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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 대통령,훈포장 문제점 지적/국무회의

    21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공무원 훈포장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했을 뿐,다른 지시사항은 없었다.金대통령은 “공무원에게 퇴직을 이유로 훈장을 주는 것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면서 “창의력을 발휘,정부물자를 절약하거나 대민업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등의 경우에 훈장을 수여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金대통령은 국무회의 도중 金重權 비서실장으로부터 메모를 전달받은 뒤 사회봉을 金鍾泌 국무총리에제 넘기고 5분쯤 먼저 자리를 떠 관심을 모았다.金대통령은 곧바로 집무실로 돌아와 金실장으로부터 국회일정을 비롯,국정현안에 대해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문에 국무회의 뒤에 예정되어 있던 金총리의 주례보고와 陳稔 기획예산위원장의 보고가 서면보고로 대체됐다.金실장은 “그 때만해도 국무회의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고,미리 金총리께서도 오늘 보고는 서면으로 해도 될 내용이라고 해서 메모를 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金대통령은 그러나 이날 상오 11시15분 신임 南宮晳 정보통신부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뒤 金총리를 별도로 10여분동안 면담,사실상 주례보고를 받았다.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金총리에게 “아까(국무회의때) 미안하다.급한 일이 있어 뵙지 못했다”고 말한뒤 따로 시간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처리된 안건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령안 △은행법시행령개정안 △외무공무원임용령개정안 △징발보상심의회규정개 정안 △군인복무규율개정안 △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운영법 시행령안 △별정직공무원인사규정개정안 △기술대학 설립·운영규정개정안 △낙농진흥법시행령개정안 △한국전력공사법시행령개정안 △자연환경보전법시행령개정안 △환경영향평가법시행령개정안 △유해화학물질관리법시행령개정안 △폐기물관리법시행령개정안 △수도법시행령개정안 △폐기물의 국가간 이동 및 그 처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개정안 △먹는 물 관리법 시행령개정안 △근로자직업훈련촉진법시행령안 ■일반안건 △한국산업은행에 대한 국유재산 현물출자안 △한국수출입은행에 대한 국유재산 현물출자안 △98년도 통신사업특별회계 수입금마련 지출
  • 민족일보 조용수(金三雄 칼럼)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다이모니온을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 타락케 한 혐의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독배를 들기에 앞서 최후진술에서 “클리톤이여,아스크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다오”라는 유언을 남긴채 권력의 제물로 사라졌다. 2,000여년이 지난후 한 청년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이며 민족일보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데 썼는데,갚아주지 못하고 가게돼 미안하다”는,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의 유언이 그것이다. 1961년 12월2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조용수는 32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친구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건국 이래 수 많은 언론인이 정치적 수난을 겪었지만 순수한 언론활동을 이유로 극형을 당한 사람은 조용수 사장이 처음이다. ○박정권의 이념적 희생양 친일언론인 출신으로 해방후 평화일보·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정국은은 재일 조총련계의 국제공산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54년 2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월간 ‘청맥’과 관련한 김질락의 경우 간첩혐의로 박정희정권에 의해 72년 7월 처형되었다. 정국은과 김질락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첩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수 사장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친일과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에서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고 마침내 유망한 젊은 언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조사장은 61년 2월 4월혁명 공간에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부정부패를 고발하며,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한다는 사시 아래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하다가 5·16 쿠데타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확인절차로 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부는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언론인을 처형하는 잔인성을 보였다.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나왔다는 혐의와 북한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선동하여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조총련계 자금유입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평화통일론이 극형의 죄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가 유일한 ‘물증’으로 내세운 이영근씨는 민단계통의 인물이었으며,노태우정부는 1990년 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이유로 국민훈장을 추서하여 간첩이 아님이 입증됐다. 또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역대 정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더러는 정부가 훈장을 줌으로써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사장의 37주기에 즈음하여 지난 20일 낮 남한산성에 있는 묘소에서 추도식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 발족식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검찰이 자료공개를 거부해온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국회에서 특별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기념사업을 통해 평화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뜻이 모아졌다.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당시 검찰,재판관 등 생존자들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계도 건국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한 언론지도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신원(伸寃)하는데 뜻을 모았으면 한다.
  • 첫 여성변호사 李兌榮 여사 타계

    ◎서울 법대 첫 여학생… 여권신장·민주화 헌신/여성법률사무소 설립… ‘힘없는 이웃’ 위해 한 평생 국내 첫 여성변호사이자 여성계의 대모인 李兌榮 여사가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다방면에 ‘여성 제1호’를 기록한 이여사는 민주화와 여권 신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1914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난 李여사는 36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해방 이듬해인 46년 서울대 법대에 최초의 여학생으로 입학했다. 남편 고 鄭一亨 박사와는 36년 평양의 한 교회에서 만나 결혼했다.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인 鄭大哲씨가 아들이다. 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李여사는 52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하지만 李承晩 대통령이 당시 야당 국회의원 鄭씨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검사 임용을 막자 변호사로 개업했다. 56년 8월25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설립했다.여성변호사로서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63년에는 가정법원 설치에 힘을쏟았으며 76년 한국여성운동의 산실인 ‘여성백인회관’을 서울 여의도에 세워 여성차별 철폐와 인권을 위해 전념했다. 63년부터 71년까지는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을 역임했다.69년 55세 때 ‘한국이혼연구’로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89년에는 여성법률상담소를 중심으로 가족법을 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李여사는 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선언,76년 3·1운동 민주구국선언 등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이때 金大中 대통령과 李姬鎬 여사와 깊은 교분을 맺었다. 李여사는 이같은 인권운동·여성운동 등의 공로로 71년 세계평화상,75년 막사이사이상,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등을 비롯,국내에서도 국민훈장,무궁화장,3·1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은 鄭大哲 부총재(54)를 비롯,眞淑·善淑·美淑씨 등 1남3녀,빈소는 삼성 서울병원,발인 21일 오전(02)3410­0945∼6
  • 인권 법·제도적 정착 최선/金 대통령 세계인권선언 기념식 연설

    정부는 10일 오전 10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金大中 대통령과 朴浚圭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金容俊 헌법재판소장,咸正鎬 변협회장을 비롯,시민단체 회원등 1,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0회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을 가졌다. 인권선언 기념일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金대통령은 “과거처럼 권력의 폭압으로부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경제·사회적 환경과 제도 및 문화를 만들어나가는,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인권개선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정부는 인권법의 제정과 인권위원회의 설치를 통해 인권이 법적·제도적으로 더욱 확고히 정착될 수 있도록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국내 인권개선 상황 보고’를 통해 “인권법이 제정돼 내년에 인권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면 전반적인 인권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인권국가로서의 이미지도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에서는 인권보호와 신장에 크게이바지한 李敦明 변호사가 국민훈장 무궁화장,崔昌植 한국갱생보호공단 이사장이 국민훈장 모란장,吳文植 법무사가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또 文昌河 제주지검 범죄예방위원과 周先應 인천구치소 종교위원,한국가정법률상담소 성남지부 등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 국민훈장 받은 李敦明 변호사/세계인권선언 50주년

    ◎“현정권 인권보호 진일보 환영”/‘정부가 주는 賞’에 세상 변화 실감/인권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약자들 위해 정부가 끝까지 노력해야 “인권을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입니다.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상까지 받게 돼 쑥스럽습니다” ‘인권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李敦明 변호사(76)는 1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 인권선언 50돌 기념식에서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데 대해 “앞으로도 흔들림없이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35년동안 변호사로 재직하면서 한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인권침해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던 李변호사는 스스로 말하듯 꿈도 꾸지 않았던 ‘정부가 주는 상’에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이같은 사회진보에 작게나마 역할을 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그는 덧붙였다. 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법조계에 투신한 그는 54년 대전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10년동안 법관을 지냈다. 지방판사여서 정치적 사건을 맡을 기회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속적부심을 적용,피의자를 석방해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대통령 비방으로 구속된 한 야당 정치인을 적부심으로 풀어 준 것이다. 63년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도 법률신문 기고를 통해 “변호사로 성공과 실패의 판단기준은 돈을 많이 벌어 큰 집을 사고 자가용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실천했느냐로 따져야 한다”는 올 곧은 법조인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72년 10월유신 선포는 그가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유신이 선포되던 날 정부가 입법 및 사법권을 독점하고 무엇보다 국민에게서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 간데 대해 분노하며 밤잠을 설쳤다”면서 “이 때문에 인권운동에 앞장 서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金芝河씨 사건 변론 李변호사가 인권운동차원서 첫 변론을 맡은 사건은 지난 75년 시인 金芝河씨의 반공법 위반사건이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사건,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삼민투 사건,權仁淑양 성고문사건,金槿泰씨 고문사건 등 한국 인권운동사의 한가운데에 늘 자리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연루된 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사건의 변론도 그의 몫이었다.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땐 동료 변호사들의 협조를 얻어 광고게재운동을 주도했었다. ○5共때까지 암흑시대 그는 “유신이후 全斗煥 정권때까지 인권의 암흑시대라고 할만큼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극심했다”면서 “당시만 해도 인권변호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여서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부지런히 뛰었지만 법관이 용기있는 판결을 내리지 않아 항상 졌다”면서 “나중엔 법관을 보고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방청객을 향해 변론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李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인권변호사 그룹은 80년대 이르러 그 趙永來씨. 李相洙 국민회의 의원 등 소장변호사들의 합류로 세를 불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조직했으며 李 변호사는 초대 고문을 맡았다. 87년에는 5·3 인천사태로 수배중이던 李富榮 현 한나라당의원을 숨겨준 죄로 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정치보복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단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88년 모교인 조선대의 총장직을 제의받고 적임자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학교측에서 수십 번을 찾아와 부탁해 할 수 없이 승낙했다.어차피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승인이 나 총장을 맡게 됐고 재직중 李哲揆군 변사사건,어용교수 해직 등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92년부터 한동안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떼고 재야운동에만 전념했다. 현재 덕수합동법무법인에 적은 둔 李변호사는 건강문제로 사건 변호는 맡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고문과 지난달 발족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도 맡는 등 인권운동에 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던 인권변호사가 이젠 인권 신장에 관심을 갖는 후배들이 많아 든든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李변호사의 세례명은 ‘유토피아’의 저자 이름과 같은 토머스 모어. 성인(聖人) 이름을 쓰는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정의를 위해 단두대에 선 용기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라는 신념이다. 李변호사는 “현 정권이 전 정권보다 인권에 관한 한 진일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환영한다”면서 “아직도 그늘 속에 있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은 만큼 정부가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 국악 원로 김천흥 선생 구순 기념 공연

    ◎궁중의 樂·歌·舞 어우른 보은의 잔치/후배·제자 출연 수제천·춘앵전·천년만세 등 선사 원로 국악인 심소(心韶)김천흥 선생(국립국악원 원로사범)의 구순 기념공연이 16일 오후 7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다. 김옹은 한국 국악학계의 제1세대 학자인 만당(晩堂)이혜구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국악계 최고 원로.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옹이 궁중예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2년 당시 국립아악사 양성기관인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에 2기생으로 들어가면서부터.김영제,함화진 등으로부터 제례악을 배웠고 해금을 전공하며 양금과 아쟁을 익혔다.23년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50수(壽)잔치 때 무동(舞童)으로 뽑혀 임금의 천수를 기원하는 춤을 추면서 무용과도 인연을 맺었다. 악(樂)·가(歌)·무(舞)등 전통예술을 두루 익힌 김옹은 이후 궁중무용 재연 발표회,처용의 이야기를 엮은 ‘처용랑’,대금의 역사를 각색한 창작무용극 ‘만파식적’,‘정악양금보(正樂洋琴譜)’같은 저서 등을 통해 우리 궁중예술의 계승·발전에 힘써 왔다.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제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로 국민훈장모란장과 한국문화대상을 받았다. 이번 무대는 부산교대 이두원 교수를 비롯한 후배 및 제자들이 김옹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정농악회와 심소춤연구회,해금연구회,서울악회,국립국악원 정악단 등 5개 단체가 나와 관악 ‘수제천’과 궁중무용 ‘춘앵전’,‘처용무’,해금합주 ‘천년만세’,관현악 ‘취태평지곡’,가곡 ‘태평가’ 등을 선사한다.(02)580­3130
  • 대검 李鐘溥 사무국장 명퇴

    ◎64년 9급 출발… 행정쇄신 공로 황조근정훈장 검찰 일반직의 최고위직인 대검 李鐘溥 사무국장(1급)이 9일 명예퇴직,34년에 걸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李국장은 지난 64년 서울지검 검찰서기보(9급)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광주지검과 서울지검,대전고검 국장을 거쳐 대검 사무국장에 올랐다. 李국장은 94년 광주지검에 근무할 때 민원인 전용주차장을 설치하고 벌과금 자동안내전화를 설치하는 등 검찰 행정 개선에 앞장서왔다. 지난해 2월에는 집행관 임명 추천제도 운용지침을 제정,시행하고 ‘민원 1회 방문처리제’를 실시하는 등 친절한 검찰상 구현과 민원행정 쇄신에 이바지한 공로로 이날 정부로부터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李국장은 내년 상반기 안헤 갱생보호공단 이사장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 ‘21세기 사회공동체운동’ 선언/새마을운동 위상 달라졌다

    ◎제2건국 중추역할·생활현장 국민의식 개혁 다짐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8일 ‘98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제2의 새마을운동’을 공식 선언했다. ‘제2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민간주도의 ‘제2의 건국’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순수민간 자율운동의 중심에 서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동안 ‘관변단체’로 인상지워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변신을 공언한 셈이다.정부도 새마을의 ‘거듭나기’ 움직임을 적극 후원하는 분위기다.金大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이날 대회에 참석한 것이 단적인 예다. 사실상 방치됐던 지난 정부때의 대접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변화의 주역은 姜汶奎 회장이다.그는 회장에 취임하기 이전에는 ‘시민단체의 대부’로 불리웠다.그런 점에서 새마을의 변화는 시기가 문제였을 뿐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다. 姜회장은 대회사에서 “새마을운동이 진정한 국민운동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21세기 시대정신에 맞는 사회공동체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했다.그러면서 “지난 두주일 동안 핵심 지도자들과 연찬회를 가지며 ‘새마을운동이 시대에 맞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강한 의지와 하나로 뭉쳐진힘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새마을의 변화가 230만명에 이르는 구성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했음을 강조한 대목이다. 姜회장은 ‘새마을이 나아가야 할 길’은 ‘당면한 국가적 어려움을 하루 빨리 극복하는데 동참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운동의 새로운 위상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구성원들에게는 ‘제2의 새마을운동’에 앞서 ‘지난날의 새마을운동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도 촉구했다. 姜회장은 ‘제2의 새마을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으로는 먼저 ‘생활현장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생활개혁’을 제시했다. 각급 민간 직능 및 시민운동 단체들과의 연대협력체제를 폭 넓게 구축하고,일방적인 정부로 부터의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건전하고 동등한 파트너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마지막으로 현장중심으로 추진방식을 전환하여 사업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한편 재정적인 자립기반을 확충하여 자율역량을 높이는 방안도 내세웠다. ‘제2 새마을운동’은 이를 바탕으로 ●나라살리기 경제회생운동 ●건전한 국민의식 실현을 위한 생활의식 개혁운동 ●더불어 함께 사는 화합과 이웃사랑 운동 ●지탱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환경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의 국제적 확산 및 통일준비운동 등 5대 과제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키로 했다. □훈·포장 수상자 명단 ◇새마을훈장 자조장 ▲徐漢泰 새마을운동경남도지부회장 ◇새마을훈장 협동장 ▲姜昌求 충북도협의회장 ▲黃福嬉 포항시새마을부녀회장 ▲崔松圭 전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장 ▲曺世煥 직장새마을운동 전북도협의회장 ▲崔喆九 인천계양구협의회장 ▲尹漢基 용인시새마을회장 ▲金圭鉉 새마을문고서울시지부회장 ◇새마을훈장 근면장 ▲千福成 서울성북구협의회장 ▲朱春心 진주시 새마을부녀회장 ▲金貞得 서울용산구지회장 ▲吳良鎬 전남도새마을부녀회장 ▲崔燦桓 강릉시협의회장 ▲延文雄 청주시 운신새마을금고 이사장 ▲申永鎭 경기 연천군협의회장 ▲成宰榮 부산남구지회장 ▲朴貞姬 대구새마을부녀회장 ◇새마을훈장 노력장 ▲白玉子 서울 금천새마을부녀회장 ▲具正道 창원시 봉림동협의회장 ▲鄭憲台 서산시 동문동협의회장 ▲張貴石 전남 고흥군지회장 ▲梁大珍 새마을문고 부산해운대구지부회장 ▲金明淑 화성군 새마을부녀회장 ▲裵榮熙 인천 남구 새마을부녀회장 ▲金敏洙 광주 충장동협의회장 ▲申泳煥 서울 신성(주) 회장 ▲李東洙 충남도지부사무국장 ▲朴燦緖 천안시 목천면새마을부녀회장 ▲玄守男 전제주시협의회장 ◇새마을포장 ▲辛榮玉 부산 사하구새마을부녀회장 ▲金重元 서천군지회장 ▲金日泰 울주군협의회장 ▲金東順 서울 청운동새마을부녀회장 ▲李弼載 인천 만수목민새마을금고 이사장 ▲林福順 울산 남구새마을부녀회장 ▲金在英 대전 중구협의회장 ▲沈相顯 순창군협의회장 ▲金萬石 강원도 양구군지회장 ▲孫炳玉 청주시 충청신용협동조합 상무 ▲金英姬 철원군새마을부녀회장 ▲孫五憲 밀양시지회장 ▲吳亨德 무안군새마을부녀회장 ▲鄭在 목포시협의회장 ▲陰順培 안양시새마을회장 ▲金寅周 김천시협의회장 ▲鄭錫鍾 고려방제기기 산업 대표이사 ▲金正鶴 제주 북제주군 대흘2리새마을문고회장 ▲徐奉禮 광주 동구새마을부녀회장 ▲林鍾寬 서울 동대문구자연보호협의회장 ▲金星子 대전 대덕구새마을부녀회장 ▲李千錫 대구 북구협의회장 ▲羅奎三 서울 강북구협의회장 ▲禹泰夏 경기도새마을회 사무국장 ▲金榮淑 청원군새마을부녀회장 ▲金慶植 서울 중랑구 중화1·3동새마을금고 이사장 ▲尹在斗 영암군협의회장 ▲高春元 제주시 용담2동새마을부녀회장
  • “72시간 장군” 군복 벗고 정훈공보관 발탁/姜浚權 예비역 준장

    ◎국방부대변인 능력 인정/예편 3일 앞두고 별단 진기록/임무는 소장급 직책 姜浚權 국방부대변인이 ‘지상 최고의 계급’(대령)에서 ‘하늘의 말단 별’(준장)이 됐다가 다시 일주일만에 사단장급(소장) 직책에 올랐다. 북한의 침투 도발사건 등 국방부의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TV 카메라 앞에 서서 묵직한 목소리로 국방부의 입장을 대변하던 ‘군인’ 姜대변인이 8일 민간인으로 변신,정훈공보관(별정 2급)에 임명됐다.국방부의 공보 및 정훈업무를 총괄하는 정훈공보관은 전임 朴모 소장을 비롯,주로 현역 소장이 보임돼 왔던 직책이다. 전북 익산출신인 姜공보관은 지난 67년 갑종 212기로 임관 후 줄곧 정훈장교로 복무하다 지난달 27일 군 생활 31년만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진급이전에도 정책부서의 과장급인 대령이었지만 千容宅 국방장관의 공보 참모로서 차관보급(중장) 이상만 참여하는 주요 정책결정 회의에도 빠짐 없이 배석해 발언하는 등 ‘중장급 대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또 국방부 청사 지하 1층에 있는 ‘장군 식당’에서 매일아침 열리는 조찬 간담회 등에도 어김 없이 자리해 주요 현안에 대한 홍보방향 등을 건의하는 등 장군 식당을 이용하는 유일한 대령이기도 했다. 千장관은 지난달 30일자로 전역 명령을 받은 상태인 姜공보관이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때 보여준 탁월한 업무능력 등을 인정해 예편 3일을 앞둔 27일 극히 이례적으로 특별진급을 상신,‘72시간 장군’의 영광을 선사해 화제가 됐었다. 姜공보관은 지난 10월22일 장군진급 내인가를 시작으로 진급 결정(10월25일),진급 및 보직인사(11월27일),대통령표창(11월28일),장군 전역신고(11월30일),정훈공보관 보직(12월5일) 등 1개월17일만에 모두 6번에 걸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육본 정훈감실 기획담당과 1군사령부 정훈공보실장,합참 공보실장 등을 두루 거친 정훈공보통인 姜대변인이 앞으로 열린 국방의 시대를 헤쳐가는데 얼마나 기여할 지 주목된다.
  • “새마을운동 정치 이용 불용”

    ◎金 대통령 치사… 지도자대회 ‘제2새마을운동’ 선포 金大中 대통령은 8일 “국민의 정부는 건전한 시민운동을 적극 지원하되,불필요하게 개입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굳게 다짐한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새마을지도자들도 ‘새마을’이 관변단체라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 자율적인 시민사회단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층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金대통령은 특히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권력이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이제 ‘새마을’은 국난극복을 위한 국민의 참여와 협력을 불러 모으고,지역·계층·세대간 분열과 갈등을 국민대화합으로 승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며 “우리 사회의 각종 병폐와 부조리를 바로 잡는 생활의식개혁 등 국정을 총체적으로 개혁하는 제2의 건국운동의 선봉에 나서달라”고 말했다. 한편 새마을운동 관계자 8,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대회에서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제2 새마을운동’을 선포했다. 姜汶奎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우리는 지금 ‘제2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제2의 건국’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려는 새로운 전환점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고 “새마을운동이 진정한 국민운동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21세기 시대정신에 맞는 사회공동체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徐漢泰 새마을운동 경남도지부장이 새마을훈장 자조장을 수여한 것을 비롯, 모두 198명에게 훈·포장과 대통령 및 국무총리 표창장을 주었다.
  • 필리핀 최고 훈장 받은 張榮植 한전사장

    ◎“중·대만 등 해외발전시장 적극 진출”/내년 1월 세계최대 가스발전소 필리핀에 건설 한국전력공사 張榮植 사장이 필리핀 말라야 화력발전소의 성능을 완전 복구시킨 공로로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7일 최고훈장을 받았다.한전은 앞으로 중국의 원전 등 해외 발전소 건설시장에 적극 진출한다는 방침이다.張사장으로부터 수상 소감과 해외전력사업 진출계획을 들었다. ●외국 대통령으로부터의 훈장 수상이 흔치 않은데. 훈장도 기쁘지만 우리의 전력기술이 외국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데 더욱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이번 복구공사에 이어 한전은 내년 1월 가스발전소로는 세계 최대인 필리핀 일리한 발전소를 착공한다.발전소 건설은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어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말라야 발전소 공사만도 67개 중소기업이 7,300만달러의 기자재를 수출하는 효과를 거뒀다. ●한전의 해외사업계획은. 우선 중국의 원전건설 시장에 참여하는 게 당면과제다.중국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의 15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 상당수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전망이다.지난달 金大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한전과 중국전력공사가 기술교류협정을 맺었다.이를 바탕으로 최소한 3∼4기 이상의 원전건설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중국도 우리의 원전기술을 탐내고 있다. 이밖에 대만 포모사 민자발전소 7기의 가동과 인도 코로바 화력발전소 정비,베트남 바리아 가스복합화사업,케냐 디젤발전소 운전 등의 사업에 이미 진출했거나 할 계획이다. ●정부는 현재 9개인 국내 원전 건설 후보지를 연내에 3개로 줄인다는 방침이다.최종 후보지는 결정됐나. 과거 용역연구 결과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전남 진도 등 3곳이 최적지로 선정됐으나 큰 의미는 없다.지역주민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 프로레슬러 출신 미네소타 주지사 벤추라(뉴스 인사이드)

    ◎허위 군경력으로 곤욕/“베트남전 특수공작요원 참전 무공훈장 받았다” 자랑/전 주정부 1등서기관 “새빨간 거짓말쟁이” 공개 비난/군기록은 보급계요원… 반론거리 없어 논란 계속될듯 미국의 ‘11월3일 중간선거’에서 일약 미네소타주지사로 당선,세계의 시선을 모았던 제시 벤추라가 다시한번 지구촌의 관심을 끌고 있다. 프로레슬러 출신인 벤추라는 정치경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 양당의 막강 경쟁자들을 물리쳐 중간선거 최대의 화제가 됐던 인물.당시 CNN등 미국 언론들이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경악할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의 주간지 글로브는 최신호에서 프로레슬러 외에 영화 ‘프레덱터’와 ‘배트맨과 로빈’ 등에도 출연했던 벤추라가 주지사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군대경력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전했다. 중간선거때 벤추라는 자신의 터프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로 혁혁한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떠벌렸다.다른 후보들과 달리 자랑삼을 경력이 없었던 그가 베트남전의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묘사했던 것. 비장의 ‘출세 무기’가 시비거리가 된 것은 최근.미네소타주 정부에서 1등서기관으로 일했던 딕 프란슨(69)이 이같은 그의 군 경력은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이라고 공개 비난하면서 시작됐다.벤추라의 주지사 입성으로 퇴출까지 당하자 프란슨은 아예 벤추라를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네이비실(해군 특수부대) 요원으로 최전방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과장된 것으로 진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벤추라는 “맹세코 당시 전장에 있었으며 매일 600달러의 위험수당도 받았다”고 맞서고 있지만 정작 확실한 반론거리는 내세우지 못해 논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한편 글로브지는 자체 조사를 해본 결과 벤추라는 해군 특수부대에서 기본적인 훈련과정을 마쳤으며 베트남전이 끝나갈 무렵인 72∼73년에는 미군 해군기지가 있는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복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군 기록에 따르면 벤추라는 군수품 수송을 위한 보급계 요원이었지 베트남에 침투할 특수공작 대원은 아니었다는 것.이와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해 받았다는 무공훈장 역시 특수부대의 기본적인 훈련만 수료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었던 ‘졸업메달’ 같은 것이었다고 글로브지는 전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申英均대우重·崔炳哲극동전선사장 제35회 무역의날 금탑산업훈장수상

    한국무역협회(회장 具平會)는 30일 제35회 무역의 날을 맞아 각종 훈·포장 및 표창 수상자 531명과 수출탑 수상업체 487개사를 선정,29일 발표했다.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에는 申英均 대우중공업 사장과 崔炳哲 극동전선공업 사장 등 2명이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申사장은 일본 조선업계와 동등한 가격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공로가,崔사장은 산업용 전선의 일본 진출과 신기술 개발 공로가 높이 평가됐다. 은탑산업훈장 수상자로는 崔旭洛 (주)한화 사장과 朴正仁 현대정공 사장, 李文成 제일엔지니어링 부회장,金載憲 대신통상 사장,宋仁鎬 (주)을화 사장 등 5명이 선정됐다. 올해 제정된 150억불탑은 (주)대우와 삼성물산,현대종합상사 등 3개사가 수상했다.
  • 에너지절약 기여 144명 선정/현대전자 張東國 부사장 등 훈포장

    ◎개그맨 李敬揆씨도 대통령 표창 산업자원부와 에너지관리공단은 18일 현대전자산업(주) 張東國 부사장과 개그맨 李敬揆씨 등 에너지 절약에 기여한 유공자 144명을 선정,발표했다. 張부사장은 반도체 생산공정을 개선,에너지 절감으로 생산성을 높인 공로로 동탑산업훈장 수상자로 선정됐다.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게 된 李씨는 TV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에너지 절약의식을 고취시킨 공로가 인정됐다. 산자부와 에너지관리공단은 19일 오전 金鍾泌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제19회 에너지절약 촉진대회를 열어 이들 유공자를 시상할 계획이다.
  • 사장 裵說의 재판:2(대한매일 秘史:2)

    ◎日측 “대한매일이 의병봉기 선동” 주장/張仁煥 의사 의거 찬양 등 항일사설 3건 증거로 내놓아/“한국사태 왜 日서 문제삼나”/英 변호인 추궁에 원고 우물쭈물/초만원 방청객들 야유 폭소 재판은 3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 한국인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민족지를 영국의 법정은 어떻게 판결할 것인가. 피고는 대한매일의 사장 배설이라는 영국인이지만 진정한 피고는 배설이 아니라 민족언론 대한매일신보였다. 배설이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대한매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법정은 만원을 이루었다. 방청석에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복도와 재판정 바깥까지 모여서 재판을 지켜보았다. ○법정 복도·바깥서도 지켜봐 재판이 시작되자 일본 통감부와 변호인 사이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근본 원인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다. 검사 윌킨슨이 고소인 미우라를 먼저 신문하기 시작했다. 통감부의 제2인자로 이등박문을 대리하여 법정에 나온 미우라(三浦彌五郞)는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된 원인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매일이 소요와 무질서를 조장하고 한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적대감을 조장시키는 기사를 게재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이 궐기하여 전국의 치안이 불안하고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변호인 크로스는 의병의 봉기는 대한매일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들어 재판의 성격을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부각시키려 했다.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은 독립국가다. 의병의 궐기는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미우라,당신은 일본 관리인가? 한국 관리인가? 일본 관리라면서 왜 한국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문제삼아 일본 통감부의 대표로 나서서 영국인 배설을 고소하는가.” 미우라가 궁색한 논리로 대답을 얼버무리자 방성석에서는 야유하는 폭소가 터졌다. ○英·日 외교협상끝에 재판 열려 재판장은 변호사에게 정치상의 의견은 묻지 말고 사실에 관해서만 국한해서 물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영국과 일본 사이에밀고 당기는 길고도 끈질긴 외교협상 끝에 이루어진 재판이었으므로 재판장은 변호사가 재판을 정치적으로 끌고가는 것을 막으려했던 것이다. 통감부가 배설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증거물로 제시한 대한매일의 논설은 3건이었다.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 암살을 찬양한 1908년 4월17일자 기사를 비롯하여 「일백 매특날(메테르니히)이가 능히 이태리를 압제치 못함」(1908.4.29)과 「학계의 꽃」(5.16)이라는 논설이었다. 통감부의 입장에서는 대한매일의 모든 지면이 항일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지만 구체적인 증거물로 3건을 제시한 것이다. ○美 교포신문에 처음 실려 문제가 된 4월17일자 대한매일의 기사는 친일외교 고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을 다룬 내용이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1904년 12월27일 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던 미국인이다. 그는 1882년부터 일본 정부를 위해 일했고 일본 정부의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은 그를 내세워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외교상의 중요 사항을 일본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스티븐스는 한국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으로 한국 정부가 주는 고액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스티븐스의 암살 기사는 원래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발행인 鄭在寬) 3월25일자에 실린 것이었다. 공립신보는 교포들의 조직인 한인공동회(共同會)에서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공립신보는 ‘한국의 공적(公敵)’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두 애국지사 장인환과 전명운을 찬양하면서 체포된 두 사람의 변호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매일이 장,전 양 의사의 의거를 찬양하는 기사를 싣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사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주한 영국 공사 헨리 코번(Henry Cockburn)은 이때의 상황을 영국 외무성에 보고하면서 “한국인들은 집권세력도 그들에게 불명예스러운 발행물을 금지시키거나 저지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 기사를 읽고 통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코번이 지적한 ‘집권세력’은 통감부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며,그들의 재판을 기회로 일본 침략하의 한국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가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매일은 두 애국지사의 재판을 기회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세계만국에 널리 알리자고 역설했다. “오호라 한국 독립은 곧 오늘이요,한국의 자유는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라”면서 “이 재판은 우리의 독립재판이니 우리가 이 재판에 이겨야 우리 2천만의 독립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上)

    ◎臨泉 軍訓地서 ‘광복꿈’ 회상/銅山路 日 부대터에 中軍병영/연병장·단층막사 ‘옛 그대로’/끌려간 日 병영탈출 감행 뿌듯 한국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이 조국 광복을 꿈꾸며 젊은 날 이역만리에서 피 흘렸던 중국땅을 찾았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출신 광복군 초급장교들로 흔히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 일본군의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항일투쟁의 족적을 찾아 나선 것은 광복의 참뜻을 지금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 중부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에서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까지 장장 6,000리길. 일본군 탈출부터 광복군 훈련장,항일 지하공작 거점 등 열하루간 동행했던 이들의 답사 행로를 3회에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 독립군’들의 첫 현장 답사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시작됐다. 베이징(北京)서 814㎞. 기차로 8시간. 54년전에 거쳐온 길을 더듬기 위해 1시간 남짓한 비행기편도 마다했다. 1944년 2월초. 평양을 출발,기차에 강제로 실려 닿은 곳은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하던 최전방 쉬저우. 7월까지 쉬저우와 슈저우(宿州),푸양(阜陽)일대 전선에 배치됐던 이들은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하나둘 일본병영을 탈출했다. “일본군이 되어 동포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느니 차라리 탈출하다 죽기로 했다”고 50여년전 결의를 회상했다. “상당수는 우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회고담은 이어졌다. 당시 쉬저우 주변에선 일본군이 밀집해 있었고 중국으로 끌려온 ‘조선학병’ 3,000여명의 대부분도 부근에 배치됐다. 때마침 텐진(天津)에서 시작된 진푸선(津浦線)철로가 쉬저우를 지나 상하이(上海),푸둥(浦東)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노 광복군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일본군은 철도와 주변을 점령,광대한 중국대륙을 ‘선’과 ‘점’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갔던 학병들은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주둔해 있었단다. 밤을 틈타 3m가 넘는 철책을 넘었다. 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이상을 풀잎이나 과일로 연명하며 낮에는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들판을 달렸다. 대개는 중국 유격대와 조우했고 당당한 광복군이 되었다. 44년 6월 ‘宿縣부대’ 제4중대에서 탈출했던 金柔吉 부회장과 全履鎬 회원은 슈저우역에서 2㎞쯤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맨끝에 당시의 탈출지점을 찾아냈다. 지금은 ‘宿縣 付小樓 村庄’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3층의 주택들이 병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5월에 같은 부대 보병중대에서 津浦線을 넘어 탈출했던 石根永 회원도 슈저우에서 50㎞ 떨어진 구쩐(固鎭)역부근에서 병영터를 찾아냈다. 일본군은 철도가 파괴되거나 공격받으면 주변의 중국인을 몰살시켜 보복했다고 악몽같은 50년전을 떠올렸다. 중국 유격대원이 생포되기라도 하면 총검술 연습의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기도 했단다고 치를 떨었다. 대부분의 병영들은 푯말하나 남지않고 촌락 등으로 바뀌는 등 사라졌지만 尹慶彬 회장과 金永錄 회원이 탈출했던 쉬저우시 통산로(銅山路)의 부대터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대안을 돌아본 尹慶彬 회장 등은 연병장앞의 3층 본부 건물,검은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층 막사가 옛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 높은 천정의 막사안에는 시멘트바닥에 철로 만든 2층 침대 10여개와 간단한 사물함이 눈에 띄었다. 張俊河 선생 등과 함께 尹회장 일행 4명이 44년 7월7일. 일본군의 이른바 ‘중국침략 기념일’로 경계가 느슨해 틈을 타 ‘취침전 15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했다. 일본군을 벗어난 이들은 이틀밤을 앞만 보고 달리다 먼저 탈출해 중국 유격대에 와 있던 金俊燁(전 고대 총장)씨와 해후했다. “중국의 여러 유격대에 흩어져 있던 탈출자들은 린촨(臨泉)로 모였지요. 린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광복의 꿈을 키워 대일항전의 장정(長征)을 시작했습니다” 노 독립군의 회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어느새 50년전의 린촨에 닿고 있었다. ◎독립유공자협회/항일전 참가 175명이 결성… 현 회원 220명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광복회와 함께 항일투쟁의 일선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양대 산맥. 81년 독립운동가 175명에 의해 발족됐다. 초대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趙擎韓 선생.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朴英俊 회장에 이어 尹慶彬 회장이 3대 협회를 이끌고 있다. 회원은 220명. 광복회가 독립지사의 유가족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본인만이 가입할 수 있다. 회원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일제말기 학병 등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협회의 주축. 金九 선생을 보좌,충칭(重慶) 임시정부서 일했던 마지막 생존자들이기도 하다. 대부분 70대후반에서 80대초반. 색이 바라가는 독립정신을 드높이기위한 연구,탐사 등 학술사업과 사회사업,독립운동 사적에 대한 복원운동을 벌여왔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이 되는 내년 충칭시 광복군 총사령부건물 표지석 건립작업 등 후세에게 민족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중이다. ◎광복군/임정 정규군… 美와 對日 공동작전 활약 광복군이 정규군으로 발족한 것은 40년 9월. 무력으로 조국을 되찾겠다며 중국으로 온 젊은이와 일본군에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이 주축이 됐다. 총사령관은 李靑天 장군이었고 참모장 李範奭 장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지하활동 등 갖가지 군사활동을 감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3개의 직할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李範奭 장군이 지휘하는 2지대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을 거점으로 일본군 전력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주력했다.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필사의 전투는 3지대의 몫.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두고 산둥성(山東省) 등 화북지역에서 지하공작 활동도 병행했다. 44년부터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합류하면서 미국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한반도침투 등 특수공작을 준비하기도 했다.해방직전 광복군은 700여명. 광복이 될 무렵에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로 30만여 군병력을 조직하는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다. ◎임천사관학교/日軍 탈출한 한국인 광복군 간부 양성소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에 있던 ‘광복군 사관학교’. 더 정확히 말하면 44년 7월 린촨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안에 설치됐던‘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일명 한광반(韓光班)’.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군서 탈출한 한국인을 광복군 간부로 양성하던 곳이다. 44년 7월에 들어온 첫 입학생들은 48명. 33명은 대학졸업후 일본군으로 징병돼 중국전선까지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 15명은 조국광복을 꿈꾸며 중국으로 건너왔던 애국청년들. 5개월 과정을 마친뒤 白正甲 등 25명은 6,000리 길을 걸어서 쓰촨성(四川省)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본류에 합류한다. 나머지 8명은 최전방 안후성에 남아 정보수집 등 대일투쟁을 벌인다. 25명중 尹慶彬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鮮于鎭은 金九 선생비서로 白凡 선생을 최후까지 보좌하게 된다. 또 張俊河,金俊燁,金柔吉 등 일부는 한·미군사협력으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 한반도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는다. 현재 한광반 첫 수료생 가운데 국내엔 11명이 생존해 있다.
  • 金 대통령,朴세리에 각별한 관심/체육훈장 별도로 수여

    ◎“이쁘고 얌전하다”/수차례 건강 물으며 격려 골프선수 朴세리양에 대한 金大中 대통령의 애정은 각별했다. 6일 오후 별도 일정을 만들어 朴양에게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해서가 아니다. 지난 2일 병원에 입원중인 朴양이 청와대 훈장수여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시했을 때도 “몸조리를 잘하라”며 오지말도록 권유했다. 특히 이날 환담 자리에서는 “이쁘고 얌전하다”며 애정이 짙게 밴 얘기들을 해줬다. 金대통령은 “신발을 벗고 개울에 들어가 골프를 친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며 “오늘 훈장은 국민이 준 것”이라고 치하했다. 그러면서 “건강은 이제 괜찮냐”고 여러 차례 되물었다. 운동경기 관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金대통령이 여자골프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간간이 TV에 비치는 모습을 보니 경기를 하면서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데 그때 감기가 걸린 모양”이라고 말한 것이다. 金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신문을 보면 경기가 너무 잦은 느낌이 있다”며 “내년에는 경기수를 조절할계획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朴선수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 수해 대책 유공 473명 특별포상

    정부는 지난 7월31일부터 8월18일까지 수도권을 비롯,지리산 지역 등 전국적인 집중호우 때 인명구조와 응급복구,이재민 구호에 헌신한 수해대책 유공자와 단체,기업체,공무원 등 473명에 대해 국민훈장 석류장 등 특별포상을 30일 실시했다. 포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국민훈장 석류장 ▲金台勳(충북 보은군) ▲姜仁景(충남 당진군) ▲洪旭伊(전북 남원시) ◇보국포장 ▲李鎬根(육군 제9보병사단 중령) ▲裵沃根(육군 항고사 제2항공단 중령) ▲李寅澤(육군 제13통신여단 중령) ◇근정포장 ▲洪周杓(경북 의성경찰서 순경) ▲梁炯喆(전북 남원소방서 지방소방장) ◇국민포장 ▲池泳鱗(경기 양주군) ▲吳明秀(경기 양주군) ▲姜泰振(전남 구례군) ▲金奎亨(대구 달성군) ▲徐積烈(경남 산청군) ◇대통령표창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전자산업 ▲대우전자써비스 ▲현대 자동차 ▲대우자동차 ▲한국통신공사 ▲영도건설산업 ▲현대건설 ▲대우 ▲삼성물산 ▲계룡건설산업 ▲육군 제9보병사단 ▲柳南永(국방부 인사복지국 중령) ▲尹柱玹(육군 제39보병사단대령) ▲농어촌진흥공사 ▲한국전력 의정부지사 ▲가톨릭 중앙의료원 ▲진로종합식품 ▲한국폐기물 재활용수집협의회 ▲崔鉉太(경남함양경찰서 총경)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서울지부 ▲林成來(경기 하남시) ▲가천의과대학 길병원 ▲李恭雨(인천 계양구) ▲늘푸른주택 ▲파주시 새마을부녀회(경기) ▲경기도 새마을부녀회(수원) ▲崔圭辰(경기 파주시) ▲尹錫種(경기 포천군) ▲鄭夏億(경기 동두천시) ▲全鐘善(경기도 의정부소방서) ▲충북도 보은군 ▲孫仁錫(충북 옥천군) ▲농협중앙회 태안군지부 ▲대한전문 건설협회 금산협의회(충남 금산군) ▲朴曠培(충남 당진군) ▲남원시 자율방범연합회(전북 남원시) ▲구례읍 부녀의용 소방대(전남 순천시) ▲상주시 해병전우회(경북 상주) ▲金楨鎬(쌍용건설부장) ▲수중긴급구조봉사대(경남 창원시) ▲朱學秀(경남 거창군) ▲金元吉(경남 산청군 지방행정주사) ▲金容正(경남 창원소방서 지방 소방사)
  • 찬호와 세리의 금의환향/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박찬호와 박세리가 돌아왔다.동양인들에게 그토록 어렵다는 미국의 프로세계에서 당당히 이기고 돌아온 그들,젊은 한국인이 자랑스럽다.분명 금의환향(錦衣還鄕)이다.두 박선수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에 그야말로 ‘하면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정부가 오는 11월 2일 청와대에서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키로 한 결정도 그래서 수긍이 간다.우리에게 한없는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세계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당당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그들이다. 우선 박찬호를 생각해보자.그는 공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국내에서는 투수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런 그가 지난 94년 한양대 3학년 재학중 미국에서 열린 한·미 대학야구대회에 참가,빠른 공을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을 유심히 지켜본 LA다저스팀에 스카우트돼 미국으로 건너갔다.다른 선수와 달리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출전했으나 역시 기량부족으로 2게임을 던진 뒤 마이너리그로 추락할 수밖어 없었다.그곳 샌안토니오 미션팀에서 20게임,트리플에이팀에서 23게임을 치른 다음 96년 메이저리그로 복귀했으나 그 해의 성적은 3승2패로 신통치 않았다.그 이듬해인 지난해 그는 14승의 위업을 달성했고 올해 꿈의 15승을 이뤄냈다.15승의 의미는 미국 30개 메이저리그 팀 가운데 어딜 가나 에이스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오직 노력으로 일궈낸 값진 열매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박세리는 어떤가.그토록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프로골프계에서 남자의 타이거 우즈에 이어 여성 유색인종으로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쥔데 이어 최고권위의 US오픈 챔피언십을 따냈고 그 여세를 몰아 시즌 4승의 대기록을 세웠다.아직 저팬클래식투어와 투어 챔피언십이 남아 있지만 잠시 귀국한 이유는 오는 11월 11일 대한매일로 다시 태어나는 서울신문의 자매지 스포츠서울이 주최하는 ’98한국여자골프선수권대회(10월 30일∼11월 1일·레이크사이드CC)에 출전,국내 팬들에게 그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서다. 이들 두 박선수는 분명 개척정신을실천해 보여준 완성자다.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국민들과 함께 그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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