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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용카드·인터넷·화상통화 120년 전에도 있었다?

    신용카드·인터넷·화상통화 120년 전에도 있었다?

    1951년 일본의 데쓰카 오사무는 2003년 4월 7일 탄생할 로봇을 그려냈다. 키 135㎝에 몸무게 30㎏인 이 로봇은 무쇠로 만들어진 단단한 팔과 레이저 빔을 발사하는 손가락을 갖고 있었다. 로켓 엔진을 단 다리로 하늘을 날 수 있었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엉덩이에서는 발칸포를 뿜었다. 바로 ‘우주소년 아톰’의 탄생이었다. 그 후 60여년이 지난 2012년 오늘, 오사무가 그린 ‘미래’는 벌써 과거가 됐다. 하지만 현실 속에 아직 아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는 있지만 하늘을 날고 악당을 물리치기는커녕 뛰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조차 다다르지 못한 목표다. 인간은 현실에 만족하기보다 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존재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상상하고, 또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상상은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하나하나 정복됐고, 우리는 그 혜택 위에 살고 있다. 과학자들이 만화 속 아톰을 단지 허황한 상상으로만 치부하지 않는 것도 언젠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인류 발전의 속도를 바꿔놓은 이후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주도한 가장 큰 원동력은 ‘공상과학’(SF) 소설이었다. 과학자들은 SF작가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황당한 기계와 기술이 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완성된 기계, 궁극적인 기술이 어떤 모습인지를 아는 것만큼 뚜렷한 목표는 없다고 여겼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SF는 미래의 사회학”이라고 단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SF작가들이 그린 미래는 오늘날 얼마나 이뤄졌을까. 미국의 ‘이노베이션 뉴스데일리’가 ‘실제가 된 SF의 예언’이라는 기사에서 이 같은 궁금증에 답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있는 작가들의 상상력은 마치 미래를 미리 보는 듯하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1 달착륙 “미국 플로리다의 한 기지에서 세 명의 남성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캡슐에 앉아 달나라로 떠난다. 그들은 달에 도착해 달 표면을 걷는다. 돌아올 때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져 미국 해군의 배가 이들을 건져낸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사진 위) 얘기가 아니다. 1865년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 등장하는 달여행 시나리오다. 베른은 로켓은커녕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대포를 이용한 달여행을 상상했고, 소설 속 장면은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현됐다. 아폴로11호의 귀환캡슐을 바다에서 찾아낸 미 해군 함정의 실제 이름은 ‘콜롬비아’였고, 베른의 배는 ‘콜롬비아드’였다는 점까지 비슷했다. 후세 과학자들이 가장 놀란 점은 베른이 소설 속에서 “우주인들은 우주 공간에서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고 묘사한 부분이었다. 19세기에는 이 같은 사실을 추정할 근거조차 없었던 때였다. 2 인터넷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1898년 ‘1904년의 런던타임스에서’라는 짧은 소설을 썼다. 트웨인은 ‘텔렉트로스코프’라는 전화선을 이용한 시스템을 소설에 등장시켰다. 전 세계를 연결하고 무한한 정보와 매일매일의 뉴스를 전달할 수 있으며, 쌍방향 논쟁도 가능했다. 심지어 각각의 정보는 카테고리에 의해 분류돼 있었다. 미 국방부가 초창기 인터넷의 모태로 불리는 ‘알파넷’을 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1969년이었다. 3 원자폭탄 영국 작가 허버트 G 웰스는 1914년 ‘자유로워진 세계’라는 글에서 “1956년 세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는데 핵물리학을 이용한 새로운 폭탄이 등장한다.”고 적었다. 웰스는 “폭탄이 폭발하고 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땅은 복구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웰스는 당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주도로 막 태동한 핵물리학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뒤 그의 상상은 일본(사진 아래)에서 그대로 현실화됐다. 4 레이더 젊은 시절 전기 기사로 일했던 미국의 휴고 건즈백은 1911년 ‘랄프 124C 41 플러스, 2660년의 로맨스’라는 책을 썼다. 현재의 지식으로 보자면 이 책은 미래학 사전이나 마찬가지다. 형광등, TV, 리모컨, 테이프 레코더 등은 물론 태양광에 대한 아이디어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받은 것은 “일정한 파장을 가진 전파를 쏘면 반사돼 오는 전파를 관측해 금속 물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으며, 비행체의 거리도 알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쓰이는 레이더에 대한 정확한 묘사였다. 건즈백은 1926년 세계 최초의 SF전문지 ‘어메이징 스토리스’를 창간했고, 현재 가장 권위있는 SF상인 휴고상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5 온라인신문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SF작가로 꼽히는 아서 C 클라크는 1968년 대표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출간했다. 클라크는 “밀리초에 불과한 순간이면 어떤 신문의 헤드라인이든 금방 찾아볼 수 있다. 모든 뉴스는 매시간 자동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영어만 할 수 있는 사람도 전 세계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썼다. 소설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뉴스 위성’이었다. 클라크는 인공위성을 정확하게 예측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한 셈이다. 6 탱크 허버트 G 웰스는 미래의 원자폭탄뿐 아니라 전쟁용 기계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1903년 발표한 단편소설에서 웰스는 ‘랜드 아이론클래즈’라는 이름의 기계를 선보였다. 30m 정도 길이의 이 기계는 8쌍의 바퀴로 굴러가며 안에서 42명의 군인과 7명의 지휘관이 탑승했다. 자동으로 조종되는 포신은 전방위로 돌아가며 8쌍의 무한궤도 바퀴에 의해 굴러가도록 설계됐다. 13년 뒤 소설속의 기계는 탱크라는 이름으로 실제 전선에 등장했다. 7 가상현실게임 비디오게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58년이었다. 그러나 2년 전인 1956년 아서 클라크는 이미 훨씬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은하제국의 멸망 후를 그린 소설 ‘도시와 별’에서 인류의 후손들은 중앙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는 도시 다이어스퍼를 건설한다. 시민들은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천년을 산 뒤 사후에는 의식이 기억은행에 저장되고 다시 몸이 만들어지는, 이를테면 부활하는 불멸의 생을 산다. 시민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꿈 속에서 마치 실제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 8 비디오 채팅 미국의 통신회사 AT&T는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세계 최초로 ‘영상전화’의 개념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보다 50년 전인 1911년 휴고 건즈백은 ‘랄프 124C 41 플러스, 2660년의 로맨스’에서 ‘텔레폿’을 설명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벽에 설치된 텔레폿의 커다란 화면 앞에서 몇 개의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 여자친구와 화상통화를 할 수 있었다. 9 신용카드 미국 소설가 에드워드 벨러미는 1888년 ‘2000년에서 1887년을 돌이켜보면’이라는 책을 썼다. 1888년 잠든 사람이 2000년에 깨어나 변한 사회상을 살펴보는 내용의 이 책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신용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 카드로 모든 물건을 구매한다. 벨러미는 이 카드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상품은 물론 서비스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썼다. 10 스쿠버다이빙 19세기까지 사람이해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모자를 쓰고, 크고 무거운 옷을 입은 뒤 배와 연결된 공기호스를 끼우고서야 가능했다. 그러나 쥘 베른은 ‘해저 2만리’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해저탐험을 제시했다. “철로 된 통에 압력을 가해 공기를 채운 후 등에 매고 내려가면 7~8시간 이상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 [추석선물특집] 마오타이코리아

    [추석선물특집] 마오타이코리아

    공부가주의 역사는 2500년 전 공자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다.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하급 군인인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64세에 16세인 안징재를 후처로 들여 공자를 낳는다. 생후 3년 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쫓겨난 공자는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고난을 극복하고 성자 반열에 오른 공자를 기리기 위해 고향인 중국 산둥성 취푸시에는 중국 황실 주관으로 사당인 공부가 세워졌다. 사당은 베이징 자금성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했다. 황제가 제를 올리는 가옥인 대성전에는 용의 모양을 본떠 황금으로 만든 기둥 10개를 세우고 황금 기와를 얹었다. 이 사당에는 황제를 비롯해 귀족, 관리, 일반인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후손들은 공자가 생전에 제자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직접 빚은 주조법에 따라 술을 빚어 공자의 제를 모신 방문객들에게 대접했다. 이 술이 오늘날 공부가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는 전통적인 공부가주 생산 방식을 보호하고,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기 위해 취푸공부가주양조유한공사를 세워 공부가주를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취푸공부가주양조유한공사는 2009년 말에 대중적인 공부가주 ‘독’(獨)을 출시했다. 공자의 섬김과 정성의 가르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수 35도의 깊은 맛과 향을 가지면서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술을 개발하기 위해 2년 동안 연구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독’을 수입판매하는 마오타이코리아는 “상표인 ‘독’은 ‘홀로 있다’는 뜻으로 유년기에 세상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자신을 이뤄낸 공자의 의지를 배우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10월에는 프리미엄급 ‘독’이 출시된다.”고 덧붙였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무연고 묘지’ 해마다 는다

    ‘무연고 묘지’ 해마다 는다

    추석을 앞두고 성묘가 한창인 가운데 전국 곳곳에 방치되는 무연고 묘지와 관리비 체납 묘지가 늘고 있다. 30일 경북 지역 공원묘지에 따르면 가족·후손들이 찾지 않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무연고 묘지’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는 핵가족화와 더불어 최근 경제난과 이민 등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칠곡 현대공원묘원의 경우 전체 묘지 2만 7000여기(매장 2만 5000여기, 납골 2000여기) 가운데 무연고 묘지가 1300여기(5%)에 달한다. 또 4년 이상 관리비(연간 3.3㎡당 9000원)를 내지 않은 장기 미납 관리묘도 5400여기(20%)에 이른다. 이 공원묘원의 노정현 총무부장은 “미납 관리묘에 대해서는 묘지 인근에 ‘관리비 미납 묘지’ 문구를 새긴 푯말을 설치해 관리하고 있으나 묘 연고자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9000여기가 안장된 경산 공원묘원은 연간 1억원 정도의 관리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공원묘원 관계자는 “전체 묘지 중 15~20% 정도가 관리비를 내지 않고 있다.”면서 “후손들에게 수납용 지로용지를 보내도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400여통 된다. 심지어 10년 이상 관리비를 내지 않는 경우도 400여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경산 백합공원도 8700여기 중 1700여기(20%)가 찾는 이 없는 무연고 묘지다. 때문에 이 공원의 관리비 체납액은 7억원 정도 쌓였다. 이 공원 김응만 관리부장은 “공원 사정상 신용정보회사를 통한 채권추심도 고려해 봤지만 야박하게 굴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하지만 매년 추석을 앞두고 제초 작업 등 기본적인 관리는 하고 있다.”고 했다. 묘지 2000여기가 조성된 군위의 신세계·금산공원묘원 등도 5년 이상 미납 관리묘가 500기 이상, 20년 이상 장기 미납 관리묘가 100여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 지역의 강릉공원묘지, 영동공원묘지, 청솔공원묘원 등이 관리하는 분묘 1만 5000기 중에서는 30%에 가까운 4000여기가 무연고 또는 미납 관리묘다. 강릉공원묘원의 경우 3000여기 중 절반 정도가 무연고 분묘이고, 분묘 4000여기를 관리하는 영동공원묘원은 1000여기가 5년 이상 미납 관리묘다. 이런 가운데 일부 후손들은 분묘 관리비를 의도적으로 내지 않는 ‘얌체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공원묘원 관계자는 “추석을 앞두고 미납 관리묘 앞에 식혜와 과일, 생선 등이 놓여 있는 등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종종 보지만, 어려운 경제사정 탓인지 관리비를 납부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전재운 대구향교 총무국장은 “경제난과 핵가족화, 글로벌 사회 등의 영향으로 조상 묘를 돌보지 않는 후손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씁쓸해하면서도 “신세대들에게 조상에 대한 의례(儀禮)를 갖추라고 강요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다. 장묘 문화와 조상 분묘 관리 방법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독자의 소리] ‘벌초’ 유감/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이충노

    벌초는 고향 근처에 사는 후손들이나 외지에 나간 후손들이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을 제거하고 묘 주위를 정리하는 고유한 미풍양속이다. 일부 지역에선 금초(禁草), 소분(掃墳)이라 부르기도 하며, 처서가 되면 풀이 성장을 멈추기 때문에 추석 전에 행한다. 벌초 때마다 발생하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벌초 전후 음주사례가 많이 벌어진다. 또 교통질서 확립에 대한 당국의 의지 부족으로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나 분기점 등에서 과도한 끼어들기 탓이다. 벌초객들의 무단 주차로 말미암아 농작물을 훼손시키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함부로 농작물에 손을 대 농심을 멍들게 하기도 한다. 벌초가 조상의 음덕을 생각하며 가족의 화목을 다지는 행사라는 기본취지뿐만 아니라, 지역특산품 및 먹거리 구매를 통해 농민에게 소득증대 기회를 제공해 주지는 못할망정 음주사고나 교통 무질서, 농심을 아프게 하는 행위를 가져온다면 유감스럽다.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이충노
  • [기고] 녹색성장, 기아와 물 문제 해결의 단비/민동석 외교통상부 2차관

    [기고] 녹색성장, 기아와 물 문제 해결의 단비/민동석 외교통상부 2차관

    지난달 104년 만에 최악이라는 집중호우로 서울시내 전역이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물난리를 겪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바로 옆 중국 서부지역에서는 30년 만에 온 최악의 가뭄으로 물 부족 사태가 악화하여 잎들이 손으로 만지면 다 쉽게 부스러질 정도였다고 한다. 대표적 벼 주산지인 후난성에서는 올가을 쌀 수확량이 대폭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제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연임이 결정된 후 처음으로 고국을 찾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최근 서울에서 열린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 포럼’에 참석해 “기후변화 문제야말로 기아와 물, 에너지를 해결하는 하나의 진입점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반 총장이 강조하고 있는 최우선 의제가 기후변화 문제를 포함한 지속가능 발전 문제다. 2015년이 되면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밀 생산량이 30%, 쌀 생산량이 15% 감소하고 가격은 각각 194%, 121%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니컬러스 스턴경은 ‘스턴보고서’에서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해 구체적인 대응에 주저하는 사이에 기후변화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매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5~20%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녹색성장 정책을 발전의 패러다임으로 선포한 지 3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녹색성장은 세계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만든 우리 역사상 최초의 비전이며 더 큰 대한민국의 중심 비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2009년부터 녹색성장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녹색성장기본법을 제정하고 GDP 2%를 녹색성장계획에 투입하고 있다. 또한 ‘내가 먼저’(Me First) 정신에 입각하여 온실가스를 2020년 배출전망치 대비 30% 감축하겠다는 목표치를 설정했다. 작년 6월에는 경제성장과 환경적 지속가능성의 조화를 목표로 글로벌 녹색성장연구소(GGGI)를 설립하여 녹색성장 이론을 체계화하고 발전모델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고자 힘쓰고 있다. GGGI는 브라질, 에티오피아 등을 대상으로 녹색성장 지원 프로젝트 사업에 착수했다. 2012년까지 약 2억 달러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기후파트너십을 통해서도 녹색성장 선도국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녹색성장 정책을 국제자산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지난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는 우리나라 녹색정책 사례가 포함된 녹색성장전략 종합 보고서를 채택하는 등 한국의 녹색성장과 GGGI를 모범사례로 높이 평가했으며 국제연합환경계획(UNEP)도 우리에게 높은 평가를 내려 주었다. 전 세계가 우리의 녹색성장 정책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경제발전과 녹색성장 정책 경험을 세계와 함께 나누고 유엔과 협력하여 보다 더 나은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우리가 주도하는 녹색성장은 빈곤이나 가뭄으로 시달리는 전 세계에 단비가 되어 기아나 물 문제 등 다양한 이슈를 풀어 나갈 핵심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바 있는 ‘공생 발전’(Ecosystemic development)으로 가는 지름길인 셈이다.
  • 24일 서울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신의 선택은

    24일 서울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신의 선택은

    9개월여간 정국을 달구었던 ‘무상급식 논란’이 대단원의 획을 긋는다.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는 서울지역 무상급식 지원 범위에 관한 주민투표가 2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시내 2206개 투표소에서 진행된다고 23일 밝혔다. ●오늘 오후 8시까지 실시 이에 따라 투표권이 있는 서울시민은 사진이 부착된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또는 여권 등 증명서를 갖고 투표인 명부가 있는 지역 투표소에 가서 ‘단계적 무상급식안’과 ‘전면적 무상급식안’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유효투표율이 33.3%(279만 5760명)를 넘으면 오후 9시쯤부터 개표가 시작돼 오후 10시쯤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오세훈 시장이 투표 결과에 자리를 걸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정국이 요동칠 수 있다. 복지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재정립되고 정치권이 보궐선거 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 ●결과 따라 정국 요동 오 시장은 광진구 중곡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해 민생현장을 돌아보며 “24일 투표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도, 이데올로기의 대립도 아닌, 대한민국의 복지 방향을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투표”라면서 “공짜복지는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의 세금폭탄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시장이나 한나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미래를 걱정하는 부동층 시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 달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지난 22일 트위터를 통해 “투표율이 3분의1을 넘어야 유효한 주민투표의 특성상 주민투표 때마다 불참운동이 불가피하다.”면서 “2007년 하남시장 주민투표와 2009년 제주지사 주민투표 당시 한나라당도 적극적인 불참운동을 펼쳤다. ‘불참도 권리행사’는 당시의 카피”라고 밝혔다. 이창구·김지훈기자 window2@seoul.co.kr
  • [카다피 몰락] 트리폴리서 잠든 美 첫 원정 해군 200년 만에 귀향?

    [카다피 몰락] 트리폴리서 잠든 美 첫 원정 해군 200년 만에 귀향?

    카다피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최후의 격전을 벌이고 있는 리비아 트리폴리 도심의 녹색광장(순교자의 광장) 바로 아래에는 207년 전 트리폴리에서 전사한 미 해군들이 묻혀 있다. 이들은 1804년 아프리카 북서 해안지역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바르바리 전쟁 당시 폭발물을 실은 전함을 타고 트리폴리에 도착하기 직전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전함과 함께 수장됐다. 당시 숨진 미 해군은 리처드 소머스 사령관을 비롯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시인 롱펠로의 삼촌인 헨리 워즈워스 중위도 포함돼 있다. 희생자들 가운데 일부는 트리폴리의 신교도 공동묘지에 묻혔고, 나머지는 녹색광장 바로 밑에 매장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들의 유해 송환 문제를 놓고 재향군인회와 해군, 의회 사이에 논쟁이 한창이다. 재향군인회가 6개월 전 리비아 사태가 촉발된 직후 이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며 입법 로비를 벌이면서부터다. 22일(현지시간)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재향군인회의 팀 테츠는 “유해를 송환할 수 있는 적기를 맞았다.”면서 “리비아 정세는 변하고 있고, 후손들도 유해 송환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재향군인회는 리비아 사태와 관련해 각별히 관심을 가질 만한 로비를 벌인 11개 그룹 가운데 하나”라고 전했다. 재향군인회의 수개월에 걸친 로비 끝에 트리폴리에 묻힌 해군의 유해를 발굴, 송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법안은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했다고 허핑턴포스트는 전했다. 매케인 의원은 허핑턴포스트의 입장 표명 요청에 응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미 해군의 공식 입장에서 짐작할 수 있다. 게리 러프헤드 제독은 “해군의 관습과 전통은 전함이 가라앉은 장소를 전사자들의 명예로운 안식처로 삼는 것”이라면서 “해군은 트리폴리 묘지를 전사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해군 대변인 애레나 게레스 중위도 러프헤드 제독의 발언이 해군의 공식 입장이라고 확인했다. 이에 재향군인회 대변인 마티 칼라한은 “카다피군이 시위대를 진압했던 녹색광장과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신교도의 공동묘지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명예로운 전사자들을 존중할 의지와 힘을 갖고 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도 이들이 묻힐 장소가 있다.”고 덧붙였다. 리비아 사태의 급진전으로 미 해군들의 유해가 207년만에 송환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충남지역 ‘로또 조상땅’ 찾기 붐

    충남지역 ‘로또 조상땅’ 찾기 붐

    충남에서 조상땅 찾기 붐이 일고 있다. 충남도는 21일 올 상반기 도내 16개 시·군에 신청한 조상땅 찾기 건수가 732건으로 지난해 상반기 307건에 견줘 2.4배 급증했다고 밝혔다. 서민경제가 어려워진 탓도 있지만 갖가지 개발호재로 충남 땅값이 대폭 상승한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영상 금산군 지적정보계 주무관은 “올해 들어 조상땅 찾기 신청자가 부쩍 늘었다.”면서 “특히 금산이 고향인 출향 외지인이 신청을 많이 한다.”면서 “‘요즘 땅값이 얼마나 올랐느냐’고 묻는 사람이 꽤 있다.”고 귀띔했다. 시·군을 찾아와 “우리 조상이 소유했던 땅이 아주 많았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고 강조한 뒤 “요즘 살기가 어려워져 혹시 내게 남겨진 땅이 있는지 찾아보러 왔다.”며 땅 찾기에 열을 올리는 민원인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올 상반기 신청자 중에는 금산 지역이 104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 지역은 뚜렷한 개발사업은 없지만 충남 땅이 전체적으로 오르면서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 심리가 큰 곳이다. 개발업자들이 ‘서울시 천안구’로 부동산 붐을 조성해 온 천안시도 72건으로 적지 않다. 충남도청이 이전할 내포신도시가 들어서는 예산군은 78건에 달했다. 그러나 연기군은 상당수 토지가 세종시에 수용된 탓에 충남의 최대 개발호재지인데도 24건에 그쳤다. 1996년 7월 시작된 조상땅 찾기 사업으로 충남에서는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13년여간 8343명의 후손이 모두 14만 4999㎡의 조상땅을 찾아간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서울 여의도 면적(8480㎡)의 17배 정도에 이르는 크기다. 조상땅 찾기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등이 유언 없이 갑자기 숨진 뒤 물려받을 땅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신청한다. 또는 남겨진 땅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확한 지번을 몰라 조상땅 찾기에 나서기도 한다. 고향에 혹시 ‘로또 조상땅’이 남아 있는 건 아닌지 허탕을 각오하고 신청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올 상반기에 368명이 이 방법으로 조상땅을 찾아갔다. 올해 충남은 세종시와 내포시 등 대형 개발사업 진척이 빨라지면서 땅값이 3.13% 올라 전국 평균 2.57%를 크게 웃돌았다. 지난해에는 2.25% 오르는 데 그쳤다. 충남의 평균 공시지가도 지난해 3.3㎡(평)당 5만 3300원에서 올해 6만 5900원으로 대폭 상승했다. 충남도 관계자는 “이미 팔리거나 국가에서 환수한 토지도 찾아 되돌려 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조상땅 찾기를 신청하는, 웃지 못할 일도 간혹 벌어진다.”면서 “어쨌든 조상땅 찾기에 나서는 사람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독자의 소리] 독도 교육과정 편성 환영한다/강원 강릉시 포남동 이건원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한·일 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교육과학기술부가 이를 초·중·고 교육과정에 편성한다고 하니 늦은 감은 있으나 가슴이 후련하다. 이미 일본은 지난 1996년 2월 당시 일본 문부성 검정 중·고교 교과서 5종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를 실었고, 그 후 2006년 3월 29일 고교 교과서 제작 출판사에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명기하라고 요구하는 등 교과서를 통한 개입을 노골화했다. 이는 반역사적 행위이자, 대한민국 주권과 영토권에 대한 침탈행위이며,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무시하고 위협하려는 의도된 만행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정부는 국무총리실·외교통상부·교과부 등 관계부처가 독도영유권 대응책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특히 교과부는 초·중·고뿐 아니라 대학까지도 정규 교과과정으로 확대하여 차후 우리 후손에게 독도 영유권 문제의 걱정거리를 줄여주어야 한다. 강원 강릉시 포남동 이건원
  • 800년 전 제물된 어린이 유골 떼지어 발견

    800년 전 제물된 어린이 유골 떼지어 발견

    남미에서 8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소녀의 유골이 떼지어 발견됐다. 어린이들은 종교의식 때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보인다. 페루 라리베르타드 지방 우안차키토 지역에서 어린이 유골 12개가 발견됐다고 안디나통신 등 현지 언론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발굴 현장에선 낙타류로 보이는 동물 20마리의 유골도 함께 나왔다. 유골은 “땅에 뼈가 묻혀 있다.”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당국이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발견됐다. 발굴작업에 참여한 페루의 고고학자 가브리엘 프리에토는 “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약 1200년 치무문명 때 한꺼번에 제물로 바쳐진 어린이들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고고학계에 따르면 카파코차라고 불리는 잉카문명의 종교의식처럼 치무사회에도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있었다. 의식은 주로 왕이 병들거나 왕족 후손이 태어날 때 거행되곤 했다. 재앙이 닥칠 때도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행해졌다. 이번에 발견된 유골은 후자의 경우로 추정된다. 관계자는 “유골이 발견된 곳은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지만 오래된 점토가 발견됐다.”며 “아마도 큰비가 내리자 하늘을 달랜다며 어린이들을 제물로 드린 듯하다.”고 밝혔다. 사진=페루21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김병일 사람과 향기] 겸손과 헌신이 사람을 움직인다

    [김병일 사람과 향기] 겸손과 헌신이 사람을 움직인다

    요즘 우리들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모두 자기와 관련된 일을 하느라고 바쁘다. 자신과 가족, 회사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일을 위해 바쁘다. 물질적, 금전적으로 이득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남을 돌볼 겨를이 적어지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짓밟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당연히 이러한 곳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고 사회도 불신과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세계가 경탄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우리 한국의 행복지수와 투명성지수는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개인이 더 행복해지고 서로 신뢰하는 선진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이미 그런 삶을 사는 분들의 향기가 널리 퍼지도록 하여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 이근필 옹과 이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이다.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과 한국국학진흥원의 연수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이 두 분과의 대화 시간이다. 이근필 옹은 현재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하얀 두루마기 차림으로 꿇어앉은 채 수련생을 맞이하는 자세는 어느 강사보다 진지하다. 선조인 퇴계 선생의 행적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자기의 복을 짓는다는 뜻의 ‘예인조복’(譽人造福) 글귀를 강조하면서 다른 집안 선현들의 미담을 곁들인다. 재작년 101세로 작고한 부친 이동은 옹이 100세 때 쓰셨다는 ‘수신십훈’(修身十訓)을 나눠주면서, 이는 복사된 인쇄물이기 때문에 멀리서 오신 손님에게 이것만 드릴 수 없다며 정성스레 손수 쓴 ‘譽人造福’ 글귀를 같이 선물한다. “시원찮은 글씨를 드려서 죄송하다.”는 말과 더불어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십시오.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당부도 함께 한다. 작년에 2만장을 썼는데도 할 일이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퇴계종택을 나와 인근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하면 단정한 한복 차림의 이옥비 여사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갓 시집 온 새색시가 시어른께 여쭙듯 겸손하게 아버지 육사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비옥할 옥(沃)자에 아닐 비(非)자를 쓰지요. 제 이름이 왜 옥비(沃非)인 줄 아세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소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평생의 선물이에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렸을 때엔 독립운동가로서 시인으로서 아버지가 제게 안겨준 무게가 힘겹기도 했지만, 문학관을 찾는 분들이 저를 아껴주시기 때문에 요즘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가까이 느낀 적이 없다.”고 덧붙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후손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그들을 볼 때마다 겸손과 헌신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린다. 이근필 옹은 남의 말을 들을 수 없고, 이옥비 여사는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다. 온전한 몸도 아닌 상태에서도 항상 바르고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그런 모습들을 보고 이곳을 찾는 수련생들은 자신도 이렇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들을 한다. 겸손과 헌신이 사람을 움직인 것이다. 퇴계 선생과 이육사 선생은 분명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훌륭한 것은 학문적으로 뛰어났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생 동안 추구한 겸손, 배려, 헌신 등의 가치들이 오랫동안 향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향기가 그대로 후손들에 이어져 이 시대를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겸손과 헌신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아닐까 싶다. 그럴 때 대한민국은 국격이 올라가고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된 아산 ‘건재고택’ 빚 때문에 경매 나와 ‘충격’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된 아산 ‘건재고택’ 빚 때문에 경매 나와 ‘충격’

    세계문화유산 등록 잠정목록에 등재 신청된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의 상징 ‘건재고택’이 경매에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16일 대전지법 천안지원에 따르면 미래저축은행은 최근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 내 이모씨 소유의 건재고택에 대해 경매를 신청했다. 1차 경매는 10월 4일이나 11월 7일 있을 예정이다. 경매가는 81억여원이다. 이 고택은 조선 후기 학자 외암 이간(1677~1727)의 생가로 후손인 이씨의 아버지가 미래저축은행에 근저당을 잡히고 수십억원을 빌려 사업을 벌이다 실패한 뒤 자살하면서 은행 소유로 넘어갔다. 아들 이씨는 “빚을 갚을 때까지 은행에서 관리하라.”고 요청해 은행 측이 넘겨받았으나 빚을 갚지 못하는 데다 관리 과정에서 간간이 종중 및 주민들과 마찰이 빚어지자 이씨 앞으로 다시 소유권을 넘긴 뒤 경매에 부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이 지난 3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유네스코에 잠정목록 등재를 신청한 외암민속마을 65가구를 대표하는 건재고택은 2000년 1월 국가중요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됐다. ‘영암군수댁’으로도 불린다. 부지는 4433㎡, 건평은 267.7㎡이다. 마을 뒤 설화산 계곡 물을 끌어와 집안 연못으로 흐르게 하고 소나무, 향나무 등 자연경관을 살린 독특한 전통 정원으로 유명하다. 이 정원은 행정안전부의 ‘한국 정원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미래저축은행은 연료비 등으로 연간 700만~1000만원의 관리비를 들여 이 고택을 별장처럼 사용하면서 2009년 한두 차례 집 주변에서 술판을 벌여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등 문화재 사유화에 따른 관리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아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8·15 66주년] “음지서 독립 투쟁한 여성도 수만명… 정부가 증언·사료 수집해 예우해야”

    [8·15 66주년] “음지서 독립 투쟁한 여성도 수만명… 정부가 증언·사료 수집해 예우해야”

    “들꽃은 늘 조명받지 못했다. 오히려 발에 밟히고 차였다. 그러나 들꽃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들은 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피어있다.” 시인 이윤옥(52·여)씨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들꽃이라고 말한다. 지난 6월 출간된 그의 두번째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는 역사의 뒤편에 묻혀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한 최초의 시집이다. 이씨는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광복군 여성대원들의 맏언니였던 오광심은 물론 밥 짓고, 군복 만들고, 독립자금 조달한 여성들도 모두 독립유공자”라면서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워 시로 그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씨는 “‘(여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증거를 가져오라’는 정부의 독립유공자 심사체계는 어불성설”이라며 “정부가 직접 여성독립운동 사료를 수집하고 드러나지 않은 여성 유공자들을 발굴해 걸맞은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사를 건 엄혹한 시기에 그들이 독립투쟁의 흔적을 남겼겠느냐.”면서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66돌을 맞은 광복절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에서 이씨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형편없이 과소평가돼 있다. 남성 독립유공자가 수만명이라면 여성 유공자의 숫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공인된 독립유공자 1만 2966명 가운데 여성은 204명에 불과하다. 직접 총과 폭탄을 들고 싸운 여성도 적지 않지만 뒷전에서 밥 짓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나르는 등 음지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한 여성들도 모두 독립유공자 아니겠는가. →현재의 독립유공자 심사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스스로 서류를 제출해 독립운동을 증명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직접 증거자료를 수집해 국가보훈처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안다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일본군에 쫓겨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일부러 서류 등 흔적을 없앴는가 하면 가명을 서너 개씩 쓰기도 했다. 그나마 명단에 오른 분들은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해 가능했다.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사는 분들도 많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한다고 보는가. -간단하다. 정부가 나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와 일본신문만 봐도 적잖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평남도청에 폭발물을 던진 안경신 의사의 경우도 ‘여자폭탄범’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또 백범일지를 보면 연미당·정정화 여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을 되짚어 찾는 것이 국가가 할 일 아니겠는가. 생존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가 몇 분 안 된다. 그들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 빨리 그 분들의 구술을 문서로 기록해 둬야 한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몇 해 전 강의를 하던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가를 아는 대로 써 보라고 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댄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 태반이 유관순 열사였다. 그런 현실이 서글펐다. 그때 가까이 두고 읽을 수 있는 시집으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나. -기록이 거의 없었다. 국가보훈처 자료도 여성유공자 한 명당 서너줄의 기록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이들의 활동무대를 직접 찾아 나섰다. 중국 상하이, 광저우, 항저우, 충칭 등을 답사했고, 춘천 부산 나주 인천 수원 등을 돌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생존한 여성독립운동가가 6명에 불과해 자료 수집도 쉽지 않았다. 생가와 묘지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경북 안동에서 김락 지사의 묘소를 찾아가는 데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야 했을 정도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3·1절에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싶다. 이미 펴낸 시집도 공공도서관이나 초·중·고교에 보급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만 쉽지 않다. 얼마 전 요양원에 계신 이병희 여사를 찾아가 직접 시를 낭송해 드렸다. 눈물이 쏟아져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앞으로 시를 통해 여성 독립유공자 200여명의 숭고한 일생을 재조명해 보고 싶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이범진 순국 100년… “그의 자결은 日에 가장 확실한 복수”

    이범진 순국 100년… “그의 자결은 日에 가장 확실한 복수”

    국가보훈처는 대한제국 시기 러시아 상주공사였던 이범진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가 을사늑약에 항거하고 헤이그 특사를 후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올해는 이범진 공사가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자결·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번 선정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광복절을 맞아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연계하며 연해주에서 무장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이범윤 3인의 활동을 되돌아본다. 이범진의 일생은 ‘배일연아’(排日連俄)로 응축된다.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막는 세력 균형 외교를 추구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고종의 명에 따라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려가 일제가 황후를 시해할 것이라 전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아관파천을 계획하고 이를 실현했다. 아관파천은 고종을 일본군의 포위 상태로부터 해방해 친일 내각을 해산하는 등 독립국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일종의 정변이었다. ●전재산 독립운동자금 제공하고 목매 이후 이범진은 1896년 주미 공사로, 1899년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 3개국 주재 겸임 공사로, 1901년 러시아 상주 공사로 임명돼 국제 무대에서 외교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를 돕고자 노력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 회복 운동을 지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이범진은 대한제국 특사 파견을 위해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사들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범진은 항일혁명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연해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이 의병부대인 동의회를 편성할 때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군자금 1만 루블을 제공하는 등 동의회의 조직과 활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러시아 한인들의 민족운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해조신문’ 창간에도 직접 개입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자 유산을 모두 정리해 미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고 1911년 1월 13일 자결했다. 이범진은 죽기 전 만주에 있는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망했다. 폐하도 모든 권력을 잃었다. 나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그들을 벌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쳐 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범진의 자살은 나라는 망했지만 자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굴의 투쟁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목숨조차 반일투쟁의 수단으로 내놓은 것이다.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이범진이 자살로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범진은 자신의 유해를 고국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지만 그의 아들 이위종은 일제가 부친의 유해를 욕보일지 모른다고 판단해 독립이 될 때까지 부친의 유해를 페테르부르크에 안장하기로 했다. 이위종은 당시 러시아 퇴역 군인 놀겐 남작의 딸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 부친과는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위해 러시아 정교에 귀의했고,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러시아 이름도 사용했다. 이위종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부친을 따라다니며 미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프랑스에서 초등군사교육을 이수하고 러시아의 사관학교에서 장교교육을 받았다. 이런 생활 덕분에 그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평화회의에 파견되었을 때 특사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을사늑약이 황제의 승인 없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위종은 7월 9일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주제로 유창한 불어로 연설해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감동시켰고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이위종 러시아군 장교로 일본군과 싸워 1911년 부친 이범진의 자살은 이위종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이위종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방황하며 부인과 자녀를 돌보지 않아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위종은 1916년 이후 러시아군과 소비에트군에서 장교로 활동하며 의젓한 항일혁명가로 성장했다. 1918년 이위종은 붉은 군대 장교로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와 한국 공동의 적인 일본 간섭군을 상대로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한국 거류민단 집회에서 이위종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진정으로 박해받은 자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자유로운 러시아 인민들만이 우리에게 원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범진이 유서를 남긴 만주의 동생은 바로 이범윤이다. 이범진과 이범윤은 둘 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의 후손인데 러시아 문서들은 이 두 사람이 친척 관계에 있는 형제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범윤은 간도 관리사로 간도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 및 보호 사무를 맡아 인망을 얻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인부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함께 반일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1908년 연추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범윤 의병부대는 1908년 7~9월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는데, 안중근도 우영장의 신분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러일전쟁 이후 이범윤의 활동은 이범진과 밀접히 연계된 것이었다. 이후 이범윤은 유인석과 함께 13도의군을 결성하고 그 창의군 총재가 되어 재차 국내 진공작전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성명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그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19년에는 만주·노령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3·1운동 이후에는 북간도로 들어가 독립군 단체인 의군부 총재, 광복단 단장으로 추대돼 활동하다 1940년 10월 20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 [데스크 시각] 패거리에 둘러싸인 주민투표/김경운 사회2부장

    [데스크 시각] 패거리에 둘러싸인 주민투표/김경운 사회2부장

    고대 삼국시대에 먼저 국력을 과시한 나라는 백제였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은 마한을 복속시키고 고구려 왕마저 목숨을 잃게 만들었으며, 또 바다를 건너온 왜군을 제 병사처럼 부리고 중국 요서지방을 분국으로 다스렸다. 대백제가 탄생한 순간이다. 이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5세기 초반 후연과 거란, 동부여, 백제, 가야, 왜 등을 차례로 격파하며 동아시아 무역로를 장악해 ‘팍스코리아나’ 시대를 연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7세기 중반 ‘외교전쟁’을 통해 한반도 통일의 기틀을 다진다. 이들 3명의 왕은 위대한 정복통일 군주라는 것 외에도 눈에 띄는 공통점을 지녔다. 화려한 위업을 쌓기 전에는 당시 지배권력층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약자였다는 사실이다. 근초고왕은 100년 이상 유지되던 비류계 왕가에서 간신히 온조계 왕통을 이어받은 몸이었다. 왕권은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비류계 왕손과 이를 감싸고 도는 귀족층의 견제를 받았다. 반란 음모에도 시달려야 했다. 광개토대왕은 적통이 아니었던 탓에 위약했던 선왕처럼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도전에 맞서야 했다. 아울러 태종무열왕은 개인적인 잘못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선대왕의 후손인 진골이었다. 힘없고 외로운 군주 앞에서 권력을 쥔 집단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윽박지르는 모양새는 마치 힘센 패거리가 약자를 희롱하고 괴롭히는 꼴이다. 이런 약자가 패거리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민심을 얻는 길은 힘든 도전에 운명을 거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3명의 왕에게 그 길은 정복과 통일이었다. TV에서 역사드라마가 붐을 이루는 것 같다. 2000년대 이전에는 사극에서도 울고 짜며 답답한 한을 속으로 삭이는 장면이 많더니, 요즘에는 호쾌한 액션물이 넘쳐난다. 고대사에 대한 고증도 꽤 애쓴 흔적이 엿보여 볼 만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몹쓸 패거리가 약자를 괴롭히는 장면에는 부아가 치민다. 얼마 전 한 지방에서 장거리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 기사들끼리 동네 불량배를 고용해 길목과 승객을 독점하다 적발된 일이 있었다. 담합 사실을 모르고 택시를 댄 순진한 기사가 패거리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욕지거리를 듣고 발길질을 당하는 TV보도 장면을 보고 안타까웠다. 약자라고 모두가 사회적 소외계층이 아니다. 서울역 노숙자 중 몇몇 고참 노숙자들이 신참 노숙자들의 새 생활을 방해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저질 패거리 문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에서 무상급식을 놓고 오는 24일 주민투표를 하는데, 두 진영 가운데 한쪽에서 투표 불참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투표장에 나오는 유권자 모두를 한심한 사람으로 몰아갈 판이다. 주민투표를 주도하는 측에 반대할 요량이라면 정정당당하게 투표에서 지지를 얻어내면 된다. 불참을 촉구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민주주의는 참여가 기본정신 아닌가. 여기에 여야 정치권은 왜 난리인가. 주민투표가 앞으로 총선과 대선의 향방을 좌우한다며 이리저리 말을 바꾸고 시민들을 어지럽게 한다. 기왕에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투표를 하는 것이라면, 유권자들이 공익을 위한 바른 길을 잘 따져볼 수 있도록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 패거리는 아이들 밥상에서 뒤로 물러나라는 말이다. 지난 5월 스위스 취리히의 캔턴이라는 곳에서 색다른 안건의 주민투표가 진행됐다고 한다. 캔턴은 풍광이 아름답고 안락사가 허용돼 외국인들도 자살을 목적으로 찾는 관광지란다. 그러나 주민투표를 발의한 쪽에서는 이것이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라며 자살을 도와주는 ‘조력자살’과 ‘외국인 자살관광’을 제한하자는 안건을 표결에 부친 것이다. 그런데 주민(투표자 28만 8000명)들이 선택한 결과는 각각 85%, 78%의 반대표가 나왔다. 취리히 주민들은 대의보다 실리를 우선한 것이다. 주민투표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kwoon@seoul.co.kr
  • “아버지처럼 고국에 공헌하는 한국인 되고 싶어”

    “아버지처럼 고국에 공헌하는 한국인 되고 싶어”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아버지의 유언은 어머니와 형을 통해 선우광협(45)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국에서 태어나 두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중국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도 마음 속에는 늘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누리는 안정적인 삶과 한국에서 새로 꾸려가야 할 삶을 두고 끝없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선우씨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진짜 한국인이 되기로 하고 이를 실행했다. ●두살이 되기전에 부친 돌아가셔 11일 국적 증서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선우씨는 들떠 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해 충칭(重慶) 남안구 구당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유공자 선우완(1924~68) 선생의 막내 아들이다. 선우완 선생은 한국 광복군 제1지구대에서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지난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날 법무부에서 국적 증서를 받은 독립유공자 후손 13명 중 직계 아들은 선우씨가 유일하다. 선우씨의 딸 민(6)양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선우씨는 중국 선양에서 제법 잘나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중국 국영기업에서 근무하다 2004년 화장품 회사 ‘F2F’를 차렸고, 현재는 직원 120명을 거느린 견실한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 화장품 원자재를 수입, 중국에서 재가공해 출시하고 있다. 형과 누나도 중국 고위직 공무원과 교사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뒤 가족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한국 국적 취득 문제였다. 한국인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삶의 기반이 없는 현실이 문제였다. 게다가 선우씨의 아들(16)과 딸은 한국말을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도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가족회의를 정말 많이 했어요. 아내의 걱정이 컸지만 결국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제 마음을 받아줬죠.” 중국에서 어렵게 일궈 놓은 안락한 삶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이유는 뭘까. 선우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잖아요. 아버지의 뿌리인 한국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한시도 제 머리를 떠난 적이 없어요. 저도 아버지처럼 한국에 공헌하는 한국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의 형과 누나, 아내와 아들도 조만간 귀화를 신청할 계획이다. 해방 후 고향인 평북 태천군으로 돌아갔던 선우완 선생은 좌우 대립에 실망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뒤 문화대혁명 와중에 옥고를 치르다 병을 얻어 1968년 작고했다. 일곱 식구는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내몰렸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렸다. 4남매가 장성해 자리를 잡았지만 항상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참담한 가난을 이겨냈지만 고국에 대한 미련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독립유공자 후손 13명 특별귀화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선우씨는 요즘 귀국 준비에 바쁘다. 딸이 다닐 학교도 알아봤고, 다음주에는 아들과 고국 곳곳을 여행할 계획이다. “화장품 브랜드를 한국에서도 론칭할 계획입니다. 중국과 한국을 잇는 무역 외교사절이 되고 싶습니다.” 한편 법무부는 이날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대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독립유공자 후손 선우씨 등 13명에게 특별귀화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국적증서 수여식은 2006년 이후 6번째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美 최고 앵커 앤더슨 쿠퍼, 국내 최초 인터뷰

    美 최고 앵커 앤더슨 쿠퍼, 국내 최초 인터뷰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로 꼽히는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의 국내 방송 최초의 단독 인터뷰 방송이 오는 14일 오전 11시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앤더슨 쿠퍼는 CNN의 메인 앵커이자 재난 전문 기자로서, 2010년 아이티 지진참사 현장에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내던진 채 위험을 무릅쓰고 곤경에 처한 소년을 구해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쿠퍼는 성공한 저널리스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불행한 개인사를 공개하기도 했다. 미국의 철도재벌 밴더빌트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유명 패션디자이너이자 화가인 어머니는 잦은 결혼과 이혼으로 구설에 올랐고, 시나리오 작가인 아버지는 50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으며, 형은 23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투신자살한 것. 힘든 가정사 속에서 재난 현장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쿠퍼는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 밖에도 뉴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앤더슨 쿠퍼의 인간적인 모습도 시청자 곁을 찾아간다. 그는“생명을 위협받는 참사현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지만 벌레 앞에서는 꼼짝도 못한다.”고 말해 촬영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는 후문. 이 시대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자리매김한 앤더슨 쿠퍼의 국내 첫 방송 인터뷰는 14일 일요일 오전 11시 tvN‘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서 볼 수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뉴턴의 사과’ 대전에 열린다

    ‘뉴턴의 사과’ 대전에 열린다

    1665년 영국 링컨셔 근처 켄싱턴의 한 작은 마을. 20대 초반의 청년 아이작 뉴턴은 집 앞의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왜 사과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남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던 자연 현상에 궁금증을 갖기 시작한 이 천재 과학자는 결국 ‘만유인력의 법칙’을 완성했다. 40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났고, 수많은 자연의 법칙이 새로 발견됐지만 오늘날 과학은 여전히 뉴턴이 만들어낸 토대 위에 있다. 지난달 말부터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한국표준연구원 정원에 과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원 한가운데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이 사과나무의 이름은 ‘뉴턴의 사과나무’. 뉴턴의 고향과 지구 정반대에 있는 사과나무에 왜 이 같은 이름이 붙었을까. 8일 표준연에 따르면 이 사과나무는 켄싱턴 사과나무의 4대 후손이다. 1726년 영국의 고고학자인 윌리엄 스터클 리는 뉴턴의 집을 방문해 ‘뉴턴의 사과나무’를 발견했다. 이 나무는 1814년 벼락에 맞아 죽었지만 원목에서 자른 가지가 다시 벨턴의 한 정원으로 옮겨졌고, 또다시 접목한 후손이 1943년 미국립표준기술연구원으로 옮겨 심어졌다. 이어 1977년 한국에 표준연이 생기자 미연방표준국이 이 나무를 접목한 3그루를 1978년 기증하면서 한국에서 뉴턴의 사과나무가 자라게 된 것이다. 당초 세 그루 중 현재 살아남은 것은 한 그루에 불과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이곳을 찾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표준연은 꾸준히 접목을 시도해 카이스트와 과학고, 연구소, 대학 등 국내 11개 기관에 13그루를 분양했다.배재성 표준연 홍보팀장은 “1995년부터 여름마다 사과가 열렸지만 크면서 다 떨어져 버려 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연구소 직원들이 이 나무 자체가 잘 떨어지는 품종이라서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얘기도 한다.”고 밝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국내 취업중 외국인 근로자 저숙련 수 늘리고 임금 낮춰

    국내 취업 중인 외국인 근로자 대부분이 단순 인력으로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국내 고졸 미만 저숙련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다문화 가정의 2세들 역시 학력 수준이 낮은 경향이 있어 우리나라 노동력 향상에 기여하기보다는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최경수 선임연구위원은 4일 ‘외국인력 및 이민 유입의 경제적 효과’라는 정책 포럼 자료를 통해 외국인력이 현재와 같은 취업자 대비 3%를 차지할 경우 고졸 미만 근로자의 임금을 1.4~2.8% 낮추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번 연구는 2009년 말 기준으로 외국 인력의 94%가 단순 인력임을 감안, 외국인력을 내국인 고졸 미만을 ‘대체’하고 고졸 이상을 ‘보완’하는 관계로 전제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국제결혼으로 태어난 자녀들의 고등학교 취학률은 70% 정도로 100% 가까운 진학률을 보이는 내국인에 비해 낮은 편이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될 때와 마찬가지로 저숙련 노동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민자 및 그들의 후손의 비율이 취업자 대비 5%까지 늘어날 경우 저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2.1% 정도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키 큰 자녀 원하면 타국 연인 만나라”

    “키 큰 자녀 원하면 타국 연인 만나라”

    타지역 혹은 타국 연인과 교제 중인 사람들은 자녀의 키 걱정을 조금 덜어도 될지 모르겠다. 최근 부모의 출신지가 서로 멀수록 자녀의 키가 클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라이브사이언스닷컴이 보도했다. 폴란드 과학아카데미 인류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부모가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그렇지 않은 부모를 둔 자녀보다 평균적으로 키가 작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연구팀은 이 같은 이유가 유전적 특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주 다른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대대로 같은 지역 출신들보다 매우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서로 다른 유전자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효율적인 신체를 가진 후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연구팀은 매년 폴란드 학교에서 측정하고 있는 신체검사 기록을 연구에 활용했다. 이들은 성장 기간에 있는 6세부터 18세까지 아이들(남 2675명·여 2603명)의 신장 데이터와 이들 부모의 키, 수입 정도의 관계를 분석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놨다. 자녀의 신장은 부모의 유전적 요인과 영양 섭취 등의 많은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연구팀은 ‘결혼 거리’ 즉 부모의 출신지 차이가 자녀의 키에 영향을 주는 증거를 발견했다면서 남녀의 신장에 각각 20%, 14% 정도의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서로 먼 곳에서 태어난 남녀는 그들의 자손에 여러 유전적 장점을 부여할 수 있는 더 많은 유전적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이 같은 유전적 다양성을 이형 접합성(heterozygosity)이라고 하는데, 여성보다는 남성에게서 더 큰 신장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고 연구팀을 이끈 다리우스 다넬 박사는 말했다. 그의 말을 따르면 남성은 여성보다 성장 기간이 늦기에 어떤 특정한 유전적 에너지를 신체 성장에 쓰지만 여성은 여분의 에너지를 생식 성숙에 사용할 수 있다. 한편 미국 신체인류학 저널(AJPA) 7월호에 실린 이번 연구는 직접적인 유전자 관계를 실험한 결과가 아닌 간접적인 근사치를 나타낸 것으로, 연구팀은 실질적인 유전자 관계 실험을 위한 설계를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자료(베이비가제트)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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