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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공간] 지구에 녹색 옷을 입히자/오정수 국립산림과학원 산림환경부장

    요즈음 중국의 역동적인 발전상이 심심찮게 화제가 되고 있다.전세계인구의 4분의1을 차지하는 나라가 산업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상반되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하나는 우리나라에 미치는 경제적인 효과이며,다른 하나는 토인비가 역설한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중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각종 오염물질들이 우리나라를 향해 날아와 우리의 건강과 깨끗한 자연환경을 위협하기 때문이다.숲은 쾌적한 자연환경과 생활환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이 서식하는 삶의 터전이다. 숲의 혜택을 돈으로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숲의 공익적 기능인 수원 함양,대기 정화,토사유출 방지,산림 휴양,수질 정화,토사붕괴 방지,그리고 야생동물 보호 등 7가지를 기준으로 볼 때,우리나라의 숲은 우리에게 1년간 약 50조원에 상당하는 혜택을 준다고 한다.이는 숲으로부터 국민 한 사람 당 1년에 약 106만원의 혜택을 무상으로 받고 있는 셈이 된다.이 외에도 숲은 소음 방지,기상 완화,방풍,생물종 보존 등의 환경 가치와 문학,예술,교육,종교의 문화가치를 함께 제공한다. 다시 나무 심는 계절을 맞았다.긴 겨울도 모자라 우리를 계속 움츠리게 하였던 꽃샘추위가 마침내 물러가고,온 대지를 훈풍으로 감싸는 생명의 태모(太母),새봄이 찾아온 것이다.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풍년화와 산수유를 필두로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고 벚꽃도 한창이다.파란 물이 막 오른 가지들은 앞다투어 싱그러운 잎사귀와 탐스러운 형형색색의 꽃들을 피워 올릴 것이다. 검푸른 암벽과 짙푸른 물줄기와 신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우리 산하는 선조들이 이 땅에 뿌리내리면서 우리에게 물려준 가장 값진 유산 중의 하나이며 앞으로도 수천년간 세대를 거쳐 내리 물려줄 보배 중의 보배이다.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강산을 먼 훗날 이 땅을 지켜갈 후손들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가.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은 사는 우리도 깨끗한 산하를 더욱 아름답고 푸르게 가꾸어 후손들에게 보다 값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구와 도시집중화,주거 및 산업용지로 전용하기 위한 산림면적의 감소,점차 증가하는 화석연료 사용에 의한 오염물질 방출 등은 자연의 회복력을 방해하여 숲의 기능을 저해하기도 한다.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개인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뿜은 온실가스를 흡수하려면 일생동안 592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한다.작년 한 해 동안 한 사람이 가정생활,출퇴근,여행 등을 하면서 내뿜은 이산화탄소의 양은 무려 2t에 달한다.이러한 이산화탄소는 지구 온난화를 일으켜 기상재해를 발생시키고,해수면을 상승시켜 해안 저지대를 잠기게 한다.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태풍,홍수,폭설 등의 기상이변 현상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나무를 많이 심어 산림의 푸름을 지속시키는 것이다.냉난방을 위해 268그루,자동차 운행을 위해 222그루,가전제품 사용을 위해 32그루,비행기를 타기 위해 29그루,취사를 위해 24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며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환경을 훼손시키는 행위를 통해 후손들에게 진 빚을 나무를 심어 갚자는 것이다. 깨끗한 물,맑은 공기,아름다운 경치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나무를 지속적으로 심고 적극적으로 숲을 가꾸며 산불 및 병충해로부터 숲을 보호할 때만이,살아있는 건강한 숲을 만날 수 있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지구생태계의 구성원인 인간과 모든 생명체들에게 환희를 주는 가장 숭고한 행위예술이며,지구에 옷을 입히는 패션디자인인 동시에 나눔의 완성인 것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민속박물관 ‘한국의 초분’ 보고서

    초분(草墳)은 시신이 탈육(脫肉)될 때까지 이엉으로 덮어놓았다가 몇년 뒤 씻골하여 땅에 묻는 장례 풍속이다.판소리 ‘흥보가’의 ‘놀부 심술’ 대목에는 ‘새 초빈(草殯)에 불지르기’‘이장할 때 뼈감추기’처럼 초분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이렇듯 초분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친근한 장례풍속이었지만,최근에는 다큐멘터리 필름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희귀해졌다. ●전남일대 초분 78기 조사 국립민속박물관의 현지조사 결과는 그러나 초분이 아직도 서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민속박물관은 문헌자료로 초분의 역사를 재구성하고,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초분의 실태를 현지조사한 내용을 담은 종합 조사보고서 ‘한국의 초분’을 최근 펴냈다. 초분은 북쪽으로는 충남 홍성,동쪽으로는 경북 구룡포에서도 최근까지 조사되고 있지만,아무래도 호남이 중심이다.민속박물관이 이번에 전라남도 일대에서 조사한 초분은 78기.영화 ‘서편제’로 유명해진 완도군 청산도에서만 20여기를 확인했다.영화의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가는 돌담길이 끝나는 언덕 위에도 있었다. 50여 가구에 불과한 영광군 송이도에서는 12기가 조사됐고,여수 금오도와 화양면,신안군 증도와 도초도·비금도,고흥군 나로도와 개도 등에서도 찾아냈다.초분한 장소는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므로 더 많은 초분이 있을 것으로 민속박물관은 추정한다. ●풍수설따라 만들어지는 게 보통 초분의 유래는 장례 풍속의 하나인 빈(殯)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도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서쪽에 있는 빈전(殯殿)에 모셨다가 개장(改葬)하여 왕과 합장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초분은 명당을 택하여 길일에 장례를 치르면 후손이 발복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한편으로는 음력 정월이나 이월에 땅을 파면 토지신이 노한다고 생각하거나,살이 썩어 물이 빠진 메마른 뼈만으로 묻히는 것이 좋다는 속설에 따라 초분을 썼다.전염병으로 죽거나,객지에서 죽었거나,가난해서 장지를 구하지 못했거나,무령왕처럼 남편이 먼저 죽고 나서 아내를 합장하려 할 때도 초분을 만들었다. 초분의 이장은 보통 2∼3년이 지난 윤달이나 날을 잡아서 하지만,이번 조사에서는 6∼7년이 지난 것도 적지않았고,30∼50년이나 된 초분도 있었다고 한다. 초분은 일제강점기 위생법에 따라 공동묘지가 만들어지고 화장이 권장되면서 줄어들었고,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행정적으로 초분을 금지했지만,최근에는 ‘미개인들의 장례 풍속’이라는 편견도 없지 않다. ●지금도 ‘초분’ 모시는 후손들 있어 그럼에도 초분을 하는 사람들은 조상에게 예의를 다하면 후손들이 잘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살아 계시는 부모님처럼 초분을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다.하지만 장례를 두 차례 치러야 하는 번거로움과 많은 비용 때문에 오늘날에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초분을 만드는 추세라고 한다. 상장례 전문가로 초분의 현지조사와 집필을 주도한 정종수 유물과학과장은 “조상에게 효성을 다하고,후손도 잘된다는 믿음이 있는 한 초분은 당분간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면서 “없어졌는 줄 알았던 초분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서 풍속의 물꼬는 억지로 돌릴 수 없다는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의 초분’은 전국의 도서관·박물관·문화원·연구소 등에 무료로 배포하며,민속박물관 판매대에서 한정 판매한다.(02)725-5964.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中·日 달리는데 한국은 터널속에”

    “중국은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일본은 긴 터널을 빠져 나오고 있는데,한국은 컴컴한 터널로 들어서고 있다.기업에 투자나 출자를 못하게 하면 나가서 뭘 갖고 싸우란 말이냐.” 전국경제인연합회 현명관 부회장이 29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과 30대 주요그룹 투자담당자간의 간담회에 참석,우리 경제가 처한 어려움을 고속도로에 비유하며 작심한 듯 정부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10년뒤 후손들 천덕꾸러기 될까 걱정 그는 “요즘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말문을 연 뒤 “도무지 앞이 안보인다.지금은 이전 세대와 우리 세대가 벌어놓은 것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지만,10년 뒤 후손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꼬집었다.현 부회장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계기로 최근 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에게 한국 투자를 요청한 적이 있지만 한국의 노사문제와 출자총액제한 제도 때문에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며 노사문제와 정부규제에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출자총액제한과 관련,“투자는 기업의 무기”라면서 “투자를 위해 출자총액규제를 없애달라고 회의 때마다 요청해도 반응이 없다.”고 덧붙였다. ●기업투자 왜 지연되는지 생각해야 참여정부의 기업규제 완화와 관련해서는 “세액공제,특소세 및 법인세 인하 등의 접근 방식으로는 안 된다.”라고 못박았다.이어 “올해 대기업은 지난해보다 17%가 늘어난 45조원 가량의 투자계획을 갖고 있지만 1·4분기까지 7조 4000억원원밖에(16%) 투자되지 않았다.”며 “투자가 지연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뭔지 정부가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몰아붙였다. 현 부회장은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산자부는 기업의 친정이어서 다른 부처와 달리 속내를 드러내고 얘기할 수 있다.”고 말을 돌렸다. 박건승기자 ksp@˝
  • ‘안중근평화상’ 송두율교수 부인 대리로 받아

    “이 즐겁고 뜻깊은 순간에 기쁨보다 슬픔이 앞섭니다.” 끝내 환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남편 송두율(60) 교수 대신 제3회 안중근평화상을 받은 정정희(61)씨는 26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줄곧 굳은 표정이었다. 시상식에는 조광 고려대 교수,함세웅 신부 등 학계·종교계 인사 150여명과 안중근 의사에 관한 영화를 추진중인 개그맨 서세원씨,영화배우 유오성씨 등이 참석했다.기념사업회측은 “송 교수는 분단 조국 현실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을 학문적으로 승화시켜 안중근 의사의 민족,민주,통일,평화 정신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아들 송린(28)씨와 함께 시상식에 나온 정씨는 “이 슬픔,고통을 밑거름으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해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송 교수는 정씨가 대리낭독한 소감 서신을 통해 “안중근 의사를 처형한 일제는 실정법을 근거로 ‘안중근이라는 살인범과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면서 “그들이 과연 현재의 우리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또 “안중근 의사가 오늘 우리들을 보았더라면,일제 광복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못난 후손들에게도 매서운 비판을 가했을 것”이라면서 “하나인 조국을 위해 노력했을 뿐인 내가 ‘광복 이후 최대급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상황에서 이 상을 받은 것은,안 의사의 유지에 따라 하나가 될 조국을 위해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다.한편 부인 정씨에 따르면 오는 30일 1심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는 송 교수는 최근 독감과 불면증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정씨는 “남편이 지난 19일 모친 기일을 구치소에서 보낸 것 때문에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매우 울적해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채수범기자 lokavid@˝
  • [종하랑 선영이의 배낭메고 60개국](9) 베이징에서

    ‘중국 3무(無)’라는 말이 있다.중국 땅을 다 밟아본 사람,중국 음식을 다 먹어본 사람,그리고 중국 방언을 다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처음에 세계여행 루트를 짤 때는 이국적인 정서가 강한 인도나 파키스탄,터키 같은 나라에 비중을 두고,왠지 우리와 비슷할 것 같은 중국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하지만 막상 중국에 와보니 몇달씩 중국여행만 고집하는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듯했다. 거대한 국토를 구성하는 중국의 각 지방은 서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섬마을부터 아직 개발되지 않은 원시적 자연까지,그리고 세계적 대도시로 부각되고 있는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발전된 도시부터 아직 최빈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시골마을까지 사람들 사는 모습이며 문화,언어,음식이 모두 하나의 나라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 다르고 흥미롭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데,중국안에 세계가 다 있다는데,더 늦기 전에 우리도 중국을 좀더 배우고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행을 접고 베이징에서 1년간 공부할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하지만 역시 우리의 현재 본분은 여행.여행에 충실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배우기로 했다. 중국에서의 또 다른 황홀한 경험은 바로 정통 중국요리의 세계였다.여행일정상 중국의 많은 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는 없었지만 베이징에 있는 동안 최소한 중국의 각 지역별 전통요리는 모두 먹어볼 수 있었다. 평생 먹어볼까 말까 한 화려하고 푸짐한 중국 정통요리의 세계에 한동안 빠져 우리는 동남아를 여행하는 동안 빠진 살들을 모두 도로 찾게 되었다. 한국의 명동과 같은 왕푸징이라는 번화가에 가면 중국인에게는 대중적이지만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길거리 음식을 많이 볼 수 있다.족히 몇십개는 돼보이는 포장마차가 이어져 있는 음식거리가 있는데 대부분 꼬치구이를 전문으로 판다.무난한 걸로 하나 먹어보려고 종류를 보니 해마,뱀껍질,자라,메뚜기,누에,번데기 등을 꼬치에 꽂아 기름에 튀겨 주는데 번데기나 누에는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의 5배 정도는 커서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됐다.한국인들이 많이 오는지 우리를 보더니 한국말로 “해마? 뱀?” 하며 자꾸만 권한다. 중국인이 즐겨먹는 간식 중에 영양 만점인 음식이 바로 부화직전의 달걀이다.알 안에서 이미 병아리의 모습이 갖추어진 상태의 달걀을 쪄서,또는 볶아서 먹는데 영양가가 아주 많다고 한다.몸의 허약함을 빙자한 남편이 자연스럽게 하나를 집어든다.“그냥 삶은 달걀이라 생각하고 먹으면 돼.너도 먹어 봐.몸에 좋다 잖아.” 역시 한국남자들 몸 생각은 알아줘야 한다.시각적으로 다소 부담이 되는 음식이긴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그리고 몸 생각하는 외국 여행자들에게는 훌륭한 간식거리이다. 이렇게 영양가 많고 고단백질 음식,그리고 결정적으로 기름기 많은 음식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중국사람들이 살이 안 찌고 동맥경화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차를 많이 마시는 식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더운 여름이든 추운 겨울이든 계절에 관계없이 모든 식당에서는 찬물 대신 뜨거운 차가 나오는데,차를 계속 마시는 것은 기름기를 중화시켜 장을 깨끗하게 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몸이 차가워져 큰 병이 생기지 않도록 몸을 보온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다.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도 한여름에 이 방법을 한번 써 볼까 생각중이다. ●만리장성에 웬 눈썰매? 중국은 광활한 국토를 가진 나라답게 공원이든,문화유적지든 일단 걸었다 하면 좌우를 살피지 않고 직선코스로 바로 걸어도 최소한 두시간 이상 걸린다.9900칸의 방이 있다는 자금성도 꼼꼼히 돌아보려면 하루 종일 걸려도 다 보기가 어려울 만큼 압도적인 규모이다.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고 하는 만리장성은 또 어떤가.총 길이가 6000㎞라고 하니 시속 100㎞의 속도로 자가용을 타고 달려도 꼬박 60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그것도 평야가 아닌 산악지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성벽이니 만리장성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중 특히 군대 다녀온 한국남자들은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이런 것을 이렇게 길게…”하며 감탄사를 연발한다.솔직히 군대를 안 다녀온 때문인지 그것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바로 만리장성의 중턱까지 사람을 태우고 오르내리는 일종의 기구이다. 우리는 케이블카나 최소한 리프트 정도를 상상했는데 특이하게도 눈썰매장에 흔한 썰매 같이 생긴 기계로,오를 때는 전동장치에 의해 움직이고 내려올 때는 기다란 양철판으로 미끄럼틀처럼 만들어 놓은 통로에 혼자 앉아 손잡이로 브레이크를 조절하며 내려온다.조금만 속도가 붙어도 옆으로 휭 날아갈 것만 같다.밑에서 보면 봅슬레이라고 하는 스포츠 종목을 연상케 한다.역시 중국답다는 생각을 했다. 큰 돈 들이지 않고,나름대로 제 기능을 하니 ‘폼이 나지 않는’ 것 빼고는 그럴듯하다.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유적과 그를 통해 돈을 벌고 있는 후손들이 개발한 편의시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이다. ˝
  • [길섶에서] 판교의 추억/우득정 논설위원

    하루를 다한 햇살이 황사로 희뿌연 서쪽 하늘 가장자리로 잦아들 무렵,분당 아파트촌과 이웃한 판교 마을을 찾는다.10년 전 고속화도로가 분당과 판교를 갈라놓기 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큰 녀석은 손을 잡고 작은 녀석은 유모차에 태워 왔던 곳이다.신도시 개발을 앞둔 탓인지 야트막한 야산 사이의 텃밭에는 찢겨진 비닐과 쓰레기만 나뒹굴고 있다. 문득 야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허물어질 듯한 무덤 3기에 시선이 머문다.무덤 앞에는 ‘29’‘30’‘31’이라는 숫자가 적힌 자그마한 팻말이 세워져 있다.가까이 다가가 보니 팻말에는 이달 말까지 이장 신고를 하지 않으면 무연고 묘지로 간주해 처리하겠다는 경고성 통고가 담겨 있다.버려진 텃밭과 후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덤에서 머잖아 사라질 판교의 마지막 잔영이 느껴지는 듯하다. 황톳길을 따라 야산을 휘돌아가니 한때 옥수수와 고구마,보리,마늘로 무성했던 드넓은 밭 한가운데로 공사 차량 통행로가 휑하니 뚫려 있다.곳곳에 ‘경작 금지’라는 푯말과 함께.개발은 이렇게 이루어지는가 보다. 우득정 논설위원˝
  • 술따라 맛따라-계룡 백일주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란 속담이 있다.하지만 아무리 술맛이 좋아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예로부터 우리의 ‘주당’들은 100일 정도를 인내의 한계치로 본 것 같다.백일주란 이름이 붙은 술이 많은 것도 그렇고,꼭 이같은 이름이 붙지 않았어도 상당수의 술이 양조과정에서 100일 정도의 숙성·발효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전통식품 명인 제4호로 지정돼 있는 계룡백일주는 100일간의 숙성기간을 갖는 대표적인 전통 민속주. “꼭 100일을 채워야 술 맛이 좋은 것은 아니야.날이 더우면 술이 빨리 끓어 한 달 만에 익기도 하고,추우면 마냥 기다려야 할 때도 있지.아마 100일 정도에 잘 익도록 온도를 맞추어 정성을 들이면 술 맛이 좋다는 의미일 게야.” 계룡백일주 제조 기능보유자인 지복남(78)씨는 백일주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지씨는 조선 인조대왕 때부터 가양주로 백일주를 빚어서 마셔온 연안 이씨 집안의 14대손 며느리다. 14대 조부인 이귀(李貴)는 인조 반정의 일등 공신.몇차례의 반정 시도가 무산된 끝에 가까스로 성공해 인조를 왕위에 올리자,왕은 고마움의 표시로 사가에서 마시던 백일주와 그 제조법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백일주는 후손들에 의해 연안이씨 집안의 가양주로 자리잡았다.‘계룡’이란 이름은 89년 백일주가 충남 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면서 심대평 당시 지사가 계룡산에서 이름을 따 붙여준 것이다. “한때 백일주의 맥이 끊길 뻔했어.일절 강점기에 일체 술을 못빚게 했거든.그런데 술 없이 못사는 게 우리 집안 내력이었지.조부님과 아버님 모두 ‘마시곤 가도 지고는 못간다.’고 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셨어.몰래 빚을 수밖에 없었지.” 들켜서 벌금도 많이 물었지만,다행히 부잣집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나중엔 ‘저 집에 가면 항상 맛있는 술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순사와 관료들까지 와서 술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고 했다. 계룡백일주는 찹쌀과 백미,누룩,솔잎,홍화,오미자,진달래꽃,재래종 국화로 빚은 고급 약주다.밑술과 덧술 과정을 거치는데,밑술을 빚을 때 고두밥이나 백설기가 아닌 죽을 쑤어 누룩과 섞어 발효시키는 게 특징.그래야 술 맛이 차지고 감칠맛이 난다고 한다. 누룩은 직접 만든다.통밀과 찹쌀을 같은 분량으로 섞어 빻은 것을 반죽해 띄운다.여름엔 2개월,겨울엔 3개월 정도 2∼3일에 한번씩 뒤집어주어야 노르스름하면서도 하얀 누룩이 나온다고. 솔잎,진달래는 집 주변 산에서 직접 채취한다.1년치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인부를 사서 채취해다가 말려 보관한다.재래종 국화는 밭에서 재배해 쓴다.솔잎과 국화는 반드시 토종을 써야 한다고.일본에서 건너온 소나무류에서 채취한 솔잎과,꽃이 화려한 요즘 국화를 쓰면 쓴 맛이 나기 때문이다. 계룡백일주는 약주(16도)와 소주(40도)로 나온다.약주는 부드러우면서 진하다.이는 100일 이상의 충분한 숙성기간을 거쳤기 때문. 지씨는 “판매하기 위한 술은 경제성 때문에 100일의 숙성기간을 지키기가 어렵다.”며 “보통 온도 조절을 통해 시간을 훨씬 앞당긴다.”고 말한다.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저온에서 발효 숙성시켜야 향과 맛이 좋다고 했다. 소주는 약주를 증류시켜 벌꿀을 가미한 리큐르다.약주는 여과 과정을 거쳤어도 1년 정도만 보존이 가능하지만 소주는 오래 보관할수록 맛과 향이 좋아져 영구 보관이 가능하다. ■ 따라 빚어보세요 재료:누룩,찹쌀,오미자,재래종 국화,진달래꽃,솔잎. 1.찹쌀 1말을 불렸다가 가루로 빻아 물 1말을 넣어 묽은 죽을 쑨다.주걱을 꽂으면 설 정도로 한다. 2.누룩 2되와 고루 섞어 20∼25도 정도 되는 실내에서 한 여름엔 10여일,겨울엔 1개월가량 발효시킨다.누룩은 통밀과 찹쌀을 같은 분량으로 거칠게 빻아 띄운 것을 쓴다.(밑술 빚기) 3.찹쌀 2말로 고두밥을 짓는다.시루나 찜통 밑에 솔잎을 깔고 찌면 좋다. 4.식힌 고두밥에 응달에서 말린 오미자,국화,진달래꽃,솔잎 각 1근을 함께 섞어 밑술 항아리에 담아 잘 젓는다. 5.창호지로 봉해 뚜껑을 덮어 두달 열흘 정도 발효시킨다. 6.술이 잘 익으면 여과지나 촘촘한 보자기에 덧술을 떠내 짜낸다.16도 정도의 계룡백일주가 나온다. 글 공주 임창용기자 sdragon@˝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기고] 고구려사 제대로 지켜내려면/조법종 우석대 사학 교수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동북공정’ 2004년도 연구과제가 서울신문을 통해 소개되었다.이는 ‘동북변강연구총서’로 간행된 2003년 과제와 연결된 것으로 고구려,발해문제를 중심으로 우리민족 기원문제와 명·청시기 조·중관계사 등 중국이 동북3성(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 지역에 대한 역사적 장악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이와 관련된 각 연구자 및 관련기구들의 범위와 성격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동북공정에 참여한 조직이 35개에 달하며 관련인력은 수백명에 달한다는 것이다.즉,동북3성지역의 모든 사회과학원과 대학,전문연구소가 중앙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정점으로 연결되어 역할 분담을 통해 관련연구를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그리고 이 조직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대사에서 근현대사까지 동북3성지역과 관련된 중요 쟁점사항들을 다양하게 망라하여 연도별로 진행하고 있음이 실제 확인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2004년 3월15일에 공포된 ‘동북공정 과제연구지침’내용이다.이 지침에는 동북공정이 추진하는 6개의 연구항목과 과제목표가 제시되어 이에 근거한 연구계획 수립을 관련 연구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그런데 이 내용 중 새롭게 ‘고구려발해국문제연구’가 추가되어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동북공정에서 고구려,발해가 핵심 연구분야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또한 2003년의 세부연구주제였던 ‘발해유적현상조사’가 2004년 내용에는 생략되어 있다.이는 2005년에 헤이룽장성 닝안(寧安)과 지린성 둔화(敦化)지역의 발해유적을 20억위안(약 2800억원)을 들여 중국고대도시로 복원한다는 최근 보도와 연결된 것임을 보여준다. 결국,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라고 학술적으로 부각하고 곧바로 그에 대응되는 역사공간인 시안의 고구려유적과 둔화의 발해유적 등을 중국역사유적으로 복원,정비하여 명실상부한 중국역사화 작업을 완수하려는 의도를 이번에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또한 북방지역의 고대 종족,고조선,한국민족 및 고대 국가기원을 연구해 중국과 우리 민족의 관계사,국경문제,이민문제 등을 중국적 입장에서 정리하여 결국 이들 역사마저도 중국 역사범주에 있음을 강변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특히 2004년 연구과제인 ‘조선반도민족,국가의 기원과 발전’이란 제목의 연구과제는 중국의 연구가 고구려,발해와 함께 우리민족의 성격까지도 중국측 논리로 파악하려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 과제의 연구책임자가 다른 연구논저에서 이미 한국민족은 중국계통의 유이민 세력이며 중국문화가 한국문화의 모태라는 식의 철저한 중국중심주의 입장을 피력한 사실을 감안할 때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추진하는 연구사업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고구려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과 연결된 것이다.그리고 이를 통해 중국은 동북지역을 장악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수백-수천년 전에도 같은 상황인 것처럼 호도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이는 우리 민족의 존립근거와 역사문화적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폭거이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역사침략이다. 이제 우리는 후손에게 우리 역사를 당당히 지켜내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 무엇을 했고 또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때이다.특히,지난 1일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이 중국의 역사왜곡과 한민족 정체성부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의 열정과 노력,체계적인 정부의 지원,그리고 보다 많은 국민의 관심과 우리 역사사랑이 요청된다. 조법종 우석대 사학 교수˝
  • [盧탄핵안 가결-탄핵심판절차] 헌법재판관 구성·성향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을 심리할 헌법재판관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3명과,대법원장이 지명한 3명,국회가 선출한 3명 등 9명이다.형식상 모든 재판관의 임명권자는 대통령이지만,6명은 내용상으로는 대통령과 무관한 셈이다. 재판관 가운데 7명은 판사 출신이고 주선회·송인준 재판관만이 검사 출신이다.윤영철·주선회·송인준 재판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최종영 대법원장은 법원장이나 고법부장판사를 역임한 김영일·김경일·전효숙 재판관을 지명했다.국회에서 선출된 권성 재판관은 한나라당이,이상경 재판관은 민주당이 추천했다.김효종 재판관은 한나라당·민주당 공동의 지명을 받았다.판례를 볼 때 국회 지명자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편이다. 재판관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지명·선출자가 다르고 소수의견을 많이 내는 재판관도 많아 전체 성향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법조계에서는 권성 재판관과 전효숙 재판관은 상대적으로 진보적 인물로 분류한다.대법원장 후보로도 거론됐던 윤영철 소장은 ‘무색무취’하다는 평을 듣는다.대법관 시절 소수의견을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경찰관에게 부당한 감금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시민이 경찰관을 상대로 낸 재정신청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김영일 재판관은 이라크 파병결정의 위헌확인 소송에서 “파병결정은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문제이며 대통령과 국외의 의견을 사법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권성 재판관은 소수의견을 많이 낸 재판관으로 통한다.2001년 간통죄에 대해 헌재가 8대 1로 합헌 결정을 내렸을 때 혼자 위헌 의견을 낸 바 있다.송인준 재판관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찰의 피의자 알몸 수색은 헌법에 보장된 인격권 및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번 탄핵심판의 주심을 맡은 주선회 재판관은 ‘편법증여’ 논란을 빚었던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 등에 대한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과 관련,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참여연대가 제기한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기각한 일이 있다. 전효숙 재판관은 노무현 대통령과 사시 동기로 이영애·전수안 부장판사와 함께 여성 판사의 리더격이었다가 헌재 재판관으로 발탁됐다.가혹행위가 없었더라도 무리한 구속수사로 피해를 입었다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적이 있는 등 여성과 소수자 보호에 적극적이다. 가장 최근에 선임된 이상경 재판관은 국회청문회에서 일제 잔재 청산 관련 입법 추진과 관련해 “친일파나 반민족행위 처벌이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공익 목적에 한해야지 보복적 차원이나 후손의 명예를 훼손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편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에 대한 지난해 결정에서 권성·김영일·김경일·송인준 재판관 등 4명은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냈다.이들은 “재신임 국민투표가 악용된 사례가 많으므로 민주주의 발전에 해악을 끼친 신임 투표로 활용돼선 안 된다.”고 밝혔다. 지난 88년 헌법재판소가 설치된 이래 3·3·3원칙의 재판관 임명은 삼권분립의 상징이 됐다.대법관과 달리 헌재 재판관들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위헌 여부를 전혀 다르게 판단할 수 있기에 다양한 구성이 절실했다.헌법 체제 유지·중립·개혁 등 입장이 다른 재판관이 모여야 사건을 다각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다.그러나 이번 탄핵안처럼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건에선 법률적 판단보다 정치 성향에 따라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노 대통령이 직접 선출한 재판관이 단 한 명도 없는 현 상태에서 헌재의 결정이 주목된다. 정은주기자 ejung@˝
  • [깔깔깔] 며느리 헌장

    ●며느리 헌장 나는 대한민국의 며느리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밖으로는 남편의 출세에 신경을 쓰고 안으로는 남편 몰래 적금통장을 마련한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아름다운 몸매와 교활한 애교를 바탕으로 바가지 긁는 법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고집을 없애며 우리의 처지를 약한 여성의 발판으로 삼아 관능미 넘치는 몸매와 경국지색의 예쁜 각선미를 갖춘다.친정과 시가를 오가며 시부모와 남편을 숭상하고 시댁의 뼈대있는 전통을 이어 받아 에누리없는 주체의식을 북돋운다. 나아가 투기의 큰손으로 행운과 복을 잡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길이요, 횡재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방대한 부동산과 빛나는 자가용을 마련하고 근면과 검소를 가훈으로 오늘도 남편과 나의 정열을 바탕으로 옥동자 생산에 주력할 것이며 자녀교육에 최선을 다하여 아들을 나라의 우량아, 딸은 미스 유니버시아드를 만들 의무를 가지고 충실히 본연의 임무를 실행해 나아간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재산을 위하여 오늘도 새 역사를 창조하자.˝
  • [데스크시각] 서울의 변신에 대한 ‘쓴소리’/임태순 전국부장

    서울신문사와 시청 사이에는 조그만 길이 있다.폭 10m 안팎이지만 노상주차장을 끼고 있는 일방통행로인데다 이용차량도 적어 한적하다.사람과 차량이 서로 편한 대로 지나가는 공존,공생의 길이었다.그러나 최근 이 길이 부산해졌다.시청앞 잔디광장 조성으로 교통체계가 바뀌어 차량 전용의 3차선 일방도로로 변했기 때문이다.승용차들이 소음과 함께 매연을 내뿜는 것은 물론 쌩쌩 달리기까지 해 새삼 옛길이 좋았다는 것을 느낀다.그러나 시청앞에 잔디광장이 들어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불편을 참는다. 이명박 시장이 취임한 이후 서울에는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그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답게 토목공사로 서울의 변신을 주도하고 있다. 서울시내를 관통하는 청계고가가 없어지면 교통은 엉망진창이 되지 않을까,해체하면 먼지는 얼마나 날릴까 하며 걱정했지만 어느 순간 청계고가가 없어지고,지금은 청계천을 복개한 도로도 걷어내고 있다.어느날 중앙극장 앞을 지나면서 거리가 박하사탕처럼 환해지고 시원해졌음을 느꼈다.우중충한 삼일고가가 철거됐기 때문이었다. 70년대 ‘개발 드라이브’시대의 산물로 도시미관을 해쳐왔던 고가도로와 육교도 속속 해체되고 있다.원남,미아 고가도로가 헐렸고 이달중 서울역앞 고가도로도 철거된다.횡단보도 대신 건설됐던 지하도와 육교도 속속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명박 시장의 ‘서울 개조’는 기본 컨셉트를 잘 잡은 것 같다.색안경을 끼고보면 대권을 의식한 전시행정적 요소가 짙어보이지만 차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자연과 환경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복원방식은 여전히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아 안타깝다.개발시대의 조급증이 다시 번진 듯 동시 다발적 공사로 서울시내 여기저기가 파헤쳐져 있다.조금 있으면 세종로 중앙분리대도 없어진다고 한다.시민들은 “공사로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안내문을 보면서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에는 청계천 복원공사에 제동이 걸렸다.문화재청이 오간수문,수표교 등 청계천 6개 발굴지역에 공사중단명령을 내린 것이다.서울시가 내년 9월로 예정된 청계천 복원 공기에 쫓겨 문화재전문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발굴과 공사를 병행하다 모전교 호안석축에 손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얼마전 만난 언론계 선배는 청계천 복원공사 현장 주변을 지나면서 “참 우리는 무식했어.수표교 등 저런 것을 두고 마구 뒤덮어버렸으니.”라면서 자책을 했다.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 로마는 지하에 매장돼 있는 엄청난 유물 때문에 지하철 노선 신설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소설가 박경리선생은 산과 강을 훼손하며 개발하는 것을 두고 “우리 조상들은 자연(원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로 살아왔는데 요즘은 원금을 까먹으며 살고 있다.”면서 “우리는 후손들에게 뭘 물려주나.”라고 했다. 서울은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그러나 역사의 흔적은 빈약하기 그지없다.행여 복원이란 미명 아래 그나마 얼마남아 있지 않은 원금마저 날려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다.그리고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의 경제력이라면 보존과 복원도 이제 ‘빨리 빨리’에서 벗어나 품위있고 품격있게 할 때도 된 것 같다. 임태순 전국부장˝
  • 후손들이 빛내준 ‘조상님 전시회’

    ‘그 조상에 그 후손’.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1595∼1671)의 집안에 꼭 맞는 말이 될 것 같다.이경석은 대(大)문장가이자,병자호란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큰 몫을 한 인물이다. 경기도박물관은 지난해 가을 이경석이 2004년 ‘4월의 문화인물’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경석 특별전’을 열 것을 서슴지 않고 결정했다.이경석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기 때문. 경기도박물관은 1996년 설립준비에 들어가면서부터 도내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수집·정리하고자 각지로부터 유물을 기증받는 운동을 펼쳤다.이 때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이 바로 이경석의 후손인 전주 이씨 백헌상공파.성남시 석문동에서 가통을 이어온 이경석의 후손들은 2000년 보물 제930호 궤장 및 사궤장연회도첩을 비롯한 문중 유물을 일괄 기증했다. 궤장이란 노신(老臣)들에게 필요한 의자와 지팡이다.20년 이상 정승을 지내야 궤장을 하사받았다.이경석의 궤장도 1669년 현종이 내린 것이다.이경석은 병자호란 당시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이른바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을 만큼 뛰어난 현실인식을 갖고 있었다.훗날 효종의 북벌계획이 청에 알려졌을 때는 모든 책임을 영의정인 자신에게 돌려 극형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을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경기도박물관은 백헌 문중이 기증한 유물을 바탕으로 ‘난세(亂世)의 명재상 이경석’특별전을 12일부터 새달 11일까지 연다.출품되는 95점의 유물 가운데 백헌 문중의 기증유물이 71점을 차지한다.궤장과,청흥군 이중로 정사공신교서 등 보물을 비롯, 효자정려문,문과중시 장원급제 교지,연지기로회첩 등 이경석 관련 유물,그리고 이경석의 후손으로 서예의 대가인 원교 이광사의 행서병풍도 나온다.이종선 경기도박물관장은 “국난을 맞아서는 나라를 구하는 데 힘쓰고,정쟁이 한창일 때는 붕당의 폐해에서 벗어나고자 탕평에 노력을 기울인 이경석의 삶은 요즘처럼 어지러운 정치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면서 “선조의 유물은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 가장 훌륭히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사실도 이번 전시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 하와이 동포 4세 代이어 판사

    하와이 주정부 산하 단체교섭 조정관직을 맡고 있는 하와이 동포 4세 테드 홍(46) 변호사가 부친 테니 선 홍씨에 이어 주 판사 자리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홍 변호사는 최근 린다 링글 하와이 주지사에 의해 빅 아일랜드 순회재판소 판사로 지명됐으며,주상원에서 임명 동의안이 통과되면 오는 6∼7월 판사로서 첫 임무를 수행한다. 1900년대 초 하와이로 첫 이민온 사탕수수농장 한인 노동자의 후손인 홍 변호사의 부친도 지방법원 판사로 10년간 일했다. 그는 하와이대 정치학과·법학대학원을 나와 지난 91년 힐로로 이주,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하와이 카운티의 대배심 법률고문을 맡았다. 연합˝
  • [데스크시각] 독수리의 눈과 긴 호흡/한종태 공공정책부장

    “여러분,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반드시….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필자가 다니는 S교회 담임목사가 지난주 설교에서 전한 내용이다.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64년 12월10일 서독 루르지방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에서 있었던 일이다.당시 한국은 외자유치 ‘구걸’-맹방인 미국도 거절했다-끝에 서독으로부터 가까스로 1억 5000만 마르크 상업차관을 제공받기로 했다.하지만 지급보증이 문제였다.결국 서독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고 이들의 급여를 3년간 서독은행인 ‘코메르츠 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방식으로 지급보증의 실타래를 풀었다고 한다.결과적으로 이들은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담보물이었던 셈이다.독일 땅에 도착한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시신을 닦는 작업이었고,광부들은 독일 광부들보다 더 깊이 파들어가야만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GNP 76달러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난한,정말 초라한 국가였다.여기서 한강의 기적이니,경제성장이니 하며 박 대통령의 공과를 거론할 생각은 없다. 지금 나라가 온통 어지럽다.정치는 정치대로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고,경제는 언제 좋아질지 예측불가능이어서 국민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사회는 사회대로 거의 매일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질이다.곳곳에서 신음소리와 장탄식만 들린다. 더이상 추락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먼저 마음을 비우자.40년 전 나보다는 국가를 생각한 그들의,가슴 뭉클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다.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의 지도층은 물론 구성원들 모두 서로의 편협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상대방을 한번 더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피눈물’과 ‘눈물젖은 빵’을 다시금 떠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도 책값하라며 꼬깃꼬깃한 돈을 건네주시던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머리카락을 팔아 마련하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그처럼 카타르시스가 절실한 때다. 그런 뒤에 ‘독수리의 눈’과 ‘마라토너의 긴 호흡’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하늘 높이 올라가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의 눈과 결승점을 염두에 두고 42.195㎞를 달려야 하는 마라토너의 긴 호흡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될 수밖에 없다.부분만 보고 전부로 판단하거나,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자마자 전력 질주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조급하고 단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다 적극적인 도전의식을 덧붙이면 금상첨화다.‘우리의 삶은 인간으로서 가치와 존경을 받기 위해 도전하는 값진 모험이지만,한편으론 즐길 만한 게임’(교육학자 스펜서 존슨 박사)이어서다.다시 한번 비상을 꿈꾸며…. 한종태 공공정책부장 ˝
  • [고시휴게실] 고려초기 관리 채용방법

    고려시대에는 왕권이 많은 도전을 받았다.초기에는 호족에게,중기에는 무인에게 흔들렸다.말기에는 몽골의 침탈을 받기도 했다. 이런 왕권의 기복은 관리 임용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특히 고려초기와 무인 집권시기에는 임용방식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초기의 관리 임용방식은 과거제와 음서제가 대표적이다.음서제는 조상의 음덕으로 그 자손이 관리가 될 수 있게 하는 제도.왕권이 확립됐을 때는 과거제가,귀족이나 호족 세력이 강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음서제가 활발했다. 과거제는 4대인 광종 때 도입됐다.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공신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시행된 것이다.이전까지는 호족연합 정권인 탓에 호족과 왕족이 관직을 독점했다. 과거제 시행 초기에는 일정 신분 이상이면 예비시험 없이 본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관료체계가 정비되면서 복잡해졌다.8대인 현종 때는 지방에서 시험에 응시할 경우,주·현의 크기에 따라 1∼3명씩으로 응시인원을 제한했다.지방에서 시험에 합격해도 서울로 올라와 국자감에서 재시험을 친 다음에야 본시험을 볼 수 있었다.9대인 덕종 때는 지방과 중앙을 막론하고 모두 본시험에 앞서 예비시험인 국자감시(國子監試)를 보도록 했다. 시험과목은 제술업과 명경업,그리고 잡업 등으로 나눠졌는데,제술업을 가장 중요시했다.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과거 외에 승려를 대상으로 승과가 실시됐으나,무인을 양성하는 무과는 거의 실시하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음서제는 삼국시대의 천거제와 신라 귀족사회의 틀 속에서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손을 관리로 임용하는 것이다.성종 때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비됐다.왕족의 후예나 공신의 후손,5품 이상 고급관료의 자손 등이 혜택을 봤다.음서출신자에게 승진의 제한은 없다.음서출신자의 대부분이 5품 이상 고위직에 오를 수 있고,5품 이상으로 승진하면 그의 자손은 다시 음서로 공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5∼6세에 음서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15세가 되면 관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과거에 붙은 뒤에도 오랫동안 공직에 나가지 못한 사례도 많았다.그만큼 음서 진출자가 많았다는 얘기다.중앙인사위원회 관계자는 “음서로 진출한 관리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다시 과거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조덕현기자 hyoun@˝
  • 청계천 이번엔 ‘문화재 훼손’ 논란

    지난해 7월 청계천 복원공사의 착공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던 시민단체와 서울시간의 힘겨루기가 다시 시작됐다.당시 서울시의 착공 강행에 밀렸던 시민단체들은 최근 청계천 오간수문터에서 홍예석(무지개모양 다리 기초석) 등 조선시대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자 유물 발굴을 위해 공사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문화연대,녹색연합,환경정의시민연대 등 11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올바른 청계천 복원을 위한 연대회의’는 지난달 26일 서울시청 앞에서의 공사중단 시위를 시작으로 반대운동에 돌입했다.특히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공사에 대한 시민 의견을 모으기 위해 시민단체와 전문가 등으로 구성한 ‘청계천 복원사업 시민위원회’(시민위원회)의 역사분과위원회도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현재 시민단체와 서울시의 입장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태다.서로 양보할 수 없는 불가피한 입장을 내세워 마치 지난해 벌어졌던 ‘7월1일 착공’ 논란을 방불케 하고 있다. ●청계천 논란 ‘2라운드’ 돌입 시민단체는 “공사강행으로 문화유적·유물의 훼손이 우려된다.”며 공사중단을 요구하고 있다.반면 서울시는 공사를 멈추면 여름철 장마 때 피해가 커질 수 있다며 강하게 맞서고 있다. 강찬석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600년 역사유적인 청계천의 발굴을 청계천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 뭉개 없애버린다면 역사와 후손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될 것”이라며 비난했다. 시민위원회 역사문화분과위 홍성태 간사위원(상지대 교수)은 “잘못된 실시계획을 제출하고,불법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2년 6개월 안에 업적을 만들어 내겠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공사를 중단할 경우 공사 지연에 따른 시민불편과 함께 다가오는 장마철에 물난리 등이 우려된다.”면서 “공사중단에 따른 시민불편과 안전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반박했다. 시민단체들은 문화재청에 즉각 공사중단 명령을 내릴 것과 청계천 구간에서 문화재가 발견된 곳을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사적으로 ‘가지정’해줄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또 청계천 전 구간에 대한 전면 문화재 발굴을 촉구했다. ●“문화재 발견지역 사적 가지정 해야” 청계천 발굴조사사업을 모니터링해온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최근 발굴된 모전교 양쪽의 호안석축,오간수문의 홍예석 등은 청계천 전체 5.8㎞구간 중 극히 일부인 500m구간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발굴지역을 확대할 경우 문화재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덕희 시민위원회 위원은 “실시설계에 대한 시민위원회의 심의가 이뤄지지 않았는 데도 서울시가 이미 광교의 상판공사를 하고 있으며,수표교의 양쪽 석축공사를 하고 있다.”면서 “서울시가 시민위원회를 완전히 무시하고 제멋대로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이 ‘문화재 출토로 청계천 복원을 멈춰야 하는가’라는 내용의 인터넷 폴(실시간 투표)을 실시한 결과,1일 현재 9098명이 참가해 이 가운데 81.9%인 7448명이 ‘문화재 보전방식 검토를 위해 일단 공사를 멈춰야 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시민불편 최소화를 위해 공사 변경은 없어야 한다.’는 응답은 16.3%인 1482명에 그쳤다. 조기 완공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이에 따라 오는 2005년으로 돼 있는 완공 예정 일정도 미지수다. ●성급한 공사강행 부작용 우려 목소리 강병기 시민위원회 위원은 “처음부터 지적한 ‘하천공원형’ 복원사업의 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면서 “청계천에 인공둔치를 만들고 조경을 꾸미고 시설을 갖추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비가 조금만 와도 침수돼 쓰레기로 뒤덮일 수밖에 없는 대단히 잘못된 계획”이라고 지적했다. 이민규 경실련 서울시민사업팀 간사는 “그동안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동의를 얻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서울시가 문화재를 제대로 복원하라는 시민위원회와 연대회의의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해 올바른 복원계획 및 절차를 다시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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