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후회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셰플러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의혹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미혼모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홍콩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875
  • [이공연 놓치면 후회]소망·인연·기다림·회상 ‘4는 이야기’

    정태춘,장사익,김용우,이상은 등 저마다 색깔있는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4인의 소리꾼이 한무대에 선다.25일 오후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 ‘노래로 그리는 네가지 빛깔’. 이들은 각기 하나의 테마를 잡아 그에 맞는 노래들을 들려준다.먼저 스타 소리꾼 김용우는 ‘소망’을 주제로 향토적이면서 정감어린 무대를 선사한다.최근 시집을 출판하며,다양한 예술활동을 펴고 있는 가수 이상은이 택한 주제는 ‘인연’.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정태춘은 ‘기다림’이란 테마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한 노래들을 들려주고,구수한 목소리의 장사익은 ‘회상’이란 주제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한다. 이번 공연은 기존의 곡들을 국악관현악으로 새롭게 편곡해 색다른 느낌을 전달해주는 무대로 기대를 모은다.김성진씨가 지휘하고,음악평론가 윤중강씨가 사회를 맡는다.1만∼5만원.3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된다.(02)399-1185. 이순녀기자 coral@˝
  • [삼성증권배 2004 프로야구] SK 김기태 ‘아름다운 조연’ 선언

    “큰 기태는 가고 작은 기태만 남았습니다.그래도 주연보다는 조연이 마음은 편한데요.” 프로야구 경기가 없던 지난 17일 오후 인천 문학구장.정적이 흐르는 한낮 햇살 속에 SK의 고참 김기태(35)가 30분째 러닝 중이다.그의 이마에 어느덧 자리한 굵은 주름살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이젠 끝났다.’는 비아냥을 뒤로 하고 ‘해결사’로 돌아온 김기태가 땀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이젠 주연자리 후배에게 내놓을 때 김기태의 방망이는 요즘 후끈 달아올랐다.18일 현재 타율 .361로 이진영(SK)·이영우(한화)를 맹렬히 추격하며 당당히 타격 3위에 올랐다.게다가 득점권 타율은 .533으로 1위여서 영양가 만점이다. 김기태에 대한 수식어는 ‘교타자’보다는 ‘거포’였다.프로야구에 첫 발을 내디딘 지난 1991,1992년 각각 27,31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이 부문 2위를 차지했다.94년에는 좌타자로 첫 홈런왕까지 올랐다.그러나 서른살이 되던 2001년,무홈런과 1할대 빈타에 허덕인 이후 내리막길로 돌아섰다.부드러우면서도 빠른 배트 스피드로 ‘왼손 타자의 교과서’라 불리던 그였지만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었던 것.그래서 올해부터 배트를 짧게 움켜쥐었다. “욕심 같아서는 스타로 남고 싶죠.그러나 14년 동안 주목을 받았으면 충분합니다.파워나 스피드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젠 주연 자리를 후배들에게 내놔야죠.마지막까지 좋은 선수로 남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신뢰감 주는 지도자가 될 것 그가 방망이를 처음 쥔 것은 26년 전인 초등학교 5학년 때.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스타 장훈을 동경해서다.공부를 곧잘 하던 그를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던 어머니도 그의 야구에 대한 고집을 꺾진 못했다. 중학교 때 이미 ‘술·담배’를 시작하며 헤매던 그가 마음을 잡은 것은 대학(인하대)에 진학한 이후.처음으로 고향 광주를 떠났을 때다. 그는 “난생 처음 빨래하고 청소도 하다 보니 부모님께 더 이상 실망감을 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내 인생은 야구뿐’이라는 판단이 서면서 야구에 대한 뚜렷한 직업 의식을 갖게 됐다.”고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지난해 현대와의 한국시리즈를 꼽는다.김기태는 “결국 패한 뒤 눈물도 많이 흘렸다.”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 해 뛰었던 만큼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새내기였던 91년 ‘국보급 투수’ 선동열에게 첫 홈런을 뽑았던 것도 잊을 수 없다.2루 베이스를 돌면서도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사실 홈런은커녕 안타도 쳐낼 수 없다고 여겼다. 올해 초 선수들이 ‘감독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선수’로 김기태를 지목했다.실력만큼 강한 카리스마와 부드러운 인간미를 갖추었기 때문이다.그는 “선수들과 진정한 신뢰 관계를 갖는 ‘맏형’ 같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식들은 평범하게 살았으면 그는 지난해 봄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했다.아내 신세영(34)씨가 면역계 난치 질환인 ‘루프스’로 쓰러졌기 때문이다.요즘은 가끔 외출도 할 정도로 호전됐지만 당시만 해도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였다.김기태는 “부상과 훈련 부족에다 아내마저 쓰러지니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쁜 선수 생활이지만 두 아들 건형(8)과 대영(5)에게는 최고의 아버지이다.틈날 때마다 아이들과 집 근처 공원에서 ‘부자 야구’를 즐길 정도다. 그러나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것은 그리 반기지 않는다.“주위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게 고맙죠.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평범한 생활이 그리워지더라고요.요즘 꿈은 보통 팬들처럼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야구장에서 편안하게 경기를 보는 것입니다.” 인천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쨍하고 연기 물오른 지성

    ‘애정의 조건(KBS2)’을 볼 때마다 은파(한가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갔다.저렇게 잘해 주는 남자를 왜 굳이 마다할까.나라면 덥석 그의 손을 잡을 텐데….한 여자에게 ‘아낌없는 나무’가 되어 주는 윤택을 부드러운 남자 지성이 맡지 않았다면 은파가 조금 덜 밉지 않았을까. 예의 그 반듯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 있는 지성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화려한 프린트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왠지 그에겐 먼지 한 톨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매끈한 슈트가 더 어울릴 거라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몸이 안 좋은데 오늘은 특히 더 그렇네요.목에서 등줄기까지 짜르르한 게 꼭 몸살 걸릴 거 같아요.”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건 갈라진 목소리뿐.낯색이나 표정은 여유로웠다.배역도 맘에 드는 데다 드라마도 순풍이니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할 듯싶다.“드라마가 안되면 별별 탓을 다하는데 이번에 그런 게 없으니까 너무 편해요.윤택이는 밝고 순수해서 맘에 들었어요.첫사랑을 향해 조건없는 사랑을 쏟는 정말 괜찮은 친구죠.” 언뜻 보기에 그는 비슷한 역할만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 조금씩 ‘진화’해 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캐릭터가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인물에 대해 한번도 쉽게 접근해본 적이 없어요.윤택이도 마찬가지고요.” 변신에 대해서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제가 갑자기 악역이나 터프한 역을 맡으면 보시는 분들이 거부반응 일으키지 않을까요? 멜로 하나도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그는 특이한 역할을 원한다.영화 ‘레인맨’에서 자폐증 환자로 나왔던 더스틴 호프먼의 연기에 매료돼 연기자의 꿈을 키웠던 그다.“2년 전 ‘그녀와 헤어지기 몇시간 전’이란 단막극에서 시력을 점차 잃어가는 남자로 나왔었는데,이런 인물에 매력을 느껴요.” 조바심을 내지 않는 건 대박을 터뜨린 ‘올인’ 이후 ‘왕의 여자’로 참담함을 맛봤기 때문일까.막강 사극 ‘대장금’의 기세가 워낙 대단해 고전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조기 종영의 수모까지 겪을 줄이야.그러나 지성은 정작 “많은 걸 배웠다.”며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여유를 보였다.기자에게 “역시 안 보셨죠?”라고 애교스럽게 물을 정도다.“임금(광해군) 역할에 대한 중압감이 컸어요.무게감 있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죠.근데 하다보니 ‘아! 나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에게선 넘치는 끼보다 델 것 같은 열정이 느껴진다.그 덕에 데뷔 사연도 드라마틱하다.첫 작품은 ‘카이스트’.“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해보고 싶어서 114에 물어 프로덕션으로 직접 전화를 했죠.사진 보내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오디션 보는 날이었어요.갔더니 TV에서 봤던 애들이 다 앉아 있는 거예요.(웃음)” 연기의 ‘연’자도 몰랐지만 오히려 때묻지 않은 풋풋함이 점수를 따 기회를 얻었다. 운좋게 데뷔했지만 갑작스런 연기 생활은 한편으론 고통이었다.“아무도 가르쳐 주지는 않으면서 너무 많을 걸 요구하는 거예요.정말 괴로웠죠.” 그래서 가진 공백기.철저하게 배우가 되자고 결심했다.본격적인 연기 수업도 받고 책도 많이 읽었다.복귀 이후 ‘결혼의 법칙’으로 출발,‘화려한 시절’‘햇빛 사냥’‘올인’‘왕의 여자’‘애정의 조건’까지 쉼없이 달리고 있다. 하반기에는 스크린에도 다시 도전한다.영화 얘기가 나오면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다.첫 번째 영화냐고 물었던 것.“아니죠.사전 조사가 너무 없었네요.” 애써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한술 더 뜨는 기자.“(기억을 더듬으며)개봉은…했었나요?” 뜨악한 표정에 순간 긴장했지만 사람 좋은 미소 때문에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아∼,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 받았다면 정말 상처받았을 거예요.(웃음)” 출연작을 처음엔 굳이 밝히길 꺼렸했지만 두 손을 입에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휘파람 공주예요.(웃음)” 박상숙기자 alex@ ■ 여친 박솔미 인터뷰에서 또 한차례 고비를 맞은 건 만인이 다 아는 여자친구(박솔미) 때문.지성과 박솔미는 이병헌·송혜교에 이은 또 하나의 ‘올인 커플’.인라인스케이트 타는 걸 즐긴다는 그에게 “여자친구도 같이요?”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이내 입이 다물어지고 미소가 굳는다.당당하게 공개한 사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에게 없던 호의가 생긴 건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별로 숨길 것도 없는 연애 사실을 공공연한 비밀에 부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시시콜콜 밝히지는 않더라도 뭔가 여자친구에 대한 호쾌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움츠러드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다들 사귄다니까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보시는데 정말 부담돼요.” 질릴만도 하다.게다가 박솔미가 속해 있는 기획사에서 ‘한 두름’으로 엮이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각자 활동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꼭 그럴까? 이·송 커플을 보라.연인 선언 이후 따로 또 같이 각종 CF를 휩쓸고 있지 않는가. 어쨌든.그래도 영화 ‘바람의 전설’은 빼놓지 않고 봤다.운동을 좋아해 요즘 합기도를 배운다는 그.“춤은 안 배워요?” 마지막으로 웃으며 던진 농담에 “아! 글쎄,왜 이야기를 자꾸 그쪽으로 끌고 가죠?” 지성보다 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안절부절이다. 박상숙기자˝
  • [이공연 놓치면 후회] 전통 창극 ‘심청전’ 공연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안숙선)이 16일부터 3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전통 창극 ‘심청전’을 공연한다.98년부터 지난해까지 판소리 5대가를 중심으로 한 완판 장막 창극을 선보였던 국립창극단이 보통 4∼6시간에 달하는 완판 창극을 절반으로 압축해 선보이는 정통 창극 시리즈의 첫번째 무대. 국립창극단 원로단원으로 영입된 오정숙 명창과 김일구 명창 등 내로라하는 큰 소리꾼들이 대거 등장해 극에 무게감을 실어준다.‘춘향전’의 월매역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오정숙 명창은 장정승 부인역을,마당극 ‘뺑파’를 연출했던 김일구 명창은 심봉사역을 맡는다.김일구외에 최영길과 왕기철이 번갈아 심봉사로 분하고,심청으로는 김지숙,김유경,오민아 등 신세대 소리꾼이 열연한다. 판소리계 큰 스승인 서우향 명창이 작창을 맡았고,창극 연출의 베테랑인 김효경 서울예대 교수가 영상을 활용한 독특한 무대를 선보인다.(02)2280-4114. 이순녀기자 coral@˝
  • ‘미국인 참수’ 동영상 공개 충격

    한 이슬람 저항단체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에 대한 복수로 이라크에서 미국 민간인의 목을 벤 뒤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미국인들이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끝까지 관련자들을 추적해 처벌하겠다고 밝혔다.이라크 사태가 ‘피의 보복의 악순환’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11일(현지시간) 알 카에다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이슬람 저항단체 ‘문타다 알 안사르’의 웹사이트에 복면을 쓴 이슬람 저항단체원 5명이 손목이 뒤로 묶인 미국인의 목을 베는 장면이 공개됐다. 한 단체원은 처형에 앞서 “미군들의 어머니·아내들에게 전한다.”며 인질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일부 수감자들과 교환하자고 미 행정부측에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그는 “이렇게 살해되는 (미국인의) 관(棺)들 외에는 우리는 아무 것도 주지 않을 것”이라며 부시 대통령을 “서방의 개”라고 부르고 “당신의 최악의 날이 오고 있다.당신과 미군들이 이라크 땅을 밟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이어 단체원들은 “신은 위대하다.”고 외쳤고 그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는 희생자의 목을 칼로 벤 뒤 잘려 나간 목을 카메라 앞에 들어 보였다. 희생자는 필라델피아 웨스트 체스터 출신의 니컬러스 버그(26)로 밝혀졌다.그는 숨지기 전 자신과 부모·형제의 이름,출신지 등을 밝혔다. 버그는 송·수신탑을 세우는 통신장비 기술자로 이라크 재건사업 참여 업체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라크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지난해 12월 말부터 지난 2월1일까지 바그다드에 머물다 돌아갔으며 다시 3월 이라크에 입국한 뒤 3월30일 귀국 예정이었으나 6일 전인 24일 북부 모술의 검문소에서 체포돼 4월6일까지 이라크 수용소에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이어 4월9일 가족과의 교신을 마지막으로 실종됐다.버그는 지난 9일 바그다드의 한 도로 옆에서 목 없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한편 웹사이트는 버그의 목을 벤 인물이 오사마 빈 라덴의 최고위 측근이자 이슬람 테러단체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라고 밝혔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황장석기자 외신 surono@seoul.co.kr˝
  • 고개숙인 ‘영원한 집사’

    “무엇이 내 참모습인지도 알지 못한 채 헤매다 (인생)가을의 끝자락을 향해 서버렸습니다.” 10일 불법정치자금 27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도술 피고인은 징역 6년을 구형받으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최 피고인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두 아들의 돌림자를 ‘바를 정(正)’으로 정했다.”면서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국민과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는 몹쓸 죄인이 되어 한없이 부끄럽다.”고 말했다.이어 “보잘 것 없는 지난 세월을 많이 반성하고 후회한다.”고 덧붙였다.‘영원한 집사’답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충정’도 빼놓지 않았다.최 피고인은 “노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뒤 국민들에게 성공한 대통령으로 오랫동안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면서 “그때 나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인측은 “검찰과 특검이 여론과 실적을 의식해 무리하게 수사·기소했다.”면서 “회계책임자로서 관행에 따랐을 뿐이란 점을 깊이 고려해 달라.”고 선처를 호소했다. 정은주기자 ejung@
  • [서울광장] 초선의원 187명이 할 일/오풍연 논설위원

    국회를 ‘민의의 전당’이라고 한다.백성의 뜻을 모으는 크고 화려한 집을 말한다.17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다음 달 개원과 함께 정식 입주를 한다.이제부턴 의사당의 주인으로서 모든 역량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전체 의원 299명 가운데 63%를 차지하는 초선 의원 187명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크다고 하겠다.16대 때는 초선의원 비율이 41%(111명)에 머물렀다.이는 새 정치를 바라는 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 만큼 초선들이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다.적을 알고,나를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얘기다.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들이 있다.먼저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대학에 들어가면 책을 손에서 떼듯,‘금배지’를 단 뒤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상임위를 지켜보면 의원 개개인의 실력을 금세 알 수 있다.각 당 스터디 그룹이 활성화되고 있는데 환영할 만한 일이다.초심을 잃지 말아야 연구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또 오는 13일부터 이틀간 실시되는 ‘의정 과외’를 통해 비법(法)을 전수받기 바란다.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국회 도서관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학위논문실,국제기구·통일자료실,정간·신문열람실,비(非)도서자료실,마이크로폼자료실,멀티미디어실,의회·법령자료실 등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보유 도서만도 180여만권으로 국내 최대 규모다.그런데도 4년 동안 한 번도 들르지 않는 의원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지난해 1년 동안 의원열람실을 이용한 의원은 연인원 2880명에 불과했다.하루 평균 8명꼴이다.창피한 이용률이다. 소신을 가지고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의원은 한 명 한 명이 입법기관이라 할 수 있다.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권한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여야를 불문하고 중진들이 ‘줄서기’를 강요할 것이다.벌써부터 그런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후문이다.뜻을 같이하는 의원끼리 만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그러나 모임이 잦아지면 파벌이 생기고,사당(私黨)화를 초래할 가능성은 커지기 마련이다.그보다는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돈 안 쓰는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선거법 및 정당법 개정으로 돈 안 쓰는 토대는 마련됐다고 본다.돈 쓰는 정치를 하다 보면 유혹에 빠져들기 쉽고,그로 인해 패가망신하기도 한다.지금 서울구치소에는 10여명의 여야 의원들이 돈 수수혐의로 구속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다.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민원(民願)을 멀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또 자세를 낮추기 바란다.여의도에 입성한 이후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선량이 자기과시를 해서는 안 된다.이는 국민을 배반하는 행위다.공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다음 번도 보장된다.그런 점에서 의원사무실의 문턱을 낮출 것을 당부한다.문을 활짝 열어놓고 보좌진들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의총에서 발언을 많이 하는 게 좋다.의총에는 매번 ‘단골손님’만 나온다.의총은 당론을 모으고,개인의 소신을 펼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의총장에서 뒷짐을 진 채 남의 집 닭 보듯하는 선배의원들의 뒤를 밟으면 안 될 것이다.의총이 활성화된 당은 미래도 밝은 법이다. 지역구도 잘 챙겨야 한다.수도권 의원들은 선거 때만 되면 얼굴을 내미는데,그래서는 곤란하다.이 경우 다음 선거에서 당선은 힘들어 진다.계획표를 잘 세워 후회없는 의정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4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
  • [박기철의 플레이볼] 감독의 선택

    2004년 한국프로야구는 시즌 전의 예상과는 달리 현재 치열한 순위싸움 중이다.이런 박빙의 순위 경쟁을 하게 되면 가장 피가 마르는 사람은 감독이다. 야구는 단체 경기이면서도 가장 세밀하게 개인 기록을 집계한다.따라서 팀 성적이 좋지 않아도 개인 기록만 좋으면 혼자 웃을 수 있다.코치도 자신이 담당한 선수들의 기록만 좋으면 흐뭇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다.왕년에 홈런 타자로 명성을 날린 모 선수는 팀이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어도 자신이 홈런을 날리면 주위의 눈치를 안 보고 너무 기뻐하다가 눈총을 받기도 했다.결국 그 선수는 은퇴 후에 아무도 지도자로 불러주지 않았고 철 없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 팀 성적이 나쁜데 선수가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으면 감독은 선택의 폭이 제한된다.특히 연속 경기와 관련된 기록은 더욱 고민스럽다.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선수는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한번은 출전을 시켜줘야 한다.타자가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세우고 있으면 아무리 천적 투수가 나와도 대타를 내보내지 못한다.투수가 연승 기록을 이어가면 아무리 난타를 당해도 최소한 동점을 허용하기까지는 기다려 주어야 한다. 심지어 상대 선수가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는데 고의 4구로 내 보내면 여론의 빗발치는 질타를 듣는 스포츠가 야구다.다른 스포츠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지도자는 없다.야구 감독만 영어로 ‘Coach’가 아니라 ‘Manager’로 번역되는 이유이기도 하다.기술만 지도하는 게 아니라 경영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실제로 메이저리그 초창기인 19세기 후반의 감독은 대부분 구단주를 겸했다.프로야구의 재정 규모가 놀랄 만큼 커진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감독은 구단주에게 고용되는 신분으로 변했지만 감독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성적이 좋지 않으면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된 것이다.이런 고민을 안 해도 됐던 유일한 사람은 필라델피아의 감독이었던 코니 맥.그는 구단주를 겸했던 덕에 짤릴 걱정은 없었다. 1901년부터 무려 50년간을 말뚝 감독으로 지내며 3776승을 올린 역대 최다승 감독이 됐다.하지만 패전은 승보다 더 많은 4025경기나 됐다.감독을 다른 사람에게 시켰다면 연봉은 더 들었겠지만 승도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10-0으로 이기고 있는 경기의 7회쯤 되면 감독은 선발 투수를 아끼기 위해 구원 투수를 넣어야 하는지,아니면 구원 투수를 아끼기 위해 완투를 시켜야 하는지 고민한다.선발 투수에게 완봉승이나 노히트 경기의 영예를 주는 것은 다음 문제다.감독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다.감독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면 야구가 더 재미있다. 스포츠투아이 상무이사 tycobb@sports2i.com˝
  • [삶과 경영 이야기⑧] 과자 생산 58년 크라운제과 윤영달 사장

    ‘죠리퐁,콘칩,쵸코하임,쿠크다스,뽀또,미니쉘….’58년 동안 과자생산 ‘외길’을 고집해온 크라운제과가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은 과자 이름이다.기성세대인 40∼50대가 코흘리개 때 먹던 간식에서부터 ‘첨단 세대’인 10대 입맛에도 맞춘 이들 제품에는 독특한 신개념 경영철학이 깃들어 있다. 윤영달(尹泳達·59) 사장은 창업주인 고 윤태현 회장의 장남으로 1999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선친의 가업을 이어 크라운제과의 외길을 이끌고 있다.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67년부터 크라운제과의 경영과 인연을 맺었다.77년부터 20년 가까이 자동차 부품회사 등 개인사업을 하다가 회사사정이 악화되면서 95년 대표이사로 크라운제과에 복귀했다. 윤 사장은 회사가 나이테만큼이나 부침을 겪었지만 까다로운 청소년들의 입맛을 앞서야 한다는 점을 경영신조로 삼고 있다고 했다.이에 따른 그의 경영 아이디어는 독특하다.‘크로스 마케팅’ ‘루트 세일’ 등 생경하기까지 한 경영방식을 잇따라 도입해 경영위기를 성공으로 돌려세웠다.주위에서는 이에 ‘신개념 경영’이란 말을 붙였다. 크로스 마케팅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부도났던 회사를 헤쳐나올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동종업체끼리 경쟁사의 상품을 공급받아 판매하는 이 기법은 국경을 뛰어넘는 전략적 제휴이기도 했다.영어 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외국인들로부터 뜻과 맞아떨어지는 단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 사장은 이사직에 있을 때인 72년, 크라운제과의 최고 히트상품이면서 지금은 추억의 과자처럼 인식되고 있는 ‘죠리퐁’을 개발해냈다.여기에다 ‘루트 세일’이란 독특한 판매방식을 얹은 뒤 국민들의 입맛을 파고들어 장수제품으로 만들었다. ●한국적 유통방식 루트세일도 효과적 루트 세일은 제조업체의 유통사원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의 구멍가게까지 소매점을 직접 찾아다니며 물건을 공급하는 유통방식.이는 외국업체들이 쉽사리 국내시장을 뚫지 못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 회사의 외환위기 극복에 일조를 했다.현재 식품업계에서 한국적 유통방식으로 정착했다. 크라운제과의 역사는 1947년 서울역 뒤편 중림동의 ‘영일당’에서 시작됐다.고 윤태현 회장이 직접 과자 틀의 쇠를 깎아가며 장수과자 ‘산도’를 만들어낸 이야기는 김혜수가 주연했던 MBC 드라마 ‘국희’의 기둥 줄거리가 될 정도로 성공 신화였다.산도 외에도 죠리퐁,콘칩,쵸코하임,쿠크다스,뽀또,미니쉘 등의 히트 상품을 거느렸던 크라운제과도 98년부터 몰아친 외환위기의 파고를 맞아야 했다. 윤 사장은 위기를 역전의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크로스 마케팅 등 위기때의 역발상적인 경영기법들을 통해 회사를 이끌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는 몸집 부풀리기에만 치중하는 확대경영을 했다.이익규모 내에서의 투자가 아니라 빚을 얻어가며 껍데기만 키우는 바보짓을 해왔다는 후회를 한다.외환위기가 오니까 금리는 올라가고 환율도 뛰고 무엇보다 대출금과 단기차입금이 압박을 해왔다.연장을 해줘야 계속 돈을 쓸 수 있는데 갑자기 단기회수를 당해 어려움을 겪었다. -1998년 1월 결국 회사가 부도나는 비운을 맞았다.50년 역사의 회사가 도산하자 화의를 신청해 융자를 받았다.많은 채권단으로부터 지원받은 고마움은 잊지 않는다.화의가 돼서 회사가 투자를 못 하자 신제품을 못 내고,거래선에서는 회사가 쓰러질지 모른다며 외상을 잘 안 주고 수금도 어려웠다.이대로 가다가는 밥도 못 먹겠다 싶어 회사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본사 제1공장을 파는 등 일부 구조조정을 했다. -구조조정을 하고도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발견되지 않았다.신제품과 영업확대 전략을 생각하다가 내부에서 만들 능력은 없지만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크라운제과의 영업조직은 루트 세일에 기반한 강력한 조직이다.4대 과자업체 중에 크라운이 회사 규모는 가장 작지만 30년 전에 루트 세일이란 현재의 과자 영업형태를 가장 먼저 착안해서 시작했다.영업조직은 확실히 살아있어 뭔가 팔 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는데,갖고 있는 제품이 진부했다.전쟁터에서 고물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격이었다.부도로 자금이 없고 설비투자도 안돼 신제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설은 있지만 판매를 못하는 기린·삼립·동아당 등 몇몇 회사와 접촉해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품으로 판매를 시작했다.하지만 국내 조달은 불만스러웠고 설비가 우리보다 작은데다 새로운 설비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신제품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수입해 판매해 보자고 생각하게 됐다.수입상이 아니라 역시 OEM으로 한다는 방침이었다.1차로 타이완 업체와 접촉했다.타이완의 1,2,3위 제과업체인 이메이,왕왕,콰이콰이를 동시에 방문했다.회사제품인 샘플 3세트를 준비해서 서로 상대회사의 제품을 팔아보자는 의향을 이야기했다. ●中·美·호주 등 대형 업체와 제휴 추진 -이메이는 타이완 1위의 종합식품회사로 자국 내에서 막강한 시장과 마케팅능력을 보유한 업체이며,왕왕은 타이완에 본사를 두고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쌀과자 전문 회사다.처음에는 상호간에 이득이 될 수밖에 없는 제안에 대해 모두들 관심은 높았지만 내심을 숨기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한마디로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또 크라운이 당시에 화의상황이라는 것도 큰 장애요인 중의 하나였다. -왕왕과는 바로 협의가 끝나 쌀과자를 들여오기 시작했다.현재 판매하고 있는 참쌀 설병,선과라는 제품이다.연간 180억원씩,모두 800억원어치를 팔았으니 성공적인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콰이콰이와도 거래를 계속하고 있으나 많은 양은 아니다.1위 업체인 이메이는 우리와의 거래에 있어 염려를 많이 했다.2000년 1월에 방문,2003년까지 진전이 없었다.화의를 종료하고 왕왕과의 거래를 설명하자 이메이가 우리를 이해하게 됐다.거래를 시작해서 이제 경영자원과 경영정보를 주고받고 있다.공동투자를 해서 공동사업까지 벌이는 것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남가촌과 미국 위글리사의 껌 제품,호주의 가장 큰 제과회사 아노스와도 크로스 마케팅을 협의 중이다.일부 제품은 들여오고 국내 제품도 나가는 단계다.한국 야구르트의 스낵을 크라운이 팔아주고,야구르트가 우리 죠리퐁을 러시아에 팔아주는 크로스 마케팅도 진행 중이다. -크로스 마케팅은 처음에는 ‘더덕’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산삼’이었다.크로스 마케팅이 아니었다면 화의를 4년만에 조기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크로스 마케팅 덕분에 과잉투자도 모면할 수 있었다.이전에는 국내 설비상황만 보고 국내에 없는 설비는 투자해도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타이완처럼 크로스 마케팅이 가능한 지역에 있는 설비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이제는 기업간에 국경이 없으므로 함부로 설비투자를 하다가는 큰일난다.다른 산업에서도 크로스 마케팅을 많이 활용해야 한다. -크로스 마케팅을 수입이란 관점에서 보면 국내에서 만들지 수입하냐고 하지만,바꿔서 보면 수출하는 것이다.크로스 마케팅은 수입을 통해 수출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우리 제품의 시장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크로스 마케팅이 가능한 지역에는 우리제품을 얼마든지 수출하므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국내 판매량보다 많은 양을 생산하므로 원가도 절감할 수 있다.경영 관점에 지구촌이란 개념을 확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주변에 크로스 마케팅을 전파했더니 경쟁업체라 생각해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공장을 한번 보자는 제안도 못했는데 크라운의 사례를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외국회사에서도 국내 업체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외국회사를 경쟁사가 아니라 파트너로 생각하니 공장도 둘러볼 수 있고,공동사업과 공동투자도 확대됐다고 하더라. -크로스 마케팅이 좀더 발전하게 되면 중국 회사인 남가촌에서 우리 제품을 만들어 중국,일본,타이완,홍콩 등에 판매하는 전략을 갖고 있다.이는 ‘트랜스퍼 트레이드’라 이름붙였다. -외국에 나가 기술을 지도하고 원하는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연구진의 수준이 올라갔다.크로스 마케팅으로 인해 부수적으로 얻은 결과다. -생산방식으로는 일본 자동차회사인 도요타의 적기에 정량을 생산하는 ‘JIT(Just In Time)’가 있다면,영업방식에는 크라운 제과의 크로스 마케팅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크로스 마케팅이 많이 보급돼서 다른 산업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크라운제과가 화의를 조기 졸업하는 원동력으로 크로스 마케팅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윤 사장은 화의 전에는 멋모르고 골프도 쳤지만,부도난 사장이 골프치고 돌아다니냐는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골프를 그만뒀으며 아직도 안하고 있다.대신 직원들과 등산을 한다.직원들과 함께 산에 오르며 땀을 흘리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한다. ●4년 전부터 사내 독서회 만들어 유대강화 -등산을 한 뒤 목욕탕에서 같이 등을 밀고,신발이 떨어지면 사장이 직접 뛰어가 사오면서 힘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사장인 내가 몸무게가 0.1t으로 가장 많이 나가고,부사장은 저지방 진단을 받을 정도로 모든 직원이 날씬해졌다.하루에 20∼30㎞씩 걷고 아침 8시에 나가 저녁 9시에 돌아올 정도로 체력도 길러졌다.점심을 먹은 뒤 오후 3시쯤 다시 산에 오르면 지방이 타는 느낌을 받는다.최근 100회 산행 기념으로 북한산 청소를 했다.매출 목표를 달성하면 직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오를 계획이다. -4년 전부터 차장·부장 독서회 두가지를 만들었는데 프리 리딩이라고 해서 무조건 책을 사서 돌린다.차장들이 책을 읽고 키워드 하나,A4용지 한장으로 정리해 회사 내부 사이버 연수원에 올린다.부장 독서회는 책을 읽고 발표한다.책의 저자를 가능한한 연사로 모셔 강의를 듣고,연사 앞에서 토론을 한다.저자 앞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굉장히 심도있는 토론을 할 수밖에 없다.서울고등학교 16회 졸업생들 20여명이 한달에 한번씩 모이는 독서회에서 하는 똑같은 방법을 사내 독서회에 쓰고 있다.도요타 관련 책을 보니 ‘강한 사원이 강한 회사를 만든다.’는 좋은 말이 나왔다.직원들에게 ‘자네는 충분히 강한가?’라고 묻는다. 정리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씨줄날줄] 배신자 불가론/김경홍 논설위원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있고,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다.장삼이사(張三李四)의 개인사도 그러한데 하물며 국사는 말해 무엇하겠는가.후회는 절대 앞서지 않는 법이다.사전적 의미로는 지나고 보면 알게 되는 것이 후회일 테니까.일반인이 보자면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국가와 국민의 생활을 좌우하는 일들만은 하고 싶다고 하고,말고 싶다고 마는 일들은 이제 그쳤으면 좋겠다. 최근 ‘총리 논쟁’이 답답하다.김혁규 전 경남지사는 지난 2002년 4번째 경남도지사로 당선됐다.하지만 임기를 2년도 채우지 못한 지난해 12월 도지사직을 사퇴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자신을 세 번이나 공천해 경남도지사로 재직하게 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긴 것이다.김 전 지사의 오늘은 한나라당의 선견지명일 수도 있고,김 전 지사가 잘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하여튼 그래서 지금까지 경남도지사직은 공석이다.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얻게 되고 김 전 지사도 비례대표 4번으로 17대 국회의원에 당당하게 당선됐다.하지만 총선 후 여권에서 김 전 지사를 차기총리로 거론하면서부터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한나라당이 김 전 지사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총리인준을 거부할 뜻을 분명히 했다.이에 맞서 김 전 지사는 4일 인터뷰에서 “능력과 경륜,청렴도로 얘기해야지 어떤 당이냐로 재단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면서 희생물로 삼지 말라고 항변했다. 아직 대통령이 김 전 지사를 총리로 지명해 국회에 인준동의를 요청한 것도 아니고,김 전 지사의 자질이 검증돼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호들갑인가.한때 여권 주변에서 김 전 지사의 총리론이 기승을 부리더니만 이제 와서는 김 전 지사의 총리 기용을 검토한 적이 없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우리가 익히 봐오던 권력의 속성이고 일상화된 견제의 수단이다. 냉정할 필요가 있다.김 전 지사가 배신자인지,능력과 경륜이 출중한 일꾼인지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무엇보다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어떠한 명분보다도 실리가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런 논쟁,이제는 지겹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 [집중탐구 5黨의 ‘길’]⑥끝- 활로찾는 민주당

    민주당의 17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3일 고(故) 박태영 전남지사의 광주 영결식에 참석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예방하러 서울 동교동으로 다시 모였다.개인 사정상 불참한 김종인·이승희(비례대표) 당선자를 제외하고 7명이 함께 모인 것은 한화갑 대표가 당을 추스른 이래 처음이다.“이제는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민주당의 활로 찾기는 이같은 행동 통일에서 일단 출발한다. ●DJ,“인생은 새옹지마” 민주당의 ‘창업주’인 DJ는 창당 이래 가장 혹독한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당선자 7명을 따뜻이 맞았다.DJ만큼 따뜻한 품이 또 있을까.당선자들은 박 지사를 떠나보내며 새삼 ‘배신감’에 서늘해진 가슴을 DJ의 덕담으로 달랬다.DJ는 “인생만사는 새옹지마”라며 위로했다. 한 대표는 “가능하면 이른 시일 내 창당 수준의 전당대회를 열겠다.”고 당 재건 의지를 다졌다. DJ는 그러나 선거 결과에 대해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전했을 뿐 현실정치 불개입 원칙을 이날도 고수하면서 예민한 말은 되도록 아꼈다.특히 ‘6·5 재·보궐선거에 ‘한 말씀’ 해달라.’는 요청에는 “여러분이 잘 되길 바란다.좌절하지 않으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만 화답했다.이번 동교동 방문은 햇볕정책이라는 민주당의 주 브랜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박준영 전 청와대 공보수석은 앞서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참여정부 들어 대북정책에 전혀 진전이 없다.”며 “대북송금 특검과 분당(分黨)만 없었으면 지금쯤 비무장지대를 관광지로 개발했을 것”이라고 현 정부를 비판,햇볕정책이 민주당 전매특허임을 강조했다. ●전남지사에 ‘박준영 카드’ 민주당엔 이번 6·5 재·보선이 또 하나의 분수령이다.지난 4·15 총선에서 전남 지역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표가 5대4 정도로 나온 만큼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특히 ‘박준영 카드’가 채택될지 주목된다.이날 한 대표는 DJ 의사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박 전 수석은 “당의 뜻을 따르겠다.”며 적극적인 출마 의지를 내보였다.당 안팎에선 장성민 전 의원과 김성훈 전 농림장관,김정길 전 법무장관 등도 자천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다.발표는 여론조사와 현지 실사를 거쳐 5일 이뤄진다.박 지사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전남지사직을 ‘박 지사가 (생전에)입당을 했네.안 했네.’라고 입씨름하던 열린우리당에 내주지는 않겠다는 게 민주당 생각이다.그러나 전남도민들이 여당 지사를 포기하겠느냐는 게 갑갑한 요인이다.장전형 대변인은 “총선 후 호남 유권자들 사이에선 민주당이 좀더 잘 하라고 든 회초리가 걷지도 못하게 한데 대해 후회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면서 희망을 접지 않고 있다. ‘40대 트리오’ 구상은 현실적으로 벽에 부딪혀 있다.장성민 전 의원과 함께 낙선한 추미애 의원을 제주지사에,김민석 전 의원을 서울 영등포구청장에 각각 내보낸다는 복안이었지만 추 의원은 주소 문제가 걸림돌이다.출마하려면 선거 두 달 전에 제주로 주민등록을 이전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남 화순과 진도군수 후보에는 20여명의 신청자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호,당분간 ‘시계 제로’ 그러나 민주당에 낀 안개는 당분간 쉽사리 걷혀지지 않을 것 같다.당장 당사도 못 구할 만큼 재정상태가 열악한데다 당선자 9명의 ‘화합’도 미지수다.이승희 당선자는 탄핵과 ‘옥새전쟁’ 등을 통해 한 대표 진영과 앙금을 쌓았고,이낙연·김효석 의원 등 비교적 친노(親盧) 성향의 인사들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도 당의 진로 설정에 잠복 요인이다. 박정경기자 olive@˝
  • 실종자가족 ‘슬픈 5월’

    실종자 가족은 가정의 달 5월이 더 서럽다.지난해 미아와 성인 가출자는 모두 6만3834명.이 가운데 2만7290명의 행방과 생사가 묘연하다.또 올들어 3월 현재 미아는 799명,가출인은 1만5978명으로 집계됐다.해마다 6만명을 웃도는 실종자가 발생하는 추세다. 특히 올들어 부천 초등학생 2명과 포천 여중생 실종 살인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경찰은 부랴부랴 DNA를 이용한 미아찾기 작업에 착수했다.또 실종 사건을 해결하고자 실종자 가족·관련 NGO 등과 함께 전담팀을 구성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 80대 이내철씨 가족 “아부지,나 그냥 죽게 놔 둬.아부지 어딨는지도 모르는데 살아서 뭐해.” 이순호(50·여·경기 성남시 수정구 신흥2동)씨는 2일 새벽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깨어났다.꿈에서 아버지는 죽어버리겠다는 순호씨 앞을 막아서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순호씨의 아버지 이내철(82)씨가 실종된 것은 지난 1월10일.여느때처럼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는데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아버지가 지난해 12월부터 치매증상을 보였지만 심하지 않았기에 순호씨는 늘 다니던 길을 잃어버렸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근처 파출소를 뒤졌다.하지만 그날 이후 아버지 행방은 묘연했다. 지하철 역과 서울·경기도 일대 경찰서 60여곳에 전단을 보내고 전국의 부랑인 시설을 찾아보았지만 아버지는 없었다.혹시라도 연락이 올 때 통화중일까 봐 친척들에게 전화도 못하게 했지만 끝내 소식은 없었다.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평생 농사를 지은 아버지를 고집을 피워 5년 전부터 모셨다는 순호씨는 “시골에서 올라와 답답증을 느끼는지 자주 산책을 나가시곤 했다.”면서 “차라리 문을 잠그고 못 나가시게 할 걸 그랬다.”고 가슴을 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고를 당한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신분증이 든 지갑도 갖고 나가지 않아 더 불안하다는 순호씨는 “아버지 손은 여든 평생 쟁기질로 지문이 다 닳아 없어져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며 울먹였다.그는 “변을 당하셨다면 시신이라도 수습해 선산에 모셔야 할 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남편 김수환(53)씨와 함께 세탁소를 하는 순호씨는 오는 8일 어버이날에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연락처는 (031)745-2149 또는 (02)712-9763(노인복지시설협회). ■ 4세 김대현군 가족 “벌써 봄도 다 가는데,병아리 같이 쫑쫑거리던 내 새끼는 어디에 있나.” 김철동(32·공구상·경기 용인시 기흥읍)씨는 2일에도 가게에 앉아 문밖만 내다봤다.바로 그 자리에서 지난해 9월5일 아들 대현(당시 3세)이가 거짓말같이 사라진 것.친구 아이와 함께 놀던 대현이는 김씨가 눈을 뗀 지 10분도 안돼 없어졌다.함께 놀던 아이만 15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두살배기를 붙잡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 보았지만 소용이 있었겠습니까.”김씨는 석달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국의 유아보호시설을 뒤지고 다녔다.수십차례 걸려온 허위 제보전화에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갔다. 김씨는 한 달에 한 번 서울 청량리에서 열리는 전국실종자모임에 참석한다.서로 감싸안고 대안도 얘기하지만 아이를 찾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어린이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뉴스만 들리면 8개월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얼마전 전남 순천에서 어린이 익사체가 발견됐을 때는 사진을 보고서도 혹시나 해서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마음 졸였다.길거리에서 어린아이가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김씨는 “차라리 좋은 사람 손에서 잘 크고 있으면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라며 고개를 떨궜다. 자책감에 울다 까무라치고 다시 통곡하며 점점 시들어가는 부인 박민정(26)씨의 모습이 안타까워 대현이의 장난감은 모두 상자에 담아 치웠다.하지만 그는 지난해 어린이날 놀이동산에 갔다가 찍은,맑은 표정의 대현이 사진을 지갑에 갖고 다닌다.김씨는 “몇개월 사이 키가 커서 옛날 옷은 맞지도 않을 것”이라면서 “실종되기 얼마전 사준 곰돌이 목걸이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새기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연락처는 017-209-4435 또는 02-182(미아찾기센터). 성남·용인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길섶에서] 4월을 보내며/김인철 논설위원

    나른한 봄날 오후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에서 울림이 느껴진다.동창회에서 띄우는 경조사알림 등 이런저런 광고이겠지 하며 열어본 즉 의외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발신자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저 안부만 물으려 전화까지 하기에는 좀 뭐해서 한줄 날렸단다. 얼마전 자기들만 예외라는 아우성에 못이기는 척 아이들에게 휴대전화를 사주고는 이내 후회했다.전화란 용건이 있어야 거는 통신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아이들에겐 시도 때도 없이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종의 오락기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하잘것없는 말들이 오고가는 걸 보고는 적당한 핑계거리가 생기면 아예 끊어버려야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휴대전화에서 자연과 인간의 정이 물씬 묻어나는 울림이 전해져오다니. (박범신의 4월) 나도 아이들에게 배워 문자답신을 보내볼까. 김인철 논설위원
  • ‘카드덫’ 은행원의 눈물

    “‘카드 덫’에 발목 잡힌 당신은 끝내 몰락하고 말 것이다.” 신용불량자 400만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암울한 묵시록이다. 시중 한 대형은행의 여의도 지점에서 기업들을 상대로 여신·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과장이자 세 자녀의 아버지인 백모(39)씨.그는 과장으로 승진한 지 한달 만에 근무하던 지점에서 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29일 구속됐다.금융 전문가인,15년 경력의 은행원도 ‘카드빚 탈출’에 결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백씨는 “은행원이라서 카드의 생리를 잘 안다고 자신했지만 내 자신을 파멸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백씨는 “지난 3년 동안 죽도록 일하면서도 20장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며 살아야 했던 지옥 같은 생활이 끝나 차라리 후련하다.”고 말했다. ●카드 연체이자만 1억 7000만원 백씨는 5년 전부터 카드를 하나둘씩 발급받기 시작했다.지점 선·후배 간에 관행처럼 이뤄지던 후배에 대한 빚보증 2000만원도 카드 대출로 해결했다.주식투자를 위한 종자돈과 부족한 용돈도 카드 현금서비스를 통해 마련했다.직업이 은행원이어서 카드의 신용대출 한도가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은 3000만원이었다. 그때까지 백씨는 자신이 카드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다.보너스를 받아 정산을 해 이자도 많지 않았다.하지만 카드가 늘어날수록 씀씀이도 커졌다.2001년 백씨의 지갑 속에 든 신용카드가 20장으로 늘어났다.백씨가 지난 5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쓴 돈만 2억 2000만원.하나 둘씩 연체가 되자 연 20%가 넘는 이자가 달라붙기 시작했다.5년 동안 백씨에게 날아온 이자만 1억 7000만원.백씨는 “이자를 갚아도 갚아도 안 됐고 집이나 직장에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혼자서 고민했다.”면서 “한순간에 미쳤다.”고 후회했다. ●“카드빚 탈출은 불가능했다” 백씨는 기자에게 “카드가 무섭다.한번 이자가 무섭게 붙기 시작하면 내 능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결제일마다 현금서비스로 이자를 막다가 한도가 차면 다른 카드로 다시 현금서비스를 받아 메우는 식이다 보니 나중에는 원금은커녕 이자만 돌려막는 악순환이 계속됐다는 것이다.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린 백씨는 고율의 이자가 부과되는 캐피털과 사채 사무실의 문까지 두드리는 신세가 됐다.절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예금청구서 위조해 5억원 출금 서울 모 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한 백씨는 1989년 한 시중은행에 입사했다.백씨는 98년 자신이 다니던 은행이 합병된 후 정리해고의 광풍에서도 살아남았다. 깔끔한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은 것.지난달에는 과장으로 승진,노른자위인 여의도 지점에서 여신·대출을 담당했다.백씨는 지난 22일 예금청구서를 위조해 은행에서 보관하던 5억원을 동서 명의로 개설한 통장에 입금했다.백씨가 직접 전산에 정상 대출로 입력해 직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백씨는 입금된 5억원 가운데 3억 9900만원을 곧바로 인출,카드빚을 갚는 데 썼다. 백씨의 범행은 그러나 이날 저녁 지점 결산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백씨는 지점장에게 범행을 실토했고 26일 지점장과 함께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나흘 동안 본점 검사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백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카드 이자 갚을 날짜가 다가오자 초조함에 은행 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현재 카드 돌려막기로 버티고 있는 잠재적 신용불량자만 300만∼4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지적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 15년만의 답장 ‘그리운 어머니’

    “(…)두번 편지 잘 바다보앗다.너의 두 내위(내외)도 잘 잇고 우리 귀여운 다해(다혜),경재(아들의 이름은 성재였다)도 잘 논다니 뭇어(무엇)보다도 깁뿐이리로다(기쁜 일이다).(…)” 비록 언문체라 암호처럼 읽기가 난해하고 맞춤법도 틀리지만,그래서 어쩌면 더 정겹고 눈물겹게 읽히는 이 편지는 중견 작가 최인호(59)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1년전 미국에 머물던 때 한국의 며느리에게 보낸 것.그 속에는 손자와 아들 내외에 대한 걱정,집안 일에 대한 생각,답장을 기다리는 마음 등 어머니의 심정이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작가는 어머니의 부탁대로 살기는 커녕 답장조차 못했다.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월이 훌쩍 흘렀지만 어머니의 빈 자리는 갈수록 깊고 넓었다.최씨는 자신을 휘감는 후회와 그리움에 못이겨 십오 년 만에 답장을 썼다.“그리운 어머니.십오 년 만에 답장을 씁니다.(…)제 답장을 참으로 많이 기다리셨지요(…)저는 눈 뜬 장님이었습니다.(…)늘 아들인 저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제가 아플 때 펄펄 끓던 이마에 어머니의 손이 닿기만 해도 신열이 내리던 그 기적의 손 그대로,어머니…”(147쪽). 절절한 심정을 못이긴 작가는 내친 김에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여백 펴냄)라는 사모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정치·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시대에 작가로서 가족과 어머니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를 던지고 싶었습니다.어머니가 삶의 절박함을 담은 ‘모르스 부호의 SOS’ 편지를 30년 만에 ‘내 마음의 우체통’에서 열어 본 심정입니다.어머님 나이가 되니까 그 마음의 결이 하나하나 다가와 교정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수필 형식의 가족 소설인 이 책은 작가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예순 여덟 살 때부터의 운명하실 때까지의 모습과 그 뒤 묵주·흑백사진 등 어머니의 숨결이 배어있는 물건 등을 징검다리로 추억을 풀어가는 형식으로 이뤄졌다.그 속에는 홀로 3남3녀를 키우느라 두툼한 빵처럼 커진 손,아들을 6학년 때까지 여탕에 데리고 다닌 억척스러움 등이 등장한다.학창시절 젊고 아름답지 못한 어머니를 창피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던 일과 노인성 히스테리에 걸리신 어머니를 짐스러워한 데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도 토로한다. 그리움과 회한 등이 공존하고 어릴 적부터 자신의 원형질이 담긴 그 공간을 작가는 ‘치마 냄새’로 압축한다.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뛰어들던 그 푸근함 속엔 김치 냄새와 반찬 냄새,화장품 냄새 등이 어우러져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던 혼합된 냄새가 담겨 있다.작가는 그 냄새 속에 잠기며 피어나는 다양한 추억들을 떠올린다.마술사처럼 뒤집으며 구워주던 밀전병 먹던 일,해질 무렵 기상대 앞 골목길을 따라 함께 시장가던 황금빛 추억(192∼194쪽) 등이 아늑하게 등장한다. 이 회한의 감정은 작가에게 우표도 붙이지 않은 ‘받을 수 없는 편지’를 자주 쓰게 만들었다.그 때마다 작가는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추억에 잠겨 편지를 쓰기도 하고,“이제라도 전화를 걸어 오실 것 같은”(198쪽) 생생한 그리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시도 때도 없이 뻗치던 작가의 사모곡은 마침내 어머니만이 아니라 소중한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넓어지고 끝없이 메아리친다.“아아,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을까.살아 있을 때,함께 어울려 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146쪽).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이공연 놓치면 후회]13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0번

    베토벤이 생전에 미완성으로 남겼던 피아노 협주곡 ‘0번’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주된다.독일 출신 피아니스트 페터 폰 빈하르트는 25일 오후 7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26일 오후 7시30분 부산 문예회관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지휘 볼프강 젤리거)과의 협연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E플랫장조 WoO4,일명 피아노 협주곡 ‘0번’을 초연한다. 베토벤이 열세살 되던 해에 오르간,작곡 등 음악의 기초를 배웠던 스승 네페의 권유에 따라 작곡한 작품.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20세기초 스위스의 음악학자 빌리 헤스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총 3악장에 연주시간은 약 27분으로,원본은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실험적인 연주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빈하르트는 지난 2001년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이 곡을 처음 연주해 주목을 받았다.그는 지난 15일 고 김일성 주석 생일을 맞아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22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도 참가했다.(02)2068-8000. 이순녀기자 coral@˝
  • [아하 그렇구나]싱싱한 90콘서트

    요즘 콘서트계의 화두는 단연 ‘추억’. ‘7080콘서트’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데 이어 ‘90콘서트’가 마련된다.R.ef·박미경·DJ DOC·포지션·이예린이 의기투합,새달 1일 코엑스 대서양홀에서 두 차례 콘서트를 열고 90년대를 추억한다.이름하여 ‘나인티스 싱싱콘서트’.20년도 더 된 가수들이 벌떡 일어서는 판에 강산은 한번 변했지만 경쟁력은 충분할 듯. 이번 콘서트의 최대 이슈는 R.ef의 재결성.오빠부대를 이끌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R.ef가 다시 무대에 선다는 소식이 2535세대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95년 데뷔해 98년 해체될 때까지 ‘고요속의 외침’‘이별공식’‘상심’‘하늘을 걸고’ 등 무수한 히트곡들을 남긴 R.ef가 무대 위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최근 번안곡 ‘Hot Stuff’로 결혼 이후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서부터 ‘포플러 나무 아래서(이예린)’‘후회없는 사랑(포지션)’ 등 댄스음악과 발라드 히트곡들이 이번 콘서트의 레퍼토리.스타들의 데뷔 시절 영상을 보여주는 코너와,관객들로부터 직접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들려주는 이벤트도 마련돼 있다.(02)3210-1272. 박상숙기자˝
  • [기고] 한국, IT 성장엔진 시동걸 때/손연기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원장

    노벨상에는 정보통신상 혹은 컴퓨터과학상이 없다.놀랍지 않은가.오늘날 세상에서 컴퓨터와 정보통신을 빼놓고 무엇을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노벨상에 이러한 부문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지난 1991년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해 인터넷 혁명을 몰고 온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자신의 직장 유럽소립자물리학연구소(CERN)에서 쫓겨난 이유가 되었다.연구소는 그의 발명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웹은 시간낭비를 부추기고,연구집중을 방해한다고 여겼다.그러나 진짜 배경은 노벨상에 컴퓨터 과학분야가 없다는 점을 노벨상 수상자의 산실인 CERN이 새삼 깨달은 사실이었다. 22일은 정보통신의 날이었다.주지하다시피 이 날은 조선 후기인 1884년 4월22일,국내 최초의 통신업무 주무기관인 우정총국이 설립된 날이기도 하다.따라서 올해는 우리나라에 근대우편제도가 도입된 지 120주년이 된다. 지난 120년 동안 우리의 정보통신분야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1896년 최초의 자석식 전화인 ‘전어기(傳語機)’의 개통과 지금의 초고속인터넷망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격세지감이다.인구 4700만 명 가운데 인터넷 사용자가 3000만 명에 달하는 국가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우리야말로 버너스 리에게 빚진 바가 많은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운 지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제대로 된 좌표를 설정하고 있는지,또 그 목표를 향해 잘 가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버너스 리에 대해 CERN이 저지른 것과 같은 종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초일류 기업이라 할 수 있는 IBM,인텔,마이크로소프트 등이 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은 아주 간단하다.IBM은 컴퓨터 기반기술,인텔은 CPU를 비롯한 반도체기술,마이크로소프트는 PC 및 컴퓨터의 운영체제(OS)라는 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세계 산업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정보통신부가 미래 한국을 먹여 살릴 국책 정보기술(IT) 사업으로 ‘839 프로젝트’를 내놓은 것은 바로 이와 비슷한 개념이다.▲전파식별,텔레매틱스,홈 네트워크 등의 8대 서비스 ▲통신,방송,인터넷 망을 하나로 합친 광대역 통합망 ▲손목시계형 차세대 PC,지능형 로봇 등 9대 신기술 제품으로 구성된 ‘839 프로젝트’야말로 우리 산업과 기업을 고부가가치 중심으로 바꾸는 새로운 성장 엔진들인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시행되면 국내총생산(GDP)에서 IT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 19.3%까지 높아지면서,향후 10년 내 111조원의 생산유발효과로 국민소득 2만달러 진입을 기대할 수 있다.근대우편제도가 도입된 지 120년 만에 지금 우리는 제2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플랫폼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지금도 신성장 엔진,국민소득 2만달러,이공계 살리기 등의 정책이나 목소리가 매우 희미한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총선이라는 큰 이슈 속에서 잠시 잊혀졌다고 해도,우리를 진짜 먹여 살릴 사안들에 대한 ‘논의의 불씨’가 사그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웬일일까.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각종 정치 가십에 대한 설왕설래가 아닐 것이다.그랬다가는 버너스 리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빼앗기고 때늦은 후회를 한 CERN과 같은 꼴이 될 수 있다.현재 그가 소장으로 있는 W3C(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가 인터넷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W3C가 ‘21세기 웹의 얼개를 짜는 일’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제 전 세계가 정보통신 분야의 선두에 선 우리나라를 지켜보고 있다.비록 웹은 버너스 리가 먼저 만들었지만,이를 이용한 신성장 동력은 우리가 최고라야만 할 것이다.우리가 ‘21세기 신성장 엔진의 얼개’를 짜야 한다.그게 근대우편제도 도입 120년이 된 정보통신의 날에 맞는 각오다. 손연기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원장˝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