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훈계
    2026-07-21
    검색기록 지우기
  • 에너지 AI
    2026-07-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345
  • 대학교수, 밥값 안내려는 판사에 열받아 결국…

    대학교수, 밥값 안내려는 판사에 열받아 결국…

    “모르는 사람에게 법은 건조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법 밑에 살지만, 같은 혜택을 보는 게 아니다. 아는 사람만을 위한 법, 그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거침없다. 마구 지른다. 이렇게 패대기쳐도 괜찮을까. 판·검사를 난도질해도 후환은 없을까. 대한민국 사법제도 개혁,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 건지. ●“사법부의 숨겨진 빙산 91.7% 깨부수자” ‘서초동 0.917’(책과함께 펴냄)은 김희균·노명선·오경식·정승환 등 법학전문대학원·법학부 교수 4명이 서초동으로 상징되는 법조계를 겨냥해 쓴 책이다. 부제 ‘빙산을 부수다, 사법개혁’이 의미하듯 최종 목적지는 사법개혁이다. 책을 대표집필한 김희균(46)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한민국의 사법·교육·정치제도 아래에 빙산이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사법에 전관예우의 잘못이 있으면 정치, 교육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50년 이상 개혁을 얘기하고 있는데 안 되는 이유는 그 근저에 잘못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빙산의 아래에 감춰진 0.917을 깨부수자고 책을 기획했습니다.” 심층인터뷰와 세미나를 거쳤다고 한다. 취재도, 토론도 격렬히 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 적절한 비유, 콕 집는 사례가 많다. 사법제도를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인 법원과 검찰, 경찰, 변호사에 대한 고발이자, 훈계이자, 개혁을 위한 제안이다. 이런 식이다. 판사 항목의 2부에 나오는 한 대목. 밥이나 술자리의 자리배열이 엄격한 법조계에서 “판사가 무조건 상석이다. 그다음 검사, 그다음 교수, 그다음 변호사, 그다음 회사원인데(중략) 가끔 방송국PD라든가 시를 쓴다든가 하는 얘들만 분위기 파악 못하고 상석에 앉았다가 나중에 말석으로 슬슬 내려온다”, “그런데 몇몇 상석은 자리를 파할 때 비상식적인 결론을 유도해서 문제다. ‘참 오늘 돈은 누가 내지?’ 자기가 제일 많이 떠들어 놓고, 밥값은 다른 사람이 낼 때 이 점에서부터 무언가 비리가 시작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3부의 검사 항목에서도 가차 없다. “자칫 정치적 파장이 생길 만한 사건이 닥쳐오면 사건 자체를 보기보다 사건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한다. 정치인 사건이 배당되면 1년도 더 남은 총선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기업인 관련 사건이 배당되면 세계 금융위기로 침체된 국내 경제를 걱정한다. 이게 바로 검사들 생각이다. 하지만 국민은 생각이 전혀 다르다. 그냥 ‘법대로 처리하세요!’” ●법원·검·경·변호사 향한 고발 및 훈계 김 교수는 오해는 하지 말라고 한다. 특정 기관을 꼬집을 의도로 쓴 건 아니라고. “사법제도 전반이 잘못 굴러가고 있고 각자가 자기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차원입니다. 대검이 해서는 안 될 수사를 하고 있으니, 법원행정처가 무소불위가 되고 있으니, 자기 위치에 서서 돌아보면 좋겠다. 바깥에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 안에 있는 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뜻입니다.” 12월의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출판인 만큼 타깃이 정치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아니라고 했다. “가장 읽어 주면 하는 게 갓 법조에 들어간 젊은 판·검사이고 두 번째가 법학도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일반 시민들이고요. 정치권을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닙니다.” 4명의 원고를 김희균 교수가 전체 톤의 일관성을 고려해 ‘가볍고 재밌게’ 다시 썼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기 전부터 “고시공부가 싫어 딴짓을 많이 했던” 그는 극단, 출판사 근무에 파리8대학(불문학 학사, 석사, 박사),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로스쿨(법학박사)까지 다양한 경험을 누렸다. 글솜씨도 웬만한 논객 뺨친다.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다. 경제민주화가 대선의 초점이 될 것 같지만 사법개혁도 주요 쟁점으로 다뤄야 한다.”는 그는 “재량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법으로만 해결하는 법치주의를 실천하겠다는 대선 후보가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인터뷰를 맺었다. 글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담배 피우지마” 10대 여학생 몸수색하다 그만

    “담배 피우지마” 10대 여학생 몸수색하다 그만

    업소에서 담배를 피우며 떠들던 10대 여학생을 화장실에 가두고 몸수색을 한 40대 업주가 벌금형을 받았다. 서울동부지법 제12형사부(부장판사 김재호)는 청소년들을 훈계한다며 상해를 입히고 엉덩이를 만지며 추행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킨 혐의(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기소된 정모(43)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고 15일 밝혔다. 정씨는 지난해 11월18일 오후 4시30분쯤 자신이 운영하는 헬스장 건물 계단에서 청소년 여럿이 담배를 피우며 떠들고 있다는 고객 항의를 받았다. 그는 계단에 있던 윤모(15)양 등 청소년 다섯명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 “너희가 성인이었으면 맞아 죽었다.”는 등의 폭언과 함께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고 무릎과 주먹으로 가슴과 머리를 때렸다. 이어 “(호주머니를) 뒤져서 담배가 나오면 죽는다.”며 윤양 등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몸수색을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윤양 등은 눈과 턱, 갈비뼈 등을 다쳤다. 정씨는 경찰에서 “어린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기에 혼낸 것일뿐 다치게 하거나 추행하려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정씨가 피해자들을 때리려는 행동을 하거나 일정 정도의 신체 접촉이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했고, 피해자가 뒷주머니가 없는 치마를 입었는데도 담배 소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엉덩이를 만지는 등 불필요한 행동을 했다.”고 판단했다. 또 “성인의 선도나 훈계는 청소년 탈선을 예방하려는 선의의 행위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사회통념상 정당한 것으로 용인할 수 있는 방법과 정도의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갑오년(1894년) 음력 1월 고부(지금의 전북 정읍시) 봉기로 발발해 같은 해 12월 전봉준 등 주요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막을 내린 미완의 혁명. 그 정신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1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곡조에는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민초들에게 두고두고 양각으로 아로새겨진 이 기억은 그러나 권세가들에게도 특별했긴 매한가지다. 무수한 세도가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했고 머리를 조아렸던 혁명이다. 그 정신을 오롯이 기리고 있는 전북 정읍·고창·부안의 동학로를 찾았다.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끝자락에 있는 황토현 전적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 위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 즉, ‘폭정을 없애고 나라를 보존하여 인민을 안정하게 한다’라고 쓰여 있다. 동학농민군은 갑오년 음력 4월 7일 이곳에서 정규 정부군인 전라 감영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최대 승리한 것을 이렇게 기념했다. ●과거 권력자들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 1963년 10월 3일 제막식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참석했다. 여기서 박 의장은 “동학혁명은 부패·당파싸움·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에게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으로 그 정신은 길이 계승돼야 한다.”면서 “5·16혁명도 이념면에서는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윤식(69) 고창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은 “5·16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꼼수였다.”고 비판했다. 또 같은 목적으로 전두환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황토현 기념관·전봉준 장군의 동상 등을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읍농고에서 열린 13회 동학문화제에 참석한 이후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기념사업회장을 구속하고, 정읍군수·경찰서장을 직위해제했다. 박대길 정읍시 동학농민혁명선양팀장은 “군부정권이 행한 ‘정화사업’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적비 뒷산인 두승산에 오르면 동쪽으로 배들평야, 서쪽으로는 부안군 백산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로 끝에서 황토현로, 말목장터로를 따라오면 배들평야 끝으로 만석보터가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 만석보를 만들어 군민들에게 물세를 물렸고, 이에 전봉준 등이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자 사발통문을 쓰고 농민들과 함께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잘사는 사회”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면, 고창은 동학농민군의 조직·사상이 잉태된 곳”이라고 고창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갑오년 음력 3월 20일 고창지역에 있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무장현에서 봉기를 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충청도는 물론 경상·강원·황해도 등 전국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손화중은 당시 최시형과 함께 양대 동학접주 중 하나였다. 이런 점에 주목한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길은 전봉준로, 녹두로와 함께 동학농민군로, 손화중로 등으로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그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만 꾸미고 오직 제 혼자 온전할 방법에만 힘쓰면서 녹봉과 벼슬자리만 도둑질하니 어찌 다스려지리오’ 동학농민군로가 끝나는 지점인 전남 영광과 접한 무장현 봉기 장소에 있는 기념비에는 당시 만들어진 이 포고문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정부관료들에게 훈계해도 될 법한 글귀다. 농민이기도 한 진 소장은 “무장포고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은 서푼어치라도 매년 오르지만, 쌀값만은 십수년째 16만원 내외로 같은 값이다. 정부는 전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을 경시하고 있다.”면서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국민평균소득 정도는 벌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118년전 동학농민군이 이루고자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회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민란 아닌 혁명인 이유는 ‘인권중시사상’ 과거 고부군에 속했고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 백산(白山). 이곳에서 열린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 중 하나다. 해발고도 47m에 불과한 낮은 산인 백산은 사방이 평야지대에 홀로 솟아 시야 확보가 쉽고, 호남 서부지역 교통의 요지였다. 정읍 배들평야 쪽에서 이곳 백산까지가 동학로라 이름 붙여졌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갑오년 음력 3월 25~26일 1만명 가까운 농민군이 모였다. 전봉준 장군을 총대장으로 조직이 재편됐고 호남·호서 일대에 격문이 나붙었다. 백산에서 농민군 군율인 4대 명의·12조 기율도 제정된다. 왜 동학농민혁명이 ‘민란’이 아닌 ‘혁명’이었는지, 이 군율에 나타난다. 4대 명의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는 내용이, 12조 기율에는 ▲항복한 사람은 따뜻하게 대한다 ▲곤궁한 사람은 구제한다 ▲굶주린 사람은 먹여준다 ▲도주하는 사람은 쫓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진휼한다 ▲병든 사람은 약을 준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때 집결한 농민군은 한 달 뒤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전라도 수도인 전주성 점령까지 승승장구했다. 이런 백산에서의 기억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부안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직접 계승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았다. 정재철 백산고 국사교사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부안에 저항정신·애향심으로 남아 있다.”면서 “그 힘으로 2003~2005년 2년 2개월여 전 군민의 방폐장 반대 시위를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세 지역 중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가장 활발한 곳도 역시 부안이다. 상서면 호암수도원에는 천도교 교구가 설치돼 있고, 주기적으로 집회가 열린다. 민관이 함께 통치하는 집강소를 세우는 등 새 시대를 열어가던 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음력 11월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면서 급격히 쇠퇴한다. 한 달 뒤 전봉준은 옛 친구의 밀고로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고, 이듬해 을미년 음력 3월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안타까운 결말에 민초들은 이런 노래를 남겼다. ‘가보(甲午·1894년)세. 가보세. 을미(乙未·1895년)적 을미적 병신(丙申·1896년)되면 못 가보리’ 혁명이 성공했다면 달랐을까. ‘동학로’라 이름붙여진 서로 다른 길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농촌길이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 이 지역 쌀 생산은 전국 최고지만, 농민들의 소득은 여전히 밑바닥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10회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 약수로를 소개합니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다산(茶山)과 추사(秋史)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다. 한 사람은 조선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인물로 추앙받고, 한 사람은 북학(北學)의 종장으로 일컬어진다. 중국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다산, 청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인을 스승으로 삼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배우고 좋아했던 추사,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삶이 달랐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당색(黨色)마저 달랐으니 애초부터 가까이 지내기엔 서로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추사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가까운 친구였고 선배인 다산을 존경했다. 다산 사후에는 다산의 제자들이 추사의 문하를 수시로 출입하며 교유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이 다르면서도 닿아 있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죄인의 몸이 되어 유배형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의 설움 글로 푼 정약용 대대로 문한(文翰)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온몸으로 받았던 신하이자 제자였다. 그런데 출세가도를 달리던 다산에게 시련이 닥쳤다. 젊은 시절 천주학(天主學)에 관한 책을 읽고 연구했던 게 화근이었다. 다산의 집안에는 형님과 매형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많았다. 호기심 많던 다산이 천주학에 관심을 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에 다산은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천주학과의 인연을 끊지만, 젊은 시절 그가 한때 마음을 두었던 천주학은 결국 인생의 항로를 바꾸고 만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 천주학에 몸담았던 사실은 점점 다산의 목을 겨누는 칼로 변해갔다. ●든든한 후원자 정조 죽자 유배생활 시작 상황이 악화되자 다산은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1800년 봄의 일이었다. 얼마 후 다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다음해 2월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10월에 상경하여 재조사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고 만다. 죄인의 몸이 되어 강진을 찾은 다산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동문 밖 술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동천여사(東泉旅舍) 뒷골방인 사의재(四宜齋)였다. 이곳에서 1806년 여름까지 지냈다. 1805년 겨울은 승려인 아암(兒庵)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년 남짓 살았다. 이렇게 떠돌던 다산은 1808년 봄부터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 대부분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하는 일로 보냈다. 누구보다도 승려들과 많은 교유를 하였고 차(茶)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강진에 도착한 다음해 봄부터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저술에 매달렸다. 그 때문에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폐인이 될 지경이 되었고, 시력은 나빠져 늘 안경을 끼고 살았다. 다산이 그렇게 저술에 매달린 것은 폐족(廢族)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문과 자신을 구원할 길이 오직 저술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이로써 죄인의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폐족 벗어나기 위해 두 아들의 학문정진 강조 한편으로는 두 아들에게 수시로 훈계의 글을 써 보내 공부를 강조했다. 청족(淸族)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게 되지만, 폐족이 된 마당에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게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자포자기하면 자신의 저술이 후대에 전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자신의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관청의 문서만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끝내 죄인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절박함은 다산으로 하여금 50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배의 恨 서화로 푼 김정희 김정희의 증조부는 영조 임금의 사위였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왕실의 한 구성원인 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게 없는 생활을 하였다. 1810년 부친을 따라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온 뒤로 북학의 종장으로 성장하였다. 연경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유하기를 희망하였고,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이미 동아시아 최고의 석학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親청’ 추사, 反청 다산 선배로 여기고 후학들끼리 교류도 그러나 김정희가 45세 되던 1830년에는 부친 김노경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40년에는 그 자신마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모두가 정쟁 속에서 빚어진 일들이었다. 평생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김정희에게 제주도의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음식은 거칠어 목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날씨는 맞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누웠다.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해, 추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의 부음이 전해졌던 것이다. 김유근은 추사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가장 큰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김유근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로 추사는 미쳐버린 듯, 정신이 나가버린 듯하였다. 하늘을 향해 혀를 차고 밥상을 대하면 수저를 드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돌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하고 대못이 가슴에 박혀 있는 듯하여 몰골은 날마다 말라가고 정신도 따라서 나가버린 것 같았다.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추사는 두 번째 아내인 예안(禮安) 이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의 친구들과는 소식도 점차 끊어졌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소식 한 통 전해오지 않았다. 그런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그런 추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다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 덕분에 몸은 제주에 있었지만, 중국 소식을 손금 보듯 하며 지낼 수 있었다.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는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이상적의 행동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사는 그 고마움을 그림에 담아 이상적에게 선물하였다. 그렇게 ‘세한도’가 탄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추사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바로 9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 탄생하였다. 추사 또한 평생 수많은 저술을 하였고, 유배기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자신의 저술을 두 번에 걸쳐 불에 태워버렸다. 그가 남긴 것은 그의 혼이 담긴 서화뿐이었다.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 활발한 학술행사 열려 18년 유배생활을 저술로 보냈던 다산, 9년 유배생활을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 이들의 삶은 이렇게 같으면서도 달랐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밖으로 풀어내 책을 지었고, 또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붓 끝에 모아 서화로 표출했다. 올해는 다산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전시회와 함께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린다. 다산의 바람대로 죄인이라는 오명은 오래 전에 씻어졌다. 이제 다산을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500권의 저술을 남긴 위대한 학자로서의 명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산의 치열했던 삶이 온전히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철상(고서연구가)
  • [G20 정상회의] “유럽 구제자금 750억弗 더 내겠다” 목소리 내는 브릭스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18일(현지시간) 개막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가 전 세계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4560억달러를 추가로 출연하기로 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로이터통신 등이 입수한 공동선언 초안에는 ▲각국은 위험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일자리 창출 조치를 취하며 ▲국가와 은행 간의 위기가 도는 악순환을 막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결과물은 19일 오후 폐막에 앞서 발표되는 ‘로스카보스 선언’에 담긴다. 브릭스(BRICS) 국가인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날 공동성명에서 IMF 내 국가별 지분과 투표권 개혁 등을 전제로 750억 달러 추가 마련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의장국인 멕시코도 100억 달러를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IMF의 자금 규모는 3244억 달러다. IMF는 유로존 금융위기 해소 등 긴급한 구제금융을 위해 5000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G20 회원국들은 4월 워싱턴DC에서 열린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IMF 재원을 4300억 달러 늘리기로 합의했지만 멕시코 회의에서 260억 달러 더 많은 4560억 달러를 출연하기로 했다. 브릭스 정상들은 별도의 회동을 통해 국제 법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자국 통화를 스와프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구체적인 방안은 내년 남아공에서 열리는 브릭스 정상회담에서 나온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브릭스 정상들과의 회동에서 “이번 G20 회의에서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심정으로 합심해 세계경제 회복을 위한 신뢰감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유로존 경제 위기를 두고 포럼에서는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다. 이달 말 임기가 끝나는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WB) 총재는 “우리는 (유로존의 대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듣고자 한다.”며 유럽의 대응 방식을 비판했다. 또 호세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은 유로존 위기를 “세계경제의 유일한 최대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유로존 위기의 전염성을 경고하면서 “(유로존 위기의) 인화성과 불확실성은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보호주의로 가는 연료”라고 말했다.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는 “채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로존 지도자들이 구조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세 마누엘 바호주 유럽위원회(EC) 위원장은 유럽의 위기 대처 방식을 옹호하다가 “우리는 민주주의나 경제 운용에 관한 훈계나 들으러 여기에 온 게 아니다.”고 맞받아친 뒤 “위험은 이미 세계화됐다.”고 말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6) 연산군과 김일손

    [선택! 역사를 갈랐다] (16) 연산군과 김일손

    세조의 치세가 열리는 길목은 가파르고 무서웠다. 많은 죽음이 널렸고, 한때의 임금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목숨을 빼앗기고 제사도 받지 못하였다. 또한 문종의 현덕왕후까지 ‘왕이 아닌 자의 어미’라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문종에 앞서 소릉에 묻혔기 때문에 ‘소릉폐치사건’이라고 한다. 공포와 쇠락의 시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일탈과 분노의 서사였다. 세조의 공신들은 정변과 찬탈의 전리품을 즐겼다. 유학의 수기치인과 의리명분을 벗어난 화려한 외도였다. 역사의 상흔을 감추고 기억을 억압하였다. ‘사관의 이름을 적으면 바른 사초가 어렵다.’라고 말하는 관료들도 죽였다. 또한 남이의 옥사와 성종 즉위를 빌미로 공훈을 보탰다. 이들에게 세조는 ‘불세출의 중흥주’였다. 1478년(성종 9) 4월 이심원이 세조 공신의 퇴진을 상소하고, 이레 후 남효온은 소릉복위를 주장하였다. 철벽같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누구도 말하지 못한 금기를 들춘 것이다. 이심원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종친이며, 남효온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개국공신 남재의 후예였다. 이 둘은 평소 친분이 깊었고, 논지는 서로 연속하였다. 새 정치 질서를 모색하자면 진실을 밝히고 상흔을 치유하자는 바람을 담았다. 기억운동, 역사운동의 시작이었다. ●왕실의 분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다 남효온이 세조의 최대 흠결을 적시하며 국가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할 즈음 왕실은 원자를 낳은 중전 윤씨 문제로 분란에 휩싸였다. 중전 윤씨는 결국 폐서인되어 사저로 쫓겨났다가 3년 후 환란의 싹을 자른다는 포고문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원자가 7살이던 1482년 8월 세자 책봉이 있기 반년 전이었다. 폐비의 묘는 버려지고 제사도 없었다. 1489년 5월 수호와 제사에 관한 방침이 처음으로 정해졌다. 수령이 주관하였으며, 기일제(忌日祭)가 아닌 명절의 속절제(俗節祭)였다. 물론 묘호나 사당도 없었다. 다만 제례의 물품만은 ‘죽은 왕비’의 예로 하였다. 세자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미래의 국왕을 배려한 고육책이었다. 폐비 윤씨를 제사지냈던 그해 겨울 남효온이 경상도 의령에서 ‘육신전’을 탈고하였다. ‘사육신충신론’이었다. 이듬해(1490) 3월 김일손은 경연에서 “노산군은 유약하여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이지 종사에 죄를 짓지 않았음”을 이유로 입후치제(立後致祭)를 건의하였다. 이때 무오사화로 밝혀진 사초를 작성하였다.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려서 한 달이 지나도 거두는 자가 없자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짊어지고 달아나서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 ‘세조실록’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는 사론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김종직이 과거 들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충분(忠憤)을 부쳤다.’는 평가와 더불어 ‘조의제문’ 전문을 옮겨 놓았다. 또한 현덕왕후의 복위를 상소하고는 사초에 “소릉의 관을 바닷가에 버렸다.”고 적었다. 몰래 살폈던 길 위의 노래, 억압된 기억과 기록을 사초에 담았던 것이다. 왕조실록에 실리면 노래는 불멸의 증언이 되고 야사는 국가의 정사가 된다. ●치유와 화해로 미래를 열어야 김일손은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1486년 식년문과에 제출한 ‘중흥대책’(中興對策)은 인구에 비장하였다. 여기에 역대 왕조의 일치일란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면서 당대를 ‘중쇠’(中衰)로 규정하였다. 중쇠에서 중흥의 기회로 삼는 길은 간명하였다. “천지의 억울함을 풀고 일월의 어둠을 걷어내야 비로소 기강과 법도가 찬연하게 수복되고 예악문물이 가지런히 거행되고 마침내 중흥할 수 있다.” 즉 과거의 상흔을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 것이다. 재야의 역사운동이 조정에 점화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한편 역사운동은 과거로 돌아가기가 아니라 과거에서 교훈 찾기였다. 김일손은 심온 일가를 멸문시키고도 중궁 심씨는 끝까지 보전한 태종의 도량을 새삼 되살렸다. 또한 두 왕자를 부왕에게 희생된 방번ㆍ방석의 후사로 삼아 제사 지내게 하였던 세종의 인정과 고려 왕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숭의전을 세운 문종의 관용을 추앙하였다. 그만큼 좋은 정치, 어진 임금을 향한 바람이 컸던 것이다. 남효온도 사육신을 희생시킨 세조를 광명의 군주로 리메이크하고 싶은 염원이 강렬하였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을 지키며 강호에 물러나 살게 하였다면, 상왕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치세는 더욱 빛났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운동은 증오와 분열을 마감하고 화해와 미래를 향한 소망을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다. 세자는 처음부터 국왕 수업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부를 싫어하고 환관들과 희롱하기 일쑤였다. 장성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부왕의 훈계가 두려워 시강원에 나가더라도 건성이었고, 관료가 공부라도 독려할라치면 얼굴을 찌푸리며 배척하였다. 기본경전 ‘사서’를 멀리했다. 읽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방대한 ‘명신언행록’을 뒤적일 따름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유희는 심해졌다. 성종도 걱정이 많았다. 인정전 연회에서 우찬성 손순효가 반쯤 술에 취하여 용상 아래 엎드려 무언가를 아뢰고 임금도 몸을 굽혀 화답한 적이 있었다. ‘성종실록’ 21년 8월 22일 기사인데, 너무 소리가 작아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폭군의 맨얼굴 신왕은 경연에 소홀하고 국정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생모의 추복에 적극적이었다. 먼저 영사전(永思殿)에서 기일제를 지내고 분묘를 천장하고 ‘회묘’(懷墓)라 하고 ‘효사묘’(孝思廟)를 지었다. 신왕 즉위 6개월, 김일손은 시무개혁안 26조를 올렸다. 이때 국왕의 마음 공부를 기본으로 ‘내수사 혁파’ ‘공물 감액과 공안 개정’ ‘사관제도 확대’ ‘제조제의 혁파’ ‘천거제의 확대’ ‘어진 종친의 발탁’ 등을 제안하였다.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구상으로 차세대 기묘사림도 개혁과제로 삼았다. 물론 소릉 복위도 포함하였다. 신왕의 반응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김일손은 멈추지 않았다. 왕실 전래의 불교의식인 수륙재 반대에 앞장섰다. 이단을 반대한다는 것보다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면 복을 빌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외척을 우대하는 인사방침이나 폐비 제사도 반대하였다. 신왕은 싸늘했다. “총명을 조작하며 옛 법을 어지럽히지 말라.” 또한 “김일손은 나를 용렬하다고 여겨서 섬기려 하지 않을뿐더러 임금을 아끼는 마음도 없다.”고 비난했다. 결국 김일손은 소릉복위소를 마지막으로 조정을 떠났다. 1498년 봄 모친상을 끝낸 김일손은 고향 청도를 떠나 함양 남계로 옮겼다. 정여창이 살던 마을에서 멀지 않게 정사를 마련하고 서로 강론하고자 함이었다. 김일손은 여기에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국왕은 모질었다. 처음에는 사초에 나오는 궁중 비사의 출처와 이유를 캤다. 그러다가 추국 3일 만에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풀이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김일손 등은 능지처사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였다. 또한 수기철학을 실천하던 도학자까지 난언과 붕당죄로 걸렸다. 무오사화는 왕실과 훈구세력의 비판 언론과 실천 도학에 대한 국가폭력이었다. 정국은 일순 얼어붙었고 국왕은 정국주도권을 틀어쥐었다. 그래도 뜻대로 폐비 복위는 쉽지 않았다. 많은 신료가 성종의 유지를 내세워 반대한 것이다. 겁박으로 제헌(齊憲)란 시호를 얻어내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높였다. 그리고 폐비사건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신료에게 보복하였다. 그동안 무오사화를 처결하고 폐비 추숭을 진행한 윤필상 등 훈구원로나 이미 세상 떠난 세조의 으뜸 공신 한명회까지 참화를 입었다. 또한 국왕의 뜻을 거슬렀던 삼사언론을 ‘능상’(上)으로 처벌하였다. 국왕은 스스로 공도(公道)의 주인임을 포기하였다. 과거로 인재 뽑듯 ‘흥청망청’ 각처 기생을 끌어오는 ‘도가니’ 세상을 연출한 것이다. 민심이반은 심각하고, 군신관계는 결딴났다. 신하들은 묵언패를 걸고 전전긍긍, 생존게임이 벌어졌다. ●자신을 세우지 않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다 국왕 재위 12년 여름 전라도에서 유배객 김준손·이과·유빈 그리고 옥과현감 김개 등이 반정의병을 준비하였다. 9월 15일 남원 광한루에 출정하기로 하였다. 도성의 성희안·유순정에게도 알렸다. 반정과 반란의 길목에서 혼선을 막고 경중 호응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9월 1일 김개가 격문을 가지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여의치 않으면 진성대군을 호위하여 내전에 대비할 요량이었다. 바로 이날 밤, 도성의 반정세력이 궁궐을 장악하였다. 인심을 잃으면 임금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일대 사변, 중종반정이었다. 국왕은 연산군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런데 전라도의 거사에 앞장선 김준손은 김일손의 백형이었다. 연산군과 김일손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과 방향이 정반대였다. 선택과 방식도 천양지차였다. 김일손이 진실을 통하여 상흔을 치유하고 미래가치를 지향하였다면, 연산군은 개인적 분노와 욕심으로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며 보복하였다. 한편은 관용의 진보이며 다른 한편은 파괴의 퇴행이었다. 이렇게 갈리는 근본은 무엇이며, 교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극기복례, 수기처신(修己處身)의 마음 공부가 아닐까? 이종범(조선대 사학과 교수)
  •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영 어덜트’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영 어덜트’

    30대 후반 이혼녀인 메이비스(샬리즈 시어런)는 미니애폴리스의 고층 아파트에 살며 ‘영 어덜트’ 소설을 쓴다. 시리즈 소설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마지막 편을 준비 중인 지금, 그녀는 학창시절에 사귀었던 남자친구 버디의 메일을 받는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잔치에 초대한다는 글에 그녀는 딴마음을 품는다. 결혼 생활에 지친 그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빠져들 것이라고 확신한 그녀는 10여 년 전에 떠난 고향마을을 찾는다. 오랜만에 재회한 버디가 담담한 태도로 응하자 메이비스는 당황한다. 평범하면서 모범적인 가장인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버디 대신 고교시절에 따돌림을 당했던 매트와 친해진다. 함께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공유하는 부분이 많음을 발견한다. 메이비스는 추락한 여왕이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여왕으로 뽑혔던 그녀는 모든 남학생들이 꿈꾸는 소녀였다. 원대한 희망을 품고 대도시에 진출했으나 외모보다 부족한 재능은 그녀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결혼은 실패로 끝났고, 얄팍한 글 솜씨 덕에 대필 작가로 활동하면서 밥벌이하는 게 전부다. 여전히 십대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는 자유롭고 우아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애써 자위한다. 하지만, 현실은 씁쓸하다.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아파트에서 낮잠을 자며 하루를 보내는 신세이고, 곁을 지키는 건 강아지 한 마리뿐이다. 눈앞에 닥친 사십대는 미래를 바꾸기에 너무 늦은 시간일까.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 하는 짓거리는 전부 한심해 보인다. 그래도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라면 누구나 몸부림치게 마련이다. ‘영 어덜트’는 미국영화의 기대주로 떠오른 제이슨 라이트먼의 신작이다. 남다른 인물을 빚는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라이트먼은 이번에도 장기를 살린다. ‘영 어덜트’는 ‘흡연, 감사합니다’ ‘주노’ ‘인 디 에어’를 잇는 라이트먼 식 인물 탐구다. ‘담배업계 대변인, 임신한 십대, 해고 전문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대필 작가는 개중 밉살스럽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그렇게 살지 말라고 훈계하고 싶다. 라이트먼의 영화를 보노라면 그의 악취미가 궁금해진다. 호감 가는 인물로 꾸민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그의 사전에 없다. 왜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멋지고 예쁜 배우들을 불러와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매번 모난 인물을 연기하도록 주문하는 걸까. 메이비스의 실체를 파악한 고향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쯤으로 취급하거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한다.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그는 성장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철없이 굴던 메이비스가 끝내 눈물을 흘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알코올에 의존해 숨는 그녀를 본인조차 사랑하지 못할 판이다. 라이트먼 영화의 가치는, 인물이 현실의 규칙에 적응하게끔 이끌지 않는 데 있다. 메이비스는 눈물을 털어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라이트먼은 관객이 그녀를 흉보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투로 영화를 끝맺는다. 그것이 라이트먼 영화가 성숙을 대하는 방식이다. 하긴 세상에 평범하고 착한 척하는 사람만 있다면 무슨 재미인가. 고작 뉘우치고 사라질 임무를 안기려고 신이 골칫거리를 창조하진 않았을 게다. 개봉 없이 홈비디오로 직행한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 [지금&여기] 보이스피싱 차단책/정현용 사회2부 기자

    [지금&여기] 보이스피싱 차단책/정현용 사회2부 기자

    얼마 전 반갑지 않은 전화를 두 번이나 받았다. 보이스피싱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인물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검찰 수사관을 사칭하며 내게 “대포통장 사건에 연루됐다.”고 말했다. 물론 허술한 스토리를 듣는 순간 곧바로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 사람은 어디 소속이냐고 따져 묻자 얼버무리다 궁지에 몰렸는지 내게 몇 마디 욕을 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는 직접 “더 들어주려 했지만 짜임새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 다음부터 사람 속이는 일 그만두라.”고 훈계조로 얘기하고 끊었다. 과거 거주지와 전화번호, 심지어 주민번호 앞자리까지 꿰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내 개인정보는 이미 바닥까지 유출된 모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휴대전화로 받아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떠도 모두 조작된 인터넷 전화번호이고 대부분의 전화가 중국에서 오기 때문에 발신자를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그럼 해외전화 발신번호 조작을 허용해 주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해외전화번호가 그대로 뜨면 보이스피싱 범죄에 취약한 노인도 허술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는 발신번호 조작 제한을 담은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됐다. 인터넷전화 업체에 조작된 전화번호는 차단하도록 의무를 지웠다. 하지만 법안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18대 국회 회기가 끝나는 동시에 폐기됐다. 다행히 정부에서 다시 관련 내용을 법제화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보이스피싱을 수사하는 일선 경찰들은 이미 5년 전부터 언론 등을 통해 발신번호 조작 제한이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라고 지적했지만 귀담아듣는 위정자는 많지 않았다. 국민들의 민생 안정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들의 인식은 여전히 느슨한 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피해자가 늘고 있다. 그런데도 편안하게 잠이 오는가. junghy77@seoul.co.kr
  • [미주통신] 뉴욕경찰 업무는 아동 포르노 보는일?

    뉴욕 경찰의 연금을 담당하는 ‘NYPD 연금재단’에서 해고당한 전직 직원이 재단 직원들이 업무용 컴퓨터를 이용해 늘상 아동 포르노는 물론 동물과의 수간 등 미 연방법이 범죄로 규정하는 비디오를 보아왔다며 해당 직원과 뉴욕시를 브루클린 연방법원에 제소해 파장이 예상된다. ’NY 데일리뉴스’에 따르면 안토니 보넬리로 알려진 이 전직 직원은 과거에도 이 재단에 배치된 한 경찰이 한 달에 70여 차례 이상 ‘야동’사이트에 접속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재단에 근무하는 민간인은 다른 직원이 보는 앞에서 무려 1,561회나 야한 사이트를 방문하고 880회 이상 포르노사이트를 방문했지만 해고는 커녕 훈계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NYPD 연금재단’은 7만 5000명에 이르는 전 현직 뉴욕경찰의 연금을 지급하는 재단으로 약 200억 달러의 운영자금으로 현직 경찰은 물론 전직 경찰 그리고 민간인으로 구성된 15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재단이다. 보넬리는 “재단 직원들의 이같은 행위는 관련 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컴퓨터에 악성 소프트웨어 감염을 가져와 뉴욕경찰 등의 신상정보는 물론 중요 데이터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뉴욕시 법무 대변인은 상세한 논평을 회피한 채 “단지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다니엘김 미국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씨줄날줄] 아버지의 편지/임태순 논설위원

    “4년간 강목을 골똘히 봤다. 두루 읽었지만 책을 덮으면 모두 잊어버리는지라 부득불 착오를 초록한 책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때 어영부영 해를 보내면 노년에 어쩌려고 그러느냐.” 60에 접어든 연암 박지원이 아들 종서에게 보낸 편지다. 자신의 독서 경험을 전하면서 책읽기를 소홀히 하는 아들을 훈계하고 있다. 퇴계 이황도 편지를 통해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 인생의 연륜 등을 전했다. 아들, 손자는 물론 조카사위 등 100여명의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39세에 유배를 떠나 57세에 돌아온 정약용도 학연, 학유 등 두 아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자녀들이 자랄 중요한 시기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데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욕심을 낼수록 잘 빠져 나가는 게 재물이니 재물에 애착을 갖지 말라.” “선비는 닭을 기르면서도 양계법과 실상을 글로 남겨 후세에 전한다.”면서 재물에 욕심내지 말고, 배우고 익힌 것은 책으로 남길 것을 권하고 있다. 인도 총리 네루도 옥중 편지를 통해 딸을 세계사에 눈뜨게 했다. 세계사 주요 100장면을 소개한 ‘세계사 편력’이 바로 그것이다.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이 쓴 ‘달과 6펜스’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주식중개인인 가장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가정을 버리고 타히티 섬으로 가 화가가 된다는 내용이다. 달은 예술에 대한 열정, 6펜스는 세속적 삶을 상징한다. ‘설악산 화가’로 유명한 김종학씨도 42살의 나이에 홀연히 가정을 떨쳐버리고 설악산에 20년 넘게 파묻힌다. 그러나 그는 고갱과 달리 자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아버지로서 못다한 사랑과 바람을 편지와 화선지에 담아 보냈다. 편지와 그림이 딸을 키운 자양분이 되고 버팀목이 됐으니 ‘서신교육’ ‘화폭교육’이었던 셈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가 된 딸 현주씨가 그림편지 250통을 엮어 책으로 펴낸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카카오톡이니, 페이스북이니 하루가 다르게 소통의 신병기가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통병을 앓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부모와 자식들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부모·자식 간에 대화가 안 된다는 응답이 30~40%에 이르렀다. 미국산 소고기 사태에서 보듯 소통이 되지 않으면 불통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커진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화가 부족하면 자녀들이 탈선하게 되고 가정 붕괴로 이어진다. 거창한 편지는 아니더라도 자녀들에게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라도 자주 날려 소통하는 것이 어떨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인도통신] 매일 이웃집 여성 ‘훔쳐보던’ 남성 살해 충격

    [인도통신] 매일 이웃집 여성 ‘훔쳐보던’ 남성 살해 충격

    인도 중서부 뭄바이 인근의 한 지역에서 이웃 여성의 목욕하는 모습을 매일 같이 훔쳐보던 남성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1일 현지 NDTV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숨진 28세의 베르마는 우연히 옆집 벽에 있는 작은 구멍을 발견하고 구멍을 통해 옆집 여성이 목욕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이후 베르마는 매일 같이 구멍을 통해 옆집 여성의 목욕 장면을 훔쳐 보게 됐는데 남자의 이 같은 행동이 같은 마을 아주머니에게 발각됐다. 이 아주머니는 베르마를 조용히 훈계 했지만 이후에도 남자는 훔쳐보기를 반복하다 결국 마을 주민에게 알려졌고 성난 주민들은 베르마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심하게 폭행당한 남자는 뇌진탕과 과다 출혈 증상으로 인근 병원에 후송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현지언론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지 경찰은 베르마를 가해한 주민 3명을 구속했다.”고 전했다. 인도통신원 K.라지브 k.rajeev0828@gmail.com
  • 담배 피우는 초등생… 정부 대책은 ‘연기 속’

    담배 피우는 초등생… 정부 대책은 ‘연기 속’

    지난달 중순 저녁 서울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 인근 어두운 골목길 한구석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4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로 욕설을 하며 떠들어댔다. 한 어른이 집에서 나와 “아니, 어린것들이 어디서 못된 것을 배워 가지고….”라며 혼을 냈다. 아이들은 툴툴거리며 자리를 떴다. 최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인근 골목에서도 여학생 2명과 남학생 2명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누가 봐도 초등학생이었다. 초등학생들의 흡연 상황이 심상치 않다. 서울 관악구 모 초등학교 교사는 “5~6학년이면 한 반에 담배 피우는 학생이 1~2명씩은 된다.”고 말했다. 한 반에 25명이면 흡연율이 6% 이상이다. 그런데도 보건 당국은 호기심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이다. 자기 반에 담배 피우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서울의 한 교사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전체 학생을 훈계할 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학교 밖 흡연까지 단속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초등학생의 흡연에 대해 각종 유해 매체의 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강창서 한국학교보건협회 서울지부장은 “초등학생기에 사춘기를 맞으면 TV와 인터넷 등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에 막연한 호기심이 생기고, 더불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심리가 작용해 담배를 피우게 된다.”고 분석했다. 어릴수록 흡연 피해는 더 심각하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인천에서 생활하는 임모(26)씨는 10살이 되기 전부터 담배에 손을 댔다. 어려서 부모가 이혼, 누나와 함께 산 탓에 제재를 받지 않았다. 임씨의 키는 153㎝에 불과하다. 임씨는 조기 흡연으로 만성폐쇄성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카드뮴, 비소 등 50여종의 발암물질이 뒤섞인 담배 연기는 세포의 성장을 저해하고, 노화를 촉진하며, 인체 면역력을 떨어뜨려 조기 치매까지 부른다는 게 의료계의 연구 결과다. 심하면 만성폐쇄성 폐질환과 심근경색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 관계자는 “곧바로 심폐기능 저하 등 건강상 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게 조기 흡연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 국내에서는 초등학생의 흡연 실태조차 모르고 있다. 국민건강영양조사 등에서 실시하는 청소년 흡연율 조사 대상이 중학생 이상이기 때문이다. 금연 관련 단체에서도 초등생 흡연율 현황은 찾아보기 어렵다. 2009년 9월 학교보건협회와 정두언(새누리당) 의원이 수도권 8개 초등학교 6학년 학생 24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반에 몇 명이 담배를 피우나.’라는 질문에 23.4%인 562명이 ‘1~2명’, 4.7%인 138명이 ‘3~4명’, 1.5%인 35명이 ‘5~6명’, 0.5%인 11명이 ‘7명 이상’이라고 답했다. 한국교원대 연구자들의 초등학생 흡연 관련 학위논문 등에도 초등학생 흡연율이 10%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9) 조광조와 중종

    [선택! 역사를 갈랐다] (9) 조광조와 중종

    조광조(호 靜庵·정암, 시호 文正·문정)의 일생은 짧고 격절(激切)했다. 1519년(중종14) 겨울, 전라도 능주에서 사약을 마시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 젊은 선비가 남긴 일화들은 금세 신화가 되었고, 후세는 그를 성리학의 순교자로 기억하였다. ●절명시 전승되는 그의 최후 장면은 장엄한 서사다. 그때 조광조는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정중히 맞이하고, “임금께서 죽음을 명하셨다면 반드시 죄명이 있을 것이다.” 라며 죄명을 물었다. 그런데 가져온 명령서에는 죄명이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이렇게도 초라하단 말인가.” 라면서 “당장에 상소를 올려 바로잡아야 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에 관한 일이라 그만둔다”고 훈계했다. 사약을 마시기 전에 조광조는 시 한편을 읊었다. “나라님 사랑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소(愛君如愛父). 나라일 걱정 내 집안일처럼 걱정하였소(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세상을 내리쬐시니(白日臨下土), 밝고 밝게 비추어 내 마음 아시리라(昭昭照丹衷).” 이 서사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우선 그는 만고 충신이며, 지순(至純)한 도덕군자이고, 세사를 초탈한 영웅이란 것이다. 이것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조광조에 대한 집단기억으로 정착되어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끝없는 추모의 정을 불러일으켰다. ●기묘사화와 후세의 평가 정치가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쉬움으로 일관되었다. 학문이 완숙되기도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다 실패하였으니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이이(1536~1584, 호 栗谷·율곡)는 “사람들은 입 모아 말하기를, 시기가 성숙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라고 말했다. 조광조를 쓰러뜨린 것은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그 시작은 1519년 11월 16일(음력) 아침이었다. 중종은 남곤, 심정 및 홍경주와 함께 정치적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사로이 붕당을 지은” 죄로 조광조와 김정, 김식 및 김구 등 4명을 주범으로 몰았다. 윤자임, 박세희, 박훈 및 기준 등도 부화뇌동한 혐의로 엮였다. 붕당의 몸통으로 거론된 이들 8명은 당년 20~30대로,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각지로 유배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문제가 된 자신의 정치행위에 대해 조광조는 “나라의 병통이 이원(利源)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의 명맥을 영구히 새롭게 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알다시피 사적 ‘이익’의 추구는 성리학의 금기사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종반정 때 117명이나 되는 신하들이 마구잡이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봉된 것이 조광조 등의 입장에서 보면 큰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가 있는 76명의 공신칭호를 박탈하였다. 공신세력은 이에 분노했고, 중종은 반색하였다. 조광조 등이 숙청의 역풍을 맞은 것은 물론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네 가지 사실이 가려져 있었다. 첫째, 사건의 총지휘자가 중종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훈구파의 우두머리라는 남곤이 실상은 공신이 아니고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셋째, 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성격은 다양해, 기준과 권전 등의 급진파가 있었나 하면, 김안국·김정국 형제 등 소극적 지지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조광조의 노선이 실은 선배 박경(?~1507)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였다는 점이다. ●조광조는 박경의 후계자 1507년(중종2) 박경 등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다. 놀랍게도 조광조를 비롯해 그 동지 김식, 공서린 및 조광좌 등이 연루되었다. 주모자 박경은 사림파의 종장(宗匠) 김일손(1464~1498) 계열의 학자였다. 서얼이었던 박경은 정국공신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변란을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박경은 정치적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중용’(中庸)‘대학’(大學)을 숙독하는 것이 제일”이라며 성리학의 근본가치를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제를 폐지하고 대신에 ‘향리 선거법’ 즉, 추천제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또한 관행에 구애되지 않고 인재를 발탁할 것, 특히 서얼과 종친에 대한 차별을 문제 삼았다. 청년 조광조 등은 박경의 견해에 공감하였다. 서얼과 종친에 관한 부분을 뺀 나머지 사항들은 고스란히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중심축이 되었다. 한마디로 조광조 등은 박경의 뜻을 계승하여 성리학의 이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조광조의 도학적 리더십 조광조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 데는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우선 그는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법 집행이 공정하였기 때문에 서민들의 지지가 컸다. 오죽했으면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자 한성부 향도들이 들고 일어날 정도였겠는가. 그때 1000명이 넘는 유생들도 대궐에 난입해 조광조의 구명을 요구했다. 조광조는 소통에 능하였고, 그래서 동지들의 신뢰가 대단했다. 특히 김정 및 한충 등과는 큰 이불과 긴 베개를 펴놓고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가까웠다. 그들의 우정은 죽기까지 조금도 변치 않았다. 또한 조광조는 정치적 명분이 뚜렷했고, 모든 일을 끝까지 정열적으로 밀고나가는 사람이었다. 반대파에 대한 공격 역시 격렬했다. “벼슬을 얻으려고 애쓰거나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중요한 자리에 설 수 없게 되어, 겉으로는 칭찬하나 속으로는 욕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조광조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찬반 양편으로 갈라섰다. ●왕이 최고의 성리학자라야! 조광조는 요순시대의 재현을 확신했다. 1515년(중종15)의 증광문과시험 시권(답안지)에서 그는, 명도(明道)와 근독(謹獨)을 통해 황금시대를 복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펼친 이상(理想) 정치운동의 핵심은 왕도정치(王道政治)에 있었다. “임금은 하늘과 같고 신하들은 사계절과 같습니다.” 조광조는 이런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왕을 만인의 스승, 즉 군사(君師) 또는 철인군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중종에게 ‘근독’과 ‘명도’를 주문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상정치가 구현된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훗날의 예를 보아도 ‘군사’를 자처한 당대 최고의 석학 정조 때에도 요순시대는 재현되지 않았다. 그야 어떻든 조광조는 이상정치의 구현을 위해 중종에게 대학과 중용 공부를 강조하였다. 특히 대학을 중시하였다. “비록 대학 한 권밖에 없다 해도 (왕은)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광조는 ‘소학’도 높이 평가했다. “세종 때는 오직 ‘소학’의 도(道)에 마음을 썼으므로, 그 책을 널리 반포하였습니다.”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주희를 비롯한 송나라의 성리학자들도 이미 ‘소학’과 ‘대학’이 표리관계임을 말하였다. ‘소학’은 성리학적 행동규범을 가르치는 교과서요, ‘대학’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단계적으로 제시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새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인간적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중종 물론 조광조 등이 이념에만 매달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실제로 공신세력을 약화시켰고, 현량과를 실시하고 향약을 보급하는 등 몇 가지 개혁안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기묘사화라는 역풍에 휩쓸려 좌초하였다. 조광조 등은 위기가 닥쳐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세를 뒤엎지 못하였다. 왕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종이었다. 인간적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왕은 누구든 불신하였다. 우선 자신을 추대한 반정공신들도 믿지 못했다. 사림파를 요직에 임명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라고 해서 중종이 끝까지 총애할 리가 없었다. 중종은 4년간의 정치적 밀월 끝에 결국 조광조를 배신하였다. 처음부터 중종에게는 이상정치의 구현이라는 바람이 없었다. “왕은 (경연에서) 몸이 피로하고 괴로워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고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용상(龍床)에서 퉁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조광조와 김식 등은 중종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종이 ‘소인’(小人)들에게 쏠리는 날이 올 것을 예측하였다. 특히 조광조는 자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든 죄로 일망타진될 것을 내다보았다. 이러한 위험을 짐작하고서도 왕도정치의 길을 계속 걸어갔으니, 그들은 이상을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조광조의 유산 중종이 공신들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구체화한 것은 1512년(중종7년)쯤이었다. 부왕 성종이 사림파를 등용했던 것처럼 중종도 새 인물들을 찾았다. 그에 부응해 이조판서 안당이 조광조를 추천했다. 조광조는 동지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이성동 등 급진파는 삼정승까지 노골적으로 공격하며 개혁을 외쳤다. 왕과 공신들은 그들을 혐오하였다. 1519년 겨울, 그들은 사화를 일으켜 이상주의자들을 내쫓았다. 그러자 낡은 정치가 재연되었다. 중종은 외척과 권신들을 들였다 내쳤다하며 세월을 허비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선비들은 ‘불나비’ 조광조를 잊지 못했다. 그들은 조광조의 뒤를 이어 성리학 지상주의의 깃발을 더욱 높이 세웠다. 마침내 백인걸 등의 노력으로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 선비들의 영원한 아이콘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여기저기서 굉장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그 본영인 미국 경제가 벌써 몇 년째 신음소리를 낸다. 스페인과 그리스 등은 아예 국가부도의 위기를 맞았다. 한국사회의 현안인 양극화와 청년실업의 문제 또한 신자유주의의 여파다. 그래서 지금은 근본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고식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 의미의 새로움이 요청된다. 우리가 조광조의 부활을 소망하는 이유다. 21세기의 그 개혁사상가는 구체제의 귀결인 지배와 종속의 갈등과 분열을 넘어 공존공생의 평화공동체를 일으킬 것이다. 착취와 오염으로 병든 생태계에 새 숨을 불어넣을 그의 출현을 기다린다. 백승종(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 목숨과 욕망, 그 덧없음을 속삭이다

    목숨과 욕망, 그 덧없음을 속삭이다

    엽기적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쭉쭉’한, 그러나 모델답게 ‘빵빵’하지는 않은 헐벗은 여인네들이다. 그런데 엑스레이로 찍은 듯 몸뚱어리 곳곳에다 해부학적 특성을 모두 다 드러내고 있다. 말이 고상해 해부학적 특성이지, 피부 아래 숨겨진 근육, 힘줄, 뼈대 같은 것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징그러운 건 기본이고 투시도처럼 되다 보니 어느 부분에서는 약간 어색한 감도 있다. 알고 봤더니 패션계의 바이블로 통하는 잡지 보그(Vogue)를 찢어서 고스란히 썼다. 잡지를 장식하고 있는 멋진 모델들 위에다 볼펜 등을 이용해 드로잉을 올린 것이다. 미의 기준을 되묻는 작업이다. ●모델 몸 위에 새긴 죽음의 기호 5월 27일까지 서울 신림동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보그 모멘트’(Vogue Moment)전에 출품된 후미에 사사부치의 작품이다. 비슷한 톤의 작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죽음의 무도’(Totentanz) 도상들이 나타난다. 모델들의 해부학적 깊이를 드러내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모델 옆에다 죽음의 이미지를 볼펜 등으로 그려넣는 것이다. 중세 시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도상이다. 목숨을 수확해 가겠다는 듯 낫을 든 모습이 끔직해 보인다. 불멸성은 인간이 아닌 신의 속성이라는 재확인이다. 김행지 선임학예연구사는 “보그를 이용한다면 굉장히 팝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 이 작가의 경우 오히려 전통적인 드로잉에 충실한 작품을 선보여서 유럽에서 상당히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는 도상들의 현대적 변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현목 작가는 사진작업 ‘속물화’(Still of Snob) 연작을 통해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를 현대적으로 바꿨다. 네덜란드 정물화는 세상의 귀하고 아리따운 그 모든 것이 덧없다(Vanitas)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정 작가는 그 정물화의 구도 속에 샤넬 백 같은 요즘 시대의 명품을 배치해 뒀다. 고급스러운 사진 질감 위에서 정물화의 구도를 보는 맛이 새롭다. 양문기 작가의 ‘고급 돌’(Luxury Stone)은 아예 돌덩이들을 가방 모양으로 깎아낸 뒤 그 위에다 명품 로고를 새겨 뒀다. 돌을 깎아낸 모양새가 제법 명품스럽긴 하지만, 하기야 따지고 보면 명품 값은 상표 값 아니던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돌덩이로 깎은 명품가방, 비틀어진 탐욕 그럼에도 우리는 저마다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다 죽어가던 유럽의 소규모 공방들을 일본에 이어 한국과 중국이 다 먹여 살리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써 보고나 싶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욕망을 잘 즈려밟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약간의 위화감도 느끼지 않던가. 그래서 작가들의 비판적인 시선보다는 김지민 작가의 ‘바니타스홀릭’(Vanitas-holic)이 더 재미있다. 훈계조로 일러주기보다 슬쩍 비틀어 놔서다. 마치 일가족처럼 서 있는 인물 군상들인데, 이들 몸은 온통 하얗게 균질하게 칠해져 있는데다 복장이나 액세서리도 별다른 차별성이 없다. 그런데 얼굴에만은 뭔가가 잔뜩 모여 있는 형상이 붙어 있다. 뭔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남자의 얼굴에는 멋진 자동차가, 한 여자의 얼굴에는 화장품 로고가, 남자 아이 얼굴에는 닌텐도 게임기가, 개와 고양이 얼굴에는 맛난 먹을거리가 들어앉았다. 사진이나 상표 같은 것을 수백개씩 동그랗게 이어 붙여져 있다. 우리가 사는, 몽롱한 모습이다. (02)880-950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길섶에서] 계량적 사고/주병철 논설위원

    “인간은 양이 아니라 질의 세계까지도 숫자로 나타내려 한다. 이젠 인간의 기능까지도 IQ라는 숫자로 측정해 내고 있다. 통계나 퍼센티지로 저울질하는 인간의 마음은 고깃간의 그 소고기처럼, 저울대 위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문필가가 쓴 글귀다. 사람이 얼마나 계량적 사고에 함몰돼 있는가를 말해준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이런 걸 경험했다. 호스트가 술잔을 계속 돌리길래 “나는 벌써 ○잔 이상 먹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권하길래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몇잔 더 먹었다.”고 했다. 대뜸 훈계가 뒤따랐다. 어떻게 술잔을 숫자로 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술을 많이 먹었다.” “술이 취한다.”는 표현으로 하는 게 더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한방 얻어맞은 듯했다. 사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계량적 사고에 젖어 살아가고 있다. 술잔뿐이겠는가. 모든 걸 숫자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념적 성향도 숫자로 얘기하는 사회가 아닌가. 계량적 사고는 너무 각박한 듯하다. ‘감성적 사고’로 틀을 바꿔야겠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파인트리 특혜’ 중징계 대상자 시·구 유관부서서 버젓이 근무

    서울시가 특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강북구 북한산콘도, 일명 파인트리 개발과 관련된 각종 특혜의혹을 조사하면서 중징계 대상자로 지목한 시 공무원 9명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도 시·구 유관 부서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에는 현직 구청장,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시 간부도 포함돼 있었다. 서울신문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파인트리 관련 징계대상자 명단과 직책 자료를 28일 단독 입수했다. 중징계 조치를 받은 공직자는 인사위원회에 회부해야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지방공무원법상 2년의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훈계 조치만 받았다.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중징계 대상자 가운데 가장 고위급은 최창식 당시 부시장이다. 그는 도시계획위원장으로서 파인트리 설계변경을 승인해 줬다. 현재 중구청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서울시의회가 결성한 ‘북한산 콘도개발 비리 의혹 규명을 위한 행정사무조사 특별위원회’가 여러 차례 증인출석을 요구했는데도 이를 거부해 과태료 500만원 처분까지 받았다. 최 구청장과 함께 지도감독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은 이인근 당시 도시계획국장은 지난 1월 박원순 시장이 3급 이상 인사를 단행할 때 보직을 받지 못해 1급으로 승진 사퇴한 뒤 현재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초빙교수가 됐다. 유관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은 5명이나 됐다. 당시 시설계획과장과 팀장으로 일했던 전용형, 이성로씨는 지금도 시 도로시설관리과장과 마곡지구 추진단 팀장으로 버젓이 일하고 있다. 이항구 당시 도시계획과장은 1년간 공로연수까지 다녀온 뒤 지난해 6월 정년퇴직했다. 시 관계자에 따르면 박 시장은 조사결과를 보고받은 뒤 징계시효가 경과된 공직자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 등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재발방지와 제도개선 등 후속 종합대책을 마련할 것을 이제원 도시계획국장에게 주문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씨줄날줄] 스칸디 대디/최광숙 논설위원

    “부지런할 근(勤), 검소할 검(儉),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더 나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두 아들인 학연과 학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벼슬해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를 장만하지 못했으나 이 두 글자를 정신적 부적(符籍)으로 마음에 지녀 살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고 아들들에게 가르쳤다. 다산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버지로서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지침을 일일이 제시하고자 했다. 어찌나 자식들 교육에 신경을 썼는지는 아내가 보낸 빛 바랜 치마폭을 잘라 4첩의 서책 ‘하피첩’(霞皮帖)을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기에 아들들에게 필요한 훈계와 당부를 적어 보냈다. 시집 가는 딸에게는 치마 한 폭에 ‘매조도’를 그려 보내기도 했다. 다산의 애틋하고도 속 깊은 부정(父情)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자녀 양육에 있어 부모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 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러나 요즘 자신의 딸을 각별히 아끼는 ‘딸바보’ 아빠들이 전 세계 각지에 넘쳐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어머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두 딸을 가진 오바마 미국 대통령만 봐도 그렇다. 2009년 눈이 많이 내려 학교가 문을 닫자 그는 이 정도 눈에 문을 닫느냐고 학교 당국자들을 힐책하고 다음 날 둘째 딸이 다니는 학교까지 방문한, 교육열에 불타는 아빠다. 지난해 말에는 딸들에게 페이스북 금지령을 내려 “딸들의 아빠인 오바마도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딸들이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사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게 이유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부모들 사이에 ‘스칸디나비아식 자녀 양육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더 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아시아식의 엄격한 자녀 교육을 하는 ‘타이거 맘’(호랑이 엄마)은 이제 지고, 스웨덴·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의 ‘스칸디 대디’(스칸디나비아 아빠)가 뜨고 있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식 양육법의 핵심은 바로 아버지들의 적극적인 양육 참여다. 부모가 가정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그들의 양육법 10가지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위한다고 해도 나머지 가족이 아이에게 맞춰 주는 방식은 안 된다.’는 지적이다. 매사에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가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열차 안에서는…] “왜말려” 분당선 담배녀 논란

    운행 중인 전철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중년 여성이 이를 말리던 남성에게 욕을 퍼붓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돼 논란이 일고 있다. ‘분당선 담배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18일 오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등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동영상에는 분당선 상행선에서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이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담뱃재를 떠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여성은 옆에 앉은 중년 남성에게 담배를 빼앗기자 “이 XX야.”라는 욕설을 하며 달려들었고 한 청년이 몸싸움을 말리는 것으로 장면이 끝난다. 네티즌들은 동영상에 나오는 중년 여성에 대해 ‘무개념의 최고봉’이라는 등 댓글을 달며 비난했다. 전철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범칙금 3만원이 부과되지만 개포동역 역무원이 이 여성을 훈계만 하고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철도 당국의 조치에도 비판이 쏟아졌다. 국토해양부 산하 철도특별사법경찰대는 파문이 커지자 진상 조사에 나섰고, 사건이 지난 17일 오후 2시 40~50분쯤 발생한 것을 확인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문화마당] 팬덤 문화의 두얼굴/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문화마당] 팬덤 문화의 두얼굴/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최근 ‘사생팬’이 각 포털 검색어 순위에 일제히 올랐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좇는 극성팬을 지칭하는 말이다. 얼마나 좋아하면 그럴까 싶지만, 도가 지나쳐 자칫 범법의 수위를 넘나드는 일이 허다하다. 그 심각성이 오래되었지만, 뚜렷한 해법이 묘연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유명 아이돌 그룹이 소속된 기획사일수록 감내해야 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생팬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고 공격적이다. 그 집요함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정도다. 외형적 동선으로 살펴보아도 사생팬은 자신의 일상을 포기한 것처럼 보여 걱정이 앞선다. 아이돌 그룹이 포진한 대형기획사 앞에서 진을 치고 노숙하는 모습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팬들의 부산한 움직임은 임대한 택시를 이용할 만큼 기동력까지 갖췄다. 연예인의 이동이 시작되는 동시에 실시간으로 근접해 움직임을 따라잡는다. 사고의 우려도 높다. 도로 위의 곡예가 펼쳐진다. 단 한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치고는 너무 위험천만하다. 사생팬의 정보력도 놀랍다. 단순 스토커의 범주를 뛰어넘을 만큼 주도면밀하다. 장난 전화가 너무 잦아 연예인이 휴대전화를 바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번호까지 알아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사를 하는 집 앞에서 대기하는 팬들과 맞닥뜨릴 때 손발이 떨렸다는 일화가 가십 뉴스로도 알려진 바 있다. 무단침입은 많은 연예인들이 팬들에게 당한 사례 중 하나다. 위성항법장치를 통한 차량 추적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도청은 물론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 연예인과 대면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이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사생팬들이 라이벌 관계의 연예인들에게 가하는 위해는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 팬덤 경쟁의 역사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상당히 ‘진화’해 왔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남성 팬과 친분이 있는 여자 연예인에게 얼굴을 난도질한 사진과 함께 면도칼을 우편으로 보낸 사건은 대표적 사례다. 위해 물질이 든 음료수가 배달되고 입에 담기 힘든 극단적 내용이 담긴 혈서 사건들은 그 심각성에 경종을 울렸다. 걸그룹의 한 멤버는 공연 도중 난입한 남성팬에게 끌려나가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웬만한 대중 인기 스타들이라면 극성팬들의 도를 넘어선 애정 공세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훈계하고 타이르는 것도 무용지물이다. 팬들의 묵과할 수 없는 ‘무경우’는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일들은 매니저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도 남는다. 극소수의 팬덤 행태이기는 하지만, 가요계가 음악성보다 비주얼 중심으로 변질되면서 이 같은 현상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생팬들의 관심이 음악이 아닌 ‘특정 가수’에게 집중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극대화됨으로써 팬덤의 결과물이 실시간으로 드러나 과열 경쟁을 부채질했다. 이것을 중재할 대안은 모색하지 않은 채 우리는 더 새로운, 더 트렌디한 콘텐츠 만들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혀를 차며 과열 팬덤을 삿대질했다. 일반 청소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날 기회가 없고 소통도 불가능한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포용할 대화 상대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찾을 수 없다. 마음이 맞는 또래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와 방송, 문화계가 전방위적으로 이러한 문화적 대안에 현실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일그러진 팬덤은 ‘지속 발전’할 것이다. 대화 없는 소통은 불가능하다. 얼마 전, 화려한 데뷔로 주목을 받았던 한 젊은 뮤지션의 팬 사인회장에서 만난 60대 여성 팬의 말이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백발이 아름다웠던 그녀는 젊은 뮤지션 앞에 나타나 응원하는 것이 행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눈물까지 맺혔다. 마치 소녀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팬이다.
  • [열린세상] 명품시대 명품인생/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열린세상] 명품시대 명품인생/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최근 경제는 어렵다는데 명품시장은 호황이란다. 덩달아 백화점이나 면세점의 명품 수입도 불경기를 모른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외국에서 수입한 명품 판매율은 매년 30%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 국내 명품시장 규모만도 5조원이 넘는다. 덤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4대 명품시장으로 부상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가히 명품시대라 할 만하다. 이 명품시대에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며 오는 생각이 있다. 명품인생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명품인생일까? 하도 복잡다기한 세상인지라 하나의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 하도 상대주의가 만연한 세상이라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명품을 사고 또 이를 얻기 위해 분주한 명품족이 명품인생의 전형이 될 수는 없다. 흔히 가격이 오르는데도 과시욕이나 허영심 등으로 인해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베블런효과(veblen effect)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속물효과 또는 속물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계층 간의 양극화가 날로 커져 가는데 사회 지도층부터 일반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명품 열기에 젖어든다면 그게 바로 속물현상이 아닐까. 도덕군자인 양 훈계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명품(名品)은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작품 정도로 이해된다. 한편으론 이름뿐이거나 허울 좋은 물건 혹은 작품이란 의미도 있을 수 있겠다. 어찌 보면 최근에는 후자의 의미가 더 적격일 것 같다면 지나친 편견일까. 언제부턴가 우리사회는 제자리에서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을 촌스럽게 여기고 남을 따라하거나 과시하려는 풍조가 만연해지고 있다. 어린 학생들조차 명품 옷을 입어야만 한다. 하다 못해 짝퉁이라도 걸쳐야 외출을 할 수 있다. 너도나도 대학을 가야만 한다. 그것도 일류대학병에 젖어 온 나라가 사교육과 스펙 쌓기에 정신이 없다. 학업에 매진해야 할 학생에서부터 가정주부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패션과 외모 치장이 주관심사가 되었다. 방송은 밤낮없이 연예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동네 뒷산 오르는 데도 값비싼 등산복을 입어야 사람 대접 받는다. 성능 좋은 국산 승용차가 외국에서는 호평을 받건만 분수에 맞지 않게 외제차를 거들먹거리며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너도나도 특급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것 누리고 사는데 웬 참견이냐고 타박할 수도 있다. 성공에 대한 성취 의지를 폄하하느냐고 오히려 꾸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이런다고 인생이 더 행복해지는 걸까. 최근 갤럽 조사에 따르면 40여년 전에 비해 국민 소득은 200배 이상 올랐지만 행복도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공허한 자아를 허망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 분주한 우리네 모습이 마치 기약도 없이 바위를 굴리고 또 굴리는 시시포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나만의 기우일까.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사는 지금, 나보다는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고 내실 있는 삶을 찾는 문화가 속 빈 명품문화 대신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주변에서 쉬운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혼잡할 때 무리해서 타지 않기,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타기 등 이른바 지하철 10대 에티켓만 잘 지켜도 사회는 좋아질 것이다. 전화 친절하게 받기, 빨간 불일 때 서고 녹색 불일 때 가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목례나 미소 짓기 등 정말 쉬운 일 같지만 지켜지지 않는 일들이 주변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내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주변과 사회를 위해 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내 것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보니 보지 못할 뿐이다. 아니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예수의 말씀처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온전히 사랑하지는 못할지라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좋은 이웃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명품인생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내 것만 챙기지 않고 이웃과 사회를 배려하는 소박한 삶이 명품인생이 아닐까.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