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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800년 전 아기 안고 숨진 어머니 화석 발견

    대만 타이중에서 4800년 전 아기를 안고 숨진 어머니의 화석이 발견됐다. 지난 25일 대만 자연사 박물관 측은 인류의 초기 활동의 흔적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어린이 5명을 포함 총 48명의 화석들이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현재까지 대만 중부에서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고대인의 화석은 고고학적인 가치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발굴된 화석 중 영아를 안고 숨진 어머니 화석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고있다. 발굴을 이끈 추 웨이리 박사는 "지난 2014년 5월 발굴을 시작했으며 그중 어머니 화석에 모든 연구원들이 충격을 받았다"면서 "어머니는 자신의 팔에 아이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자 혹은 모녀 지간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사인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면서 "갯과 동물의 이빨과 일부 손가락 뼈가 함께 발굴돼 연구실로 보내졌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4800년 전 아기 안고 숨진 어머니 화석 발견

    대만 타이중에서 4800년 전 아기를 안고 숨진 어머니의 화석이 발견됐다. 지난 25일 대만 자연사 박물관 측은 인류의 초기 활동의 흔적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어린이 5명을 포함 총 48명의 화석들이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현재까지 대만 중부에서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고대인의 화석은 고고학적인 가치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발굴된 화석 중 영아를 안고 숨진 어머니 화석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고있다. 발굴을 이끈 추 웨이리 박사는 "지난 2014년 5월 발굴을 시작했으며 그중 어머니 화석에 모든 연구원들이 충격을 받았다"면서 "어머니는 자신의 팔에 아이를 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자 혹은 모녀 지간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사인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면서 "갯과 동물의 이빨과 일부 손가락 뼈가 함께 발굴돼 연구실로 보내졌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與 “소통 출발점” 국민의당 “늦게나마 다행” 더민주 “공식 요청 있으면 그때 봐야지”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45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개최한 오찬 간담회에 대해 새누리당은 ‘소통’ 행보의 출발점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이 불통을 다시 한번 확인한 간담회”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국민의당은 “언제라도 대화와 협력을 할 자세가 돼 있다”며 협력을 강조했다. 새누리당 이장우 대변인은 이날 간담회가 끝난 뒤 논평을 통해 “국민의 뜻을 듣고 헤아려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난제들을 풀어나가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적극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 정부와 국회, 언론 모두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경제 살리기이고, 안보위기와 경제 불황의 늪을 빠져나가기 위한 지혜와 역량의 결집이 필요할 때”라면서 “새누리당은 사즉생의 각오로 정부, 야당과 협력해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반면 더민주 이재경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끝났다”며 “소통의 전제가 돼야 할 반성과 변화를 위한 고민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어 “4·13 총선 민의는 국정 전반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었지만 어디에도 총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의 3당 대표 회동 정례화 제안에 대해서도 이 대변인은 “검토해 보겠다”고만 밝혔다. 이와 관련,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도 “공식적인 요청이 있으면 그때 봐야지”라고만 말했다. 국민의당 김희경 대변인은 박 대통령이 언급한 3당 대표 회담에 대해 “국민의당은 고단한 민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대화에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며 전향적 입장을 밝혔다. 안철수 상임공동대표는 “늦게나마 인식한 것은 다행이지만 근본적인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생산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정의당 한창민 대변인은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개혁에 최선을 다하고 소통을 한다고 말했는데 총선의 민심을 잘 들어볼 필요가 있다”면서 “지금까지의 개혁 방향을 계속 추진할 것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1억년 전 화석 되살아난 ‘땅끝마을’은 둘리 고향이래요

    [명인·명물을 찾아서] 1억년 전 화석 되살아난 ‘땅끝마을’은 둘리 고향이래요

    국내 최대 공룡박물관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이 경남 고성이라고 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땅끝마을’로 유명한 대한민국 최남단의 해남군 우항리에 최대 공룡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2007년 문을 연 우항리 공룡박물관은 500여점의 공룡 관련 화석과 각종 희귀전시물이 갖춰져 있다. 공룡들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다.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일대 74만 8243㎡ 규모로 지어진 박물관은 지하 1층·지상 2층의 공룡박물관(7966㎡)과 조각류공룡관·익룡 조류관·대형공룡관 등 3동의 야외전시관(2376㎡) 등으로 조성됐다.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 한반도의 주인이었던 공룡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장감 있게 꾸며져 있다. 한 해 30만여명이 찾는 관광명소다.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호남고속철(KTX)을 이용하면 넉넉잡아 3시간 안에 서울에서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돼 요즘 들어서는 수도권 등에서도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공룡박물관 일대는 공룡화석 자연사 유적지로 유명한 곳이다.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훌륭한 공룡화석지로 세계 최초와 세계 최대, 세계 최고의 학술적 가치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해남 우항리는 1992년 한국자원연구소의 지질학 연구조사 중 공룡발자국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인 권위자들의 인증을 받아 고생물 화석군으로 인정받았다. 세계 최초로 공룡·익룡·새발자국 화석이 동일 지층에서 함께 발견되면서 1988년 천연기념물 394호로 지정됐다. 면적은 123만㎡에 이른다. 별 마크가 달린 대형 초식공룡 발자국 110점과 퇴적층에서 나타나는 뜯어내림 암편도 세계 최초로 발견됐다. 크기 35㎝, 보행렬 7.3m의 세계 최대 익룡 발자국 443점과 8300년전 살았던 세계 최고 물갈퀴새 발자국 1000여점도 볼 수 있다. 아시아 최초의 절지동물 흔적 화석 1000여점과 길이7.7m, 원석 85%인 알로사우루스 진품 화석도 전시돼 있다. 익룡의 보행 흔적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다양하고 정교한 퇴적층군을 형성하고 있어 화석지로서 가치뿐만 아니라 지질사의 무수한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높이 21m에 이르는 조바리아(중생대 백악기 후기의 고대 초식공룡), 공중에 재현된 우항리 익룡 등 45점의 공룡전신 화석을 비롯, 각종 전시물의 거대한 위용은 타임머신을 타고 공룡의 세계에 도착한 듯한 착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희귀한 공룡유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EBS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의 배경이 될 정도로 세계적인 공룡 화석지로 주목받는 장소다. ●공룡 실제 살았던 흔적 볼 수 있는 ‘생물 교과서’ 해남군은 이러한 공룡 화석 유적지를 개발하면서 바로 옆에 500억원을 들여 공룡박물관을 건립했다. 단순한 공룡 모형뿐 아니라 실제 살았던 흔적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서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인 9000만년 전에 공룡들이 살았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시대별 공룡실, 중생대 재현실, 해양파충류실, 익룡실, 새의 출현실, 거대 공룡실 등 전시실과 공룡 관련 영상을 상영하는 영상실, 어린이 공룡교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일대의 해안가를 따라 5㎞에 이르는 공룡 화석지는 공룡발자국 등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생물 교과서다. 공룡의 신비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곳이다. 공룡박물관을 보고 해안가를 한 바퀴 돌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시간이 언제 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에 푹 빠진다.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고, 밖에서 맘껏 놀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서 어린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지난 23일 주말을 맞아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광주에서 왔다는 김모(13군)군은 “이곳을 다녀온 친구들이 너무나 자랑을 많이 해서 엄마한테 졸라서 왔다”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기하고 놀랐다”고 뿌듯해했다. 박물관에 인접한 금호 호수는 테크로 산책길을 조성해 탁 트인 풍광을 보는 즐거움도 주고 있다. 바다였지만 둑으로 막아 지금은 호수가 됐다. 영산강 지류인 이 호수는 멀리서 보면 바다로 보일 정도로 넓다. 수백 마리 철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기분도 짜릿하다. ●실물 크기 공룡·놀이시설 있어 가족단위 ‘인기’ 공룡박물관 외에도 발자국 화석을 따라 주요 화석지에는 조각류 공룡관, 익룡조류관, 대형공룡관 등 3개의 보호각이 조성돼 있어 움푹움푹 파인 발자국 등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또 금호호의 갈대밭과 어우러진 330만㎡의 넓은 야외 공원에는 실물 크기 공룡과 놀이시설이 조성돼 가족단위 관광객들과 어린이 체험학습 장소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야외에는 실제 크기로 조성된 높이 20m, 길이 30m의 초식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와 티라노사우루스, 트리케라토스 등 35개 조형 공룡들이 있어 마치 주라기 공원을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김모(42·여수시)씨는 “인공적이 아닌 자연 상태를 그대로 활용해 만들어져 있어 공룡 시대에 직접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탁 트인 넓은 야외 공원도 좋고, 공룡 흔적을 찾아 걸으니까 마치 백악기 시대에 온 것 같아 어른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남공룡박물관에서는 본격적인 관광철을 앞두고 오는 6월 26일까지 주말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봄이 되면서 관람객이 늘어나고 있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으로 색다른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봄나물 파전 만들기를 비롯 새콤달콤 슬러시 만들기, 초콜릿 케이크 만들기, 공룡 초콜릿 만들기 등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프로그램 위주로 구성돼 있다. 해남군은 관람객들에게 더 질 좋은 서비스를 위해 어린이날 운영과 특별전 개최 등 다양한 내용의 행사와 상설· 기획 전시 등을 연중 개최하고 있다. 지난 2010년에는 60억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공룡테마파크를 조성하는 등 세계적인 문화관광 자원으로 개발 중이다. 관람객 편의 증진과 화석지 내 전시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음성안내기(MP3) 50여대와 야외전시관 영상안내시스템 5대도 비치했다. 화석지 매표소에서는 유모차와 휠체어를 무료 대여해주는 등 온 가족들이 편안하게 다닐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까지 하고 있다. 해남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자신이 디지털 도어락 설치한 신축 빌라 턴 절도범 구속

    자신이 디지털 도어락 설치한 신축 빌라 턴 절도범 구속

    자신이 설치한 신축 빌라 디지털 도어락의 마스터 비밀번호를 이용, 상습적으로 훔친 절도범이 붙잡혔다. 경기 안양 만안경찰서는 도어락 마스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 안양과 안산, 수원 등 수도권 일대에서 모두 9차례에 걸쳐 1200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훔친 김모(40)씨를 상습절도혐의로 구속했다고 24일 밝혔다. 김씨는 훔친 신용카드로 고가의 카메라를 구입한 후 중고거래 사이트에 되파는 수법으로 200여만원을 부당취득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해 6월 근무했던 회사가 부도나자 자신이 도어락을 설치했던 신축빌라만을 골라 범행을 저질렀다. 김씨는 화재 등 비상시를 대비해 마스터 비밀번호가 설정된 점을 악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침입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귀중품만 몰래 가지고 나와 대부분 피해자들은 카드이용 명세서나 문자 서비스를 받고 나서야 절도 피해 사실을 알게 돼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디지털 도어락을 초기화해 이 같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지금, 이 영화] ‘철원기행’

    [지금, 이 영화] ‘철원기행’

    가족은 제국이고, 가족 구성원은 식민지이다. 가족주의라는 이름의 제국주의는 부부·부모·자식·형제·자매 관계를 식민화한다. 가족 체제는 가족 구성원이 서로가 서로를 은밀히 수탈하며 유지된다. 이것은 가족에 관한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래서 예민한 시인은 이러한 시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0년 전, 이상(李箱)의 시구이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 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가정’의 일부) 식민지 조선 청년은 일본과 가족-두 개의 제국에 압사당하고 있었다. 이제 한 개의 봉인은 풀렸다. 그러나 아직 한 개의 봉인이 남았다. 80년 후, 우리는 모두 그 문 앞에 서 있다. 철원에서 평생 고교 교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정년퇴임을 하는 날이다.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어머니, 큰아들 부부, 작은아들은 오랜만에 철원으로 왔다. 초라한 퇴임식이 끝나고 궁상맞은 중국집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한다. 아버지와 큰아들은 말이 없고, 늦게 온 작은아들은 쩝쩝대며 먹느라 바쁘다. 퇴임식도, 중국집도 못마땅한 어머니는 연신 투덜대기만 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큰며느리는 여러 가지 말을 꺼내지만 별로 신통치 않다. 술잔을 기울이던 아버지가 마침내 침묵을 깬다. “이혼하기로 했다.” 가족이라는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선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 ‘철원기행’은 진짜 시작을 알린다. 영화 제목은 어쩔 수 없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기행’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알고 있는 대로, 기행은 여행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데 그렇게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철원과 무진은 등장인물들에게 전혀 생소한 곳이 아니라, 그들의 연고지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직장이 달라 전부 떨어져 살지만 원래 철원은 (큰며느리를 제외한) 가족의 보금자리였고, 무진은 주인공의 본적지였다. 애초에 기행은 고향과 연결시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두 작품은 모순된 표제를 내세운다. 낯익은 동네에서 등장인물들은 정말로 낯선 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가족-타인을, 또한 조금도 의심치 않던 자기 자신을 하염없이 헤맨다. 갑작스럽게 눈이 푹푹 쏟아진다. 철원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힌다. 형식적으로만 이어져 있던 가족 해체를 공표한 바로 뒤, 식구들이 한집에서 며칠 동안 얼굴을 맞대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펼쳐진다. 가족이 가진 제국의 속성과, 가족 구성원이 가진 식민지의 속성이 저마다 부딪치고 뒤섞여 엉클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며느리, 아들과 며느리의 입장이 중첩된다. 내면의 그늘이 조금씩 서로에게 드리워진다. 각자 감추고 피차 모른 척해 왔던 것이다. 눈이 그친다. 이들은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아무것도 해결된 문제 없이, 다만 서로의 그늘이 마주 겹쳤던 흔적을 지닌 채로. 12세 관람가. 21일 개봉.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인적 끊긴 ‘유령 도시’ 프리피야트… 끊지 못한 ‘원전 중독’

    인적 끊긴 ‘유령 도시’ 프리피야트… 끊지 못한 ‘원전 중독’

    오는 26일(현지시간)이면 ‘20세기 최악의 원전 참사’로 기록된 구소련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한 지 30년이 된다. 전 세계에 원자력의 위험성을 직접 보여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소도시 프리피야트는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이자 종말 혹은 죽음의 이미지를 원하는 사진 기자와 작가들이 즐겨찾는 관광지가 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사고 원전이 위치한 체르노빌 프리피야트는 발전소 종사자와 연구자, 가족 등 5만명을 위해 만든 첨단 신도시였다. 소련 전역에 ‘안전한 원자력’을 홍보하기 위해 당시 가장 앞선 도시공학을 적용한 이 도시는 사고가 없었다면 우크라이나의 주요 경제 허브로 성장했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고 발생 30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원전 폐쇄 작업을 진행하는 인부들을 빼면 사람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유령 도시로 변했다. 이곳의 상징이던 초대형 놀이기구가 30년째 멈춰 서 있어 황량함을 더한다. 최근 70대 이상 고령자들 일부가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지자체 반대에도 다시 들어와 살고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방사성 원소 수치가 낮아지려면 최소 900년 이상이 걸린다고 AFP는 전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도시를 원자력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어 하는 언론인이나 사진작가들에게 취재 명목으로 개방해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고 당시 원전에서 유출된 낙진의 80% 정도가 떨어져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웃국가 벨라루스에선 지금까지도 전 국토(약 20만㎢)의 4분의1가량이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여 있다. ●생태계 복원능력은 예상보다 빨라 다만 과학자들은 프리피야트를 비롯한 체르노빌 일대가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서 ‘야생동물 터전’이 되었다는 점에 안도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연구 결과를 인용해 “엄청난 방사능 수치에도 생태계가 예상보다 빠르게 복원돼 동식물 개체수가 1986년 사고 이전보다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지구·환경 전문가 짐 스미스는 “최악의 원전 사고에도 사람이 떠나자 자연이 살아났다”면서 “동물들에게 있어 방사능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람인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유출된 낙진은 원전과 가장 가까웠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에 집중돼 큰 피해를 줬다. 하지만 사고 발생 30년이 지난 지금 이들 세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전 증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원자력의 위험을 알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에너지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환경 단체들은 이들의 ‘원전 중독’ 배후에는 자본의 이해관계가 개입돼 있다며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15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고 있으며, 두 기를 새로 짓고 있다. 원래는 러시아의 투자를 받아 짓던 것이지만 최근 두 나라 관계가 나빠지면서 계약을 파기한 뒤 새 파트너를 찾고 있다. 벨라루스 역시 원전 정책은 우크라이나와 다르지 않다. 이웃나라인 리투아니아 국경 부근에 러시아의 투자로 원자력 발전소 2기를 건설 중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를 입은 일본도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전 재가동에 나서며 원전 해외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또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정부와 원전 건설사, 전력회사 간 공고한 유착을 일컫는 ‘원자력 카르텔’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100만명 숨진 20세기 최악 원전 참사 체르노빌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새벽 우크라이나 북서부 체르노빌 지역의 레닌 원자력 발전소에서 새로 지은 4호 원전의 전기 출력을 높이는 실험을 진행하다 핵분열 속도를 줄여주는 재료인 감속재를 너무 많이 제거해 1시 24분쯤 원자로가 녹아내리며 발생했다. 당황한 연구자들이 다시 감속재를 밀어 넣었지만 원자로의 폭발을 막진 못했다. 특히 파괴된 원자로 뚜껑 위로 크레인까지 떨어지면서 노심(핵 물질이 들어 있는 원자로 중심)이 파괴돼 방사성 물질이 열흘이나 무방비로 흘러나왔다. 소련 정부는 이를 숨겨오다 대기 중 방사능 수치 급증을 안 스웨덴의 문제제기로 사흘이 지나서야 뒤늦게 털어놨다. 소련 정부의 정보 공개 거부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체르노빌로 인한 직간접 피해로 100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방사능 유출에 따른 유전자 변형으로 40만명 넘게 암과 기형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원전 주변 30㎞ 이내에 살던 주민 9만 2000명도 강제 이주돼 고향을 잃었다. 사고 수습에 너무 많은 비용이 소요되다 보니 1991년 소련 해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진주시민 성금으로 지은 ‘형평기념탑’ 이전 논란

    진주시민 성금으로 지은 ‘형평기념탑’ 이전 논란

    사업회 “시민 의견 반영 안 해 근대 인권운동 정신 유지해야” 일제강점기 인권·사회운동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탑’(衡平運動紀念塔) 이전을 둘러싸고 경남 진주시 여론이 분열하고 있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으로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사회운동이었다. 이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시의원 등은 진주시가 기념탑 이전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며 재고를 요구하지만, 진주시는 강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진주시는 7일 진주대첩의 역사성과 진주의 호국충절 정신을 기리고자 진주성 촉석문 앞 일대 2만 5000㎡에 ‘진주대첩기념광장’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진주시는 보상비 600여억원을 포함해 모두 980여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광장 예정 부지 안에 있는 ‘장어거리’ 음식점 등 모든 시설물을 사들여 2018년 광장을 완성할 예정이다. 그 때문에 진주성 앞에 조성된 형평운동기념탑도 들어내 외곽으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시는 진주대첩기념광장 주제가 ‘비움’이라 형평운동기념탑도 들어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형평운동기념탑은 진주시민들에게는 특별한 기념탑이다. 1923년 진주의 백정들은 차별 대우 철폐와 평등을 외치며 형평운동을 벌였다. 진주의 양반들도 참여했다.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한 형평운동은 근대 인권운동의 시발로도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진주가 인권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을 널리 알리고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탑을 1996년 건립한 것이다. 특히 지방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진주시민과 출향 인사, 해외 동포 등 1500여명이 한두 푼 성금을 모은 결과물이었다. 시민들의 정성이 모인 만큼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측은 “기념탑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시가 진주대첩기념광장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시민의 의견은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은 원래 있었던 그 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난다”면서 “형평운동기념탑을 진주성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조선 500년간 차별로 고통받은 백정들의 영혼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김중섭 경상대 교수도 “역사는 짧은 기간 권력을 소유한 단체장 등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며 “역사도시인 진주의 정신을 유지하려면 형평운동기념탑을 현재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시민은 “조선시대 전쟁을 기념하려고, 근대 시민들의 인권운동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이창희 진주시장과 서은애 진주시의원은 형평운동기념탑 이전을 놓고 최근 시의회에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 의원은 시정질문에서 “기념탑을 그대로 존치해 달라는 기념사업회 측의 의견을 존중해 달라”고 소통을 촉구했다. 서 의원은 “진주대첩기념광장 설계를 맡은 회사는 기념광장 조성 예정지 안에 형평운동기념탑이 있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며 “시가 처음부터 형평운동기념탑을 들어낼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민들에게 기념탑 이전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혀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논란으로 현재 부지 매입이 82% 진행됐지만, 낮은 보상가 탓에 일부 상인의 반발도 있다. 이 시장은 “나도 시민이다. 36만 시민의 의견을 어떻게 다 들을 수 있느냐”며 “진주대첩기념광장은 다 비우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느 누가 와도 안 된다.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반박했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용어 클릭] ■형평운동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한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인권·사회운동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차별이 법적으로 폐지됐으나 실제로는 백정 차별이 유지됐다. 이에 진주의 백정뿐 아니라 신현수·강상호 등 양반들도 참여해 형평사(衡平運動)를 설립했다. 설립 1년 만에 전국에 지사 12개, 분사 67개가 설립됐다. 형평사는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이다. 1930년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됐다.
  • 진주시민 성금으로 지은 ‘형평기념탑’ 이전 논란

    진주시민 성금으로 지은 ‘형평기념탑’ 이전 논란

    사업회 “시민 의견 반영 안 해… 근대 인권운동 정신 유지해야” 일제강점기 인권·사회운동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탑’(衡平運動紀念塔) 이전을 둘러싸고 경남 진주시 여론이 분열하고 있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으로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사회운동이었다. 이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시의원 등은 진주시가 기념탑 이전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며 재고를 요구하지만, 진주시는 강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진주시는 18일 진주대첩의 역사성과 진주의 호국충절 정신을 기리고자 진주성 촉석문 앞 일대 2만 5000㎡에 ‘진주대첩기념광장’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진주시는 보상비 600여억원을 포함해 모두 980여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광장 예정 부지 안에 있는 ‘장어거리’ 음식점 등 모든 시설물을 사들여 2018년 광장을 완성할 예정이다. 그 때문에 진주성 앞에 조성된 형평운동기념탑도 들어내 외곽으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시는 진주대첩기념광장 주제가 ‘비움’이라 형평운동기념탑도 들어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형평운동기념탑은 진주시민들에게는 특별한 기념탑이다. 1923년 진주의 백정들은 차별 대우 철폐와 평등을 외치며 형평운동을 벌였다. 진주의 양반들도 참여했다.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한 형평운동은 근대 인권운동의 시발로도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진주가 인권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을 널리 알리고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탑을 1996년 건립한 것이다. 특히 지방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진주시민과 출향 인사, 해외 동포 등 1500여명이 한두 푼 성금을 모은 결과물이었다. 시민들의 정성이 모인 만큼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측은 “기념탑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시가 진주대첩기념광장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시민의 의견은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은 원래 있었던 그 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난다”면서 “형평운동기념탑을 진주성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조선 500년간 차별로 고통받은 백정들의 영혼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김중섭 경상대 교수도 “역사는 짧은 기간 권력을 소유한 단체장 등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며 “역사도시인 진주의 정신을 유지하려면 형평운동기념탑을 현재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시민은 “조선시대 전쟁을 기념하려고, 근대 시민들의 인권운동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이창희 진주시장과 서은애 진주시의원은 형평운동기념탑 이전을 놓고 최근 시의회에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 의원은 시정질문에서 “기념탑을 그대로 존치해 달라는 기념사업회 측의 의견을 존중해 달라”고 소통을 촉구했다. 서 의원은 “진주대첩기념광장 설계를 맡은 회사는 기념광장 조성 예정지 안에 형평운동기념탑이 있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며 “시가 처음부터 형평운동기념탑을 들어낼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민들에게 기념탑 이전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혀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논란으로 현재 부지 매입이 82% 진행됐지만, 낮은 보상가 탓에 일부 상인의 반발도 있다. 이 시장은 “나도 시민이다. 36만 시민의 의견을 어떻게 다 들을 수 있느냐”며 “진주대첩기념광장은 다 비우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느 누가 와도 안 된다.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반박했다.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용어 클릭] ■형평운동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한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인권·사회운동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차별이 법적으로 폐지됐으나 실제로는 백정 차별이 유지됐다. 이에 진주의 백정뿐 아니라 신현수·강상호 등 양반들도 참여해 형평사(衡平運動)를 설립했다. 설립 1년 만에 전국에 지사 12개, 분사 67개가 설립됐다. 형평사는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이다. 1930년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됐다.
  • [공무원이 말하는 정책이야기] “범인 잡는 첨단장비 체험… 진로탐색 기회로”

    [공무원이 말하는 정책이야기] “범인 잡는 첨단장비 체험… 진로탐색 기회로”

    오리무중인 사건·사고와 귀신 같은 범인도 많지만 ‘귀신을 속였으면 속였지 과학수사대(CSI)를 속일 순 없다’고 합니다.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듯 날로 발전하는 과학수사 기술 덕분입니다. 과학수사엔 자연과학뿐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 사회과학 분야 지식도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수사센터(KCSI)가 활약 중입니다. 이런 기관들에 충실하게 자료를 뒷받침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곳이 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은수저 색깔로 음식에 독약을 넣었는지를 알아내는 등 과학수사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1955년 국과수 출범으로 본격화됐습니다. 국과수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18일 서정훈 국과수 연구기획과장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갈수록 대형화되는 사건·사고와 함께 재난영화, 언론보도 등 대중매체를 통해 국민들이 과학수사라는 단어를 많이 접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높아지는 관심에 발맞춰 국과수에선 과학이 어떻게 범죄 증거물을 분석하고 범인 검거에 활용되는지를 실험·실습 형태로 경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짭니다. 원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했는데, 자유학기제와 맞물려 최근엔 중학생 등 청소년으로 확대했죠. 일찌감치 꿈을 키우며 진로를 탐색할 기회를 주게 된 셈입니다. 가변광원기를 사용한 인체분비물 찾기, 유전자(DNA) 관찰하기 등 밖에서는 체험하기 힘든 알찬 과정으로 구성돼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폐쇄회로(CC)TV나 블랙박스 등 영상에 찍힌 용의자와 검거된 용의자의 얼굴을 2D와 3D로 찍어 일치율을 살펴보는 ‘3D스캐너를 이용한 생체인식 알아보기’가 인기입니다. 체험 시간엔 연예인이나 국과수 직원들과 직접 매칭을 시켜 흥미를 끕니다. 실제로도 서울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 배포돼 면허증 위조 사범을 한 달 만에 3명이나 검거하는 실적을 올렸답니다. 올해 체험교실은 1회당 30명 정원으로 꾸립니다. 여름방학 중엔 4회 잡혔습니다. 과학수사체험실 네이버카페에서 선착순으로 개별(동반 2명까지 가능) 접수합니다. 2학기 때 운영하는 자유학기제와 연계한 과학수사체험교실은 모두 8차례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모집 공고를 낸 다음 사전에 교육기관별로 공문을 주고받으며 예약하게 됩니다. 또한 2014년 세계과학학술대전(WFF), 지난해 세계과학수사박람회(IFE) 등 행사를 운영할 때 부대행사로 진행했던 과학수사 잡 코칭(Job-Coaching) 토크콘서트를 올해부터 정식으로 개설해 보다 다양한 과학수사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진로 상담에서 벗어나 국과수에서 일하는 미래의 선배 법과학자와 질의응답을 통해 진행합니다. 법의학자인 서중석 국과수 원장의 특강, 법의학과 DNA, 약독물·화학 분야는 물론 디지털 등 다양한 방면의 업무 소개를 들을 기회입니다. 오는 6월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행정자치부 주관으로 열리는 정부3.0 박람회에서 100분 러닝타임으로 첫 회를 시작합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우주를 보다] 화성 생명탐사선이 보낸 첫 이미지 공개

    [우주를 보다] 화성 생명탐사선이 보낸 첫 이미지 공개

    최근 ‘붉은 행성’ 화성으로 생명 흔적을 찾는 임무를 갖고 여정에 나선 프로젝트 탐사선 ‘엑소마스’(ExoMars)에서 처음 촬영한 이미지가 지구에 도착했다. 유럽우주기구(ESA)와 러시아연방우주국(Roscosmos)이 함께 지난달 14일(이하 현지시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쏘아올린 ‘엑소마스’는 오는 10월 19일 화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화성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이번에 엑소마스가 보내온 사진은 탐사선에 탑재된 카메라 장치와 지구와의 통신체계가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공개된 사진은 지난 7일 엑소마스에 탑재된 가스 추적궤도선(TLO, Trace Gas Orbiter)에 장착된 고해상도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이 카메라는 회전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는데 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사진 2장을 촬영해 합성한 사진 1장을 지구로 보내왔다. 가스 추적궤도선은 앞으로 엑소마스가 화성 궤도권에 도착하면 이후 개별적으로 화성 상공을 돌며 생명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메탄의 존재를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엑소마스에는 가스 추적궤도선 외에도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라는 이름의 착륙선이 실려 있다. 사실 스키아파렐리는 오는 2018년 엑소마스 2차 발사에서 화성으로 향할 탐사로봇 ‘엑소마스 로버’를 위해 사전 답사하는 역할을 한다. 엑소마스 로버가 본격적인 탐사 활동을 시작하기 전 지상으로 돌입하는 하강 착륙 실험을 진행하고 이후부터는 화성의 날씨와 지질환경을 미리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현재 엑소마스는 총 5억 ㎞에 달하는 화성 여정 중 약 8300만 ㎞를 지났다. 이 탐사선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사진=ESA/Roscosmos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프라이버시를 양보하는 사람들

    프라이버시를 양보하는 사람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브루스 슈나이어 지음/이현주 옮김/반비/476쪽/1만 9000원 문명의 이기(利器)는 ‘양날의 칼’에 비유된다. 디지털 시대의 정보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통해 얻는 편리함·안전에 수반되는 개인정보 노출과 감시, 통제, 프라이버시 침해가 심각한 수준이다. 많은 사람은 디지털 정보 시대를 ‘거대 감시사회’로 부른다. 구글의 최고경영자 에릭 슈밋은 “우리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고 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 최고의 보안 전문가’로 유명한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버크먼 인터넷사회연구소 연구원이 이 책에서 고발한 ‘거대 감시사회’의 실상은 섬뜩하다. 감시사회에 대한 무감각을 깨고 적극 대처해야 할 이유가 설득력 있게 풀어진다. 책에서 드러나는 감시와 악용의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수두룩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위기의 실상’이 도드라진다. 이를테면 페이스북은 약혼을 선언하기도 전에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커밍아웃 전이라도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본인 모르게, 또는 본인 허락 없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파한다. 통계에 따르면 인류는 2010년에 이미 태고부터 2003년까지 만든 모든 데이터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매일 만들어 냈다. 산업 시대 인간 활동이 배기가스를 남겼다면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모든 흔적을 어김없이 데이터로 남긴다. 문제는 그 데이터들이 기록되고 영구히 저장된다는 점이다. 미국에선 성별과 생일, 다섯 자리 우편번호만으로 3억 인구 중 87%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고, 시간·날짜·위치 정보 등 단 4개의 메타데이터만으로도 미국인 95%의 이름을 식별해 낼 수 있다. 미국인 전체의 일상을 1년간 비디오로 기록하는 데 2억 달러(약 2300억원)면 충분하다. 컴퓨터, 스마트폰, 신용카드뿐만 아니라 폐쇄회로(CC)TV, 냉장고, 주방기구, 의료장비, 자동차 등을 이용하는 그 누구도 감시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운 셈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이 발간된 이후 사람들은 전체주의 독재사회와 정보의 악용에 경계를 쏟아 냈다. 2013년엔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컴퓨터 기술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 국가안보국(NSA)이 모든 미국인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을 수집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작 정보를 누가 어떻게 수집, 이용하는지 모르고 데이터 삭제 권한도 갖지 못한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이 들먹거려지는 게 ‘프라이버시 양보’다. 정보를 통해 편리함과 안전을 얻는 대신 프라이버시를 자발적으로 양보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의 위험성’이 정부·기업의 개입과 감시·통제를 부추긴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정부는 기업의 감시 능력을 이용해 국민들을 관찰하기 일쑤다. NSA는 인터넷 기업들을 상대로 수천 명의 관심 대상에 대한 데이터 제공을 합법적으로 강요한다. 기업들은 자진 협력하기도 하고 법원에 의해 비밀리에 강제로 데이터를 넘겨주기도 한다. “정부와 기업이 저지르는 대량 감시는 인종, 종교, 계급, 정치 신념 등 모든 점에서 차별을 가능하게 한다.” 감시와 통제를 통해 가장 크게 희생되는 건 당연히 자유와 민주주의다.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가 하면, 반대자와 발전이 없는 사회를 낳기도 한다. 그 개선을 위해 저자는 정보기관이 감시 대상을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하도록 강제하는 법을 마련하고, 정부와 기업들은 정보를 처리하는 알고리즘을 공개하는 등 투명성을 높이라고 주문한다. 특히 프라이버시의 요체는 인권임을 강조한 저자는 “관여하고 책임을 묻고 저항하며,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싸우라”고 주문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화성탐사선 ‘엑소마스’ 생명 탐사 미션 돌입, 첫 이미지 전송

    화성탐사선 ‘엑소마스’ 생명 탐사 미션 돌입, 첫 이미지 전송

    최근 ‘붉은 행성’ 화성으로 생명 흔적을 찾는 임무를 갖고 여정에 나선 프로젝트 탐사선 ‘엑소마스’(ExoMars)에서 처음 촬영한 이미지가 지구에 도착했다. 유럽우주기구(ESA)와 러시아연방우주국(Roscosmos)이 함께 지난달 14일(이하 현지시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쏘아올린 ‘엑소마스’는 오는 10월 19일 화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화성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이번에 엑소마스가 보내온 사진은 탐사선에 탑재된 카메라 장치와 지구와의 통신체계가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공개된 사진은 지난 7일 엑소마스에 탑재된 가스 추적궤도선(TLO, Trace Gas Orbiter)에 장착된 고해상도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이 카메라는 회전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는데 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사진 2장을 촬영해 합성한 사진 1장을 지구로 보내왔다. 가스 추적궤도선은 앞으로 엑소마스가 화성 궤도권에 도착하면 이후 개별적으로 화성 상공을 돌며 생명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메탄의 존재를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엑소마스에는 가스 추적궤도선 외에도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라는 이름의 착륙선이 실려 있다. 사실 스키아파렐리는 오는 2018년 엑소마스 2차 발사에서 화성으로 향할 탐사로봇 ‘엑소마스 로버’를 위해 사전 답사하는 역할을 한다. 엑소마스 로버가 본격적인 탐사 활동을 시작하기 전 지상으로 돌입하는 하강 착륙 실험을 진행하고 이후부터는 화성의 날씨와 지질환경을 미리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현재 엑소마스는 총 5억 ㎞에 달하는 화성 여정 중 약 8300만 ㎞를 지났다. 이 탐사선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사진=ESA/Roscosmos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진도 명량해협 해저유물 서울 나들이

    진도 명량해협 해저유물 서울 나들이

    충무공 이순신이 대승을 거둔 전남 진도 명량해협에서 찾아낸 유물들을 통해 명량해협의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보는 전시가 마련됐다. 오는 15일부터 6월 19일까지 서울대학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명량(鳴梁) 해저유물 특별전’이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12~2014년 진도 명량대첩로 수중조사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을 선보이고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했다. 5부로 구성된 전시엔 명량대첩에서 사용됐던 무기류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과 ‘석환’(石丸·돌포탄)을 비롯해 고려 절정기 최고급 청자향로 등 200여점의 유물이 소개된다. 1부 ‘서남해 지름길 명량’과 2부 ‘난행량의 흔적, 해난사고’에선 남해와 서해를 잇는 바닷길인 명량해협의 의미를 조명하고,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역사를 짚는다. 3부 ‘2천년 해로의 역사’에선 명량해협에서 출수된 기원 전후의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철기시대 토기)와 11~13세기 중국 송(宋)나라 동전 등을 통해 오랜 세월 중요 해로였던 명량해협을, 4부 ‘명량 바닷길 도자기’에선 2012년부터 3년간 명량해협 발굴조사로 찾아낸 466점의 도자기 중 고려 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된 다양한 형태의 청자를 소개한다. 5부 ‘명량대첩의 흔적’에선 소소승자총통, 쇠뇌(지지대를 갖춘 기계식 활)의 방아쇠인 노기(弩機) 등 명량해전에서 사용된 무기들을 만날 수 있다. 문화재청은 “명량해협은 조류가 강한 험로지만 해상 지름길로 예부터 수많은 선박이 왕래했던 곳”이라며 “명량해협이 품은 역사의 흔적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봄 통영, 백석의 달뜸과 한숨이 묻어 있는 곳

    봄 통영, 백석의 달뜸과 한숨이 묻어 있는 곳

    길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삶 사이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대처로 떠나는 자식의 발걸음이 잠시 떨리며 머뭇거렸음을, 옷고름 사이로 떨어진 어미의 눈물방울이 짭짜름했음을 동구밖 길은 아주 오래 기억했다. 동네를 감아 도는 그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중반 그 봄,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으면 통영 앞바다가 훤히 펼쳐졌을 게다. 여황산자락 아래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이어진 집들을 지난 눈 속에는 쉴 새 없이 고깃배가 오갔고, 부푼 꿈을 안고 오는 이, 또 다른 꿈을 이고 타향으로 떠나는 이가 엇갈리는 낡은 선창이 비쳤을 테다. 하지만 사랑을 잃은 사내에게는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도 오롯이 아름답기 어려웠으리라. 한참 나중에 호사가들이 통영을 일컬어 ‘한국의 베니스’ 운운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칭송했지만, 스물넷 평안도 출신의 청년시인 백석(1912~1995)에게는 실연의 상처가 훨씬 컸을 수밖에 없었다. 백석은 사랑을 위해 멀리 남쪽 바다까지 헛걸음을 반복해야 했다. 한 번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다른 두 번은 사랑을 기억하며 가슴 먹먹함을 달래기 위해 찾았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이 돌아올 리는 없는 법. 통영을 다녀왔던 길은 그의 작품 속 중요한 지역의 하나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으로 갈무리됐다. ●삼도수군통제영 복판 여황산 끼고 돌아 백석의 발길로부터 80년의 시간이 흐른 봄, 통영을 찾았다. 그가 시 ‘통영1’에서 묘사한 것처럼 통영 여황로에는 마침 ‘김 냄새 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차들은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고, 타관의 학생들을 실은 수학여행 버스들은 줄을 지어 여황로 길을 지나고 있었다. 여황로는 174m의 야트막한 여황산(艅山)에서 비롯된 이름의 길이다. ‘여황’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임금이 아끼던 화려한 배로, 훌륭한 군세를 갖춘 큰 전선을 상징했다. 통영항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산세를 펼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복판에 자리잡은 산이니 딱 걸맞은 이름이다. 통영시 북쪽 여황산 아래쪽으로 4113m 이어지며 문화동, 북신동, 명정동 등을 감싸고 돈다. 통영은 현대문화예술의 보물창고와도 같다. 특히 여황로 하면 일단 백석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여황로 충렬사 앞에는 백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2’라는 시다. 편의상 ‘통영1’, ‘통영2’라고 했지만 발표 당시 원래 제목은 모두 ‘통영’이었다. ‘통영2’는 그가 통영에 대해 쓴 시편 중 가장 길고 유려하며 음율을 잘 살렸다. 그는 ‘통영2’에서 이곳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또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에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고 노래했다. 사랑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여황로 길가에 앉아 한껏 달떠서 혼자 히죽거리는 백석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곧 깨지고 말 단꿈이었지만. 여기에 원체 아름다운 통영의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왔으니 시인의 시심이 절로 우러났을 것임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백석 시비 앞 명정샘 박경리가 소설에 써 ‘난’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막 문청을 벗고 등단해 시인이 된 그는 한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통영 출신의 이화고녀 졸업반이던 박경련을 만나고, 첫눈에 반해 사귄다.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그는 박경련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통영을 찾았지만 걸음이 엇갈려 만남이 어긋나게 됐다. 난의 집이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이 그의 직장(조선일보)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가 난과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다. 사랑과 친구를 함께 잃은 아픔 탓이었을까. 그는 그해 조선일보를 그만뒀다. 그리고 기생 자야(子夜·본명 김영한·역시 백석이 붙여준 애칭이다)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나눴고, 고향집 부모님의 성화에 다른 여인과 혼례를 치렀지만 다시 자야에게 돌아갔다. 1940년 자야마저도 떠나 고향땅인 신의주, 정주로 갔다. 그가 통영에 대해 직접 남긴 작품은 ‘통영 1, 2’ 외에 ‘남행시초2-통영’ 등 모두 세 편이다. 특히 ‘남행시초2-통영’ 시편 마지막에는 난의 외사촌 오빠인 ‘서병직씨에게’라고 적었다. 그를 통해 통영 장터며 선창 등을 둘러봤음을 알게 해준다. 백석이 들여다본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골 명정샘은 지금도 여황로 시비 앞에 있었다. 충렬사 문화해설사인 옥복주(47)씨는 “일(日)정과 월(月)정 두 개의 샘이 있어 명정(日+月=明井)이 됐다.”면서 “1670년 만든 이후 몇 년 전까지 330년 넘도록 식수로 썼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은 여전히 맑지만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통영2’ 중)을 찾을 수는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명정골은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1926~2008)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문장 속에도 그 흔적을 흩뿌려 놓았다. 박경리는 명정골에 대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고 했다. 박경리의 생가는 여황로 충렬사 주차장 맞은편 바로 곁의 좁은 골목길인 ‘토영 이야길’을 따라가면 있다. 하지만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표지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남편과 사별한 시조시인 이영도(1916~1976)에게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무려 5000통의 연서를 보냈던 유부남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사연이 남겨진 곳도 그리 멀지 않다. 유치환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중)고 노래했던 통영중앙우체국은 여황로에서 서문로를 따라 7~8분 남짓 내려오다가 세병로(청마거리) 오른쪽으로 접어든 뒤 3~4분쯤 걸어가면 있으니 그리 멀지 않다. ●지긋한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읊어 이른 아침 여황로 어귀에서 만난,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는 늙수그레한 중년의 김모(58)씨는 “그 사람들이야 먹고살만 하니까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썼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유치환, 이영도의 ‘아름다운 불륜’이며, 시인 김춘수, 화가 김용주,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박경리 등 통영 출신 예술가의 이름들을 줄줄이 들먹였다. 흔히 돈을 잘 버는 동네에서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들 하는데, 통영이라면 ‘중늙은이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소설 한 토막쯤 읊조린다.’는 말이 좋이 쓰일 법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후딱 오른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통영시내 쪽으로는 강구안길이며, 여황산이 보이고, 다도해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산도, 매물도, 그리고 멀리 대마도까지 한눈에 푹 안긴다.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과분할 만큼의 통영이다. 이곳의 길 위에서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그 옛 기억과 향취까지 가져간다면 더욱 어울릴 법하다. ● 역사의 보고 통영의 길들 동피랑·서문까꾸막… 토박이말 길이름 천국 통영은 바다의 왜적들과의 싸움, 그리고 평화에 대한 바람으로 다져진 곳이다. 통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뚜벅뚜벅 들어감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세운 뒤 ‘통영’이라는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통제영의 약칭에서 따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충렬사와 통제영의 일종의 객사 역할을 했던 세병관(洗兵館·세병로 27), 그리고 북포루(北樓) 등은 통영 출신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이고, 다른 지역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 필수 방문지다. 길 이름 역시 이러한 역사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세병로, 충렬로 등은 물론이고 통제영을 굳게 지키던 문들도 이름을 남겼다. 동문로(東門路)와 서문로(西門路)는 모두 옛 통영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였던 동문과 서문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두 문 모두 고갯마루의 정상쯤에 위치해 있었으니, 통영 토박이들의 말로 ‘동문까꾸막’(동문고개), ‘서문까꾸막’(서문고개)이라고 불렀던 길들이다. 북신로(北新路) 역시 통영성 북문 바깥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세병로와 여황로 사이를 잇는 갈림길인 운주길은 옛 통제영의 관아였던 운주당(運籌堂)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남해안대로에서 갈래져 나온 원문마을길은 통제영 입구였던 원문성(轅門城)에서 따온 마을 이름을 달았다. 이 밖에 통영을 찾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동피랑길은 정겨운 마을 벽화로 유명하다. ‘피랑’은 벼랑을 일컫는 통영 말이다. 통영시의 동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통영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자랑한다. 통영성과 동포루(東樓)의 유적이 있다. 사진=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통영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담당자 PC서 두 차례 9시간 ‘조작’… ‘리눅스’로 3중 암호 뚫어

    담당자 PC서 두 차례 9시간 ‘조작’… ‘리눅스’로 3중 암호 뚫어

    지역인재 7급 합격자 명단을 조작한 송모(26)씨가 무려 나흘간 정부서울청사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채용 담당 공무원의 개인용 컴퓨터(PC)에 3차례나 접속해 9시간가량 작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무원 PC 암호 해제 어떻게 송씨가 최초로 PC에 접속한 지난달 24일 밤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서 3차례 방문을 통해 공무원 출입증을 손에 넣은 송씨는 오후 11시 20분쯤 태연하게 인사혁신처 채용관리과가 있는 16층으로 올라갔다. 앞서 송씨는 이날 오후 8시쯤부터 16층을 배회하다 당시 야근 중이던 공무원이 “무엇 때문에 오셨느냐”고 묻자, “OO과에 근무하는데 슬리퍼를 가지러 왔다”는 식으로 해명하고 급히 피한 뒤 3시간을 훨씬 넘겨 다시 사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전자 도어록이 설치된 사무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송씨는 비밀번호를 뚫고 지역인재 7급 채용 담당 주무관의 자리를 찾아 11시 35분부터 58분까지 23분간 개인용 PC에 접속했다. 인사처 관계자는 “도어록 비밀번호는 해당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만 알고 있는데, 어떻게 열고 들어갔는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채용 담당 공무원의 PC 보안 역시 뚫렸다. 정부보안 지침상 공무원 PC는 3단계로 암호를 설정하게 돼 있다. 송씨는 이를 염두에 두고 사전에 리눅스 프로그램을 저장한 휴대용 저장장치(USB)를 챙겨와 컴퓨터에 연결, 담당 공무원 PC의 암호를 무력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인사처 관계자는 설명했다. 인사처뿐만 아니라 청사에 입주한 대부분 부처 공무원 PC 역시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청사 보안망은 언제든지 뚫릴 수 있는 상황이다. 국가직 공무원 채용시험 진행을 총괄하는 채용관리과는 사무실 안에 24시간 운영 중인 폐쇄회로(CC)TV 1대를 설치하고 있으나 외부 침입자를 막는 데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인사처 관계자는 “1대뿐이라 전체 사무실 공간을 커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9시간 동안 외부인 침입, 아무도 몰라 첫날인 24일은 사전 탐사에 그쳤다. 토요일인 26일 오후 9시쯤 청사를 다시 찾은 송씨는 본격적으로 담당 공무원들의 PC에 접속해 시험 결과를 조작했다. 이틀 전과 같은 방식으로 담당 주무관 PC에 오후 9시 2분 접속한 송씨는 일요일인 다음날 새벽 5시 35분까지 8시간 30분간 마음 놓고 작업했다. 당직 근무를 서는 공무원과 방호관들이 야간에 청사 건물 전체를 순회하지만 송씨의 침입을 알아채지 못했다. 송씨는 이날 PC에 그림파일 형태로 저장된 자신의 답안지 사본을 일일이 수정해 점수를 높였다. 올해 지역인재 7급 1차 필기시험인 공직적격성평가(PSAT)의 과락 점수는 40점으로 송씨는 합격을 위해 자신의 점수를 45점에서 75점으로 30점 높였다. 인사처는 통상 시험 당일 답안지를 별도 서버에 저장한 뒤 외장하드에 백업해 저장한다. 공무원이 응시생 답안지를 확인할 때는 PC에 저장한 사본을 이용한다. 송씨는 주무관 PC에 이어 담당 사무관의 PC까지 열어 답안지 사본을 조작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결재 문서의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기도 했다. 인사처 관계자는 “송씨가 작업 후 사무실 앞에 있는 파쇄기를 이용해 출력한 인쇄물들을 없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사처가 이번 사건을 경찰에 수사의뢰한 것은 보안이 뚫린 지 8일 만이었다. 담당 주무관은 25일 자신의 컴퓨터에 누군가 접속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황서종 인사처 차장은 “당시에는 해당 컴퓨터의 암호 체계에 이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인사처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2차 침입이 발생하고 하루가 지난 28일에야 외부 침입 흔적을 발견했다. 담당 사무관은 28일 컴퓨터를 부팅하면서 암호를 넣는 창이 뜨지 않자 낌새를 눈치챘으나 다음날 건강검진을 위해 연차를 냈다. 이후 시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내부 문서를 비교 대조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송씨의 행각을 눈치챘다. 이후 30∼31일 내부 조사를 거쳐 직원 중에 해당 컴퓨터에 접근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외부자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일 수사를 의뢰했다. ●정부, 청사보안강화 TF 가동 정부는 청사보안을 원점에서 분석하는 한편 방호와 당직근무, 정보보안에 과실이 없었는지 관련 부서를 대상으로 감찰에 착수했다. 감찰은 총리실 공직기강부서가 맡았다. 김성렬 행정자치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청사보안강화TF(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청사보안 전반을 검토하기로 했다. TF에는 행자부, 경찰, 인사처 등 정부 유관기관과 민간 보안전문가가 참여한다. 김 차관은 체력단련실 라커에 잠금장치가 없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보완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송씨가 훔친 신분증이 제대로 분실신고 처리됐는지와 관련해 김 차관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인사처 시험 담당자가 정부의 PC 보안지침을 제대로 이행했는지도 파악 중이다. 이와 관련 황교안 국무총리는 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간부회의에서 “국가 핵심시설인 정부청사에 외부인이 무단으로 침입해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청사 경비와 방호, 전산장비 보안, 당직근무 등 정부청사의 보안관리 시스템 전반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강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노재헌, 유령회사 설립 ‘역외탈세 의혹’

    노 “계좌 개설도 안해”… 의혹 부인“한국인 195명”…세계정상도 12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51)씨가 조세 도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3곳의 ‘페이퍼컴퍼니’(서류로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를 설립한 사실이 확인됐다. 노씨 외에도 조세 도피처에 한국인 이름 195개가 더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세청은 이 명단을 입수해 역외 탈세 혐의가 포착되면 바로 세무조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뉴스타파는 4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 작업을 통해 이런 내용의 ‘조세 도피처 프로젝트’ 명단을 공개했다. 이번 자료는 파나마 법률회사로 역외 금융을 서비스하는 ‘모색 폰세카’에서 유출된 것이다. 문서 양만 1150만건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 도피처 자료로 평가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전·현직 세계 정상 12명도 포함됐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노씨는 2012년 5월 버진아일랜드에서 회사 3곳을 설립해 주주 겸 이사로 취임했다. 3개사(원 아시아 인터내셔널, GCI 아시아, 루제스 인터내셔널) 모두 1달러짜리 주식 1주만 발행한 페이퍼컴퍼니다. 뉴스타파 측은 “회사 소유 구조를 중층적으로 설계해 매우 복잡했다”면서 “다만 노태우 정권의 비자금 이동 흔적을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씨는 반박 자료에서 “중국 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사업 진행이 안 돼 계좌 개설도 하지 않았다”며 탈세 의혹을 부인했다. 뉴스타파는 SK그룹과의 관계도 들여다봤지만 추정만 할 뿐이라고 밝혔다. 최태원 SK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사위다. 이번 자료에서 ‘코리아’(korea)로 검색된 파일은 모두 1만 5000여건이고 이 중 한국 주소를 기재한 한국인 이름이 195개다. 뉴스타파는 이번 주 한국인 명단을 추가 공개한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해외여행 | 대마도를 애증한 시간

    해외여행 | 대마도를 애증한 시간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 조선통신사 외교의 징검다리였던 섬, 일제강점기의 한恨이 서린 섬, 조선 마지막 황녀의 흔적이 남은 섬. 대마도를 여행한 시간은, 대마도를 ‘애증’한 시간이었다. 그 섬을 찾는 이유 부산에서 배를 타고 1시간 10분이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닿는다. 일본에서는 쓰시마つしま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겐 대마도로 더 익숙한 섬이다. 행정구역상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는데, 거리로는 부산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 142km여서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훨씬 가깝다. 그래선지 여권을 들고 출국심사를 받으면서도 기분이 영 얼떨떨하다. 그래도 외국은 외국이라 면세 쇼핑의 기회는 똑같이 주어진다. 부산항 여객터미널엔 양손에 바리바리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뱃삯만 내면 되니 부산 사람들은 면세 쇼핑을 위한 당일치기 대마도 여행을 자주 한단다. 멀미약을 입에 털어 넣고 꾸벅꾸벅 졸았더니 금세 도착이다. 배에서 읽으려고 가져간 책이 민망할 정도로 금방이다. 거리 분위기는 영락없는 일본 시골마을인데, 가는 곳마다 온통 한국어 표지판이라 한국 같기도 하다. 식당과 호텔 직원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한국말을 구사하고, 주요 관광지마다 있는 조그마한 커피트럭에서는 한국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을 정도다. 알고 보니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를 여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마도를 찾는 여행객의 95%가 한국인이란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한 해 대마도를 여행하는 한국인은 10만명 이상. 사실 오늘날 대마도가 한국인의 인기 여행지로 개발된 것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도발에서 시작되었다. 국내 최초의 대마도 전공 박사이기도 한 발해투어 황백현 대표가 대마도 여행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독도 앞바다에 찾아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 외치는 운동을 수십 번 하다가, 그냥 놔둬도 우리 땅인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 방식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오히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이 독도를 사수하는 더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1997년,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한국 땅’이란 슬로건을 들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 14명과 대마도로 갔다. 당시엔 부산-대마도 뱃길이 없었기 때문에 후쿠오카를 경유해 가야 했다. 4박 5일 일정 동안 배를 탄 시간만 왕복 42시간. 첫 순례 이후 부산의 선사들을 찾아가 부산-대마도 직항 운항을 적극 권유했고 마침내 1999년 부산-대마도 뱃길이 생겼다. 지금은 발해투어 말고도 많은 여행사들이 대마도 여행 상품을 팔고 있고, 낚시·캠핑·등산 여행지로도 인기를 끌게 됐다. 이번 여행에선 대마도 여행길을 처음 열었던 그때 그 마음으로, 황백현 박사와 함께 대마도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훑었다. 대마도는 실제로 우리 땅이었다 솔직히 대마도를 가기 전까지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말이 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무관심했고 무지해서였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우리 조상들이 대마도에 남긴 수많은 흔적들이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황백현 박사는 그의 저서 <대마도 통치사統治史>와 <대마도에 남아 있는 한국문화재>를 통해 대마도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우리 영토였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기록들을 세세히 소개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일본 천태종 승려 현진이 1197년에 집필한 <산가요약기>에는 “대마도는 고려가 말을 방목해 기른 곳이며,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1419년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대마도를 정벌했고, 이듬해인 1420년 대마도 8대 도주島主가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니 대마도 사람들을 조선에 의탁한다”는 문서와 함께 대마도를 조선에 바친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켰으니 앞으로 모든 보고와 문의는 반드시 경상도를 통해 하도록 하라”는 답서를 보냈고 그때부터 대마도는 공식적인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황 박사는 ‘대마도’와 ‘쓰시마’라는 이름도 우리말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 말馬이 없었던 2세기에 ‘말 마馬’자가 들어가는 ‘대마도對馬島·말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의 섬’라는 지명이 생길 수 있었던 건, 고대부터 말을 키우던 우리나라에서 붙여 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쓰시마’라는 이름 또한 ‘두 섬Tu-Sem’이라는 한국어 발음이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말한다.대마도에서 1,500년 전 백제 사람이 심은 은행나무를 만났다. 나이로는 일본에서 첫 번째, 크기(높이 23m, 둘레 12.5m)로는 두 번째다. 본래는 ‘백제 은행나무’라는 안내판이 있었지만 몇 해 전 일본이 그중 ‘백제’라는 말을 삭제했다고 한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영토 쓰시마는 역사와 관광의 섬입니다’라고 쓴 안내판도 새로 설치했다. 이 은행나무는 1789년 벼락을 맞아 나무속이 불타기도 했고, 1950년 태풍으로 줄기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웅장한 모습으로 생명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은행나무 앞에 서서 생각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우리 역사를 잊지 말자.’ 대마도의 생명줄이었던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1607년부터 200여 년간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다. ‘200년 동안 겨우 12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 한 번 일본을 오가는 데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걸렸고, 매번 300~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움직였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횟수가 아니다. 이 조선통신사의 길을 연 것이 대마도다. 평지가 없고 땅이 척박해 쌀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식량을 공급 받아 먹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조선과 교역이 끊기자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됐다. 당시 대마도 도주였던 소宗 요시토시義智는 국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일본 막부와 조선 왕실의 외교 회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렇게 성사된 조선통신사는, 말하자면 대마도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였다. 대마도는 조선통신사가 반드시 거치는 기항지였다. 한양에서 출발한 일행은 부산을 거쳐 대마도에 상륙했다가 다시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에도(지금의 도쿄)로 갔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조선 왕실에서는 통신사의 출발일이 결정되면 관리 3사(정사, 부사, 종사관)를 궁으로 불러 어사주를 내렸고, 그날 밤에는 영의정이 남대문 밖에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출발 전날엔 마포나루터에 통신사 일행과 그 가족들이 모두 모여 송별연을 가졌고, 부산에 도착하면 무사왕복 기원제를 올렸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면 그 숙소에는 조선의 학문과 예술을 전수받으려는 일본 문인들과 유학도들이 몰려들었다. 조선 선비들의 한시漢詩 한 수를 보물처럼 여기는 일본인들도 많았다고. 그러니 한류가 최초로 전해진 곳이 대마도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테다. 대마도에서 가장 번화한 이즈하라에는 지금도 그 역사를 기억하는 ‘조선국통신사의 비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세워져 있다. 그 앞의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는 길이 16.58m에 달하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소장되어 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 마쓰리’ 축제도 개최된다. 친일의 기록과 항일의 흔적 대마도 사람들은 한국어 공부도 참 열심히 했다. 과거 이즈하라에는 한국어 학교가 두 개나 있었다. 먼저 1727년 세워진 한어사韓語司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먹고 살던 이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던 곳이다. 3년 동안 하루 4시간씩 한국어 수업을 듣고 매달 월말고사를 치렀던, 속된 말로 ‘빡센’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일본인들은 조선 선비들보다 한글을 더 잘 썼다는데, 당시 조선 양반들은 한글을 천시하며 잘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한어사 건물은 지금도 개인주택으로 대마도에 남아 있다. 한어사에서 불과 200m 거리에 1872년 세워진 한어학소韓語學所는 설립 취지가 불순했다. 조선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통역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한국어를 공부한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역비서로 일했다. 고쿠분 쇼타로는 을사늑약 조약문 초안과 한일 합병문 초안을 작성하는 일까지 맡았고, 조선총독부 인사국장을 거쳐 내부차관까지 지냈다. 그런 사람이 죽자 통탄해 하면서 묘비명을 쓴 사람이 바로 매국노 이완용이다.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하나로 꼽혔던 이완용은 그 묘비 왼쪽 아래에 ‘후작 이완용 쓰다侯爵 李完用 書’라고 자랑스레 새겼다. 스스로가 매국노라는 증명을 길이길이 남긴 셈이다. 이 묘비를 황백현 박사가 대마도에서 2007년 발굴했고 3년 동안 다수의 서예가들과 학자들의 검증을 거쳐 이완용의 필체임을 밝혀냈다. 한국에는 없는 이완용의 매국 증거물이 대마도 땅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그런 친일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대마도에는 항일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즈하라의 절 ‘슈젠지修善寺’에는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들의 선봉장이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을 기리는 비석과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선생은 항일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대마도 감금 3년 형을 받고 이송당하면서도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며 양쪽 짚신 바닥에 고국의 흙을 한줌씩 담아 신고 갔다고 한다. 결국 “원수가 주는 끼니로 몸과 입을 더럽힐 수 없다”며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대마도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슈젠지는 최익현 선생의 시신이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나흘간 장례를 치른 곳이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한국전망대에 올랐다.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부산이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전망대다. 일제강점기 대마도에 잡혀 온 우리 선조들은 명절만 되면 이곳에 올라 바다 건너 고향땅을 하염없이 바라다보며 설움을 달랬다 한다. 그 자리에 1997년 한국에서 공수한 자재를 이용해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을 본뜬 모양으로 이 전망대를 지은 것이다. 찬 바닷바람이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는 한국전망대에 서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절대로, 절대로, 이 역사를 잊어선 안 되겠다고. *이토 히로부미 |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었다. 조선 마지막 황녀의 눈물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 기울어 가는 국가의 왕녀로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대마도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대마도에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있다. ‘결혼 봉축’이라고 하니 축복받은 결혼인 건가 싶었는데, 그 반대였다. 덕혜옹주는 19살이던 193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인 ‘소宗 다케유키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시댁이 대마도였던 셈인데, 결혼식은 도쿄에서 올렸고 덕혜옹주가 대마도를 찾은 건 결혼한 해에 단 한 번 인사차 방문한 것뿐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연고로 대마도에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세워지게 됐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61세 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 7살 때 약혼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일본은 덕혜옹주를 13살 때 도쿄로 강제 유학을 보내 고종황제와 떼어 놓았다. 덕혜옹주는 식민지의 공주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갖은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정신질환까지 얻게 됐다. 일본은 그런 덕혜옹주를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과 일본이 완전히 하나의 국가라고 주장했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과 결혼시켰다. 덕혜옹주의 딸 정혜 역시 갖은 차별 대우와 따돌림을 당하다 어머니처럼 정신질환을 얻었다. 결국 정혜는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써 놓고 실종되었다. 그 일 이후 덕혜옹주의 우울증과 몽유병은 날로 더 악화되었다. 1955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했고,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외롭게 수감되었다. 그 사실을 조선일보 기자가 폭로해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귀국시킴으로써 마침내 덕혜옹주는 고국에 돌아왔다. 7년간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라고 쓰여 덩그러니 놓인 회색 비석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맺혔다. 탄생부터 결혼, 출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축복받을 수 없었던 덕혜옹주의 인생. 그와 너무나 상반되는 ‘결혼 봉축’이라는 이름의 비석이 그 삶을 더 기구하게 비추는 듯했다. 때마침 흩날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꼭 덕혜옹주의 눈물 같아 더 속상했다. *대마도 도주島主 | 오랜 세월 대마도를 지배했던 ‘소宗’가家는 에도시대 이전까지 도주였고, 이후에는 번주藩主가 되어 대마도의 모든 것을 통치한 지방 토착세력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조선의 교류 재개에 노력을 기울여 조선통신사의 길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등의 임무도 수행함으로써 당시 일본 막부와 조선 모두에게 공을 인정받았다. ▶travel info 대마도 FERRY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과 대마도 히타카츠항, 이즈하라항을 연결하는 쾌속선이 매일 운항된다. 히타카츠까지는 1시간 10분, 이즈하라까지는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다수의 페리회사가 부산-대마도 노선을 하루에도 수차례 운항하기 때문에 아침에 출발해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Shopping대마도 대형마트 티아라 쇼핑몰 대마도 이즈하라에는 대형마트가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도 티아라 쇼핑몰은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어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입구에는 큼지막한 한국어 안내문도 붙어 있다. 마트에는 일본 본토에서 만날 수 있는 식료품과 생활용품 등이 모두 들어와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PLACE5,000엔 화폐 속 여인의 사랑 나카라이 도스이 기념관 대마도 이즈하라 태생 소설가이자 기자인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의 생가를 개조해 만든 기념관이다. 나카라이 도스이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자 5,000엔 화폐 속 인물인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의 문학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나카라이 도스이는 아버지의 근무지인 부산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한국말에 능통했고, 서울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에 입사한 뒤에는 <춘향전>을 번역해 20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히구치 이치요는 1891년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나카라이 도스이를 찾아가 소설 지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히구치 이치요는 20살, 나카라이 도스이는 32살이었다. 히구치 이치요는 어린아이들의 성장과 사랑을 그린 <키재기>, 창부들의 삶을 그린 <흐린 강>,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나 때문에> <매미> 등 작품들을 쏟아내고 2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도스이를 연모한 그녀의 마음은 사후 발표된 일기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대마도판 하롱베이 에보시다케 전망대 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는 아소만의 수많은 섬이 펼쳐진 풍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해발 176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변에 그보다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들쑥날쑥한 해양 지형이 특징인 아소만은 진주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 전망대는 석양과 일출이 아름다워 연말연시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오키나와를 닮은 해변 미우다 해수욕장‘일본 해수욕장 100선’에 속하는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의 바닷물은 마치 오키나와의 해변인 듯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낸다. 물이 맑아 물고기, 성게 등 해양 생물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도 하기 좋다. 근처엔 캠핑장도 있어 여름철엔 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캠핑과 해수욕을 하러 찾아온다. Food대마도 도주가 좋아했던 간식 카스마키‘대마도 명물’이란 별명이 붙은 카스마키는 달콤한 팥소를 카스테라로 돌돌 만 것이다. 대마도 도주가 특히 좋아했던 간식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커리로 유명한 일본답게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대마도 여행 중 간식으로 먹거나 선물용으로 사 가기에 좋다. 글 고서령 기자 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 취재협조 발해투어 051-253-5887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해외여행 | 교류交流에 대하여-조선통신사의 흔적을 기록하다

    해외여행 | 교류交流에 대하여-조선통신사의 흔적을 기록하다

    교류交流에 대하여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기록하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 사실에 의도를 개입시킨 ‘불순한 장난’이라면, 그 장난을 가능케 하는 원인은 역사에 대한 무지無知에 있다고 생각했다. 무지를 지知로 바꾸는 첫 번째 행동은 기록하는 것이다.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 4,000km를 오갔던 조선통신사, 그 흔적을 기록하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 나는 잠시 부끄러웠다 강우량 많다는 도시답게 닛코日光에 들어서자 눈발이 날렸다. 눈은 온천마을의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더 도드라지게 해주는 소품 같았다. 기누가와鬼怒川 온천은 소박하면서 깨끗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 숙소 터가 있다는 이마이치今市 객관으로 가는 날이었다. 통신사 300명을 포함해 일본인 경호원까지 약 2,000명이 이틀 동안 머물렀다는 숙소는 지금 유적비 하나만 남아 있다고 했다. 안내원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못 갈 수도 있다며 염려했다. 그러나 고작 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는 곳이라니 설령 가지 못한다 해도 크게 낙담할 건 없다 싶었다. 점심 무렵 눈은 멎었고 가이드는 낭보라며 일정대로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버스는 황량한 공터에 취재진을 내려 줬다. 유적비가 있는 풀밭 속까지 누군가 애써 눈을 치운 흔적이 선명했다. ‘닛코 조선통신사 연구회’의 야나기하라 가즈오키씨가 일정이 취소될까 노심초사하며 오전 내내 낸 길이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노신사는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유적비를 설명했다. 통신사의 최종 목적지는 천황이 있는 에도(江戸, 현재의 도쿄)였지만 1636년 4차 통신사 300명은 도쿄에서 150km 떨어진 닛코까지 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신으로 모신 도쇼구東照宮, 동조궁를 보여 주고 싶은 막부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 일본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100억원을 들여 임시 숙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 터에 기념비를 하나 세웠다. 2007년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해 600만엔의 모금으로 만든 것이다. 나는 조선통신사보다, 기념비보다, 이것 하나를 보여 주기 위해 전날부터 일기예보를 점검하고 오전 내내 홀로 눈을 치웠을 야나기하라씨의 열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가 더 궁금했다. 직업적 책임감이라기엔 그의 눈빛과 음성과 분위기가 연출 없이 정직했다. 그것은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형형함이었다. “당신에게 조선통신사는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그는 “스승과 대마도를 가서 우연히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를 접하게 되었고 스승이 돌아가신 후 깊게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지금의 한류처럼 당시의 조선통신사는 한시, 서도, 문화, 그림 등을 일본인들에게 전파해 준 공로가 분명히 있다”는 말도 강조했다. 그는 시간을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보존해서 타인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눈 속의 길을 만들어 낸 힘이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한국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쟁점이 사실에 의도를 개입시키면서 발생하는 ‘불순한 장난’이라면 역사에 있어 무지無知는 그 장난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무지를 지知로 바꾸는 첫 번째 행동은 기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보존이며 세 번째는 관심이다. 조선통신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관심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나는 기록을 일구는 노인 앞에서 잠시 부끄러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일본을 통일하고 250년 지속된 에도 막부 시대를 연 초대 쇼군將軍.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무역을 재개하기 위해 1607년 조선에 먼저 국서를 보냈고, 이후 조선이 제시한 제한적 무역조건 아래 조선통신사의 길이 열렸다. 조선통신사의 장대한 여정 조선시대에 12번의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활성화됐다. 일본은 조선의 앞선 문화를 통신사를 통해 접하고 싶었고 조선은 일본의 재침략 의도를 점검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생환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양국이 믿음信으로 소통通하자 해서 통신通信사가 되었다. 정사(당상관급), 부사, 종사관 3사가 인솔하며 군관, 역관, 의원, 화원(화가), 마상재(달리는 말 위에서 무예를 하는 사람), 소동(심부름꾼 아이) 등이 따라갔다. 약 300~500명으로 구성됐다.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 4,000km 거리를 수로와 육로로 이동했다. 8개월에서 1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현해탄 건너기도 쉽지 않았으니 차출된 사람은 유서를 쓰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무사귀환을 빌며 해신제를 지냈다. 행렬은 일본 사무라이 호위무사까지 800명이 넘었다. 도로를 닦고 숙소를 짓고 배를 만들고 하는 준비기간만 반년이었다. 한 번 통신사를 맞이하는 데 일본의 1년 국가 예산을 모두 쏟아 부을 정도(NHK 보도에 따르면 현재 가치로 약 1,000억엔한화 약 1조750억원)였다니 일본 입장에서도 무척 큰 외교행사였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고립된 섬나라 일본은 중국의 앞선 문명과 조선 고유의 문명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통신사를 적극 환영했다. 남의 것이라도 좋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본인 특유의 실용주의良いとこ取り, 이이 토고 토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조선통신사는 그러지 못했다. 침략전쟁을 겪고 얼마 후였으니 마음에 꽃바람이 불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유교국가 조선의 눈에 일본 문화는 계통 없는 잡스러움이 아니었을까. 통신사로 참석했던 김인겸과 신유한은 <일동장유기1764년>와 <해유록1719년>에서 오사카를 본 후 도시의 발전된 문명을 놀라워하면서도 오랑캐의 번영을 원망하고 애석해하는 것에 기운을 더 쏟았다. 게다가 대다수 도공 포로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대신 장인 대우를 받는 일본에 남기를 원했다. 돌아가면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많이 주고 덜 가져온 탓인지 한국에서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의는 많이 노출되지 못했다. 다행히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한일 양국이 조선통신사 관련기록물 111건 333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조선통신사 기록에 대한 핵심적 정리다. 한성(지금의 경기도 광주)-동래(부산)-이즈하라(대마도)-시모노세키-아카시-사카이-교토-나고야-하마마쓰-에도(도쿄)-닛코로 이어지는 통신사의 여정. 그중 이번 취재지였던 도쿄와 닛코 주변의 흥미로운 관광지 몇 개를 더한다. “일본은 중국의 앞선 문명과 조선 고유의 문명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통신사를 적극 환영했다. 남의 것이라도 좋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본 특유의 실용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쇼구를 자랑하고 싶었던 막부와 스토리텔링 한국 여행객에게 일본의 신사神社는 여러모로 불편하다. 역사적으로는 신사참배의 부정적 이미지가 있고 이념적으로는 야스쿠니 신사의 전범자 예우를 기억한다. 그러나 일본 여행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사이며 사당이다. 신사를 중심으로 한 사당 문화가 일본인의 종교이며 생활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종교, 신도神道는 일본의 토착 신앙에 유교와 불교를 혼합한 것이다. 비록 그 발원의 과정에서 태양신을 덴노(천왕)의 조상신으로 둔갑시키고 태양신의 아들 덴노에게 충성을 다해 섬기라는 정치적 오염의 혐의도 받고 있지만 일본의 신사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와 정신과 일상을 응축해 놓은 곳이다. 닛코의 가장 대표적인 신사가 도쇼구東照宮, 동조궁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이 이곳에 있다. 그의 손자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1636년에 금 56만8,000냥이라는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 현재의 규모로 호화찬란하게 증축했다. 에도 막부는 이것을 통해 막부의 권위를 통신사에게 과시하고 싶어했다. 4차, 5차, 6차 통신사를 이곳으로 초대한 이유다. 도쇼구에 들어서면 우측에 보이는 종은 5차 통신사의 선물이다. 도쿠가와 무덤 앞에는 통신사가 전달한 삼구족(화병, 향로, 촛대)이 놓여 있다. 이것이 조공이냐 하사냐 하는 것을 두고 양국이 대립했다. 그 첨예한 갈등 때문인지 설명문 하나 붙어 있지 않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도쇼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다. 보물도 많고 예술품도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야기가 많다. 울창한 삼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점점 좁아지는 계단을 오르면 신사의 입구인 도리이鳥居가 나온다. 도쇼구의 도리이는 일본에서 가장 큰 돌로 만들어졌다. 높이 9m. 기둥둘레 3.6m. 재미있는 것은 도리이 하단부에 조각된 연꽃 문양이다. 신불습합神佛習合, 불교를 믿는 게 신도를 믿는 것이라는 일본의 혼합주의 종교관을 도리와 연꽃 문양에서 본다. 기도할 때 ‘하느님 부처님(카미사마かみさま, 호토케사마ほとけさま)’을 찾는 것도 같은 정서다. 이런 모습 때문에 저들은 도쇼구를 일컬어, 불교의 사원과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이 혼합된 건축의 백미라고 말한다. 입구를 지나면 정문인 요메이문陽明門이 나온다. 닛코를 보지 않고 미美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 화려한 문의 외경과 더불어 흥미로운 것은 원숭이를 거꾸로 조각한 의도다. 완벽함보다는 허술함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일본의 철학을 또 여기서 본다. 원숭이를 통한 스토리텔링은 경내의 마구간에서 절정을 이룬다. 부모가 아들에게 해주는 인생 이야기가 8개의 원숭이 이야기로 마구간에 조각돼 있다. 연애, 결혼, 임신과 희로애락이 그 안에 다 담겨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산자루三猿·さんざる다. 유년기에는 세상의 나쁜 것을 보지 말고(미자루), 듣지 말고(키카자루), 말하지도 말라(이와자루)는 부모의 말에 원숭이는 눈과 입과 귀를 막고 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있다. 잠자는 고양이(네무리네꼬眠り猫) 조각이다. 히다리진 고로 左甚五郞의 작품이며 고양이 뒤의 참새 조각과 더불어 공존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 잠자는 고양이의 실체는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보다 더 작게 숨어 있다. 기대감이 무너지는 의외성도 여행의 즐거움이라면 그 의도는 200% 성공한 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과 그 앞의 삼구족을 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힘이 든다고 생각할 때, 도쿠가와의 유훈 하나를 만난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고구려인을 신으로 모신 일본 신사 일본의 야요이 시대BC200~AD300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현해탄을 넘어갔다. 일본은 이들을 도래인渡來人, 도라이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도래인은 일본 열도에 농경과 금속기 사용법을 전파하면서 큰 변혁을 선물했다. 두 번째 도래인은 5세기 백제 유민들이다. 일본에 제철기술을 전수했고 바느질과 비단, 소와 말을 보급했다. 7세기에 이르러 도래인 수는 토착 일본인인 조몬인보다 훨씬 많아졌다.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7세기 일본 인구 540만명 중 80% 가량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이들이었다”라고 말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다. 이제는 고구려인들이 도래인이 되어 일본으로 갔다. 2년 전 외교사절로 일본에 간 약광若光은 ‘왕’이라는 성性을 받았다. 716년, 7개 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인 1,799명이 무사시노 지방으로 이주해 고려군을 창설했다. 일본에서는 고구려인을 고마비토高麗人, 고려인라고 불렀다. 약광은 초대군장이 됐다. 오늘날 가나가와현 오이소에는 고려산이 있고 주소에도 고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초기 고구려인이 정착했던 지역이다. 고구려인은 고려사라는 절도 세웠다. 지금 그 절은 다카쿠高來 신사가 되었다. 일본 거리의 표지판에서 문득 고려라는 지명을 만나니 신기하고 반갑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좀 더 선명한 고구려인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다면 고마군의 중심지인 사이타마현 히다카日高시를 가면 된다. ‘고려강高麗川, 고마가와’이 있고 ‘고려역高麗驛, 고마에끼’이 있다. 약광을 신으로 모신 고마신사高麗神社도 있다. 산악·하천·호수·늪·민속신·실존인물·전설인물 등이 모두 신이 되는 신도의 나라 일본에서, 고구려인 약광도 신이 되었다.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하고 무사시 지역을 개척한 공로였다. 고마신사 입구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다. 한일국교 40주년을 맞아 민단(재일동포)이 기증한 것이다. 고구려인을 신으로 모시고, 그 후손들이 터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신사 입구엔 한국의 조각물이 서 있으니, 한국 여행객들은 여느 신사와 다른 친숙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정치인, 연예인 등도 방문 기념으로 나무와 명판 등을 남겼다. 고구려인으로서 신의 반열에 오른 탓일까? 요즘 약광은 출세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 등 6명의 역대 총리가 이곳을 참배한 뒤 총리대신 또는 국무대신에 올랐다고, 관계자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자랑을 한다. 뒤로 돌아가면 400년 전에 지어진 고려씨의 구주택이 있다.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다. 고마신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쇼텐인聖天院, 성천원이란 절이 있다. 일본식 정원이 잘 다듬어져 있고 한국의 대웅전을 닮은 사당도 웅장하다. 쇼텐인 뒤쪽 고마산 중턱에는 ‘고구려 성지’도 있다. 성지 우측으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백제의 왕인 박사,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신사임당 상像이 모셔져 있다. 2차 대전 때 징용되어 돌아가신 무명의 조선인 위령탑이 있어 더 특별하다. 남북한 재일동포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에디터 고서령 기자 글 Travie writer 윤용인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일본정부관광국 www.jroute.or.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공희정 컬처 살롱] 사랑, 너마저

    [공희정 컬처 살롱] 사랑, 너마저

    다시는 잎이 돋지 않을 것 같던 나무에서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볕 좋은 담벼락에는 노란 개나리가 방긋방긋 입을 벌리고, 솜털 보송한 목련도 만개할 준비를 마쳤다.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이 바람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하늘거리는 옷 입고 설레는 마음 살짝살짝 보여 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시절. 그래서일까, 가상일지라도 달달한 연애 프로그램에 자주 눈길이 머문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이 처음 등장한 것은 8년 전쯤이다. 가상현실이 익숙하지 않았던 때이다 보니 보는 시청자도, 보여 줘야 하는 출연자도 어색했다. ‘연애에 대한 공감과 결혼에 대한 설렘’을 보여 주기에 적합한 미혼의 젊은 연예인들이 가상 부부가 돼 출연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물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다. 그 모든 순간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됐다. 가끔은 이 사람들 진짜 결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얼’했다.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 된, 또는 혼기를 한참 넘긴 중년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가상 결혼 프로그램도 있다. 사랑의 아픔을 알고 있는 그들은 새로운 사랑 앞에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혼기를 놓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에도 무감각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슴 설레는 사랑을 꿈꾸는 건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을 이들은 보여 주고 있다. 가상 부부인 40대 개그맨 커플은 시청률 7%를 넘으면 실제로 결혼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그 덕분인지 시청률은 꾸준히 상승해 5%를 넘었다. 정말 7%를 넘으면 이들은 결혼할까? 밀고 당기는 사랑의 현장을 보여 주는 가상 프로그램도 있다. 일명 ‘싱글 중년 친구 찾기’. 출연자는 한때 대중들의 마음을 홀딱 뺏어 갔던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가수나 배우들이다. 팽팽했던 젊음은 세월따라 가버렸고, 아무리 화장을 해도 숨길 수 없는 주름과 탄력 잃은 피부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한때 스타들은 좁고 허름한 시골집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한다. 세수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고, 익숙하지 않은 집안일에 우왕좌왕한다. 엉성한 일상의 틈새를 뚫고 남자와 여자는 자신과 주파수가 맞는 상대에게 은근슬쩍 신호를 날려 본다. 짓궂은 웃음이라도 날아들면 어느새 얼굴은 발그레해진다. 밀고 당기는 현장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오락이다. 기획에 의해 설정된 상황에서 주어진 캐릭터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 주면 된다. 드라마와는 다른 현실감이 시청자들을 묘하게 유혹한다. 간혹 카메라 밖 그들의 실제 애정 생활을 보면서 프로그램 속 상대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바람난 남동생 보듯 실망도 하지만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가상을 현실로 오해한 것은 시청자다. 그래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눈이 먼 것도 아닌데 사랑을 이렇게 상품화해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든다. 가상이 현실인 듯, 현실이 가상인 듯 천지 분간되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사랑마저 참과 거짓을 구분해서 봐야 하는 이 봄이 좀 씁쓸하다.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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