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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예 저작권 기증자’ 배우 이광기 사진전

    ‘명예 저작권 기증자’ 배우 이광기 사진전

    ‘명예 저작권 기증자’로 선정된 배우 이광기(사진)가 사진전을 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는 다음달 3~10일까지 파주에 있는 갤러리 ‘끼’에서 이광기가 저작권을 국가에 기증한 사진 작품을 위주로 전시회를 연다고 30일 밝혔다. 이번 전시회는 2019년 명예 저작권 기증자로 선정된 배우 이광기와 가수 진영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광기의 사진은 국내와 아프리카 부룬디, 아이티, 몽골 등 해외 여러 지역 삶의 흔적을 담았다. 현장에서는 진영이 기증한 음원 ‘그대는’도 들을 수 있다. 3일 열리는 오프닝 행사에는 가수 양희은,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 등이 참석해 축하공연도 열 예정이다. 사진전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이광기가 직접 작품 설명을 할 예정이다. 한국저작권 위원회는 “저작권 기증, 자유이용허락표시(CCL) 활성화 등을 통해 저작권 나눔 문화를 확산하겠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지구 환경 파괴했다 (사이언스紙)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지구 환경 파괴했다 (사이언스紙)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지구의 자연환경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온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등 국제 연구진이 전 세계 고고학자 255명과 협력해 약 1만 년 전부터 170년 전까지 세계 토지 이용을 조사해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3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 연구는 ‘아키오글로브 프로젝트’(ArchaeoGLOBE Project)라는 이름의 크라우드소싱(집단 협업) 운동 덕분에 가능했다. 이는 인류사를 다루는 전 세계 고고학자들에게 설문지를 보내 정보를 얻은 것이다. 연구진은 총 255명이 응답한 정보를 통해 약 1만 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 전 세계 700여 지역의 토지가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농경으로 지구상에 남긴 흔적은 신석기 시대인 1만 년 전부터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대 인간들이 수렵채집 외에도 농경을 통해 지구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을 보여준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인류세’ 개념이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됐음을 시사한다. 인류세는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의 환경 체계가 급격히 변했고 그 탓에 지구 환경과 맞서 싸우게 된 시대를 뜻한다.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이동경작과 목축농업이 이미 4000년 전 세계 토지 면적의 40% 이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토지 경작은 2000년 전까지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전 연구와 모순되는 데 인류는 생각보다 1000년 일찍 땅을 일궈온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마이클 바턴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는 “인간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구의 자연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에 어떻게 기후변화 등의 문제에 대처할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면서 “지구의 환경 변화는 최근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고대 사람들의 활동은 지구상에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돼 있고 화석으로도 남아 있다. 이에 대해 바턴 교수는 그들의 환경적 성공과 실패를 연구하면 미래에 긍정적인 변화를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바턴 교수는 이번 연구가 미래에 인간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모델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정확한 예측은 현재와 과거의 비교에 의존하는 데 지금까지 자료는 인간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연구는 발견했다. 또다른 연구 참여자인 미국 필드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 큐레이터 게리 파인먼 박사는 대규모 자료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3000년 전 전 세계에서 토지 사용에 의한 환경적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이는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약 1만2000년 전 인간은 주로 수렵과 채집을 했는데 이는 농부들이 일반적으로 토지를 경작하는 것처럼 자연환경과 집중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제 우리는 3000년 전 지구 곳곳에서 실제로 침해적인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30일자)에 게재됐다. 사진=사이언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전쟁의 상처 안고 살아가는 60년대 ‘인간 군상’을 엿보다

    전쟁의 상처 안고 살아가는 60년대 ‘인간 군상’을 엿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8회 서울의 영화3(이만희 감독의 귀로)’ 편이 지난 24일 중구 정동과 서소문동 그리고 서울역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지난달 27일부터 시작한 혹서기 야간투어 프로그램의 마지막 다섯 번째 순서였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평소보다 한 시간 빠른 오후 5시 집결지인 시청역 2번 출구에서 출발했다. 먼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정동 전망대에 올라 영화의 주요 무대 중 한 곳인 정동과 덕수궁 일대를 조망했다. 이어 정동제일교회~배재학당역사박물관~고려삼계탕~시위병영 터~호암아트홀을 차례로 둘러봤다. 가톨릭 성지로 거듭난 서소문역사공원은 칠패시장과 만초천, 처형장의 옛 흔적을 품은 곳이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서울역 고가도로에서 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서울역의 황혼을 지켜본 뒤 서울역 광장에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인 영화 귀로와 유형유산인 고려삼계탕, 서울역 고가도로, 서울역 광장 등 모두 4곳이었다. 해설을 맡은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영화의 주요 현장에서 영화보다 더 재미난 영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참석자들은 흥미진진한 60년대 미스터리 멜로드라마에 숨을 죽였다.한국영화사의 거장 이만희(1931~1975) 감독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쟁이었다. ‘인간 이만희’의 삶은 온통 전쟁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에 참전, 통신병으로 5년간 복무한 그는 “내가 가진 기억은 군대와 영화밖에 없다”,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으면 직업군인으로 살았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연출작 51편 중 11편이 전쟁영화였으며 멜로물에도 전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켰다. 소설가 김승옥은 이만희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전진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는 압축적인 헌사를 묘비명으로 바쳤다. 전쟁영화 감독 역이 가장 앞에 놓인 것처럼 그의 영화에 담긴 휴머니즘, 시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이해와 생동감 넘치는 묘사는 모두 전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흔히 대표작으로 ‘마의 계단’(1964), ‘만추’(1966), ‘귀로’(1967), ‘휴일’(1968) 등을 꼽지만 그의 진정한 대표작은 1963년 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다. 이 전쟁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그는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됐다.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년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충족시킨 인물이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가 개발한 기존 장르를 활용하면서도 재해석했고, 대사로 설명하기보다는 영상과 분위기로 영화를 느끼게 했다. 전쟁영화도, 멜로드라마도, 액션스릴러도, 시대극도 자신의 스타일로 창조한 스타일리스트였다.이만희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1960년대 한국영화를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대중 지향의 장르영화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미학과 예술성을 개척했다. 영화 ‘귀로’는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병상에 눕게 된 남편(김진규 분)을 돌보던 아내 지연(문정숙 분)의 망설임과 선택에 관한 영화다. ‘가부장제 현실과 자유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실존적 고투를 벌이는 여성 캐릭터’라고 평가할 만하다. 영화는 우연히 알게 된 젊은 남자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심리와 도시의 풍경이 맞물린 감각적인 멜로드라마다. 이상과 현실, 권태와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 여인의 몸부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육교, 가로등, 거리의 시계, 서울역 광장을 통해 여주인공의 결핍과 욕망을 대사 없이 상징적으로 화면에 담았다. 영화에는 남편이 있는 이층 방으로 연결되는 계단, 연인과 함께 밤을 보내는 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언덕 위에 있는 성당까지 이어진 돌계단 등 세 종류의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들은 욕망과 죽음 혹은 구원과 파멸을 은유한다. 또한 이 계단들은 삶과 죽음, 허상과 실상을 구획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허상의 삶 너머에는 아득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 계단 숏들의 미세한 변주는 지연의 심리 변화와 이 부부의 관계 변화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 계단 전후에 반복되는 사건들이 배치된다. 반복과 차이의 구조는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기차역에서 신문사로 가는 길에 나오는 건널목에서는 기차가 지나가고, 육교를 걸을 때 대형 시계가 보인다. 또 핸드백은 이별을 예감하게 한다.1960년대 후반 서울의 모습이 영화를 통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가와 육교 그리고 지하도는 1960년대 후반 서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 건조물들이다. 이 시기 도로와 교량 건설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서울은 차량을 위한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아현고가도로는 준공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도심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은 외곽으로 쫓겨났다.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타고 싶지만 막상 타고 보면 답답하다”고 여주인공은 말한다. ‘귀로’에서 여주인공은 남편의 심부름으로 ‘잔설’이라는 제목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신문사에 전달하기 위해 경인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다. 서울역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이동하기 위해 스쳐 가는 곳이다. 남편의 소설 원고를 신문사에 전달하기 위한 주기적인 외출이 그녀를 숨 쉬게 한다. 그녀는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기차를 타고 신문사로 간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외출은 그녀에게 ‘짧은 여행’이다. 기차는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한다. 인천과 서울을 왕복하는 지연의 동선은 세 번에 걸쳐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기본적으로 그녀의 동선은 기차~서울역~육교~신문사로 이어지고 돌아오는 길은 그 역순이다. 이 동선에 남산 야외음악당과 서울역 근처의 성당을 산책하는 것이 가끔 낄 뿐이다. 그녀는 서울의 거리를 걷는 여성 산책자다. 그녀의 집은 정주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속에 사로잡힌 폐쇄의 공간일 뿐이다. 서울 나들이는 실존의 이유를 찾는 여정이다. 그녀는 존재는 도시의 군중 속에 있다. 서울 도심의 유일한 철도건널목인 서소문건널목은 하루 평균 560회가량 열차가 지나다니는 전국 통행량 1위 건널목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전통적인 처형장이었지만 천주교 역사에서는 순교성지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며 수많은 순교자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한국 교회의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이다.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를 배출한 국내 최대이자 세계적인 성지다.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서소문은 도성과 마포, 용산을 잇는 관문이자 조선시대 1번 국도인 의주를 잇는 중요한 문이었다. 서소문과 그 서쪽 약현 사이 저지대를 가르며 안산과 인왕산에서 발원한 만초천이 한강으로 흘렀는데 그 유역을 따라 시가지가 발달했다. 군자창, 만리창 등 관영창고가 위치했고, 칠패시장과 소의문 밖 시장이 서로 이어졌다. 종로시전, 이현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을 형성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우리나라 왕성 5부 안의 애오개는 서강으로 가는 길이고, 약고개는 용산으로 가는 길로서 곡물이 폭주하고 수레가 부딪치고 사람이 어깨를 부딪는 곳”이라며 번잡한 시가지로 묘사했다. ‘귀로’의 여주인공이 서울역에서 세종로 신문사로 가는 길에 건넜던 그 서소문건널목에는 아직도 사람과 열차가 분주하게 지나다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차 망우리 ■일시 및 집결장소: 8월 31일(토) 오전10시, 망우역 1번 출구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우주를 보다] 인도 찬드라얀-2가 포착한 놀라운 달의 극 지방 

    [우주를 보다] 인도 찬드라얀-2가 포착한 놀라운 달의 극 지방 

    인도의 두 번째 달 탐사선 찬드라얀 2호가 달 주위를 도는 궤도에 접어듦으로써 달 탐사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무인 탐사선인 찬드라얀-2는 지난 20일 인도우주연구기구(IRSO)에 의한 엔진 원격조정으로 정확하게 달 궤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며, 2주 이내의 착륙 위한 일련의 궤도를 조정 기동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찬드라얀-2는 지난 23일 우주선에 장착된 지도작성 카메라로 찍은 달 표면 사진들을 보내주었는데, 여기에는 달의 북극에 분포한 크레이터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잡힌 이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눈에 띄는 크레이터들은 플라스켓, 로제스트벤스키, 에르미트, 좀머펠트, 커크우드 크레이터 등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잭슨, 마흐, 미르타 및 코롤레프 크레이터 등이 산재해 있는 달 뒷면 북반구의 영역을 보여준다. 찬드라얀-2는 달의 극 사이를 맴도는 궤도에 자리잡고있다. 약 일주일 안에 궤도선은 착륙선을 분리시킨 후 내년까지 같은 궤도를 계속 돌 예정이다. 찬드라얀-2는 극 지방의 크레이터에 물 얼음이 있는지 탐사할 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찬드라얀-1 탐사선을 모델로 제작된 찬드라얀-2가 탐사하려고 하는 곳은 바로 달의 남극으로, 자원이 풍부하고 태양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달 탐사의 최적의 장소로 꼽히는 곳으로, 미 항공우주국(NASA)도 2024년 아르테미스의 달 탐사 임무를 이곳에서 수행할 예정이다.인도 자체 기술로 제작된 찬드라얀 2호는 궤도선, 착륙선 비크람, 탐사장비 프라그얀으로 이뤄졌다. 궤도선은 2400㎏ 무게로 1년간 달 궤도를 돌면서 표면 촬영, 대기 연구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비크람은 달 남극 부근에 착륙할 예정이다. 프라그얀은 물의 흔적을 추적하고 암석과 토양을 분석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임무 수행 기간은 지구 시간으로 14일이다. 프라그얀은 태양에너지로 작동된다. ISRO 소속 과학자들이 원격으로 조정한다. 우주선에서 분리된 착륙선은 달 표면을 탐사할 로버를 탑재하고 있는데, 달 남극 근처 표면에 연착륙을 시도할 예정이다. 이 미션이 성공하면 인도는 러시아, 미국, 중국에 이어 네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한 국가가 된다. 착륙은 9월 7일로 예정되어 있다. 찬드라얀 2호는 특히 저렴한 개발비용으로 주목받았다. 개발에 투입된 비용은 97억8000만 루피(약 1648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는 현재 2022년 이전 첫 유인우주선 발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관련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IRSO는 자체 개발한 우주선으로 우주인 3명을 상공 300∼400㎞의 지구 저궤도로 올려보낸 뒤 최장 7일간 머물게 할 계획이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화성서 발견된 돌 ‘롤링스톤스’로 명명…아이언맨·믹 재거 감격

    화성서 발견된 돌 ‘롤링스톤스’로 명명…아이언맨·믹 재거 감격

    골프공보다 약간 큰 화성의 돌에 전설적인 록그룹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이름을 따 '롤링스톤스'(Rolling Stones Rock)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었다. 특히 롤링스톤스라는 이름을 명명하는 이벤트를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아 큰 화제가 됐다.지난 23일(현지시간) AP통신 등 외신은 전날인 22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로즈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롤링스톤스의 특별공연에서 롤링스톤스 명명식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이 돌은 지난해 화성 탐사선 인사이트에 의해 처음 발견된 화성의 암석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사이트의 자체 추진력 때문에 약 1m 정도 굴러갔다는 점. 이같은 이유로 말 그대로 화성의 돌은 롤링스톤이 됐다.이날 특별공연 무대에 등장한 다우니 주니어는 "과학과 전설적인 록밴드의 만남은 항상 좋은 일"이라면서 "이 이름을 공식화하는 데 이미 6만 명이나 찬성 투표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롤링스톤스 명명에 가장 감격한 사람은 역시 리더 믹 재거(76)였다. 그는 "이번 투어를 축하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라면서 "이는 우리 밴드의 길고 파란만장한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으로 미 항공우주국(NASA)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기뻐했다. NASA 제트추진연구소 지질학자 맷 골롬벡은 “그간 수많은 다른 행성의 암석을 봐왔지만, 이번에 명명된 암석은 어떤 과학 논문에도 존재하지 않는 특별하고 가장 차가운 암석”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26일 화성 적도 인근 엘리시움 평원(Elysium Planitia)에 무사히 착륙해 탐사를 이어가고 있는 인사이트는 기존 화성 탐사로봇과는 다르다. 이제까지의 탐사로봇들이 주로 화성 지표면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는 임무를 수행했다면 인사이트는 ‘땅파기’를 통해 화성 내부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4월 인사이트는 화성 지진(marsquake)일 가능성이 높은 희미한 진동을 처음으로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대륙에 남겨진 희미한 기개

    [그 책속 이미지] 대륙에 남겨진 희미한 기개

    조선의용군의 눈물/박하선 사진·글/눈빛/172쪽/2만 2000원 “왜놈의 上官(상관) 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벽돌이 떨어진 건물 벽에 쓴 글. 다소 섬뜩하게도 느껴지는 이 글은 중국 화북 운두처촌에 남아 있는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의 흔적이다. 1940년 초반 조선의용군이 써놓은 것을 주민들이 뜻도 모른 채 계속 덧칠했다. 덕분에 당시 선명했던 그들의 기개가 그대로 남았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로 김구 선생이 이끌었던 임시정부 광복군을 꼽겠지만, 중국 태항산과 연안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도 있었다. 가장 최전선에서 일본과 맞섰는데도, 중국공산당과 함께해서, 해방 후 북조선으로 향했다는 이유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가 박하선의 사진집 ‘조선의용군의 눈물’은 1940년대 초반부터 광복 때까지 활동한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따라간 사진집이다. 흑백사진 90점과 현장에서 느낀 감정을 글로 담아낸다. 조선의용군이 숨어 지내던 산기슭 토굴 ‘야오동’,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부서진 채 방치한 교육장 등을 거칠게 그린다. 그들의 삶을 따라간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조선의용군은 어떤 의미냐 묻고, 조선의용군 출신 김학철의 유언으로 여정을 마무리한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항하라!”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이국땅에 온 선교사들 희생, 노을에 붉게 물들다

    [흥미진진 견문기] 이국땅에 온 선교사들 희생, 노을에 붉게 물들다

    오늘 투어의 첫 목적지는 절두산 순교 성지였다. 절두산은 본래 ‘잠두봉’이라 불리며 한강의 명승지였지만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을 당한 뒤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런 배경 설명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순교 성지로 들어갔다. 순교 성지는 조경이 잘 돼 있었고 곳곳에 성인의 동상, 조각품 등도 놓여 있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지나자 ‘절두산 십자가의 길’이 마련돼 있었는데,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부활에 이르는 열다섯 장면을 비석에 글과 그림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비석의 구절 하나하나를 함께 읽으며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마음 또한 깨끗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으로 이동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기념비적인 장소가 한곳에 같이 있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는 총 417명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한 분 한 분의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종교적 소명 하나만을 가지고 먼 이국땅에 와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마침 해가 약간 저물어 묘원을 비추는데 그 풍경이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마지막 목적지는 선유도공원이었다. 가는 길에 정몽주 동상을 지나쳐 버스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넜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변의 노을 지는 풍경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선유도는 원래 정수장으로 사용됐지만 정수장이 폐쇄되면서 공원을 조성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곳곳에는 정수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특히 정수장 시설을 활용한 수생식물원이 인상 깊었다. 수생식물원을 보며 무엇인가 새롭게 만들 때 기존의 흔적을 모두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발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소진 이화여대 행정학과 4년
  • [와우! 과학] 3500만 년 전 미국 초토화…소행성 충돌 증거 발견

    [와우! 과학] 3500만 년 전 미국 초토화…소행성 충돌 증거 발견

    지구는 탄생 직후부터 끊임없이 소행성 충돌에 시달렸다. 대개는 무시해도 될 만큼 작은 크기지만, 6600만 년 전 수많은 생물의 멸종을 가져온 소행성 충돌처럼 큰 충돌도 있었다. 이런 대격변 탓에 기존의 생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진화를 촉진하고 다양한 생명체가 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조류를 제외한 공룡과 여러 중생대 생물을 멸종시킨 칙술루브 크레이터(충돌구)는 많은 연구 끝에 최근에야 그 존재가 확인됐다. 지구 표면은 지질 활동과 물에 의한 침식으로 지형이 계속 바뀌는 데다 바다의 면적이 넓어 크레이터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오래된 지층에서 대규모 충돌의 흔적을 찾아 과거 설명할 수 없었던 급격한 환경 변화의 이유를 알아냈다. 북미 대륙의 지층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신생대 중반에도 대형 소행성 충돌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미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텍사스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형 운석 충돌 시 볼 수 있는 텍타이트(tektite)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높은 압력과 온도에서 만들어지는 텍타이트는 운석 충돌의 증거로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충돌 규모가 크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 사이의 체서피크만에서 원인이 되는 크레이터를 찾는 데 성공했다.(사진) 다만 최근까지도 체서피크만 크레이터의 정확한 충돌 시기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미 애리조나 주립대학 연구팀은 크레이터에서 400㎞ 떨어진 바다 지층을 드릴로 시추해 그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있는 동위원소를 찾아냈다. 우라늄-토륨-헬륨(uranium-thorium-helium) 연대 분석 결과는 충돌 시기가 3500만 년 전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시기 충돌의 결과로 북미 대륙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이 연구의 또 다른 중요성은 거대 소행성 충돌이 지구 역사상 얼마나 흔한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체서피크만 크레이터는 지름 40㎞ 크기로 지금까지 확인된 지구 크레이터 중 15번째로 큰 크기다. 칙술루브 크레이터가 지름 150㎞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지만, 그래도 파괴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런 대규모 충돌이 과거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알아낸다면 앞으로 발생 확률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진=2014년 대양수심도(GEBCO) 세계 지도(대양수심도 운영위원회 홈페이지)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
  • [아하! 우주] 中 달탐사 로버가 보내온 놀라운 사진들

    [아하! 우주] 中 달탐사 로버가 보내온 놀라운 사진들

    창어-4, 달의 이면에서 8일간의 과학작업 완료 중국의 달 착륙선 창어 4호가 달의 뒷면에서 만 8일간에 걸친 과학 작업을 완료했다고 중국의 우주항공 전략을 총괄하는 국가항천국(CNSA)이 15일 발표했다. 또한 창어-4와 탐사 로버 위투- 2는 실험하는 사이 틈틈이 찍은 달 표면의 사진들을 지구로 전송해왔다고 관련 인사가 덧붙여 설명했다. 이 듀오의 임무는 1월 초 달의 뒷면에 착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착륙은 달의 뒷면에서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착륙이었다. 달의 낮과 밤은 각각 지구 시간으로 약 2주간 지속되며, 기온은 낮에는 섭씨 130도, 밤에는 영하 130도까지 떨어진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이 듀오의 미션이 달의 가혹한 조건들을 극복하면서 무난히 수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월 9일에 끝난 7일 간의 미션 기간 동안 두 로봇은 중성자 검출기, 방사선 기기, 적외선 분광계 및 무선 장치를 사용하여 다양한 측정을 완료했다. 듀오는 추운 밤을 견디기 위해 다시 2주간의 수면 모드에 들어간 후 7월 26일에 깨어나 8월 7일까지 또 다른 미션을 완료했다. 그때까지 로버는 달의 이면에서 총 271m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했다. 올해 초 달 뒷면에 착륙한 창어 4호와 위투 2호 탐사 로버는 달에 밤이 찾아오면 수면 모드에 들어가고, 햇빛이 비추는 낮이 오면 활동에 들어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탐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달의 뒷면 쪽은 우리가 지구에서 보는 앞면과는 상당히 다르며, 이러한 차이점이 어떻게 발생하게 됐는지 과학자들은 아직까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착륙선 창어-4와 탐사 로버 위투-2가 수집한 데이터가 그 수수께끼를 해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 창어 4호는 달의 뒷면에 착륙한 최초의 우주선으로, 달 뒷면 지역의 지질학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5월 창어 4호는 달 뒷면의 지표면에서 지각과 핵 사이의 물질인 달 맨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74주년 광복절 다크 투어리즘 명소 선정

    74주년 광복절 다크 투어리즘 명소 선정

    서울관광재단이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에 남겨진 당시 흔적들을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 명소를 선정해 소개했다. ‘남산 국치의 길’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남산 자락에 들어선 시설들을 따라간다. ‘한국통감관저 터’, ‘노기신사 터’ 등이 이 구간에 있다. ‘경제 침탈의 길’은 보신각 남쪽 광교에서 숭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이르는 구간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지역의 흔적을 살핀다. ‘고종의 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이른바 ‘아관파천’ 당시 통과했던 길을 복원한 것이다. 전체 길이가 불과 120m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코스다. 덕수궁 중명전, 정동전망대 등과 함께 둘러보면 좋다. 서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박물관’은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경교장, 돈의문 박물관, 경희궁, 한양도성박물관, 청계천박물관 등 다수의 분관으로 구성돼 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를 복원해 조성한 곳이다. 1907년 경성감옥으로 시작한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은 독립투사만 4만여명이라 전한다. 5000여장의 당시 수형 기록표 등을 전시해 놨다. ‘망우리공원’은 독립투사와 유명 예술인 등이 묻힌 곳이다. 예전엔 공동묘지였으나 최근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안창호, 한용운, 이중섭, 박인환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물들의 묘지가 있다. 유관순 열사 합장비도 세웠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소풍 하면 떠오르던 그곳… ‘어른이대공원’ 추억을 거닐다

    소풍 하면 떠오르던 그곳… ‘어른이대공원’ 추억을 거닐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6회 어린이대공원 야유회’ 편이 지난 10일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2시간 동안 열렸다. 장마와 불볕더위를 피해 오후 6시부터 진행하는 혹서기 야간투어 프로그램 세 번째 순서였다. 40여명의 참석자가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 4번 출구에 어김없이 집결했다. 절기상 말복(11일)과 입추(8일) 사이에 낀 여름의 초절정이지만 54만㎡의 광활한 숲으로 둘러싸인 어린이대공원 안은 마치 에어컨을 켜 놓은 듯했다. 이날 투어는 어린이대공원을 수십번씩 오가면서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던 동물원, 식물원, 놀이터 같은 전통적인 시설을 중점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해설을 맡은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평소 별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던 어린이대공원의 존재 이유를 엄마의 입장에서 상냥하고 친절하게 소개해 호응을 얻었다. 퀴즈쇼도 흥미를 유발했다. 주말 저녁이라 시설물 대부분이 문을 닫은 게 흠이었다.소파 방정환 동상이 서 있는 서울어린이대공원은 더이상 어린이대공원이 아니다. 2006년 무료 개방, 2009년 재개장과 함께 사실상 ‘어른이대공원’으로 거듭났다. 1973년 개장 이후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른들의 추억을 소환하는 초대형 놀이터이거나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 지역 주민들의 산책 및 운동용 공원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운영을 맡은 서울시설공단도 세태를 반영해 ‘세상에서 가장 큰 놀이터’라고 서울어린이대공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대공원의 수명이 만료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놀이기구와 식물원, 동물원은 물론 상상나라, 수영장, 어린이회관 같은 정통 어린이·유아 대상 시설이 여전히 동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대공원은 기존에 있던 골프장 코스의 그린을 이용한 잔디밭 조성이 목적이었다. 개장 당시 국민소득 350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의 수도에 건립된 분에 넘치는 어린이 전용 시설이었다. 예산이 없어 부지는 강제로 수용하다시피 했고, 시설은 전문가의 재능기부와 기증, 성금으로 지었다. 어린이대공원이 조성된 1970년대 초반은 국내 정치·안보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어린이대공원 건설계획이 발표된 1971년 4월 20일은 제7대 대통령 선거 일주일 전이었으니, 다분히 선거를 의식한 선심성 공약이었다. 또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방북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남북 간 체제안보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 북한 어린이 시설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경쟁의 산물이기도 했다.또 당시 서울의 공원은 창경원(현 창경궁), 남산공원, 사직동원, 효창공원, 삼청공원, 파고다공원뿐이었다. 1976년 6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시민이 가장 많이 놀러 가는 곳은 창경원(198만명)이 1위였고, 다음이 어린이대공원(117만명)이었다. 조경이라는 개념이 막 도입돼 전문가도 부족했다. 정문과 팔각당은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엄덕문, 분수대는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조각한 김세중, 식물원과 동물원은 나상기와 이광로가 각각 맡았다. 재일교포 변주호가 기증한 벚나무 3500그루는 어린이대공원의 명물이 됐다.서울어린이대공원은 조선 최후 황후의 능이자 최초의 골프장, 최초의 어린이 전용 공원이라는 역사 기록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공간이다. 능동의 역사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 능에서 유래했다. 민씨가 황태자비일 때 죽었기에 유강원이었다가, 순종 사후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에 합장되면서 버려진 땅이 됐다. 민씨는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태호의 딸이자 실세 민영익의 동생이었다. 지금도 어린이대공원 한쪽에 20여기의 석물이 흩어져 있다. 능동이라는 지명은 능이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1927년 총독부 간부와 귀족, 부호, 외교관들의 사교용으로 조선 최초의 18홀 골프코스가 들어섰다. 서울컨트리구락부가 운영하는 군자리 골프코스였다. 해방 후 미 군정청 간부와 고위 공직자, 상공인이 어울리는 서울컨트리클럽의 능동골프장으로 복구됐다. 사단법인 서울컨트리클럽이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으로부터 평당 5000원씩 21만 3000평을 10억 5000만원에 사들였는데 이 땅이 오롯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남았다. 서울컨트리클럽 개장(1954년)과 광장동 워커힐(1963년), 어린이대공원 개장(1975년)은 한적한 목장 풍경을 보이던 뚝섬, 화양, 중곡지구 등 동부서울의 지형을 바꿔 놨다. 워커힐 건설 이후 1966년 성동교가 확장된 데 이어 두 번째 개발 바람이 불었다. 이웃에 건국대(1956년)와 세종대(1962년)가 차례로 문을 열었고, 광장동~천호동 구간 천호대교가 1974년 착공했다. 능동로, 중곡동길, 자양로 등 간선도로가 어린이대공원 개원 후에 개설됐다. 서울시내 모든 버스노선은 1번만 갈아타면 어린이대공원에 닿을 수 있게 개편됐고, 지하철 2·5·7호선의 노선을 확정하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어린이대공원은 초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했다. 개원 당시 총면적 71만 9400㎡ 중 육영재단 어린이회관에 10만 3085㎡, 통일교재단 리틀엔젤스회관(유니버설아트센터)에 2만 3278㎡를 각각 잠식당했다. 그 후에도 서울상상나라, 아리수나라, 119안전센터, 서울시민안전체험관 등이 조금씩 차지했다. 어린이대공원과 무관한 백마고지 삼용사 등 갖가지 동상과 조형물이 난립했다. 꿈마루는 어린이대공원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살아남은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설계됐다가 1973년 이후 새싹의 집이라는 이름의 어린이대공원 관리사무소 겸 교양관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두 건물의 용도 차이 때문에 정체성과 가치를 잃고 버려졌다가 2009년 철거 논의 과정에서 근대건축문화 자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기적처럼 힘을 얻었다. 골프장에서 어린이대공원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사건을 담은 중요한 건물이며, 나상진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어필이 수용돼 리모델링으로 방향을 틀었다. 버림받기 일보 직전에 구조된 것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나상진은 우리나라 건축 1세대를 양분하는 김중업과 김수근의 중간에 낀 인물이다. 석관동 옛 안기부 건물과 광화문 옛 경기도청을 설계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과감하게 사용, 1960~1970년대 격동의 서울을 품은 작품이다. 리모델링을 맡은 건축가 조성룡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재생과 회복’이라는 디자인 개념을 선택했다. 건물이 가진 과거의 가치를 현재 속에 되살려 장소 전체에 투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골격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낡아서 삭아 버린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안전장치만 보강했다. 만약 꿈마루에서 선유도가 떠올랐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두 곳 모두 조성룡이 살려 낸 도시재생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최준석은 꿈마루를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장소’라고 부른다. “집이지만 집이 아니고, 그렇다고 공원도 아니고, 길도 아닌 조금 이상한 공간”이라고 풀었다. 건축가 조한 역시 “역사의 굴곡을 견뎌 내며 철거를 피하는 이 건물의 곡예술도 한 편의 서사 드라마 같다”는 의미심장한 감상평을 남겼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17차 양화진과 선유도 ■일시 및 집결장소:8월 17일(토) 오후 6시 합정역 7번 출구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삼국시대부터 임실 봉화산 봉수 운영

    전북 임실 봉화산(해발 430m) 봉수대가 삼국시대부터 운영된 것으로 확인됐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봉화산 정상부와 조금 떨어진 평탄면에서 시행된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 때 운영되었던 봉수 시설의 흔적(토축의 구조와 출토물 등)을 확인했다”고 14일 밝혔다. 지난해 봉화산 정상부에 대한 1차 조사에서는 봉수대의 뚜렷한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다. 연구원에 따르면 이 평탄대지는 당시 지표면과 암반을 깎아 평탄하게 한 후 경사면에는 흙과 잡석을 섞어 쌓아 조성됐다. 평탄대지 토축(흙으로 쌓은 건축물)의 규모는 너비 약 2.5m, 높이는 1m 정도이며 생흙 면 위로 여러 겹의 목탄과 소토층이 확인됐다. 이 평탄대지는 당시 봉수와 관련된 일을 하는 봉수군의 주둔지로 추정된다. 또 현장에서는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短頸壺), 적갈색 연질 토기편 등 다량의 토기가 출토됐다. 봉화산 봉수 출토 유물들은 가야 고분군으로 알려진 전북 장수군 동촌리·삼봉리 고분군에서 나온 토기들과 매우 흡사해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굴 조사는 현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된 ‘가야 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사업’의 하나로 전북도와 임실군의 지원을 받았다. 임실 봉화산 봉수는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와 오수면 봉천리를 경계에 있는 봉화산의 정상부에 자리한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말레이 리조트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영국 소녀 부검 “타살 흔적 없어”

    말레이 리조트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영국 소녀 부검 “타살 흔적 없어”

    말레이시아 열대우림 리조트에 가족 여행을 왔다가 실종 열흘 만에 주검으로 발견된 발달장애 영국 소녀의 죽음에는 아무런 범죄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지난 3일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65㎞ 정도 떨어진 느그리슴빌란주 세렘반의 열대우림 리조트에 2주 일정으로 가족여행을 왔다가 투숙 이튿날 실종돼 지난 13일 리조트에서 2.5㎞ 떨어진 개울에서 옷을 걸치지 않은 주검으로 발견된 노라 앤 퀴어린(15)의 부검을 실시한 결과 아무런 범죄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굶주림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노라가 자학 행위를 했고, 그 결과 위장 내 출혈이 생겨 숨진 것으로 잠정 결론내렸다. 또 실종 사나흘 안에 숨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라의 신체 조직 샘플을 떼내 정밀한 검사를 더 진행할 예정이며 부모들은 딸의 유해를 영국으로 데려가도 좋다고 경찰은 밝혔다. 어머니 미브는 딸의 유해를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송환해 장례를 치를 계획이라고 BBC는 전했다. 노라의 어머니는 벨파스트 출신, 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이고, 노라는 어릴 적부터 영국에서 살았다. 노라는 발달장애와 학습장애가 있어 결코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녀가 제발로 리조트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며 납치됐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경찰은 앞서 수색구조대 자원봉사자들이 한 시민의 제보를 받고 시신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주검은 곧바로 헬리콥터로 병원에 이송됐다.노라 가족은 12일 벨파스트에 본사를 둔 사업체가 기부했다며 5만 링깃(약 1500만원)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또 영국·아일랜드·프랑스 경찰이 현장에 파견됐으며, 심지어 무당들까지 수색에 참여했다. 또 친척들이 만든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모인 돈만 11만 6700 파운드(약 1억 7245만원)가 넘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이모가 만든 페이지에 10만 파운드 이상이 걷혔고, 삼촌이 유로로만 모금한 페이지에 1만 6700 파운드 정도가 모였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오대산·‘한려해상 지심도’서 만나는 아픈 역사

    오대산·‘한려해상 지심도’서 만나는 아픈 역사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공단은 광복 74주년을 맞아 오대산과 한려해상국립공원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흔적을 돌아보는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13일 밝혔다. 오대산은 일제강점기 목재 수탈과 노동력 착취 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심도는 일제 해군기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대산 화전민 마을은 노동력 착취의 산물이다. 현재 월정사와 상원사의 선재길 구간에 화전민 가옥 터 50여곳이 남아 있다. 일제는 목재를 옮기기 위한 ‘목차레일’도 만들었다. 산속에 사는 화전민을 동원해 나무를 벤 후 목차레일로 산 아래까지 실어 날랐다. 목재를 운반할 때 불렀던 노동요인 ‘목도소리’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진다. 오대산 일대 지명에서도 수탈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오대천 상류의 ‘보메기’는 계곡의 보를 막아 나무를 쌓아 놓은 뒤 비를 이용해 한꺼번에 무너뜨려 이동시켰다는 데서 비롯됐다. ‘회사거리’는 오대산에서 이송한 목재를 가공하던 조선총독부 산하 목재회사가 있던 자리다. 회사거리 인근에는 나무를 운반할 때 이용했던 ‘목도’가 설치됐다. 두 사람 이상이 짝을 지어 밧줄로 목재를 연결해 운반했는데 사람수에 따라 2목도·4목도·8목도로 구분했다. 한려해상 지심도는 경남 거제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섬이다. 동백섬으로 불리며 매년 13만명이 방문하는 관광명소지만 일제강점기 해군기지로 사용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1936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일본 해군의 군사요충지로 함포 요새 역할을 했다. 지심도 주민을 동원해 만든 포진지와 지하벙커식 탄약고, 탐조등 보관소 등 군사시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종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성접대·뇌물’ 김학의, 오늘 첫 정식재판…혐의 전면 부인할 듯

    ‘성접대·뇌물’ 김학의, 오늘 첫 정식재판…혐의 전면 부인할 듯

    검찰, 1억원 뇌물 혐의 추가 기소 검토 억대 뇌물과 성 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13일 처음으로 재판을 받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정계선)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학의 전 차관의 첫 공판을 이날 연다. 김학의 전 차관은 2007년 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건설업자 윤중천씨에게 31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비롯해 1억 3000만원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최근 김학의 전 차관이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척 명의의 계좌로 모 저축은행 회장 김모씨에게서 1억원이 넘는 금품을 받은 흔적을 확인해 추가 기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김학의 전 차관의 뇌물 혐의액은 3억원을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김학의 전 차관은 검찰이 적용한 혐의 대부분을 부인할 것으로 보인다. 김학의 전 차관의 변호인은 앞서 지난달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전반적으로 혐의를 부인하는 취지”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공소사실에 범죄 행위의 구체적 일시·장소가 특정되지 않았다거나, 검찰이 공소시효를 맞추기 위해 ‘억지 기소’를 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날 김학의 전 차관 측이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밝히고 나면, 윤중천씨가 증인으로 출석하는 27일부터 본격적인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불황 시대’ 접어든 1970년대… 한줄기 빛 비춰준 ‘영상시대’

    ‘불황 시대’ 접어든 1970년대… 한줄기 빛 비춰준 ‘영상시대’

    197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는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제작사들은 외화 수입 쿼터를 받기 위해 저예산 제작으로 작품 수를 늘리는 데 치중했고, 그 자리는 호스티스영화와 국적 불명의 무협액션영화가 채워 갔다. 작품의 질이 떨어지자 관객들도 멀어졌다.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외국영화 상영편수를 한참 앞섰지만 관람객도, 상영일수도 외화 쪽이 2배 이상 많았다. 영화에 대한 당국의 규제도 강화됐다. 영화, 음반, 공연 등을 심의하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기록을 보면 영화 시나리오 사전 심의 결과 1974년 41% 수준이던 수정·반려 비율이 1975년에는 80%에 이를 정도였다. 1970년대 한국영화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 낸 것은 196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들과 ‘영상시대’ 동인들 덕분이었다.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정진우가 각각 ‘장마’(1979), ‘야행’(1977), ‘삼포 가는 길’(1975), ‘심봤다’(1979) 등을 내놓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이와 함께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홍파, 이원세 등 영상시대 동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축을 버텨 냈다. 바로 그 중심에 하길종과 그의 세 번째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이 있었다.●뉴웨이브의 기수 하길종 1941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하길종은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데모대의 최전선에서 4·19 혁명을 겪었다. 문학 활동을 했지만 후배 김승옥 등에 비해 주목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졸업 후 프랑스 항공사에 입사, 미국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됐다. 1965년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고, 영화학으로 MA(이론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저항운동과 청년 문화가 주도하는 변혁의 시기였고, 특히 그가 미국에 도착한 1960년대 중반은 미국영화의 뉴웨이브, 즉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한 때였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아서 펜, 1967), ‘졸업’(마이크 니컬스, 1967),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 같은 작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이 정치적으로 또 영화미학적으로 영화감독 하길종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였음은 분명해 보인다.이러한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1970년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의 감독 데뷔는 순탄하지 않았다. 김지하와 야심 차게 개발한 시나리오 ‘태인전쟁’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효석 원작을 동생 하명중이 각색한 ‘화분’ 촬영도 예산 부족으로 중단됐다. 1972년 ‘화분’을 데뷔작으로 완성했지만, 파악하기 힘든 이야기와 ‘푸른 집’으로 표현된 정치적 알레고리는 대중적인 호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시나리오들 역시 대중성 부족과 검열 문제로 좌초되면서 하길종은 영화계를 떠날 결심까지 하게 된다. 최대한 현실과 타협해 만든 두 번째 작품 ‘수절’(1974)이 어렵게 공개됐지만, 역시 좋은 흥행 성적을 얻지 못했다. 검열로 20분 이상 삭제된 데다 난해한 미학적 실험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충무로 영화계에서 하길종의 존재감은 세 번째 연출작 ‘바보들의 행진’으로 입증됐다. 15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과 평단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미국 유학파 출신 감독을 기대 반 시기 반으로 지켜보던 영화계 동료들로부터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하길종 본인은 상업적 성공에 양가적인 기분이었던 것 같다. 당시 기사들에 의하면 그 역시 언론의 관심과 흥행 성공에 매우 흡족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성사에서 연 시사가 끝난 후 김수용 감독이 드디어 대중적 방향감각을 찾았다고 칭찬하자 하길종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 역시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에게 어떤 작품이었을까. 물론 영화의 성공은 하길종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지만, 당대 청년들의 감수성을 읽어 내는 데 탁월했던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의 원작에 기댄 점도 그의 심정을 복잡하게 했을 것이다. 또 당국의 검열로 인해 117분의 영화가 최종 99분 분량의 작품으로 공개됐지만, 청년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혹은 스스로 행간을 메우며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지금도 한국영화 10선으로 선정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고 하길종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정작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화분’을 대표작으로 뽑았던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영화가 성공한 그해 하길종은 ‘영상시대’ 동인이 됐고,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도 부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여자를 찾습니다’(1976)와 개봉조차 하지 못한 ‘한네의 승천’(1977)으로 주춤했다가, ‘속 별들의 고향’(1978, 32만)과 ‘병태와 영자’(1979, 18만)로 다시 흥행력을 입증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세 작품 모두 최인호의 원작과 시나리오라는 점은 서구의 ‘뉴시네마’라는 이상과 통속적 대중문화라는 현실 사이에 놓인 하길종의 복잡한 고민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는 1979년 2월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검열의 상처를 안고 태어난 한국의 ‘뉴시네마’ ‘바보들의 행진’은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를 복기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작품이다. 병영을 방불케 하는 규율사회의 무거운 공기와 청년들의 건강한 저항 정신이 부딪치는 파열음을 영화 그 자체에 오롯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검열 과정을 살펴보자. 1974년 11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 처음 접수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197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사전 심의에서 시나리오 곳곳에 개작과 삭제 통보를 받았고, 하길종은 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두 달간 촬영을 진행했다. 물론 군데군데 삭제 요구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신 전체를 촬영했을 것이고 머릿속에만 있는 장면도 더 찍었을 것이다. 완성된 영화는 4월 초 본편 심의에 들어갔는데, 다시 15군데의 삭제와 단축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4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49일 동안 15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검열에 시달린 감독으로서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히트였던 것이다. 더구나 당국은 이 작품에 우수영화라는 타이틀까지 부여해 1970년대 대중문화 장의 아이러니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영화는 대학생들의 밝은 에너지가 발산하는 경쾌한 분위기와 시대의 공기에서 포착되는 암울한 정서를 오가며 매우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 사항을 반영해 만든 영화가 다시 20분 이상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하길종은 검열로 잘려 나간 영화를 어떻게든 살려 내기 위해 신을 흩트리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셀 수 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이후 후반부는 영화의 리듬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결국 불균질한 텍스트로 남게 된다. 아마도 하길종은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식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리는 개봉 때의 99분 버전보다 2분 29초가량 더 살아 있는 102분 버전(블루레이 출시본)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네거티브(원본)필름 자체에서 삭제된 15분 정도의 분량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바보들의 행진’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비롯한 서구 뉴웨이브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당대 청년 문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선택한 영화는 그들이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다큐적 질감을 택하고, 투박하지만 인상적인 숏 배열을 선보인다. 특히 과감하게 줌을 쓰는 장면들이 그렇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기성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며 뮤직비디오 시퀀스를 만든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해 영화의 이미지와 합일하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날이 갈수록’은 영화가 엔딩을 준비하면서 흘러나온다. 무기한 휴강이 결정된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처절한 외침이 들리고 병태(윤문섭)는 구역질을 하는 듯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예쁜 고래를 잡겠다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영철(하재영)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고래사냥’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영철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영화의 마지막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뽑힌다. 입대를 선택한 병태는 머리를 깎고 입영열차에 타고 있고, 영자(이영옥)가 플랫폼으로 뛰어와 그를 찾아낸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병태에게 영자가 키스하려 하고, 낭만적이게도 헌병이 그녀를 들어 키스를 도와준다. 심의 대본의 “입술을 맞추는 영자, 말리는 헌병”이라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의 폭력과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새긴 영화는 이렇게 당대의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아하! 우주] 34억 년 전 화성 바다에 소행성 충돌…초거대 쓰나미 발생

    [아하! 우주] 34억 년 전 화성 바다에 소행성 충돌…초거대 쓰나미 발생

    3년 전 과학자들은 대략 34억 년 전 화성을 덮쳤던 초대형 쓰나미의 증거를 발견했다. 이 거대 쓰나미는 적어도 수천㎞ 해안에 걸쳐 수백㎞ 범위의 광범위한 침전물과 흔적을 남겼다. 당연히 이 쓰나미가 화성을 휩쓸었던 시기까지 화성에는 큰 바다가 존재했다. 따라서 이 쓰나미의 범위와 크기를 연구하면 당시 화성에 존재했던 바다의 크기와 깊이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연구 초기에는 이 쓰나미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프랑스, 호주, 스페인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국제 연구팀은 거대 쓰나미의 방향과 발생 시기, 그리고 충돌 에너지를 고려할 때 화성 북반구에 있는 로모노소프 크레이터(Lomonosov crater)를 만든 것은 소행성 충돌이 그 원인임을 밝혀냈다. 로모노소프 크레이터는 지름 150㎞의 대형 크레이터로 한때 바다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화성 북쪽의 저지대인 베리티타스 보레알리스(Vastitas Borealis)에 있다. 따라서 당시 바다가 있던 지역에 대형 소행성 혹은 혜성 충돌이 발생하면서 화성 역사는 물론 태양계 역사상 가장 큰 쓰나미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소행성 충돌로 인한 쓰나미는 지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실 지구 표면의 대부분이 바다이고 지구가 화성보다 더 크기 때문에 지구에 더 큰 소행성 충돌 쓰나미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구의 지질 활동이 매우 활발하고 물에 의한 침식 끊임없는 침식 작용이 있어 수십 억 년 전 있었던 거대 쓰나미의 증거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쓰나미의 흔적은 지구가 아닌 화성에서 찾기 쉽다. 역설적이지만 바다가 사라지고 건조한 행성이 된 덕분에 오래전 쓰나미의 증거가 남은 셈이다. 과학자들은 적어도 30억 년 이전에 액체 상태의 물이 있을 정도로 따뜻하고 대기의 밀도도 높았던 화성의 과거를 연구하고 있다. 화성의 거대 쓰나미와 이 쓰나미를 만든 대형 크레이터는 당시 화성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로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 
  • ‘성접대 혐의’ 김학의, 억대 금품수수 추가 포착

    ‘성접대 혐의’ 김학의, 억대 금품수수 추가 포착

    김학의(63) 전 법무부 차관이 저축은행 고위 관계자에게서 억대의 금품을 수수한 정황이 추가로 포착됐다. 11일 검찰에 따르면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은 김 전 차관이 2000년대 초반부터 부인 명의 계좌로 모 저축은행 회장 김모씨에게서 1억원 넘는 금품을 받은 흔적을 확인하고 추가기소 여부를 검토 중이다. 수사단은 당시 김 전 차관이 일선 검찰청 차장검사와 검사장으로 일한 검찰 고위간부였던 점을 고려해 김씨가 향후 수사에 대비해 건넨 뇌물로 판단하고 있다. 김씨는 고양종합터미널 건설사업과 관련해 시행사에 약 6900억원을 불법대출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2012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사단은 지난 5월 구속돼 구치소에 수감 중인 김 전 차관이 계속 소환조사를 거부함에 따라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김 전 차관은 2003년 8월부터 2011년 5월까지 건설업자 윤중천씨와 또다른 사업가 최모씨에게서 뇌물 1억 7000여만원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올해 6월 구속기소됐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이 최씨로부터 1000여만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를 추가해 지난달 말 공소사실을 변경했다. 김씨에게 받은 1억원대 뇌물이 더해질 경우 전체 수뢰액은 3억원을 넘을 전망이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법서라] 검사들은 그만둘 때 왜 흔적을 남길까

    [법서라] 검사들은 그만둘 때 왜 흔적을 남길까

    검찰 내부망에 ‘사의 표명’ 문화대부분 자기반성·당부·감사 인사 [편집자주] 전국 최대 법원과 최대 검찰이 몰려 있는 서울 서초동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는 법조계는 이상한 일이 참 많습니다. 법조의 뒷이야기와 속이야기를 풀어드리는 ‘법조기자의 서리풀 라이프’, 약칭 ‘법서라’를 토요일에 선보입니다.검찰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검사들이 조직을 떠날 때 검찰 내부망인 ‘이프로스’에 사직 인사 글을 남긴다는 점입니다. 의무는 아닌데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하면서 이제는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고 낯설다고 합니다. 대체로 검사들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자기 반성과 당부의 글을 남기고 선·후배 등 검찰 직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물론 일부 검사는 검찰 인사에 따른 불만, 서러움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다른 정부 부처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인데요. 같은 법조인인 판사들 세계에서도 이런 문화는 없다고 합니다. 댓글에 울고 웃는 검사들...‘댓글패’ 선물 지난 6월 윤석열 검찰총장이 총장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70여명의 검사가 옷을 벗으면서 수 많은 사의 표명 글이 내부 게시판에 올라 왔는데요. 이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첫 번째로 사퇴를 알린 봉욱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의 글이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반듯하게 쓴 손글씨에 검찰 직원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직접 펜으로 꾹꾹 눌러 쓴 4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내부 게시판에 올렸기 때문인데요. ‘봉욱체로 지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흘러 나왔습니다. 이렇게 사의 표명 글이 올라오면 댓글이 달립니다. 실명 게시판이기 때문에 ‘악플’이 달리기는 어려운 구조입니다. 한 전직 검사 표현에 따르면 성의 있게 댓글을 단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뉠 뿐입니다. 보통 평검사가 그만둘 때는 100~150개, 부장검사는 150~200개, 검사장급 이상은 300개가량의 댓글이 달린다고 합니다. 근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검찰 안에서 인연을 맺은 직원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댓글 수도 늘어날 수밖에 없을텐데요. 봉 전 차장의 글에는 616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역대 최대치입니다. 4년 전 그만 둔 ‘마지막 중수부장’ 김경수 전 대구고검장이 세운 기록(613개)을 간발의 차이로 앞섰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댓글이 많은 이유는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해는 특히 댓글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검찰 내에서 평판이 좋은 검사들이 대거 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찬식 전 서울동부지검장, 박윤해 전 대구지검장, 차경환 전 수원지검장, 권익환 전 서울남부지검장에도 500개 안팎의 댓글이 달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떠나는 인사에 달리는 댓글 수와 댓글의 진정성은 그 검사가 검사 생활을 제대로 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냉정한 ‘성적표’가 아닐까 싶은데요. 검사 입장에서도 자존심이 달린 문제입니다. 일부 검찰청에서는 댓글만 따로 출력해 ‘댓글패’를 만들어 퇴직 선물로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지난 6일 새로 보직을 받은 법무부, 대검, 재경지검 간부급 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후배 검사와 수사관, 직원들을 배려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결국 우리(검찰)한테 부여된 업무를 얼마나 잘 하느냐는 우리 조직에서 얼마나 멋진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운영해 나가느냐와 직결돼 있다.”가족주의 문화, 전국 근무 특수성 반영 사직 인사 글은 이프로스 내 ‘검사 게시판’에 올라옵니다. 검찰 내부 직원들만 볼 수 있는 실명 게시판인데요. 검사 게시판이 만들어진 게 2001년 7월쯤이니 검사들의 ‘인터넷 작별 인사’ 문화도 그즈음부터 생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의 표명 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2003년쯤으로 보입니다. 검사들이 그만 둘 때 사의 표명 글을 올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옵니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공직에 몸 담았다는 것은 뭔가 보람 있고 뜻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을텐데, 막상 떠나려고 하면 자신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게 된다. 검사로서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함께 근무했던 동료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프로스)까지 있으니 관례 비슷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지방의 한 차장검사는 “검사들의 근무 특수성에 기인한 문화”라고 바라봤습니다. 검사는 전국을 돌며 근무를 하기 때문에 일선 검찰청 직원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많은데, 나중에 퇴직할 때 일일이 전화를 할 수 없으니 온라인을 통해 인사를 나눈다는 설명입니다. 또 다른 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의 가족주의 문화가 온라인 공간의 활성화로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검찰만의 끈적끈적함, 서로 밤 늦게까지 업무를 하면서 쌓인 ‘전우애’가 공직을 떠날 때도 발휘된다는 설명입니다.검사의 메시지 진화...작심발언에서 완곡법 배경이 어찌됐든, 검찰 인사가 날 때마다 어김없이 사퇴를 알리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물러날 때임을 직감했던 검사장들은 미리 준비한 글에 사자성어나 시 한 구절을 더해 자신의 생각을 대신 전했습니다. ‘특수통’, ‘공안통’ 등 수사 검사로 승승장구한 검사들도 떠날 때는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옷 벗을 각오를 한 일부 검사는 작심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 3월 요직 중 하나로 꼽히는 법무부 검찰국장에서 서울고검 차장검사로 인사 발령을 받은 장윤석 전 검사장이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은 상당히 수위가 쎈 편입니다. “개혁을 위한 서열 파괴라는 미명 하에 선배를 후배 밑에 앉히는 것은 떠나라는 협박이다. 오늘 불명예스럽게 서울고검에 부임하고 사직하는 것은 스스로 물러서기보다 차라리 인사의 총탄에 맞아 죽어나가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혼외아들설이 제기된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압박성 감찰을 비판하며 사의를 표명한 김윤상 전 대검찰청 감찰1과장의 글도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김 전 과장은 당시 “후배의 소신을 지켜주기 위해 직을 걸 용기는 없었던 못난 장관(당시 황교안)과 그나마 마음은 착했던 그를 악마의 길로 유인한 모사꾼들에게 내 행적노트를 넘겨주고 자리를 애원할 수는 없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최근 사표를 낸 검사들이 올리는 사직 인사 글에서는 과거처럼 강경 발언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세련된 방식으로 불만이나 아쉬움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한 주진우 전 서울동부지검 부장검사의 최근 사의 표명 글이 대표적인데요. 그는 “제 공직관이 흔들리고 있는데 검사 생활을 더 이어가는 것은 국민과 검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주 부장의 글은 완곡법이 더 강한 메시지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금요칼럼] 역사의 정면교사/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역사의 정면교사/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한국 문명은 역사상 강력한 제국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반도 주변에 자리잡은 초강대국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전쟁도 숱하게 불사했지만, 종국에는 주변 강대국이 구축한 국제질서에 순응하였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역사의 지혜가 거의 다 반면교사 일색이다. 왜란과 호란을 단골손님처럼 거론하지만 이 또한 죄다 반면교사다. 실제로 역사의 사례를 들며 “그것을 반면교사 삼자”는 표현이 우리 귀에 익다. 한 개인이 아닌 국가정책 차원에서 귀감을 삼을 정면(正面)교사 사례는 상대적으로 희귀하다. 그래도 하나 소개해 보자. 1479년(성종 10년) 조선은 명 황제로부터 징병칙서를 받았다. 요동을 위협하는 여진족을 서쪽으로부터 정벌하려 하니 조선도 남쪽에서 출병하여 여진족을 치라는 명령이었다. 12년 전에도 비슷한 칙서를 받았는데 그때 조선은 군대를 보내 여진족을 공격하였다. 이때 협공에 맛들인 명나라가 2차 원정을 감행하면서 조선에 또 파병을 요구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조정의 의견이 양분되어 논쟁이 뜨거웠다. 국왕 성종을 비롯하여 중신들은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르면 국익에 안 좋으니, 이번에도 파병을 선호하였다. 그런데 대간을 중심으로 한 소장관료들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12년 전에 남의 전쟁에 참여한 결과 그때부터 여진족이 거의 매년 압록강 일대를 보복침탈하는 상황을 우선으로 꼽았다. 쓸데없이 양자의 싸움에 끼어들어 분란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고 칙서를 대놓고 거부할 수도 없으니, 때가 겨울이라 거병하기 어렵고 마침 연이은 흉년으로 군사징발이 어렵다고 회신하자는 대안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왕의 뜻에 따라 어유소(1434~1489)를 사령관으로 삼아 1만명의 큰 병력을 출정시켰다. 그런데 압록강에 도달한 어유소는 얼음이 얼지 않아 도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임의로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중신들 사이에서는 국경을 넘지도 않은 채 국내에서 군대를 해산해 버렸으니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칙서에 순응하여 거병한 사실조차 믿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대간에서는 일이 차라리 잘되었으니 아예 원정을 포기하자고 들고 일어났다. 국론이 양분된 상황에서 성종은 대사헌과 대사간을 밤에 차례로 불러 독대하였다. 당시 활 제조에 필요한 물소뿔을 명나라에서는 군수품으로 분류하여 애초부터 수출금지로 묶었다. 그런데 조선의 오랜 로비 끝에 마침 4년 전부터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서는 특별히 물소뿔 수입을 허용하였다. 그런데 이제 명나라의 출병 요구에 조선이 불응한다면 물소뿔 수입이 다시 막힐지 모르니 이번에 징병칙서에 응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며 설득하였다. 이에 대간도 모두 성종의 뜻을 수용하였다. 4000명의 병력을 전송하며 성종은 사령관 윤필상(1427~1504)에게 특명을 내렸다. 섣불리 싸우지 말고 여진족 부녀 몇 명만 잡을 것이며, 조선군이 지나는 곳에는 큰 흔적을 남겨 명나라에서 쉽게 알 수 있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조선군은 여진족 부락 일부를 급습해 부녀와 아동 15명을 붙잡았다. 전투가 아니라 ‘인간생포’ 작전에 가까웠다. 조선 조정은 이들 15명을 바로 북경에 보냈다. 한파를 뚫고 조선군이 출병하여 칙서에 순응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자료였다. 이에 명 황제는 조선 국왕을 크게 치하하고 포상하였다. 일본의 경제도발로 인해 굳을 대로 굳은 현 상황과 성종 때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그래도 전쟁에 준하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일국의 위정자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처신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정면교사로 다루기에 충분하다. 정부는 경제와 외교, 실리와 국격 등을 모두 충분히 계산하여 지혜롭게 ‘정면’ 돌파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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