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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전기를 지으면서, 이 두 지역의 민속을 이렇게 구별하여 설명하였다.“서울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종로 남쪽부터 남산까지가 남부이다. 장사꾼과 부자들이 많이 산다. 이익을 좋아하고 인색하면서도, 수레와 집은 서로 사치를 다툰다. 백련봉 서쪽부터 필운대까지가 북부이다. 대체로 가난하고 얻어먹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의협스러운 무리들이 자주 있어, 의기로 사귀어 노닐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흔쾌히 허락하고 남의 어려움을 잘 도왔으며 근심을 함께 하였다. 시인 문장가들이 계절을 따라 노닐며 자연속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마음이 내키면 시를 읊었는데, 많이 짓는 것을 자랑하고 곱게 짓기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 북촌은 고관들이 주로 사는 가회동, 안국동, 재동 일대를 가리키지만 북부는 중인과 경아전들이 주로 살던 인왕산과 백악이 이어진 산자락을 가리킨다. ●‘물좋은´ 내수사 경아전 자리 스스로 물러나 임준원은 대대로 서울 북부에 살았던 경아전이다. 신선 같은 모습에다 말솜씨까지 좋았는데, 젊었을 때 최기남(崔奇男·1586∼1669)의 서당에서 시를 배웠다. 최기남은 집이 너무 가난해 선조의 셋째 사위인 신익성(申翊聖)의 궁노(宮奴)가 되었다가 한문을 배워 서당 훈장으로 이름이 났던 위항시인이다. 임준원 역시 시를 잘 짓는다고 칭찬들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한데다 늙은 어버이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실용성 없는 한시만 계속 배울 수는 없었다. 정내교는 그가 큰 돈을 번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임준원은) 드디어 뜻을 굽히고 내수사(內需司)의 서리가 되었다. 임용되어 부(富)를 일으키니, 재산이 수천냥이나 모아졌다. 그러자 ‘내겐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탄식하더니,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 집에서 지냈다.” 내수사(內需司)는 조선시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개국 초에 함흥지역을 중심으로 한 태조 이성계 집안의 사유재산과 고려왕실에서 물려받은 왕실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으므로, 본궁(本宮)이라 불리기도 했던 관청이다. 본래 면세특권을 부여받은 내수사전(內需司田)과 각 지방에 흩어져 일하는 수많은 노비·염전 등을 보유한데다, 왕실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계속 확대했다. 그 폐단이 커지자 “군주는 사재(私財)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워 내수사를 없애자고 건의했지만,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어놓으려는 왕은 하나도 없었다. 신익성의 아버지 신흠(申欽)은 영의정까지 지내 국가재정에 훤했는데,‘휘언(彙言)’이라는 글에서 “내수사는 수입이 국가의 일반재정과 맞먹었다. 그곳의 형세가 안전해 양민(良民)과 사천(私賤)이 많이 도망해 들어갔으며,(그 재정은 內需가 아니라) 태반이 내수(內竪)의 개인적 용도로 허비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방대한 재정을 왕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사에 관련된 개인들이 사취한다는 뜻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내수사 노비들이 나라 안에 돌아다니며 거둬들인 돈과 베를 내시들이 주관한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막연히 알지 못해, 임금의 사치심만 날로 더하게 한다.”고 폐단을 논했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그곳의 관원 10명은 모두 왕의 심복인 내시였다. 그러다보니 서리 8명이 방대한 재정을 자기 집안의 살림처럼 운용하며 많은 재물을 빼어돌린 것이다. 내수사에 관련된 죄인을 잡아가두는 감옥인 내사옥(內司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비리가 많았는데, 그나마 1711년에 폐지되었다. 서리도 전문직이기 때문에 한문을 잘 알아야 했고, 선발시험도 보았다.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9월3일 기록에 “전에는 서리를 임명하기 위해 고강(考講)·제술(製述)·서산(書算)을 시험한 뒤에 후보자로 참여시켰는데, 지금은 해이해졌다.”는 구절이 있다. 언제부턴가 읽기, 짓기, 쓰기, 셈하기 등을 시험 보아 적임자를 뽑지 않고, 청탁에 의해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아전 이윤선(李潤善·1826∼1869)이 26년 동안 호조에서 근무하며 기록한 ‘공사기고(公私記攷)’를 분석하여 ‘조선후기 경아전 서리 연구’라는 논문을 쓴 원재영 선생은 호조 아전들이 임용되기 위해서 보통 1500냥 내지 1900냥을 주었다고 했다.‘탁지지(度支志)’에 기록된 서리의 월급은 무명 3필, 쌀 1석5두, 보리 1두5되에 불과했다. 이윤선은 자신의 서리직을 정석찬에게 거금 1800냥에 팔았다가 6개월 뒤에 다시 1900냥을 주고 복직하였다.1847년부터 1855년까지 9년 동안에만도 부동산 투자에 1000냥을 들였으며, 아들에게 공부방을 마련해주고 독선생을 모셨다.11살 난 아들 용석(容錫)이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다고 대견해 한 것을 보면, 아들에게는 사대부 못지않은 교양까지 갖춰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호조 아전들은 다양한 명목의 화폐나 현물을 수시로 받았다고 했으니, 고관 못지 않은 요직이었다. 내수사가 있던 마을을 내수삿골이라 불렀는데, 인왕산 밑자락인 지금의 종로구 내수동이다. 종합청사 뒷길이 내자동길인데, 내수동에서 내자동을 거쳐 사직단으로 이어진다. 내자시(內資寺) 역시 궁궐에서 사용하는 식품과 옷감을 조달하던 관청이어서 경복궁 앞에 있었다. 관원들은 승진하면 다른 관청으로 전근하지만 아전들은 평생 한 관청에 있었으며, 대를 이어서 그 일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경복궁 앞의 관청에 소속된 아전들은 출퇴근하기 좋은 인왕산에 많이 살았다. ●가난해 경조사 못 치르는 이들도 지원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어떻게 수천금을 벌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서리직을 팔았다는 기록도 없고,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남부의 중인들 같이 이익을 좋아하거나 사치하지 않았으며, 인색하지도 않았다. 정내교는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큰 돈을 벌어들인 방법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설명하였다.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는 집에서 지냈다. 문학과 역사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날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찬홍·홍세태·최대립·최승태·김충렬·김부현 같은 시인들이 있었다.” 임준원은 좋은 날이나 경치가 아름다워질 때마다 여러 사람을 불러모았다. 시를 짓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흩어졌다. 정내교가 “서울에서 재주가 좀 있다고 이름난 사람들이 그 모임에 끼이지 못하게 되면 부끄럽게 여겼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름난 위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임준원의 집에 자주 모였던 시인들은 대부분 궁노(宮奴) 최기남의 제자들이다. 임준원은 물론 형조 아전 최승태는 그의 아들이고, 김부현은 그의 외손자이다. 홍세태는 역관, 김충렬은 홍문관 서리, 유찬홍은 역관이었다. 문학사에서는 이들의 모임을 낙사(洛社)라고 불렀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 가운데 가난해서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찾아왔다. 평소에도 그의 집을 드나들며 어버이처럼 모시는 자가 몇십명이나 되었다. 그가 육조거리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관리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욕을 해대는데, 그 여자는 슬프게 울기만 했다. 그가 그 까닭을 묻고는 “그까짓 얼마 안되는 빚 때문에 여자를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불량배를 꾸짖었다. 그 자리에서 빚을 갚아 주고는, 차용증을 찢어버린 채 가버렸다. 여자가 쫓아가면서 이름과 주소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가르쳐 주지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부모가 죽은 것 같이 곡을 했다. 더 이상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되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떠나셨소?” 하고 우는 자들도 많았다. 한 늙은 과부가 와서 상복을 만들어 놓고 갔는데, 육조거리에서 구해 준 그 여자였다. 정내교뿐만 아니라 성해응도 임준원의 전기를 짓고, 홍문관 대제학 남유용도 지었다. 남유용은 정내교의 전기를 읽어보고 ‘요즘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라면서 전기를 지었다. 첫 줄에서 ‘호(豪)’라고 표현했는데, 부호(富豪)라는 뜻도 되지만 호걸(豪傑)이라는 뜻도 된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도왔던 그의 이름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남유용의 ‘임준원전’을 통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삼성·포스코 역시 !

    삼성전자와 포스코가 지난해 1조원이 넘는 세금을 내 ‘고액 납세의 탑’을 수상했다. 정부는 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전군표 국세청장 등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41회 납세자의 날’ 기념식을 갖고 모범납세자 259명 등 600여명을 포상했다. 삼성전자는 2005 사업연도 실적 기준으로 지난해 1조 3230억원의 법인세를 납부해 ‘국세 1조 3000억원탑’을 수상했다. 삼성전자는 2002년부터 매년 법인세를 1조원 넘게 내왔다. 포스코도 지난해 1조 2000억원의 법인세를 납부해 이날 ‘1조 2000억원탑’을 수상했다. 국민은행(9000억원),SK텔레콤(6000억원), 기업은행·우리은행·삼성생명·SK(2000억원), 한국씨티은행·호남석유화학(1000억원) 등은 세금액에 맞는 납세의 탑을 받았다.이밖에 ▲금탑산업훈장 허명수 GS건설 대표이사 ▲은탑산업훈장 박양규 삼성네트워크 대표·이중구 삼성테크원 대표 ▲동탑산업훈장 임선민 한미약품 대표 등이 각각 수상했다.한편 인기드라마 ‘주몽’의 주인공 탤런트 송일국과 영화배우 이나영은 모범 납세자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그대 조국애 영원하리”

    “그대 조국애 영원하리”

    하늘도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프가니스탄 바그람기지에서 무장세력의 폭탄테러로 숨진 고 윤장호(27) 하사의 유해가 2일 오전 7시 아시아나 전세기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한 뒤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됐다. 장례식장 지하 1층 4호 분향실에 차려진 빈소에는 오전 9시부터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윤 하사의 아버지 윤희철(65)씨와 어머니 이창희(59)씨는 금쪽 같은 아들을 황망하게 떠나보낸 슬픔과 왕복 20여시간의 비행 탓인지 눈이 충혈되고 침통한 표정 속에 조문객을 맞았다. 특히 윤씨는 추도 예배중 복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아버지 윤씨는 “쿠웨이트에서 아들의 얼굴을 봤는데 잠만 자고 있더라. 오랫동안 못 봤으니 화장터에 가는 순간까지 영안실에 가서 보고 또 볼 생각이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어머니 이씨도 “국민들이 장호를 아껴 주셔서 고맙다. 하루라도 더 곁에 두고 보고 싶다. 오랫동안 같이 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인과 함께했던 다산부대원들이 먼저 빈소를 찾았다. 조재식(28) 대위는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국가여서 음주가 금지돼 있다.(한국으로) 복귀하면 옛날 다니던 회사 근처에서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근 두 달간 함께 통역병으로 근무한 유성관(22) 상병은 “최고 선임병으로서 항상 밝은 얼굴로 도와주려 했다.”면서 “이렇게 돼서… 조금만 있었어도…”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인이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되기 전에 특전사령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엄선호(22) 병장은 “아직도 안 믿긴다. 동기라기보다 큰 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앞장서 부대원을 감싸 주는 큰형 같은 존재였다.”면서 “4월에 돌아오면 단골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하기로 했는데 (다음 세상에서라도) 다시 만나 꼭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인디애나대 경영학과 동창인 박철환(28·회사원)씨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최근까지 이메일로 연락해 왔다.”면서 “그 친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다시 만나 얘기 나눌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고 밝혔다. 대학친구 구충희(27)씨는 “아프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다고 계속 말했다.”면서 “내가 말렸지만 가려는 의지가 워낙 강했다. 마음이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빈소에는 한명숙 국무총리와 윤병세 통일외교안보수석, 김장수 국방부장관 등이 찾아 유가족을 위로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장영달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등 정치권의 발길도 이어졌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미 정부가 순직한 외국 군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동성무공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평화활동가 20여명은 낮 12시37분부터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횡단보도에서 윤 하사의 나이를 나타내는 27분간 ‘플래시 몹’ 퍼포먼스를 펼쳤다. 참가자들이 ‘죽음의 저글링 파병을 멈춰라.’라는 구호를 외칠 때마다 군복 차림의 사람이 일어나 “사람의 목숨은 저글링 놀이가 아니다.”라며 저글링을 펼쳤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도 추모의 글이 쇄도했다. 아이디 ‘nalsenne’는 “하늘마저 우는가 봅니다. 님의 고귀한 정신 후세에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이 땅에 전쟁이 없는 그날을 기다리며…”라고 적었다. 아이디 ‘원미애’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가족분들 모두 힘내세요.”라고 안타까워했다. 성남 윤상돈·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사설] ‘같은 군복 입어 자랑스럽다’

    탈레반 테러에 희생된 윤장호 병장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글이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봇물을 이룬다고 한다.“한 시대에 같은 군복을 입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그의 미니홈피에 올라 있는 글이다. 다른 공간에도 `고인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파병지원을 망설였기에 더욱 부끄럽다.´는 등의 안타깝고 애절한 심정이 보태지고 있다. 밝은 앞날이 보장됐던 한 젊은이의 죽음 앞에 보내는 국민들의 애절한 마음이 한데 모아졌다 할 것이다. 또 우리 젊은이들과 국민들에게 애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해외 영주권자들이 앞다퉈 자원입대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든든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조국이나 민족에 대한 가슴 뜨거운 애정이 옅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높았던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같은 시대를 사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한·미간 정보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번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측이 우리나라에서의 반미감정 등을 우려, 윤 병장에게 훈장을 추서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조치와 관계없이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한·미 등 동맹국간의 정보공유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할 것이다. 때마침 그제 자이툰부대의 파병식이 있었다. 정부는 장병들의 안전에 더욱 만전을 기하길 당부한다.
  • 美 국무부·대사·벨사령관 애도 뜻…윤하사 훈장 추서

    ‘반미 불똥 차단하라.’ 딕 체니 미 부통령을 겨냥한 테러에 한국군 윤장호 하사가 사망하자 미 정부와 주한미군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테러 발생 직후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이 신속하게 애도의 뜻을 전한 데 이어,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와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도 잇따라 조의를 표시하는 등 각별한 신경을 쓰는 눈치다. 외국군 사병인 윤 하사에게 무공훈장의 하나인 ‘동성훈장(Bronze Star)’을 추서하겠다는 뜻을 전달해온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2002년의 학습효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테러사건의 불똥이 자칫 미 정부와 주한미군으로 튀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라는 것이다. 미국측은 특히 체니 부통령의 방문사실을 같은 기지를 사용하는 동맹군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 ‘미군 책임론’이 번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미 대사관과 주한미군 사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미선·효순양 사망사건에 미온적으로 대처해 대미정서를 악화시켰던 2002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면서 “특히 이번 사건이 한국군의 조기철군으로 이어져 아프간·이라크 미군의 부담이 증가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윤병장 유해 2일 서울로

    아프가니스탄 무장세력의 폭탄테러로 숨진 윤장호 병장의 유해가 2일 전세기 편으로 서울공항에 들어온다고 합참측은 지난달 28일 밝혔다. 한편 이날 윤 병장이 지난해 12월 3일 어머니 이창희(59)씨에게 보낸 24초 짜리 ‘영상편지’와 호주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윤 병장의 형 장혁(33)씨에게 보낸 이메일이 공개돼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2억원대 보상금 유해는 국군 수도병원에 안치될 예정이며 장례 일정과 절차는 유가족 의사를 존중해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합참은 숨진 윤 병장에게 전사자 처리와 함께 1계급 특진과 무공훈장 추서를 건의할 방침이다. 군인연금법시행령상 전사자에게는 일정액의 보훈연금과 함께 2억원대의 사망보상금이 주어진다. 윤 병장의 유족에게는 매달 89만5000원의 연금과 2억3100여만원의 보상금이 주어질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윤 병장의 사인과 관련, 합참은 후폭풍으로 인한 쇼크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합참 관계자는 “검시결과 파편에 의한 외상이나 과다출혈보다는 폭발로 발생한 공기압박이 원인으로 보인다.”면서 “옆구리와 둔부에 파편상이 있지만 출혈이 적어 직접사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현장통제로 시신확인 늦어져 윤 병장은 또 당초 알려진 것처럼 병원 후송 뒤 숨진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즉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신확인이 늦어진 것과 관련, 합참 관계자는 “현장과 다산부대의 거리가 3㎞나 되고, 사건 직후 미군 경계병들이 차량과 인원의 현장접근을 철저히 통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철군일정 앞당겨질까 국방부는 윤 병장의 희생으로 해외파병부대에 대한 조기철군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고 대책을 고민중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파병에 대한 여론이 호전되던 상황이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퇴직 교원 2352명 훈·포장

    정부는 이달 말 퇴직하는 교원 가운데 2352명에게 훈·포장 및 표창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과 심윤종 전 성균관대 총장 등 6명이 청조근정훈장을 받는다.또 여성무 고서초등학교 교장 등 742명에게 황조근정훈장을, 김재청 경복고 교사 등 578명에게 홍조근정훈장, 신의자 용인중 교사 등 422명에게 녹조근정훈장, 신중식 국민대 교수 등 276명에게 옥조근정훈장, 김서태 한국맹학교 교사 등 123명에게 근정포장을 각각 수여한다.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독립유공 59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3·1절을 맞아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이언일·김문순·김정락 선생 등 59명에게 건국 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을 수여한다. 보훈처는 300여건의 독립유공포상 신청에 대해 전문사료발굴분석단에 의뢰해 공적을 확인한 뒤 유공자서혼 공적심사위의 심사를 거쳤다고 밝혔다. 이언일 선생은 1919년 독립군조직인 대한국민회 서부지방회 경호부원으로 활동하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일본군에 의해 피살됐다. 김문순·김정락 선생도 같은 시기 지린성 등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다 순국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 초대석] 진실·화해위원장 송기인 신부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 초대석] 진실·화해위원장 송기인 신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긴급조치 유죄판결 판사 명단 공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위원장 송기인 신부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주목 받았던 인물. 송 신부를 20일 서울 필동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실에서 만났다. 성직자라기보다는 강직한 학자 같은 인상. 만나자마자 “내가 노 대통령보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인데…”라며 언론에 대한 경계심부터 내비쳤지만,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추진방법 등에 대해선 반대와 국민설득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분명히 했다. ▶긴급조치 조사 보고서가 정쟁거리가 돼버렸는데요. “섭섭한 부분입니다.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해소해 나가자는 뜻이었어요. 우리는 정리만 했지 새로 만든 것은 없습니다. 법관 이름이 안 들어간다면 누가 납득하겠습니까. 법원, 특히 정당 쪽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명단 유출 때문에 다른 중요한 내용이 묻혀 버린 것도 아쉬워요. 예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이나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 등은 언론이 상세히 다뤄줄 만한 사건이었는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5년 후에 보자고 했던 것은 거리를 두겠다는 뜻으로 읽혔는데 위원장직을 맡으셨습니다. 지난 1년을 평가하신다면. “거리를 두겠다는 원칙은 변함 없어요. 위원장직 맡은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거절해 놓고 유럽엘 갔다와 보니 발표가 나 있었어요. 한 인터뷰에서 과거사 정리는 꼭 필요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게 씨가 된 겁니다. 맡고 보니 문제가 많아요. 작년 10월에는 두 차례나 뭇매를 맞았어요. 접수만 하고 왜 조사 안 하냐, 왜 이리 진도가 느리냐며 유족들이 농성을 하길래 나도 같이 농성하자고 했죠. 진실규명 신청을 해온 1만 845건 중 2836건(26.9%)에 조사가 착수돼 5건이 끝났어요. 할 일은 많고 어려운데 직원은 192명뿐이에요. 조사원은 그중 절반이니 일이 느릴 수밖에 없어요. ▶6년 한시 조직인데, 선별해 조사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부일장학회 건 등 재산 관련 사건까지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어느 사건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과거사 문제는 누가 관련됐든 이번에 꼭 매듭짓고 가야 한다는 게 국민들의 공통적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 만들 때도 야당이 더 찬성한 것 아닙니까. 다만 현재 인원으로는 13년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130∼140명만 더 있으면 될 텐데 정부와 국회에서 도와줘야 합니다.” 송 신부는 노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가는 길에 가진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당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발언을 실마리로 하여 정치적인 화제들을 꺼내 보았다. “여러 기사가 나왔나 본데, 사실 대통령에게 딱 두 가지 얘기를 했어요. 첫째, 돈을 모으지 마라. 전직 대통령들을 예로 들면서 당부했더니 ‘저를 모릅니까.’ 해요. 둘째, 개혁은 끝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두 가지 모두 섭섭한 문제가 없습니다. 적어도 내 부탁은 잘 이행하고 있어요.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함량 부족이죠. 생각보다 모자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려고 애쓰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4년에 대해 평가한다면. 실패라는 평가가 많은데요. “단연 성공이지요. 지난 4년간의 변화는 40년의 변화와 맞먹는 것입니다.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정치자금이 없어졌습니다. 이건 일본, 미국도 못하고 있는 일이에요. 정경유착이 끊어졌습니다. 아무리 책임이 많다지만 지금 정부 책임자들은 역사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청렴합니다. 그 점은 국민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낮은 지지율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여권은 대통령 후보도 못내고 있는 상황인데요. “경제가 파탄됐다고 하는데 수긍이 잘 안갑니다. 솔직히 경제에는 문외한이라 내놓고 말할 처지가 못됩니다만. 지지율에 대해서는 걱정마라, 당신이 책임질 일 아니다, 정권 놓치는 것 당연하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한 정권만 계속 집권하면 되겠습니까. 바뀌어야 혁신이 되죠.” ▶그러나 정권의 실패를 민주세력의 위기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잖아도 누가 찾아와 민주 정착이 덜 된 상태에서 보수에게 정권이 넘어가면 그동안 고생한 게 도루묵이 된다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러나 이런 말은 민주화운동 자체를 희화화하는 것입니다. 민주화 안 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는데 납득이 안 갑니다. 판결문에 나온 판사 이름 밝혔다고 말들이 많은데, 긴급조치 시대 땐 어땠습니까. 맘에 안 드는 말 한마디 했다고 3년,1년 반씩 징역 때렸습니다. 이걸 결국 민주화운동이 해결한 겁니다.” 정권을 재창출할 방법이라도 있느냐고 다그쳐 묻자 ‘희망사항’이 그렇다며 ‘지난번에도 봤지 않느냐.’고 2002년을 회상했다. 그해 봄 송 신부는 노 대통령과 여름 티베트 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 얘기가 나오더니 바람몰이가 시작됐다. 광주 이변에다가 6월 월드컵 축구 4강 진출, 부산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획득,12월 대통령 당선 등 낭보가 이어졌다. 그해가 칠십 평생에 가장 즐거운 해였다는 송 신부는 “우리 국민들이 그런 저력을 갖고 있다.”며 장래에 대한 낙관론을 피력했다. ▶그럼 정권 재창출에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런 것에 신경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는 일 열심히 해서 임무 끝내고 후임자가 잘해 주길 바라면 된다고 봅니다. 아직 개혁과제 할 일이 많습니다. 교육, 법원, 기업 등 현재 상태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어요. 특히 사학법에 대한 국회의 태도는 맘에 안 듭니다. 나도 사학 이사 해봤지만, 재단에 재산 출연을 했으면 공익을 위해 일해야지요.” ▶개헌 제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기가 어떻다 하는데, 개헌은 야당이 주장했던 것 아닌가요. 반대는 어거지를 위한 어거지지요. 야당이 다음 집권에 자신 있다면, 지금 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노 대통령 취임 때 언론을 포용할 것도 조언하셨습니다. “요즘 언론은 국가를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론을 위한 언론, 회사와 그룹만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공익과는 담을 쌓고 자기 주장만 관철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걸 감싸지 못한 정권도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민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인내심을 갖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우리 경제가 먹고살 거리를 걱정할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책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도 많겠지만 삶의 자세를 어떻게 가지느냐, 생각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너무 경쟁, 기술만 강조했지 철학이 부재했던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할 말은 하면서도, 정권에 대해선 애정이 여전했다. yshin@seoul.co.kr ■ 송기인 그는… 1938년 부산 출생(만 69세). 가톨릭대 신학과를 나와 1972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군사독재 시절 부산지역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노무현 대통령이 변론을 맡으면서 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1988년 13대 총선 때 노 대통령의 정계 진출을 끌어냈고, 대통령을 질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사이다. 교회사를 전공해 부산교회사연구소장직을 맡고 있고,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를 맡을 정도로 과거사 청산에 관심이 크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동아대 석좌교수. 요산 김정한 선생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생가와 문학관을 완공하는 등 은퇴 후엔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나 음식 쓰레기 안 남기기 운동 같은 시민운동에 참여할 생각이다.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 나치협력 佛 파퐁 사망후에도 논란

    |파리 이종수특파원|‘살아서 프랑스 국민을 속이더니 죽어서는 논란의 대상’ 지난 17일(현지시간) 프랑스 나치협력자 모리스 파퐁(96)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최고위급 나치 협력자’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2차대전후 나치협력 경력을 감쪽같이 속이고 레지스탕스로 과거를 ‘세탁’한 뒤 파리 경찰청장, 예산장관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최고 영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사기극은 1981년 드러났다. 그가 1942∼44년 보르도지역의 치안책임자로서 유대인 1690명을 나치 수용소로 이송하는 데 관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희생자 유족의 고발로 1983년 기소된 그는 범행을 부인했다. 그러나 한 민간단체의 끈질긴 추적끝에 그가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도록 명령한 문서에 서명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98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항소심 전날 스위스로 도주했다가 체포되면서 항소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이후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3차례나 관대한 처분을 요청한 뒤 2002년 9월 석방됐다. 그런 그가 죽어서도 프랑스를 논란에 휩싸이게 하고 있다.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그의 안장과 관련, 변호사 프랑시스 뷔유맹은 18일 “생전에 받은 레종 도뇌르 3등장 등 생전에 받은 훈장을 함께 매장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vielee@seoul.co.kr
  • 노대통령, 스페인서 최고훈장

    스페인을 이틀째 국빈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12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숙소인 영빈관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명예위원장의 접견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사마란치 명예위원장이 건강상 이유로 행사를 소화할 수 없다고 밝혀옴에 따라 일정이 취소됐다고 청와대측이 밝혔다. 노 대통령은 당초 사마란치 명예위원장을 만나 오는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협조를 당부하는 등 양국의 스포츠 외교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청와대 측은 “사만란치 명예위원장이 87세의 고령인 데다 건강상의 이유를 들었다.”며 접견 취소 배경을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스페인 정부의 공식 환영식에 이어 후안 카를로스 국왕 내외 주최 오찬에 참석했다. 오찬에 앞서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는 카를로스 국왕으로부터 스페인 최고훈장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또 마드리드 시내에서 열리는 한국상품전도 시찰했다. 노 대통령은 13일 오전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다.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극단 ‘학전’ 김민기 대표 獨문화원 ‘괴테메달’ 수상

    극단 학전의 김민기 대표가 독일문화원이 수여하는 ‘괴테 메달’의 2007년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주한독일문화원은 1일 “김씨가 연극인, 작곡가, 작가로 활동하면서 한국과 독일간 연극 교류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전했다. 김씨는 독일 그립스극장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1994년부터 13년째 공연하고 있다. 1954년 제정된 괴테 메달은 독일과의 문화교류에 공을 세운 세계적인 예술가나 학자에게 독일문화원이 수여하는 훈장. 올해엔 김 대표와 함께 베를린 도이치 국립오페라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총감독인 다니엘 바렌보임, 작가 겸 번역가인 데셰 탄도리 등 3명이 메달을 받는다. 종전 한국인 수상자는 중앙국립극장장을 역임한 연극인 고 서항석(1970년), 작곡가 고 윤이상(독일·1995년),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미국·1997년) 등이 있다. 시상식은 괴테의 서거일인 3월22일 독일 바이마르에서 열린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그동안 한양 인왕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중인들의 이야기를 몇차례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관청의 아전들이 많았지만, 역관이나 의원들도 있었고, 서당 훈장도 있었으며,인쇄전문가도 있었다. 조선시대 신지식인 이라고 평가되는 중인은 과연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본다. ●중인의 직업은 수십가지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지으면서,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 우리나라 백성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부류를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았다. 벼슬하지 못한 선비는 농·공·상(農工商) 가운데 한 직업을 택해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혹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하여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그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직업은 네가지가 아니라 수십가지였다. 이 책의 총론에서 그 예를 들었다. “종실(宗室)과 사대부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집안이 되고, 사대부보다 못한 계층은 시골의 품관(品官)·중정(中正)·공조(功曹) 따위가 되었다. 이보다 못한 계층은 사서(士庶) 및 장교·역관·산원(算員)·의관과 방외의 한산인(閑散人)이 되었다. 더 못한 계층은 아전·군호(軍戶)·양만 따위가 되었으며, 이보다 더 못한 계층은 공사천(公私賤) 노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노비에서 지방 아전까지가 하인(下人) 한 계층이고, 서얼과 잡색(雜色)이 중인 한 계층이며, 품관과 사대부를 양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안의 흥망성쇠에 따라 “사대부가 혹 신분이 낮아져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이 오래 되면서 혹 신분이 높아져 차츰 사대부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인은 전문직업인 이중환이 말한 중인은 서얼과 장교·역관·산원·의관 등의 전문직업인이다. 서얼은 물론 양반이지만 진출에 제한받기 때문에 저절로 중인과 한 부류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위항문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정조시대였는데, 정조(正祖)는 중인과 시정배(市井輩)를 이렇게 구분하였다. “중인에는 편교(校)·계사(計士)·의원·역관·일관(日官)·율관(律官)·창재(唱才)·상기(賞技)·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녹사(錄事)의 칭호가 있다. 시정(市井)에는 액속(掖屬)·조리(曹吏)·전민(廛民)의 이름이 있다. 이것이 중인과 시정의 명분이다. 이들 밖에도 하천(下賤)의 복사역역자(服事力役者)들이 수만이나 되니, 군예(軍隸)·노복(奴僕)·공(工)·상(商)·용고(傭雇)같이 미천한 자들도 또한 낫고 못한 차이가 있다.” 정조가 말한 중인들의 직업을 요즘으로 치자면 장교, 공인회계사, 의사, 외교관 겸 동시통역사, 천문학자, 변호사와 법관, 서예가, 화가, 공무원 등이다. 정조는 중인 외에 시정(市井)과 하천(下賤)을 구분했는데, 이 세가지 계층을 아울러 당시에는 위항인(委巷人)이라고 했다.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인데, 넓은 의미의 중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숙영이 지은 서문에 “유희경은 본래 위항인이다.”고 했는데, 본래는 천한 종이었다.‘화곡집’ 서문에는 “아깝게도 황군은 위항인이다.”라고 했는데, 황택후는 금위영 서리였다.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만이 아니라, 훨씬 낮은 서리나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 바로 위항인이다. 위항인은 글자 그대로 위항(委巷)에 사는 사람이다. 위(委)는 곡(曲)이고, 항(巷)은 ‘이중도(里中道)’이다. 즉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 바로 위항이고,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위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로 내려가면서 양반보다 부유한 중인들이 많아졌으므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열가지 복을 누린 역관 조수삼 송석원시사 동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호는 추재(秋齋)로 한양 조씨이다. 그의 후배 조희룡은 그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는 풍채가 아름다워 신선의 기골이 있었다. 문장력이 넓고도 깊었는데, 시에 가장 뛰어났다.”는 칭찬으로 시작했다. 사대부의 풍채와 문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이 화원이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직업적인 역관이 아니었는데,28세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처음 중국에 따라갔다고 한다. “길에서 강남 사람을 만났는데, 같은 수레를 타고 가면서 중국말을 다 배웠다. 그 뒤론 북경 사람과 말할 때에도 필담(筆談)과 통역의 힘을 빌지 않았다.” 역관을 선택한 중인들은 사역원(司譯院)에서 몇년 동안 그 나라 말을 배웠는데, 그는 북경까지 가는 길에서 중국어를 다 배운 것이다. 여섯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뒤엔 역관의 신분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서울의 모습이 바뀌자, 전에는 듣고 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조수삼은 그러한 이야기를 71편 골라서 ‘기이(紀異)’라는 시를 쓰고 그 앞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군상의 소묘이면서도 사회변화를 보여준다. “내 나무(吾柴)는 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그는 (나무를 팔면서) ‘나무 사시오.’라 말하지 않고,‘내 나무’라고만 말하였다. 심하게 바람 불거나 눈 내리는 추운 날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내 나무’라고) 외치다가, 나무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 틈이 나면 길가에 앉아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었는데, 바로 고본 경서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위에도 열두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쪽 거리 북쪽 거리에서 ‘내 나무’라고 외치네. 어리석은 아낙네야 비웃겠지만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다오.” 고본 경서를 읽는 것으로 보아 나무 장사꾼은 양반계층에서 몰락한 지식인인 듯하다. 그래서 차마 다른 장사꾼들처럼 “나무 사시오.”라는 존댓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내 나무”라고 반말을 씀으로써 양반 선비의 마지막 체면을 세웠던 듯하다. ●양반에 60년 뒤진 중인 그러나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어도 쓸 데가 없는 것이 당시 사회였고, 그런데도 끝까지 양반의 알량한 자존심과 경서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에 비하면 조수삼은 행복한 중인이었는데, 조희룡은 그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추재가 지닌 복이 모두 열가지라고 하면서, 남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지녀도 평생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가지란 첫째 풍도(風度), 둘째 시문(詩文), 셋째 공령(功令), 넷째 의학, 다섯째 바둑, 여섯째 서예, 일곱째 기억력, 여덟째 담론, 아홉째 복택, 열째 장수이다.” 8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장수하여 남의 부러움을 샀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공령문인데, 과거시험 때에 쓰는 시나 문장이다. 양반들은 대부분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답안지를 쓰기 위해 공령문을 배웠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면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고, 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문집에 공령시가 실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의 문집에는 공령시가 57편이나 실렸다. 그가 공령시를 잘 지었다고 소문났지만, 자기가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한 것이 아니라 양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연습한 것이다. 그는 61세에 경상도 관찰사 조인영의 서기로 따라갔는데, 실제로는 가정교사이다. 그는 83세에야 진사에 합격했는데, 영의정 조인영이 시를 짓게 하자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를 지었다.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합격자 명부인 방목에 그를 유학(幼學)이라고 표시했으니,83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양반들은 20대 초반에 이미 진사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응시했는데, 그는 60년이나 뒤처졌다. 시의 제목은 “진사시 합격자를 발표한 날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입으로 읊은 시”이다. 조인영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기쁨을 시로 표현해 보라는 주문을 한 것인데,“가까스로” 합격해 난삼을 걸친 기쁨과, 몇백 짐의 책을 외우고도 60년 늦게 합격한 중인의 한을 함께 표현했다. 그나마 영의정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전문직업을 지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면서도 신분적으로는 60년이나 양반에게 뒤진 것이 바로 중인의 한계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빈민의 아버지’ 佛 아베 피에르 신부 선종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행동하는 성자’로 프랑스 최고의 휴머니스트이자 빈민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아베 피에르 신부가 22일 선종했다.94세. 피에르 신부의 선종 소식에 프랑스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50여년 동안 거리의 부랑자와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등 빈민들을 도우며 해마다 발표하는 ‘가장 존경하는 프랑스인’에 8차례나 1위에 오른 인물이다. AFP통신 등 프랑스 언론들은 북서부 루앙 외곽에서 말년을 보내던 피에르 신부가 폐렴이 심해져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타계했다고 밝혔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날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자, 양심, 선(善)의 화신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은 “피에르 신부가 없는 프랑스는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며 국장(國葬)으로 예우하자고 촉구했다. 반세기 동안 사랑과 봉사에 헌신해 온 피에르 신부의 활동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때는 지난 1954년 매서운 겨울 밤. 라디오에 나와 파리의 거리에서 숨진 한 여성의 죽음에 대해 호소하면서부터다. 그는 “친구들이여, 도와주세요. 한 여성이 오늘 새벽 3시에 얼어 숨졌습니다. 전날 받은 퇴거 통지서를 손에 든 채 숨을 거뒀습니다. 오늘 밤까지, 늦어도 내일까지는 담요 5000장과 대형 텐트 300장, 조리기구 200개가 필요합니다.”고 호소했다. 1912년 8월 5일 남동부 리옹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앙리 그루에스란 이름으로 태어난 피에르 신부는 2차 세계대전 때 반(反) 나치 지하 저항 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프랑스의 전시 지도자 샤를 드골의 형제 한 사람도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독일인에게 체포된 뒤 탈출, 알제리로 피신한 그는 전후 귀국, 교외의 낡은 건물을 수리해 노숙자들을 위한 숙소로 만들었다.1949년에 탄생한 노숙자 자립 시설 엠마우스 공동체가 그것이다. 엠마우스는 현재 50여개국에 회원과 시설들을 가진 국제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 최고 영예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노벨 평화상 후보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저서로는 ‘단순한 기쁨’,‘피에르 신부의 고백’,‘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등이 있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깔깔깔]

    ●돈이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 재산을 물려받기로 돼있는 사오정이 그 부를 함께 누릴 여자가 필요했다. 술집에 간 사오정은 예쁜 여자를 보고 말했다. “나는 200억원을 상속받을 예정인데 그 돈을 함께 쓸 상대를 찾고 있어요.” 그 여자는 사오정과 함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튿날 그녀는 사오정의 계모가 돼버렸다.●웃음을 주는 사람과 수상소감 사오정이 온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게 되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기자들이 사오정에게 물었다. “훈장을 수상하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다 사오정이 대답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 [카메라 탐방] 22일 새 1만원권 발행 앞둔 조폐창 24시

    [카메라 탐방] 22일 새 1만원권 발행 앞둔 조폐창 24시

    오는 22일 24년 만에 1만원과 1000원권 지폐를 새롭게 선보일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돈 만드는 공장’ 경북 경산시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舊 경산조폐창)를 찾았다. 높은 담장과 망루, 건물 안팎에 설치된 수백대의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직원들도 보안직원의 입회 하에 작업복으로 갈아입어야 근무를 할 수 있다. 기자 역시 출입을 위한 보안카드를 수령한 뒤 지문인식 등의 보안검색과정을 통과했다. 지폐 디자인실 등 최고의 보안시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홍채인식 과정까지 거쳐야 한다. 외부인에게는 보안서약서를 작성토록 하고 안내를 맡은 직원과 보안요원이 철통같이 감시를 하며 일일이 취재과정까지 기록한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지폐 인쇄현장에는 공정별로 최첨단 시설의 육중한 기계가 24시간 쉼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충남 부여에 위치한 제지본부에서 들여온 100% 면(綿)으로 된 화폐 원지가 완성된 지폐가 되기까지는 10여개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공정마다 인쇄의 안정화를 위한 숙성과정, 계수작업, 불량검사를 거치기 때문에 총 45일 정도 걸린다. 새 지폐는 위·변조방지를 위해 20여가지 기술이 사용되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홀로그램과 스크린인쇄이다.1만원권에 채택된 홀로그램은 우리나라 지도, 태극 및 액면숫자,4궤 등 3종류의 무늬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뒷면에 채택된 스크린인쇄는 액면숫자가 각도에 따라 녹색과 황금색으로 보이도록 한다. 이러한 우수한 지폐제작 기술력을 바탕으로 화폐생산처에서는 수표 및 우표, 각종 상품권, 채권, 여권, 증지 등 돈만큼 중요한 상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주화뿐 아니라 세계 10여개국에 주화를 수출하고 있는 주화생산처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무궁화대훈장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정부에서 수여하는 각종 훈·포장과 표창, 기념주화, 기념메달 등을 생산한다. 나아가 조폐공사는 ‘문화재 재현실’을 2년 전에 발족하여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재를 자문단의 고증을 거쳐 전통기법으로 재현하고 있다. 현재 고구려 신라 백제의 금속공예품과 별전 등을 생산하여 상품화하고 있다. “돈공장에서 돈은 단지 소중한 제품이며 새돈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평생의 영광으로 여길 수상자의 마음으로 훈·포장을 만든다.”는 직원들의 마음가짐이 오늘날 세계적인 화폐기술력의 바탕이 되었다. 사진 글 경산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랭글 美 하원 세출위원장 수교훈장 광화장 받아

    |워싱턴 이도운특파원| 찰스 랭글 미 하원 세출위원장이 13일(현지시간) 뉴욕 퀸스 칼리지 콜든센터에서 열린 ‘2007년 미주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우리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랭글 의원은 한국전 개전 초기 미 2사단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1977년 같은 당 소속인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강력히 반대한 미 하원 내 대표적인 친한파 의원이다. 그는 “1950년 평양 북쪽지역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면서 “몸바쳐 싸워 지킨 한국이 이룬 민주주의의 발전상이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북한의 핵 문제가 걱정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dawn@seoul.co.kr
  • [업계소식-CF] 하이마트 겨울 CF ‘컴퓨터’편

    [업계소식-CF] 하이마트 겨울 CF ‘컴퓨터’편

    하이마트의 TV CF ‘컴퓨터´편이 눈길을 끈다. 오래된 컴퓨터 때문에 숙제를 못해 훈장에게 꾸중 듣는 정 도령에게 현 낭자와 학동들이 하이마트에서 최신형 컴퓨터로 바꾸라고 조언하는 내용. CM송은 개그콘서트 ‘마빡이´의 주제가를 사용했다. 훈장 역할은 하이마트 선종구 대표이사가 맡았다. 선 대표는 훈장의 모습을 완벽히 소화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 [어린이 책꽂이]

    ●신화가 숨겨진 나무들(김숙분 글, 송태원 그림, 가문비어린이 펴냄) 하늘나라의 왕자 환웅은 태백산에서 가장 우람한 박달나무에 내려와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우리의 시조인 단군왕검을 낳는다. 전쟁의 신 오딘은 자신의 눈을 팔아 지혜를 얻고 물푸레나무에 살면서 신과 인간들에게 지혜를 나눠 주고, 신들의 왕 제우스는 참나무에서 살며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한다. 마왕과 발키리는 오리나무에 살면서 사람들을 악한 길에 빠뜨리고 괴롭히다가 결국 오리나무를 떠나 허공을 떠돌게 된다. 나무와 관련된 세계의 신화를 소개.8000원. ●일년은 열두 달(엘사 베스코브 글·그림, 김상열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우리가 정월대보름, 단오, 추석 등 명절을 쇠고 풍속을 따르듯, 스웨덴에도 여러 가지 풍속이 있다. 국민의 대부분이 스웨덴 국교회 교도인 스웨덴 사람들은 다양한 기독교 절기들을 따른다. 사순절(부활제 전 40일간) 날 깃털을 단 나뭇가지로 사람들을 때리거나 ‘셈라빵’을 먹고, 오월제 때는 꽃으로 장식한 나무기둥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스웨덴 최고의 어린이책 상인 ‘닐스 홀게르손’ 훈장을 받은 저자가 지은 서정성 넘치는 그림책.8000원. ●이집트의 왕비 네페르타리(로베르타 안젤레티 글·그림, 김정윤 옮김, 애플트리 테일스 펴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교한 것으로 알려진 이집트 문명은 파라오 시대인 기원전 3000년부터 페르시아에 의해 몰락하는 기원전 525년 사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다. 이 그림책은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가 살던 고대 이집트 시대를 다룬다.‘여왕의 계곡’으로 떠난 주인공을 따라가면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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