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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한국화, 특히 수묵화가 오랫동안 침체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수묵을 연구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대학에서는 동양화나 한국화 전공 학과가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그래도 나는 우리 고유의 수묵담채화 전통과 기법을 후세에 남기고 싶습니다.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길이 57m의 초대작을 그렸다는 오산 홍성모(58) 화백의 화실을 지난 12일 찾았다. 흰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었고, 빨간색 셔츠와 검정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나왔다. 악수하며 맞잡은 손에서 작은 굳은살들이 느껴졌다.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그의 화실로 들어서자 안쪽 벽에 걸린 가로 2.75m, 세로 1.7m 크기의 흑백 그림이 반겼다. 무슨 그림인지 묻자 “사자 바위”라고 짧게 답한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콧날, 수북한 갈기가 엿보이는 게 앞을 내려보는 사자처럼 보였다. 홍 화백은 “적벽강 사자 바위는 채석강과 함께 부안의 명물”이라고 설명해 줬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이다. 그가 작품 구상을 설명했다. “사자니깐 전반적으로 좀더 거칠게 사납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을 가리키며) 빛을 이쪽으로 넣고···.” 이 그림은 부안군의회 포토존에 걸릴 예정이다. 화실의 다른 벽에는 용 비늘 같은 껍질의 소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 마을, 살구꽃이 흐드러진 동네 어귀의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길이 57.4m짜리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던데. -계화도에서 줄포만생태공원까지 변산반도 83㎞의 해안 사계절을 담았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길이가 57.4m, 높이가 1.2m입니다. 가로 2.05m짜리 작품 28개를 그려 이었지요. 시작한 지 20개월 만인 지난 6월에 완성했습니다. 그사이 쓰러져 병원에 두 번 실려 갔죠. 지난 7월 부안군에 이 그림 ‘해원부안사계전도’를 기증했습니다. 군청 민원실 1층과 2층 사이 난간 벽에 길게 걸려 있습니다.→이런 초대형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3년 여름에 위도로 하얀 상사화 스케치를 하러 갔었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변산반도를 바라봤는데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연작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 쪽인 채석강을 보면 그야말로 신이 혼자 즐기려고 만든 정원같이 빼어난 절경입니다. 말 그대로 ‘해원’(海苑·바다의 정원)이지요. 이를 그려 기증하겠다고 제안하니 부안군에서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부안군이 많이 지원해 줬겠다. -부안군이 곰소항 쪽에 작업실을 마련해 줬습니다. 저는 월~목요일 서울에서 활동하다 금요일 부안에 내려가 일요일까지 작업했습니다. 주말마다 266㎞를 달려 내려갔지요. 해안을 스케치하러 낚싯배를 15번 빌려 타고 나갔지요. 낚싯배 한 번 빌리는 데 30만원, 그건 제 지갑에서 나갔습니다. 겨울엔 줄포만 쪽엔 수심이 얇아 배가 못 들어가니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 태우는 경운기와 트랙터를 얻어 타고 갔지요. 잠은 처음엔 여관방에서 자다가 비용 문제로 찜질방에서 자고···. →작업할 때 가장 큰 애로는. -먹는 것이었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깜빡 저녁 시간을 놓쳐 밤 8~9시쯤 나가면 식당들이 문을 닫아 먹을 데가 없어요. 또 간장게장이니, 무슨 찌개를 한 그릇 먹으려 해도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 이상만 팔더라고요. 그래서 2인분을 시켜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포장해 와서 다음날 먹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도시락을 두 끼 정도 싸 다니기도 했고···. 표구 값만 1000만원 넘게 들었는데, 모두 제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남다르게 깊은 고향 사랑 아닌가. -고교 졸업 후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고향이지요. 아름다운 풍광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마음입니다. 나이가 더 들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 작업이 힘들어지기 전에 그림을 남겨 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질 한 번에 산이 솟고, 나무에서 잎이 돋고, 길이 만들어지고, 강이 흘렀다. 그는 작품을 할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케치를 보고 바로 붓질을 하죠. 그러다가 잘못되면 작품을 고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종이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린 화선지 값만 해도 강남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심장병 어린이를 많이 도왔다던데. -제가 심장병으로 대학 4학년 때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때 의사가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요. 동료 학생들이 1000원씩 걷어 모금한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돈이 생기면 단 한 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시켜 주자고 결심한 것이 심장병 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13년 동안 어린이 50명에게 심장병뿐만 아니라 언청이 등의 수술을 해 줬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찾아 입원시켰습니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자랑 같지만 제가 졸업과 동시에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잘나갔죠. 병원비는 그때 작품을 그려 팔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려서 팔고, 후원금 계좌도 만들고, 그렇게 해서 해마다 병원에 2500만원가량을 한꺼번에 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니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후원금도 끊겼습니다. 병원에서는 외상 수술비 갚으라고 독촉도 오고···. 그때 병원 외상이 2억원 남짓 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할 때 와이프 몰래 결혼 반지,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모조리 팔아 병원비를 갚는 데 보탰습니다. 그래도 남은 빚은 병원에서 탕감해 줬습니다. 지금은 심장병 수술을 돕는 단체도 많고, 보험도 적용되고 해서 더는 안 합니다. →그림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요즘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최소 2시간씩은 붓을 잡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바꿨습니다. 동양화 특히 한국화의 맛과 멋, 선의 묘미를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팔이 아파 들지를 못합니다. 한참 풀어 줘야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도, 직업병 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오른손을 다시 만져 봤다. 가운뎃손가락의 마지막 끝 부분이 한쪽으로 뭉턱 들어갔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씨름한 훈장이지요.”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손톱은 다른 손가락과는 달리 먹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강원도 그림을 많이 그렸던데. -IMF 이후 병원 빚을 겨우 갚고 나서,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숨어 살려고 강원 영월에 들어갔습니다. 그전에 80년대부터 영월군 청령포를 처음 접했을 때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암절벽의 산과 계곡이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에 반해 영월의 폐교에 화실을 마련해 거기서 살았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다음 전시회는 언제 여나. -내년에 열한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약간 색다른 전시를 할까 합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정자나 경치, 나무 등에 얽힌 역사와 야사 등도 함께 적어서 그림 아래에 붙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안에 내려가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습니다. 한 100점 정도 전시할 생각인데, 지금 70점 정도 완성했습니다. 글 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홍성모는 누구 - 1961년 전북 부안 출생, 원광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졸업(석사), 개인전 10차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성균관대 겸임교수 역임, 동국대·원광대 강사 역임 ●작품의 대표적 소장처 - 한국은행 청주지점, 외교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천대 길병원, 싱가포르 대사관, 부안군청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9년 세상을 떠난 뒤 일제의 왜곡과 날조 등으로 한국인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반세기가 지나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베델이라는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 수립 뒤 국가 재정비에 정신을 쏟느라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를 챙기지 못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 컸다. 대한민국이 베델을 다시 찾은 건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독립된 정부가 세워진 지 20년이 지난 뒤였다.●베델 며느리가 손주 데리고 한국대사관 찾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학생과 근로자가 중심이 된 사회변혁운동)이 들불처럼 유럽 전역에 번지던 1968년 7월 15일. 영국의 ‘더타임스’ 16면에 조그마한 안내 광고 하나가 실렸다. 확대경을 대지 않으면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1905년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분께 훈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연고자는 런던의 한국대사관으로 연락 바랍니다.” 한국과 영국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대영(大英) 남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베델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 돼서였다. 하루 종일 신문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광고의 존재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작게 게재돼 아무 반향도 없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정말로 그의 후손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영국 최고 권위지 가운데 한 곳에 광고를 내 독립운동가를 찾으려 나름 노력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 나왔다. 신문 광고의 크기가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측은해 보였던 것일까. 더타임스가 이 광고를 근거로 이튿날 ‘한국이 한 영국인에게 감사를 표하려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쓴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대통령 훈장과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과거 한국의 국민 영웅이던 영국인 후손을 기다린다. 1905년 신문을 창간해 일본의 한국 지배에 저항하다가 1907~1909년 사이에 추방당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더타임스 기사는 오류가 많았다. 그때까지 우리가 아는 베델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자 후손에게서 연락이 왔다. 베델의 며느리인 도러시 메리 베델(당시 52세·2002년 작고) 여사가 딸 수전 제인(당시 12세)과 아들 토머스 오언(당시 9세)을 데리고 한국대사관을 찾은 것이다. 베델 사후 반세기가 넘어 그의 가족과 한국이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베델, 전 재산 한국에 쏟아 가족들 곤궁한 삶 도러시의 입을 통해 들은 베델 가족의 이야기는 한 편의 가슴 아픈 소설 같았다.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남편 사망 뒤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데리고 결혼 전 살았던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베델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 대부분을 대한매일신보 발간에 쏟아부어 영국에서의 삶은 힘들고 곤궁했다. 도러시가 한국대사관을 찾아왔을 때도 이들은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이웃들은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한국을 도운 베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 여사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한국 정부가 베델의 연고자를 찾았을 때는 그와 조선에 함께 살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1964년 아들 허버트가 63세에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베델의 부인 메리 여사도 92세로 숨을 거뒀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아버지(허버트)가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내가 10살도 되기 전에 떠났다. 할머니(메리 여사) 역시 말년에 치매 증세를 보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재 베델의 후손들은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꾸준히 한국을 방문해 그를 기린다. 베델이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달라”고 당부한 신보는 어떻게 됐을까. 베델의 비서였던 영국인 알프레드 매넘이 신보사의 2대 사장이 됐지만 1910년 영국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에 신보사를 팔고 떠났다. 이후 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조선인들의 신뢰도 사라졌다. 매일신보는 해방 뒤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가 사옥과 시설을 파괴해 희귀 자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베델 다시 살려내는 데 정진석 교수 역할 커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베델의 발자취를 찾아내 ‘영원한 한국인’으로 부활시킨 이는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였다. 1976년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영인 작업에 참여하면서 그의 삶에 매료된 정 교수는 영국 런던정경대(LSE)에 수학하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베델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냈다. 베델이 태어난 영국 브리스톨과 1888~1904년 무역업을 했던 일본 고베 등을 돌며 베델 기록 대부분을 바로잡았다. 지금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해 배우는 베델의 생애는 그가 일생을 바쳐 찾아낸 것들이다. 서울신문 역시 ‘조선을 사랑한 英 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기획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우선 언론학계의 주요 과제였던 베델의 영국 브리스톨 생가를 확인했다. 그간 베델 생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관훈클럽 창립자인 최병우(1924~1958)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수차례 시도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정 교수는 베델의 출생지 주소(Egerton villa, Egerton Road, Horfield)를 구했지만 지금의 영국 주소체계와 달라 생가를 특정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서울신문이 찾아낸 베델 생가(현주소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를 검증한 뒤 현충시설로 지정해 역사적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베델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베델 관련 자료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서울신문은 베델의 가족관계 일부를 새로 발굴해 그가 왜 일본을 통해 조선에 오게 됐는지를 좀더 명확히 밝혀냈다. 해외 기사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해 베델이 통신원으로 조선에 와서 쓴 첫 번째 기사(전통놀이 석전)도 소개했다. 이밖에도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10년대 미국 작가의 역사소설 두 편(황제 납치 프로젝트·황제의 옥새)을 찾아냈다. 베델의 열정에 반해 러시아 기밀문서 등을 찾아내 독학으로 연구하는 외국인을 만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베델의 생애를 소개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해외 네티즌도 확인했다. 베델의 발자취 찾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길이 57.4m 초대작 남긴 홍성모 화백이 말하는 수묵화“한국화 특히 수묵화가 오랫동안 침체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저를 비롯한 수묵을 연구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그림에 발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동양화나 한국화 전공 학과가 없어지는 추세지요. 그래도 나는 우리 고유의 수묵담채화 전통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요.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길이 57m의 초대작을 그렸다는 소식에 동양화가 오산(悟山) 홍성모(58) 화백을 지난 12일 찾아갔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그의 화실이 찾아가는 길에서 그를 만났다. 화실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한 듯 홍 화백이 마중 나온 것이다. 흰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묵었고, 빨간색 셔츠와 검정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나왔다. 길거리에서 악수를 했다. 그의 손바닥은 작은 굳은 살이 박혀 거칠거칠했다. 그를 따라 화실에 들어서자 안쪽 벽에 걸린 가로 2m75cm, 세로 170cm 크기의 흑백 그림이 반겼다. ‘무슨 그림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처음 만난 기자가 다소 서먹한지 “사자 바위”라고 짧게 답한다.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다소 어색한 듯도 했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콧날, 수북한 갈기··· 앞을 내려보는 사자처럼 보였다. 홍 화백은 “적벽강 사자 바위는 채석강과 함께 부안의 명물”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이다. 어색함이 다소 풀린 듯 작품 구상을 설명했다. “사자니깐 전반적으로 좀 더 거칠게 사납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을 가르키며) 빛을 이쪽으로 넣고···.” 이렇게 큰 그림을 어디에 전시할 것이냐고 묻자 “부안군의회 포토존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화실의 다른 벽에는 용 비늘 같은 껍질의 소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 마을, 살구 꽃이 흐드러진 동네 어귀의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눈이 호사를 누렸다.- 길이 57.4m짜리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던데.☞ 변산반도의 4계절을 그렸습니다. 계화도에서 줄포만생태공원까지 83km의 해안 4계절을 20개월 만에 완성했지요. 지난 7월에 부안군에 이 그림 ‘해원부안사계전도’를 기증했습니다. 군청 민원실 1층과 2층 사이 난간 벽에 길게 전시돼 있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길이가 57.4m, 높이가 120cm입니다. 가로 2m5cm짜리 작품 28개를 그려 이었지요. 이 작품을 하다가 과로로 화실에서 쓰러져 병원에 두 번이나 실려갔습니다. - 이런 초대형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3년 여름에 위도로 하얀 상사화 스케치를 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돌아오면서 선상에서 본 변산반도가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연작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 쪽인 채석강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신이 혼자 즐기려고 만든 정원같이 아름다운 절경입니다. 말 그대로 ‘해원(海苑·바다의 정원)’이랍니다. 이를 그려 기증하겠다고 제안하니 부안군에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 부안군이 많이 지원해 줬겠다.☞ 부안군이 곰소항 쪽에 작업실을 마련해줬습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금요일 부안에 내려가 일요일까지 작업했습니다. 주말마다 266km를 달려 내려갔지요. 해안을 스케치하러 낚싯배를 15번 빌려 타고 나갔지요. 낚싯배 한번 빌리는데 30만원, 제 지갑에서 나갔습니다. 겨울엔 줄포만 쪽엔 수심이 얇아 배가 못 들어가니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 태우는 경운기와 트랙터를 얻어 타고 갔지요. 개펄이어서 발이 빠지니 걸어다니진 못하거든요. 잠은 처음엔 여관방에서 자다가 비용 문제로 찜질방에서 자고···. - 해원부안사계도 작업할 때 가장 큰 애로는.☞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깜빡 저녁 시간을 놓쳐 밤 8~9시쯤 나가면 식당들이 문을 닫아 먹을 데가 없어요. 또 간장게장이니, 무슨 찌개를 한 그릇 먹으려 해도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 이상만 팔더라고요. 그래서 2인분을 시켜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포장해와서 다음날 먹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도시락을 두 끼 정도 싸다니기도 했고···. 표구 값만 1천만원 넘게 들었습니다. 모두 제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 정말 고향 사랑이 남다르게 깊다.☞= 고교 졸업 후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친척들밖에 없지만, 그래도 고향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풍광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마음입니다. 나이가 더 들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 작업이 힘들어지기 전에 그림을 남겨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산반도를 쳐다보고 화폭에 담으면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새록새록 깊어졌습니다. 그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질 한 번에 산이 솟고, 나무에서 입이 돋고, 길이 만들어지고 강이 흘렀다. 그는 작품을 할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케치를 보고 바로 붓질을 하죠. 그러다가 잘못되면 작품을 고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종이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린 화선지 값이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 심장병 어린이를 많이 도왔던데, 계기는.☞ 제가 심장에 구멍이 생기는 질병으로 대학 4학년 때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때 의사가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요. 동료 학생들이 1000원씩 걷어 모금한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돈이 생기면 단 한 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시켜주자고 결심한 것이 심장병 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13년 동안 어린이 50명에게 심장병뿐만 아니라 언청이 등의 수술을 해 줬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찾아 입원시켰습니다. 가천 길병원 이길녀 이사장님이 의료팀을 만들어주었지요. 참, 고마운 분입니다. -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자랑 같지만 제가 졸업과 동시에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잘 나갔죠. 입원비는 그때 작품을 그려 팔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려서 팔고, 후원금 계좌도 만들고, 그렇게 해서 해마다 병원에 2500만원가량을 한꺼번에 수술비로 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니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후원금도 끊겼습니다. 병원에서는 외상 수술비 갚으로고 독촉도 오고···. 그때 병원 외상이 2억원 남짓 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할 때 와이프 몰래 결혼 반지,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모조리 팔아 병원비를 갚는데 보탰습니다. 그래도 남은 빚은 병원에서 탕감해 줬습니다. 이젠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기관도 많고, 의료보험도 되니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 젊은 시절 이름을 날렸군요.☞ 특선하고 나서 대학 졸업 직후 전북 익산에서 활동했는데 건달들 등쌀에 힘들었습니다. 건달들이 저를 납치해 여관방에 감금시켜두고 그림을 그리게 했거든요. 건달들은 제 그림을 강매해서 돈을 챙겼던 거죠. 그때 경찰서장이 건달들에게 저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던 1988년 서울로 도망쳐 왔습니다. 서울에서 한번은 검은 양복 차림의 20대의 깍두기가 제 화실로 찾아와 ‘오산 선생,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오산인데···.’라고 했더니 ‘너 말고, 너희 선생 어딨느냐’고 하더라고요. 서울은 사람도 많고 작가도 많으니 제게 관심이 없어진 거죠. - 그림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요즘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최소 2시간씩은 붓을 잡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바꿨지요. 유화 페인트 냄새에 머리가 아파서 작업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1985년부터 수묵담채화로 전향했습니다. 동양화로 바꾼 지 5개월 만에 한국미술대전에 입선하고 그다음 해에 특선하니깐 신동났다고 했지요. 화선지를 끼고 스케치를 나갔지요. 하지만 동양화 특히 한국화 맛과 멋, 선의 묘미를 깨닫는 데는 1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팔이 아파 들지를 못합니다. 한참 풀어줘야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도, 직업병 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오른손을 다시 만져봤다. 가운뎃손가락의 마지막 끝 부분이 한쪽으로 뭉턱 들어갔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씨름한 훈장이지요.”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손톱은 다른 손가락과는 달리 먹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 강원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IMF 이후 병원 빚을 다 갚고 나서,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숨어 살려고 강원도 영월에 들어갔습니다. 그 전에 80년대부터 영월군 청령포를 처음 접했을 때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암절벽의 산과 계곡이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에 반해 영월의 폐교에 화실을 마련해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영월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지금도 영월에 아는 사람이 고향 부안보다 더 많아요. - 전시회 계획은.☞ 내년에 열한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그림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약간 색다른 전시를 할까 합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정자나 경치, 나무 등에 얽힌 역사와 야사 등도 함께 적어서 그림 아래에 붙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안에 내려가 어른들한테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습니다. 한 100점 정도 전시할 생각인데, 지금 70점 정도 완성했습니다. - 꿈이 무엇인가.☞ 부안의 절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기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지내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기고, 그 작품들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일걸요. 또 와이프랑 전시회를 같이 여는 것입니다(그의 부인 강지우씨는 학교 과후배로, 수채화를 그린다). 그는 서울신문 기자인 점을 의식한 듯 “옛날에 서울신문 1층 갤러리에 자주 갔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개인전도 하고 단체전은 여러 번 했던 인연이 있다”며 “서울신문에 있던 미술관이 없어져 아쉽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홍성모는 누구 - 1961년 전북 부안 출생- 원광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졸업(석사)- 개인전 10차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성균관대 겸임교수 역임- 동국대·원광대 강가 역임 ●작품 대표적 소장처 - 한국은행 청주지점- 외교통상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천 길병원- 싱가포르 대사관- 부안군청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김종필 훈장 추서’ 사후 의결한 정부, 공적조서 비공개 논란

    정부가 김종필(1926~2018) 전 국무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사후 의결하고도 훈장 추서 이유를 적은 ‘공적조서’를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16일 국무조정실이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 등에 따르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6월 25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김 전 총리 측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달했다. 당시 국무조정실은 “이영덕·남덕우 전 총리도 별세 뒤 국무회의 의결 없이 무궁화장을 먼저 추서받고 사후 절차를 밟았다”며 김 전 총리에 대한 ‘선 추서’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한쪽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자 국무총리를 두 차례나 역임한 분이기에 무궁화장을 받아 마땅하다”고 찬성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군사 쿠데타와 유신 체제 옹호 등 대한민국 적폐 체제에 책임이 큰 역사적 범죄자에게 줘선 안 된다”며 반대했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7월 13일 자체 공적심사를 통해 그에게 무궁화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같은 달 31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제33회 국무회의에서 이를 의결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8월 1일 재가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등에 제공된 국무회의 사전·사후 안건 목록에는 ‘영예수여안’(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등)으로만 표기돼 있어 김 전 총리 훈장 추서안의 상정·의결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석태·이은애 청문보고서 채택 불발… 민주 “한국당 정략적 의도 의심”

    이석태·이은애 청문보고서 채택 불발… 민주 “한국당 정략적 의도 의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14일 전체회의를 열어 이석태·이은애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하고자 했으나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해 채택이 불발됐다. 더불어민주당은 후보자 임명에 대한 찬·반 의견을 병기해 보고서를 채택하면 되는데 채택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정략적 의도라고 비판하는 반면, 자유한국당은 이석태 후보자의 정치적 편향성, 이은재 후보자의 위장전입을 들어 보고서 채택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날 법사위는 오전 전체회의를 열어 청문 보고서 채택을 논의하고자 했으나 한국당 소속 위원들이 퇴장하면서 회의가 무산됐다.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인 조응천 의원은 “야당이 (보고서) 채택을 못 하겠다며 먼저 나갔다”며 “여당 간사인 송기헌 의원이 끝까지 남아서 설득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해 우리도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소속 법사위 간사인 김도읍 의원은 이날 한국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이석태 후보자가 정부와 긴밀한 특수 관계를 갖고 있고 정치적 편향성 때문에 보고서를 채택 안 하기로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이석태 후보는 지난 4월 대한민국 최고훈장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을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훈장 수여를 알았다고 했다”며 “이는 법무부가 내부규정을 어겨가면서 민변 출신 인사의 추천을 요구했고 이석태 후보자가 훈장을 받은 것이다. 훈장까지도 농단을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당은 아울러 이은애 후보자의 위장전입이 청와대의 고위공직자 후보자 배제 기준 중 하나라고 재차 강조했다. 앞서 청와대는 전날 “입법부가 추천하거나 사법부에서 지명한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대해서 청와대가 인사검증을 하는 것은 헌법상 권력분립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공직 기준에 맞지 않으면 대통령이 임명장 수여를 안 하면 될 것”이라며 “조금의 틈만 보이면 청와대가 책임 떠넘기는 그런 행태 그만뒀으면 좋겠다”라고 지적했다.반면 송기헌 의원은 “이석태 후보자는 인사 기준상 하자가 될 만한 내용이 없는데 그동안의 활동을 근거로 편향적이라며 (한국당이 보고서 채택을) 못해주겠다고 한다”며 “(후보자의) 소신과 양심 때문에 헌법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헌법재판소라는 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은애 후보자에 대해서는 “위장전입을 배제 기준에 넣은 것은 부동산 투기나 자녀 학군 이동 문제 때문인데 이 후보자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송 의원은 “(이은애 후보자를 지명한) 대법원의 설명을 들어보니 헌법재판관 후보자 추천위원회가 대법원장에게 후보자 7명을 추천했는데 그 중 이은애 후보자가 유일한 여성이었다”며 “대법원장은 헌법재판소에 여성이 1명밖에 없어 여성 비율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은애 후보자를 지명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추천위원회도 이은애 후보자의 위장전입 사실을 알았지만 인사 배제 사유는 아니라고 판단해 후보자 명단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 의원은 “대법원장이 지명한 헌법재판관에 대해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사례는 없다”며 “채택하지 않을 경우 잘못된 선례를 만드는 것이고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청문 보고서 채택이) 계속 이와 유사한 정치적 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송 의원은 한국당의 보고서 채택 거부에 대해 “(청문 보고서 채택이 불발되더라도) 대통령이 (두 후보자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며 “야당의 동의 없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했다며 공격을 할 빌미를 만들려고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헌법에 따르면 헌법재판관 9명 중 대법원장 몫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회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다. 인사청문회법에는 대법원장이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요청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국회는 20일 이내에 인사청문을 마쳐야 하며 이 기간 내에 국회가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송부하지 못하면 대법원장은 10일 이내에 청문 보고서를 송부해줄 것을 다시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추가 기간 내에도 국회가 보고서를 송부하지 못하면 대법원장은 그대로 헌법재판관을 지명하고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이에 이석태·이은애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요청서가 지난 27일에 국회에 제출됐으므로 국회는 일요일인 16일 다음 날인 오는 17일까지 청문보고서를 채택해야 한다. 채택이 불발된다면 대법원장은 국회에 보고서 채택을 다시 요구한 뒤 그래도 채택되지 않으면 국회 동의 없이 지명할 수 있다. 송 의원은 “(인사청문 기한인) 오는 17일까지 한국당 간사와 계속 협의를 할 예정”이라며 “청문보고서가 채택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장사상륙작전, 10대 학도병들 희생 기억해 주세요”

    “장사상륙작전, 10대 학도병들 희생 기억해 주세요”

    인천상륙작전 전날 동해안 교란 혈전 영화로 제작… 김명민·메건 폭스 출연 “팔순을 넘긴 동지들이 30여명 생존해 있어요. 훈장도 보상도 원치 않아요. 그저 죽기 전에 장사상륙작전의 진실을 밝히고 정부 차원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열어 먼저 간 동지들의 한을 풀었으면 좋겠어요.” 6·25 전쟁 때 양동작전인 장사상륙작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3일 만난 류병추(86)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장’은 이같이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사상륙작전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는 68년을 넘긴 오늘날까지 없어요. 훈장도 보상도 바라지 않아요. 오직 구국 일념으로 몸을 던진 10대 학도병들을 국민들이 기억하고, 추모 행사를 정부에서 열었으면 합니다.” 극비로 수립된 작전명 174호 장사상륙작전은 6·25 전쟁 전황을 일거에 바꿔 놓은 인천상륙작전 때 인천과 반대편인 경북 영덕 장사해변에서 적의 눈을 돌리기 위해 펼쳐졌다. 작전에 참가한 이명흠 대위가 지휘한 대원 772명 대부분 학도병이었다. 기초훈련만 받고 계급도, 군번도 없이 작전에 투입됐다. 이들은 상륙 당일인 1950년 9월 14일 태풍으로 수송함 문산호가 좌초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작전을 감행했다. 다음날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것이다. 부대원들은 절반가량인 350여명을 희생시키며 일주일에 걸친 혈투를 벌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류 회장은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에 다니다 6·25를 맞았다. 1950년 8월 24일 학도병으로 지원해 9월 12일까지 19일간 기초훈련만 받고 부산에서 목적지도 모른 채 문산호에 승선, 밤샘 항해 끝에 장사해변에 도착했다. 류 회장은 “지금 참전유격동지회에서 경북도와 영덕군의 지원으로 매년 9월 14일이면 장사해변에서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낸다”면서 “정부 주도로 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 구국의 성지로 만들어 나라사랑 교훈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사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도 나온다. ‘인천상륙작전’ 후속작이다. 태원엔터테인먼트사가 내년 개봉을 목표로 다음달 중순 촬영에 들어간다.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명민과 할리우드 스타 메건 폭스가 출연한다. 글 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전·현직 250명 참석…‘법원의 날’ 지정한 양승태는 불참

    전·현직 250명 참석…‘법원의 날’ 지정한 양승태는 불참

    ‘사법농단’ 질타 시민들 영상으로 시작 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에 무궁화장“사법농단·재판거래 의혹에 충격받았다.” “국민은 큰 게 아니라 상식적인 재판을 바랄 뿐이다.” “만인을 위한 사법부가 돼 달라.”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상영된 ‘국민의 목소리’ 영상은 최근 사법농단 사태를 질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대법원 중앙홀에 설치된 단상 바로 위엔 ‘정의의 여신’ 디케 동상이 배치돼 있고 시민들의 육성이 나오는 스크린 위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라는 홀로그램 문구가 선명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사법부와 유관기관 관계자 250여명은 “정의롭고 투명한 재판을 해야 한다”는 호소에 집중했다.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임기를 시작한 9월 13일을 ‘법원의 날’로 2015년 지정한 당사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박병대·고영한·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 등은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사법농단 사태로 부담을 느꼈을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대법원 바깥에선 참여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으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가 “법원은 수사 방해를 중단하고 관련 판사들을 탄핵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뒤 출범한 사법발전위원회 위원장인 이홍훈 전 대법관과 윤관·최종영·이용훈 전 대법원장 등은 참석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최재형 감사원장, 박상기 법무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 정성진 양형위원장,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김현 대한변협회장, 정용상 한국법학교수회장 등도 기념식을 지켰다. 문재인 대통령은 ‘1세대 인권변호사’인 한승헌 전 감사원장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1976년 긴급조치 위반 사건 때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선고한 고 이영구 판사와 여성인권 신장에 힘쓴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26년 동안 법원 공무원을 지낸 뒤 퇴임 뒤에도 민원 업무를 하는 이홍용 서울중앙지법 민원상담위원에게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사법농단 수사가 진행 중임을 의식해 간소하게 진행된 기념식은 서울법원청사합창단의 합창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당초 대법원은 강당에서 기념식을 열 계획이었으나 대법정 앞인 중앙홀에서 하자는 청와대 측 제안을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국가대표’ 주제가 ‘버터플라이’ 합창 선율이 청사 전체로 퍼지는 효과가 발휘됐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는다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는다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84) 전 감사원장이 사법부 70주년을 맞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는다.대법원은 13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전 감사원장에게 국민훈장 중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준다고 밝혔다. 시국 사건 1호 변호사로도 불리는 한 전 감사원장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 수많은 시국 사건의 변론을 맡는 등 국민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자신 또한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썼다가 구속되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몰려 투옥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참여정부 시절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을 맡는 등 사법 개혁과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 애쓴 공로도 인정받았다. 한 전 감사원장 외에도 고 이영구 판사와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월드피플+] 결혼하는 손녀 소원 들어주고 영면한 전쟁영웅 할아버지

    [월드피플+] 결혼하는 손녀 소원 들어주고 영면한 전쟁영웅 할아버지

    2차 대전 참전용사로 활약했던 90대 할아버지는 손녀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해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뒤에야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선은 죽기 전 손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영면한 브로니슬라브 그롬 카르봅스키(94)의 사연을 소개했다. 지난 달 30일 폴란드 동부 비알리스톡에서 카르봅스키 할아버지의 손녀 조안나의 결혼식이 열렸다. 할아버지는 용맹 훈장으로 장식된 군복을 차려입고,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손에는 손녀 딸 손을 맞잡고 예식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 뒤로는 폴란드 영웅이었던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군인들의 호위가 이어졌고, 하객들은 연약하지만 굳센 할아버지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신부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깊이 숨을 들이마셨으며, 신랑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면서 눈물을 멈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 참전한 할아버지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 정권의 포로가 됐지만 가까스로 탈출해 건국 훈장을 받았다. 조국을 위해 싸우며 살아남은 덕분에 뒤늦게 예쁜 손녀를 얻을 수 있었고, 생을 마감하기 전 손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최근 건강이 나빠졌음을 알고 있었지만 손녀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할아버지. 신랑에게 손녀딸을 넘겨주면 눈시울을 붉혔던 그는 결국 결혼식을 마친 후 불과 이틀 만에 숨을 거두었다. 폴란드 군 당국은 “그는 한 나라의 영웅으로서 마지막 결의를 보여주고 떠났다”면서 할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했고, 이를 접한 사람들은 “신부에게 신의 은총이 있길,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할아버지를 애도했다. 사진=더선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친일 잔재’ 성북 인촌로 이름 바꾼다

    ‘친일 잔재’ 성북 인촌로 이름 바꾼다

    서울 성북구는 도로명 ‘인촌로’ 변경을 추진한다고 4일 밝혔다. 성북구는 “지난해 4월 인촌 김성수에 대한 대법원의 친일행위 인정 판결에 이어 지난 2월 국무회의에서 1962년 인촌이 받은 건국공로훈장을 취소한 데 따른 조치이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등이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자의 부적합한 도로명 변경에 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것”이라고 전했다. 인촌로는 고려대를 운영했던 김성수의 호 인촌(仁村)을 인용한 것으로,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주소체계가 시행되면서 2010년 4월 명명됐다. 지하철 6호선 보문역~고대병원~안암역~고대앞사거리 구간(폭 25m, 길이 약 1.2㎞)으로 종속도로 190개, 건물번호 1527개에 사용된다. 구 관계자는 “인촌 김성수는 중일전쟁 이후 매일신보 등에 일제의 징병·학병을 지지하는 글을 싣는 등 친일행위가 인정돼 정부는 훈장 취소 및 생가와 동상 등 5곳의 현충시설을 해제했다”며 “성북구도 인촌로를 변경, 친일 적폐 청산에 기여하기로 했다”고 했다. 구는 도로명 변경안내문을 공고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 구 관계자는 “지역 주민, 외국인, 사업자 등을 포함한 인촌로 주소사용자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인촌로 변경 타당성을 알리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촌로 변경추진 태스크포스(TF)도 꾸렸다”며 “도로명 부여 세부 기준 검토 과정이 남았지만 우선은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 ‘고려대로’ 등이 대체 도로명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했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성북구 일대에 거주하며 성북구는 항일운동의 핵심지 역할을 했다”며 “단순히 도로명 변경 의미를 넘어 엄혹한 일제치하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김인제 서울시의원, 몽골 울란바토르시 최고의 ‘항가르드’ 훈장 받아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관리위원회 김인제 위원장(더불어민주당,구로4)이 몽골 울란바토르시로부터 양도시의 도시계획 교류 분야에 공헌한 공로로 최고의 훈장인 ‘항가르드 훈장’을 받았다. 훈장 수여식은 지난 31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시청사에서 거행되었으며, 아마르사이칸 의장이 수여했다. 이번 수훈은 몽골 울란바토르시 도시계획 자문위원인 김인제 서울시의원이 울란바토르시의 현안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르(Ger)촌 공공주택 공급 종합계획수립, 신주거단지 조성, 도시 스모그 해결 방안 등의 자문과 양도시의 협력 및 교류에서 보여 준 신뢰와 공헌에 대한 몽골 울란바토르시의 감사와 향후 협력에 대한 기대가 담긴 것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고려대 인근 ‘인촌로’, 김성수 친일 행적 논란에 명칭 변경 추진

    고려대 인근 ‘인촌로’, 김성수 친일 행적 논란에 명칭 변경 추진

    고려대학교를 인수, 운영했던 인촌 김성수의 호를 따서 지은 인근 도로명이 바뀔 전망이다. 서울 성북구는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의 하나로 관내 도로명인 ‘인촌로’의 명칭 변경을 추진한다고 4일 밝혔다. 지난해 대법원이 그의 친일 행위 인정 판결을 내리고, 올해 초 그가 받았던 건국 공로훈장까지 취소된 데 따른 조치라고 성북구는 설명했다. 대체 도로명으로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고려대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인촌로’는 지하철 6호선 보문역-고대병원-안암역-고대앞사거리로 이어지는 약 1.2㎞ 길이, 폭 25m의 도로다. 정부는 2010년 4월 새로운 주소체계 시행에 따라 한때 고려대를 운영했던 김성수의 호 인촌(仁村)을 따서 이 도로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촌 김성수가 중일전쟁이 터진 뒤 매일신보 등에 일제의 징병 및 학도병 모집을 지지하는 글을 싣는 등의 친일 행위에 나선 점 등을 들어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등에서는 도로명 변경을 요구해왔다. 성북구는 ‘인촌로’ 명칭 직권변경을 위해 이달 중 도로명 변경 안내문을 공고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한다. 이후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주소 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면 동의를 받는다. 명칭 변경을 위해서는 도로명 ‘인촌로’를 사용하는 건물의 지역 주민, 외국인, 사업자 등을 포함한 주소 사용자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 ‘인촌로’는 현재 종속도로 190개, 건물번호 1527개에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성북구 일대에 거주하며 성북구는 항일운동의 핵심지 역할을 했다”며 “단순히 도로명 변경의 의미를 넘어 엄혹한 일제치하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베컴, 기사 작위 지연… 세금 회피 의혹 탓”

    “베컴, 기사 작위 지연… 세금 회피 의혹 탓”

    영국의 축구 스타인 데이비드 베컴이 지난해 영국 여왕의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한 것은 조세 회피 의혹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더타임스는 1일(현지시간) 정부가 사전 조사를 통해 조세 회피 의혹이 있는 이들에 대한 기사 작위나 훈장 수여를 배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국세청은 매년 수천명의 서훈 후보자들에 대해 이른바 ‘신호등 시스템’으로 불리는 적합성 조사를 하며, 위험 요소(리스크)가 큰 대상자는 빨간색, 그보다 적거나 중간일 경우 각각 녹색, 노란색으로 분류한다고 더타임스가 전했다. 베컴의 기사 작위가 미뤄지는 이유도 국세청의 적합성 조사에서 ‘레드’로 분류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데이비드 베컴이 기사 작위 못 받은 이유

    데이비드 베컴이 기사 작위 못 받은 이유

    영국의 축구 스타인 데이비드 베컴이 지난해 영국 여왕의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한 것은 조세 회피 의혹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더타임스는 1일(현지시간) 정부가 사전 조사를 통해 조세 회피 의혹이 있는 이들에 대한 기사 작위나 훈장 수여를 배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국세청은 매년 수천명의 서훈 후보자들에 대해 이른바 ‘신호등 시스템’으로 불리는 적합성 조사를 하며, 위험 요소(리스크)가 큰 대상자는 빨간색, 그보다 적거나 중간일 경우 각각 녹색, 노란색으로 분류한다고 더타임스가 전했다. 베컴의 기사 작위가 미뤄지는 이유도 국세청의 적합성 조사에서 ‘레드’로 분류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 기록을 가진 웨인 루니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더타임스는 추정했다.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자선단체를 위해 연간 수백만 파운드 모금에 기여해 온 영국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가 ‘대영제국 장교 훈장’(OBE)을 받지 못한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들 유명인은 조세 회피가 아닌 합법적인 절세 행위였다고 주장하지만 영국 정부는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서훈자 명단에서 제외하고 있다. 서훈 수여자가 추후 탈세자로 드러날 경우 국가적 작위나 훈장의 명성에도 해를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인식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문 대통령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 공동개최 희망”

    문 대통령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 공동개최 희망”

    문재인 대통령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만나 2032년 하계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언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 대통령이 30일 청와대에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2032년 하계 올림픽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31일 MBC가 보도했다.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 문 대통령에게 올림픽 훈장을 전달하기 위해 마련됐다. 보도에 따르면 훈장 수여 이후 이어진 환담에서 문 대통령은 “최근 아시안게임에서 남북 단일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면서 “앞으로 베이징 동계올림픽, 도쿄 하계올림픽에서도 남북 단일팀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가능하다면 서울과 평양에서 올림픽을 공동 개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MBC는 전했다. 현재 202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는 정해졌기 때문에 문 대통령이 2032년 하계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이처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바흐 위원장이 긍정적으로 화답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밝힌 것으로 MBC는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과 문화체육관광부 역시 4·27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5월, 남북 올림픽 공동 개최 방안을 협의한 바 있다고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안민석 위원장은 MBC와의 통화에서 “다른 남북 교류는 대북 제재 때문에 한계가 있다”면서 “올림픽 공동 개최는 제재와 상관 없이 세계에 평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카드”라고 설명했다. 당정은 2주 뒤쯤 올림픽 공동 유치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다음달 열릴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문 대통령이 올림픽 공동 개최 방안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모험 놀이터가 필요한 이유

    [그 책속 이미지] 모험 놀이터가 필요한 이유

    마을이 함께 만드는 모험 놀이터/김성원 지음/빨간소금/256쪽/1만 5000원흙탕물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조그만 나무 뗏목을 타고 막대기로 물을 가른다. 뒤편으로 줄지어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는 모습도 보인다. 아이들은 옷이 젖든, 더러워지든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재밌게 논 증거이자 훈장이다. 놀고 싶은 만큼 놀고 근처에 있는 샤워 시설에 몸을 씻으면 그만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허팅턴 해변 놀이터 모습이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 보자. 시소, 미끄럼틀, 그네. 이른바 ‘3S’라 불리는 표준 놀이터뿐이다. 아이가 다칠까 지나치게 걱정한 부모와 아무 고민 없이 이를 받아들인 지자체가 만든 결과물이다. 놀이터 디자이너 김성원씨의 신간 ‘마을이 함께 만드는 모험 놀이터’는 우리에게 맞는 놀이터가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이 담긴 책이다. 왜 19세기 미국에서 최초로 놀이터가 생겼는지, 놀이터가 나라마다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려준다. 폐타이어 놀이터, 팝업 놀이터, 아이들이 설계한 놀이터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개성 넘치는 놀이터도 소개한다. 자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재미와 안전이 살아 있는 모험 놀이터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포토 다큐] 녹슨 포탄서 꽃망울 터져요…매향리로 평화 소풍 갈래요

    [포토 다큐] 녹슨 포탄서 꽃망울 터져요…매향리로 평화 소풍 갈래요

    “영화 동막골에서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을 모르지만, 매향리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났는지를 모를 정도로 54년 동안 폭격이 쉼없이 계속되었습니다.” 11대째 매향리에 살고 있는 전만규(62·매향리 평화마을 추진위원장)씨는 무자비했던 폭격의 참상을 증언했다. 54년간의 폭격이 멈추고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상처는 온전하게 치유되지 못하고 마을 곳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매화향기 가득했던 경기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梅香里)에 미 공군 폭격 연습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다. 이후 1955년 매향리의 옛 지명인 고온리의 미국식 발음 ‘쿠니사격장’(Koo-ni Range)으로 공식 명명되었다. 사격장은 1968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2277만㎡의 해상사격장과 125만㎡의 육상사격장으로 확장됐다. 2005년 8월 폐쇄될 때까지 미군은 연간 250일 하루 12시간씩 15~30분 간격으로 포탄을 퍼부었다. 해안에서 750m 떨어져 있던 해상사격 표적물로 사용된 구비섬은 이미 형체가 사라지고 이후 표적물이 된 해안 1500m 지점에 위치한 농섬도 일부만 남아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결혼 후 서울에서 매향리로 이주한 지 28년째라는 김미경(55)씨는 “매일 폭격기가 낮게 날아 폭격하는 모습과 그때 들리던 소음을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며 몸서리쳤다.마을 초입에 자리잡은 매향리역사관은 얼마나 많은 폭격이 마을에 쏟아졌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수거한 크고 작은 포탄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가 하면 목표물이 된 차량에는 벌집 같은 구멍이 나 있다. 녹슨 포탄은 전쟁의 아픔을 알리는 작품으로, 한편으론 생활용품으로 바뀐 모습으로 전시돼 당시 매향리 사람들의 아프고 힘든 일상을 알려주고 있다.평화를 외치는 구호가 여전하지만 2005년 미군 사격장이 폐쇄된 이후 매향리에서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각종 문화 활동과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쿠니사격장 내에 있는 관제탑은 경기도 제1호 현대건축물 우수문화재로 2016년 등재됐고 부대시설이 있던 일대는 평화기념관이 조성돼 아픈 역사의 교훈장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8면의 야구장을 갖춘 화성드림파크는 2017년 완공돼 국내 최대 유소년 야구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의 꾸준한 해안 정화작업으로 농섬에는 검은머리물떼새, 저어새 등 희귀새들이 날아들고 갯벌에서 수확하는 바지락 수입이 작년 50억원을 넘어섰다.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폐허가 된 매향교회는 매향리 스튜디오로 탈바꿈해 문화복합공간으로 각종 전시회와 문화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다음달 8일부터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평화가 허락해준 소풍 in 매향리’란 평화축제가 화성드림파크와 매향리 일대에서 열린다. 올해 5월에 착공한 매향리 평화생태공원은 사업비 1100억원을 투입해 2020년에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곳에는 역사박물관, 야외조각공원, 평화기념관, 평화정원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45년째 매향리에서 살고 있는 박순자(71) 할머니는 “평화생태공원이 지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무분별한 개발로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조성됐으면 한다”고 앞으로의 기대를 내비쳤다. 매향리는 아픔과 상처를 넘어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변모해 가는 중이다. 글 사진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 [서울포토] ‘올림픽 금장 훈장’ 받은 문 대통령

    [서울포토] ‘올림픽 금장 훈장’ 받은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오후 청와대에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으로부터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 올림픽에 공헌한 공로로 금장 훈장을 받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독립운동 남편 옥바라지한 부인도 유공자입니다”

    “독립운동 남편 옥바라지한 부인도 유공자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 발굴 사업 주관 투옥된 가족 보살핀 박애신 여사 찾아 “부족한 기록·증언으로 인정 쉽지 않아”“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위해 옥바라지를 하며 평생 희생한 부인은 어떤 포상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한 겁니다.”정부는 지난 15일 202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이 중 26명에 대해 서훈을 수여했다. 발굴 사업을 주관한 이정은(64)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28일 “남편이나 시아버지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웠으며, 독립운동을 떠난 남편 대신 만주땅을 개간한 여성의 노력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라며 “한평생 희생한 여성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위대한 여성상’을 마련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굴을 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희생한 여성도 사각지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이사장은 이번 발굴 작업에서 찾아낸 박애신(1900년생) 여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박 여사는 1919년 3월 9일 독립운동가 김태규 선생과 혼인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데 관여한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이 서대문 형무소에 연이어 갇히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출옥한 남편은 몇 개월 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동교통부(국내 거점과 비밀 연락 업무)에 들어갔다. 의열단 등에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이 이사장은 “부부의 마지막 만남은 김태규 선생이 갓난아이가 보고 싶으니 미상의 역 플랫폼에 아기를 안고 서 있으라고 기별을 했던 것”이라며 “김 선생이 기차를 타고 가며 먼발치에서 부인과 아기를 바라봤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여사는 독립운동가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그는 정부가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선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이사장은 보훈처의 용역공모사업에 따라 연구진을 꾸려 지난 1월 12일부터 4개월간 발굴을 진행했고 202명을 찾아냈다. 정부는 지난 15일에 훈장과 포장을 받은 26명 외에도 향후 검증을 통해 오는 11월 순국선열의 날, 내년 3·1절 등에 차례로 서훈을 수여할 계획이다. 이 이사장은 발굴 과정에서 애로사항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 독립운동 기록을 들었다. 그는 “문헌이나 증언을 찾고자 4개월 발굴 기간에 2개월은 족히 헤맨 것 같다”며 “전체 독립 유공자 중 여성이 2%에 불과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행히 보훈처가 3개월 옥고를 치러야 한다는 독립유공자 기준을 ‘실질적인 독립활동 여부’로 변경하면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빛을 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위원을 지낸 이 이사장은 2012년 퇴임을 하면서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을 설립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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