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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경제硏 보고서 “종합 재난관리시스템 구축부터”

    반복적인 기상재해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려면 관련 정부조직을 서둘러 정비하고 가칭 국가기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1일 ‘반복되는 기상재해와 대응시스템’이라는 보고서에서 “96년,98년에 이어 올 여름에 발생한 수해는 원인,피해 그리고 대응방식에서 똑같았다”며 “기상재해는 물론 기후변화와 기후변화협약 등의 문제를 국가가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재난관리시스템이 하루빨리 구축돼야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재난대응책이 여러 부처에 나뉘어 있고 재난방지 계획이나 복구와 관련된 활동이 자연재해대책법 재난관리법 재해구호법 민방위기본법 등각종 개별법에 따라 별도 운용되고 있다”며 “예컨대 대도시 지역의 오존발생 예보체제도 기상과는 관련이 적은 환경부가 관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분산된 기상관측과 예보,대응에 관련된 기구와 시스템이 연계 운용되도록 국가기후법의 제정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미국의 경우 기후변화 등기상문제를 총괄하는 국가기후위원회를 두어 부처간 이견을 조정하고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어 “재해를 최소화하려면 개발계획을 세울 때 입지장소와 지반상태,기후조건,강수량 예측 등 설계단계부터 방재 개념을 엄격히 적용해야하며 풍수해보험 등 선진형 재난구제제도도 도입,기상재해 손실을 복구하는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재민들의 심리적 고통을 줄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기상재해로 전 세계가 곡물부족사태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며 “식량 생산을 적정수준에서 유지하고 비축을 늘리는 특단의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슈퍼컴퓨터를 도입했더라도 대기가 불확실한 성질을 갖고 있는한 기상 예측은 신(神)의 영역에 속한다”며 “마구잡이식 택지개발 등 환경을 경시한 정책이나 국민의식의 낙후성때문에 자연이 크게 훼손돼 재해가 일상화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경제 주체 모두 환경보전으로 기상재해를 최소화해나가야 할 것”고 밝혔다. 권혁찬기자 khc@
  • [대한광장] 교수들은 왜 거리로 나섰을까

    지난 8일 1,000여명의 교수가 ‘두뇌한국 21(BK 21)사업’의 백지화를 외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4·19혁명 이래 교수들만으로는 처음이라는 이 행사를 놓고 일부 언론은 “교수들의 제몫 챙기기”라고 자못 소리높여 비판의목소리를 돋우었다.겉으로는 BK21 사업을 반대하는 듯하지만,속을 들여다보면 교수계약제·연봉제 철폐를 주장하는 등 교수 신분 유지에 급급하고 대학개혁 일정 자체를 전면 포기하라는 등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얽매였다는 것이다. 우선 명확히 할 것은 거리로 나선 교수들이 대학개혁을 반대하기는커녕 현행의 대학체제와 관행에 대해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라는 점이다.이들은 우리대학의 낙후성을 통감하고 이를 극복해 ‘독자적인 학문생산체제’를 수립하자고 지난 10여년간 지속적으로 견해를 밝히고 여러 방안을 제시해 왔다.문제는 BK21 사업에서 교육부가 그것을 대학의 구조조정과 연계하고 있다는 점이다.즉 이 사업을 대학구조 및 입시제도 개혁과 연계해 초·중등교육을 정상화한다는 것이다. 교수들이 반대한 것은 대학개혁이나 그 취지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고등인력 육성사업과 연계한다는 점이었다.이들은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양자는 별개로 진행돼야 하며 오히려 연계가 대학개혁의 규모와 긴박감을 떨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즉 이들은 개혁을 반대한 것이아니라 근본적인 개혁을 제약하는 연계를 반대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신분 유지에 급급했다는 지적은 이들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다.이는 언론이 정부의 발표만 믿은 결과다.정부와 여당은 BK21 사업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7일 당정협의회를 열고 이 사업을 보완하기로 결정했다.이들은 보완책의 하나로 BK21 사업을 당초 계획과는 달리 연봉제·계약제와 연계시키지 않는다고 발표했다.이는 BK21에 대한 교수들의 반대가 이것때문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로 그동안 교수들이 BK21에 반대한 주된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 대학의 서열화,중앙·지방의격차 심화,기초학문의 붕괴,입시경쟁의 격화 등 대학교육의 황폐화다. 정부가 그 문제를 부각시킨 것은 국민들에게 마치 교수들이 연봉제와 계약제 때문에 반대를 한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며 일부 언론이 여기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지식정보화의 국제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갈 창의력 있는 인재를키운다는 BK21 사업의 근본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제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절차상의 결정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혹 여론수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합의가 나눠먹기식 결과밖에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대학사회의 현실이 그 반론을 쉽게 외면하기 어렵게 만든다.대학은 참으로개혁돼야 한다.하지만 그렇다고 교육부가 지원사업을 직접 관장할 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을까?그렇게 된다면 과거에도 그렇듯이 이번에도 ‘되는 것도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교수들은 생각한다. 대학사회가 병든 데는 자율적인 대학기구를 꾸리겠다는 교수들의 의지를 교육부가 끊임없이 꺾어온 것이 주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현재 대학은‘공론’을 형성하기 어려운 불구의 상태를 보이고 있음이 사실이다.그렇다고 하여 교육부가 마구 통제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뿐이다. 사학재단의 비리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대학을 옥죄는교육부를 교수들은 신뢰하지 않는다.교육당국에 대한 이 뿌리깊은 불신이 교수들을 거리로 내몬 것이다.이 불신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어떠한 교육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현 정권은 지금이라도 대학의 자율성을 보듬어 주어야 하며 교육부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현 상태에서 BK21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별도의 ‘고등교육위원회’를 꾸려야 할 것이다. [崔甲壽 서울대 교수·서양사]
  • [각료에세이] 열린 마음으로-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

    ‘세발(細足)낙지’를 ‘세발(三足)낙지’로 오해하는 도회지 사람들이 더러 있다.그런가 하면 포장마차에서 안주를 주문하면서 ‘산(生)낙지’를 ‘산(山)낙지’로 발음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둘 다 바다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코미디다. 내 고향 목포에서는 숟가락을 쥘 나이만 되면 꿈틀거리는 세발낙지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다리(세 개가 아니라 여덟 개다)를 ‘전체적으로’ 쭉 훑어 순간적으로 정렬시킨 뒤 통째로 단숨에 삼키는 아이들이 많다.목포는 천상 항구다. 조선왕조 500년 통치이념은 유학이었다.유학 숭상에는 이 고장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예 산에다 ‘유달(儒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유달산 정기 속에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해 공부와 공직수행으로 보낸 나날이수십 년에 이르렀다.크게 보면 목포도 한국이므로 국가에 바친 내 나름의 작은 봉사도 고향에 대한 헌신이 되리라 견강부회해 보지만,아무래도 애향(愛鄕)의 관심과 열정이 미흡했다는 반성이 든다.가끔씩 밤차를 타고 내려가 어쭙잖게 경제강의를 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다. 문일석의 시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 ‘목포의 눈물’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한다.이 노래가 나온 1930년대 목포 앞바다에는 동력선이 거의 없었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사정은마찬가지였다.‘동양의 나폴리’에 어울리지 않게 목포항은 오랫동안 상대적인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근년 들어 서해안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오늘날에는 다소 발전하고 있지만 1번 국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남서해안의 거점도시로서 기능을 갖추자면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문향(文鄕)이자 예향(藝鄕) 아닌 고향이 어디 있으랴만 필자의 고향에는 박화성문학기념관,남농기념관,해양유물전시관,향토문화관,농업박물관 등이 빼곡이 들어서서 자존심을 뽐낸다.건립을 추진중인 난영기념관까지 완공되면‘트로트 메카’의 위용도 한결 빛날 것이다.그뿐인가.시민 성금으로 90년대 초 새단장한 유달공원에는 한국 최초의 조각공원을 비롯해 달성공원,체육공원이나란히 조성되어 시민들의 높은 문화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오랜만에 유달산에 오르며 ‘유달산공원조성기념비’에 새겨진 권일송 님의 시를 읽어본다.“굽이치는 다도해를 발 아래 거느리고 영겁
  • [期數문화 진단](7)전문가 지적

    기수(期數)문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하루속히 없어져야 할 병폐”라고 지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기수문화는 연(緣)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또 하나의 ‘패거리 문화’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능률적인 일처리에도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석홍(吳錫泓)서울대 교수는 “기수제도는 대부분 군 검찰 등 일사불란한지휘체계를 요구하는 곳에서 깊숙하게 자리잡았다”면서 “그렇다보니 조직의 경직화를 초래했다”고 말했다.일본에도 이 제도와 비슷한 용퇴(勇退)제도가 있지만 우리처럼 일괄 승진,동반 퇴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교수는 특히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체제에서 기수제도는 조직의 낙후성을가져온다고 강조했다.인력활용 차원에서보더라도 기수제도는 불필요하다는설명이다. 성균관대 이효성(李孝成)교수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연으로 얽혀진 우리사회에서 기수 운운하는 것은 또 하나의 ‘패거리’ 문화”라고 혹평했다.지역감정과 같은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도 결국 이러한 ‘패거리문화’에서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기수 등에 조직이 휘둘려지면 원리원칙에 입각한 인사관리보다인간관계에 따라 일이 처리돼 비효율적인 집단을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기수들이 진급을 같이하고 퇴진도 동시에 한다면 유능한 인재가사장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경석(朴慶錫) 군사평론가협회장도 “최근 검찰 인사처럼 동기가 총장이됐다고 다 옷을 벗어버리는 사례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보는 기현상”이라면서 “인력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같은 관행은 하루속히 없어져야한다”고 말했다. 박회장은 “물론 일사불란하고 신진대사를 원활히 해 인사적체를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 해악이 많은 게 현실”이라고진단했다. 기수문화의 병폐가 많지만 마땅한 해결책 또한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하고있다. 오교수는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뚜렷한 현실에서 볼 때 기수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면서 “그러나 기수제도의 장점을 살린 조화의 미가필요하다”고 주장했다.동기애를 비롯,인간적인 관계에선 기수제의 장점을살리고,조직관리를 위해선 기수 이기주의를 배제해 연공서열을 타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실적주의와 행정의 전문성,일관성을 강화하기 위해 직업관료제도가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추기자 sch8@
  • 朴泰俊총재 ‘현장정치’ 시동

    - 인천신공항 찾아 문제점 지적, 전문가적 식견바탕 대안제시 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가 11일 영종도를 찾았다.인천신국제공항 건설현장을 점검했다.‘현장정치’의 가동이다.정책정당으로서의 재도약을 목표로하고 있다.스스로는 ‘정책총재’로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꾀하고 있다. 박총재는 주요 정책현장 방문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오는 18일에는 성업공사를 방문,부실기업 회생 및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를 갖는다.경부고속철도 건설현장,대전 과학단지,전문건설업체 등도 찾을 예정이다. 박총재는 이날 ‘철강왕’의 경륜과 경험을 유감없이 내보였다.영종대교 건설현황을 보고받을 때는 “한강대교가 20개가 넘는데도 현수교 하나 없다”면서 건설기술의 낙후성을 꼬집었다. 신공항 건설현장에서도 집요했다.“활주로간 거리가 400m밖에 되지 않는다”며 심각한 우려도 표시했다.국제민간항공기구(ICAO)규정에 따라 700m를 넘어야 한다는 전문가적 식견도 곁들였다.서울과 연결되는 철도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점을 지적하며 대안으로 ‘모노레일’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날 방문은 예정시간을 넘었다.차수명(車秀明)정책위의장과 이양희(李良熙)대변인, 김동주(金東周) 이긍규(李肯珪) 김고성(金高盛) 이상만(李相晩) 강종희(姜宗熙) 이재선(李在善)의원 등 당 소속 국회 건설교통위원들이 수행했다.박총재의 넘치는 의욕을 반증한다. 박총재의 방문프로그램은 당내로는 ‘친정체제’구축시도로 연결된다.정책정당으로서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통해 당내 위상을 굳건히 하겠다는 의지를읽게 한다.그러나 박총재는 당내 주류측인 충청권의 도전에 다시 직면하고있다.국민회의와의 소선거구제 합의를 전면 백지화한 것이 빌미가 되고 있다. 인천 박대출기자 dcpark@
  • 스크린쿼터 폐지보다 완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7일 “지금 당장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남북 당국자간 회담이나 경제협력 대화 등이 포함될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하반기중 본격적인 남북 당국자대화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낮 청와대에서 서울 상주 외신기자단과 오찬간담회를 갖고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미국사찰단의 사찰 결과가 나오고 페리보고서가 발표돼 남북관계가 완화되면 획기적인 진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대통령은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질문에 “지난해 250편의 영화가 상영됐는데 이 가운데 미국영화 관객비율이 68%”라고 지적한 뒤 “문화적인 차이와 한국영화의 낙후성 때문에 당장 폐지하기는 어렵고,차츰 완화시켜 나갈것”이라고 약속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98∼99 프로농구가 남긴것](5)-’아마추어’구단·KBL

    프로출범 3년째인 98∼99시즌에서도 구단과 한국농구연맹(KBL) 모두 아마추어 티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구단은 장기적인 경영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다기 보다는 하루 하루의 경기진행과 승리만을 쫓는데 급급했고 KBL 역시 조직과 운영에서 여전히 주먹구구식을 면치 못한 것.올시즌 개막을 앞두고 구단들은 ‘IMF한파’를 내세워앞 다퉈 긴축예산을 짰다.이 때문에 적자체제를 흑자로 돌릴 공격적 운영 전략은 아예 구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 이었다.출범 초기 각종 수익사업 등 선진형의 보라빛 운영 계획을 밝혔던 구단들조차 적자폭을 줄이는데에만 관심을 쏟아 ‘2001년까지 흑자 전환’이라는 목표는 한발짝 더 멀어진 느낌을주고 있다. KBL 또한 조직의 권한과 책임이 불분명해 시스템 보다는 소수인에 의해 좌우되는 낙후성을 드러냈고 규정상의 허점과 인적 구성의 난맥상까지 노출시켜 총체적인 정비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각종 위원회의 구성원이별다른 검증없이 선임돼 제몫을 못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특히 재정위원회와 징계위원회가 학맥과 인맥,여론 등에 휩쓸려 시즌 내내 원칙없는 징계를 남발한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농구계 안팎의 중론.이와 관련해 ‘죄형법정주의’를 원용해 징계의 절차와 내용을 조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아마추어시절을 연상케하는 ‘정실주의’ 냄새를 씻어내지 않고서는 KBL이 공정한 집행자역을 자임하기는 어렵다.기회있을때 마다 미국프로농구(NBA)를 모델로 내세우는 구단과 KBL 모두 오늘의 NBA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있었는가를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 [대한광장]정부개혁 논쟁의 낙후성

    2차 정부개혁안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비등했었다.대체적인 논조는 민간경영진단팀이 내놓은 개혁안이 ‘정답’이었는데 정부가 각 부처의 반발로 ‘물타기’를 시도해 하나마나한 개혁안으로 퇴락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개혁 담당자들이나 여론이 공히 신자유주의로 편향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작고 강한 정부’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는 문민정부에서 물려받은 유물이다. 정부의 기획담당자들,각종 정책연구소,사회의 여론주도층은 대부분 이 신자유주의의 주술에 걸려있는 것 같다.민간경영진단팀과 기획예산위의 개혁안이 모두 부처통폐합 및 기구축소를 통한 인원과 예산감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언론도 이 원안을 정답으로 삼고 수정된 최종안을 ‘용두사미’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정부를 확대해 온 구좌익에 맞선 신우익의 신자유주의적 정부축소론은 레이건과 대처시대에 큰 위력을 떨쳤다.그러나 이 신자유주의는 시대착오적 측면 때문에 급격히 퇴조했고 급기야는 신우익의 연쇄적 권력상실로 이어졌다.이 과정에서 클린턴·블레어·슈뢰더 등 신중도세력의 ‘능동적·역동적 정부론’이 신자유주의를 대체했다.따라서 문민정부가 ‘작은 정부’의 슬로건을 채택했을 때도 이 개혁노선은 이미 낡은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대착오적 주술에 걸려있는 셈이다.인구를 감안할 때 서구의어떤 나라 정부보다 결코 크지 않은 우리 정부의 기구와 인원을 축소하려는것은 그릇된 것이다. 올바른 정부개혁의 기본방향은 ▲정부 서비스 효율의 역동적 제고 ▲시민참여적 민·관합동 행정모델 정착을 통한 정부의 새로운 민주적 정통성 기반마련 ▲세계화에 따른 위험에 맞서는 시민들의 모험능력 제고와 보장을 위한 새로운 적극적 기능 도입 ▲시장논리 활성화를 위한 탈규제와 새로운 규제의 신설일 것이다.즉 정부의 확대 또는 축소가 아니라 ‘능동적·역동적 정부’ 창출을 위한 ‘재구성’이다. 이것은 인원이 남는 부처에서 모자라는 부처로 인원을 재배치하고 공무원을 새로 훈련시키는 것,대민 서비스의 ‘능동적’ 수행과 효율화를 위한 새 업무모델을 발전시키는 것,국가기관의 정통성을 제고하기 위해 시민사회와의동반자 관계에서 민·관 합동행정을 구현해 정부를 민주화하고 정부의 복지기능을 민간에 이양하는 것,행정참여와 일부 복지기능의 수행을 떠맡을 민간단체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시장을 해치는 행정규제를 철폐하고 시장논리를보호할 새로운 규제를 설정하는 것,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대민 서비스를 능동적으로 발굴·수행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간 각국의 정부는 관료적 재량권의 급팽창,효율저하,부패를 겪으면서 국민의 불신대상으로 전락했다.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민주국가에서 관료의 확대된 재량권이 국민의 눈에 ‘무허가’ 권력으로 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시민의 행정저항이 심화됐고 정부는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70∼80년대 서구에서는 ‘통치불능’이라는 말이 유행했다.정부의 정책공청회가 이해집단들의 실력행사로 무산되고 행정기관의 각종 단속활동이 시민의 일반적 불신을 받는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위기 조짐은 오늘날우리 나라에서도예외가 아니다.따라서 정부개혁에서 첫번째 염두에 둘 것은 시민참여적 민·관 합동행정 모델로 정부의 민주적 정통성을 제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정·축소된 최종안도 원안의 관점이 아니라 ‘능동적·역동적 정부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이다.가령 8,000명의 인원 감축 항목은 삭제하고 자꾸 희석되는 개방형 공무원 제도는 더욱 확대하고 민·관 합동행정 모델 등 앞서 열거된 사항들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제2건국위 기획단의 ‘정부혁신방안’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정치외교
  • [제2공화국과 張勉](8)尹潽善과의 갈등(下)/윤보선과 평가

    1961년 5월16일 새벽2시쯤 張勉은 총리 숙소로 쓰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경호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張都暎은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현재 해병과 공수부대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다리에서 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염려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와서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기다리지만 張都暎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오자 張勉은 경호대장 등과 함께 지프를타고 반도호텔을 떠났다.거리가 가까운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사택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잠시 몸을 피하려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으로 갔다”(회고록 중에서).그리고는 55시간이 지난 18일 낮12시쯤에야 모습을 드러내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尹潽善은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張勉과 마찬가지로 張都暎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張都暎은 “쿠데타가 일어나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뚫렸다. 쿠데타군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같지 않다”고 우려했다(尹潽善 회고록에서). 尹潽善은 “피신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300만 서울시민을 버릴 수 없고” 또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설령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지킨다. 5·16쿠데타가 발생해 제2공화국이 결국 무너지기까지 국무총리 張勉은 몸을 숨겼고 대통령 尹潽善은 현장에 남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쿠데타세력을 상대한다.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분쇄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피신하는 데 그쳤던 張勉은 제2공화국 붕괴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그렇다면 尹潽善은 제 할일을 다한 걸까. 16일 낮 쿠데타 주역인 朴正熙소장과 柳原植대령이 청와대로 尹潽善을 찾아왔다.이 자리에는 玄錫虎국방장관과 張都暎 등이 함께 있었다.玄錫虎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로 가서 張勉을 만나고 헤어진 뒤 쿠데타군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접견실에서 朴正熙 일행을 만난 尹潽善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열었다.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尹潽善을 비난하는 쪽은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투의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쿠데타세력과 관련해 보여준 행동을 설명하는키워드”라고 풀이했다.현장에 있던 玄錫虎는 회고록에서,尹潽善이 이 말에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張勉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朴正熙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尹潽善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그들(朴正熙 일행)을 대하는 마음이 서글퍼나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고,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할 때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尹潽善은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는 말로 발언을 끝낸다.모두 물러갔다가 朴正熙와 柳原植이 다시 들어왔다.柳原植이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면서과거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다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마치 張勉내각이 물러나면 권력을 尹潽善에게 넘길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말이었다. 尹潽善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그는 白樂濬 참의원의장을 쿠데타군쪽에 보내 ‘헌법 69조에 따라 尹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다면 군부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할 것인가’를 타진한다. 한편 朴正熙 일행에 이어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매그루더 UN군사령관이 함께 尹潽善을 방문한다.두 사람은 이미 “張勉총리 영도 하의 합헌적인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였다.두 사람은 “서울시내에 들어온쿠데타군은 4,000명이 채 안되므로 4만 병력만 출동시켜 서울을 포위해 들어가면 쿠데타군이 항복할 것”이라며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尹潽善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끝내 반대한다.그린은 “각하의 이번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매그루더는 尹潽善과의 면담후 본국 합참본부에 전문을 보내“尹대통령은 張총리를 몰아내고 싶어 가능한 법적 절차를 찾고 있다”고 보고한다. 尹潽善은 이날 오후 張都暎이 요청한 계엄령을 승인했으며 17일 오후 2시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신한다”고 밝혀 張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또 쿠데타를 “애국적인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張勉은 수녀원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태의 전개를 알고 있었고 16일아침 그린 대리대사와 통화도 한다(그린의 증언).그는 내각 총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미대사관에서 尹씨의 태도를 연락받았는데 그가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록에서밝혔다.그러나 張勉은 尹潽善에게 직접 연락해 쿠데타 저지를 논의하거나,최소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尹潽善은 張勉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제2공화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과 인적 구성 등에서 이질적이었던 민주당의 신·구파,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은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히게 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한다.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저울질한다면 張勉과 尹潽善 그 어느쪽으로도 저울추가 결코 기울지는 않을것이다. 이용원- [기고] 張勉과 尹潽善 평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張勉총리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尹潽善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한 것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합을잘 말해준다.우리가 슈뢰더 독일총리는 알아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모르듯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은 명목상 존재에 불과하다.그런데도 尹潽善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다 막상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때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해 버렸다. 尹潽善에게 쿠데타가 ‘올 것’인 이유는 자신의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집권당은 한민당 후신인 구파와,재야 민주화세력인 신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민주당이었다.申翼熙·趙炳玉같은 비중 있는 지도자가사망한 뒤 구파를 이끌게 된 尹潽善은 전형적인 과거형 정치가였다.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은 우익민족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혼재한 정당이었다.UN한국위원단이 ‘보수적 지주정당’이라고 지적했듯이 해방직후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李承晩의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따라서 한민당이 李承晩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걸은 것은 이념과 정책상의 대립이라기보다 李承晩의 권력독점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한민당은 해방이후 좌익세력의 급진성과 李承晩의 독선이 낳은‘반감(反感)’이란 정치적 공간을 적절히 점유해 생존한 과거형 정당인 것이다. 4월혁명후 ‘대통령=구파,총리=신파’라는 합의 덕에 대통령에 선출된 尹潽善이,자파인 金度演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과거형 정치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구파는 결국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다.尹潽善은대통령으로서 이런 분열적 행위를 제지하기보다는 부추기는듯한 처신을 보였고,정부를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해 張勉정부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개인과 파벌의 이익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한 행위인 것이다. 반면 신파를 이끈 張勉은 1960년대 한국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치가인 張勉은 2000년을 눈앞에 둔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그는 尹潽善이 이끄는 구파의 끝없는 시비를 인내하면서,1960년 10월 제2공화국 경축식에서 말한대로 “정부의 시정목표로서경제제일주의”를 주창한 실질적이고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쿠데타 세력이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은 모두 張勉정부에서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고자 수립한 것들이다.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張勉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실천되었더라면 5·16이후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신화’라는 어두운 경제성장사는 ‘국민신화’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5·16후 두 사람의행보도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張勉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尹潽善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朴正熙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全斗煥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 [李德 一 역사평론가·문학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이제는 신기술로 승부건다](1)-’사이버코리아21’ 구상

    南宮晳정보통신부장관이 2일 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한‘사이버 코리아 21’은 실업문제까지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한국판 정보화 뉴딜정책이다. 실제로 현재 실태와 4년뒤 예상할 수 있는 정보화 기반 정도를 보면 신지식산업 분야에서만 100만명의 새로운 고용 창출이 가능하다는 전망은 충분히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96년부터 정보화촉진 기본계획을 수립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으나 국가·사회 정보화 수준은 미국과 일본은 물론싱가포르와 대만 등에 크게 뒤지고 있다. 정책이 제대로만 이뤄진다면 정보화의 척도로 볼 수 있는 전자상거래만도지난해 550억원에서 2002년에는 60배가 넘는 3조8,000억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인터넷 이용자 수는 300만명에서 1,000만명으로 증가해 고객들이 그만큼 많아지는 셈이다. 특히 신지식산업의 신경조직이 될 인터넷 망의 속도가 지금보다 무려 100배 가량 빨라진다는 것은 4년뒤 급변한 사회의 일단을 미리 점쳐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전체적으로는 현재 22위에 머물고 있는우리나라의 정보화 수준을 2002년에는 10위권으로 올리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2002년부터 정부의 모든 문서를 전자결재하겠다는 계획은 정부가 정보화에앞장서겠다는 의도다.지금은 51개 행정기관중 45개 기관이 전자문서시스템을 도입했으나 전자결재 시행률은 미미한 수준이다. 정보화를 통해 국가전반의 생산성 향상에다 실업난까지 해결하겠다는 목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그러나 정부는 기반조성을 위한 자금조성이문제지 미국이라는 확실한 선례가 있는 만큼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90년 초부터 지식 정보화시대 도래에 대비해 정보고속도로 구축과 작고 효율적인 전자정부 실현 등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그 결과 미국은지난 6년 동안 사회의 발전적 변화와 함께 1,700만개의 새 일자리를 만들고28년 만에 최저실업률(4.4%)을 달성했다. - 육성 필요성 ‘지식기반산업 신기술 육성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식기반산업의 정의와 특징에 잘 나타난다. 지식기반산업이란 부가가치 창출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의 활용도가 높은 산업을 말한다.특징은 공해가 거의 없으며 고도의 전문성과 창의성에 바탕을둔다는 점이다. 정부가 실업대책의 무게추를 지식기반산업 신기술 육성에 두는 것은 우리산업구조의 낙후성이 지금의 실업사태를 불러온 원인중 큰 몫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경제는 60년대 정부와 대기업 주도형 성장전략으로 급속한 양적 성장에 성공했다.그러나 80년대 말 노동력 위주의 경공업이 후발개도국의 추격으로 경쟁력을 잃은 데다 중화학공업은 과잉투자와 가격하락으로 경영악화를 겪기 시작했다.90년대 들어 지식과 정보혁명의 물결이 밀어닥쳤지만 적응에 실패하면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정부는 지식기반 고부가가치형 산업구조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다.21세기 국제분업화 경쟁에서 우리경제의 생명줄인 수출을 늘리고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이루기 위해서다. 산업인력 수급을 살펴봐도 그동안 경제성장의 원천이던 ‘노동과 자본’이‘기술과 지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88년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2.5%였으나 97년에 25.7%로,고용비중 역시 27.8%에서 21.3%로 하락했다. 반면 85∼95년 지식기반산업의 부가가치는 연평균 22.5% 늘었다.또 같은기간 고용증가율은 7.1%로 기타산업 증가율(2.4%)보다 훨씬 높았고,전체고용의 9.1%를 차지했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21세기를 대비한 산업구조 개편’이란 보고서에서 지식기반산업이 성공적으로 발전하면 실업률은 해마다 0.32%포인트 낮아지고 GDP성장률은 해마다 0.64%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 3·1운동-臨政 수립 80돌/백범전집편찬위 ‘방명록’ 입수

    중국은 상해시절부터 임시정부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특히 임정의광복군 창설 이후 지원을 대폭 늘렸는데 이는 중국측이 임정·광복군을 항일전의 동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최근 백범전집편찬위원회는 1943년 3월1일 중경시내에서 개최된 3·1의거 24주년기념식에 참석한 중국측 인사들의 방명록(芳名錄)을 대만(臺灣)에서 입수,공개하였다. 행사에 참석한 중국측 인사들이 자필서명한 이 방명록에는 당시 소위 ‘친한파’로 불릴만한 인사들이 총망라돼 있다.대표적 인물 몇명을 꼽아보면,첫머리의 유치(劉峙)는 당시 중경시 위수사령관으로 광복군창설에 참여한 인물이며,왕계현(王繼賢·당시 대령)은 중국 군사위원회(위원장 장개석) 조사실(정보담당부서) 소속으로 중국군과 광복군간의 연락장교를하면서 광복군의 인원파악과 물자지원을 담당하였다. 또 당시 입법원 원장손과(孫科)는 손문(孫文)의 아들로 한·중간의 우호단체인 한·중문화협회의회장을 지내면서 임정을 지원한 거물급 인사다.국민당 조직부장을 지낸 주가화는 1939∼44년 말까지 중국측 임정 담당 총책임자로 있었던 인물이며,후성(侯成)은 당시 한국광복군이 속해 있던 군사위원회 군정부 판공청 제1처장으로 광복군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조덕수(趙德樹)는 중국군 출신으로 광복군에 파견돼 李範奭장군 후임으로 참모장을 지냈으며,도행지(陶行知)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으로 구성한 참정회(參政會)의원으로 1940년 9월 ‘임시정부 승인 결의안’ 작성을 주도한 인물이다.이밖에 중국공산당측 인사로는 주은래(周恩來) 동필무 등영초(鄧穎超)등 3명의이름이 보인다.당시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중경 판사처주임이었고,동필무는참정회의원이었으며,등영초는 주은래의 아내이자 동지였다.鄭雲鉉
  • 관악산 일대 고도제한 재검토

    오는 10월부터 관악산일대에 고도제한을 하기로 했던 서울시의 방침이 재검토된다. 서울시는 23일 현재 관악산 일대의 재개발·재건축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는 상태에서 뒤늦게 고도제한을 할 경우 형평성이 문제되고 일부지역은 개발 자체가 무산되는 등 문제점이 많아 이를 재검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이같은 방침선회는 지난 22일 열린 구청장협의회에 참석했던 高建 시장이 金熙喆 관악구청장으로부터 관악산 고도제한에 따른 문제점을 듣고재검토를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金 구청장은 구청장협의회에서 “관악산 주변에 일률적으로 고도제한을 가하면 현재 재개발·재건축사업이 추진중인 1만여 가구가 피해를 입게 된다”면서 “재개발에 차질이 빚어지면 지역개발에도 지장을 초래,낙후성을 면치못할 것”이라며 재검토를 요청했다. 서울시는 이에 따라 고도제한의 기본원칙은 지키되 재개발이나 재건축 외에 지역개발을 할 수 없는 난곡지구 등 일부지역은 구제하는 것을 검토중이다. 시는 그러나 관악산 주변의 다세대 다가구 주택지역을재개발 재건축할 경우 관악산 경관을 심하게 훼손시킬 것으로 보고 다가구 다세대 주택지역은그대로 고도제한을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曺德鉉 hyoun@
  • 유로-달러 양극체제 세계경제회생 호기

    ■통화전쟁 판세 전망과 대책 연초부터 세계 기축통화의 주도권을 둘러싼 샅바싸움이 치열하다.유럽 11개 국은 1일부터 유럽을 하나의 통화권으로 통일하고 단일 통화인 유로를 출범 시켰고 아시아에선 일본의 엔 국제화가 지지기반을 확대할 조짐이다.유로와 달러의 치열한 패권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아시아 등 다른 지역통화는 약세를 지속,통상마찰도 초래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유로의 출범은 세계 경제전쟁의 서곡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도전받는 달러]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해 12월 22일 공개시장위원회를 열었지 만 금리를 현수준인 연간 4.75%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유로 출범을 앞두고 통화정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에 금리인하 압력을 완화시키고 유로로의 순조로운 이행을 돕기 위한 조치였다. 미 노던 트러스트의 한 분석가는 “FRB가 금리를 인하하면 유로의 상대적인 절상이 예상되는 만큼 ECB는 곧바로 금리를 내려야 하는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면 유럽은 유로의 평가절상으로수출상품의 가격경쟁 력이 손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유로 출범에 맞춰 유럽 통화당국에 아주 실용적인 선물을 선사한 셈 이다. 사실 미국의 통화당국자들에게 있어 ‘유로’는 중요한 고려대상이 못된다. 국내 경기침체를 막고 경제를 연착륙시키는 게 급선무다.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도 “유로는 미국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단언한 바 있다. 유로가 출범하기 전부터 미 달러는 유럽 통화에 대해 약세를 보여왔다.지난 해 12월 18일 달러는 마르크화에 대해 1.659로,6주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파운드나 프랑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유로가 출범할 경우 유로권 국가들이 보유 달러를 매각함으로써 달러 가 넘쳐나 달러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시장이 이를 반영한 탓이었다. 유로 출범 첫해인 올해 달러는 ‘소폭’의 하락세를 보일 것으로 전문가들 은 입을 모은다.금리인하가 주된 원인이다.올해 미국은 경기연착륙 유도를 위해 0.5∼0.75%포인트의 금리인하가 점쳐지고 있고 그만큼 달러가치는 하락 할 것이다. 신흥시장의 금융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경제적 불확실성의 증가에 따른 소비 지출의 위축,주가하락,클린턴 대통령 탄핵 여부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력이 줄어들거나 미국의 ‘권위’가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다.미국인들은 최소한 40년 정도는 걸려야 유로가 달러 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미국은 여전히 달러 발권력을 보유하고 있고 정치 안보 측면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화의 야심] 유로(EURO)시대가 개막됐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통화동맹(EMU) 가입 11개국은 1일부터 단일 통화인 유 로를 출범시켰다. 이들 11개국은 우선 크레딧 카드 사용 등 신용거래에 유로를 사용하고 2002 년 7월부터는 모든 분야에서 유로를 통용시킬 예정이다. 유로의 출범은 단순한 통화 통합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유럽이 품어온 정 치적 경제적 야심의 상징물이다.달러와 미국의 지배력에 유럽이 더이상 가위 눌림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유럽은 규모의 경제,즉 개별 국가로서 싸우기보다는 힘을모으 기로 했고 통화통합은 가장 용이하고 효과적인 1단계 수단으로 선택됐다는 설명이다. 유로 11개국은 총인구 2억9,000만명,국내총생산(GDP) 합산액 6조3,000억달 러로 미국(2억7,000만명,7조8,000억달러)에 필적할 힘을 갖췄다.교역규모에 있어도 전세계의 20%를 차지, 미국을 앞서고 있다. 이때문에 유럽 각국이 유로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재계의 지도자들은 빠르면 10년,늦어도 20년 안에 유로는 ‘외환보유고’ 통화로서 달러를 제압할 것이라고 낙관론을 펴고 있다. 당장 이같은 기대가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이다.다만 유럽 각국과 시민들은 개별 통화 사용에 따른 환전비용 등 기회비용이 없어지는 혜택을 누릴 것이 다. 유로는 유럽의 국제금융시장에서도 거래통화의 90%를 차지하는 달러를 점차 대체할 뿐 아니라 국제교역의 결제수단으로서도 달러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 에 유럽으로서는 달러에 버금가는 기축통화를 갖게 되는 셈이다. 미국이 달러의 발행과 대여로 누려온 막대한 차익(세뇨리지)도 누리게 될 것이며 이는 곧미합중국 중심축의 세계사를 유럽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이전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된다. 그러나 유로 출범에도 불구,미국과 그 영향권의 많은 국가들은 여전히 달러 를 사용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따라서 유로의 성공은 세계 교역 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아시아권의 향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무엇보다 각국이 정도의 차이를 극복하고 금융·제조부문의 구조개혁을 달 성할 수 있을지와 공공부채 감소,재정적자 축소 등의 EMU 출범 목표를 달성 하는지에도 크게 좌우될 것이다. [국제화 노리는 엔] ‘세계 2위의 경제력에 걸맞는 엔화의 힘을 키우자’.을묘(乙卯)년 새해가 밝으면서 일본이 달러화 및 새로 출범한 유로화를 상대로 통화전쟁을 선포하 며 출사표를 던졌다. 출사표의 핵심은 엔화의 국제화.국제 금융에서 엔화의 유통을 활성화시켜 달러화 및 유로화에 버금가는 세계 기축통화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 이다. 엔화의 국제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경제위기로 금융의 낙후성을 드러내며 최대의 채무국 달러화에 최대의 채권국 엔화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짓밟혔기 때 문.1조달러에 이르는 대외채권을 가진 경제대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채무대 국 미국 달러화의 통제를 받아야 하느냐는 항변인 셈이다. 사실 일본은 이미 몇년 전부터 달러와 유로를 상대로 일전을 벼르며 준비를 해왔다.일본이 공식적으로 엔화의 국제화 의지를 표명한 것은 지난 97년 5 월말.당시 마쓰나가 히카루 대장상은 “9,500억달러의 순채권을 가진 나라가 매년 1,00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미국의 통화에 따라 움직이는 일 은 말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해 9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1,000억달러의 아시아통화기금(AIMF) 창 설을 제안한 것도 엔화의 국제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아시아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미국과 대동아공영권의 부 활이라고 보는 중국의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98년들어 아시아 위기가 심화되자 일본은 엔화의 국제화에 박차를 가했다.1 0월 경제위기를 겪는 아시아국가들에 300억달러의 지원을 하겠다는 ‘미야자 와플랜’을 발표했다. 24조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하면서 1조엔을 아시아 경제지원에 돌리겠 다고 약속했다. 오구라 가즈오 주한 일본대사는 역내 관세철폐와 무역장벽 해소를 통해 교역 을 증대하려는 한·일 자유무역지대 구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이같은 노력에도 엔화의 국제화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미국 이 국제 신용평가기관을 앞세워 일본의 신용등급을 조정하는 ‘딴죽’을 거 는 데다,아시아 국가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도 그리 쉽지 않은 탓이다.
  • ‘유로貨 출범’ 대책 세워라/禹弘濟 논설실장(대한포럼)

    유럽경제를 한 울타리로 묶는 유로화(EURO貨) 출범이 한달 남짓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세계금융시장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철저한 대책마련이 요청되고 있다.내년 1월1일을 기해 범(汎)유럽권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새로운 결제수단으로 등장하면 국제금융시장은 점차 미국 달러화 독주시대에서 벗어나 달러와 유로화의 두 축(軸)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전망이다.일본 엔화의 세계화전략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유로화의 세계외환거래비중이 30∼40%로 높게 예측되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외환거래 40% 점유 각국 화폐를 하나로 만드는 사상 유례없는 통화혁명으로 세계금융시장은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경제의 가장 큰 결함으로 오랜 ‘금융의 낙후성(落後性)’이 지적되고 있는데다 국제금융분야의 전문가가 많지 않은 취약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유로화대책은 적기(適期)에 차분히 강구돼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유럽연합(EU) 15개 회원국가운데 영국 스웨덴 덴마크 그리스 4개국을 제외한 11개국이 참여하는 유로화는 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 11개국 통화와 주요 결제수단으로 병용된뒤 2002년부터는 유일의 법화(法貨)로 쓰인다.달러에 버금가는 국제금융거래의 기축통화(基軸通貨)로 발돋움한다는 것이다.유로화 출범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유럽을 단일통화권으로 묶어 경제적 통합은 물론 정치 외교등 각분야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옛영광을 되찾게 하는 ‘강력한 유럽’의 탄생을 겨냥한다는 사실이다.유로화를 사용하는 11개국 인구가 2억9,000만명,경제규모는 96년 국내총생산(GDP)기준 6조8,000억달러로 미국 7조6,000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이다. 때문에 대외지향의 성장전략을 추구하는 우리로서는 지대한 관심과 함께 대책마련에 소홀함이 없어야 유럽지역과의 수출입업무등 각종 환거래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외신은 이미 필립스,지멘스등 유럽소재 대기업들이 내년부터 유로화로 거래대금을 결제키로 결정했다고 전한다.그러나 우리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은 구조조정의 와중에서유로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치 못하거나 초보적인 준비단계에 머물러 있다.기업들은 유로화 등장으로 각국 통화와의 거래에 따른 환전비용이 줄어드는 등 유럽지역 교역에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므로 이에맞는 새로운 수출입전략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국제금융전문가 양성 시급 특히 각 금융기관은 유로화 전문가양성에 힘써 환거래에 따른 피해를 사전방지하고 수출입관련 상담창구를 마련,유로화 표시의 결제업무가 원활히 이뤄지도록 대(對)고객 서비스에도 만전을 기하도록 당부한다.거듭 강조하지만 국내금융기관의 가장 큰 취약점은 외환거래를 비롯한 국제금융 메커니즘에 미숙(未熟)한 것이다.지난 해의 환란도 국제금융시장동향을 제때에 철저히 체크했더라면 그피해는 상당부분 줄일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얼마전 각 은행경영 개선의 고삐를 죄게 한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 8%’규정을 사전에 몰랐던 임직원들이 너무 많더라던 한 은행임원의 실토가 우리 금융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말해준다.유로화가 몰고올 세계금융의 변화에 실기(失機)함 없이 대비해야 한다.
  • 금융발전 선언/禹弘濟 논설실장(外言內言)

    금융산업의 건전성 회복과 새 출발선언식이 23일 서울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금융인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것으로 보도됐다. 금융계는 이날 대출청탁배격 등 금융인의 다짐을 채택하고 금융을 21세기 선도산업으로 육성키로 결의했다. 이번 행사는 1단계 금융구조조정이 마무리됨에 따라 금융인 단합과 각오를 다지고 금융발전의 전기(轉機)로 삼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언식이 금융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닌 관제성 행사라는 비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번 행사가 관제든,순수하게 자발적이든 금융권은 비난과 질타를 면할 수 없는 시점에 있다.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고 국제통화기금(IMF)사태로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없던 커다란 고통을 안겨 준 요인중의 하나가 ‘금융의 낙후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자발적으로 이뤄졌더라도 “잘한다”는 칭찬보다 “금융업무에나 충실할 것이지”라는 비난섞인 평(評)을 받았을 듯 싶다. 과거 대형금융사고가 발생할 때면 으레 결의대회를 갖곤 했던 관행도 금융계 행사에대한 일반의 시선을 곱지 않게 만든 이유가 될 것이다. 금융권의 발전노력에 대한 평가는 각국민계층인 고객의 몫이다. 금융산업이 고객의 편익을 위해 어떠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실물경제 활동지원과 관련,IMF체제를 벗어나는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등에 따라 평점의 높낮이가 결정될 것이다. 모든 국민들은 지난 1년동안 금융이 국가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부실금융기관에 넣어둔 예치금이 몽땅 떼이는 사례도 있었다.국제채권 은행단의 자금회수 압력이 어떠한 가를 직접 보았고 모라토리엄(외채상환유예)이나 투기성자금을 가리키는 헤지펀드같은 국제금융 전문용어도 적잖이 익혔다. 한마디로 ‘금융은 곧 국가경쟁력’임을 실감한 국민이 된 것이다.금융권이 해야 할일은 너무 자명하다. 가장 시급한 것이 국제금융인력의 양성이다. 홍콩이나 싱가포르같이 경쟁력이 높은 금융강국(强國)이 되고 경제발전 선도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결의대회같은 행사는 누가 주관하든 관계없이 국민들은 갈채를 보낼 것이다. 금융계의분발을 촉구한다.
  • 中 학·관계 탄탄한 인맥/金 대통령 知人들

    ◎劉述卿 전 외교학회장 李淑錚 全人大 간부 등/釣魚臺 오찬 13명 초청 【베이징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야인(野人)시절,두차례의 중국방문을 통해 꽤 탄탄한 현지인맥을 형성해 놓았다. 12일 댜오위타이(釣魚臺) 오찬에 초청받은 13명의 중국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金대통령의 중국인맥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학계와 관계에 두루 퍼져 있는 지인(知人)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류수칭(劉述卿) 전 인민외교학회장.그는 인민외교학회장 시절,야인 신분인 金대통령을 중국에 초청해준 인물이다.지난 2월 金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으며 이달 초 서울을 방문,金대통령에게 방중에 대한 사전 자문을 하기도 했다.또 지난 83년 중국민항기 납치사건과 92년 한·중 수교 교섭때는 외교부 관리로서 깊숙이 간여했다.우리의 차관급인 외교부 부부장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급인 국무원 외사판공실 주임을 거친 류수칭은 지금도 중국 외교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문난 지한파(知韓派)로 알려진 리수정(李淑錚) 전인대(全人大) 외사부부주임도 金대통령 중국인맥의 또 다른 한 축이다.우리로 말하면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부위원장격인 리수정은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장관급)시절,국민회의와 당 대 당 교류를 하면서 金대통령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량(朱良) 전 전인대 외사위원장,왕빙첸(王丙乾) 전 전인대 부위원장,다이빙궈(戴秉國) 공산당 대외연락부장 등은 중국 관료출신의 金대통령 인맥이다.또 우수칭(吳樹靑) 北京大 전총장과 후성(胡繩) 사회과학원장,그리고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핵심두뇌로 알려진 루신(汝信) 사회과학원 부원장 등은 중국학계의 대표적인 지인들이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上)

    ◎臨泉 軍訓地서 ‘광복꿈’ 회상/銅山路 日 부대터에 中軍병영/연병장·단층막사 ‘옛 그대로’/끌려간 日 병영탈출 감행 뿌듯 한국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이 조국 광복을 꿈꾸며 젊은 날 이역만리에서 피 흘렸던 중국땅을 찾았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출신 광복군 초급장교들로 흔히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 일본군의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항일투쟁의 족적을 찾아 나선 것은 광복의 참뜻을 지금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 중부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에서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까지 장장 6,000리길. 일본군 탈출부터 광복군 훈련장,항일 지하공작 거점 등 열하루간 동행했던 이들의 답사 행로를 3회에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 독립군’들의 첫 현장 답사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시작됐다. 베이징(北京)서 814㎞. 기차로 8시간. 54년전에 거쳐온 길을 더듬기 위해 1시간 남짓한 비행기편도 마다했다. 1944년 2월초. 평양을 출발,기차에 강제로 실려 닿은 곳은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하던 최전방 쉬저우. 7월까지 쉬저우와 슈저우(宿州),푸양(阜陽)일대 전선에 배치됐던 이들은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하나둘 일본병영을 탈출했다. “일본군이 되어 동포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느니 차라리 탈출하다 죽기로 했다”고 50여년전 결의를 회상했다. “상당수는 우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회고담은 이어졌다. 당시 쉬저우 주변에선 일본군이 밀집해 있었고 중국으로 끌려온 ‘조선학병’ 3,000여명의 대부분도 부근에 배치됐다. 때마침 텐진(天津)에서 시작된 진푸선(津浦線)철로가 쉬저우를 지나 상하이(上海),푸둥(浦東)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노 광복군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일본군은 철도와 주변을 점령,광대한 중국대륙을 ‘선’과 ‘점’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갔던 학병들은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주둔해 있었단다. 밤을 틈타 3m가 넘는 철책을 넘었다. 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이상을 풀잎이나 과일로 연명하며 낮에는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들판을 달렸다. 대개는 중국 유격대와 조우했고 당당한 광복군이 되었다. 44년 6월 ‘宿縣부대’ 제4중대에서 탈출했던 金柔吉 부회장과 全履鎬 회원은 슈저우역에서 2㎞쯤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맨끝에 당시의 탈출지점을 찾아냈다. 지금은 ‘宿縣 付小樓 村庄’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3층의 주택들이 병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5월에 같은 부대 보병중대에서 津浦線을 넘어 탈출했던 石根永 회원도 슈저우에서 50㎞ 떨어진 구쩐(固鎭)역부근에서 병영터를 찾아냈다. 일본군은 철도가 파괴되거나 공격받으면 주변의 중국인을 몰살시켜 보복했다고 악몽같은 50년전을 떠올렸다. 중국 유격대원이 생포되기라도 하면 총검술 연습의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기도 했단다고 치를 떨었다. 대부분의 병영들은 푯말하나 남지않고 촌락 등으로 바뀌는 등 사라졌지만 尹慶彬 회장과 金永錄 회원이 탈출했던 쉬저우시 통산로(銅山路)의 부대터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대안을 돌아본 尹慶彬 회장 등은 연병장앞의 3층 본부 건물,검은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층 막사가 옛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 높은 천정의 막사안에는 시멘트바닥에 철로 만든 2층 침대 10여개와 간단한 사물함이 눈에 띄었다. 張俊河 선생 등과 함께 尹회장 일행 4명이 44년 7월7일. 일본군의 이른바 ‘중국침략 기념일’로 경계가 느슨해 틈을 타 ‘취침전 15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했다. 일본군을 벗어난 이들은 이틀밤을 앞만 보고 달리다 먼저 탈출해 중국 유격대에 와 있던 金俊燁(전 고대 총장)씨와 해후했다. “중국의 여러 유격대에 흩어져 있던 탈출자들은 린촨(臨泉)로 모였지요. 린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광복의 꿈을 키워 대일항전의 장정(長征)을 시작했습니다” 노 독립군의 회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어느새 50년전의 린촨에 닿고 있었다. ◎독립유공자협회/항일전 참가 175명이 결성… 현 회원 220명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광복회와 함께 항일투쟁의 일선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양대 산맥. 81년 독립운동가 175명에 의해 발족됐다. 초대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趙擎韓 선생.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朴英俊 회장에 이어 尹慶彬 회장이 3대 협회를 이끌고 있다. 회원은 220명. 광복회가 독립지사의 유가족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본인만이 가입할 수 있다. 회원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일제말기 학병 등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협회의 주축. 金九 선생을 보좌,충칭(重慶) 임시정부서 일했던 마지막 생존자들이기도 하다. 대부분 70대후반에서 80대초반. 색이 바라가는 독립정신을 드높이기위한 연구,탐사 등 학술사업과 사회사업,독립운동 사적에 대한 복원운동을 벌여왔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이 되는 내년 충칭시 광복군 총사령부건물 표지석 건립작업 등 후세에게 민족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중이다. ◎광복군/임정 정규군… 美와 對日 공동작전 활약 광복군이 정규군으로 발족한 것은 40년 9월. 무력으로 조국을 되찾겠다며 중국으로 온 젊은이와 일본군에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이 주축이 됐다. 총사령관은 李靑天 장군이었고 참모장 李範奭 장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지하활동 등 갖가지 군사활동을 감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3개의 직할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李範奭 장군이 지휘하는 2지대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을 거점으로 일본군 전력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주력했다.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필사의 전투는 3지대의 몫.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두고 산둥성(山東省) 등 화북지역에서 지하공작 활동도 병행했다. 44년부터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합류하면서 미국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한반도침투 등 특수공작을 준비하기도 했다.해방직전 광복군은 700여명. 광복이 될 무렵에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로 30만여 군병력을 조직하는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다. ◎임천사관학교/日軍 탈출한 한국인 광복군 간부 양성소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에 있던 ‘광복군 사관학교’. 더 정확히 말하면 44년 7월 린촨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안에 설치됐던‘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일명 한광반(韓光班)’.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군서 탈출한 한국인을 광복군 간부로 양성하던 곳이다. 44년 7월에 들어온 첫 입학생들은 48명. 33명은 대학졸업후 일본군으로 징병돼 중국전선까지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 15명은 조국광복을 꿈꾸며 중국으로 건너왔던 애국청년들. 5개월 과정을 마친뒤 白正甲 등 25명은 6,000리 길을 걸어서 쓰촨성(四川省)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본류에 합류한다. 나머지 8명은 최전방 안후성에 남아 정보수집 등 대일투쟁을 벌인다. 25명중 尹慶彬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鮮于鎭은 金九 선생비서로 白凡 선생을 최후까지 보좌하게 된다. 또 張俊河,金俊燁,金柔吉 등 일부는 한·미군사협력으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 한반도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는다. 현재 한광반 첫 수료생 가운데 국내엔 11명이 생존해 있다.
  • 출판/자유 신장… 유통은 낙후(한국문화 50년:6)

    ◎3공∼6공 사슬 벗고 해방직후 수준으로/금서 대거 ‘햇빛’… IMF로 업계 도산 회오리 “상부구조는 반세기전으로 회귀,하부구조는 전근대성의 상존.” 최근 들어 전자서적 및 사이버서점의 출현 등으로 급류를 타고 있는 우리 출판계의 50년사는 이렇게 요약된다. 출판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 기간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정부수립까지의 3년간. 당시 미군정청은 신문과 기타 출판물 등기를 골자로 하는 출판등록제를 발표,등록만 하면 출판물을 발간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좌·우 이념서적은 물론 정치 팸플릿이 여과없이 쏟아져 나와 해방공간은 사상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러나 정부수립이후 3공,유신,5공,6공을 거치면서 80년대 후반까지 제약을 받아오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해방 직후 수준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유통·판매 등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1년 6월 대형서점인 교보문고가 탄생했지만 소규모 유통상에 의해 움직이고 어음에 의해 결제되는 현실은 여전하다. 출판 형태로 보면 50년대부터 시작돼 70년대 후반까지 이어져오던 전집·학습참고서류는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단행본에게 자리를 내준다. 장식·진열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출판업이 책장사에서 독자위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87년 6·29선언으로 출판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왔다. 이 해 10월19일 출판활성화 방안으로 정치·경제·철학 등 431종의 금서가 해금된 것을 시작으로 정지용 등 납북·월북작가의 작품도 햇빛을 보게 됐다. 또 87년 하반기부터는 개정된 저작권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외국인 저작권 보호를 내용으로 한 이 법의 시행으로 외국소설 및 기술서적을 번역출판하던 출판사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를 계기로 번역 해적국의 오명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출판 국제화를 기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연말 발생한 IMF사태는 출판계를 벼랑으로 몰고 갔다. 고려원·계몽사 등 대형 출판사들이 무너지고 군소 출판사·서점들이 연쇄 도산하는 출판계 최악의 환경을 맞이한 것이다.
  • 학술진흥기금 창설하라/李宗秀(발언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97년 과학기술 국제경쟁력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투자규모와 인력규모가 양적인 측면에선 각각 7위,10위이다. 반면 질적으로는 기술협력 43위,과학교육 24위로 뒤져 종합순위 22위이다. 대만의 경우 투자규모는 13위이나 종합순위는 10위,싱가포르는 투자규모 26위·종합순위 8위로서 투자에 비해 능률적인 연구결과를 산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관료 부패도가 가장 높고,싱가포르가 가장 낮으며,대만도 낮은 편이다. 이는 연구투자비가 누수되거나 능률적인 지원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학문의 낙후성과 현실안주가 IMF위기를 초래한 원인(遠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97년 현재 한국의 과학분야는 SCI(과학인용지수)기준 17위로 12위인 중국과 13위 인도에도 뒤지고 있다. 국가경쟁력을 대폭 끌어 올리기 위한 학술진흥 대안을 몇가지 제시한다. 첫째,학술진흥정책연구 활성화가 요구된다. 장기적인 국가학술발전 비전과 단기적인 학술연구를 체계적·효과적으로 돕는 방향으로 제도적인 지원이 요망된다.둘째,취약한 학술연구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학술진흥기금 창설을 제안한다. 외국 선진제국의 경우 어려운 시기일수록 연구개발(R&D)에 투자를 확대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셋째,학술기관과 학술연구물 평가업무의 선진화·전문화를 통하여 연구의 질을 높여야 한다. 연구비 집행과정과 연구결과물에 대한 철저한 평가 및 검증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넷째,첨단정보센터의 국제화·전문화이다. 다섯째,학술발전에 공이 크고,국제경쟁력을 갖춘 연구자를 심사·선정하여 학술상을 시상하고 학문후속세대 양성책으로 대학원생의 우수논문을 공모·시상하며,장학제도 및 박사후 과정과 대학강사의 처우를 개선한다. 여섯째,국제적 경쟁력과 학문적 차별성을 가진 고급전문 학술지를 발간하거나 집중지원하며,남북간 학술교류체계를 활성화하고 학문적 동질성 회복방법을 강구한다. 끝으로 학술인들의 숙원인 학술회관 건립을 통하여 중소규모 학회들의 연구 및 학술활동을 지원하여야 한다. 학회들이 교수연구실이나 민간기업을 전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 연구공간과 시설을 제공한다면 국내학문의 선진화와 국제교류가 활성화될 것이다.
  • 광양·진주권 개발 지역특성 살려야/白承斗(공직자의 소리)

    경남도와 전남도가 진주권과 광양권을 광역개발권역으로 지정,공동개발하는 ‘광양만·진주권 광역개발계획’에 전격 합의했다.이 계획은 올해부터 오는 2011년까지 14년간 17조3천7백45억원을 투입해 두 지역을 새로운 국제교역지대로 육성,발전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개발권역에 포함된 경남의 2시 2군과 전남의 4시 3군 등은 광역개발에 따른 개발이익을 최대한 유인할 수있는 전략마련에 저마다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역 이기주의 경계해야 자칫하면 국토의 균형개발보다는 지역이기주의에 빠져 특정지역에 편중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없다.물론 건설교통부가 각 자치단체별 개발계획을 사전 심사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개발여건이나 지역특성이 무시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광역개발권 지정에 따라 경남 서부지역의 중심인 진주시가 낙후된이 지역의 개발과 발전을 선도해야 할 중추관리도시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어느때 보다 강조되고 있다. 진주시는 오는 2016년을 목표연도로 인구 55만명을 기준하는 도시기본계획 및 재정비계획을 수립했다. 장기발전 방향은 역사·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교육·문화도시,광역권 신산업지대를 선도하는 첨단산업정보도시,서부경남의 물류거점도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한 산업입지조성과 간접지원시설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우선 산업입지로서 사봉과 금곡지구에 2백만평 규모의 지방산업단지가 조성돼야 하고,항공·우주,생명공학,신 소재산업 등 첨단과학연구단지 조성사업도 광역개발계획에 포함돼야 한다. ○진주 장기 기본계획 수립 물류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광역물류단지 조성이 필수적이다.또 광역교통체계 구축과 정보통신 개발계획도 계획성있게 추진돼야 한다.남강계통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은 빼놓을 수 없는 개발과제다. 광역권시대의 중추관리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텔리포트와 컨벤션센터등을 건설,신 복합기능의 도심으로 조성돼야 한다. 경남 서부지역은 성장 잠재력은 높지만 경제적 낙후성으로 재정자립도는 대단히 빈약한 실정이다.사회간접자본 확충을 비롯한 기반사업 추진에 필요한 정부의 재정지원이 있어야 하고,진사(晋泗)연담도시개발에 최대의 장애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는 그린벨트구역의 이용활성화 방안도 광역개발과정에서 심도있게 강구돼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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