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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30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0)-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나는 표석에 새겨진 임방의 시를 묵묵히 읽어 보았다. 이처럼 두향의 무덤은 마치 계주경기에서 바통터치를 하듯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잊혀지지 않고 제를 올리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석 측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으로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밖에 영조 때 문인 월암 이광려, 퇴계 후손인 이휘재 등의 시가 있으며, 토정(이것 역시 오기이다) 이지번 선생의 아들 아계 이산해로 하여금 두향의 제를 지내게 하였다. 단성향토문화연구회건립(丹城鄕土文化硏究會建立)” 두향을 위해 추모시를 지은 이광려와 이휘재의 시는 이미 앞에서 전재하였고. 비문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면 향토문화연구회에서 해마다 두향의 추모제를 올려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맥이 끊어지지 않고 내려온 두향의 추모제가 마침내 향토문화연구회에서 계승하여 이를 지켜나가고 있다면, 그리하여 두향제가 온 마을의 축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면 이는 다행스러운 일인 것이다. 나는 비닐백 속에서 구내매점에서 사온 소주 한 병을 꺼내들었다. 노산 이은상이 ‘내 비록 풍류랑은 아닐지언정 두향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못 놓고 가는 것이 얼마큼 서운한지 모르겠다.’고 탄식하였던 것처럼 나는 비록 풍류객은 아니지만 마땅히 두향의 무덤 앞에 술 한 잔 바쳐 제향을 올리는 것이 마땅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종이컵 속에 술을 한 잔 가득 따르고 나는 그것을 상석 위에 올려놓았다. 문득 송림 속 암벽 사이에 핀 붉은 철쭉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활짝 핀 철쭉꽃 한 가지를 꺾어 상석 위에 함께 놓았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춘향전에 나오는 판소리 한마당이 기억되어 떠올랐다. 춘향이가 변사또에게 항의하던 노래였던가. 정확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충효열녀에 상하 있소. 자세히 들으시오. 기생으로 말하나이다. 충효열녀 없다 하니 낱낱이 아뢰나이다. 해서(海西) 기생 농선이는 동선령에 죽어 있고, 선천 기생은 아이로되 칠거학문 들어 있고, 진주 기생 논개는 우리나라 충렬로서 충렬문에 모셔 놓고 천추향사(千秋享祀) 제사지내며, 청주 기생 화월이는 삼충각에 올라 있고, 평양 기생 월선이도 충렬문에 들어 있고, 안동 기생 일지홍은 생열녀문(生烈女門) 지은 후에 정경가자(貞敬加資) 있사오니 기생을 너무 없이 보지 마옵소서.…” ‘열녀춘향수절가’ 중의 한 구절인 이 판소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생이라 할지라도 농선이는 우리나라 10대 절경 중 하나인 황해도 구월산 동선령에 묻혀 있고, 진주 기생 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어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베풀 때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던져 순국하였고, 안동 기생 일지홍은 살아있을 때 지은 열녀문에 문무백관 아내의 작호인 정경부인의 품계로 묻혀 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두향의 무덤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두향이도 퇴계를 위해 종신 수절하였다. 불과 9개월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두향은 퇴계만을 사랑하였고 퇴계만을 섬겼다.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나자 신임 사또에게 기적(妓籍)에서 빼달라고 청원하였던 두향. 그리하여 마침내 두향은 관기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던가.
  • 몽양 딸 “아버지 서훈 거부”

    몽양 딸 “아버지 서훈 거부”

    북한에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직계 혈육인 친딸 여원구(77)씨가 최근 몽양에게 수여된 건국훈장(대통령장) 거부 의사를 밝힘에 따라 훈장은 남한의 유족들에게 전달되거나, 정부가 보관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보훈처는 7일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인 여원구씨가 최근 북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몽양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를 거부한 것과 관련,“국내 유족은 물론 내부 협의를 거쳐 상훈법에 따른 적절한 훈장 전달대상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현 상훈법에는 훈장을 직계 배우자 및 직계 후손에게 전달하도록 돼 있으나, 해당 유가족이 없으면 훈장 추천권자(보훈처장)가 행정자치부 장관과 협의를 거쳐서 지정한 사람에게 수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하지만 월 120여만원에 이르는 유족연금은 훈장과는 달리 딸·손자 등의 직계 후손에게만 수령 자격을 부여하고 있어, 방계인 남측의 유족들은 수령 대상에서 제외된다. 한편 여원구씨는 최근 북한 통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남조선 당국이 주는 훈장을 단호히 거부한다.”며 “남조선 당국이 진정으로 아버지를 평가하려 한다면 암살범인 미국의 죄악부터 밝혀내고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승진 구혜영기자 redtrain@seoul.co.kr
  • 성남시의회, “보전녹지는 말 그대로 보전해야”

    성남시의회, “보전녹지는 말 그대로 보전해야”

    성남시의회가 ‘보전녹지 내 종교시설건립’ 조례를 불과 4개월여 만에 뒤집었다. 시민단체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해당 종교시설은 우울증(?)에 걸렸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0월29일. 성남시의회는 이날 제120회 임시회에서 보전녹지 내 종교시설을 허용하는 도시계획조례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성남시 공무원들은 물론 시민들도 이 조례안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성남시 한 관계자는 “상위법의 정신을 어기는 조례”라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일부 시의원들도 ‘보전녹지는 보전하라고 지정한 곳인데….’라며 입을 모았다. 여기다 시민단체들도 이 조례가 보전녹지 내 무분별한 종교시설 허가를 남발하는 것은 물론 특정 종교단체에 대한 특혜의혹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정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시의회는 지난달 25일 122회 제2차본회의에서 김창완(수정구 태평3동) 의원 등 10여명이 발의해 도시건설위원회에서 가결된 ‘보전녹지 내에 종교집회장을 불허한다.’는 내용의 도시계획조례 중 개정조례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21표, 반대 18표로 원안 가결했다. 이들 의원은 표결 전 ‘얼마 남지 않은 보전녹지는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같은 설득이 결국 받아들여지게 됐다. 홍용기(수정구 복정동) 의원은 “보전녹지는 보전의 필요성 때문에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종교시설에 대해 건축을 허가한다면 모든 종교시설이 개발을 요청할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개진해 왔다. 시민단체들은 불과 4개월여 만에 조례를 뒤집는 일이 발생했지만 늦게나마 환원돼 기쁘다며 의회에 축하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개정조례안이 가결된 본회의장은 투표방식에서부터 발언내용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지며 고성이 오가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儒林(29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두향의 무덤 앞에 서 있는 표석에서도 두향과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향이 단양 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토정 이지번 선생에게 청풍경계인 옥순봉을 양보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표석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 문장은 분명한 오기이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호는 성암(省菴)이지 토정(土亭)이 아니다. 토정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냄으로써 토정이란 호가 붙었던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이지함(李之)을 가리킨다. 이지함은 바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사람으로 역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던 기인이었으며,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다.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고, 이지번역시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지번은 고려조의 대학자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단양에 내려와 구담에 집을 짓고 한세월을 보냈던 은사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이지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조 8년(1575 12월1일). 전 내자시정(內資侍正) 이지번이 사망하였다. 이지번은 목은 이색의 후예인데, 어릴 때부터 침착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들자 다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상중에 몹시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가례를 따라 행하였다.…(중략)…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이 되었으나 사은하고는 출사하지 않다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사평이 되었다. 아들 이산해는 어릴 적에 신동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尹元衡:당시 최고의 세도가)이 자기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으려하자 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과 함께 단양의 구담에 내려가 은둔하여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소박한 생활을 하여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이 그와 벗하여 도학을 권면하였다. 금상초년에 청풍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을 숭상하였다.” ‘왕조실록’에 실려진 내용대로 은사였던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을 청풍군수로 제수케 추천했던 사람이 바로 이퇴계. 그러므로 이지번과 그의 아우 이지함은 이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풍수에 밝은 토정 이지함은 형에게 구담봉 부근에 명당이 많은 것을 말하여 가족의 무덤을 다섯 개나 이장함으로써 당대가 지나기도 전에 아들이 영의정에 오르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만큼 이곳일대를 사랑하였는데, 이지번은 항상 푸른 소를 타고 강가를 오르내리며, 구담과 오로봉 사이에 칡넝쿨로 큰 줄을 만들어 가로지르고 학모양의 탈것을 만들어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니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신선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번 이름 앞에 동생 이지함의 호인 ‘토정’이 명기된 것은 분명한 오기인 것이다.
  • 儒林(296)-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6)-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만약 정비석이 두향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해 그녀의 에피소드를 ‘명기열전’에 소설로 형상화하지 못하였더라면 두향은 수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정비석은 ‘명기열전’에서 두향의 무덤을 찾을 때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부근 일대는 과연 물살이 급한 여울이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과 옥순봉이 있는데, 그 부근의 물살이 어찌나 센지 배가 물결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물결을 따라 내려가는데도 위험하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강선대는 강 위쪽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저편 강가에 있으면서도 그 여울을 건너가는 데는 어지간히 힘이 들었다. 나는 두향이가 그처럼 좋아했다는 강선대를 자세히 돌아보고 나서 두향의 무덤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두향의 무덤이 있다는 강가일대는 쑥이 무성하게 자라서 한길이나 넘는 쑥들을 베어 버리기 전에는 무덤을 도저히 찾아낼 길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쑥대숲이 그처럼 무성한 곳에 무덤이 있으리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생스럽게 찾아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쑥대를 베어버리자면 낫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곳은 험준한 적성산(赤城山) 기슭인 까닭에 인가조차 없어서 낫을 구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있는 바로 그때,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안씨라는 나무꾼이 나뭇짐을 등에 지고 강을 건너려고 손에 낫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나무꾼에게 인사를 청하고 나서 ‘이 쑥대밭 속에 두향이라는 기생의 무덤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하고 물어보았다. 나무꾼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있지요. 이 쑥대밭 속에는 무덤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건넛마을 김씨네 무덤이고, 나머지 하나가 두향의 무덤이지요.’ ‘나는 두향의 무덤을 찾아보려고 서울서 예까지 일부러 내려왔는데, 마침 낫을 가지고 계시니 수고스럽지만 이 쑥대를 베어 줄 수는 없을까요.’ ‘그러십시다. 멀리서 오셨군요.’ 순박한 나무꾼 안씨는 담배를 한대 피우고 나서 쑥대를 베기 시작하였다. 내 키보다 훨씬 위되게 자란 쑥대들이었다. 나무꾼이 능란한 솜씨로 부근 일대의 쑥대를 벌초하다 보니 과연 그 속에서 무덤 1기(一基)가 나왔다. ‘아, 바로 이게 그 무덤인가 보군요.’ 나는 기쁨에 환성을 올리며 얼른 무덤으로 달려가 봉분 한복판에 소나무 그루터기가 있는가 없는가 살펴 조사해 보았다.7,8년 전에 이미 이가원(李家源:퇴계학의 권위자로 퇴계의 14대 후손)박사가 찾아와 부탁한 대로 무덤 한복판에 자라난 소나무를 베어냈다면 그 그루터기가 아직 남아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봉분 한복판을 파헤쳐 보니 과연 나무그루터기가 나왔다. 그것도 이가원 박사가 말한 대로 어린아이 팔뚝만한 소나무 그루터기였다. 문제의 소나무 그루터기를 쭉 뽑아보니 7,8년 동안에 뿌리가 썩어서 맥없이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탄식하였다. ‘아아, 이것이 바로 두향의 무덤임에 틀림이 없구나.’”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두향의 무덤을 발견한 정비석. 퇴계의 후손이었던 이가원이 오래전 찾아와 봉분 한가운데 자라난 소나무를 베어달라고 동네사람들에게 부탁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무덤에서 그루터기를 발견함으로써 확실한 두향의 무덤을 발견한 소설가 정비석. 그는 두향의 무덤을 밝혀 낸 직후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말말말˙˙˙

    총궐기해 찬성표를 던진 의원에 대한 대대적인 낙선운동을 벌이겠다.-성균관이 국회 법사위가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을 처리한 것과 관련,“여성의 인격을 존중하고, 여성 사회진출의 저해 요소를 없애는 데 얼마든지 힘을 합칠 생각이 있지만 이런 방식은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 [기고] 망언·망발과 역사전쟁/박석흥 대전대 문화사학과 겸임교수·명예논설위원

    3·1절을 앞두고 주한일본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했다. 외교관의 단순한 망언이 아니다. 중국 정부가 고구려·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발표한 음모와 비슷한 충격적인 발언이다.‘한국 침략’을 ‘진출’로 바꾸고 종군 위안부, 대학살, 경제 수탈 등 일본의 침략 사실을 축소·삭제했던 2001년 일본 ‘신편 교과서 파동’에서 한걸음 더 나가, 침략을 미화하는 일본 극우 세력의 ‘자유주의 사관’과 국가주의가 만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 전쟁 도전에 안팎곱사등이가 됐다. 중국은 한국 고대사의 시원인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 등 한국 근·현대사를 날조해 한국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있다. 중국·일본이 도발한 역사 전쟁은 단순한 과거사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한·중·일 관계사를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망언이 나올 때마다 항의나 하는 미봉책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다. 2005년은 을사국치 100년, 광복 60돌이 되는 해다. 중국·일본과의 역사 전쟁에 앞서서 치욕과 영광이 겹쳐진 이 100년의 역사 정리는 민족의 새 진로 설정을 위해서도 서둘렀어야 할 과제다. 건국 후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과거사 정리와 한국사 체계화가 시도되긴 했으나 전통문화와 현대사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사건 중심으로 접근, 혼란만 가중되고 중국·일본의 역사 전쟁 도전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 한국 역사에 관한 의도적인 왜곡과 망언은 이제 극우 일본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한일본대사가 언론회관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만한 틈새를 한국 정부·학자·지식인이 보여 주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수탈만이 아니라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보자는 경제학자의 망언을 비롯하여 정신대에 관한 경제사학자의 망언, 고구려사는 중국동북아사라는 동양사학자의 망언, 일본의 작위까지 받은 구한말 고관대작과 일제 밀정의 후손까지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나서는 망언 등 망언이 만발하고 있다. 최근 경제사학계에는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의 한국 지배 침략기에 깔아 놓은 경제성장의 연장이라는 일본학자의 중진자본주의론이 무시못할 학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 사학계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도 전에 일본 극우파 학자들의 식민지배 미화론에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 정치인들의 일제 침략이후의 한·일 관계사에 관한 무지와 적절치 못한 발언까지 남발돼 참으로 딱한 형국이다. 1998년 한·일 공동 파트너십 선언에 앞서 가진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 대통령은 “일본의 침략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제 침략의 실체와 친일 세력의 죄악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나온 한국 대통령의 통큰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에서는 한국 침략사를 왜곡한 ‘신편교과서’가 정식 교재로 채택되었고 일본 총리가 2차대전 전범들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의 이런 후안무치한 작태를 방조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정치인의 발언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시혜론에 동조하는 친일 인사들의 증가다. 광복 후 한국 역대 정권의 문화 정책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일본·중국의 한국사 왜곡을 바로잡아줄 학술원·국사편찬위원회·한국학 중앙연구원·독립기념관 등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27년전 국학 연구 총본산으로 출범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총리나 장관 등 여권 중진들의 퇴임 후 보직처로 전락했고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건립된 독립기념관도 한·일 역사 전쟁 논의에서 비켜서 있다. 국학 관련 중요 기관을 설립 목적보다 정치 목적으로 운영해온 파행 행정이 중국의 역사 전쟁 도발에 또 하나의 연구소를 서둘러 만드는 모순을 드러냈다.2005년 일본 교과서 검인정 작업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화될 일본의 한국침략사 왜곡을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걱정이다. 박석흥 대전대 문화사학과 겸임교수·명예논설위원
  • [공연리뷰] 佛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원작의 맛은 확실히 깊고 그윽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뮤지컬에서 상업적으로 윤색돼 ‘노틀담의 꼽추’로 격하됐던 원작은 그 후손들에 의해서 품격을 되찾았다. 지난 25일 프랑스 오리지널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첫 막을 올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15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벌어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속으로 완벽히 빠져드는 데 단 1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음유시인 그랭그와르가 부르는 서곡 ‘대성당의 시대’는 강한 마력으로 관객의 호흡까지 붙들었다. 대사 없이 54곡의 노래만으로 이루어지는 독특한 형식.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집시 여인의 삶을 노래한 에스메랄다의 ‘보헤미안’, 그녀에 대한 애끓는 욕망을 표현한 콰지모도, 페뷔스, 프롤로 세 남자가 부르는 ‘아름다워’, 에스메랄다의 연적 플뢰르드리스의 ‘말 탄 기사’에서부터 죽은 에스메랄다를 향한 콰지모도의 절규를 담은 ‘춤을 추오, 나의 에스메랄다’까지.1시간40분 동안 쉴새 없이 쏟아지는 노래들은 폐부까지 자극하고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짙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음악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에 눈 먼 인간들이 벌이는 욕망, 질투, 음모, 희생을 제대로 그리고 있기에 두고두고 곱씹게 한다. 특히 그간 많은 작품에서 전형적이고 단선적인 악인으로만 그려졌던 신부 프롤로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 못해 번민하고 스스로 파멸해 가는 복잡한 인물로 살아났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배우들은 열창과 열연으로 무대에 빛을 더했다. 첫 공연이라 사소한 실수와 고음에서 약간 불안한 대목이 있기는 해도 크게 흠잡을 것은 못됐다. 단순하고 현대적인 세트와 의상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담기에 손색없이 잘 어울린다. 무대 전면에 설치된 노트르담 성벽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장면에 따라 성당, 집시들의 아지트, 파리 뒷골목 등으로 변화를 거듭한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첨단 조명 기술은 무대를 더욱 풍성하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연기를 하는 배우와 무용수가 따로 분리돼 있는 것이 작품의 또다른 특징. 헤드 스핀까지 구사하는 16명의 무용수는 발레, 애크러배틱, 브레이크댄스, 현대 무용이 혼합된 역동적이고 육감적인 춤사위로 시종일관 시선을 자극했다.3월20일까지.(02)501-1377.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儒林(29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이휘영의 호가 고계(古溪)로 퇴계학의 계승자이기도 했었는데, 한때 도총부의 부총관(副摠官) 벼슬까지 지냈으며,‘고계문집’‘십도집설’과 같은 저서를 낸 거유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휘영이 퇴계가 죽은 지 3백년 후 단양까지 두향의 무덤을 찾아와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그의 아우인 이휘재가 쓴 ‘운산집(雲山集)’에 실려 있는데, 이휘재는 형과 더불어 두향의 성묘에 함께 동행하지 못함을 못내 섭섭하게 여기며 시를 지었는데, 그 시를 짓게 된 배경을 ‘운산집’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계옹이 여러분과 함께 옥순봉, 구담봉으로부터 배를 타고 강선대에 이르러 그 밑에 배를 세우고 장회에 사는 촌민 박순욱(朴順郁)에게 물어 고비(故婢) 두향의 무덤에 술잔을 드리며 길이 수호해주도록 부탁하였다고 하니, 내 비록 그들과 함께 배를 타지는 못하였으나 고계옹의 편지를 읽고 창연(然)히 느끼는 바가 있어 시를 한편 읊어 그 일을 기록하노라.”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윽한 옛 혼 강선대에 향기로운데 석자 외로운 무덤에 물결이 굽이치네. 강가의 봄시름에 풀빛조차 어두우니 달이 뜨면 학들도 응당 날아들리라. 꽃다운 이름은 시와 노래에 실어오고 옛일을 서로 전하며 술잔을 올리도다. 마을 사람들에게 잘 지켜주기를 부탁했건만 해는 져도 돌아오는 뱃길이 마냥 더디구나.” 이를 미뤄 보면 퇴계의 가문에서도 조상의 명예를 더럽힐까 두려워 비록 내놓고 제사를 지내주지는 못했을망정 대대로 내려오며 두향의 존재를 인정하며 두향의 무덤을 끊임없이 보살펴온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퇴계의 가문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던 기생 두향. 따라서 두향의 무덤이 사후 5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무연묘(無緣墓)로 버려지지 아니하고 이처럼 보존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니 사랑의 힘은 시대를 뛰어넘고 공간을 초월하는 타오르는 불인가. 배는 호수 건너편 산기슭에 이르렀다. 수많은 송림으로 가득찬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축대를 쌓은 봉분 하나가 보였다. 수몰된 강선대와 연결된 암석 위에 잘 정돈된 무덤이 하나 놓여 있었다. 마침 붉은 철쭉꽃들이 소나무와 암석 사이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사내가 발동을 끄며 말하였다. “저기 보이는 무덤이 두향의 묘입니다.” 무덤 바로 아래는 암벽으로 막혀져 있어 배를 댈 수 없었다. 따라서 배는 무덤 옆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속력을 줄인 배는 천천히 기슭에 닿았다. 퇴계의 후손 이휘재가 쓴 시구처럼 석자 외로운 무덤에는 물결이 굽이치고 있었고, 강가의 봄시름에 풀빛조차 어두웠다. 외로운 무덤가에는 묘비 두 개가 봉분을 가운데로 하고 나란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리십시오.” 사내는 내가 편히 내릴 수 있도록 배와 암벽 사이에 널빤지를 깔아 건널 수 있도록 임시 다리를 만들었다. “주의하십시오.” 사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부축해주었고, 나는 천천히 널빤지를 밟으며 암벽 위로 올라섰다.
  • [교황 기관지 수술] 차기 누가 거론되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건강이상이 다시 돌출되면서 차기 교황 후보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교황이 될 자격을 갖지만 추기경 가운데 뽑는다.60∼70대 추기경 10여명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인망, 개혁 및 보수적 성향 등이 쟁점이다.80세 이하의 추기경 120여명이 투표로 뽑는다. ●디오지니 테타만치(70) 밀라노 대주교 전통적으로 교황을 배출해온 이탈리아 최대 교구의 최고위 성직자다. 교리 해석엔 보수적이면서도 사회 참여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안젤로 스콜라(63) 베네치아 총대주교 이탈리아 가톨릭계의 ‘젊은 별’.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춘 이슬람 전문가로 교회와 현대문명의 연결을 주장하고 있다. ●프랜시스 아린제(72) 교황청 신앙성성(聖省) 수장 흑인 가운데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교육받았다. ●클라디오 흄즈(70) 브라질 상파울루 대주교 라틴아메리카의 교황 후보중 선두주자. 독일계 이민 후손으로 노동운동에 동조하면서도 교리적으론 전통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요제프 라칭어(77) 교황청 신앙교리성 수장 독일 바이에른 출신으로 엄격한 보수성과 깔끔한 관리능력으로 ‘과도기 교황’으로 꼽힌다. 교회의 현안을 해결한 뒤 몇년 안에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주말화제] 불멸의 이순신 ‘세계화’작업 추진

    [주말화제] 불멸의 이순신 ‘세계화’작업 추진

    ‘성웅 이순신’이 세계로 나아간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을 세계화하기 위한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경남 통영시는 재단법인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설립을 준비중이라고 25일 밝혔다. 재단설립계획안이 최근 경남도 투융자 심사를 통과함에 따라 5월중 재단을 발족시킬 계획이다. ●기금 30억 조성 재단 5월 발족 기금조성 목표액은 30억원이며 미국 LA지역 동포들은 이미 2억 5000만원을 출연했다. 시는 올 하반기 중 ‘한산대첩 기념사업 지원조례’를 제정, 기금 출연 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예정이다. 통영을 비롯, 서울과 미국 등에 재단사무실을 개설해 국내외 인적 인프라를 활용한다. 재단 이사진에는 정·관계와 문화·예술계 인사 및 해외동포 등이 망라된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조순 전 서울시장, 이일규 전 대법원장, 김명주·조성래 국회의원, 작가 박경리씨, 홍영기 LA한·미경제연구소장 등 17명이 승낙서를 보내왔다. 이 전 총리가 이사장을 맡고, 조 전 시장과 이 전 대법원장은 고문직을 내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수성前총리등 각계·해외동포 참가 재단 발족과 함께 한산대첩제가 세계적인 행사로 거듭나고, 관광 상품화될 수 있도록 전문기관에 의뢰, 프로그램을 대폭 개편하기로 했다. 우선 오는 8월에 열리는 축제기간에 4개국 해군사관생도가 참가하는 국제 ‘아쿠아 슬론’을 개최할 계획이다. 한국을 비롯, 프랑스와 영국·러시아 등지에서 60여명이 참가한다. 아쿠아슬론은 ‘트라이 애슬론(철인 3종경기)’과 달리 수영(4.5㎞)과 마라톤(20㎞) 2종 경기를 펼치는 것. 그리고 영국·프랑스·스페인·그리스 등의 해군 군악대를 초청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8월 4개국 ‘아쿠아 슬론’등 관광상품화 아울러 한산대첩지가 한눈에 보이는 정량동 망일봉에 ‘한산대첩 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한다. 공원에는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한산대첩 시뮬레이션관과 전통 병영체험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실물 크기의 거북선과 판옥선을 타고 한산대첩 해역을 돌아보면서 당시 처절했던 전투상황을 경험토록 한다. 미국내 재단사무실 개소에 맞춰 LA 현지에서 거북선 모형 기증식을 갖고, 충무공 기념사업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거북선 모형은 지난달 LA교민회로 보냈으며, 동포들의 호응에 따라 일본과 독일 등지로 확산시킬 방침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맞서 싸웠던 왜장들의 후손을 찾아 함께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통영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이명박시장 “수도분할은 이전보다 나쁘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여·야가 합의한 ‘행정복합도시’ 방안에 대해 25일 성명을 내고 “수도가 두동강 나게 됐다.”면서 “수도 분할은 국가정체성과 통치의 근본을 쪼개는 것으로서 수도이전보다 나쁘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어 “후손의 운명이 걸린 국가 중대사에 대해 정파를 떠나, 정당의 이해관계를 떠나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갖기 바란다.”며 정부와 여·야 정당에 재고를 요구했다. 이 시장은 ‘정부와 여당에 호소합니다’라는 성명서에서 “세계 어느 나라도 수도를, 그것도 행정부를 갈라 나눠버린 예는 없다.”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들이 서로 120㎞나 떨어진 장소에서 근무해서는 국정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원만한 부처간 협의도 신속한 위기관리도 어려워진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 균형발전도 좋지만 그 수단으로 수도가 분할돼서는 안된다.”면서 “지방에 재정과 의사결정 및 집행의 실질적인 권한부터 두고 지역별 특색있는 개발로 차별화된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충청권 발전은 광역경제권 조성 정책의 크고 실질적인 틀로 풀어야 하며 연기·공주 지역은 기업과 연구·교육기능을 중심으로 대전·대덕 연구단지 및 청주·오송 바이오단지와 연계해 ‘대전·청주 광역경제권’으로 조성하고 중부권의 경제·교육·과학도시로 육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시장은 “정부가 수도를 분할해서 부처 이전을 완료하기 전에 한반도는 통일돼야 한다.”며 “모든 정파가 가슴을 열고 미래를 생각할 것을 호소한다.”고 끝을 맺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儒林(292)-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2)-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퇴계의 ‘구담봉’ 묘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봉우리들이 그림과도 같은데, 협문이 마주 보고 열려 있고, 물은 그곳에 쌓였는데, 깊고 넓은 것이 몹시 푸르러 마치 새로 간 거울이 하늘에서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 구담이다.…” 구담봉은 남한강의 풍수설에서 ‘거북’의 이미지가 강조된 풍경으로 새벽 일찍 이곳을 지나면서 이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새벽을 지나 구담을 비추던 달이 산속으로 들어가니 구담은 높이 솟아 달의 여부만 미루어 상상하고 있네. 주인은 이제 다른 산에 은거하고 있는데, 학의 원성과 잔나비의 울음만이 구름 사이로 울려 퍼지네.” 이 시에 나오는 ‘주인’은 이이성(李而盛)을 가리키는 말. 이이성은 구담봉에 암자를 짓고 세상을 등지고 살던 은자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구담봉을 ‘간혹 가서 노닐며 흥에 따라 시도 읊었다.(寄興吟詠焉)’는 이안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퇴계는 아마도 두향과 함께 강선대 바위 위에서 노닐며 구담봉을 완상(玩賞)하고 춘흥이 도도하여 이와 같은 시를 읊었을 것이다. 수제자 김성일도 이때의 이퇴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군(郡)에 소백산이 있으니 곧 남쪽 갈래의 명산이다. 선생은 일찍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그 봉우리에 올랐다가 여러 날 만에 돌아오곤 하였는데, 표연(飄然)히 남악(南嶽)의 흥이 있었다.” 김성일이 말하였던 ‘남악의 흥’이란 일찍이 주자(朱子)가 남악에 올라 속세를 떠날 것을 노래로 읊은 것을 비유하여 스승도 세상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을 암시하여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이때의 퇴계를 김성일은 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선생이 두 고을(단양과 풍기)에 있을 때에는 맑은 바람 씻어간 듯이 조금도 사사로운 일에는 개의하지 않았다. 공무의 여가에는 책으로써 스스로 즐기고 혹은 초연히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기도 하였는데, 들에 농부들이 이 모습을 바라보고 마치 신선같이 생각하였다.” 단양에서의 퇴계를 묘사한 두 제자 이안도와 김성일의 표현처럼 퇴계는 마치 속세를 버린 신선처럼 산수에서 노닐며 흥에 겨워 시를 읊기도 하면서 한세월을 보낸 것이었다. 두향은 바로 이 무렵 퇴계의 곁에서 세월을 함께 보낸 동반자였던 것이다. 두향. 불과 9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퇴계와 더불어 구름과 비의 운우지정을 나눴던 기생 두향. 평양의 유명하고도 아름다운 기생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퇴계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한 사람의 여인 두향. 그녀는 어째서 여색에 엄격하였던 퇴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 퇴계의 가문에서도 비록 정식으로 퇴계와 사랑을 나눴던 두향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 후손들이 찾아와 두향의 무덤에 참배하였다는 기록은 아직도 남아 있다. 퇴계에게는 10대손인 이휘재(李彙載)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벼슬이 한성좌윤(漢城左尹)에까지 이르렀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형으로는 이휘영(李彙寧)이란 대학자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퇴계의 10세봉사손(十世奉祀孫)이었다.
  • 여운형·권오설등 좌파 독립운동가 54명 서훈

    여운형·권오설등 좌파 독립운동가 54명 서훈

    좌파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던 독립 운동가들이 광복 6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특히 이들의 대표격인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수여된다. 국가보훈처는 3·1절 86돌을 맞아 일제에 항거하여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김진영, 배희두 선생 등 108명과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여운형, 권오설, 조동호 선생 등 57명의 독립유공자를 포함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65명을 포상한다고 22일 발표했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의 훈격(勳格)은 건국훈장 35명(대통령장 1명, 독립장 2명, 애국장 4명, 애족장 28명), 건국포장 29명, 대통령 표창 101명이다.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1등급)에 추서된 인물은 없다. 특히 포상자 중에는 몽양을 비롯, 권오설(독립장), 조동호(〃), 구연흠(애국장), 김재봉(애국장) 등 그동안 좌파계열이란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던 인사 54명이 포함됐다. 심사를 맡았던 신용하(한양대 석좌교수) 국가유공자 공적심사위원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이라고 해서 공적을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학계의 오래된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역사에서 높게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몽양 선생의 경우 훈장을 몽양의 남측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도 있지만, 북측에 유일한 혈육인 딸 여원구(77)에게 전달하는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포상식은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정동 이화여고 내 유관순기념관을 비롯, 각 지방자치단체와 재외공관에서 거행된다. 후손이 없는 순국선열의 훈장은 정부에서 보관한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CEO 칼럼] 핵심기술 하나없는 나라/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CEO 칼럼] 핵심기술 하나없는 나라/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지난해 포천지는 유명한 미래학자인 피터 슈위츠가 선정한 50년 후의 ‘가상 세계 10대 기업’을 보도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중국·일본·인도에 본사를 둔 기업이 5개나 뽑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에 기반을 둔 기업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10대 기업 중 현존하는 기업으로는 도요타,IBM, 네슬레, 뉴스코퍼레이션 등 4개뿐이었다. 나머지 6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설립될 기업들이었다.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2위권 나라로 급성장했다. 선박 건조량은 세계 1위, 전자제품 더생산액은 세계 3위, 조강 생산량은 세계 5위,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6위다. 그런데 왜 미래의 경쟁력 있는 가상 기업을 하나도 배출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나라는 지난 반세기 동안 노동력과 자본을 계속 쏟아붓는 이른바 ‘요소 투입’ 위주의 성장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또한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기업의 경쟁력 향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제조업 부문의 설비투자가 포화상태에 이르고,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이 한계에 달해 이같은 요소투입형 성장은 근본적인 변화 시점에 와 있다. 선진국 형태(총요소 생산성 증가형)로의 성장 패러다임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 경쟁력 확보를 통한 생산성 증대가 절대적이다. 하지만 과학기술부의 보고서를 보면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지난해 국회에 보고한 ‘10년후 국가비전 달성을 위한 핵심기술 99개 및 10대 성장동력산업 기술수준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핵심기술 99개 중 미국은 88개, 일본은 16개를 갖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단 한 개도 없다. 욱 심각한 것은 미국의 기술수준을 100으로 했을 때 우리나라의 99개 핵심기술 수준은 65.1로 5.8년이나 기술격차를 보였다. 중국보다는 우월하다고 하지만 그 격차는 2.1년에 불과했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을 따라잡기에는 갈길이 너무 먼 반면 중국·인도 등 후발국과의 격차는 바짝 좁혀져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 비중은 2003년 기준으로 2.64%이다. 미국(2.62%), 일본(3.12%), 독일(2.5%), 프랑스(2.2%), 영국(1.88%)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 나라와의 기술격차를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투자비 비중이 훨씬 높아야 한다. 이를테면 GDP 대비 10% 이상의 투자도 할 수 있다는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투자비를 재원별로 보면 정부 25%, 민간부문 75%로 구성돼 있다. 정부만 투자해서는 지금의 관련 예산을 10배까지 늘려야 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민간이 있기에 충분히 가능하다. 민간부문, 즉 기업들이 창출한 부가가치를 연구개발 투자에 ‘올인’할 수 있도록 정부가 과감하게 정책적 배려를 해주면 된다. 법인세율 인하, 세액 공제 확대, 손비인정 한도 확대 등 정부가 내밀 ‘당근’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의 세수(稅收) 감소를 우려해 더 미룰 일이 아니다. 우리가 창출한 부가가치를 우리가 다 소진해 버리면 후손들의 미래는 누가 보장할 것인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연구개발에 더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후손들에게 희망의 미래를 줄 수 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①-CJ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①-CJ그룹

    CJ그룹에는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53년 설탕회사로 출범, 제일모직·삼성전자·삼성생명 등 현재 삼성그룹의 기업적 ‘젖줄’이 된 곳이 바로 CJ(옛 제일제당)다. 또 삼성의 인재를 길러낸 ‘인재사관 학교’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 CJ하면 떠오르는 것은 설탕·밀가루 등을 만드는 식품회사 정도였다. 그 이후 점차 생명공학, 홈쇼핑, 엔터테인먼트 등 신세대 사업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식품회사의 틀과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졌다.1995년 그룹 분리 당시 1조 50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지난해 8조원, 영업이익은 97억원에서 5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자산 기준 재계 서열 23위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끊임없이 모험과 변신을 꿈꾸는 벤처기업처럼 역동적으로 사업을 발굴, 추진해 온 덕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성가(家)의 장손이 우뚝 서있다. ●부친 ‘공백’ 메우는 직계 장손 CJ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손인 이재현(46) 회장이 이끌고 있다. 그의 부친은 고 이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76) 전 제일비료 회장. 부친이 할아버지 눈밖에 나는 바람에 이 회장은 일찌감치 부친을 대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삼성과 제일제당에서 경영 수업을 쌓았다. 한솔그룹(창업주의 장녀 이인희 고문), 신세계(4녀 이명희 회장), 새한미디어(차남 고 이창희 회장)에 이어 가장 늦게 삼성에서 떨어져 나왔다.1993년 시작된 CJ의 계열 분리 작업은 지난 97년 법적으로 완전히 정리됐다. 이 회장이 36세때의 일이다. 그룹을 혼자 경영하기에는 나이나 경험이 모두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CJ는 자연히 이 회장과 외삼촌인 손경식(66) 회장이 함께 경영하는 ‘쌍두마차’ 체제로 유지됐다. 손 회장은 대외업무, 이 회장은 내부경영 등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는 것이 CJ측의 공식적 설명이지만 이들의 역할을 뚜렷하게 구분짓기 어려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만큼 이 회장의 비중이 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회장의 ‘등극’은 삼성가의 3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3남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 사촌들과 함께 삼성가의 3세 경영시대를 여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서울 남대문로 본관 사옥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흉상은 그가 삼성가의 직계 장손임을 상징해 주고 있다. ●평범한 혼인, 드러나지 않은 내조 고 이 회장의 장남 맹희씨는 부인 손복남(71)씨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뒀다. 자녀 모두 평범한 집안과 혼인해 이렇다 할 화려한 혼맥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맹희씨가 코흘리개인 네살 때 이미 “아이들이 자라면 혼인을 시키자.”는 양가 어른의 언약이 인연이 돼 손씨와 결혼했다. 이화여대 교육학과 출신인 손씨는 부친이 경기도 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씨다. 손복남씨가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난 뒤 맹희씨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손씨는 삼성가의 맏며느리로서 겉으로는 화려해도 남편이 풍상을 겪자 말 못할 마음의 고통을 삭이며 살아왔다. 서울 장충동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3남매를 키웠다.CJ가(家)의 명실상부한 ‘안주인’ 역할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것이다.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나 제일제당의 최대주주로 있다가 주식 증여를 통해 경영권을 장남 재현씨에게 넘겼다. 재현씨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함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체격 등 외모, 사고나 행동방식까지 조부와 비슷해 ‘리틀 이병철’이라고도 불린다. 결혼 후 “나가서 신혼살림을 하라.”는 부모님의 얘기에도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며 고집을 피워 2001년 1월 할머니 박두을씨가 별세할 때까지 서울 장충동 집에서 모셨다. 지금도 모친 손여사와 함께 장충동 집에서 산다. 경복고, 고려대 법대 출신인 재현씨는 “누구 덕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다.”며 1983년 씨티은행에 취직,‘탈 삼성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부인 고 이병철 회장이 “재현이에게 왜 남의 집살이를 시키냐.”는 불호령을 내려 결국 85년 삼성의 주력 계열사였던 제일제당 경리부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88년 경리부 차장,89년 기획관리부장으로 승진했다.92년부터 1년 정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대우로 일하기도 했다.93년 제일제당 이사로 친정에 복귀해 97년 부사장,99년 부회장을 거쳐 2002년 회장에 올랐다. 부산 출신으로 이화여대 미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부인 김희재(46)씨와는 대학시절 미팅을 통해 결혼, 딸 경후(21)씨와 아들 선호(16)군을 뒀다. 두 자녀는 현재 해외 유학 중이다. 90년대 중반 이 회장은 회식을 끝내고 밤늦게 직원들을 집으로 데려와 2차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부인 희재씨는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뒷바라지해 직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또 이 회장과 함께 노인무료급식소 등에서 김장을 하고 노인들의 가정에 도배도 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이 회장의 장모인 김만조씨는 ‘김치박사’로 유명하다.CJ의 김치개발에도 참여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씨는 연세대, 서울여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홈쇼핑·영화등 사업다각화… 재계 23위 ‘껑충’ 이 회장의 누나 미경(48)씨는 부친이 유학 중이던 미국에서 동생 재현씨와 함께 태어났다. 어릴 때 ‘미키’라고 불린 것을 계기로 지금도 ‘미키 리’라는 이름으로 해외 활동을 한다. 중학교때 대통령배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영어외에 불어, 중국어에도 능통하다. 경기여고, 서울대 가정학과,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연구로 석사학위를,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995년 제일제당 멀티미디어 사업부 이사 시절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세계 최대의 영상소프트회사인 ‘드림웍스’와 제일제당의 합작을 성공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이건희 회장과 이재현 회장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스필버그와 협상을 벌일 만큼 드림웍스 설립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나 결국 그는 삼촌 대신 동생 재현씨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말 CJ엔터테인먼트 사업의 글로벌 부문을 맡아 사업의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씨-삼성 경영서 물러난 뒤 유랑생활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자 이재현 회장의 부친인 맹희(76)씨는 요즘 몽골에 머물고 있다. 과거 유목민의 후예들이 사는 그 곳이 그에게는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고 했다. ‘비운의 황태자’‘양녕대군’은 맹희씨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삼성을 이끌 ‘운명’을 타고 났지만 오히려 바람처럼 떠도는 처지가 그의 ‘운명’이 된 ‘풍운아’다. 동생 이건희 회장으로 후계구도가 정해진 후 그는 형제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과도 떨어져 세속을 등진 채 살아왔다. 그의 ‘유랑생활’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친이 기업을 일구는 것을 보며 컸다.1938년 삼성의 설립으로 기록되는 삼성상회 간판 아래 부친이 대구에서 국수공장을 운영할 당시 공장 귀퉁이 방안에서 부친이 새우잠을 자며 일하는 것을 보며 자라난 삼성 성장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경북고 32회 출신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고 김윤환 의원, 정호용 전 의원 등 TK출신 정치인들과는 친구사이다. 그는 일본, 미국 유학을 거쳐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 직함이 무려 17개에 이를 정도로 강도 높은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그의 호칭은 삼성의 ‘젊은 부총수’였고, 아무도 그가 삼성의 경영 대권 주자로 낙점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만들려 했던 선친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196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는 실질적으로 그룹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선친의 눈밖에 나면서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그때가 1971년이었다. 그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자신이 삼성에서 일한 기간은 7년이고,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다.”라며 부친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부친이 동생 이건희 회장으로의 대권이양 선언시를 회고할 때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며 당시의 ‘충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bori@seoul.co.kr ■ 차세대 사업의 양날개 ‘左-미경, 右-재환’ 차남 재환(44)씨는 배재고, 타이완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현재 경영기획실 중국담당 상무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제일제당 일본지사 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재환씨는 일본과 중국쪽 사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7·8·9대 국회의원을 지낸 민기식 전 의원의 딸 재원(38)씨와 결혼, 딸 소혜(15)양과 아들 호준(7)군을 뒀다. 재원씨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오너보다 CEO로 평가받겠다.” CJ맨들이 보는 이 회장은 ‘꿈과 비전·열정이 큰 사람’으로 요약된다. 회사의 실적을 보고 받으면 “최소한 얼마는 돼야 하는데, 회사가 좀 더 커야 한다.”며 항상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원들과의 대화를 ‘정말’ 즐긴다. 좀처럼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 책상에 걸터 앉아 얘기를 하고, 직원들과 남산에 올라 자유토론도 한다. 회사의 경영 방침과 경영 철학을 직접 설파, 공감대를 넓혀나가는 식이다. CJ 관계자는 그런 그의 행보를 두고 “오너라기보다는 유능한 최고경영자(CEO)로 평가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사석에서 “이 회장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서 “10년 뒤 살아 남을 사람(오너)은 이 회장밖에 없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만큼 오너 2,3세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한 경영인이란 방증이다. 재벌가의 후손들이면 보통 가는 해외유학 코스도 밟지 않은 ‘토종파’인데도 그의 기업 문화론은 어느 기업보다 앞서간다. 오래된 보수적인 회사로 짧은 시간에 젊고 활기찬 기업으로 변모시킨 것은 바로 ‘이재현 식’ 기업 문화에서 비롯됐다. 국내 최초로 복장 자율화,‘∼님’으로 호칭 통일, 플렉서블 타임제(자율 출퇴근시간), 층마다 비치된 간이 도서관 등은 다 그의 작품이다. CJ의 역사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삼성과의 결별을 앞둔 94년 10월 삼성측이 제일제당에 이학수 당시 삼성화재 부사장(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을 파견, 삼촌 이건희 회장과 조카 이 회장의 신경전은 제일제당이 삼성본관에서 95년 4월 현재의 사옥으로 이사오기까지 6개월간 계속됐다. 제일제당이 보유한 부동산, 삼성생명주식 평가방법을 놓고 양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야 제일제당은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삼성그룹에서 분리될 당시의 제일제당은 삼성의 전자 및 중공업 위주의 우선 투자전략에서 밀려 성장한계를 보인 상황이었다. 식품회사라는 고정된 이미지도 그룹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5년 독자경영을 시작한 이후 이 회장 주도로 식품 등 기존의 사업을 다지면서 미디어·영상·물류·유선방송·홈쇼핑 사업 등 다각화된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짰다. 식품·정보통신·화장품, 음료사업 등 매년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는 비주력 사업은 과감히 매각했다. 이 가운데 인터넷사업인 드림라인은 이 회장이 주도한 사업 중의 하나였으나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련’을 갖지 않고 구조조정을 무난하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의 식품, 식품서비스, 바이오,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신유통 등 4개 분야를 CJ의 핵심 사업으로 확정했다.“설탕이나 파는 식의 마인드로 살아 남을 수 없다.”면서 이 회장은 당시 직원들의 신발끈을 조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실있는 임원 김주형(58) ㈜CJ 대표이사 사장은 1972년 제일제당에 들어온 이후 최고 경영자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 곡물구매 전문가로 자기 색깔을 내지 않으며 두루 회사를 아우르는 ‘덕장’형이다. 각양 각색의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칫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는 갈등 사안들을 절묘하게 중재·조정하는 ‘조율사’로서 탁월한 역할을 해낸다는 평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유연성 덕분이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존대하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을 준다. CJ개발 문성기(56)사장은 1974년 제일제당에 입사, 신사업 본부장 등을 거쳐 99년부터 CJ개발 대표를 맡았다. 우리나라 골프장 최초로 미국 LPGA 대회를 유치해 2002년 부터 3년 연속 성공적으로 개최,CJ의 골프장 ‘클럽 나인브릿지’를 세계 100대 회원제 골프장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CJ그룹을 해외에 알린 주역이다. 조용하면서도 강한 리더십이 강점이다. 이태호(57) CJ푸드시스템 대표(부사장)는 1973년 삼성그룹으로 입사, 사료본부장 등을 거쳐 2003년 말부터 CJ푸드시스템을 맡았다. 사료본부장 시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으로 일찌감치 사업을 확장한 주역이다. 부하직원들로부터 냉철한 판단력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리더로 평가받는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사업의 비전 제시력이 강하다는 평이다. 소탈한 성격으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 평이 좋다. 박동호(49) CJ엔터테인먼트 대표(부사장)는 ‘비즈니스맨의 모범’으로 불린다. 국내 최초로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극장체인인 CGV를 도입, 업계 1위로 성장시켜 사업역량을 인정 받으면서 한국 영화판을 좌지우지하는 ‘충무로 파워맨’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지난해 게임업체인 플래너스를 전격 인수하는 수완도 발휘했다.‘튀는’ 사람들과 일하는 분야에서 내부를 꼼꼼하게 추스르고 챙기는 관리자의 역할에 꼭 맞는 인물이다. 김진수(54) CJ홈쇼핑 대표(부사장)는 제일제당 마케팅 실장 등을 거쳐 다국적기업 한국 존슨의 사장으로 잠시 외도했다가 친정으로 복귀한 케이스. 마케팅실장때 대상(옛 미원)과의 조미료 전쟁에서 ‘다시다’로 역전을 이뤘고, 식품본부장 시절에는 ‘햇반’ 등 신상품을 시장에 안착시켰다. 중국 홈쇼핑시장에 진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해외통이자 마케팅 전문가로 평가 받는 그는 분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박대용(53) CJ GLS 대표(부사장)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물류 전문가다.1977년 제일제당에 입사,89년 물류개선팀장으로 발탁된 이후 16년간 물류관련 업무에만 종사해 왔다. 지난 99년 택배사업에 진출,3년만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며 CJ GLS를 택배업게 ‘빅 4’에 합류시켰다. 권위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부하직원들을 대하는 ‘온화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정진구(60) CJ푸드빌 대표(부사장)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스카이락·빕스·한쿡과 베이커리 뚜레쥬르 등 외식사업을 총괄한다. 아이스크림전문점 배스킨 라빈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최고 브랜드로 성장했다. 국내 외식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직관력과 현장 감각이 뛰어나 한국에 진출하려는 외국기업들의 영입대상 1순위로 알려져 있다.2003년 말 CJ그룹에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김홍창(51) CJ투자증권 대표(부사장)는 1981년 당시 제일제당에 입사, 제일투자증권 상무, 제일선물 대표 등을 거친 대표적인 관리·금융통. 제일선물 대표 당시 업계 8∼9위에 불과했던 회사를 1년여 만에 업계 2위로 끌어올려 놓기도 했다. 이재현 회장의 입사 초기 수년간 경리·관리 부서에서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스스럼 없이 이메일을 주고받는 등 격의없는 성격이며 조직 밀착 경영에 강하다는 평이다. 지난 1월 정기인사에서 전격 발탁된 CJ미디어 강석희 대표(상무)는 자타가 인정하는 제약마케팅의 귀재다. 마케팅에서 보여준 실력이 미디어라는 복합다기한 사업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관심사다. bori@seoul.co.kr ■ 손경식 회장은 누구 손경식(66) 회장은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이면서 CJ그룹을 이끄는 또 다른 한 축이다. 이 회장에게 할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이 정신적 지주라면 외삼촌 손 회장은 ‘경영 스승’인 셈이다. 이 회장이 회사 중대 사안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상대다. 경기고 2학년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정도여서 ‘천재’라는 얘기를 들었다. 손 회장은 누나이자 이재현 회장의 모친인 손복남 고문이 삼성가로 시집가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1968년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공부를 하려던 그를 고 이병철 회장이 비서실로 불러들였던 것. 아무리 가까운 혈연이라도 능력이 없으면 발탁하지 않는 삼성가에서 그는 77년 38세의 나이에 안국화재(현 삼성화재)사장으로 발탁돼 삼성을 이끌 리더로 자리잡았다. 안국화재는 자신의 부친인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가 사장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1993년 6월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되면서 조카 이 회장의 ‘후견인’ 역할이 요구됐다. 당시 경영 수업을 받던 재현씨를 어떻게든지 잘 보호해 제일제당의 ‘주인’으로 ‘옹립’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조카 재현씨와 함께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 삼성과의 분리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등 제일제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96년 5월 “삼성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제일제당 그룹으로 새롭게 출발한다.”며 삼성그룹과의 결별을 공식 선언한 것도 그였다. 거대 그룹의 우산 아래서 떨어져 나온 제일제당이 큰 위기를 겪지 않고 오늘의 CJ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손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안팎의 평가다. 화려한 학맥으로 그는 정·관·재계의 인맥 네트워크가 강하다. 재작년에는 경기고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부인 김교숙(59)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bor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다빈치코드’ 伊 모의법정 설전

    예수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낳은 딸이 교황으로서 적통을 이었어야 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담아 논란을 불러일으킨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의 역사적 진위를 가리는 모의재판이 이탈리아에서 열리고 있다.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인 빈치시에서 지난 18일(현지시간) 개정된 모의법정에는 많은 예술 전문가들과 보수적인 가톨릭 성직자들이 ‘원고’로 참여했다. 이들은 독자들이 작가 댄 브라운이 꾸며낸 ‘성서의 진실’이라는 픽션과 역사적 진실을 혼동해선 안된다고 역설했다. ●‘최후의 만찬’ 막달라 후계자 인정 꽉 찬 원고석과는 달리 소설을 옹호하는 ‘피고’석에는 수백명의 독자들만이 참석했다. 브라운은 2003년 6월 소설 출간 직후 미국 NBC방송의 ‘투데이쇼’에 출연,“주인공 로버트 랭던 등 등장인물을 제외하고 예술과 건축, 밀교의식, 비밀결사에 관한 모든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소설은 다빈치가 실제로는 여자 교황의 적통성에 찬동하는 비밀결사의 지도자로서 그의 작품들에 여성 교황의 적통성을 주장, 옹호하는 코드들을 교묘히 숨겨왔다는 점을 담고 있다. 예수와 12제자의 만찬을 그린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제자들 가운데 막달라를 가장 믿음직스러운 후계자로 인정했음을 드러내려고 다빈치가 의도한 것이라거나,‘모나리자’가 사실은 다빈치의 초상화로 여성의 세계 지배를 당연시하는 다빈치의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지도자들이 막달라를 마녀로 낙인찍어 성배를 둘러싼 진실을 은폐하려 했으며, 교황청의 추적으로부터 예수의 후손들을 보호하기 위해 1099년부터 시온수도회가 실존해 왔다고 주장했다. ●보수 기독교계 반발… ‘유죄 평결’ 이같은 내용은 가톨릭은 물론, 보수적인 기독교단으로부터 전례없는 반발을 불러왔다. 예수를 신성한 존재에서 하루 아침에 보통 인간으로 격하시킨 신성모독이라는 항변이었다. 모의법정을 기획한 알레산드로 베초시 레오나르도 박물관장은 다빈치 초상화와 모나리자를 비교한 결과 귀와 입, 눈동자, 표정 등에서 확연한 차이가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록과 회화작품 사진 120장을 공개, 소설의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겠다고 덧붙였다. 소설 속에서 성서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암약하는 바티칸의 비밀결사로 묘사된 ‘오푸스 데이’(하느님의 과업) 대표도 법정에 나와 자신들을 둘러싼 오해를 독자들에게 해명한다. 모의법정의 평결은 ‘유죄’가 예정돼 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세계적으로 750만부가 팔렸고 소설 속 논란만을 정리한 책이 10종이나 쏟아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한투’ 공자금 1조6500억 추가투입

    한국투자증권이 동원금융지주에 5462억원에 팔리는 것으로 최종 확정됐다. 이 과정에서 공적자금 1조 6500억원이 추가로 투입된다. 최대 500억원 가량의 사후손실 보전도 정부와 동원지주 사이에 약속됐다. 이에 따라 한투증권에는 총 6조 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지만 회수액은 인수자산 등을 포함,1조원에 머물게 됐다. 재정경제부 산하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18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전체회의를 열어 예금보험공사(정부측)와 동원지주가 합의한 이런 내용의 ‘한국투자증권 주식매매 계약 체결 및 공적자금 지원안’을 승인했다. 한투증권 매각절차는 다음달 말 완전히 마무리된다. 앞으로 예금보험공사는 한투증권에 1조 500억원을 출자하고 한투증권 보유 주식과 채권 등 자산 6000억원어치를 매입하는 등 모두 1조 65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다. 이에 따라 한투증권에 들어가는 공적자금은 1999∼2000년의 4조 9000억원을 포함, 모두 6조 5500억원에 달하게 됐다. 공자위는 “금감원이 정하고 있는 영업용 순자산비율 150%를 충족시지 않으면 한투증권이 영업을 지속할 수 없어 추가로 공적자금을 투입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한투증권 인수로 동원지주는 자산운용업계에서 단숨에 1위로 올라서게 됐다. 두 회사의 계열 자산운용사들의 지난해 12월말 기준 수탁고는 동원투신운용 3조 9340억원(시장점유율 2.12%), 한국투신운용 20조 5780억원(11.07%)으로 총 24조 5210억원(13.19%)에 이른다. 현재 1위와 2위인 삼성투신운용 22조 2260억원(11.96%), 대한투신운용 21조 5690억원(11.60%)을 상당폭 웃도는 것이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미리 가본 ‘아파트 종갓집’의 설

    미리 가본 ‘아파트 종갓집’의 설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 딸린 종가는 대개 외진 곳에 있다. 심하게는 돌보는 후손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종가는 곧 생명력을 잃은 집이다. 더욱이 문화재라도 지정되면 박제된 느낌이다. 조상은 후손이 돌보지 않는 고대광실의 사당보다는 자손과 함께 숨쉬는 초옥을 더 정겨워하지 않을까. 이 시대의 대표적 주거 형태인 아파트에 조상의 신위를 모신 종가도 있다. 대유학자 율곡 이이를 배출한 덕수이씨 가문이다. 율곡 하면 강릉 오죽헌을 생각하지만 오죽헌은 율곡의 생가이지 종가는 아니다. 아파트 종가는 21세기에 변해 가는 종가의 대표적인 미래 모습임에 분명하다. 설을 며칠 앞두고 율곡의 15세손 이천용(64)씨가 지키고 있는 아파트 종가를 찾았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오정식 남상인기자 oosing@seoul.co.kr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 강선마을 한 아파트에 있는 덕수이씨 종가. 솟을대문도, 세월의 이끼가 낀 대들보도 없다. 여느 아파트와 겉모습은 똑같다. 현관을 들어서자 왼쪽 벽에는 10만양병을 주장한 내용과 함께 율곡 선생을 성균관 문묘에 배향할 수 있도록 명한 교지가 표구된 채 걸려 있다. 아파트 거실 한 쪽에는 황해도 석담에 있는 옛 종가의 빛바랜 흑백사진 등이 걸려 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키를 넘는 장에는 잘 닦여진 유기 제기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비로소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율곡의 15세손 이천용(64) 종부 서경옥(61) 부부의 단아한 미소도 남달랐다. 부드러운 눈매가 초가지붕과 닮았다고 할까. 이씨가 현관 오른쪽 방문을 “서재 겸 사당”이라며 열어주었다.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의 위패를 모신 방이다.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위패는 상스러운 흰빛이었다. 이씨는 “전통 한옥으로 친다면 안채 동편 뒤에 사당이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신주를 모셨다.”고 말했다. 신주를 모시는 감실을 벽에 붙였다. 감실 둘레에는 짧은 휘장을 드리웠다. 감실 맞은편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다. 클릭 한번으로 지구촌이 연결되는 첨단과 누대에 걸친 전통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평소에 문을 닫아두는 곳이다. 율곡은 선생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시 석담에 정착했고, 수백년 동안 후손들이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사유재산을 한창 몰수하던 1947년 14대 종손 이재능(79년 작고)씨가 율곡의 신주와 교지를 품에 안고 월남했다. 이씨는 불천지위(不遷之位·통상 4대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유교 관례에서 벗어나 후손들이 영원히 제사를 받드는 신위)를 비롯해 한해 10여차례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봉제사와 함께 제수를 장만할 재산도 상속받았겠지만 그는 아무 유사없이 제사만 물려받았다.‘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밥은 굶어도 조상 제사는 지낸다. 그는 “일산에 자리잡은 이유는 1시간 거리인 황해도 종가와 가깝고 율곡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와 지척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설 차례에는 출가한 딸 내외와 종친회 몇 사람이 찾는다. 종가를 찾는 문중의 숫자도 많이 줄었지만 “조상을 섬기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대유학자의 집안이니 차례상에 오르는 제수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율곡은 불천지위이므로 차례나 제사때 가장 먼저 지낸다. 이씨는 “할아버지가 저술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제의초(祭儀抄) 기록대로 제사를 행하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례상을 각각 차린다.”고 말했다. 제의초에만 제수 5열 진열을 처음 선보였고, 요즘 대부분이 이에 따르고 있다. 설 차례상 첫줄에는 떡국을 올린다. 둘째줄에는 제기 하나에 닭고기와 쇠고기, 숭어 한 마리를 순서로 올리고 하얀 화선지로 십자 모양의 적사지로 숭어를 감싼다. 이어 절편을 본편으로 하여 그위에 화전을 올린다. 셋째 줄에는 탕이, 넷째 줄에는 포와 삼색나물(숙주·고사리·시금치)·간장·나박김치·식혜를, 다섯째 줄에는 대추·밤·배·감·사과 5가지의 과일만 올린다. 꼭 올라야 하는 기본 제수품으로 정갈하고 단출한 상차림이다. 서씨는 “할아버지는 고기를 그다지 드시지 않았던 분이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손이 많이 가는 전과 가짓수가 많은 떡과 같은 제수품이 많지 않아 제사 모시는 일이 결코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슝늉 대신 차를 올린다며 차례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이 정도면 신세대 주부들도 차례상 차림이 그다지 어렵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가와 차례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세계가 인정하는 한민족 고유의 풍속인 종가와 차례가 아름다운 전통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어 보였다. ■ 율곡의 가문 덕수 이씨는 율곡의 가문 덕수 이씨는 조선시대에 크게 부흥했다. 덕수는 임진강 연변의 파주를 이르는 지명으로 덕수부원군인 4세 이윤온 때부터 가문을 덕수 이씨라 부른다고 했다. 덕수 이씨는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세기의 사상가 율곡이 있고, 무공 충무공 이순신이 역시 이 가문 출신이다. 조선조 여인상 신사임당도 이 가문의 며느리다. 율곡과 충무공은 같은 시대의 인물로 율곡이 9세 더 많지만 세대로는 율곡이 13세, 충무공이 12세손으로 아저씨와 조카뻘이다. 촌수는 19촌간. 종손 이씨가 들려준 이들 간에 구전되는 일화 하나. 어느 날 둘이 만나기로 하고 충무공이 찾아왔으나 율곡이 나오지 않는 대신 호수에 거북이 모양의 기름종이를 띄웠고, 충무공은 이에 착안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율곡은 명종 19년(1564년) 호조 좌랑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 홍문관 교리로 임명된 후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 국방의 안전을 위해 십만양병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한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파주시 율곡리에서 호 ‘율곡’을 따왔다. 1584년 1월16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청렴하게 산 그는 저승갈 때 입을 수의마저 없었고, 수중에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부싯돌 하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 ‘차례 차례’ 배우면 쉬워요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게 제례문화다. 명절 때마다 낯설다. 그러나 어려운 의례에 끌려다닐 수는 없는 일. 올 설날을 앞두고 제례문화를 익혀 보자. 황의욱 성균관 전례연구위원은 “제사 음식을 담는 그릇을 제기라 한다. 반드시 목기나 유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쓰는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또 “과일을 다 깎아야겠지만 윗부분만 깎는 것은 깎았다는 시늉을 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김행 한국전례원장은 “차례상에 음식을 놓는 위치는 곧 음양의 질서”라며 “차례 때마다 음식의 위치가 바뀌면 신경을 덜 쓰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차례는 제사와는 달리 술을 한번만 올리고 축문을 읽지 않는다. 설 차례에는 떡국을 올린다. 상차림은 지방마다 가정마다 조금씩 다르다.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은 “차례상에는 복숭아를 올리지 않고, 붉은 팥으로 떡고물을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례 음식은 양념을 진하게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윤소장과 함께 차례상 차리는 법을 점검한다. 우선, 제주가 차례상을 바라보아 앞쪽이 북쪽, 왼쪽을 서쪽, 오른쪽을 동쪽으로 한다.(실제 방위와는 다를 수 있다.) 차례상을 차리는 순서는 가장 먼저 신위 앞으로 잔과 시접을 놓고 제5열부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둔다.5열 과일을 두는 순서는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 흰색 과일은 서쪽에)니 조율이시(棗栗梨枾·왼쪽부터 대추·밤·배·감의 순서)니 하지만 정확한 원칙은 없다. 가풍대로 하면 된다. 대개 꽃받침자리가 위로 가게 한다. 그 다음은 제4열로 포·나물·간장·침채·식혜 등을 둔다. 이때는 건좌습우(乾左濕右·마른 것은 왼쪽, 젖은 것은 오른쪽)와 생동숙서(生東熟西·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에)를 따른다. 식혜는 건더기만 건져서 쓴다. 제3열은 육탕·소탕·어탕을 둔다. 제2열은 국수 육적·소적·어적·떡을 놓는다. 탕과 적의 숫자를 같게 하는데 보통 3개나 5개를 둔다. 또 어동육서(魚東肉西·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에)와 두동미서(頭東尾西·생선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를 따른다. 생선의 배쪽이 신위쪽으로 가게 한다. 제1열은 떡국·잔·시접·잔·떡국 순서로 놓는다. 접동잔서(接東盞西)라 하여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철상의 순서는 떡국을 물리고, 신위(또는 지방)를 제자리에 둔 다음 상 그대로 내려 먹으면 된다. 황 연구위원은 “‘감 놔라, 배 놔라.’는 할 수는 없다. 형식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가가례로 정성을 다하면 된다.”고 말했다.
  • [낮은소리] 국가 기록 없어… 유공자 인정 ‘별따기’

    [낮은소리] 국가 기록 없어… 유공자 인정 ‘별따기’

    6·25 당시 참전 인원은 12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70여만명이 부상을 입었다.40여만명은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나머지 30여만명은 입증자료 부족 등으로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 유공자 신청이 연간 2만여건 제기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중 65%가량만 인정된다고 한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수년, 수십년간 매달려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가로부터 치료와 함께 보상금을 받고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 이외에 추가로 인정받기가 무척 힘들다. 정부도 이들을 최대한 배려한다는 입장이나 일정 조건을 갖춰야 하는 만큼 한계가 있다. “6·25때 경찰에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하다 질병으로 제대한 뒤 숨진 부친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길이 없나요.” 충남 천안시에 사는 신모씨는 참전 중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등을 벌이다 폐결핵에 걸려 제대를 한 뒤 2년 만에 사망한 부친을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지난해 말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신씨는 “해당 기관에서는 경력 증명서와 재적(在籍)등본, 사망원인을 알 수 있는 의학적인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지만 50년 전의 일이어서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이처럼 젊었을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조국을 지키다 숨졌거나 부상을 입은 노병(老兵)과 그들의 후손 가운데 관련 서류가 없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당사자들이 입증자료를 대지 못하는 데다 정부에서도 보관 중인 서류가 없어 ‘비해당처분’을 받기 때문이다. 군인 및 경찰로 복무할 때의 기록은 모두 보관돼야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관련 서류가 보관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6·25때의 자료 가운데 상당수가 없으며, 이 때문에 인정을 해주고 싶어도 못 해주고 있다.”면서 “그렇다고 본인들이 제출한 자료만으로 인정해 줄 수는 없지 않으냐.”고 답답해했다. 강원도 평창에 사는 박모(75) 할아버지.50년 전 군대에 있을 때 차량 전복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도 관련 자료가 없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며 하소연했다. 박 할아버지는 “사고로 군병원에 후송돼 치료를 받았는데, 병원에 입원한 기록은 있지만 어디를 치료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관돼 있지 않다.”면서 “국가가 기록 관리를 하지 않은 채 서류가 없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것 아니냐.”고 흥분했다. 그는 “사고 때 등뼈 2개가 손상됐고, 복수가 차오르는 등 중상을 입었는데 당시 국가사정이 어려워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의병제대를 한 뒤 평생을 약에 의존해 생활하다 치료라도 무료로 받고 싶어 신청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전북 고창군에 사는 이모(73) 할아버지의 사정도 마찬가지.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학도병으로 입대한 뒤 2차례나 부상을 입었으나 부상원인을 규명할 관련 서류가 없어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당시에는 의료시설이 제대로 없었고, 매일 수백명의 환자가 몰렸기 때문에 행정착오가 많은 때였다.”고 상황을 회고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 역시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못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같은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방도가 달리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번 신청을 했다가 인정을 못 받으면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또 민원인의 상당수는 노령자다. 그렇지만 일부는 수차례에 걸쳐 민원을 제기하고 행정소송까지 제기하기도 한다.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소송에서 진 뒤 관련 서류를 찾아내 끝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긴 하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2년만에 인정받은 김상국씨 “기록관리의 책임은 국가에 있는데, 민원인에게 관련 자료를 찾아오라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2년여의 노력 끝에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은 김상국(60·인천시 남구 도화2동)씨는 국가유공자 인정 절차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2002년 7월 유공자 인정신청을 낸 이후 두 차례나 기각결정과 행정심판 패소라는 역경을 겪어야 했다.‘3전4기’ 끝에 지난해에야 비로소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김씨는 민원인이 직접 유공자임을 입증할 만한 서류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돼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 서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뿐더러 ‘돈 타 먹으려고 사기친다.’는 ‘모욕’도 수없이 당했다고 억울해했다. 그는 지난 1968년 11월 군에서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돼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다 만기제대했다.2000년 ‘상이등급 7급’이 신설되면서 국가유공자 인정 신청을 냈지만 관련 서류가 없어 인정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후송돼 간 병원에는 자료가 남아 있는데, 언제 자대로 복귀했는지,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등의 자료가 전혀 없었다. 부인 김옥수(60)씨가 나서서 세 차례에 걸쳐 육군본부를 방문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직접 찾아 제출했으나 역시 돌아온 것은 ‘인정불가’ 판정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국민고충처리위원회를 찾았다. 고충위가 나서서 보충서류를 찾고, 함께 근무하다 사고를 목격했던 선임하사의 진술을 바탕으로 ‘인정권고’를 해준 바람에 결국 2년 만에야 인정을 받았다. 김씨는 “민원이 접수되면 정부가 적극 나서서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정말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관련 서류가 없는 분들은 인정받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혀를 찼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정하태 보훈처 사무관 “자료가 없어 국가유공자 인정을 못 받는 억울함도 막아야 하지만,‘가짜’ 유공자 양산을 막는 것도 중요합니다.” 국가보훈처 정하태(심사정책과) 사무관은 국가유공자 인정 실태의 ‘한계’를 인정한다. 민원인이 제기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가 보관되지 않은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접수된 민원 가운데 30% 정도는 관련 서류가 없다. 정 사무관은 그래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도 관련 서류가 없어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류보관에 문제가 있는 만큼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당시 사진이나 엑스선 필름, 의사소견서, 사고를 목격한 동료의 인우보증 등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제출할 것을 당부한다. 국방부에도 필요한 자료를 찾아달라고 계속 주문한다. 이같은 노력으로 2001년 39.8%,2002년 39.5%에 이르던 행정소송 패소율이 2003년 33%,2004년에는 28.1%까지 떨어졌다. 소송 전에 직접적인 자료가 없더라도 보충적인 자료를 적극 활용해 인정을 해주다 보니 패소율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 사무관은 억울한 민원을 줄이기 위해서는 관련 기관이 서류를 찾아주는 데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간 제출되는 민원은 2만건에 달하지만 관련 서류를 찾는 담당인력은 8명에 불과하다.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열심히 찾아도 누락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유공자를 위해 쓰는 예산이 연간 2조원에 달한다.”면서 “엄청난 예산이 수반되는 만큼 억울한 사람도 없어야 하지만, 가짜 유공자가 진짜로 둔갑해 세금을 축내는 것을 막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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