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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미가 당기는 목포 9味”… 목포시, 전국 최초 ‘맛의 도시’ 선포

    “구미가 당기는 목포 9味”… 목포시, 전국 최초 ‘맛의 도시’ 선포

    목포시가 전국 최초로 ‘맛의 도시’를 선포했다. 목포 음식의 뛰어난 맛을 전국에 알리고 ‘맛 도시’ 브랜드를 선점한다는 전략이다. 목포시는 12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맛의 도시 목포 선포식’을 열고 목포 식재료와 음식의 음식의 우수성을 알렸다. 행사는 목포 출신 국악인 박애리와 팝핀현준 부부의 축하공연으로 문을 열었다. 서예가 송홍범 선생은 대붓으로 축하 휘호를 썼다. 김병찬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다. 문정훈 서울대학교 농경사회학부 교수는 ‘맛의 도시 목포: 9미(味) 이야기’ 발표를 통해 목포가 맛의 도시로 자리잡은 배경을 설명했다. 문 교수는 “목포는 바다와 육지를 잇는 지리적 조건으로 자연스럽게 파도 위의 시장 ‘파시’가 형성됐다”며 “1960년대를 지나면서 1번 국도와 2번 국도가 출발하는 육상교통의 중심이자 맛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단지 해산물이 많이 모인다는 것만으로는 목포가 맛의 도시인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며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문화자산이자 경제적 자원인 식문화를 자원화하는 데 음식 명인들의 공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선포식에서는 세발낙지, 홍어삼함, 민어회, 꽃게무침, 갈치조림, 병어회, 준치무침, 아구탕, 우럭간국 등 ‘목포 9미’를 선정했다. 김종식 목포시장은 “오늘로서 대한민국의 맛 하면 목포, 목포하면 맛 하는 등식이 성립됐다”며 “목포에 오시면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있다. 10월에는 국내 최대 해상케이블카가 개통한다. 오감만족 관광지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요즘에는 볼거리만 갖고는 관광지가 대박을 치긴 어렵다고 한다. 먹거리가 합쳐져야 최고의 관광지가 된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오늘 목포 9미를 보니 벌써 구미가 당긴다. 9미를 맛보러 다음주에 목포에 갈 예정”이라고 말해 환호를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이밖에 박지원 국회의원, 최운열 국회의원, 배우 최불암 등 각계 초청인사 400여명이 참석해 맛의 도시 목포 선포식을 축하했다. 목포 홍보대사인 개그우먼 박나래와 배우 김수미의 축하 영상도 눈길을 끌었다. 임정식, 이충후, 김성운, 이형준 등 국내 유명 셰프들이 목포 식재료인 낙지, 홍어, 우럭, 민어 등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는 영상이 상영됐다. 현장에서는 조리 시연이 펼쳐졌다. 목포시는 선포식을 계기로 음식특화거리 조성, 으뜸 맛집 경영 컨설팅, 음식 관광코스 개발 및 상품화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글·사진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이승만 전 대통령이 명명 ‘파로호’…강원도, 대붕호로 명칭 변경 추진

    강원도는 6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의 뜻을 담고 있는 화천 파로호(破虜湖)의 명칭을 평화시대에 걸맞게 본래 지명인 대붕호(大鵬湖)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행정절차와 주민의견 수렴 논의에 들어갔다. 파로호는 면적 38.9㎢, 저수량 10억t의 인공 호수로 1944년 화천 간동면 구만리 북한강 협곡을 막아 축조됐다. 당시 주민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전설 속의 큰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는 의미로 대붕호라고 불렀다. 하지만 1951년 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을 패퇴시키고 3만명을 수장시킨 화천전투 승전을 기념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파로호’ 친필 휘호를 내려 명칭을 바꿨다. 파로호라는 이름이 적대적이어서 ‘빛나는 냇가’(華川)라는 본래 지역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논란은 줄곧 있었다. 종교계 등에서는 대붕호 이름 되찾기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해부터 남북 화해 국면을 맞으면서 명분이 힘을 얻으며 찬성론을 부풀렸다. 강원도 관계자는 “파로호의 명칭 변경안을 화천군지명변경위에 상정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으나 화천군과 주민 의견이 중요하다”며 “신중하게 여론을 수렴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그날처럼 차려입고 “만세”…하나된 함성, 하나된 강서

    그날처럼 차려입고 “만세”…하나된 함성, 하나된 강서

    강서공고~방화근린공원 감동 재현 외침소리에 모두 뛰쳐나와 코끝 찡 손도장 찍기·휘호쓰기… 주민들 뭉클 노 구청장 “학생들이 기획해 큰 의미”“대한독립만세~.” 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남녀노소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일 전국에 들불처럼 퍼진 그날의 함성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지난 1일 오전 9시 20분, 서울 강서구 강서공업고등학교 앞 대로에서다. 이날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로 열린 거리행진엔 주민 1500여명이 참여했다. 강서공고 앞 왕복 4차선은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복장을 갖췄다. 검정 두루마기를 두르거나 유관순 열사가 입었던 흰색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한 손엔 태극기를 들었다.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머리띠를 두른 이들도 있었다. 노현송 강서구청장도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동참했다. 진성준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구민의 한 사람으로, 그날의 감동 재현에 함께했다. 노 구청장 등은 대북 소리를 신호로 하나가 돼 걸음을 뗐다. 한 발 한 발 힘찬 걸음을 내딛으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 자주독립만세, 기억하라 민족의 함성,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등의 문구가 적힌 만장기가 행렬을 뒤따랐다. 행진 대열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났다. 만세 소리를 듣고 집에서 쉬던 주민들도, 길 가던 주민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쳐나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 행진은 강서공고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방화근린공원까지 30분간 이어졌다. 대형 태극기를 들고 만세행진에 참가한 한 여고생은 “저희 또래인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며 만세를 불렀다”며 “일제의 만행에 대항해 10대 여고생들도 목숨을 내놓고 만세를 불렀던 그날의 장면이 그려져 울컥했다”고 했다. 한 주민은 “딸과 함께 인근 공원에 운동하러 가다가 만세 소리를 듣고 참가했다”며 “1919년 당시에도 이처럼 만세 소리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코 끝이 찡했다”고 했다. 행진이 끝난 뒤 열린 기념식에선 3·1독립선언서 낭독, 만세 삼창, 축하 공연 등이 진행됐다. 안중근 의사 손도장 찍기와 휘호 쓰기, 태극기 그리기, 페이스페인팅 등 다양한 체험 행사도 마련됐다. 체험 행사를 기획·준비한 강서혁신교육지구 학생자치연합회 학생들은 “지역 내 10여개 학교 학생들이 모여 준비했다”며 “오늘의 감동은 어른이 돼도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다”고 했다. 노 구청장은 “강서구민들의 울림이 강서를 넘어 전국에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며 “그날을 잊지 않고 기리는, 이 폭발적인 에너지가 강서의 내일을 밝게 하는 것 같아 가슴 뭉클하다”고 했다. 한편 같은 시간 양천향교에선 강서구 독립운동가인 상산 김도연(1894~1967) 선생을 기리는 2·8독립선언 결의서 낭독식이 열렸다. 상산 선생은 도쿄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100년전 그날의 외침, 강서 방화근린공원서 재현

    100년전 그날의 외침, 강서 방화근린공원서 재현

    ‘2·8 학생 대표’ 김도연 선생 추모 묵념 안중근 휘호 쓰기 등 다채로운 행사도서울 강서구는 다음달 1일 오전 9시 20분 방화근린공원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고 21일 밝혔다. 구 관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에서도 범국민적인 행사를 하는 만큼 강서구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갖는다”고 말했다. 행사 당일 가양동 양천향교에선 강서구 독립운동가로 1919년 2·8독립선언 때 학생 대표였던 상산 김도연(1894~1967) 선생을 위한 추모 묵념과 독립선언 결의문 낭독이 진행된다. 이어 지역 주민 1000여명이 3·1운동 당시 복장을 갖추고 강서공고에서 방화근린공원까지 30분간 행진한다. 대형 태극기 등으로 그날의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구립극단 퍼포먼스도 펼쳐진다. 이어 방화근린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기념식 등 본행사가 열린다. 독립선언서 전문을 낭독한 후엔 참가자 전원이 만세삼창을 한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음원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과 구립합창단 공연, 안중근 의사 휘호 쓰기 등 이벤트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노현송 강서구청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이번 행사를 통해 3·1운동 함성과 감격을 다시금 느끼고, 한마음으로 독립을 외쳤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갖길 바란다”며 주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당부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족보도서관 설립, 시장 바뀔 때마다 달라집니다…우리 핏줄의 역사 문제 아닙니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족보도서관 설립, 시장 바뀔 때마다 달라집니다…우리 핏줄의 역사 문제 아닙니까”

    65년 족보 인쇄 외길 회상사 박병호 대표가 말하는 ‘족보’“6층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 책이 한 3만~4만 권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필름으로도 그만큼 보관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문중의 족보는 여기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족보 인쇄가 사양길에 접어들다 보니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관하는 족보는 개인 재산 차원을 넘어 한국인의 핏줄 역사가 담긴 문화재입니다. 대전시가 족보도서관 만들어 영구보관한다고 이야기 나온 게 십수년이 됐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6층 회상문보원 서가엔 900여가문 족보 빼곡히 꽂혀 65년째 족보 인쇄의 외길을 걷는 대전시 동구 중동 회상사(回想社)가 족보 보관에 애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11일 박병호(73) 대표를 찾았다. 회상사 겉모습은 출판사라기보다는 창고와 같아 보였다. 건물 1층 사무실에 석유난로를 켜고 직원 몇 사람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박병호 대표를 만나러 왔다.’라고 했더니 한쪽 책상에 앉아있던 ‘내가 박병호입니다.’라며 일어나 기자를 맞았다. 1층 사무실을 둘러보니 벽에는 철제 캐비닛이 몇 개 서 있고, 책상만 몇 개 놓여 있었다. 박 대표는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석유난로를 옮겨왔다. 족보 책은 보이지 않았다. 족보 전문 출판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족보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 대신 나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갔다.6층엔 회상문보원(回想文譜院)이란 간판 아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서화 냄새가 어우러진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 안에는 금천 강씨(衿川 姜氏)부터 900여 가문의 족보가 가나다순으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한쪽 벽면엔 각종 문집과 향교지 등도 보관하고 있었다. “199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족보도서관인 여기에 보관된 족보가 한 3만~4만 권쯤 될 겁니다. 2007년 제가 취임한 후로 대동보(大同譜) 500여종, 세보(世譜·일명 파보) 1500여종, 가승보(家乘譜) 900여종 등 모두 600만 부 이상 발간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휘호도…윤보선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납 활자본도 고스란히…희귀 벽자 700여개도 보관“하루 족보 35쪽 입력…족보 한권은 통상 800쪽”5층엔 선친 박홍구의 아호를 딴 춘전(春田)기념관이 있다. 여기에는 족보를 받은 문중에서 기념으로 선물한 고서화, 병풍 등이 가득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화친(和親)’도 보였다. 1983년 윤보선 전 대통령의 해평윤씨 대동보 발간 기념 친필 휘호,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大道無門) 백자 도자기, 199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회상사 방문 및 친필 실사구시(實事求是) 휘호도 받아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따로 연락이 없었다고 말한다. 4층엔 납으로 인쇄하던 시절의 활자본이 보관돼 있었다.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은 옥편에도 안 나오는 한자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읽는 법은 당사자에게 물어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한자로 짜잡기해서 글자를 만든 벽자(僻字)도 700개 남짓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선 족보를 만들기 위한 인쇄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여성직원이 기존의 족보 책을 뜯어내 하나하나 컴퓨터로 입력하고 있었다. “몇십 년 전에 납 활자로 인쇄한 족보는 컴퓨터 데이터가 없어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입력합니다. 하루 8시간 작업하면 35~40페이지 정도 입력합니다. 족보 만들 때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보통 족보 한 권이 800페이지 전후이니 수작업의 번거로움이 짐작된다. 창문 너머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곳엔 족보 필름이 책으로 환산하면 3만~4만 권이 보관돼 있지요.”그가 5층과 6층의 족보도서관과 기념관을 보여주고 나서 문을 자물쇠로 굳게 잠그고 나서 다시 확인했다. “도서관이라면서 왜 이렇게 잠그느냐”라고 물었다. “도둑이 들어서…. 과거엔 사람들이 와서 열람도 하고 했는데 이젠 인력이 부족해 관리가 소홀하니 족보도 훔쳐가고 고서화도 훔쳐가고 해서…. 도난당한 족보만 해도 수천 권에 이를 갑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도둑맞은 겁니다. 모사품을 새로 걸어둔 것이지요.” 그리고 보니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아무렇게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낙관도 어쩐지 흑백이더라. 체계적 보관과 관리가 시급해 보였다. “도난당한 족보 수천권…박정희 대통령 휘호도 도난당해체계적 관리, 영구보존 대책 시급…시장 박뀌면 백지화”“이렇게 관리상에 어려움이 많아도 이 자료들이 나름대로 귀중한 문화재 아닙니까. 소멸하면 혈족에 관한 국가적 문화재가 사라지는 것이니 출판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료를 빼고 모든 자료를 대전시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영구보존하려는 것이죠. 회상사가 설립된 1954년부터 출판한 450문중의 대동보와 14문중의 인터넷 족보, 600문중의 전자족보, 800여 권의 한문 서적 등을 기증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전시가 족보도서관을 만든다고 이야기가 나온 지 십수년이 됐습니다만 확약서를 쓰지 않은 탓인지 여태까지 잘 안 되고 있단다. “우리 회상사가 대전시에 기증할 족보와 고서화 등의 자료를 보관할 장소가 500~600평 정도 필요하지만 대전시문화원이 제공하려는 공간은 260평 정도로 협소하고, 관리·보존이나 재원 마련 계획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장이 바뀌면 이런 계획마저도 백지화됩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요즘 일거리가 많은지 물었다. “1970~80년대 족보 만들기가 붐이었지요. 전쟁통에 불타거나 잃어버린 집안이 많아서…. 그때는 집성촌을 찾아가 남아있는 족보를 모아서 복원하곤 했지요. 족보 인쇄를 시작하면 문중에서 개판식(開版式)을 성대히 치렀습니다.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지요. 그런데 요즘엔 누가 족보 만들려고 하나요. 그래도 제대로 족보 만드는 기업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텐데….” 최근에 한글을 병기한 족보에 조상의 사진도 넣는다고 한다. 일부 문중은 전자족보, 인터넷 족보를 운영한다고 귀띔했다. “한때는 디스크나 CD롬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요즘 컴퓨터엔 CD플레이어가 부착돼 있지 않으니 보려면 불편합니다. 첨단기술이라는 게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종이 족보는 보관만 잘하면 수백 년 흘러도 볼 수 있고 편리합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납 활자로 족보를 만드는 기업, 200년 역사의 회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부 문중 전자족보, 인터넷 족보 운영종이 족보 보관 잘하면 수백년 문제 없어”요즘 또 다른 고민은 가업인 족보 인쇄를 맡아갈 아들을 찾는 것이다. “사양 산업으로 돈벌이가 잘되지도 않으니, 아들들이 서로 맡지 않으려 합니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서로 상의하고 있겠지요.” 그도 1954년 설립된 회상사를 2007년에서야 맡았다. “선친이 장남인 제게 이 일을 물려줄 생각에 공고에 가라고 해서 대전공고에 들어갔죠. 그때만 해도 족보 만드는 일을 계승할까 했는데, 어느 날 경쟁업체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쳐들어와서 큰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걸 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져, 선친의 뜻을 어기고 약대로 진학했습니다. 도립 충남홍성병원에서 약제과장을 지내다 약국 개업도 했지요. 그때도 선친이 회사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저는 뿌리치고 시의원과 초대 및 3대 대전 동구청장을 지내며 제 길을 갔습니다.” “구청장 임기 끝나고부터 회상사 일을 맡았습니다. 선친이 많이 편찮으셨거든요. 그때가 2007년 1월이었습니다. 직원들 퇴직금도 밀린 상태였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창 때는 직원이 150명도 넘었는데 …. 이 일대가 한창때 우리가 일거리를 주면서 생겨난 업소들 거리였습니다. 이젠 어엿한 ‘인쇄 골목’이 됐지만.” 족보를 만들면서 봤거나 겪었던 특이하거나 재미난 성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박 대표는 “그 문중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어떤 문중에서는 족보가 발간되자마자 이를 받아들고 회상사 건물 앞 계단에서 조상님들께 고하는 고유제를 지냈습니다. 또 직원들 한명 한명 붙잡고 감사하다고도 인사했지요.” “한창 시절, 경쟁업체가 도끼 들고 쳐들어와만정 떨어져, 가업 계승 대신 구청장 길 걸어발간된 족보 들고 제사 지내는 문중도 있어”회상사엔 세가지 불문율이 있다. 먼저 족보 내용이 인쇄된 파지는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또 인쇄된 용지는 밟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족보는 ‘모신다.’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족보 유래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왕실의 제왕년표(帝王年表)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의종 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시초다. 민간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나온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인데 기록만 전한다. “회상사에는 선친의 피눈물이 들어있습니다. 이를 가업으로 잘 넘겨주는 것이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선친은 충북 제천에서 ‘권학사’라는 서점을 운영하며 돈을 좀 만졌습니다. 6·25때 총부리를 겨누고 협박하는 인민군에게 돈을 빼앗겼고, 다시 방첩대는 인민군에게 돈 줬다고 선친을 불러다 엄청나게 때리고 재산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전쟁 이후 권력 기관에 의해 괴롭힘을 무척 많이 당했습니다. 선친이 한번은 어린 저를 붙잡고 치욕적이라며 부들부들 떨며 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곤 맨손으로 아무도 모르는 대전으로 나왔던 거죠. 인쇄소에 1년 남짓 다니시다가 족보를 인쇄할 생각을 하셨던 거죠. 그리곤 전국 최대의 족보 인쇄 회사를 일구셨습니다.” 가짜 족보 문제도 많다고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족보를 출판하는 인쇄업자입니다. 족보 내용은 문중의 종친회장인 발행인의 승낙 없이는 손대지 못합니다. 문중의 어르신들이 와서 돋보기를 들고 하나하나 다 교정을 봅니다. 족보는 정확성입니다. 그것이 신뢰이고, 우리의 철칙입니다. 요즘 가짜족보 문제는 문중 재산 즉 조상 땅 싸움 때문에 발생합니다. 문중에서 법정 소송이 벌어지면 족보가 증거로 채택됩니다. 검찰에서 우리가 보관한 족보를 복사해 간 적이 몇번 있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족보에 끼워달라는 부탁을 몇 차례나 받았습니다만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최근 가짜 족보 문제는 문중 재산 싸움 탓우린 출판업자, 발행인 승낙 없이 수정 못해족보는 과거 아닌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그에겐 족보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가업을 승계하는 차원을 넘었다. “고리타분한 핏줄, 즉 혈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족보는 그런 면에서 현재의 나와 조상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인 셈입니다.” 한편, 2015년 통계청 조사결과 한국인의 성씨는 모두 5582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5인 이상인 성씨는 530여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0년대의 270여개 성씨와 비교하면 급증한 것이다. 다문화의 영향으로 외래 성씨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은 삼국시대부터 일부 계층이 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110년 전인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대전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독립 열망, 붓으로 남기다

    독립 열망, 붓으로 남기다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민족의 독립을 이끌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꿈꿨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헤아려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주관하는 특별전 ‘문화재로 되돌아보는 100년 전 그날’이다. 오는 2월 19일부터 4월 21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에 앞서 서울신문은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자유를 향한 염원이 깃들어 있는 전시 유물 20여점에 얽힌 이야기를 매주 한 차례씩 소개한다.중국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마지막 거처인 충칭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았다. 임시정부는 당시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 환국을 앞둔 11월 4일 김구를 비롯한 이시영, 김원봉,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 23명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감회와 새 조국 건설에 대한 포부를 붓으로 적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재유기념첩(在諭紀念帖)은 요인들의 필적뿐만 아니라 이들이 당시 품고 있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다. “낡은 집 무너지매 새집 지으려고 온갖 셈 닿이어 놓고 옛 터 두루 살피어보니 터는 좋다마는 가시 덩굴 적지 않소라. 날랜 연장 잡았으니 그 무엇 걱정하랴.” 눈앞에 놓인 현실이 가시덩굴처럼 험하지만 정교한 연장과 더불어 걱정없이 나아가겠다는 호기로운 이 문장은 독립운동가 윤기섭(1887~1959)이 적었다. 1908년 안창호(1878~1938)의 지도 아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이후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1876~1949)의 “변하지 않음은 수많은 변화를 감당할 수 있다”(不變應萬變)는 문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변치 않는 의지와 굳건한 사상만 있다면 극한의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명근 한국기독교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독립운동가들이 마음속에 품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한 포부와 희망,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문서로서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조소앙(1887~1958)의 “세상의 지혜와 부에 대한 권리를 균등하게 하라”(均天下之智富權), 이시영(1869~1953)의 “오직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고 지성이 신을 감동시킨다”(惟誠動天 至誠感神), 신익희(1894~1956)의 “독립은 아직 미완성이니 우리들은 여전히 노력해야 한다”(獨立尙未完成 我等仍順努力), 장건상(1882~1974)의 “세계의 평화와 민족의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자라야 혁명가라 할 수 있다”(爲世界和平幷民族自由而奮者方可謂革命家) 등의 휘호를 통해 임정 요인들의 대동단결과 자립, 자유에 대한 열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황금돼지해 ‘인생 일출’… 여기서 소원을 말해봐

    황금돼지해 ‘인생 일출’… 여기서 소원을 말해봐

    울산 간절곶 올해 15만명 방문 예상 진해 공원·왜목마을, 한 자리서 일출·일몰 제주 1일 0시 한라산 야간산행 특별 허용 정동진 모래시계 회전식… 속초선 불꽃쇼이제 25일로 ‘무술년’(戊戌年)을 엿새만 남겼다. 바짝 다가선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의 희망을 품으려는 새해 첫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발길을 유혹한다. 24일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기해년 첫 일출은 2019년 1월 1일 오전 7시 31분 울산 간절곶으로 시작으로 포항 호미곶(오전 7시 32분), 강릉 정동진(오전 7시 39분), 서울(오전 7시 47분) 등 한반도를 비춘다. 전국에서 맑은 날씨로 예보됐다.‘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울산 울주군 간절곶에는 올해 15만명가량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마다 10만명 이상 손님을 맞는 간절곶에서 방문객들은 오는 31일 밤부터 새해 첫날 아침까지 하룻밤을 꼬박 새운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경기 회복, 가족 건강, 자녀 취직, 연인 간 사랑, 학생 수능 합격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축하공연, 카운트다운, 해상 불꽃놀이, 레이저 쇼, 기원무 공연, 희망 태양 띄우기 등 볼거리가 넘친다. 무료로 떡국도 나눠 준다. 경남 진해공원은 바다에서 해넘이와 해돋이를 구경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시는 내년 1월 1일 오전 5시 30분부터 솔라파크 전시동 4층 로비를 비롯해 공원 일대를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한다. 안전을 위해 솔라타워 출입은 통제한다. 일출 시간인 오전 7시 30분을 전후로 해맞이와 소망 달기 등을 진행한다.제주 성산일출축제는 오는 30일부터 사흘에 걸쳐 열린다. 일출희망 퍼레이드, 명사와 함께하는 일출 바닷길 걷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감귤, 돈육, 은갈치 등 지역특산품 시식회도 마련한다. 한라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1일 0시부터 해맞이 한라산 야간산행이 특별 허용된다. 한라산국립공원에서는 탐방객 안전을 위해 성판악 탐방로 등에 직원을 배치, 비상근무를 실시한다.한반도 시작인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도 오는 31일 해넘이·해맞이를 잇달아 만날 수 있다. 31일 오후 1시부터 버스킹 공연을 시작으로 전망대 봉수대에서 열리는 해넘이 제례와 각종 공연을 버무린 어울림 한마당이 펼쳐진다. 자정에 펼쳐지는 불꽃놀이, 강강술래 댄스를 비롯해 1일 오전 6시부터는 띠배 띄우기와 풍물놀이 등 볼거리를 선사한다. 충남 당진시 석묵면 왜목마을과 서천군 서면 마량포구는 서해안에서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왜목마을은 인근 장고항의 노적봉 남근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이번엔 국내 해상 조형물 중 가장 높은 30m 높이의 상징조형물 ‘새빛 왜목’이 만들어져 볼거리를 더했다. 강원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모래시계 공원에서는 지름 8.06m, 폭 3.20m, 모래 무게 8t의 세계 최대규모 모래시계 시간을 다시 돌리는 회전식이 오는 31일 자정에 열린다. 앞서 전국 장기자랑대회와 어울림 한마당 등 여러 공연과 체험 행사가 마련된다 또 속초시는 해변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7분간 화려한 불꽃 향연을 신호탄으로 축제를 시작한다. 1일 오전 6시 30분부터는 새해를 기념하는 속초시립풍물단의 북 공연, 성악 중창 등이 펼쳐진다. 가훈·휘호 써주기, 스마트폰 무료 사진 인화 등 부대행사도 이어지며, 추위를 이기도록 돕기 위해 떡국과 따뜻한 음료도 제공한다. 산불 예방을 위해 행사장 내에서 폭죽, 풍등 사용과 판매는 금지된다. 김철수 속초시장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가슴 속에 솟구치는 희망을 하나씩 담아 가도록 애쓰겠다”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속초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박정희 탄생 101돌’ 숭모제·기념식 구미·문경서 열려

    ‘박정희 탄생 101돌’ 숭모제·기념식 구미·문경서 열려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1돌 숭모제 등 기념행사가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사곡동 박정희 생가와 인근 박정희기념공원, 문경시 청운각에서 각각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생이다.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 주관으로 열린 숭모제에는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탄생을 기념했다. 숭모제에서 초헌관은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 아헌관은 김태근 구미시의회 의장, 종헌관은 생가보존회 전병억 이사장이 맡았다. 이어 생가 옆 특설무대에서 시민 등 1500여명이 참가해 기념식과 함께 박 전 대통령 일대기와 18년 업적을 영상으로 보여줬다. 지난해 5000여명 이상이 참가해 박 전 대통령 100주년을 축하했던 분위기와는 크게 달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기념식 축사에서 “박 전 대통령은 5000년 역사에서 굶주림을 해결하고, 고속도로·공단 건설로 산업국가를 일궈냈다”며 “그의 위대한 업적은 아무리 깎아내리고 거부하려고 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고 대한민국 역사에 깊이 각인됐다”고 말했다. 기념식에 이어 대북 공연, 국악과 재즈의 만남 등이 펼쳐지고 박정희 사진·휘호 전시회, 붓글씨 체험 등 부대행사도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이 1937년부터 4년간 교사(문경초등학교)로 근무하며 하숙 생활을 한 문경시 문경읍 청운각에서도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101회 탄신 기념식이 열렸다. 구미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中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삼학사비, 복제비마저 잡목에 묻힌다

    中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삼학사비, 복제비마저 잡목에 묻힌다

    우리 민족 최대 치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삼배구고두’(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로 불리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남한산성 항복이다. 이때 침략국 청나라에 항복하거나 청과 화의를 맺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가 처형된 세 신하 오달제·홍익한·윤집이 있었다. 이들의 충절 및 절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삼학사비’가 선양 외곽 한 창고와 풀숲에 방치돼 잊혀 가고 있다. 역사를 망각하면 미래가 없다고 한다. 선양에 방치된 삼학사비를 지난 22일 찾아봤다.●요녕발해대학 설립자 천문갑 학장 숨져 폐교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난 택시는 덜컹거리며 10분여 인적이 끊긴 선양시 허핑구 경진로 재개발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폭 6m 철문이 나타났다. 그 너머로 예쁘장한 5층짜리 건물이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질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조선족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중국 내 유일한 ‘요녕발해대학’ 본관이다. 설립자인 천문갑(조선족 과학자) 학장이 2009년 지병으로 숨지면서 문을 닫았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50대 후반 남성이 본관 안으로 안내했다. 쇠사슬로 잠금장치를 한 낡은 여닫이 쌍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 양쪽 가득 종이 상자가 쌓여 있다. 왼쪽은 매점이다. 상자를 치워 가며 복도 끝 오른쪽 방문 앞에 이르자, 비로소 ‘전시실’이란 푯말이 보였다. ●발견된 비신은 요녕발해대학 전시실에 보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면 가득 사진과 설명문이 붙어 있다. 그 한가운데 비스듬히 깨져 나간 육중한 비석이 붉은 테이블보 위 유리관 안에 누워 있다. 삼학사비다. ‘비두’라 불리는 머리 부분은 중국 문화대혁명기(1966~1976년) 때 훈허강변에 버려진 뒤 발견되지 않고 있고, 몸체 격인 ‘비신’만 발견돼 보관 중이다. 13년 전 사비를 털어 이 전시실을 꾸민 김용규(60) 전 요녕발해대학후원회 비서실장이 전등을 켜고 삼학사비 앞에 서서 한참을 묵념했다. 착잡한 그의 표정에서 삼학사가 느꼈을 망국의 설움이 보이는 듯했다.건물 밖으로 나와 왼쪽 풀숲을 더듬거리며 들어가 보니 거대한 비석이 나타났다. 높이 390㎝, 가로 83㎝, 두께 26㎝의 삼학사비 복제비이다. 2005년 허창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계룡건설 도움으로 2개의 복제비를 만들었다. 1기는 그해 6월 국내로 옮겨져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 세웠으며 다른 1기는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농가의 주춧돌로 사용될 뻔했던 원비(비신)는 앞서 봤던 요녕발해대학 내 전시실 유리관 안에 보관하고 있다. 복제비가 세워진 곳은 13년 전 깔끔했던 공원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카시아 등 잡목과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잡초로 뒤덮여 있다. 정문 경비원이나 학교 관리원이 한 시간이면 정리정돈할 수 있을텐데 안타깝다. 대학 설립자 유가족들이 삼학사와 삼학사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태종은 1636년 조선을 침략해 2개월 만에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철군할 때 약 60만명의 우리 백성을 포로 또는 노예로 끌고 갔다. 당시 조선 인구는 200만명 내외로 추정된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 항복하거나 화친을 반대한 오달제·홍익한·윤집 등 신하 셋(삼학사)도 선양으로 끌려갔다. 신하가 되라며 고문하고 회유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형했다. 청태종은 그러나 삼학사의 굳은 충절과 절개에 감동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비와 사당을 세워 매년 제를 지내 삼학사의 넋을 위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한’은 조선을 의미하고 ‘산두’는 삼학사의 정신이 태산처럼 크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없이 빛난다는 뜻이다. 청태종이 세운 비는 세월이 흘러 청이 멸망하면서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33년 오달제 선생 후손 등에 의해 머리 부분이 발견돼 1935년 10월 항일운동의 한 방법으로 다시 중건됐다. 이후 모택동 집권 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다시 파괴돼 선양을 가로지르는 훈허강에 버려진 것으로 전해진다.●3년치 급여 털어 비신 구입… 재중건 뜻 못이뤄 한동안 잊혔던 비는 1990년 비신 부분이 중국 농민에 의해 발견됐다. 중국인이 밭갈이하다 발견한 바위를 주춧돌로 사용하려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고 문밖에 내놨다. 중국 에서는 글이 새겨진 돌은 집 안에 두지 않는다. 길을 지나던 조선족 교원이 비문을 보고 중국 당국에 보관해 달라고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삼학사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거절됐다. 다행히 당시 랴오닝대학 교수이자, 중국 조선족과학자협회 천문갑 부이사장이 3년치 급여를 들여 구입해 보관해 오다 1992년 요녕발해대학을 설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천 학장은 선양 일대 동포 유지들을 모아 삼학사비 재중건 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변 도움으로 복제비 2개만 만드는 데 그쳤다. 김 전 비서실장은 “순국열사들의 행적을 찾고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책무”라며 안타까워했다. 글 사진 선양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모더니즘 소설가와 신여성의 결혼 이상·정지용 기상천외 축하 방명록

    1934년 10월 24일 모더니즘 소설가 박태원과 신여성 김정애의 결혼식은 식민지 조선과 경성 문화계의 일대 사건이요 화제였다. 하객의 명단을 보면 이상, 이무영,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 조벽암, 김상용 등 구인회 동인과 김진섭, 안석영, 안회남, 유엽, 이석훈, 이하윤, 정인택 등 작가들의 이름이 보인다. 화가로는 김규택, 윤희순, 이승만 등이 축하 휘호를 남겼다. 양장본 형태의 스케치북이 결혼식 방명록을 대신했는데 하객 30명 전원이 기상천외한 축하 글과 그림을 남겼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대 문단, 경성 문화계의 풍속을 보여 주는 특별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를 모아 ‘구보 결혼’이라는 소장유물자료집을 펴냈다. 방명록의 첫 페이지는 절친 시인 이상이 장식했다. 이상은 ‘면회사절 반대 이상(以上)/결혼은 곧 만화에 틀림없고/ 만화의 실연(實演)에 틀림없다/만화실연의 진지미(眞摯美)는 또다시 만화로-윤회한다’라는 5줄짜리 글을 적었다. ‘以上’(이상의 필명 중 하나)은 만화처럼 결혼하는 구보가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함께 월북한 경성제일고보 동기 정인택도 휘호를 남겼는데, 그의 미망인은 북한에서 구보와 재혼한 권영희이다. 그녀는 실명한 구보의 구술에 의지해 박태원의 후기 대표작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했다. 방명록에서 정지용은 ‘太和(태화)/꽃 피였으니/열매 맺고/뿌리는 다시/깊히!/지용’이라는 시를 바쳤다. 이태준은 ‘1+1=1’이라는 수식을 적은 뒤 봉숭아를 한 개 그려 놓았다. 박태원의 결혼식은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발표한 지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어머니 남양 홍씨의 소원을 이뤄 준 셈이다. 양가 모두 한약방을 운영하는 넉넉한 집안답게 전통혼례와 신식을 절충한 시끌벅적한 잔치였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한한국 교수가 작곡하고 태진아가 부르는 신곡 ‘그게 답이야’ 주제는 희망·평화의 메시지

    한한국 교수가 작곡하고 태진아가 부르는 신곡 ‘그게 답이야’ 주제는 희망·평화의 메시지

    “국민가수 태진아님이 불러 매우 영광스럽고 국민들에게 오래오래 사랑받는 노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14일 한한국 세계평화작가에 따르면 국민 트롯트 가수 태진아가 지난 10일 싱글앨범과 함께 멜론·벅스·지니뮤직·엠넷 등 음악사이트에 신곡 ‘그게 답이야를 발표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번 신곡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평화의 노래를 선물하고자 경기 김포시 홍보대사이며 세계평화작가인 한 석좌교수와 윤소천 시인이 손을 잡고 금영그룹 김진갑 회장과 공동 작사·작곡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작가가 평화지도를 제작하다 10년전에 느낀 바를 그대로 만든 곡에, 윤 시인이 작사에 도움을 줬다. 그런 다음 금영그룹 김진갑 회장이 노래 2절 부분을 개사했다. 신곡 앨범 재킷에 한 교수가 친필 휘호로 ‘그게 답이야’ 작품을 디자인했다. 음반은 국내 노래 반주기 시장 점유율 1위 금영그룹이 제작했다. ‘그게 답이야’ 곡은 리듬이 경쾌하고, 흥이 절로 생기는 곡이다. 우선 멜로디가 쉽고 한번 들으면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으며, 명쾌하고 시원한 인생의 답이 노랫말에 담겨 있다. 또 태진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가창력과 창법, 보이스가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진 곡으로 ‘그게 답이야’는 벌써부터 유행어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 금영 신곡 차트포스터와 함께 금영노래방에 등록됐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호남제일성 전라감영 복원 상량식

    전라감영 복원사업의 핵심인 선화당에 대들보를 엊는 상량식이 25일 거행됐다. 상량식에는 송하진 전북지사, 김승수 전주시장, 이재운 전북도 문화재위원장, 이명우 전라감영재창조위원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전라감영 복원사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인 최기영 대목장 등 전통건축 장인들이 참여해 기둥 세우기, 대들보 올리기, 포작(包作) 설치 등 가구재 조립을 마치고 이날 상량에 이르게 됐다. 상량식은 길놀이 풍물공연을 시작으로 경과보고, 상량 고유제, 상량문 봉안 순으로 진행됐다. 상량 고유제는 송하진 전북지사가 첫 술잔을 따르는 초헌관을 맡았고 두번째 술잔을 따르는 아헌관은 김승수 전주시장이, 종헌관은 이명우 전라감영 재창조위원장이 맡았다. 상량문에는 선화당의 가치와 복원 경위 및 의미 등을 담았다. 상량문은 선화당 어칸 도리 부재 상부에 넣어 봉안했다. 상량 묵서는 서홍식 한국서도협회 공동회장 겸 전북지회장이 휘호했다. 앞으로 복원공사는 서까래 설치, 지붕기와 잇기, 미장공사, 창호공사 등을 거쳐 내년 말 완공할 예정이다. 전라감사가 집무를 보던 정청(政廳)인 선화당과 함께 부속건물 6동도 복원된다. 부속건물은 전라감사 가족이 살던 관사인 내아와 연신당, 고위 관료용 사랑방인 관풍각, 전라감사를 보좌하던 벼슬아치들 사무실인 비장청 등이다. 송하진 전북지사는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이하는 올해 전라감영 복원은 전북인의 자긍심을 되살리는 일이다”며 “전라감영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복원해 전북 자존의 시대를 힘차게 열어나가자”고 말했다. 김승수 전주시장도 “전라감영은 아시아문화심장터의 심장과 같은 곳”이라며 “단순한 건축물 복원이 아니라 전주시민의 자존감을 세우고 전주문화의 정수를 살려서 찬란한 전주시대를 열어갈 핵심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편 전라감영은 조선 태조 4년(1395년)부터 고종 22년(1895년)까지 전라도와 제주도를 다스렸던 중심 관청이다. 그러나 갑오개혁(1895년)으로 팔도제가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에는 주변에 상업시설이 난립하면서 위축됐다.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주요 건축물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옛 도청사 지하에 쌓아둔 포탄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풍운아 JP의 말말말… ‘춘래불사춘부터 몽니까지’

    풍운아 JP의 말말말… ‘춘래불사춘부터 몽니까지’

    23일 별세한 JP는 화려한 정치이력 만큼이나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답답한 심경과 정치 현실을 은유적이고 시적인 용어로 표현하면서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그의 말 중에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공격은 드물었다. 혹자는 그의 말에 산이 있고 바람이 있고 물이 있다고도 했다.1980년의 ‘서울의 봄’을 두고 JP는 ‘춘래불사춘’이라고 했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상당수 국민들은 어둡고 긴 유신의 터널이 끝났다고 믿었다. JP는 박 전 대통령을 이을 2인자로 주목받았고 이윽고 3김씨가 정치의 전면에 다시 나서면서 민주주의 시대가 온 듯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신군부는 3김씨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JP는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됐다. DJ도 소요 조종 혐의로 잡혀 갔다. YS는 공직을 박탈당하고 가택연금됐다. 당시 연행에 앞서 이미 시대현실을 직시하고 표현한 JP의 ‘춘래불사춘’은 그의 수많의 명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1990년 3당 합당 뒤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이른바 ‘마산파동’을 일으키자 JP는 이를 “틀물레짓”이라고 빗대어 비난했다. 행동이 어린애같이 서투르고 유치하다는 충청도 사투리다. 그러나 YS는 그냥 넘어갔다. 비난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생소하고 왠지 구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5년 설움을 딛고 민자당에서 탈당해 거대 야당인 자민련으로 재기한 뒤 국회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내놓은 “사랑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발언도 대히트였다. 대권을 거머쥔 뒤 자신을 팽했던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 대한 절절한 질책과 충고 뒤에 나온 연설로 상대인 민자당 의원들의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JP는 중학 3,4학년 때 독서의 절정기를 맞았다고 한다. 1야1권 독파주의라는 목표로 매일밤 하루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자신의 독서 버릇을 가리켜 난독(亂讀)의 시대였다고 회상했다. 닥치는대로 읽은 것이다. 주로 읽은 책은 역사와 전기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시로 사전을 뒤적이면서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그 뜻을 검토하는 세심한 준비 과정을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JP의 말 중 압권으로는 ‘몽니’가 꼽힌다. 1998년 12월 15일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이 ‘내각제 개헌연기론’을 제기하고 국민회의 측이 ‘내각제 개헌 유보’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참을 때 까지 참는 게 지성이지만 그래도 안 되면 몽니를 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현장 기자들은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을 부리는 성질’이라는 몽니의 뜻을 몰라 해석을 부탁하는 해프닝이 일기도 했다. 이후 JP에게 ‘몽니 정치’는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다음은 생전에 고인이 남긴 주요 어록. ▲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1963년. 일본과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자) ▲ 자의 반 타의 반(1963년 2월. 증권파동 등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1987년. 저서 ‘새 역사의 고동’) ▲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1987년 11월 3일. 관훈토론회) ▲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1990년 10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며) ▲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1995년 1월 1일. 민자당 대표시절 민주계의 대표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덕담하자) ▲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1995년 6년 13일.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유세) ▲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다(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해) ▲ 줄탁동기(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조직인 민족중흥회 회보에 사용한 신년휘호. 중국 송나라 선종의 대표적 전적인 벽암록 글귀. 병아리가 건강하게 부화하고자 알 속에서 두드려 나갈 때가 됐음을 알리고 어미닭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밖에서 알을 쪼아 껍데기를 깨줘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히 맞아야 한다는 뜻.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는 해석) ▲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1997년 5월 29일.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 이인제 후보가 우리를 늙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씨름 한 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코 이 후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젊다(1997년 12월 3일. 충북 괴산 정당연설회에서) ▲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1998년 6월 27일. 총리 서리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덜어질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 시인 프로스트가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앞으로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겠다(1998년 10월 16일. 동의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특강) ▲ 미리 왕성한 상상력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행보를 좁히거나 의지를 약화시키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때를 맞춰야 하고 그러고도 안 될 때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1998년 12월 15일. 자민련 중앙위원회 연수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약속 불이행을 우려하면서 발언) ▲ 백날을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2000년 5월 2일. 일주일만에 당사에 출근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동 가능성을 묻자) ▲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다(2001년 1월 9일.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4·13 총선 때 자신을 ‘서산에 지는 해’로 표현한 것을 두고)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세종대왕 행차요!… 행궁밥상·약수칵테일 대령이요~

    세종대왕 행차요!… 행궁밥상·약수칵테일 대령이요~

    전직 대통령들의 탄핵과 구속 등으로 우울한 요즘 위로를 받고 싶다면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를 추천한다. 충북 청주시가 오는 25일부터 3일간 청원구 내수읍 초정문화공원 일원에서 개최하는 이 축제는 자신보다 먼저 백성을 생각해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다. 우리도 자랑할 만한 국가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가슴이 뿌듯하지 않을까. 더불어 세계 3대 광천수로 인정받고 있는 초정약수를 마음껏 즐겨 볼 수 있으니 요즘 말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 최고의 축제다.●세종 2회 123일간 머물며 눈병 치료 15일 청주시에 따르면 세종대왕과 초정약수가 축제를 통해 ‘한몸’이 된 것은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400년대로 가보자. 세종대왕은 1432년부터 눈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다음 해부터 당뇨까지 겹쳐 합병증까지 찾아왔다. 세종대왕은 눈병 치료를 위해 충남 온양온천 등에서 요양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낙심한 세종대왕은 다시는 온천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1444년 반전이 있었다. 청주에 후추 맛 같은 ‘초수’라는 물이 있는데 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세종대왕은 청주행을 결심하고 4~5일이나 걸려 청주를 찾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내수읍 초정리에 행궁(行宮)을 짓고 1444년 3월과 9월 두 차례로 나눠 총 123일간 머물며 눈병을 치료했다. 행궁은 왕이 본궁 밖으로 나가 머무는 임시 궁궐을 말한다. 세종대왕은 초정에서 한글 창제의 마무리 작업도 진행했다. 또한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지역민들의 여론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는 등 민본정치를 실현하기도 했다. 축제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시작돼 올해 12회를 맞는다. 축제의 백미는 세종대왕이 한양을 떠나 초정리로 오는 모습을 재현하는 어가행렬이다. 그동안 시는 어가행렬을 선보이면서 고종황제의 증손자를 세종대왕으로 분장시켜 참여시키고 수백명을 투입했다. 지난해 축제 때는 청주대 학생들과 군 장병 등 200여명이 왕비, 호위 무사, 신하, 궁녀, 장군, 선비 등의 의상을 입고 충북소주 공장에서 초정문화공원까지 2㎞ 구간에서 어가행차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규모를 축소하는 등 변화를 주기로 했다. 축제 둘째 날인 26일 오후 초정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어가행렬에는 대학생 등 100여명이 참여한다. 또한 사물놀이패 등 시민공연팀이 어가행렬에 참여해 분위기를 띄운다. 어가행렬의 주인공인 세종과 소헌왕후는 전국 공모를 통해 선발한다. 나이 등 자격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남녀가 동반 신청만 하면 된다. 뽑히면 각각 상금 100만원을 받는다.●식욕 증진·소화 촉진·구토 진정에 효과 어가행렬 규모를 줄인 것은 실제 초정으로 오던 세종대왕의 어가행렬이 소박했기 때문이다.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수와 수라상을 올릴 몇몇 사람, 집현전 학자, 각종 행사를 그리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도화서 화공 등만이 함께 했을 뿐 취타대도 따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이동암 청주시 축제담당은 “그동안 어가행렬이 보여주기였다면 이번에는 모두가 참여하는 어가행렬이 될 것”이라며 “축제의 재미가 배가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 축제 기간 동안 행사장에서는 세종대왕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조선시대를 느낄 수 있는 한옥 형태의 가건물을 만들어 한글 이름 도장 만들기와 휘호 쓰기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먹었던 음식을 직접 맛보는 행궁 밥상 체험 부스가 운영되고 조선시대 저잣거리가 조성돼 눈과 입이 심심할 틈이 없다. 집현전과 내의원, 수라간도 꾸며진다. 행사장 한쪽에는 별빛정원이 조성돼 아름다운 야경도 볼 수 있다.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펼쳐진다. 초정에 머물며 마을 주민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고 옷감을 하사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이번 축제의 한 축인 초정약수는 600여년 전에 발견됐다. 행사장을 방문하면 약수로 족욕을 하고, 약수로 만든 칵테일을 마셔 볼 수 있다. 행사장 방문객들이 약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시음대도 마련된다.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폴리나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로 인정받고 있는 초정약수는 유리탄산, 칼슘, 나트륨, 중탄산, 칼륨, 마그네슘, 이온이 많이 들어 있어 피부 미용에 좋다. 자체 탄산가스가 살균 작용을 해 위생적이다. 지하 50~100m에서 석영 암반을 뚫고 솟아나 허드렛물이 끼어들 틈도 없다. 한 모금 마시면 쌉싸래하며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감미료 등을 첨가하지 않은 싱거운 사이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조성렬 충북보건환경연구원 먹는물검사과장은 “탄산가스를 함유한 물이 피부에 닿으면 항균 작용을 하고 혈관을 확장시켜 준다”며 “이 때문에 초정약수탕에 들어가 앉으면 사타구니 등 예민한 곳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물을 마시면 식욕 증진, 소화 촉진, 구토 진정 등의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초정리 물이 좋다 보니 주변에 탄산수 등을 생산하는 일화, 충북소주, 롯데주류 등의 공장이 가동 중에 있다. 초정약수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 수 있는 목욕탕도 2곳이 있다. 김인석 내수읍장은 “주말이면 약수를 즐기기 위해 관광버스를 타고 초정을 찾는 외지인들이 많다”며 “임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이 요양을 위해 찾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주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시는 관람객 편의를 위해 축제 기간 중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청주 시내와 초정약수를 잇는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정부 외교력 시험대…자주·실리외교 밑거름 된 서희 선생의 강직함 배워야”

    “정부 외교력 시험대…자주·실리외교 밑거름 된 서희 선생의 강직함 배워야”

    “27일 남북 정상회담과 이어 열릴 북·미 대화 등 북핵 해결을 위한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정부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한 시기에 국민 모두가 외교가·협상가인 서희 선생의 업적을 기억하고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서희 선생, 우리 외교 빛낸 인물 1호 장위공 서희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외교적 리더십을 되새기고자 서희테마파크와 서희역사관을 조성한 3선의 조병돈 이천시장은 2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대사를 앞두고 선생의 외교적 지략과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왜 서희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교가는 거란의 소손녕을 찾아가 외교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되찾은 서희 선생이다. 당시 고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정확히 꿰뚫고 당당한 자세와 논리로 상대의 의중과 약점을 파고든 위대한 협상가다. 현재 우리는 국가 차원의 외교 역량을 키우기 위한 어떤 정책이나 인재 육성 방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천시가 서희테마공원을 조성하고 서희 문화제 등 장위공 선생 선양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는 위대한 외교가이자 협상가인 선생의 정신을 계승 발전해 우리 외교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천시가 국립외교원에 서희 선생 흉상을 건립했는데. -시는 2008년 서희 선생을 범국가적으로 선양하고자 외교부에 흉상 설치를 요청했다. 외교부 청사에 건립되기를 희망했으나 청사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못해 지금도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 후 2009년 외교부는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1호’로 서희를 선정했다. 이것만 봐도 우리 외교사에서 차지하는 선생의 빛나는 업적과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이천시도 이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서희 선생 묘지순례 대행진, 휘호대회, 전국 초·중·고 미술대회와 추모제 등 선생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市, 선양사업 추진… 업적 계승 발전 →청소년들은 선생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 -외교관이 되고 싶은 청소년들은 선생의 외교력이나 협상력 이전에 그분의 강직함을 먼저 배웠으면 한다. 선생은 임금 앞에서도 옳고 그름에 대해 할 말을 했다. 이런 당당함이 거란의 80만 대군 앞에서도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외교관을 꿈꾸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모든 청소년들이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하고 선생의 탁월한 협상력과 논리, 강직함을 배웠으면 한다. 이천시도 선생의 업적을 꾸준히 연구하고 계승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선양사업을 펼치겠다. 글 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남편·아들 대통령 만든 ‘정치명가 大母’

    남편·아들 대통령 만든 ‘정치명가 大母’

    수수한 옷차림·가짜 진주목걸이 소박한 ‘국민 할머니’로 사랑받아 바버라 부시는 조지 H W 부시 미국 41대 대통령의 부인이자 조지 W 부시 43대 대통령의 어머니로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남편과 아들의 대통령 취임을 모두 지켜본 여성이다. 퍼스트레이디일 때는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내조형’으로 이미지를 남겼고, 수수한 옷차림에 가짜 진주목걸이도 주저하지 않고 드러내면서 소박한 ‘국민 할머니’로 사랑받았다. 남편, 장남뿐만 아니라 작은아들 젭 부시도 전 플로리다주 주지사이자 201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쟁자로 성장하면서, 바버라는 미국 정치 명가를 일군 대모(大母)로도 불렸다.부시 가문의 대변인 짐 맥그래스는 17일(현지시간) 바버라의 영면을 알렸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CNN 등 미 주요 매체도 일제히 바버라의 일생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애도를 표했다.바버라는 1925년 뉴욕의 명문가인 ‘피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16세였던 1941년 크리스마스 댄스 파티에서 부시 전 대통령을 만나 1945년 1월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결혼했다. 올해 1월 결혼 73주년을 맞아 미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결혼 생활을 한 대통령 내외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백혈병으로 3살 때 세상을 떠난 로빈 부시를 포함해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뒀다. 손주 17명, 증손주 7명이 있다.바버라는 전형적인 내조형 퍼스트레이디로 꼽힌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사업과 정치를 도왔다. 1989년 1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영부인이 된 뒤에는 논쟁적인 이슈에 대한 공개 발언을 자제했다. NYT는 “그는 판단력이 빠르고 인기 있는 연설자로서 남편의 큰 정치적 동맹이자 자산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임기 초반 조지 H W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20% 아래로 곤두박질쳤을 때도 바버라의 지지율은 40%에 육박했다. 아들 둘을 대통령, 주지사로 키웠을 만큼 자식 뒷바라지에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평소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데 조심했지만 2016년 젭 부시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었을 때 “트럼프는 여성과 군대에 대해 끔찍한 말을 한다. 사람들이 왜 그를 지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공격하는 등 자식의 선거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남편 부시 전 대통령이 1981년부터 8년간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 바버라는 문맹 퇴치 운동을 주도했다. 남편이 대통령에 취임한 1989년에는 ‘바버라 부시 가족 독서교육 재단’을 설립했다. 미국인들은 새하얀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수수한 옷차림을 즐기며, 가짜 진주목걸이를 자랑하는 바버라를 사랑했다. 남편이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 “부시 행정부의 성공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다”면서도 “난 결코 머리를 염색하거나 옷을 바꾸거나 살을 빼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는 등 외모에 대한 유쾌한 농담을 즐기며 미국인들에게 친근감을 안겼다. 1992년 1월 퍼스트레이디로서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 문화재를 둘러보고 붓글씨로 ‘한미 우호, 임신 새해 바바라 부시’라는 한글 휘호를 남겼다. 아들 부시 전 대통령은 “어머니는 굉장한 영부인”이라면서 “어머니는 늘 우리가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했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웃게 하신 분”이라고 애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퍼스트레이디인 멜라니아와 함께 공동 성명을 내고 “바버라는 미국 가정의 가치를 수호한 사람”이라면서 “이 나라와 가족에 대한 헌신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라고 위로의 뜻을 전했다. 장례식은 오는 21일 오전 11시 텍사스주 휴스턴의 세인트 마틴 교회에서 열린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Barbara Bush 1925~2018 1925년 6월 8일 출생 / 1941년 조지 H W 부시와 교제 / 1945년 1월 6일 조지 H W 부시와 결혼 / 1946년 7월 6일 장남 조지 W 부시 출산 / 1989년 1월 20일 남편 미 41대 대통령 취임 / 1989~1993년 미 영부인 / 2001년 1월 20일 장남 미 43대 대통령 취임 / 2018년 4월 17일 사망
  • [열린세상] 대통령의 선물/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대통령의 선물/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바야흐로 남북 긴장을 해소하는 분위기가 빠르게 조성되면서 4, 5월에 수많은 남북 문제를 둘러싼 열강들과의 정상회담이 줄을 서고 있다. 어느 때보다 한국의 외교적인 역량이 필요한 지금이다. 그런데 선물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가 간의 대화에서 무언의 메신저 역할을 해 왔다. 다른 나라에서 받은 선물은 국가원수의 권위를 강조하는 주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왕국의 성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를 비롯한 고대 근동의 왕들은 사방에서 들여온 전리품과 사신의 선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를 두었고, 신하나 사신들에게 보여 주며 자신의 권위를 자랑했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중국에서 호랑이 계통의 모피로 유명했다. 제나라 환공을 섬겼던 관자는 고조선의 호랑이 가죽은 제왕의 상징이니, 중원의 각 제후국에 선물한다면 모두 복속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중원 제후국 간의 선물로 고조선의 특산품이 사용됐다는 뜻이다. 신라의 계림로 고분에서도 중앙아시아 최고의 황금 보검이 발견된 적이 있다. 실크로드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 간에 외교적인 선물이 오고 간 결과였을 것이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접하는 최고의 보물들 대부분은 국가 간에 주고받은 선물의 흔적이다. 그리고 왕들의 보물창고는 근대 이후에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넘어가며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근대 박물관의 기원이 됐다. 1952년에 체결된 헤이그조약으로 폭력적인 수단으로 다른 나라가 가진 문화재를 반출할 수 없게 됐다. 대신에 문화재는 21세기 치열한 국제 외교 속에서 우호와 화해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됐다. 1990년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KTX 선정 사업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규장각의 의궤 1권을 방한 시에 가져온 바가 있다. 그리고 2009년 일본에서 돌려받은 북관대첩비는 남한을 거쳐 북한으로 반환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에서도 돌려받은 어보도 화제가 됐다. 물론 어보의 반환은 그 이전부터 추진돼 온 결과지만, 한국과 미국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문화재로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문화재를 통한 외교는 특히 러시아가 잘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2016년 9월의 G20 회의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난 푸틴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년 휘호를 선물했다. 당시 푸틴은 딸을 둔 아버지로서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며 이 선물을 건넸다. 아버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신년 휘호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길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음을 꿰뚫었던 선물이었다. 이 선물을 받고 두 달 뒤에 운명적으로 정권은 내리막길을 걸었으니, 어쩌면 예언적인 선물이었다. 1년 뒤에 푸틴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조선시대의 칼을 선물했다. 적폐청산과 개혁을 내세우는 새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한다는 뜻이었다. 자국의 특산품이나 자랑거리를 선물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상대국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상징적인 선물을 주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러시아 외교부 측은 우리나라 대통령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미국의 골동품 시장을 주목하며 유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유라시아 각국을 상대하는 노련한 러시아의 외교력이 발현된 것이다. 러시아가 1억 4000명밖에 안 되는 인구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경을 접하고 미국과 맞서는 강대국의 지위를 지켜 나가는 배경에는 무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접 국가들의 이해와 문화를 속속들이 파악한 뒤 웃음 속에서 건넨 선물 속에 그들의 힘이 숨어 있었다. 한반도에 부는 신데탕트의 분위기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이어 나가려면 외교력을 뒷받침하는 문화적인 역량 또한 중요하다.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을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압도할 수 없는 우리가 대화와 조정으로 외교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세계에 보여 줄 수 있는 문화적인 역량이 절실히 필요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지난 수십 년간 얽혀 있는 남북 관계의 매듭을 풀어 헤치는 데에는 날카로운 칼보다는 상대국의 이해를 간파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화해의 선물이 더 필요하다. 역사의 전환을 이루고 향후 수백 년을 두고 기억될 수 있는 멋있는 선물들이 오가는 4, 5월을 기대한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친필 ‘사람사는 세상’ 1600만원에 낙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친필 ‘사람사는 세상’ 1600만원에 낙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사람사는 세상’ 휘호가 치열한 경합 끝에 1600만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매는 100만원에서 시작해 총 91건의 응찰수를 보였다고 한다.미술품 경매회사 ㈜에이옥션에 따르면 지난 20일 마감한 2017년 마지막 미술품 경매의 낙찰총액은 2억원, 낙찰률은 75%를 기록했다고 이데일리가 21일 보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이번 휘호 작품은 2002년 민주당 서울지역 경선 마지막날인 4월 27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당시 노무현 고문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기 바로 직전이다. 노 전 대통령의 슬로건이었던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문구가 간결하게 적혀 있다.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높게 낙찰된 작품은 한글 서예가 평보 서희환(1934~1995)의 ‘용비어천가’다. 노 전 대통령의 휘호보다 110만원 더 비싸게 팔렸다. 낙찰 금액 1710만원으로 시작가의 약 34배에 달한다. 이외에 나란히 출품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수출입국’은 800만원에 시작해 1050만원에 낙찰됐다. 이데일리에 따르면 에이옥션은 1월 소품(小品) 기획 특별 경매를 열 예정이다. 출품 작품은 유명 작가의 소품으로 작지만 알찬 내용 구성을 가진 작품 위주로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70년 전 김구 친필 휘호 ‘풍송어주도안’ 첫 공개

    70년 전 김구 친필 휘호 ‘풍송어주도안’ 첫 공개

    백범(白凡) 김구(1876∼1949) 선생이 해방 이후인 1948년 1월 1일 동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기 위해 붉은 비단에 쓴 친필 휘호가 70년 만에 공개됐다.한국학중앙연구원은 23일 경기 성남 장서각에서 여는 학술대회 ‘선교장의 역사와 문화’에서 강원 강릉의 고택인 선교장(船橋莊)에서 소장하고 있던 김구 선생의 ‘풍송어주도안’(風送漁舟到岸) 휘호를 처음 공개한다고 22일 밝혔다. 글씨는 ‘바람은 고깃배를 연안으로 보내네’라는 뜻으로, 중국 시에서 ‘우최초자환가’(雨催樵子還家·나무꾼이 집에 돌아가길 재촉하고)와 대구를 이룬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해방 뒤 혼란하던 우리나라 정국이나 밖에 있다 돌아온 임시정부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는 의미를 주기 때문에 희망의 메시지로 인용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어보·국채보상운동·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됐다

    어보·국채보상운동·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됐다

    의례용 인장·옥에 새긴 어책 등 인류 문화사서 갖는 가치 인정 일제 항거해 비녀까지 판 국민…나랏빚 갚기 운동도 높게 평가조선 왕실의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이로써 한국이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은 16개로 늘어났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지난 24~2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3차 회의에서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심사해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이를 추인하며 등재가 확정됐다.조선왕실의 유물인 어보와 어책은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을 책봉하거나 존호, 시호, 휘호 등을 수여할 때 만든 의례용 인장과 책이다. 금이나 은, 옥에 아름다운 명칭을 새긴 어보 331점, 옥이나 대나무, 금동판에 책봉을 하거나 지위를 하사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책 등 어책 338점으로 이뤄져 있다. 이 유물들은 왕조의 지속성을 상징하고 왕에게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해 신성한 성물로 숭배돼 왔다. 조선이 세워진 초기부터 근대까지 570여년간 줄곧 제작·봉헌된 점, 시대별로 다른 내용과 문장 형식, 서체, 재료, 장식물 등이 사회의 변화를 오롯이 반영한다는 점 등에서 인류 문화사에서 갖는 가치가 인정됐다.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일제의 차관 공세에 맞서 국가적 위기에 힘을 모은 시민들의 책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로 평가받으며 세계기록유산에 추가됐다. 1907~1910년 나랏빚을 갚기 위해 남성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성들은 반지와 비녀를 파는 등 전 국민의 25%가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한 과정이 낱낱이 기록된 수기와 언론 보도 2472건으로 구성돼 있다.부산문화재단과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가 공동신청한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전쟁을 치른 양국이 사절단을 통해 문화 교류를 이어갔고 평화적인 관계를 이뤄냈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조선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간 일본에 12차례 파견한 외교사절의 외교·여정·문화 교류에 관한 기록 111건 333점을 아우른다. 문화재청은 “한국은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등 기존의 세계기록유산 13건에 이번에 등재된 3건을 더하며 기록 문화 강국으로 위상을 높이게 됐다”며 “앞으로도 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할 기록 유산을 적극 발굴해 우리의 우수한 기록 문화를 국내외에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네스코는 이번 회의에서 125건을 심사해 78건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새로 등재했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가 1992년부터 시작해 온 세계기록유산의 목록은 427건이 됐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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