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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대내 각종 비리 소상히 기록/金 중위 사망전 메모 노트 발견

    ◎‘탄약 은닉’ 등 전역병 진술과 일치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金勳 중위는 지난 2월 숨지기 전 부대내의 총기분실·탄약은닉·음주사고 등 각종 비리를 메모식으로 노트에 적어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金중위의 아버지 金拓씨(55·예비역중장)는 10일 기자들과 만나 “훈이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는 대학노트 1권에는 부대내의 각종비리가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면서 “소대장의 위치에서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당시 군기가 문란해졌음을 짐작케 한다”고 말했다. 노트에는 ‘총기 분실’ ‘탄(약)은닉 및 금기사건’, ‘총기장난,MP(헌병)체포’ ‘구타,동기끼리 때려’ ‘선임자 지적에, 선임자 멱살→소대 교체’ ‘초소근무지 총구 위협’ 등 군기 문란 행위가 89쪽에 걸쳐 적혀 있다. 이어 소대원들의 실명과 함께 ‘북쪽에 올라가기 12시간 전 음주’, ‘음주운전, 새벽 3시’라는 메모와 함께 ‘군복무규정을 지키지 않는 우리는 군인도 아니다. 우리는 거짓말쟁이다.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자책하는 메모가 영문으로 쓰여 있어 김 중위가 부대원들의 군기 문란 때문에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金씨는 “웬만한 비리라면 지휘관이 자신도 문책당할 수 있는데 노트에 이런 얘기들을 적어 놓지도 않았을 것”이라면서 “훈이가 부대내의 문제를 고치려고 혼자 고민하며 갈등을 빚다 반대세력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金씨는 “‘탄약은닉’이라는 메모만 봐도 ‘당시 실탄을 쏘다가 남으면 감춰두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박스째 다량으로 보관한 적도 있었다’는 전역병의 진술과 일치한다”면서 “당시 부대 내에 많은 비리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金씨는 “훈이가 죽은 뒤 전역병들로 부터 ‘군수품을 팔아먹고 나중에 남대문시장에서 보충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군기가 엉망이었다”고 덧붙였다.
  • 아키히토 日皇 만찬사 요지

    일의대수(一衣帶水)를 끼고 있는 귀국과 우리나라 사람들 간에는 예로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귀국의 문화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8세기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日本書紀’에서는 갖가지 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 기록에는 그 당시 국제사회의 국가 대 국가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개인과 개인과의 유대가 공고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같이 긴밀한 교류의 역사가 있는 반면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본인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양국간에는 갖가지 국면을 지닌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우리는 이와 같은 관계에 있는 양국의 역사를 늘 진실을 추구하여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양국 국민의 노력에 의해 싹트기 시작한 상대방에 대한 평가와 경애의 마음을 미래를 향해 키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양국 인사들의 열의와 노력으로 각종 분야에서 교류가 진척되고 상호 이해와 우호관계가 증진되고 있음은 기쁜 일입니다.젊은 세대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양국 관계 발전에 큰 기대를 갖게 합니다.일전에 정부가 주최하는 일·한 양국 청년친선교류사업의 일환으로 귀국을 방문했던 청년 한국 파견단을 만났습니다.단원들이 귀국의 많은 분들의 마음을 접하고 귀국에 대한 이해와 친근감을 다지고 돌아온 것을 기쁘게 느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이번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것은 양국 관계의 장래에 매우 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이번 일본 방문이 가을의 결실과 같이 대통령각하와 영부인께 결실이 풍부하고 쾌적한 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벼랑선 클린턴­성추문 보고서 주요내용

    ◎르윈스키·클린턴 집무실 등서 10차례 성관계/95년 인턴때 집무실 밖 복도서 첫 관계/15차례 폰섹스… 클린턴이 전화걸어 주도 클린턴 대통령과 전 백악관 인턴직원 르윈스키양과의 성추문에 대한 스타 검사의 의회보고서가 인터넷으로 공개됐다. 총 445쪽에 달하는 보고서 내용은 즉각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인터넷 주소는 http://thomas,loc.gov/icreport,http://www.house.gov/icreport,http://www.access.gpo.gov/congress/icreport 등 3개다. 공개된 보고서는 지난 1월의 폴라 존스 성희롱사건 재판과 7월의 연방 대배심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했던 증언을 반박하는 내용들이 주로 이루고 있다. 특히 르윈스키는 10차례의 ‘성 관계’를 가졌다며 적나라하게 증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문화적 현실을 고려해 적절치 못한 어휘는 다소 완화해서 주요 내용을 요약,소개한다. ▷성관계◁ 클린턴 대통령은 르윈스키와 ‘성적 관계’,‘성관계’를 가졌음을 부인했다. 또 자극과 만족을 목적으로 르윈스키의 가슴 등과 접촉했음을 부인했다. 반면 르윈스키는 대배심 증언에서 백악관 인턴직원으로 있으면서 22살인 95년 11월부터 실질적인 성적 행동을 비롯해 대통령과 10차례의 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했다. ①95년 11월15일=백악관 인턴직원이었고 대통령과 처음으로 성적 접촉을 가졌다. 오벌 오피스(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밖의 복도에서 오럴섹스를 했다. 대통령은 가슴을 만지고 키스도 했다. 성적으로 자극시키는 손동작도 있었다. ②95년 11월17일=오벌 오피스 밖의 개인 욕실에서 오럴섹스를 했다. 가슴을 손으로 애무하고 키스도 했다. ③95년 12월31일=스웨터를 벗기고 손으로 가슴을 애무했으며 키스도 했다. 오럴섹스를 했다. ④96년 1월7일=오럴섹스를 했다. 가슴을 손과 입으로 애무했다. 클린턴이 오럴섹스를 해주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신체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⑤96년 1월21일=가슴을 애무했다. 오럴섹스를 나눴다. ⑥96년 2월4일=대통령이 불렀다. 드레스와 브래지어를 부분적으로 들어 올리기도 했다. 성적으로 자극시키기 위해 깊숙한 성감대를 만졌으며 오럴섹스를 해주었다. ⑦96년 3월31일=대통령이 만남을 주선,그녀의 하의를 벗기고 직접 애무했다. ⑧96년 4월7일=가슴을 만졌으며 대통령에게 오럴 섹스를 해줬다. ⑨두번의 연속적인 만남=97년 8월16일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만났다. 키스를 나눴으나 오럴섹스는 거부했다. 이날 만남에서 다른 성행위는 없었다. 대통령의 폴라 존스 재판증언을 3주 앞둔 97년 12월28일 오벌 오피스에서 또 만났다. ‘정열적인 키스’를 나눴으나 다른 성적 접촉은 없었다. ▷폰섹스◁ 르윈스키는 대통령과 대략 15번의 폰섹스를 나눴다고 증언했다. 대통령이 르윈스키에게 매번 전화를 걸어 폰섹스를 주도했다. ▷물질적 증거◁ 르윈스키는 97년 2월28일 대통령과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특별 수사팀에 제출했다. 그녀는 이 옷에 대통령의 정액이 묻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특별 검사실의 요청에 따라 연방수사국(FBI)은 드레스의 흔적을 분석했다. 특별검사실은 대통령의 DNA샘플을 요청했다. 98년 8월3일 백악관의 한 의사가 특별검사실의 한 변호사와 FBI의 한 요원 앞에서 대통령의 혈액을 채취했다. 가장 민감한 DNA분석을 통해 FBI는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정액이 사실상 대통령의 것이라고 확실히 결론지었다. 대통령의 것이 아닐 가능성은 7조8,700만분의 1이다. ◎핵심 쟁점/성관계­스타:르윈스키 드레스서 정액 발견.클린턴:“부적절한 관계 가졌다” 시인/조사방해­스타:미국인·의회 기만 전략 구사.클린턴:돕기위해 공개적인 노력했다 ◇연방 대배심 등 ‘선서 증언’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거짓말. ▲스타=클린턴은 8월 17일 대배심 증언과 1월 17일 폴라 존스 성희롱 소송 증언에서 르위스키와의 성관계를 부인함으로써 선서를 하고서도 거짓말을 했다. ▲클린턴=성관계를 가졌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을 받았으며 이질문을 성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와의 성관계를 가졌는지 여부. ▲스타=연방수사국(FBI)시험은 르윈스키의 드레스에서 발견된 정액이 클린턴의 것 임을 논란의 여지없이 입증해주고 있다. ▲클린턴=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가졌음을 시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비하고 추한 주장들이 공개된 것은 대통령에게 굴욕감을 주고 사임을 강요하기 위한 의도이다. ◇클린턴이 스타의 조사를 방해하려 했는지 여부. ▲스타=대통령은 98년 1월 이후 미국민과 의회를 기만하는 전략을 추구했으며 7개월동안 형사적 조사를 지연,방해하고 8월에는 미국민과 의회를 속였다. ▲클린턴=증인 매수는 없었다. 백악관은 참모들이 변호인을 확보하는 것을 지원하고 증인들과 대화를 나누어 조사결과에 대한 조언을 하기 위한 “공개적이고도 합법적인” 노력을 했다. ◇클린턴이 르윈스키나 개인비서 베티 커리에게 르윈스키로부터 받은 선물을 회수하도록 요구했는지 여부. ▲스타=클린턴은 선물회수 문제와 관련,소환에 불응하려는 한 증인을 도움으로써 사법권을 방해하려했다. ▲클린턴=르위스키에게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고 시인했다. 선물들을 처분하도록 암시하지 않았고 더구나 커리에게 르윈스키에게 준 선물을 회수하도록 요구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다. ◇클린턴이 르윈스키나 커리의 증언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했는지 여부. ▲스타=클린턴은 잠재적 증인으로 떠오른 커리에게 영향을 미칠 의도로 폴라 존스 재판에서 증언을 한 다음 날 커리를 집무실로 불러 들였다. ▲클린턴=증인 매수는 없었다. ◎보고서/性관련 어휘 5,000회 등장/법률용어 별로 없고 ‘탄핵’은 15번 나와 공개된 보고서에는 낯뜨거운 어휘들이 대거 등장해 인텃네에서는 ‘어른들만 열람’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컴퓨터로 분석 결과,보고서에서는 성 관련 어휘가 무려 5,000번이나 등장. ‘오럴섹스’,‘폰섹스’,‘성적 접촉’,‘성관계’,‘성욕’,‘성교’ 등 온통 성관련 용어로 뒤덮여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성적(sexual)’. 무려 406번이나 나온다. ‘섹스’라는 말도 164번에 이른다. ‘젖가슴’이 62번,‘시가’ 23번,‘정액’ 19번,‘질’ 5번,그리고 ‘성기’와 그 변형어가 64번 사용됐다. 연인이 상대방에게 ‘줄 수 있다’는 의미의 ‘선물’이란 단어가 215번,‘사랑’도 18번 쓰였다. ‘성적으로’는 9번,‘섹시’와 ‘더욱 섹시’ 그리고‘성행위’ 등은 각각 1번씩 쓰였다. 법률 용어는 적었다. ‘사법’뒤에 붙은 ‘방해’라는 말은 11번,‘위증’ 40번,‘탄핵’ 15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성추문 보고서 일지 ▲98년 1월7일=르윈스키,클린턴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내용의 선서 진술서에 서명. ▲1월12일=르윈스키의 친구이자 국방부 직원 린다 트립,르윈스키가 클린턴 대통령과의 성관계에 관해 얘기하는 대화 내용을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를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에게 전달. ▲1월17일=클린턴,폴라 존스양 성추문 소송에서의 선서 증언을 통해 르윈스키와의 성관계를 부인. ▲7월17일=스타 검사,클린턴에게 대배심 출두를 요구하는 소환장 발부. ▲7월27일=르윈스키,처음으로 특별검사팀과 면담을 갖고 클린턴과의 성관계를 시인한 것으로 알려짐. ▲7월29일=클린턴,8월17일 백악관에서 폐쇄회로 TV를 통해 연방 대배심 증언을 하겠다고 발표. ▲8월6일=르윈스키,연방 대배심 첫 증언. ▲8월17일=클린턴,연방대배심 증언후 대국민 연설에서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 시인. ▲9월4일=클린턴,더블린 방문시 처음으로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죄송하다’는 표현 사용. ▲9월9일=스타 검사,의회에 보고서 제출. ▲9월10일=클린턴,민주당 상원 지도부와 회동해 르윈스키 스캔들 관련 사과. 하원법사위 스타 검사 보고서 공개 권고 의결. ▲9월11일=하원 전체 회의,스타 보고서 전문 공개 의결.
  • 徐相穆­白南治 의원 7­8일 출두 통보/검찰 정치인 비리 수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李明載 검사장)는 4일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38억원 불법 모금과 관련,林采柱 당시 국세청장에게 모금을 요청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徐相穆 의원(서울 강남 갑)을 오는 7일 출두토록 통보했다. 또 김포 매립지 용도변경과 관련,동아건설측으로부터 1억여원을 수뢰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白南治 의원(서울 노원 갑)에 대해서도 8일 출두토록 통보했다. 검찰은 徐,白의원이 소환에 불응하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국회에 체포동의서를 제출하는 절차를 밟을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대선자금과 관련,SK와 대우그룹이 徐의원에게 10억원씩을 직접 전달한 연결고리가 확인됐다”면서 “미국에 체류중인 李碩熙 전 국세청 차장의 귀국과 관계 없이 혐의사실 입증이 가능해 출두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지난 3일 구속 수감된 한나라당 李信行 의원(서울 구로 을)을 이날 대검 청사로 소환,(주)기산 사장으로 있으면서 조성한 비자금 중 사용처가 확인되지 않은 43억원을 여야 의원에게 제공했는지 여부에대해 집중 추궁했다. 검찰은 李의원이 착복한 자금의 상당액이 한나라당 중진 K,S,L의원과 또 다른 L의원,여권의 K의원에 흘러간 흔적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 무용평론가 李丙姙(이세기의 인물탐구:178)

    ◎백조의 나래접고 무대비평 30년/애정어린 패러독스로 무용계 ‘미운오리’/평론 1,000여편… 시들지 않는 필력 자랑/1年 3∼4회 태평양 넘나들며 세계화 앞장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때 무리 중 아무도 여자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없었다. 60∼70년대를 거쳐 무용계를 독주하면서 악명을 떨치던 무용평론가 李丙姙. 아마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지금도 손사래를 흔드는 이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투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투철하게 꿰뚫는 이병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당시 한국예술분야 중 무용은 가장 뒤떨어진 분야로 치부되어 음악과 무용을 평론하는 원로 박용구씨마저 ‘평론할만한 의욕을 일깨워주는 무용공연이 없어서’ 무용평론에서 손떼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비평에 생소한 무용계와 그와의 사이는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평론활동은 시작부터가 우여곡절의 반복이었다. 지난 75년 ‘한국문학’지에 실린 수필에 보면 그는 “나는 무용계의 생태같은것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젊은 혈기만으로 기성세대에 항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나의 당돌함은 무용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고 쓰고있다. 예절과 겸허가 없는 그의 패기는 무례로 간주되었으며 종횡무진의 이 맹랑한 문제아 출현에 논리부재의 무용계는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전국무용협회 회원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한동안 ‘바위밑에서 영원히 사멸되는듯이’ 보였으나 사나운 파도속에 휩쓸리면서도 끝내 가라앉지 않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점이 비난받아 마땅한가. ○“창작력 없는 춤에 분노” 예를들어 그는 남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한 원로의 춤을 보고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통도 제대로 답습하지 못한 저런 춤을 추느냐. 창작력이 없이 추는 춤은 부끄러움에 앞서 분노가 느껴진다”고 비난했다. 지난 74년 문공부가 주최한 한국무용용어 통일위원회에 한 중견 무용인이 위원으로 입회를 희망할때도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거부하는가하면 국립무용단 창단때는 “왜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많은데 권력있는 자가 국립산하에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한 특정인을 가리켜 몰아붙이기도 했다. 더이상 분노를 참을수 없는 무용계는 ‘곡필(曲筆) 평론가’‘소피스트케이션’을 내용으로한 투서와 전화로 신문사에 그의 평문을 싣지 말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한 신문은 “집단이 한 개인을 놓고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최근 평론가는 있고 창작이 없는 상황에서 이병임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일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평론을 쓸때마다 ‘코피가 터지고 옷이 찢어지는’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그는 ‘논쟁은 대화’이며 ‘무용에 대한 애정’임을 매몰차게 강변했다. 협회에 사과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중재하려 했으나 그는 “사실을 말한것뿐이다. 절대로 굽힐수 없다”고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녔다. 온갖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 앙칼지게 일어서려는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긴 碧史 한영숙씨는 “우리 무용계에도 재인(才人)이 있다”고 그를 두둔했고 연극 ‘햄릿’의 연출가이며 예총회장이던 고 이해랑씨는 “날카로운 필봉을 완강하게 견제하려는 세력때문에 그의 카리스마와 패러독스는 계속될수 없었으나 매너리즘에 허덕이던 무용계에 활기와 자극을 준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우리 무용계 才人’ 높이 평가 이병임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나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상임이사를 지낸 李命九씨와 白世鉉씨의 6남2녀중 둘째. 신교육을 받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학교보다는 연극과 무용공연에 따라다니거나 비를 맞고 거리를 방황하면서 ‘최승희같은 무용가’가 될것을 꿈꾸기도 했다. 이화여대 입학후 김보남 김천흥 한영숙을 사사, 졸업후 부모의 강요로 60년에 결혼, 2년만에 남편과 헤어져 68년 조흥동 개인발표회 무용평을 쓰면서 평단에 데뷔했다. 서울에서만 600여편, 지금까지 1,000여편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에 가서 그는 영국의 무용평론가 리처드 버클이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에 ‘니진스키 평전’을 기고한 것을 보고 스승인 벽사등 원로무용가의 평전에 손대기 시작했고 지난 88년 LA타임스에 국립무용단 미주공연평을 비롯, ‘한국의 멋’을 기고하기도 했다. 미주 한국무용협회 발족에 이어 85년 미주 예총 창립, 미주 무용단을 이끌고 한국전통문화연구원이 주최하는 고궁 공연에 참가하는가 하면 격년으로 고국의 인간문재인 김천흥 한영숙 이매방 강선영씨와 육완순 김말애 박명숙등을 미국에 초청,공연을 갖기도 한다. 특히 100만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문화단체로 성장한 미주 예총이 있기까지는 ‘언제나 공격적인 이미지’와 ‘마치 투쟁이나 하듯이 굴하지 않는 용기와 진취성’으로 그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우리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역설한 결과다. 그의 대학선배이자 오랜 무용의 동반자인 현대무용가 육완순씨는 “그의 정의감과 무용이 성장할수 있게 뼈아픈 조언을 해온것은 사실”이라고 조언한다. 자녀는 USC에서 연극을 전공한 아들 김정구씨와 UCLA를 나온 화가 딸 유나씨가 있다. ○민주한인사회에 긍지 심어 누가 뭐래도 그는 한때 ‘이병임시대’를 독주한 여류다. 여전히 시들지 않은 가시돋친 장미꽃같은 필력을 지키고있으나 이제는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박는 비평이 아니라 말속에 뼈를 감춘 담예논도(談藝論道)로 무용계의 발전을 모색하는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무용과 함께 한평생을 살아왔고 ‘미주 한인사회에 우리 예술의 긍지를 심어준 공로가 지대하다’는 점에서 혼자 외롭게 투쟁하는 그에게 조국이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무용계는 말하게 되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면서 살아있는 흔적을 그때마다 확고히 남기는 그는 더이상 소피스트케이션이나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우리 무용의 확대와 세계화에 앞장서기 위해 한해에도 서너차례씩 태평양을 넘나들면서 민간 사절의 몫을 해내는 역동적인 메신저로 높이 발돋움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길 1936년 서울 서린동 출생 1958년 이대 체육과 졸업 1958­64년 풍문여고 교사 1968년부터 무용평론 활동 1968­74년 한양대강사및 전임강사·이대대학원강사 1973년 대한무용학회창립,상임이사 1975년 세계무용가회의 참가 1981년 도미 1983년 미주 한국무용협회창립 1985년 미주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미주예총) 창립및 부회장 1985년부터 인간문화재 미주초청 1986년 이병임 자전적 무용공연 1988년 진달래어린이무용단 창단 1989­현재 미주 예총회장 1989년 88올림픽1주년기념 세계 한민족예술제미주예술단 예술감독, MBC주최 이산가족찾기운동예술제 참가 1991·98년 우리춤보존회 회장 1993년 대전엑스포 전야제 참가 1994·98년 LA한인회 자문위원 1997­현재 민주평통 고문 1997년 한국전통문화연구원초청 ‘한국전통문화예술제’ 예술감독 1998년 국립민속박물관공연 참가 LA시장 감사패(87·88·91·92·95년) 서울시 주최 ‘세계를 빛낸 한국인’ 선정(95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감사패(91·92·95·96년) LA시의회의장 감사패(92·94·97년) ‘한국무용교육의 재검토’‘해방30년 한국 현대무용의 정리’‘전통문화의 올바른 정립’등 다수
  • 申昌源 ‘오리무중’/탐문·수색 성과 없어

    탈옥수 申昌源(31)을 쫓고 있는 경찰은 17일 사건 현장인 서울 강남구 포이동 일대를 중심으로 탐문과 수색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나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이날 경찰특공대 등 1,000여명의 병력과 군견을 동원,인근 구룡산과 대모산 일대에 대한 수색활동을 펼쳤다. 경찰은 도주 당시 申이 맨발이었고 택시를 탈만한 돈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직 현장 인근에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 申昌源 서울 출현… 또 놓쳤다

    ◎어제 새벽 강남에 고급승용차 타고 나타나/순찰 경관 차적 조회… 도난차 확인후 검문/격투 끝 도주… 거액 돈가방·가발 등 발견 지난해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무기수 申昌源(31)이 서울에 나타나 경찰과의 격투 끝에 또다시 달아났다. 이로써 경찰은 모두 5차례에 걸쳐 申을 눈앞에서 놓쳤다. ▷발견◁ 申은 16일 상오 4시15분쯤 강남구 포이동 229 C식당 앞에서 순찰 중이던 수서경찰서 개포4파출소 소속 嚴宗鐵 경장(42)과 吳昌祐 순경(30)에게 적발됐다. 嚴경장 등은 서울 48라 5186 엔터프라이즈 승용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申을 수상하게 여기고 휴대용 차적조회기(MDT)를 통해 도난 차량임을 확인,검문을 했다. 嚴경장이 “차 주인이냐”고 묻자 申은 “당구장에 있는 차주인의 돈가방 심부름을 왔다”고 대답했다. 嚴경장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申과 함께 10여m 떨어진 M당구장으로 걸어 갔다. 吳순경은 순찰차로 이들을 따라갔다. ▷격투 및 도주◁ 嚴경장과 함께 지하당구장 입구에 도착한 申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순간 검정색 가방을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嚴경장의 오른쪽 눈을 때렸다. 嚴경장은 申의 목을 감싸 안으며 격투를 벌였다. 뒤따라 온 吳순경도 차에서 내려 합세했다. 嚴경장 등이 수갑을 채우기 위해 申의 손목을 잡는 순간 申은 목을 조른 嚴경장의 오른 손목과 귀를 물어 뜯고 주택가 골목으로 달아났다. 吳순경이 30여m를 뒤쫓아 갔으나 결국 놓치고 말았다. 申은 격투 과정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가 벗겨져 맨발 상태였고 주홍색 반팔 T셔츠에 검정색 반바지 차림이었다. 嚴경장은 申의 가슴에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검거 실패 이유◁ 朴양이 吳순경의 부탁을 받고 곧바로 112에 신고했지만 서울경찰청,수서·서초경찰서 중 어느 곳에도 접수되지 않았다. 10여분동안 격투가 계속됐던 점을 감안할때 신고 직후 즉각 출동했다면 申이 또다시 도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嚴경장은 “申이 몸이 날랬고 뜀박질이 매우 빨랐으며 단순 강도라고 생각해 총을 쏘지 못했다”고 말했다. 吳순경은 수갑을 채우기위해 申의 팔을 잡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嚴경장이 유도 2단,吳순경이 태권도 4단인 점을 감안하면 너무 안일하게 대응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유류품◁ 申이 버리고 간 가방에는 미화 6,922달러,10만원권 수표 6장과 1만원권 865장(925만원),회칼 2개,운전면허증 2개,주민등록증,안경,도피과정 등을 적은 대학노트 등이 있었다. 차량 뒷자석에서는 여자가발,옥색과 붉은색 개량한복 각 1벌,검정색 구두,슬리퍼,검정색 가방,전국지도가 발견됐다. 뒷 트렁크에는 쇠톱과 훔친 차량번호판 5개 등이 있었다. ▷추적◁ 경찰은 서울시내 모든 지역에서 투입,검문검색을 실시하는 한편 8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강남구의 구룡산과 대모산 일대를 수색했으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또 차량에서 지문 10개를 채취,감식 중이다.
  • 무장간첩 흔적 발견 못해/軍,이번주 수색종결 검토

    군 당국은 무장간첩들의 내륙침투 가능성에 대비해 16일에도 산악지역 등의 예상 도주로를 중심으로 수색 및 매복작전을 실시했으나 침투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군은 또 이날 새벽 4시쯤 지난 14일 거동 수상자 2명이 신고된 삼척시 도계읍 육백산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을 종결했다. 수색작전 결과 이들 거수자가 약초 등을 채취하던 주민이거나 일반 범법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닷새째 계속된 수색작전에도 불구하고 무장간첩의 도주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데다 수색작전이 장기화될 경우 피서철을 맞은 영동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이번 주말을 전후해 수색작전을 종결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무장간첩 침투 사흘째 이모저모/잔당 흔적 발견못해 수색 길어질듯

    ◎인근 해안서 발견 잠수복은 주민이 버린것 추정 군 당국은 14일 무장간첩 수색 작전 사흘째를 맞아 해안 일대는 물론 잔당의 예상 도주로인 매봉산­칠성산­발왕산­오대산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특전사 병력 등을 집중 투입해 퇴로를 차단하는 등 수색을 강화했으나 아직까지 눈에 띄는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따라 수색작전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육군 특전사와 해군 해난구조대(SSU)의 수중 탐색 작업이 진전을 보지 못함에 따라 해군은 13일부터 어민들의 트롤어선 6대를 동원,해저 수색에 나섰다. 해군 관계자는 이날 “해군 함대와 해양경찰에 민간 트롤어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장비가 없어 조만간 어민들의 협조를 얻어 트롤 어선을 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장간첩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동해시 어달동 방파제 앞 바다 속에서 낡은 잠수복 2벌과 녹슨 산소통용 수압조절기,업무용 수첩이 발견돼 한때 긴장. 합동신문조가 정밀 조사한 결과 이 잠수복과 수압조절기는 간첩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주민이 쓰다 버린 것으로 밝혀다. ○…동해시 주민들은 무장간첩 잔당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해가 진 뒤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는 등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 특히 무장간첩의 시신이 발견된 묵호동 주민들은 빨래를 밖에 내다 걸지 않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주민 李모씨(45)는 “마을 바로 뒤가 산이라 밤이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면서 “바람소리에도 놀랄 정도”라고 말했다. ○…군당국은 피서철 대목을 맞은 지역 상인들과 피서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고심. 군 관계자는 “‘진돗개 하나’ 비상 경계 태세에서 수색을 하기 위해서는 해수욕장 등에 일반인과 어선의 출입을 막는 것이 마땅하지만 지역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기 위해 통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 ○…權正達 의원을 단장으로 한 ‘한나라당 무장간첩 침투 사건 진상조사단’이 이날 상오 수색 현장을 방문. 鄭昌和 柳興洙 睦堯相 姜昌成 黃鶴洙 의원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수색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해군 1함대 사령부와 무장간첩 시신이 발견된 곳을 둘러보고 군과 주민들의 애로 사항을 들었다. 趙淳 총재도 이날 의원들과 동행했다.
  • 해안 배수관에 ‘도주흔적’/무장간첩 침투­군·경 이틀째 수색작전

    ◎간첩시신 발견된곳서 10여m 떨어져/“이끼에 발자국… 1∼2일전 지나간 자취”/육지 침투대비 예상도주로 차단 매복 ‘무장 간첩의 흔적을 찾아라’ 강원도 동해시 일대에서 이틀째 수색작전을 펴고 있는 군과 경찰은 13일 또 다른 무장간첩 1∼4명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예상 도주로를 차단한 채 추적 중이다. 무장간첩이 이용한 수중 추진기의 상태로 미루어 팀투조는 3명으로 보인다고 군 당국은 밝혔다. 이날 현장에 투입된 육군특수전학교 수중전 전문교관들은 전날 시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10m 정도 떨어진 배수관에서 1∼2일전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미리 현장을 둘러본 한 교관은 “배수관에 있는 이끼에 발자국 흔적이 있고,거미줄이 일부 찢겨져 있었다”면서 “사람이 지나간 명백한 자취”라고 말했다. 이어 “바닷가로 난 배수관에는 보통 거미줄이 처져있는데 거미줄은 질겨 잘 찢어지지 않는다”면서 “찢긴 형태로 보아도 사람이 지나간 게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군은 무장간첩 잔당이 배수구를 통해육지로 침투했을 가능성에 대비,이 일대에 있는 10여개의 배수구를 집중수색했다. 배수관은 가로 1m,세로 1.5m 가량의 크기이며,그 안에 직경 1m의 배수구가 있다. 이 배수관은 도로 밑을 통해 15m 가량 떨어진 횟집들과 연결돼 있고,뒤는 바로 산이다. 바다에서는 해군해난구조대(SSU)와 수중폭파대(UDT)가 투입돼 바다 밑을 샅샅이 뒤졌다. 육군은 무장간첩들이 이미 육지로 침투했다면 해안선 일대에 비밀창호를 파고 은신하거나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북으로의 복귀를 시도할 것으로 보고 주요 지점에서 매복작전을 펴고 있다. 또 육지로 침투할 경우 시신이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2㎞ 북쪽에 있는 대진항 봉화대를 통해 침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주변 수색을 펴고 있다. ◎지난달 침투 잠수정서 수충추진기 1대 발견 지난달 22일 속초 앞바다에 침투한 북한 잠수정에서 지난 12일 발견된 것과 같은 수중 추진기가 실려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군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군 고위 관계자는 13일 “지난달 침투했던잠수정을 진해 해군기지로 옮겨 최근 해체작업을 한 결과 이번에 발견된 수중 추진기와 모양이 같은 수중 추진기를 잠수정 앞머리 위에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1­2(정직한 역사 되찾기)

    ◎헌법 반세기/9차례 개헌… 민의 철저히 외면/52년 의원들 납치 직선제 채택/54년 부결안 사사오입 억지통과/박 대통령 집권연장 3차례 칼질/12·12 탈취자 헌전파괴로 ‘심판’/10번째 개헌 국민의 뜻 반영돼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헌법전문은 이렇게 시작되어 326자의 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많은 사람들은 학창시절 헌법전문을 의미도 잘 모른 채 달달 외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개헌의 역사도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그러나 교과서 뒤에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있었다. 그들의 정략적 개헌은 많은 어용 학자와 지식인들에 의해 ‘정당화’ 되어왔다.헌법은 이러한 굴절된 개헌의 역사로 오염됐다. 헌법은 지난 50년 전쟁 와중의 1차 개헌 이후 9차례에 걸쳐 바뀌었다.지금까지 개헌은 집권세력이 자기의 편의대로 헌법을 뜯어고친 정치적 상처의 흔적을 남겼다. 1차개헌의 핵심은 대통령 선출을 국회가 아닌 국민직선으로 바꾸는 것이었다.50년 총선에서 참패한 李承晩은 국회에서 대통령 재선이 어려워지자 52년 7월7일 국회의원을 강제로 납치해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그는 대통령 중임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게는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개헌을 다시 강행했다.그러나 그 개헌안은 당초 부결된 것으로 선포됐다.하지만 54년 11월29일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기상천외한 수학적 원리를 끌어들여 억지로 통과시겼다. 4·19혁명은 헌법에서 보장받지 못한 민중 스스로의 저항권 행사였다.그러나 혁명주체가 정치적 힘으로 결집되지 못해 직업 정치인들에게 공을 가로채이고,그들에 의해 의원내각제 정부형태를 채택한 3차개헌이 단행됐다.그러나 혁명주체세력들은 4·19정신의 반영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그들은 국회에 압력을 가해 4차개헌이 이루어지도록 했다.4차개헌은 3·15부정선거 주동자에 대한 공민권 정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민의에 의한 헌법질서 수립은 그러나 5·16쿠데타로 6개월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30여년의 기나긴 군사독재의 장이 열렸다.朴正熙대통령은 3번이나 헌법을 개악했다.개헌의 핵심은 대통령권한의 강화였다.그는 4년 임기 대통령의 중임제한규정을 없애기 위해 69년 대통령 재임을 3번까지 인정하는 6차개헌안을 여당의원들만 모인 가운데 날치기 통과시켰다.72년에는 아예 영구집권을 담보할 수 있는 유신헌법을 공포했다.유신헌법체제는 거센 국민의 저항에 부닥쳤고,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암울한 긴급조치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김재규의 朴正熙 살해는 유신체제를 끝나게 했다.하지만 군사정권의 종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신군부세력이 12·12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했다.그들은 80년 10월27일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출을 골자로한 제8차 개헌을 단행했다.그러나 결국 이들은 헌정파괴사범으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신군부의 공포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거세졌고,이는 직선제 개헌의 요구로 이어졌다.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한열군 최루탄 사망사건이 도화선이 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위기를 느낀 집권세력은 6·29선언을 통한 직선제 개헌 수용으로 국민들을 회유한다. 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여전히 비민주적 요소를 갖고 있다.대통령에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돼 있고 긴급권에 대한 통제장치도 부족하다. 새 정부도 내각제로의 개헌을 약속하고 있다.그러나 10번째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단순한 정부형태의 변경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지난 50여년간 왜곡돼온 것들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개헌때에는 특히 그동안 소외돼온 국민들의 뜻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대한민국헌법 연혁 ▲1948.7.17 헌법제정 ▲1952.7.7 제1차 개정(제2대 국회) △양원제 △대통령·부통령의 직접선거 ▲1954.11.29 제2차 개정(제3대 국회) △주권의 제약,영토의 변경 등 중대사항에 관한 국민투표제 △국무총리제 폐지 ▲1960.6.15 제3차 개정(제4대 국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의 절대적 기본권화 △의원내각제 △중앙선거위원회 설치 △헌법재판소의 설치 ▲1960.11.29 제4차 개정(제5대 국회) △4·19에 관련된 부정선거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 제한과 부정축재자의 처벌에 관한 소급입법권의 부여 △특별재판부및 특별검찰부의 설치 ▲1962.12.26 제5차 개정(국회재건최고회의)전문개정 △국가안전을 위해 기본권 보장 다소 약화 △단원제환원 △대통령제 △헌법재판소를 폐지하고 위헌법률심사권을 법원에 부여 △헌법개정엔 국회의결을 거쳐 국민투표 ▲1969.10.21 제6차 개정(제7대 국회)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의원 50명 이상의 발의와 재적.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함 △대통령의 계속 재임 3번까지 가능 ▲1972.12.27 제7차 개정(유신헌법) 전문개정 △통일주체국민회의 신설 △임기의 연장과 긴급조치권,국회해산 등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 강화 △국회의 권한과 지위를 제한 내지 축소 △헌법위원회 신설 ▲1980.10.27 제8차 개정(국민투표) △비례대표제 채택 △국정조사권 신설 △행정심판제도 신설 △대통령 7년 단임제 △대통령 비상조치권 부여 △전직대통령의 예우조항 신설 ▲1987.10.29 제9차 개정(국민투표) △대통령의 직접선거(5년 단임제) ◎누가 참여했나/권력에 들러리 선 학자들 반성없는 ‘법기술자’ 활보/5·16후 법조인 등 21명 개헌작업 참여/신군부 입법회의에 총장 등 이름 내걸어/실제 입법활동 청와대·권력기관이 주도/김철수 교수 등은 양심 지켜 좋은 본보기 쿠데타에 의한 정권찬탈과 독재정치에 합법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은 학자들이 주로 맡았다.이들은 개헌안 입안과 각종 악법 제정에 참여해 부실한 통치 이념을 보완하고,양심세력을 잡아넣는데 정당성을 부여했다.그리고 이들은 대개 출세가도를 달렸고,지금도 반성의 말 한마디 없다. 5·16쿠데타 세력이 추진한 5차개헌안 마련에는 兪鎭午·韓泰淵·葛奉根·尹天柱·李英燮 등 21명의 학자와 법조인이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兪鎭午는 5·16세력의 개헌에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관제 단체인 재건국민운동 초대본부장을 맡음으로써 제헌헌법 기초자로서의 명예를 스스로 낮추었다. 72년 유신 선포후 개헌작업은 申稙秀 법무 李坰鎬 보사 徐壹敎 총무처장관과 劉敏相 법제처장,그리고 헌법학자 韓泰淵·葛奉根교수로 구성된 법무부 헌법심의위원회가 맡았다.韓泰淵과 葛奉根은 3선 개헌에 이어 유신개헌까지 참여해 독재헌법 제정의 ‘단골’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80년 신군부의 개헌을 위한 헌법심의위원회에는 文鴻柱 부산대 尹謹植 성균관대 尹世昌 고려대 朴承載 한양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그리고 5·6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각종 악법을 양산한 입법회의에는 金相浹 고려대(5공 초대 국무총리) 權彛赫 서울대 鄭義淑 이화여대 安世熙 연세대 총장,朴奉植 서울대 羅昌柱 건국대 韓基春 외국어대 교수 등이 들어갔다.이들중 朴承載 羅昌柱 등은 특히 신군부 집권의 당위성을 강변하는 각종 기고문을 많이 써서 곡학 아세(曲學阿世)의 본보기가 됐으며,두사람 모두 5공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韓己植 고대 교수는 ‘광주폭도의 실상’이란 주제로 각 대학을 돌며 교수들을 상대로 슬라이드 상영과 강연을 해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헌법심의위나 전문위원,입법회의 등은 들러리에 불과하고 실제 입법은 청와대나 정보기관이 관리하는 비밀모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그러나 비록 극소수지만 金哲洙 서울대 명예교수 韓相範 동국대 교수 등 끝내 권력자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법의 본질적 역할인 정의를 지키는 일에 헌신한 양심적 학자들도 있다. ◎3선 개헌 반대 芮春浩 전 의원/“헌정 파괴 방관만 할수 있나 여 의원으로서 저항에 자부심” “헌정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개인이나 당의 이익보다는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가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요” 지난 69년 朴正熙정권이 3선개헌을 강행하자 여당인 공화당의원으로 끝까지 저항했던 芮春浩 전의원(71)은 지금도 그때의 결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芮 전의원은 개악적 개헌 저지를 위한 반대투쟁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그는 여당의원의 신분이면서도 정권의 불의에 끝까지 저항했다.당시의 독재적 정치체제 속에서 여당의원이 개헌에 반대한다는 것은 정치생명의 끝이며 핍박의 시작이던 상황이었다.그러나 그는 온갖 협박과 회유를 거부하고 정의를 위해 세속적 의미의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대통령은 정권 연장을 위해 69년 6차개헌에 나섰다.그러나 여당내에서도 芮 전의원 등 40명이 반대 서명에 나서는 등 강한 반발이 나타났다. “숫자상으로 야당의원에 여당의원 5∼6명만 가세해도 개헌은 막을 수 있었는데….그러나 개헌의결 당일까지 당내에서 반대로 남았던 사람은 제명당했던 저와 鄭求瑛 전 공화당의장 등 2명뿐이었습니다.정권의 회유와 협박이 대단히 집요했어요.” “정권의 회유와 협박에 다른 사람들은 결국 굴복했습니다.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재산가로 변신했죠”라며 芮 전의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군사정권에 몸담게된 계기에 대해,“5·16직후 벌어진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됐다”고 밝혔다.“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고,재건운동의 취지가 훌륭했습니다.朴正熙의 소박한 생활과 일에 대한 열정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습니다.” 개헌과 관련해 남다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는 새정부의 개헌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개인적 소신으로는 의원내각제가 좋다고 봅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헌의도와 그 과정의 순수성과 투명성이겠지요.국민들을 그과정에 얼마나 많이 참여시키느냐 하는 것도 과제입니다.” 그는 현정부에 대해서도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아직 귄위주의적 통치문화를 벗지 못한 느낌이 든다”며 “한번 그 맛에 젖어들면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 절대 권력의 속성”이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20여년간 서울 진관외동에 살다 지난해 분당으로 이사해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다.주로 독서와 낚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재구성해본 鄭周永씨 訪北 7박8일

    ◎유람선 서명… “4,500만 최고의 선물”/16일­판문점 넘어 평양행… 모란봉초대소서 첫밤/19일­10년만에 밟은 고향땅서 망향의 회포 풀어/20일­금강산 방문… 北과 유람선사업 추진 합의/21일­원산 산업시설 시찰… 합작타당성 구체조사/23일­“할일 다했다” 9월 재방북 기약하며 귀로에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7박8일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23일 돌아왔다. 그와 동행했던 방북단 15명이 전하는 얘기와 관련보도를 엮어 鄭 회장의 북한 체류 8일을 재구성한다.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모든 게 변해 있었다. 흘러간 50년이 남긴 흔적을 찾으러 두 눈은 더욱 가늘어져만 갔다. 그러기를 잠시….무언가가 갑자기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감나무. 鄭周永 회장은 19일 이렇게 고향을 찾았다. 강원도 통천 아산리. 분단의 오랜 세월은 기억 속의 고향마저 앗아갔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며 심어놓은 그감나무 만은 그 자리에 있었다. 鄭 회장이 설레이는 가슴으로 판문점을 넘은 것은 16일. 宋虎景 조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鄭雲業 민족경제협력연합회 회장이 밝은 표정으로 맞았다. 서로의 얼굴이 상기됐다. 벅찬 가슴을 추스리기도 전에 방북단은 평양일행과 평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수대 의사당에서 金容淳 조선 아·태평화위 위원장과 담화를 나눈 뒤 저녁에는 목란관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가졌다. 金위원장은 “잘 키운 소를 선뜻 건네 줘 감사하다”며 “통일의 길을 열 수 있는 힘을 모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鄭 회장을 비롯한 현대 방북단은 “자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남북경협의 물꼬를 이 자리에서부터 제대로 터보자”고 화답했다. 모란봉 초대소에서의 첫날 밤을 설레이는 마음에 뒤척이며 보낸 鄭 회장은 17일 평양교예극장에서 종합교예공연을 보는 것으로 이틀째 일정을 시작했다. 혁명과 기백을 강조하는 북한 특유의 공연이 낯설었다. 고향 방문과 금강산 개발사업 등에 대한 상념으로 공연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일행은 아·태평화위와 民經聯 등 북측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금강산 개발 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유람선 사업과 고선박 해체,자동차 합작,제 3국 건설 공동진출,서해안 공단개발,통신사업 등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업이 없었다. 3일째도 평양이었다. 18일 국제친선전람관을 둘러보고 묘향산을 찾았다. 깎아만든 듯한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일 鄭 회장은 마침내 고향땅을 밟게 됐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비행기를 탔다. 다시 통천까지는 육로와 해로가 함께 이용됐다. 승용차뿐 아니라 요트도 동원됐다. 앞선 공연관람과 묘향산 비경의 눈요기 등 기타 일정에서의 소회는 통천땅의 아늑함과 인척들의 환대엔 견줄 일이 아니었다. 감개무량했다. 사흘전 판문점을 넘을 때만 해도 담담하던 북한방송들도 이날만은 “약 10년 만에 다시 고향을 찾은 명예회장 일행은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면서 친척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며 요란을 떨었다. 돌멩이 하나,잡풀 하나 하나를 붙들고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갔다. 1915년 11월25일 통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지금이미 팔순을 넘긴 노신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소년이었다. “이게 내 고향이든가”“그래요 이곳이 바로 우리 고향입니다” 동생들과 큰아들 夢九씨 등 4명과 함께 한 잠자리는 모란봉초대소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89년에 이어 두번째 고향 땅을 밟은 鄭 회장은 9년전보다 가슴이 더 절절했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내 집 드나들 듯이 오갈 수 있는 시절은 언제나 다시 올까”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경협사업에 대한 꿈을 다지고 또 다졌다. 형제들과 큰 아들이 망향의 회포를 푸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경협사업협의에 몰두했다. 통천에서의 하룻밤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른 시일안에 꼭 다시 찾을 것을 기약하며 고향의 흙내음나는 그 땅과 풋풋한 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다. 고향 사람들은 인삼차와 토속주,대로 엮어 만든 모자 등을 정성어린 손길로 일행에 쥐어주며 아쉬움을 달랬다. 鄭 회장은 89년 방북때 그랬던 것 처럼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며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그대로 두고 고향을 뒤로 했다. 20일에 찾은 곳은 금강산. 더없이 잘생긴 절경을 보는 순간 일행은‘이 산을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샅샅이 살폈다. 안개때문에 멀리 볼 수는 없었지만 민족 최대의 비경을 자랑하는 금강산임에는 틀림없었다. 기기묘묘한 일만이천 봉우리가 방북단 일행을 황홀경으로 몰아 넣었다. 일행은 “어서 통일을 이뤄 온겨레가 이 절경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야할 텐데…”라며 입을 모았다. 일행은 鄭 회장의 9월 재방북과 금강산 유람선 투어사업 성사를 위한 실무협의에 고삐를 바짝 당겼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7박8일의 일정이지만 남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놓을만한 선물은 이것이 최고라는 판단에서였다. 마침내 북측 고위관계자와 금강산 유람 사업화를 위한 협력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유람선사업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이제 온 겨레가 금강산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부푼 희망을 안은 채 21일 원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북 6일째. 6·4차량종합기업소 등 여러 산업시설을 둘러보며 합작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기회를 가졌다. 현지 관계자들과 시설규모와 투자 필요성 등에 이르기까지 대화가 쉼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날인 22일. 비행기 편으로 평양에 되돌아 왔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참관했다. 한 꼬마가 안겨준 꽃다발에 鄭 회장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인척들도 만나고,성묘도 했고,금강산 개발사업도 잘 마무리될 것 같고. “나름대로 할 일은 다 했구나”하는 마음이 일었다. 金正日을 만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9월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인민문화궁전에서 마련된 연회에서 鄭 회장은 연설을 통해 “하늘과구름,땅이 하나로 통하는 가깝고도 먼 고향에 오니 꿈만 같다”고 했다. “너무도 정답고 따스한 가슴의 문을 열어주어 진심으로 감사한다”고도 했다. “부강한 나라를 창조하기 위해 새 이정표를 세우고 우리 민족이 힘을 모아 출발하자”고 당부하고 “남과 북이 협력해 조국의 번영을 이룩하고 상호협력사업을 토대로 분열을 버리고 통일과 화해로 가는 광명의 길을 웃으면서 함께 가자”고 역설했다. 23일 아침 鄭 회장은 다시 판문점으로 향했다. 金 아·태위원회 위원장은 “9월에 다시 봅시다. 金正日 장군께서 그때는 꼭 만날 것이란 뜻을 전하셨다”며 추가 방북에 무게를 실었다. 9월,금강산은 황금색으로 반기리라.
  • 중국/그 문화를 읽으면 과거·현재·미래가 보인다

    ◎中 관련서 세권 잇달아 발간/서양중심 시각 탈피 新해석 나폴레옹은 일찌기 중국을 두고 “중국이 눈을 뜨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라고 했다. 그 중국은 이제 ‘잠자는 사자’에서 깨어나 서구인들의 동양회귀(East turning) 열기의 진원이 될 만큼 거대 관심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과연 어떤 나라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최근 잇달아 나온 세 권의 책 ‘중국문화의 이해’(을유문화사)·‘중국이 보인다’(일빛)·‘코카콜라 병에 빠진 중국’(자작나무)은 하나같이 문화라는 창을 통한 중국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 문화의 이해’는 국내 최초로 ‘허사(虛辭)사전’을 펴낸 건양대 김원중 교수(중문과)가 지은 중국 문화론이다.김교수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의 중국 문화를 보는 관점이 유럽 중심주의 시각,즉 동양의 정체성에 시선을 고정시킨 서양우월적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한다.동양학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철저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씌어진 식민지 학문이라는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가 말하는 중국 문화의 특징은 중화(中華)사상으로 요약된다.그것은 동양은 자체 근대화 능력이 부족하므로 먼저 눈 뜬 서양이 동양을 도와줘야 한다는 제국주의적인 의미의 문화 우월주의와는 구분된다.수백년 전부터 유럽과 교류해온 광동시에서 서구 문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거나,중국인들이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공문서에서 외국인을 ‘만이(蠻夷)’라고 썼던 것은 그 두드러진 예다. ‘중국이 보인다’는 국내의 중국학 교수 26인이 쓴 중국문화 에세이.이책의 지은이들은 중국을 만들었고 또 만들어 갈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진정으로 예(禮)가 무엇인지 알았던 공자,위대한 청백리 공청천,문학을 사랑했던 중국의 정치지도자들,비행기가 사흘이나 늦게 출발해도 무덤덤하기만 한 보통 중국인들,자신의 시 ‘물소’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고생하면서도 화 한 번 안내고 살았던’ 시인 애청(艾靑,1910∼1996) 등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중국의 역대 황제나 정치가들 가운데는 문학에 관해 깊은 소양을 지닌 인물들이 많다.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전통인도 모른다.예컨대 춘추전국시대의 제왕이나 정치가들 중에는 ‘시경’의 시들을 암기,외교의 장에서 시구절로 화답함으로써 외교적 성공을 거둔 경우가 적지않다.항우는 유명한 ‘해하가’를 읊었고,한 고조 유방은 ‘대풍가’를 남겼으며,조조 삼부자(三父子)는 당대 최고의 시인들이기도 했다.송나라의 진종은 직접 ‘권학시’를 지을 정도였다.이런 전통은 현대까지 그대로 계승됐다.모택동은 전통 형식의 시사(詩詞)들을 즐겨 지었다.모택동의 대표적인 사(詞) ‘심원춘·설’의한 토막. 그가 ‘서정시인’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에서는 이밖에 ‘온 우주를 먹는다’는 중국인들의 요리문화,다양하기 그지없는 술문화,‘쪽빛 개미’로 표현될 정도로 쪽빛 옷을 즐겨 입는 중국인의 옷문화 등이 소개된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 북경 특파원을 지낸 탄도 요시노리(丹藤佳紀)씨가 쓴 ‘코카콜라 병에 빠진 중국’(김양수 옮김)은 ‘민부국강(民富國强)’의 기치 아래 개혁·개방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 중국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샤하이(하해·下海:돈을 더 벌려고 직장을 옮기는 일),커커우커러(가구가락·可口可樂:코카콜라),따꺼따(대가대·大哥大:핸드폰)….변화의 바람에 휩싸인 개방 중국에는 이처럼 신조어들이 많다.이 책에서는 중국의 사회변화를 알려 주는 100가지의 키워드를 골라 내 중국을 읽는다. 1990년대 중국학의 과제는 박물관에 존재하는 ‘정물(靜物)로서의 중국’이 아니라,실제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움직이는 ‘등신대(等身大)로서의 중국’을 파악하는 것이다.이번에 나온 세 권이 중국관련서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주로 정신문화적 관점에서 살폈다.중국의 문화를 알면 중국의 강점과 약점,치부와 긍지를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경보 화석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4)

    ◎46억년,지구의 신비에 매료/지질시대 생물의 유해·흔적 한반도선 희귀… 접할 기회 적어/20년간 모은 1,500점 한자리/삼엽층 살아 꿈틀거리는듯 규화목의 오묘한 빛깔 ‘탄성’ 지구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리 쉽지 않다.생성으로부터 46억년이라는 시간의 깊이와 한반도라는 좁은 땅덩어리의 시공(時空)적 제약 때문이다.그러나 이같은 모든 한계를 초월,우리에게 지구의 비밀들을 하나씩 벗겨 보여주는 안내자가 있다.바로 ‘화석’(化石,fossil)이다. ‘화석으로 보는 지구 역사’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국내 유일의 화석박물관인 ‘경보화석박물관’(설립자 姜海中·57)은 온통 신비스러움으로 가득차 있다.경북 영덕군 남정면 원척리 267­9 해안도로 옆,동해안 청정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이 박물관은 우리가 품고 있는 지구에 대한 의문들에 차근차근 답해준다. 우리나라에는 왜 석유가 나지 않을까.산꼭대기에서 물고기 화석이 발견되는 까닭은.수십억년 지구역사는 어떻게 진행돼 왔을까.또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끝없는 우리의 의문을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화석이다.화석은 보면 볼수록 신비 그 자체이다.5억7천만년 전에 살았다는 삼엽충화석은 그 몸통과 가시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반투명한 호박보석 속의 모기는 작은 몸체는 물론이고 날개와 가느다란 다리까지 너무도 선명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다.신생대에 살았던 노랑가오리와 주변 작은 물고기들의 모습들이 찍힌 화석은 마치 고풍스런 수족관을 연상케 한다. 화석은 지질시대(1만년전 이상)에 살던 생물의 유해와 흔적을 가리킨다.생물체의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물론,발자국 또는 기어간 자국과 같은 생활흔적,배설물 등을 포함한다.죽으면 썩어 없어지는 것이 생물의 일반적인 현상일때 화석으로 남는 것은 특수환경에서만 가능한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고생대 이전 선캠브리아기 암석과 중생대의 화성암류로 되어 있다.그러나 선캠브리아기 퇴적암층은 오랜 지질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대부분 변성암으로 되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화석들의 구조와 형태가파괴되어 화석 산출은 극히 드물다.화성암류도 지각내부의 마그마가 굳어져 생성됐기 때문에 화석이 없다.따라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고생물학자나 학생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제대로 된 화석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화석에 매료된 한 수집가의 집념으로 이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전세계의 화들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1996년 6월 문을 연 이 박물관에 소장된 1,500여점의 진귀한 화석들은 설립자 姜씨가 20여년 동안 국내는 물론 세계 20여개국에서 수집한 것들이다. 150여평의 전시실과 시원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야외전시관을 갖추었으며,시대별 지역별 특성에 따라 고생대·중생대·신생대관,한국관,광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인류보다 2억여년 앞섰으며 또 2억년간 생존,지구에서 최대 종(種)의 지위를 누리다 멸종된 5억5천만년전의 삼엽충,최초의 담수성파충류인 도마뱀 ‘메소사우르스’,중생대 쥬라기의 군집상태로 보존된 암모나이트화석 ‘닥틸리오세라스’,12개의 공룡알이 모여 있는 화석 등 태고 신비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야외전시관에는 죽은 고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규화목 50여점이 있다.만져보기 전에는 나무인지 암석인지 구별이 안된다.규화목을 잘라낸 단면은 다양한 나무결 무늬에다 화석에 함유된 광물질이 뿜어내는 오묘한 빛깔까지 더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대부분 다양하고 보존상태가 좋은 완벽한 것들이다. 또한 2층 한쪽 100여평 공간에는 姜씨가 최근 2년간 새로 수집한 식물화석만을 선보일 ‘식물화석 테마관’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이 박물관은 훌륭한 전망과 깨끗한 백사장이 펼쳐진 해변을 걷는 즐거움 또한 선사한다.특히 이 곳에서 10여분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얼마전 인기리에 끝난 주말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무대이며 영덕대게의 집산지로 유명한 강구항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드라마속 최불암의 질박한 연기모습을 떠올리며 영덕대게를 맛보는 것은 화석박물관 관람의 묘미를 배가시켜 준다. ◎金美顯 관장/“학생들 견학 많이 왔으면…”/잘모르는 관람객에 많은 설명 해주려 노력/재원 부족해 안타까워 경보화석박물관 金美顯 관장(30)은 젊다.아직도 부산대에서 지질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구열에 불타는 대학원생이기도 하다.모교인 충남대의 추천으로 박물관 설립과 함께 이곳에서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의 화석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유별난 듯했다.곧 문을 열게 되는 제2전시실 작업장을 보여주는 그녀의 자세는 며칠째 밤샘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쳐났다. “처음 소개를 받고 이 곳에 와서 화석을 보고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명색이 지질학도이면서도 화석다운 화석을 볼 기회가 없었던 제게 이곳 화석은 너무 완벽해 보였지요.그때부터 바로 전시실을 꾸미는 작업부터 들어갔습니다.” 한국의 지질학 역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워낙 짧고 일반인들의 화석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녀가 2명의 직원들과 함께 관람객들에게 사명감을 갖고 되도록 많은 설명을 해주려 애쓰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박물관의 재정문제도 중요한 어려움 중의 하나다.사립박물관이라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전혀없어 얼마 안되는 입장료로 운영비와 화석 구입비를 충당해야 한다.“물론 턱없이 부족해 설립자가 박물관 아래층에서 운영하는 휴게소 매점과 주유소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충당합니다.” “행정당국이 재정적인 지원까지는 못해주더라도 가까운 학교들이 학생들의 견학프로그램 등에 박물관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도움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는 절실한 바람을 강조한 金관장은 앞으로의 원대한 꿈도 펼쳐 보였다. “설립자의 뜻대로 이 박물관을 역사성과 영원성을 갖춘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화석박물관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그러자면 더 좋은 전시품과 시설,교육프로그램을 갖추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겠지요.” ◎화석박물관 가는 길/포항서 40분 거리 위치/장사해수욕장 바로 위/백사장 거니는 멋도 경북 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방면으로 40분쯤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하얀 백사장이 장관을 이루는 장사해수욕장을 만난다.여기서 1.5㎞를 더 가면 왼쪽에 붉은 벽돌로 지은 경보휴게소가 있고 그 2·3층에 경보화석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버스를 이용하려면 포항종합터미널에서 영덕행 직행버스를 타고 장사해수욕장에서 내려 택시나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한다.여유가 있다면 해수욕장에서부터 오른 쪽에 자리한 시원한 동해의 파도와 눈부신 백사장을 벗삼아 걷는 것도 괜찮을 듯.20분이면 충분하다. 박물관 관람은 평일 상오 9시부터 하오 7시까지,주말과 공휴일은 상오 9시부터 하오 8시까지다.소요시간은 1시간30분 정도.지난 해 9월부터 받고 있는 입장료는 어른 2,000원,어린이는 1,000원이다.노인과 장애자,국가유공자들은 무료.연락처 (0564)32­8655.
  • 李鍾贊 안기부장 관훈클럽 일문일답/“남는 電力 北 제공 용의”

    ◎北,파키스탄 핵 개발관련 흔적 못찾아/鄭周永 회장 방북 절차협의 시간 필요 李鍾贊 국가안전기획부장은 8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조찬간담회에 참석했다.지난 61년 중앙정보부(현 안기부)가 창설된 이후 정보기관의 장(長)이 언론단체의 공식 토론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다음은 일문일답. ­정부는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비료제공과 관련된 남북한 차관급 회담에서 상호주의 원칙을 밝혔다.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경직’됐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한데. ▲경직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북한을 도우려면 북한쪽에서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북한측이 요구하는 비료 20만t은 700억원이다.북한측의 성의나 반응도 없이 지원하는 것을 국민들은 바라지 않는다. ­파키스탄이 북한의 핵실험을 대리했을 가능성도 점쳐지는데.또 북한이 핵개발을 할 가능성은 없는지. ▲파키스탄과 북한이 (핵실험과 관련한)기술적인 교류를 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고 있어영변지역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할 수 없다. 다른 은폐된 지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는지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9일 방북(訪北)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늦어지는 이유는. ▲鄭명예회장의 방북 원칙은 (남북간에)합의됐다.구체적인 절차에 관해 아직 합의되지 않은 게 있을 뿐이다. 鄭명예회장은 판문점을 통해, 다른 가족은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간다고 하는데 북한방문 절차가 간단한 것 같지만 복잡하다.시간이 필요하다. ­새 정부들어 안기부 직원의 11%(약 1,000명)가 감원됐다.개혁보다는 숙청이나 혁명처럼 보이기도 한다.감원된 전직 안기부 요원중 대공(對共)수사와 간첩전문가도 많은 것 같다.문제는 없겠는가. ▲작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만들려면 인사쇄신은 불가피하다.줄을 대고 있던 사람과 자격이 없는데도 지연만을 내세워 있던 사람들을 비롯,‘인사거품’이 될 만한 사람들을 감원한 것이다. 좀더 기동성있는 인사체제로 개편한 것으로 보면 된다.묵묵히 일해왔지만 과거에 소외됐던 전문성과 실력있는사람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인력은 오히려 강화됐다. ­한국전력은 남는 전력을 북한측에 줄 수 있다는 입장인데. ▲전력도 생산된 제품이다.남으면 낭비다.따라서 한전이 남는 전력을 북한에 제공하면서 적당한 값을 받으면 좋다고 본다.북한에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한전의 전력과 같은) 정제된 전력이 필요하다. 남북대화가 본격화되면 한전이 전력을 북한에 공급하는 문제가 논의될 수밖에 없다. ­북한정세에 관해 일본과의 정보교류 계획은. ▲이번 주에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정보교류 문제를 깊이 있게 얘기할 계획이다.
  • ‘즐거운 사라’와 비아그라/釋之鳴 청계사 주지(時論)

    며칠 전에 馬光洙씨가 연세대학 교수로 복직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는 92년에 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냈는데 음란성이 과하다는 이유로 실형과 실직의 고통을 겪었었다.나는 그 소설을 읽지 못했지만,과거에 월간 잡지에 연재된 글들의 성향으로 보아서 나라 법이 왜 그 소설을 음란물로 간주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사와 악마 인간의 양면성 馬교수는 자기 소설의 음란성을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설명한다.인간에게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해당하는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이 있다.낮에는 최고의 지식인이고 도덕군자(道德君子)인 사람이 밤에는 야수(野獸)가 된다는 것은 비유일 뿐이다.밤과 낮에 관계없이 인간은 육체를 초월하려는 고매한 이상과 육체의 즐거움에 탐닉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인간의 천사성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문제는 동물성이다.소설에 음란성(淫亂性)이 짙게 된 이유는 인간이 가진 저 동물성을 대리로 배설해서,사람들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요즘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에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하다.미국에서는 최근에 전국적인 총판매액이 가장 많은 약이 되었고,이 약을 복용하고 있는 전 대통령 후보 부부가 그 효능에 대해서 기자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우리나라의 공항 세관은 이 약의 지입(持入)을 막는데 바쁘고,경찰은 남대문 시장에서 이 약이 암거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수사에 착수했다.정력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태국 여행까지 서슴치 않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약을 먹어 보고 싶어하건만,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안정성 및 유효성(有效性) 검사와 임상시험을 모두 마치고 약이 판매되는 시기는 내년말쯤이 될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피임약이 여성을 임신 공포에서 해방시켜서 마음놓고 성을 누릴 수 있게 했던 것처럼,비아그라가 남성을 여성에 대한 무력감 또는 위축감(萎縮感)에서 해방시켜서 마음대로 성을 누릴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馬교수의 소설과 비아그라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소설의 음란성은 전통적으로 인정해 온성기와 그것의 발기에 의존하지 않고 성욕을 충족시키는 예를 보여 주려 한다.특정한 성기나 정력에 기대어서 성을 즐기려고 하면 힘만 들고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 줄 수도 없기 때문에,성도착(性倒錯)이나 변태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이에 비해서 비아그라는 직접적으로 성기에 힘을 불어넣고 그것에 의지해서 성욕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性 압박서 해방 시도 일치 馬교수 소설의 음란성과 비아그라가 사람들을 성의 압박에서 구하려고 시도하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그 방법은 정반대다.馬교수는 지금까지 고착적(固着的)으로 인정되어 온 성기에 구애받지 않고 온몸을 성기화하려고 한 데 비해서,비아그라는 성기 그 자체를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불가에는 성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수행력이 높은 한 선사가 있었다.어느날 빨래 담당 수행자가 그 선사의 속옷속에서 몽정(夢精)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선사는 수행자에게 물었다.“옷이 더럽혀졌을 때 세탁하려는 사람의 진짜 주인은 마음인가 몸인가(몽정의 주체는 몸인가 마음인가)”하고 말이다.그 법문을 들은 수행자는 절을 하고 물러갔다. ○마음의 미혹·욕망 버려야 중생으로서의 모든 인간에게 성욕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그 성욕을 달래기 위해서 馬교수나 비아그라가 크게 기여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이 두가지 방법이 인간의 성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전신(全身)의 성기화나 성기의 강화는 어디까지나 육체의 요구를 들어주는 임시 방편책일 뿐 근본적 치유책은 아니다.우리의 마음에 미혹(迷惑)과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몸을 달래도 소용이 없다.저 고승의 몽정 이야기는 바로 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마음에 있음을 전하려고 한다. 몸만 아니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그곳에 가득한 마음이 모두 성기가 아니던가.우주적인 성기를 깨닫고 그것을 음미할 수 있을 때만 성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 가정의 달/가족과 손잡고 고향의 봄을…

    ◎아련한 추억 되새기며 가족애도 다지고/근교 한적한 곳 나들이로 찌든 심신 ‘훌훌’ 【양산·마산=任泰淳 기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동문학가 李元壽씨의 동시 ‘고향의 봄’이다.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동요지만 동요의 차원을 넘어 전국민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다.굳이 고향이 남쪽이 아니라도 이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고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래서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자위가 붉어 진다.그만큼 고향의 정겨운 모습이 간단하고 평이한 언어로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또 ‘고향’과 ‘봄’의 절묘한 배치도 이 노래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李元壽는 1911년 경남 양산읍 북정리 660에서 태어났다.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15살이던 1926년.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명정같은 마음이 이 노래말을 탄생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고향의 봄’ 무대는 어디였을까.그의 생가터는 아직 북정리에 남아 있다.아파트와 연립주택을 지나 꼬불꼬불 샛길로 접어들면 제일 뒤편에 기와집이 나타난다.기와집 너머로는 낮은 야산이 있고 집좌우측으로는 대나무,감나무가 휘감고 있다.넓직한 마당 한켠에는 텃밭과 꽃밭이 있다.50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는 김복남씨(71)는 “옛날에는 마을 초입의 교리에 복숭아꽃,양산천 제방에 수양버들이 가득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택지로 개발이 되고 도로가 뚫리면서 그 옛날 고향의 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대신 양산천 너머 강서동의 춘추공원에 그를 기리는 시비만이 남아 그와의 인연을 말해준다. 李元壽는 김해,창원,마산 등을 옮겨 다니며 소년시절을 보낸다.그는 생전인터뷰를 통해 “창원에서 서당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며 고향의 봄을 지었다”고 회고했다.그러나 김해,창원 등지에서도 고향의 봄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서당과 그가 기거하던 집은 없어져 버렸고 그가 다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학교)도 현대식 건물로 바꼈기 때문이다.양산과 마찬가지로 마산 산호공원에 그의 시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5월은 어린이날,어버이날이 이어지는 가정의 달이다.가정의 달을 맞아 자녀들을 이끌고 한번 고향집 뒷산을 찾아 보자.고향집이 사라졌으면 고향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근교의 한적한 곳을 찾아 보자.
  • 터키 넴루트유적(세계 문화유산 순례:71)

    ◎2,150m 산 정상에 늘어선 거대 석상들/우주를 껴안은 ‘신의 테라스’/기원전 1세기 번성 코마게네왕국 ‘흔적’/로마에 대항했던 파르티아와 소멸 함께/안티오쿠스1세 묘·신상 등 곳곳에/테라스에 비친 빛의 향연 신을 만난듯 터키의 아나톨리아는 수천년 오리엔트 문명이 다양하게 중첩되고 잘 보존된 문명 박물관이다.어디를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히타이트,미타니,오라르투,바빌로니아,아시리아,메데스,페르시아,마케도니아,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일련의 인류문명들이 모두 이 지역을 지나가거나 이곳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더욱이 동방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아나톨리아는 동양과 서양이 함께 조화된 독특한 문화의 향기를 가졌다. ○페르시아 그리스 혼합 이러한 대표적인 유적지가 터키 동남쪽 아드야만을 중심으로 기원전후 1세기경 번영을 누렸던 코마게네 왕국이었다.이 왕국의 유적은 특이하게도 2천150m 높이의 넴루트 산 정상에 있는 안티오쿠스 1세의 무덤을 중심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넴루트 유적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세계 8대 불가사이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산 정상에 이룬 정교한 도시문명과 수도 없이 펼쳐지는 10m에 달하는 거대한 석상들의 존재 때문이다.물론 코마게네 왕국의 수도는 카흐타 마을에서 남쪽으로 50㎞ 지점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사모사타였다.그러나 그곳은 이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고,그나마 몰아닥친 개발의 열풍에 밀려 영원한 역사의 수수께끼가 된지 오래다. 코마게네 왕국은 기원전 69년에서 서기 72년까지 반짝했던 동서양 혼합 문명국가였다.오히려 이란을 중심으로 한 고대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군단이 대치하고 있는 경쟁의 공백지대에 생겨난 완충국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같다.이런 상황은 동시에 주변 양 강대국의 세력판도에 따라 왕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하였다.코마게네는 파르티아와 연계하여 로마내전의 시기에 집요한 반로마 투쟁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결국 로마가 평정을 되찾자코 마게네 왕국도 다른 수많은 군소국가들과 함께 네로 통치하의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코마게네 왕가의 출신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다만 기원전 2세기 소아시아의 안티오크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알렉산더의 후계국가 셀루키드 왕조의 후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유프라테스 상류에 자리잡은 코마게네 왕국의 통치권이 셀루키드 왕조와 일치하고 왕의 이름이 안티오쿠스라는 점 등이다.그러나 다방면의 연구결과 코마게네 왕국의 문화적 성격은 페르시아적인 비탕에 그리스적 요소가 가미된 혼합문화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더욱이 소아시아의 수많은 군소국가들이 로마의 점령과 함께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망각되었지만,코마게네는 인간의 눈을 의심케하는 위대한 문명을 남겨놓았다.그것도 2천m가 넘는 험준한 산의 정상에. ○60m 높이에 직경 150m 넴루트 산 아래에 있는 카흐타 마을에서 출발하여 산 언저리에 오르는 시간만 자동차로 한시간 가량 걸린다.우선 산 정상이라 생각되는 자그만 언덕이 눈길을 끈다.이것이 바로 코마게네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안티오쿠스 1세 왕의 거대한 무덤이다.높이 60m,직경 150m 크기의 이 왕묘는 소아시아전역에서 다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형태인데,산 정상에서 하늘로 향하고있는 독특한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하늘과 가장 가까이 감으로써 왕 자신이 다시 신으로 부활하리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그들은 이 무덤의 정상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지상의 낙원을 향해 사방으로 돌을 깎아 성벽과 테라스를 만들었다. 특히 동서 테라스에는 거대한 신의 석상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다.분명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실제로 신을 만나는 감흥이 있다.8∼10m 높이를 가진 신들은 아폴로,행운의 여신 티케,제우스와 헤라클레스등 4개의 신들이 주류를 이룬다.그리고 이 왕국의 최고 통치자인 안티오쿠스가 지상의 인간신으로 그 거대한 불멸의 모습을 남겨놓았다.그들의 수호신인 사자와 독수리의 석상들도 훨씬 커다란 높이에서 그들을 감싸고 있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아폴로 신상의 의미이다.태양신 아폴로는 이 지역전통신인 빛의 신 미트라와 습합(習合)하여 나타난다.조로아스터교의 한 분파인 미트라교는 당시 오리엔트 일대에 크게 성행하여 로마의 종교는 물론 새로 태동한 기독교의 성장과 의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의례에도 영향 넴루트 유적을 감상하는 최고의 시간대는 일출과 일몰이다.동서 테라스에 스며드는 황홀한 빛의 향연은 2000년전 바로 이곳에서 성대하게 행해졌던 종교적 의례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코마게네 유적과 유물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넴루트의 동쪽 테라스로 가본다.이곳에는 바위 반석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신들의 모습이 압권이다.아폴로와 미트라 신상이 함께 보이고,풍요의 신인 코마게네 신과 8∼9m 높이의 안티오쿠스 1세의 신상도 열을 지어 서 있다.좌우에는 사자와 독수리 상이 수호신으로 신들을 보호하고 있다. 서쪽 테라스는 신들의 회합장소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석상들이 테두리가 있는 다양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한결같이 근엄한 모습으로 나란히 서있다.서쪽 테라스에서 가장 눈길을 크는 것은 여러 신들과 악수하고 있는 안티오쿠스 신상은 물론이려니와 너무나 아름답게 조각된 사자별자리의 부조이다.이 천문도의 역법에 의하면 기원전 109년 7월14일인데 이 날은 바로 안티오쿠스의 부친인 미트리다테스 왕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날이었다. 특히 동서 테라스를 연결하는 언덕에 서있는 비문에는 안티오쿠스 1세가 새긴 코마게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당시의 사회관습과 생활상이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넴루트 산 정상에 남아 있는 유적은 코마게네왕국의 일부분이다.이 왕국의 실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는 셈이다. ◎넴루트 가는 길/아드야만시서 차로 3시간/아레세미아모텔 등 깨끗 넴루트 산 정상 유적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우선 터키 동남부의 아드야만시로 가야한다.이스탄불에서 1천228㎞,앙카라에서 770㎞ 거리에 있다.이스탄불까지는 서울에서 아시아나 직항편이 있다.아드야만에서 다시 자동차로 1시간30분을 달려 카흐타로 가서,그곳에서 약 100㎞ 거리에 있는 넴루트 정상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된다.카흐타에 코마게네 호텔과 아드야만에 아레세미아 모텔이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원더풀 투어(212­257­2288)와 한국계 윤투리즘(212­257­1361)이 넴루트 전문여행사이다.
  • 그리스 사모스섬(세계 문화유산 순례:68)

    ◎BC 2000년 미케네문명 유적 곳곳에/헤라여신 성전 흔적/6,400m 동굴터널 헬레니즘시대 빌라/계단식 노천극장에 고고박물관도 볼만 고대 그리스 영역은(기원전 6세기∼3세기경 기준) 그리스 본토를 중심으로 좌우,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사이에 끼고 이탈리아반도의 남쪽 시칠리아와 소아시아반도 그리고 지중해 곳곳에 펼쳐진 크고 작은 많은 섬들로 이루어졌었다.기원전 6세기경 즉 아카익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사모스는 소아시아반도쪽에 편재된 큰 섬중 하나로 도착하면 먼저 해발 1천440m에 이르는 케리키스산이 시야에 차오면서 그 봉우리 아래 크고 작은 산들이 많은 섬이다. 그리스의 땅들은 대체적으로 찬란히 햇살받아 빛나는 푸른 옥빛 바다와는 무관하게 그 바다를 바라다보며 목마른 갈증으로 메말라가는 척박한 대지,그리고 그 갈라진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올리브나무 숲을 연상하게 된다.하지만 사모스섬에 도착하는 순간 한 눈에 이런 예상은 빗나가고 만다.울창한 숲의 푸르름,풍성히 피어있는 꽃들의 향연,기름진 옥토….그래서고대로부터 떡갈나무가 풍성한 땅이라는 뜻의 드루사,사프러스나무가 많은 땅이라 해서 키파라이시아,꽃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안데무사등으로 불렸다.또한 흙내음나는 그리스 특유의 포도주산지로도 유명하다. 사모스섬에서 하얀,푸르름이 함께 눈부신 에게해를 향해 포도주 한 잔을 건네면,먼 태고적 사모스의 전령이였던 헤라여신이 나타날 것만 같은 환영에 사로잡히는 듯하다. 사모스는 고대수도였던 피타고리안지역과 헤라이온지역,그리고 해안선 주변의 바티지역으로 구분되어져 있다.이 세 지역엔 그리스 선사시대부터 근세까지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존재했던 곳이라 고고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사모스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그리스문화가 시작되면서 헤라여신을 수호신으로 모셨다.(그리스의 각 고대도시들은 저마다 각기 수호신을 섬기었다) 때문에 헤라이온지역에 가면 기원전 2000년경 미케네인들에 의해 세워진 거대한 헤라여신의 성전흔적을 만날 수 있다.그러나 이 성전은 헤로도루스의 기록에의해 전하여질뿐,지금은 기원전 522년,아카익시대때 전성기를 누렸던 폴리크레아트 전제군주가 세운 신전의 거대한 밑 기단들만이 몇몇 포개져 흩어져 있을 뿐이다.그리고 이 기단들 사이로 기원전 7세기경의 신전 입구문 흔적이 있을 뿐이다. 헤라이온지역의 고대유적은 크게 선사시(기원전 2000년경),아카익시대(기원전 1000∼580년경),로이코스시대(기원전 580∼540년경),그리고 폴리크레아트(기원전 538∼522년경),기원전 1세기경의 유적으로 구분되어져 있다.지금은 신전과 회랑등이 부분적 파편으로만 남아있다.그러나 헤라여신의 성전앞에 기원전 50년경 로마의 유명했던 웅변가 마큐스 툴리우스 시세옹과 그의 동생인 킨티우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사모스의 역사적 변천을 엿볼 수도 있다. 고대수도였던 피타고리안지역은 1955년까지 티가니로 불리다 피타고라스를 추앙하는 의미에서 피타고리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그래서 이 작은 항구에는 그 옛날 수도임을 상징하는 폴리크레아트 신전이 서있고,옛 사모스의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고고학박물관도 있다.또한 고고학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으로는 바티해안선을 타고 300m정도 섬 중앙쪽으로 들어오면 폴리크레아트시대에 만들어진 6천400m의 우팔리노스 동굴터널을 빼놓을 수가 없다.물론 지금은 몇몇 둘러친 벽의 조각들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계단식 노천극장과 헬레니즘시대의 빌라들이 보존상태는 양호하지 않지만 주의깊게 관찰하면 그 잔해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있다.사모스의 현재 수도이기도 한 바티지역은 아카익시대의 유명한 남자조각상인 쿠루스와 여자조각상인 코레,기하학시대와 아카익시대의 청동유물 및 작은 오브제들이 소장된 박물관도 명소중 하나이다. 이렇듯 사모스는 그리스역사를 골고루 담고있는 곳이기에 각 시대별 특징적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하여 누구라도 저토록 빛나는 지중해를 바라다보고 서 있노라면 옛 그리스 신들의 향연이 들려오는 듯,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터이다. ◎여행가이드/아테네서 비행기편 1시간/관광호텔 등 숙박시설 완비 사모스까지는 아테네에서 국내선 비행기편으로 1시간이걸린다.여유를 갖고 지중해와 에게해를 함께 즐기려면 아테네에서 에페소스나 로도스섬까지가서 배편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이들 섬에서 사모스로 가는 일반선박과 페리호는 매일 뜬다.사모스는 물론 관광호텔과 같은 고급숙박시설도 잘 갖추어졌으나,그리스인 인심을 맛보려면 민박을 하는 것도 좋다.그리스 본토는 멀기만 하고 터키는 지척이어서 국경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 달 남극에 유인우주기지 세운다

    ◎ESA ‘유로문2000’ 프로젝트 추진/얼음 탐사로봇 시험주행 완료… 2001년 발사 예정/달 얼음 활용땐 수소·산소 얻고 기지비용도 절감 【朴建昇 기자】 미국 달탐사선 ‘루나 프로스펙터’가 지난 3월초 달 극지대에서 얼음 형태의 물 흔적을 발견한 이후 달에 유인(有人)기지를 건설하려는 작업이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달에는 북극 4만6천㎢와 남극의 1만8천500㎢에 걸쳐 최고 3억3천만t의 물이 얼음 형태로 흩어져 존재하고 있다.이 얼음 형태의 물은 2인 가족 1천가구가 100년이상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지구에서 2㎏의 물질을 달궤도에 올리는데 2만달러의 비용이 든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달에 매장된 얼음의 경제적 가치는 줄잡아 60조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달에서 물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우주탐사에는 이미 일대 혁신적 발전이 예고됐다.우선 물을 화학분해하면 상설 우주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연료와,다른 행성으로 쏘아 올리는 로켓의 추진연료를 얻을 수 있다.얼음을 녹이면 생명수가 되고,이를 전기분해하면 로켓연료인 수소와 산소가 나오기 때문이다.로켓추진제로 쓰이는 액체산소와 액체수소를 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지구를 떠날 때 돌아올 추진제까지 싣고 갈 번거로움이 없어진다.이런 맥락에서 과학전문지 ‘뉴사언티스트’는 “달의 얼음을 활용하면 유인기지 운용비용을 적어도 60% 남짓 줄일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게다가 본격적인 달기지 건설에 나섰을 때 물에서 산소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식물을 경작하는 방식으로 식량도 조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얼음이 달의 남극과 북극의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크레이터(분화구)에 매장되어 있다는 점.이 곳 대부분은 온도가 섭씨 영하 173도이상 오르지 않는 혹한지역인 데다 인간이 그동안 유력한 달기지로 꼽았던 적도부근에서 무려 3000㎞나 떨어져 있다.이론상으로는 흙을 파헤쳐 얼음덩어리를 꺼낸 뒤 적도지역으로 옮기면 되겠지만 이같은 작업에는 실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추진하고 있는 유인기지 건설작업이 유럽우주국(ESA)의 이른바 ‘유로문 2000(EuroMoon 2000)’ 프로젝트. 유럽우주국은 달의 얼음을 가장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의 하나로 달 남극 크레이터 주변지대인 이른바 ‘만년광봉(萬年光峰)’에 유인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만년광봉’은 직경이 수㎞에 불과하며,남극인데도 늘 햇볕이 드는 매우 희귀한 지역.얼음덩어리가 매장된 곳과 인접해 있으며 온도는 섭씨 영하 30도 안팎으로 기후조건이 매우 양호하다.유럽우주국은 빠르면 2001년 첫 왕복선을 쏘아 올려 탐사로봇을 얼음이 매장된 근처의 크레이터에 떨어뜨려 놓을 계획이다. 얼음탐사용 로봇의 제작도 순조롭다. 미국 카네기 멜론대학 레드 휘태커 박사팀은 최근 달의 가장 깊은 지대인 크레이터에 매장된 얼음덩어리를 탐색,발굴할 수 있는 시험용 탐사로봇을 공개했다.휘태커 박사팀은 지난해 칠레아타카마 사막에서 이 얼음탐사용 로봇의 시험주행을 마쳤다. 달의 물을 이용해 유인기지에서 작물을 재배하려는 연구는 일본에서 활발하다.일본 로카쇼무라 환경과학연구소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끝에 최근 월면(月面) 경작용 벼품종을 개발했다.이 벼는 ‘무츠 호마레’라는 품종의 돌연변이로 실험실에서 온도·일조량·이산화탄소량을 적절히 조절,월면의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1년에 세차례 수확할 수 있으며 미질(米質)은 보통 쌀보다 떨어지지만 달에서 식량으로 쓰기에는 손색이 없다고 로카쇼무라연구소측은 설명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일본은 오는 2005년까지 달에 1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식민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다.일본의 건설회사인 시미츠사는 이를 위해 위험한 우주광선을 차단하고 극한온도(섭씨 영하 190도∼영상 137도)에서 견딜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건축기술을 연구중이다. 이와 함께 유성과 충돌하더라도 피해가 없는 나선형주택의 개발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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