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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년새 73억 챙긴 “부동산 큰손”/구속된 목영자씨의 투기수법

    ◎병원경영 돈벌어 전국돌며 “사재기”/1백20평 아파트 살며 90억대 땅 소유/증여위장등 탈법 총동원,법망 빠져나가 70년대 산부인과 의사로 이름을 날렸던 목병원 원장 목영자씨(57ㆍ여)가 본업을 제쳐두고 온갖 지능적인 수법을 총동원해 부동산 투기에 골몰하다 검찰에 구속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진 일부 지도층 인사들의 투기풍조실태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목씨는 지난 80년대 초부터 병원수익금과 은행대출금 등으로 전국 각지의 임야ㆍ대지ㆍ전답 등을 자신과 가족들의 명의로 무더기로 사들인뒤 되파는 수법으로 거액의 전매차익을 챙기다 검찰에 적발됐다. 목씨가 자신과 가족들의 명의로 구입한 부동산은 서울과 수도권일대,충남ㆍ제주 등 전국 9개지역의 금싸라기땅 7만7천여평. 목씨는 이 가운데 3만7천여평을 지난 87년과 올해초에 미등기전매 또는 허가없이 되팔아 2년동안의 땅투기로만 73억여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목씨는 이 과정에서 ▲증여로위장 ▲등기일 소급기재 ▲소유권이전등기를 낸뒤 판결전에 의제화해하는 방법 등 온갖 지능적이고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투기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목씨는 지난해 5월 토지거래허가지역인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임야 3천7백여평을 매입하면서 소유자 송모씨(38)와 짜고 토지소유권 소송을 제기,송씨를 법정에 출두하지 말도록 해 승소판결을 받아 이전등기를 마쳤다는 것이다. 목씨는 또 신고지역이라도 증여일 경우는 신고가 없어도 된다는 점을 악용,지난해 4월 충남 서산군 임야 5천여평을 원소유자와 짜고 증여로 위장 매입하는 등 교묘한 방법으로 법망을 피해왔다. 목씨는 이밖에 남편이 이사장으로 있는 경기도 포천의 동인학교법인까지 투기에 끌어들여 이 법인 이사 민모씨(47ㆍ불구속)로 하여금 부동산을 관리하게 하는 등 「투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목씨는 현재에도 충남 서산,경기 포천 등 전국 각지역에 90여억원 상당의 부동산 4만여평과 목병원 건물을 비롯,강남구 대치동 삼보빌딩 등 10여채의 각종 건물을 자신과 가족들 명의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현재 살고있는 성동구 광장동 워커힐아파트는 60평짜리 두채를 터서 만든 1백20평짜리로 집값만도 12억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씨는 지난 5월11일 국세청이 발표한 부동산 상습투기꾼 1백68에 포함돼 8억7천여만원의 세금을 추징당했으며 주거래 은행인 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각각 3억원,2억5천만원의 대출금을 회수당하는 한편 대출금지조치가 내려졌다. K대 의대를 졸업한 목씨는 전문의 자격도 없이 의사면허증만으로 지난59년 용산구 동자동에 산부인과 전문인 동인의원을 개설한뒤 78년 지금의 갈월동 자리에 목영자의원을 열었으며 85년에 종합병원 목병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목씨는 현재 모정당의 후원회원으로 있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왔고 최근 경쟁병원인 강남의 C병원이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따라잡기 위해 강남구 청담동에 40여억원을 들여 병원부지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씨는 이달초부터 부동산 투기사범에 대해 수사를 벌여온 검찰이 자신에 대한 혐의를 잡자 지난 11일부터 잠적,20일 가까이 도망다니다 이날 검찰에 자진출두,10여년 동안의 투기행각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 「사천왕사 왔소」 새달 일 공연… 연출가 허규씨(안녕하십니까)

    ◎“전통축제 「해외마당」에 큰 보람”/“전래문화의 뿌리,일 재현에 가슴 뿌듯/춘향제등 향토축전의 활성화 힘써야”/재일동포들에 민족문화의 우월성 심어줄 터 【대담:장석영문화부장】 오직 무대를 통해 말한다는 연극연출가 허규씨(57). 그가 최근 연출가에서 문화이벤트기획가로 변신,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특히 지난 4월 진해 군항제를 시작으로 남원 춘향제,강릉 단오제에서 지역문화와 관련된 인물의 행차행렬을 꾸며 지역축제를 활성화시킨 데 이어 오는 8월 일본 오사카에서 펼쳐질 「사천왕사 왔소」라는 행사를 맡아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에 몰두해 있다. 허씨는 이번 「사천왕사 왔소」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의 전통축제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선보여 한일문화의 고리를 복원시켜 보겠다고 벼른다. 그는 또 이번 행사가 자신의 연출무대를 제한된 실내 공간에서 실외마당으로 옮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내마당에서 해외마당으로 넓혀나가는 길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재일동포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온 정열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예술가에서 민족예술가로 도약해 보겠다는 그의 오늘과 내일의 목표는 무엇일까. -먼저 「사천왕사 왔소」라는 행사를 맡게 된 동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이 행사가 태동된 것은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진 이후였습니다.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서 거리축제인 「상감마마 행차요」를 기획·연출했는데 아마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저에게 이번 행사를 맡긴 것 같습니다. 지난해 10월부터 기획에 들어가 이미 지난달 12일 서울 임진각에서부터 본행사가 시작됐습니다. -행사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원래 이 행사는 신한은행의 모체인 대판흥은의 이승재전무가 「빛나거라 21세기의 어린이여」를 기업이미지의 주제로 내세우다가 교포 3세이하의 세대를 위한 전통문화축제를 착안,재일실업가들로 후원회를 결성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이 후원회는 후쿠다 전일본수상등 한일 주요인사 18명으로 「사천왕사 왔소」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두 나라를 연결하는 첫 행사를 이번에 갖는 것입니다. 지난달 12일 임진각에서 5백여명의 교포가 성토제등을 올려 조국순례행사의 막이 올려졌고 이달 31일 부산을 출발,다음달 19일 오사카에서 약 3천여명의 교포가 참석하는 고대의상 퍼레이드와 일본 사천왕사에서의 전통예술공연등으로 행사는 이어집니다. ○올림픽뒤 축제에 전념 -왜 행사의 이름을 「사천왕사 왔소」라고 했습니까. ▲교포들의 사상최대 뿌리찾기 운동인 이 축제의 명칭이 어째서 「사천왕사 왔소」인가 하면 일본의 사천왕사가 부여의 정림사지를 모방한 사찰로 고대 한일문화 교류의 창구역할을 맡았고,일본의 전통축제에서 「왔쇼이」(□□□)라고 외치는 말의 어원이 한국어 「왔소」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축제의 의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대로부터 많은 문물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넘어갔다는 인식은 일본 사회에 깔려 있으나 그것을 기리는 축제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축제는 그 명칭에서 나타나 있듯이 한반도에서 받은 영향을 기리자는 최초의 축제로 오사카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고대 사기에도 나타나듯이 일본인 모두가 좋아하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고구려인이며 그런 분들이 이 시대에 오사카에 다시 나타났음을 표현해 보일 계획입니다. 또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들을 재현하려 합니다. 이 행사를 8월에 갖는 이유는 우리의 광복일이 8월에 들어있기 때문등입니다. -연출가에서 기획가로 변신한 셈인 데 보람을 느끼십니까. ▲물론입니다. 저의 활동을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0년 주기로 변한 것 같습니다. 60년대에는 주로 서구식 연극에 주력해 왔고 70년대에 넘어오면서 우리 연극 찾기에 눈을 돌렸죠. 그러다 80년대에 와서는 창극쪽으로 관심을 모았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른 뒤부터 축제에 전념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축제다운 축제가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축제를 기획·제작·연출하는 단체를 만들어 보자는 데 착안했던 것입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단체가 축제문화진흥회죠. ▲81년부터 89년초까지는 국립극장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종합기획 「마루」라는 이름으로축제행사를 맡아 추진해왔는데 지난해 3월 주식회사로 등록하면서 「축제문화진흥회」란 간판을 달게 되었습니다. 거리축제는 가만히 서 있는 무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오고 가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구간별로 업무를 분담해 조립형태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상당히 많은 인력과 장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각 지방에 따라 고유의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경시되어 온 경향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활성화가 되리라고 보십니까. ▲각 지역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유의 축제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 축제들이 주로 관청에서 주관해 왔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행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남원의 춘향제만 해도 제가 거의 30여년간 굿판등을 쫓아다니며 보아왔지만 전혀 발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어디든 백일장,노래자랑 등이 있고 난장에 서서 먹고 마시고 떠들썩한 것만 있었지 정작 삶의 질을 높여주는 축제다운 축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올해부터 전국 10개 지역에서 펼치는 향토문화축제는 그런 면에서 매우 바람직스럽고 반드시 지역문화 발전에 큰 몫을 하리라고 기대됩니다. ○마당극 현대에 잘 맞아 -현재 우리의 공연계에 대해 하실 말씀은. ▲제 자신이 공연계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꼬집어 얘기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연예술은 지금까지 보다는 앞으로 훨씬 독창력을 발휘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더욱 활성화도 이루어지리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우리는 전파와 전자의 뉴미디어시대에 살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인간적인 모습의 예술공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또 그리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리워지고 자연이 그리워지고 하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어찌보면 우리 공연계도 혼돈적 상황이라고 해야겠지요. 각종 개방화에 편승,외국의 공연단체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외국과 문화의 뿌리를 달리하는 우리나라에서 현재의 예술적 환경과 시대상황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극형식은 어떤 것일까요. ▲저보고 마당극의 기수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은 줄 알고 있습니다만 마당극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맞는 전통의 현대적 수용의 지름길이 된다고 봅니다. 지난 75년 미국과 유럽을 40여일간 여행을 하면서 그곳의 공연만 38편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각 나라의 연극이 자기네 민족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통일성은 언어입니다. 음식문화도 중요하지요. 역사와 국가를 떠나 인간중심의 시각에서 언어나 음식이 같으면 그 기질도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우리의 기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민족의 신명,신바람도 그런 것중의 하나죠.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또 놀기 좋아하는 특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놀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예능적 재질이 뛰어난 민족이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을 무수히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같은 언어,같은 음식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음악적으로나 기타 다른 형식에서도 나름대로 획일적이 아닙니다. 신바람 잘 내는 민족이기 때문에 싸움도 잘하고 분파도 잘 일으킵니다만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자존심과 자신감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연극부 활동 -맨 처음 연극을 하시게 된 동기는. ▲원래 대학의 전공은 임학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할 때인데 연극에 열을 올리던 아저씨 집에서 기거를 했어요. 그때 연극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서울농대 3학년때 연극부에 들어가면서 연극인의 길을 걸었죠. 그동안 연극연출 횟수는 1백10여편정도였고 방송드라마는 약 5백여회를 제작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역시 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물도리동」과 68년에 제작했던 드라마 「탑」입니다. -가족이 분야는 달라도 모두 한길을 걷고 있다고 들었는데. ▲시인인 아내(박현영)와 시립국악단에 있는 딸,그리고 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이 가족인데 모두 한 길을 걷고 있는 셈이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전통예술의 뿌리에서 우리 예술을 꽃피우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갈 작정입니다.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우리 문화예술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노력해 나갈 계획입니다.
  • 회장 정수창씨 선출/민자당후원회 정총

    민자당후원회는 22일 하오 서울 가락동 민자당중앙정치교육원에서 회원 4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기총회를 갖고 신임회장에 정수창대한상의 명예회장을 선출했다. 총회는 또 부회장에 김수근(대성산업회장),서성환(태평양화학회장),이회림(동양화학회장),임광행(보해양조회장),장영신(애경유지회장)씨등 5명을 선출했다.
  • 중앙교육심의회 위원 60명 새로 위촉

    문교부는 7일 교육정책에 대한 장관 자문기구인 중앙교육심의회 1기 위원의 2년 임기가 끝남에 따라 심의회 7개분과위원 60명과 연구위원 7명을 새로 위촉했다. 새위원 60명 가운데 38명이 신임이며 나머지 22명은 유임됐고 연구위원은 4명이 유임됐다. 문교부는 이달안에 7개 각분과위원회를 열어 분과위원장을 뽑은 뒤 전체회의를 열어 위원장을 호선하기로 했다. 분과별 중교심위원과 연구위원은 다음과 같다. ◇교육이념분과 ▲남정걸(단국대교수) ▲안상원(건국대 〃 ) ▲이상설(한남대총장) ▲정용술(경남고교장) ▲이돈희(서울대교수) ▲신용일(인하대교육대학원장) ▲차경수(서울대교수) ▲곽병선(한국교육개발원기조실장) ▲한명희(동국대교수) ◇보통교육분과 ▲이상금(이대교수) ▲김재규(현대고교장) ▲강기주(용산공고 〃 ) ▲이수한(돈암국 〃 ) ▲황명주(환일고 〃 ) ▲송준만(이대교수) ▲고학용(조선일보논설위원) ▲이무근(서울대교수) ▲김상일(오금고교장) ◇고등교육분과 ▲장인숙(전문교부차관) ▲김경동(서울대교수) ▲김종철(덕성여대대우교수) ▲신일희(계명대총장) ▲하두봉(서울대교수) ▲심종섭(전학술원장) ▲배종근(동국대교수) ▲강신택(서울대행정대학원장) ▲전재욱(동우전문대학장) ▲최정훈(연대교수) ◇과학기술교육분과 ▲김시중(고대교수) ▲박승재(서울대 〃 ) ▲송해균( 〃 ) ▲이승우( 〃 ) ▲선우중호( 〃 ) ▲한종하(한국교육개발원부원장) ▲김홍우(서울과학고교장) ▲이재원(충남대교수) ▲이병기(부산수대 〃 ) ◇교직분과 ▲최광만(부천여고교장) ▲허태진(한국교총정책연구소장) ▲유익동(언북중교장) ▲신극범(교원대총장) ▲백명희(이대교수) ▲조찬귀(이리여고교사) ▲박덕규(한국교육개발원 수석연구원) ▲오조익(광주월산국교장) ◇평생교육분과 ▲김신일(서울대교수) ▲문상주(한국학원총연합부회장) ▲황종건(명지대교수) ▲김난주(광주대총장) ▲정우현(고대교수) ▲이광규(서울대 〃 ) ▲정필모(중앙대 〃 ) ▲김종서(한국지역사회학교후원회부위원장) ◇사회정책분과 ▲송재(연세대교수) ▲엄규백(양정고교장) ▲김영실(문일고 〃 ) ▲백봉호(한양대교수) ▲홍성대(상산학원이사장) ▲장용국(단대기획실장) ▲이재선(명덕고교장) ◇연구위원 ▲구학봉(문교부장학관) ▲박도순(고려대교수) ▲노종희(한양대 〃 ) ▲김신복(서울대 〃 ) ▲김중수(국민경제제도연구원부원장) ▲이종재(서울대교수) ▲이화국(전북대 〃 )
  • 무의탁자 「무료병원」 첫 개설/내과 등 3개과 설치… 성당서 후원

    ◎성가병원,새달 개소 행려병자와 무의탁자전용의 무료병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다음달 7일부터 문을 연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1동 88의526 성가병원재단인 수녀원 「성가소비녀회」는 현재 일반병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 병원을 50억원 재산의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해 병상 70여개에 하루평균 2백여명의 오갈데 없는 환자를 돌보기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병원측은 이 병원에 내과ㆍ외과ㆍ소아과 등 3개과를 개설해 전국 성당별로 후원회를 조직,약값 의사급료 등 무료치료를 위한 매달 3천만∼4천만원의 비용을 충당할 계획이다. 지난58년 개원한 이 병원은 당초 「가난하고 병든자」를 돌보기 위해 출발했으나 70년 현위치로 옮겨온 뒤로는 「진료비도 싸고 친절하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일반환자들 때문에 유료로 운영돼 왔었다.
  • 투기억제 특별법등 민자,임시국회 처리

    민자당은 16일 당무회의를 열고 이달말 열릴 예정인 임시국회에서 국가보안법ㆍ안기부법ㆍ광주보상법ㆍ지자제법 등 현안 법안 뿐만 아니라 부동산투기억제특별법ㆍ산업평화 및 근로자복지법 등 민생법안도 처리키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또 지난 4월말 정치자금법 시행령이 공포됨에 따라 곧 지구당별로 후원회 구성에 착수하기로 했다.
  • 「의원윤리준칙」 제정 추진/민자,이달국회서 청탁배제등 규정

    민자당은 11일 최근의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사회분위기를 일신하는데 정치권이 앞장선다는 방침아래 5월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윤리준칙」(가칭)을 제정하기로 했다. 민자당이 마련중인 이 준칙에는 ▲청탁등 이권개입금지 ▲화환전달등 허례허식자제 ▲근검절약의 생활태도 준수 등의 내용을 담게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준칙에는 특히 정당법및 정치자금법과 상충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정당및 개인후원회가 정치자금을 모금하는 한도및 방법 등을 규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 어제 「장애자의 날」/유공자 훈ㆍ포장

    제10회 장애자의 날 기념식이 20일 상오 김정수 보사부장관을 비롯,장애인복지유공자와 관계인사 6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한국맹인복지협회 부산지부후원회 김상훈회장(54)이 국민훈장 목련장을,안동 애명복지촌 배연창이사장(47),국제어린이재활원 최승구원장(49),하상복지회 이수남부이사장(37)등 3명이 국민포장을 받았으며 광주세광학교 이순덕교장(63ㆍ여)등 44명이 표창을 받았다.
  • “정치자금 기탁자 성명ㆍ주소 밝혀야”/각의,정치자금법시행령 의결

    개인이 후원회에 정치자금을 기탁할 경우 성명ㆍ주소 및 주민등록번호를 밝혀야 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 기탁할 경우에는 정치자금기탁서를 써야 하며 후원회와 선관위는 이에따른 후원회 금품수납증과 수탁증을 교부해 줘야 한다. 국무회의는 3일 하오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정치자금 기부과정의 공개를 꾀하고자 하는 정치자금법시행령개정안을 의결했다. 이 개정안은 후원회가 회원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금품을 모집하고자 할때는 금품모집집회일 또는 광고일 2일전까지 관할 선관위에 신고토록하고 선관위는 그신고가 요건을 구비했을 때는 지체없이 신고필증을 교부하도록 했다. 개정안은 또 후원회 또는 선관위에 기탁된 금품이 유가증권이나 기타 물건이어서 가격이 형성돼 있지 않은 경우는 공인된 감정기관의 시가감정서를 참고,평가하도록해 정치자금의 기부행위에 대한 면세조치를 받을 수 있게 했다. 후원회의 금품모집방법은 집회의 경우 실내의 같은 장소에서 하되 6시간을 넘지못하도록 했으며 광고의 경우 정기간행물을 3회의 범위내에서 이용하도록 했다. 신문광고는 길이 17㎝,너비 18.5㎝이내로,신문외의 정기간행물 광고는 해당 정기간행물의 2면 이내로 해야하며 광고기간은 30일 이내로 규정했다. 이 개정안은 이와함께 선관위는 기탁금을 기탁받은날(물건을 공매한 때에는 매각대금이 수납되는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정당에 지급하도록 했다.
  • 민정ㆍ민주ㆍ공화 “임무 마감” 이모저모

    ◎“감회와 아쉬움”… 3당 간판 내리던 날/총재들은 모두 불참… 새 출발 결속 다짐/“우린 어떻게 되나” 사무처 요원들 침울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 구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은 14일 상하오에 걸쳐 각각 중앙당사에서 당기와 당간판을 내렸다. 민자당은 15일 중앙선관위에 창당등록을 함으로써 4ㆍ26 총선이래 지속된 4당구조를 22개월만에 법률적으로 종지부를 찍고 평민당과 양당체제로 정국을 이끌게 된다. ○…구 민정당은 이날 상오 서울 관훈동 중앙당사의 건물벽에 붙은 「민주정의당」이란 당명과 당마크를 떼낸 데 이어 하오 4시30분 박태준 민자당최고위원대행과 박준병사무총장등 구 민정당 당직자들과 사무처요원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판식과 하기식을 거행. 박대행은 이어 통일관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지난 40여년의 얼룩진 헌정사에서 집권당 스스로가 보다 큰 목표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 스스로 당의 깃발을 내린 것은 초유의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뒤 『이러한 위대한 결단은 역사가 존재하는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라며 감회와 아쉬움에 젖은 참석자들을 위로. 박총장도 민정당의 발전적 해체를 강조하며 협력과 결속을 거듭 당부했으나 참석자들은 9년여 만에 당기가 내려진 데 대해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 이날 당해체에 따라 사무처요원들은 그동안 적립한 2백만∼8백만원의 퇴직금과 2개월분의 봉급에 해당하는 위로금을 수령. 이들은 여의도 민자당 당사의 내부정리가 끝나는 이달말경 전원 민자당 중앙사무처 요원으로 새출발할 예정이나 지자제 선거국ㆍ국방대학원ㆍ국영기업체로의 전출 등을 통해 상당수 정리될 것으로 전망. 이와관련,박총장은 『사무처 직원들의 유출에 있어 강제나 타의에 의한 불이익을 줄 생각은 없다』면서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지방의회 진출,여권 유관단체로의 전출,재정위원회와 후원회의 기구확대 등을 통해 다른 분야로 흡수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으며 이들의 처리를 전담할 기구를 신당내에 만들 생각』이라고 피력. 한편 현재의 당사는 일단 신당의 국책연구원이 쓰도록 했으며 추후 제2당사나 신당사로개축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 ○…구 민주당은 이날 상오 9시 김명윤 전고문ㆍ강인섭 전부총재ㆍ김동영 전총장 등 사무처 간부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마포구 공덕동 제일빌딩 현관에 걸려있던 「통일민주당」 간판을 내렸다. 나무로 된 이 당간판은 당시 김영삼총재가 직접 쓴 것으로 김 전총재는 자신의 손으로 간판을 떼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는지 김 전고문과 김 전총장에게 대신해줄 것을 지시하고는 강판식장에 불참. 약 2분간에 걸친 행사를 마친 뒤 김 전총장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어떻게 만든 민주당인데 마음이 아프다』면서 당시 청부폭력배들의 창당 방해사건인 「용팔이 사건」등을 잠시 회고. 김 전총장은 그러나 이날 강판이 신여당인 민자당의 현판으로 이어짐을 지적하며 『국가의 경제난국을 수습하고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아픔이 뭔지 헤아려 나갈 것』이라고 다짐. 김 전총장은 강판 행사후 정무회의실에서 사무처 요원을 소집,간단한 고별식을 가진 자리에서 『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평민당이 당을 깨고 나감으로써민주당이 집권의 꿈을 이루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며 『그러나 김영삼 전총재가 구국의 결단을 내림에 따라 새롭게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국민의 편에 서서 일하자』고 당부. 이날 구 민주당 간판이 내려졌지만 민자당이 아직 사무처를 구성하지 않고 있어 당사 사무실은 폐쇄되지 않은 채 기존 사무처 요원들이 당분간 계속 출근할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얼마나 신당에 소화될지가 불투명한 상태여서 매우 침울한 분위기. 구 민주당은 김동주 전사무차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당직자 및 당무요원 대책위」를 구성,이들 사무처 요원들을 개별 면담한 뒤 ▲민자당 흡수 ▲타직장 취업 알선 ▲지방의회 진출 대기자 등으로 분류할 방침인데 대부분 신당 흡수를 희망해 한차례 진통을 겪을 전망. ○…전 공화당도 이날 상오 9시 서울 마포구 중앙당사 및 전국 각 지구당사에서 일제히 「신민주공화당」 간판을 내리는 강판식을 거행. 서울 도화동 성지빌딩 16층에서 거행된 강판행사에는 이병희 전부총재,최각규 전사무총장,이희일ㆍ조부영의원 등 10여명의 전 공화당직자들과 30여명의 사무처 직원 등이 참석,2년3개월만에 내려지는 당간판을 감회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들. 김종필 전총재는 이날 치통으로 강판식에는 불참. 최각규 전총장은 강판식을 끝낸 뒤 『비록 당간판은 떨어졌지만 공화당의 이름은 역사속에 남을 것』이라고 감회를 피력. 최 전총장은 당사로 사용했던 15ㆍ16ㆍ17층의 처리문제와 관련,『5억5천만원의 전세금으로 임대했던 15ㆍ16층은 이미 전세 계약해제 통고를 했다』며 『당 총재 명의로 구입한 17층은 합당등록후엔 공화당 차원의 처분이 불가능하므로 김 최고위원 개인명의로 소유권을 변경,향후 매각해 부채정리등에 사용키로 했다』고 설명. 전 공화당 사무처 직원들은 신당의 인사발령이 내정조차 확인되지 않고있어 일손이 잡히지 않는 분위기. 사무처 직원들은 그러나 『전 공화당의 사무처 직원 80명중 국회소속 당 전문위원 20명을 제하면 60여명에 대한 처리만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고 『민자당의 사무처 조직 규모로 보아 3백여명 정도의 인원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3당의석비율로 사무처 요원을 충원하더라도 공화계는 모두 흡수될 것으로 낙관. 이와관련 최 전총장은 『신임 민자당사무총장과 전공화당사무총장이 협의해서 처리할 것』이라며 원칙론만 언급하고 3당 사무처 요원 전원에 대해 사표를 받은 뒤 선발적으로 수리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함구.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6ㆍ29선언」 배경 훗날에 밝힐 터”/「항공사 2원화」 따라 「제2민항」을 인가/언론통폐합,지금은 수긍 어려운 면도 ○이ㆍ장 어음사기사건 이 사건들은 이미 모두 철저한 수사와 재판이 끝났으며 그 과정에서 진상이 상세히 밝혀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철희ㆍ장영자사건이 정치자금과 연관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인데,꿈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도대체 이철희ㆍ장영자 이 두사람과는 일면식조차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둡니다. 그리고 명성그룹의 해체가 본인이 세무사찰을 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주장의 사실여부를 물으셨으나,명성그룹은 명성사건 발생과 함께 대표자가 구속되고 대부분의 자산이 적법절차를 거쳐 처리됨으로써 자동적으로 해체된 것이지 세무사찰로 해체된 것은 아니었으며 본인이 세무사찰을 지시한바 없습니다. ○제2 민항 인가 제2 민항문제가 제기된 것은 제5공화국 초기부터 국제교역의 증대와 해외여행자율화 시책으로 항공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87년초부터 교통부에서 실무검토에 착수,그해 11월 항공사 2원화 방침을 보고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운송업 경험이 풍부하고 자본력이 견실한 호남지역 기업 중에서 대상업체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검토한 교통부가 이미 85년경부터 항공운수사업을 추진하고,87년부터 한국공항터미널 주식회사의 일부를 인수하는 등 항공 전문업체로서의 본격적인 발돋움을 하고 있는 금호그룹에 제2 민항 설립을 허가해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장관을 통해 건의해서 이를 재가하였습니다. 재가 시기가 본인의 퇴임 직전에 이루어진 점에 대해 의혹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동 인가문제는 87년초부터 계속 검토되어 왔던 것으로 오히려 늦게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며 본인의 재임중에 시작된 일이어서 재임중에 종결짓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재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원전ㆍ노스럽 의혹◁ 원전 11,12호기 도입과 관련한 시공업자의 로비설은 경쟁탈락 회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며 원전 낙찰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원전 선정은 동력자원부와 한국전력의 주관하에 관계전문가 1백50여명으로 구성된 입찰 평가팀이 다양한 조건을 비교검토한 결과 조건이 가장 유리하여 선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군 주력항공기 선정사업은 공군의 전투력 향상과 항공산업 육성의 측면에서 지난 83년부터 추진되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제너럴 다이내믹스사의 F­16과 노스럽사의 F­20이 경합하게 되었는 바,정부는 공동생산의 경제적ㆍ기술적 실익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생산업체를 선정하여 미국업체와 공동생산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84년 10월 수원,85년 5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F­20기가 시험비행과정중 추락하는 등 사고가 있어 노스럽사가 F­20의 개발을 중단함에 따라 정부는 F­20을 검토대상기종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비자금 운운하며 의혹이 있었는 바 이는 본인 또는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일입니다. ▷골프장 인가◁ 내인가 골프장 중 일부 기업이 성금ㆍ기금 등을 낸 것이 바로 특혜가 아니냐 하는 의혹이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해부족에서 오는 낭설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인가라는 것은 행정의 합목적적인 수행을 위해 쓰고있는 행정관행인 것입니다. 골프장 내인가 권한은 교통부장관에게 있으며 대통령에게는 사전 또는 사후에 보고하는 것입니다. ○「기부」가 오해불러 일부 골프장 인가 과정에서 수십억대의 금액이 사례비조로 오고 갔다는 주장에 대하여 말씀드린다면 골프장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고려해서 공익과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조건을 달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조건은 지역별로 공익시설을 건설토록 하거나 장학금 또는 장학기금을 내도록 하거나 총 골프장 건설소요자금의 10%이상을 국민관광지 조성에 쓰거나 그에 상응하는 기금을 내도록 한 것이 잘못 이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골프장을 설립한 기업중에는 새마을 성금 등 공익법인에 기부한 사례도 있고 지방자치단체의 회관설립기금을 기부한 기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부행위가 정치자금과 관련된 것으로 잘못 인식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으며 정치자금 수수는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삼청교육ㆍ언론통폐합◁ 삼청교육은 상습적이고 조직적인 폭력ㆍ공갈ㆍ사기ㆍ마약ㆍ인신매매 등 각종 사회악을 제거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함으로써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시국수습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삼청교육은 당시 사회혼란을 틈타 난무하고 있던 고질적인 상습범들에 대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특별교육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민생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사회악이 국민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불안을 조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법치주의의 맹점을 이용하거나 법망을 교묘히 피해나감으로써 통상적 방법으로는 다스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성실한 대다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추진된 것입니다. 당시 사회안정을 시급히 회복시킨다는 목적에서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다 보니 시행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바,이 점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해에 있었던 공직자 정화조치는 이권개입 등 부패공직자,공사생활에서 지탄받는 자 등을 정리함으로써 공직기강을 바로 잡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상자 선정은 사정기관의 자료와 각 부처별 대내외 첩보와 여론수집을 통해 엄밀히 심사토록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정실,또는 개인적감정에 의해 처리된 사례도 없지않았다고 봅니다. 이점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 입니다. 언론인 해직조치 또한 사회각계 정화조치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대상은 각 언론사에서 자율적으로 선정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실제적으로는 계엄당국의 언론관계 담당관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언론통폐합은 건전언론을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그 전부터 몇차례 건의를 받은 바 있었습니다. 본인은 당시 언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결국 80년 11월 언론통폐합 계획을 승인하게 되었습니다. 되돌아 보건데 당시 언론계에는 소위 「사이비기자」 「사이비언론」 등 문제점과 폐단이 적지않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충격적 조치가 불가피 하다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부정축재 환수◁ 그 외에 80년 당시 있었던 일로서 10ㆍ26 이후 사건수사 과정에서 청와대 비서실에서 발견된 자금문제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총 9억6천만원중 2억원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5천만원은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주어 이를 활용토록 하고 1억원은 당시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비로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유족에게 전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정축재 환수 재산처리는 적법절차에 의하여 농어촌후계자 육성기금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헌납액에 차이가 있는 것은 환수재산중 일부는 현금이 아닌 서화 토지 등 실물자산으로서 이에 대한 평가액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0ㆍ27불교 법난◁ 소위 10ㆍ27 불교법난으로 알려진 불교계에 대한 정화는 사회전반에 대한 정화조치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특정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비추어진 점에 대해서는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일은 정화조치의 일환이기는 하나 본인의 대통령 취임후 몹시 바쁜 기간이었으므로 중대한 사안인데도 집행기관을 자세히 챙기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정치자금◁ 70년대에는 집권당 간부 중심으로 정치자금을 조달,관리함으로써 정치권의 부패가 여론화 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취임초부터 깨끗한 정치를 위해 나름대로의 의욕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재임기간중에 집권당이 깨끗한 정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도록 강조해 왔으며 그 결과 재임기간중에 당의 고위 간부중에서 정치자금과 관련된 물의가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인은 기업 또는 개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 받은 바 있으나 국고보조 확대,선관위 기탁금,후원회를 통한 모금,당원의 당비 납부 등 외부로부터 정치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필요성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정기적 지원 없었다 실제로 민정당 창당시부터 자립정당을 표방하여 평소 당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당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했으며 필요한 자금을 가끔 지원한 적이 있으나 그 금액은 생각하는 것만큼 큰 규모가 아니었으며 본인이 정기적으로 일정액을 지원한 사실은 없습니다. 질의 내용중에 양대 선거와 관련한 자금 문제도 있으나 어느 당을 막론하고 선거때 선거자금을 모금하고 지원을 받아온 것은 비밀일 수도 없는 공지의 사실인 것입니다. 후보자간의 과열경쟁과 유권자의 기대심리가 높은 우리의 선거풍토에서 본인은 정치자금에 대한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에 곤혹스러움을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며 이러한 고충은 아마 모두가 비슷하였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자금의 내역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로 과장되게 알려진 측면이 없지않을 뿐 아니라 정치자금에 대한 논란은 자칫 정치불신만을 심화시킬 우려가 큰,매우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정당 이외의 특정인에게 본인이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으나 그러한 사실이 없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평화적으로 정권을 인계해 주고 나온 어떤 통치자도 정치자금의내역을 공개하여 왈가왈부하는 사례를 본적이 없습니다. 본인도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기 싫다기 보다는 입을 열게 됨으로써 과거청산의 마무리가 아니라 청산의 새로운 시작이 되고 세기말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과거의 수렁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강제징집문제◁ 병역법상 대학생은 스스로가 원하면 졸업시까지 징집을 연기할 수 있지만 대학을 그만두거나 휴학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연기혜택을 받을 수 없으므로 휴학한 대학생은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입대하여야 하며 의식화된 대학생이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의식화된 대학생이 퇴학된 경우,징집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를 강제징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입대한 사람들은 당연히 군부대에서 다른 병사들과 함께 똑같이 병영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생각되나,그중 몇명이 사망하자 사망사실 자체가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대통령인 본인이 병영내에서 사망자가 발생할때마다 보고받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당시 본인은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물은바가 없습니다. ▷관계기관 대책회의◁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란 것은 공식적인 정부기구가 아니라 국가 중요 현안이나 업무내용이 여러부처와 관련되는 사안인 경우 관련부처의 책임자 또는 실무자들이 모여 주무부서 책임자 주관하에 서로 의견을 개진하고 대책을 협의하는 비상설회의로 운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회의는 의결 또는 집행기구가 아니라 단순히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모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회의는 참석 대상자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해당 안건과 관련있는 부처의 공무원들이 그때 그때 참석하는 것으로서 대통령이 회의소집을 지시하거나 참석자를 지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화의 댐 건설◁ 평화의 댐은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에 따른 국가안보상의 위해를 예방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대응 댐 건설이 정부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응방안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84년 9월께 북한에서 북한강 상류에 80만㎾ 규모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사실이 노동신문ㆍ평양방송 등을 통해 수차 보도된 바 있어 저들이 공표한 발전용량을 근거로 저수량을 역산해 본 기술진의 검토결과 최대 저수량 2백억t에 달하는 초대형 댐을 건설하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북측 대응 최선책 북한의 이러한 대규모 댐 건설은 하류에 있는 우리측의 수자원 및 발전량 감소를 초래함은 물론 인위적으로 파괴하거나 또는 자연붕되될 경우에 10여시간 후에는 수도권 일대가 대부분 수몰되는 등 우리 국민의 생존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며 특히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악랄한 반대와 방해공작을 펴오던 북한으로서는 무슨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르는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이었음은 국민 여러분도 상기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86년 10월께 수차례에 걸쳐 북한측에 국제관례를 무시한 금강산 댐 건설을 중지하도록 촉구하였으나 북한측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여 86년 11월께 국가보위를 위한 자위 조치로서 수공을 방지할 수 있는 대응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의 댐은 당시 정부의 정보 판단에 따른 최선의 대응방안이었으며 정권유지 차원에서 금강산 댐의 위험성을 과장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우방이 제공해준 항공사진 등 여러가지 정보 자료에 비추어 이 댐은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축소중이었음이 확실하며 그 뒤 북한이 댐 공사를 중단한 것은 우리가 평화의 댐을 축조함으로써 저들의 의도가 사전 봉쇄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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