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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선대위 사령탑 맡은 강선영씨(정가 초점)

    신한국당이 13일 여성표 공략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전체 유권자의 절반인 여성만을 담당하는 여성선거대책위를 별도로 공식 발족시킨 것이다.지금까지는 고작해야 중앙선대위 산하에 직능위원회 정도로 그쳐온 것이 현실인 만큼 정당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 의장에 선출된 강선영 전국구의원(71)은 당내 여성 원로.직책이 의장인 만큼 「당당히」 이회창 중앙선대위 의장과 동급이다.여성위원장인 정옥순의원이 선거대책본부장,김영순 전 정무2차관 등 11명이 부의장단,김정숙의원이 대변인으로 강의장을 보좌한다.시도별 여성선거대책위와 기획단,지방상황단,여성정책자문단,선거대책위원 등 실무기구도 갖췄다. 국립무용단 부단장,평통자문위원,예총회장등을 역임한 강의장은 전통 한국무용인 태평무의 유일한 계승자.이런 공로로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받고 88년에는 인간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됐다.경기 광명갑에 신한국당 후보로 나선 탤런트 이덕화씨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등 그녀를 어머니로 모시는 연예인들도 수두룩할 정도다. 강의장은 『여성계 지지를 확보하고 여성정책 홍보활동을 전개하며 여성의 투표참여를 독려하고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이종성 재경원 세제총괄심의관(폴리시 메이커)

    ◎“근소세 부담 안늘게 세법 보완”/「납세자 귄리헌장」 제정관련 월내 공청회 개최 재정경제원 세제실은 2·3월이 비교적 한가한 철이다.전년도 세법개정 후속조치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개정작업 준비가 본격화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종성 세제총괄심의관은 94년말 개정돼 올해부터 시행된 소득세법을 다시 손질하고,납세자 권리헌장 제정을 준비하느라 요즘 이례적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뛰고 있다. 독신근로자 등 일부계층의 근로소득세 부담 증가 논란은 기본세율체계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이국장의 전임자들이 나름대로 자료를 가지고 제도개편을 한 것이지만,상대적으로 가족수가 적은 저소득층에서 세부담증가현상이 나타나 보완할 필요성이 생겼다.이국장은 『세금부담이 늘어나는 경우가 전혀 없도록 소둑세법을 개정해 지난 1월분 급여부터 소급적용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이국장은 이달내로 필요절차를 거쳐 방침을 확정,발표한 뒤 첫 임시국회에서 법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자의 조세부담은선진국보다는 높지않다.그러나 사업소득자와의 형평성문제때문에 여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세목이다.그는 『정부의 기본입장은 재정여건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가능한 한 근로소득자의 세부담을 덜어준다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문제는 재정여건』이라고 말한다. 연월차수당은 복잡한 비과세소득의 종류를 정리하기 위해 일단 과세소득으로 통일한 대신 소득공제를 그 이상으로 늘려 실질적으로 세금부담은 하지 않도록 조치한 정책적 결정이기 때문에 다시 비과세소득으로 전환하는 것은 무의미하며,식대도 비슷한 경우이나 일반적 정서까지 겹쳐 좀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고민중에 있다고 한다. 납세자 권리헌장 제정에 대해 그는 『과거 30여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개발연대의 우리 세정은 성장재원 조달과 과세편의 위주로 납세자의 의무만 강조해온 것이 사실』이라면서 『21세기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의무에 상응한 납세자의 권리가 보호받고 납세편의위주의 세정으로 개혁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납세자 권리헌장 제정은 우리 세정사에 큰 획을 긋는 쾌거』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납세자 권리헌장은 선진국에서도 일부만이 80년대 들어서야 도입한 비교적 새로운 제도다.각국별 장단점을 충분히 검토한 뒤 우리 환경에 가장 적절한 형태와 내용을 담을 계획이다.상대적으로 현실이 열악한 우리 세정환경에서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니냐는 세무행정당국의 우려도 있지만 세제 및 세정발전을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입장이다.이달중 공청회를 거쳐 첫 임시국회에서 제정할 계획이란다. 서울 상대 경제학과를 나와 행시 10회로 지난 71년 국세청에서 공직을 시작한 이래 관세청,내무부 지방세심의위원,재무부 관세정책과장·국세심판관 등을 두루 거친 보기 드문 세제·세무행정통이다.관세정책과장시절 간이환급제도를 도입하는 등 관세환급제도를 대폭 개선했다.지난달 조세의 날에는 세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재경원 공보관도 지냈다.바둑을 즐기며 테니스는 수준급이다.
  • 지휘자 임원식(이세기의 인물탐구:93)

    ◎26세에 지휘봉 잡은 “한국의 토스카니니”/46년 고려교향악단 창설… 4대교향곡 국내초연/서울 온 오사카필 등 단골 지휘… 일 TV서도 소개/서울예고·예원학교 설립… 7순넘긴 나이에도 “꼿꼿한 현역” 미국의 NBC교향악단이 세기적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음악의 자존심」 임원식이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그는 음악을 위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은 음악사의 중앙을 가로질러 우뚝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평생을 통해 그처럼 존경과 사랑과 선망을 한몸에 받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그리고 음악의 발전·보급과 그 질을 높이는데 지금도 식을줄 모르는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첫째,그는 우리나라 교향악운동에 초석을 놓은 독보적 존재다.아직 새파랗게 젊은 나이인 26세에 하얼빈교향악단 지휘로 음악계에 데뷔,국내 최초의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여 46년 서울 부민관무대에서 첫지휘봉을 잡았을 때 『혜성같이 나타난 젊고 아름다운 예술가에 대한 청중의 열광은 참으로 대단했다』『연주 때마다 객석은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그날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은 극장의 창문을 깨뜨릴 정도였다』고 그의 오랜 동료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전봉초씨가 이를 증명한다.그로부터 10년후인 56년,KBS교향악단창단과 함께 그는 지금까지 「현역의 단정함」을 꼿꼿이 지키고 있다. 지난 94년 음악생활 50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그는 베토벤 교향곡 1번·5번을 필두로 다섯차례나 암보지휘를 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다. 전에는 비교적 섬세한 해석이 눈에 띄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큰 흐름을 붙들면서 「음률의 마디마디에서 거인의 숨결이 느껴지고 인간정신의 승리가 구가되는 한층 심화된 경지」를 펼쳐보였다.『그가 지휘봉을 드는 순간이 바로 음악을 이루는 순간』이라는 박용구씨의 평은 결코 과장일수가 없다. ○연주때마다 관객 만원 둘째,음악교육에서도 그는 미래를 지향하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만든 일이다.미 줄리어드 음악학교 유학시절 청소년예능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이화재단 신봉조이사장과 의논하여 예술고교를 설립하는 한편 해외에 나가있는 재능있는 젊은이가 눈에 띄면 어떤 방해도 뿌리치고 국내무대에 진출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음악계 일선에서 쟁쟁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원경수를 비롯,이남수 박은성,피아니스트 백낙호 정진우 신수정 이경숙 백건우등등 연주자 성악인의 대부분은 그의 도움을 받아 발돋움한 이들이다. 우리나라에 클래식이 보급되는 역사와 더불어 그는 주옥 같은 명편을 직접 들려준 첫지휘자이기도 하다.이른바 4대교향곡으로 일컬어지는 차이코프스키의「비창」,드보르자크의「신세계」,베토벤의「운명」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초연은 물론 음악애호가들이 탐닉해마지않는 모차르트에서 프로코피예프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이모셔널한 시심과 티없이 순수한 천상의 음악」으로 그때마다 지식층의 청중들을 일시에 혼도시키고야 말았다. 그는 지방교향악단의 위상과 연주확대의 차원에서도 남이 넘볼수 없는 커다란 획을 긋고 있다.83년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부임했을 때 동호인 그룹에 불과하던 이 악단을 3관편성의 풀오케스트라로 전열을 가다듬었고 지방시향으로선 엄두도 못낼 동남아및 미국순연으로 활기와 용기를 불어 넣었다.이런 면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교향악단으로 성장시킨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처럼 굵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 대한 행사는 떠들썩하게 소문내는 법이 없다.62년 이래 오사카필을 비롯,일본 NHK심포니·도쿄필하모닉의 단골지휘자였으며 지난 71년에는 서울에 온 오사카필을 지휘,내한공연을 갖는 외국교향악단을 최초로 지휘한 기록을 세웠고 77년 일본 도쿄와 삿포로에서 열렸던 아시케나지와의 협연역시 「아시케나지 특유의 탁월한 기교와 시적감성 표출을 절묘한 조화로 이끌어냈다」는 일본신문들의 특필이 있었으나 이를 과시하지 않고 평상적으로 지나갔다. ○유학도 국내진출 뒷받침 91년에는 레닌그라드필,다음은 러시아국립교향악단 객원지휘로 차이코프스키를 연주,「음 하나하나를 갈고 닦은 다이내믹한 쾌감과 가슴을 파고들게한 더없이 아름다운 거장의 선율」로 호평되었고 지난해엔 일본 마이니치 TV가 제작한 세계 최원로지휘자인 아사히나 다가시(조비나 융)다큐멘터리에 참가,이 프로그램은 다가시와 다가시의 후계자였던 그의 하얼빈교향악단 지휘 50년을 기념하는 동양음악사에 남을만한 내용이었다. 그의 성품이 바로 그렇다.폭이 넓고 대범하면서도 절도와 예의범절을 중시하여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는다.단지 싫고 좋은 것을 선명하게 가리는 까다로움 때문에 「카리스마적」이라든가 또는 「독선적」으로 몰아붙이는 예가 없지 않으나 이는 임원식 카테고리에 들지 못한 사람들의 질투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간단해진다. 오히려 불의에 굽히지 않는 강건한 의협심은 작곡가 윤이상씨가 국가보안법에 관련되어 주변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할 때도 점심을 싸들고 구치소에 드나들며 「거대한 예술가」의 고뇌와 슬픔을 달래주고 예술혼을 격려한 것으로 유명하다.그래서 윤이상씨는 『임원식은 나의 유일한 은인』임을 자랑삼았고 바로 이런 정의감과 의리가 그의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끈끈한 친화력은 다양한 층과 교분을 트고있는 사교맨이기도 하다.정·재계는 물론 체육계와도 깊이 관련되어 70년대엔 남자대학농구협회부회장을 지내는가 하면 바로 「농구의 노래」를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농구와의 인연은 그가 누구도 「못말릴 농구광」이기 때문이다.그가 얼마나 열렬한 농구광인가는 그가 있는 곳엔 반드시 어린이농구든 어머니농구든 농구경기가 열리고 있다고 짐작하면 정확하다. 그는 평북 의주의 독실한 개신교집안에서 태어났다.집안이 만주로 이사하는 바람에 봉천서 유년기를 보내고 하얼빈에 있는 제일음악학원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사사,교회찬양대를 반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접할수 있었다.편곡과 작곡에도 능하여 도쿄음악학교시절에 작곡한 파인 김동환의 「아무도 모르라고」는 지금도 폭넓게 애창되는 가곡의 하나다.가족은 플루티스트인 고순자씨와의 사이에 2녀1남,연극연출가 임영웅씨가 그의 조카다. ○각계각층 인사와 교분 토스카니니가은퇴해야 할 69세부터 87세까지 거장다운 황금시대를 누렸고 스토코프스키가 95세까지 7천회의 지휘로 금자탑을 쌓았다면 그는 지금 욕구와 절제,감성과 이성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음악의 정수를 순수한 형태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결집된 시기다.그의 열렬한 지지자의 한사람인 원경수는 「영원히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점에서 『그는 파우스트적』이라고 말한다.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의 피아니시모는 예리하고 그의 포르티시모는 누구보다 웅장하며 긴장되고 팽팽한 현의 울림,꽉차오르는 관의 장중한 볼륨은 거센 폭풍우를 분출시키면서 청중의 가슴속에 날카롭게 꽂힌다』고 경탄해 마지않는다. 올해는 그가 하얼빈서 돌아와 첫지휘봉을 잡은지 만50주년이 되는해,상대방의 내부에 음악의 혼을 심어준 「위대한 음악의 은인」에게 우리 모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의 기립박수를 보낼 때이다. □연보 ▲1919년 평북 의주출생 ▲1942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 졸업 제정삼낭사사 ▲1945년 중국하얼빈심포니 지휘데뷔 ▲1946년 고려교향악단창단,초대상임지휘자 ▲1948년 줄리어드음악학교 수학 ▲1949년 탱글우드음악제서 러시아출신의 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사사 ▲1953년 서울예고 창립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1956∼71년 KBS교향악단 창단,상임지휘자 ▲1961∼75년 서울예고교장 ▲1962년이래 일본 오사카·도쿄필,NHK교향악단 등 50여회 객원지휘 ▲1966년 한국음악협회이사장 ▲1971년 내한 오사카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서울시민회관) ▲1973∼86년 국제청소년 음악연맹 한국지부 회장 ▲1976년부터 서울예고 명예교장 ▲1978년 경희대 음대학장 ▲1981∼84년 예총부회장 ▲1984∼95년 인천시향상임지휘자 ▲1985년부터 추계예대교수 ▲1987년 인천시향 동남아순회연주 및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 3개도시 연주 ▲1991년 싱가포르 교향악단 및 레닌그라드필 지휘 ▲1994년 음악데뷔 50년 기념음악회 서울시향 「베토벤 교향곡전곡」지휘,러시아국립교향악단 지휘 ▲1995년 국제청소년음악연맹 한국지부회장 예술원회원,인천시향 및 서울아카데미심포니 명예지휘자 서울시문화상·방송문화상·오월문예상·대한민국예술원상·서독문화훈장·은관문화훈장·음악동아대상
  • 홍순일 변호사 별세

    대구지검장을 지낸 홍순일 변호사(79)가 4일 상오 8시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나와 지난 46년부터 78년까지 32년동안 검찰에 몸담았다.서울지검 차장검사,춘천·대전·광주·대구지검장을 역임하면서 황조·홍조·녹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원식씨(LG증권 국제금융부 과장),사위 이용구(대림산업전무)·신희구(서울지검 서부지청 차장검사)·금난새(수원시향 지휘자)·김영진씨(경기대 교수) 등이 있다. 발인은 6일 상오8시 서울삼성의료원.3410­0469
  •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석구 선생

    ◎「독립선언」 민족대표… 신사참배 끝내 거부/감리교 구역장 맡아 전도하며 항일운동/일장기 게양 거부… 체포·투옥 고초 겪어 국가보훈처는 2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되는 등 국권회복에 힘쓴 은재 신석구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875년 5월 3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신재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유가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20대 초반 서울에서 한학을 가르치고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침탈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현실은 선생을 안주하도록 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개된 반일 국권회복운동은 언론,종교,교육,학술을 통한 국민계몽운동과 즉각적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나뉘었다.선생은 이 가운데 종교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을 모색했다. 선생은 1908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A·W·Wasson)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개성 북부교회를 맡게 된다.한국 병탄 이후에는 감리교 강원도 홍천구역장과 경기도 가평구역장으로 활동하면서 암암리에 국민계몽활동을 폈다.1910년대 전도를 통한 국민계몽활동은 곧 항일의식의 고취요,독립운동의 전파나 다름없었으며 1919년 2월 감리교 목사인 오화영의 권유로 3·1운동의 추진계획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선정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이 일로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같은 일제의 탄압은 선생의 몸을 구속할 수는 있었어도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선생은 재판정에서 『조선독립은 이루어진다.독립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당당히 대답,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본격적인 「황민화」정책을 감행한다.이에 따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어 상용,신사참배,황국신민서사,창씨개명 등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일본 신도에 대한신사참배는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요,민족적으로는 식민지 정책에 협력함으로써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감리교단 결정에 의해 신사참배를 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선생은 이를 단호히 거부,1938년 7월 다시 체포돼 2개월간 갖은 악형을 당하고 중병이 들어 석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끝내 굴복하지 않고 1939년 5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 교회의 담임으로 가서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1941년 3월에는 조선감리교회를 일본 기독교단의 산하에 두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호응하려는 감리교 통리자의 친일 배족행위에 반대하다가 강제로 은퇴당하기도 했다. 같은해 12월 일제의 태평양 전쟁 도발 때에는 일본 경찰의 민족운동자 예비검속 조치로 1개월 이상 구금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더욱이 광복직전인 1945년 5월 선생은 대동아 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다 용강경찰서에 다시 피검되는 등 한시도 일제에 대한 항쟁을멈추지 않았다. 광복 이후 선생은 북한지방에 남아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3·1절 기념 방송사건,1947년 3월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사건으로 2차례 투옥됐다.이어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공비밀결사를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북한 중앙정치보위부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선생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국군의 평양탈환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공산군에게 총살돼 순국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퇴직교원 3천2백32명 포상

    정부는 28일 이달말로 정년 또는 명예 퇴직하는 초·중·고 및 대학 교원 2천7백42명과 교육경력 15년 이상인 의원퇴직 교원 4백90명 등 모두 3천2백32명에게 훈·포장 및 표창장을 수여키로 했다. 경북대 금종우교수 등 27명은 국민훈장 모란장을,서울 동명초등학교 조성호교장 등 1천8명은 국민훈장 동백장을,서울 광남초등학교 임장하교사 등 6백24명은 국민훈장 목련장을 각각 받는다.
  • 비틀스의 모든것 선보인다/케이블TV Q채널…「비틀스앤솔로지」방송

    ◎탄생∼해체·음악세계 함께 조명 60년대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케한 영국의 전설적인 4인조 팝그룹 「비틀스」의 음악세계를 담은 화제의 최신 다큐멘터리가 케이블 방송을 통해 소개된다. 다큐멘터리 전문 케이블 채널인 Q채널(25번)은 1주년 개국특집으로 영국애플사가 지난 86년부터 10여년동안 제작,지난해 11월 완성한 초대작 다큐멘터리 「비틀스 앤솔로지」(감독 지오프리 원포)를 긴급 입수,오는 3월2일부터 3주간 매주 금·토 하오 10시 방송한다. 「비틀스 앤솔로지」는 팝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한 세대의 문화를 변모시킨 이들로 평가받는 그룹 비틀스의 탄생과정에서부터 해체에 이르는 모든 것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희귀한 자료들과 함께 담고 있다. 존 레논·폴 메카트니·조지 해리슨·링고 스타 등 그룹 멤버들의 성장과정과 「비틀스」 결성뒤 영국 리버풀의 초라한 나이트클럽 「케번」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하루 7∼8시간씩 노래를 부르던 그들의 무명시절 풋풋한 모습들이 주옥같은 노래들과 함께 선보인다. 『처음엔 단지 리버풀에서 최고의 밴드가 되고 싶었어요.다음엔 영국최고였죠』(폴 메카트니) 처음 이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은 점점 커져 전세계를 누비게 되고 65년 엘리자베스여왕으로부터 「영예로운 대영제국인」훈장을 받기에 이른다. 이들의 첫 공식앨범 「두 미 러브」(62년),비틀스 열풍의 도화선이 된 「플리즈 플리즈 미」(63년)의 수록곡들을 비롯,최고의 히트곡인 「예스터 데이」,「헤이 주드」등이 이 다큐멘터리의 전편을 흐른다. 특히 3월2일 방송되는 제1편에는 지난해 공개된 존 레논의 유작 「새처럼 자유롭게」를 토대로 생존멤버 3명이 만든 뮤직비디오를 Q채널에서 삽입했다. 「비틀스 앤솔로지」는 완성되자마자 영국 BBC와 I채널이 독점방영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화제를 모았으며 지난해 11월19일 미국 ABC방송이 방영했을때 4천7백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 정도.현재 전세계 45개국에서 방송이 확정된 상태다. 삼성영상사업단 류시양 Q채널 사업부장은 『외국의 경우 대형 공중파 방송사들이 방송하는 화제작을 우리나라에서케이블이 첫 방송한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40∼50대 중장년층 뿐만 아니라 젊은 팝매니어들의 큰 관심을 모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문화예술단체 선거 열풍/예총회장­신영균현회장·이명복씨 나서

    ◎사진작가협이사장­이봉하·유재정씨 치열한 각축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회장과 회원단체 이사장 선거로 문화예술계가 분주하다.올해 예총은 제21대 예총회장을 비롯해 건축가협회와 사진작가협회,연예협회 이사장등 3개 회원단체장 선거가 실시됐거나 치러질 예정. 이 가운데 연예협회는 이미 선거를 끝내 새회장을 탄생시켰고 건축가협회가 14일,사진작가협회가 25일 각각 선거를 치를 예정이다.건축가협회의 경우 강석원(58)수석부회장이 규정상 협회장을 승계토록 돼있어 별 움직임이 없지만 사진작가협회와 예총회장 선거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특히 사진작가협회는 이봉하(70)부이사장과 유재정(60)회원이 지난달 25일까지 후보자 등록을 마친뒤 예측불허의 선거전을 벌이고 있다.그러나 아무래도 예총 회장선거가 문화예술계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예총은 오는 14일쯤 이사회를 열어 정기총회 일자를 확정할 방침이다.총회에서 실시될 회장선거에 최근 신한국당에 입당한 신영균(68)현 회장과 이명복(68)사진작가협회 이사장이 출마의사를 밝히고 나서 벌써부터 선거전에 돌입한 분위기다.최절로(62)예총 사무총장은 『이사회에서 총회일을 오는 28일로 결정할 가능성이 크지만 최근 15대 총선 열기를 비켜가기 위해 총선이 끝난뒤로 미루어 질 수 도 있다』고 밝혔다.총회일이 28일로 결정되면 입후보자들은 10일 전인 오는 18일까지 후보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 회장선거는 예총 10개단체의 대표 각 20명씩 2백명과 전국 75개 지회·지부대표 1명씩등 모두 2백75명의 대의원이 투표로 당선자를 결정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당초 황명문인협회이사장과 이두식미술협회이사장등 4∼5명이 출마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결국 신회장과 이이사장의 맞대결로 압축된 양상.신회장이 『이미 두차례나 회장을 역임했고 참신한 후보에게 자리를 넘기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최근 출마의 뜻을 굳혀 다른 후보들이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회장측은 이번 선거에서 지난 임기중 추진했던 목동 문화예술인종합회관이 올해부터 건립되게 된 점을 강조하며 추진력과 자금력을앞세워 표밭을 다질 계획.이에 비해 이이사장측은 예총의 위상강화와 지원확충을 집중 거론해 문화예술인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끌어낸다는 전략이다.이이사장은 운동선수가 세계무대에서 입상하면 연금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문화예술인들은 금관문화훈장을 받고도 연금혜택에서 제외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관련법 제정을 위해 나서는 한편 지방 문화원과 예총산하단체에 대한 지원금을 늘리고 회장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4년 단임제를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와관련,문화예술인들은 『예총회장은 중앙·지방의 모든 문화예술인들을 모두 배려할 수 있는 진정한 봉사자가 당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양측에 대한 지지는 팽팽한 편.연극·무용·연예등 무대예술쪽은 신회장에 기울고 있는 반면 건축·사진·문학·미술 분야와 지방 대의원들은 이이사장쪽을 지지하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아무튼 선거일 결정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돼야 당락의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이번 예총회장 선거는 예년의 판도와는 달리 결과를 쉽사리 점칠 수 없다는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 일재 식민사관 맞선 애국계몽 사상가/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채호선생

    ◎자주적 한국 고대사 재구성,민족사관 확립/연해주서 광복활동… 「조선혁명선언」도 집필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정언을 지낸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살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살때 행시를 지었으며 12살때 사서삼경을 독파,신동으로 불렸다.18살때 한말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천원군 목천 사저를 출입하면서 신·구서적을 섭렵,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키워간다. 26살때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위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당시의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던 상황에서 실력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방법이었다.그러나 같은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됨에따라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자 황성신문은 압수조치와 함께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1906년 영국인 베델이 사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참가,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조선사」등을 저술,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의 초기식민주의사관을 퍼뜨리면서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에 광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같은 일제의 거짓학설에 대한 학문적 투쟁을 전개,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먼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한 뒤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생은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선생은 연해주에서 광복회를 조직하고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는 박은식 등과 박달학원을 세우는 등 국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임시정부 발기회의 참가했으나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윌슨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고 퇴장했다.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를 묶어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역시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반 임시정부의 노선을 걸었다.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한 선생은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이 선언은 일제의 요인과 기관을 암살·파괴할 폭탄·단총과 함께 의열단원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였을 정도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일제당국을 공포에 빠뜨렸다. 1924년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를 집필,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들 역사서를 통해 제시된 선생의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사관은 당시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대응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과에 따라 대만에서 화폐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순국했다.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무형문화재 김성진옹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제20호 대금정악의 기능보유자인 김성진옹이 1일 하오 4시55분쯤 서울 강서구 방화동 217의132 자택에서 별세했다.향년 80세. 지난 82년 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녹조근정훈장,대한민국 예술원상,국악대상 공로상 등을 받았다. 발인 3일 상오 9시.(02)662­3501.
  • 단동시 영화산기슭 항미원조기념관(압록강 2천리:23)

    ◎한국전 유물 1천여점 10곳에 전시/부지 18만㎡에 연건평 1만2천㎡… 58년 건립/김일선·모택동 친필서한·명령서등도 전시/영웅실엔 전사한 모택동 맏아들 석고상도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치른 한국전쟁을 통해 오늘의 단동시인 당시 안동은 영웅도시가 되었다.그로 인해 1958년 9월 중앙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안동에 이른바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졌다.이 기념관이 오늘의 모습으로 확장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 93년의 일이다.기념관의 확장은 19 83년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단동(안동)에 들른 중앙군사위 부비서장 홍학지의 주선으로 실현되었다. ○등소평 친필 든 탑 세워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영화산기슭에 있다.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의 현판은 당시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곽말약(곽말약)이 썼다고 한다.18만㎡나 되는 부지에 1만2천㎡에 이르는 건물을 지었다.그리고 지난 1953년에는 등소평동지의 친필이 든 높이 53m의 탑을 세웠다.탑높이 53m는 1953년의 정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10개의 전시실을 두어 한국전쟁에 관한 1천1백8건의 문물이 전시되었다.이 가운데 주목을 끈 자료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에게 보낸 친필서한이다..연합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중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 김일성의 친필서한은 여러 자료 가운데 백미인지도 모른다.김일성 서한 옆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직을 채근한 모택동의 친필 명령서가 나란히 진열되었다. 그러니까 대륙의 거인이던 모택동의 휘필 한점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작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그 명령에 따라 1백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화속으로 뛰어든 것이다.장백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선족 서군(65)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지원군 참전상황이 잘 드러난다.19 50년 당시 장백현 공청단위원회 선전부장이던 그는 한달 훈련을 받고 중국지원군 고사포부대 제1사 제1탄소속 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은 10월19일로 기억하지비.그날밤에 안동을 떠나 장전하구로 와서 이내 압록강철교를 건넜수다.극비의 행동이라 중국말도 못하게 했고 중국을 떠날 때 글이 있는 물건은 못 지니게 했구마.삭주를 거쳐 평안남도 북진에 도착한 것이 10월28일인가,그렇지비.그날밤 거기서 5리쯤 떨어진 영봉에서 우리 지원군과 미군이 첫접전을 붙지 않았겠슴둥.그게 운산전투였지지비』 그 운산전투에서 미군은 3일간 포위되었다.11월1일 미군이 포위망을 뚫었으나 지원군은 미군 2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그 무렵에 지원군을 「38군」이라고 불렀는데 모택동이 「만세 38군」이라는 친필까지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그러나 지원군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특히 서군선생이 소속된 고사포부대는 박살이 났다.장비가 일본군이 쓰던 것이라 포탄이 포신에서 발사되어도 12초가 지나야 터졌다.그런 상황이어서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군선생이 소속한 고사포부대는 12월25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요령성 금주시로 철수했다.거기서 소련제37.85포로 재무장하고 이듬해 3월18일 집안을 거쳐 만포로 건너갔다는 것이다.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비해 모든 장비가 열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확인되었다.기념관내 공군진열실에서 본 쌍방의 공군장비에서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났다.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체 전투기가 2백대도 안되었지만,연합군비행기는 1천2백대였다는 것이다. ○연합군 비해 장비 열세 1951년 3월15일 지원군 공군사령부가 안동에 창설되었다.사령원은 유진이었는데,더러 미그15기가 F84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그러나 공중전 전과는 미미한 것이어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공포화에 중점을 두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 사는 김창권(66)씨는 전쟁 때 고사기관총소대에 복무했다.방호산이 사령으로 있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12사 1연대 1중대 고사기관총소대 사수이던 그는 당시 활동상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고사기관총소대는 대우가 달랐디요.일반전투원은 하루 배식량이 8백g이었는데 우리는 1천g이었단 말입네다.12.7㎜ 소련제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재수가 좋으면 적기를 명중시켰디요.함경남도 함주군에 주둔할 때니끼리 1951년 1월18일 오전쯤 됐을 겁네다.미군기 한대가 저공으로 공격해와서리 갈겼디요.그거이 명중되어 처음 한대를 잡고서리 뒤에 두대를 더 잡았디 뭡니까.그래서리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댔습네다』 그에게는 일생동안 무료치료에 자식의 대학진학특전 등이 돌아왔다.그러나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때 무효가 되었으나,지난 1987년 전공을 다시 인정받아 지금은 매달 3백원씩 연금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는 전쟁을 회고하기를 떴다하면 미군 비행기고,아군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그렇듯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은 물론 중국쪽 국경지대에도 낙하산부대들이 투하되었다. 1952년 11월15일 백두산일대에 낙하산병이 투하되자 장백·임강·무송현이 발칵 뒤집혔다.경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5주야를 산을 수색했다.이들에 의해 1명이 사살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다.「장백현지」를 보면 이보다 앞서 1951년 6월29일 낙하산 침투병을 잡는 데 공헌한 장백현 12도구 사람 채후남(1888∼1974년)이야기가 인물록에 나온다.채후남은 마을에 살다 행방불명된 김형길이라는 청년이 낙하산으로 떨어져 이미 이사한 어머니를 찾아 숨어든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관광·참배객 줄이어 항미원조기념관 맨 위층에 마련한 전쟁묘사공간 「청천강전역」은 스케일이 엄청 컸다.그림과 실물조각,조명과 음향이 한데 어울린 이 공간은 높이 17m,너비 1백32m나 되었다.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그 공간을 넋잃은 듯 바라보는 노인이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아니나다를까,전쟁에 참가했다는 노인이었다.자신을 평안북도 창성 태생으로 지금은 단동시에 사는 조선족 최정근(69)이라고 소개했다. 『은산전투를 마치고 청천강으로 나갔다.나는 포병이라 부근부대를 뒤따라 조을리에 이르니 전투가 끝났다고 그라데…,시체가 즐비해서 밤이면 얼어서 뻣뻣한 미군시체를 바람막이로 쌓아놓고 잠을 잤디 않았갔수.죽은 미군 신발을 벗겨 신는 것은 약과고 속옷까지 벗겨 입었으니 원….손을 옷속에 넣으면 이가 한줌씩 잡혔으니 별도리가 없었디』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항미원조기념관 영웅모범열사실에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의 석고상이 전시되었다.지원군사령부 근무중 미공군 폭격에 사망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묻혀 있다.어떻든 전쟁은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예찬이 아닌 전쟁억제에 더 큰 비중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이주석국세청법인세과장·세정선진화 기획단 실무간사(폴리시 메이커)

    ◎“납세자료 우편신고… 비리 원천봉쇄”/세무서 타성 벗고 서비스기관으로 거듭날것 국세청이 최근 발표한 세정선진화 방안 가운데 세무직원의 업소방문금지라는 글귀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세무직원들에게 시달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신선한 샘물같은 느낌을 줄 만한 조치였다. 국세청 이주석법인세과장(46)은 국세청 30주년에 즈음해 발족된 세정선진화 기획단의 실무책임을 맡은 간사로서 이 방안을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앞으로 세무 종사 직원이 임의적으로 업소에 나가 직접 주인과 접촉하는 것은 금지됩니다.불가피하다고 판단될 때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무직원의 업소방문은 납세자와 직접 만남으로써 비리를 발생케할 소지가 많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무직원이 아무런 목적없이는 물론이고 어떤 조사를 하다 알게된 정보를 갖고 업소에 나가거나 납세자를 세무서로 부르면 징계 등의 벌칙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친절만으로는 안되고 납세자에게 서비스한다는 차원에서 납세자가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진정한 요구사항을 해결해 준다는 배경에서 이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업소방문 금지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우편신고제이다.납세자에게 사실을 확인하거나 자료제출을 요구할 때에는 우편으로 조회하고 회신을 받는 것으로 제도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과장은 그러나 『조세회피를 막는 장치로 법적으로 보장된 질문조사권을 금지하는데는 역기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국세청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고 말했다. 또 어떤 경우나 업소방문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세금 신고후 불성실 신고자로 판단된 납세자를 조사할 경우나 우편으로 요청했으나 명쾌하게 소명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업소를 방문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있다. 『납세자나 세무공무원이나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고 말하는 이과장은 『양쪽 다 사고를 획기적으로 전환하는데 세정개혁안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래서 『세무서에 대한 좋지않은 인식을 씻어보고자하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와 같은 제도가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단언한다.과거와 같이 업소를 방문하며 개별지도를 하는 것이 업무적으로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과장은 행정고시 13회에 합격,서울송파세무서장과 재산세 1과장·소득세과장 등 실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세정업무 개선에 기여해왔다. 그 공로로 지난해 12월 중앙관서별로 1명씩 수여하는 「올해의 공무원상」과 홍조근정훈장을 함께 받은 모범공무원이다.
  • 사립교원 연금부담 6.5%로/각의 의결

    ◎식수원 개발비 93억지출 확정/고 장기려박사에 국민훈장 추서 정부는 23일 이수성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사립학교 교원의 연금비용부담률을 개인부담금의 경우 월보수의 5.5%에서 6.5%로 올리는 것을 골자로 한 사립교원연금법시행령 개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이 개정안은 연금비용의 국가부담금에 대해선 개인부담금 합계액의 55분의 20에서 65분의 25로,법인부담금에 대해선 당해 학교 교원이 부담하는 개인부담금 합계액의 55분의 35에서 65분의 40으로 각각 올렸다. 국무회의는 또 증권투자신탁업법 시행령을 고쳐 여신규모나 자산규모가 10위 이내인 계열기업군 또는 대규모 기업집단에 속하는 회사가 소유할 수 있는 위탁회사의 의결권이 있는 발행주식수를 총수의 30% 이하로 제한했다. 이와함께 생활용수가 부족한 제한급수지역 26개 시·군에 대한 긴급식수원개발비 93억4천여만원의 일반회계 지출안도 의결했다. 한편 이날 각의는 소외계층과 불우이웃에 대한 의료봉사에 헌신한 고 장기려부산청십자병원명예원장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키로 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송종익선생/재미 흥사단 이끌며 임정 적극 후원

    ◎40여년간 항일운동·광복군 지원 활동/통합 독립단체 「한족연합위」 결성 앞장 국가보훈처는 7일 흥사단 창립 발기위원을 역임하고 북미 「대한인 국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우강 송종우선생을 서거 40주기를 맞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887년 2월 대구에서 태어났다.1904년 4월 미국으로 유학간 뒤 재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40여년간의 항일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1908년 3월 전명운의사 등이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이들의 석방을 위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서 재판경비 조달에 힘썼다.1912년 도산 안창호선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여줬다.이같은 만남이 인연이 돼 선생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어 일생을 흥사단 운동에 바치게 된다. 이듬해인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창립총회가 열렸다.흥사단의 사자는 문사와 무사를 모두 일컫는 말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흥사단은 창단 이후 8년동안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했으며 3부 역원제가 실시된 1921년부터 선생은 5년간 이사부장을 맡았다. 1926년부터 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도산이 없을 때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었다. 1919년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흥사단의 창립자인 도산이 노동협판 등 정부요인으로 활동하게 되자 흥사단 미주본부의 사무는 선생이 도맡게 됐다.선생은 흥사단 활동은 물론 개인적으로는 도산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중국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을 위해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웠으나 벼농사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선생은 미주 「대한인 국민회」의 재무로서 임시정부 건설의 경비조달에도 참여했다.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1922년 1월 대의회의 결의로 지방총회를 폐지한 뒤 미주·멕시코·쿠바에 있던 지방회들만으로 국민회를 재편성하고 북미 대한인 국민회로 이름을 바꿨다. 그 뒤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는 등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자 1936년 5월 국민회는 미주 각 지역의 대표자들을 소집,항일역량의 결집을 시도했다.선생도 여기에 참여해 항일독립운동의후원에 힘을 쏟았다.선생은 총회관 건축위원에 선임되어 국민회의 중흥에 노력하는 한편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지역 항일세력의 지원을 계속했다. 국민회는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광복 때까지 외교사업과 국방후원 및 동포들의 전시안녕 보장을 주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편성도 도왔다. 1941년 4월 하와이 국민회 및 동지회와 북미 국민회 등은 하와이 국민총회관에서 「대한민족이 대동단결해 독립전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광복대업을 촉성할 것」을 목적으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했다.이 회의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정세의 변화에 호응하고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독립운동 및 지원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미주지역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됐고 이 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호놀룰루에는 의사부를 두어 1943년 봄까지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에 보내 광복사업비에 충당케 했다. 선생은 미주대표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재무에 선임돼 이같은 활동에 앞장섰다. 1943년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가 연합위에서 탈퇴하자 연합위는 워싱턴에 별도로 외교사무소를 설치했다.이 때문에 동지회의 외교사무소와 나란히 활동함으로써 외교활동에 지장이 생겼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외교기관을 단일화하기 위해 1944년 8월 주미외교위원부를 폐지하는 대신 주미외무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정,위원회 인선을 재미한인사회에 일임했다.동지회를 제외한 13개 단체 대표들은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15명의 위원을 선출했는데 선생도 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동지회가 불참했다는 이유로 이 인선을 인준하지 않았다. 선생은 광복후인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조국재건과 흥사단 부흥에 힘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지원과 흥사단 정신의 발양에 헌신하다 1956년 1월7일 별세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국악인 김천흥(이세기의 인물탐구:89)

    ◎「춘앵전」 등 궁중무 재현에 80평생/14세때 아악생으로 입문…악·가·무 두루 갖춰/대한 국악원·민속 예술원 등 설립,후지 양성/오는 3월 미수 앞두고 “전아의 극치” 「춘앵무」공연 준비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 앵삼에 노란 관과 붉은 띠,오색 한삼속에 감춘두손을 좌우로 펼쳤다가 이마높이로 들어 모으며 창사를 읊조린다.여섯자 화문석위에서 「평조회상」에 맞춰 추는 「춘앵전」은 꾀꼬리가 버들가지를 넘나들며 노니는듯 노래부르는듯 화사하고 밝은 화전태와 여의풍이 특징이다.이는 궁중정재의 마지막 한끝을 잇는 심소 김천흥이 재현한 춤으로 그는 상영산에서 잔영산에 이르는 원형그대로를 추기도 하지만 느린 가락의 상영산을 생략하고 세영산을 위시한 삼현도드리와 변주곡인 군악의 장단으로 아정한 무작을 짜고 있다. ○꾀꼬리 춤사위 일품 그의 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사람의 심금을 움직인다.그것은 한낱노익장을 과시했다는 표현으로는 미치지 못하달 수가 있다.특히 한국무용의 기교를 전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처용무」는 「깊은 온축과 비범한 예술성,씩씩하고 장엄한 남무의 풍도와 낙화유수의 가녀린 애조가 두드러져 우리의 고대무용을 보다 본격적으로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즉 그의 춤은 천격이나 기교가 없이 「심소가 아니면 되살릴수 없는 무격이 제격」이다.크고 광활하게 장삼을 흩뿌리는 「승무」역시 무기교의 절제미와 정제미,무념무상의 선비적인 청정이 깃들어 몸이 아닌 마음으로 추는명무로 손꼽힌다.그런가 하면 그의 「살풀이」는 멈출듯 주춤한 정지속의 움직임과 여백의 미가 일품이다.명주수건을 던졌다가 다가서고 다가섰다 물러서는 흐르는 춤태는 손끝 하나에서도 예술의 연륜이 묻어나 이를 보고 「속으로 흐느끼지 않은이가 없다」는 찬사를 들을 정도다.이 춤은 지난 연초 하와이대 객원교수로 갔다가 배한라여사의 1주기를 맞는 추모무대에서 춘 것이 「그곳의 객석을 흐느끼게 했다」고 전해져 왔다.노예술가의 연륜을 거론하는 것은 외람되나 약관 14세에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의 아악생으로 입소하여 장천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기를 어느덧 70여년.1923년 순종황제 탄신 오순을 경축하는 창덕궁 어전연주에서 무동으로 뽑힌 것이 인연이되어 그는 당대 명인 하규일 함화진으로부터 「악.가.무」일체를 이어받는 예인의 길에 올랐다.그가 재현하여 공연에서 선보인 궁중무만도 「춘앵전」외에 「무고」 「가인전목단」,용알을 가지고 사를 부르며 추는 「포구락」등 48종.궁중명무로 알려져 있지만 한때 아악부를 떨치고 나가 교방의 무속악사로 전전한 경험때문에 민속무용과 무속음악에도 일가를 이루어 「꼭두각시」에서 「봉산탈춤」에 이르기까지 그가 추지 않은 춤은 없다.악기도 아악부시절의 전공은 해금이지만 양금 아쟁의 명수이고 곰삭고 결삭은 성대를 구사하여 남녀창인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선유가등 12잡가와 사설시조 휘모리시조를 어느 자리에서나 두루 거침없이 노래부른다.그가 춤과 국악으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개인무용발표회를 가진것은 56년부터 7차례,궁중무용 재현은 10여차례가 넘지만 공연뒤 리셉션을 가진 것은 72년 「무악생활 50년」과 92년 「무악생활 70년기념」공연등 단 두번뿐이다.그만큼 그는남에게 폐스러운 일,번거로운 일을 삼가고 분수에 넘치는 것은 넘보지 않는다.첫번째 공연에서 벌써 「우뚝하고 반듯한 김천흥의 무용」으로 평가되더니「완숙의 미와 멋과 흥」등 넘치는 찬사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만약 충고하는 조언이 있으면 언제라도 주춤거리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돋보인다. ○순종 오순때 무동으로 「일찍이 없었고 뒤에도 없을 그의 공업은 동료와 제자의 경의와 찬하만으로 모자란다」는 이성천교수(서울대)의 말대로 그는 참으로 많은 업적을남기고 있다.40년대초 이전에서의 국악교육을 필두로 대한국악원 국악사양성소 무용인협회 한국가면극 대한민속예술원 정농악회등 국악과 관련된 수많은 단체를 만드는데 앞장서 왔으나 그는 이를 굳이 「창단」「결성」으로 강조하기보다 단순히 「참여」한 것으로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청렴했던 심소는 80평생 살림집과 무용연구소 이사를 다닌 것만도 50여번이 넘는다.살림집은 사글세 전세 전세를 전전하여 40여번,연구소는 지난 55년 낙원동에 김천흥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나서 78년 문을 닫기까지 10여번이상을 옮겨다녔다.무용발표 때마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집을 가진 것은 68년 잠실주공아파트가 처음이고 그후 다시 수번을 이사한 끝에 2년반전 현재의 서초구임광아파트에 정착했다.그러나 무용연구소 시절 장구쳐 줄 사람이 없어 하루종일 「하나둘 하나둘」 육성박자로 춤을 가르치는 궁핍한 생활에서도 그는 연구생들이 내는 월사금외에 별도로 작품료를 받은 적이 없고 월사금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냥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만사에 최선을 다하여 대강 넘어가지 않는 그는 60년대초 원각사 공연때는 빈혈로 쓰러지자 아침마다 신당동에 다니며 소피를 먹으면서 무대에 선 적도있고 76년 미독립 2백주년기념 축하행사는 50일간 필라델피아 워싱턴등 11개지역에서 20여회를 공연하는 동안 급작스런 복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의 할바와 의무에 빈틈을보이지 않았다.지금도 「국록」을 받는다는 자세로 매일 국악원에 나와 직접후진을 지도한다. ○40여회 전·월세 전전 국악계를 통틀어 『높은 스승일뿐만 아니라 인품이요 덕망,학식이고 예술에서 앞으로 누가 있어 선생을 따를 이가 과연 있을 것 같지않다』는 성경린씨(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지휘 기능보유자)의 말대로 「명확한 운궁법을 통한 정확한 표현력으로 평가되어지는 악기」를 젖혀두고라도 전통무용으로 저문한 그는 당연히 「한국무용사의 산증인」이요 「궁중정재의 대명사」이며 「정재재현의 명장」이 아닐 수 없다.아악부 시절에 만난 성경린과의 총죽지교는 「한 핏줄과도 같은깊고 짙은 우정」으로 일요일마다 「산행의 동반자」이기도 하다.가족은 그를말없이 내조해온 부인 박준주여사는 2년전 타계하고 3남3녀중 5남매는 미국에 체류중.차남 정완씨(회사원)가 극진히 모시고 있다.여전히 가볍고 날렵한 그의 몸놀림은 어느 한구석 비틀거림이나 흐트러짐이 없다.갸냘프리만치 깡마른 체구에도 강단이 세고건강해서 그에게선 「노인」의 티란 찾아볼 수 없고 특히 춤을 출때 그렇다.『남과 다투지 않고 아부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고 마음 편히 늙었으니 행복하고후회가 없다』는 그는 『그러나 노장은 무용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무대에 서서 살아있는 춤을 보여주고 싶다』는 절규와도 같은 기원을 기필코지키고 싶어한다.오는 3월 30일 미수를 앞둔 제자들의 축하공연에서 심소는 또한번 「전아의 극치」로 일컬어지는 「춘앵무」로 우리에게 상서로운 봄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그것은 무용가 최현의 표현대로 「결과 멋과 흥」이 샘물처럼 어우러진 「절예의 경지」 또는 「입신의 경지」 그자체일 것이다. □연보 ▲1909년 서울출생 ▲22∼26년 이왕직 아락부원양성소 졸업(해금·양금·아쟁전공) ▲23년 순종황제탄신 오순경축공연 무동출연 ▲26∼4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아악수장 ▲40∼45년 이화여전 강사 ▲43∼45년 조선음악가협회회원 ▲45∼47년 대한국악원이사 ▲50∼88년 서울대·한양대·추계예대·숙대무용과 출강 ▲51∼95년 국립국악원 예술사,연주원,자문위원,현재 원로사범 ▲55∼78년 무용연구소 개설 ▲1956년 첫번째 무용발표회 이후 75년까지 7차례,창작무극 「처용랑」「만파식적」「흥부전」「봉산탈춤」등 발표 ▲61∼76년 한국국악협회이사,부이사장,상임고문,명예회장 ▲61∼80년 서울시 문화재위원 ▲62∼95년 미주·동남아·유럽지역등 해외공연 21차례 ▲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39호 처용무기능보유자지정 ▲73∼93년 대락회 이사장 ▲77∼현재 정농락회 회장,궁중무용발표회 이후 10여차례 ▲78∼현재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92년 「심소김천흥선생 무락생활 70주년기념」공연(국악원소극장) ▲93년 무악생활 70주년기념 해외순회공연 ▲95년 하와이대 초청 객원교수 한국무용의 기본무보(69년) 정악양금보(82) 정악해금보(88) 심소김천흥무악70년(95년) 서울시문화상(60년) 문화재보존공로상(68년) 한국문화대상(69년) 대한민국예술원상(70년) 국민훈장모란장(73년) 한국국악대상(83년) KBS국악대상 특별공로상(92년)
  • 1995년에 사라진 별들

    ▷국내◁ ◎전 국무총리 진의종씨 해방후 상공부차관과 한전부사장을 거쳐 8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10대 선거에 낙선한뒤 10·26 이후 보사부장관으로 입각.11·12대 민정당의원으로 당선된뒤 대표위원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의학박사 장기려씨 지난 25일 서울 백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별세한 「한국의 슈바이처」.서울대·가톨릭대 의과대학교수를 역임했으며 68년 영세민을 위한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고 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민법학자 안이준씨 지난 3월19일 서울 중앙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 향년 65세.안교수는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뒤 경희대교수로 재직했으며 민사법학회장을 지냈다.주요 저서로는 민법총칙,채권법 등이 있다. ◎법조인 김성일씨 법관의 정도로 일컬어졌으며 10월31일 상오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순직.그는 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천안지원 판사를 거쳐 대법원 재판연구관,제주지법원장을 역임했다.간결한 판결문 정착에 애썼다. ◎전 대법관 김갑수씨 강직한 대법관의 대명사로 꼽혀온 변호사.1월26일 하오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향년 82세.김변호사는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와 평양법원판사를 거쳐 법무·내무차관을 역임했고 지난 60년 대법원장 직무대리 시절 군사정권에 맞서다 법복을 벗었다. ◎충남방적 이종성 회장 지난 70년 부실기업인 국안방적을 인수한지 10년도 안돼 오늘날의 충남방적으로 키웠다.81년에는 국민당에 입당,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국민당의 부총재·전당대회의장 등을 거쳤다.공직자·기업인·정치인으로 거듭된 변신을 하면서도 성공을 거뒀다. ◎명창 김소희여사 우리 시대의 소리꾼.지난 4월17일 78세로 별세.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기능보유자로 우리 국악의 양갈래를 이루는 「동편제」소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국창」.그의 소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 제1회 한국국악대상,대한미국 문화예술상등을 수상했다. ◎추상조각가 문신씨 지난 5월24일 73세를 일기로 타계한 추상조각의 거장. 국내보다 세계화단에서 더 명성을 떨친 추상조각가로 90∼92년 미술의 본고장 유럽을 순회하며 가진 회고전에서 호평을 받았고 91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기사 훈장을 받았다. ◎작곡가 윤이상씨 세계적인 음악가이면서도 끝내 이역땅에서 유명을 달리 한 비운의 예술가.지난 11월4일 78세를 일기로 독일땅에서 서거한 그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힐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67년 동백림사건으로 「이데올로기의 멍에」를 쓰고 71년 독일에 귀화했었다. ◎작곡가 길옥윤씨 지난 3월 17일 68세로 별세한 우리 가요계의 대표적인 작곡가. 대표작으로는 「서울의 찬가」 「이별」 「빛과 그림자」 「4월이 가면」. 가요생활 50년을 통해 작사·작곡·편곡한 노래가 3천여곡이 넘는다. 서울 세종로공원에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건립됐다. ◎소설가 김동리씨 지난 6월 17일 82세로 별세한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60여년 작품활동을 통해 「무녀도」「황토기」「사반의 십자가」「을화」등 1백여편의 장·단편소설을 남긴 현대문학의 증인.서라벌예대 교수,한국문인협회장을 역임했다. ◎레슬링선수 송성일씨 위암으로 1월29일 타계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백㎏급 국가대표선수. 자신의 몸에 암세포가 번지는 것도 모른 채 위암으로 투병중인 어머니를 걱정하며 혼신의 투혼을 발휘,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배구선수 김병선씨 대학졸업을 불과 4일 앞둔 2월21일 심장마비로 숨진 남자배구의 큰 별. 2m의 장신으로 성균관대학 1년 때부터 부동의 국가대표 센터로 활약하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경제학자 고승제씨 함남 출신으로 학술원회원을 지낸 원로 경제학자.일본 릿교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서울대·고려대·연세대 교수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경제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대림창업주 이재준씨 지난 39년 대림그룹의 모태인 부림상회를 세워 목재업과 건자재업에 진출한뒤 한평생 건설 외길을 걸어왔다.한국전쟁후 복구특수를 활용해 기반을 다졌고60년대 중반부터 해외건설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섰다.지난 88년 장남인 이준용 대림그룹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겼다. ▷국외◁ ◎반전기수 풀브라이트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의 설립자이자 베트남전 당시 「권력의 오만」을 출간,반전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인물.지난 2월10일 워싱턴 자택에서 90세로 타계했다.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맹비난,미군의 베트남철수에 기여했다. ◎전 일 총리 후쿠다 지난 7월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그는 대장상과 외상 및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한 뒤 76년 미키 다케오 전총리에 이어 67대 총리로 취임,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도쿄국제공항 개항등 현안을 처리했다.그는 86년 중의원 14선을 역임한뒤 90년 정계에서 은퇴했었다. ◎미 언론인 레스턴 미국 언론인들의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두번이나 수상하는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언론인중의 한 사람.지난 12월6일 워싱턴DC의 자택에서 암으로 숨졌다.그는 뉴욕타임스에서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제임스 레스턴 칼럼」을 연재,필명을 떨쳤다. ◎중 실용주의거두 진운 중국의 최고실력자 등소평과 함께 모택동사후 중국정치를 요리해온 인물.지난 4월10일 노환으로 90세에 사망했다.모택동으로부터 「당내 제일의 경제통」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50년대부터 실용주의 경제노선을 지향,모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중동평화 상징 라빈 지난 11월4일 텔아비브에서 중동평화협상 지지집회에 참석중 극우파학생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그는 군생활 28년을 거치는 동안 아랍세계와의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었으며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모색한 평화노력으로 9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케네디 모친 로즈 1월 1백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그녀는 19 14년 조지프 페트릭과 결혼,케네디가와 인연을 맺은후 대사의 아내로서,대통령과 두 상원의원의 어머니로서 최상의 영광을 누렸으나 9명의 자녀중 두명의 아들이 총탄에 목숨을 잃는 암살의 비극을 겪기도 했다. ◎전 영국총리 윌슨 60년대와 70년대초 영국 노동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으며 79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그는 29세때 하원에 진출한뒤 2년후 무역장관으로 취임해 최연소 입각기록을 세웠다.64년 총선에서 승리한뒤 총리 재임기간동안 줄곧 미국의 베트남 파병요청을 거부하고 반전무드를 조성해 영국노동당 시대를 주도했다. ◎전 일 부총리 와타나베 지난 9월 72세를 일기로 사망한 그는 『한일합방은 원만하게 체결됐으며 36년간 통치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는 망언을 남긴인물.63년 고향에서 중의원에 당선된이래 대장상·당정조회장등 요직을 거쳤고 대북한 쌀지원 협상에서는 막후조정을 벌였다. ◎영국시인 스펜더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자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지난 7월 86세로 타계했다.그는 20세기 영국의 인도주의적 사상을 대표한 강력한 자유주의적 운동을 펼쳤으며 30년대 비평가들로부터 이 시대의 가장 저명한 3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고의 양심 질라스 공산주의의 모순을 비판한 저서 「새로운 계급」으로 유명한 티토치하 유고의 대표적 반체제인사.83세를 일기로 4월20일 심장병으로 사망.부통령에 올라한때 티토의 후계자로 지목되기까지 했으나 공산체제에 염증을 느껴 반체제 이론가로 변신했다. ◎백신개발 선구자 소크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해 인류를 불구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의료계의 선구자.80세를 일기로 지난 6월23일 사망했다.뉴욕대학 의학부를 졸업,면역학및 세균학을 연구했으며 「소크백신」개발 후에는 샌디에이고 소크연구소에서 다발성 경화증과 암연구에 몰두했다.
  • 올해 공 외무 등 3명에 「훈일등」훈장/일본의 한국인 서훈 실태

    ◎80년대 중반이후 11명 최상위 “영예” 일본 고위정치인의 잇따른 과거사 망언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올해 한국과 일본정부는 각각 3∼4명의 상대국 국민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정부는 올해 한·일국교정상화 30년을 기념하기 위해 4명의 일본인에게 서훈했다.올해 데라우치문고가 반환되는 데 큰 역할을 한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일·한의원연맹회장(전총리)에게는 수교훈장 광화대장이 수여됐다.또 사할린교포의 귀환문제해결에 정성을 쏟아온 하라 분베에(원문병위) 전참의원의장과 하구라 노부야(우창신야) 일·한경제협회장에게는 수교훈장 광화장이,역시 사할린교포문제해결에 노력해온 이가라시 고조(오십람광삼) 중의원에게는 수교훈장 흥인장이 지난 18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각각 수여됐다. 올해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박용학 한·일경제협회장,백선엽 전교통부장관이다.공장관은 지난해 12월까지 주일대사로서 한·일관계발전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지난 1월 훈일등욱일대수장을 받았고,박회장은 지난 4월 한·일경제협력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훈일등서보장을 받았다. 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전장관은 조선전쟁사를 연구하는 일본인에게 아낌없는 협력을 해 양국 전쟁사 관계자간의 교류를 심화했다는 공적사항으로 지난달 훈일등서보장을 받았다. 일본이 준 훈장은 우리와는 달리 광복 50년이나 한·일국교정상화 30년을 기념하는 성격은 아니다. 주한일본대사관의 고위관계자는 『우호친선촉진에 공적이 있는 외국인에 대한 서훈은 각국이 개별적으로 평가해 이뤄지는 것이지 상호주의에 입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정부는 매년 봄과 가을에 일본과의 우호친선증진에 공헌한 외국인을 대상으로,훈일등에서 훈팔등까지 8단계로 나눠 서훈한다. 올해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모두 34명이다.이 가운데 우리국민 3명이 모두 훈일등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이 한국인에게 훈장을 본격적으로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0년대 중반이후로,86년에 신현확 전국무총리가,87년에는 이원경 전외무부장관이 각각 훈일등욱일대수장을 각각 받았다.또 88년 작고한 이병철 전삼성그룹회장과 김용완 전경방명예회장이,89년에는 고 김용식 전외무부장관이,90년에는 고 이한기 전국무총리서리가,91년에는 유창순 전국무총리가,92년에는 고 김정렬 전국무총리가 모두 훈일등욱일대수장을 받았다.
  • 파행·날치기 시비없이 「깨끗한 매듭」/14대 마지막 정기국회결산

    ◎5·18법 제정·예산 시한대 처리 큰 성과/정치관련법 손질… 정치권변화 틀 마련 제14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19일 폐회됐다. 이번 제1백77회 정기국회는 정치적으로나,국회 고유의 기능인 입법과 예산심의 등에서 그 어느 때보다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날 여야 각당의 폐회성명에서도 단 한차례의 파행이나 날치기 시비없이 유종의 미를 거둔 이번 국회활동을 높이 사고 있다. 먼저 이번 국회 회기 중에 시작된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민주당 박계동의원의 폭로로 비롯된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거 청산작업의 법적·제도적 완결이라고 볼 수 있는 5·18특별법 제정은 정치권의 앞날을 엄청나게 변화시킬 계기로 작용했다.물론 이 과정에서 대선자금 시비 등 여야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하지만 이는 단순히 정쟁차원이 아니라 구태와의 단절을 위한 진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결국 국회는 일부 야당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역사청산이라는 대의를 쫓아 5·18특별법을 원만하게 처리했다. 정경유착 근절과 깨끗한 정치풍토 조성을 위한 정치자금법 등 정치관련법도 손질했다.이는 앞으로의 정치권의 체질개선과 나아가 15대국회의 도덕성과 생산성을 보장하는 준거로 작용할 전망이다.특히 이 과정에서 돋보인 것은 여야가 끝까지 대화를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은 표결을 통해 처리하는 다수결 원칙과 민주적 질서가 존중되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또 이번 국회는 15대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여야 4당 구도 속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생산적인 국회로 운영됐다.국정감사,예산심의,법안심의 등에서 여야는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인 실적을 남겼다.지방자치 실시후 처음 실시된 국정감사는 단체장의 소속정당에 따라 일부 파행운영이 예상됐으나 결과는 정파적 이해를 떠나 국감 본래의 취지에 충실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특히 새해예산안 심의에 있어서 여야는 한 차례의 격돌없이 법정시한을 지킴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민생을 우선한다는 모습을 보였다.이는 14대국회에서 여야가 날치기 시비없이 법정시한내 예산안처리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번 국회는 비자금 정국이라는 어수선한 정치분위기 속에서도 1백71건이라는 14대 정기국회 가운데 가장 많은 법안처리 기록도 수립했다.이는 92년이나 93년 정기국회에서보다 20여건이나 많은 숫자다.특히 5·18특별법이나 정치자금법개정 등 정치적인 법안 뿐만 아니라 농어촌주택개량촉진법,중소기업 구조개선 및 경영안정지원 특별조치법 등 민생관련 법안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았다. 그러나 이번 국회가 결과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인 국회로 평가받고 있지만 여야가 능동적으로 생산적인 국회로 이끌었다기 보다는 두 전직대통령의 구속,대선자금 공방시비,사정정국에 대한 불안 등으로 인해 국회안에서의 정쟁을 자제한 결과가 조용한 국회로 끝났다는 점에서 다소 아쉽다는 지적도 있다. ◎5·18 특별법안 제1조(목적)이 법은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정지 등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공소시효의 정지)①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파괴 범죄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 ②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이라 함은 당해 범죄행위의 종료일부터 1993년2월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3조(재정신청에 관한 특례)①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고소 또는 고발을 한 자가 검사 또는 검찰관으로부터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는 통지를 받은 때에는 그 검사소속의 고등검찰청이나 그 검찰관소속의 고등검찰부에 대응하는 고등법원 또는 고등군사법원에 그 당부에 관한 재정을 신청할 수 있다.이 법 시행전에 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하는 결정이 된 사건의 경우에도 또한 같다. ①제1항의 재정신청에 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200조 내지 제205조 또는 군사법원법 의 해당규정을 적용한다.제4조(특별재심)①제2조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및 군사법원법 제469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②재심의 청구는 원판결의 법원이 관할한다.다만 군형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한 자에 대한 원판결의 법원이 군법회의 또는 군사법원일 때에는 그 심급에 따라 주소지의 법원이 관할한다. ③재심의 관할법원은 직권으로 제2조의 죄를 범한 자가 그 죄로 유죄의 선고를 받아 그 형이 확정된 사실을 조사하여야 한다. ④제1항의 재심청구인이 사면을 받았거나 형이 실효된 경우에 재심관할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6조 내지 제328조 및 군사법원법 제381조 내지 제383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종국적 실체판결을 하여야 한다. ⑤제1항의 재심에 관한 절차는 동재심의 성격에 저촉하지 아니하는 한 형사소송법과 군사법원법의 해당조항을 적용한다. 제5조(기념사업)정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 제6조(배상의제)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의한 보상은 배상으로 본다. 제7조(상훈치탈)정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훈을 받은 자에 대하여 심사한 결과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상훈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하여 서훈을 취소하고,훈장등을 치탈한다. ○부칙 제1조 이 법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제2조 제3조 제1항 단서의 규정에 의한 재정신청은 이 법 시행일로 부터. ◎당정파괴범 공소시효 특례법안 제1조(목적) 이 법은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질서파괴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배제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용어의 정의) 이 법에서 「헌정질서파괴범죄」라 함은 형법 제2편 제1장 내란의 죄,제2장 외환의 죄와 군형법 제2편 제1장 반란의 죄,제2장 이적의 죄를 말한다. 제3조(공소시효의 적용배제) 다음 각호의 범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249조 내지 제253조 및 군사법원법 제291조 내지 제295조에 규정된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아니한다. 1、제2조의 헌정질서파괴범죄 2、형법 제250조의 죄로서 집단학살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규정된 집단살해에 해당하는 범죄 제4조(재정신청에 관한 특례) ①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고소 또는 고발을 한 자가 검사 또는 검찰관으로부터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는 통지를 받은 때에는 그 검사소속의 고등검찰청이나 그 검찰관소속의 고등검찰부에 대응하는 고등법원 또는 고등군사법원에 그 당부에 관한 재정을 신청할 수 있다.②제1항의 재정신청에 관하여는 형사소송법 또는 군사법원법의 해당규정을 적용한다. ◎「12·12」­「5·18」 수사내용 국회보고 촉구안 ▷주문◁ 12·12군사반란 및 5·18내란사건 등의 수사에 있어서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8조의 규정을 적용함에 있어 국회가 수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명백한 의도가 없는 한 정부는 그 수사내용을 국회에 보고할 것을 촉구한다. ▷제안이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함에 있어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독립하여 수사를 하는 것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적절하게 감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일환으로 12·12군사반란 및 5·18내란사건등의 수사내용을 국회에 보고토록 하는 촉구결의안을 제안하는 바이다.
  • 「5·18특별법」 처리 조건 안간힘/폐회 하루 앞둔 국회표정

    ◎야2당 「긍정」 선회… 세부 사안놓고 신경전/여야 4분발언 통해 한바탕 「특검제」 설전 14대 마지막 정기국회 폐회일을 하루 남겨놓은 18일 여야는 최대 쟁점인 5·18특별법 처리를 놓고 숨가쁜 막전막후 협상을 계속했다.여야는 대체로 이견을 좁히기는 했지만 몇몇 세부 사안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처리를 하루 뒤로 넘겼다.이때문에 이날 본회의에서는 이수성 국무총리 임명동의안과 민생법안 등을 처리하는 데 그쳤다.그러나 특별법도 자민련을 제외한 야2당이 긍정적으로 나오면서 전망은 밝아졌다. ▷본회의◁ ○…여야는 이날 하오 2시부터 열린 본회의 4분 자유발언을 통해 특별법제정과 특별검사제를 둘러싸고 열띤 설전을 벌였다. 자민련 김범명 의원은 『역사를 바로 잡는 작업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겠지만 이를 한 사람의 독단으로 일시에 완성하려는 것은 과정자체가 비민주적』이라고 여당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국민회의 이석현 의원은 이어 『현재 검찰 수뇌부에는 80년 국보위에 가담한 인사도 포함돼 있고 야당에 대한 표적수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며 특검제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그는 『공소권이 없다고 결정한 검찰이 재수사를 하는 것은 「갓쓰고 목욕」하는 꼴』이라며 『검찰은 지금이라도 내부의 논리를 정리해 성공한 쿠데타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라』고 검찰에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신한국당 변정일 의원은 『창조적 개혁작업인 5·18특별법 제정작업이 특검제 도입 논의로 늦어지고 있다』며 『검찰이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수사를 하고 있고,대통령도 국민 의혹을 씻겠다고 밝혔으니 특별법제정에 협조하라』고 맞받아쳤다.변의원은 특히 『특검제를 도입하면 수사가 엄청나게 지연돼 조속한 정국안정을 바라는 국민의사에도 반하게 된다』며 『우리식 특검제인 재정신청 제도를 도입하고 있어 불공정성을 우려할 필요도 없다』고 강조했다. 무소속 서훈 의원은 『특검제를 고집해 특별법제정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정국의 주도권 상실로 인한 무조건적 반대이거나,5·6공 비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세력 또는 그런 세력을 끌어안기 위한 당리당략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며 국민회의와 자민련측을 싸잡아 비난했다. ▷총무회담◁ ○…4당 총무는 이날 하오4시 국회 귀빈식당에서 막판 절충을 시도했으나 자민련은 특별법 반대,국민회의는 조건부 찬성 등 서로의 입장을 고수해 19일 상오10시 다시 논의키로 했다. 자민련 한영수 총무는 『신한국당 소속의원들이 아직 마음의 통일이 안된 상황이나 처리를 미루자』면서 대선자금 공개를 위한 특검제 도입을 주장했고,이에 신한국당 서정화 총무는 『회기내 처리와 특검제 수용불가는 확고한 원칙』이라고 일축했다. 국민회의 신기하 총무와 민주당 이철 총무는 특별법 처리에는 응하되 각자 보완사항을 주문했다.신총무는 ▲5·18희생자에 대한 특별 재심제도 수용 ▲희생자 명예회복 ▲5·18관련자 훈장 박탈근거 ▲부화뇌동자 처벌 ▲양민학살자 처벌 등을 부칙에 명시하는 등 「5대 부대조항」반영과 5·18에만 국한된 특검제를 요구했으며 이총무는 일반 특검제 도입에 대한 정치적 약속을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그러나 신한국당 서총무는 『5·18문제는 이번 회기안에 모두 정리해야 한다』고 거부했다. ▷법사위◁ ○…이날 상오 10시 열린 법사위에서는 일반 법안 처리를 우선 진행하면서 소위 위원들이 틈틈이 쟁점조항을 놓고 막판 협상을 계속했다.특히 특별검사제 논의를 1월 임시국회로 유보키로 한 국민회의측은 법안성안 작업에서 핵심역할을 한 박상천 보건복지위원장이 박희태 법사위원장과 단독밀담을 갖는 등 국민회의의 「5대 부대조항」반영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박희태 위원장은 5·18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김대중 국민회의총재등의 「재심 특례」 또는 무죄선언 조항과 관련,「법리상 불가」라던 당초 방침에서 「사면을 받았더라도 일반적인 재심과 달리 면소가 아니라 유·무죄에 관한 실체판단을 허용하는」 특칙을 마련키로 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박상천 의원은 당 지도부를 수시로 오가며 수용 여부를 타진했고 김상현 지도위의장도 법사위원장실을 찾는 등 협상분위기는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다만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대우보장 등을 놓고 신한국당측이 법리적·현실적어려움을 들어 난색을 표시,논란을 벌였다. ▷신한국당 의총◁ ○…신한국당은 특별법을 자민련이 반대하는 만큼 표결처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아래 내부 이탈표 방지에 막판 총력을 기울였다.「5·6공」,특히 대구·경북(TK)출신의원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표단속」을 하느라 분주했다. 본회의에 앞서 열린 의총에서 김윤환 대표위원은 『역사적 과제인 5·18특별법안에 국민들은 관심을 쏟고 있다』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구시대의 악습을 일소하기 위해 특별법은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고 의원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서정화 원내총무는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자민련을 제외하고 가급적 3당 처리로 처리하는 것이 당의 방침』이라면서 『내일까지 협상을 계속하되 합의점을 찾지 못할 때는 불가피하게 표결처리할 것』이라고 거듭 의지를 밝혔다.
  • 일본인 가슴에 달아준 훈장/이도운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18일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이 발효된지 30년이 지났다. 광복 50년,국교정상화 30년이라는 숫자의 마력 때문에 올해초만해도 양국은 어두운 과거를 딛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그러나 올해가 저물어가는 현시점에서 그런 기대는 이미 퇴색된지 오래다. 오히려 올들어 양국관계는 국가원수가 나서서 상대를 비난하고 예정됐던 정상회담이 취소될 뻔 할만큼 악화됐다.아마도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고노 요헤이(하야양평)외무장관,에토 다카미(강등륭미)총무청장관등 일본 정부지도자들이 줄지어 과거사에 대한 망언을 해댄 것이 관계 악화의 가장 큰 이유가 됐을 것이다.또 이들 망언에 대한 우리정부의 대응도 이전의 정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단호하고 강경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서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고노 장관은 수교30주년을 맞은 이날 아침 전화를 통해 양국간의 지속적인 협조관계를 다짐했다.또 과거사 정리를 위한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운영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이날 눈길을 끌만한 기념행사는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한국정부가 4명의 일본인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총리를 지낸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일한의원연맹회장에게는 수교훈장 광화대장이,하라 분베(원문병위) 전참의원의장과 하구라 노부야(우창신야) 일한경제협회장에게는 수교훈장 광화장이,이가라시 코죠(오십람광삼)중의원에게는 수교훈장 흥인장이 수여됐다.정부는 훈장수여의 구체적 공적사항은 밝히지 않았다.단지 양국관계 발전에 공헌이 컸다고만 밝혔다. 외교의 기본원칙이 상호주의라지만 일본정부가 수교 30주년을 맞아 한국인에게 훈장을 준다는 얘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그렇다면 뭣 때문에 우리정부만 일본인에게 훈장을 주느냐』는 비판이 반사적으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속좁은」 비판은 일단 접어두자.다만 일본인들이 우리가 가슴에 달아준 훈장을 바라보며 지난 30년과 50년,그리고 그 이전의 모습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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