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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북한의 DMZ 핵기지 건설(사설)

    지난 2월 서울을 방문했던 체니 미 국방장관은 귀국직후 미 의회증언에서 북한의 핵개발계획이 동아시아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 무렵 동구권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개혁추세에 따른 국제적인 화해와 군축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동서의 모든 국가들이 전후 냉전체제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난해부터 국제적으로 검증되고 있었던 북한의 핵개발은 이같은 국제적 추세에 역행하는 무모한 전쟁대비책동으로 보여졌던 것이다. 북한이 이번에는 한반도의 휴전선 비무장지대(DMA) 부근에 새 탄도미사일의 발사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발사대 2기를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이 소련제 스커드B 미사일을 개량하여 자체개발한 이 새 탄도미사일은 그 사정거리가 5백 내지 6백K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돼 남한전역이 그 사정권에 들며 핵 또는 화학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한반도 안전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특히 미국의 첩보위성에 의해 이미 이달초에확인됐다는 점에서 매우 심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나 핵운반수단의 확보 내지 실전배치는 크게는 국제정세의 신데탕트 분위기와 군축정책에 역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한반도의 군사균형을 근본적으로 깨고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에 또다시 긴장을 고조시키는 실질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휴전선 일대에 그들 전병력의 70%이상을 전진배치하고 있다. 특히 전쟁상황 또는 기습공격시 전후방 이동 등 기동이 자유로운 자주포를 비롯하여 대공포ㆍ견인포와 주력 전차,장갑차등 모든 공격 전력을 휴전선 북방한계선에 은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제적인 추세발전에 힘입어 한반도에서의 군비통제 또는 군축논의가 활발해질 계제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또 우리쪽의 대화노력과 방안 가운데에는 구체적인 군축협상도 포함돼 있다. 북한 당국 자신도 최근에는 남북한 군축문제와 관련하여 몇개의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전해진 바로 본다면 북한의 태도는 실제와 다른 것이드러났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고 속이 다르다면,더구나 그것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직접 관련되는 군사적 사항이고 보면 우리로서도 만반의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 미소를 비롯한 국제여론의 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제핵안전협정(IAEA)에 서명하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들의 그같은 거부자세가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의 핵기지 설치와 관련됐다면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에도 미ㆍ북한이 북경등지에서 접촉했다고 하나 그 역시 이 핵안전협정 서명과 관계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북한이 핵무기 개발내지 새 미사일기지 설치설과 관련하여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으로 본다. 북한이 그동안 한반도의 비핵화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해 왔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그들이 현명치 못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 합참의장 군령권 대폭 제한/국방장관의 용병감독 권한은 강화

    ◎문민통제 확립의 합동군제 개선안 마련 국방부는 국회에 상정중인 국군조직법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문민통제의 원칙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 국방장관의 용병에 대한 권한을 대폭 강화,신설되는 합동참모본부의장이 임의적으로 병력을 사용치 못하도록 제한키로 했다. 국방부는 또 합참의장의 군령 주요결정사항에 각군총장이 소외되는 것을 막고 전문성 있는 각군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주 1회씩 합동참모회의를 실시하도록 국방부장관 훈령에 명시키로 했다. 국방부는 합동군제인 합동참모본부 창설에 대비,문민통제와 3군의 균형발전을 위해 국군조직법 시행령을 비롯,국방부장관 훈련 등 70여개의 관련법령의 개정안을 마련중이라고 밝혔다. 국방부가 마련한 국군조직법 개정안 시행령에 따르면 특전부대의 여단급,일반부대의 사단급 등 주요부대의 이동과 대규모 부대의 수도권진입 등은 반드시 선보고및 사후보고를 통해 장관의 결재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방부는 이와함께 장관의 문민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인사ㆍ정책ㆍ조직기능관장직책을 현역에서문관으로 전환하는 문제와 자문교수 또는 전문민간인 등의 참여를 확대하고 차관보 직급을 합참의 4개 본부장 직급과등 직위로 하는 직제개편도 검토하고 있다. 국방부는 합동참모회의 결정사항에 대한 3군 총장의 이견이 있을 경우 이 의견을 첨부 보고토록 의무화하고 합참의장의 임의적 군령집행을 수시 또는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국회의 국정감사 활동도 보장토록 관계법을 개정할 예정이다. 국방부는 또 군정과 군령기능의 유기적인 협조를 위해 합동참모회의 외에 합참요원과 각군 본부요원간의 회의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방법과 국방부와 각군 본부의 각종예규와 규정을 세분화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국방부는 국방부의 직제령을 고쳐 국방부 본부의 현역장성급 참모들 중 해ㆍ공군의 편성 보완으로 정책심의 결정에 해ㆍ공군의 전문성및 특수성을 보장하고 합참의 직할부대 편성시 해ㆍ공군의 편성직위를 보장토록 각 부대령을 보완키로 했다. 국방부는 이밖에 오는 93년 미군으로부터의 작전통제권의 인수에 대비,휴전협정과의 법률적 문제를 검토키로 했다.
  • 남북한 「군축테이블」 마련될까/북의 「선전공세」와 정부대응 안팎

    ◎신 데탕트 무드에 실질협상 가능성/북측 안 미군 철수시한 명시안해 “진일보”/상호감시 기능 확보등 신뢰구축이 과제 한반도의 평화구조정착을 위해 당사자인 남북한당국간의 군축협상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을 통해 노태우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에게 북한의 개방 및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소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군사적으로 북한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추구하지 않고 무력으로 북한을 공격할 뜻이 전혀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앞으로 예상되는 남북한 군축문제에 적극 대응하려는 우리측의 입장을 나타냈다. 북한측도 한소 정상회담개최 사실이 발표된 지 하룻만인 지난 5월 31일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정무원연합회의 명의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안」을 제시,그 의도야 어떻든 남북한 상호군축문제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다. 따라서 남북한당국간의 군축협상은 그 자체의 성격상 조기에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는 힘들지만 미·소·중·일 등 한반도 주변4대강국의 관계변화를 비롯한 한반도외적인 화해와 협력의 신 데탕트바람이 불어닥칠 경우 군축의 실질적인 진전이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부는 이같이 새로운 상황에 적극 대응한다는 차원에서 국무총리실 산하의 외무부·국방부·통일원 고위당국자들로 구성된 안보실무대책단을 중심으로 북한측이 제의한 「한반도군축안」의 수용여부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보실무대책단의 한 관계자는 최근 『북한의 이번 제의는 종전 주장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군사적 신뢰구축문제를 포함한 일부 내용이 우리측의 지금까지 주장과 비슷한 점이 있어 협상할 가치가 있다』고 밝혀 진전된 북측제의를 평가하면서 조만간 남북군축협상에 응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군축에 관한 우리측 의견을 무시하거나 건성으로 들었지만 이번에는 외교부산하 평화군축연구소와 미스탠퍼드대 국제전략문제연구소간의 공동연구등으로 현실수용자세를 보인 것 같다고 이 관계자는 지적한다.나아가 상당한 경제적 위기에 빠져있는 북한이 더이상의 군비확대를 추구할 경우 『경제파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감지한 결과로도 보여진다고 분석했다. 정부도 이같은 기류에 따라 지금까지 스톡홀름협정에 의한 유럽형군축모델을 밑바탕으로 우리 실정을 가미한 군축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왔다. 정부는 한반도군축 또는 군비통제를 위해 ▲남북불가침선언및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제반조치의 실현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와 휴전선일대에 배치된 공격용무기의 후방 분산배치등이 상호간의 검증을 거쳐 완결됐을 때 병력을 감축하는 것 등의 단계적 군축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특히 실질적인 군축협상을 위해 남북상호간 문서로 합의된 군축안대로 실행하느냐의 여부를 감시한다는 차원에서 상호 감시기능의 확보와 선신뢰구축이 보다 중요할 것으로 보고 이를 위한 방안 마련에 힘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부는 아울러 북한측이 그동안 일관되게 주장해온 주한미군의 철수와관련,미군의 단계적 철수와 군축회담을 연계시키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의 이번 제안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쌍방고위군사당국자간의 직통전화 설치·운영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우선 남북간의 불가침선언채택등 우리측 군축안과 매우 비슷한 부분이 있고 또 그동안 일관되게 주장했던 미군철수에 대해서도 시한을 못박지 않는등 종전보다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같은 남북군축협상에 대한 낙관론 못지않게 신중론도 만만찮다. 즉,북한측 제안을 87년 7월 「한반도에서의 단계별 군축실현을 위한 다국적 군축협상제의」와 88년 11월 「포괄적 평화방안」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다. 송한호통일원차관은 이와관련 9일 기자들과 만나 『북한입장은 과거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고 따라서 우리 입장도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는데 그의 이같은 발언은 정부내 신중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인 군축의 단계적 실현에 대해서도 송차관은 『북한이 이번 제안에서 남북신뢰조성,무력감축,외국무력철수,군축과 그 이후의 평화보장 등 4개항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를 단계적으로 하자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북측 제의를 평가절하하고 최근 일고 있는 군축협상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했다. 북한이 우선 남북불가침선언을 채택하자고 제안한 것이 3자회담에서 남북당국간 회담으로 후퇴,남북간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3자회담 논리에서 후퇴한 것이 아니며 불가침선언채택은 북한측이 종전에도 계속 주장했던 내용』이라며 『3자회담입장은 계속 살아있는 것으로 본다』고 강경입장을 고수했다. 또 북한이 3자회담이전이라도 남북이 군축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점도 앞으로 고위급회담에서 미군철수와 군축문제를 새롭게 다루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결국 남북간 군축에 대한 실질적인 협상을 정부내 서로 다른 입장간의 조정을 거쳐 대북제의를 통해 가시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정치·군사문제를 유일하게 다루고 있는 남북고위급회담이 남북쌍방간에 똑같이 엄청난 비중으로 취급될 것으로 예측된다. 아울러 미국과 소련등 초강대국의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능동적인 대응도 한반도 군축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다.
  • 6월의 전쟁과 평화/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미국은 아직까지 15년전의 월남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전 당사자간의 정치적 협상에 의한 종전이며 미국으로서는 그에 따른 전략적 철군인 것이다. 건국이래 나라밖의 어떤 전장에서건 결코 패배해 본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그들에게 월남전은 두번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전쟁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미국에 있어 40년전 6ㆍ25 한국전쟁은 어떤 것인가. 「한국전쟁을 가리켜 『이상한 시기에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하게 일어난 전쟁』이라고 지적한 이가 있었다. 그럴듯한 표현같지만 기실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자체가 정상이 아닌 비상이며 이상인 까닭이다. 오늘의 미국을 대표하는 부시대통령의 6ㆍ25관은 이러하다.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되어 「잊혀진 승리」로 불려진다』「잊고 싶은 전쟁」(월남전)과 「잊혀진 승리」(한국전)란 표현은 그들이 밖에서 치른 전쟁이란 한 「대상」의 앞뒤면을 설명해준다고 해도 좋다. 해방후 한반도 북쪽에서 김일성이 손쉽게 한 정권을 창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현대사가들은 다음 4가지로 꼽는다. 즉 첫째 뛰어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서울에 모여있었다. 둘째 다른 당파들은 서울이나 평양에서 모두 분열,쟁투하고 있었다. 셋째 그가 북의 군과 정보를 장악했다. 넷째 소련 진주군이 그를 한가닥으로 밀었다는 점 등이다. 그 정도의 호재를 갖는 여건위에 남한에서 미군마저 철수하자 그 힘의 공백을 틈타 김일성은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다. 사실이 그러한 터에 지금에 와서 6ㆍ25가 「민족해방전쟁」이며 「북침에 의한 것」이거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도발전」이라는 검증될 수 없는 가설이 한때나마 유행처럼 언설됐던 것은 객관적으로도 결코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된 것은 6ㆍ25 사흘후인 6월28일 이었다. 그래 세상에 어느 멍청한 정권이 자기네 수도가 사흘만에 거꾸로 적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의 모험을 안고 「침략전쟁」을 일으킨단 말인가. 대개 무기를 갖고는 평화를 얘기하기 못한다. 인간의 정신과 의지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 평화는 헌장이나 협정만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사람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증오에 앞서 평화에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 속에서 만나고 다짐해야 한다. 이 화사한 성장의 계절에 왜 6ㆍ25를 얘기하는 가는 묻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모순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의 분단상태가 해소되지 않고는 해마다 6월에 우리들은 전쟁과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경구가 있다. 상대가 문제해결 수단으로 무력을 택한다면 군축이나 협상에 의한 평화유지는 어렵다. 그렇다면 전쟁수행 능력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옛말에 일렀다. 나라가 비록 크나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편안하나 싸움하는 방법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하다(국수대 호전필망 천하수안 망전필위). 평화를 얘기하고 전쟁을 논할즈음 「좋은 전쟁」이니 「나쁜평화」니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전쟁은 전쟁이고 평화는 평화일 뿐이다. 평화와 전쟁,전쟁과 평화는 흔히 대립개념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평화에 대한 평균적인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둘은 반드시 대립개념은 아니다. 교전 당사자간의 투쟁을 전쟁이라 할 때 전쟁의 개념은 명백해지지만 평화의 개념은 그렇지 못하다. 평화란 전쟁과 관련되면서도 매우 추상적인 데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중세유럽에서의 평화개념이 오히려 오늘의 그것보다 더 명료하다. 즉 『일반적으로 어느 지역이 평화롭다는 것은 그 지역민중이 공유하는 환경의 이용가치가 외부의 폭력적 간섭으로 손상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세적 개념의 평화란 단순히 영주간에 전쟁이 행해지고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민중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해 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ㆍ정신적 기반 즉 「생존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전쟁의 상흔이외에 6ㆍ25가 우리에게 남긴 더큰 상처는 분단의 굴레를 우리민족 가슴속에 깊이 내면화 시킨데서 더나아가 전쟁과 평화,평화와 전쟁에 대한 위기적 인식을 생활화 시켰다는 점이다. 그나마의 「생존의 보호」가 언젠가 송두리째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전쟁신드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판문점ㆍ휴전선ㆍ국립묘지와 저 소모적인 콘크리트 장벽 논쟁ㆍ땅굴 등 6ㆍ25의 전쟁적 실체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지금 이 평화적 생존의 보호에 대해서는 언제나 초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모두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사라져가고 있다고들 얘기한다. 6ㆍ25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1950년 6ㆍ25당시 소련에 있어 한국은 미국의 대소전방 기지였다. 원래 북한정권의 수립을 직접 주관했고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을 지원했던 그 소련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을 만난 것은 소련이 더이상 한국을 미국의 대소전초기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쪽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연의 산세는 골이 깊어 수림이 무성하다지만 인간사에선 상처가 크면 치유도 오래갈수밖에 없다. 6ㆍ25가 아직도 그 자체로서 역사적 인식이나 평가 또는 전쟁사적 해석에 있어 미진한 채로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6ㆍ25의 피맺힌 상처는 우리가 그것을 한과 증오의 대상으로서 보다 민족과 역사의 교훈으로 살려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래서 6월엔 아무래도 전쟁과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한ㆍ소 정상회담 이후 「동북아 역학」진단(전문가 좌담)

    ◎“한반도 긴장완화의 「지렛대」본격 작동”/크렘린,「두개의 코리아」사실상 인정한 셈/중국도 장기적으로 북한개방 유도할 듯/평양,대소의존 높아 「단절」어려울 듯/미군철수 겨냥… 전략차원서 대미접근 가능성/한ㆍ소발전은 서울ㆍ북경 개선의 촉매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간의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통해 수교원칙이 합의됨에 따라 양국관계는 급격히 개선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정세도 큰 변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특히 한소정상회담을 격렬히 비난해온 북한이 이같은 사태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갈지,과연 북한도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해 갈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으며 북한­중국­소련의 북방3각관계가 어떻게 변모해갈지도 궁금하다. 이같은 문제들을 풀어보기 위해 신승권(한양대ㆍ소련정치) 박두복(외교안보연구원ㆍ중국정치) 윤병익교수(통일연수원ㆍ북한정치)의 좌담을 마련했다. □참석자 신승권교수 박두복교수 윤병익교수 ▲신승권교수=한소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관계의 급진전과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한국과의 수교원칙에 합의한 소련측의 결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금년 3월 이전까지는 북한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한미군사동맹 관계를 인정하면서 한반도에서의 1코리아(1Korea) 정책을 고수한다는 것이 소련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소간의 정치ㆍ경제ㆍ문화교류를 발전시킬 뿐 아니라 북한으로 하여금 대남관계를 개선토록 하고 개방과 개혁의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는 2코리아(2Korea) 정책을 펴나갈 것이다. 한국과 관계개선은 하되 국교정상화까지는 가지 않겠다고 북한측에 다짐했던 소련이 금년들어 학자와 언론인 등을 통해 김일성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근본적인 정책변화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박두복교수=한소관계의 발전은 장기적으로 한중관계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중소분쟁 완화이후 한소ㆍ한중관계는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상승적인 작용을 해왔다.우리 정부의 북방정책도 이런 대전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체제유지에 한계성 ▲윤병익교수=북한도 소련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입장을 표시할 수는 있지만 구조적으로 군사ㆍ경제면에서 대소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소련의 정책을 인정 내지 묵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북한과 소련관계가 단절되면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무기공급이나 수리도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고 한소수교와 국제화해 및 한반도 정세변화 상황을 나름대로 대남정책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2코리아 정책으로 입장을 바꾼다면 북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조선정권과 대한민국자체를 부인하는 등의 대남전략 기본속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한반도의 평화정착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등의 군사문제 타개책을 내세울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군축과 신뢰회복,외국군의 단계적 철수를 들고 나온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여러면에서 체제유지에 한계가 있다. ▲박교수=중국은 대북한관계에 있어서 소련보다는 많은 제한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련은 분단극복과제를 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정책을 펴나가는데 있어서 자유롭고 고르바초프 등 지도자들이 2차대전 당시 징집연령에 이르지 않았던 혁명 3세대로 실용주의적 가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군사ㆍ경제적으로 북한에 대해 확고한 제재수단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은 대만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중국」 (1 China)정책을 고수하기 때문에 한반도정책에 있어서도 행동반경이 좁고 등소평을 비롯한 실세지도층이 혁명 1세대들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한국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2코리아 정책을 받아들이는 꼴이 돼 1차이나원칙과 배치되는 모순을 자초하게 된다. 우리의 북방정책방향도 중국보다 행동반경이 넓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함으로써 한중 관계발전의 자극요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신교수=소련은 정치개혁면에서는 중국에 앞서 있지만 경제개혁면에서는 훨씬 뒤져있다. 중국은 실용주의 경제노선에 착수한지 오래고 소련은 이제서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소간의 경제발전 경쟁과 협력이 이뤄져 북한에 개혁개방압력을 가하면 북한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73년이란 가장 오래된 공산주의국가 소련에서 경제가 엉망이 됐고 동구권이 붕괴한 것을 보고도 북한이 계속 통제경제를 추진하는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선택놓고 고심예상 ▲윤교수=올가을 북경 아시안게임에 노대통령이 방문하는등 중국과 접촉할 경우 한중 관계개선을 통해 중국의 1코리아정책에 중대한 변화합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도 결국 남북한 평화공존모델로 갈 수 밖에 없는데 1코리아정책에서 2코리아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 정책선택의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 ▲박교수=천안문사태와 동구민주개혁이후 중국의 정치상황은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다. 이같은 급진적 변화가 중국공산당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정책결정과정에서 이데올로기요인이 부각되고 현실주의적 목소리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체제에 대한 인식도 이데올로기 요인에포함된다. 그러나 이는 외적변화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하다. 중국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의 체제변화와 개혁을 유도하는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한소관계가 한중관계발전으로 직결되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리한 영향을 미치리라 본다. 중국사람들을 만나보면 한중관계는 한소관계진전보다 반발짝 늦게 따라간다고 얘기한다. ▲신교수=중국과 소련이 라이벌입장이긴 하지만 고르바초프 등장이후 한반도긴장완화와 군축문제에 있어서 한소관계가 정상화돼야 한중관계도 이를 구실삼아 북한의 비판을 받지않고 부드럽게 정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견해를 같이 할 것이다. 중소관계도 냉각관계를 뛰어넘어 뭔가 진전을 봐야할 것이며 작년 중소정상회담에서 뭔가 합의를 보지 않았겠는가. ▲윤교수=중국은 천안문사태이전까지는 정경분리원칙에 입각,2코리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위에서나마 한국과 상당한 경제접근이 있었다. 그러나 천안문사태 이후 상황이 달라져 북한과 밀착되는 징후를 보였다. 그에 비해 소련은 86년 블라디보스토크선언을 통해 아시아국의 일원임을 자처한 이래 88올림픽직전 글라스노야르스크선언에서 남북한을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는 등 사실상 2코리아정책으로 가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소련매스컴이 김일성을 소련군대위출신으로 소규모 빨치산을 이끈데 지나지 않으며 6ㆍ25가 남침전쟁이라고 폭로한 것은 김일성위상격하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소국교수립상태까지 가면 평화공존은 「2개의 조선」을 조작하려는 책동이라는 입장의 북한의 1코리아정책은 수정될 수 밖에 없고 이같은 기본논리의 와해는 북한체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박교수=북한의 1코리아정책은 유한성을 띤 시간문제다. 1코리아정책은 국제사회의 대결논리시대의 산물로서 이제 국제적인 데탕트의 물결이 한반도에까지 투영되는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남북교류가 불가피하고 서로 정치실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진실성을 갖고 군축문제에 임해야 하며 1코리아 정책으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대남강경노선을 평화공존노선으로 전환하기 위해 체제변화가 불가피하다. 북한이 단기적으로는 어렵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은 동구의 변혁이 김일성체제를 위협,오히려 더욱 경직화되고 이념을 강조하겠지만 이는 외부자극에 대한 조건반사일 뿐이다. 김일성이 거의 80세가 다된 만큼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시키는 과정에서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정치ㆍ경제개방을 촉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교수=김일성 사망이후 획기적인 계기가 있을 수 있고 김정일집권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경제개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관할 수 있다. 북한이 석유ㆍ원자력 등 자원면에서 소련에 의존하고 있고 전력ㆍ식량난 등 경제사정이 워낙 어렵다. 소련은 지난 84년 체르넨코서기장시절 김일성의 소련방문 당시 원자력발전소 설치를 약속했지만 체르노빌 사건이후 소극적으로 변해 북한의 원자력발전소 건립자체를 주저하고 있다. ○소련ㆍ북한 갈등 예상 ▲박교수=소련이 탈스탈린화 하는데 북한이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소련과 북한간의 갈등으로 나타나겠지만 북한의 경제ㆍ군사 구조상 지탱하는데 한계가 있다. 중국도 소련보다 먼저 탈스탈린화에 나섰기 때문에 중소가 동시에 변혁을 추진하고 이 변혁이 상호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도 천안문사태 이전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다. 중국이 현재는 위축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동안의 개방정책으로 인한 빈부계층과 지역갈등의 해결을 통한 국민일치감 회복을 위해서는 경제합리화보다 정치개혁이 더 쉬운 방법이다. 중국이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개혁과 개방정책으로 회귀하지 못한다면 한소관계발전은 오히려 중국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교수=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중국에서 배운 것이다. 만일 페레스트로이카가 없었다면 중소분쟁이 심화됐을 것이나 양국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중소관계도 진전될 것이다. 박교수는 중국이 사회혼란 극복문제때문에 잠정적으로 위축돼 있다고 했는데 소련은 개혁과 개방을 중단할 수 없는 단계에와있다. ▲박교수=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중국의 개혁ㆍ개방정책이 2단계로 접어든다면 중소 관계발전은 북한체제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압력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교수=현재 소련만이 북한에 개방압력을 가해도 시간문제인데 중국까지 압력에 가세한다면 북한은 그야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중국과 소련처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부개혁 서둘러야 ▲윤교수=모든 문제는 결국 북한의 변화가능성문제로 귀착된다. 대외개방정책면에서 북한은 중국처럼 대외개방경제를 추진하되 주체사상논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조총련계기업을 받아들이는 등 변명을 추진하려할 것이다. 김일성이 지난 84년 소련과 동구를 돌아보고 이들의 경제발전상에 쇼크를 받은뒤 중국을 본받아 합영법을 실시했으나 서방자본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다. 중국이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시장경제를 부분 도입한데 반해 북한은 시장경제도입을 꺼리기 때문에 국내경제개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국은 대내적개방의 바탕위에서 대외개방을 추진,조화를 이룰 수 있으나 북한은 국내변화는 도외시한 채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라는 식의 교조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박교수=유물변증론에서 봐도 외적요인은 내적요인과 연관지어서만 움직일 뿐이다. 북한에서도 국가최우선 목표를 계급투쟁에서 생산력발전으로 전환시키는 내적변화가 있어야 진정한 군축과 평화공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사상과 현대화개념이 대립됐었으나 모사망후 현대화론 노선화가 이뤄졌다. 북한에도 김일성사망후 주체사상수정을 통해 78년이후의 중국이 치른 과정이 있어야 한다. ▲윤교수=현재로서는 북한의 대외경제개혁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개혁은 물론 정치개혁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원민주체제가 일반적 추세인데도 북한은 김부자세습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1당독재체제의 변형인 주체사상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대내개혁이 안되기 때문에 대남정책의 변혁도 어려운 것이다.최근까지 몇차례 남북대화를 했지만 북한의 남조선해방인민민주주의 통일전선전략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기 때문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신교수=소련이 지금까지는 북한에 대한 개방압력을 주저해 왔다. 북한이 내부개혁을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중국과 함께 설득하는 색다른 방법을 들고 나올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철두철미한 통제사회라 해도 차우셰스쿠정권처럼 밑으로 부터 붕괴되지 않으려면 정권유지차원에서라도 지금같은 스탈린체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이 김일성사망후 차기정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겠지만 소련이 루마니아처럼 북한에도 개입할지는 알 수 없다. 소련이 전세계 천연가스생산량의 40%,석유 20%,목재 40% 등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미일학자들이 고르바초프가 곧 쓰러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유는 공산주의가 망해가고 있다는 얘기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85년에 비해 요즘은 모든 물건이 비싸며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일을 잘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의욕고취요인이 없기 때문에 서방세계에서 1시간이면 할 일을 3∼4시간 동안 하고 시설마저 낙후돼 있어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프로레타리아 룸펜기질이 몸에 배 있는 것이다. 소련도 그런 상황인데 석유한방울 안나는 북한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폐쇄경제」날로 악화 ▲윤교수=북한은 주체적방식에 의해 자립적 사회주의민족경제를 건설한다는 목표아래 물질대신 정신적인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있다. 요즘은 잘 안되니까 물질인센티브를 병행하고 있지만. 북한이 자립경제를 한다고 나서는데 대해 소련의 타스통신은 북한기간산업 70여개가 소련에 의해 건설됐고 기술자도 소련에서 배워간 것 아니냐고 폭로하기도 했다. 북한경제의 특징은 군인력을 포함한 노동력동원을 통한 경제건설이다. 경제가 어려운데도 정치선전목적을 위한 전시효과를 노려 1백5층짜리 유경호텔까지 짓고 경영능력이 없어 싱가포르인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 북한에서 4년간 농업지도를 하다 얼마전 일본으로 돌아온 조총련계농업전문가에 따르면 심각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의 발상으로 경사도45도까지의 산을 소위 다락밭으로 만들어 옥수수를 심도록 했는데 산을 전부 깎고나니 여름에 홍수가 지고 산사태가 나 논에까지 토사가 쌓이는 바람에 대부분의 논까지 버렸다고 한다. 세계농업기술 수준에서 인정받지 못할 비과학적인 방법을 주체적발상이란 미명아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비능률성에다 주체적발상까지 겹쳐 북한경제의 한계를 앞당기고 있는 셈이다. ▲박교수=한소관계 발전이 북한을 고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리더십의 특성상 중국과 북한이 관계를 강화할 수 밖에 없으며 고립화 방향이 아닐 경우 북한이 미일등 서방과 관계개선하는 방향으로 진전돼 한소관계 발전이 한중관계,나아가서는 남북한관계에 유리한 여건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윤교수=한소수교때문에 북한이 미일과 접근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고 북한이 미군유해송환등 화해제스처를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북한의 목표는 미국과 수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북한ㆍ미국간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대남전략차원에서의 대미접근일 뿐이다. 한소수교원칙합의를 계기로 대남전략에 변화를 보인다면 한국정부를 승인하고 대화하며 동서독식 평화공존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통일을 원하는 대내외적 갈망분위기를 활용,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전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인 전망이고 장기적으로는 여러가지 변화요인에 의해 압박을 받게돼 결국 우리의 정책노선에 응해올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된다.
  • 북,군축회담 재촉구/“한ㆍ미와 협정 용의”/로동신문

    【도쿄 AFP 연합】 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한소 정상회담을 앞두고 4일 미국과 한국에 대해 한반도의 군축문제에 관한 회담을 갖자고 촉구했다. 북한 중앙통신에 따르면 로동당기관지 로동신문은 평양당국이 지난 1일 제안한 새로운 군축안을 논평하면서 북한측의 제안은 6ㆍ25전쟁의 휴전상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평화안」이라고 주장했다.
  • 미ㆍ소 정상,대결시대 종식 선언의 의미

    ◎아태지역 새질서 구축의 “청신호”/“북한개방이 평화정착 열쇠”판단/소도 냉전구도 청산을 강력 희망/크렘린,한ㆍ일 등과 경협 확대… 긴장완화 추구 미국과 소련의 두 정상은 3일 양국정상회담을 마무리짓는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정상회담으로 미소양국의 대결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회담의 구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들이 있겠지만 이번 회담으로 전후냉전체제를 이끌어온 두나라는 대결시대를 마무리하고 상호협조의 터를 다지는 하나의 이정표를 마련했다. 통일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입문제에 대해 양측의 이견이 아직 좁혀지지 않았으나 지난 6개월여 계속돼온 동유럽의 변화는 이번 미소의 만남으로 사실상 마무리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제 세계의 관심은 한반도를 비롯,중국ㆍ베트남 등 마지막 남아 있는 아시아공산국들의 변화여부에 모아지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도 3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미와의 새관계를 바탕으로 앞으로 태평양권에도 새질서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해 다음의 외교목표를 아시아지역에 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아태국들과의 경제협력체 구성을 위해 내년초 일본방문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노태우대통령과의 전격적인 한소정상회담 합의와 대한수교의사는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정책의 구체적인 첫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아시아 지역에서의 새 질서모색을 위해 정기적으로 여러 제안들을 내놓았다. 지난 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중국과의 화해를 천명한 것을 비롯,그해 11월에는 아태지역의 비핵화 등 군축을 제의한 「뉴델리 선언」,그리고 88년에는 이 지역국들의 경제협력과 집단안보 구상을 골자로 한 크라스노야르스크선언을 내놓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프가니스탄과 캄보디아주둔 베트남군의 철수가 이뤄졌고 89년 5월과 금년 4월 두차례에 걸쳐 중국과의 수뇌회담이 성사돼 양국 국경의 병력감축 합의가 발표됐다. 그동안 동유럽에서는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페지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일대 변혁이 진행됐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등 아시아 공산국들은 좀체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들도 80년대 들어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 경제적인 변화만 추구한다는 소위 「위로부터의 개혁」방식을 도입,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했지만 그 정도는 너무 미약했다. 정치와 경제체제를 한꺼번에 바꿔버린 동유럽의 변혁물결이 일자 이들은 결국 체제안보를 위해 변화시도 자체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6월 북경의 천안문 사태가 그 단적인 예이다. 북한은 동유럽 각국에서 유학생들을 불러들이고 남북대화를 교착상태에 빠지게 했다. 소련으로서는 아시아지역에서 유럽에 상응하는 군축,그리고 시베리아를 포함한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변화노력을 이곳에서 펼칠 때가 된 것이다. 아시아에서 동서대결구도가 청산되지 않는한 북한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인 가치를 소련은 포기하기 어렵다. 북한은 주한미군과의 대치지역이고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발진한 소태평양함대가 태평양으로 빠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소양국은 한ㆍ미ㆍ소 3국이 북한을 설득,개방을 촉진함으로써 남북한 대화와 미ㆍ북한관계개선 그리고 이 지역의 군축에 진척을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데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과의 수교를 단기적으로 북한에게는 충격이겠지만 결국 이지역의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게 소련의 판단인 듯하다. 북한의 충격완화를 위해 일시적으로는 주한미군철수,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대체 등 북한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지지하겠지만 소련이 한반도에서 바라는 것도 결국은 독일식의 해결방안일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북방4개섬 반환문제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아시아지역의 새질서 구축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본과의 본격 협력시대를 열어 새 아태협력체를 구성시키겠다는 것이 소련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북한ㆍ중국을 포괄하는 구상이다. 고르바초프의 내년 방일은 이런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동유럽의 변혁물결과 본격화될 소련의 아시아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유럽대륙에서와 같은 화해의 새바람이 불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오는 9월 북경아시아게임을 고비로 중국도 대외개방과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란 전망들이 있으나 아직은 뚜렷한 변화조짐이 없다. 노대통령은 3일 한소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면서 출국인사를 통해 『우리의 분단상황은 결코 21세기로까지 이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안에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남북한과 미ㆍ소ㆍ중ㆍ일 등 관련국이 무엇보다 먼저 할일은 이 지역의 긴장완화와 대결구도 청산일 것이다. 남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 주는 이번 미소정상회담의 의의는 바로 이런 노력의 첫발을 내딛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 4계파,오늘 동경서 평화회담

    ◎캄보디아 「11년 분쟁」 종식에 “청신호”/신 데탕트 여파로 내전 지속 명분 상실/휴전협정 체결… 연내 총선ㆍ연정 가능성 11년간 계속된 캄보디아 내전 종식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평화회담이 4,5일 이틀간 일본 도쿄(동경)에서 열린다. 이번 회담은 현 프놈펜정권(헹삼린정권)을 이끄는 훈센총리와 전 국가원수인 시아누크공,크메르 루주(구폴포트정권)의 큐삼판의장,구론놀정권의 손산 전총리 등 연합국민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3대 무장반군세력 등 4대파벌의 수뇌들이 전원 참석,휴전협정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이같은 희망적 관측은 그동안 분쟁해결을 막아왔던 외부지원세력의 입장에 변화가 있었고 더 이상의 내전지속이 어느 파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교전당사자들이 인식을 같이하고 있는데서 도출된 것이다. 현 프놈펜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베트남과 소련,반군세력을 지원하고 있는 중국과 크메르 루주를 제외한 2개파를 지원하는 미국은 모두 국제사회의 데탕트분위기 확산에 따라 내전종식을 지연시킬 명분을 잃어버린 상태다. 지난 79년 캄보디아침공으로 크메르 루주정권을 타도한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 지원세력인 중국과 최근들어 외무차관접촉을 갖고 내전종식과 민족통일을 상징하는 최고국민평의회 구성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양국관계가 빠른 속도로 정상화 되고 있다. 미국과 소련도 이번 워싱턴정상회담에서 지역분쟁 해결노력을 거듭 다짐하는 등 내전종식쪽으로 견해차를 좁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휴전협정이 예정대로 조인된다면 연내에 파리회의를 소집,협정내용을 보장할 국제감시기구를 구성하고 유엔평화유지군파견과 휴전감시,4개정파가 참여하는 자유총선,새정부 구성의 정치일정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프놈펜정권과 반군세력간의 이견이 완전 해소된 것은 아니다. 우선 반군세력을 지원하는 미국과 캄보디아국토의 90%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현 프놈펜정권은 내전 종결후 세워질 연립정부에서 크메르 루주가 배제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대해 반군세력들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는 크메르 루주를 배제시켜서는 휴전이 성립될 수 없으며 계속 외세에 이용당하게 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고,특히 크메르 루주측은 프놈펜정권의 즉각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또 유엔휴전감시기구의 역할에 대해서도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훈센정권은 권한을 최소화해 즉각 휴전하자는 입장인데 반해 반군세력들은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시아누크공이 집권하다 70년 외유중 론놀에 의해 추방됐고 75년 폴포트정권이 무력으로 론놀정권을 진압한 뒤 79년 베트남군을 앞세운 헹삼린정권에 의해 타도되는 등 숱한 정변을 겪은 캄보디아 국민들은 이제 지리한 내전의 터널끝을 바라보며 막바지 진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
  • 대미 공식창구 노린 유화책/북한의 미군유해 송환 안팎

    ◎미 의회와 직접 접촉… 관계개선을 모색/남북대화 진전·긴장완화에 「한몫」 기대 북한이 미국의 현충일인 28일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미군병사 유해 5구를 판문점을 통해 미 의회대표단(단장 GV 몽고메리하원 원호위원장·민주·미시시피주)에게 인도한 것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북한이 유엔군사령부소속 장병들의 유해를 유엔사에 마지막으로 인도했던 것은 휴전협정이 발효된 1년뒤인 54년 8월17일로 당시 유해는 북한의 한만 국경지역 14개 포로수용소에 수감중 사망한 미군 1천8백69명을 포함한 4천23구로 올해 유해송환은 만 3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유엔군사령부는 휴전이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공산측과 80여차례나 유엔군장병 유해송환을 위한 협상을 벌였으나 북한측의 무성의로 결실을 보지 못했었다. 미국은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인 88년 12월6일 북경에서 북한과 외교접촉을 전개하고 지난달 26일까지 8차례의 비공식접촉을 통해 양국간의 현안을 토의해왔다. 미국측은북한과의 접촉에서 ▲남북대화 진전 ▲비무장지대안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 ▲실종미군유해 인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 가입 ▲테러포기 ▲대미 비방중지등을 촉구하고,북한측은 ▲주한미군 철수 ▲남북한 상호감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한미 정부간 직접대화및 관련개선 ▲실종미군 송환을 위한 양국정부간 협의등을 내세웠다. 지난 1년 5개월동안 수차례에 걸쳐 계속된 북경접촉과 주유엔 북한대표부 허종부대표의 워싱턴에서의 미 정계·관계인사들과 빈번한 접촉끝에 이번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해송환에는 북한측이 미국측에 보내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중 혹은 포로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미군은 모두 8천1백77명이며 이밖에 한국군과 영국·프랑스·터키·캐나다 등 참전 16개국의 유해도 2천2백33구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만3백여구의 유해중 이번에 인도되는 5구의 유해송환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군과 참전 16개국의 유해송환문제도 계속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군사관계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 대변인 링크대령은 『북한이 어떤 의도로 5구의 유해를 미국측에 인도하는지 알 수 없으나 외교적인 루트를 통하지 않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판문점을 이용하는 것은 앞으로 남북대화나 긴장완화를 위해서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은 당초 미군의 유해발견 사실을 뉴스를 통해 흘린 뒤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측 대표들의 인도주의적인 인도요구를 무시하고 미국과의 공식대화의 무기로 이용하려는 기도를 보여왔다. 유해반환은 교전 당사국간의 군사적 문제로 정전위원회 소관사항이나 북한이 유해인도계획을 몽고메리의원에게 직접 서한으로 통보한 것은 미 의회와 접촉해 보려는 외교적인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측은 처음 미 의회대표단이 직접 평양에 와서 유해를 인수해 가라는 제의를 했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로 인도장소를 바꾸었다. 이번 인도된 5구의 유해는 판문점에서 헬리콥터를 이용,오산 미 공군기지로 이송된 뒤 29일 C141 미 수송기로 미 육군중앙신원감식소(USACIL)에 보내져서 첨단과학 장비를 이용,신원확인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신원감식소에서는 인식표·단추·만년필 등 유류품이 있을 경우 이를 토대로 1차 감정을 하고 2차로 X선·레이저빔·유골의 조직검사 등으로 신원을 최종 확인한 뒤 유가족에게 통보한다. 1975년 월남전쟁이 끝난 뒤 설립된 미 육군신원감식소는 그동안 태평양전쟁이나 월남전에 희생된 유해를 정밀하게 분석,신원파악을 해와 이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미군 관계자들은 이번의 경우 전쟁이 일어난지 40년이나 지나 유해만 가지고 신원파악이 어려운 데다 설령 신원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유족을 찾는 작업이 더 어려워 이들의 대부분이 무명용사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37개월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은 8천1백77명의 실종자이외에 3만3천6백29명의 사망자와 10만3천2백84명의 부상자를 내고 3백89명의 돌아오지 않는 포로를 내었다. 미국이 무명용사의유해반환을 위해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이나 베트남·북한과 공개접촉 혹은 비밀접촉을 하는등 끝까지 송환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유족들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인도주의적인 면도 있으나 미국군복을 입고 전사한 장병들의 시신은 끝까지 국가가 신경을 써 응분의 대우를 한다는 것을 보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긍지를 높이려는 의도도 짙다. 북한도 그동안 회피해왔던 미군유해 송환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은 이를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려는 계산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전인철외교부부장이 지난 15일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우리는 미군의 유해를 더 발견하는 경우 유해를 모두 반환할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협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실종·미귀환포로 현황 (유엔군사령부 집계) 국적 실종 미귀환포로 계 한국군 1,647 1,647 미군 8,177 389 8,566 기타참전국 18 197 215 계8,195 2,233 10,428
  • 캄보디아 휴전협정 조인/4대 정파/11년 내전 종식… 새달 발효

    【아라냐프라테트(태국) AP 연합】 캄보디아 친베트남 정권과 이에 대항해온 크메르 루주등 3대 게릴라세력은 휴전협정에 서명했으며 내달 발효될 것이라고 게릴라 고위소식통들이 26일 전했다. 이들 소식통은 4대 정파가 휴전협정서명과 함께 향후 캄보디아를 관장해갈 최고민족평의회구성에도 의견을 모았다고 전함으로써 지난 11년간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려온 내전이 종식될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들은 구체적인 협정내용이 내달 4∼5일 도쿄에서 열릴 예정인 캄보디아 평화협상에서 공개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4대정파가 오는 7월 파리에서 평화정착을 위한 회동을 재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게릴라 세력의 하나인 크메르 인민해방전선(KPLNF)관계자는 휴전협정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면서 『휴전이란 없다』고 강조,전투가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임을 위협하기도 했다. 태국 외교소식통들은 게릴라 세력이 도쿄회담을 앞두고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공세를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 캄보디아 휴전협정 타결 임박/4개파,11년내전 종식 합의

    ◎태 총리 6월4일 도쿄서 평화회담 【방콕 AP AFP 로이터 연합 특약】 캄보디아의 교전당사자인 프놈펜정권 등 4개 파벌은 휴전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 태국 라디오방송이 23일 차티차이 춘하반 태국총리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이 방송은 또 차티차이 춘하반 태국총리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이 방송은 또 차티차이총리가 오는 6월4일부터 이틀간 도쿄에서 캄보디아내전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차티차이 총리는 『4개 파벌이 곧 휴전협정에 서명키로 합의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차티차이총리는 캄보디아휴전협상의 주요 중재자로 활약해 왔다. 휴전협정이 서명될 경우 이는 11년동안 계속돼온 캄보디아 내전을 종식시키는 주요한 첫 정치협정이 될 것으로 분석된다. 이 방송은 차티차이총리가 방콕을 방문중인 구엔 코 탁 베트남외무장관과의 회담뒤에 이같이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구엔 코 탁 베트남외무장관은 22일 캄보디아 내전문제가 「터널의 끝에 이르러 빛이 보이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해 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한 바 있다
  • 통일「예멘공화국」출범/살레 초대대통령취임… 5인평의회 구성

    ◎“국방비가 경제피폐 주인”인식… 이념벽 넘어/81년 협정체결,동서화해무드 타고 급진전 아라비아남단에 위치한 중동유일의 분단국가인 남북예멘이 꾸준한 노력끝에 마침내 22일 통일을 선언,단일국가인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을 수립했다. 통일예멘의 통치기구는 지난 4월 22일 양국정상회담에서 합의된 헌법초안에 따라 앞으로 30개월의 과도기간동안에는 인구비례에 의해 북예멘 3명,남예멘 2명으로 구성된 5인대통령회의가 구성돼 합의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과도기간이 지나면 선거를 통해 행정부수뇌와 입법부를 구성한다. 입법권은 북예멘 국가자문평의회 의원 1백59명과 남예멘 인민의회의원 1백11명에다 대통령회의가 주로 야당인사로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는 임명직 31명의 의원을 합한 3백1명 정원의 통일의회가 행사한다. 대통령회의는 양국간 사전 합의에 따라 알리 압둘라 살레 현북예멘대통령을 통일예멘의 새대통령으로,남예멘 집권 사회당 사무총장 알리살렘 알바이드를 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하이데르 아부 바크르 알아타스 현남예멘대통령이 총리에 임명됐다. 헌법초안은 21일과 22일 양국의회에서 통과됐으며 오는 11월 30일 국민투표로 확정되게 된다. 친서방 자본주의 회교국가인 북예멘과 친소 사회주의 세속국가인 남예멘이 급속하게 통일을 이루게 된것은 통일을 향한 꾸준한 노력과 동서화해무드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예멘은 15세기이래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다. 1918년 제1차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영국이 패전국 오스만터키로부터 이 지역을 분리시키면서 북예멘만 독립시키고 남예멘은 「남아라비아연방」에 편입,계속 지배해 왔다. 남예멘지역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중심이 돼 67년 독립했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지 50년만에 남예멘이 독립하자 곧 통일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양국은 같은 민족,같은 언어,같은 종교(수니파 이슬람교)를 갖고 있었지만 이데올로기 차이는 현격했다. 동서대결무드가 고조됐던 79년에는 국경분쟁으로 전쟁도 치렀다. 그러나 이 전쟁도 양국민의 드높은 통일열망으로 한달만에 휴전에 이르렀고 81년에는 통일을 목표로 한 아덴협정이 체결돼 양국통합의 기본원칙이 천명되기에 이르렀다. 81년 11월 북예멘 살레대통령이 남예멘을 방문,통일노력을 본격화시켰고 83년 예멘최고평의회가 구성돼 통일방안을 구체화시켰다. 86년 남예멘에서는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는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득세하기도 했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새로운 평화공존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통일노력이 기울여졌다. 당초 오는 11월 30일로 예정된 통일이 5월 26일로,또 다시 22일로 6개월이나 앞당겨진 것은 외세의 개입,북예멘 북부지역의 시아파 원리주의자와 남예멘 극좌파의 반통일움직임을 조속히 배격해야 한다는 양국지도자들의 공통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밖에도 양국의 정치ㆍ경제사정도 통일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분석된다. 북예멘은 독립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쿠데타도 빈발해 왔다. 아직도 북예멘 사회는 부족중심적이며 중앙정부의 행정이 지방에서 잘 집행되지 않고 있다. 1인당 GNP도 6백50달러,총 GNP57억달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국방비가 5억3천만달러나 이르는 등 경제사정도어렵다. 남예멘도 86년 내전을 겪는 등 정정이 불안하며 총 GNP 10억달러,1인당 GNP 4백30달러에 국방비는 2억달러 수준에 이르고 있어 통합의 필요성이 절실한 형편이다. 더욱이 양국 국경지역에서 8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유전의 공동탐사필요성과 공동탐사경험도 통일에 일조했다. 시바여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예멘땅에 통일이 옛날의 영화를 한꺼번에 가져다주지는 않겠지만 양국은 이미 양국국민의 자유왕래를 보장하고 있고 20일 군통합도 완료한 터라 통일에 큰 어려움은 따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서독통일과 함께 남북예멘의 통일은 동서화해시대를 확인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 “한국전 참전기념비 세우자” 미서 1천만불 모금운동

    ◎부시도 참여… 5백50만불 이미 모아/링컨기념관부근에 93년까지 완공 【워싱턴=김호준특파원】 미국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 만찬이 1일 저녁(미국시간)워싱턴의 옴니 쇼람호텔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및 상ㆍ하의원 40여명을 비롯한 미 정ㆍ재계 고위인사 1천여명과 이 모금행사를 지원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부시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돼 「잊혀진 승리」로 불려지고 있다』고 회고하며 『이 기념비가 세워지면 미국인들은 미국의 용감한 아들 딸들이 침략을 저지하면서 부딪쳤던 자유의 시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대통령은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에 걸쳐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행진은 한국전에서의 자유수호가 그 기초를 놓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1백만달러의 모금을 목표로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왕년의 명코미디언 보브 호프와 여가수 로즈메리 클루니가 여흥을 맡아 한국전 당시를 회고케 했으며 한국전을 배경으로 한 「3일의 약속」이란 소설을 출간,그 판매대금 20만달러를 기념비 건립기금으로 기부한 교포의사 정동규씨도 참석했다.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위원회(위원장 리처드 스틸웰 전주한미군 사령관)는 모금 목표액 1천50만달러 가운데 이날 만찬전까지 총 10만명으로부터 5백50만달러를 모금했다고 밝히고 1만달러이상 기부자 가운데는 포드자동차,크라이슬러사,IBM,두폰,필립 모리스 등 미국굴지의 기업과 현대 포철 대우 등의 미 현지법인들이 포함돼 있다고 공개했다. 위원회는 6ㆍ25동란 발발 40주년을 맞아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리스 등 미국 각지에서 80여건의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라고 설명하고 91년 10월까지 모금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금은 지난 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 의회를 통과한 기념비건립법안에 서명한 뒤부터 착수됐다. 기념비는 휴전협정 40주년 기념일인 오는 93년 7월27일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링컨기념관 부근 2천4백평 부지위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한국의 38선을 상징하는 무장병사 38명의 행군 입상이 중심을 이루며,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병사들의 조상 사이를 걸어서 대형 성조기가 게양된 경배구역에 다다르도록 설계돼 있다.
  • 「경고시간」단축과 안보(사설)

    유럽을 중심무대로 하는 세계적인 화해와 군축의 바람이 드디어 중국과 소련간 국경군감축 협정체결을 계기로 아시아에까지 밀려들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세계를 풍미했던 이념과 전쟁과 혁명은 이제 확연히 그 기세를 잃고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역사는 흐르고 시대는 변한다고 하지만 21세기에는 또 어떤 변화와 추세가 닥쳐 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반도는 어떠한가. 화해와 군축의 산들바람은 저쪽에 멎어 있고 한반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원하는 평화는 정착되지 못한 채 긴장이 흐르고 때로는 전쟁의 그림자마저 어른거리고 있다. 부분적인 대화와 교류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의 첨예한 대립과 군사적 대결은 그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 이같은 전쟁적 요소와 긴장요인이 상존하는 것은 북한이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비평화적 통일전략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해 한반도에는 아직 전쟁의 위협과 위험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한반도 안팎의 여러정세와 분위기요인도 그러하거니와 근본적으로는 세계적인 군축추세에 역행하는 북한의 군비현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이 이 단계에서 주한미군이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전략적 판단아래 휴전선으로부터의 북한남침 경고시간을 종래의 48시간에서 24시간으로 단축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반도 전쟁 가능성에 관한한 그것은 「조기경보체제의 단축」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조치는 다시 말해 북한의 공격가능성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런 점에서 지상의 휴전선을 비롯한 해ㆍ공전역에 걸쳐 상대방 공격에 대한 사전 조기경보체제를 우리 군이 독자ㆍ자율적으로 확보 운영하는 문제는 한미간의 주한미군 감축협상에 있어 가장 큰 전제조건의 하나인 것이다. 미국은 최근 그들의 대 유럽전략과 관련하여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침공에 대한 경고시간을 3개월로 늘린 바 있다. 동서화해와 군축의 상징적 조치임과 아울러 실질적인 평화의지의 공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다르다. 북한의 경우 지상군 93만 가운데 70%가 휴전선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 15∼20마일내의 벙커와 땅굴에서 영구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게다가 멀지 않아 핵폭탄을 제조 보유하리라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한미양국이 동시에 판단했던 대로 한반도의 군사적 정세는 「심각한 위협」을 넘어서는 국면에 이를지 모른다. 「전쟁의 위험」을 정권안보나 체제유지의 한 수단으로 삼았던 때는 지났다. 이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명백하고도 객관적이며 현실적인 전쟁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감축이 현실로 나타남과 거의 같은 시기에 북한이 파놓은 네번째 땅굴이 발견됐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안보의 현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 미 상원군사위 청문회 내용

    ◎작전권 한국이양은 92년께 가능/주한군 10%이상 감축할 땐 위험/유지비부담 13%… 총3억2천만불 미 상원군사위(위원장 샘 넌 의원ㆍ민주ㆍ조지아주)가 19일 부시 행정부의 아태지역 전략평가보고서 제출과 관련,국방부와 국무부의 고위관리 4명을 출석시켜 2시간여동안 개최한 청문회의 주요 질문과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샘 넌 위원장=주한미군과 주일미군에 대한 양국정부의 유지비 부담은. ▲앨런 홈스 대사(국무부 방위비분담 문제담당대사)=한국정부의 부담률은 13%가 조금 넘으며 일본정부의 부담률은 직접비 35%를 포함,41%이다. ­넌=한국의 경제발전에 따라 유지비 부담률이 증대될 전망은. ▲폴 울포위츠 국방차관=한국의 국방비가 지난 10년사이에 3배가 증가했다. 우리는 이에 힘입어 주한미군 감축을 검토할 수 있게 됐다. 체니 국방장관이 지난번 서울방문때 이 문제를 거론했으며 앞으로 협상이 계속될 것이다. ▲홈스=한국은 연합방위증강계획으로 89년 4천5백만달러,90년에 7천만달러를 증액했다. 미군유지비로 90년에 3억2천만달러를부담하고 있으며 유지비증액과 유지비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는 것 등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넌=주한미군과 주일미군에 대한 양국정부의 유지비 부담률 인상목표는. ▲홈스=우리는 목표를 설정해서 협상중이다. 공개석상에서 말하기는 어렵다. ­존 워너 의원(공ㆍ버지니아주)=지난 51∼52년의 한국전때 유엔군과 함께 전투한 한국군은 가장 훌륭한 군대였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군이 왜 주도적인 방위역할을 맡지 못하는가. ▲울포위츠=북한은 40년전 에치슨 국무장관의 발언을 오판,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이 한국방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내놓으면 북한이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 ­워너=그렇다면 주한미군 감축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위험성은. ▲울포위츠=10%정도의 감군은 괜찮다고 본다. 그 이상의 감축은 현재로서는 북한에 위험한 신호를 보내게 될지 모른다. ­워너=북한 지도층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주한미군감축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윌리엄 펜들리 해군소장(미태평양사령부 기획국장)=김일성이 많은 일상업무를 김정일에게 넘겨주고 있다. 남북대화의 진전이 미군감축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존 매케인 의원(공ㆍ애리조나주)=유엔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군사체계를 만들어 지휘권을 한국 장성에게 넘기는 시나리오를 검토하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펜들리=지휘체계가 어느 정도 조정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휴전이 유엔사에 의해 성립돼 존속되고 있으며 북한의 위협이 크다는 점이다. ­티모디 워스 의원(민ㆍ콜로라도주)=팀 스피리트 훈련때 소련을 참관단으로 초청하지 않은 이유는. ▲울포위츠=한국과 소련의 수교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칼 레빈 의원(민ㆍ미시간주)=작전지휘권의 한국군 이양과 한국정부의 미군 유지비 증액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칼 포드 부차관보(국방부 국제안보국 동아태국)=조만간에 한국군의 주도적 역할이 시작될 것으로 본다. 평시에는 한국장성이 지휘권을 갖게 될 것이다. ­레빈=언제쯤 이루어질 것인가. ▲포드=체니 장관이 한국방문에서 거론한데 따라 논의중인데 우리는 1단계중인 92년경에지휘권의 조정이 있기를 원한다. ­레빈=앞으로 왜 2년이 더 필요한가. ▲포드=한국에는 미군의 존재,그리고 미군장성의 지휘가 북한의 침략저지에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종종 작전지휘권의 이양문제가 제기됐지만 안전하게 이양되려면 2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레빈=FA­18전투기 1백20대를 확보하는 한국의 차세대전투기 구매계획(KFP)은 일본의 전투기개발계획인 「FSX의 아들」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 계획으로 한국이 항공산업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데…. ▲울포위츠=공동생산이기 때문에 FSX와는 달리 새로운 기술이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워스=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이유는. ▲울포위츠=북한과 같이 조그만 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할 이유는 결코 없다고 본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 가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 북한,군사력 급속증강/유사시 미군증파ㆍ사전경고 긴요

    ◎펜타곤보고서 지적 【워싱턴 연합】 미국과 유럽의 나토회원국들은 재래식 군사력 감축협정이 체결되면 단거리 핵무기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소련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국방부의 한 보고서가 18일 밝혔다. 미국방부가 이날 공개한 「90년도 공동군사력 순평가」에 관한 보고서는 설사 소련이 현시점에서 바르샤바 동맹국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치더라도 미군을 비롯,나토회원국 군대는 재래식 전쟁에서 소련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한반도에 관해,대화의 조짐이 있었으나 대결관계가 변화하려는 시사는 없었다고 지적하고 북한은 최근 몇년동안에 군사력을 증강해 왔으나 적절한 사전경고와 늦지않는 미군의 증파가 있다면 한국군은 북한의 공격시 성공적으로 방어하거나 현재의 휴전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보고서는 또한 미국은 한국의 꾸준한 방위력 발전과 한국군의 역할증대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 엘살바도르 내전종식 합의/정부ㆍ반군대표,유엔중재 7개항 수락

    ◎좌익반군 합법단체 인정ㆍ민주화 추진/유엔감독아래 평화협정 체결키로 【제네바로이터AFP연합】 엘살바도르정부와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좌익 게릴라들은 4일 제네바에서 6개월만에 처음으로 회의를 갖고 유엔감독하에 평화를 정착시키로 합의했다.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사무총장은 이날 오스카 데 소토 엘살바도르법무장관과 샤피크 핸달 FMLN사령관을 단장으로 한 양측의 대표단과 각각 별도의 회담을 가진 뒤 거행된 공동기념식에서 양측이 중미평화를 위해 자신이 제안한 7개항의 서류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날 양측이 서명한 서류는 ▲FMLN의 합법적인 정치기구화 ▲민주화추진▲인권존중▲엘살바도르 사회의 통합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서류는 양측이 우선 정치적 협정을 통해 무장충돌을 중단하고 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법을 철폐하며 일단 휴전이 성립된 뒤에는 FMLN을 합법적인 정치기구화하고 게릴라들을 일반 시민들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 미군철수땐 한반도 군비경쟁 촉발

    주한미군 감축을 포함한 아시아지역에서의 군축과 주한미군의 감축이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한 한미 의회의 공청회및 청문회가 13,14일 비슷한 시기에 열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드세이 앤더슨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가 13일 미하원 외무위 아태소위(위원장 스티븐 솔라즈)청문회에 출석,아시아지역 군축의 최우선 대상으로 한반도를 설정해 놓고 있다고 한 발언은 주목을 끌고있다. 한미 두나라 의회주최 공청회와 청문회에서 관계자 7명이 한 증언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 하원 아시아군축 청문회/“북한의 핵개발,한반도 안정「최대의 적」/동북아 미군은 평화보장의 최후보루” ◆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드세이 앤더슨 증언 아시아의 군사ㆍ정치적 현실은 유럽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다르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뚜렷이 구분된 2개의 정치ㆍ군사 동맹과 지역기구 등을 갖고 있다. 반면 아시아는 엄청난 지리적ㆍ문화적ㆍ역사적 차이와 더불어 많은 위협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유럽에서와 같은 다자간 정치ㆍ군사ㆍ경제기구의 구성을 저해하고 있다. 우리는 모스크바의 유럽 외교정책에서 과시된 대담한 「신사고」를 동북아에서는 아직 보지못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군사력 전진배치가 바로 긴장의 요인이며 미군 계속 주둔의 이유가 되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캄보디아 사태가 미해결로 남아있다. 유럽형 군축체제가 아시아전역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미국은 긴장완화 수단으로 이를 선호하고 있다. 미국이 (유럽형 군축 대상으로)아시아 지역에서 첫머리에 올려놓고 있는 곳은 한반도다.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은 대체로 유럽과 비슷하기 때문에 유럽에서 발전된 것과 같은 신뢰구축조치가 유용성을 지닐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한반도에선 유럽처럼 대규모의 재래식 군대가 잘 획정된 전선을 따라 전진배치돼 있어 적대행위가 급속히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긴장완화가 이뤄지면 모든 관계당사자가 서로 득을 보게된다. 우리는 남북관계가 개선될 때만 한반도에 진정한 긴장완화가 있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한국의 긴장완화 노력을 전폭지원하고 평양에 대해 서울과 의미있는 토론에 들어가도록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소련이 북한에 대해 궁극적으로 중요한 군축협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조치의 확립을 위해 합리적 방안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그들의 최선의 이익임을 전달해주기 바라고 있다. ◆군축국장 로널드 레만 증언 우리는 아시아와 관계된 소련의 군축제의에 관심이 없다. 그건 미국에 대해 불평등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 그들 제안은 핵무기 숫자제한,해군및 재래식 군대감축,군사훈련 참가 항공기 숫자 제한,해군훈련참관및 선박 항공기를 위한 안전지대 설정 등의 내용을 담고있다. 소련제안은 미국의 작전 신축성과 전쟁억지력을 제한하고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공약에 회의를 갖게할 수 있다. 소련의 아시아 주둔군 감축은 미국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키지도 못했고 동북아의 군사대결 위험성도 감소시키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한반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소련의 군사력 감축에 걸맞는 조치를 미국ㆍ한국ㆍ일본이 취하는데 있어 북한의 군사력이 얼마나 제약을 가하고있는지를 소련은 깨달아야 한다. 북한의 지속적인 군비증강과 핵및 미사일 개발활동이 이 지역 안정에 최대의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는 평양이 보다 책임있는 태도를 취하도록 소련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국방부 국제안보국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칼 포드 증언 소련은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동북아의 미군은 역내 안정을 위해 균형추로서,브로커로서,안보 보증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90년대에도 동북아의 미군은 대체할 수 없는 「평형바퀴」가 될 것이다. 이 지역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 다른 강대국들이 공백을 메우려 들거나 메우도록 강요받는 사태가 초래돼 역내 군비경쟁과 대결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다. 아시아에서 긴장완화 방안이 채택될 수 있는 유일한 현장이 한반도다. 우리는 남북한간의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가 찾아질수 있다고 확신한다. 비무장지대 양측에 대치하고 있는 군사력은 남북한 협상에 의해 긴장을 완화하고 이해를 증진시킬 어느정도의 수준까지 감축할 수 있다. 우리는 남북한 양측이 이러한 목표를 갖고 진지한 의견교환을 개시하도록 고무하고 있다. ◎국회 외무위 주한미군 공청회/“북한 개방 유도할 국제여건 조성해야/미군감축은 남북 관계개선과 연계를” ◆임동원 외교안보연구원장 주한미군의 감축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군의 주둔기간을 최대한 이용하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이라는 도전을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감축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불안정을 증대시킬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대북 대비태세의 유지와 함께 전력증강을 통한 군사력 균형달성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확대 지향적 군사력 균형달성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기습 남침계획을 버리고 「합리적 충족성」에 의한 방어전략만 유지하도록 축소지향적 군사력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북한변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침체의 심화,남북국력 격차의 확대,김일성의 노쇠화 등으로 현체제의 지속이 어려울 전망이다. 북한의 개방과 변혁을 적극 유도하고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정착을 유도하기 위한 국제적 여건을 조성해나가야 한다. ◆정종욱 서울대교수 주한미군 감축으로 한반도 방위의 주도적 역할이 한국군에게 이양될 경우 한미안보 협력에 대한 북한의 오식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의 경제력이나 과학기술수준에 비추어볼때 2천년대 초기,빠르면 90년대 후반에 자주방위능력이 확보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자주방위능력이 확보된다고 해서 전쟁억지의 기능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중요한 것은 자주방위의 능력보다 전쟁억지에 있다. 이같은 전쟁억지의 기능을 주한미군이 수행해 주고 있다. 주둔 군사력에 못지않게 부대의 위치가 전쟁억지 기능을 위해 중요한 것인 만큼 휴전선 부근에 배치된 미2사단을 후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주한미군의 점진적 부분감축은 남북한 관계개선의 정도와 연계되어 실시돼야 한다. 특히 주한미군의 실질적 감축은 남북한간의 군비통제가 실시되어 보다 구조적인 의미에서 군사력감축이 이루어질때 시작돼야 한다. ◆박영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방위비 분담에 관한 한미 양국간의 이견은 분담계산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한국은 88년에 총 22억1천9백만달러의 주한미군 방위비를 부담했는데 이중 부동산(토지ㆍ시설제공)11억9천만 달러를 포함하는 간접지원비가 19억4천2백만 달러로 전체의 87.5%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직접지원비는 2억7천만달러에 불과하며 이중에서도 국방부에서 미군에 제공한 개인소유분에 대한 대여료 1억7천만달러를 제외하면 실제로 정부예산에 직접 편성해 지원하는 분야는 연간 1억달러 정도이다. 결국 논쟁의 초점은 간접지원비의 방위비부담 포함여부다. 현재 남북한간의 군사력은 주한미군을 포함하여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는 평가를 전제로 한국의 방위비 분담은 한국의 현재 부담수준을 하한선으로 하고 주한미군감축으로 생기는 전력차질을 한국이 보강하는데 드는 비용을 상한선으로 결정,양쪽 범위내에서 조정돼야 할것이다. ◆남주홍 국방대학원교수 미국의 대한 안보공약은 휴전협정체제의 관리와 전쟁억지력의 유지라는 두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이를 감안할때 주한미군의 감축은 미국의 역할이 과거 한국방어라는 주도적 측면에서 지원적 측면으로 변경됐음을 의미한다. 주한미군의 감축에 앞서 한미 양국간에 작전통제권 문제에 대한 재정립이 선행돼야 한다. 즉 미군감축시 작전통제권은 평시의 경우 한국군의 지휘통제에 두고 전시에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도록 하는등 작전권의 단계적 인수방안이 검토돼야 한다. 이와함께 건전한 한미안보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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