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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젠 고국품서 편히 쉬소서”/임정요인 5위 상해서 돌아오던 날

    ◎공항서 봉영식후 국립묘지로/연도시민들 발길 멈추고 묵념 조국광복의 한을 안고 이역땅에서 눈을 감은 선열5위가 그토록 그리던 고국 하늘을 숨쉰 5일 온 국민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이들을 맞았다.1시간35분거리인 지척의 중국 상해에 이들을 두고 70여년동안 고국에 유택을 마련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간직해온 국민들은 고개숙여 선열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간직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유해도착및 봉영식◁ 이날 상오11시34분 상해를 떠난 임정선열 5위의 유해는 하오1시6분 대한항공 KE6146 특별기편으로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3군의장단의 도열을 받아 입국장을 빠져나온 유해 행렬은 수방사 군악대의 「고향의 봄」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국제선청사 귀빈주차장에 마련된 제단으로 옮겨졌다. 이날 봉영식은 영정과 유해가 임시분향소에 안치된 하오2시4분쯤부터 황인성국무총리등 정부관계자와 김승곤광복회회장,국가유공자,유가족등 2백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영사낭독,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됐다. 봉영식을 지켜본 박은식선생의 며느리 최윤신씨(77)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이제야 먼저간 남편(박시창·전 광복회장)의 소원을 푼것 같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또 노구를 이끌고 전주에서 올라온 김인전선생의 딸 김영영씨(89)는 말을 잘하지 못해 아들 최순팔씨(54)를 통해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15살때 헤어지고 이렇게 죽기전에 유해나마 다시 만나뵙게 되어 말할수 없이 기쁘다』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운구행렬◁ 봉영식을 마친 유해행렬은 하오2시25분쯤 16대의 군용지프와 버스 9대에 선열의 유해와 유족들이 나눠타고 경찰사이드카 20여대의 선도를 받으며 김포공항을 떠났다. 유해봉환행렬이 영등포네거리를 지나는동안 길가던 시민들은 손을 흔들며 경건한 마음으로 유해행렬을 맞았다. 노량진역 주변의 시민들도 노상에서 육교위등에서 잠시 멈춰 서 행렬을 바라보며 뒤늦게나마 유해가 돌아온 것을 다행스러워 했다. 또 시민들중 일부는 유해행렬이 지나는 동안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념,선열들에 대한 추모의 뜻을 표시하기도 했다.▷국립묘지안치◁ 유해는 예정보다 10분 늦은 하오3시5분쯤 동작구 국립묘지 현충관에 도착했다. 5위의 영정과 훈장·유골함은 유가족,유관단체 관계자등이 엄숙히 지켜보는 가운데 도열병 15명에 의해 오른쪽부터 김인전·신규식·박은식·노백린·안태국선생의 순으로 현충관안에 마련된 영현봉안관으로 옮겨져 안치됐다. 이어 국회의원대표 장기욱의원과 이충길국가보훈처차장등 2명이 분향·참배하고 유족대표 20여명이 묵념을 올렸다. 백범 김구선생을 20여년동안 모시다 지난 3월 타계한 백강 조경환선생의 사촌계수인 김김이(74)·유남(69)자매는 하오2시쯤부터 영현봉안관앞에 나와 선열 5위의 봉안과정을 지켜보며 묵념을 올린뒤 『이번 영현봉안이 민족혼을 되살리는 계기가 돼야할 것』이라며 남다른 감회를 피력했다.
  • 유해 봉환 임정요인 5인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민족사상를 고취/박은식/을사조약때 음독/신규식/미서 독립군 양성/노백린/한국노병회 결성/김인전/상민공동회 조직/안태국 ◇박은식(1859∼1925년)황해도 황주태생.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했으며 1905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을 역임하는등 민족언론인으로 민족사상을 고취.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대통령대리를 겸직했으며 1925년 3월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탄핵면직을 계기로 2대 대통령으로 취임,독립운동에 헌신하다 같은해 11월1일 노환으로 상해의 한 병원에서 작고.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신규식(1879∼1922년)충북 청원태생.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비분강개,음독자살을 기도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1911년11월 중국으로 망명,손문의 신해혁명에 참여했으며 상해·남경등지에서 망명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를 조직.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출범과 함께 법무총장에 임명되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취임하는 등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쳐오다 1922년 9월25일 과로로 상해에서 43세로 별세.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노백린(1873∼1926년)황해도 송화태생.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와이에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달려가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고 군무부총장에 임명됨.1922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다음해 국무총리에 정식 취임했으며 1924∼25년까지 국무총리,교통 및 군무총장직을 겸임하다 1926년 1월22일 상해에서 지병으로 별세.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김인전(1876∼1923년)충남 서천태생.1919년 4월 상해로 건너가 이듬해 임시의정원 재무예산위원직을 시작으로 의정원부의장,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과 임시공채관리국장,임시정부의학무총장대리 등을 역임.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피선됐고 같은해 4대 의정원의장에 선출돼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로병회를 결성,군대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 1923년5월24일 과로로 순국.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 ◇안태국(1875∼1920년)평남 평양태생.평양에서 협동사라는 회사를 설립,실업구국운동에 앞장섰으며 이승훈 등과 함께 상민공동회를 조직하고 1917년 신민회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최고위간부로 활동.1911년 간도의 독립군기지 설치운동과 관련,경찰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 신문 무휴발행­조·석간 부활주도/타계한 장강재 한국일보회장

    ◎체육·문화계서도 다양한 활동/30대에 사장… 5개일간지 운영 2일 타계한 고 장강재 한국일보사회장은 언론뿐 아니라 사회 여러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사이다.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서울경제신문,일간스포츠,소년한국일보등 그가 운영해온 일간신문만 해도 5가지.대한체육회이사,외무부 정책자문위원,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이사,자연보호중앙협의회이사,스위스 로잔의 IOC박물관창립위원등 다양한 경력을 가졌다. 장회장은 지난 77년 창업주인 부친 장기영 전부총리의 타계후 33세의 젊은 나이에 경영권을 인수받아 16년간 한국일보와 그 자매지를 운영해왔다.특히 최근 전국동시인쇄실현,월요일자신문발행,조·석간제부활등 한국신문산업에 있어 새로운 시도를 과감히 도입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장회장은 45년 장 전부총리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서울고와 한양대를 졸업했다.6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기획관리실장,부사장,사장등을 거치며 신문경영수업을 착실히 받았다.부친 장 전부총리와 마찬가지로 신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간암투병중 휠체어를 타고 회사에 출근,사원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기자·직원들과 두주불사로 자주 어울린 것이 건강을 악화시켰다는 얘기도 듣고 있다. 폭넓은 사회활동에 걸맞게 국민훈장 무궁화장등 국내포상뿐아니라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올림픽훈장도 받았다. 미망인은 인기여배우출신 이순임여사(예명 문희)로 결혼당시 상당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 남자현여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 선정/항일단체 결속 앞장선 「독립군의 어머니」/서로군정서가입,일제관리 독살 기도/투옥·부상동지들 정성껏 보살피기도/임종땐 평생 모은돈 「독립축하금」으로 희사 「독립군의 어머니」로 통했던 남자현여사는 1873년 12월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씨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났다.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김씨 김영주에게 시집을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을 결심하고 의병활동에 나섰으나 곧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여사 나이 46세에 일어난 1919년 3·1운동은 여사에게 남편의 원수 갚기를 결심하도록 만든다.항일 구국하는길만이 원한을 갚는 길임을 깨닫고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정착하게 된다.여사는 우선 그 곳에서 활동하는 비밀무장단체 서로군정서에 가입,군인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북만주일대의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한다.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는 조선총독을 독살하기 위해 동료 한 명과 함께 국내에 잠입,거사를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지로 되돌아 가야 했다.마침 인근 길림주민회장인 이규동과 편강렬·양기탁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믿아다니며 통합을 독려,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1927년 봄 상해 임시정부 요인인 안창호선생이 길림 조양문 밖에서 나석주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독립운동단체 간부·지방유지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안선생등 3백명을 무차별 체포했다. 여사는 안선생뿐아니라 투옥중인 애국지사들이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를 정성껏 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여사의 망명지 요녕성뿐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자 안선생과 함께 보석으로 풀려난 독립운동단체 핵심간부인 김동삼은 할 수 없이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의 한 애국지사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체포된다.아무도 김동삼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면회를 허가받고 연락책 역할을 거뜬히 해낸다.여사는 김동삼의 지시내용과 정보사항을 동지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빼돌릴 계획도 세웠으나 시간이 촉박한 바람에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그러나 여사의 슬기롭고 대담무쌍한 기질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계획이었던 것이다.여성다움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는 항상 고향의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위로·격려했다. 여사는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쪽 약손가락 두마디를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뒤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간악한 일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하기 위함이었다.여사의 항일정신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성해졌고 남편의 복수심은 꺼질 줄 몰랐다. 여사는 1933년 초 동료들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1일에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부도 노부요시(무등신의)를 독살하기로 하고 그해 2월29일 거지로 변장,폭탄·권총 1정과 탄환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장춘(당시는 신경)으로 가던 중 일영사관 형사에게 발각돼 붙잡히게 된다.일본군에게 전사당한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영어의 몸이 된다.여사는 잔악한 일경들의 고문을 6개월이나 버텨냈다. 여자의 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이겨냈다. 여사는 그해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옥중에서 15일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인다.악독한 일경들도 여사의 강인한 저항에 두 손을 들고 여사를 석방했다.그러나 여사는 6개월에 걸친 옥중생활로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여사는 즉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치료를 받고 하얼빈에 있는 여관에서 가료를 받았으나 옥중에서의 고문 후유증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1933년 8월22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사는 임종을 맞을때까지도 항일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유복자인 아들을 앞에 앉히고는 보따리를 풀어 중국화폐 2백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희사하라』고 당부했다.여사는 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독립운동은 정신으로 이루어 진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유족들은 여사의 뜻대로 1946년 3월1일 조국광복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독립축하금으로 여사가 남긴 돈을 김구·이승만선생에게 전달한다. 정부는 여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민족적 명절」지정… 연초부터 대규모 행사준비(오늘의 북한)

    ◎전승 40주 경축 전례없이 요란/각지서 군중집회… 2백여가지 구호 채택/기념탑 건립·참전노병 무더기 훈장 수여/부자세급 굳히기 내부결속용으로 활용한듯 북한은 올해 휴전협정체결 40주년을 맞아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요란한 경축행사들을 열었다.그들 스스로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이라고 부르며 해마다 경축행사를 치러오긴했지만 올해는 「민족적 명절」로 지정,경축준비위원회까지 조직하여 외국의 축하사절을 초청하는등 떠들썩한 경축행사들을 했다. 북한이 올해 휴전협정일을 이처럼 요란하게 경축한 것은 올해가 5년 10년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인데다 국제적 핵사찰 압력과 당면한 경제난 등 대내외적인 곤경을 이겨내고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있다. 북한은 올해초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휴전협정체결일을 「민족적 명절」로 지정하는 한편 「전승40주 경축준비위원회」까지 조직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해 왔다.지난 5월11일 노동당중앙위 명의로 사회주의체제 고수와 통일투쟁등을 선동하는 2백여가지의 구호를채택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잡은 뒤 6월중순부터 김일성부자에게 보내는 「충성의 편지」를 채택하는 군중집회를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가졌다.이 편지들은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행사로 연결되어 북한각지를 거쳐 27일 평양에서 열리는 「전승」기념행사장에서 김부자에게 전달됐다. 또 평양 보통강변의 5만㎡에 인민군 병사들이 인공기를 휘날리며 돌진하는 모습을 조각한 거대한 전승기념탑을 건립,27일 준공식을 가졌다.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는 휴전후 처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6·25참전용사들을 초청한 「전국 노병대회」를 갖고 훈장등을 무더기로 주었다.23일 평양 2·8문화회관에서 열린 노병대회에는 김부자와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같은 기념행사와 아울러 김일성 회고록 제4권을 출간하고 이른바 「군민일치」운동과 「총진군 속도창조운동」등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군민일치운동은 현역및 건설현장에 동원된 인민군들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 인접 마을이나 행정구역에서 병영생활에 필요한 소품과 부식을 지원하는 것이다.속도창조운동은 인민들의 노동을 배로 늘리는 것으로 이운동을 통해 『올해의 경제과업을 7월27일까지 조기완수하자』고 독려하고 있다.북한은 올해 주요건설과업인 평양시 3만가구 주택건설을 비롯해 ▲통일거리 2단계공사 ▲궤도전차 3단계공사 ▲남포시의 화력발전소 건설공사등은 물론 안주·덕천탄광등 주요 탄광에도 이 운동을 적용하고있다. 올해 기념식에는 외국의 축하사절들도 대규모로 초청됐다.중국공산당 호금도상무위원을 단장으로하는 중국축하사절단을 비롯,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등이 평양에 왔다. 북한은 올해의 휴전협정일을 이처럼 대대적으로 경축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해마다 기념해왔던 6·25기념행사와 6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설정,연례적으로 벌여왔던 반미투쟁행사를 하지않았다.이는 북한이 이번 대대적인 휴전기념행사들을 당면한 체제위기상황을 극복하고 김일성부자의 세습구도를 확고히 하기위한 대내결속용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 평택∼대전 LNG주배관 준공/중부권 15만가구 공급

    ◎영호남구간 96년 완공 천연가스(LNG) 인수기지가 있는 평택과 대전을 잇는 총 1백52㎞의 천연가스 주배관 공사가 16일 완공돼 대전 청주 천안 등 중부권 도시의 15만가구에 천연가스가 단계적으로 공급된다. 한국가스공사(사장 박청부)는 이날 대전시 중구 중촌동 한국가스공사 가스공급기지에서 김철수상공자원부 장관과 안동선국회 상공자원위 위원장 등 각계 인사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부권 천연가스 주배관 준공 및 영·호남 주배관 기공식을 가졌다.90년 10월에 착공된 중부권 주배관 공사는 배관 및 10개 공급기지건설에 총 1천3백34억원이 들어갔다. 영·호남권 주배관 공사중 호남권은 총사업비가 2천2백23억원으로 구간은 대전∼전주∼이리∼광주간 2백14㎞이다.오는 95년 10월에 완공돼 전주에는 95년 1월,광주에는 95년 10월 천연가스를 공급한다.주배관 인접도시인 군산 장항 목포 나주에는 98년 1월,논산 연무 정주에는 2000년1월에 각각 공급한다. 4천7백72억원이 투입되는 영남권 주배관은 대전∼대구간이 2백12㎞,대구∼창원간 2백50㎞ 등총 4백62㎞이다.오는 96년 1월까지 단계적으로 마쳐 대구와 구미에는 95년 1월,울산 부산 창원 마산 진해 경주 영천에는 96년 1월 각각 천연가스를 공급할 계획이다.포항은 98년 1월,김해 김천은 2000년 1월에 공급한다. 포상자는. ◇철탑산업훈장 허명회(한국가스공사 관로건설부장) ◇산업포장 송희중(대림산업 부장) ◇대통령표창 차승구(한국가스공사 수도권건설 사무소 계장) 황준태(〃 관리역) 이상덕(현대산업개발 부장) 신영찬(충남 도시가스 대표이사)
  • 서재필박사 유해 국내봉환 추진/신문협이사회 결정

    한국신문협회(회장 김병관 동아일보회장)는 15일 제 2백26차 이사회를 열고 미국 필라델피아시에 있는 고 서재필박사의 유해를 국가보훈처 및 유족들과 공동으로 국내 봉환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서박사는 1898년 이후 1945년까지 미국에서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적이 있어 정부는 77년12월 13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신문협회는 지난 90년 4월7일 제34회 신문의 날을 맞아 서박사의 동상을 독립문 옆 서대문 독립공원에 세웠다.
  • 창씨개명뒤 버젓이 일본의 밀정노릇/서훈취소 심의대상 8인의 행적

    ◎총독부 단체에 참여… 학병지원 권유/김성주/「2·8선언」후 변절… 전국서 친일강연/서춘/친일계 신문인 「만선일보」에 몸담아/이은상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각종 훈·포장을 받았던 김성수씨등 8명에 대해 정부가 친일 여부를 정식 조사하고 있어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 모두가 부통령·국회의원등 고위공직을 지냈거나 언론계·문학계등에서 지도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사회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친일혐의가 새롭게 부각된 것은 전혀 아니다. 일부 학계인사와 사회단체등에서는 광복직후부터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꾸준히 그 행적을 추적해 왔다. 다만 이승만정부 수립이후 좌­우 이념대립이 격화되면서 이승만정부가 친일여부를 가리지않고 마구 등용하는 바람에「친일파를 가려내 청산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뒷전으로 밀렸을 뿐이라고 할수있다. 따라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재평가에 나서 이들「거물」들을 조사대상에 올린 것은 뒤늦게나마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반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관련학자·단체들이 조사·공표한 이들 각자의 친일행각을 보면 제1공화국에서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씨의 경우 1940년 10월27일 미나미 당시 조선총독이 결성한 총력동맹에 이사로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매일신보」「경성일보」등지에 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실었으며 시국강연반에 들어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다. 이갑성씨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였으며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인물로 자유당정권에서 당의 최고위원과 국회의원을 지냈고 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상해에서 이와모토(암본)로 창씨개명한 뒤 일본의 밀정노릇을 했으며 미쓰비시사의 만주 신경출장소장,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촉탁으로 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적으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윤치영씨는 초대내무부장관을 비롯,이후 역대정부에서 고위직을 누렸다. 윤씨는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시기로 인정받은 41년 12월20일 친일잡지「동양지광」이 주최한「미·영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석해『황국신민으로서 참전은 우리 어깨에 지워진 공정무사한 대사명』이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은상씨도 일제말 친일계 신문인「만선일보」에 재직한 사실이 있다. 이밖에 이번에 조사대상 8명에 포함된 서춘씨(매일신보 주필)는 이광수와 함께 2·8독립선언위원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 인물로 39년 7월 배영동지회 평의원,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낸 외에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고 승려인 이종욱씨는 총독부 지원으로 월정사 주지와 조선불교 종회의장을 지냈다. 윤익선씨는 서울 원서정 총대(현 동장)와 경성부 북부정회총대회 간사를 지냈으며 전협씨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신임을 얻어 그의 추천으로 부평군수를 지냈으며 일진회 평의장도 역임했다. 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은『정부 차원에서 친일파 재조사작업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우수·모범공무원 1천3백47명 포상

    정부는 1일 공직사회의 분위기쇄신과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신한국창조에 앞장서는 공무원」 1천3백47명을 선정,포상했다. 이들 수상자는 우수공무원 3백53명과 모범공무원 9백94명으로 우수공무원에게는 ▲근정훈장(50명) ▲근정포장(45명) ▲대통령표창(1백32명) ▲국무총리표창(1백26명) 이 각각 수여됐다. 6급이하 하위직공무원을 대상으로 선정한 모범공무원에게는 국무총리표창과 모범수당이 지급됐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홍조근정훈장◁ 황원섭(정무1장관실) 박권수(비상기획위원회) 김병호(총리행조실) 정수부(법제처) 신현진(기상청) 장윤호(교통부) 민경덕(서울시선관위) 서재국(항만청) 이경문(문화체육부) 방극윤(노동부) 신구범(농림수산부) 김복수(청송교도소) 김동훈(서울 종로구) 주동관(부산 동구) 신태수(대구 시의회) 정하용(충청남도) 송은복(경상남도) ▷녹조근정훈장◁ 권기성(정무2장관실) 윤한철(총리비서실) 정구일(평통자문회의)최충일(대통령비서실) 정응채(통일원) 박광자(공업진흥청) 강공우(국방부) 김효천(조달청) 이범길(통계연수원) 김용기(보훈처) 강형대(수산청) 심동로(산림청) 태석원(외무부) 최광규(건설부) 김성우(보사부) 이도인(국립농업자재검사소) 박안규(법원행정처) 탁태영(농촌진흥청) 민병휘(국세청) 김평종(서울지방국세청) 이우영(철도청) 김창수(〃) 이상훈(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 윤혁경(서울 송파구) 양권용(서울 서대문구) 노승회(교육부) 이지헌(〃) 송기영(전북 임실교육청) 홍순우(내무부) 심무섭(경기도) 박재순(전라남도) 남기성(경북 점촌시) 이종박(대검) ▷근정포장◁ 김현태(상공자원부) 최광태(대전세계무역박람회) 이주형(〃)김도렬(〃) 윤복균(〃) 원상선(과기처) 송정칠(공보처) 이명규(재무부) 남경우(〃) 변근섭(상공자원부) 신명재(〃) 남정우(환경처) 명재정(노동부) 안덕현(농림수산부) 김원길(광주고법) 김연오(농촌진흥청) 유지웅(경기농촌진흥원) 정병춘(국세청) 유장철(〃) 성백영(법무연수원) 김유민(광주소년감별소) 조성래(철도청) 정기철(철도청철도건설창) 서철모(서울특별시) 정유성(서울 시의회) 조애형(서울시 서대문병원) 조기봉(서울시교육위) 김명원(경기도교육청) 김하응(충북대) 강태석(대구교육대) 박성진(내무부) 안신일(부산 영도구) 남기천(경기 용인군) 김정한(경기도) 한영신(강원도) 유의재(충북 괴산군) 이상두(전라북도) 전철현(전남 영안군) 오정석(경상북도) 임광원(〃) 이규윤(경상남도) 손달인(경남 울산시) 박철현(광주직할시) 이광목(인천 남구) 박헌오(대전직할시) ▷대통령표창◁ 윤병삼(특허청) 송재기(특허청) 윤필상(공보처) 이광래(공업진흥청)기조(경제기획원) 신호현(경제기획원) 이종국(기상청) 박희정(환경처) 최종태(국방부) 이충(조달청) 이재붕(교통부) 윤형백(통계청) 현동준(국가보훈처) 이광민(총무처) 이영렬(총무처) 박철수(총무처) 정병운(중앙선거관리위원회) 나택균(수산청) 방기혁(수산청) 민재홍(산림청안동영림서) 정해웅(외무부) 이종천(해운항만청)심종보(해운항만청) 김홍렬(문화체육부) 남달웅(노동부) 이창우(대구지방노동청) 이용산(노동부) 송기섭(건설부) 이융세(건설부) 이우철(보건사회부) 이육상(보건사회부) 박종임(국립의료원) 김우건(국립식물검역소) 최희종(농림수산부) 박윤근(국립농산물검사소) 김동석(농림수산부) 강철구(농림수산부) 김지순(서울민사지방법원) 김태인(서울가정법원) 천상용(대구지방법원) 윤문한(광주지방법원) 조도용(대전고등법원) 이창형(서울민사지방법원) 정남채(수원지방법원) 정재곤(법원행정처) 송인석(농촌진흥청농업기술연구소) 김영진(농촌진흥청) 이병욱(충북진천군농촌지도소) 이완구(전북 익산군 농촌지도소) 김영화(경북 경주시 농촌지도소) 유인인(국세청) 이재원(서울지방국세청) 최광욱(중부지방국세청) 김경수(대전지방국세청) 고원창(광주지방국세청) 안원구(대구세무서) 황수길(부산지방국세청) 장병환(법무부) 김재업(서울지방검찰청) 나영일(법무부) 정상문(대구지방교정청) 박연수(영등포구치소) 양이근(전주교도소) 남기빈(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김종태(철도청) 유동배(철도청) 정재홍(철도청) 문재석(철도청설계사무소) 김종태(서울지방철도청) 김종수(부산지방철도청) 강성문(순천지방철도청) 권경호(영주지방철도청) 서정순(서울특별시) 최오곤(서울특별시) 김진연(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우신(서울특별시 강남구) 서관수(서울특별시) 박석안(서울특별시) 정효성(서울특별시) 목영만(서울특별시) 안승일(서울특별시) 채희정(서울특별시 상수도사업본부) 이규일(서울특별시교통방송본부) 이만구(서울특별시성동구) 송경섭(서울특별시지하철건설본부) 이현목(교육부) 김현승(교육부) 조흥래(교육부) 이문희(교육부) 이상복(인천시교육청) 주진창(대전직할시교육청) 김준호(대구직할시교육청) 박형근(강원도교육청) 홍재문(충청북도교육청) 임기호(전라남도교육청) 윤문걸(경상남도울주군교육청) 최종복(경상남도삼천포교육청) 전규종(목포대학교) 김호중(공주대학교) 권영세(내무부) 서만근(내무부) 허병태(부산직할시남구) 권기백(부산직할시) 이성철(부산직할시) 김우홍(대구직할시) 여희광(대구직할시) 홍창수(인천직할시 북구) 정현택(경기도) 윤명구(경기도 고양시) 유찬상(경기도 의왕시) 정두현(경기도) 박의현(강원도 철원군) 손학용(강원도) 김용번(충청북도) 권청사(충청북도) 김종원(충청남도 아산군) 이상수(충청남도) 김형진(전라북도 부안군) 안세경(전라북도) 노태홍(전라북도 정주시) 김종빈(전라남도) 김종훈(전라남도 구례군) 김이문(전라남도 나주시) 송동환(경상북도 상주시) 한희태(경상북도 금릉군) 우외진(경상북도 경주군) 이춘식(경상북도 군위군) 구민원(경상남도) 허환구(경상남도) 김종대(경상남도 창원군) 박종표(경상남도 의령군) 황대정(제주도 제주시)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철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5적 처단 실패후 대종교 창시/32세때 관직 버리고 유신회 조직… 항일/합방후 “민족정기수호” 단군신앙 포교/“암흑시대 겨레의 횃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로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씨와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아들로 출생했다.족보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한뒤 대종교 창교후 철로 바꿨다. ○전남 보성서 출생 1902년 29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선생은 32세때 징세서장으로 있다가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했다.그뒤 강진출신 오기호지사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구국운동에 앞장선다.그해 미국 포츠마츠에서 노일전쟁의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자 우리의 입장을 미국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할 것을 결심,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유람을 빙자,일본 도쿄에 가게 된다.거기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조선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특별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자 일왕궁성 앞에서 3일동안 단식하며 항쟁하기도 했다.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30일 귀국한다.이듬해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리완용 외부대신박재순 군부대신리근택 내부대신리지용 농상공부대신권중현등 세칭 「5적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동지들을 규합,자금도 모으고 권총 8정도 구입했다.각국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도 작성했다.첫번째 거사일을 음력 정월 초하루(2월13일)로 정하고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이후 4차례에 걸친 처단시도는 이런저런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체포된 동지 한명이 고문에 못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가자 선생은 제발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1907년 7월3일 유배 10년형을 받는다.그는 지도로 유배지가 결정돼 헌병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29일 인천을 출발했다.그러나 운이 좋았던지 유배 4개월여만에 오기호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난다. 1910년 8월 경술7조약 체결로 일제는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았다.너무도 치욕적인 조약이어서 선생은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됐다.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전통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과 제인구세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선생은 1909년 정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등 수십명과 함께 서울 제동 취운정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공식 종교로 공표하고 통상의 건국기원에 1백24년이 앞선 4366년을 개천의 기념으로 삼았다. ○초대교주로 추대 모든 교인들로부터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30일 칙령을 발표,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된다.대종교는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구심점이 돼 급속도로 발전한다.선생은 대종교의 도사교가 되면서 이름을 인영에서 철로 바꾼다. 선생은 경술7조약이후 일제침략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어렵게 되자 성지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다.그 옛날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몸소 알고 역사와 교훈을 깨달아 겨레의 나아갈 길을 믿아보려고 한 것이다.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아래의 중국 동삼성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의 확대포교를 구상하게 된다.이 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지사가 정착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선생의 노력으로 대종교는 이 곳에서 크게 번창했다.선생은 한편으로 교인과 교포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도마련,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면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에서는 완벽한 서류를 냈으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가증스런 종교탄압이었다.선생의 신변도 위협해왔다.창교이래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구월산에서 순교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중 택일을 위해 매일을 기원했다.이윽고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는데 이는 단군 성적지를 믿아 순교하려는 결단이었다.1916년 음력 8월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뒤 삼성사에 도착한다.8월 한가위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한다.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믿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여러 유서들이 나왔으나 모두 죽음으로써 침략자들에게 항쟁한다는 뜻이었다.선생의 나이 54세. 정부는 이같은 선생의 항일공훈을 추앙하여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공무원 승진기준(알아둡시다)

    ◎5급이하는 후보자명부 중심으로/연 2회 근무성적·경력 평정,교육성적 합산… 서열 정해/도서벽지 근무자엔 가점… 4급이상은 능력·실적 위주 5급이하 공무원과 연구·지도사 및 기능직공무원의 승진은 승진후보자명부를 기준으로 이뤄진다. 승진후보자명부는 승진임용권자가 대상공무원의 근무성적과 경력·교육훈련성적및 가점을 합산한 종합성적에 따라 승진예정직급별 서열순으로 작성된다. 그러나 4급이상 공무원의 경우 능력·실적·경력등을 고려해 승진이 이뤄지며 승진후보자명부는 작성하지 않는다. 승진후보자명부작성에 있어서 근무성적은 승진후보자명부 작성 1개월전을 기준해 매년 6개월마다 두차례 업무실적을 평가해 산정하는 것으로 현행 실적위주의 인사제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사기준이 된다. 평정절차는 대상공무원 스스로가 6개월동안의 근무실적을 평가해 기록한 자기평정서를 제출하면 상급감독자인 평정자와 평정자의 직속상급자인 확인자가 근무실적·능력·태도등을 절대평정하는 순서로 진행되며 이를 종합해 평정대상자의근무성적을 수(20%)·우(40%)·양(30%)·가(10%)로 분류해 그 성적을 승진명부에 반영하게 된다. 경력평정은 공무원으로 근무한 일정기간의 경력(5급의 경우 12년,6급이하 연구·지도사및 기능직의 경우 10년)에 대해 현직급과의 관련성을 기준으로 갑·을·병·정경력으로 분류,각각 월단위의 점수를 곱해 산출한다.경력평정 역시 승진후보자명부 작성 1개월전을 기준으로 매년 두차례씩 이뤄진다. 교육훈련성적평정은 해당공무원이 가장 최근에 직무수행능력향상을 위해 교육훈련기관에서 2주이상 받은 직급별 기본교육이나 직무전문교육의 성적을 말한다. 공무원이 도서벽지등 특수한 지역에 있는 기관(교육원및 민원실 포함)에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직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갖고 있는 경우 또는 훈장·표창을 받은 경우에는 일정점수의 가산점을 부여해 승진명부에 반영한다. 그러나 공무원사회의 승진정체가 심화됨에 따라 가점의 영향력이 커져 승진대상자들이 가점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등 가점제도 본래의 취지와 달리 부작용이 발생됨에 따라 정부는 지난 91년 6월부터 가점의 비중을 2분의 1로 줄인바 있으며 5년뒤부터는 도서벽지근무에 대해서만 가점을 부여할 방침이다.
  • 서훈 결격·박탈대상 31명/김계원·전경환·김상조씨 등 포함

    ◎명단 처음 밝혀져 감사원이 서훈결격자로 지적,총무처에 훈·포장을 박탈하도록 요구한 31명에 박정희 전대통령시해사건에 관련된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김계원 전대통령비서실장등이 포함되어 있음이 25일 밝혀졌다. 서훈결격자 3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서훈내용과 서훈당시 직책. ◇서훈자중 범죄로 인한 서훈 치탈대상자(19명) ▲박명호(홍조근정훈장·대통령경호실과장) ▲백준기(국민포장·동산의료원원장) ▲김중묵(녹조근정훈장·조달청과장) ▲문철웅(총리표창,국민훈장 석류장·재향군인회회장) ▲전경환(홍조근정훈장,새마을훈장 자립장·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 ▲박종관(녹조근정훈장·조달청과장) ▲임원재(홍조근정훈장·부산시지하철본부본부장) ▲윤자중(충무무공훈장,보국훈장 국선장,보국훈장 통일장,을지무공훈장,청조근정훈장·교통부장관) ▲박창권(홍조근정훈장·건설부국장) ▲정승원(보국훈장 삼일장·국방부 행정관) ▲곽근배(석탑산업훈장·서일종합건설대표) ▲김석현(근정포장·경상남도 과장)▲진남식(〃·내무부근무) ▲김상조(녹조근정훈장,보국훈장 천수장,홍조근정훈장·치안본부 3부장) ▲신선호(금탑산업훈장·율산실업대표)▲박연차(석탑산업훈장·태광실업대표) ▲최덕신(태극무공훈장) ▲김재규(보국훈장 통일장·중앙정보부장) ▲김계원(수교훈장 광화장·대통령 경호실장) ◇사전 서훈결격자(12명) ▲박은태(석탑산업훈장·미주산업대표) ▲이수천(국민훈장 목련장·임마누엘영육원대표) ▲최신해(국민포장·청량리정신병원장) ▲이근옥(새마을포장·새마을지도자) ▲문광식(국민훈장 목련장·민주평통 안양시 협의회장) ▲이흥길(산업포장·양정종합상사대표)▲장춘락(새마을훈장 노력장·삼화새마을금고이사장) ▲박종기(〃·동원농산종묘대표) ▲장태석(체육훈장 백마장·한국체대학생) ▲박문용(새마을훈장 노력장·농수축산업종사) ▲이인진(산업포장·충북진천농지개량조합)▲선상준(체육훈장 기린장·학생)
  • 이런 전쟁(외언내언)

    「6·25」에 대한 역사적 정의라든가 전쟁사적 규정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동란이니 사변이니 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조선전쟁 또는 그냥 「6·25전쟁」이라고도 쓴다. 「6·25」는 이를 체험한 세대에겐 민족적 비극이며 악몽이다.휴전선철책과 판문점,국립묘지와 녹슨 훈장,빛바랜 사진 한장이 그 비극의 실체다. 19 49년 4월13일 당시 38선을 시찰한 미 전권대사 필립 C 제섭은 『실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 서니 전율을 금할 수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50년 6월초에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북한군이 38선에 집결되고 있다.남한군은 형편없이 약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본국정부에 보냈다.그는 그 직전 워싱턴에서 『한국군이 전차와 장비로 증강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서울로 귀임한 터였다.국무차관 딘 러스크는 무초의 전문을 읽고는 같은 소리거니 판단하고 서랍속에 처박았다. 50년 6월19일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38선 부근으로 소제 전차와 중포가 대량으로 이동완료됐으나 병사들의 동태는 「쥐죽은 듯이」고요했다는 게 당시 미국방장관 존슨의 훗날 증언이다.바로 엿새후 일요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했다. 남침공격에 앞서 김일성이 공격계획을 마무리할 무렵 소련의 스탈린은 계획승인과 동시에 인민군의 사단·연대에 배치됐던 소련측 군사고문단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했다.그 당시 소련공산당 초급간부였던 흐루시초프가 의아해서 까닭을 물었다.『고문단을 그대로 거기에 두는 것은 너무 위험해.잘못하면 포로로 잡힌단 말야.우리가 끼어들었다는 증거를 보여선 안되지.그건(전쟁)모두 김일성의 일이지 우리일은 아니니까』흐루시초프회고록에 나오는 스탈린의 대답이다.또다시 「6·25」를 맞는다.아니 벌써 43년전의 일이다.
  • 「서훈박탈」놓고 총무처 고민

    ◎감사원 31명 조치요구에 전례없어 난처/케이스별 외국사례 분석… 대처방안 모색 국가가 훈장을 주었다가 다시 뺏을 수 있는 것인가. 상훈관련 주무부서인 총무처는 요즘 고민에 빠져있다.감사원이 과거 국가서훈자중에서 윤자중 전교통부장관등 31명의 자격문제를 지적,서훈박탈조치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 감사원은 윤 전장관등 19명은 훈포장수여이후 자격박탈요건이 생겼다고 밝혔고,최신해 청량리정신병원장등 12명은 사전 자격이 없는 인사에게 서훈이 주어졌다고 지적. 상훈법 8조에 보면 ▲서훈공적이 허위임이 판명됐을 때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자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때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경우에는 서훈을 박탈하도록 규정되어있다.따라서 비리혐의로 형을 확정받은 윤 전장관등은 법적 자격박탈케이스에 해당한다. 총무처 상훈지침은 금고이상 형을 받고 3년이 경과되지않은 인사는 훈포장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최정신병원장등 12명이 그같은 경우라는 것. 법규는 그같이 되어있으나 훈포장 박탈사례가 이제까지 한건도 없었다.공무원 제안제도로 상을 받았던 철도청직원이 남의 제안을 도용한 것으로 밝혀지자 스스로 상을 반납한 예가 있을 뿐이다.상을 줄때 신원조회가 미흡했다면 정부의 잘못이니 선뜻 취소처분을 내리기 힘들다.또 상을 받을 당시에는 유공자였으나 나중에 비리를 저질렀다고 훈장을 박탈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도 있다는 것이다. 야당에서 「5·18」진압관련인사들의 서훈을 박탈하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도 정부로서는 골칫거리이다.이번 감사원 지적을 잘못 처리하면 「5·18」서훈문제와 맞물릴 수도 있다. 총무처는 향후에는 자체 신원심사에 철저를 기해 무자격자의 서훈수여가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서훈후 형을 받은 경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와 외국사례들을 종합,신중히 대처방안을 마련해나가기로 했다.
  • 공무원 봉급 전면동결 의결/각의,올연말까지

    ◎고통분담 취지… 9년만에 처엄/고 김춘도경장에 근정훈장 추서 정부는 17일 황인성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다음달부터 당초 3% 인상될 예정이던 공무원봉급을 전면동결하는 내용의 공무원보수규정개정령안을 의결했다. 경제회복을 위한 정부의 고통분담의지에 따라 취해진 이번 조치로 모든 공무원들은 올해말까지 현수준의 임금을 지급받게 된다. 전체공무원의 임금이 동결된 것은 지난 84년 2차 석유파동이후 9년만으로 지난해에는 1급이상,90년에는 3급이상 공무원의 임금이 동결됐었다. 한편 각의는 폐기물관리법시행령개정안을 의결,일반폐기물을 하루평균 1t이상 배출하는 업자를 일반폐기물 다량배출자에 새로 추가했다. 각의는 이밖에 지난 12일 대학생 시위진압도중 사망한 고금춘도경장에게 근정훈장을 추서하고 아니발 카살 주한파라과이대사등 3명에게 수교훈장과 보국훈장을,금년도 생산성대상수상자인 김회수금성기전대표에게 산업훈장을 각각 수여키로 했다.
  • 김 순경 영결식/대전국립묘지 안장

    학생시위를 진압하다 숨진 고 김춘도순경(27)의 영결식(장례위원장 김길동서울경찰청경무부장)이 16일 상오10시 서울중구 신당동 제1기동대 광장에서 이해구내무부장관,오병문교육부장관,박찬종의원,김효은경찰청장,여관구서울경찰청장 그리고 김순경의 아버지 김학용씨(61)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고인에게는 옥조근정훈장이 서훈됐으며 경장으로 1계급 특진됐다. 영결식을 마친 김순경의 유해는 경기도 성남 시립장묘사업소에서 화장된 뒤 대전 국립묘지 경찰묘역에 안장됐다.
  • 시위대,골목서 무참히 난타/경관 참사

    ◎퇴로 차단… 쓰러뜨린 뒤 짓밟아/병원후송 1시간만에 절명/검경,폭행가담자 전원 구속방침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참변이었다. 대학생들은 이날 2시간여동안의 시위를 벌인뒤 경찰의 해산작전에 밀려 달아나면서 김춘도순경에게 달려들어 무차별 폭행을 가해 목숨을 앗아갔다. ▷사고순간◁ 사고나기 5분전인 하오4시10분쯤 경찰은 연신내네거리 왕복9차선 도로를 점거한채 연좌농성을 벌이던 학생2천여명에 대해 해산위주의 진압작전을 펼쳤다.순간 학생들은 구파발쪽으로 달아났고 이들 가운데 3백여명은 조흥은행앞 삼거리에서 갈현중앙시장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으로 달아난 학생들은 숨진 김순경등 30여명의 사복체포조들이 뒤쫓아오자 갑자기 뒤돌아서서 경찰을 덮쳤고 혼자 붙잡힌 김순경의 오른쪽 목과 가슴 등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마구찼다. 뭇매를 맞은 김순경은 5m쯤 뒷걸음치다 조흥은행앞 삼거리입구 신호등 아래에서 앞으로 쓰러졌다. 당시 김순경은 진압봉을 뺏기고 투구가 벗겨진채 러닝셔츠가 겉옷밖으로 삐져나온 상태였다. ▷사고직후◁ 김순경이 쓰러지자 주변에서 대기중이던 전경 10여명이 김순경을 급히 부축,인근 청구성심병원으로 옮겼다. 학생 3백여명은 너비 7m쯤의 좁은 골목길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다 하오4시30분쯤 강제 해산됐다. 목격자 사고지점인 경산빌딩 맞은편에서 구두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승규씨(30)는 『경찰과 학생이 좁은 골목길안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난뒤 김순경이 비틀거리며 5m쯤 골목바깥쪽으로 걸어나와 앞으로 쓰러졌다』고 말했다. 시장입구의 금은방인 「황보당」주인 박진숙씨(34·여)는 『전경들이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진압하자 학생들이 주먹과 발길질로 맞섰다』고 말했다. 또 시장상인 김모씨(34)는 『숨진 김순경은 동료 경찰관들과 5m쯤 떨어져 있다가 한 학생의 발길에 차여 쓰러졌고 학생 30여명이 쓰러진 김순경을 마구 짓밟았다』고 말했다. ▷응급치료◁ 김순경은 사고발생 15분뒤인 하오4시30분쯤 전경들에 의해 1백여m 떨어진 청구성심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응급실에 대기하고 있던 이 병원 송규우외과의사(35)는 김순경의 왼쪽 폐에서 수차례에 걸쳐 4ℓ나 되는 고인 피를 뽑아낸 뒤 긴급 수혈을 하고 수액주사를 했으나 짧은 시간내에 워낙 많은 피를 흘려 1시간여 뒤인 하오5시25분 숨졌다. 김순경을 치료한 송의사는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김순경은 이미 흉곽내출혈에 의해 동공이 확대되고 호흡곤란증세를 보이며 빈사상태였고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회생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김순경의 시신은 이날 하오7시55분쯤 81중대 2소대 모공석경위(40)등 경찰관 9명의 인솔하에 앰뷸런스로 송파구 가락동58 국립경찰병원 응급실에 도착,당직의사들로부터 30여분간 검안을 받은뒤 영안실에 안치됐다. ▷빈소◁ 이날 시위진압에 참가했던 81중대 소속 대원 60여명은 하오8시30분쯤 경찰병원에 도착,X선 촬영실 밖에서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이날 하오9시쯤 동료순경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촌동생 김춘길씨(27)와 둘째누나 김명옥씨(35)는 『연락은 병원으로 오던중 방송을 통해 동생의 사망소식을들었다』면서 통곡하다 기절했다. 또 김순경의 삼촌 학근씨(45)와 형 춘식씨(35)내외도 영안실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어 주위의 눈시울을 적셨다. 한편 김순경의 고향인 경북 영덕군 달산면 옥산2리에는 아버지 김학용씨(61·농업)와 동생 태구씨(23)가 이날 하오 모내기를 마치고 집에서 쉬던중 이같은 비보를 접하고 망연자실하며 흐느꼈다. ◎김 순경 1계급 특진 한편 경찰은 숨진 김 순경을 1계급 특진시키고 훈장을 추서한 뒤 국립묘지에 안장키로 하고 장례는 오는 16일 상오10시 근무지인 서울 중구 신당동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에서 서울경찰청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 「5·18」 훈포장·표창자 명단

    ▲충무무공훈장(3명)=정호용 박준병 최세창 ▲화랑무공훈장(13명)=차정환소령(11특전여단·전사)변상진소령(동·전사)최연안중위(7특전여단·전사)조창구중령(11특전여단)박병수대위(7특전여단)김태용대위(11특전여단)김석찬대위(동)임명진중위(동)임수원중령 고성준대위(7특전여단 중대장)최영준대위(11특전여단)이종규상병(보병20사단·전사)변광열상병(동·전사) ▲인헌무공훈장(20명)=전광철상사(3특전여단·전사)박억순상사(11특전여단·전사)이영권중사(동·전사)김용석중사(동·전사)최갑규중사(동·전사)김용구상사(동)안희선상사(3특전여단)이동국중사(11특전여단)조진수중사(동)편종식대위(3특전여단중대장)전광수중위(7특전여단소대장)석희업대위(11특전여단중대장)정대덕소령(동·지역대장)김성범병장(보병20사단)한윤수상병(육군포병학교)이명규병장(보병20사단)윤태정일병(육군포병학교)임춘수일병(동)강대농상병(육군화학학교)이병택중사(전투병과교육사·전사) ▲무공포장(17명)=김경용병장(7특전여단·전사)이상수병장(11특전여단·동)권석원병장(11특전여단·동)이관형상병(7특전여단·동)권용운상병(11특전여단·동)김인태상병(동)김지호상병(동)김갑규하사(7특전여단)장원복하사(3특전여단)배현수하사(동)이종열일병(11특전여단)경기만일병(동)강용래병장(보병31사단·전사)김명철상병(동)최필양일병(동)이종규 배동환상병(11특전여단) ▲삼일장(1명)=김연균대령(광주 통합병원장) ▲광복장(4명)=이기양대위(보병20사단중대장)김용주병장(육군화학학교)박용근상병(보병20사단)배승일(전투병과교육사·군무원) ▲보국포장(11명)=호근철중사(3특전여단)이연배중사(7특전여단)이연수중사(3특전여단사령부)안경상일병(7특전여단)조용희하사(3특전여단)서영민일병(7특전여단)강춘구하사(3특전여단)신재덕일병(7특전여단)김기종하사(3특전여단)김관식일병(7특전여단)손광식일병(전투병과교육사·전사) ▲대통령표창(5명)=최웅준장 신우식준장 장운태중령(보병31사단대대장)특전사령부 보병20사단 ▲국무총리표창(5명)=오의근대위(3특전여단중대장)안부웅중령(11특전여단대대장)권승만중령 추삼득(광주경찰서경장)김정수일병(보병20사단)
  • 「5·18민주화 운동」 진압작전 관련/서훈·표창자 명단공개/민주당

    ◎의원 2명·현역장성 3명 포함 민주당은 4일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과 관련해 훈·포장및 표창을 받은 77명및 2개진압부대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날 공개된 명단은 민주당의 김병오 정책위의장이 지난달 1일 권령해 국방장관에게 발송한 서면질의에 대해 국방부가 회신해 온 것이다. 훈·포장및 표창을 받은 당시 장성급은 모두 5명으로 정호용 특전사령관(현 민자의원)박준병 20사단장(현 민자의원)최세창 제3특전여단장(전 국방장관)등 3명이 충무무공훈장을,최웅 제11특전여단장(주폴란드대사)신우식 제7특전여단장등 2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현재 복무중인 13명중 장성급은 육본인사운영감 임수원준장(당시 3특전여단 대대장)이 화랑무공훈장,15사단장 이종규소장(당시 20사단 대대장)이 무공포장,하사관학교장 권승만준장(당시 7특전여단 대대장)이 국무총리표창을 각각 받았다. 또 충정작전부대였던 특전사령부와 제20사단은 대통령표창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훈·포장및 표창을 받은 77명중에는 당시 장성급 3명,장교 24명,하사관및사병 48명등 군인 75명이외에 군무원·경찰관 각1명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75명 가운데 ▲장교 3명과 하사관및 사병 20명은 당시 진압작전과정에서 사망했고 ▲39명은 전역했으며 ▲나머지 13명은 현재 장성 3명,영관급장교 8명,하사관 2명으로 복무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세주열사)

    ◎의용군 지휘… 중국 화북서 일군과 전투/중학때 연무단 조직,개천절시위 주도/일경수배 피해 망명… 조선의열단 결성/독립단체 규합… 40만명과 교전중 장렬한 최후 윤세주선생은 1901년 6월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강천리에서 부친 윤희규선생과 모친 김경이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성품은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서 저항할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윤선생은 국민학교때 일왕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변소에 버릴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그는 밀양의 사립 동화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교장의 영향을 받아 항일 정신을 키워갔다. 윤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학교내의 비밀결사인 연무단을 조직했다.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그러나 윤선생의 가슴에 반일·배일사상은 영원히 남게됐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13일 하오1시쯤 수천명이 모인 고향장터에서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그를 그냥 둘리 없는 일제의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그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해 4월14일 부산지법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윤선생에게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 만주로 망명한 그는 요령성 유하현에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따라 이회영형제가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그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그는 11월9일 죽마고우 김원봉등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구체적인 항일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열단은 조선총독부등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살해 하기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투척자를 물색하게됐다. 19세의 그는 신철휴 윤치형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 그러나 윤선생일행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국내동지 50여명과 함께 체포됐다. 5년4개월의 감옥생활을하고 27년 출옥한 그는 중외일보 기자·경남주식회사사장으로 위장,독립운동에서 손을 뗀 양 조용히 지내다가 32년 여름 다시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폭탄투척자 물색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도 세련되어갔다.그는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는 32년 10월20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33년 4월21일 1기로 졸업했다.독립운동전선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뒤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그해 11월10일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을 결성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안병조·김두봉·김규식·윤기섭·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33년 7월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민족혁명단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그는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는 또 민족혁명당이 일군에 무력으로 대항하기위해 만든 중국과 제휴해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간이 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다.그러나 독립운동의 효과는 호전되지 않고 일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다.독립운동을 적극 협력해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38년 10월25일 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부터는 중공군과의 내전에만 심혈을 쏟았다. 그는 직접 조선의용대 지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41년 4월에 그는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갔다.그는 마침내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8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그는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42년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월에는 20개사단 40만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조선의용군은 불과 3천∼4천명에 불과했다. ○“끝까지 투쟁” 유언 일본군은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5월29일 항일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 탈출로를 확보하고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전군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작전개시 5시간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6월3일 그는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게 동지들에게 남긴 그의 유언이었다.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선생이 전사한 뒤 1주년이된 43년 6월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은 합동으로 윤선생의 추도회를 가졌다.대한민국정부는 80년 윤세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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