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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덜쓰고 덜버리자/낙동강 오염의 교훈/김명자(특별기고)

    최근의 낙동강물오염사태는 온국민을 충격과 허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그 사이 언론매체는 과연 어디서 무엇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파헤쳤고,거기서 우리는 오늘의 환경문제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위기감을 확인케 된다. 그런데 그 논의의 홍수속에 어찌하여 「기발한」 묘책은 없단 말인가. 몹시 안타까운 노릇이나 몇몇 관리자를 나무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요컨대 이는 총체적 상황으로서 이시대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난중지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단 한국이 60년대 이후 유례없는 단기간 초고속의 근대화를 성취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의 구호아래 밖으로부터 공해다발산업을 서슴없이 유치해왔던 경제성장 일변도의 산업화를 돌아보건대 일례로 화력발전소의 설비에 탈황시설이 빠졌던 것에서 드러나듯 「환경」은 완전히 뒷전이었기 때문이다.그 덕을 좀 본 탓일까.한국의 수출 드라이브정책은 가히 금메달감으로 1991년 일인당 GNP 83달러에서 1992년에는 6천7백49달러로 뛰어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생산증가는 쓰레기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의미했다.그리하여 성장의 반대급부랄까.생명의 원천인 공기­물­흙은 되돌릴수 없는 지경으로 피폐되고 독을 품게되었다.물질의 마력에 홀린 사람들은 마치 소비가 미덕인 양 경쟁하듯 산업현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독성의 쓰레기를 거리낌없이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산업화는 매우 좁은 땅에서 세계 몇째의 인구밀도 조건에서 맹렬히 추진되었다.환경재난에 대비하자는 한구석의 목소리는 「한심하고 배부른소리」로 치부되었다.결국 강물은 각종 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하수도로 전락했고 공기도 땅도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위기국면으로 다가온 듯한 환경재난과 그에 따른 들끓는 반응들은 실상 우리의 근대화에서 이미 예정된 사건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예견 사람들은 삶의 중요한 대목에서 이렇게 헛똑똑이 노릇을 잘한다.낙동강 물은 이런 사람들에게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냄새를 터뜨린게 아닐까?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망치고서는 민심을 붙잡을 수 없고,「마실 공기 마실 물 만들기」야말로 역사에 남을(?)위업임을 깨달아 주었으면 한다.그리고 국민들은 이쯤해서 물값도 더 올릴 수밖에 어벗다는 것도 알아차려야 한다.한마디로 우리의 환경정책은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더 이상의 시행착오 없이 수행해나가도록 해야한다. 이제 「물쓰듯 한다」는 말은 「약쓰듯 아낀다」는 뜻으로 바뀌어야 한다.우리의 강물은 그리 길지도 깊지도 않고 자연정화력이 뛰어나지도 못하다.엄청난 에너지를 들여 정수처리한다고 해보았자 그야말로 전근대적 수준일 뿐이다.늘상 뒷전에 밀려 있던 환경분야가 첨단기술을 확보했을 턱이 없으려니와,뭘 한다고 해도 나날이 새롭게 만들어져 기체,액체,고체상태로 버려지는 물질들을 제거할 장치는 버려지는 물질들을 제거할 장치는 애당초 없다.게다가 그렇게 버려진 것들끼리 섞여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실은 아무도 잘 모른다. ○최대 피해자는 후손 별 도리가 없다.모두가 덜 쓰고 다시 쓰고덜 버리는 것부터 체질화해야 한다.좀 우울한 얘기지만 내가 버린 모든것(자연에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농도보다 더 많아지면 그것은 오염물질이다)은 내게 돌아올 뿐만 아니라 내 자식들의 몸속에 쌓여 필경 그들에게 갖가지 형태의 변고(한국의 기형아출산율이 세계 몇째라던가)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오염의 최대피해자가 바로 내 자식들일진대 어찌 우리가 저지른 것에 대한 「자연의 복수」를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수질개선대책」 반드시 이행”/이 총리 일문일답

    ◎“국토 되살리기” 차원에서 사태 파악/영세업체 폐수시설 비용 지원 강구 이회창국무총리는 15일 낙동강의 수질오염사태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며 개선대책을 발표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대책의 내용이 3년전 페놀 사태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수질관리 대책은 어느 시점에서도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문제는 대책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철저하게 집행하느냐에 있다고 본다. 오늘 발표가 우선 급한 고비를 넘기고 보자는 의도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총리로서 반드시 시행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정부는 특히 이번 대책을 국토의 생존과 직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단순한 행정차원이 아니라 깨끗한 국토를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자세로 대책을 마련했다. ­낙동강 수질오염은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했다.관계장관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생각은 없는가. ▲공무원의 직무유기등이 밝혀지면 응분의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진실을 덮어둘 생각은 조금도 없다. ­대책 집행에 소요되는 재원은뒷받침될 수 있는가. ▲장기대책 부문은 해마다 예산을 편성해야 하기 때문에 차질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그러나 대책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결코 허구가 아니다. ­영세업체들이 비싼 폐수처리시설을 설치하는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이에 대한 대책은. ▲(박윤흔 환경처장관) 금융지원등 재정보조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또 축산업체등 형편이 매우 어려운 기업을 위한 간이 정수처리시설을 연구 개발중이다. ­국민들이 정부의 수질측정 결과발표를 믿지 않고 있는데. ▲(박장관) 측정장비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이번 낙동강 수질오염 측정에서도 벤젠과 톨루엔이 처음에는 아주 미량으로 발견됐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오늘 발표된 대책에는 수질측정기구와 기관을 증설하겠다는 내용이 있으며 이를 반드시 실천하겠다.
  • 영 작가 브란웰작품 사후 145년만에 첫 경매

    ◎아편·알코올 탐닉… 31세로 요절/3천6백만원에 순식간 팔려/시·단편 소설 등 모두 6개작품 「제인 에어」,「폭풍의 언덕」등으로 너무도 유명한 브론테 자매들.그러나 샬롯(제인 에어의 저자),에밀리(폭풍의 언덕),앤(아그네스 그레이)등 이들 세자매와 함께 문학적 열정을 불태웠던 브론테가의 외동아들 브란웰 브론테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최근 영국에서는 31세로 요절한 브란웰 브론테의 문학작품이 사후 1백45년만에 실시된 경매에서 순식간에 팔려나가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연말(12월 13일) 영국 하워드 브론테 박물관에서 열린 경매에서 브론테가의 후손이 브란웰의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시와 단편소설등 여섯 작품이 모두 3만파운드(3천6백만원 상당)에 낙찰된 것. 이날 브란웰의 작품을 산 사람들은 대부분 브론테가의 잊혀진 장남에 대한 호기심에서 이 작품들을 샀다고 말했다.브란웰의 현손녀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은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 작품을 구입한다고 밝혔다. 샬롯의 동생이자 에밀리와 앤의 오빠인 브란웰은1817년 지금은 브론테 박물관인 하워드 교회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하워드교회 목사였던 브론테 남매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어릴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했던 브란웰을 천재라 여기고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었다. 『어릴 때 죽은 두 누이를 포함,모두 다섯 자매들틈에서 자란 브란웰은 가문에 영예를 안겨줄 기둥이었다』고 브론테가의 찰스 레먼은 말했다. 외딴 시골의 목사관에서 고립된 생활을 한 브론테 남매들은 주로 독서와 글쓰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브란웰은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브론테 자매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경매에 선보인 「앵그리안」은 샬롯과 함께 쓴 소설이다. 그러나 브란웰은 청년시절 문학적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채 이상하게 옆길로 들어가 철도노동자를 거쳐 부호 로빈슨집의 가정교사가 됐다. 브란웰은 그곳에서 마치 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줄리앙처럼 안주인 로빈슨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그가 남긴 대부분의 시들은 당시의 연정을 담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래잖아 사련이 발각돼 브란웰은 즉시 해고됐으며 그후 그는 28세의 나이에 아편과 알코올등에 탐닉,방황을 일삼다 3년뒤 숨을 거두게 된다.이 때문에 하워드 사람들은 브란웰을 단지 술주정뱅이로 기억하게 됐다. 브란웰의 뒤늦은 부상에 대해 브론테 가문의 후손들은 『누이들의 빛에 가려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던 브란웰이 이제야 대접을 받게 됐다』며 『그동안 그는 찬양받지 못한 천재였을 뿐이다』고 평했다.
  • 소비자 의식/“우리것 수호” 실천의지 드높여야(UR경제시대:13)

    ◎농어촌실태 직시… 범국민적 협조 절실/수입품결함 감시… 피해엔 적극대응을 2천년대의 모월 모일.회사원 A씨의 아버지 제삿날이다.젯상앞에서 후손들은 절하며 아버님의 혼령이 많이 들고 자손들에게 복을 내려줄 것을 기원했다. 그러나 모처럼 이승을 찾은 혼령은 아무리 둘러봐도 젯상에서 먹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메나 떡은 모두 미국산 수입쌀로 만들었고 나물류는 중국산이며 또 고기류는 호주산으로 살아생전 자신이 먹던 음식들과 모양은 같아도 그 맛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UR이 타결되고 95년부터 국내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이같은 상황은 결코 지나친 상상이 아니다.소비자들이 밀려오는 개방화의 물결속에서 무턱대고 외국제를 좋아한다거나 값싼 것만 찾을때 우리의 상품은 모두 설자리를 잃어갈 것이 분명해진다.또 우리의 식탁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멀잖아 우리 땅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온통 수입 농수산물로 채워질 위기이다.이런 위기상황속에서 정부차원의 각종 처방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소비자들의 확고하고 건전한 의식이 중요하다. 「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회장 윤수자)은 이런 위기속에서 제2의 물산장려운동을 펼쳐서라도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전국새마을부녀회등도 「농촌 살리기」를 94년의 주요사업계획으로 확정했다.우리 농업의 장래와 가족들의 건강은 각 가정의 식탁을 책임지고 소비주체인 주부들이 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조금 비싸더라도 우리 체질에 맞는 건강한 우리 농산물로 식탁을 꾸며야겠다는 자각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농촌이 어렵다,농촌총각이 장가를 못간다,농촌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 윤수자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추상적 느낌만 있을뿐 진짜 심각성은 잘 모르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따라서 앞으로는 정부와 농촌의 농민·도시소비자들이 일체가 되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농간의 확실한 고리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 홍월표사무처장은 시장개방으로 아무리 많은 농수산물이 쏟아져 들어온다해도 소비자들이 우리 것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만 있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들 여성단체들이 농촌살리기운동으로 계획하고 있는 구체적 실천사항은 ▲농수산물구입시 우리 농수산물여부 확인 ▲농수산물을 수입하는 기업에 자제를 요청하며 만일지키지 않을때 그 기업의 생산품에 대한 불매운동 ▲수입물건을 좋아하는 이웃에 대한 계몽및 도시·농촌자매결연 확대 ▲농촌 일손돕기 강화 ▲주말농장과 계약재배등의 체험농사 확대 등이다. 시장개방으로 물밀듯 들어올 수입상품과 서비스로 인해 소비자편익 못잖게 소비자피해도 크게 증가할 것이 예상됨에 따라 소비자단체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은 최근 이사회를 열고 「시장개방에 따른 소비자문제」를 내년의 주요사업계획으로 확정하는 한편 6개월 중기과제로 수입소비재의 유통구조·가격전략·안전제도 등 수입소비재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기로 했다. 또 수입상품의 결함으로 소비자피해가 발생했을때 제조업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제조물책임법」의 도입을 신중히 검토중이며 수입농산물의 원산지표시 실태,맹독성농약의 유통 및 사용실태 조사를 강화하고 「수입품 구매실태 및 소비자의식조사」등도 실시할 계획이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은 최근 수입농산물의 안전성확보를 위한 정부당국의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통해 94년부터 수입상품과 관련한 소비자들의 고발을 접수하는 상담창구를 개설하고 국내외 농산물 및 수입상품에 대한 안전성검사를 끊임없이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서울YMCA 시민중계실은 수입상품으로 인한 소비자피해 모니터활동을 강화하고 수입식품으로 인한 소비자의 집단적피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법률구조 대응을 해나가기로 했다. 이밖에 10여개 소비자관련 단체가 가입된 소비자단체협의회도 이제까지 해오던 농약잔류량검사 등 수입식품 안전도검사를 강화하고 수입상품에 대한 시장감시활동을 꾸준히 펴나갈 계획이다.
  • 고속버스 전용차선/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신석기 사람들은 물론 21세기 컴퓨터 시대까지,조상대대로 전해져온 아름다운 산과 강 넓은 들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한곳에 살아온 민족은 세계에도 그 유래가 드물다.한곳에서 300년을 살아온 해남의 연동마을이나 안동의 하회마을의 가계전승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아름다운 자연속의 평화로운 삶,조상대대로의 선영과 역사가 숨쉬고 어린 시절의 꿈이 서린 농촌의 고향은 언제나 잊 을수 없는 추억이요,향수이다.어떻게 고향을 꿈속에서라도 잊는단 말인가. 1950년대 농촌과 도시의 인구비는 70:30이었고 농촌은 도시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요,모태였다.서울의 극소수 토박이를 제외하고 누구도 소박한 농촌의 토양속에 살았다.뱀장어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강상류에 되돌아와 알을 낳듯이 우리들의 역사적,인륜적 귀소본능 또한 한국인의 보편적 민족성을 이루고 있다.그러다보니 명절이나 연휴때만 되면 기차도 사람에 실려가고 고속도로 역시 자가용에 짓밟혀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다.3∼6시간 거리를 12∼24시간 걸려서 도착하게 하는 주범은 이웃을 생각하지않는 자가용 남용 귀성행태이다. 민속규범이 숨쉬는 농촌의 공동체생활은 나보다 이웃,이웃보다 마을을 생각하는 상호인보정신이 그 기초였다.기름 한방울없이 값비싼 외화를 낭비하는 악순환을 떨쳐버리고 버스승객이 편히 갈 수 있도록 고속버스 전용차선을 연말연시라도 채택했으면 좋겠다.흙을 가꾸는 농민의 후손으로서 우루과이라운드에 속터지는 농어민을 위해서도 외화를 아껴야 한다. 주말과 연초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농촌에 가 위로의 말이라도 전했으면 좋겠다.땀과 시름의 결실인 농촌쌀도,종묘값조차 건지기 어려운 시름의 배추도 한가마니씩,한묶음씩 버스 짐칸에 싣고 오자.그래서 도시와 우리를 키워온 농촌을 살리고 아픔에 동참했다는 마음의 여유도 가지자.그리고 고향에 갈때는 순박한 농민이 되어 얌체처럼 갓길을 달리는 무뢰한이나,고속도를 쓰레기장화하는 환경의 파괴범이 되지 말자.제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교통소통 행정이 이번 연말연시에는 환골탈태하는지 우리 모두 지켜보자.이를 위해 고속버스 전용차선을 93년 세밑에 시험해보자.
  • 대마도의 수선사(일본속의 한국문화:10)

    ◎“항일의병의 거유” 최익현선생 순국지/영정 지금도 모셔 한국인관광객 잦은 발길/만관운하 개설… 대륙침략의 전진기지 삼아 임진왜란은 대마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일제침략은 대마도와 무관하지 않다.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국교정상화에도 대마도가 깊이 개입하여 2백년간에 걸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기술한바 있다.도대체 대마도주가 만든 가짜 침략사죄문서를 가지고 만족해 버린 당시의 조선정부가 잘못이었다.겉으로는 성신교련을 내세웠으나 속으로는 제각기 다른 뜻을 품고 있었으니 결국은 일제재침으로 이어질수밖에 없었다. 대마도에는 일제침략사의 생생한 자리 방캉세토(만관뢰호)라는 인공운하와 이에 항거한 최익현선생의 순국지 수선사가 남아 있다.대마도는 19세기말 20세기초의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기에 대한침략의 전진기지로 둔갑하게 되는데 특히 일본해군의 전초기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그래서 아사마(천이)만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는데 지금도 해상자위대가 자리잡고 있는 죽부(다케후키)라는 항구가 그것이다.이 항구는 한가지 큰 흠을 갖고 있었으니 한국쪽으로만 바다가 열려있고 일본쪽으로는 육지로 가려있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인공운하를 파기로 했다.이곳이 바로 대마도가 자랑하는 만관뢰호요 그 위에 걸린 다리가 만관교다.보기에는 매우 아름답다.그러나 그 어두운 과거때문에 우리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이 운하는 1900년에 개통되고 1905년 일본함대가 러시아극동함대를 격파할때 큰 공을 세웠다. ○1904년에 개통 또 이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일본 구주의 나가사키(장기)와 우리나라 진해를 우회하지 않고 직선으로 잇는 항로가 개설되었다.그러니 이 운하에 얽힌 모든 과거사가 불쾌하기만 하다. 이 운하가 개통된 해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약된 바로 그해였다.을사조약이 늑약되자 많은 유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면암 최익현이었다. 최익현은 호남에서 거사하였는데 관군토벌대가 들이닥치자 동주끼리 싸울수 없다 하여 자진 해산하고 체포되었다.최익현은 그의 한마디로 대원군까지 실각시킨 당대 제일의 거유였기 때문에 일제는 간교하게도 유배지를 대마도로 정하고 이곳 이즈하라(엄원)에 유패시켰다. 최익현이 이곳에서 식음을 전폐한뒤 순국하게 되는데 그가 마시던 우물이 남아 있을뿐 유폐되었던 건물은 철거되어 없다.그대신 그의 시신이 잠깐 머물다가 떠난 수선사라는 작은 절이 남아있고 최근 경내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가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필자는 이 수선사를 두번 가보았다.몇년전 처음 찾아갔을때 이 절의 주지(주지라고 해야 자기 혼자서 지키는 절이다.물론 대처승이다)가 공손히 인사하면서 이 절에 귀중한 보물이 있다고 말했다.보니 아주 작은 청동불상이었다.신라불이라는 것이다.금년 여름에 두번째로 방문했을때에도 역시 그 보물을 내보였다.그래서 그가 필자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모든 한국방문객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바닥에 들 정도로 아주 작은 부처님.확실히 우리나라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수선사 주지손에 넘어왔는지 아무도 모르며 또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 절이 한국과 수천년의 관계를 맺어온것처럼 내색하는 저의 또한 아리송했다.그러나 얼마뒤 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번의 수선사 방문은 근 50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규모여서 비좁은 수선사 경내가 가득찼다.사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일본땅에 순국비를 세우도록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모두 법당에 들어가서 절을 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언제 갖다 놓았는지 최익현선생 영정이 놓여져 있었다.예전에는 미처 못보던 것이다.일행은 한층 더 감동해서 영정앞에 절을 하고 성금을 거두어 바쳤다.그리고 모두가 이 절을 두고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그날은 마침 배를 타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겉과 속다른 일본인 3박4일의 짧은 여정이었으나 대마도의 이모저모를 보고 떠나는 기분이 상쾌하였다.그렇게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대마도의 베일을 벗긴 기분.거기다 우리의 순국선열을 고이모시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듯한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떠나는 우리를 더없이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데 배를 타기직전 일행중의 한 학생이 수선사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해서 급히 달려갔다가 헐떡거리면서 돌아왔다.그러면서 들려주는 말은 갑자기 우리의 들뜬 가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수선사 법당에 내어 놓았던 최익현선생의 영정이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역시 그랬구나!』고 탄식하였다. 『겉과 속이 달라야 훌륭한 일본인』이라는 말의 참뜻을 배운 셈이 된 것이다. 필자는 젊은 학생들이 대마도에서 본 다른 모든 것을 합쳐도 이보다 더 귀한 교훈은 없었다고 생각했다.착잡한 생각과 그동안 정성을 갖고 안내에 힘써주신 영창구혜선생,그리고 아비창덕생씨에게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뒤엉키는 것을 느끼며 대마도를 떠났다.대마도는 다시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이 시점에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일은 아니나 깊이 새겨서 밝고 명랑한 미래사에 비출 필요는 있을 것이다.
  • 선조의 업적 객관적 시각서 조명

    ◎「관산별곡」 「전봉준의 개혁사상」 「윤관 대원수」 출간/일방적 미화·주장 탈피… 독자에 판단 맡겨/어쩔 수 없는 과장·표준영정 고집등은 한계/일화·가족사 형식… 직계후손 직접 집필 자랑스런 선조의 업적이나 남긴 글을 책에 담아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래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이 서구화의 물결에 밀려 거의 사그라져 가고 있는 지금도 자신이 속한 성씨의 시조 혹은 역사책에 이름 석자라도 언급될만한 선조라면 대부분 종친회등에서 발간한 기념문집 한권 정도는 나와있다고 보아도 좋다.문제는 이같은 책들이 객관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일방적인 선조에 대한 미화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에따라 심지어는 아직까지 사색당쟁의 와중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는 경우까지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의 업적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일반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눈길을 끈다. 중종대의 무신의 일대기를 그린 「관산별곡」(반재식 지음·을지서적간)과 「거유 전봉준의 개혁정신」(전하우 지음·영원사간),「문숙공 윤관대원수 실기」(윤범하 지음·한가람간)가 그것이다.이책의 지은이는 모두 주인공의 직계 후손들이다. 「관산별곡」은 조선 성종에서 중종 시대를 살다 간 송애 번석평의 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전기소설.주로 변방의 수령으로 남긴 일화를 마치 야담집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필치로 엮고 있다.독자들은 이 책이 주는 재미속에 주인공에 대해 호감을 갖게 마련이다. 「전봉준의 개혁사상」은 역사학계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전봉준의 가족사를 파헤쳐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그 가운데 하나는 아직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지만 전봉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까지 알려진 전창혁과 광산금씨가 아닌 전기창과 언양금씨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 「문숙공…」은 주인공의 역사적 비중에 따라 손보기와 이이화 최창규등 역사학자들로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자문에 응하고 완성된 원고를 검토케하는등 객관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종친회의 문집에서 한단계 발전했다고 해도 직계후손이 종친회등의 경제적 지원으로 발간한 이 책들은 아직 한계가 보인다.미담으로 만들다보니 생기는 어쩔수 없는 과장(관산별곡)과 전봉준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체포 직후의 사진보다는 새로 그린 표준 영정만을 고집하고 있다든가(전봉준의…),역사적 사실보다는 조상에 대한 존경의 염이 앞서는 문장(문숙공…)등이 그것이다. 출판계는 가문의 전통을 중시하는 세대가 차차 신세대로 자리바꿈하는 상황에서 선조를 기리는 출판물은 갈수록 줄어들겠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객관성을 찾아 좀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전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임금·금리·물류비 후발국보다 부담커/경쟁력 왜 높여야 하나

    ◎고부가상품 개발·시장다변화도 부진 자원이 없는 우리경제가 살 길은 수출 뿐이다.수출은 여전히 GNP(국민총생산) 성장에 30%나 기여한다.5명에 한명이 수출과 관련된 일에 종사할 만큼 수출과 성장을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고도성장의 견인차였던 수출.그러나 지금 우리의 수출은 거의 빈사 지경에 빠졌다.80년대 후반 급격히 오른 임금과 중국 및 동남아 국가의 추격으로 국제 무대에서 우리 제품은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86∼88년 3저시절 연간 26.1%였던 수출증가율은 89∼92년중 6%로 떨어졌다.경쟁국 가운데 가장 낮은 증가율이다.90년엔 무역적자국으로 전락했다. 우리 상품의 품질을 1백이라면 일본 제품은 1백27,동남아에서 만든 일본 제품은 1백7이다.생산요소인 임금 금리 땅값이 경쟁국보다 턱없이 비싸 품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높다.물류비도 오를 대로 올랐다. 88∼92년중 제조업의 단위 노동비용 증가율은 8.2%로 대만이나 일본의 2∼4배이다.기업의 매출액에서 금융비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6.3%로 대만과 일본의 3배이다. 인천 남동공단의땅값은 ㎡당 2백5달러.일본 센다이공단은 1백49∼1백63달러,대만 민웅공단은 23∼1백10달러 밖에 안 된다.물류비도 엄청나 서울∼부산 간 내륙운송비가 부산∼홍콩의 선박운송비의 3배나 된다. 기술수준과 마케팅 등 비가격 분야도 마찬가지이다.선진국을 1백으로 할 때 우리의 기술은 평균 42.6.품질불량률은 일본(1.5%)이나 대만(2.5%)의 갑절(4∼5%)이다.노사분규와 과다한 휴일도 수출과 고품질을 가로막는다.우리나라의 휴일은 1백17∼1백27일로 싱가포르(96∼1백3일)나 대만(1백2∼1백24일)보다 많다.독자적 판매망도 미흡하고 고유상표의 수출은 평균 49.1%에 지나지 않는다. 가격 및 비가격 경쟁에서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이를 극복해 후손에게 더 잘 사는 나라를 물려주는 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 정인보선생/해방전후 국학부흥­교육에 진력(다시 새기는 그 충절)

    ◎18세 상해 망명… 신채호 등과 항일투쟁/국학대학 설립… 민족사관 정립에 큰공 의에 철저한 인생을 살았던 위당 정인보선생은 말을 타고 총칼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붓과 펜으로 싸운 정신적 독립운동가였다. ○서울 종현서 출생 선생은 1893년 5월6일 서울 종현(지금의 명동성당부근)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씨와 어머니 달성 서씨의 독자로 태워나 후손이 없는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다.1910년 17세때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난곡 이건방선생으로부터 한국화한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11년과 1912년 두차례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성 회인현 흥도촌과 유하현 삼원보등지에서 활동하는데 이곳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이회영형제를 만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평땅 4백∼5백섬거리 전답을 팔아 신흥강습소등 이회영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한다.선생은 1913년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일제와의 투쟁을 다짐하는 박은식·신규식·신채호·김규식등많은 청년애국지사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들과 비밀결사인 동제사를 조직했다. 선생은 1922년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초빙을 받아 조선문학론과 한문을 강의한다.그후 중앙불교전문학교·협성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학및 동양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켰다.또한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민족사관 정립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선생은 일본인들의 왜곡된 학설에 철저히 반론을 전개해 주목을 끌었는데 우리 고대사의 심층연구를 위해 안재홍·신채호·문일평·손진태선생등과도 힘을 합쳤다. ○일경에 검거·고초 선생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지원했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현충사를 중건했으며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실었다.이후 같은 신문에 「단군 개천」「5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으며 실학연구를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했다.1937년 「경훈훈민정음서」「훈민정음운해해제」등을 저술,국어보존에도 기여했다. 그해 7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어교육만을 강요,연희전문학교에서 선생이 강의하던 조선문학과목은 폐지됐다.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1940년 10월 중동학교안에 소위 「5인 독서회」가 조직된다.노국환·조성훈·황종갑·이기을·유영하등은 역사연구를 명분으로 선생을 비롯,김성수·송진우등으로부터 국제정세등을 들기를 요청해와 이들과 접촉을 갖는다.독서회 운동이 한창 추진되고 있을 때 황종갑의 편지가 일제의 검열에 발각되면서 선생도 적지않은 고초를 당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기에 이르자 선생은 병을 핑계로 휴직을 한뒤 1943년 가족을 이끌고 전북 익산군 황화산으로 들어가 산중생활을 한다. 2년후인 1945년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게되자 선생은 서울로 귀환,일제하의 식민정책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연면하게 이어온 국학을 부흥·발전시키기 위해선 일제로 인해 단절된 우리 얼을 선양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국학대학을 설립한다. ○1950년 납북 국학발전에 몸바치고 있던중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돼 감찰위원회가 구성되자 선생은 여러 인사의 천거와 이승만초대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새 정부의 감찰위원장에 취임,관기확립및 부정부패 일소에 나섰다.그러나 선생은 취임 1년이 지날즈음 자신의 의지가 이루어 질 수없음을 깨닫고 감찰위원장 자리를 떠났다. 다시 국학대학장에 돌아온 선생은 더욱 우리 얼을 밝혀 내는데 정진했으며 국학대학장을 그만 둔 뒤 서울 회현동에서 역사연구와 집필생활을 하다 6·25전쟁을 맞았다.미처 피란가지 못한 선생은 1950년 7월 북한으로 납치돼 한동안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그해 11월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정부는 1990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대마도의 오사키항/박성수(일본속의 한국문화:9)

    ◎왜구 본거지… 고려이래 약탈 일삼아/우왕때는 연27회 침범… 논의 벼까지 베어가/진노한 세종은 배 2백20척 동원,정벌 나서 일기도의 가쓰모토(승본)항도 왜구의 소굴이었으나 그보다 더 우리를 괴롭힌 곳은 대마도의 오사키(미기)항이었다.오사키항은 대마도의 윗섬과 아래섬을 갈라 놓고 있는 바다,아사마(천모)만에 있는 아주 작은 어촌이었다.백제산성을 보고 나서 이 모사키마을을 잠깐 둘러보았으나 그 옛날 조선 세종때 우리 정벌군이 이 마을을 공격한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언제 그랬나 할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다.단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이 이곳의 옛 호주 하야타(조전)가에 보존되어 왔다는 조선국고신이라는 문서 한장이었다. 「병조봉교피고이라 위승의부위」운운하는 우리나라 관이임명장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5백년전인 연산군때(1503년)것이다. ○벼슬 주어 달래고 왜구가 하도 심하니까 창무책의 하나도 대마도 왜인들에게 관직을 주어서 우리나라에 오면 쌀도 주고 장사도 할수 있게 해 준 것인데 이들을 가리켜 수직위인이라 했었다. 유명한 신숙주(1417∼1475)의 「해동제국기」를 보면 대마도의 지도를 그려놓고 모두 82개에 달하는 포구가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신숙주의 지도에는 대마도가 마치 등을 구부린 송충이처럼 그려져 있는데 보기에도 징그럽다.이 송충이의 털구멍마다 왜구의 소굴이 박혀 있어서 제각기 마음 내키는대로 우리나라 남해안은 물론 동·서해안까지 왕래하면서 약탈하였으니 견딜수가 없는 일이었다.우리나라 연해안을 약탈한 왜구의 소굴은 대마도에만 있지 않았다.멀리 구주땅의 여러 포구에서도 왜구떼가 몰려왔으니 이들 송충이의 공격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왜구는 고려말에 극성을 이뤄 그때문에 실제로 고려가 망하고 말았다.눈물의 왕 공민왕(1352∼1374)재위 23년동안에 크고 작은 왜구가 1백15회나 들락날락하였고 경상·전라도는 물론 경기·황해·강원·평안·함경도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심지어는 고려의 서울 개경근처까지 쳐들어와 수도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다음 우왕(1375∼1388)때에 이르러서는더욱 심하여 재위 14년동안에 왜구가 3백78회나 쳐들어 와 연평균 27회라는 이분야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이무렵 우리나라 연해안의 여러 고을들은 『황량하게 텅 비었다』고 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불상·범종 훔쳐가 왜구가 어떻게 우리나라 고을들은 습격하였는가 하면 왜구는 처음부터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기분나쁘게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상륙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하였다.말하자면 치고 달리기 작전을 폈던 것이다.마치 서양의 바이킹같은 강도행위를 자행한 것인데 이때문에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왕조가 교체되는 정변을 겪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성계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워 특세하더니 끝내는 정변을 일으켜서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러면 대마도 왜구들은 무엇을 약탈하여 갔는가.주로 곳간에서 먹을 양식을 퍼가거나 곳간에 식량이 없으면 논의 벼를 베어다가 배에 싣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는 식량만 가져가는 예절바른 도적이 아니라 부엌의 그릇은 물론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 제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찰의 불상과 범종까지 들고 달아났다.대마도에 원통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서는 본존이 고려불이라고 버젓이 자랑하고 있다.부처님만 고려제가 아니라 대웅전앞에 걸어놓은 범종까지 우리나라 것이니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다. 훔쳐온 것을 훔쳐 왔다고 이실직고할 그들이 아니다.고려왕이 바쳤다느니 조선왕이 하사하였다느니 그럴듯하게 둘러대기 마련이니 도적질당한 놈만 억울할수 밖에 없다. 왜구들은 물건만 훔쳐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납치하여 팔아 먹었다.이런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 오사키 어부들은 우리를 낯선 이방인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누구의 후손들인지를 너무나 잘알고 있다.15세기말 성종때의 학자 성현(성현)이 쓴 유명한 「용재총화」에 보면 왜 세종 원년(1419)에 우리나라가 대마도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려말에 특히 왜구가 잦았는데 우리나라 연해에 진(군사기지)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태조가등극한 이후에는 주요한 포구에 만호를 두어 수군을 상주하게 하였더니 잠시 잠잠해졌었다.그러나 그뒤 다시 왜구가 침노하여 와서 세종이 삼군에 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만7천명 출정 이처럼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발본색원을 노린 일대 영단이었다고 할수 있는데 병력은 총1만7천명,배는 2백20여척이었다.총사령관 이종무가 중군장을 겸임하고 좌우군장이 그를 보좌하였다.공격목표는 바로 이 오사키항이었는데 길잡이가 대마도 사람이었다.우리 함대는 마산포와 거제도를 출발하여 그날로 이곳 오사키에 도착하였는데 처음에는 선발대 10척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곳 마을 사람들은 도적질 하러 떠난 자기네 배가 돌아오는줄로 알고 술과 떡을 들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탄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르고 헤어 스타일이 전혀 다른 것을 알고 놀랐다.잇따라 수백척의 배가 들어오니 모두 기겁을 하고 산으로 달아났다.바로 그 현장이 오사키항인데 향토사학자 영류씨는 웃으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여유를 보였다.그렇다.지금은 서로 웃으면서 그날을 회상할수 있으나 이곳에서 전사한 좌군장 박실을 생각하면 반드시 웃을 일만은 아니다.박실 장군은 우군장과 중군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총사령관 이종무의 큰 실수였다.만일 그가 박실의 좌군을 지원했더라면 대승을 거두어 왜구를 발본색원하였을 것인데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때문에 그뒤에도 왜구는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는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았다.
  • 정치내조자도 “개혁공부”/민자의원·지구당위장부인 세미나

    ◎박관용비서실장,청와대 입성후 첫 공개강연/“「안방정치인」 안주 말고 신한국건설 동참” 촉구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참모장인 박관용대통령비서실장이 청와대 입성이후 처음으로 개혁을 공개 강연했다. 그는 11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민자당 소속의원 및 원외지구당위원장 부인 2백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치인 부인들의 의식개혁」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개혁의 당연성을 역설했다.「안방 선양」「안방 정치인」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바깥 선양」「바깥 정치인」의 절반을 맡아 개혁에 동참하라는 내조 촉구가 강연의 주류. 그는 그동안의 외부강연 자제이유를 『대통령 보좌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말 한마디가 대통령의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우려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선의원을 거치면서 몸에 배인 특유의 달변으로 50여분간 이어진 박비서실장의 강연은 『왜 개혁이 필요한가』로부터 시작됐다.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체제를,경제적으로는 관주도방식을,사회적으로는 온갖 갈등을 탈피하고 해소해야 하기때문이라고 했다.나아가 통일대비는 네번째 기둥이라고 했다. 그는 『신한국은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고통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이러한 「역사소명」을 완벽하게 완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후손들에게 그 틀이라도 물려주기 위해 개혁은 5년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그는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면서 『혁명은 총칼,권위,힘으로 할 수 있지만 개혁은 준법아래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개혁에 대한 비판과 「오해」부분에 대해서는 상당부분을 할애,「동의」를 호소했다.「인치론」과 관련해서는 『일부에서는 독주니 새로운 권위주의니 별별 얘기가 나돌고 있으나 이는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일축했다.사정의 형평성시비에 대해 『특정지역 특정인을 겨냥한 표적이라는 말은 얼토당토않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비서실장은 개혁의 과정에서 공무원의 사기가 위축되고 경제침체가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회사 하나 차리려면 수백 수십곳을 찾아다니며 뒷돈을 대주는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냐』고 반문했다.개혁은 이같이 원가를 절감해 경제를 살리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논리를 폈다.질서,의식회복운동부분에서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스스로 실천해보면 성과가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 관산별곡/반재식 지음(화제의 책)

    ◎조선 청백리 번석평의 일대기 조선 전기 북변 오랑캐들과의 긴장된 대치과정을 중심으로 그린 일종의 전기소설. 이 책은 조선 성종에서 중종 연간을 살다간 송애 번석평(1472∼1540)을 주인공으로 한 청렴한 선비의 우국충정과 목민관으로 일관한 일대기를 각종 고증자료를 참조해 사실적으로 엮었다.지은이는 주인공의 후손이기도 하다. 송애가 활동하던 시대는 당쟁의 시대.35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주로 변방을 오가며 명판결과 국방전문가로서 많은 일화를 남긴다.이 책에서는 특히 변방의 덕장이자 용장으로 청렴한 선비로서 그동안 알려지지않았던 그의 면모가 담겨있다.반재식 지음 을지서적 6천원.
  • 공기업의 「철밥통 속성」/정종석 경제부기자(오늘의 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에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한 중국 정부가 국영기업의 경영혁신을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이른바 「철밥통」 타파운동이다. 철밥통은 전혀 깨질 염려가 없는 밥그릇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생계가 보장되는 국영기업의 낭비를 상징한다.결정적 잘못이 없는 한 빈둥빈둥 놀아도 내쫓길 염려가 없이 평생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능률이 오를 리 없고 조직 내에 무사안일,적당주의,관료주의가 판치게 된다. 그대로 두고는 경제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철밥통을 없애자는 운동이다. 능력에 따른 성과급 등 자본주의적 경쟁방식과 이윤동기를 부여한 결과,제법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리나라 공기업에도 철밥통 속성이 존재한다.대부분 독점적 성격을 지녀 효율을 높이려는 동기가 별로 없고 따라서 경영실적 또한 좋을 리 없다. 철도나 체신사업처럼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사업이 만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철밥통의 전형이다.반면 지난 83년 P호텔에 넘긴 홍익회 사업이나 여행사에서 대행하는 열차표 발매업무 등은 경영쇄신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DHL,심부름센터 등 민간 배달사업이 활발한 데도 고객이 우체국을 찾아가야만 하는 가게식 운영은 수십년 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공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관료에 의해,관료적 통제방법으로 운영되는 점이다. 최근 경제기획원의 정부투자기관 운영실태 공개를 계기로 서울신문에 「공기업­무엇이 문제인가」가 연재(3회)된 뒤 기자는 많은 전화를 받았다.노조의 항의가 많았지만 문제점을 과감히 파헤친데 대한 격려도 적지 않았다.항의 중에는 『정권교체 때마다 복지국가 만든다더니 국영기업을 복지천국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사촌 땅 사니 배아픈」 것과 뭐가 다르냐』는 구절도 있었다. 철밥통 타파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정부와 공기업이 서로 책임만 따지거나 기득권에 매달리다가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사회주의 국가마저 벗어던진 철밥통을 지키려다간 후손들에게 3류국의 멍에를 물려줄 지도 모른다.
  • 안기부,“선진정보 발전 계획 추진”(국감중계)

    ◎미 애커먼 방북 숨겨진 의도 없었다/외통의/야의원드,「비핵화」 재검토 거듭 촉구/국방위 ▷국방위◁ 안기부에 대한 국감에서 의원들의 질의만은 처음으로 공개된 가운데 정치중립에 걸맞는 안기부법 개정,북한 핵문제,남한조선노동당사건 등을 집중 추궁. 특히 임복진의원이 무려 60개 항목의 질의를 퍼붓는 등 민주당 의원들은 너나없이 김대중씨납치사건에 대한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 정대철 강창성의원(민주)은 『정권안보 차단이 김영삼정부의 개혁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면서 ▲안기부의 수사권 폐지 ▲보안감사권,정보기획조정권의 폐지 ▲안기부에 대한 국회 통제기능 강화 ▲예산공개 등 4개 원칙에 의한 안기부법의 개정을 주장. 안기부 출신의 서수종의원(민자)은 『그동안 안기부와 안기부원이 경원과 질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업무에의 개입과 활동방법상의 문제 때문』이라면서 예산증액 등을 통한 개선을 촉구. 정대철 강창성 나병선 권로갑의원(민주)등은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관련,『실효성없는 선언에 얽매여 국익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비판,전면 재검토를 촉구했고 권익현의원(민자)도 이에 동조. 정석모의원(민자)은 『한반도의 주변상황은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국민의 60%이상은 안보의식이 둔감한 실정』이라며 대공태세의 강화를 촉구. 김덕안기부장은 『안기부는 2000년대에 선진국 수준의 정보기관이 되기 위한 선진정보발전계획을 수립,추진중』이라고 설명. 김안기부장은 이어 김대중납치사건 관련기록 제시요구에 대해 『비밀문서 수발대장은 보존연한이 3년으로 폐기된 상태이며 당시 근무직원들도 남아 있지 않다』고 답변. 김안기부장은 비핵화정책의 수정여부와 관련,『플루토늄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평화적 용도가 없다』고 전제,『북한의 핵무기개발 저지의 유력한 근거를 우리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표시. ▷외무통일위◁ 외무통일위의 외무부 본부 감사는 북핵등 무수한 현안 때문에 초반부터 열전. 첫 공방은 미하원 외교위원회 개리 애커먼아·태소위위원장의 방북과 판문점을 통한 방한문제.이는 이세기의원(민자)이 미주국 업무보고도중 애커먼의 방북문제를 거론하면서 촉발. 한장관은 『미·북한간 고위급회담이 중단된 상태에서 미고위급인사와 접촉을 가짐으로써 국내외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북한의 의도』로 분석. 설명이 원론적인 수준에 그치자 박실의원(민주)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않는다』며 발끈. 한장관은 다시 『애커먼의 방북은 양측 군사정전위 비서장간 접촉을 통해 이뤄졌다』며 『한미 양국 모두 그의 방북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고 설명. 그러자 좀처럼 입을 열지않던 이종찬의원(새한국당)이 한장관의 답변을 끊으며 『뭔가 숨겨진 의도와 카드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재차 질의했고 이세기·박정수·김동근의원(민자)도 『애커먼이 북측에 전달한 입장말고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애커먼을 통해 얘기한 것은 무엇이냐』고 이에 가세. 한장관은 그러나 『애커먼을 수행한 퀴노네스북한담당관과 우리측 관계자간의 장시간 대화 기회가 있었으며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보고와 협의가 있었다』고만 답변. ▷재무위◁ 서울지방국세청에 대한 국감에서 의원들은 세수 부족과 관련,국세청의 징세활동 강화를 집중 추궁.또 세무공무원들의 징수비리와 실명제 대책에 대해서도 질의. 서청원의원(민자)은 『세수가 부족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징세 공세를 펴는 것은 조세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경기가 어려울 경우 무조건 징세를 강화하는 것보다는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게 나은게 아니냐』며 최근의 징세 강화를 추궁.정필근의원(민자)도 『세수부족을 메우기 위해 징세를 강화하면 경제회복 조짐이 미미한 상황에서 경제에 또 다시 부담을 줄 가능성은 없느냐』라고 질의. 홍영기의원(민주)은 『실제로는 일반과세자이지만 과세특례자로 위장해 세금을 적게 내는 사업자들이 많다』며 『납세 형평을 위해서도 이들을 적발해야 할 것 아니냐』고 주장. ▷보사위◁ 국가보훈처에 대한 감사에서 의원들은 국가유공자 선정상의 형평성과 이와 관련한 의혹을 제기.이와함께 안중근 서재필등 해외에 안장돼 있는 독립지사 유해 봉환을 위한 적극적인노력을 촉구. 이해찬의원(민주)은 광복회 간부직을 맡고 있는 모인사를 예로 들어 『본의원이 직접 조사한 결과 공적조서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수형기록과 공문서도 없는 사람이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명확한 심사기준을 제시하라고 요구. 김한규의원(민자)은 『지금까지 국내에 안장된 임정요인의 유해는 28위에 불과하고 나머지 87위는 봉환되지 않아 후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유해 봉환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라고 촉구. ▷법사위◁ 헌법재판소에 대한 감사에서 여야의원들은 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의 헌법재판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와 개소 5주년을 맞은 헌재의 실적평가와 앞으로의 제도개선방안등에 관해 집중 추궁. 박헌기의원(민자)등은 『국민기본권 수호의 최후보루라고 할 수 있는 헌재에서 정당한 사유없이 재판을 장기간 지연시켜서는 안될 것』이라고 전제,『심리지연이 헌재 본연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냐』고 따졌다. 박희태의원(민자)은 『헌재가 지난 5년동안 접수처리한 실질적인 위헌법률사건이 44건밖에 안되는 것은 실적이 너무 미미하다』고 지적했고 강철선의원(민주)은 『헌법소원사건의 위헌 인용률이 4%로 너무 낮다』고 공격. 한편 이날 국감에서는 의원들이 답변태도가 불성실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한때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
  • 여전한 취사행위… 유원지마다 법석(국토청결운동 이곳부터:상)

    ◎수도권지역 오염의 현장/떠나간 자리엔 쓰레기로 어지럽고/계곡물 위엔 빈캔·술병·꽁초만 “둥둥”/곳곳에 천막·방갈로… 주변 경관 제모습 잃은지 오래 무질서한 행락자세와 무분별한 상행위로 수도권 주변의 경관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본격적인 단풍철로 접어들면서 행락객들이 버린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이고 있고 상인들의 마구잡이 자연훼손으로 제모습을 잃고 있는 수도권 인근 산과 계곡의 실태를 고발한다.이번 주발부터 본격화되는 국토대청결운동은 이런데서부터 착수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3일 상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 북한산 국립공원.일명 송추유원지로 알려진 이곳에 모회사의 가을철 야유회를 알리는 플래카드를 두른 버스 한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40여명의 직원들은 관광버스에서 내리면서 술과 음료수·과일·과자류등이 담긴 10여개의 상자,대형플라스틱통을 가득 채운 양념고기통을 가득 들고 있었다.물론 숯불구이를 위한 번개탄과 숯곽 한박스씩도 잊지않고 챙기고 있었다. 약 5백여m를 걸어 계곡을 올라가던 일행은 인근음식점 주인과 몇마디 말을 나눈뒤 계곡의 한쪽을 천막으로 막고 콘크리트로 바위틈을 메워 만든 장방형 장소에 짐을 풀었다. 이들이 자리를 잡은지 불과 한시간도 채 안돼 계곡은 고기굽는 냄새와 연기가 자욱히 깔리고 어느새 도착한 밴드의 음악소리까지 합세해 난장판을 이루고 있다. 계곡내에서의 취사행위가 금지돼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 도시락 문화가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이들에게는 먼곳의 이야기인듯 싶었다. 술에 취한 일행들은 불과 30여m 떨어진 간이화장실을 외면한채 숲속에서 용변을 보는가 하면 빈캔 음료와 술병을 계곡물에 던져넣기도 했다. 이들이 한바탕 질펀하게 놀다간 주변은 깨진 유리병,과일 껍질,담배꽁초가 돌틈사이에 숨겨진채 널부러져 있은 것은 물론이다. 이날 송추유원지를 찾은 행락객 4백여명중 일부 가족단위 행락객을 제외하고 50여곳의 불법 콘크리트좌대 주변은 여지없이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이보다 앞선 지난 일요일인 10일의 남양주군 별내면 수락산유원지 사정도 다를바가 없었다. 이곳은 비지정 유원지이지만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상인들이 불법적으로 시설물을 만들어 놓고 있다. 등산복 차림의 40∼50대 남자 10여명은 음식점주인이 즉석에서 중개해 만난 30∼40대 여자들과 짝을 맞춰 야외카바레에서 춤을 즐기고 있다. 이들은 열기가 오르자 등산로를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의 따가운 눈길도 아랑곳없이 뜨거운 장면 연출에 여념이 없다. 이같은 꼴불견 행락문화는 비단 이곳들 뿐아니라 북한산국립공원내 북한산성,원도봉산유원지와 양주군 장흥국민관광지등 수도권일대 이름난 유원지들 어디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평일·휴일을 가리지않는 행락객들의 자연훼손으로 이 일대 산과 계곡은 쓰레기로 또 다른 산을 이루고 맑고 깨끗한 계곡물은 죽은 물로 변하고 있다. 영리에만 급급해 소중한 자연경관에 콘크리트공작물과 천막·방갈로를 마구 설치하는 상인들과 인력부족을 이유로 관리단속에 소홀한 행정기관이 우리의 산과 계곡의 제모습 잃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수락산에서 만난 등산객 조모씨(54·회사원·서울 도봉구 창동)는 『이같은 자연훼손행위에 따른 피해는 결국 우리와 후손들에게 되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전시용 자연보호캠페인보다 의식개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단군숭배,정치이념으로 발전”/구한말∼일 강점기 민족적결속을 다져

    ◎정문연 정영훈연구원 「단군민족주의… 」 논문서 주장/자주독립·통일 추구하는 밑거름 역할 「단군이 실제로 존재했는가,또는 신화속의 인물일 뿐인가」라는 학계의 논란과는 별도로 우리 사회에는 단군을 국조로 믿고 숭상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다.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우리의 근대사 진행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돼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단군숭배」현상을 정치이념의 하나로 풀이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단군민족주의를 「단군을 민족 공동의 조상으로 여기고 그를 토대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발전을 추구하는 사상 또는 정치적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정연구원은 단군민족주의는 적어도 「단군사화」가 처음 수록된 역사책인 「삼국유사」가 발간된 고려 중기(1281년)에 시작됐다고 보았다. 이후 구한말에 나라의 기틀이 위태로워지자 「우리는 단군할아버지의 같은 후손」이라는 민족적 연대감이 확산되면서 각 분야에서 단군의 이름 아래 민족적 결속을 이룬 것으로 분석했다. 대표적인 예로 독립군 간부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애국가에 「품질좋은 단군자손 우리 국민일세」라는 대목이 들어 있는 것을 비롯,독립군들의 격문은 으레 「단군자손들이 한데 뭉쳐 궐기하자」고 돼 있어 단군이 민족부활의 구심점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종교부문에서 단군교­대종교가 등장한 것이나,학문분야에서 민족주의사학이 탄생하는 등 국학이 부흥한 것들이 모두 단군민족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라고 정연구원은 풀이했다. 정연구원은 그러나 이같은 「단군숭배」가 민족의 자주독립등 추상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호로만 쓰인 것이 아니며 정치운동으로서 일정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즉 「한 사람의 왕과 소수의 양반귀족이 군림하던 구한말의 절대군주국가 체제를,다같이 단군의 자손인 민족 모두가 공유하는 국민국가로 바꾸자는 것」이 그 목표였다는 주장이다. 「단군숭배」는 결국 단군민족주의의 겉모습이었으며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군민족주의는 그 내용을 보강했다는 것이다. 그는 『구한말부터 확산돼온 단군민족주의는 「3·1운동」에서 응집된 대중의 힘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고 밝히고 이후 조소앙의 「삼균주의」,안재홍의「신민족주의」,안호상의 「일민주의」등 숱한 민족주의 이론을 잉태한 것으로 평가했다. 정연구원은 단군민족주의는 정부수립후에도 ▲단기(단군기원)연호의 공식사용 ▲개천절의 국경일 지정 ▲「홍익인간」사상의 교육이념 제정등으로 국가의례속에 제도화돼 이어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단군이 역사상에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보다는 「상징화된 단군」이 우리 사회에서 갖고 있는 생명력이 더욱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 비류백제설:중(온 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17)

    ◎“광개토대왕비에 2개백제 명시”/잔국=비류백제·백잔국=온조백제 해석/“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왕족 묻힌곳”주장 서기전 18년부터 396년까지 한반도에 제4의 국가로 존재했다는 「비류백제」.이를 입증하는 자료란 어떤 것들일까.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비류백제」를 주장하는 근거는 다양하다.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들이 ▲비류가 자살하지 않고 강국을 이루었다는 일부 사서의 기록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2개의 백제를 시사하는 부분 ▲(온조)백제가 한때 도읍했던 웅진(현재의 공주)지역의 유적분포상황등이다. 백제의 건국을 다룬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지난 회에 밝힌 「비류의 자살」기사에 이설이 덧붙여 있다.삼국사기 편찬자는 『일설로는 시조 비류왕이 미추홀에 정착했다.또 중국의 사서인「북사」와 「수서」는 주몽의 후손인 구대(구이)가 대방땅에서 처음 나라를 세워 나중에 동이강국이 되었다고 했다.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삼국사기」 편찬자가 비류의 기사에 연결해 구이의 활약상을 소개한 이유는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그는 각종 사서에 씌어진 그들의 활동시기·지역·내용등을 비교한 뒤 「비류와 구이는 동일인」이라고 결론지었다.또 『구이의 묘가 웅진에 있다』는 기록에서 비류백제의 도읍지를 웅진으로 잡았다. 백제본기중의 이설이 비류백제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이라면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정벌 기사는 한시기에 2개의 백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게 김씨의 논리다.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이끌고 「잔국」의 성 55곳을 함락시켜 토벌했다.귀환하는 도중 백잔왕의 저항을 받자 대왕은 한강을 건너 백잔국의 성 3곳을 빼앗았다.백잔왕은 백성 1천명등을 바치면서 영원히 복종할 것을 맹세했으며 대왕은 백잔왕을 용서했다.「잔왕」의 동생과 신하 10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김씨는 비문의 내용상 「잔국」과 백잔국이 엄연히 구분돼 있다고 지적했다.「잔국」은 ▲성 55곳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충남일대에 위치했으며 ▲고구려군에게 멸망(토벌)했고 ▲왕의동생등이 포로로 잡혀갔다.반면 백잔국은 ▲공격받은 성이 한강 북쪽에 있었으며 ▲왕이 공물을 바치고 용서를 받았다. 즉 2개의 나라이름이 등장하는데다 자리잡은 지역,전쟁결과에 따른 처리등에 큰 차이가 나므로 「잔국」과 백잔국은 서로 다른 나라라는 주장이다.김씨는 「잔국」을 비류백제로,백잔국을 온조백제로 보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비류백제의 도읍이 있었다는 웅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기록상 (온조)백제가 웅진에 도읍한 기간은 63년(475∼538)이며 이곳에 묻힌 왕은 무령왕등 4명이다.그러나 현재 웅진에는 왕릉규모의 고분 십여기를 비롯,수백기의 대형무덤이 남아 있다. 김씨는 『온조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삼은 63년동안 그처럼 많은 대형무덤을 남길 수는 없다』고 지적하고 이들 무덤의 주인은 4백여년 도읍했던 비류백제의 왕과 왕족들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연구에 한·중·일 3국의 관련사서를 두루 동원했고 「통계적 지명고찰」이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등의 노력으로 매우 탄탄해 보이는 논리를 짜냈다.그럼에도 기존 학계에서 그의 학설을 「이단」으로 취급했다.그 이유는 다음회에 다룬다.
  • 만송원 뒷산 종가 묘역(일본속의 한국문화:4)

    ◎32대 7백년 통치 대마도주 집안 묘지/향나무 숲속 자리… 아래부터 웃분모셔 특이/청수산성은 조선 침략군 전진·병참기지로 만송원 원당을 보고 나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수령 1천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사이로 이끼낀 돌계단이 놓여 있고 좌우에는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공동묘지다.혼자 가라면 망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애첩까지 함께 묻혀 바로 이곳이 고려시대 중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7백여년에 걸쳐 대마도를 지배하면서 한·일 두 나라 사이를 오간 32대에 걸친 대마도주들의 공동묘소다.일본에서도 단 세곳밖에 없다는 종중묘지인데 묘역에는 역대 도주는 물론 그 정실부인과 애첩들,그리고 그 피붙이들까지 모두 한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고 보면 고려때 우리나라에서 이 섬으로 건너간 송씨일족의 무덤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양식이 모두 왜식이라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느낌을 준다.가장 이색적인 사실은 아래위가 뒤바뀐 무덤의 서열이라 할 수 있다.이 공동묘지는 윗무덤(상어령실)과 가운뎃무덤(중어령실),그리고 아랫무덤(하어령실)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일 윗무덤에 19대 의지 이하 32대까지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그보다 아래에 자리한 가운뎃무덤에다 10대부터 18대까지의 선조들을 모셔놓았다.그리고 제일 아랫무덤에 이들 선조의 부인과 아이들을 묻어놓았으니 완전히 선후배가 꺼꾸로 자리한 꼴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마도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것 같다.19대 종의지와 그의 아들 종의성은 임진왜란을 이용하여 대마도를 일신해놓은 중흥의 명주로 알려져 있다.이 두 사람이 나오기 이전의 대마도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고 왜구들이 군웅할거하던 섬이었다.이런 대마도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는 기록이 송희경이 쓴 「일본행록」이다.송희경은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한 이듬해인 세종2년(1420) 사신으로 일본 가는 길에 대마도에 들렀다. ○왜군의 길잡이 노릇 그때 대마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배추빛(채색)으로 떠 있었다고 한다.배추빛이란 굶어서 얼굴이 누르스름하다는 이야기다.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본토가 모두 가난하여 도처에 해적들이 우굴거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잡혀 죽을 정도였다.송희경보다 50년 뒤인 1470년(성종2년)에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읽어보더라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대마도로서는 일본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고 죽으나 사나 조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말 대마도는 갑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다름아닌 임진왜란 때문이었다.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하자 종의지는 재빨리 왜장을 찾아가서 전승을 축하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선과의 교섭사명을 부여받았다.그러다 보니 결국 왜군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조선으로부터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종의지는 먼저 대마도를 조선침략군의 전진기지요 병참기지로 제공했다.바로 이곳 이즈하라의 진산인 청수산에 남아 있는 산성지가 그것인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지은 것이다.북구주의 명호옥에서 일기도의 승본을 거쳐 대마도의 청수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군 루트가 지금도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일본에서는 임란사적으로 지정해놓고 있다. 종의지가 다음에 한 일은 대마도민 2천8백명을 침략군 선봉에 나서게 하는 일이었다.2천8백명이었다면 임란때의 왜군 총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마도군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침략 왜군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번대와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번대,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용장정이 이끄는 제3번대가 그것이었다.이중에서 대마도군은 소서행장의 제1번대,그것도 최선봉군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일로 서울로 북진해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서로 믿고 지낼 수 있던 대마도주 의지가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으니 배신도 이만저만 배신이 아니었다.이때만 하더라도 일본 본토의 왜장들은 조선의 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아는 사람은 오로지 대마도인뿐.그들은 이미 고려때부터 조선을 내왕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상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만일 이 고려인의 후예 종가놈이 완강하게 길안내역을 거절하였거나 아니면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삼천포로 빠져 남한일대에서 헤매었을지 모를 일이다.만일 그랬더라면 왜란은 조기에 종결되었거나 그 피해 또한 그토록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임난후 쌀수출 중지 뿐만 아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대마도인의 접근을 금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부산에 있던 왜관이 폐쇄되고 대마도에의 곡물 수출을 일체 금지하게 되자 대마도경제는 일대 공황속에 빠지고 말았다.자업자득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배신행위에 대한 당연한 응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마도주로서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까지 험악해진 조선과의 사이를 또 다시 교활한 속임수로 뚫고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서위조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기극인데 임란 이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불과 8년만에 이루어졌다.이를일제침략 종식후 20년만인 1965년에 성립된 한·일국교정상화에 비한다면 배나 더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 배후에는 대마도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때 일본의 실권자 덕천가강은 단 한푼 배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마디 사죄하지 않은 상태로 앉아서 통신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대마도주는 일본 상전에게 두둑한 상을 받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조정에 대해서는 다시 배신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대마도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서 기울어졌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임란 전후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전국의 장승들이 모였다는데(박갑천칼럼)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는 「변강쇠전」(변강쇠타령)은 징음성을 띤다.서시같이 아름다운 천하음녀 옹녀와 천하색골 변강쇠의 어울림으로부터 시작된 이 작품은 나중에 초라니 풍각쟁이들의 음심까지 징계받는 것으로 되어있지 않던가. 게으르면서 여색만 밝히는 변강쇠가 죽는 까닭은 지리산속 장승을 빼다가 장작 같이 패서 불을 땐데에 있다.죄없이 「도끼아래 조각나고 부엌속에 재가된」 목신이 경기도 노강선창목 대방에게 원정한다.그결과 전국의 장승이 모여 변강쇠 응징할 일을 의논하는데 여러의견 가운데 해남관머리 장승의 것이 채택된다.그내용은 『…그런 흉한놈을 쉽사리 죽여서는 설치가 못될테니 칠칠이 사십구 한달 열아흐레 밤낮으로 볶아대다가 험사·악사하게 되면…우리식구대로 병하나씩을 가지고서 변강쇠를 찾아가 정수리에서 발톱까지…겹겹이 발랐으면 그수가 좋을 듯 하오』.무서운 복수심이다.변강쇠는 장승같은 모양을 하고 죽는다. 장승은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그러나 크게는 장승계(계)와 벅수계로 갈린다.그래서 땅이름에도 장승배기·장승개·장성이터·장생말…이 있는가 하면 벅수거리·법수터·벅수재·법숫골…따위 이름들도 숱하게 깔려있다.돌로도 되어있고 나무로도 되어 있는 장승은 그 기원설도 가지가지이다.그중에서도 「실존인물 장승상」에 관한 것은 사뭇 패륜적이다.제가 낳은딸을 「여자」로 생각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는 「장승」을 「장승상」에다 부회한 「얘기」일 뿐이다. 장승의 생겨남은 역시 벽사진경에 있었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정표 구실까지 곁들이게 되었다고 봄이 옳을 듯 하다(김두하지음 「벅수와 장승」).지금은 거의 볼수 없게 되었지만 동네어귀 같은데 세워진 「천하대장군」「지하녀장군」은 역신에게 겁을 주는 듯한 무서운 표정속에서도 오히려 익살을 안은 다정한 모습 아니었던가.그 얼굴에는 우리겨레의 심상이 어린다.사람들 마음에 안식을 심어주는 표정이기도 하다. 장승사랑회가 「93장승한마당전」을 열고 있다(4일∼11일:서울종로 영풍문고 이벤트홀).전국의 장승들이 사진으로 조각으로 그 희한한 모습을 선보이는,말하자면 전국 장승잔치의 자리이다.일찍이 변강쇠를 응징했던 장승의 후손들은 지금 한자리에 모여서 과연 무슨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일까.어쩌면 문명화사회에 대한 응징책이 화제의 중심으로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대마도 이즈하라 만송원(일본속의 한국문화:3)

    ◎임란침략 선봉장 종의지 아들이 건립/20대 도주 의성,선친 명복 빌기위해 세워/마룻바닥 구석에 약탈한 조선제기 전시 『살아서 대마도에 가서 부산을 단 한치만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가 4년간 억류당한 유학자 강항의 비통한 한마디다.강항는 돌아와서 유명한 「간량록」을 지어 남겼다.「간양록」을 읽지 않고서는 일본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책이다. 대마도의 행정수도 이즈하라(엄원)에 가면 누구나 관광업소 제1호 만송원을 둘러보게 된다.본래 송음사라 이름지었다가 만송원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만송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침략앞잡이 종의지라는 19대 대마도주의 법호라고 한다.그 아들 종의성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 이 만송원의 유래다.그런데 이 아들 의성 역시 임란후 국서(외교문서)를 위조하여 속임수로 한일국교를 정상화시킨 장본인이다.그러니 만송원으로 들어가는 한국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은 뒤 화재를 만나 몇번이나 다시 지었다는 법당에는 일본막부 덕천가의 위패를 유리창속에 안치해놓고 앞의 마룻바닥 한 구석에는 조선국왕이 바쳤다는 이 절의 보물 삼구족을 마치 노획물이나 되는 듯 전시해놓았다.도대체 놓여 있는 자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경복궁서 훔쳐온 듯 일본막부 덕천일주을 신주처럼 모셔놓고 그 앞에 그것도 마룻바닥 한 구석에다 우리나라 왕실에서나 쓰던 성스러운 기물을 진열하였으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거기다 더한 것은 조선국왕이 이 보잘것없는 섬의 도주에게 왕실에서 쓰는 기물을 바쳤다(여기 말로 공헌하였다)는 말투다.아마도 이 말은 일제때 조선을 얕잡아보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 추측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조선국왕의 하사품이라든지,아니면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임진왜란 때 왜국의 선봉장으로 서울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에 들어가 훔쳐온 것이라든지 확실하게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이 아닌가.왜냐하면 필자가 아는 한 우리측의 어느 기록에도 이런 성스러운물건을 대마도주에게 하사하였다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는 상태에서 만송원 법당안을 둘러보고 나면 그 뒷산이 청수산이라는 이즈하라의 진산에 올라가게 되는데 30여대에 걸친 종가들 일족의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가의 족보문제다.도대체 종가란 자들은 언제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임란 직후에 사상초유의 외침에 시달린 우리 조상들은 많은 임란일록을 지어 남겼다.그중에 화은 신경(신경,1614∼1653년)의 「재조번방지」란 책이 있다.이 책에 보면 대마도주 종가는 우리나라 송씨였다는 기록이 나온다.즉 신경은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가장 친근한 섬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대개 대마도땅은 모래와 돌로 되어 있어 전적으로 우리나라와 교역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도주 종성장(12대)은 우리나라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섬(대마도)으로 들어가서 도주가 되어 성을 종으로 간 사람이다』 신경의 「재조번방지」는 매우 신빙성이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대마도주 종가의 뿌리가 조선인 송가였다는 이 기록을 근거없다고 하여 일소에 붙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조선인 송씨가 조상 본시 일본 사람들의 습속이란 『성을 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온 우리네와는 달리 마음대로 갈고 고치는 사람들이므로 종가의 세계보를 그 어느 누구도 보증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송원에 모셔져 있다는 종의지란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하는 점이다.강항에 따르면 종의지는 『풍신수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데 있어서 향도노릇을 한 모사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 임란 이전에는 우리나라 쌀을 받아먹다가 임란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워 수길에게 영지를 얻어 일본쌀을 먹게 되었다고 그 배신행위에 격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항이 4년간의 억류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조국땅을 향해 대마도를 거쳐 오는데 이 이즈하라에서 의지의 참모역을 맡고 있던 심복부하 유천조신을 만나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대마도는 그때 임란 직후라 조선과의 교역이 끊겨 도민의 생계가 막막하던 때였다. 『이 섬은 한일 두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 수길(즉 일본)이 상국(즉 조선)을 침범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우리가 사전에 수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정보를 귀뜀하여 주지 않았습니까.미리 침략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는데 우리로서는 그때 할일을 다했습니다.수길이 침략군을 동원하게 되자 약한 우리 대마도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봉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에 장차 조선이 강해서 일본을 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선을 위해 일본을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또 대마도는 과거 2백년간 위관의 소굴이었다고 하나 호남을 범한 일은 있으나 영남을 범한 일은 없습니다.우리 대마도가 조선의 영남을 지켜준 셈입니다』 ○임란발발 미리 알려 조신의 이 말 가운데 왜구의 방파제가 되어 조선의 영남지방을 지켜주었다는 마지막 말은 과장되어 있으나 임란 직전에 왜군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조선에 알려준 사실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종의지와 조신은 임란 직전인 1590년에 우리 사신 황윤길과 김성일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었는데 돌아와서 두 사신의 보고가 엇갈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했다.이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듬해(1591년) 5월 임란이 일어나기 꼭 1년전에 종의지가 홀로 배를 타고 부산 영도에 와서 『조선조정에 급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나를 서울에 가도록 하여 주시오.일본이 곧 쳐들어옵니다.대비하여야 합니다』라고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이때 서울의 조정에서는 어리석게도 현지 관리의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아무 회답도 보내지 않았다.종의지는 열흘동안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대마도로 돌아가고 말았다.이 사실로 미루어 그는 과연 조선인 종씨의 후손이 아니었든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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