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후손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안타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수산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제주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유착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360
  • [저자와의 대화]’율곡학의 선구와 후예’ 충남대 황의동교수

    실용적 가치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유학이 중심사상으로 존재하기는 쉽지 않다.최근에 나온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은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의 원류를 유교에서 찾고 있다.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유교문화의 영향은 뿌리 깊다.그러한 유교의 한국내 양대 산맥중의 하나인 율곡학을 조명한 ‘율곡학의 선구와 후예’라는 책이 나왔다.(예문서원 1만6,000원) “율곡학은 이(理)와 기(氣)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철학이다.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이상·정신이고 기는 현실·물질이라 할 수 있다.율곡학은뛰어난 사상으로 조선 중기 이후 정치·사상 등 모든 면에서 큰 영향을 미쳐 왔다”고 이 책을 쓴 황의동 충남대 철학과 교수는 말한다. 한국 성리학에는 퇴계학과 율곡학이라는 두 줄기의 큰 흐름이 있다.퇴계학과 율곡학은 이와 기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계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한다.이러한 이론적 탐구는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정도로 정밀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은 1부에서 유학의 일반론 및한국 유학의 발전과정과 특성을 설명한다.2부와 3부에서는 율곡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정여창·서경덕·이언적·이황·이이·김장생·윤선도·송시열 등의 인물을 통해 탐구한다. 저자는 기존의 연구들과는 다르게 호남유학을 기호유학으로부터 분리하여 호남유학의 독자적인 학술사적 흐름을 추적하고 김정·조익·조성기 등 많이알려지지 않은 유학자들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황 교수는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갖고 있다.서양 철학은 이를 이성과 감성이라고 말한다.두 가지 본성은 늘 갈등을 일으킨다.율곡학은 그 갈등을 조화롭게 극복하여 조화적·전인적인 인간을 추구한다.조화와 균형의 철학이념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계층·성별·세대·지역·이념간의 대립과 갈등구조를 치유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유학은 지나치게 윤리·도덕·관념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있다. 그러나 율곡학은 경제·민생 등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그리고 개방적이라서 불교·양명학 등을 수용하여 다양하게 발전해 왔고 실학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황 교수는 퇴계학에 비해 율곡학 연구는 그동안 많은 홀대를 받아 왔다고말한다.“율곡학 연구가 지금은 율곡사상연구회를 중심으로 많이 활성화되고학술진흥재단 등의 지원도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지역적 이유 등으로 영남유학인 퇴계학보다 정부지원과 학문연구가 빈약했다.더욱이 퇴계의 후손들은경제적 여유가 있어 퇴계학 연구를 적극 지원했으나 율곡의 후손들은 그럴만한 재력 있는 사람이 없어 문중 차원의 지원도 별로 없었다.” 그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대해 “유학에 대한 올바른인식이 부족하고 논리적 비약이 많다”고 지적한다.그러나 유학자들은 유학을 대중 속에 살아 있도록 하지 못한데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유학은 죽어서는 안되며 살아 있는 유학이 되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경제적 가치를 우선한다.그러나 21세기에 맞는 철학은 율곡학 처럼 경제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사상이어야 한다”고 황 교수는 말한다. 이창순기자 cslee@
  • [외언내언] 케네디家 비극

    한 장의 가족사진을 들여다본다.막내아들을 무릎에 앉힌 아버지를 중심으로어머니와 9명의 자녀가 포즈를 잡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는다. 케네디가(家)가 1940년 하이아니스 포트의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지난 60년대 후반AP통신이 엮은 책 ‘케네디가의 승리와 비극’(서울신문 외신부 번역·발간)에 실린 이 사진에는 비극의 그림자가 없다.다복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그로부터 4년후 가족사진 속의 맏아들이 죽는다.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언젠가는 미국대통령이 되겠다고 장담했던 조지프 패트릭이 2차대전중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에 참여했다가 피격당한다. 그로부터 다시 4년후 9남매중 넷째인 딸 캐슬린이 비행기 사고로 또 죽는다. 이어 케네디 집안 영광의 정점(頂點)에 섰던 둘째아들 존 F 케네디 대통령(63년)과 일곱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68년)이 잇달아 암살당함으로써 케네디가의 비극은 미국의 비극이 되기에 이른다.이제 사진속의 가족 가운데 남은 사람은 막내아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4명의 딸뿐이다. 케네디가의 비극적 죽음은 3대까지 이어져 로버트의 두 아들 데이비드(84년)와 마이클(97년)이 각각 약물 과다복용과 스키사고로 숨진데 이어 케네디대통령의 아들 존 F 케네디 2세와 그의 부인 캐롤라인이 함께 탄 비행기가 17일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다.공교롭게도 실종된 비행기는 케네디일가가 가족사진을 찍었던 하이아니스 포트를 최종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케네디가의 비극에는 운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미국 대통령 1명과 대통령 후보 3명(상원의원 3명),하원의원 3명을 배출한 미국 최고의 정치 명문으로 왕실이 없는 미국에서 로열 패밀리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 집안에 드리운 운명의 그림자는 영광이 빛이 밝은 만큼 더 어둡게 보인다.워싱턴포스트는 케네디2세의 비행기 실종사고를 보도하면서 “미국에 셰익스피어가있다면 케네디가의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셰익스피어는 야망,부(富),정열,권력,섹스,사랑 그리고 죽음등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 초대형 인생의 모든것이여기에 들어 있음을 즉각 간파했을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 가문의 이야기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을 것이라며 호머의 ‘오디세이’에 비유한 국내 번역가도 있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30대에 백만장자가 되고 영국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조지프 케네디로부터 시작된 케네디가의 신화가 미국은 물론 세계적인 주목을 끈데는 이 비극의 그림자도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단란한 가족사진을 망가뜨린 비극은 너무 처절하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원했듯이케네디 2세의 실종이 케네디가의 마지막 비극이 되길 바란다.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언더우드목사 白骨되어 한국에

    연세대 설립자인 고(故) 언더우드(원두우·元杜尤) 목사가 83년만에 제2의고국인 한국에 돌아왔다. 오는 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서울 외국인묘지공원에서는 각계 인사들이참석한 가운데 박사의 탄생 140주년과 이장(移葬)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박사의 유해는 지난 5월20일 이미 이장됐다. 1916년 발진티프스병이 악화돼 요양차 미국으로 떠났던 박사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 해 10월12일 57세로 별세,뉴저지주의 작은 교회에 묻혔다.당시 박사의 시신을 한국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부인인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뜻에 따라 이장을 위해 준비해둔 비용을 유치원 건립비로 썼다. 이장보다는 한국의 교육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96년 박사의 80주기 기념예배에서 후손들은 박사의 부인과 외아들원한경(元韓慶)박사 부부,그리고 장손인 원일한(元一韓·82)박사의 부인이묻힌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이로써 언더우드가의 ‘가족묘’가 한국에 완성된 셈이다. 4세 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박사는뉴욕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인도로 가기를 희망했다.그러나 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한 1884년 주미대사였던 명성황후의 오빠 민영익(閔泳翊)을 통해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1885년 4월 인천에 도착한 박사는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을 만들었다.1889년에는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간행했다.1897년에는 순 한글신문인 ‘주간 그리스도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887년에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모체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일제 초기인 191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형으로부터 5만2,000달러라는 거금을 받아 세상을 뜨기 한해 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다.선교와 교육 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했다.장손인 원일한 연세대 상임이사는 “할아버지는 특히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과 가깝게 지냈고 교육과 언론의 사명에대해 자주 의논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사는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동상에 새겨진 글귀대로진정 ‘하나님의 사자(Messenger of God)’로 이 땅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Follower of Christ)’로 살다가 ‘한국인의 친구가 된 사람(Friend of Korea)’이었다. 이지운 김미경기자 jj@ - 언더우드家 3代 안장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소장 李康泌)은 마포구 합정동 145 당산철교 근처에있다. 지난 1890년 고종황제가 장로교 선교회 소속 미국 의료선교사 존 해론박사의 장지로 이 땅을 기증한 것이 시초가 됐다.이때부터 미국을 비롯해 호주,벨기에,캐나다,프랑스,백러시아,독일 등 11개국 외국인 500여명이 묻혔다.선교사 뿐만 아니라 백러시아에서 온 피난민들,외교관 및 군 관련 외국인들도포함되어 있다. 공원 뒤쪽에 바로 언더우드 일가의 묘지가 있다.최근 이장한 언더우드 박사를 비롯해 부인 릴리아스,아들 원한경(元漢慶),며느리 와그너,손자 일한(一漢)씨의 부인 원성희씨가 묻혀 있다. 이외에도 지난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최초의 미국감리교선교사로서 배재학당 창시자인 아펜젤러,고종의 밀사로 1907년 이준 열사와 함께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헐버트,이화학당 창시자스크랜튼,세브란스 병원설립에 참여한 애비슨 등이 안장돼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대한시론] 임시정부 법통계승 기념사업

    1987년 10월12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그해 10월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제9차로 개정된 현행 헌법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대한민국이‘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한다. 법통 계승이 왜 중요한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헌법이 선언적인 의미만 갖는 형식적인 글귀가 아니라면 헌법전문에 명시한 법통 계승은 거기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음이 당연하다.더구나 같은 전문에 명시된‘3.1운동’과‘4.19민주이념’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조치가역대 정권에 의해 취해졌다.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임정에 대해서도 예우가필요하다. 개정 헌법에서 임정과의 관계를 적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헌법하에서 출발한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았다.기껏 김영삼 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요인 몇분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을 뿐이다. 50년 만에 교체되었다는 이 정권이 앞의 정권들과 차별성을 보이려면 임정의 법통 계승문제의 해결도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이에 법통 계승과관련된 몇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임정 유적지 보존이다.임정은 상해에서 시작하였지만 1932년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에는 계속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임정이 충칭(重慶)까지 옮겨간 여러 지방의 유적지를 찾고 후손들이 찾을 수 있도록보존해야 한다.오랜 세월이 지나 정확한 유적지를 알 수 없는 곳도 많겠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들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에 서둘러야 한다.이런 문제는 주재국 정부와의 외교적 교섭이 앞서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둘째,임정기념관의 건립이다.지금까지 임정기념관이 설립되지 않은 것은 임정의 권위와 전통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세력에 의한 것이지만 결코 떳떳한일은 아니다.임정기념관은 임정 관계자료와 독립운동 관계자료 및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자료 등,이 시기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갖춘다.그렇게 되면 이곳에 와서 독립운동과 민족 반역의 역사를 모두 찾아볼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여러번 임정기념관 설립 최적지는 헐어버린 조선총독부 자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주장의 의도는 광화문 일대의 국가 핵심 건물의 배치도가 종전에는 경복궁→조선총독부→정부종합청사의 순서로 되어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가관이었는데 조선총독부 자리에 독립광장과 임정기념관을 대신한다면 조선왕조가 독립운동(임정)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게 되었다는 바른 역사의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효창원 등 국립묘지 밖에 있는 임정 요인 묘역을 국립묘지 수준으로예우하는 것이다.이런 묘역들은 나름대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이장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현재 효창공원은 임정주석 김구와 임정 요인(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삼 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이 묘역을 국립묘지 수준으로 격을 높이고,효창공원이라는 이름도 거기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정 자료의 체계적인 편찬이다.여기에는 의정원과 정부의 각종 기록,독립신문,독립운동사 편찬자료 및 각국 정부·인사 및해외 교민들과 왕래한 문서들이 해당된다.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 등 여러 곳에서 많은 자료를 출간하였고 최근 대한매일이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에서도 상당 부분 보완하였다.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에 두 트럭분의 문서를가져왔으나 소실된 것 같다고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정부는 임정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한시적인 기구를 만들어 본격화시켜야 한다. 최근 임정자료 수집만을 위해 학계 중진들이 연구소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정부가 이 사업을 직·간접으로 지원한다면 역사에 남는 정권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한국사
  • [발언대] 구청 비협조 납골당·영탑 설치 차질

    장묘제도는 이제 더이상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매장제도는 반영구적으로 국토를 점유하기 때문에 토지의 효과적인 이용 측면에서 화장이 전세계적인 장법이 돼있는 실정이다.유교종주국인 중국에서는 대부분 화장을 하고있으며 서구 국가에서도 화장이 대중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해 약 500만평이 묘지화되고 있다고 한다.매장 위주의장묘제도로 한정된 국토에 죽은 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살아있는 자의 공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이른바 조상을 명당에 모셔야 후손이 잘된다는 이런전통을 재조명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최근 불교계는 불교고유의 장법인 화장을 보급하는 납골당과 영탑공원 건립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정부가 국토의 묘지화를 막는다는 차원에서 크게 장려하고 있어앞으로 더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많은 사찰들이 경내에 납골당과 영탑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영탑은 탑 아래에 유골이나 위패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돼 있으며 가족탑,문중탑,동호인탑,회사탑 등 종류까지 다양해 환영받고 있다. 공립납골당을 운영하려면 매년 65억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는데 서울시에서는 예산이 없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종단에서는 영탑을 조성해 1인당 100만∼15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묘지문제를 해결해줌은 물론 종교의식으로 제사를 대신해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삼우재나 49재,백일재 천도재 등의 행사를 도심에서 한다는 이유로해당 구청에 시정을 건의하는 민원이 몰려 정작 수혜자들에게 알릴 수 없는실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행법상 사찰 경내 2m 미만의 부도탑 설치는 신고제로 명시돼 있으며 ‘매장 및 묘지에 관한 법률’에서도 종교단체의 납골당 설치를 권장하면서 신고제로 인정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민원으로 인한 구청의 비협조적인 자세는 화장장려책은 물론이고 국토의 효율적 이용에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호균[경기도 고양시 토당동]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9)신라전기의 對日교류·갈등

    ◆신라 전기의 對日교류와 갈등 비단으로 감싼 알을 넣은 궤짝 하나가 동해안 한 바닷가(阿津浦口)에 닿았다.이 궤는 먼저 낙동강 하구인 금관가야국에 닿았지만 받아주질 않자 이곳까지 온 것이다.한 할머니가 그 궤짝 안에 있던 아이를 품에 안고 나오자 까치 한 마리가 울며 쫓아왔다.바다를 건너 찾아온 아이는 신라의 4대왕이 된석탈해(昔脫解)였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왜의 동북쪽 천여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왔다 하였고,삼국유사는 용성국(龍城國)이라고 하였다.그러니까 석탈해는 바다건너서 궤짝으로 표현된 배를 타고 들어온 이주민인 셈이다.신라의 건국과정에서 일어난 일종의 항해사화이다. 신라는 4세기 늦게까지 내륙의 분지인 경주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국가로 이해한다.하지만 초기부터 국제성이 강한 나라였고,경주는 바다로 이어진 해항(海港)도시였다.그래서 초기부터 해외와 관련된 기록이 많았다. ‘삼국지’나 ‘삼국사기’ 등에는 진(秦)나라때 난리를 피한 사람들이 신라지역에 있었다고 한다.그들중에는 산동이나 요동등에 살고 있던 동이족들이 많았으며,이후에도 계속 황해를 건너왔다.진한은 당시 중요한 화폐대용이었던 철을 팔면서 남해를 넘나드는 해외무역을 했으니 신라는 당연히 교역망을 물려받았을 것이다.대장장이인 석탈해가 왕이 된 것은 철의 생산과 수출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수 있다.세계적인 중국의 안산(鞍山)제철소가 고구려의 요동성 지역에 세워진 것처럼 포항제철과 울산공단이 석탈해의 터전에 세워지고 수출항이 된 것은 역사의 현재화를 웅변한다. 경주는 초기부터 해외로 진출하는 전진기지였고,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였다.박혁거세때에 호공(瓠公)은 왜국에서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온귀화인이지만 중요한 벼슬을 하였다. 왜인들은 초기부터 신라를 침입해왔고 2대 남해왕때는 병선 100여척에 타고 해안을 침범하였다.때로는 대규모로 침입하여 수도 경주를 위협하기도 했다.왜와 관련된 기사가 500년까지 50여회나 나올만큼 왜인들은 자주 신라를 침범했다. 그런가하면 아달라왕(阿達羅王) 20년(173년) 5월에는 왜국 여왕 비미호가사신을 보내 수교하는 등 우호관계도 유지했다.그래서 그들은 ‘한반도의 남부에 거주한 주민이다’ ‘남부와 대마도,규슈까지 연결하는 규슈 왜왕조의왜인들이다’ ‘단순한 해적집단이다’등 여러가지 설이 나타났다.심지어는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모두가 당시의 해양문화수준이 낮다는 인식에서 나온 설들이다. 그러나 그 시기 동아지중해의 전반적인 해양능력은 발달했다.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은 인도네시아까지 선단을 파견하였다.한무제는 수만의 해군을 동원하여 남월(南越)을 정벌하고,위만조선과 수군을 동원한 대전쟁을 하였다.3세기에 위나라는 서해 연안항로를 이용하여 일본열도까지 교역은 물론,내정간섭까지 하였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미 7,000여년 전부터 교류가 있어왔다.물살은 거세지만 최단거리로 이으면 200km에도 못미치는 대한해협은 해양민들이 건너다니기에는 어려운 바다가 아니었다.일본의 초기역사를 다룬 ‘일본서기’의 초반부에는 신라관련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태양여신인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와 싸우다 실패한 스사노오노미코도는 그의 뿌리나라(根國)인신라로 돌아가고 후손들은 이즈모(出雲)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한다. 또다른 기록엔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신라에 내려와 살다가 흙(埴土)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이즈모지방의 도리가미노다케(鳥上峯)에 내려왔다고 한다.신라인들은 그 후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열도의 여러 지역으로 진출한다.그 시대에 사용된 선박의 규모는 알 수가 없다.무덤에서 나온 배모양의 토기는 단순한 형태의 부장품일 뿐이다. 신라왕은 응신천황에게 배만드는 장인을 보낼 정도였다.그런데 비슷한 시대에 위나라 사신과 상인들은 대방을 경유하여 김해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 규슈까지 타고 다녔다.이미 100명 이상이 타는 큰 배들이 대한해협을 항해하고 있던 시대이었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왜인들이 신라에 오는 시기는 거의 봄철에 집중되고 있다.규슈나 대마도,이즈모 등 지역에서 남풍계열의 바람을 타면 자연스럽게 신라지역에 도착하기 때문이다.일본 선사시대 조오몽(繩文)토기들이 부산의 동삼동이나 울산 서생포에서 발견되는 것은 해류와 함께 이 남풍을 이용한 때문이다. 반대로 신라배들은 가을에서 초겨울까지 북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여 남진하였다.그러니 대한해협을 건너다니는 신라배나 왜의 배는 돛을 단 상당한수준의 범선이었다.그리고 초기부터 해군이 있었다.석탈해때는 가야와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싸웠다.조분왕(助賁王,233년)때는 해상에서 왜와 화공전까지 벌였으며,유례왕(儒禮王,289년)때는 왜국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병선을 수리했다. 그러면 그 당시 한일항로는 어떠 했을까? 신라의 위치나 동해남부와 일본열도 사이의 해양조건을 고려한다면 신라인들은 주로 경주 외항인 감포,눌지왕때 박제상이 출발한 울산(율포),아달라왕때 연오랑과 세오녀가 출발한 포항의 영일만 지역 등 항구에서 일본열도로 의욕에 찬 항해를 시작하였다.초기에는 좀더 안전하게 대마도를 경유하여 규슈 북부지역에 도착했지만,해양능력이 점차 향상되면서 혼슈 남단 시마네현,돗토리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반대로 왜인들은 대마도 규슈북부,혼슈 남부 등 여러지역에서 목적에 따라출발하였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이들을 왜인,왜국,왜병,적 등으로 구분해부른 것이다.해류와 조류 등 바람을 이용해서 왜인들이 가장 쉽게 도착한 곳이 신라해변이다.신라와 왜 사이에 벌어진 어쩔수 없는 갈등관계는 대한해협의 섭리였다.때문에 신라는 처음부터 수군을 키우며 해양능력을 강화시켜야만 했다.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
  • 金대통령, 스코필드박사 후손접견 안팎

    [오타와 양승현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캐나다 방문 일정 중 특이한 것은 6일 새벽(한국시간) 고(故) 프랜시스 스코필드박사(사진) 후손들의접견이었다.에어캐나다 스튜어디스 및 간호사로 일하다 은퇴한 캐서린 스코필드(60·며느리),스위스항공사에 근무했던 리사 크로포드(39·손녀),조경회사를 운영하는 딘 스코필드(37·손자)씨 등 3명이었다. 캐나다인(1889년 영국 출생)으로 온타리오 수의학대학 박사인 스코필드박사는 한국인이 아니면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인물이다.1916∼20년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 3·1독립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919년 봄부터1년동안 형을 산 뒤 캐나다로 추방됐다.그러나 그는 6·25전쟁 직후인 55년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70년까지 세브란스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아원을설립,우리나라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이들과 만나 과거 스코필드박사와 맺은 각별한 인연을 소개했다.스코필드박사가 서울의 한 초라한 아파트에서 병고의 몸으로 몹시 고생할때 그를 직접 찾아뵌 일이있다고 했다.“아파트로 찾아가,아픈 몸을 이끌고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우리의 민주화투쟁을 지원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서로 다짐도 했었다”면서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털어놓았다.또 스코필드박사는 금세기초 한국국민에게 민족의 자결과 민주주의를 가르쳐 준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스코필드박사는 70년 4월12일 우리나라에서 별세했다.정부는 그에게 60년과 68년 각각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金대통령 중견공무원 2,400명대상 특강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28일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중앙부처 서울지역 과장급 등 중하위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특강한 것은 공직사회의 기강확립,특히 도덕성 회복을 위한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공무원들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것으로 볼 수 있다.이들 공무원들이 일선 행정현장의 ‘실무 중추’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 참석한 2,400여명의 중하위직 공무원들은 대국민 ‘1차 접점(接點)’으로 정부가 추진중인 공직자 10대 준수사항의 직접 당사자다.이들의 폭넓은지지 없이는 준수사항의 정착이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중하위직 공무원들의 불만을 다독거리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김 대통령이 강연 30분,대화 1시간으로 진행된 행사에서 공무원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주체임을역설하면서 거듭 ‘개혁의 동반자’가 되자고 당부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김 대통령은 이를 4가지 방향으로 요약,정리했다.먼저 공무원의 명예는 국가를 지탱하는 재산이라는 것이다.김 대통령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깨끗한 공직사회를만들어야 할 것”이라면서 ‘도덕 재무장’을 주문했다.이어 지난 1년반 동안 공무원들의 희생과 고통 감내에 위로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공무원들이 실업과 봉급 삭감 등을 감내하면서 협력한 결과 경제적 국난 타개에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고 치하한 데서도 이같은 마음을 읽게 했다. 나아가 공직자들의 처우 개선을 약속했다.“봉급을 중견기업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점진적으로 처우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며“긴급한 생계대책을 위한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끝으로 공무원을 개혁의 파트너로 규정,서로 힘을 합쳐 개혁을 완수해 나가자고 호소했다.즉 한국을 21세기 일류국가로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자랑스러운 조상이 되자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대화에서는 행정기관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데 주력했다.이는특히 최근 공직자 10대 준수사항 발표 이후 중하위직 공무원 사이에 불만의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특히 질문을 통해‘라스포사 옷사건’ ‘거액의 격려금’ 등으로 IMF 고통속에 비난까지 받고 있는 공직사회를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사기진작에 애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날 특강은 공직자에 대한 김 대통령의 애정과 사기진작,그리고 염려를 전달한 자리였다. 양승현기자 yangbak@
  • ‘백범 전집’ 告由祭·추모음악회도 열려

    백범 김구(金九)선생 서거 50주기 추모식이 지난 26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효창원 선생 묘소에서 거행됐다.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이수성(李壽成) 회장은 식사에서 “선생의 서거 50주기를 맞은 오늘,비록 몸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혼과 가르침은 민족의 등불로 여전히 우리의 갈 길을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최규학(崔圭鶴) 보훈처장은 추모사를 통해 “21세기를 민족통일과 번영의새시대로 이끄는 것이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 선생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도 “한평생 ‘완전 자주독립 통일’을 위해 헌신하신 백범 선생은 우리 민족의 사업이 사랑과 평화를 통해 스스로도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살도록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다”고 추모했다.고은(高銀) 시인이 ‘오늘은 나라의 아버지를 가슴에 품은 날입니다’로 시작하는 추모시를 숙연한 분위기 속에 낭송하자 추모객들은 잠시 흐느끼기도 했다. 이어 서거 50주기에 맞춰 대한매일신보사가 12권으로 펴낸 ‘백범 김구전집’을 김삼웅(金三雄) 대한매일 주필과 윤병석(尹炳奭) 백범 김구전집 편찬위원장(인하대 명예교수)이 선생의 영전에 바치는 고유제(告由祭)가 열렸다. 이만열(李萬烈) 숙명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추도식에는 백범 선생의 둘째아들인 김신(金信) 전 교통부장관 등 후손을 비롯,한승헌(韓勝憲) 감사원장,이원범(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장,김근태(金槿泰) 국민회의 의원 등각계인사 500여명이 참석했다. 이에 앞서 민족정기수호국민연합 회원 30여명은 오전 9시부터 효창원 정문에서 선생을 기리는 집회를 가졌다.오후 7시30분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추모음악회가 열려 200명으로 구성된 연합시립합창단의 합창과 서울대 이애주(李愛珠) 교수의 춤 등 예술인들의 추모 공연이 이어졌다. 한편 북한도 이날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백범 김구선생 회고모임’을 갖고 “일찍부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염원한 양심적인 민족주의 인사였던 선생을 추모했다”고 평양방송이 27일 보도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白凡50주기 추도식/이모저모

    - 백범장례 民族葬·國葬 논란끝 國民葬으로 백범 김구선생 서거50주기를 맞아 49년 7월 5일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관련 ‘회의록 철’이 처음 공개됐다.회의록 철에는 백범이 서거한 당일부터 시작된 장례식 준비과정의 전모와 최종 결산사항까지 상세히 나와 있다. 백범기념사업회는 25일 고(故)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가 작성한 ‘회의록 철’을 공개했다.이 자료는 그동안 백범 차남 김신(金信)씨가 보관해오다가 이번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장례위원회 구성 논의에 앞서 장례명칭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백범진영에서는 ‘민족장’을 주장한 반면,정부에서는 ‘국장(國葬)’을 들고 나왔다.이에 대해 조완구(趙琬九)선생은 “자기들이 (백범을) 죽여놓고서 무슨 국장이냐”며 당국의 처사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결국 김규식(金奎植)박사의중재로 ‘국장’과 ‘민족장’을 합친,‘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27일 국민장위원회(위원장 吳世昌)와 그 산하에 상임위원회(위원장 趙素昻)가 구성되면서 구체적인 장례절차와 일정이 논의되었다.장지와관련,위원회는 백범이 생전에 효창공원 3열사묘 서편 자락에 묻히겠다는 유언을 한 사실을 들어 이곳으로 결정하였다.장례는 10일장으로 7월5일 거행,영결식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정하고 치산(治山)은 조선 전래식으로 결정하였다.장례당일 불릴 조가(弔歌)는 노산 이은상(李殷相)씨에게 작사를,작곡은 최종 김성태(金聖泰)씨에게 맡기기로 했다.예산은 900만원을 책정하였고 이 가운데 3분의 2 이상을 정부가 부담토록 결정하였는데 6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7월 5일 오전 10시 경교장을 출발한 장의행렬은 종로∼서울운동장(영결식)∼남대문을 거쳐 오후 8시 장지인 효창공원에 도착하였다.이날 당국은 장의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변에 경찰과 군대를 동원,배치하였다.김신씨는 “장례당일 당국은 경찰관들에게 정부수립후 처음으로 45구경 권총과 실탄을 지급한 것으로 안다”며 “비상사태를 선포만 안했지 사실상 비상사태와 같은 분위기였다”고 증언했다.장례당일 밤 늦게까지 계속된 치산작업에는 인부 700명,봉사인원 2700여명이 참여하였다. 정운현기자- 백범 김구전집…협찬인사들의 감회 대한매일신보사가 24일 펴낸 ‘백범(白凡) 김구(金九)전집’은 여러 후원가들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됐다.“어떤 후원보다도 의미가 커 가슴 뿌듯했다”는 협찬자들의 감회를 소개한다. 한국전력공사 최수병(崔洙秉)사장은 “백범 서거 50주기를 맞아 선생의 독립애국사상과 통일의지를 되새기면서 민족통일을 위해 우리의 좌표를 설정하기 위해 전집 출간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이를 계기로 선생의 민족사랑과 애국정신을 새겨 민족화합과 통일시대를 밝히는 기업으로 거듭 나겠다”고다짐했다. ㈜부영 이중근(李重根)회장은 “선생이 서거했을 때 초등학교 학생이었다”면서 “온 국민이 비탄에 빠졌던 광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며 50년전을 떠올렸다.이회장은 “때마침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선생의 전집을 발간한다는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힘을 보탰다”면서 “앞으로도 백범선생 추모사업에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코리아스테파 신수연(申受娟)대표이사는 “선생이돌아가신지 50주년이됐는데도 전집 하나 없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평소에 가장 존경하는 선생의 전집 출간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하다”고 말했다.이어 “앞으로 백범 추모기념관 건립과 백범상 제정 등선생 추모관련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밀리오레 유종환(柳宗煥)대표이사는 “평소에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의 염원을 성취하고자 힘썼던 백범선생을 존경해왔다”면서 “민족정기의 보전과발전을 위해 전집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힘을 보탰다”고 설명했다. 한국담배인삼공사 김재홍(金在烘)사장은 “백범선생은 조국독립에 기여한공헌 외에도 올곧은 행동과 변함없는 지조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면서 “백범전집 출간을 통해 선생의 높은 뜻과 행동이 국민 모두에게 전파되도록 하자는 염원에서 정성을 보탰다”고 말했다. 현죽재단 서원석(徐元錫)이사장은 “민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선생의민족애와 정기를 후손들이 배워서 선생의 뜻을 자손만대에 영원히 전하자는뜻에서 전집 발간 후원에 동참했다”면서 “어느 때보다 가슴뿌듯한 후원이었다”고 말했다. 이종락기자 - 白凡50주기 추도식 엄수 26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효창원에서 ‘백범 김구선생 제50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李壽成)가 주관하는 이날 행사는 각계인사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규학(崔圭鶴)국가보훈처장과 윤경빈(尹慶彬)광복회장의 추모사와 고은(高銀)시인의 추모시 헌정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김구선생 서거 50주기에 맞춰 대한매일신보사가 12권으로 펴낸 ‘백범 김구전집’을 선생의 영전에 바치는 고유제(告由祭)가 치러진다. 이날 저녁 7시30분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옛 서대문형무소) 야외무대에서는 KBS 열린음악회 주최로 ‘백범 서거 50년 나라사랑 음악회’가 열린다.서대문형무소는 선생이 안중근(安重根)의사의 동생인 ‘안명근 사건’에 연루돼 1911년부터 5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일제의 칼날에스러져간 곳이다. 음악회에는 명창 안숙선,바리톤 최현수,가수 이미자·조영남·안치환씨와성남·안산시립연합합창단 등이 출연,‘아리랑’등을 부르며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린다.서울대 이애주교수 등 7명의 춤꾼들은 백범선생이 간절히바라던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큰북연주’판을 벌인다. 음악회는 출연자와 관객이 안익태선생이 작곡한 ‘코리아 환타지’ 가운데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한몸을 바친 선생의 삶을 되새기는 가운데 막을 내린다. 전영우기자 - 白凡의 삶 만화로 예찬사 일대기 출간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선생의 불꽃같은 애국의 삶을 만화로그린 ‘만화로 보는 백범 김구’(박찬민 글·그림)가 출간됐다. 이 만화는 도서출판 예찬사가 딱딱한 위인전을 싫어하는 어린이들이 보다쉽고 재미 있게 위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시작한 ‘한국을 빛낸 믿음의 시리즈’의 첫번째 책으로 ‘만화로 보는 고당 조만식’과 함께 나왔다. 이 책에는 김구 선생의 어릴적 모습과 청년시절의 동학 입교와 탈퇴,일본군장교 응징과 이에 따른 사형 언도,탈옥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해방후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등이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어릴때 평범한 개구쟁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 어린이들에게 친밀감을 주고 있으며,청년기에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고뇌하는 모습 등은 아이들에게 점점 희박해지는 나라사랑에 대한 개념을 분명하게 해준다. 예찬사 관계자는 “이번 시리즈는 우리 역사의 빛과 소금이었던 위인들을어린이들에게 보다 쉽게 알리기 위해 기획했다”며 “특히 민족의 스승으로추앙받는 백범 김구 선생편을 선생 서거 50주기를 맞아 첫번째로 내놓게 돼의미를 더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 6·25참전이 굴레가 되어 ‘검은 戰士들’ 박해 반세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아시나요’. 6·25가 발발한 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에서야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돕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에티오피아 참전군인은 6,037명.이 가운데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다.생존자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남은 사람들은 아디스아바바 교외에 모여 살고 있다.‘코리안 빌리지’로 불리는 이곳에는 2,000여명의 참전용사와 가족,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참전군인들은 에티오피아가 74년 공산화되는 바람에 ‘남한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았다.91년 다시 민주화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직업도 갖지 못하고 5평 남짓한 집에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온 이들에게 남은것은 가난과 질병,전쟁후유증 뿐이었다.지금도 하루평균 10명 이상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들을 돕는 운동의 주역은 국제봉사단체 ‘로터리클럽’ 회원으로 무역업에 종사하던 신광철(申光澈·47)씨.96년 우연히 방송을 통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신씨는 로터리클럽 회원20여명과 함께에티오피아로 건너가 참전용사들의 힘든 삶을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왔다.신씨는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후원회’를 결성,돕기에나섰으며 400여명이 후원회원이 됐다.신씨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후원회는 그동안 생계가 어려운 500가구에 20여차례에 걸쳐 생계비 10만여달러와 의약품,식량을 지원했다.지난해 5월에는 20만달러를 들여 한해에 2만대를 생산하는 자전거 조립공장도 현지에 세워줬다. 후원회는 앞으로 현지에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회관’을 건립할 계획이다.건평 200평으로 2001년 4월에 완공할 예정이지만 최근 회원수와 후원금이 크게 줄어 걱정이다. 신씨는 “혜택도 받지 못한채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는 참전용사들을 보고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후원전화 (02)363-0028. 한편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게타흔이타요(67)씨는 “한국땅을 다시 밟으니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목이 멘다”고소감을 밝혔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의 초청으로 지난 22일 방한한 이타요씨는 51년 1차파병때 대원 1,300여명과 함께 들어와 2년3개월동안 육군 보병으로 북한군들과 싸웠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여성 생리주기 따라 선호 남성 달라진다

    ?始굔阪ㅊ셕섯助? 외신 종합?施㈋봉? 생리 주기에 따라 매력적으로 느끼는남성의 얼굴형이 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국 세인트 앤드루스대학 심리학 교수인 데이비드 페레트 박사와 일본연구팀은 과학전문지 네이처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여성은 임신 준비가 된 상태인 배란기에는 근육형의 강인한 외모를 지닌 남자를 원하지만 임신가능성이 없는 때에는 여성적인 부드러운 면모의 남성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스코틀랜드와 일본의 21세 이상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페레트 박사는 이는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본능으로 임신기에는 강건한 면역체계를 지난 후손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 화순군, 김삿갓 詩碑 세운다

    “둥둥 뜨는 내 삿갓은 빈 거룻배와 같은 걸 한번 쓰고 나선지 사십평생이라…(중략)…세상 인간 의관이란 다 외양치레니 천지에 가득찬 비바람 속에라도 삿갓쓴 내 신세만이 근심이 없구려” 삿갓 쓰고 뜬구름과 함께 유랑하며 풍월을 읊은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金炳淵)의 시비(詩碑)가 전남 화순군에 건립된다.군은 “화순 동복면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감한 김삿갓의 풍류정신을 기리기 위해 오는 9월쯤 예산 9,000만원을 들여 시비를 세우기로 했다”고 밝혔다. 군이 김삿갓의 시비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것은 김삿갓이 이 지역의 빼어난산수와 동복면에 있는 적벽(赤壁)의 경관에 매혹돼 세번이나 이곳을 찾았고57세를 일기로 적벽에서 별세하는 등 이 지역과 뜻깊은 인연이 있는 데 따른 것이다. 군은 시비 건립장소로 수몰지역인 풍광이 뛰어난 이서면 동복수원지내 부지 등을 검토하고 있다.군은 최근 향토사가와 전통시인 등 11명으로 구성된 ‘김삿갓 시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군 관계자는 “시비가 후손들의 학습장이 되고 정서함양에 기여할 것으로기대된다”며 “동복호와 화순온천,화가 오지호씨 기념관 등과 연계해 관광자원화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金成勳 농림부장관

    일제의 수탈정책과 6·25 전란을 거치면서 벌거숭이가 됐던 우리의 산이 푸름이 가득한 숲으로 변했다.67년부터 전개된 치산녹화사업을 통해 100억 그루가 넘는 나무를 온 국민이 심고 가꾼 결과다.이 때문에 국제식량농업기구(FAO)는 한 세대 안에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바꾼 가장 성공적인 나라로 한국을 지목한다. 그럼에도 불구,“숲은 이루어졌지만 좋은 나무가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산림녹화를 위해 속성수들을 많이 심었고,30년생 이하의 나무들이 우리 산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좋은 나무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현실적으로 이른 감이 있다.선진국의 아름드리 수풀들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100년 넘게 애써 가꾸고 키운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해부터 시행된 공공근로사업에 ‘생명의 숲 가꾸기’가 포함된 것은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에서 보자면 참으로 천만다행이다.그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넘는 실직자를 고용해 10만㏊의 산림을 가꾸었다.또 간벌재 등 산물을 이용해 톱밥과 조사료를생산,분뇨 처리문제로 고통받고 있던축산농가에게 퇴비화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었다. 숲은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이 가득한 생명자원이다.홍수와 가뭄 방지,건강증진을 위한 쾌적한 쉼터 제공 등 숲이 베푸는 공익적 가치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크다.숲은 천연의 녹색댐이다.숲의 물 저장 기능은 소양강댐의 10배가 넘는다. 숲은 그 국민들의 정서함양과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인도의 싯다르타는 사바(娑婆)에서 이루지 못한 깨달음을 6년간 숲속의 생활을 거치면서 터득하였다.중국 송나라 학자 정이천(程伊川)도 용문산에 들어가 수양하면서 성리학을 일으켰고,주자(朱子)는 무이산에 파묻혀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우리나라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산속에 도산서원을 세워 학문을 연구하다 생각이 벽에 부딪히면 청량산에 들어가 학리를 깨치곤했다고 전해진다.시인 J 킬머는 “나무를 심는 것은 희망을 심는 것.다음 세대를 위해서 나무를 심자”고 노래하기도 했다. 산림을 가꾸는 것은 미래를 가꾸는 것이다.문명사회가 발전할수록 숲과 산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우리 모두 복합자원인 숲을 잘 가꾸어 후손에게풍요로운 환경과 희망찬 미래를 물려주자.푸른 산에 눈을 돌려 숲에서 사는법을 개발하자.산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4)남정현의 분지③

    작가 남정현이 구속될 무렵,한일협정 반대 문학인 성명 말고도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크리스찬 아카데미가 주최한 ‘문학과 현실’대화모임이 위커힐에서 1965년 7월 8∼9일 양일간 개최되었다.홍사중 사회로 진행된 이 모임은 서정주·최인훈이 발제를 맡았는데,참석자는 김동리·서정주를 비롯한 세칭 ‘순수문학’ 주창 원로에다 이호철·김승옥 등 중견과신진이 포함되어 있었다.이 모임은 60년대 순수·참여 논쟁의 시발로 알고있는 세계문화자유회의 세미나(1967.10)에서의 김붕구의 도전적인 발언보다2년이나 앞선 논쟁의 도화선이었다.“‘분지’를 유죄로 몰고간 박정권은 그 후 알게 모르게 어용문인들을 내세워 각종 전달매체를 동원하여 세칭 참여문학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었다”고 본 남정현의 판단이적중해가던 서글픈 한 시대의 풍경이었다. 작가는 검찰 송치 열흘만인 7월 24일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되나 그게 사건의 종결은 아니었다.그는 1년여 동안 간헐적으로 검찰의 심문을 받아오다가 1966년 7월23일 불구속기소(재판장 박두환 판사)되어 반공법으로 법정에 서게 된 첫 작가가 되었다.공소장에 따르면 ‘분지’는 반미 계급의식의 고취 및 반정부 선동으로 “북괴의 대남 적화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사기관부터 검찰에 이르는 조사과정에서 작가는 시종 주인공 홍만수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공소장에는 아예 그가 비취여사를 겁탈한 것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왜곡하고 있다.홍만수가 비취여사를 어떻게 다뤘느냐는 문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그는 “정말 그네의 하반신을 한번 관찰함으로써 저의 의문을 풀고 싶었을 뿐,그외의 다른 아무런 흉계도 흑막도없었다”고 소설에는 묘사되어 있다.더 자세히 살펴보면 홍만수가 그녀에게“옷을 좀 잠깐 벗어 주셔야 하겠습니다”며 그 이유를 “밤마다 곤욕을 당하는 분이의 딱한 형편을 밝히고” “단 하나인 누이동생의 건강을 보살피자면 부득불 나는 여사가 지닌 국부의 그 비밀스러운 구조를 확인함으로써 그됨됨이를 분이에게 알려주어,분이가 자신의 육체적인 결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각케하여 그 시정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오빠로서의 입장을 확실히”했다.그러자 비취여사는 “갓뎀!”이라며 홍만길의 뺨을 후려치길래 만길은 여사의 목을 눌러 배 위로 덮치자 그녀는 제발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다.홍길동의 후손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만길은 여사의생리구조만 파악하는데 그쳤으나,펜타곤은 그를 “악마가 토해낸 오물이며동시에 인간 최대의 적으로 판정하고 전세계의 이목을 향미산으로 집중”시켜 공격하러 하자 당혹스런 그는 출신구 민의원을 찾아가 하소연하고자 했으나,이미 그는 “스피드상사의 상관을 찾아가 열번이나 절을 하고 내 출신구의 유권자 중에 그렇듯이 해괴한 악의 종자가 인간의 탈을 쓰고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본인의 치욕이며 동시에 미국의 명예에 대한 중대한 위협임을 누누이 강조”하며,“사전에 적발하여 처단하지 못한 사직당국의 무능과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할 것임을 거듭 약속”한 터였다. 결국 홍만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향미산에서 미군의 공격을 당해야 하는억울한 처지가 된 것이다.바로 주인공의 결백성이 이 소설의 요지이기 때문에 작가는 심문을 당하면서도 이 점을 강조했지만 홍만수가 비취여사를 겁탈한 것으로 소설을 왜곡하여 그렸기에 미군이 그를 죽이려 했다고 쓰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한 왜곡은 비단 수사기관에서만 행해진 게 아니다.그 동안 이작품에 대하여 언급한 많은 평론가들의 글들도 수사기관의 주장처럼 홍만수가 비취여사를 겁탈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작가 남정현은 아쉬워하고 있다. “어떻게 그 많은 평론가들 중 작가가 쓴 소설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작품을 분석 평가해 주려는 양식을 지닌 분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다”며정확·치밀성이 없는 평단 풍토를 작가는 비꼬았다.공소장처럼 홍만수가 비취여사를 겁탈했기에 펜타곤이 분노하여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공격하려 했다면 결국 한국의 비평계는 ‘분지’를 유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꼴이 되지 않는가.그것도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홍만수를 ‘겁탈범’으로 보았다면 너무 오독이 심하지 않는가. 홍만수가 결백한데도 억울하게 공격당했다는 게 바로 ‘분지’가 말하고자하는 민족적 자존의 본질이며 미국의 오만성을 상징해주는 대목이다.E.M.포스터의 ‘인도에의 길’을 연상하면 이 대목은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약소민족이란 그 자체가 곧 죄인 것이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깊이읽기] 문학의 죽음

    [앨빈 커넌지음·최인자 번역] 최근 평론가들이 ‘작가의 죽음’등의 표현을 써가며 ‘문학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다’,‘문학이 변하고 있다’는 공론들을 해왔다.그러나 앨빈 커넌처럼 무자비하며 단정적인 어조로 ‘문학의 죽음’(문학동네 발간)을 선고한사람은 없었다. 그는 방대한 자료들을 인용해가면서 작가의 행적,출판업계의 현황과 사건들을 통하여 문학계에 일어난 비리와 모순들을 폭로하고 문학이 이처럼 쇠퇴한 이유로 문학가들의 실수와 사회의 변모를 열거한다.그에 의하면 페미니즘과 마르크시즘 비평가들은 사회에 뿌리박고 자란 문학작품들을 놓고 단지 자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남근중심주의니 부르주아 계층의 자기합리화니 하며 재단한다는 것이다.해체주의자 또한 전문 용어를 구사해가며 그럴싸하게꾸며 쇠퇴해 가는 문학을 대학이란 전문체제 속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글을 읽어갈수록 나의 의문은 깊어만 갔다.문학 작품은 인쇄매체 속에 담겨 나오기 때문에 작가가 쓴 글이 순수하게 독자에게 전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그 중간에 출판사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있고 제도가 있다.당연히 그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는 굴절되고 왜곡된다.그리고 그 굴절과 왜곡은하나의 훌륭한 의미로 독자에게 수용된다.또 저작권법 때문에 그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후손들이 벼락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작가의 노고를 몽땅 사회에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또 실제 작가와 책 속에 함축된 작가는 엄연히 분리되어야 한다. 커넌이 비난하는 것처럼 폴 드 만이 여자를 버리고 아이를 외면했다 하더라도 그의 문학 이론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커넌은 왜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작가와 평론가들의 위선과 표절을 캐는 것일까? 문학은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의 장(場)으로 작용할 수 있다.‘무정’을 읽고 1910년대 학생들이 교육으로 국가를 발전시킬 결심을 했다면 당시 기생들은 기생 영채의 불운을 자기일 처럼 슬퍼했다.문학은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감정과 세계관을 드러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공유물이다.페미니즘 비평가가 염상섭의 ‘삼대’에서 가부장의권위에 희생되는 여성들의 모습을 끄집어내며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며 마르크시즘 비평가가 같은 소설을 읽고 부르주아 지식인의 나약함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이 모든 것중 어떤 것도 문학의 나약함을 설명해줄 수 없다. 커넌의 말대로 문학은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이야기는영상매체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영화와 TV 속으로 스며들었고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둥지를 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변화를 ‘문학은이제 수많은 의사소통의 양식들 중에서 단지 글을 통한 의사소통을 위한 하나의 테크닉일 뿐’이라며 비장하게 설명하고 있다.커넌이야말로 그동안 문학의 정전성(正典性)을 믿었던 문학 연구가였는지 모른다.자기가 사랑하던것에 대한 배반감이 이리도 사무친 것일 줄이야.그의 분노와 고뇌에 의해 이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5)-광개토대왕의 水軍상륙작전

    ‘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取五十八城村七百…’ 광개토대왕이 즉위 6년 되던 병신년에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토벌한 다음 58개 성과 700촌을 얻었다는 내용의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이다. 삼국사기가 실수(?)로 빠뜨린 대왕의 수군작전을 동양에서 가장 큰 금석문이 새겨놓았다.이 비(碑)의 주인공은 우리 역사상 가장 넓게 영토를 확장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세계국가적인 성격이 강했던 시대의 대왕,왕중의왕인 태왕,즉 광개토대왕이었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을 군사전략에 능하고 영토확장에만 힘쓴 정복군주 정도로 간단히 이해하고 있다.그러나 4∼5세기의 동아시아와 고구려는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시대였고,그 힘의 중핵에서 자리잡고 있었다.4세기 후반 중국지역은 남북분단과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중심으로 북방종족들과 화전 양면의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특히 해양을 활용,군사외교를 펼쳤다.이때 백제는 근초고왕이 황해도지역으로 북진하였다.경기만을 장악하고 황해중부 해상권을 획득해 일본열도와한반도 중부이남,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하고자하였다.그리고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정면 충돌을 하였고,결과는 고구려의 좌절로 일단락 되었다. 이같은 시기에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다.18세에 즉위한 청년군주인 광개토대왕은 첫해부터 왕성한 정복활동을 펼쳤다.북방종족들과는 화전 양면책을구사하였다.그러나 숙군성,요동성을 공격하고,406년에는 3,000리를 행군해온 연(燕)을 물리치면서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이는 요동반도와 서한만,대동강 하구를 잇는 황해동안의 해상로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대왕은 즉위초에 비려(碑麗)를 토벌하고,3개부락 6,700영(營)을 공파했으며,수많은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획득했다고 한다.요동과 동몽고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의 상류 초원지대까지 진출했다.410년에는동부여를 친정하여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도 영역으로 하였다.북부여의옛땅도 이때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런데 비문에는 백제와 관계 등 주로 대왕의 남진정책에 비중을 둔 듯하다.그리고 해양활동이나 수군작전이 여러번 기록되고 있다.대왕은 즉위 2년에4만의 군사로 백제의 10현을 함락하고,10월에는 최전방기지이자 수군함대사령부가 있음직한 관미성(關彌城:강화도 북부)을 함락시켰다.그 후 6년(396)대규모 수군을 투입해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탈취했다.기병과 수군을 활용한 선제공격 및 협공의 수륙양면작전이다.관미성 외에도 당시 비성(沸城:김포) 아단성(阿旦城:아차산) 미추성(彌鄒城:인천) 모로성(牟盧城:용인)등이점령된 것으로 보아 육군외에 수군은 3개방향으로 상륙했던 것 같다. 첫째는,대동강유역에서 출발,예성강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두번째는,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그리고 세번째는 남양만으로상륙하여 수원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치는 것이다. 이런 전쟁양상은 경기만 쟁탈전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경기만은 해상교통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며,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광개토대왕은 한성을 공멸하면서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여 백제의 수군활동을 마비시키고,황해중부연안의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해양봉쇄를 통한 차단전략을 꾀하자 외교적으로 고립된 백제는 왜(倭)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비문에는 영락(永樂)10년 경자년(400년) 대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백제 가야 왜의 군대를 물리치고 신라를구원했다고 한다. 이는 신라를 복속시키고, 해양을 고리로 부상하는 백제와가야, 왜의 외교질서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대왕은 이어 가야 영역까지 침범하였다.함안 말산리,고령 지산동,동래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가야지역은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출구이자 교섭 창구였다.고구려가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읽을수 있다.대왕 14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황해도지역인 대방계를 침입했으나 대왕의 친정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궤멸시켰다. 이러한 상황과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는 이미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대왕 18년(실성왕 7년),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려다 중지하였다.이같은 사실은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 영내에 주둔해 있을가능성으로 보아 공조체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렇듯 광개토대왕은 전통적 육지질서를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질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아지중해 내부의 각 국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중핵)을 구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황해 해상권를 확보함으로써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북부,황해중부 이북의 해양에 걸쳐 있는 동아지중해의 중핵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1,600년 가까이 만주벌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글자 하나하나는 21세기를맞으면서 우왕좌왕하는 후손들에게 해양력의 강화와 국제질서 재편전략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마을이름 바로잡은 토박이 집념

    “우리 마을 이름은 ‘신투리’가 아니고 ‘신트리’가 맞습니다” 무심결에 잘못 쓰이던 동네 명칭이 한 구의원의 관심과 노력으로 바로잡혔다. 주인공은 양천구의회 김종화(金鍾和·47·신정4동)의원.김의원은 최근 신정3동 700 일대 대규모 아파트 건설현장을 지나치다 우연히 건물 외벽에 ‘신투리’라고 씌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곳 토박이인 김의원은 잘못된 명칭임을 직감하고 즉시 문헌을 뒤지는 등 사실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김의원의 확신은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하는 ‘동명연혁고’(洞名沿革考)에서 확인됐다. 이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은 600여년전 ‘신기’(新機)라 불리던 곳.당시새로 마을을 조성하면서 ‘새로운 틀(터)’이라는 의미로 이 명칭을 썼다가이후 ‘틀’자와 마을을 뜻하는 ‘리’(里)자가 합쳐지면서 ‘ㄹ’자가 떨어져나가 ‘트리’가 됐으나,후대에 ‘투리’로 잘못 발음되면서 ‘신투리’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것. 김의원은 “등기과정에서 잘못된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면 후손들이 본뜻을찾을 수 있는 근거를잃게 된다”면서 “마을의 올바른 이름을 찾는 것도 지방자치의 참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순기자 fidelis@
  • [이어령의 새 천년읽기] 타임 캡슐과 埋香

    변화하는 시대,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대다.변해야만이 세계화 지구화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으며 나라의 운명도 여기에 좌우된다.본지가 우리 시대의 지성이자 문명비평가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李御寧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미래를 내다보는 ‘이어령의 새천년읽기’를 연재하는 것도 이같은 여망을 담아내기 위해서다.이교수의 에세이는 미래를 향해 깊이와 재미를 함께하는 연재가 될 것이다. 타임 캡슐을 묻는다.지방자치단체에서도 기업이나 사회단체에서도 땅을 파고 타임 캡슐을 묻자고들 한다.타임 캡슐은 이제 새 천년 맞이 행사의 감초가 되어 버렸다.하지만 천년전의 우리 조상들처럼 후세를 위해 향목(香木)을 묻고 매향비(埋香碑)를 세우자는 사람은 드물다.대체 타임캡슐은 무엇이며매향비는 또 무엇인가.바로 이것이 어쩌면 새 천년의 의미를 탐색하는 우리의 중요한 화두가 될는지 모른다. 타임 캡슐을 맨 처음 땅에 묻은 것은 미국이었다.1939년 뉴욕 박람회 때 웨스팅하우스사는 어뢰모양으로 디자인된 길이 7.5피트 직경 8인치 가량의 캡슐 하나를 땅속에 묻었다. 그 안에는 미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칫솔 카멜담배 인형과 같은 35종의 일용품,음악,예술을 비롯한 2만3천 페이지 분의 문화 정보를 담은 마이크로필름이 들어 있었다.그리고 그 한구석에는 미래의 인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도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천년이란 상징적 의미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먼 미래의 시간이다.하지만 미국인들이 생각해 낸 타임 캡술은 천년이 아니라 5000년 뒤에 개봉하여 실제로 사용 가능하도록 설계된 문화용품이며 그 기록이었던 것이다.타임 캡슐을 묻은지하실은 내열성 유리인 파이렉스로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불활성 질소를 채워 내용물들이 변질되지 않도록 과학적 처리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임캡슐을 묻은 사실이나 그 자리를 후세사람이 알아 낼 수 있도록 ‘타임 캡슐에 관한 기록'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세계 곳곳의 도서관과박물관에 뿌리기도 했다. 그들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타임 캡슐을 땅에 묻었는가.대체 그들이생각한 5천년 뒤의 세계는어떤 것이었는가.뜻밖에도 그 해답은 우리를 매우 당혹하게 하는 것이다.타임 캡슐의 착상은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H.G웰즈의 미래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언젠가는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전제 밑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욕 박람회의 과학 감독이었던 제럴드 웬즈는 “5천년 뒤 지구 문명이 붕괴된다 할지라도 텍스트로서의 캡슐에 의해 그것을 새롭게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며 실제로 그 타임 캡슐 안에는 미개인과 다름없는 시람들을 위해서 각종 도구나 기계를 만드는 자세한 설명서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폼페이의 유적에서 보듯이 아무리 화려했던 문명이라 할지라도 5천년이라는 긴 세월은 그것을 흔적 없는 폐허로 만든다.위대한 이집트도 로마제국도 모두 그렇게 사라졌다.전쟁이든 지진이든 화산폭발이나 혹은 화성인의 침입이든 위대한 아메리칸 드림과 문명 역시 언젠가는 그 앞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가위눌린 악몽 속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아메리칸 드림의 한 파편을 땅속에 묻어두려 한 것이 바로 그 웨스팅하우스의 타임 캡슐이라 할 수있다. ‘20세기를 만든 일용품'의 저자는 그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세계가 붕괴하더라도 타임 캡슐을 꺼내기만 하면 인간의 문명 문화는 언제든 부활될 수가있을 것이다.그 문명 문화는 미국 것이 되고 미국의 문명 문화는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다.즉 타임캡슐은 미국 문명 문화의 유전자로서 땅속에 묻혀진것이다.” 5천년 뒤의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땅에 묻은 타임 캡슐이 고작 오늘의 물질 문명,더 좁게는 미국 문화와 문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한 패권 경쟁의한 산물이었다면 요즘 아이들의 말대로 얼마나 ‘썰렁한' 이야기인가.그리고지금 미국을 비롯하여 새 천년맞이를 준비하고 있는 유럽 여러나라의 행사내용이 60년 전 뉴욕 세계 박람회 때의 타임 캡슐의 발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면 인류의 미래는 얼마나 어둡고 쓸쓸할 것인가.단지 ‘화성인 내습'이라는 가상 현실이 핵이나 환경호르몬과 같은 지구 붕괴의 이야기로 각색되고 그폭이 넓어졌을 뿐 여전히 서구 근대 문명이인류의 유일 절대의 보편적 문명이라는 신앙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쿨 브리태니카 (멋진 영국) 미국의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미래”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중국”-지금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밀레니엄 축제들의 구호를 보면 모두가 자신들의 문화 문명의 자랑스러운 DNA를 시간과 함께 냉동시켜 캡슐속에 밀폐하고 봉인을 찍어두는 타임캡슐의 경쟁을 방불케 한다. 이른바 월드 시스템이 된 오늘의 서구 근대의 백인 문명이 천년을 단위로인류의 문명을 생각할 때 과연 어떻게 변해야 하느냐 하는 물음보다는 오늘우리가 누리고 있는 서구 근대문명을 어떻게 천년 뒤까지 유지 지속시켜가는가 하는 것이 지금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밀레니엄 축제요 그 준비라고 할 것이다. 참으로 인류가 천년 5천년의 앞날을 생각하며 묻어야 할 것은 오늘의 서구문명을 역사의 종결로 생각하는 프란시스 후쿠야마같은 타임 캡슐의 욕망이다. 인류의 멸망과 지구의 붕괴를 가져올지 모를 서구 근대문명의 물질적 기능적 속세주의적 욕망일 것이다.더 추상적으로 말한다면 아메리칸 드림으로 요약되는 오늘 날의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산업주의적 기계관들을 땅에 묻고새 천년을 위한 문화문명의 창조를 향한 비전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냉전상황이 끝나고 세계시장이 이루어지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세계화라는 유행어가 2000년을 맞이하여 뉴 밀레니엄이라는 말로 바뀌어가고있는 것은 세계화 자체의 반성이며 글로벌리즘의 한 손 원리로만 가지고는결코 인류의 앞날은 없다는 새로운 의식의 출발점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글로벌리즘이 지구의 국경을 없애가는 공간의 확충이라고 한다면 밀레니어미즘은 그것과는 대응되는 시간축의 지속이라고 할 수 있다.2000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세계화라는 공간 의식속에 천년화라는 새로운 시간의식을 맞이하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국경을 뛰어 넘는 시간 죽이기의 세계화가 자국의 역사와 전통을 단절시키고 민족문화의 DNA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 번영과 그 문명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래의 희망이라는 IT(정보기술)에 뒤지면 우리는세계화에서 고립된다고말한다.경제든 정치든 모든 것이 세계와 링크(연결)되어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상황에서 우리는 절대로 고립해서는 안된다.그러나 개방의 논리속에서 민족의 시간축인 전통과 역사가 두절되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근대화를 100년동안 해서 서구화한 터키가 지금 어떠한가.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하여 근대화대열의 모범국이 되었던 일본이 지금 새천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94년만 해도 국가 경쟁지수가 3위이던일본이 13위로 급락하는 의미는 무엇인가.그것은 세계화의 개방을 게을리한것만큼 천년화라는 시간의 단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한국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임캡슐을 묻는 것이 어메리칸 드림이었다면 그것에 맞먹는 코리언 드림은 무엇인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천년전 한국인의 꿈은 땅속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의식(埋香儀式)으로 상징된다.고통과 가난속에서 천년 전 고려인들이 꿈꿔온 것은 천년 만년뒤 보살이 미래불로 성불하여 인류를구제하고모두가 행복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미륵신앙이었다.불교라는 종교 의식이라기보다 민중들의 생활속에서 우러나온 토착신앙과도 같은 의식이었던 것이다. 어디엔가 고난의 땅 - 이승과 저승이 마주치는 것처럼 갯물과 바닷물이 와닿는 해변가 그리고 왜구들이 끝없이 침범한 은밀한 섬에 매향을 하면 그 나무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쇠처럼 단단해지고 그 향내는 이 지상의 어떤 것보다도 그윽한 침향이 된다는 믿음이다.이렇게 한국인들은 현세의 지속이 아니라 천년 뒤에 올 새로운 생명의 가치와 그 부활의 문화를 위해서 매향비를세웠던 것이다.지금도 국토의 여러곳에서 매향비가 발굴되고 있는 까닭이 바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우리 조상들은 천년뒤에 올 후손들을 위해서 향기로운 생명의 향기를 창조해 내는 향나무를 묻었다.과학적인 장치가 아니라 바닷물과 지열과 흙의 자연적인 힘이 천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속에서 형성해 내는 나무의 변화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을 밀봉하여 정지된 천년 뒤에 개봉하는 문화가 아니다.붕괴한 뒤에 복고하기 위한 문화,이미 있는 문화가 아니라 우리가 한번도맛보지 못한 이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정토의 맑고 깨끗한 세상이다. 세계화(globalization)의 공간 확충에 천년화(millenniumization)의 시간적 지속이 있을 때 우리의 사회는 완벽한 평화를 이룬다. 새 천년의 새로운 한국은 세계화의 한 손 원리만 가지고는 안된다.거기에 한국의 전통과 민족의창조력을 잇는 천년화의 또 한 손이 요구된다.타임 캡슐만 묻는 새 천년 맞이의 발상에 향목을 묻는 매향비의 새로운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새천년의 꿈을 두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