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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5 경축식 표정/“신명 바쳐 제2도약” 20여차례 박수

    ◎김 대통령 수해희생자 명복 빌며 유족 위로/경축연선 “지도층 인사 앞장서야 개혁 완수”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8·15 경축식과 경축연에 연이어 참석,‘제2건국’을 선언하면서 여느때보다 힘있는 목소리로 총체적 개혁 작업에 대한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金대통령 내외와 3부요인,각계 대표,주한 외교사절 등 7,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경축식은 金鍾泌 총리서리의 개식선언,국민의례,金正吉 행정자치부장관의 ‘대한민국 50년 경과보고’,주한 외교사절단장 축사 순으로 진행됐다. 金대통령은 경축사에 앞서 수해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면서 “정부는 복구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에앞서 고 金擎天 장군 등 독립과 교육발전 유공자 6명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金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저는 기꺼이 신명을 바쳐 여러분이 명령한 바를 성취하고자 합니다”라는 대목에 ‘반드시’라는 말을 집어 넣어 강조하는 등 개혁의지를 강력히 천명,참석자들은 20여차례의 박수로 호응했다. 金대통령은 이어 세종문화회관 세종홀로 자리를 옮긴 경축연에서도 인사말을 통해 개혁 의지를 강조하면서 참석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인 여러분이 도와주지 않으면 못해낸다”며 지도층의 개혁 동참을 촉구했다. 金대통령은 제헌국회 선거와 유엔의 승인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6·25 때 공산세력의 극복,세계 11위의 경제 대국 건설,‘아시아에서 보기 힘든’ 투표에 의한 정권교체와 민주주의 실현 등을 현대사의 4대 전환점으로 제시하고 “최근의 5번째 국난도 극복,일류국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개혁에 성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金대통령이 20여분간의 인사말을 끝내자 金鍾泌 총리서리는 “金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오늘을 기해 모든 면에서 차원높은 또 한번의 도약을 이루고,제2건국의 보람을 함께 나누는 날을 기약하자”고 건배사를 했다. 경축연에선 金총리서리,朴浚圭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국민회의 趙世衡 총재대행,자민련 朴泰俊 총재,국민신당 李萬燮 총재,姜英勳 전 총리,金正吉 행정자치부장관 등이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서자리를 함께 했다.
  • 故 金始顯 선생 외아들 峰年씨의 착잡한 ‘8·15’

    ◎3代 걸쳐 항일투쟁/훈장없는 독립투사/金九 암살배후 李承晩 지목… 저격 미수/‘나라 위한 외길’ 불구 유공자 지정 못받아 □金始顯 선생 공적 독립군 군자금 조성 5차례 16년간 투옥 상해서 의열단 조직 비밀군관학교 설립 “3대가 독립운동을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부친의 단호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8·15 광복절 쉰세돌을 맞는 金峰年씨(76·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감회는 착잡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인 金씨의 일가족 가운데 모친 權愛羅씨(작고)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자신과 부친 金始顯선생(1883∼1966)은 아직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일가의 이력은 조부인 金澤東 선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맹렬하게 활동했다. 金始顯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는 이처럼 부친의 영향이 컸다. 1917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대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체포되면서부터 가시밭길을 걸었다. 1920년에는 군자금을 조성하려다 붙잡히는 등 일제 치하에서 모두 5차례에 걸쳐 16년동안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어떠한 탄압도 선생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부인 權씨는 192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항쟁을 주도하다 만났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세계 약소민족대표자대회’에 임시정부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 독립운동의 평생 반려자로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선생은 1923년에는 폭탄 밀반입사건(일명 黃鈺 사건),1925년에는 난징(南京)에서 비밀군관학교를 설립,독립군을 양성한 혐의 등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외아들 金씨는 1942년 상하이에서 독립군에 편성돼 무장항쟁에 참여했다. 金씨는 “만주에서 모친과 함께 비밀 감옥소에 수용됐을 때 ‘봉년아 잘 있느냐. 어미도 잘 있다’는 모친의 친필을 화장실 기둥에서 발견하고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부친 金始顯 선생은 그러나 2대 민의원(안동)을 지낼 때 金九 선생의 암살배후자로 李承晩 대통령을 지목,6·25 발발 얼마 후 李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52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4·19혁명으로 석방되면서 복권돼 5대 민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金씨는 “저격 미수 전력 때문에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金九 선생의 암살로부터 나라의 비극이 시작됐다는 게 부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 두 빈소(朴康文 코너)

    항일투사 海平 李在賢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빈소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병원의 장례시설에 모셨다고 했다. 안양에 있는 작은 집에서 검박하게 살던 그에게 사후에 누리는 이런 호사란 좀 뜻밖이었다. 유족이 퍽 애쓴 것 같았다. 장례식장 건물 앞에는 연신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와닿고 차림새가 말쑥한 사람들이 내렸다. 해평 선생을 조상하러 온 손님들이거니 하고 인파에 묻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빈소 문전은 분향 재배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고인의 고매한 인품이 이렇듯 사람을 모으는가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생소한 이들 뿐인 것이 이상했다.해평 선생의 빈소가 아니었다. ○광복군 장교와 친일고관 거기서는 높은 관직에 있던 어떤 분이 조객을 맞고 있었다.그 가족이 별세한 것이었다.그 전직 고관은 일제때 유능하고 충성심 있는 관리로서 신임을 받았다.대한민국에서도 오랫동안 여러 요직을 맡았다.관직에서 물러났건만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은 거기 모인 조객의 숫자로 알 만했다.정작,해평 선생 빈소의 분위기는 고인의 성품처럼 고즈넉했다. 아니,쓸쓸했다고 해야 옳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이들이 상 두어개를 둘러싸고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몇 시간 내내 새로 온 조객은 거의 없었으니까. 해평 선생은 광복군 장교로서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합작해 8월 말로 예정한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광복군 안에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총지휘부가 구성되고 이범석 장군이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해평 선생은 본부요원이 되었다.안춘생 선생은 평안·황해·경기지역을 맡은 제1지구 대장,장준하 선생은 제1 지구의 경기도반장이었다. 국내 정진군은 국내에 들어와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미군이 상륙할 때 내응하는 것이 임무였다. 미군 훈련관이 실시한 3개월간의 특수훈련이 거의 끌나는 8월초 국내정진군은 편성되었다. 곧 미국 잠수함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할 참이었다. 일본 항복이 조금만 늦었더라면,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있을 터였다.모든 광복군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통한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해평 선생은 광복후 귀국해 수십년이 되도록 국가 보훈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이역 땅에서 갖은 신고를 겪으며 싸우다 광복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투사들께 죄스러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수십년간 공적 숨겨 그는 에스페란토­한국어사전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다.그 작업이 마침내 끝났을 때,출판비용을 조달할 방도가 달리 없자 유공자로서 훈장과 함께 받게 된 돈을 여기에 썼다.그래서 국내에서는 이 분야 최초인 사전이 해평 덕분에 나오게 되었다. 이번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늘,서울 남산에서 3·1 독립운동기념탑 건립기공식이 있다. 그 건립위원회 구성원 명단에,앞서 말한 전직 고관의 이름이 끼인 것을 보았다. 해평 선생을 영결한 것은 지난해 일이었지만,그 때 대조적이던 두 빈소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母國法서 금지” 이임 加 대사 훈장 거절

    ◎외통부 뒤늦게 서훈 취소 소동 외교통상부가 상대국의 관행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임하는 서방국 대사에게 훈장을 주려다 정중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31일 외교통상부 등에 따르면 외통부는 지난 23일 3년6개월동안 근무하다 이임하는 미셀 페로 주한 캐나다대사에게 수교훈장을 주기로 하고 행정자치부에 서훈을 건의했다.행자부는 이에 따라 30일 차관회의를 거쳐 다음주 국무회의에 상정키로 하고 일을 추진했다. 외통부는 그러나 지난 28일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전화로 통보받고 행자부에 긴급연락,서훈신청을 취소했다.행자부도 훈장수여안을 안건에서 빼냈다. 외통부는 3년 이상 근무한 외국 대사는 자동적으로 서훈을 추진하도록 돼 있고,전임 대사도 훈장을 받은 적이 있어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서훈을 추진한 것이라고 밝혔다. 레오나르드 에드워즈 전임대사는 지난 94년 외무부에 비망록을 보내 “개인적인 차원에서 훈장을 받는 것은 좋으나 공식석상에 훈장을 차고 나가지는 못한다”고 훈장을비공식적으로 받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캐나다 대사관측은 “캐나다의 어떤 대사도 공식업무와 관련해 주재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돼 있다”고 밝혔다. 한 공무원은 “러시아 외교관 사태에 이어 훈장 취소소동은 외통부의 업무처리 미숙을 드러낸 일”이라고 지적했다.
  • 행자부 상훈과 李殷九씨의 ‘붓과 15년’

    ◎“정성 담긴 글씨 PC론 할수없지요” 전자 정부를 추진하는 정부 세종로 청사에 컴퓨터를 부팅하는 대신 벼루와 먹을 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공무원이 있다.행정자치부 의정국 상훈과의 李殷九 기록담당(56·5급 상당).대통령이 수여하는 훈·포장증과 대통령 및 국무총리 표창장 등을 붓글씨로 쓰는 게 李씨의 일이다. 李씨는 83년부터 15년째 이 일을 맡고 있다.한 해에 8,000여장 안팎의 훈·포장 증서를 쓴다.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훈장 이름과 포장이름,공적내용,수여권자인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름과 수여날짜 등을 모두 기록한다.훈·포장증에 적는 글씨는 모두 한글.중국인을 제외하고는 주한 외국대사 등 외국인 이름도 한글로 표기한다.지난 5·6월에는 퇴직 공무원들이 8,000여명에 이르러 이름을 적는 데만 한달이 걸렸다. “全斗煥 盧泰愚 金泳三 전 대통령 이름을 많이 썼다”는 李씨는 지난 2월 25일 金大中 대통령 취임식 때 金대통령과 李姬鎬 여사에게 수여되는 무궁화대훈장증을 만들 때 수십번 글씨 쓰는 연습을 했었다.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의 이름을 적는다는 심적 부담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의 이름은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 李씨는 “글씨는 최소한 20년 정도는 써야 남 앞에 내놓을 수 있다”면서 “능률로 보면 PC가 제격이나 훈·포장의 품위 등을 감안하면 숭고한 아름다움이 결집된 글씨로 쓰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 金正吉 행자에 들어본 2차 행정 구조조정

    ◎“공무원 조직 감축 원칙갖고 추진”/“민원인에 대한 친절도 人事 반영/공직사회가 변해야 국민들 따라와/인구기준 미달 區·郡 통폐합 바람직/박세리 선수 훈장 수여 신중히 검토” 요즘 한창 진행되고 있는 공직구조조정을 성전(聖戰)에 비유한다면,개혁을 교리(敎理)로 하는 진영의 야전군사령부는 단연 행정자치부다.개혁군(軍)은 지금 지방조직 30% 감축이나 행자부에서 2국 5과를 줄이는 2차 구조조정 등 처음에는 접근조차 불가능해 보였던 고지(高地)들을 하나씩 점령해가고 있다.개혁군의 야전사령관인 金正吉 장관을 만나 개혁의 중간과정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행정개혁 ‘고지검령’ 눈앞 ­취임하신지 5개월 남짓 지났습니다.그동안 겪은 행자부는 어떻습니까. ▲과거 내무부나 총무처는 지방자치단체나 중앙부처로부터 원성을 많이 들었지요.통합 이후에는 권위주의를 탈색시키기 위해 많이들 노력하고 있습니다.이제는 어느 부서에 전화를 걸어도 “안녕하세요.어느 과 누구입니다”라는 정도의 인사는 합니다.전문기관에서 친절도 테스트를 한 적이 있어요.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시비조로 다른 사무실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한거죠.우리 직원도 기분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잠깐 기다리세요”하더니 전화번호를 찾아 가르쳐주더라구요.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민원인에 대한 친절도를 인사에 반영해서 친절이 몸에 배이도록 하겠습니다.제가 직접 각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확인할 작정입니다.친절하게 받는 사람은 선물을 주겠습니다.친절히 전화를 받아줘서 고맙다구요.그러면 더 잘 되지 않겠습니까. ­54개에 이르는 과(課)를 모두 순방하셨다지요. ▲어느 직원은 장관이 찾아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것은 공무원 생활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장관실에 앉아서 결재만 받으면 생생한 얘기를 못들어요.처음에는 얘기를 하지 않다가도 나중에는 “개혁 개혁 하는데 왜 장관은 개혁을 하면서 엿은 안주고 채찍질만 하느냐”고까지 말합니다. 한 직원은 “사무실에서는 상사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 집에서도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못 받는다.장관이 사진을 한번같이 찍어주면 집에 가서 기 좀펴고 살 것 같다”고 하길래 과장부터 전원을 장관실로 오라고 해서 한사람씩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지역구가 있는 정치인으로 개혁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정치인이라면 오히려 자리를 넓혀주어 인심을 얻어야 덕이 쌓이는데…. 부담은 되지만 욕을 얻어 먹더라도 해야합니다.金南祚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손가락 잘린 사람이 다리 하나 잘린 사람보다 낫지 않느냐”는 얘기죠.저는 반대로 말합니다.지금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안정적이던 은행까지 문을 닫았다.하루 아침에 쫓겨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고요. 공직사회가 솔선수범하지 않고는 국민들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폐지하라고 지침을 내린 증평출장소와 계룡출장소는 반발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변해야 되고 바뀌어야 한다는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그런데 막상 자신이 피해당사자가 되면 달라집니다.개혁은 원칙을 갖고 해야 합니다.어려운 때 일수록 원칙을 세워 실천해야 합니다.과거 원내총무 시절에도 그랬습니다.대화하고 타협해서 풀어나가야 하지만 원칙까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우리가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에 대해 한 외국인 투자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한국에는 원칙이 없어서 투자를 할 수 없노라고요.원칙이 무너진 사회,편법이 난무하는 사회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증평·계룡출장소 폐지 이번에 마산시의 2개구가 폐지됩니다.50만명이 되지 않는 시의 구는 폐지 한다는 기준에 유일하게 마산시가 들어갔던 겁니다.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전라도 정권이 들어서 경상도를 홀대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있습니다.마산과 이웃한 창원은 인구가 50만명이 넘어도 구가 없습니다.그러면 창원은 구를 3개 만들어야 하나요. 증평출장소를 없애겠다고 하자 대표단이 찾아 왔더군요.출장소를 존속시켜 달라구요. 저는 주민들이 불편해진다면 ‘충청북도 출장소’는 안되지만 ‘괴산군 출장소’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그러자 “괴산군 밑으로는 갈수 없다”고 합니다.독립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세금을 그만큼 더 많이 내야 합니다. 앞으로 작은 군(郡)도합쳐야 합니다.공무원들 월급만 많이 주는 바보짓을 왜 합니까. 합리적으로 생각해 합당하면 기준과 원칙을 바꿀 것입니다.다만 이치에 맞게 할 겁니다. 얼마전 청와대에서 인원증원을 요구해 왔습니다.해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청와대 검찰 안기부 감사원은 다해주고 나머지는 안해줄 수 있습니까.청와대부터 안해줘야 다른 데도 안해줄 명분이 생깁니다.우리가 2국 5과를 폐지하니까 다른 부처들이 증원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金장관하면 개혁 다음으로는 컴퓨터가 떠오르는데요.국 과장 인사에서도 컴퓨터 사용능력을 참고하셨다지요. ▲하루에 3∼4차례는 행자부 홈페이지를 보고 전자결재도 하지요.인사에도 같은 조건이면 컴퓨터와 외국어 능력,친절도를 반영하려고 합니다. ○컴퓨터·외국어 능력 중요 ­탈주범 신창원을 영웅시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그를 잡지 못한 경찰간부를 무더기로 징계하는 것이 이를 돕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치안 주무장관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창원을 잡지 못하는 것은 경찰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기 때문입니다.경찰조직이 고여있는 물이 되어 썩고 있습니다.범죄자를 제대로 못 잡는 경찰관은 내보내고 능력있는 인물로 수혈해 주어야 합니다. ­골프 실력은 어떻습니까.상훈을 담당하는 부처로서 박세리선수에게 훈장을 주는 문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골프는 아직 ‘비기너’입니다.100도 넘어요.박세리선수는 공으로 따지면 당연히 훈장감입니다.외화를 벌어들이고 국위를 선양하는 등 1등급을 주어야 합니다.그런데 박선수는 아직 20살입니다.훈장을 받고나면 자만해 잘못될 수도 있고,또 앞으로 더 잘하면 뭘 주어야 하느냐는 문제도 있습니다.훈장을 주기 위해 불러들이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때가 되면 주면 되는 것입니다.
  • 40년 근속 초·중등교사 국민훈장 모란장 받게

    ◎교육부·교총 합의서 서명 앞으로 초·중등학교 교원도 40년 이상 근무하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다. 이와 함께 교직수당과 담임업무수당·보직교사 수당도 인상된다. 李海瓚 교육부장관과 한국교총 金玟河 회장은 21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한 ‘98년도 상반기 교섭·협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번 합의로 초·중등 교원도 40년 이상 근무하면 대학 교원과 마찬가지로 2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모란장과 1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현행 정부포상업무 지침에 따르면 초중등 교원은 48년 이상,대학 교원은 40년 이상 근무해야 모란장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이 때문에 초·중등 교원이 모란장을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무궁화장은 심사대상에서 아예 제외됐었다. 훈장 수여기준이 이처럼 차별화되어 있고 비현실적이어서 오는 8월 퇴직하는 서울시 초·중등 교원 1,449명 가운데 모란장 해당자는 1명도 없는 실정이다. ◎行自部선 난색 표명 한편 행정자치부 의정국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교육부로부터 어떤 협의도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행자부로서는 지난 3월 정부포상업무 지침을 그대로 지킬 것”이라고 훈장 수여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 박세리 훈장논란 유감/徐東澈 행정뉴스팀 기자(오늘의 눈)

    金宇中씨와 趙重勳씨는 ‘레종 도뇌르’를 받았다.‘레종…’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정부가 주는 최고 훈장이다.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金宇中씨는 대우그룹 회장이고,趙重勳씨는 한진그룹 회장이다.두말할 필요없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인들이다. 기업인이란 무엇일까.얼마전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고향인 강원도 통천 땅으로 금의환향했던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부모 몰래 소 판 돈을 들고 38선을 넘어와 싸전을 열었을 때는 평범한 장사꾼이었다.자동차를 고치는 ‘아도공업사’를 차리면서 중소기업인으로 변신했고 이후 현대건설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하게 기업인으로 발돋움했다. 한 마디로 기업인이란 이처럼 성공한 ‘장사꾼’이다.당연히 기업인에 아마추어란 없다. 그렇다면 프랑스 정부는 왜 金宇中씨나 趙重勳씨에게 발자크나 뒤마 같은 대(大)문호(文豪)에게 주었던 것과 똑 같은 훈장을 주었을까.프랑스 국익(國益)에 도움이 되었거나,장차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뜻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지휘자 鄭明勳씨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해 지은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음에도 ‘레종 도뇌르’는 받지 못했다.鄭씨는 대신 우리나라에서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누이인 바이올리니스트 鄭京和씨도 같은 훈장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음악이라는 직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는 공통점도 있다.‘프로 중의 프로’라는 얘기다. 이들이 ‘프로’라기 보다는 ‘고전음악가’가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그렇다면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부른 金貞九씨와 왜색(倭色)으로 비난받으며 한때 금지곡 반열에 들었던 ‘동백아가씨’를 부른 李美子씨에게 정부가 수여한 문화훈장은 과연 잘못될 것일까. 최근 일부에선 골프천재 朴세리씨에게 훈장을 주는 문제를 놓고 그녀가 아마추어니 프로니 하며 괜한 트집을 잡기도 한다.그러나 金宇中·趙重勳 회장과 鄭明勳씨 남매,金貞九씨와 李美子씨의 사례에서 보듯 이미 결론이 내려진 ‘철 지난 논란’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 “박세리 선수는 이 시대의 영웅”/金 대통령 격찬

    ◎경쟁력 최고 수출상품/경제난 타개 큰힘 될것 “朴세리 선수가 국가를 위해 기여하고 국민의 사기진작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웅이다” 14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金大中 대통령이 회의를 마치면서 운을 뗐다. 서류를 정리하던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을 주목했다. 대통령은 이어 “朴세리 선수가 계속 우승하고 있다. 영웅적 업적을 세우고 있는 朴선수가 귀국하면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훈장도 수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와관련,청와대의 한관계자는 “대통령의 언급에는 ‘朴세리는 우리모두가 키워낸 가장 경쟁력 있는 수출상품이며,경제난 타개에도 朴선수가 일조할 것이 틀림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서양화가 李大源(이세기의 인물탐구:175)

    ◎빛을 데생하는 화단의 신사/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작품에 그대로/화폭마다 생명력 약동 축제분위기 넘실/‘물방울처럼 영롱한 화경’… 독자 영역 이룩 만약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봄날에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본 사람이라면 서양화단의 원로 李大源 화백의 그림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쏘는듯한 붓길은 비로드에 싸인 보석더미와 그 보자기를 펼치는 순간의 차갑고도 투명한 광채(光彩)의 이미지다. 겨울에는 오색 찬란한 꽃망울이 예감되고 무더운 장마에는 무지개빛 서광이 번뜩인다. 눈송이도 빗방울도 온통 색채의 의장(意匠)이 장식되어 못위에 내리는 빗줄기가 송곳처럼 수면에 꽂히는가하면 색채의 향연이 옥구슬처럼 농원에서 굴러다닌다. 광활한 공간에 만약 그의 그림이 한점만 걸려 있어도 그곳에는 생명의 결실과 축제의 분위기가 넘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그림은 미술’ 임을 확고히 지켜나간다. 아무리봐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봐도 행복감에 젖어 그림속에서 흘러나오는 탐미적 향기에 도취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초기의 여거도(與居島)등 섬이나 산그림을 보면 웅걸(雄傑)한 호방함과 분방함이 도사리지만 그림의 내면은 오늘의 별빛 미래를 산뜻하게 예고했다고 할수 있다. 예를 들어 야트막한 산야와 그 아래 펼쳐진 과수원풍경,수목에서 솟아나는 활기와 생동감은 하루의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이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인다’는 말대로 가장 신선한 그림을 탄생시킨다.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려는 것은 자연의 일부를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가능성과 미묘한 조율(調律)을 변주로 뿜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생동감 變奏 그러기 위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영감과 감상에 의존하기보다 다시한번 새롭게 사물을 관찰하여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관용으로 작가의 내면까지 화면에 담아낸다. 이른바 살아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연못에 이는 잔물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은 무의미하게 멀리 서있는 부동의 풍경화가 아니라 햇빛에 찰랑거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살아숨쉬는 소우주로서 재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그의 붓길은 속도감과 운동감으로 쉴새없이 움직이고 짧은 사선과 직선과 곡선이 그때마다 의외성을 다양하게 표출해 낸다. 평론가 박래경은‘상식적이지 않은 시선과 범상치않은 구도설정은 단순하면서도 참신한 맛을 추가하여 추상화된 그림세계에 연결되고 있다’고 예언한바 있다. 예를들어 지난 60년에 그린 ‘담쟁이’는 불꺼진 창과 밋밋한 벽으로 기어오르는 메마른 덩굴에 머물고 있으나 그로부터 2년후인 62년에는 같은 벽으로 기어오르는 덩굴이라도 빨강과 황금색등 색채의 축연을 조직하는 것이 남다르다. 이른바 12계절이라해도 좋을만큼 시절따라 시간따라 환상적인 보랏빛이 발휘되고 같은 유형의 색깔이 변조되어 맨 마지막 단계에서 오리지널리티의 완결성과 정신적 탐구를 성취해낸다. ○59년 첫 개인전 열어 이경(二耕) 이대원, 가장 흔히 회자되기는 그는 화단의 신사요 멋쟁이다. 그의 그림세계에는 예술가들이 자칫 가질수 있는 퇴폐적인 낭만이나 고뇌나 파토스 대신 아파테이아의 초연(超然)이 깃들여 있다. 그와 경복고 동문에다 절친했던 고고학자 김원룡박사에 따르면 ‘말쑥한 성품으로 태어나서 평탄한 청춘시절을 보내고 만년소녀로 소문난 아름다운 미인의 내조를 받으며 정상의 예술가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총장을 거쳐 집에서는 딸들과 훌륭한 사위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과연 이대원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항상 멋있는 옷을 입어 화단의 드레서로 소문나 있고 미식가애 주가에다 집과 학교와 파주농원에까지 화실이 세군데나 되어 화단의 귀족’ 같은 존재지만 그의 어느 일면에도 ‘속물취(俗物臭)’는 찾아볼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예술가적 면모는 어느장소에서나 시와 정취와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지성적 풍모에 단정한 매너로 인해 언뜻 보기엔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그와 사귄 사람들은 ‘볼수록 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에 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소에는 화단의 김흥수 권옥연과 잘 어울리고 최기원과 이만익, 삼성문화재단의 손기상 상무와도 각별한 사이다. 경기도 문산에서 농림회사에다니면서 그 일대 꽤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던 一耕 李鍾林씨와 金善伊씨 사이에서 삼남중 막내. 파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울로 이사해서 청운공립보통학교에 다닐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3학년때 선전에 연속 입선, 경복고를 졸업할때까지 미술공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부친이 미술학교만은 강경하게 반대하여 지금의 서울대인 경성제국대 법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만을 그렸고 59년에 첫개인전, 한때는 우리나라 화랑의 효시로 기록되는 반도화랑을 운영한 적이 있다. 가족은 의사이던 부인 李鉉金 여사와의 사이에 딸 다섯, 63년간 살고 있는 유명한 혜화동집은 지난 89년 출간된 ‘혜화동 50년’의 바로 그 무대다. ○한때 반도화랑 운영 그의 미술역정은 파리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하면 ‘출중하고도 예외적인 인물’로서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 빛을 데생하는 화가’란 말로 압축된다. ‘선과 점과 조직을 사용해서 그것으로부터 그의 붓은 그가 창출한 수많은 색채로 형태를그려내기’ 때문이다. 그의 엄청난 재능들은 레스타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그림속에 있는 모든 것은 화사함과 고요함과 기쁨’에 틀림없다. 현대작가중에서 이러한 자연적인 교훈을 자신의 창작으로 성취한 사람은 별로 흔치않다. 물방울처럼 튀기는 영롱한 화경에서 그가 이룩한 이대원식 표현이란 바로 ‘이대원 자신의 화창한 인생의 음률’일 것이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으며 범우주적인 진솔한 정서와 삶의 즐거움만이 투영되어 날이 갈수록 싱싱하고 청청한 빛을 발한다. 사람을 반기는 그의 색채점묘화는 보는 이의 가슴에 루비나 사파이어같은 보석의 광채를 언제까지나 눈이 부시게 비춰주게 될것이다. ◎그의 길 ▲1921년 경기도 문산 출생 ▲1938­40년 선전 출품 ▲1945년 경성제대 법과졸업 ▲1959년 첫개인전(중앙공보관화랑) ▲1959­60년 국제자유미술전출품 ▲1962­68년 신상전·동인전출품 ▲1967­86년 홍대 미술대 교수·대학원장·학장·총장 ▲1971년 개인전(반도화랑) ▲1973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위원 ▲1977년 개인전(현대·신세계) ▲1978년 중화민국 중화예술원 명예철학박사,영국국제하계미술전 출품 ▲1979년 뉴욕 한국화랑초대개인전 ▲1981년 회갑기념전, 성균관대 명예철학박사, 파리 살롱도톤느 출품 ▲1983·85년 현대화랑 개인전 ▲1986년부터 홍대 명예교수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한국박물관회회장,개인전(강남현대) ▲1988년 부산개인전 ▲1988­91년 국제현대미술제 및 아시아국제미술전 출품 ▲1989년 개인전,대한민국예술원회원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1995년 ‘이대원 1990­95년’개인전(갤러리 현대) 국민훈장목련장(73년) 5·16민족상(88년) 대한민국예술원상(9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94년) 오지호미술상·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95년) 역서 柳宗悅저 ‘한국과 그 예술’(74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96년) 화집 ‘이대원’(81년) ‘이대원,혜화동 50년’(89년)
  • 金 대통령,박세리에 “훈장 주라”/클린턴 美대통령 “골프 치자”

    ◎청와대만찬도 초청/박세리양에 제의 ’98 US오픈 여자골프대회에서 우승,메이저 대회 2승을 달성한 朴세리 선수에게 훈장이 수여된다. 金大中 대통령은 9일 국민회의 3역의 주례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朴선수의 훈장 수여 건의를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고 鄭均桓 사무총장이 전했다. 金대통령은 이와함께 朴선수를 초청,환영 대회를 열고 청와대 만찬에도 초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鄭총장이 덧붙였다. 한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朴선수에게 공식으로 라운딩을 제의,메이저대회 2연승으로 한껏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했다. 소속사 삼성물산에 따르면 클린턴 대통령은 9일 새벽(한국시간) 제이미파 크로거 클래식대회 개막 전야제에서 짐 리츠 LPGA회장을 통해 “기회가 주어진다면 함께 라운딩하고 싶다”는 뜻을 공식으로 전달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짐 리츠 회장이 朴선수와 클린턴 대통령의 일정을 고려,라운딩을 주선할 것으로 예상된다.
  • 국가과학기술委 설치 추진/과기부 국정 보고

    ◎정책 종합조정기능 강화 과학기술부는 앞으로 2년 동안 미취업 과학기술 인력 5,000명을 연구개발 사업에 흡수,활용하고 과학기술 정책 종합조정 강화 방안으로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치키로 했다. 姜昌熙 과학기술부 장관은 6일 청와대에서 金大中 대통령에게 이같은 내용 을골자로 한 ‘과기부 국정과제 추진실적 및 계획’을 보고했다. 姜장관은 과학기술 정책 종합조정 강화를 위해 15개 정부 부·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67개 국가연구개발 사업(총 1조6,439억원)에 대한 조사·분석·평가작업을 실시,이달 중 열릴 과학기술장관회의에 상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중 생활용품기술개발 염색 등 일부 사업에 대해서는 정부 지원이 중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설치 근거 마련을 위해 과학기술혁신특별법 개정을 추진,현재 입법예고중이라고 보고했다. 출연연구기관 경영혁신 대책으로는 기관장 공모제 도입과 함께 출연연구소에서 수행하고 있는 100개 사업에 대한 평가를 실시,2개 사업을 중단하고 23개 사업을 축소,조정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과학기술 훈·포장 제도 신설을 위해 훈장명칭을 은하장·항성장·행성장·위성장·혜성장으로 확정,99년 시행을 목표로 행정자치부와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 “공무원 채용 여성 20% 이상”

    ◎金 대통령,여성주간 기념식서 약속 金大中 대통령은 3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부터 우선 각종 위원회 직원과 공무원을 채용할 때 20% 이상 여성이 참여하도록 할것”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 3회 여성주간 기념식에 참석해 “국민의 정부는 ‘남녀가 더불어 일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이같이 약속했다. 기념식에는 대통령 부인 李姬鎬 여사를 비롯해 朴相千 법무·金正吉 행정자치·申樂均 문화관광·金成勳 농림·金慕妊 보건복지 장관과 국회의원,여성단체장 등 각계인사 370여명이 참석했다.金대통령은 연설에 앞서 여성 권익향상과 발전을 위해 기여한 朴英淑 한국환경사회정책 연구소장과 韓明淑 한국여성단체연합 지도위원,徐惠根 대구여성단체 협의회장에게 훈장과 포장 및 대통령 표창을 각각 주었다.
  • 평화의 훈풍 감도는‘鐵의 삼각지’(휴전선 해빙의시대 오는가:下)

    ◎안보교육장된 격전지에 관광객 북적/민통선 주민 금강산철도 복원 큰 기대 날아오는 총알을 이빨로 물었던 무용담과 금강산 여행의 희망이 어우러진 곳이 있다.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 철원­평강­김화를 잇는 지역이다. 철의 삼각지는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포탄을 너무 맞아 높이가 1m 낮아진 백마고지,꼭대기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렸다는 아이스크림고지,희생자들의 피가 내를 이뤘던 피의 능선 등. 이제 이곳은 대표적인 안보교육장이 되었다. 백마고지 전적지와 월정리 일대는 관광객을 태운 버스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코 앞에 휴전선이 있고 민통선 이북이다. 여기가 뚫리면 단번에 서울이 위험해진다. 정예강군으로 평가받는 육군 청성부대와 열쇠부대가 한치의 틈도 없이 지키고 있다. 6·25 발발 48주년을 맞아 철의 삼각지 전투에 참여했던 예비역 장성 10여명이 부부동반으로 백마고지 전적비를 찾았다. 모두들 감회어린 표정으로 ‘무용담’을 자랑했다. “일어나서 부대원들에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순간,적의 총알이 입으로 들어오길래 꽉 깨물어버렸지” “중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전투는 내가 다 치렀는데 기록판에 내 이름은 없구만” 환갑을 훨씬 넘긴 노병(老兵)들은 지금이라도 전투에 나서겠다는 기백이 넘쳤다. 최전방을 지키는 초병들에게 북한은 아직 ‘격멸해야할 적(敵)’이다. 동해안에서 북한 잠수정이 나포된 뒤 경계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초병들 강도높은 훈련 매진 열쇠부대 姜恩珍 중위(26)는 “조건반사적인 훈련만이 유사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인식아래 강도높은 교육훈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고 씩씩하게 외쳤다. 관광객이 더욱 많이 찾는 청성부대 장병들도 경계태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柳寅雲 중령(40)은 “유비무환의 자세로 경계작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철원은 한탄강을 끼고 북한의 평강고원까지 용암대지 위에 형성된 너른 들판이다. 강원도 최대의 곡창지대였던 ‘화려한 과거’를 갖고 있다.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금강산가는 전철이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원산 아래의 ‘명사십리’는 실향민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가보고 싶은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내금강행 전철은 해방 1년전인 지난 44년 일본이 다른 곳의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철거했다. 북한이 개방되면 경원선도 복구하고 금강산 전철도 새로 깔아야 한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 ‘대북 화해정책’의 훈풍이 철원평야에 먼저 분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남북통일이 되거나 관계가 개선될 때 개발 우선순위 지역이다. 민통선 북쪽에 위치한 마을 대마리 주민들도 꿈에 부풀어 있다. 188가구,950명의 주민 중 상당수가 실향민이다. 이들은 고향에 가볼 날이 멀지 않았다는것과 함께 ‘금강산 개발’에 대한 기대가 크다. 대마리 이장 林鍾睦씨(41)는 ”정주영씨의 소떼가 북한에 감으로써 남북교류의 물꼬가 터졌으니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생기겠지요”라고 말했다. 철원과 금강산을 잇는 철도 복원문제에 대해서는 “가슴이 벅차 무어라 표현을 못하겠어요”라고 설레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 잠수정 사건이 일과성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경원선이마지막으로 끊어진 월정리역. 휴전선 남방한계선과 붙어 있다. 취재진과 동행한 작가 柳在用씨(62)는 ‘적극적 통일대비론’을 폈다. “이제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가 아니라 ‘달려야 한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서진 옛 기차를 새 기차로 바꿔놓고 조건만 충족되면 당장이라도 달리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월정리 일대에는 이미 유명해진 ‘북한 노동당사’와 ‘제2땅굴’도 있다. 북한의 호전성을 알려주는 유적들과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 그 가운데 삭막한 분위기를 바꿔주는 이가 있다. 청성부대 정훈장교 朴商瑛 중위(27). 훤칠한 키에 절도있는 동작의 여장부지만 해맑은 미소로 방문객을 맞으며 최전방을 밝게 한다. 21세기 남북관계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도 싶다. ○굵직한 문화유적 곳곳 산재 남북 해빙무드에 맞춰 철원 일대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요충이라는 것 외에도 다양하다. 굵직한 문화 유적만 해도 10여개가 넘는다. 궁예도성,성산성,동주산성 등. 후삼국 시절 궁예가 지은 도성은 비무장지대(DMZ)안에 있다. 재두루미,고라니,큰기러기 등 희귀조류 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여기에 동송저수지,학저수지 등 사람에 찌들지 않은 호수들과 50년간 인공이 배제된 DMZ 일대의 생태계 등. 금강산 개발과 철원일대 관광지개발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남북관계 발전은 물론 국부(國富)증진에 폭발적 힘을 보탤 것이다. ◎김화 출신 소설가 柳在用씨/금방 전원교향악 들려올듯 평온/6월 햇살속 겨울옷 벗겨낼 힘 충만/포성·격양된 대남방송 분단 실감케 6월 하순의 철원평야. 여기가 6·25전쟁중 최대 격전장이었던 ‘철의 삼각지’란 말인가. 검푸르게 자라는 벼포기들을 가득 실은 평야,그 위로 유유히 날으는 백로들,여유있는 표정의 농민들을 바라보느라니 아름다운 민요가락이나 전원교양악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인구 2만의 융성했던 도시 철원읍을 완벽한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쟁은 꿈속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전쟁은 결코 꿈은 아니었다. 반세기라는 짧지 않은 세월로도 다 아물릴 수 없었던 상처들이 철원평야의 곳곳에 남아 있었다. 구철원읍의 중심가였던 자리에 벽과 벽의 일부로만 남아 있는 얼음창고,농산물검사소,금융조합,철원감리교회,교각만 남아 있는 금강산행 관광철도의 철교와 잡초 우거진 철로둑,월정리역에서 끊겨버린 경원선 철로,해골처럼 흉물스러운 몰골로 서있는 철원노동당청사,길가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지뢰지역,24회나 주인이 바뀌는 격전으로 2만명의 전사자를 낸 백마고지,북한의 남침 야욕과 적화통일에의 미련이 노출된 땅굴,국토의 허리를 막아 놓은 철조망…. 뛰어가면 5분에 닿을 수 있다는 북한쪽 고지에서는 격앙된 목소리의 대남방송이 들려오고 어디선가 포사격 연습하는 소리가 먼 천둥소리인양 우릉우릉 들려온다. 게다가 북한군 잠수정의 동해안 침투소식마저 겹쳐 어쩔 수 없이 분단과 대치를 실감하게 해준다. 하지만 몇 년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철원평야에는 한결 짙은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한가로운 전원풍경이나 철조망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노래하는 뻐꾸기와 꾀꼬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에는 철원평야의 정적속에 공포와 불안이 배어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감과 안정감과 화해의 기운이 배어들어 있었다. 철원평야 위로 쏟아져 내리는 6월의 따가운 햇살속에는 얼음을 녹이고 겨울옷을 벗겨낼 힘이 충만해 있었다. 내실을 다지는 일과 경계하는 자세를 흐트리지는 말아야 한다. 서두르지도 말고 차근차근 준비하며 기다리자. 멀지않은 장래에 통일열차를 타고 분계선을 넘어 북쪽땅으로,고향으로 달려갈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가슴 속에 고여 올라옴을 느끼며 철원평야를 뒤로 했다. (柳在用씨는 강원도 김화군 창도리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철원 지역을 주무 대로한 자전적 분단소설 ‘달빛과 폐허’ 등 많은 작품을 썼다.) ◎6·25당시 美 군사고문단 캐롤 하지스씨/전쟁의 교훈 어느것이든 잊어선 안돼/미국서 한국전쟁 관심 되살아나 다행 6·25전쟁시 군사고문단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미국인 캐롤 B,하지스씨(84)는 주한미군사령관 고문으로 한국군 창설과정,또 농촌근대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을 했다. 예비역 대령으로 미국 플로리다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그가 6·25 48주년을 맞아 한국에 왔다. ­한국전쟁 48주년을 맞는 소감은. ▲이 때만 되면 남다른 감회가 많다. 헐벗고 굶주리던 당시 한국민들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3만5,000여명의 미군이 숨지고 10만명이상 부상한 한국전쟁이 미국인들 사이에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것이 안타깝다. ­그 이유는. ▲베트남전쟁 패배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을 기억할 여유가 없었다. 왜 막강한 화력의 미군주도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해야 했는가도,전쟁중 작전권이 박탈된 맥아더 장군의 교훈도 잊었다. 한국전쟁 기념비도 1995년에야 세워졌다. 전쟁의 교훈은 어느 것이든 잊어선 안된다. 최근 미국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다행이다. ­한국전쟁후 심혈을 쏟은 농촌부흥운동인 4H운동에 대해 들려달라. ▲한국민들의 열정과 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성과는 놀라왔다. 평택 모범농장은 폐허에서 일으켜 세운 농촌의 전형이 됐다. 또 4H운동은 한국 민초(民草)들에게 민주주의를 심어준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朴正熙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으로 바뀌었고 아쉽게도 나중에 획일적 집단주의로 흘렀다. ­부인 해리어트 여사와 벌이고 있는 어린이심장병환자 수술운동은. ▲이 일은 단번에 중단할 수 없다. 지난 72년 심장병을 앓던 한 한국 소녀를 아내가 적극 미국에 주선해 완쾌시킨 뒤부터 시작,지금까지 3,300명에게 혜택을 주었다. ­50년만에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용공 시비는. ▲용공시비는 한국군 내부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많은 군인사들이 내게 그런 정보를 흘렸으나 근거가 없다.
  • “사선 넘은 전우 명예 찾아주오”

    ◎6·25때 민간인 유격대 ‘백골병단’ 용사들/647명 적후방 침투 3개월 활동 “전과 혁혁”/360여명 전사… “종전후 돌아온건 무관심뿐” “물질적인 혜택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조국을 지키려고 사선을 넘나들었던 우리가 그에 걸맞는 명예를 찾자는 것뿐입니다” 지난 51년 북한군 점령지역에 침투돼 수백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낳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유격대 ‘백골병단’ 용사들.이들은 지금도 이름없이 산화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처절한 가슴을 달랠 길 없다. 백골병단은 1·4후퇴를 즈음해 적 후방교란을 위해 급조한 유격대였다. 육군본부는 민간인 647명을 차출,대구 육군보충대에서 불과 3주간의 특수훈련만 시키고 51년 2월 강원도 북한군 점령지역으로 인민군 복장을 시켜 투입했다. 비록 3개월 동안의 유격활동이었지만 혁혁한 전과를 올혔다. 양양군 인구리에 주둔했던 인민군 69여단의 궤멸은 이들의 공이었다.백골병단 대원들은 69여단의 작전계획,병력 등이 기록된 전투상보를 갖고 상급부대로 가던 인민군 장교 4명을 생포,전투상보를국군 수도사단에 전달해 대승을 거둘 수 있게 했다. 대남 빨치산 사령관 임무를 띠고 남한으로 내려오던 인민군 중장 길원팔(吉元八)을 인제군 가리산리 필례마을에서 생포한 것도 이들이었다.그러나 길원팔과 함께 붙잡힌 인민군 여장교가 탈출,이 때부터 인민군 부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인제군 용대리에서 1만여명 규모의 인민군 부대에 맞서 싸우다 60명이 목숨을 읽었다. 단목령은 이들에게 비극의 자리였다.일주일 동안 굶은 채 격전을 치른 대원들은 이곳에서 120여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다.끝내 살아남은 사람은 647명중 283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정부의 무관심.생존자들중 일부는 대한유격참전동지회를 만들어 국방부에 여러차례 훈장도 요청했지만 국방부는 훈장수여는 전쟁직후 이미 끝났다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동지회 全仁植 회장(69·당시 작전참모·대위)은 “우리가 훈장을 받겠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흐려져가는 호국정신을 다시 살리자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 金 대통령 “살신성인” 각별 배려

    ◎물에 빠진 두학생 구한뒤 숨진 미장공 애도/‘사회의 귀감 되게하라” 보상금·훈포장 지시 金大中 대통령이 22일 극히 이례적인 지시를 내렸다. 바다에 빠진 학생 2명을 구하고 숨진 金甲龍씨(33·미장공)빈소에 曺圭香 사회복지 수석을 보내조화와 조의금을 전달하도록 했다. 또 숨진 金씨와 친구인 鄭在玄씨(33)에게 국민훈장 또는 포장을 수여하도록 행정자치부에 지시했다. 보건복지부에는 의·사상자 심사위원회를 열어 金씨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실직상태인 金씨가 받게 될 보상금은 실직자 월 최저 임금인 33만4,900원의 240개월분에 해당하는 8,000여만원이 될 것이라고 朴智元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金대통령이 전례에서 벗어나 金씨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혼탁한 사회의 ‘귀감’으로 삼으려는 배려로 보인다. 朴대변인도 “金대통령은 혼탁한사회 속에서 남을 위한 밝은 얘기가 많이 알려져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金대통령은 중소기업 사장의 자살이나 실직자들의 범죄와 같은 우울한 얘기를 접할 때마다 상심해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포자기 심정이 자칫 우리 사회와 청소년들에게 전도된 가치관을 심어줄 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숨진 金씨는 지난 20일 하오 5시쯤 부산 영도구 함짓골 공원앞 바닷가에서 초·중학생 4명이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자 친구 鄭씨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이들을 모두 구조했으나 자신은 탈진해 숨졌다. 당시 金씨는 깊은 바다로 떠밀려간 2명의 학생을,친구인 鄭씨는 얕은 곳에 빠진 2명을 구해냈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뒤 10년째 건축 공사장에서 일해온 金씨는 중풍에 걸린 아버지의 치료비와 두 동생의 생활비를 대느라 결혼도 미뤄왔다.
  • 아!… ‘아래아 한글’(朴康文 코너)

    나는 89년 세운상가 4층 러브리소프트라는 가게에서 ‘한글’을 샀다. 개발자 이찬진씨한테 어디서 파느냐고 천리안 전자우편으로 물었더니 이곳을 일러 주었다. 그 때 그는 남의 소유인 이 가게의 한켠에 작은 책상 하나를 놓고 5.25인치 디스켓 다섯 장에 든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한글’을 팔았다. 그는 대학노트를 펴고 기다란 일련번호 다음에 구입자 주소 성명을 모나미 볼펜으로 적은 뒤 1번 디스켓 레이블에 그 번호를 써 주었다. 그와 말을 나눈 것은 이 때를 앞뒤로 하여 두어 번밖에 되지 않는다.그는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는데 겸손하고 성실한 젊은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그런 그가 뒷날 화려하게 날개를 펴고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의 사장이 되어 한국의 빌 게이츠로 날아오를 줄은 그 때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외국에 나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출국할 때쯤에 새 버전이 나올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그 해 여름 새 버전으로 바꿔 미국에 가서 잘썼다.그의 성실함에 끌려 ‘프로그램의 이러이러한 점은 저러저러하게 고쳤으면 좋겠다’고 꽤 긴 편지를 서울에 보내기도 했다. 미국서 잠시 함께 지내던 국어학자 서 아무개 교수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글’사랑에 빠진 이였다.세종대왕 이후의 최대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한글’이야말로 한글 워드프로세서라고 할 만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이것이 나옴으로써 컴퓨터에서 한글이 비로소 제대로 살아 빛을 뿜었다.이찬진씨에게 훈장을 주어야 한다는 서 교수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한글’이 처음 나올 때부터,그 뒤 여러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이제까지,10 년 동안 써 왔다.내 머리 속의 생각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글로 짜여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다. 이찬진,그가 빛나는 한국의 빌 게이츠가 되리라는 것도 몰랐지만, 그가 자신의 분신이라 할 ‘한글’에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 같은 이보다야 그자신이 몇 백 갑절 더할 것이다. 고민도 많았으리라. 그를 생각하면 죄책감,허탈감이 밀려 온다. 우리가 누린 만큼 그에게 제대로 보답했는가.우리 잇속만 챙기고 그의 고민을 외면하지 않았는가.사실 여러 번의 버전업이 있었지만,내가 정품을 구입했던 것은 두 번 아니면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컴퓨터를 사면 하드 디스크에 이미 설치된 경우가 있어 굳이 따로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배신감도 한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그 길밖에 없었는가.자신이 만들기는 했지만,또 비록 그것이 돈벌이가 안된다지만,이제 국민적 자산이 된 ‘한글’을 버릴 수 있는가.자기 ‘아이’를 버리기로 하고 2,000만 달러를 빌 게이츠에게서 얻다니. 소프트웨어 불법복제가 성행하고 정품이 팔리지 않는 풍토를 그가 원망하지만, 이름없는 청년을 오늘의 그로 자라게 한 밑거름은 초기에 싸지 않은 값을 치르고 정품을 구입한 사람들이 뿌렸다. 초기의 겸손을 잊은 것이 오늘이 사태의 원인일 수도 있다. 이제,자꾸만 그가,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보이니 슬프다.무너지는‘한글’의 신화가 가슴 아프다.
  • 농사꾼·광부 거쳐 市長으로/金潤周 군포시 당선자의 인간 드라마

    ◎농사 실패 부친따라 탄광촌서 날품팔이/무작정 상경 인부·노점상 등 밑바닥 전전/노동운동 16년 국민회의 공천받아 ‘행운’ ‘가난한 농사꾼에서 탄광촌 광부를 거쳐 민선 시장으로­’ 정규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인 노동자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민선시장에 당선,한 편의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엮어냈다. 주인공은 경기도 군포시장 선거에서 두번째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金潤周 당선자(50·한국노총 중부지역본부 의장).지난 77년부터 93년까지 16년동안 냉방기기 회사 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출신으로,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시장에 당선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이번 선거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두터운 학력 장벽을 극복하는 문제였다.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언론사 정치부 기자를 거친 무소속의 沈良燮 후보(38)나 40여년의 공직 경력을 내세운 趙源克 현 시장(66·한나라당)을 상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숱한 고난을 겪어온 金당선자는 ‘단 열매를 맛보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농사에 실패한 부친을 따라 탄광촌으로 들어가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던 기억이나 무작정 상경한 뒤 막노동판 벽돌인부,시장골목 노점상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고통을 참아냈던 과거들이 유권자들에게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서는데 큰 힘이 돼준 것이다. “시민의 60%가 노동자와 그 가족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노동운동도 이제는 시민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金당선자는 “지방자치도 결국 시민자치를 목표로 하는 것인 만큼 앞으로 시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시정을 의논하는 진정한 시민자치 행정을 펼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金당선자는 노동현장에서도 틈나는 대로 공부에 몰두해 숭실대학 노사관계대학원을 수료했으며,근로자 복지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돼 대통령포상(85년)·석탑산업훈장(96년)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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