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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력다짐’ 러 푸틴, 페이스북 사진 보니 ‘충격’

    ‘무력다짐’ 러 푸틴, 페이스북 사진 보니 ‘충격’

    러시아의 파병으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러시아가 소치 동계올림픽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준비해왔다는 분석이 나왔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외교가 소식통과 러시아군에 정통한 전문가들 말을 토대로 러시아가 여러 주 동안 세심하게 우크라이나 파병을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냉전 시기 스웨덴군에서 러시아 관련 정보장교를 지낸 경제학자 요한 라이벡은 러시아가 공습부대원 2000명을 크림반도에 보내고 서부 접경지에서 병력 15만명을 동원한 군사훈련을 진행한 것을 두고 “그런 규모의 군사행동을 그렇게 순식간에 진행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라이벡은 “러시아 흑해함대가 발트함대의 지원을 받아 며칠 만에 병력을 이동시킨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며 “러시아의 이번 군사행동은 소치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일어나도록 모두 계획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정보기관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들은 러시아가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을 동원해 군사작전을 준비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FSB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몸담았던 곳이자 정권 세력 기반인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이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외교관은 FT에 “크림반도에서 친러시아 무장세력이 활동하는 데에 FSB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서 “친러시아 시위대 조직에도 이들의 손길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반대한 ‘광장 시위대’와 야누코비치 근위대 역할을 해온 경찰 진압 특수부대 ‘베르쿠트’ 모두에 러시아 정보요원들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유럽 국가의 외교관은 “(군사행동을) 결정하기 이전부터 러시아 정보기관이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했다는 징후들은 러시아에서 자유·진보 세력과 친 푸틴 강경세력 사이의 균형이 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우려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2일(현지시간) 친서방 성향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를 비난하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주민들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는 이날 오후 5시쯤부터 약 2만명이 시내 중심가 푸쉬킨 광장에 집결한 뒤 환상도로를 따라 사하로프 대로까지 수 km를 행진했다. 여러 정당 당원들과 사회단체, 청년·학생 조직 회원 등은 ‘우크라이나인이여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있다’, ‘우리는 형제들을 버리지 않는다’ 등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관련 구호를 외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남부 크라스노다르 등 다른 도시들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성원을 보내고 푸틴 대통령이 상원으로부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력 사용 승인을 확보한 것을 지지하는 집회와 시위가 개최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 내 집회 장면 등을 담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등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한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 행장과 제일2저축은행은

    정구행(50) 제일2저축은행장은 대전상고와 한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제일저축은행 장충동본점 영업부 행원으로 입사하면서 저축은행 업계에 몸을 담았다. 이후 제이원(현 제일2) 저축은행 남대문지점장과 테헤란로지점장을 역임한 뒤 2005년부터 제일2저축은행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제일2저축은행은 1972년 설립된 한국상호신용금고의 후신이며, 제일저축은행이 2000년 인수했다. 2006년부터 제일2저축은행을 상호로 썼다. 제일저축은행이 100% 지분을 갖고 있으며 현재 서울 테헤란로와 강남, 천호동 등 3곳에 지점을 두고 있다. 제일2저축은행은 모회사와 함께 여러 건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참여해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았고, 이번 영업정지 조치를 피하지 못했다. 금융감독원 검사 결과 올해 6월 말 현재 제일2저축은행의 여신을 포함한 총자산은 1조 610억원이었으며, 부채는 1조 495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 6월 말 9.22%였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올 6월에는 마이너스 0.63%로 악화됐다. 제일저축은행 관계자는 “갑자기 정 행장이 투신해 당황스럽다.”며 “(정 행장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한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정 행장은 상호신용업계 ‘토박이’로 불릴 만큼 오래 근무했다.”며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지만, 이번 영업정지로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고 전했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책임은 내가 지겠다” 메모 압수수색중 본점 옥상서

    “책임은 내가 지겠다” 메모 압수수색중 본점 옥상서

    최근 부실저축은행으로 지정돼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비리 의혹 수사 대상에 오른 제일2상호저축은행 정구행(50) 행장이 23일 합동수사단의 압수수색를 받던 도중 투신, 자살했다. 낮 12시 5분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제일2상호저축은행 본점 앞길에 정 행장이 엎드린 채 숨져 있는 것을 순찰하던 혜화경찰서 관할 파출소 경찰관이 발견했다. 경찰서 측은 “은행 근처를 순찰하던 직원이 ‘퍽’ 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양복바지에 흰 와이셔츠 차림의 정 행장이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정 행장의 자필 메모가 행장실에서 발견됐다. 메모에는 “뒷일을 부탁한다. 써놓은 글이 있으니 읽어 달라. 최근 매각 관련한 실사가 진행 중인데 실사가 잘 안 될 수 있다. 고객들에게 미안하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는 등의 내용이 적힌 것으로 전해졌다. 정 행장은 투신 직전 박모 이사의 방에 있다가 박 이사에게 ‘지갑 안에 메모지가 있으니 꺼내서 보라.’고 말했다. 박 이사가 5분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 정 행장이 사라졌고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후 정 행장이 전화를 걸어와 “먼저 가서 미안하다. 매각절차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끊었다는 것이다. 정 행장이 투신할 당시 합수단은 은행 2층을 압수수색하고 있었다. 정 행장은 낮 12시쯤 3층 행장실에서 마지막으로 직원들에게 목격됐다. 경찰 관계자는 “3층 행장실에 있던 정 행장이 압수수색이 진행되자 말 없이 6층으로 올라갔다.”는 직원들의 진술을 받았다. 경찰은 정 행장이 압수수색이 시작된 첫날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제일2저축은행은 1972년 설립된 한국상호신용금고의 후신이며, 제일저축은행이 2000년 인수했다. 2006년부터 제일2저축은행을 상호로 썼다. 제일저축은행이 100% 지분을 갖고 있으며, 현재 서울 테헤란로와 강남, 천호동 등 3곳에 지점을 두고 있다. 임주형·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시론] 백제의 요서(遼西) 경략을 역사에서 지우려하지 마라/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시론] 백제의 요서(遼西) 경략을 역사에서 지우려하지 마라/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우리나라 역사상 해외파병 하면 베트남 파병이나 고려말 이성계의 요동 동녕부 공격을 떠 올린다. 이와 관련해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음미해 본다. 488년에 편찬된 중국 사서 송서에 보면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를 경략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晋平郡) 진평현이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백제가 중국 랴오닝성의 서반부인 요서(遼西) 지역에 설치한 해외 식민지인 진평군을 언급했다. 이 기사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는 민족의 기상을 드날릴 수 있는 호재로 여겼지만, 신빙성 없는 기록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많았다. 백제가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와 전쟁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해외로까지 진출한다는 자체를 뜬금없는 기록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양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 명백히 적혀 있다. 이와 더불어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인 남제서에 각각 보인다. 이 기사 역시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바다를 가로질러 백제를 공격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백제가 해상으로 진출해서 북위를 공격했을 것 같지도 않다는 판단하에 오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는 백제 동성왕이 북위의 앙숙인 남제(南齊)의 황제로부터 칭찬 받을 목적에서 만들어낸 허위 기록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혹은 백제가 북위가 아니라 고구려와 치른 전쟁으로 해석하거나, 고구려의 양해 하에 북위군이 육로를 이용해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상천외한 해석도 나왔다. 모두 백제의 해상 진출을 부정하려는 저의가 담겼다. 이쯤 되면 해양강국 백제라는 말은 구두선이나 메아리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를 공간적 범위로 해서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던 백제가 무대를 바꿔 요서 지역에 진출하게 된 것은 양국 간의 전쟁과 역학 구도가 국제성을 띠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개토왕릉 비문에 보이는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한 400년 고구려군 5만명의 낙동강유역 출병도 기실은 백제의 사주를 받은 왜 세력의 신라 침공이라는 유인책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연(後燕)이 고구려의 배후를 기습하여 서쪽 700여리의 땅을 일거에 약취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낙동강유역 진출은 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백제는 왜·후연과 연계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맞서고 있었다. 400년 이후 후연과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사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후연은 고구려에 시종 밀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릉하 방면의 숙군성까지 빼앗겼고, 심지어는 지금의 베이징인 연군(燕郡)까지 공격을 받았을 정도로 수세에 놓였다. 다급한 후연이 고구려의 앙숙인 백제에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백제군은 요서 지역에 진출해서 고구려의 서진(西進)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그 직후 붕괴된 후연 정권의 후신이자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의 북연 정권은 408년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돌변한 상황에 후연을 지원할 목적으로 요서 지역에 출병한 백제군의 입장이 모호해졌다. 결국 백제군은 기왕에 진출한 요서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 산물이 요서 지역의 진평군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를 경략했다.’는 구절은 정확한 기록인 것이다.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의 침공을 격퇴하고 해상전에서 승리한 전쟁은 진평군을 에워싼 전투가 분명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요서 지역의 진평군은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 같다. 진평군의 소멸 시기는 연구 과제로 남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백제의 요서 진출은 우리 역사 무대의 공간적 범위가 한반도를 뛰어넘었을 정도로 국제성을 지녔음과 더불어 해양강국의 위용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2009 녹색성장 비전] ‘온실가스 감축 = 돈’ 12개국 내년 1500억弗 시장 형성

    [2009 녹색성장 비전] ‘온실가스 감축 = 돈’ 12개국 내년 1500억弗 시장 형성

    지구온난화를 초래한다는 온실가스를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온실가스의 배출을 강제로 규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배출을 줄일 경우 경제적 인센티브를 안겨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을 결합시킨 것이 기후거래소(Climate Exchange)라고 할 수 있다.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인 이행방안인 교토의정서가 2005년 발효되면서 세계적으로 기후거래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현재 각국에서 15개 정도의 기후거래소가 운영중이거나 준비 단계에 있다. 세계탄소시장의 거래규모는 오는 2010년 150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기후거래소에서는 온실가스가 상품으로 거래된다. 온실가스 가운데서도 이산화탄소가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탄소 시장(Carbon Market)’으로도 불리며, 그밖에도 배출권 거래 등 다양한 이름이 붙어있다.기후거래소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이 회원국별로 온실가스 배출량 할당 및 거래(Cap and Trade)를 골자로 하는 배출권거래제도(ETS·Emission Trading Scheme)를 가장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영국 런던에는 거래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유럽기후거래소(ECX)가 자리잡고 있다. 또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노르웨이도 기후거래소를 설립했다. 2005년 4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도 ECX가 설치됐지만, 2007년 10월 런던으로 통합됐다. 파리에는 2007년 12월에 설립된 블루넥스트라는 기후 거래소가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소유한 유로넥스트(파리, 암스테르담, 브뤼셀의 통합 증시)와 프랑스의 공공 금융기관인 케세 데 데포(Caisse des Depot)가 합작한 회사다. 탄소배출권 선물을 주로 거래하는 ECX와 달리 블루넥스트에서는 현물·선물이 모두 거래된다. 블루넥스트는 탄소배출권뿐만 아니라 ‘기후로 인한 위험(Weather Risk)’도 환경관련 금융 상품으로 개발해 판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와 함께 블루넥스트는 뉴욕증권거래소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용해 북미와 아시아를 포함한 전세계적인 기후거래소를 만들어간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3년에 문을 연 시카고기후거래소(CCX·Chicago Climate Exchange)가 가장 큰 기후거래 시장이다. ECX의 소유주인 영국의 CLE(Climate Exchange Plc) 그룹이 미국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2003년에 설립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시절 미 정부가 교토의정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등 탄소 거래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CCX는 자발적 시장으로 운영되어 왔다. CCX에 참여한 멤버들은 201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3년을 기준으로 6% 줄이기로 서약했다. 현재 CCX 멤버 가운데는 포드·듀폰·모토롤라 등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들이 포함돼 있다. 이와 함께 시카고·오클랜드와 같은 도시, UC샌디에이고·미네소타대학·미시간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철도회사 암트랙과 같은 정부 기관, 전국농민연합 등 각종 협회를 포함해 멤버 수가 350개에 이른다. 이들이 배정받은 감축량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배출권을 사야 하고, 적게 배출하면 배출권을 파는 것이다. 거래 대상은 CCX에서 만든 CFI(Carbon Financial Instrument). 기본거래 단위는 100t이다. 자발적 시장이지만 가입한 회원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의 법적인 의무가 있다. 미 금융산업규제국(FINRA)에서 회원들의 감축 여부를 감시한다. 캐나다의 몬트리올에도 자발적 탄소거래시장인 MCeX가 설립됐다. 또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 주에도 역시 자발적 기후거래소인 ACX(Australian Climate Exchange)가 있다. 2005년 12월 석유 및 가스 회사에서 일하던 중역들에 의해 설립됐다. ACX에서는 독자개발한 NGAC라는 배출권 상품이 CER 등 다른 배출권과 함께 거래된다. 뉴질랜드 웰링턴의 탄소거래소(NZCX)에서는 호주 거래소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의 파생상품거래소인 MCX는 지난해 1월 아시아 최초로 CER 선물시장을 설립했다. 중국도 지난해 9월 CCX와 합작으로 톈진기후거래소(TCX)를 열었다. 일본은 도쿄 증권거래소가 올해 탄소거래소를 세울 예정이다. 홍콩의 증권거래소도 역시 기후거래소를 추진중이다. 한국에서는 환경부와 한국거래소, 지식경제부와 전력거래소가 각각 손잡고 탄소거래시장 설립의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seoul.co.kr ■ 세계 최대 탄소시장, 런던 ECX를 가다 직원 6명이 전세계 거래량의 40% 담당 │런던 이도운특파원│세계 최대 기후거래소인 영국의 유럽기후거래소(ECX·European Climate Exchange)를 직접 방문하면 적어도 두 번은 놀라게 된다. ●ECX는 상품개발·마케팅만 우선은 직원 수가 6명에 불과하다는 사실. 런던 금융가의 중심인 비숍스게이트에 자리잡은 ECX 본사에 들어가면 너무나 조용한 분위기에 놀라게 된다. 1층에는 리셉션과 회의실, 접견실이 자리잡고 있고, 2층은 사무실이다. 샘 존슨-힐 시장 개발 담당자에게 “도대체 6명으로 세계 최대의 기후거래소가 운영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나마 최근까지는 5명이었다가 한명을 더 뽑은 것”이라고 웃음을 지으며 답변했다. ECX의 탄소거래는 ICE(Inter Continental Exchange) 유럽선물거래소의 온라인 거래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다. ECX는 상품 개발과 마케팅만 담당한다. 말하자면 핵심사업만 담당하고 나머지는 아웃소싱을 한 것이다. ICE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에너지선물거래소로, 국제석유거래소(International Petroleum Exchange)의 후신이다. 모든 거래는 ICE유럽청산소에서 청산되며, 영국 금융감독청(FSA)의 감독을 받는다. ECX에서 두번째로 놀라는 것은 엄청난 탄소 거래량이다. 지난해 ECX의 총거래규모는 무려 920억유로(1250억달러·약 162조원)에 이른다. 2007년의 400억유로와 비교해도 두배가 넘게 증가했다. 전 세계 탄소거래양의 40%, 유럽 탄소 거래량의 87%를 차지한다. 존슨-힐이 회의실을 컴퓨터를 켜고 ICE 사이트로 접속해서 탄소 거래 현황을 직접 보여줬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거래 상황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ECX에서 거래되는 탄소 상품은 네가지. EUA(EU Allowances) 선물, 옵션과 CER(Certified Emission Reductions) 선물, 옵션이다. EUA는 유럽연합(EU)이 회원국의 탄소배출량을 분배하고 거래하도록 만든 시스템(Cap and Trade)에 따른 배출권이다. 회원국들이 배분받은 배출량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그만큼의 EUA를 사야 하고, 적게 배출하면 EUA를 팔 수 있다. 1EUA는 1t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다. CER는 기후변화협약(교토의정서)에 따라 나무 심기, 화석연료 대체 등과 같은 청정개발체제(CDM) 사업에 투자해 인정받은 배출권을 말한다. EUA는 2014년까지 매년 12월 마감하는 상품이, CER는 2012년까지 매년 12월을 기준으로 삼는 상품이 거래된다. ●지난해 총거래규모 162조원 ECX에서는 이미 글로벌 대기업은 물론 세계 각국의 개인들까지 적극적으로 거래에 참여하고 있다. BP와 바클레이스, 골드먼삭스 등 80여개의 글로벌 기업들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전세계에서 수천명의 거래자들이 은행 등 중개기관을 통해 탄소거래를 하고 있으며, 가정에서 온라인 거래를 하는 개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온라인 거래가 가능하다. 존슨-힐에게 단일 국제 기후거래소의 설립이 가능한가를 묻자 “CER는 가능하지만, EUA는 유럽 국가간의 거래이므로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CX는 영국 CLE(Climate Exchange Plc) 그룹에 속한 회사다. 런던 증시에 상장돼 있는 CLE는 ECX와 함께 미국의 시카고기후거래소(CCX), 시카고기후선물거래소(CCFE)도 소유하고 있다. dawn@seoul.co.kr
  • [맞수] 여의도硏 vs 민주정책硏

    [맞수] 여의도硏 vs 민주정책硏

    여의도연구소와 민주정책연구원은 각각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머리 싸움’을 지원하는 싱크탱크다.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추가경정예산안과 여야가 첨예하게 맞선 입법전쟁, 4·29 재·보선 등 각종 정치·정책 현안에 대해 기본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고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여야 전략·전술의 첨병 여야가 발표한 추가경정예산안 규모는 여의도연구소와 민주정책연구원의 여론조사를 통해 확정됐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최근 “여의도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 국민 대다수가 ‘30조원쯤이 적당하거나 오히려 많아도 좋겠다.’고 답했다.”고 소개했다. 민주정책연구원은 추경 규모를 13조 8000억원 선으로 제시했다. 영세 자영업자 구제나 빈곤자 긴급 구제 등 서민 경제에 방점을 뒀다. 생활에 밀착하고 국민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뉴 민주당 플랜’을 입안하는 것도 민주정책연구원의 몫이다. 한나라당이 경제살리기를 이번 재·보선의 화두로 삼아야 한다는 구상도 여의도연구소의 작품이다. 여의도연구소의 제안에 따라 당 지도부는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해 지역별 맞춤형 경제 공약을 발굴한다. 울산 북구와 인천 부평을에 경제 전문가를 전략 공천해야 한다는 구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여의도연구소는 지역별로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후보에 야당 후보를 대입한 여론조사도 실시하고 있다. 민주정책연구원도 재·보선과 관련한 지역 현안을 개발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해당 지역의 유권자가 바라는 정책과 사업을 조사한 뒤 후보의 정책 전략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4월과 6월 임시국회에서 이어질 입법전의 전략 기조도 여의도연구소와 민주정책연구원의 머리에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지난해 말 사이버모욕죄 신설을 놓고 여야간 논쟁이 벌어졌을 때 여의도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가 한나라당에 ‘방패’를 제공했다. ●당 독주에 제동도 한나라당은 1995년 정책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여의도연구소를 설립했다. 곽창규 부소장은 29일 “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은 당과 일체되는 감이 있지만, 여의도연구소는 당과는 한 발 떨어져 객관성을 갖고 정책 입안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당 부설이긴 하지만, 한나라당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 ‘MB정부 1년 평가’에서는 현 정부가 국민 소통이 부족하고 대야 설득 능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당정이 성장 위주로 속도전을 주장하면 여의도연구소는 서민과 취약 계층의 배려를 강조해 균형을 잡는다. 민주정책연구원이 발족한 것은 지난해 8월. 2003년 새천년민주당 시절 국가전략연구소, 열린우리당 시절 열린정책연구원, 통합민주신당 시절 한반도전략연구원의 후신이다. 민주정책연구원은 “창립 이후 지난해 말까지 연구개발 실적이 68건이고, 정책 토론회와 여론조사가 63건, 당 정책 교육이 67건”이라고 밝혔다. 문병주 실장은 “여의도연구소가 여론 동향을 파악해 집권을 위한 전략 수립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맞춘다면, 민주정책연구원은 당이 나아갈 정책을 입안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주현진 허백윤기자 jhj@seoul.co.kr
  • [총선 D-20] ‘친박연대’ 30여명 동참

    [총선 D-20] ‘친박연대’ 30여명 동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경선 캠프 좌장이던 서청원·홍사덕 전 의원이 19일 가칭 ‘친박연대’에 입당,4·9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친박연대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낙천하고 탈당한 친박(親朴·친박근혜)계가 둥지를 튼 미래한국당의 후신이다. 서 전 의원과 이규택 의원이 당 공동대표를 맡는다. 이로써 ▲친박연대 소속으로 출마하는 30여명 ▲무소속으로 출마한 20여명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한 30여명 등 친박 그룹의 세 갈래 총선 체제가 완성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친박연대라는 당명에 대해 아직 선거법 위반 여부 유권해석을 마치지 않았다.‘박근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게 5년 뒤 대선 사전선거운동이 되는지가 쟁점이다. 선관위가 허락한다면 서청원(동작갑) 대표와 이규택(경기 이천·여주) 의원, 함승희(노원갑)·전용원(경기 구리) 전 의원 등이 친박연대라는 당명을 걸고 출마한다. 홍사덕 전 의원도 지역구 출마 결심을 굳혔지만, 아직 출마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영남권에서는 엄호성(부산 사하갑)·이강두(경남 산청·함양·거창) 의원이 동참했다. 김무성 의원이 좌장 역할을 하고 있는 친박 무소속 연대와는 ‘공생’ 관계를 유지할 방침이다. 당명에 ‘친박’을 넣는 것을 놓고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모양새가 이상하다는 반대론과 잘못된 공천을 응징해야 한다는 찬성론이 엇갈리고 있다. 친박연대의 한 의원은 “친박연대 당적을 넣어 여론조사를 하면, 무소속 출마를 전제로 했을 때에 비해 5∼6% 포인트 정도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고 전했다. 반면 총선 뒤 한나라당으로 되돌아가기 쉬운 무소속 출마를 유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구도 있다. 이런 지역 몇몇에서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의 집단 탈당이 감행되고 있다. 한편 박 전 대표는 주말 또는 다음주초부터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 머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부고] 원로 국악인 성경린옹 별세

    [부고] 원로 국악인 성경린옹 별세

    원로 국악인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관재(寬齋) 성경린(成慶麟)씨가 5일 오후 경기도 분당 보바스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97세. 국립국악원장(1961년)을 지냈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지휘 보유자로 지정된 고인은 1986년부터 현재까지 국립국악원 사범으로 재직했다.1911년생인 고인은 1931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졸업해 아악부원 아악수와 아악수장, 아악사를 지냈으며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국악계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 보유자로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던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ㆍ1909∼2007)과 고인을 궁중음악 보존이라는 한길을 걸어온 큰 어른으로 여겨왔다. 고인은 2000년 국악진흥 발전에 공이 큰 후학들을 위해 1억 700만원을 ‘관재 국악상’ 기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고인은 서울시 문화상(1960)과 대한민국 문화포상(1963), 대한민국예술원상(1968), 대한민국 모란장(1972), 은관문화훈장(1990), 방일영 국악상(1998)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음악 독본´ ‘조선의 아악´ ‘한국의 무용´ ‘한국음악논고´ 등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아들 탁연(미국 거주), 딸 정희(주부)씨 등 3남4녀가 있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3호실. 발인은 7일 오전 10시.(031)787-1503.
  • 워런 버핏은 누구

    워런 버핏은 ‘가치 투자의 귀재’ 또는 그가 거주하는 네브래스카주 도시명을 따서 ‘오마하의 현인’ 등으로 불린다. 가치가 있지만 저평가된 기업을 발굴, 그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자신의 투자전문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를 위해 매년 여는 주주총회는 ‘자본주의의 축제’로 불린다. 25일 대구텍 임직원들에게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7살에 주식투자 관련 책을 읽었고 11살에 주식투자를 시작했다.“11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고 할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한 ‘행운아’였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세계 5위 안에 드는 부자지만 지난해 6월 마이크로소프트(MS) 빌 게이츠 회장의 재단에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등 부자로서의 사회적 의무 실행에도 앞장서고 있다. ●대구텍은 대한중석광업 후신 대구텍은 1952년 세워진 대한중석광업의 후신이다.1998년 이스라엘 그룹 IMC에 인수되면서 이름을 바꿨다.IMC의 최대 주주는 워런 버핏의 투자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가 최대 주주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최태환칼럼] DJ, 민주당, 소통합…

    [최태환칼럼] DJ, 민주당, 소통합…

    지난주는 ‘동교동 정치주간’이었다.DJ자택이 문전성시였다.‘한 말씀 들으려는’ 범여권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DJ가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선 듯한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동교동 문지방이 반질반질해졌다는 조크가 나올 만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보다 낫다 했던가. 새삼 케케묵은 고사가 떠오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하나다. 범여권 대통합이다. 반한나라당 전선 구축을 독려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뒷전이었다. 대통합 추진 훈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5·18이 분수령이 됐다. 형식은 노대통령이 DJ 뜻을 용인하는 모양새였다.‘대의’에 따른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노·DJ연합론이 성급하게 나왔다. 사실상 노의 후퇴다. 현직 대통령과의 파워게임에서 한물간 전직이 제갈량의 위세를 보였다. 김 전 대통령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훈수’를 뒀다고 했다. 그러나 실속이 별로 없다. 오히려 상처를 입었다.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한지 모른다. 우선 민주당의 반응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시큰둥했다. 그가 만든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이다. 호남지역 적자를 자처한다. 동교동을 찾은 박상천 대표는 기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국정실패 인사 배제론을 거듭 강조했다. 전직 대통령의 정치 간여를 공개적으로 반대해왔던 그다. 김 전 대통령으로선 또박또박 설득하려 드는 박 대표가 달가웠을 리 없다. 면담 내용을 두고서도 민주당과 동교동측 얘기가 달랐다. 신경전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상상조차 어려운 장면이다. 격세지감이다. 민주당 조순형의원도 DJ의 문지방 정치 비판에 가세했다. 평생 정치를 했는데 싫증날 때도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민주당 어느 인사는 “김 전 대통령은 통합에 대해 할말 다했으니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얘기까지 했다. 일련의 흐름은 더 이상 현 정국에 대해 콩 놔라 팥 놔라 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지난 월요일 민주당·중도통합신당 두 정파가 통합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소통합이다.DJ 뜻과는 관계없다. 그의 그림과는 다른 모습이다. 통합 합의 때 민주당은 국정실패 인사 배제론 명문화를 철회했다. 하지만 실리는 챙겼다. 민주당 의지가 충분히 전달됐다. 어차피 열린우리당 내 노무현 핵심그룹은 참여하기 어렵게 된 현실이 더 중요하다. 단계적 대통합 논의과정에서 기선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할 만하다. DJ로선 답답할 노릇이다. 자신의 영향력이 예상보다 못한 것도 그렇고, 카리스마가 훼손된 부분도 그렇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더 이상의 지렛대가 없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그의 문지방 정치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반한나라당 정권 재창출이 절박한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더 욕심 부릴 일이 아니다. 그의 의지 여부와 관계없이 지역주의 부활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정권의 창출은 DJ정권 승계를 원하는 민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노 대통령과의 연대 목소리를 높일수록 민망하게 보인다. 그러잖아도 정국은 지난 주말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을 계기로 벌집 쑤씬 듯하다. 대통합 갈등 역시 새 국면으로 접어드는 양상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언제 또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될까. 국민들은 혼란스럽고, 착잡하다. 집착은 또다른 갈등과 분열을 낳을 뿐이다. 호남도 DJ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됐다. 이제 그가 호남을 놓아줄 차례다.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정권재창출 관심없다고? 절대 아냐”

    “정권재창출 관심없다고? 절대 아냐”

    노무현 대통령이 18일 지역주의 심판론과 민주세력 정권재창출론을 꺼내들었다.“지역주의는 오로지 일부 정치인들에게만 이로울 뿐”이며 “어느 누구도 도도한 진보의 흐름을 가로막거나 되돌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오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였다. 기념식에 이어 지역 경제인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는 “일부에서 내가 정권재창출에 관심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그건 절대 아니다.”고 민주세력의 정권재창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지역주의 부활 조짐” 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정치의 지역주의가 아직 남아 있다.”면서 “광주 시민이 영남사람인 저를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영남에서도 30% 안팎의 국민이 지역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선거제도가 합리적으로 바뀌지 않아 (지역주의 극복 노력에)후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군사정권의 업적은 부당하게 남의 기회를 박탈하여 이룬 것”이라면서 “그 업적이 독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다는 논리는 증명할 수도 없고, 국민의 역량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세력임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도 민주세력이 무능하고 실패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열린 광주·전남 지역 경제인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내가 탈당은 했지만, 열린우리당이 결정하면 따르겠다.”며 질서있는 통합의 결과를 존중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열린우리당 해체와 ‘도로민주당’ 회귀에 우려 표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열린우리당의 해체와 도로 민주당식 지역주의 회귀 움직임을 경계하고, 지역 중심의 호남·충청연대론보다는 지역주의를 벗어나려는 ‘영남의 30%’에 정권재창출의 단초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군사독재 정권의 후신이라고 보는 한나라당과 민주세력 무능론을 주장하는 일부 진보진영 인사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반(反)지역주의와 ‘김대중-노무현’을 계승하는 민주세력 단결을 역사 진전의 해법으로 내놓은 셈이다. ●“2단계 균형발전계획 밀어붙여 보자” 노 대통령은 이날 경제인 오찬간담회에서 2단계 균형발전계획과 관련,“대통령 선거판에 국회에 내놓고 밀어붙여 보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금년 1·4분기가 되면 (정책 입안이)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그게 늦었다.”며 “(현재)입안 중”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2단계 균형발전 계획의 핵심 내용과 관련,“(기업이)지방 가면 비용이 훨씬 줄도록 세금·인건비 확실히 줄여주고, 지방 가면 사람이 확보되게 해줘야 한다.”면서 “2010년쯤에는 보따리 싸서 가겠다고 기업이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겨냥? 한편 노 대통령은 “2011년 (혁신도시 건설이) 끝나고 나면 대운하 만든다는 사람도 있고 하니까 건설물량은 끊임없이 나올 것 같다.”며 듣기에 따라선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해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혁신도시 조성사업과 관련, 노 대통령은 “삽 뜨는 게 60조원쯤 되고 거기에 건설이 100조원 정도 될 것”이라면서 “제 임기 동안은 큰 건설을 못했고, 건설업이 썩 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앞으로 5년 동안은 우리나라 건설업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도 했다. 박찬구기자·광주 구혜영기자 ckpark@seoul.co.kr
  • [내가 바로 으뜸 공무원] 서울시 홍보기획과 심승훈 주임

    서울시 홍보기획과 심승훈(40) 주임은 잡지사 기자 출신의 홍보전문직 공무원이다. 서울시가 매월 발행하는 ‘서울사랑’의 편집 책임을 맡은 뒤 딱딱한 기관발행지를 여느 민간 월간지 못지않게 재미있고 유익하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사랑은 월 7만부를 찍어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병원, 은행, 구청 등에 무료로 배포된다. 서울시 홍보대사인 연예인을 표지모델로 활용하고 세련된 화보, 재미있는 콩트, 알기 쉽게 풀이한 시정 등을 담는다. 재미있다며 정기구독을 하는 시민이 2만 5000여명이나 된다. 심 주임은 서울사랑팀 4명과 함께 매월 기획→취재→기사 작성→편집을 하면서 몇가지 원칙을 정했다. 되도록 시민에게 수혜가 될 수 있는 아이템을 찾고 시민 입장에서 궁금한 점을 취재하며 사례 위주로 알기 쉽게 기사를 작성했다. 관의 냄새가 나지 않도록 세련된 편집기법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사랑은 1996년에 창간한 ‘월간서울’의 후신이다. 당시 조순 시장은 민선 자치단체 출범 1주년을 맞아 시정을 알릴 목적으로 월간지를 만들었다. 고건 전 시장은 타블로이드판 신문 ‘새서울뉴스’로 이름을 바꿔 최대 250만부를 발행했다. 이명박 전 시장이 ‘서울사랑’이라는 이름의 잡지로 다시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심 주임은 “오세훈 시장의 이미지를 감안해 부드럽고 세련된 편집, 시민고객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발굴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체장에 대한 직접 홍보는 1년에 4회로 확 줄였다. 잡지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50대 남성이나 30∼40대 여성들의 전화가 빗발친다고 한다. 연재물 ‘추억의 사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고 동네 이웃의 주소를 일러 주며 추가 배달을 요구하기도 한다. 심 주임은 대학에서 무역학을 공부한 뒤 해양전문잡지에서 4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서울시가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홍보전문직을 신설하자 공직에 뛰어들었다. 서울시에는 교통방송 기자 등 500여명의 홍보전문직이 근무하고 있다. 심 주임은 “서울사랑의 개인 독자가 나날이 늘어 예산부족을 걱정할 지경”이라고 ‘행복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불법 다단계 사업자 등록 불허

    앞으로 불법적인 다단계 판매행위로 적발된 사업자는 다른 업체를 인수하거나 신설하는 방식으로 다시 영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후원수당을 법정한도인 35%를 초과해 지급한 다단계 판매업자는 3년 이하의 징역형 처벌을 받게 된다. 서울 강남과 서초 등 다단계 판매조직이 밀집한 곳에서 기획조사도 실시된다. 이동규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은 26일 “소비자와 사업자 단체·학계·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 다단계 판매와 관련된 법령의 제·개정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면서 “내년 중 개선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사무처장은 “지금까지는 불법행위를 한 판매업자를 임원으로 두면 다단계 판매업자 등록을 금지했지만 앞으로는 지배 주주가 위법 전력이 있을 때에도 등록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또 지난 22일 방문판매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후원수당 지급총액이 매출액의 35% 이하로 제한된다고 지적했다. 이를 초과하면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지고 미성년자를 고용하면 1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피해보상보험 계약 후 매출액 등의 자료를 허위로 꾸며도 3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된다. 한편 공정위는 제이유 그룹의 후신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불스홀딩스와 관련,“미등록 상태에서 다단계 판매를 했거나 금전거래를 했는지 조사하고 있다.”면서 “자료검토가 끝나는 내년 1월이면 조사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이탈리아 화력쇼…우크라이나 3-0대파 4강행

    [스포테인먼트 | 박현기자] ‘아주리군단’ 이탈리아가 막강한 화력을 뽐내며 손쉽게 4강에 안착했다. ‘전천후 득점기계’ 안드리 셰브첸코를 앞세워 첫 월드컵 무대에서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우크라이나의 돌풍도 거함 이탈리아 앞에서 힘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이탈리아가 1일 새벽(한국시간) 함부르크 FIFA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우크라이나와의 2006독일월드컵 8강전에서 한 수 위의 실력을 뽐내며 3-0으로 완승했다. 2005~2006시즌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지만 이번 대회 16강전까지 득점포를 가동하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장신 공격수 루카 토니는 이날 경기에서 두 골을 몰아넣으며 조국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같은날 아르헨티나를 승부차기 끝에 힘겹게 꺾은 개최국 독일과 결승행 티켓을 놓고 한판승부를 펼치게 됐다. 월드컵 처녀 출전국인 우크라이나는 공수 모든 면에서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골운 역시 지독하게 따라주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전반 시작 휘슬이 울리기가 무섭게 우크라이나를 링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이탈리아는 전반 6분만에 수비수 잔루카 참브로타가 페널티지역 우측에서 강력한 왼발슛으로 골네트를 흔들며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이탈리아는 이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추가 득점에 실패하며 전반을 마쳤다. 후반 초반은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거세게 전개됐다. 후반 5분 안드리 후신이 페널티지역 좌측에서 정확한 헤딩슛을 날렸지만 재빨리 몸을 날린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의 손끝에 걸리고 말았다. 후반 13분에는 페널티지역 우측에서 올레흐 후세프의 강력한 오른발슛이 역시 부폰의 정면으로 갔고 이은 막심 칼리니첸코의 오른발슛 또한 골라인에 버티고 있던 수비수가 걷어내며 땅을 쳐야했다. 우크라이나는 후반 17분 후신이 시도한 회심의 헤딩슛마저 골포스트 상단에 가로막히며 지긋지긋한 불운에 눈물을 흘렸다. 우크라이나가 동점골을 넣기 위해 공격을 강화한 틈을 타 이탈리아는 효과적인 역습으로 우크라이나의 골문을 두들겼다. 후반 14분 프란체스코 토티가 우크라이나 진영 우측에서 올려준 날카로운 크로스를 문전에 버티고 있던 토니가 가볍게 헤딩슛으로 마무리하며 2-0으로 점수차를 벌렸다. 토니는 후반 24분 우크라이나 진영 좌측을 완벽하게 돌파한 참브로타의 절묘한 땅볼 패스를 받아 텅빈 골문을 향해 왼발로 침착하게 골을 마무리하며 이날 경기 자신의 두번째 골이자 팀의 세번째 골을 완성시켰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최후의 반격을 펼쳤지만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뚫지 못하고 영패를 당하고 말았다. 후반 45분에는 셰브첸코가 화려한 개인기로 돌파를 시도한 후 페널티지역 안에서 수비수와 몸싸움 도중 넘어졌지만 오히려 공격자 파울을 선언당하기도 했다. 셰브첸코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될지도 모르는 이번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하며 퇴장했다. forever9@sportsseoul.com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50) 예언에 관한 일화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50) 예언에 관한 일화

    ‘정감록’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주제를 40개 정도로 나눠 일년 가까이 연재를 해왔지만 손길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아직도 많다. 우선 생각나는 것이 예언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들이다. 그 중엔 그냥 버려두기 아까운 것이 꽤 많아 몇 가지를 간추려 보았다. 특히 암울했던 일제시대엔 독립을 향한 민중의 염원이 간절해서인지 각종 예언과 관련된 일화가 많았다. 또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동학과 관련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예언에서 찾은 조선독립의 희망 1920년대에는 천도교가 예언과 관련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이라 이상세계의 실현에 대한 믿음이 유달리 강했다. 당시 교단 지도부는 재정에 충실을 기하려고 성미(誠米) 적립운동을 펼쳤는데, 성미운동에서도 예언이 등장했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천도교 신도는 성심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끼니 때마다 가족 수만큼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교단에 바쳐야 된다고 했다. 하늘은 성미가 많고 적음에 따라 신도들의 성심을 상중하로 판단해 장부에 기재하므로, 성심이 깊으면 복을 많이 받지만 적거나 없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교단에 따르면, 교조 최제우는 동학이 창건된 지 61주년째 되는 1920년 한국에 갱생한다 했다. 세상에 다시 내려온 최제우는 오만 년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펼쳐 전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연맹을 대신해 세계정부를 세운다 했다. 이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예언이었다. 기독교의 재림예수이야기를 방불케 한다. 천도교 신도들은 교단의 가르침을 성심껏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했다. 그들 각자가 바치는 정성은 하늘을 감복시켜, 성미를 많이 바친 이는 새 세상에서 고위관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본인은 물론, 자손들까지도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르침은 통했다.1920년경 천도교 측이 거둔 성미 수입은 당시 화폐로 수십만 원이나 되었다. 참고로, 일제말기 초등학교 교원의 초임은 45원에 불과했다. 천도교의 성미운동을 식민지 당국은 사기적인 약탈행위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성미는 물론 천도교단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상당부분은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투입되었다.1919년의 3·1운동 때도 천도교 측은 운동자금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그 뒤에도 천도교 측은 ‘개벽’과 같이 선진적인 계몽잡지를 발간했고 농촌운동을 일으켰다. 기꺼이 성미를 적립했던 신도들도 마음속으로 조선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심지어 천도교의 곁가지인 무극대도교나 상제교 측도 그러했다. 무극대도교는 일제의 보안법을 자주 위반한 것으로 유명했다. 상제교도 교주 김연국이 상제로부터 홍서(紅書)를 받았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었다. 또 다른 일파인 수운교도 교조 최제우를 부처의 후신으로 보았다. 이들 교단은 여러 예언을 동원해 곧 지상천국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지상천국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독립을 기본전제로 했다. 일제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런 신종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감언이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실상 그것은 단순한 감언이설이 아니었다.“이 교단”은 혁명 즉, 정권창출에 성공할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배출하게 되며,“이 교”에 입교해 신앙 활동을 잘 하면 생활이 안정되고 새로운 정치지배세력의 일원이 된다는 확신이 뚜렷했다. 이미 언급한 천도교 등 여러 신종교들을 비롯해 보천교, 금강도 및 청림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기존 예언서인 ‘정감록’을 중시했고, 거기에 자기네 나름으로 새 예언을 덧붙였다. 심지어 전혀 이름조차 없는 소규모 단체들도 ‘정감록’에 기대어 독립을 점쳤다.1931년 3월31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경찰서 고등계는 경북 상주와 문경 등지에 사는 평범한 남녀 주민 4명을 보안법 위반자로 검거했다. 당시 40∼50대 나이로 장년층에 속했던 이들은 조선독립을 목표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정감록’의 한 구절,“땅값이 똥값이 되며 천 마리 말이 소가죽을 입는다.(土價如糞 馬千牛服)”라는 대목을 장차 반드시 일어날 미래의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해석은 특이했다. 장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10년간 지속된다고 보았고, 결과적으로 일본은 멸망하고 조선독립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 된다 했다. 우연한 일이지만 이 예언은 거의 들어맞았다.1939년 제2차대전이 터졌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일본은 연합국 측에 패전해 무조건 항복했으며, 마침내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런 주장을 펼치던 사람들은 ‘정감록’ 예언을 따라 십승지를 찾아갔다. 그들은 경북 상주군 화북면 중대리에 있는 우복동에 주목했다. 거기 피난처를 정한 다음, 그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1928년 5월, 우복동에서 결사를 맺고 사찰을 지어 승려로 가장했다. 이웃한 지역사회에서는 그들의 취지에 공감해 사찰건립기금을 낸 사람이 20명가량이나 되었다. 우복동의 ‘선민’들은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진인 정씨의 출현을 기다리며, 그 때 긴요하게 쓰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종교 교육활동에 몰두했다 한다. 사실 19세기 이후 한국에는 수많은 예언이 난무했다. 그 중엔 ‘정감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 예언도 많았다.1933년 8월21일, 충청북도 영동 출신의 박모라는 사람은 그동안 누구도 풀이하지 못한 예언시를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그 일부가 우연히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문제의 예언시는 첫 구절이 이러했다.“봄날 나무에서 원숭이가 우니 귀신도 알지 못한다.”(猿啼春樹鬼不知)는 것이다. 박 도사는 여기 나오는 원숭이(猿)를 임신년 즉 1932년으로 간주했고, 그 해 3월 만주국이 창건될 것을 예견한 시라고 주장했다. 시의 둘째 구절은 “비바람이 치는 날 닭이 울 때”(一天風雨鷄鳴時)라 했다. 박 씨는 닭이 울 때(鷄鳴時)를 계유년(1933)으로 상정했다. 그 해에 만주국의 주권을 둘러싸고 국제회의가 열린다고 예견했다. 회의에서 일본이 만주를 불법 점령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내다보았다. 엄밀한 의미로, 이것은 틀린 해석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만주국의 성립은 장차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리란 예고편이었다. 그 전쟁이 확대되어 마침내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으로 번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박씨의 예언 풀이는 제법 타당한 점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예언시의 마지막 부분은 “만국이 진을 이루고 개가 울 때” (萬國成陳犬吠時)란 구절이었다. 박씨는 이 구절에 대해,“개가 울 때”(犬吠時)는 갑술년(1934)이며 만주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전쟁이 유발되고 악성 전염병이 유행한다는 뜻이라 했다. 그러나 그 말대로 1934년에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는 일본의 패망을 예언한 대본교(大本敎) 같은 신종교도 있었다. 그 교주 왕인은 1945년에 “국체변혁”(國體變革), 즉 일본이 망한다는 예언을 내놓았다. 그의 위험한 발언이 나오기가 무섭게 식민지 당국은 대본교의 교당을 헐어버렸다. 왕인 등 교단 지도부도 몽땅 체포했다. 본래 왕인이란 사람은 농부였다. 그런데 예언능력이 탁월해 신종교의 교주가 된 것이다. 그는 교당의 터를 잡을 때 여기를 파면 반석같이 큰 바위가 나오리라 예언했다. 과연 그 말 대로였다. 세상 사람들은 왕인이 땅속까지 꿰뚫어보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할 만큼 형안을 가졌으면서도, 자기 교당이 허물어질 줄은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며 비웃었다. 중요한 사실은 평범한 개인이든, 크고 작은 신종교 단체든 일제시기 내내 많은 한국인들이 늘 조선독립을 점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예언은 대부분 ‘정감록’을 토대로 했다.‘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동학과 정감록-최제우, 동학정신에 정감록 ‘弓弓乙乙’ 담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정감록’에 대해 미묘한 태도를 보였다. 동학경전을 읽어보면 그는 정감록을 믿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고,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믿는 것 같다. 그가 “기이한 동국 참서”, 즉 ‘정감록’을 손에 쥐고 들려준 가르침을 좀 풀어보면 이렇다. 과거 임진왜란 때는 이재송송(利在松松 이여송 형제가 도움이 됐다)이라 하였고, 가산 정주 서적(西賊 홍경래 난)때는 이재가가(利在家家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이 좋았다)라고 ‘정감록’ 등에 기록돼 있지. 다 맞는 말이었네. 그런 선례를 본받아 우리의 미래도 한번 설계해 보세. 앞으로 세상을 제대로 살려면 ‘정감록’에 나오는 구절이네만 이재궁궁(利在弓弓 궁궁이 유리하다)을 알아내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고 봐야 하네. 매관매직을 일삼는 세도가들도 그 마음은 오직 궁궁에 있는 듯하고, 돈 많은 부자들도 궁궁만 찾고 있네. 거지들도 궁궁, 풍수에 미친 사람들도 궁궁촌을 찾아 더러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다네. 더러는 서학(西學 천주교)에 입교해 그것이 궁궁인 줄로 믿고들 있지. 세상 사람들이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는 것이 몽땅 궁궁에 관한 것뿐이네. 그러나 제 몸을 닦고, 집안일을 바로 다스리지 않은 사람이 강산을 찾아가면 뭐하나. 경박한 세상 사람들 같으니! 다들 이익이 송송(松松)이니 가가(家家)에 있다고 한 말뜻은 겨우 알아낸 듯하지만 정작 궁궁이 무엇인줄은 전혀 모르고 있군. 최제우는 자신이 발견해낸 종교적 진리가 바로 궁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무극대도”라 불렀고, 앞으로 5만년간의 태평시절이 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감록’에 적힌 궁궁을을(弓弓乙乙)이란 구절에 모든 진리가 압축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구절에 입각해 그는 궁을부(弓乙符)를 만들었다. 이 부적을 몸에 붙이면 상처가 생기지 않고, 이것을 불살라 먹으면 만병이 사라진다고 최제우는 가르쳤다. 그러다 고종1년(1864)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동학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그가 죽은 지 30년이 되던 갑오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군들의 깃발에는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水雲大義)란 글귀가 높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수운, 즉 최제우가 설파한 5만년 이상세계의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요컨대 궁을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겠단 것이었다. 고종30년(1894)에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을 전후해 민간에 여러가지 노래가 유행했다. 단순한 노랫가락이 아니라 요참(謠讖), 즉 노래형태를 빈 예언이었다. 더러는 일제시대까지도 남아 인구에 회자되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甲午歲 甲午歲 乙未 乙未 丙申되면 못 간다)” 기왕 일을 벌이려거든 갑오년(1894)에 서울까지 밀고 올라가서 일을 마무리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하다 을미년이나 병신년까지 지연되면 실패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 예언 노래는 갑오 동학농민운동 당시 김개남 등 급진파 측에서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운동이 실패로 끝난 다음, 뒤늦은 후회를 예언의 형태로 담아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동학농민군이 서둘러 서울로 진격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남원 방면을 공략하다 뜻밖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운봉 아전 박봉양이 이끈 반항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씨의 저항은 요참에도 담겨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아랫녘 새야, 윗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하루박(하눌타리), 후-여!” 전라도 고부 출신 녹두장군 전봉준은 ‘하루박´으로 표현되는 박봉양에게 밀린다는 말이다. 참시에서 저항세력을 하눌타리 또는 하루살이에 불과한 박씨라고 일컬은 점은 재미있다. 이런 비유로 볼 때 노래를 만든 이나 부른 이는 농민군 편이었다. 노랫말에 보이는 “후-여”는 새 쫓을 때 내는 소리다. 녹두새 전봉준에게 미리 경고해 농민군이 남원쪽으로 움직이지 말게 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느껴진다. 알다시피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했다. 이로써 운동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수많은 농민군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은 것도 물론이다. 이런 동학농민군들의 비원을 담은 노래는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란 노래였다. 전봉준을 녹두꽃에 비유해 그의 죽음이 곧 민중의 비극이란 것이다. 그밖에 “솔잎과 댓잎이 파르라니 봄인 줄 알고 찾아 왔는데, 흰눈이 펄펄 흩날리니 송죽이 나를 속였었구나.”란 노래도 널리 유행했다. 솔잎과 댓잎만 보고 겨울을 봄으로 착각했다는 가사는, 농학농민군이 시세판단을 잘못해 너무 일찍 군대를 일으켰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농민군의 준비부족을 한탄한 것이다. 이들 가요는 내용을 가지고 보면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그 편에서 만들어 부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노래를 채집한 이은상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제시대 민중은 이 노래들을 후일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노래가 운동이 발생하기 전에 유행한 예언이었다고 믿었다. 민중은 동학농민운동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에게 특별한 예지력이 있다고도 생각했다.1894년 음력 4월경 전라감사 김문현은 농민군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전봉준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는 자객 2명을 밀파했다. 자객들은 담배장사로 변장해 전봉준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신분이 탄로되어 붙들리고 말았다. 전봉준은 점술에 밝았기 때문이다. 점괘를 던져본 그는 자객이 온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고 한다. 믿고 따를 지도자라면 당연히 예언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민중은 생각했다. 요즘도 연말이 되면 국가기관이나 공신력을 자랑하는 주요연구소에선 다음해의 경제성장을 전망하곤 한다. 이런 예언, 예시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필수조건인 모양이다.
  • “배설 선생 숭고한 뜻 이어가자”

    “배설 선생 숭고한 뜻 이어가자”

    대한매일신보 창간자인 영국인 배설(영국명 어니스트 베델) 선생 96주기를 맞아 27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추모대회가 열렸다. 배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진채호) 주최로 열린 행사는 배설 선생의 생애와 항일 언론투쟁 활동상 회고, 경모시 낭송, 헌화 및 분향, 기념식수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종전 추모식은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에서 열렸으나 올해에는 외국인 묘지공원 옆에 조성된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진행됐다. 양화진 성지공원은 개화기때 한국에 기여한 외국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최근 마포구청이 새로 조성했다. 대회장인 채수삼 서울신문사장은 양동용 서울신문 이사가 대독한 추념사를 통해 “배설 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겨레의 독립자존을 일깨운 횃불이었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우리 민족을 계몽시켜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채 사장은 또 “서울신문은 앞으로도 선생의 숭고한 뜻을 이어 언제나 독자와 진실편에 서서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한편, 공공 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 서울신문이다. 당초 행사에 배설 선생의 후손이 초청됐으나 일정 때문에 8·15광복절에 서울을 찾기로 했다. 배설 선생은 15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영국 크로니컬지 아시아특파원으로 일하던 중 러·일전쟁을 취재하면서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영·일동맹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자 크로니컬지에 사표를 던지고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고종의 후원 아래 배설 선생은 박은식·양기탁·신채호 선생을 영입, 민족주의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를 견디다 못한 영국이 일본의 탄압을 묵인해줘 선생은 한때 상하이에서 구금되기도 했다.1909년 조선에서 지병으로 숨진 뒤 고종이 마련해준 마포구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1964년 한국 언론인들이 기념비를 세웠고, 196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내 인생의 등대] 최창식 서울시 도시관리정책보좌관

    [내 인생의 등대] 최창식 서울시 도시관리정책보좌관

    “한 우물을 파면 삶의 보람이 따른다는 사실을 30년 가까이 되는 공직생활이 일깨워 줬습니다.” 2일 시청 태평홀에서 만난 서울시 최창식(53) 도시관리정책보좌관은 “두분의 스승과 공직생활 자체가 삶의 좌표가 됐다.”고 회고했다. 성균관대 은사인 신현묵 교수와 서울대 환경대학원 최상철 교수가 ‘외길’을 걷게 한 주인공이다. “최창식 당신, 학교 나가 봐야 할 것이라곤 공무원 말고는 없어….” 최 보좌관은 “대학교에 다닐 때 신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자주 했는데 결국 ‘씨앗’이 됐다.”고 웃었다. 자신을 그리 활달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로 보고, 지도해 준 도움말이 됐다. 아무튼 최 보좌관은 졸업을 한 뒤 몇몇 기업체에 들어갈 뻔했다. 하지만 며칠 출근하며 ‘개인보다는 공공을 위해 일하는 게 보람이 클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1977년 해군에서 제대를 하자마자, 그동안 해오던 기술고시 공부에 매달려 이듬해 3월 도시계획국 토지구획정리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85년 3월 도로과로 옮기기까지 이곳에서 8년이나 근무했다. 영등포구 건설국장을 지낸 뒤 1989년 11월 지하철건설본부로 가서는 본부장 등을 지내며 지난해 7월 현직에 부임하기까지 12년간 ‘터줏대감’으로 버텼다. 그는 현재 첫 부임지인 토지구획정리과의 후신이라 할 뉴타운 관련 추진본부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시의 도시계획 전문가다. 그런데 공직생활 만 3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1981년 네덜란드에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 갔다가 11개월 만에 돌아와 또 같은 부서로 발령난 것이다. “선생님,3년이 넘었는데 똑같은 업무를 하게 됐습니다. 짜증도 나고, 싫증도 나고 어떡해야 할지 원….” 그러자 당시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과정을 지도했던 최 교수가 “이웃나라인 일본의 경우 7∼8년도 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에 더 이상 한눈을 팔지 않았다. 이후 해외출장 때마다 다른 나라 공직자들의 근무자세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얼마 전 중앙인사위원회 통계를 봤는데 평균 근속연수가 과장급 10.8개월, 국장급 11.3개월이더군요. 정부의 경쟁력이 바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업무상 긴밀한 협의가 절실한 중앙부처 간부들이 자주 바뀌어 애를 먹었다.”며 전문화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최신원 SKC회장

    “시간을 갖고 형제들과 그룹의 분가를 논의하겠다.” SK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의 차남인 최신원(53) SKC 회장이 재계 주변에 설(說)로만 떠돌던 ‘그룹 분가’에 대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최 회장은 31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편안하게 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그룹에 걱정이 없을 때 분가는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분가가 사촌 동생인 최태원 회장 등 고 최종현 회장 아들들과의 불화로 비춰질까봐 조심스러운 눈치였다.“분가 문제로 형제들이 갈등을 겪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최 회장은 올들어 SKC,SK케미칼,SK증권 등 주요 계열사 주식을 꾸준히 사들여 관심을 끌었다. 지난 4월에는 SKC 주식 6500주를 매입해 지분을 0.08%에서 0.1%로 소폭 늘렸다.3∼4월에는 SK증권 주식 27만 4000주를 매입했다. 지난 3월 형제들과 함께 대폭 매입한 SK케미칼 주식도 5월들어 2만 7000주를 추가 매입했다.현재 지분은 동생인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정원·지원·예정씨까지 더해 8.5%로 최태원 회장·최재원 SK엔론 부회장 형제(9.11%)와 비슷한 수준이다.SK케미칼은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에 이어 두번째로 세운 선경합섬의 후신이다.최 회장은 또 선친이 마지막으로 인수한 워커힐 호텔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공동 인수해 경영을 해보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다. 한편 최태원 SK㈜ 회장은 이날 사촌형의 발언이 보도된데 대해 “회사를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인데 그렇게 보도가 됐네요.”라며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SK관계자도 “LG그룹의 구씨·허씨처럼 그룹 내 계열사를 나눠 가진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분가는 시기상조”라고 잘라 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한총련 “해체 대신 조직혁신”

    제12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대중성 회복과 활로 모색 방안으로 11기의 ‘발전적 해체’와는 상반된 ‘조직 강화’에 역점을 두기로 해 활동 방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지난달 30,31일 대의원대회에서 실시된 제12기 의장선출 투표 결과 백종호 한국외국어대 총학생회장이 252표를 획득,102표를 얻은 유지훈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따돌렸다. 백 신임의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활동 방향에 대해 “성급한 해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 불식이 우선”이라고 밝혔다.그는 “아무리 새로운 기구를 발족한다고 해도 한총련의 후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이라면서 “우선 조직을 혁신하고 중앙집행기구의 기능을 강화해서 국민들의 공감을 얻은 뒤 차차 추진하는 것이 맞는 순서”라고 지적했다.백 의장측은 “11기 지도부는 일부 대학 대표자들로만 구성,대표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지도부에 새로운 구성원을 폭넓게 영입하고 중앙위원회를 두 달마다 개최,전국 총학생회장들의 뜻을 모아 주요 방침과 사업을 결정하는 등 대의체제를 강화하겠다.”고밝혔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비운동권과의 마찰에 대해서는 “한총련을 한국 대학생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로 만들겠다.”면서 “등록금 인상 저지 등 비운동권과 연대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하지만 비운동권 학생연합인 학생연대21측은 “최종적인 지향점은 될 수 있겠으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만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
  • 남북합작 대학 첫 설립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이 평양에 함께 대학을 세운다. 사단법인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사장 郭善熙)은 18일평양에 정보과학기술대학을 설립키로 북한 교육성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 재단에 따르면 정보과학기술대학은 우선 대학원 과정을 중심으로 내년 9월에 개교하고 이를 위해 다음달 초 남한 전문가 10여명으로 구성된 대학설립기획단이 평양을 방문,착공식을 가질 예정이다.북한은 평양시 외곽의 33만평을 부지로 제공했다.대학 재정과 운영은 남북이 공동으로하기로 했다. 이 재단은 93년부터 중국 지린(吉林)성에 옌볜(延邊) 과학기술대학을 운영중인 단체다.초대 총장은 김진경(金鎭慶) 옌볜과학기술대학 총장이 맡는다.재단은 남한 정보기술(IT) 분야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지산(知産) 복합단지를 조성키로 하고 남한 벤처기업과 대학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평양정보과학기술대학은 김 총장이 북측과 98년 6월 합의한 나진선봉과학기술대학의 후신이다.그해 9월말 김 총장이 북측에 두달간 억류되면서 무산됐으나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다시논의됐다. 한편 18일 현재 통일부에는 이와 관련된 서류들이 접수되지 않았다. 전경하기자 lar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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