 망명시인 창강 김택영(1850∼1927)이다.낙빈왕이 오직 그 무덤만을 남겼음에도 우리겨레 김창강은 그의 고택과 함께 유택이 남통시시청문화재당국의 보호하에 온전히 보존된 것이다. 낙빈왕은 절강의 의오사람.그는 왕발과 함께 신동으로 불리울만큼 총명한 시인이었지만 일찌기 아버지를 여윈뒤가난과 의협으로 떠돌다가 심지어 노름꾼을 따라다니기도 했다.한때 몇군데의 지방관을 지내면서 뜻을 얻지 못하다가 설상가상 당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의 섭정에 분개,상소를 올리다 투옥당했다. 가까스로 사면당한 낙빈왕은 절강 임해의 현령으로 잠시 봉직했지만 무측천이 국호를 「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때마침 광택1년(684),당시 유주 사마로 유배당했던 이경업(?∼684)이 양주에서 반무동란을 일으키자 낙빈왕은 유명한 「이경업과 함께 무후와 싸울 것을 천하에 고함」(대이경업전격천하문)이란 격문을 쓰고 결연히 그 싸움에 투신했다. 이경업이 죽고 전열이 흐트러지자 빈왕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위의 격문에서 「한겹의 흙이 미처 마르지 않았거늘 육척의 어린 왕손은 어디 갔는가?」고.(일배지토미건,육척지고안재?). 그러니까 선제가 죽은지 이제 며칠인데 어느새 찬탈이 웬말이냐는 충직한 두마디에 무후조차 숙연하더라는 이야기다.가위 왕발의 「등왕각서」에 견줄만한 명문이었다.그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느니 장강에 몸을 던져 자진했다는 등 전설속에 충직의 말로는 참담한 채 객사,결국 아무 연때도 없는 남통에 묻혔고,그의 고향에는 따로 의관총을 만들었다. 창강 김택영은 한말 순국시인인 매천 황현(1855∼1910)과 한말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매천은 벼슬에 매달리지 않고 숨어서 애국시를 쓰다가 일제의 강점에 자결로 맞섰고,창강은 통정대부로 학부편찬을 지내다가 을사보호조약 그 직전,고국을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1905년 9월 9일,56세의 창강은 먼저 상해로 상륙했다.망연한 이역에서 먼저 그가 흠모하던 청말의 시인 유월을 찾아 소주로 갔으나 생계를 잇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하는수 없이 옛날 면식이 있던 남통의 거부요 교육가·정치가였던 장건(1853∼1926)을 찾아 청원하자,방직과 조선으로 사업이 번창했던 장건은 창강의 시재를 아낀 나머지 우선 그를 남통의 한묵림 출판사에 편교로 초빙,생활을 보장해 주었다.또 그가 중국 최초로 건립한 남통박물원 부근인 서남영촌 29호에 세칸짜리 집을 마련해 주었다. 남통 22년동안,허가항에 이어 세번째 이사온 이 집을 「차수정」이라 했다.그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그늘을 빌려 시원하게 산다는 자조적인 말인데 창강의 타국살이를 암유키도 한다. 그는 여기서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붓과 머리로 조국의 문학에 공헌했고 그 스스로의 문학을 중국에 남겼다.그는 우선 「매천시집」을 비롯,신자하집」·「여한십가문초」·「역사집략」·「교정삼국사기」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시집이나 역사전적을 간행한 이외에 자신의 문집인 「소호당집」을 정리 출판했으니 나라잃은 한을 나라의 정신문화 정리간행으로 풀다가 그는 끝내 남통의 거류민증을 손에 든채 표박을 마쳤다.그는 경술국치때 그 비보를 듣고 친상을 당한 죄인인양 소복을 입고 망명문학의 절정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오호부」를 표효했는데 한국인으로 그의 목숨은 그때로 끝났던 것이다. 「오호라!하늘 아래 동서남북,땅 아닌 곳이 없는데,나는 왜 이 땅에 태었을까? 고왕금래,세월은 영원한데,나는 왜 이 때를 만났을까? 하늘을 불러 애타게 여쭈어도 하늘은 입을 다문채 말이없네. 오호라!하늘을 불러도 끝내 대답이 없거늘,나 옷깃 풀고 외치옵니다.(후략)」 마침 올해가 창강 70주기라서 남통시문화국과 남통박물관은 기념행사 준비에 한창이다.창강의 묘는 낭산 동남쪽에 남통시청문화재로 보호받고 있고 그 묘포는 「조선시인김창강지묘」로 적혀 있다.거기서 20∼30m 내려오면 낙빈왕의 무덤,한과 한의 시인이 위 아로 누워있다.
  • 신 신토불이(김호준 정치평론)

    신토불이­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용어는 지난 80년대말 농협이 우리 농산물 애용을 권장하는 슬로건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친숙해진 말이다. 직역을 하면 『몸과 흙은 둘이 아니다』인 것을 『태어난 곳에서 나는 농산물이 자기 몸에 제일 맞는다』는 뜻으로 토산품 선전에 원용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이 공직사회에 더욱 심화되고 만연된 눈치보기·무사안일을 일컫는 신종 유행어로 회자되고 있다. 공직사회의 「신토불이」란 공무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어 땅인지 사람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아냥을 담고 있다. ○공직사회 무사안일 빗대 사용 개혁의 서슬이 시퍼렇던 문민정부 초기에 잔뜩 움츠러든 공직사회를 풍자하던 유행어는 「복지부동」이었다. 「복지부동」은 그래도 땅위에 두꺼비처럼 엎드린 사람을 분간이라도 할 수 있다지만 「신토불이」는 땅속의 두더지처럼 숨어버려 아예 보이지도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고 할까, 집권초 경증)의 「복지부동」이 임기말에 이르자 중증의 「신토불이」로 바뀐 것이다. 임기말이 되면 권력누수와 더불어 공직사회의 기강해이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요즘처럼 공직사회가 질타의 대상이 된 적도 없을 것이다. 눈치보기·일 안하기는 약과이고 차기를 겨냥한 줄대기와 돈 챙기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다. 멀지않아 윗사람이 바뀔 것이라는 빤한 예상 때문에 상부 지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을 뿐더러 근무시간중에 잡기를 즐기거나 개인 일을 보러다니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고건총리의 새벽 기습순찰에 흐트러진 근무자세를 여지없이 노출한 파출소라든가 야간근무중 업소에서 주민들과 도박판을 벌인 경찰관의 모습은 기강해이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노동법사태·한보대출비리·김현철씨 국정개입의혹 등 잇단 대형 악재가 온 나라를 분노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공무원의 사기와 의욕을 저상시킨 것만은 틀림없다. 잦은 개각도 공직기강의 해이를 부른 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국가의 위기는 모른체 하고 권력싸움에만 열을올리는 정치권의 실망스런 모습도 공직자들의 일탈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관료주의가 강하게 확립된 나라로 흔히들 프랑스와 일본을 든다. 특히 프랑스 관료사회는 통치체제가 어떻게 바뀌든 그것 때문에 나라의 기본시책이 흔들리는 일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 공직자들도 대통령과 정치권이 어떻게 돌아가든 좀 더 주인의식과 책임감에 투철했더라면 국정이 이렇게 표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한보사태를 공룡처럼 키운 책임도 따지고 보면 공직사회에 있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표가 지적했듯이 정부의 한보사태 처리는 그 접근방법이 애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한보그룹에 대한 제철소 인허가과정, 공유수면 매립과정, 은행대출과정, 기업운영의 성과등을 철저히 밝힌 뒤 사법처리에 착수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이런 실질문제에 대한 조사없이 검찰수사부터 하는 바람에 비리만 부각돼 의혹과 불신을 증폭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정부가 한보에 대한 불가피했던 정책지원 내역만 밝혔더라도 국민들로 하여금 한보대출 5조7천억원을 몽땅 비리의대상으로 보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투철한 주인의식 확립 절실 그런 점에서 늦게나마 정부가 경제부총리 주도 아래 한보사태의 전과정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에 착수한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다. 한보사태의 종합적인 진상파악은 이수성내각에서도 거론됐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해당 부처에서 기피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경제수석들이 관여한 문제라면 청와대가 풀어야지 왜 우리 손에까지 흙을 묻히려고 하느냐는 관료들의 회피주의가 사태확산을 방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마 임기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헌법을 고쳐서 대통령 임기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임기말 현상은 주기적으로 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복지부동」이라든가 「신토불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공직자들의 투철한 주인의식 확립뿐이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주역이 바로 공직자들이다. 요즘 일본에서는 관료망국론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튀어 나오지만 한국의 공직자들 앞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다. 공직자들이 다시 자긍심을 갖고 나라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난국극복의 주체로서 공직자들의 심기일전과 분발을 촉구한다.〈논설위원실장〉
  • 김포 쓰레기매립지 흙운반비 조합서 550억 부당지급

    ◎환경관리공단 감리서 적발 환경관리공단은 11일 김포 수도권 쓰레기매립지 운영관리조합의 운영실태에 관한 감리를 실시한 결과,조합측이 지난 92년 2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수도권 건설현장 등에서 발생한 8백14만여t의 토사를 쓰레기를 덮는 흙(복토재)로 반입하면서 매립 시공회사인 동아건설에 5백50억원을 운반비 명목으로 부당하게 지급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건축법에 따르면 폐기물인 토사를 매립지에 운반할 경우 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전액 건축물 건설업자가 부담하도록 돼 있다.
  • 싼 쌀값… 귀한줄 모르면 버력입어(박갑천 칼럼)

    쌀도 물건이니 사고판다.한데 우리겨레의 쌀을 팔고사는데 대한 생각은 유다르다.사는걸 일러 반댓말 「팔다」를 쓰잖은가.체면을 중시하여 없어도 있는체 사러가면서 『팔러간다』고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돈구실하던 쌀을 돈같이 여기면서 생긴 말이라고도 한다.쌀을 산다는건 돈을 파는 것이므로 『돈팔러간다­쌀팔러간다』로 됐다는 생각이다. 사고파는데는 값이 있다.그값은 사람에게도 매겨진다.그래서 공자도 아름다운 옥(미옥:공자를 가리킴)을 팔아야 하느냐 간직해야 하느냐는 자공의 물음에 대답한다.『팔아야지(고지재),팔아야 하고말고.난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논어」자한편).비싸게 팔리고자 했던 것이리라.그값은 같은 물건이라도 형편따라 오르고 내린다. 쌀값의 오르내림도 그렇다.「지봉유설」(재리부)을 보자.태평했던 신라태종때는 베 한필값이 벼 30∼50섬이었는데 고려공민왕때는 흉년이 들어 쌀 다섯되로 바꾼다.조선 선조때인 계사(1593)갑오(1594)년은 왜구로 황폐해지면서 무명 한필값이 쌀 두되였으며 말 한마리도 쌀 서너말에 살수있었다.그때의 베나 쌀은 돈구실을 해주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쌀소비량은 한사람앞에 104.9㎏으로 95년의 106.5㎏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국민의 한끼 소비량은 96.8g이라는 계산이었으니 돈으로 칠때 2백원이 채못된다.식생활에서의 쌀값 비중을 알게하는 숫자다.그런만큼 돈으로만 따지면서 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잊어간다.먹다 남기면서 버리는 일쯤 예사롭게 생각하는 것도 그맥락이라 하겠다. 정재륜은 쌀에 대해 엄격했던 효종임금 얘기를 그의 「공사견문록」에 써놓았다.그가 궁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밥을 물에 말아 몇숟갈 뜨고서 밀쳐놓았다.이를 본 임금이 먹을만큼만 떠다먹어야지 무슨 짓이냐면서 하늘이 내린것을 귀한줄 모르고 버릴때 그죄를 면할길 없다고 귀띄게 야단친다.나중에 수랏상 나가는걸 보니 밥그릇에 밥알 한톨 묻어있지 않았다.농민의 피땀어린 쌀에는 하늘의 비틈한 뜻도 곁들여 있음을 임금은 깊이 새겨 알고 있었다. 금덩이속에 묻혀사는 사람에겐 금이 흙같을 수도 있다.그러나 금은 금이다.흔하고 싸다하여 귀함을 잊고 존절을 모를때 하늘이 버력내릴걸 왜 모르는고.굶주리는 북녘땅 겨레만 생각한대도 쌀을 허투루 다룰 일인가.〈칼럼니스트〉
  • 빼어난 효능… 탁월한 품질/인삼의 고장 강화도

    ◎토질·기후 최적지 “전국 최고” 자부/수삼 1채에 5만원… 도매가로 판매/가격 불안정·수입상품 늘어 재배감소가 문제 우리나라 인삼의 효능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 명나라 이시진이 지은 의약서인 「본초강목」에서조차 『인삼중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것은 한국으로부터 도래한다』고 명시돼 있다.이름하여 「고려인삼」이다. 고려인삼 가운데서도 강화인삼을 최고로 치는 것은 강화도가 인삼을 재배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화의 토양은 점질 양토인데다 통풍이 좋은 해양성기후로 인삼이 자라기에 최적의 토양·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다른 지역 인삼이 4년근인데 비해 강화인삼은 6년근으로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이 풍부해 약효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인삼에 비해 조직이 치밀하고 인삼의 영양분이 밀집된 뿌리의 발달상태가 양호하다. 강화 인삼은 강화인삼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강화인삼센터」내 79개 점포에서 도매가격으로 직판되거나 이곳을 찾는 소매상들을 통해 전국에 공급되는데 생산량이 많지 않아 공급이 달리는 형편이다. 강화인삼은 지난 76년까지는 재배면적이 1천여㏊에 달했으나 지금은 200㏊에 불과한 실정이고 경작인도 400명 뿐이다. 이는 농촌 인력난으로 경작면적이 날로 감소하는 데다 인삼가격 불안정과 중국인삼 수입 등으로 농민들의 경작의욕이 상실돼 가기 때문이다. ▷종류◁ 수삼은 인삼밭에서 재배한 것을 캐내 자연상태 그대로 보존한 것으로,효능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강화읍 갑곶리 844의 1에 자리잡은 강화인삼센터에서 취급하는 인삼은 거의 모두가 수삼이다. 백삼은 수삼의 껍질을 깎아 말린 것인데 인삼에 흠집이 많거나 장기보관이 필요할 경우에 이 방법을 취한다. 홍삼은 수삼을 증기로 찌는 것으로 담배인삼공사에서 수매한 인삼을 이러한 방식으로 여러 형태의 가공식품을 만들어낸다. ▷고르는 법◁ 인삼의 상태가 썩지 않고 흠집이 없이 깔끔한 것이 좋다. 색깔은 흙빛깔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인삼의 효능과는 직접 관련이 없으나 적변삼(붉은 빛깔을띤 인삼)은 질이 조금 떨어진다. 인삼은 뿌리의 상태가 중요한데 뿌리가 잘뻗고 개수가 많은 것이 좋다. ▷가격◁ 수삼의 경우 굵은 것일수록 가격이 높은데 1차(750g)당 5∼6개 들은 것이 5만원,7∼8개 4만5천원,9∼10개 3만5천원,11∼13개 3만원선이다. 선물용으로는 1차당 7∼8개 이하 들은 것이 적합하다. 삼계탕용 잔삼은 1차에 25개 든 것이 2만원,차를 끊이는데 사용하는 파삼은 1만2천원선이다. 백삼은 1근(300g)당 4년근이 3만5천원,5년근 4만2천원,6년근 6만원선이다. ▷효능◁ 원기를 북돋워 허약체질을 개선하고 체력을 증진시켜 주며 심장과 폐·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혈액생성을 왕성하게 하고 맥을 고르게 하며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다.몸안의 독 제거와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 ▷문제점◁ 수매제도의 불안정이 인삼재배의 위축을 가져오고 있다. 담배인삼공사에서 인삼을 수매하는 가격이 5년째 동결돼 있는데다 수매가 또한 시중가보다 높지 않아 지난해에는 강화지역 재배농민들이 수매를 거부하였다. 5∼6년전부터 밀수입돼 시중에 싼 가격으로 불법유통되고 있는 중국인삼도 인삼가격 불안정을 부추기고 있다. 강화인삼협동조합 관계자는 『강화지역의 인삼재배가 다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수매제도의 확립 등 정부의 다각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우리나라 최고 농경유적 발굴

    ◎건물대박물관팀 진주시 남강댐상류 덕천강유역/두둑·고랑 갖춘 철기시대의 농사흔적 뚜렷/삼한사회 등장시기… 변한 세력의 터전 추정 경남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농경유적이 발굴됐다.지금까지 밝혀진 농경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촌리유적은 초기철기시대(BC 3,000∼0년)농사흔적을 뚜렷이 간직하고 있다.건국대박물관 최무장 교수팀이 발굴한 상촌리유적은 남강댐 상류 덕천강가 층적평야지대에 자리잡은 대규모 농경유적이다. 상촌리 농경유적은 9천600㎡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되었다.현재 드러난 농경지에는 이랑이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모두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발굴한 농경유적 가운데 A구역은 5m 간격으로 두둑을 만들고 50㎝너비의 고랑을 파놓았다.지금까지 확인한 이들 이랑은 남북방향으로 50m나 길게 뻗혀있다.그리고 13구역은 이랑 너비를 불규칙하게 동서방향으로 만들어 놓고,긴 고랑을 남북방향으로 내어 이랑들과 교차시켰다. 이들 농경지의 고랑은 물을 댔던 관개시설로 보았다.이랑은 두둑과 고랑의 흙색깔이 서로 달랐다.두둑의 흙색깔이 고랑의 흙색깔 보다 훨씬 더 검었는데,그 이유는 거름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다.특히 상촌리일대 평야의 흙은 비옥하기 이를데 없는 충적토.거기다 수량이 풍부한 강물을 끼고있는 탓에 초기철기시대 당시에도 농경조건이 대단히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이 일대의 시대층위를 가려내기 위해 판 C지구에서는 초기철기시대 층위 아래 형성되었던 청동기시대 층위도 찾아냈다.청동기시대 층위에서는 기둥구멍이 있는 움집터가 발견됐다.또 초기철기시대 생활층에서는 베를 짤때 쓰는 가락바퀴와 고기잡이 그물에 매다는 어망추,토기 등의 유물을 수습했다.이밖에 현재의 지표 아래로 하부구조가 묻혀있는 고인돌 2기가 확인됐다. 상촌리 선사농경지가 이루어진 초기철기시대는 삼한사회가 등장한 시기에 해당한다.그러니까 삼한시대인 것이다.이 지역은 농경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변한사회 한 세력집단의 터전일 가능성이 많다.중국의 사서 「삼국지」에 나오는 변진의 고자미동국 중심지로 알려진 고성이 그리멀지않은 거리에 있다.그러나 고성지방의 유적은 조개더미가 주류를 이루어 상촌리 농경유적과는 그 성격이 아주 다르다.
  • 주남지 살리기(외언내언)

    94년 덴마크 학자들은 무작위로 자국내 1㎡의 숲지면을 샅샅이 뒤지는 작업을 했다.약 4만6천마리의 작은 땅벌레와 그 비슷한 생물들,2백만마리의 회충류,4만6천마리의 곤충을 발견했다.그리고 같은 장소의 흙 1g에서는 1백만마리의 세균,효모세포 10만개,곰팡이 조각 5만개를 찾아냈다. 이런 연구의 의도는 무엇인가.그저 생물 다양성의 놀라움을 즐기기 위해서인가.물론 그렇지 않다.생태학은 지금 생물종들에서 그 종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풍부한 상호관계를 추적하고 있다.생물들의 연결망이 환경의 보존이나 파괴의 결과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실제로 식용식물에 있어 개량한 단종을,타종잡초를 다 걷어내고 재배할 때 어느날 갑자기 알 수없는 질병으로 대규모 파괴를 당하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다양성구조를 바꾸면 그것이 치명적 결손으로 바뀔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이것이 이제는 생물서식처 보존의 가장 핵심적 이유다. 지난 15일 「동양최대 철새 도래지」로 각광받는 주남저수지 갈대숲 방화사건이 있었다.이후 또 한번 보존과 개발의 딜레마에 부딪히게 되었다.「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우선 살아야 할 것 아니냐」「철새보호도 중요하지만 주민생존권이 급하지 않은가」라는 의견이 당연해 보인다.그러나 철새가 그곳에 오는 연유에는 그저 먹을 곡식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새가 없어지면 같은 장소에서 어떤 생물의 상호관계가 깨질 수 있고 그것이 또다른 치명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문제도 이제는 연구할 때가 된 것이다. 「주남저수지를 사랑하는 시민모임」 주동으로 「철새도래지 주남살리기 시민연대」가 곧 결성될 모양이다.보존·개발의 마찰이 시민간의 운동속에서 더 잘 조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그러면서 자연보호가 단순한 정서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일도 더 체계화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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