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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철저히 외면한,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

    우리가 철저히 외면한,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김승섭 지음/난다/268쪽/1만 5000원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서해에서 폭침으로 배가 가라앉고 46명의 군인이 사망한 사건. 흔히 천안함 사건을 떠올리면 여기서 멈춘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날 배가 왜 가라앉았는지에 관심을 집중했고 진영을 나눠 다퉜다. 배에서 살아남은 58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이 폭침 당일에 한정된 용어가 아니라 그 이후 천안함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를 모두 포괄하는 단어가 돼야 마땅하다.” 성소수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세월호 피해자, 결혼이주여성, 소방관 등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약자들의 건강을 들여다본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가 천안함 사건 생존 장병들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풀어냈다.천안함 사건으로 숨진 장병들은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숭고하게 산화한 것으로 기억되지만 58명의 생존 장병들은 갖은 낙인과 편견,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2018년 생존 장병 24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 91.3%가 한 번이라도 PTSD를 경험했다고 답했고, 58.3%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고 이 가운데 29.1%는 시도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가운데 2001~2005년 PTSD 진단을 받거나 치료받은 사람이 13%였던 것에 비해 매우 높다. 이들을 특히 괴롭힌 건 ‘패잔병’이라는 낙인이었다. 배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을 잃은 이들에게 사망자의 시신 확인, 유품 수습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고, 국군수도병원에서 밤마다 헌병 조사를 받으며 배가 가라앉은 이유를 추궁받고 복무 태만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거듭 자책해야 했다. 김 교수는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 만에 최원일 당시 천안함 함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해야만 했던 상황이 이들에게 패잔병 멍에를 지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꼬집는다. 환자복을 입은 장병들은 동료를 지키지 못한 나약한 몸들로, 전투복을 입은 최 전 함장은 개인이 모든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비쳤다는 것이다.가까스로 군 생활을 이어 가면서도 “너네 둘이(생존 장병들) 붙어 있지 마, 천안함이라 께름칙해”, “너 때문에 배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라고 모욕을 당하거나 정신질환 치료를 받는 ‘불완전한 몸’이라는 편견, 트라우마로 승함 경력 점수를 채우지 못해 진급을 못 하는 등 주변의 차별도 끊이지 않았다.뒤늦게 알게 된 이들의 시간이지만 어딘가 기시감이 크다. 김 교수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의 기억도 꺼냈다. 단원고 학생 325명 가운데 살아남은 75명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을 잃고도 ‘운이 좋았다’는 반응에 가려졌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너는 어느 편이냐’를 따지는 진영의 리트머스지 같은 두 사건의 피해자들이 가진 상처에 공통점을 발견했다. “트라우마 생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라는 것과 “진영 논리의 폭력성과 편향적 사고가 만연했던 사건”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천안함을 옹호하기 위해 세월호를 비하하고, 세월호를 옹호하기 위해 천안함을 외면한 시간들이 꽤 오래 이어지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가려졌다.김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가 된다는 일은 간단치 않다”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피해자 이미지에서 어긋나는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이 아픔을 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기다려 주는 일, 그것이 너무 어려운 공간이라는 걸 두 사건이 미래의 피해자들에게 여전히 조심스레 외치고 있다.
  • ‘토지’의 무대 하동에 호텔급 한옥 숙박시설

    소설 ‘토지’ 무대로 유명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일원에 호텔급 한옥 숙박시설이 건립된다. 경남도와 하동군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22년 지역특화형 친환경 숙박시설 조성사업 공모에 한옥 숙박시설 ‘청송재’(靑松齋) 건립 사업이 선정됐다고 17일 밝혔다. 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호캉스(호텔)나 옥캉스(한옥) 등 숙박시설에 관광 수요가 집중되는 것에서 착안한 사업이다. 인구소멸도시를 대상으로 숙박시설을 통해 관광명소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청송재 조성 사업은 최참판댁 일원 8477㎡ 부지에 연면적 1122㎡ 규모의 한옥 숙박시설 4채를 조성하는 것이다. 토지 내용에 따라 최참판댁 일원에 조성한 김훈장댁과 김평산집 등 2채를 한옥 숙박시설로 새단장하고, 2채를 신축한다. 토지 세트장으로 썼던 초가집 12채를 공유 오피스, 판매 공간, 아트 갤러리 등으로 꾸민다. 국비 39억원 등 총 79억원이 들어가며 내년 말 완공 예정이다. 최참판댁 일원에는 하동군이 건립해 위탁 운영하는 한옥 숙박시설 한옥문화관(올모스트 홈스테이)이 있다. 한옥문화관은 신혼부부들에게 소문나 연 예약률이 96%에 이르는 등 인구소멸도시 하동군에 젊은 층을 불러들이는 효자 관광 시설이다.
  • 72년 만에 전달된 6·25 무공훈장

    72년 만에 전달된 6·25 무공훈장

    6·25 전쟁에 참전해서 낙동강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군인에게 수여된 무공훈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다 72년 만에 유족에게 전달됐다. 경기 안산시는 6·25 참전유공자인 고 홍순철(1928∼1950) 하사의 유족에게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72년 만에 대리 수여했다고 15일 밝혔다. 홍 하사는 1947년 입대한 뒤 육군 제8사단 소속(현재 오뚜기부대)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공비 토벌과 낙동강 전선 침공 저지에 공을 세우고 아군의 북진 공격 시도 등 반격에 기여했으나 1950년 7월 15일 전사했다. 전사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950년 12월 30일자로 무성화랑·금성화랑 2개의 무공수훈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며 상병에서 하사로 2계급 특진했다. 전시에 훈장이 유가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가 국방부의 ‘6·25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에 따라 72년 만인 지난 14일 조카인 홍일호씨에게 전달됐다. 홍씨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삼촌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애써 주신 국가와 안산시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와 유족들의 숭고한 뜻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 72년 만에 전달된 6·25 참전 무공훈장… 고 홍순철 하사 유족에 수여

    72년 만에 전달된 6·25 참전 무공훈장… 고 홍순철 하사 유족에 수여

    6·25 전쟁에 참전해서 낙동강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 세우고 전사한 군인에게 수여된 무공훈장이 전시라서 전달되지 못하다가 72년만에 뒤늦게 유족들에게 전달됐다. 경기 안산시는 6·25 참전유공자인 고(故) 홍순철(1928∼1950) 하사의 유족에게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72년 만에 대리 수여했다고 15일 밝혔다. 홍 하사는 1947년 입대한 뒤 육군 제8사단 소속(현재 오뚜기부대)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북한군 공비 토벌 및 낙동강 전선 침공 저지에 공을 세우고 아군의 북진 공격 시도 등 반격에 기여했으나, 안타깝게도 1950년 7월 15일 전사했다. 전사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950년 12월 30일 자로 무성화랑·금성화랑 2개의 무공수훈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며 상병에서 하사로 2계급 특진했다. 이후 70년 넘게 서훈되지 못한 훈장은 국방부가 유공자·유공자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하는 ‘6·25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에 따라 72년 만인 지난 14일 조카인 홍일호(반월신문 회장) 씨에게 전달됐다.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전하거나 접적지역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으로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며, 5등급으로 나뉜다. 훈장을 대신 받은 조카 홍일호 씨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삼촌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애써주신 국가와 안산시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화섭 시장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와 유족들의 숭고한 뜻을 절대 잊지 않겠다”라며 “보훈가족의 예우와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 서울예대 ‘삶의 빛’ 상에 노희경 작가 선정

    서울예대 ‘삶의 빛’ 상에 노희경 작가 선정

    서울예술대학교는 모교를 빛낸 동문에게 주는 ‘삶의 빛’ 상 수상자로 드라마 작가 노희경을 선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8일 서울예대 학위수여식장(아텍 301호)에서 열리며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생중계한다. 서울예대에 관계자는 “노희경은 문예창작 86학번으로 지난 20여년 동안 삶의 진정성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 완성도 높은 대본 등으로 매년 문제적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독보적인 드라마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전했다. 노 씨는 지난해 ‘제12회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삶의 빛 상은 서울예대에서 모교를 빛낸 동문에게 주는 상으로 2020년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 대표가, 2019년에는 ‘국제시장’ ‘베테랑’ ‘공작’ 등에서 주연을 맡은 황정민 배우가, 2018년에는 ㈜우아한 형제들의 김봉진 대표가 수상한 바 있다.
  • ‘녹두장군’·‘암태도’ 고 송기숙 소설가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녹두장군’·‘암태도’ 고 송기숙 소설가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지난해 12월 별세한 송기숙 소설가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황희 장관이 14일 정부를 대표해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고 알렸다. 문화훈장은 문화예술 발전과 국민 문화 향유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금관은 1등급 훈장에 해당한다. 송 소설가는 대표작 ‘녹두장군’, ‘암태도’ 등 민족의 수난사와 민중의 삶을 집중 조명한 소설을 통해 주목받았다. 20여년간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및 상임고문 등을 지내며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 특히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참여적 지식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현대문학상(1973), 만해문학상(1994), 금호예술상(1995), 요산문학상(1996), 후광학술상(2019) 등을 받았다.
  • 땅도 金도 빼앗겨도 한바탕 웃음… 슬프도록 신명 나는 ‘치유의 가락’

    땅도 金도 빼앗겨도 한바탕 웃음… 슬프도록 신명 나는 ‘치유의 가락’

    원제목은 김용환의 ‘눈깔먼노다지’수탈된 아픔, 신명으로 치환한 ‘만요’38세 요절할 때까지 가수·배우 활약 동생 김정구가 이어 부르며 알려져‘서울구경’ ‘오빠는 풍각쟁이’ 등 계승감내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을 겪었을 때 그것을 오히려 웃음으로 풀어 내는 슬기는 우리 한민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특히 국권을 강탈당한 일제 강점기에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치유 형식의 가요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중 하나가 만요(漫謠)다. 만요는 1930년대에 나타난 익살과 해학을 담은 노래로, 웃음과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코믹 송 장르다. 음악적으로는 트로트와 신민요는 물론 재즈 등 다양한 형식을 갖췄으며, 노랫말에 해학 및 골계적 성분이 있어 다른 장르와 변별된다. 이 같은 만요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노래가 김용환이 처음 부른 ‘노다지 타령’이다. ‘노다지 노다지 금 노다지/ 노다지 노다지 금 노다지/ 노다진지 칡뿌린지 알 수가 없구나/ 금 당나귀 나올까 기다렸더니/ 칡뿌리만 나오니 성화가 아니냐/ 엥야라차 차차 엥야라차 차차’‘노다지 타령’은 빅타레코드에서 1939년에 출반한 곡으로 ‘정어리 타령’과 함께 실렸다. 김용환이 곡을 쓰고 김성집이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출반 당시 ‘눈깔먼노다지’라는 제목이었지만, 김용환이 세상을 뜬 1949년 이후부터는 동생 김정구가 부르면서 대중에게는 김정구의 ‘노다지 타령’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노다지’는 풍부한 광맥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 확장해 금이나 재물 또는 행운을 뜻하기도 한다. 조선 말기 서세동점하는 열강들에 밀려 조선은 광물채굴권, 삼림벌목권, 철도부설권 등 자원에 대한 권리를 속속 외국에 내줬다. 이때 미국은 금광 사업에 관한 이권을 차지했다. 미국은 평안도 운산 광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금 채굴에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노동자들이 금을 발견하고 일제히 “금이다”를 외치면, 미국인 감독이 달려와 눈을 부릅뜨고 만지지 말라며 “노 터치!”(No touch)를 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운산 일대의 주민들이 미국 금광회사의 철조망으로 모여들자 이를 제지하려는 미국인들의 ‘노 터치’를 ‘노다지’로 알아들었다는 견해도 있다. 운산 금광에 노다지가 쏟아진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조선인 사업자들도 운산 금광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근대식 광산 기술자와 채광 기계를 갖춘 미국인들과 달리 전근대식으로 금맥을 찾는 조선인 사업자는 경쟁이 될 수 없었다. ‘집 팔고 논 팔아서 모조리 바쳤건만’이란 가사에서 보듯이 전 재산을 금광에 투자했지만 ‘나오라는 노다지는 안 나오고 칡뿌리나 도라지만’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미국인에게만 보이는 노다지. 그래서 ‘눈깔먼노다지’인 것이다. 그래도 화자는 자신의 노다지 사업을 ‘하룻밤 흥망춤’에 비기며, ‘물레’처럼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와 같이 곧 대운이 터질 것을 꿈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노다지 타령’은 굿거리 장단의 신명 나는 신민요이지만, 우리 땅에 묻힌 금을 남이 파 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수탈의 아픔이 녹아 있다. 그러나 원통하고 분하다고 해서 외세에 무작정 대항하면 혹심한 탄압을 받는 것은 물론 조선의 존립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리하여 골계적으로 외세의 수탈행위가 부당함을 고발하고, 내적으로는 슬픔을 한바탕 웃음으로 치환한 만요라는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강홍식의 ‘유쾌한 시골영감(서울구경)’,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 이종조·이진진의 ‘영감타령(잘했군 잘했어)’, 김용환의 ‘장모님전 항의’, 김정구의 ‘왕서방 연서’ 등에서도 볼 수 있듯 만요에는 풍자와 낭만, 해학이 서려 있다. 이 같은 만요의 전통은 해방 이후에도 한복남의 ‘빈대떡신사’, 김용만의 ‘월급날 맘보’, 최희준의 ‘엄처시하’로 이어졌다.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문희옥의 ‘천방지축’, 김용임의 ‘서울은 가고 있다’ 등도 만요 장르를 계승하는 노래들로 볼 수 있다.김용환은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의 형이며, 소프라노 김안라의 오빠다. 1912년생인 그는 38세에 사망할 때까지 음악인으로서의 재능을 펼치며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줬다. 1930년 무렵 원산 지역 극단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배우 겸 가수로 활약했다. 1933년 ‘이팔청춘’을 발표했고 왕수복과 듀엣으로 ‘최신 아리랑’을 냈다. 1943년 나운규의 극영화 ‘아리랑’을 악극으로 해석해 주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악극 ‘심청전’에서는 심봉사 연기를 펼쳤고, 아세아가요단을 운영하며 ‘심청전’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작사와 작곡에도 능해 ‘눈깔먼노다지’ 외에도 ‘장기타령’, ‘정어리타령’, ‘꼴망태 목동’, ‘가거라 초립동’, ‘어머님 전상서’ 등 작품이 있다.김정구는 그의 형 김용환 사후 한평생 ‘노다지 타령’을 그의 무대에서 불렀다. 1936년 뉴코리아레코드에서 김용환 작곡의 ‘삼번통 아가씨’를 최선과 듀엣으로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1938년 만요 ‘왕서방 연서’를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김정구는 ‘왕서방 연서’를 노래할 때면 이를 까맣게 칠해, 마치 이가 빠진 우스꽝스러운 중국인처럼 분장하고 노래를 불러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어린아이들도 ‘띵호와 띵호와’를 합창할 만큼 대단한 인기였다. 무대에 가만히 서서 정적으로 노래하던 당시 기발한 만요에 파격적인 제스처와 코믹한 율동을 곁들여 부르며 최고의 스타로 각광받았다. ‘앵화폭풍’, ‘총각 진정서’, ‘모던 관상쟁이’, ‘복덕장사’, ‘십삼도 총각회의’ 등이 당시 대표곡이었다. 이후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과 ‘바다의 교향시’로 오랫동안 사랑받았고, 1975년 가요계 사상 처음으로 회갑 기념 쇼를 열었다. 1980년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고, 1998년 미국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작곡가·문학박사
  • ‘아름다운 승계’ 구자홍 LS그룹 초대 회장 별세(종합)

    ‘아름다운 승계’ 구자홍 LS그룹 초대 회장 별세(종합)

    LS그룹 초대 회장을 지낸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이 11일 오전 별세했다. 76세. LS그룹은 구 회장이 오늘 오전 8시쯤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셋째 동생인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지난 2004년부터 2012년까지 9년간 LS그룹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46년 경남 진주 출신인 구 회장은 경기고 졸업 뒤 고려대 교육학과를 다니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 사업부 수입과에 입사한 그는 이후 반도상사 홍콩 지사장 중장을 거쳐 1983년 럭키금성상사 싱가포르 지사 본부장에 올랐다. 1995년 금성사가 LG전자로 이름을 바꾼 뒤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해 일하다 1998년 부회장, 2002년 회장을 지냈다. 이후 고인은 LS그룹이 2003년 LG그룹으로부터 전선과 금속부문을 계열 분리해 독립하면서 2004년부터 LS그룹 초대 회장을 맡아 2012년까지 그룹을 이끌었다. 그룹 회장직을 맡은 지 10년 만인 2012년 그는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사촌 동생인 구자열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며 ‘사촌 간 공동경영’이라는 승계 전통을 이어 갔다. 고인은 이듬해인 2013년 LS그룹의 연수원인 LS미래원 회장으로 옮기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5년에는 2014년에 세상을 떠난 동생 구자명 회장의 빈 자리를 채우며 LS니꼬동제련 회장에 복귀했다.고인은 주변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리더십을 지향했다. 부사장 시절을 포함해 LG전자 대표이사(CEO)로만 10년을 근무한 그는 LG전자의 디지털 사업을 지휘하며 ‘디지털 CEO’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계열 분리 후에는 LS 초대 회장으로 전기·전자, 소재, 에너지 분야에서 적극적인 인수합병과 해외 진출을 주도해 10년간 매출을 4배, 영업이익을 3배, 기업가치를 7배 키우며 회사를 재계 13위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등 성공적으로 그룹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사촌 동생 구자열 회장에게 잡음 없이 자리를 넘겨주면서 그룹 공동 경영의 모범 사례로도 꼽힌다. 고인은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해 인재 키우기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차세대 인재는 금수저, 흙수저 그리고 장애, 비장애 그런 구분이 없다. 그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일에 대한 열정, 사회를 향한 헌신만 있으면 된다”는 가치관을 밝히기도 했다. 소탈한 성품을 지닌 고인은 우리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고 가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강조하기도 했다. 부친 구태회 회장과 어머니 최무 여사를 90세가 넘도록 모시고 살았다. 그는 또 바둑에 대한 애정이 깊어 1997년부터 바둑 꿈나무를 육성하는 ‘꿈나무 프로젝트’를 통해 후원 활동을 해 오기도 했다. 이세돌 9단을 14세 때부터 지원한 것을 비롯해, 최철한 9단, 박영훈 9단, 조혜연 9단 등 스타급 기사들이 고인의 도움을 받았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전자산업진흥회 회장, 한국비철금속협회 회장을 지내며 금탑산업훈장, 한국CEO대상, 금속재료상 등을 수상했다. LS그룹은 “고인은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임직원 화합과 건강한 기업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지순혜 여사와 장녀 구나윤 지오피갤러리 대표, 아들 구본웅 마음그룹 대표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20호실에 마련됐다. 조문은 12일부터 가능하며 발인은 15일 오전 8시에 진행된다. 장지는 경기 광주공원묘원이다.
  • ‘한국 사위’ 호건 주지사에 韓최고 수교 훈장

    ‘한국 사위’ 호건 주지사에 韓최고 수교 훈장

    ‘한국 사위’로 통하는 래리 호건 미국 메릴랜드 주지사가 9일(현지시간)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 훈장 중 최고 등급인 광화장을 받았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정부가 호건 주지사에게 수여하는 광화장을 이수혁 주미대사가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전달했다고 이날 밝혔다. 수교 훈장은 국권 신장,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외국인에게 수여된다. 광화장은 5등급으로 나뉜 수교 훈장 중에서 최고 등급에 속한다. 2015년 취임한 호건 주지사는 메릴랜드에 태권도의 날 및 코리안웨이 지정, 코리아타운 기념 조형물·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건립 기여 등 한미 우호 관계 증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았다. 한국계 화가인 유미 호건을 부인으로 둔 그는 ‘한국 사위’라는 별칭을 갖고 있고 한국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 친한파 인사로 통한다. 호건 주지사는 “한국과 메릴랜드주, 미국의 지속적인 연대와 우정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양측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기 위해 권한 내에서 모든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유미 호건 역시 현지에서 한국 문화를 알린 역할을 인정받아 2020년 11월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 창파 이태영 박사 평전 출판 기념회 개최

    창파 이태영 박사 평전 출판 기념회 개최

    대구대학교 창파연구원이 최근 성산홀 대회의실에서 창파 이태영 박사 평전 출판 기념회를 개최했다. 대구대 설립자 및 독립투사였던 고 성산 이영식 목사의 장남이자 초대 총장을 역임한 고 창파 이태영 박사는 우리나라 특수교육 및 사회복지에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대구대를 만인 복지 실현의 중추적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져 그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된 바 있다. 창파연구원은 대학의 건학이념 계승 및 특성화 실천방안의 일환으로 이태영 박사의 장남 이근용 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 차남 이근민 대구대 재활공학과 교수, 고인의 생전에 동행했던 황용수 명예교수 등의 공동 작업으로 ‘창파 이태영 박사의 생애와 개척자 정신’ 제목의 평전을 발간했다. 이근용 대구사이버대 총장은 “가장 약한 자에게 쏟으신 선친의 숭고한 사랑이 책으로 전파돼 오늘날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38노스 “평양에서 열병식 준비, 위성사진으로 확인”

    38노스 “평양에서 열병식 준비, 위성사진으로 확인”

    북한이 대규모 열병식을 준비하는 정황이 위성사진을 통해 포착됐다고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38노스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오는 16일 김정일 탄생 80주년과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10주년을 앞두고 준비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매체는 내다봤다. 38노스에 따르면 지난 5일 촬영된 위성 사진을 분석한 결과 평양 미림비행장 북쪽의 열병식 훈련장에 수백명이 대형을 이룬 모습이 확인됐다. 이 훈련장은 평양 김일성 광장을 재현한 것으로 보통 열병식이 열리기 몇 달 전부터 연습이 진행되는 곳이라고 38노스는 전했다. 38노스는 미림비행장 서쪽의 대규모 주택 단지에 240대가 넘는 버스가 주차돼 있었다면서 실제 열병식 준비에 참여한 인원 수가 위성사진에 잡힌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문제의 사진이 촬영된 5일은 토요일로 주로 북한에서 사상 교육이 진행되는 날이다. 훈련장 맞은편에 2020년 건설된 건물 안마당에서도 지난달 말에 천막 35개 동이 세워졌다. 다만 대형 군용 차량과 미사일 발사대 등이 이용하는 보안주차 구역의 눈은 치워졌으나 군 장비 등은 보이지 않았다. 38노스는 과거 열병식 훈련 때는 트럭 등 대형 군용 차량이 대거 주차된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현재 준비 중인 열병식이 군인 중심으로 치러지는 것이거나 아직 훈련장에 장비가 도착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앞서 한국 군 관계자는 지난달 20일 미림비행장 주변에서 열병식을 준비하는 정황이 포착됐다고 밝힌 일이 있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김정일 생일을 기념하는 당 및 국가 표창 수여식이 만수대의사당에서 개최돼 김정일훈장 4명 등 모두 8732명이 각종 훈장과 칭호 등을 받았다고 전했다. 수여식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재했다. 통신은 “김정일 동지의 탄생 80돌을 맞으며 당 정책 관철을 위한 투쟁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운 일군(간부), 근로자, 군인들에게 수여한 것”이라고 전했다. 같은 날 김정일 탄생 80돌 경축 우표 전시회, 광명성절 요리기술 경연, 김정일 관련 영상미술 작품을 보여주는 ‘애국 헌신의 한평생’ 중앙미술 전시회 등도 잇따라 열렸다.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는 “김정일 동지의 불멸의 혁명 업적을 깊이 체득하기 위한 중앙연구토론회”가 열렸다. 리일환 당 비서 등이 참석해 김정일의 사상과 행적을 토론하면서 “장군님께서 인민군대를 나라의 기둥으로 내세우시고 인민군대의 정치 사상적 위력을 강화하는 데 선차적인 힘을 넣으셨다”며 그의 ‘선군 정치’를 칭송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통신은 “토론자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혁명의 미래를 환히 내다보시고 혁명 위업 계승 문제에서 기본으로 되는 수령의 후계자 문제, 영도의 계승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신 데 대해 언급했다”며 김정은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11일 개막 예정인 제1차 광명성절 경축 인민예술축전을 두고는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이날 “전례 없는 규모와 형식으로 온 나라 인민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며 “축전에 참여하는 누구나 격정과 흥분에 휩싸였다”고 주장했다.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김정일은 2011년 세상을 떠났다. 북한은 그의 생일을 ‘광명성절’이라 부르며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과 함께 최고 명절로 친다. 두 생일 축하를 성대히 하고자 지난달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재한 정치국 회의에서 준비 방안을 논의하는 등 경축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 1억원+땅 700㎡+훈장… ‘축구 우승’ 세네갈 대표팀에 생긴 일

    1억원+땅 700㎡+훈장… ‘축구 우승’ 세네갈 대표팀에 생긴 일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며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세네갈 축구대표팀이 막대한 포상금과 부동산, 훈장 등 톡톡한 보상을 받게 됐다. 8일(현지시간) AFP·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은 이날 수도 다카르의 대통령궁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대표팀 선수들에게 국가 최고 훈장인 ‘사자 훈장’을 수여했다. 또 선수 각자에 포상금 8만 7000달러(약 1억 400만원)과 다카르 내 토지 200㎡, 인근 신도시 디암니아디오의 토지 500㎡를 지급하기로 했다. 지난해 기준 세네갈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600달러로 한국의 20분의1에 못 미친다.살 대통령은 “당신들의 생명력과 창조적인 천재성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며 “우리는 우승컵을 꿈꿨고, 당신들은 그 꿈을 쌓아올렸고, 마침내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축하했다. 세네갈 대표팀은 지난 6일 카메룬 야운데 올렘베스타디움에서 열린 네이션스컵 결승전에서 이집트에 상대로 0대0 접전을 벌였고 승부차기 4대2로 우승했다. 네이션스컵 60여년 역사에서 세네갈의 종전 최고 기록은 2002년과 2019년 대회 준우승인 반면, 이집트는 총 7번 우승한 아프리카 최강팀이다.살 대통령은 이번 대회 우승을 이끈 알리우 시세 감독에게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써달라고 주문했다. 네이션스컵 우승을 기념해 공휴일로 지정된 지난 7일에는 다카르 시민 수십만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으며 다음날 새벽까지 축하 모임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3명이 숨지기도 했다.
  • 군인 모집 때만 금지된 광둥어 사용?...중국의 이상한 선전 영상 ‘뭇매’

    군인 모집 때만 금지된 광둥어 사용?...중국의 이상한 선전 영상 ‘뭇매’

    중국 대륙에서 사용되는 ‘푸통화’를 표준어로 대대적으로 보급해온 중국이 오직 군인 장병 모집 선전용 영상만 광둥어로 제작해 배포한 사실이 공개돼 뭇매를 맞는 분위기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은 중국 해방군신문의 보도 내용을 인용해, 최근 광둥어로 제작한 징병용 선전 영상을 배포해 군인 징집 시에만 광둥 지역 청년들을 모집하려 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고 8일 전했다.  광둥어는 중국 남부권의 대표적인 방언으로 광둥성 일대와 홍콩, 마카오 등 일부 지역에서 사용해오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이후 중국 당국은 광둥어로 게재됐던 주요 간판과 안내문, 명대 장군의 동상 명판을 철거하는 등 줄곧 광둥어를 푸통화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추진해왔다.  문제가 된 것은 지난 중국 당국이 제작한 해방군 모집 영상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중국 해방군언론센터가 최근 군인 징집 선전 홍보용으로 제작한 단편 영화에는 훈장을 단 채 등장한 한 고위급 장병이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우리가 여기서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를 대신해 국가를 지켜주고 있는 덕분이다”면서 “진짜 남자라면 국가의 부름에 응하고, 전쟁에 임하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단편 영화 속에는 광둥성 지역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광저우탑과 사자춤 등 이 지역을 상징하는 각종 문화요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선전 영상을 최초 공개한 중국 방송망 군사채널의 웨이보 공식 채널인 ‘중광군사’에는 영상 공개와 동시에 ‘광둥의 아들들아 빨리 와서 군입대에 참여하자’는 등의 노골적인 홍보문구도 달렸다. 이 모든 선전 문구들은 표준어인 푸통화 대신 광둥어로 제작됐다.  하지만 이를 접한 누리꾼들의 상당수는 중국 당국의 선전 영상 내용이 ‘불쾌하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수년 동안 광둥어 사용을 제한, 푸통화 대체 사업을 벌였던 중국 당국이 군사 징집 시에만 광둥어로 제작된 선전 영상을 제작해 배포한 것에 누리꾼들의 비판이 집중된 분위기다.  더욱이 이 선전 영상은 중국 본토에서는 접속이 불가능한 해외 SNS 유튜브 등에도 공식 됐다는 점에서 중국 당국이 해외 거주 중국계 청년을 겨냥해 제작한 영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분위기다.  한 누리꾼은 “이 영상을 본 광둥성을 고향으로 둔 이들 모두 마치 당국이 전쟁 등 막다른 골목에 광둥어 사용자를 차별적으로 내몰려는 수작으로 느끼고 있다”면서 “지난 2014년부터 광둥성 내 공립학교에서 광둥어 사용을 금지했던 정부가 이제 와서 최전선에 배치될 군사 모집에만 광둥어를 사용해 아이들을 현혹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한편, 중국 당국은 지난 2010년대에 접어든 이후 줄곧 중국 전역에 푸통화 진흥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왔다. 특히 중국 정부는 오는 2025년을 기준으로 중국 전역의 소수 민족 언어를 중국 본토의 언어인 푸통화로 최대 85%까지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공공연하게 공개해오고 있다. 사실상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과 국가공무원 응시 시험 등에서 소수 민족의 언어 사용을 금지해오고 있는 것. 이를 이유로 지난 2010년 7월 광둥성에서는 광둥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부에 맞선 대규모 민중 집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 홍콩에서는 홍콩 소재 모든 대학에서의 광둥어를 사용한 강의가 전면 금지했다.  이를 두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 중인 한 누리꾼은 “광둥어로 제작된 징집 영화를 보고 큰 불편함을 느꼈다”면서 “중국 당국이 광둥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을 진정으로 아끼지 않고, 그들을 단지 도구로 이용해 전쟁 등 최전선에 내몰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절대로 청년들이 그들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 활활 타오르던 문장, 부채의 바람결 따라 네 마음에 가닿기를

    활활 타오르던 문장, 부채의 바람결 따라 네 마음에 가닿기를

    ‘혼불’ 7년 2개월 월간지 최장 연재총 10권 원고지 1만 2000장 분량작가 “조상의 삶이 수놓여진 글” 생이 끝날 때까지 집필에만 몰두 어릴 때 지낸 전주에 문학관 건립호남 노래·풍속 등 생생하게 풀어힘든 서민의 생활 아름답게 표현“글 속 문장은 고급 한국어의 백미”“무겁게 감은 청암부인의 왼쪽 눈귀에 찐득한 눈물이 배어났다. 그것은 댓진 같은 진액이었다. 차마 흘러내리지도 못한 채 눈언저리에 엉기어 있기만 하는 그 눈물은, 무슨 응어리 같기도 하였다. 그날 밤, 인월댁은 종가의 지붕 위로 훌렁 떠오르는 푸른 불덩어리를 보았다. 안채 쪽에서 솟아오른 그 불덩어리는 보름달만큼 크고 투명하였다. 그러나 달보다 더 투명하고 시리어 섬뜩하도록 푸른빛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청암부인의 혼불이었다. 어두운 밤 우뚝한 용마루 근처에서 그 혼불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윽고 혀를 차듯 한 번 출렁하고는, 검푸른 대밭을 넘어 너훌너훌 들판 쪽으로 날아갔다.” - 최명희 ‘혼불’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최명희길을 걷다 중앙초등학교 옆의 작은 골목으로 빨려 들어가 홀리듯 앞으로 향하면 부채문화관이 나온다. 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최명희 문학관’이 나타난다. 예스러운 기와집이야 한옥마을 전체가 다 그러하니 크게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 앞에서는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치게 된다. 문학관의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데 아마도 그 자리가 옆집에서 부쳐 온 부채의 바람이 드나드는 바람목이지 싶다. 바람을 따라 찾아온 누군가의 혼백 아니 도깨비불마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길목이어서인지 그곳은 늘 생과 사가 공존하고, 먼저 간 사람의 마음까지도 매만져 볼 수 있는 자리다. 부채의 바람결에 실려 있는 최명희의 문장들 덕분이다. 남원의 혼불 문학관이 아닌 전주 한옥마을의 최명희 문학관을 찾은 것은 바로 그 ‘바람’과 ‘푸른 불’ 때문이었다. 문학관이 표방한 ‘작가가 다시 살러 온 집’은 그리하여 누구라도 계속 머물 것만 같고, 떠났던 이가 돌아와 여장을 풀며 몸과 마음을 바람에 말리는 장소다. 인간이 듣지 못하는 신의 음성, 차마 못다 한 말들이 부채가 일으킨 공명을 타고 일어나는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눈 밝은 이들이 찾아드는 것이다.‘혼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혼불을 봤다는 사람은 많다.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로서 모양은 둥글고 크기는 종발만 한데, 빛살 없는 푸른색이며,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한다. (중략) 이것이 미신이냐 실화냐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의 몸에 혼불이 있으면 산 것이고,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혼불’은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의 불이기도 하다. 즉, 혼불은 존재의 핵이 되는 불꽃인 것이다. -최명희 ‘나는 왜 ‘혼불’을 쓰는가’ 소설가 최명희는 1947년 전북 전주시 화원동에서 출생했다. 풍남초등학교와 전주사범병설중학교, 기전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전주 기전여고와 서울 보성여중, 보성여고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쓰러지는 빛’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혼불’ 제1부가 당선됐다. 교직을 그만두고 혼불 창작에만 매진하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부터 5부까지 연재했다. 이는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만 7년 2개월)다. 1990년에 혼불 제1부와 2부를 발간했으며 1996년에 혼불 제1부부터 5부까지 총 10권(한길사)을 발간했다. 이는 200자 원고지 1만 2000장 분량이다.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혼불’ 작가 후기 최명희의 주요 작품으로는 ‘몌별’, ‘만종’, ‘정옥이’, ‘주소’와 마지막으로 ‘혼불’이 있다. 혼불은 10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이지만 미완성된 작품이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까지 혼불의 제5부를 구상했다고 한다. 작가가 된 이후 생이 끝날 때까지 ‘혼불’을 구상하고 집필에 몰두했던 최명희는 1998년에 난소암의 발병으로 51세에 사망했다. ‘혼불’ 제5부 완간 4개월을 앞두고 암이 발병했지만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집필에만 몰두하다 1996년 12월에 혼불의 마지막 부분을 썼다. 그가 죽었으니 제5부가 마지막일 뿐, 그가 살아 있었다면 혼불은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정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책이 출간되자 일부에서는 ‘완간’이라고 표현했지만 작가는 “이 작품은 아직 완간이 아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해방 공간 이후 6.25, 4.19, 5.16 등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어져 한국사의 격동기를 그리게 될 것”이라 말했다. 우리의 풍속을 잃지 않으면서도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삶을 잘 그려 냈다는 평에 대하여 작가는 생전에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글은 제가 쓴 것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아득한 개국의 시원에 웅녀 할머니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이 땅의 조상들의 말 없는 한숨, 괴로움, 아픔, 그들이 나서 살고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저절로 와서 한 자씩 수놓아져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소설은 이미 제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거대한 강물로 저를 붙잡고 있어서 작중의 인물들이 토해 내는 많은 이야기를 주워 담는 것만이 제 역할이었어요.”(‘필’ 1997년 1월호)라고 소회를 밝혔다. 만 17년을 한 작품에 쏟는 열정, 그 때문에 그가 일찍 혼불이 돼 날아갔을까. 작가는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장례는 전주시 사회장으로 5일 동안 치러졌다. 전주시청 앞에서 영결식이 열렸고, 고인의 생가와 모교인 기전여고를 거친 시가지 운구 행렬에 이어 전북대에서 노제를 지냈다. 그가 남긴 노트에는 앞으로 써야 할 글감이 130여개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저쪽에서도 끊임없이 쓰고 있을까. ‘혼불’을 일컬어 ‘한국 혼 일깨우는 이 땅 문학사의 영원한 기념비’라고들 한다. 소설 속에서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잘 버무리며 생의 질곡과 역사의 너울을 한없이 순정하고도 곡진한 우리말로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인의 생활사, 풍속사, 의례와 속신들을 유장하게 풀어낸 소설의 문장들은 ‘고급 한국어’의 백미라 일컬어진다.또한 ‘혼불’은 호남지방의 관혼상제, 노래, 음식, 세시풍속 등을 생생하게 표현해 내서 ‘우리 풍속의 보고, 모국어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일제 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름답게’가 아닐까. 최명희는 그 유장하고 지리멸렬했던 한국사와 생활사 그리고 사람살이를 어떻게든 ‘아름답게’ 표현해 내려 평생을 바쳤던 작가다. 단재상과 세종문화상, 전북 예향대상과 여성동아대상, 호암상 예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2000년에는 육관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1997년에 독자들이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꾸린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혼불기념사업회가 발족됐고, 이듬해부터 혼불문학제가 개최됐다. ‘혼불’의 배경 지역인 남원시는 2004년 10월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혼불 문학관을 개관했다. 전주시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완산구 풍남동에 최명희 문학관을 세웠다. 최명희 문학관은 2006년 4월에 전주한옥마을에 터를 잡았다. 작가 최명희의 녹록지 않았던 삶과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친필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들, 생전 인터뷰와 문학 강연 모습을 담은 동영상과 여러 작품에서 추려 낸 글이 새겨진 각종 패널들이 전시돼 있다. 1층에는 전시관인 독락재가 있고 지하는 문학강연장 및 기획전시장인 비시동락지실로 꾸며졌다. 한옥마을의 최명희길이 끝나 가는 즈음에 생가터가 있다. 자신의 고향, 생가터에 관하여 최명희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이라고 하는 동네입니다. (중략) 전 이상하게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 몇 번지라고 했을 때, 그 어린 마음에도 ‘화원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제 맘에 좋아서, 굉장히, 제가 뭔지 아름다운 동네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화원’이라고 하는 그 음률이, 그 음색이 주는 울림이 저로 하여금 굉장히, 제 마음에 화사한 꽃밭 하나를 지니고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곤 했어요.”마음에 꽃밭 하나, 활활 타오르는 문장의 불 하나를 지니고 살았던 사람. 그리하여 그 불꽃과 화원을 함께 하늘로 태워 보낸 사람. 우리 곁에는 언제나 ‘푸른 불꽃’으로 남은 사람의 마지막 거처, 최명희 문학관이다. 부채의 바람을 탄 문장들이 이끄는 자리로 오늘의 당신을 초대한다. 바람이 푸른 불꽃을 당신의 거처에까지 가져가 준다면, 그대여 그 뒤를 따라오시라. 소설가 이은선
  • 동료 지키고 두 다리 잃은 한인 2세, 美 주정부 고위직 됐다

    동료 지키고 두 다리 잃은 한인 2세, 美 주정부 고위직 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하다가 두 다리와 손가락 두 개를 잃은 한인 2세 상이군인이 미국 버지니아주 정부 고위직에 올랐다. 19일 미주한국일보에 따르면 글렌 영킨 신임 버지니아 주지사는 새 내각을 발표하면서 제이슨 박(박재선·32)을 보훈 및 병무부 부장관에 임명했다.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박 부장관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2012년 육군 보병 2사단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다. 근무 도중 무장조직 탈레반이 설치한 급조폭발물이 터지면서 크게 다쳤다. 당시 그는 소대원들을 먼저 피신시키는 의로운 행동으로 연방 정부가 주는 군인 훈장인 ‘퍼플하트’를 받았다. 제대 후 ‘아프가니스탄의 영웅’으로 불리며 기업체와 대학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영킨 주지사는 그의 강연을 듣고서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고 부장관으로 발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부장관은 “현역 군인과 참전용사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박 부장관은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하는 박영태 예비역 대령과 성악가 박영애씨 사이의 장남이다. 부친 역시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주한미군 2사단과 한미연합사 소속으로 7년 복무한 바 있다.
  • 年 1만척 배 오가는 진도 바닷길, 24시간 안전 지킴이

    年 1만척 배 오가는 진도 바닷길, 24시간 안전 지킴이

    전남 진도군에 있는 ‘진도선박교통관제(VTS)센터’는 지금도 세월호 참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이다. 당시 진도VTS센터는 근무 태만과 근무일지 위조 등이 드러나면서 질타를 받았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진도VTS센터의 선박교통관제사들은 세월호 참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3941㎢에 이르는 담당구역으로, 한 해 1만대(2020년 기준)가 넘는 선박이 통행하는 진도VTS센터에서 2018년부터 선박교통관제사로 일하는 심상현 해양경찰청 주무관은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각오로 일한다”고 말했다. 18일 인사혁신처 도움을 받아 진도VTS센터에서 심 주무관을 만났다. -선박교통관제사 업무를 소개해달라. “공항 관제탑에서 항공기 운항을 관찰하고 사고 예방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조언·지시를 하는데, 선박교통관제사는 선박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선박이 항로를 이탈하거나 위험구역에 접근하지 않고 안전하게 운항하도록 돕는 게 핵심 업무다. 입출항 우선순위 조정 등 항만운영정보도 제공하고 조류나 날씨 등 항행안전정보를 제공한다. 해양사고나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신속한 초동조치를 하도록 정보를 전파하는 것도 우리 업무다.” -진도VTS센터는 담당 구역도 넓고 교통량도 많은 것 같다. “선박교통관제사들이 일하기에 가장 부담스럽다고 꼽는 곳이 선박통행량이 많은 인천, 부산, 여수, 진도다. 진도VTS센터는 진도 동쪽으로 흑산도, 남쪽으론 추자도 인근까지 담당한다. 해안선이 단순하고 섬이 많지 않아 안보 수요가 많은 동해와 달리 서해는 섬이 1000개가 넘고 조류가 강한데다 관할 구역이 넓다. 최근엔 해상 레저 인구가 늘면서 각종 안전사고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중에서도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전남 진도 주변은 특별관리수역으로 해경 함정을 전담 배치하고 있다. 선박교통관제센터는 바닷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우리만 해도 육안이나 망원경으로 선박 운항을 살핀다는 건 불가능하다. 레이더와 선박자동식별장치 등 각종 장비를 활용하기 때문에 권역별로 설치하는 게 인력 운용 측면에서도 더 효율적이다. 이 때문에 해경에선 3월 목포VTS센터를 신축해 두 VTS센터를 통합 운영할 예정이다.” -오랫동안 뱃사람으로 경험을 쌓았다고 들었다. “목포해양대를 졸업한 2008년부터 2017년까지 꼬박 10년을 항해사로 일했다. 항해사는 선박 운항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살림꾼 같은 자리다. 중국 상하이나 일본 오사카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싱가포르, 미국 샌프란시스코, 네덜란드 로테르담, 남아프리카공화국 리처드베이 등 전 세계 곳곳에 있는 항구도시를 수도 없이 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젤란해협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기 때문에 파도와 바람이 거세서 무척 힘들게 통과했다. 바람이 100노트 이상 불었는데 그 정도면 안경이 날아갈 정도다. 마젤란해협을 통과한 선원들에겐 칠레 정부에서 인증서를 주는데 뱃사람들에겐 훈장 같은 것이다. 지금도 그 인증서를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뱃사람에서 뱃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됐다. “선박이 항구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대화하는 게 선박교통관제사다. 선박교통관제사는 그 나라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국가대표 같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항해사로 일할 때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으면 그 나라 이미지 자체가 좋아진다. 반면에 불친절하거나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는 걸 보면 ‘아, 이 나라는 형편없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예전부터 한국 선박교통관제사들은 ‘소형 어선이 앞에 있으니 주의하라’거나 다양한 정보를 챙겨 주는 걸로 유명하다. 외국에선 보기 쉽지 않은 특징이다. 나도 그런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기억나는 일이 많을 듯하다. “얼마 전 관제구역 밖 서남쪽에서 관제구역으로 진입하는 한국 선박이 하나 있었는데 그 선박이 갑자기 속력이 줄이는 걸 확인하고 호출을 했는데 기관 고장이라고 했다. 자칫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고, 우리가 담당하는 구역에는 양식장을 비롯해 어장이 많기 때문에 어민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상황실에 알려서 경비함정이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일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을 때가 우리 관제구역을 벗어나는 선박에게서 ‘관제 감사합니다’라는 연락을 받을 때다. 사고를 예방해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게 보람이다. ”-진도VTS센터에서 일한다는 건 느낌이 남다를 듯한데.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직접 당사자가 아닌 나조차도 세월호 얘기를 하는 게 조심스럽다.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나 역시 TV로 봤던 곳으로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을 당시엔 항해사였는데 TV로 소식을 접하면서 ‘내가 선장이라면 나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2014년 당시 진도VTS센터 관련 기사를 다 찾아봤다. 나도 그렇고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지금도 ‘세월호’의 무게를 안고 일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자신만의 근무 철학이 있다면. “선박교통관제사의 기본 업무는 관제4단계(관찰확인, 정보제공, 조언, 지시)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선배가 나에게 관제4단계 이전에 ‘관심’ 단계를 추가해야 한다고 얘기해 줬다. 관심이 있어야 관찰을 잘할 수 있다. 레이더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관심이 없으면 보이질 않는다. 관심이 있어야 선제적인 조치가 가능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선박교통관제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국민들이 알게 됐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국민들이 우리 일을 전혀 모르는 게 우리가 지향하는 최고 목표다. 우리가 일을 잘해서 애초에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 부경대, ‘워커 하우스’ 이전 추진 논란... 학내 갈등

    부경대, ‘워커 하우스’ 이전 추진 논란... 학내 갈등

    부경대가 한국전쟁 때 유엔 사령부 건물로 사용된 워커 하우스를 현재 장소에서 교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17일 부경대와 유엔문화 콘텐츠 연구소 등에 따르면 학교당국은 ‘노르웨이 숲 공간(워커 하우스 일대 )환경개선 사업’을 위해 최근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동원 장보고 관 뒤편 농구장 옆으로 이전▲ 워커 하우스 건물 지붕철거 후 벽체만 남긴 채 향파관 이전 ▲ 지붕철거 후 벽체만 남기는 방안 등 3가지 안을 마련,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확정하기로 했다. 환경개선 사업에는 25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그러나 일부 교수 등 학내 구성원은 근· 현대사적 가치가 높은 워커하우스 일부 철거 및 이전 등에 반발하고 있다. A 교수는 “워커 하우스는 전쟁사적으로 지리적 의미가 중요한데,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면 사료적 가치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역사적 구조물은 위치의 중요성이 함축되기 때문에 위치의 이전은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훼손이고 돌과 콘크리트 구조물의 특성상 이전 때 원형 훼손이 불가피하다”며 이전 반대 뜻을 밝혔다. 워커 하우스는 부산시의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사업에도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건물은 비어 있는 상태다. 문제의 건물은 6·25 전쟁 당시 전 국토의 80%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유엔사령부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옛 수산대(현 부경대)에 옮긴 시설이다. 워커 장군은 6·25전쟁 때 파병된 미8군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지키지 못하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함께 참전한 아들의 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하봉규 유엔문화 콘텐츠 연구소장은 “애초 워커 하우스 중심으로 주변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추진 과정에서 변질했다”며 “ 이로 인해 학내 갈등으로 비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학 당국은 “ 노르웨이숲 공간 환경개선 사업지역에 기념관이 포함돼 있다. 기념관 존치 및 이전 여부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며 “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않았다”고 말했다.
  • [월드피플+] 딸의 암 극복로 계기로 40년째 모금 활동 중인 英부부의 사연

    [월드피플+] 딸의 암 극복로 계기로 40년째 모금 활동 중인 英부부의 사연

    암 환자를 위해 40년째 모금 활동 중인 영국의 노부부 사연이 세상에 공개됐다. BBC 등에 따르면, 웨일스 뉴포트에 사는 마이크 로크(90)와 아내 브리짓(88)은 1982년 이후 40년간 암 연구비 지원 목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여 지금까지 95만 6000파운드(약 15억 5700만원)를 기부했다. 부부는 앞으로 4만 4000파운드(약 7300만원)를 더 모아 오는 7월까지 총 100만 파운드(약 16억 3000만원)를 기부할 계획이다.부부는 40년 전 당시 18세였던 막내딸 샐리 케이(59)가 암을 극복한 뒤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마이크는 “샐리가 마지막 수술과 항암 치료까지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난 운이 좋아. 뭔가 보답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고 말했던 것이 모금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 부부는 대형 마트와 조찬, 골프 행사에서의 모금 활동과 경품을 내건 자선 복권 등을 통해 기부금을 모았다. 부부는 30년 전 마이크의 퇴직 이후 모금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마이크의 경우 취미로 마멀레이드(오렌지나 레몬 따위의 겉껍질로 된 잼) 만들기도 즐기는데 지금까지 2000개 넘게 팔아 모두 기부금에 보탰다.마이크는 암 연구에 공헌한 사실이 인정돼 2007년 대영제국훈장(MBE)을 받기도 했다. 당시 마이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준 훈장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면서 “나와 브리짓 그리고 협력해 준 여러분 모두의 것”이라고 밝혔다. 또 “난 모금 활동을 즐긴다.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정말 즐겁다”면서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목적을 가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을 안 받고 일하는 것 같다. 처음엔 50만파운드가 넘으면 여유를 가지려 했지만, 너무 바빠 그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부부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예전처럼 모금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이크의 90세 생일이 있는 7월까지 부부는 반드시 100만 파운드 달성할 계획이다. 영국 연구지원단체 암 연구 UK(Cancer Research UK)의 소피 버슨은 “부부가 이룬 업적은 경이롭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암 예방, 진단, 치료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과학자들이 찾게 도울 것”이라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사진=마크 루이스
  • [서울포토] ‘친절한 금자씨’ 아역배우, 미 유엔사 중위로 근무

    [서울포토] ‘친절한 금자씨’ 아역배우, 미 유엔사 중위로 근무

    “저에게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별 같은 존재였어요. 저를 유명하게 만들어줬고, 소중한 경험을 선물해 줬으니까요. 군은 인생 학교라고 할까요?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2005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주인공 이영애(금자씨)의 딸 ‘제니’ 역을 맡은 아역배우가 미 육군 중위로 활동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화제다. 한국의 유엔군사령부(유엔사) 소속의 커스틴 권(한국명 권예영) 중위가 그 주인공이다. 권 중위는 16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연기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었던 탓에 영화 촬영은 매우 힘들었다”며 “10여 년이 지나고 돌아보니 당시 경험이 평생 남을 훈장이 됐더라”고 했다. KBS ‘TV유치원’을 비롯해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광고 등에 출연했던 권 중위는 2012년 미국으로 돌아갔고, 대학 졸업 후인 2019년 미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포병 병과로 임관한 권 중위는 미 포병부대 소대장을 거쳐 조부모의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와 유엔사 의장대에서 선임 참모로 근무하고 있다. 전술 훈련을 짜고, 부대 행사를 조율하는 것이 그가 맡은 임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영어와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다양한 감정 연기를 보여준 그는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배운 한국어가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며 “영화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팀워크’인데, 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자원입대를 결심한 이유를 묻자 그는 “웃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답했다. “원래 꿈은 외교관이었는데요. 외교가 실패한다면 초래하는 결과 중 하나는 전쟁이라 생각해요. 군인은 그 전장을 지키고 싸우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고요. 군에서 흘린 땀이 좀 더 나은 외교관이 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결정했어요.”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나 역시 한국인”이라고 강조한 그는 “모국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했다. 권 중위는 “내 뿌리인 나라가 쌓아온 문화와 언어, 역사 등을 배우러 왔다”며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많은 주목을 받았으니 정말 좋은 선택 아니냐”고 웃었다. 이어 “사실 아버지가 입대를 추천해주셨다”며 “걱정하셨던 어머니도 평소 저를 ‘강하게 키우겠다’고 말씀하신 분답게 말리지는 않으셨다”고 전했다. 각오는 했지만 군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부대원보다 체구가 작고, 체력도 부족했거든요. 더 열심히 운동했어요. 고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건강해질 기회라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래도 많은 동료와 함께 훈련하고 어울려 지냈던 경험은 군인으로서 즐거웠어요.” 10대 초반에 경험했던 한국과 20대 후반이 돼서 다시 찾은 한국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많이 차가워졌고 개인주의 성향도 커진 것 같다”며 “예전에는 서로 돕고 소통도 활발했는데, 이제는 웬만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외면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유엔사에서 맡은 보직을 충실히 수행하고, 좋은 장교이자 좋은 시민이 되는 게 목표”라며 “앞으로도 계속 외교관이란 꿈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내 고향이고, 미국은 내가 갚을 것이 많은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두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어요.”
  • “美 지원받아 일본군 교란”… 광복군, 군사연대 제안 문건 첫 공개

    “美 지원받아 일본군 교란”… 광복군, 군사연대 제안 문건 첫 공개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이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작성한 ‘대미 군사연대 제안 공식문건’이 처음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12일 “지난달 국외 독립운동 사료 수집 과정에서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가 소장한 ‘조지 맥아피 매큔 기증자료’로부터 1942년 6월 30일 이범석(1900∼1972)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작성한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조지 맥아피 매큔(1808~1948)은 미국 선교사 조지 섀넌 매큔(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장남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뒤 미 전략정보국(OSS), 국무부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다수 소장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가 발굴한 문건은 총 10쪽 분량으로 ▲한국 독립이 필요한 이유 ▲한국광복군의 임무 ▲한국광복군이 태평양전쟁에서 담당할 수 있는 역할 ▲앞으로 미국과 협상이 필요한 사항 등이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광복군의 대미 참전외교 초기 활동을 보여 주는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문건에서 이 참모장은 “한국광복군이 장래 독립국가 수립 이후 국군의 근간을 이룰 것”이라며 “한국광복군의 임무가 한국의 독립 달성을 넘어 연합국과 함께 인류평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태평양전쟁에 한국광복군을 파견하고 미국 지원을 받아 중국에서 한인 게릴라부대를 양성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겠다”며 구체적 군사 연대도 제안했다. 미국과 협상이 필요한 파견 규모, 공작 지점, 보급 문제 등 세부 사항도 언급하는 등 “광복군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의 군사연대를 실질적으로 모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이 문서는 실제 미국 측에 전달됐다고 한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주미외교위원부 관계자들이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과의 군사연대를 시도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도 “해당 문건은 국내외에서 처음 공개된 희귀자료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미 OSS 활동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조지 맥아피 매큔 자료를 분석해 독립유공자 발굴 등에 활용할 예정”이라며 “앞으로도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관련 문건을 추가 공개할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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