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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협상 원칙 고수하라/구본영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초록색 커버를 씌운 탁자는 또 하나의 전투장이었으며,혀는 무기였다』 유엔군 대표로 한국전 휴전회담에 나갔던 C 터너 조이 제독이 남긴 말이다.그는 회고록에서 억지와 식언을 밥먹듯 하는 북한측의 협상술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북한은 쌀지원과 관련한 최근 일련의 남북접촉에서도 특유의 협상술을 유감없이 보여줬다.한 선원이 청진항 풍경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우리측 쌀수송선과 선원 21명을 억류했다가 1차 합의한 쌀 잔여분의 인도를 약속받고 선심쓰듯 풀어준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청진항은 군항도 아니다.또 그 정도는 과거 서울에서의 고위급회담등에서 북한측의 「사진촬영」에 견주더라도 「정탐행위」라고 시비를 걸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더욱이 북측은 억류사태 이후 북경의 송환협상에서도 우리측 당국자를 철저히 따돌렸다.공식당국도 아닌 삼천리총회사와 대한무역진흥공사 채널의 가동에만 응했다는 것이다. 우리측의 선의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북측에 의해 깡그리 짓밟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냉전 이후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새삼스러운 대북 봉쇄정책 회귀는 실효가 없다는 게 통일원등 대북정책부서의 시각인 듯하다.한 당국자는 14일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은 북한당국자들을 너무 코너로 모는 것은 자칫 동반자살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며 이를 대변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개입정책 내지 개방유도 정책이 불가피하더라도 지켜야할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정부는 북경 쌀회담을 시작할 때 당초 구도대로 당국간 회담이라는 원칙을 고수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조선 삼천리총회사나 대외경제협력추진위라는 어정쩡한 「단체」를 상대해주는등 원칙없는 양보를 해 북한의 협상태도를 더욱 방자하게 만든게 아닌지 자성해볼 일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찬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라는 이솝우화의 교훈은 북한을 「다루는데」 적용해도 원론적으로는 큰 무리가 없을 성 싶다.그러나 그 나그네가 심사가 뒤틀린 고약한 인사라면 햇볕만으론 곤란할지도 모른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민주당/내분 수습이냐/제2분당이냐/KT계­구당파 이번주 본격협상

    ◎「총재 연말퇴진」 여부가 핫이슈/반 「이」 재야연합 카드는 힘들듯 당수습방안을 둘러싼 민주당 이기택 총재와 구당파간의 내분이 이번주 최대고비를 맞을 전망이어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3김시대」청산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하느냐,제2의 분당사태로 지리멸렬하느냐의 갈림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총재의 퇴진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은 여전하다.구당파측은 『이총재 밑에서는 당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되뇌고 있고 이총재는 『민주당을 김대중씨에게 바치자는 소리』라고 맞서고 있다.그러나 양측은 그동안의 「휴전기간」을 거치면서 상당히 거리를 좁혀 왔다.이총재가 12일 전당대회를 연내에 두차례 실시하는 방안을 들고 나온 것도 변화된 기류를 말해준다. 이총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일단 예정대로 8월전당대회를 치른 뒤 외부인사 영입등 당체제 정비작업을 거쳐 연말에 총재경선을 포함하는 전당대회를 다시 열자고 구당파에 제안했다.『8월 전당대회이후에는 나는 자유스러운 몸』『당대표로서의 5년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대권에 도전하더라도 당직은 졸업할 때도 됐다』며 연말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지 않을 뜻도 있음을 내비쳤다.구당파의 구미를 당기는 제안임에는 틀림없다.구당파 내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인사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구당파는 12일 모임에서 일단 이총재의 제안을 거부했다.한마디로 『이총재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제정외의원은 『연말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못박은 게 아니지 않느냐』며 이총재의 제안을 당권강화를 위한 「시간벌기용」으로 풀이했다.구당파측은 하지만 이총재가 연말 전당대회에서 불출마하겠다는 보장만 있다면 당장의 이총재체제는 수용할 수도 있다는 내부방침도 세워두고 있다.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던 자세에서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주부터 본격화될 양측의 협상에서는 이총재의 연말퇴진여부가 최대 쟁점이 될 전망이다.구당파측은 이와 관련해 「집단탈당­신당창당」의 시나리오를 「압박카드」로 활용하고 있다.이총재가 끝내 당권을 고집할 때는시민단체와 재야인사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시민연합」(정개련)과의 창당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구당파의 일부 인사들이 정개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그러나 정개련과의 제휴는 자금과 조직력의 열세로 총선에서의 성과가 불투명하다는 점이 구당파들의 고민이다.이총재 역시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쉽사리 구당파의 요구에 응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 휴정협정 서명(6·25 내막/모스크바 새 증언:30)

    ◎중국,휴전 앞두고 “마지막 진격” 주장/소선 “미군 상륙작전 감행 두렵다” 반대/해리슨 중장­남일,7월27일 역사적 조인 중국당국은 스탈린앞으로 휴전협상 진행에 관한 상세한 현황보고를 하면서 그에 덧붙여 협상대책까지 건의했다.즉 협상속도를 싸고 미국과 이승만정부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앞으로 미국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승만에게 더 큰 압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에 휴전성사 가능성은 높다는 게 중국당국의 기본 시각이었다.53년 7월3일자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이 모스크바에 보고한 전문에 나타난 중국의 협상대책은 다음과 같다.(N17286) ○“미­이승만 불화 조장을” 『이같은 상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는 바임.이는 휴전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미·이승만간의 불화를 더 조장하고,미국의 내외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정권에 더 많은 압력을 행사토록 하기 위함임. (1)7월5일자로 클라크앞으로 김일성·팽덕회동지의 답신을 보낼 것.협상재개에 앞서 미국의 입장을 비난하고 앞으로 미국의 유화정책이다시 바뀔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것. (2)휴전협정 서명 전 작전을 전개해 이승만 괴뢰군에게 일격을 가할 것.이는 전선을 조금이라도 더 남쪽으로 내려보내기 위함임.그뒤 휴전협상이 재개되면 이승만정권의 잘못으로 협정체결이 지연됐다고 비난할 것.그리고 상황이 바뀌었으니 휴전개시점을 재조정하자고 요구할 것.미국도 이 요구에 응할 것임.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이정권과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임.반대로 상대가 양보 대신 새로운 선전차원의 술책을 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음.그럴 경우에는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택해 양보하고 현전선에서 휴전하는 데 동의할 것. ○“최후가지 투쟁은 엄포” …중략…휴전협정체결은 7월15일에 해야한다고 생각함.중국대표단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추가로 밝힐 것.즉,중국정부는 최근 이승만정권의 잦은 도발이 한편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용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함.이런 이유로 이승만은 미국과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고집하고 있음.이는 만약 미국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전병력이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말하나 우리는 이것이 엄포라고 생각함. 중국정부는 미국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함.미국은 이에게 대규모 지원을 할 경우 그가 심각한 모험을 전개해 미국을 끌어들이려할 것을 우려함.미국은 극동지역에서 더이상 대규모 모험에 끌려들려 하지 않고있음. 앞으로 개최될 정치협상 대책에서도 미·이승만간 이견이 있음.이는 이 정치협상 대신 북한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중·조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하려고 함.위 상황을 종합할 때 중국정부는 휴전협정 조인이 평화에 유익하다고 판단함. 당시 중국외무차관은 이 말을 듣고 농담조로 「중국과 미국이 이승만에 반대해 공동전선을 펴고있다」고 말했음.그는 또한 중국정부는 이가 소규모 발악적인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심각한 도발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음』 한편 소련측은 휴전협정 서명을 눈앞에 두고 공산군측 서명당사자의 인선에까지 일일이 간섭했다.유엔군 대표단의 김일성직접서명 요구에 절대 응하지 말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남한정부가 김일성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53년 7월2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는 김일성의 서명식 참석여부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해 직접 김일성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의안 NP19/9) 『김일성을 위시한 조선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함.소련공산당 중앙위는 판문점 휴전협정서명에 북조선대표로 부수상 1명이,중국대표로는 팽덕회동지가 참석할 것을 권고함.누가 참석할지 여부의 결정은 전적으로 중·조 정부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절대 미국의 압력에 이끌려가서는 안됨. 현상황에서 김일성의 판문점 여행은 위험부담이 큼.이승만 진영이 김일성에게 어떤 종류의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미국의 김일성 참석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휴전협정일정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임.팽덕회장군이 참석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임.만약 미국이 김의 불참을 이유로 협정서명을 거부한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임』 ○김일성 위해 우려 이유 북한측 대표는 이렇게 해서 부수상 남일로 결정됐다.53년 7월27일 남일은 유엔군 대표인 해리슨중장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되기 불과 하루 전인 53년 7월26일 북경주재 소련대사는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이 휴전협상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모스크바에서 7월3일자로 보낸 중국정부의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답신이었다.(N8019) 『본인은 모택동에게 소련정부가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중국정부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이제 한국에서 적대행위를 끝낼 시기가 됐다는데 상호동의한다고 말했음.적도 군사적 이유로 전쟁을 계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말했음.모택동은 이와 관련,깊은 사의를 소련정부에 보낸다고 말했음.그러면서 모는 적이 군사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도 휴전협정체결에 동의했다고 말했음. 군사적으로 볼때 적은 지난해동안 지상에서 진격은 물론 전선사수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모는 말했음.반면 중국군은 현위치 사수는 물론 진격작전 수행에도 자신을 가졌다고 했음.정치적인 면에서는 적들이 제국주의 진영내 내분을 겪고있고 전세계 여론이 전쟁에 반대하고있기 때문에 휴전에 동의한 것으로 모택동은 설명했음.경제적으로도 제국주의진영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모는 말했음.즉 전쟁초기 2년간 미국의 독점 군수업체들이 엄청난 수입을 올렸지만 이후 휴전협상이 시작되고 반전여론이 강화되면서 이들의 수익이 격감했다는 것임』 이 보고서 내용중 흥미있는 것은 모택동이 순수 군사적인 면에서 볼때 적이 수세에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을 1년 정도 더 계속해 한강주변에 보다 많은 전략거점을 확보하는게 협상에 유리하다고 주장한 점이다.반면 이 보고서를 보낸 중국 주재 소련대사는 남쪽으로의 추가진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덧붙였다.추가 진격을 감행할 경우 동서 해안에까지 전력을 배치해야하는데,그러면 중·조군 후방에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후복구 소도움 요청 이렇게 해서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됐다.휴전이 성사되자 김일성은 즉각 전후복구작업에 들어갔다.김일성은 전후복구 역시 소련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협정조인 며칠 뒤인 8월5일 김일성은 소련지도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친서전문을 보냈다.(N2060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후 복구·건설계획과 관련 소련 전문가 여단을 초빙키로 결정했음.이들이 조선의 기간 산업체들의 복구,건설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주기를 원함』 이틀 뒤인 8월7일 평양주재 소련대사는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했다.(N20779) 『우리는 소련 전문가들에게 조선의 복구계획을 짜면서 가장 긴급한 문제부터 시작하되 가능한한 조선국내의 자원을 활용토록 지시했음.…중략…그러나 이미 입안된 계획을 보니 조선내부 자원활용에 큰 역점이 주어져있지 않고 대신 소련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주의국가들로부터의 원조를 극대화하는 데 주관심을 두고있음. ○김일성 다시 모스크바로 또한 경제복구계획의 주안점이 경공업·농업부문 대신 중공업 분야에 주어져있음.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북조선 정부는 정부부처에서 우리 전문가들을 활용치 않고 대신 산업체에다 이들의 파견수자를 늘리고있음.이런 제문제를 협의키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이같은 소련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53년 9월초 전후복구문제를 협의키 위해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다. ◎연재를 마치면서/관련문서 계속 발굴… 속편 준비 이번 30회를 끝으로 「모스크바 새증언」 연재를 일단 마무리합니다.이번 시리즈는 주로 6·25를 둘러싼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인의 행적,협조관계등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밖에도 전쟁기간중 중·소·북한 정권 내부의 주요정책 결정과정등 밝혀져야할 「연결고리」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게 사실입니다.앞으로 관련문서를 더 찾아내 추가집필의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쌀 북송선 억류」를 보고/김학준 단국대 이사장(기고)

    ◎항구외양 찍은게 어떻게 정탐인가/북 강경파 「입지 강화용」 가능성 높아/인질외교 펼쳐 추가양보 얻을 속셈/이번 「폭거」 교훈삼아 남북관계 정관하는 자세 필요 북한이 우리 선박 삼선비너스호와 그 선원들을 억류했다는 통일원의 공식 발표는 우리 국민 모두를 분노하게 만든다.그 배가 어떤 배인가? 북한에 쌀을 무상으로 주기 위해 청진항에 입항한 배가 아닌가? 다른 배라고 해도 분노하게 마련인데,바로 북한의 식량난을 풀어주기 위해 쌀을 싣고 들어간 배를,그리고 그 배의 선원들을 억류했다고 하니,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북한의 설명으로는 삼선비너스호의 항해사 이양천씨가 항구 사진을 찍은 것이 북한에 대한 「정탐행위」라는 것인데,이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보통 카메라로,그것도 배에서 항구의 외양을 찍은 것이 어떻게 「정탐행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남북회담이 있을 때마다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들이나 기자들은 서울을 수없이 찍어갔다.그렇다면 그들 역시 한국을 상대로 「정탐행위」를했었단 말인가. 설령 이항해사의 사진 촬영행위가 북한 당국의 비위에 맞지 않았다고 하자.그렇다면 필름을,또는 백보를 양보해 문제의 카메라를 압수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박과 21명의 선원 전원을 억류하는 속셈은 무엇인가? 그뿐 아니다.이 일을 구실삼아 8월10일에 베이징(북경)에서 열릴 예정이던 3차 회담을 연기했는데 그 속셈은 무엇인가? 첫째 북한 내부의 강경파가 저지른 소행일 수 있다.북한의 교조주의자들은 남북 사이에 쌀교섭이 진행되던 때에 이미 『다른 나라로부터 쌀을 얻어먹어서는 나라의 자립이 흔들린다』는 방송을 내보내면서 남쪽으로부터 쌀을 원조받는 것에 대해 반발했었다. 사실 주체를 내세우는 북한이 다른 나라로부터,더구나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고 경멸해 온 남한으로부터 쌀을 원조받는 것에 대해 북한 내부에서는 이론 투쟁이 심각하게 벌어졌을 것이며,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자신들이 배급받은 쌀이 「조선 인민의 철천지 원쑤」라는 일본으로부터 왔고,또 「아이들이 깡통차고 다니는 곳」이라는 남한으로부터 온 것임을 북한 주민들이 깨닫게 될 때,북한 주민들의 의식구조에 동요가 발생할 것임을 북한의 통치자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쌀 수송선 자체를 억류해 남북사이에 더이상 쌀 교류가 없게끔 만들고자 획책한 것일 수 있다. 둘째,국제적 예양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일이지만,북한 나름으로는 자신의 체면을 세워보겠다는 속셈에서 취한 대응 방식일 수 있다.『우리가 비록 너희에게 얻어먹기는 얻어먹어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겠다는 뜻에서 무례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풀이이다. 셋째,인질 외교의 전술일 수 있다.남한 내부에서 『북한에 대해 더 이상 무상으로 쌀을 줄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거세지는 것을 보고,문제의 삼선비너스호와 선원을 억류해 인질로 삼은뒤 한국정부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는 전술을 쓰고 있다는 판단도 든다. 이 점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남북 쌀회담의 북쪽 대표인 전금철이 우리에게 보낸 설명문에서 『쌀지원을 변함없이 추진시켜 나갈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사실이다.이것은 북한이 여전히 우리로부터 쌀을 무상으로 지원받고 싶어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넷째,8월15일에 발표될 것으로 보도된 김영삼대통령의 「획기적 대북제의」에 미리 찬물을 끼얹으려는 속셈도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한국정부가 현행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조처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자,북한으로서는 그러한 제의 자체를 사전에 봉쇄 또는 약화시키기 위해 쌀 수송선 억류라는 강수를 놓았다는 풀이이다. 북한의 속셈이 그 무엇이든,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은 남북관계의 개선에 큰 마음이 없다는 사실이다.우리로부터는 급할 때 공짜로 얻을 것이 있으면 얻어나가면 그만이고,그럴 일이 없으면 남북관계를 그대로 교착시켜 놓겠다는 뜻이 분명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은 폭거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볼 때,우리도 남북관계에 신중히 대처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 옳겠다.더 이상 북한에 대해 유화적이거나 타협적으로 비치는 조처는 취하지 말고,오히려 북한이 우리를 다급히 찾을 때까지 정관하는 것이슬기롭겠다. 그러나 우선 삼선비너스호와 선원 전원은 반드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우성호와 선원 전원의 무사 귀환도 거듭 요구해 반드시 실현시켜야 한다.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남북 교류라면 국민들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 6·25 내막/모스크바 새 증언/총평/박명림 정박·고려대 강사

    ◎한국전 진실규명 새 지평 열었다/남북화해 위한 올바른 역사교육 토대 구축 이번에 서울신문에 공개된 한국전쟁관련 옛소련 문서들은 우리에게 많은 새 사실들을 알려줬다.역사란 후대에 항상 더 많은 새로움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위한 가르침을 주는 것인지 모른다.우리는 앞선 시대의 역사로부터 항상 새롭게 배울 수밖에 없다.이번 자료에서 밝혀진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그중 핵심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전쟁의 결정과 관련,스탈린과 김일성의 49년3월7일 대화내용이다.우선 3월5일의 회담(이 내용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에 이어 3월7일에 두번째의 회담이 있었음이 처음 공개됐다.이는 이번 문서가 발굴한 내용중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다.전쟁전 스탈린과 김일성이 전쟁 개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내용중 최초의 것이고 그 공개 역시 최초다. 또한 50년3월30일∼4월25일 김일성의 소련 방문시의 세차례의 회담 사실과 대담 내용도 처음으로 공개됐다.여기에서는 전쟁을 위한 3단계 극비작전(병력 이동­평화통일 제안­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기습공격작전)이 스탈린의 제안이었음도 밝혀져 있다.김일성이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내용도 밝혀져 있다. 전쟁 결정과정에서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자간의 구체적 교섭내용과 과정 역시 지금까지의 어떤 자료보다도 상세하게 밝혀졌다.이 과정에서 스탈린이 모택동과 김일성을 분리지배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하고 있음도 밝혀졌다.전쟁의 최종순간인 50년6월까지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일일이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동의를 구한 점도 처음으로 밝혀졌다.6월15일 전쟁의 최종작전계획이 확정됐다는 점도 흥미롭다.물론 작전내용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말했던 그대로다.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이며 앞으로 추가적인 자료발굴과 많은 해석이 뒤따라야 할 사실들이다. 둘째,전쟁의 전개와 종료과정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이다.여기에서 밝혀진 새 사실들은 너무도 많다.그중 중요한 것만 간추리면 전쟁의 실제 진행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소련군사고문단이 한 역할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는 점,스탈린은전쟁의 중요한 결정에 모두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스탈린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미리 인지했다는 점,중국군 참전에 대해 스탈린이 더 적극적으로 모택동에게 권고했다는 점,모택동이 처음에는 파병을 꺼려 심각하게 고민하였다는 점,소련이 북한을 포기하고 평양정권을 망명시키려 계획했었다는 점,한국전쟁에서의 스탈린과 모택동의 갈등이 자주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이 결국은 훗날의 중·소갈등의 뿌리가 됐다는 점,휴전회담 직전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비밀리에 다시 방문했다는 점,휴전의사를 모택동이 먼저 갖고 있었고 제기했다는 점,스탈린은 미국과의 대결을 의식해 모택동과 김일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전쟁 계속을 주장하고 추진한 반면 모택동과 김일성은 휴전을 원했다는 점,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주도권이 상당부분 모택동에게로 넘어가기도 했다는 점,평양은 휴전협상과정에서 내용적으로 사실상 배제됐었다는 점,전쟁의 끝까지도 스탈린과 모택동은 긴장관계를 지속했다는 점,결국 스탈린의 죽음으로 전쟁의 종결이 가능했다는 점 등이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상세히 공개된 내용들이다.이 모든 사실들은 앞으로 한국전쟁은 물론 냉전과 20세기 세계사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논점을 제공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재발굴,재해석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모처럼 조성된 남북화해의 분위기를 해칠지도 모르는데 왜 과거의 사태를 되불러오느냐고 묻는다.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모든 역사적 사건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도로 진실에 근접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세가지 점에서 특히 더 그러하다.첫째,역사적 사건이 남긴 상처의 치유와 화해는 진실의 최종적 규명 뒤에 가능하다는 점이다.우리는 이미 광주문제를 둘러싼 공방을 지켜보면서 역사적 진실의 규명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에는 시효가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민주화 이후 시기에 권위주의 시기의 비민주적 사태에 대해 용서와 화해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은폐해서는 안된다.그것은 전쟁과 남북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우리는 통일을 위해,그리고 통일 이후까지도공존하고 화해해야 하지만 그것이 허위의 진실 위에 구축돼서는 안된다.진실의 규명없이는 갈등은 항상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둘째,진실의 규명은 또 역사적 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하다.우리가 앞선 시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후세에 대한 바른 교육은 필수적이다.앞선 시기의 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이것을 객관적으로 규명해 후세에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세대의 몫이며 역사발전에 필수적이다.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오늘을 위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듯이 우리의 후세는 오늘의 우리의 문제와 고민을 제대로 알아야 그로부터 가려 배워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진실의 은폐는 오늘의 죄악만이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도 죄악이다. 셋째,그것은 또 현실의 정책결정과 판단을 위해서도 중요한 지침을 준다.과거의 선례에 대한 진지한 학습없이 올바른 정책결정은 어렵다.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의 시행착오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분단 초기 시기와 전쟁에 대한 이해없이는 오늘의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북한의 정책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이 전부 번역되어 재구성되면 그것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 사태였던 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히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이를 위해 정부·학자·언론의 공동노력이 필요할 때다.특히 정부가 미국과 러시아·중국및 일본을 포함하여 우리의 근대사및 현대사와 관련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됐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말한 바 있다.이것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역사와 권력의 본질을 지적한 것이다.우리는 과거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그리고 그러한 과거 이해의 지평 위에서 오늘을 위해 가려 배울 수 있는 지침을 얻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 크로아,세계 공격 재개/「보」국경 세계탈출로 집중포격

    ◎휴정협정 서명 수시간뒤 깨져/보스니아 세계,크로아 5개지역 공습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장병과 난민 약 8만명을 인근 보스니아로 소개하는 내용의 유엔 휴전협정이 체결,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간의 전투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고 유엔 관계자들이 7일 밝혔다. 유엔의 한 관계자는 이날 『크로아티아당국이 이날 상오11시30분(한국시간 하오4시30분)쯤 세르비아계의 속임수를 이유로 들어 휴전협정을 폐기한다고 통보한 뒤 즉각공세를 재개했다』고 말했다. 휴전협정이 깨지고 난 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가 유엔군에게 무기를 인도하고 보스니아로 넘어가는 지역의 하나인 토푸스코는 크로아티아군의 격렬한 포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전투기들은 전날 쿠티나의 석유화학공장을 공습한데 이어 이날 다시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영토에 있는 반야 루카를 이륙한 뒤 노브스카·쿠티나·주판야·포제가·비로비티카 등 5개 지역을 공습하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이에 앞서 유엔의 한 관계자는 이날 크로아티아군이 크라이나지역에서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와 함께 유엔이 주선한 휴전안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날 상오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인 크라이나공화국 및 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계의 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휴전안에 서명했다』고 밝히고 세르비아계는 이 협정에 근거하여 크로아티아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평화유지군에게 중화기를 양도하게 된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의 프란요 투지만대통령을 비롯한 크로아티정부 관리들은 이날 『「크라이나」라는 세르비아계 지역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크닌의 탈환은 향후 수세기동안 크로아티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유고 개입­내전 확대 “갈림길”/크로아의 크라이나 장악이후/세계,대 비세계 대결 구도면 전면전 크로아티아 영토의 3분의1에 달했던 세르비아반군 거점지역의 대부분이 불과 며칠 사이에 크로아티아 정부군에 의해 함락됨에 따라 실지회복을 위한 신유고연방의 개입과 전면전으로의 확산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다급해진 신유고연방은 크로아티아내의 유일한 세르비아계 거점으로 남아 있는 동부 슬라보니아로 일단 미사일 발사대와 병력을 실은 트럭 수십대를 보낸 것으로 전해져 이미 개입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일단 크로아티아의 공격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적극개입 의사는 밝히지 않고 있다.보스니아내전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라는 서방측의 요구에 대해 내전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극 중재를 회피해왔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내전에도 대대적으로 직접 개입하기에는 국제사회의 비난 등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처지다.따라서 무기지원 등 소극적인 간접지원에 그칠 공산이 적지 않다.그럴 경우 뚜렷한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는 지루한 내전의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의 정치지도자인 라도반 카라지치가 라트코 믈라디치 군사령관을 전격 해임함으로써 빚어진 양자간의 권력투쟁은 세르비아계의 일사불란한 행동통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유고연방측으로서도 크로아티아내에서 세르비아계가 설 땅을 잃어버린 현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강경파들의 적극개입 요구도 갈수록 거세질 전망이어서 구유고내 세르비아계와 비세르비아계간의 전면전 양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미국은 보스니아 회교정부군과 합동작전으로 전개된 크로아티아의 이번 공세가 보스니아 평화협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낙관적인 반응을 보인다.승승장구하던 세르비아계의 위세를 누그러뜨림으로써 세력균형을 이뤄 평화협상의 길을 열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섞인 시각이다.그러나 그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 모기와 군복(외언내언)

    모기침은 얼마만한 위력을 가진 것일까.학계에서 「양성 3일열 말라리아 매개모기」로 부르는 중국얼룩날개모기는 몸집이 뇌염모기보다 크지만 몸길이가 6㎜이고 이중 머리에서 침끝 길이는 2.5㎜에 불과하다.머리카락 같은 모기침은 한쌍 곁눈(복안)옆 더듬이보다 약간 길고 양옆에 수염을 달고 있다. 이것이 바로 대롱모양의 모기 입이라고 한다.끝에는 칼날같이 뚫는 기능이 있고 뱃속에서 타액을 내뱉으며 효소를 작동시켜 흡혈할 때 피를 엉기지않게 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이 대롱모양입을 침놓듯 내리꽂고 흡혈하는 시간은 30초에서 1분간.이 순간 흡혈량은 2㎣.배가 가득차서 무거워 날기 어려울 정도가 돼야 더 달려들지 않고 쉬러 간다고 한다. 국립보건원은 말라리아 방역을 위해 군인들에게 모기침이 들어가지 않는 특수군복을 지급할 것과 전방막사에 2중망창을 하고 저녁이후 새벽까지 야외근무 장병에게 모기 기피제를 지급할 것을 긴급 건의했다.보건원이 그간 말라리아 발병환자를 정밀 조사한 결과 지난해와 올해 발병자 모두 휴전선에서 근무한군인들이고 민간인도 전방에서 감염된 것이 거듭 확인된데 따른 것이다. 보건원관계자는 말라리아가 후방에까지 전파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인근 지역 모기박멸도 있어야 하지만 군인들이 물리지 않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장병들이 제대후 발병하지 않게 하는 것도 방역의 필수지만 국내 헌혈의 상당부분을 이들 젊은 층이 담당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인근 미군부대에는 모기침이 뚫을수 없는 굉장히 조밀하게 직조된 군복과 긴 소매에 방충제를 바른 특수군복이 지급되어 있고 막사에도 2중망창 시설이 되어있다는 점을 든다.모기는 색맹이지만 밝은 옷보다 짙고 어두운 색을 더 좋아한다.모기는 살충제를 바른 옷도 용케 감지하고 피한다고 한다. 군복제조에 모기방어까지 고려한 미군들의 장병보호 전략을 늦었지만 바로 본받아야 할 것이다.
  • 스탈린 사망이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29)

    ◎소 새정권 주도로 휴전협상 급피치/소,“북한측 협상대표 남일 교체하지 말라” 지시/김일성엔 신변위험 들어 조인식장 불참 요청 스탈린사망과 함께 휴전협상은 소련 주도하에 급피치를 올렸다.흥미있는 것은 스탈린 사후 긴급히 채택된 소련공산당 및 내각의 결의안이 보여주듯 휴전협상 초기 모택동이 한동안 전권을 행사하는 듯 하다가 종전시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소련이 모든 결정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앞회에 소개한 소련내각의 결정문은 조기휴전 방침과 함께 중국·북한당국이 취할 세부조치사항에 대해서도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첫째,클라크장군에 대한 답변에 관해,김일성과 팽덕회동지는 클라크장군에게 답신을 낼 때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에 대한 그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양측 대표간 판문점 휴전회담의 재개를 제의할 것.부상포로 및 환자교환문제의 타결은 포로문제 전체의 해결을 뜻하며 나아가 군사행동 중지 및 휴전협정 체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임. 둘째,북경 성명에 관해,중국당국은 이 성명에서 북조선당국과클라크장군의 제의에 대해 협의,전적으로 지지키로 합의했다고 밝힐 것.아울러 판문점 자국 대표들에게 클라크장군과 협상을 시작하라고 지시할 것』 ○중·북한 취할자세 지시 기본적으로 소련 각료회의 결정문은 한국전의 즉각적인 종결의지와 함께 한국전과 관련,소련·중국·북한 3국의 유대를 다시 한번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3월 25일소련의 몰로토프는 김일성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내 북한에 억류돼 있는 프랑스인 14명을 조속히 석방해주라고 요청했다.소련이 종전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섰는 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전문번호N6352) 『3월 21일 프랑스 정부가 소련정부앞으로 북조선에 억류돼 있는 프랑스인 14명의 석방을 위해 힘써줄 것을 요청해왔음.…중략…우리는 현상황에서 프랑스정부의 이런 요청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게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전쟁종결을 가장 기뻐한 사람중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바로 김일성이었다.사실상 거의 모든 힘이 소진된 채 마지못해 전쟁에 끌려가던 김은 소련대표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듯고 뛸듯이 반가워 했다. 김은3월 29일아침 소련특사인 쿠즈네초프,페도렝코 두 사람으로부터 소련의 전쟁종결 방침을 전해들었다.두 사람은 모스크바로 보낸 보고전문에서 김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전문번호N8265)『김일성은 우리의 통보를 듣고 매우 흥분했음.그는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듣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하고 는 그 통지문을 자세히 한번 보고 싶다며 우리와 다시 만나자고 청했음』 이렇게 해서 그날 하오 소련특사 두사람은 다시 김일성과 만났다.다음은 김을 두번째 만난 뒤 이들이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전문번호N8298) 『김일성은 한국문제에 관한 소련정부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그리고 이 제의들이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지기 바란다고 했음.아울러 김은 우리측이 한반도 종전과 평화달성을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음.김은 현상황을 지속시키는 것은 중·조선국민을 비롯,전세계 민주진영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음. 김은 현재 매일 3백∼4백명의 인명피해가 나는 등조선측 피해가 심각하니 미국과 교환포로의 숫자를 놓고 논란을 계속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음.김은 현상황에서는 소련의 제안이 최상의 방안이라고 거듭 말했음』 김일성은 이와 함께 협상이 본격화될 것에 대비해 북한에 억류중인 전쟁포로의 숫자파악과 판문점협상의 실무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한편 소련당국은 북측 협상대표를 계속 남일로 내세우라고 지시했다.이 때문에 김일성은 남일을 외교부장으로 임명하려던 계획을 다소 늦추겠다고 소련대표들에게 말했다. ○불인 포로 석방 요청 당시 북한내부에서는 박헌영 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어서 권력상층부의 자리바꿈이 대폭으로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착된 채 장기간 계속됨에 따라 전쟁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본격화됐던 것이다.김일성은52년 12월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조직과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역설했는데 이후 그의 연설을 연구학습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뒤인 53년초부터 박헌영 일파의 체포에 나섰다.그래서 박헌영숙청에 앞서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등 주요 남로당 계열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이들은 이후 전쟁이 종결된지 3일 후인 53년 7월 30일기소돼 다음달에 재판을 받았다.이후 박헌영도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공화국정권 전복음모행위」등 3가지 조목으로 체포돼 55년 12월사형을 선고 받았다. 어쨌든 소련의 적극적인 자세로 휴전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53년 6월 3일 몰로토프 소련외상은 미국의 볼렌대사와 만나 판문점 휴전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막바지 의견조정작업을 마쳤다.몰로토프와 볼렌대사간의 회담을 기록한 메모랜덤은 『두사람은 판문점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한 방안에 합의했음.볼렌대사는 판문점회담의 성공이 모든 당사자가 희망하는 바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몰로토프,볼렌 두 사람의 의견이 완전일치했음』이라고 적고있다. 소련정부는 중·북한측에게 미국의 휴전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지시하면서 답신에 답을 구체내용을 일일이 적시해 보낸바 있다.소련당국은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듯 이번에는 클라크장군이6월 29일자 서신을 통해 보내온 제안에 대해 김일성·팽덕회가 보낼 답신의 초안을 직접 작성해서 두 사람앞으로 보냈다. 다음은7월 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최고간부회의가 채택한 「김일성·팽덕회가 클라크의 53년 6월 29일자 서신에 대해 보낼 답신의 초안에 관한 결정」의 주 내용이다.간부회의는 이를 곧바로 북경과 평양으로 타전했다.(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정문.NP14/1) 『소련정부는 지금까지 휴전협상 과정이 중·조 양국의 전략에 따라 성공적으로 진행돼왔음을 믿어의심치 않음.중·조 양국은 전세계에 평화의지와 협상의지를 과시했음.…중략…이에 따라 휴전협정 체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됐음.아울러 미국은 국내외 정책에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됐음. ○중도 휴전필요성 역설 이같은 새로운 상황전개에 따라 미국지도부는 군사적 광기를 유지시키는 데 심각한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음.아울러 대중 여론의 압력이 점차 커져서미국의 지도부는 한국전 종결을 오래 미룰 수 없게 됐음.물론 아직도 미국과 이승만 일당이 휴전협정 연기를 획책할 가능성은 남아 있음. 소련정부는 김일성동지가 휴전협정 서명을 위해 판문점으로 가는 문제를 의논하고 싶음.하지만 이승만 일당이 김일성동지에 대해 어떤 위험한 술책을 가할지 모르기 때문에 김일성동지는 판문점으로 가지 않는 게 바람직함.다른 조선동지를 대신 판문점으로 보내 휴전협정을 체결토록 하기 바람.중국동지들도 이에 동의할 것으로 기대함』 한편 이보다 하루 전인 53년 7월3일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은 휴전협상에 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입수,이를 본부에 타전했다.이 장문의 전문은 휴전필요성을 역설하는 중국정부의 입장을 상세히 담고 있다. 『최근 12일간 이승만정권은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음.한국전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음.…중략…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을 설득시키려고 함.그의 요구는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미국의 결심에 배치됨.이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간의 2주동안 진행된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음. 이같은 상황에서 클라크장군이 6월 29일,김일성과 팽덕회가 보낸 서신에 응답한 것임.응답한 목적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그의 요구에 양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임.즉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에 관계없이 휴전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임.아울러 전 세계에 미국이 전쟁종결을 원한다는 점을 과시하겠다는 뜻임』 ◎새로 밝혀진 사실/소,중·북한에 “종전 동의하라” 지시/김일성은 “최상의 방안… 환영” 응답 이번 사료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의 종전이 소련의 동의로 인해 가능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종전방침을 확정하자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중국에 넘어갔던 전쟁의 주도권이 다시 소련에게로 넘어갔다.그러면서 한국전쟁의 한 주체인 공산측의 세나라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다.이 내부 합의가 이뤄지자 다음 단계인 유엔측과의 합의는 의외로 쉬웠다.즉 한국전쟁의 종전과 관련하여 더 어려웠던 것은 때로는 공산측 내부의합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일단 방향을 선회하자 소련은 중국과 북한에 아예 명령형 전문을 보내 『클라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라』고 했다.미국의 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까지 지시하고 있다.소련은 또한 대외적으로 발표할 성명의 내용까지 지시하고 있었으며 성명의 초안까지 작성해주고 있었다.새 지도부는 스탈린이 주로 배면에 숨어 전쟁을 조종하였던 방식에서 벗어나 앞장서서 종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소련은 북한과 중국의 협상대표 선정,김일성의 판문점 방문여부 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결정해주었다.재미있는 것은 소련이 이승만의 행동과 그 의도를 정확히 알고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전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있는 점은 김일성의 반응이었다.그가 소련의 종전결정에 대해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정말 기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그는 소련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상의 방안이다』면서 흥분한 채 『정말 기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휴전과 관련한 그의 반응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이는 전쟁을 시도하고 이를 실패한 그로서는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는 전쟁의 지속을 주장하면서 격렬하게 휴전반대운동을 벌인,전쟁을 당한 이승만과도 극적으로 대비된다.
  • 미서 한국전 관련서적 잇달아 출간

    ◎전쟁 발발 배경·미의 대한 군사정책 등 주제 다양/학계 중심 역사적 재평가작업 활발 한국전쟁을 조명하는 한국전 관련서적들이 최근 몇년사이 미국에서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이는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던 한국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작업이 미 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주로 한국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대학의 출판사들이 한국전의 발발배경,미국의 군사정책,한반도주변 군사정세,한국전의 파급효과 등을 주제로 내놓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민간출판사들이 간행한 것도 적지 않다. 올해의 경우 워싱턴 포스트,USA투데이 등 미 주요 언론들도 워싱턴에 한국전참전기념비 제막을 계기로 한국전이 「잊혀지지 않았다」며 한국전에 대한 교훈을 비중있게 기사화해 한국전에 대한 관심을 높여 놓기도 했다. 컬럼비아대 출판사는 올해초 「한국전쟁의 중국길:중­미대결」이란 제목으로 3백52쪽을 출판했으며,캔사스대 출판사는 오는 11월 「모택동의 군사적 로맨티시즘:중국과 한국전쟁,1950∼1953」을 발간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발간된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영문도서는 20여종에 이르고 있다.이들중 일부를 소개한다. ▲한국:전쟁의 증인(푸트남 버클리그룹출판사,95년 발간) ▲한국전쟁:국제적 역사(프린스턴대,95년) ▲한국전쟁의 기원:1·2권(프린스턴대,94년) ▲인천상륙작전,한국,1950(그린우드사,94년) ▲잘못된 전쟁:미 정책과 한국갈등의 범위(코넬대,92년) ▲불확실한 동반자들:스탈린,모택동,그리고 한국전(스탠퍼드대,93년) ▲한국을 위한 산등성이길 전투(텍사스 A&M대,90년) ▲승리의 대용:한국휴전에 있어 평화책정정책(코넬대,90년) ▲한국의 재난(텍사스 A&M대,89년)
  • 민통선 북방지역 영농허용면적/가구당 20㏊까지 확대

    ◎성묘객 등 당일 주민증검사로 출입허용 앞으로 휴전선 아래 민간인통제선 북방 전방지역안 주민의 가구당 영농허용면적이 최대 20㏊까지 확대되며 성묘객등 민간인은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당일출입이 허용된다. 합동참모본부는 31일 주민편의를 높이기 위해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민통선 북방지역 민사활동규정 개정안」을 마련,8월1일부터 시행키로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그동안 가구당 3㏊로 제한된 민통선 이북지역 영농범위를 10㏊로 늘리고 시장·군수의 승인이 있으면 최대 20㏊까지 허용하는 한편 비닐하우스재배나 화훼단지조성등은 관할부대장의 별도승인을 얻도록 했다. 또 이 지역에 관과 군요원으로 구성,운영해온 「영농심의위원회」에 주민대표를 참고인자격으로 참석토록 해 주민이주나 개간등의 재산권행사와 관련된 문제를 심의할 때 주민의견을 반영토록 했다. 군은 이와 함께 연평균 1만5천여명에 이르는 이 지역 성묘객이나 모내기 및 추수기의 임시고용인등이 이 지역에 출입할 때 종전에 1주일전까지 해당 군·읍·면에 출입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던 것을 폐지하고,대신 당일 출입통제소에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출입이 가능토록 했다. 한편 민통선 북방지역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5∼20㎞까지의 지역으로 경기·강원의 9개 군 24개 읍 1백5개 마을에 걸쳐 설정돼 있으며 2만여명이 상주하고 있다.
  • 3부요인·정당대표 청와대 오찬 대화록

    ◎“북의 대미 평화협정 공세에 쐐기”­김 대통령/시국 사범 구제… 참사후속조치 만전­이기택 총재/클린턴인기 재선가능할 정도 상승­김종필 총재 김영삼 대통령이 31일 낮 3부요인과 여야 정당대표를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나누면서 나눈 대화 내용을 배석했던 이원종 청와대정무수석과 일부 참석자가 전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김대통령=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문제는 한국이 주도하며 미국은 지원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북한정세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분석하고 대처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한반도 평화체제문제는 남북한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하여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은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 공세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평화체제가 등장할 때까지 휴전협정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고위 외교레벨에서 협의체 구성에 합의한 것과 한국민이 원하는 한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도 성과다.과거의 한미 정상회담은 한미관계만 주로 논의해 왔으나 이번에는 동북아문제를 비롯한 범세계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했다.이것은 우리가 유엔 안보리에 진출하면 세계문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한미간의 협조가 더욱 중요해 진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다.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선다는 것이 단순한 구호가 아닌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며 우리 위상이 이렇게 달라진데 대해 국민에게 감사한다. 6·25의 역사적인 의미를 미국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큰 성과다.6·25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온 전쟁으로서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기억될 전쟁이라는 새로운 평가와 인식을 분명히 심어주었다.이 참전기념비는 워싱턴의 명소가 될 것인 만큼 앞으로 6·25를 모르는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6·25의 역사적인 의미와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기택 민주당총재=정치적인 이유와 이념적인 문제때문에 생긴 시국사범과 정치적 이유로 제약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구제됐으면 좋겠다.삼풍사고 등 대형사고로 민심이 흉흉하다.사고 자체도 문제지만 사고를 처리하는 후속조치가 미흡한 것도 문제다.국민들은 사고도 사고지만 정부의 사고처리를 더욱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대통령의 미국방문이후 한미간 통상마찰이 많이 줄어들 것인지. ▲김대통령=통상마찰은 실무적으로 미리미리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차관보급 실무 채널을 마련했다.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원칙에 입각해 정도로 나가겠다.원래 걸어온 길이 그랬지만 사심없이 국민과 더불어 최선을 다하겠다.8월25일이면 내 임기도 반이 지나가는데 두분 총재께서 뒷받침해 주었으면 좋겠다.큰 범죄 행위가 아닌데 전과자가 돼있는 사람들이 많다.그런 문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구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것에 대해서 국민들은 대부분 찬성하나 그 속의 문화재를 손상없이 보존하는데 관심이 많다.이 문제도 추호의 잘못이 없이 잘 해나가도록 지시했다.왜 총독부 건물안에 박물관을 짓게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사고는 고도성장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다.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제부터는 공기를 연장,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히 안전문제를 챙기겠다.이렇게 하다보면 많은 불편이 생기고 이러한 불편은 국민들이 참아 주어야 한다.다리건 도로건 건물이건 불편이 있어도 국민들이 이해하고 동참해 주어야 하며 이와 관련해서도 두분 총재께서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 이에 앞서 참석자들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대통령=(김종필 자민련총재에게)요즘 골프 많이 치는지. ▲김자민련총재=(골프를 화제로 한참 환담) ▲이민주총재=골프 금지령은 해제된 것인지. ▲김대통령=내가 안 친다고 했지 골프를 금지한 적은 없다.(김자민련총재에게)체중이는 것 같다. ▲김자민련총재=체중이 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클린턴미국대통령의 인기가 재선이 가능한 정도로 올라가는 것 같다. ▲김대통령=타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도가 클린턴은 44%,공화당의 보브 돌은 46%로 나타나고 있다.보브 돌은 오른팔을 못쓰는데 전쟁에서 부상당했다.내가 의회 연설할때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던데 감회가 새로운 것 같더라. ▲김자민련총재=클린턴은 대통령으로서 검증을 거쳤고 보브 돌은 그렇지 못해 클린턴이 유리한 것 같다. ▲황낙주 국회의장=우리나라 사람은 칭찬에 인색하다.국회의장이 된 뒤 수십명의 외국 사람을 만났는데 한국을 부러워하고 칭찬하더라.14대 마지막인 이번 정기국회를 국민들이 칭찬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 1953년 3월5일(모스크바 새 증언:28)

    ◎“스탈린 사망”… 소 「휴전협상 조기타결」 급선회/크렘린 새 지도부,북한·중국에 “입장 변경” 급전/모 “더 싸울수 있다” 몇차례 이견 표명후 곧 동의 전선현황을 일일이 보고받아 전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알면서도 스탈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무슨 신념같이 휴전협상에서 이같은 강경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북한은 스탈린이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훈령을 보낸 바로 그날,51년 11월 19일,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같은 제의를 발표할 예정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스탈린은 이튿날 정치국 이름으로 다시 한번 평양주재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전문을 띄워 엄청난 질책을 퍼부었다.(51년 11월20일.N334/93) 『우리는 조선동지들이 조속한 휴전성사를 위해 유엔에 청원하겠다는 건과 관련,대사가 취한 태도를 용납할수 없음.대사는 조선이 유엔에 청원할 의사가 있음을 11월 18일에서야 보고했음.귀하는 북한의 이러한 청원이 우리의 공식입장에 위배되지 않는지 문의했음. 그러나 귀하는11일,18일자로 귀하가 보낸 전문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같은날(11월 19일) 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그 청원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고했음.도대체 누가 그것을 작성했는지 캐내 보고하라는 거듭된 훈령을 묵살하고 대사는 그것이 라디오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사실만 보고했음. 따라서 조선동지들은 이같은 유해한 청원을 우리의 승인없이 내놓았음.…중략…귀하는 매우 경솔히 행동했고 조선동지들이 이 청원을 중국과 사전협의했는지 조사해 보고하라는 훈령도 묵살했기 때문에 귀하의 죄는 더 가중됐음. 모든 비판을 받아들여 후일의 교훈으로 삼을 것』 ○주북대사에 질책 전문 이런 식의 논란이 그뒤 1년간 계속된 것이다.그런 소동이 벌어진 지 1년 뒤인 52년 12월 17일 모택동은 마침내 스탈린의 생각을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듯 휴전협상이 지연되니 장기전에 대비해야한다며 소련의 추가무기원조를 요청했다.(전문번호N26499) 『휴전협상이 지연되고 또한 미국은 군사행동을 중단할 정도로 전력손실이 크지 않으니 최소한 1년정도는 전투가 치열해질 것에 대비해야함.아이젠하워는 취임과 동시에 작전을 개시할 의도로 전투준비를 하고 있음.적은 우리 방어망이 견고한 전방을 공격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높음. 적의 상륙작전은 내년 봄,빠르면 2월에 감행될수 있음.가장 큰 과제는 이 상륙작전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막을 것인가 하는 것임.지난해 8월 적의 대공세를 막아낸 이후 전황은 다소 안정적임.이 기간 동안 아군은 전방 방어선과 해안방어망을 강화했음. 아군은 전술적 공격을 감행해 58개 적의 진지를 뺏았고 9월­10월중 우리가 집계한 적의 피해는 미군 4만명을 포함,사상자수가 11만명에 달함.10월중순 적은 2개 사단을 동원해 아군 진지 2곳을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했음. 이같은 진지쟁탈전이 계속됨에 따라 포탄소모량이 크게 늘었음.최근 3개월간 아군은 총2백40만발의 포탄을 썼음.하지만 현재 포 보유대수는 적이 1만4천문인데 비해 우리는 1만3천문임.그리고 적은 대부분 중포 및 탱크포인데 비해 우리는 경포가 주류임.또다른 문제는 현재 아군은 소련제 포 2천문을 보유하고 있는데 소련제 포탄을 비롯,포탄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임.만약 적이 우리의 실정을 알아채고 조기공세를 감행할 경우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임.소련제 포탄 추가공급이 최우선 과제임』 모택동은 이 전문에서 또한 앞으로 중국은 새로 의용군을 모집해 이듬해 25만명을 한국전에 추가투입하겠다고 밝혔다.모는 또 북한에 철도,도로건설등 각종 시설을 무상으로 건설해주고 식량을 비롯,모두 미화 6천만달러에 상당하는 각종 물품을 3년동안 매년 북한에 공급키로 했다고 밝혔다.그외 전쟁고아도 대거 중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모는 호언했다.이렇게 잔뜩 장황설을 늘어놓은 뒤 모는 『그렇지만 이 일들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며 본론인 소련의 도움을 거듭 요청했다. ○“미 대공세없다” 반박 모가 가장 시급하게 요청한 품목은 포탄이었다.스탈린은 이 요청에 대해 12월27일 다음과 같이 답전을 보냈다.스탈린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대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모택동의 지적에 이의를 달았다.아울러 그가요청한 추가 무기지원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했다.다음은 이 답전의 주요내용. 『미국이 1953년 봄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동지의 분석은 현 트루만정권의 계획을 기초로 한 것임.하지만 아이젠하워가 취임하면 한국전에서의 긴장을 훨씬 완화하는 쪽으로 전략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음.물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미국의 상륙작전을 가정하는 것은 좋은 생각임. 동지가 요청한 53년도분 추가 무기지원내역은 우리의 능력한도를 넘는 양임.53년도에 20개 사단용 이상의 무기,탄약은 공급하기 곤란함.다시말해 동지가 요청한 양의 4분의 1밖에 공급할 수없음』 그러나 모택동은 끈질기게 추가원조를 요청했다.이듬해인 53년 1월12일에는 모의 요청에 따라 소련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스키장군과 소콜로프스키장군 이름으로 추가무기요청 전문이 스탈린 앞으로 전달됐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N738343)이 전문에서 중국은 53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6백24문의 각종 포와 탄약 2백35만5천발을 시급히 요청했다. 이 전문에서 모는 이전에 약속한 20개 사단용 무기공급을 53년3월부터 시작해 매월 2개사단분씩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모는 이와함께 무기공급의 구체적인 스케줄까지 다음과같이 적어보냈다. 기간 탄약 포 1월 20만발 166 2월 20만발 166 3월 18만발 132 4월 18만발 132 5­12월 8만발 132 (매월) 휴전협상을 둘러싼 중·소간의 강온 의견대립은 53년 3월5일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사정이 급변했다.크렘린의 새지도부는 한국전쟁의 조속히 끝내기로 입장을 굳혔다.중국·북한도 곧바로 이같은 크렘린의 새 결정에 동의했다.물론 모택동은 한두차례 자기는 좀더 싸울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순순히 전쟁조기 종결에 동의했다. ○소각료들은 결의문 채택 53년 3월19일 소련당국은 스탈린 사망에 따른 긴급각료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에 관한 정부입장을 변경시키기로 하고 이같은 결정을 중·조 양국정부에 통보했다.다음은 당시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N858­372cc) 『소련정부는 현재의 전쟁 상황과 최근의 사태발전을 면밀히 검토했음.그 결과 소련정부는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정책방향을 현정치정세에 맞게,그리고 소련,중국,조선 인민들의 이익에 부합되게 바꾸어야함.우리 인민들은 전세계에 평화가 강화되기를 원하며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위해 항상 노력해왔음』 스탈린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전쟁계속 노선이 하루아침에 돌변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비극이 마침내 마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이 결의안은 「영·미 블록의 침략적인 제국주의정책」을 비난한 뒤 다음과같이 계속됐다. 『우리는 중·조 국민들의 기본적인 이익과 여타 평화애호 국민들의 이해를 고려해 이 전쟁을 끝내야한다.우리는 다음 사항의 조속실현을 주장함. 1.김일성과 팽덕회는 클라크장군이 2월27일자로 제시한 환자·부상포로의 교환에 관한 제의에 긍정적인 회신을 보낼 것. 2.김일성과 팽덕회의 답신이 발표된 직후 중국당국의 대표(가장 적임자는 주은래임)가 북경에서 역시 긍정적인 성명을 발표할 것.이 성명에서는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을 포함,포로문제 전반을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과 한국전쟁의 종결 및 휴전협정을 체결할 시기가 됐다는 점을 지적할 것. 3.북경 당국자의 성명에 때맞춰 평양에서는 북조선 대표 김일성이 위 중국대표의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연설을 할 것. 4.우리 역시 북경과 평양에서의 당국자 성명이 발표된 직후 소련외무장관 연설을 통해 이 두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을 고려중임. 5.위에 언급한 4가지 조치에 발맞춰 유엔주재 소련대표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조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 ◎“전쟁 계속하되 무기지원 감축”/모스크바­북경 종전까지 갈등 스탈린과 한국전쟁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그동안 공개된 자료를 통해 전쟁의 기원과 결정에서는 이미 그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전쟁의 전개과정에서의 역할은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가 최초로 그의 역할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종전과 관련된 그의 역할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그것은 그의 죽음이었다.1952년 12월 17일과 27일의 모택동과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의 종결이 임박한 시점에서까지도 이들의 입장이 조정이 안되었음을 보여준다.특히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을 계속하되 중국이 요청한 무기를 그대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그의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다만 요구한 양의 4분의 1만을 제공하겠다고 단정적으로 통보하고 있다.이 답변은 그동안의 모택동의 끈질긴 요구에 대해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담고 있기까지 하다.53년 1월 12일의 모택동의 전문은 스탈린의 거부가 계속되자 아예 지원무기의 월별 필요 양까지 명기하고 있다.이는 종전시에 이르러서는 둘 사이의 긴장과 내적 갈등이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3월 5일의 스탈린의 사망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둘 사이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그것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스탈린이 사망한 지 10여일이 지난 3월 19일의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은 스탈린의 사망이 전쟁의 종결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지금까지 공개된 것 중 최초의 문건이다.즉 스탈린의 사망과 한국전쟁의 종결이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문건인 것이다.거기에는 『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게 옳지 않다』는 분명한 지적이 나온다.소련지도부 전체의 종전정책으로의 극적 전환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실려있는 다섯가지의 권고사항은 스탈린이 전쟁을 계속하려한 이유가 얼마나 비평화적이고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이 권고사항들은 실제의 종전과정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스탈린은 자신의 죽음으로써만 이 참혹한 전쟁의 종결을 도울 수 있었을 뿐임을 이 자료는 처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앵커리지→서울도착/김 대통령 방미여로

    ◎꽃다발 생략… 간소한 한국환영식/황 의장·윤 대법원장·야 의원 등 초청안돼 김영삼 대통령은 29일 하오 7박8일간의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김대통령은 귀국길에 앵커리지에 들러 교민들을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하오 6시55분 대한항공 특별기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공항 청사 2층에 마련된 환영식장에서 조촐한 귀국행사를 가졌다. 환영식은 환송식과 마찬가지로 화동의 꽃다발 증정이 생략됐으며 황낙주 국회의장 김용준 헌법재판소장 윤관 대법원장,그리고 야당 의원들은 초청되지 않았다. 민자당에서도 이춘구 대표와 당3역만이 참석해 이홍구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을 합쳐 환영식 참석인사는 모두 47명이었다. ○…김대통령은 귀국인사에서 『이번 미국방문은 광복 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다져온 미국과의 우의를 재확인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우리가 세계화를 더욱 힘차게 추진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일류화하고 선진화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면서 『여기에 자족하지 말고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민족의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창조적 개혁에 뜻과 힘을 모아 나아가자』고 말했다. ○…이에앞서 김대통령은 워싱턴 근교 세인트 앤드류스 공군기지를 출발해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앵커리지공항에 잠깐 들러 알래스카의 영향력있는 인사들과 교민대표를 만났다. 김대통령은 공항내 대한항공 귀빈실에서 마이스트롬 앵커리지시장 부부와 론스버리 한·알래스카실업인협회장 부부와 환담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공항내 주정부 귀빈실에서 정원팔한인회장과 김춘근평통지회장등 교민대표 20여명을 접견하고 격려했다. ◎김 대통령 귀국인사 요지 저는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속에서 7박8일간의 미국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금 돌아왔습니다. 어제 저는 워싱턴에서 클린턴대통령과 취임후 네번째 정상회담을 갖고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한반도와 그 주변의 정세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양국간 안보협력 강화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저와 클린턴대통령은 북한정세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하고 북한의 점진적 개방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클린턴대통령은 한·미 양국의 확고부동한 동맹관계를 재확인하였으며 향후 한반도정세를 평가하고 대북 공동전략을 모색하기 위하여 고위정책 레벨에서의 외교협의체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어 저와 클린턴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수립은 어디까지나 남북한 당사자간에 합의되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였고 그때까지는 휴전협정이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저와 클린턴대통령은 또한 한·미 두나라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APE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나아가 우리 두 사람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범세계적 문제에 관하여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한국은 앞으로 유엔안보리 이사국으로 진출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인 만큼 미국과 동반자적 위치에서 세계적인 문제해결에 상호협조해 나가기로 합의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은 이제 중심적 요소가 되었으며 이러한 높아진 우리의 위상에 대하여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커다란 긍지를 느낍니다. 워싱턴방문중 저는 클린턴대통령과 함께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6·25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평가하고 국민 여러분이 참전용사와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따뜻한 우정과 감사를 전했습니다. 저는 이번 미국방문중 의회연설을 통해 상·하 양원의원들을 비롯한 각계의 지도자들에게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향한 한·미협력을 주제로 역설했으며 그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해 주었습니다. 미국의원들은 우리의 남북대화 노력과 민족공동체 발전계획에 대하여 전폭적인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저의 이번 방미는 광복 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다져온 한미우의를 재확인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의 바람직한 양국관계를 정립해나가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미국방문에서도 우리가 세계화를 더욱 힘차게 추진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일류화하고 선진화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는 피땀을 흘려 많은 것을 이루어냈으며 이제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당당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자족하지 말고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민족의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창조적 개혁에 뜻과 힘을 모아 나아갑시다.
  • 한국전 재평가… 깊어진 우호/한·미 정상회담을 보고

    한·미 양국정상은 현지시간으로 27일 상오 「잊혀진 전쟁」으로 그동안 별로 미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한국전쟁 참전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하오 단독회담,확대 정상회담,그리고 회담결과를 설명하는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남북한관계,한·미안보협력관계,북한핵문제,한·미통상관계,동북아 및 아·태지역협력문제 등 광범위한 이슈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하여 얻어진 몇가지 가시적 성과만 보더라도 이번 회담이 내실이 있고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첫째,양국정상은 불확실한 북한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공동대응 전략의 모색을 겨냥한 한·미간 차관급 대북공동 전략협의체를 마련키로 합의했다.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오는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개최후 이와는 별도로 미국무부 부장관을 대표로 하는 미국대표단과 한국측의 외무부차관을 대표로 하는 한국대표단의 첫 회담을 갖기로 했다.한·미 SCM이 북한에 대한 주로 군사·안보차원의 양국 협력모색에 중점을 두어온 데 반하여 이번 대북공동 전략협의체의 설립 합의를 계기로 한·미 양국은 외교·경제영역에까지 북한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둘째,미 클린턴 대통령은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 국민이 원하는 한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이라고 표명,미국의 확고한 대한 방위공약 준수를 확인했다.북한의 가공할 재래식 병력과 함께 화·생물무기의 보유는 물론 전환기 북한체제의 불확실성·불안전성 및 불가예측성을 감안한다면 현재 무엇보다도 이에 대비한 철저한 한·미방위태세의 유지가 중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셋째,양국정상은 기본적으로 미·북한관계개선이 남북관계개선과 병행,진전되어야 한다는 점,그리고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북한의 정전체제무력화와 대미평화협정체결 공세에 대하여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는 남북한 당사자가 해결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밖에도 콸라룸푸르 합의의 이행을 통한 한국이 중심이 되는 대북 경수로 지원관련,양국의 KEDO지원 등 긴밀한 공조체제의유지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한마디로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정상은 북한문제에 대하여 양국이 긴밀한 협의하에 공동으로 대처해나갈 것을 합의했다.대북한 경수로 지원문제뿐만 아니라 북한의 경제위기,한반도 정전체제 전환문제 등 북한문제가 한·미간 긴밀한 협력 없이는 풀릴 수 없다는 양국정상의 완전히 일치된 견해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제반 북한문제 대처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정상은 북한문제 및 한·미 양국간 이슈만이 아니라 동북아 및 아·태지역관련 이슈도 논의함으로써 한국이 명실공히 미국의 포괄적 파트너로 부상했음을 뒷받침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된 한·미관계는 과거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미국은 일방적인 지원국가이고 한국은 이러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수혜국관계의 패턴에서 이제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성숙한 동반자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더욱이 냉전종식후 한·미관계,특히 안보관계는 그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물론 핵개발문제 등 북한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동아시아 및 동북아정책에서 한국의 전략적 비중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냉전이후시대 동아시아의 「신3각관계」로 일컬어지는 미·중·일관계에서 미·일관계는 심각한 무역마찰로 갈등을 빚고 있고,미·중관계는 최근 미행정부의 대만 이등휘총통에 대한 비자발급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을 단순한 한반도 차원에서가 아니라 동북아 및 아·태지역 차원에서의 중요한 협력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으며,그 결과가 이번 한·미정상회담 성과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42년전 한국전쟁 휴전이후 「잊혀진 전쟁」으로 인식되어온 한국전쟁이 이번 한국전 참전비 제막으로 냉전승리의 큰 분수령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되찾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이제 전쟁의 잿더미에서 세계 제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21세기를 앞두고 미국의 「성숙한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로 부상하였다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 “한국전은 가장 기억할만한 전쟁” 새 평가

    ◎워싱턴 참전기념비 제막식 현장/“자유실현 원동력 됐다” 두 정상 영령추모/양국국가·민요 연주속 태권발레 선보여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이 27일 하오(한국시간 28일 새벽)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쪽 광장에 새로 조성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됐다.한국과 미국 양국은 이날 김영삼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참전용사및 가족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휴전 42주년을 맞아 참전비를 제막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혈맹의 우의를 다졌다.특히 이번 제막식을 통해 6·25전쟁을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게 저지해 전후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사건으로 재조명되게 함으로써 그동안의 「잊혀진 전쟁」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 ○냉전종식에 큰 공헌 ○…김대통령은 제막식 연설에서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다』면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됐다』고 한국전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클린턴대통령은 『한국전은 자유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면서 『한국전은 동서 냉전을 종식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고 역시 6·25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두 나라 대통령에 앞서 앨 고어 미국부통령은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을 위해 피를 흘렸다』면서 『전쟁희생자와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자』고 제의했다. ○…제막식은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이 기념공원에 나란히 입장해 공원을 시찰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의 박수 속에 도열한 의장대를 통과해 기념비에 다가가 대기하고 있던 데이비스 미국측 준비위원장으로부터 기념비에 대한 설명을 청취한 뒤 V자형으로 배열된 기념조형물 맨 앞의 병사동상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두 나라 국가 연주와 기념연설이 끝나고 미공군기가 축하비행을 하는 가운데 데이비스위원장은 『모두 손잡고 이 기념비의 제막을 알리자』면서 기념비 제막을 공식 선포했다.제막 선포에 앞서 미국 여가수가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열창해 개막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군악대는 「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등 한국 민요와 가곡을 연주해 분위기를 돋웠고 재미동포 이준구씨가 지도하는 태권도단원 96명이 양국 국기를 손에 들고 애국가와 미국국가에 맞춰 태권발레를 선보였다.태권발레 시범단에는 이씨의 제자인 에스피 전농무장관도 끼어 있어 이채를 띠었다. 한국측에서는 3군 의장대와 전통의상을 입은 육군 취타대 2백50명이 행사에 참가했고 주최측은 단상 뒤편에 대형 점보트론을 설치해 행사장면을 중계했다.주최측은 섭씨 35도에 달하는 무더위속에 고령의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점을 고려해 수만t의 생수와 수십대의 앰뷸런스를 대기시켰는데 참전용사 몇몇은 더위를 먹고 쓰러져 들것에 실려 후송되기도 했다. ○완공에 3년1개월 ○…기념비는 미의회가 지난 86년 미국재향군인회의 요청으로 기념사업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할 것을 의결한 것을 계기로 모금한 1천8백만달러의 재원으로 3년1개월간의 공사끝에 완공됐다.기념조형물은 49m의 화강암 석벽과 승리를 상징하는 V자형 대지 위에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으로 구성됐다. 화강암 벽면에는 참전용사의 얼굴이 부조식으로 새겨졌으며 맞은편 화강암 보도경계석에는 한국전 참전 22개국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조각됐다.19명 병사동상 가운데 맨 앞 병사의 앞면 바닥에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분단상징 38선 표현 병사동상 가운데는 미참전기념비준비위 이사인 윌리엄 웨버씨를 모델로 한 동상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올해 69세인 웨버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낙하하면서 지뢰밭에 떨어져 오른발과 오른손을 잃고도 육군에 계속 근무하다가 지난 80년 대령으로 전역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날 행사를 단상에서 참관했다.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은 육군 14명,해병 3명,해군특공대 1명,공군척후병 1명으로 구성됐다.그들의 모습은 화강암 석벽에 유리처럼 비쳐 모두 38명이 행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있는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행사준비위 관계자가 설명했다. ◎김대통령 제막식 연설/전문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우리는 이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이 참전 기념비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우리 자손 만대에 전해줄 것입니다. 나는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한국전 전몰장병을 추모하며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이 뜻깊은 기념비가 제막되기까지 사업을 주관하고 지원해온 미국 정부와 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데이비스장군을 비롯한 건립위원들과 모금에 참여한 모든 분들,그리고 조형물 제작에 참여하신 예술가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45년전 6월 북한 공산군의 기습침략으로 시작된 한국동란은 3만3천여명의 미국 장병들을 비롯하여 9만5천여명에 달하는 유엔군 용사들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한국군과 유엔참전국의 총 사상자수는 무려 50만에 달했습니다. 이 기념비의 바닥에 각인되었듯이 한국동란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이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유세계는 6·25전쟁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고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6·25전쟁은 먼 훗날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고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4천4백만의 한국인들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뿌리내린,미국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전쟁이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바뀐 역사의 진전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낍니다.아시아·태평양시대의 개막과 함께 자유와 평화를 향한 한국과 미국 양국의 유대는 이 흑색 화강석처럼 단단하고,저포토맥강처럼 장구하게 발전할 것입니다.이 기념비에 새겨진 권리를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합니다.자유는 희생없이 지켜지지 않는다고.감사합니다.
  • 워싱턴 한국전 기념광장 텐트 시티/옛전우 찾는 노병들로 “북적”

    ◎“생사 같이했던 40여년전 「그 얼굴」 만나려나”/「6·25」 당시 전황도 짚어가며 무용담도 나눠 『8029 MASH(이동외과병원) 전우를 찾습니다』 멋들어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텍사스에서 달려왔다는 토머스 처칠(70)예비역 육군상사는 자신이 만들어온 자그마한 팻말을 자꾸 더높이 올리려 애를 썼다.1951년 펀치볼전투에 투입됐다가 원주에서 휴전을 맞았다는 그는 40여년만에 옛전우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26일 개장된 한국전 참전 기념조형물 옆의 텐트촌(Tent City)은 하루종일 처칠씨와 같이 이산전우를 찾는 왕년의 노병들로 북적거렸다. 「KOREA」라고 적힌 모자,부대이름을 수놓은 조끼,전투지명을 찍어놓은 T셔츠 등을 저마다 착용한채 옛 전우를 찾을까 하는 기대감에 뙤약볕 아래 이리저리 오가는 노병들의 모습은 안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전 당시 부산에 피란온 각 기관들이 세웠던 텐트촌을 본따 몰공원 남쪽 1만여평에 들어선 이 텐트촌은 미보훈처,미참전용사회,전쟁박물관,전우찾기센터 등 관련단체들은 물론 분향소,기념품점,식당 등 모두 25개의 텐트들이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전쟁박물관 텐트에 마련된 6·25당시의 시기별 전황도 앞에선 역전용사들은 당시 자신의 발자취를 더듬기에 여념이 없었다.가장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 곳은 「전우찾기」 센터(Memorial Kiosk)로 텐트안에 놓인 30여대의 컴퓨터들은 옛전우를 찾으려는 손길을 맞기에 바빴다. IBM에서 한국전쟁 사망자 색인을 위해 최근 새로 개발했다는 OS/2Warp 프로그램이 장착된 이들 컴퓨터는 5만여명에 달하는 한국전 사망자들에 대한 간단한 이력서와 군번,사진까지 찾아볼 수 있으며 바로 인쇄까지 할 수 있게 돼 있다. 따라서 막연하게 이름 한 자만 알고 있는 경우에도 여기서는 찾을수 있다.당시 소대원 30명의 생사를 확인해가는 사람도 있고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사랑하는 가족의 젊은 모습을 뽑아가는 사람도 있었다.IBM측은 한국전 프로그램에 이어 베트남전과 2차대전 당시의 사망자에 대한 기록들도 프로그램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텐트촌 한 귀퉁이에는 대형 공연장도 마련되어 각종 공연이 펼쳐지며 또한 점보트론 대형스크린이 설치돼 있어 오늘의 한국 비디오물들과 각종 기록영화 등이 상영됐다.텐트촌 건너편의 워싱턴기념탑 앞쪽으로는 대형 야외무대가 설치돼 「한국의 밤」공연 등도 다채롭게 펼쳐졌다. 역시 개장 첫날 옛전우를 만나기 위해 텐트촌을 찾았다는 당시 3사단 17연대소속 중대장 이었던 조지 가드스 예비역중위(66)는 『그동안 잊고 지내던 한국전쟁의 교훈이 이번 참전조형물의 건립으로 늘 우리곁에 살아서 함께 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 『한국전쟁은 이긴 것도 아니고 또 진 것도 아니지만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우리의 목표는 달성했던 전쟁』이라고 회상했다.
  • 김대통령­클린턴 2년새 4번째 대좌/김대통령­방미 여로

    ◎“6·25참전 미군 희생은 한국번영 초석”­김대통령/단독·확대회담 60분… 덕담 교환하며 우호 확인/미 각계 유력인사 4백명 부부동반 초청 환담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국빈방문 사흘째인 27일 상오 11시40분(한국시간 28일 0시40분·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단독·확대정상회담을 갖고 북한 경수로 지원문제 등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논의한데 이어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조지타운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저녁에는 미국의 정계·재계·언론계·문화계 등 각계의 유력인사들을 초청,리셉션을 베풀고 환담을 나눴다. ○회담장 향하며 미소 ▷단독 정상회담◁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의 클린턴대통령 집무실(오벌오피스)에서 20분 남짓 단독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대통령은 사진기자들을 위해 잠시 포즈를 취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회담에 돌입했다. 양국 정상회담은 지난 93년7월 클린턴대통령의 방한과 93년11월김대통령의 방미,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 단독정상회담에는 우리측의 유종하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미국의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만 배석했다. 두 정상은 여러차례 정상회담과 전화통화 등으로 가까워진 탓인지 회담을 갖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도 시종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통상문제 집중 거론 ▷확대 정상회담◁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단독정상회담에 이어 캐비닛룸으로 자리를 옮겨 확대정상회담에 들어갔다. 양국 대통령은 확대회담에 앞서 각각 배석자를 소개한 뒤 두 나라 우호관계를 화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약 40분간 진행된 확대정상회담에서는 단독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함께 양국간 통상증진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지난해 6월부터 우리 정부가 시행한 외국인 투자환경개선정책을 설명한 뒤 『미국이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투자를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확대정상회담을 끝낸 양국정상은 단독회담이 열렸던 오벌 오피스로 다시 자리를 옮겨 잠시 환담한 뒤 공동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다. 확대정상회담에는 우리측에서 공로명외무·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박건우 주미대사,청와대의 한이헌경제·유종하 외교안보·윤여전 공보수석,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이 배석했고 미국측에서는 고어 부통령,크리스토퍼 국무·페리 국방·브라운 상무장관,파네티 백악관비서실장,캔터 USTR(미국무역대표부)대표,레이크 안보보좌관,레이니 주한대사,로드 국무부차관보 등이 배석했다. ○미의 평화지원 다짐 ▷백악관 공식환영식◁ ○…정상회담에 앞서 김대통령은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했다. 레이저 백악관의전실장의 안내로 입장,클린턴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김대통령은 앨 고어 부통령내외,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존 섈리캐슈빌리 합참의장 등 미국측 환영인사를 소개받은 뒤 사열대로 올랐다. 김대통령은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애국가와 미국국가가 연주된 뒤 의장대를 사열했고 미국 고적대의 분열식을 참관했다. 클린턴대통령은 환영사를 통해 『한·미관계는 상호 고통분담의 역사와 공동목표의 미래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김대통령의 희생과 집념에 힘입어 한국은 경제성장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클린턴대통령은 또 『북한핵문제가 한·미·일 세나라간의 긴밀한 공조체제 아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면서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남북대화 재개,한반도의 평화와 안정확보를 위한 미국의 확고한 지원을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답사를 통해 『42년전 오늘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참전우방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린 전쟁이 3년만에 역사상 가장 긴 휴전에 들어갔다』고 상기시킨 뒤 『한국국민이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국민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미국 젊은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그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4천4백만 한국인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번영을 구가하고있다』고 감사의 뜻을 밝히고 『한국은 앞으로 보다 평화로운 세계,보다 번영하는 지구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미국국민과 굳게 손잡고 나아가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5차례 열렬한 박수 ▷미국 유력인사 리셉션◁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백악관 바로 옆쪽에 자리한 코코란 미술관 1층홀에서 톰 폴리 전하원의장,제시 브라운 육군성장관,샘 넌 상원의원 등 미국의 유력인사 4백명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환담을 나눴다. 김대통령은 박건우주미대사의 안내로 리셉션장에 들어선 후 4중주 실내악단의 「아리랑」 등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중앙 플로어에서 45분간에 걸쳐 참석자 전원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 김대통령은 이어 인사말을 통해 『전쟁의 잿더미에서 실의에 빠진 우리에게 미국은 전쟁복구와 경제재건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김대통령이 『한국이 기적을 이루기까지 미국의 도움이 컸다』면서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고 인사하자 일제히 박수를 보내는 등모두 5차례에 걸쳐 박수로 호응했다. ○자유는 번영의 열쇠 ▷명예박사학위 수여◁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조지타운대학 본관 힐리홀에서 오도노반 총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자유는 번영의 열쇠」라는 제목의 학위수락 연설을 했다. 순차통역으로 진행된 연설에서 김대통령은 『한국에서 북한공산주의의 위협은 군사독재를 불러왔고 절대빈곤의 고통은 개발독재를 정당화했다』면서 『그러나 나는 자유와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신했다』고 강조했다. ○전화통화도 10여회 ○…스탠리 로스 백악관 NSC(국가안보위) 아시아담당 보좌관은 27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선 브리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매우 친밀한 관계라며 수치를 비교해가며 강조. 로스 보좌관은 두 정상간의 직접 대좌는 93년 여름 클린턴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가진 첫대좌 이래 4번째라고 소개하고 두번째는 블레이크섬 회담후 백악관에서,세번째는 APEC 보고르회담에서라고 발표. 그는 또 양국 정상간에는 전화와 서신교환도 잦다고 설명하고 지금까지 직접 전화통화만도 10차례가 넘는다며 이는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부연설명. ◎김대통령 미 조지타운대 명박 수락연설/요지 세계 최고수준의 학문적 업적과 교육적 명성으로 빛나는 조지타운대학으로부터 수여받은 이 학위는 나에게 최상의 영예가 될 것입니다.클린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과 세계를 이끌어온 이 대학졸업생들,그리고 21세기의 주역이 될 학생 여러분과 동문이 된 이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대학이 2백여년전,종교적 자유와 미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창설되었다는 사실에,40여년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온 나로서는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태평양 너머 동북아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의 지난 반세기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우리는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국토분단과 전쟁,그리고 절대빈곤이라는 3중고를 안고 국가건설에 나서야 했습니다.우리는 절망의 어두움으로부터 희망의 빛을끌어내야 했습니다. 대학생으로서 서양철학에 심취해 있던 나는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숱한 고뇌를 하였습니다. 나는 미국이 이미 누리고 있던 자유와 평등,풍요와 복지는 다름아닌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맺은 결실임을 확신하였습니다.나는 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정계에 투신하여 40여년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삶을 바쳤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숱한 역경이 있었습니다. 일본 식민통치가 남긴 척박한 토양에 민주주의는 뿌리내리기 어려웠습니다.북한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군사독재를 불러왔습니다.절대빈곤의 고통은 개발독재를 정당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유와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서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신하였습니다.자유민주주의가 빈곤으로부터 해방되는 지름길이며,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복하는 요체라고 믿었습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별개가 아니라 자유라는 한 뿌리를 가진 두 가지라는 나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이러한 신념을함께 한 한국 국민의 기나긴 민주화 투쟁은 마침내 문민 민주주의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나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한국사회에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뿌리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왔습니다. 이러한 개혁조치가 경제를 침체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지금 한국 경제는 몇년전의 만성적 침체를 벗어나 8%이상의 높은 성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정당성과 효율성을 함께 지닌 민주정부만이 국민에게 참다운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랜 민주화투쟁을 통해 자유 없는 번영은 진정한 번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자유 없는 번영은 풍족한 노예생활과 같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인류는 새로운 문명을 태동시키고 있습니다.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이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습니다.동양과 서양이 진정으로 만나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화의 조화」를 통해 인류역사 추진의 두 수레바퀴가 되는 위대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의 산실인대학을 비롯한 세계의 지성계가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나는 세계공동체의 시대이자 지식사회의 시대를 맞아 세계 대학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졌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이미 조지타운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한국의 인재들은 한국사회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지금도 5만여명의 한국 학생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이제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름으로써 여러분의 새로운 개척지가 될 것입니다. 한·미 우호관계는 자유와 번영의 가치 아래 새로운 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더욱 성숙되어갈 것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 엇갈리는 휴전전략(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27)

    ◎스탈린·모택동,휴전 놓고 이해 저울질/스탈린­UNDP 조기 종전 요청하려는 김일성을 비난/모택동­“현전선서 휴전” 미안 수용… 조기타결 적극적 휴전전략을 싸고 스탈린·모택동 양자간의 이견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계속됐다. 이러한 의견대립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쟁종결을 앞두고 서로 자신의 이익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치졸한 속셈들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관련문서들은 보여주고 있다. 51년 10월 29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을 지휘하던 이극농은 모택동 앞으로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보냈다.더이상 협상지연이 무의미하니 38도선 휴전을 포기하고 미군측의 주장인 현전선 휴전쪽으로 양보를 하자는 건의였다.모택동은 이 보고전문을 그대로 스탈린앞으로 보냈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5406) ○“38도선 포기“ 건의 『현전선 사정에 비추어볼때 적이 우리의 저항에 굴복해 휴전협상과 관련,우리 요구를 받아들일 것같지는 않음.따라서 현상태를 당분간 지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함.현재 우리 병력이 배치된 지점이 휴전지점으로일반적으로 인정받을만한 시점이 되면 현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우리가 먼저 수정제의를 하는 게 좋을듯함』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받아들이되 입장변화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현전선에서 전투의 교착상태를 장기화하자는 제의였다. 이튿날인 10월30일 이극농은 모택동앞으로 재차 전문을 띄워 구체방안까지 적시하며 모의 결단을 촉구했다.기존의 방침을 바꾸어 현전선에서의 군사행동 중단을 먼저 제의하자고 거듭 요구한 것이다.그는 이 수정제의가 『(1)적이 받아들일 내용을 담을 것.(2)쌍방이 철수할 영토는 비슷한 면적이어야 한다』며 입장변경의 구체방안까지 건의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었다.그는 10월31일 이극농에게 다음과 같이 답신전문을 보냈다. 『10월31일 회담에서 우리측이 먼저 현전선에서의 군사행동중지를 제의하기로 했다는 귀하의 건의에 동의함.만약 적대표가 이같은 우리의 변경된 입장에도 반대한다면 그를 신랄히 비판할 것.공개성명을 내도 좋고 언론을 이용해도 좋을 것임.만약 적이 우리 제의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11월1일 회담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휴전방안을 제시하고 협상의 전 이니셔티브를 우리가 잡도록 할 것』 모택동은 이극농에게 보낸 이 전문사본을 그대로 스탈린에게도 보냈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전문.N25465) 중국측은 이렇게 해서 수정된 제의를 내놓았다.51년 11월21일 이극농은 유엔군측 반응을 모택동 앞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전문했다. 『11월21일 협상소위 회담에서 우리가 수정제의를 내놓자 적은 몇가지 반대를 했으나 사소한 것이었음.우리대표가 적절한 해명을 했음.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음』 이어서 52년 1월31일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협상진행상황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만들어보냈다.역시 조속한 협상타결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N16008) ○정전감시단 구성 제안 『적의 의도적인 회담지연으로 휴전협상이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음.그러나 전투중지와 관련한 기본적인 사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음.휴전선 획정과 관련한 3가지 사안과 포로교환 문제에 대해서도 원칙적 합의가 이루어졌음.…중략… 따라서 협상이오래 지연될 것같지는 않음.적은 공항복구에 대해 여러 제한을 들고나오고 포로를 자유의사에 따라 교환하자는등 터무니없는 제의로 회담을 고의지연시키려고 하는 게 사실임.그러나 우리대표들은 이에 결사 반대하고 있음.하지만 적으로서는 전쟁을 계속하는데 대해 여론의 지지를 얻기 힘들게 돼있음.따라서 미국과 그 위성국들은 한국에서 전쟁을 중지하고 싶어함.그 결과 적은 비행장 문제를 일단 철회하고 사소한 세부문제 토의에 들어갈 것을 제의했음. 최종 협상타결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음.동시에 우리는 미지도부의 술책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음.이들이 국내외 악화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협상을 지연 내지 결렬시키고 국제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임.어쨌든 현재 양측은 합의사항의 구체세부항목 논의단계에 와있음』 모택동이 내세운 입장의 근저에 깔린 것은 역시 휴전협상의 조기타결이었음이 이런 전문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스탈린도 일단은 휴전지점에 대한 입장변경을 제의한 모택동의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는 51년 11월20일 다음과 같은 훈령을 북경주재 로신대사에게 내려보냈다. 『모택동,그리고 라주바예프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다음 사항을 전달할 것.비신스키가 당초 제안한 미군병력의 38도선 이남으로 즉각철수 요구 주장과 중국·조선 동지들이 현전선에서 휴전선언을 하자고 하는 두 입장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음.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기를 거부하는 미군입장의 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비신스키가 당초입장을 바꾸기는 곤란했던 것임. 그러나 이제 비신스키가 휴전지점과 관련,입장을 바꿀 필요가 있음.이는 중·조 동지들에게도 유익함.그럼으로써 미국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만방에 보여주고 또한 중·조 동지들이 얼마나 유연하고 평화를 사랑하는지를 과시하는 효과도 있는 것임.라주바예프동지가 스탈린을 대신해 김일성에게도 이같은 입장을 전할 것』 휴전선 획정문제는 이렇게 공산군측의 양보로 해결됐다.스탈린은 52년 2월3일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정전감시단의 구체적인 구성방안까지 제의했다. ○본심은 여전히 이중적『휴전협상관련 1월31일자 동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함.우리는 폴란드,체코대표단을 정전감독위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폴란드,체코동지들과 의논해야한다고 생각함.그들도 이에 동의할 것으로 믿음』 그러나 휴전협상에 임하는 스탈린의 본심은 여전히 이중적이고 부정적이었다.모택동과 김일성앞으로 보내는 시그널이 서로 달랐는가 하면 주요 고비때마다 조속한 휴전성사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다.스탈린은 전황이 불리하게 기울던 51년 가을,조속한 휴전성사를 희망하는 김일성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사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다음은 이와 관련,스탈린이 정치국 명의로 51년 11월 19일 북한 주재 라주바예프 소련대사앞으로 보낸 훈령.(소련당 정치국결정 NP84/422) 『도대체 누구의 뜻으로 북조선인민공화국 이름으로 유엔총회와 안보리에 한국문제의 조속해결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려는 발상이 나왔는지 이해가 안됨.전날 내게 보낸 전문에서 대사는 북한이 이 청원서에서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음.즉,조선에서 즉각적인 군사행동의중지,현전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2㎞의 비무장지대 설치,전쟁계속을 꾀하는 전범자 처벌등을 거론했음. 현재 미국이 협박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그런 요청은 중·조군이 허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이는 정치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임.현재 중국동지들의 의중을 모르고,조선동지들의 진짜 의중도 모르기 때문에 귀하가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그런 해결요청은 하지 말도록 조선동지들을 설득할 것.보다 상세한 보고를 할 것』 ○휴전 원하는 쪽은 미국 같은날 스탈린은 정치국 명의로 모택동에게도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웠다.(정치국 결정.NP84/421) 『현재 휴전을 보다 더 바라는 쪽은 미국임.이는 국제정세에 비추어도 마찬가지임.따라서 중·조 동지들은 유연한 협상태도를 갖되 우리 요구는 확고히 지키는 것이 옳음.조급함을 보이지 말고 조속한 협상타결에 절대 관심을 보이지 말것.적은 우리보다도 훨씬 더 평화를 원함』 현상태에서 휴전을 더 원하는 쪽은 미군이니 절대로 이에 쉽게 응할 필요가 없다.끝까지 밀어붙여 요구를 관철시키자는 식의 생각을 스탈린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새로 밝혀진 사실/“협상서 조급함 보이지 말라”/스탈린,모택동에 전문 띄워 51년 10월29일의 이극농의 전문은 협상의 초기부터 이미 중국측이 『현전선에서의 휴전』이라는 미국측의 안을 받아들이려 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이 문제에는 드물게 스탈린도 동의한 상태였다.따라서 미국측 안을 놓고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사이에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우리는 51년말∼52년초에 전쟁이 종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52년 1월31일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은 『협상이 오래 지연될 것같지는 않다』『최종 협상타결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며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앞서 51년 11월19일 스탈린은 유엔을 통한 북한의 조기종전제안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조급함을 보이지 말고 조속한 협상타결에 절대관심을 보이지 말 것』이란 전문은 그가 결코 조기종전을 원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그는 중국과 북한을 앞세워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끝까지 공산측이 밀리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전쟁을 결정할 때 그가 왜 망설이고 뒤로 빠지려 하였는지 우리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게된 것이다.그에게 한국전쟁은 자신의 의사와 구도를 실험하고 중국과 북한을 이용하여 뒤에서 이를 관철시키는 대리전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이번 자료를 통해볼 때 휴전협상의 협상전선이 두개였음을 우리는 알게 됐다.그것은 유엔측과 공산측을 하나로 하고 공산측 내부의 의견조율을 다른 하나로 하는 이중전선이었던 것이다.후자는 이번 자료를 통해 비로소 그 내막이 상세하게 공개됐다.(앞으로 이는 많은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21세기 아·태시대 향한 협력­평화·번영의 동반자

    ◎김대통령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전문 위대한 미국국민을 대표하는 이 숭고한 민주주의의 전당에서 연설하는 영예를 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나는 고향을 찾아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스물다섯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된 이래 40년 가까운 의정생활을 통해 의회는 어느 덧 나의 「고향」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또한 나의 고난에 찬 기나긴 민주화투쟁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의원 여러분에게 평소 깊은 감사와 함께 동지의식을 지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오직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의 한국을 이루기까지 언제나 든든한 벗이 되어 온 미국 국민에게 뜨거운 우정을 느끼고 있습니다.나아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새로운 세기를 향해 우리 두 나라의 두터운 유대관계를 더욱 성숙시켜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빈국서 부국으로 1945년 2차대전의 종전은 우리 민족에게 해방과 독립이라는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우리는 민족분단이라는 역사적 비운을 다시 맞게 되었으며 5년후 동족상잔이라는 참극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인은 식민통치의 잔재와 빈곤의 유산,그리고 전쟁의 폐허와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번영을 향한 의지,단지 그것만으로 지난 40여년을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최빈국으로 출발했던 한국은 이제 경제규모에 있어 세계 열한번째의 나라로 뛰어올랐습니다.그러나 우리 국민이 이룩한 것중에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운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두텁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여기에서도,한국 국민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향한 끈질긴 투쟁끝에 마침내 문민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2년여동안 과감한 「변화와 개혁」을 통해 군사독재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고 참다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또한 지난해부터 우리는 「세계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지구공동체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이룩하고 이제 세계로,미래로 나아가는 한국의 이야기입니다. ○참전용사에 감사 한국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평화가 가져온 결실입니다.한반도의 평화가 지켜지지 않았다면 한국 국민은 오늘의 자유도,번영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평화는 대가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내일은 우리 모두가 이 의사당 맞은편 포토맥강변에서 한국전의 영웅들을 다시 만나는 뜻깊은 날입니다.6·25전쟁의 휴전 42주년이 되는 이날을 맞아 제막될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우리에게 언제나 평화의 소중함을 웅변해줄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을 대신하여 한국의 전선에서 고귀한 젊음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시 약관 19세의 나이로 참전하신 찰스 랑겔의원을 비롯한 스물여덟분의 의원들께도 경의를표합니다. 아울러 지난 40여년간 한국의 전선을 지켜온 모든 미군장병과 그 가족에게 한국 국민의 사의를 전합니다.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태평양 너머 멀리 느껴졌던 우리 두 나라는 이제 가장 가까운 벗이 되었습니다.일방적인 도움을 주고 받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자유와 번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성숙한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함께 키워온 평화의 유대는 값진 열매를 맺었습니다.한국의 성공은 한·미 양국 국민의 공동승리입니다. 아시아·태평양시대의 막은 이미 올랐습니다.한·미 두 나라는 더욱 강력한 결속으로 본격적인 아·태시대를 열어나가야 합니다.아·태지역이 역동적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미국이 장기간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아·태 미 역할 긴요 아·태시대가 활짝 꽃피기 위해서는 미국이 앞으로도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역할을 계속해야 합니다.특히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의 평화보장은 이 지역 전체의 안정에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아직도 1백50만의 중무장한 병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입니다.주한미군은 지난 40여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아·태지역 전체의 안정을 위해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싸고 고조되었던 긴장은 한반도가 얼마나 불안정한 지역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핵문제와 관련하여 미·북간에 이뤄진 콸라룸푸르합의를 지지하는 바입니다.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공동보조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분명히 풀릴 때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미·북 제네바합의가 충실히 이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그 실질적 당사자인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에 의해서만 정착될 수 있습니다.대화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는 클린턴대통령과 미국 의회가 그동안 남북대화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강조해온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광복 50주년이자 분단 50주년인 올해를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만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1민족 1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한국의 통일정책입니다.이에는 북한의 안정이 필수적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남과 북이 함께 번영하는 「민족공동발전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북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 한국형 원자로를 제공하고 그 중심적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입니다.같은 취지에서 남북경제협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또 순수한 동포애적 차원에서 북한의 어려운 식량사정을 덜어주기 위해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로 가는 길이 비록 멀고 험하더라도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쉼없이 전진해갈 것입니다.한반도가 다시 하나가 되는 그날,동북아에는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올 것입니다.분단된 한국보다통일된 한국이 인류와 세계에 더욱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균형통상 급선무 아시아·태평양지역 전체의 번영을 위해서는 이 지역에 자유무역과 개방주의가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2차대전후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유세계에서 이뤄져온 자유무역은 빈곤과 공산주의를 퇴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국 역시 자유무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나는 아·태지역의 모든 나라가 자유무역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클린턴대통령과 더불어 APEC의 발전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한국정부는 또한 WTO 규범에 따른 다자간 협력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미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며 한국도 이제 미국의 여섯번째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지난해 양국간 교역은 4백억달러를 넘어섰고 금년에는 5백억달러 수준에 달할 것입니다. 한·미간의 무역은 대체로 균형을 이루어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한국의 대미 적자폭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세계화정책을 통해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의 개방과 자율화를 적극 추진해왔습니다. 우리는 나아가 OECD 가입을 통하여 선진국 수준의 개방화시책을 본격적으로 펴나갈 것입니다.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문을 열어왔습니다.앞으로도 한국은 지속적인 자율과 개방정책을 통해 아·태지역의 번영을 촉진하는 미국의 강력한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국제적 책임 확대 우리 앞에는 21세기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미국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한국도 국제사회에서의 역할과 책임을 확대해나갈 것입니다.우리의 발전경험을 살려 개도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범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도 적극 동참할 계획입니다. 한국 국민은 한·미양국이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아래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전진시켜나가려는 희망에 차 있습니다.통일한국을 이루어 미국국민과 함께 「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로서 세계와 인류에 더욱 크게 기여하자는 의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의 메시지입니다.그것은 이 신대륙에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미국의 정신에도 합치할 것입니다. 우리,어깨를 나란히 하여 앞으로 나아갑시다.그리하여 인류에게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을 안겨줄 새로운 세기,새로운 세계를 함께 열어 나갑시다.모든 것은 유한하나 평화와 번영을 향한 인류의 열망은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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