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후손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영장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지영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할인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포기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358
  • [의열 독립투쟁] (16) 조명하 의사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죠(大正町)도서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대만주둔 일본군 검열차 육군특별검열사 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육군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爾宮邦彦)를 환영하기 위해서 동원된 인파들이었다. 바로 그 시각 한 청년이 군중을 헤치고 구니노미야가 탄 무개차를 향해 뛰어들었다.청년이 단도를 빼어들고 구니노미야를 겨누자 무개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으며,시종무관 오누마(大沼)는 몸으로 구니노미야를 비호하였다. 청년은 구니노미야를 향해 힘껏 단도를 던졌다.그러나 애석하게도 맹독이 묻은 단도는 구니노미야의 왼쪽 어깨를 스친 뒤 운전사의 등에 맞고 떨어졌다. 거사후 청년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그가 바로 조명하(趙明河)의사다.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27일사망하였다. 조 의사는 1905년 5월 황해도 송화군 태생으로 송화보통학교 졸업후 집안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친척이경영하고 있던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독학(獨學)으로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어 등을 공부하였다.5년여 동안 한약방에서 근무하면서 틈틈히 실력을 쌓은 조 의사는 1926년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군청 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당시 군청 서기는 상당한 실력을갖춘 엘리트로,경제적으로도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해 ‘6·10만세의거’,송학선(宋學先)의 ‘금호문(金虎門)의거’로 조선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몸으로 느낀 조 의사는 어렵게 합격한군청 서기직을 3개월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였다.조 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고 판단,국외에 나가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 의사는 아키카와 토요오(明河風雄)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낮에는 회사원·점원으로 일하였고 밤에는 오사카상공전문학교(大阪商工專門學校)를 다니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였다.일본식 이름 아키카와 토요오(明河風雄:명하풍웅)은 본명 ‘명하’를 일본식 성(姓)으로 바꾸고 ‘의로운 일로써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의미의 ‘풍웅’을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이는 조 의사의 독립투쟁 의지가 담긴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활동에 한계를 느낀 조 의사는 1927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키로 하고 이 해 11월경 기착지인 대만에 도착하였다.조 의사는 대만에서도 역시 일본인에 의해 자행되는 수탈과 행패를 눈으로 확인고는 당시 대만 총독 우에야마(上山)를 처단하고자 하였다.조 의사는 일본인 행세를하면서 타이중시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부귀원(富貴園)이란 찻집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단도를 구입,독극물을 발라 놓고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5월에 일본 천황의 장인이며,육군대장이던 구니노미야가대만주둔 일본군의 검열차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처단키로 결심하였다.구니노미야는 일본 육사·육군대학을 졸업한 이후 일본 육군에 투신,육군참사관을 거쳐 1928년 당시 육군대장으로 군(軍) 내의 실력자였다. 사전에 일정을 입수하여 검토하는 한편 거사현장을 직접 답사한 조 의사는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수많은 인파를 뚫고 돌진,그를 처단하였다.조 의사의 의거는 당시 조선과 똑같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일본의 식민지 차별정책에 대해서 울분에 차 있던 대만 군중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조 의사의 신원이 조선인으로 밝혀지자 조선총독 야마니시 한조(山梨半造)는 대경실색하여 대만총독과 연락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조선총독부에서는 조 의사가 17세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는 요시찰 인물이 아니었으므로조선에는 아무런 연루자나 교사자가 없다고 단정하였다.그러나 대만총독부에서는 범인의 자백과 왕복 서류,기타 정황에 의하면 조 의사에 향리에 공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5월말경 대만총독부 보안과장과 경부 2명을 파견,조사를벌였으나 공범검거에는 실패했다. 조 의사의 재판은 오랜 시일 예심을 거쳐 1928년 7월 7일 대북고등법원(臺北高等法院)에서 가네코(金子) 판사의 단독심으로 진행되었다.변호인은 대만변호사협회 소속 일본인관선변호사 아보(安保)와 가네코(金子)가 선임되었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인 관선변호사가 재판정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뻔한 것이었다.재판부는 일본 형법 제 75조 ‘황족위해죄’,즉 “황족에 대하여 위해(危害)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위해를 가하려 한 자는 무기징역에 처함”을 적용하여 조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그 해 10월 10일 오전 10시 12분 조 의사는 순국하였는데 그 때 의사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일본 황족이 대만에서 상해를 입은데 대하여 대만총독은 황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하여 사직하기에 이르렀다.일제는 이 사건을 극히 중요시하여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뒤인 6월 15일에야 비로서 신문지상에 공개되었다. 조 의사는 일본 국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한 사람에게 칼을 던졌으나,이는조선민족 전체의 의분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조 의사의 의거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조선민중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달게 받고 있다”는 일제의 선전이 허구라는점과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쾌거였다고 할 수 있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연구원] - 조명하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24세로 순국한 조명하 의사는 슬하에 일점 혈육을 남겼다.조 의사의 외아들 혁래(赫來·73)씨는 태어난지 1개월만에 부친 조 의사가 고향을 떠남으로써 부친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일제하 황해도 은율에서 농업학교를마친 혁래씨는 해방후 평양공과대학 4학년 재학중 6·25를 만나 월남하였다. 취직보다는 개인사업에 손을 대 최근 2∼3년전까지도 사회활동했었다.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은 모두 해외에 나가 있고 세 딸은 모두 한국에살고 있다. 장남 경환(京煥·43)씨는 호주에서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고,2남 정환(正煥·40)과 3남 국환(國煥·39)씨는 같이 미국 LA에서 식당업을 하고 있다.혁래씨 가족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는 드물게 사는 형편이 괜찮은 편이다. 80년대초에 결성된 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는 전 통일원장관 홍성철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데 홍씨는 황해도 은율출신으로 조 의사와 동향인 셈이다.기념사업회는 지난 88년 과천 서울대공원 정문 앞에 조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순국일인 10월 10일 추모제를 주관해오고 있다. 78년에는 대만 교포들이 한교(韓僑)소학교 내에 동상을 세운 바 있다.혁래씨는 “월남할 때 부친 관련자료를 하나도 챙겨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하루빨리 통일이 돼 이북에 있는 선친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21세기 내고장 역점사업] (48) 밀양시

    경남 밀양시가 새 천년에는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관광·전원도시로변모한다. 밀양은 경남 동북부 내륙 깊숙히 자리잡은 전통을 중시하는 충효의 고장이다.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가지산을 중심으로 얼음골과 호박소 등 수려한 경관을 갖고 있다.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해 있어 철도문화가 발달했던 60년대까지는 인구 25만을 자랑하는 웅군(雄郡)이었다.그러나 70년대 이후 뚫리기 시작한 고속도로가 수송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소외된 밀양은 교통의 오지로 남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밀양시는 민선 자치 이후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범시민 정신운동을 전개했다.지난 4년간 의식 개혁과 지역사랑 운동을 벌여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개혁의 기반을 마련하고 21세기 ‘일등 시 일등 시민’을 구현하기위해 야심찬 시책을 추진하고 있다. 사명대사 유적지 정비와,폐교를 활용한 문화·예술공간 확충,종합체육단지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명실상부한 문화·관광전원도시를 건설,새 천년의역사를 창조한다는 포부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교통문제도 오는 2004년쯤이면 말끔히 해소된다.경부고속열차가 밀양역에 서고,밀양을 지나는 부산∼대구간 고속도로 및 국도와 지방도 5개 노선이 4차선으로 확·포장된다.이렇게 되면 부산·대구·울산시와 창원·마산 등지는 1시간 이내로 좁혀지고,이들 지역 주민 1,000만명이 여가를 즐길 장소로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사명대사 유적지 정비사업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유적지를 성역화해 청소년에게 구국정신을 일깨우고,불교연수원∼대법사∼표충비∼영남루∼만어사∼표충사∼얼음골을 잇는 불교 관광벨트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무안면 고라리 사명대사 생가 주변 4만4,000여㎡를 정비하고 임진왜란 전적기념관을 건립한다.나라에 중요한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땀 흘리는 것으로 유명한 표충비 비각(碑閣)을 보수하고,대법사에 이르는 진입로 1㎞와 유적지 연계도로 1.5㎞도 확포장할 계획이다.이 사업은 국비와지방비 등 82억여원을 들여 올해부터 오는 2002년까지 4개년 사업으로 추진한다. ?폐교를 활용한 문화·예술공간 확충사업 인구감소로 늘어난 폐교를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청소년들의 탈선장소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는1석2조의 효과를 거둔다. 현재 시가 확보한 폐교는 7개교.이중 3개교는 이미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되고 있고,나머지 4개교도 활용계획이 수립됐다. 하늘아래 첫 동네인 단장면 구천리 사자평에 위치한 고사리분교는 기념물로 보존한다.무안면 내진초등학교는 자연학습원으로 조성하고,삼랑진읍 안태초등학교는 청소년 예절학교로 활용하며,산내면 임고분교에는 민?薇같活? 유치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민간위탁자를 물색중이다. 부북면 월산초등학교 등 3개교는 밀양연극촌과 미리벌 민속박물관,가인예술인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종합체육단지 조성사업 정부가 마련한 국민체육진흥 5개년 계획에 맞춰 체육시설을 규모화·집단화해 활용도를 높이고 대규모 체육대회를 유치해 시민의 자긍심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오는 2003년말까지 240억원의 사업비로 교동 일대 1만7,000여평에 각종 체육시설을 건립하기로 했다.800평 규모의 실내체육관과 소도시형 실내수영장을 건립하고,공설운동장에 육상경기 보조트랙을 설치할 계획이다.3,000평 규모의 보조잔디축구장과 주차장도 각각 건설한다. 내년 상반기까지 부지 매입을 끝내고,내년말 실시설계가 완료되면 2001년에는 착공할 계획이다. 밀양 이정규기자 jeong@ -밀양 이상조시장 인터뷰 “21세기 밀양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명실상부한 영남 최고의 문화·관광도시로 변모할 것입니다” 이상조(李相兆) 밀양시장은 “철도문화가 발달된 60년대에는 인구가 26만명에 달했으나 도로교통이 불편해 지금은 13만여명으로 줄었다”며 “대단위무공해 공장을 유치하고,쾌적한 환경을 겸비한 돌아오는 밀양을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21세기 밀양의 개발 방향은.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쾌적한 전원도시건설이다.민선 취임 이후 일관성있는 개발방향을 설정해 추진하고 있다.그동안 추진해온 대형 프로젝트사업을 2003년까지 마무리짓고 미착수 사업이 시행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특히 밀양역광장 확장 및 밀양강 주변 개발등 우리시의 얼굴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업에는 아끼지 않고 투자하겠다. ■지역문화 육성과 관광진흥책은.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위해 미리벌 민속박물관과 가인예술촌,밀양연극촌을 개원했다.앞으로도 폐교를 문화예술공간으로 이용하고 교동지구에 종합예술타운을 건립할 계획이다.사명대사 유적지를 관광벨트화하고,얼음골 케이블카와 골프장을 조기유치하며,숙박시설도 확충해 머물다 가는 관광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환경보전 대책은. 밀양은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서 모아진 맑은 물이 흐르는밀양강을 중심으로 자자손손 정답게 살아온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를 그대로보전, 후손에 물려주기 위해 지난해 ‘푸른 밀양 21’을 발간해 행동강령을제시했다.내년에 수립하는 환경기본계획이 완료되면 밀양은 전국에서 가장살기좋은 ‘그린시티(Green City)’가 될 것이다. ■돌아오는 밀양 건설 시책은. 인구 유입정책은 무엇보다 살기 좋은 고장 건설이다.그리고 대학교와 무공해 공장을 유치해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주민소득을 증대시켜 고향을 떠났던 출향인들을 기다리겠다. 밀양 이정규기자 - 아일랜드 파크 계발 계획 밀양 시내 한 복판에 ‘아일랜드 파크’가 뜨고 있다.시내를 흐르는 밀양강에 갇혀 섬 아닌 섬이 된 삼문동과 가곡동 일대 강변둔치가 말끔히 정비돼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이 일대는 지대가 강 바닥보다 낮아웬만한 비에도 침수 피해를 당하고,둔치에는 비닐하우스가 설치돼 경관을 해쳤었다.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밀양시는 지난 95년부터 아일랜드 파크 조성계획을 수립,사업을 추진하고있다.우선 밀양강에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도록 제2밀양교 부근 하류에 제1수중보(洑)를 설치했다.밀양의 상징 영남루 맞은편에 조성된 야외공연장에서는 수준높은 공연이 이어지며,주변에 건립된 분수대가 뿜는 시원한 물줄기는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준다.바로 옆 체육공원은 휴일마다 청소년이나 동호인들로 만원이다.인근 송림공원은 이들의 회식장소. 용두교밑 6,000여평에 조성된 조각공원은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동북아 및 한국의 고대 암각화 29점이 재현돼청소년들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국회 행자위 ‘명예회복법’ 공청회

    국회 행정자치위는 9일 오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공청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관심을 모았던 민주화운동 시기,대상 및 민주화운동의 개념을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법’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및 민주화운동 기념사업 추진근거 등을 담고 있다.권위주의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뜻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자는 것이 이 법안의 취지이다. 이날 열린 공청회에서는 국민회의 유선호(柳宣浩)의원과 한나라당 이신범(李信範)의원이 대표로 제출한 두 법안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법안의 적용 시기 및 대상자와 관련,대한변호사회 정태상(鄭泰相)변호사는유선호 의원의 법안대로 적용시기를 한정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정변호사는 “민주화운동이 반드시 유신시대처럼 명백히 헌정질서가 문란된 시기에만 가능한 것은 아니고 5·6공화국,문민정부 시절은 물론 현 정부에서도민주화운동은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민주화운동의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현재는 상당한 정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나 완전한 민주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법안의 적용을 받는 대상자를 특정시기로 한정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박원순(朴元淳)사무처장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과 그 유족에게까지 보상의 범위를 확대해야 하며,생활지원금·의료보조금·서훈·보상·기념사업 등의 보상방법이 채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변호사는 또 적용시기에 대해 “72년 10월17일(10월유신)부터 87년 6월29일까지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그는 “지난 5공화국 때 강제해직,강제퇴학 등으로 인해 수많은 언론인,공직자,학생들이 피해를 봤다”면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해직 또는 학사징계를 당한 사람들도 법적용의 대상이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양동안(梁東安)교수는 “민주화운동에 대해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양교수는 “민주화운동이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운동이어야 한다”면서 “비록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고 국민의 자유와권리를 회복·신장하는 활동이더라도 그 목적이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의 실현,대한민국의 붕괴에 있었다면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시기와 관련,”5·16이후 87년 6·29까지,아니면 문민정부 출범이전까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현진기자 jhj@
  • [의열 독립투쟁] (15)이봉창 의사

    20세기 전반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침략을받았다.일제의 침략을 받은 각 민족은 국가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저항해 싸웠다.그러나 한국민족만큼 강인하고 격렬하게 일제와 싸운 민족은드물었다.그 중에서도 침략의 괴수인 일왕 처단을 시도한 민족은 우리민족뿐이었다. 1932년 1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다.일왕을 처단하려는 조선인 애국지사가 던진 세번째 폭탄이었다.1924년 박열(朴烈) 의사가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사전에발각되었고,1925년엔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었다.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인 청년은 이봉창(李奉昌) 의사였다.이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수원의 철로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탓으로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랐다.소년시절에는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일하기도 했다.그리고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갔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의사는 일본인과 분간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일본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알고 있어 겉모습은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일본인의 고용살이를 하면서,또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민족의 피가 끓고 있었다.스무살때 경험한 3·1의거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있었다. 193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 의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고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다.일왕을 손쉽게 죽일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임시정부에선 의심스럽게 여겼다.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하였기 때문에수상히 여긴 것이다.김구(金九)는 직원을 시켜 이 의사를 은밀히 떠보도록하였다.어느 술자리에서 이 의사는 “작년에 도쿄에서 일왕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생각하기를 지금 나에게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일왕을 죽일수 있다는 얘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를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이 의사를 직접 만났다.그는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부턴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김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일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사업에 몸바치겠다는 이 의사의 각오는 김구를 감복케 하였다.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마침내 일왕을 폭살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준비는 김구가 맡았다.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만들었다.준비한 폭탄은 두 개였다.하나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이 의사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의사는 “나는 참된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屠殺)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적국의 괴수,그것은 일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이 의사는 이 해 12월말경 일본 도쿄로 향했다.그는 일왕이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김구에게는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이 의사는 거사장소로 일본궁성 근처에 있는 경시청 앞을 택하였다.일왕은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이 의사는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 의사는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회고’에서 군중과 일왕의 거리가 100미터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의사의 일왕 저격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중에서도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고 하며,일왕을 폭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일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도에 반발,1932년 1월 상해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놓은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점에서,그리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해방후 김구는 일본에 있던 이 의사의 유해를 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효창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62년 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봉창의사 주변 일본제국주의의 총수격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신은 적지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봉창 의사.순국 당시 이 의사는 32세로 미혼이었다.그런 이 의사에게 직계후손이 있을 리 없다.이 의사와 가장 가까운 혈손으로는 이복형의 딸인 질녀 은임씨가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은임씨는 이 의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일본서 노동자생활을 할 때 이 의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거사를 앞두고 이 의사는 백범에게 질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후 환국한 백범은 은임씨에게 집을 사주는 등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켰다.은임씨도 이미 수 년전 작고했다.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중에서도 번듯한 후손을 둔 경우는 그래도 낫다.기념관이나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묘소를 돌보기도 한다.그러나 이 의사처럼 후사가 없는 선열들의 경우는 죽어서도 외롭다. 현재 이 의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나 추모단체는 없는 실정이다.다만 효창원순국선열추모회가 4월 13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역시 지난 95년에야 겨우 효창원에 건립됐다.이 의사처럼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채 청춘에 간 애국선열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당국이나 종친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해 양자라도 한 사람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 정운현기자
  • [외언내언] 장묘문화

    중국에 사는 조선족으로 일본 히로시마대학에 유학중인 김문학(金文學·37)씨는 최근 ‘한국인이여,상놈이 돼라’는 책에서 같은 동양권인 중국·일본·한국 민족들의 죽은 자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 눈길을 끌고 있다.중국과 일본에서는 대부분 화장을 하며 일본에서는 심지어 고인의 신위를 집안에 모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김씨는 유독 한국에서만 화장을 하면 죽은 이에 대해 죄를 짓는 것으로 여기며 이는 유교에 중독된 탓이라고 힐난한다.유교(儒敎)는 인(仁)을 강조한공자의 가르침이 근간을 이루며 사서삼경이 경전인 만큼 조상숭배의 예(禮)가 자연스럽게 강조된다.그는 그러나 조상을 잘 모시려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하고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도 화장이 일반화되어 있고 토장(土葬)을 고집하지 않는 일본도 경제대국으로 잘 살고 있지 않느냐고반문한다. ‘잘 돼도 조상탓,못 돼도 조상탓’이란 조상을 잘 모셔야 후손들도 잘 된다는 기복(祈福)사상에서 비롯된다.그러나 호화분묘가 계층간의 위화감을 불러 일으키고 국토가 분묘로 잠식되는 현상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전국에서 하루 740명이 사망해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1.2배인 9㎢가 묘지로 바뀌고 있다.연말쯤 전국의 묘는 2,000만개,묘지면적은 국토의 5. 2%인 1,00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방치하면 전국토가 묘소화 될 우려가 있다. 이때문에 마련된 매장 및 묘지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복지위와 법사위를 오가는 1년간의 핑퐁신세 끝에 7일 법사위를 통과,법안이 발효될 경우장묘 문화에 큰 변화가 일 것으로 예상된다.법안은 2001년부터 묘지 사용기한을 15년으로 하며 3차례 연장이 가능해 최장 60년으로 제한하고 있다.24평까지 허용됐던 개인묘지는 9평으로,공동묘지는 기당 9평에서 3평으로 대폭축소했다. 개정안이 장묘문화의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은 사용기간이 끝나면 어차피화장해 납골당으로 모셔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장을 하는 풍토가 이뤄질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화장률은 꾸준히 늘어나 현재 28% 수준이나 개정안이발효되면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새로운 장묘문화가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화장장·납골당의 수를 늘리고 이들 시설들이 혐오시설이 아닌 편의시설이 되도록 환경을 친화력있게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외국에서처럼 마을 공동묘지가 시내에 위치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역할을 하는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은 묘소의 크기와 호화 정도가 아니라 자주 찾아 보고 돌보는 마음가짐이다. [李基伯 논설위원 kbl@]
  • [오늘의 쟁점] 韓電민영화 타당한가

    한국전력공사의 분할매각을 핵심으로 하는 전력산업구조개편이 벽에 부닥쳤다.정부가 제출한 전력산업구조개편촉진법이 노동계와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로 국회 산업자원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이에 따라 연말부터매각작업에 착수하려던 정부의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해졌고,일각에선 구조개편의 백지화까지 점쳐지고 있다.한전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하나.“전력산업을경쟁체제로 전환, 경영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개편론과 “섣부른 민영화는 국민부담만 가중시킨다”는 개편반대론이 팽팽히 맞선 상황을맞아 지면을 통해 양측 주장을 들어본다. ◆찬성 “경쟁체제로 생산성 높여야” 시장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경쟁이 독점보다 낫다는 것이다.대형 유통점들의 가격파괴 경쟁에서 보듯이 경쟁은 소비자에게 정직하다. 전력산업도 마찬가지이다.정부는 한전 발전부문을 분할해서 6개의 자회사로나누고 이들간의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이른바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추진중이다.발전소들끼리 경쟁하게 되면 전력생산의 원가가 크게 절감된다.지금까지 독점기업으로서 한전이 보여왔던 여러가지 비효율성,공기업으로서의 타성,불친절한 소비자 서비스도 상당히 개선된다.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쟁을 하려면 정부가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손발을 묶지 말아야 하고 그러자면 민영화를 단행하여야 한다. 한전 민영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나타난다.국부유출이다,전기요금이 폭등할 가능성이 있다,헐값으로 기간산업을 매각한다,재벌이 전력산업을 지배하게 된다는 식의 다소 감정적인 반대까지도 나타난다. 발전소가 공기업인 한전의 소유에서 민간기업의 소유로 넘어간다고 해서 또는 외국인의 소유로 넘어간다고 해서 발전소를 떼내어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득을 보고 치고 빠지는 ‘히트 앤드 런’을 하는 단기적인 금융자본이나핫머니의 움직임과는 달리 전력산업에 대한 투자는 20∼30년을 바라보는 장기투자이다.주식이나 채권과는 달리 발전소는 한 순간에 쉽게 팔아치울 수있는 자산이 아니다. 보다 실질적인 문제를 보자.한전은 약 68억달러의 해외차입금을 보유하고있다.삼성전자와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도 외국으로부터 상당한 차입을 하고 있다.꼬박꼬박 이자가 지불된다.이렇게 간접투자는 어차피 열어놓고 있으면서 직접투자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성을 지키는데 남문은 열어놓고,북문은 닫아 걸은 채 북문쪽 성벽위에올라가서 성을 지키는 것과 흡사하다.보다 중요한 것은 쓸데없는 명분보다는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혹자는 급격한 구조개편을 하지 말고 기존의 공기업 체제 속에서 경영개선을 통해 효율성을 향상시키자는 주장을 펴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잭 웰치나 리 아이아코카가 북한에 간다고 해서 북한경제가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한 두 사람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제도적인 정비가 보다 현실적인 방안이다. [趙成鳳 에너지경제硏 연구위원] ◆반대 “실익없고 국민부담만 가중”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시장경쟁 체제로 효율성을 강화하여 소비자의 이익을실현하겠다는데 정부의 목적이 있다.여기서 경쟁의 필수요건은 비용의 절감,특히 생산비용의대부분을 차지하는 발전연료비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절감하느냐에 있다.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단행한 영국의 경우도 천연가스를 연료로 하는 복합화력 발전방식 때문에 가능했다.건설기간이 짧고 상대적으로 천연가스의 가격이 싼 덕분에 경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일부 무연탄을 제외한 발전연료 대부분을 수입해다 써야 하는 상황이라 발전소간에 경쟁이 될 수 없다.연료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대책이 없는 것이다. 경쟁체제의 또다른 필수조건은 안정된 전력수요와 적정한 설비예비율이다. 저장이 불가능한 전력의 특성상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공급자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정부는 한전의 발전소를 6개의 자회사로 분할하여 이를 매각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이를 분할매각하게 되면 대부분 해외자본에 넘어가게 된다.전력산업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자본에 넘어가면 국가경제나 국민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례로 미국의 AES라는 전력회사가 인도에서 전력사업을하던 중 태풍으로인해 약 6,0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는데 AES사는 인도정부에게 이를 보상할것을 요구했다.또 우리나라의 한화 인천발전소 매각협상에서도 AES사는 연간 15% 이상의 이익보장을 요구하고 또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전력사업을 못하게 되었을 때는 한국정부가 발전소를 다시 매입해야 된다는 조건을 걸어 협상이 결렬된 바 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전기요금의 급격한 인상도 수반한다.구조개편에 따른비용이 천문학적이고 적정이윤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는 전기요금이 인상돼야하며, 그동안 공익을 위해 한전이 떠안아 온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된다.현재 원가보다도 싼 농사용·산업용 전기요금도 현실화를 명분으로 오르게 되고 무연탄·가스산업에 대한 보조금도 소비자의 부담으로 전가된다. 결국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해외자본에게는 막대한 이익을,국민에게는 엄청난부담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더욱이 이는 지금 세대 뿐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까지 더 큰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李慶鎬 전국전력노조 홍보국장]
  • [외언내언] 밀렵 쌍벌주의

    올해 순환수렵이 지난달 1일부터 충청북도에서 실시되면서 밀렵이 전국적으로 성행하고 있어 우려된다.순환수렵제는 사냥을 건전한 레포츠로 정착시키고 밀렵행위를 추방하기 위해 20여년째 시행되고 있지만 이 시기에 밀렵이도리어 극성을 부려 그 취지를 무색케 한다.밀렵은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밀렵꾼과 보신(補身)을 좇는 소비자의 욕구가 어우러져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게 요즘 세태다. 보신·강장·정력용으로 사용되는 야생동물은 멧돼지,꿩,노루,청둥오리,오소리,너구리·산토끼 등 50여가지.최근 밀렵꾼들이 제철을 만난 듯 전국 심산유곡을 뒤지고 다니며 곳곳에 덫을 놓고 있어 산에 오르기도 위험한 지경이다.서울 경동시장과 성남 모란시장을 비롯,충북 진천·청원,경북 고령·영천,강원 강릉 등을 중심으로 박쥐는 마리당 2만원,너구리 5만원,오소리 10만원,고라니 20만원씩 불법거래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산림청이 밀렵행위자에 대한 처벌 뿐만 아니라 불법유통되는 야생동물로 만든 음식물을 사먹는 사람도 조수보호에 관한 법률을 적용,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키로 했다.경우에 따라 명단도 공개한다는 것이다.지금까지는 불법으로 잡은 야생동물 박제를 취득하거나 보관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해왔으나 쌍벌(雙罰)주의를 적용,수요단계부터 차단시키겠다는 의도이다. 우리 모두 우리가 너무 보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3년전 미국 뉴욕경찰이 교포 뱀탕집을 급습해 한국인들을 체포하자미국 언론들이 중계차까지 동원,생방송해 교민들의 분노를 산 일이 있었다. 또 지난해 여행사 직원들이 태국 야산에서 곰을 도살하다 경찰에 검거돼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전국적으로 건강원이 7,000여곳,밀렵꾼이 2만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공급이 이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건강하고 힘있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다른 민족이라고 이런 욕망이 없을 리 없다.그러나 우리 사회처럼 정도가 지나쳐 ‘리비도(libido)적 사고’에 치우쳐 성적인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그 공동체를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삶의 가치는 한 차원 높은 일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겨야 할 일도 많기 때문이다. 밀렵의 쌍벌처벌 도입을 계기로 보약에 대한 인식도 바꿔야겠다.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제철에 나는 농산물이 가장 좋은 보약이라고 했다.동의보감에‘사람이 먹을 수 있는 보약은 오직 오곡 뿐이다.보약보다 음식을 조절해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강조하고 있다. [李基伯 논설위원 kbl@]
  • ‘한국 고전 명수필선’

    다른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이 수필도 우리는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나라 옛 수필은 탄탄한 구성,호흡의 장단,간결한 표현,주제의 통일성 등에서 현대 수필 보다 오히려 더 나은 점이 많다. 최근 나온 ‘한국고전명수필선’(손광성 등 편역,을유문화사 펴냄)은 문채(文彩)가 빼어난 선인의 작품 82편을 모아 고전수필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해준다. 설총,최치원 등 신라 때의 것을 비롯해 이규보,이수광,박지원,정약용,허균,김정희,이황,이이 등의 작품이 망라돼 있다.작품들은 하나하나마다 선인들의 지혜와 풍류,생활상 등을 재치있게 담아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도 재미있게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 초기의 학자인 강희맹(姜希孟,1444∼1504)이 아들을 훈육하기위해 지은 ‘훈자오설(訓子五說)’에서 뽑은 ‘아비 도둑과 아들 도둑 이야기’는 자만심에 대한 따끔한 경고가 돋보인다. 어느 도둑이 아들에게 도둑 기술을 전수하고 함께 ‘실습’에 나선다.그런데 아들의 도둑 기술이 워낙 특출해 여러 도둑들의 칭찬을 받고 자만심에 빠진다.도둑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만하지 말라”고 여러차례 타일렀으나아들이 듣지 않자 그를 부잣집 곳간에 가두고는 혼자서 빠져 나오라고 한다. 강희맹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고관 대작의 후손들은 인의(仁義)의아름다움과 학문의 이로움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입신 출세한 것만 믿고 옛조상들의 업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니,아들 도둑이 아비 도둑을 우습게 여겨 자만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설파한다. 총 7장으로 이뤄진 수필선은 주제별로 엮어져 있다. 설류(說類)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모은 제1장 ‘생활의 예지’를 시작으로기류(記類)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실어놓은 ‘한가로움과 풍류’,제문(祭文)등을 모은 ‘사랑과 고뇌,그리고 소망’ 등이 있다.값 9,000원. 박재범기자
  • WTO서 유전자식품 수출 의제 채택 파문

    시애틀에서 열리고 있는 WTO각료회담에서 1일 EU와 미국이 유전자변형식품(GMO)수출문제를 의제로 채택,실무위원회를 구성키로 합의함으로써 국가간 GMO의 대량유통길이 조만간 열릴 전망이다.그러나 GMO의 가공할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돼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파리 AFP 연합] 해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잎에서 독성물질이 나오도록유전자 조작된 옥수수가 토양에도 독성물질을 잔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대학과 베네수엘라 과학조사연구소가 2일자 네이처지에 기고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유전자 조작 옥수수품종인 ‘Bt 옥수수’가 성장기간 중 25일정도의 기간에 뿌리에서도 독성물질을 배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배출된 독성물질은 주변 흙과 결합되면서 생물분해 과정에서도 제외돼 배출이후 최소한 234일간에 걸쳐 독성이 유지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번 논문은 유전조작된 옥수수가 제주왕나비의 생존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는 연구결과에 이어 나온 것으로,유전자조작식품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환경운동가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줄 것으로 보인다. 연구팀들은 그러나 Bt 옥수수에서 나오는 독성물질이 토양에 어떤 영향을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고 밝혀 이번 논문의 일방적 해석을 경계했다. 연구팀은 Bt 옥수수에서 나오는 독성물질이 오히려 해충구제에 도움이 되거나 유전자조작식품 재배를 용이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잔류 독성물질에 의해 구제대상이 아닌 곤충이 피해를 입거나 고영양상태의 유기체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라면서 이런 문제는 추가연구를 통해 규명해야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 “변형된 물고기 1마리가 자연산 모두 도태시켜” [파리 AFP 연합] 유전자 변형 물고기 1마리가 자연상태의 물고기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 퍼듀 대학의 윌리엄 뮈러,리처드 하워드 연구팀은 1일 발간된 뉴 사이언티스트지에 인간성장 호르몬을 투여한 관상어의 성장 및생식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본 관상어의 일종인 메다카 배(胚)에 인간성장 호르몬(hGH)를 주입한 결과 유전자 변형된 물고기는 보통 물고기보다 성장 속도와생식 시기가 훨씬 빨랐다. 암컷 물고기가 통상 큰 물고기와 교미하려는 경향을 가졌음을 감안할 때 이는 유전자 변형된 큰 물고기가 생식 단계에서 자연상태의 물고기들을 도태시키고 조작된 유전 형질을 후손에 물려줄 것이라는 가설을 가능케 한다고 연구자들은 주장했다. 연구팀은 컴퓨터 모델로 실험한 결과 보통 물고기 60만마리 속에 유전자 변형된물고기 60마리를 풀어놓았을 때 40세대만에 기존 물고기들이 모두 소멸했다고 보고했다. 또 유전자 변형된 물고기 1마리로만 실험을 했을 때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보통 물고기들이 소멸하는 결과는 동일했다. 유전자 변형된 생물에 의해 기존 생물이 도태될 것이라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환경보호론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 [의열독립투쟁] (14)김시현 의사

    살아 생전 24년을 감옥살이한 투사가 있다.36세에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후,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6년을 감옥에서 보냈고,광복 이후 20년동안 8년을 또 투옥된 것이다. 독립운동에 첫 발을디딘 후,47년의 절반을 넘는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 있으니,그가 바로김시현(金始顯)의사다. 김 의사는 188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김 의사를 기억하는 안동 사람들은 먼저 그의 혀짧은 연설을 알아듣느라 애쓴 이야기를 떠올리는데,이는 김의사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며 투쟁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처음 김 의사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검사가 “도대체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 그렇게 바꾸어썼다고 한다.29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역정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참여해 자금과 단원모집을 위해국내로 침투하였다.이로부터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망명은 쉼없이 반복되었다. 거사를 벌이고, 체포되고, 출옥하면 곧바로 망명하여 다시 의거를 일으키는 연속된 행위를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한 것이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이 회의장에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부부가 될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다. 그의 본부인이 고향의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본부인은 1930년 사망) 상하이로 돌아온 뒤14살 연하의 권애라와 결혼했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3·1의거에 참가,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그후 이화학당을 졸업한 권애라는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활약하는 등끊임없이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다가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대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가 있었다.의열단이 국내에 아지트를 만든 뒤 대규모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많은 양의 폭탄과무기를 국내로 수송한 공작이었다.1923년 2월초 김 의사는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및 ‘조선혁명선언’,‘조선관공리에게’라는 선전문서를 인수했다.“동포들에게 설날 떡을 선물한다”고 표현한 그는 평소 포섭해둔 황옥(黃鈺) 경부(警部)를 동반,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투옥생활의 연속이었다.1929년 출옥후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한 김 의사는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고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지도부와 재결합하였다. 마침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징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노을룡(盧乙龍)과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이 의거로 체포된 그는 살인미수혐의로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9년 9월 출옥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그는 역시 항일투쟁과 옥중생활로 보냈다.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생활했다.경성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그러다가1944년 베이징헌병대에 다시 체포당한 그는 1년간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 5·10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안동 갑구)되어 정치활동을 펴면서 혁명가로서 그의 면모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새롭게 타올랐다.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에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전개되는 와중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 거사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석방되었으나 1966년에 서거,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 의사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받을 수 없다’는규정 때문에 독립유공 공적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의사는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마지막 가는 길에도 그는 아내에게 “권 동지,미안하오.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시현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는 항일동지이자부인인 권애라 여사 사이에서 일점 혈육을 남겼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살고 있는 김 의사의 외아들 봉년(峯年·77)씨는 192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중국 옌지(延吉)에서 농업학교를,옌안(延安)에서 항일정치군사학교를 졸업한 봉년씨는 해방후 고향에서 면의원을 역임하였으며,대한중석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지금은 은퇴했다.2남2녀.장남 우일(宇鎰·40),차남 홍일(弘鎰)씨는 모두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편 김 의사는 경북 예천 선영에 묘소가 마련돼 있을 뿐 뚜렷한 독립운동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다. 이는 김 의사가 1954년 1월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탓이다. 봉년씨는 “부친의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상태”라고 밝혔다. 봉년씨는 또 “1923년 봄 의열단원들이 일제통치기관 폭파,일본인 요인처단을 목적으로 폭탄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소위 ‘황옥 경부사건’은 주모자가부친이므로 ‘김시현의사사건’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강만길 고려대교수 역사비평집 ‘21세기사의 서론‘ 출간

    지조있는 학자로,행동하는 지성인으로 40년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역사학도의 길을 걸어온 강만길(姜萬吉·66) 고려대 명예교수가 최근 역사비평집‘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9,500원)를 출간했다.20세기를 넘기며 노학자가 제시하는 21세기의 바른 ‘서론’을 위한 통찰적 제언의요체는 무엇인가. 금년초 한 인터뷰에서 강 교수는 우리의 20세기를 ‘한(恨)의 역사’로 압축한 바 있다.강 교수는 이번 책에서 이같은 시각을 확장,우리는 20세기의첫경험을 식민지에서 했고,식민지 시대가 끝난 뒤에는 분단의 상처를 아린가슴들에 묻고 파헤치기를 반세기동안 반복해 왔다고 분석한다.식민과 분단,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된 ‘파행적 근대화’가 바로 20세기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이 강 교수의 결론이다. 총4부로 구성된 책은 제1부에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왜곡,또는 오인되고 있는 역사적 문제들을 꼬집고 있다.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의 황실복원운동,4·19와 6·25의 역사적 평가,‘식민지근대화론’ 논쟁,박정희 정권의 역사적 평가,또 민주의열투쟁의 역사적 평가 등등.입장과 시각에 따라 견해차가 날 수 있고,또 실지로 더러는 첨예하게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나름대로 명쾌한 견해를 펴고 있다.예를들어 황실복원운동은 한 두사람의 왕족이반일적이었다고 해서 전제주의 왕실을 옹호하는 식의 역사인식은 공화주의시대에 가당찮은 일이며,또 경제건설이라는 ‘상황주의’를 내세워 정치적으로는 독재체제,문화적으로는 획일주의의 군사문화 양산,사회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과 갈등을 조장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복고주의는 ‘역사건망증’에서 비롯한 반역사적 현상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제2·3부는 그가 평소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온 ‘통일문제’와 그 방법론에 대한 견해모음이다.통일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일제 강점시대와 분단시대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사 전체의 흐름을 옳게 파악하고식민지화 및 분단과정의 역사적 원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분단 반세기가 넘으면서 남북간에는 역사 인식상의 차이가 생겨났는데 남북의 역사 동질성에서 그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강 교수는 그 한 방법으로 통일이전이라도 남북한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교과서 제작을들고 있다.해방후 남북의 역사를 남한사·북한사가 아닌,한국사를 완전통일이전이라도 쓰고 가르치는 일이 절실하다고 보고 있다.통독 이전 동·서독이공동교과서를 제작,가르친 일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마지막 제4부는 강 교수의 선견적 안목을 담고 있다.시각도 한국을 벗어나동아시아,한일관계로 넓혀져 있다.그는 “21세기에 한국은 20세기보다 더더욱 세계사의 행방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통일문제도 21세기 세계사의 흐름,새로운 세계체제와 직결돼 있다”고 예견한다.통일과 관련,“21세기에는 민족국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역공동체적 결속이 강화될 것으로 보이나 동아시아에서 민족국가간 대립이 지속될 경우 예측하기어렵다”고 진단한다. 지난해 정년퇴직한 강 교수는 성북구청 뒷편에 자신의 아호를 딴 ‘여사서실’이란 서재겸 집필실에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이번 책은 작년에 출간된‘20세기 우리역사’‘역사를 위하여’에 이어 세번째로 출간된 역사비평서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3)곽재기 의사

    곽재기(郭在驥·1893∼1952)의사는 1920년대 항일 독립투쟁사의 전설적 존재인 의열단(義烈團)의 초대 부단장으로서 창단 직후 추진된‘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의 실행을 국내에서 지휘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7년 가까이 옥고를겪었다.흔히‘밀양폭탄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거사 계획은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을 만큼 대담무쌍했으며,일제의‘문화정치’틀속에 안주하려던 각계 유지층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1893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곽 의사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청남학교(淸南學校) 교사로 다년간 봉직했다.곽 의사의 항일운동 이력은 1909년에 창립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3.1의거가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곽 의사는 1919년 7월 부인 윤씨와 두 아들(大鉉·壽鉉)을 남겨둔 채 중국 동북지방 지린(吉林)으로 망명했다.서너달 후 곽 의사는 투탄·암살 등 의열투쟁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달성코자 결성된 소년단의 지린 지부장으로 등장한다. 이 해 10월 중순곽 의사는 신흥무관학교 생도인 김원봉(金元鳳·의열단장) 등과 알게 되었는데 그 무렵 이들은 ‘의열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조직하고자 동지를 규합하고 있는 중이었다.소수 정예의 결사적‘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세력을 타격하며 독립운동의 전투적 기운을 드높이려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곽 의사는 곧 그들의 동지가 되기로 맹약했다.이들은 11월9일 밤 지린성 밖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창단 회합을 갖고 10개조의 공약을 정했다.단장에는 김원봉,부단장에는 곽 의사가 추대됐다.서상락(徐相洛)·배중세(裵重世)와 함께 27세의 최연장자라는 점 이외에 교사 경력과 그동안의 항일 경력,그리고 식견과 지도력이 두루 참작된 결정이었다. 의열 단원들은 처음부터 고강도의‘암살파괴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표적은 총독부 일본인 고관과 친일 반역자,그리고 식민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와 부속 시설물들이었다.이 계획은 테러리즘의 소치가 아니라 민족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행해질 기습 특공작전이요,그 원초적 범례가될 것이었다. 단원들은 지체없이 국내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 폭파와 사이토(齋藤)를 비롯한 총독부 수뇌·요인들을 저격,포살키로 목표를 정했다.김원봉은 중국에서의 제반 준비와지원을 책임지고 국내 현지에서의 거사 추진 및 실행은 곽 의사가 전담,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창단 직후부터 추진한 무기 구입 노력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성과를 보았다.상하이(上海)에서 구입한 탄피 3개와 폭약을 이용하여화약 투입식,도화선 점화식,투척 즉발식 폭탄 1개씩을 각각 제조했다.4월 하순 김원봉과 이성우가 폭탄 13개(점화식 7개,투척식 6개),제조용 폭약과 탄피,권총 두 자루,탄환 100발을 중국인으로부터 추가로 구입했다.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4월 초와 5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식으로 수행되었다.1차분 폭탄 3개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의이름을 빌려 안뚱현(安東縣)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부친 후 곽 의사가 따렌(大連)을 거쳐 안뚱으로 가 소포를 찾아그 곳의 상주연락원 이병철(李炳喆)에게 넘겨주었다.이병철은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포장해서 경남 밀양의 화물운송점으로 부친 후 기차편으로 밀양으로 가서 화물을 찾아 폭탄만 따로 빼내 청년회장 김환(金煥)의 집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 2차분 무기 묶음은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성우가 의류상자로 위장해서 휴대하고 선편으로 안뚱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주었다.이병철은 지난번처럼옥수수 다섯 포대 속에 무기를 넣어 포장하고 다른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화물로 위장해 부산진역의 한 운송점으로 보냈다.이것을 배중세가 수령해서 비밀표식이 된 다섯 포대만 따로 추려 창원 강산진(姜祥振)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무기 반입이 완료되자 지도부는 인원 배치와 임무 분담,자금 조달 등의 후속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4월 중순 국내로 잠입한 곽 의사는 밀양으로 내려가 1차분 폭탄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먼저 귀국한 단원들을 만나 임무를 부여하고 격려하였다.그리고는 상하이로 돌아가 김원봉에게 제반 준비작업의 진척도를 보고한뒤 이성우와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했다.서울 공평동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지휘소를 두고 단원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가며 거사날짜만을 기다렸다.거사는원래 6월 초 이내에 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태로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밀양에 숨겨둔 폭탄 3개가 밀정의 제보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돼 가택수색 끝에 적발,압수되어버린 것이다.이 때문에 경성부 관내에는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지고 엄중한감시망이 가동되었다.게다가 이수택은 거사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 반입무기의 서울 이송을 누차 미루었다.자금마련을 위해 곽 의사가 대구와 청주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그래서 거사날짜는 7월8일로 잠정 연기되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잠행하며 대기중이던 단원 5명이 6월20일경 조선인경부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고 말았다.곽 의사는 무기 보관 상태 점검차 부산에 잠시 내려갔다가 김기득과 함께 부산서 체포되었다.다른 단원들과협력자들도 속속 검거되고 창원에 은닉해뒀던 무기도 모두 압수되었다. 1921년 6월21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곽 의사는 상고를 포기한 채 마포형무소 독방에서 복역 중 1927년 1월 특사조치로 1년10개월 감형돼 이 해 1월22일 만기출옥했다.출옥 후 3년 뒤 곽 의사는 다시 만주·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재투신한 것으로 전해진다.광복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곽 의사는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이끄는 등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에 타계했다.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곽재기 의사 후손들 근황 곽재기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애국지사에 속한다.동작동 국립묘지에 묘소가 마련된 것 외에는 기념사업회는 물론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워진 것이 없다.‘못 배우고 못 사는’ 후손 덕분(?)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하나 제대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후손들 역시 곽 의사의 이름 석 자를 겨우기억하고 있을 뿐 곽 의사가 해방 후에 타계한 탓으로 연금 한 푼 주어지는것이 없다. 곽 의사의 부인 윤씨는 곽 의사보다 먼저 작고했다.두 아들 가운데 장남 대현(大鉉)씨는 일제때 작고했으며,차남 수현(壽鉉)씨는 80년대 중반 작고했다.장손 기수(琦洙·65)씨는 함북 청진 태생으로 일제때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며 일제가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못 치르게 해 입학이 늦어졌다.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기수씨는 62년부터 10여년 동안 교통부에서 역무원으로 종사한 바 있는데 지난 95년 부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떠 현재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슬하에 2남2녀.최근 해방 후 작고한 독립운동가들의 손자들이 자신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과 관련,조상들의 건국훈장을 반납,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기수씨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조상을 팔아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없습니다.그러나 단지조부님께서 해방 후에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손자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운현기자 jwh59@
  • 李萬燮·張英信 공동위원장

    ‘새천년 민주신당’(가칭)의 이만섭(李萬燮)·장영신(張英信) 창당 공동준비위원장은 25일 준비위 결성식 직후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생산적이고경쟁력 있는 정치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새정치,새정당의 모습을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향후 일정은 (이위원장)오늘 구성된 상무위원회로부터 일정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위임받았다.내일 당장 새 위원장단과 함께 본격 논의를 시작할 계획이다. ■정치개혁의 열망이 높은데 (장위원장)준비위에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비전과 전문성,철학을 다져온 분들이 대거 참여했다.모두 힘을 합친다면 정치개혁은 물론 후손들에게 부정부패가 없는 풍요로운 국가를 물려줄수 있을 것이다. ■영입은 계속되나 (이위원장)도지부를 중심으로 지구당 결성대회를 마친 뒤 지역별로 영입작업에 나서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좋은 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더 영입할 것이다. (장위원장)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하고 정착시키고자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함께 신당을 창당하겠다.■시급한 과제는 (이위원장)창당준비위 산하 각 분과위를 조직,가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위원장)기업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효율성을 높여 정치의 고객인 국민이만족할 수 있는 좋은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국민회의와의 관계 설정은 (이위원장)아직은 구체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내년 1월20일 신당 창당 직전 국민회의를 해산하고 신당에 합류하거나 신당이 국민회의를 법적·정치적으로 승계·통합하는 등의 방안을 검토 중이다.어떤 경우든 법적 문제는 없다.다만 국민회의의 해산 결의 등 당내 절차가 남아 있다. ■자민련과의 합당 문제는 (이위원장)기존 방침에 변함이 없다.우리는 우리대로 간다.다만 우리와 정치적 신념을 같이하는 인사에게는 항상 문호가 열려 있다.자민련의 당론 결정이 선결 과제다. ■국민회의내 일부 차세대 주자들은 지도부에서 왜 빠졌나 (이위원장)차기 대선을 마음에 두고 있는 인사들은 창당준비위 지도체제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을 감안한 것이다. 주현진기자 jhj@
  • 與 신당 창당 준비위 결성식 이모저모

    여권의 ‘새천년 민주신당’(가칭)이 개혁과 화합을 기치로 대장정(大長征)에 들어갔다.25일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민주신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식은 3,648명의 창당준비위원과 외부인사 등 4,000여명이 참석한가운데 2시간 남짓 진행됐다. ■국민회의 총재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신당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정치안정을 실현시킬확고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대통령은 “변화와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좌절한다”며 신당 창당이 내년 총선 승리로 결실을 이룰 수있도록 분발을 당부했다. 김대통령이 20분 남짓 연설하는 동안 최근 일부 사건 책임자의 단호한 조치와 지역감정 타파,정치 안정을 강조한 대목 등에서 20여 차례에 걸쳐 박수가터져 나왔다. ■국민회의 정동채(鄭東采)의원의 사회로 진행된 본행사는 이재정(李在禎)총무위원장의 경과보고,창당준비위 규약채택,창당준비위원장 선출,축사,대통령치사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이만섭(李萬燮)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자기를 희생하여 새정치에 바치고,눈앞의 이해를 녹여 신당의 용광로에 부어 넣자”며 “겸허하고 진솔하게 역사와 국민 앞에 다가간다면 국민 또한 우리를 믿고 화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영신(張英信) 공동위원장은 “주부로서,평범한 경제인으로서 살아왔지만국민의 아픔을 쓰다듬을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능력과 경험을 모두쏟아부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공동여당인 자민련에서는 박태준(朴泰俊)총재와 한영수(韓英洙)부총재,김현욱(金顯煜)사무총장 등이 축하사절단으로 참석했다.박총재는 축사를 통해“망국적 지역주의 구도를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감수하는 비상한 용기가 필요하다”며 “구정치에 안녕을 고하고 새정치 건설에 함께 매진하자”고 제의했다. ■행사장에는 ‘새천년의 꿈을 펴자,새정치의 길을 열자’‘한국을 새천년의 강국으로,국민을 새정치의 주인으로’ 등의 플래카드가 나붙었다.준비위원들은 대국민결의문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 정치구조의 정착▲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 지향▲민의 수렴을 통한 생활·민생정치 구현▲신당 문호 개방▲16대 총선 필승 등 7개항을 약속했다. ■행사에는 신당의 ‘새천년’이미지와 국민화합을 부각시키는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됐다. 행사 시작 2시간 전부터 행사장 입구 앞뜰에 인터넷 PC를 전시해놓고 참석자들에게 인터넷 PC 신청접수를 받는 ‘새 천년의 꿈갖기’ 이벤트와 홈페이지 갖기 캠페인을 펼쳤다. 특히 김대통령 내외가 입장한 직후 전국의 대학생,회사원,사업가,어린이 등 각계 시민의 주문을 담은 ‘국민 파이팅’이라는 영상물이 무대 전면에 마련된 화면을 통해 흘러나왔다.행사 후반부에는 우주 대폭발과 새로운 우주의탄생을 상징하는 영상물이 상영됐다. ■결성식에서는 국민회의 권노갑(權魯甲)조세형(趙世衡)김상현(金相賢)김원기(金元基)김영배(金令培) 고문과 안동선(安東善) 지도위의장 등 당 원로와이창복(李昌馥)김민하(金玟河)민경배(閔庚培)강덕기(姜德基)김은영(金殷泳)최영희(崔榮熙) 신당창당추진위원 등 12명이 고문으로 위촉됐다. 박찬구기자 ckpark@
  • [독자의 소리] 독립유공자 유족 훈장반납 사연 살피길

    조국이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고 신음할때 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의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 우리는 독립된 나라에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독립유공자들은 일제의 혹독한 체포 구금과 모든 것이 피탈된 상황에서 자녀교육도 제대로 못시킨 결과 그 후손들은 3,4대까지 고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참담하게 살고 있다.국가에서는 당연히 후손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보장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가 45년 8월15일 이후 타계한 경우 후손에게 연금혜택을 주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독립운동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보훈혜택을 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텐데왜 유공자들의 사망시기를 임의로 정해 보상을 결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독립유공자 후손 300여명은 생활고만 안겨준 허울뿐인 훈장을 자율적으로 정부에 반납하기 시작한 것이다.정부 당국은 조상에게 추서된 훈장을 반납하는 유족의 피맺힌 한이 서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방재만[서울 강서구 방화3동]
  • [새해 예산안 분야] 국가채무 분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국가채무 문제를 따지는 데는 여야 구별이 없다.여야 의원 모두 정부측에 ‘쓴 소리’를 한다.당장 아쉽다고 끌어다 사용한 국가빚은 결국 후손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기 때문이다. 정부측은 “97년 이후 채무증가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업구조조정 등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강조하고 있다.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채무증가를 억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이 때문에 22일 열린 금융정책협의회에서는 올 연말까지 남은 국고채 발행한도 5조9,000억원 어치 중 3분의1수준인 1조9,000억원 어치만 다음달중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여당측은 정부의 이런 노력을 인정하는 편이다.반면 야당측 예결위원들은내년 세출을 대폭 삭감하고 그에 따라 국채발행액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한 야당측 예결위원은 “국가채무의 증대는 ‘미래의 문제’만이 아니며 예산액 중 상당부분을 이자로 지출해야 하므로 이는 결국 사회복지나 연금분야의 축소편성을 당장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98년말 현재 국가채무 총액은143조3,906억원이다.정부채무 및 정부보증채무를 합친 액수다.올해 말까지 약 177조에 이를 전망이다. 대다수 예결위원들은 앞으로 정부보증 채무가 더 증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제일·서울은행에 대한 추가출자와 투신권의 부실해결 등 공적자금 추가 수요를 꼽고 있다.또 부실채권으로 공적자금 회수가 차질을 빚고 있는 점도 들고 있다.국회사무처 법제예산실측도 “정부가 재정적자 보전을 위한 국채 발행을 계속하고 실업대책 및 사회안정망 구축을 위한 재정지출 또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부채무의 증가를 우려했다. 그러나 정부측은 “2000년부터 재정적자를 축소해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최근 지속적인 경기회복세가 유지됨에 따라 적자관리에 중점을 두어 균형재정 시기를 2004년으로 앞당기고 2005년부터 상환하면 2006년부터 흑자재정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최광숙기자 bori@
  • 국회본회의 이모저모

    국회가 정쟁(政爭)의 볼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22일 본회의에서 여당은 한나라당에 정치공세 중단을 촉구했지만 일부 야당의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날 본회의에서 김기재(金杞載)행자부장관의 해임건의안 표결은 10여분만에 마무리되는 등 종전 다른 해임안 처리때보다 긴장감이 떨어졌다. 소속 의원 132명 가운데 125명이 표결한 한나라당은 ‘가(可)’표가 119표에 그쳐 최소한 6명이 반란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됐다.반면 공동여당은 160명 중 국민회의 2명,자민련 9명 등 11명이 표결에 불참했는데도 ‘부(否)’표가 157표에 이르는 등 성과를 올렸다고 자평했다. ■본회의 5분발언에서도 여야간 정치공방은 재연됐다. 한나라당 이신범(李信範)의원은 “국가정보원이 자체 교육관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입찰자격이 없는 충남 소재 대아건설에 공사를 넘겼다”며 김종필(金鍾泌)총리의 압력설을 제기했다. 그러자 국민회의 장영달(張永達)의원은 “야당이 근거없는 괴문서나 설(說)로 국정을 농단하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과거 민주화운동 당시 우리 당의 은혜를 입은 이신범 의원은 더이상 배은망덕한 얘기를 하지 말라”고 몰아세웠다.장의원은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을 겨냥,“언론문건 국정조사와 검찰조사에 떳떳이 나서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자민련 김범명(金範明)의원도 한나라당 이의원의 발언을 문제삼아 “면책특권을 악용,본회의장에만 서면 유언비어식 정치를 감행한다”고 비난했다. 총리실측도 “이신범 의원의 발언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사과후 속기록 삭제를 않으면 명예훼손 고발 등 법적 대응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서경원(徐敬元)전의원 밀입북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한나라당 김기춘(金淇春)의원은 신상발언을 통해 “검찰이 이번 재조사에서 방향을 설정해 놓고‘조작된 사건’인 것처럼 다시 조작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정치 탄압 또는 보복으로 비치게 한다면 검찰은 존재가치를 영영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야간 입씨름이 계속되자 일부 여당의원은 근시안적인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정쟁을 중단할 것을 제의했다.국민회의 김병태(金秉泰)의원은 “일시적으로 판단을 잘못한 19세기말에 이어 20세기말 우리 판단이 또다시 잘못될 때후손이 당할 고난을 생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자민련 조영재(趙永載)의원은 “여당은 금도(襟度)의 정치를,야당은 건전한 대안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박찬구기자 ckpark@
  • 유전공학 이용 자식성별 선택

    [베를린 연합] 유전 공학을 이용해 자식의 성별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방법이 개발됐다고 독일 일간 디 벨트가 20일 보도했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 면역생물학 연구소는 쥐 실험에서 유전자 조합을 변화시켜 정자의 운동성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수컷을 암컷보다 두배나 많이 낳을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성별을 결정하는 X,Y 염색체는 자연상태에서는 암컷과 수컷이 동일한 비율로 태어나도록 분배된다.이때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쥐의 경우 17번 염색체. 이 염색체는 정자의 운동성을 결정한다.따라서 17번 염색체가 정자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도록 할 경우 수컷이 되도록 하는 Y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난자에 도달해 수컷쥐의 생산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베른하르트 헤르만 연구팀장은 정자의 운동성을 강화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앞으로 100% 성별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다른 포유류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손의 성별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X 염색체와 Y 염색체의 무게차를 이용하는 것.남성 염색체인 Y 염색체는 여성 염색체인 X 염색체에 비해 무게가 2.8∼7.5% 정도가벼운 점을 이용,정자를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서 남성이 되도록 하는 정자와 여성이 되도록 하는 정자를 분리 인공수정하면 가능하다.
  • 金대통령, 창원 바르게살기 전국대회 참석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서경원(徐敬元) 전의원 밀입북 사건과 이에 따른언론자유 문제를 언급했다.검찰 재조사 이후 첫 공식 언급이다.경남 창원에서 열린 제 10회 바르게 살기 운동 전국대회와 지역인사와의 오찬 자리에서다.경남지역인 만큼 지역정서 문제도 거론했다. 김대통령은 특히 지역인사 오찬에서 IMF 위기 2주년이 다가오고 있는 점을상기시키며 “나라의 붕괴위기를 넘기게 됐다”고 강조했다.앞선 전국대회연설에서는 이보다 훨씬 강도높게 “국민과 함께 다짐하고 결의한 대로 1년반만에 IMF 외환위기를 완전히 이겨냈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언론자유 문제를 거론했다.“국민 여론조사를 보면 현 정부가 언론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전제한뒤 과거 서 전의원 밀입북사건때와 최근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의 ‘빨치산’ 발언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비교했다. “과거 언론은 나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서 전의원으로부터 턱도없는 1만달러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결국 야당총재였던 내가 공산당에게 돈이나 받은 것처럼 비쳤다.80년 내란 음모사건때도 사형언도를 받자 용공분자라는 보도도 했다.당시 언론은 알고도 쓰지 못했다.그에 비해 지금은 야당이 대통령을 빨치산이라고 말하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나는 역사 속에서 평가받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앞으로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길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그러면서 지역갈등 문제를 끄집어냈다.김대통령은 “나같이 지역차별로 고통받은 사람도 없다.아무 죄없이 영남지역에서 차별을 받아왔다”고 말문을 열었다.이를방치하면 조상과 후손에 죄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대한매일을 읽고] 독립유공자 훈장 후손들이 반납 이해안돼

    독립유공자 손자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공로로 조상이 받은 훈장을 집단으로 청와대에 반납했다고 한다(대한매일 9월29일,11월8일자).얼마전에는 어느 체육인이 자식도 보살피지 못하는 부모와 나라를 탓하면서 훈장을 반납했다. 명예의 상징인 훈장을 반납하다니 선뜻 이해가 안간다.물론 사정이야 가슴에 맺힌 한도 있고 제도에 대한 불만도 있겠지만 그래도 훈장은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없는 고귀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상징물이 아닌가.그런데 의견이다르고 이해가 다르다고 훈장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다.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거울이 아닌가 생각할 때 섬뜩한 느낌이 든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면 생활이 어렵고 찌들었다할지라도 선열의 고매한성품은 이어 받았을 것이다.그런데 생활이 어렵다고 선열이 지켜온 고귀한희생정신을 함부로 저버릴 수가 있는가.가뜩이나 정치도 경제도 후련한 곳이 없는 요즘 명예마저 반납하는 사회가 됐으니 국민은 어디에 중심을 잡고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정관희[서울 노원구 상계동]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