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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외국인 직접투자와 지식유치

    98년 신고기준 외국인 투자는 97년 대비 27% 증가한 약 88억달러로 사상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이같은 외국인 투자 유치실적은 97년말 외환위기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과 경쟁국인 동남아 국가들의 전반적인 투자유치 부진을 감안할 때 괄목할만한 성과가 아닐수 없다. 80년대만 해도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한편으로 동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외채부담이 수반되지 않는 안정적인 장기자본으로서의 직접투자의 장점이 크게 부각되어 왔다.우리나라도 IMF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는 고용을 촉진하고 외국자본을 안정적으로 도입하여 기업 및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촉진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또한 직접투자에의한 다국적기업의 국내시장 진입은 경쟁촉진을 통해 산업구조를 개방적·경쟁적 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외자(外資)유치 뿐만 아니라,외국의 지식을 받아들이는외지(外知)유치의 경로이기도 하다.직접투자는 다국적기업의 본사와 현지 자회사간의 기업내부 교역을 확대시킴으로써 생산기술과 경영기법 등의 전수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선진 외국기업과의 기술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직접투자를 선진기업의 지적자본(知的資本)에 대한 접근 경로로 인식하고 또 이를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뿐만 아니라 이같은 외지유치는 새정부의국정목표인 창조적 지식국가 건설을 위해서도 그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하겠다. 다국적기업의 기술이전 경로는 대체로 3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다.첫째는 현지기업에 의해 고용된 노동력의 학습효과를 통해서이며,둘째는 현지법인의 전후방 연관기업과의 교호작용을 통해서이다.셋째는‘기술개발투자의 현지화’를 통해서이다.기술개발투자의 현지화란 현지법인이 기술개발을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현지인력을 중심으로 기술개발을 추진하는 기술개발의분권화를 의미한다.따라서 외지(外知)유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현지기업을 R&D지역거점으로 삼아 기술개발의현지화가 촉진될 수 있도록투자환경을 정비하여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위해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외국인의 국내기업 인수합병(M&A) 전면자유화,‘외국인 투자촉진법’제정 등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외국인 투자환경 정비라는 일반론에 치우쳐 외지유치라는 국가의 산업정책 방향과 연계시키는 전략성이 부족하였다.따라서 선진 기업의 현지국 기술이전이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될수 있도록 유인하는 투자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구체적으로 기술이전·확산의 크기에 따라 투자지원을 차등하는 투자지원제도의 탄력적 운영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우리 기업이 R&D지역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지적 인프라 구축,지적재산권 정비,고급연구인력 양성,산학협동 강화,진출대상 산업의 산업클러스터(Cluster) 형성,노동시장의 유연화,정부의 R&D 지원 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趙東根 명지대 교수·경제학]
  • 『金대통령 국민과의 대화』어떤 메시지 담았나

    金大中대통령이 21일 국민과의 TV 대화에서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인내와 희망’이었다.아직은 대기업 구조조정과 공공부문 등 4대 개혁을 포함해 매듭지어야 할 개혁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만큼 ‘다시 뛰는’ 자세로 올 1년을 보내야 한다는 당부와,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우리도 희망의 21세기를맞게 된다는 비전 제시로 볼 수 있다.金대통령이 이날 대화에서 실업대책과경기회복 방안,정치개혁,노동시장의 안정 등이 미흡했다는 점을 솔직히 토로하고 지속적인 개혁의지를 거듭 강조한 것도 선진국 진입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金대통령은 이런 기조 위에서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민생현안에 대한 답변에 주력했다.여론조사결과를 토대로 선정한 경기회복 전망과 물가안정,중소기업 지원 및 시중자금 유통,빅딜과정에서의 근로자의 고통부담,실업대책,농어촌 부채문제 등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까지 적시하며 충실히 답변을 한 것은국민의 협조를 얻기 위함이다.국민의 동참 없이는 산적한 개혁과제는 물론경기회복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또 물가안정과 자금사정 호전 약속은 국민의 동참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의하나다.실업난 해소를 위한 정부의 노력과 농어촌 부채탕감 조치의 진척상황을 소상히 소개한 것도 마찬가지다.金대통령은 “구조조정으로 일시적 실업이 증가하나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생긴다”며 고비를 함께 넘기자는 호소를 잊지 않았다. 총체적 국정개혁을 위해 내년 총선 전까지 정치개혁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은 ‘정치가 더이상 경제재건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정치권에 대한 경고다. 특히 金대통령은 지역갈등 해소와 제2건국운동에 대해 강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적극적 처방을 예고했다.제2건국운동을 “새 천년을 향한 세계적 도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규정짓고 참여하자,바르게 살자,다시 뛰자는 ‘참바다운동’과 부정부패 척결,신지식인 운동을 제창한 것은 이 운동의 향후방향을 가늠하는 잣대다.이를 통해 능력과 개혁성,참신성에다 지역형평을 가미한 인사정책을 거듭 확약하고,‘지역차별의 최대 피해자’로서 전국적인국민화합노력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 (25)

    ◆친일 미술가 金仁承·景承형제 작년 11월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있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 “해방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면서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서울 종묘공원의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등을 들었다. 김경승(金景承,1915∼1992)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유명한 조각가이다.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89·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賞)을 휩쓸었고,해방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 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중 장남과 차남으로 태어난 김인승·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과(科)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이 학교는 일본인 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다. 이들 형제 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하면서 우등생으로 졸업(1937년)하였다.재학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년)봉축기념전’에 출품,입선하면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 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부문의 심사위원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따라서 선전에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1940년 선전의추천작가가 되었다.이 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사람 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1939년 ‘S씨상’(흉상),40년 ‘목동’(전신상)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인 ‘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44년 그는 ‘선전’에 ‘제4반’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관변조직인 애국반(愛國班)의 반원인 조선여성이 전시하 후방에서근로봉사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다섯 점 모두가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일제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두 사람은 또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활동하였다.1941년 2월 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다.두 사람은 각각서양화부(김인승),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00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참조)를제작하였다.이 그림은 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지원병훈련소장,총력연맹 사무국 총장,경기도지사,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해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병사들의 행진모습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출전의 분위기를 조장하고있다.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그는 또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표기하였으며 ‘선전’ 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Kin’으로 표기하였다.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할 수 있다. 해방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선전’ 추천작가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 하였다.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주도,이화여대 미대 학장,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냈다.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나란히 수상하였다.남산의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것이다.
  • 日 자위대 해외파병 논쟁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 연립여당의 한 축인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와 제1야당 민주당 간 나오토(菅直人) 대표가 7일 TV에서 격렬한 ‘안보토론’을 벌였다. ‘안보국회’로 일컬어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물론 일본 열도를 휩쓸고있는 안보논쟁에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이루는 여야 대표주자로서 이들의 논쟁은 안팎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먼저 국회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는 자위대의 해외파견에 대한 한국 중국등 주변국의 반발 문제. 오자와 당수는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해야 한다는)내 논리를 한국이나 중국에 말해왔지만 반론은 없었다.(그들이)이해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간 대표는 “그 견해는 틀리다.내가 한국인이나 중국인들과 만나본 바로는결코 그렇지 않다”고 응수했다. 일본 정부가 미국측에 자금을 지원했던 91년 걸프전도 도마에 올랐다. 간 대표는 “(걸프전은 미국이)이라크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치렀던전쟁”이라고 비판하고 “자위대를 군사목적으로 내보내는 것은 반대”라고못박았다. 이에대해 오자와 당수는 “그렇지 않다.마피아의 우두머리가 ‘나는 살인하지 않는다.돈으로 시킬 뿐이다’고 하는게 가장 나쁘다”고 당시 전쟁에 자금만 지원했던 일본이 자위대도 파견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엔 결의에 따른 다국적군에 대한 자위대의 후방지원에 대해 오자와당수는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간 대표는 “헌법에 어긋나 반대한다”고 맞서 안보문제를 둘러싼 연립여당과 야당의 입장차를 분명히 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4회)

    ■2·8독립선언 주역 徐 椿 지난 97년 8월 독립유공자 후손 한 사람이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독립유공자 적용배제 취소청구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그는 보훈처가 자신의 선친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96년 10월 보훈처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사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일부 포함돼 있다는 재야 역사학계의 지적을 토대로 재심사를 벌여 5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바 있다.해당자 5명은 徐椿·金羲善·朴淵瑞·張膺震·鄭廣朝 등이다. 소송을 낸 사람은 서춘의 아들 서인창씨(69·서울거주).서씨는 소장에서 “아버지는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금고 9개월의 형을 받은 공적으로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애국지사임이 명백하다”며 “기자출신인 아버지가 일제때 쓴 기사 5,000여건 중 16건의 기사를 문제삼아 (독립)유공자에서 배제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1심에서 서씨는 승소하였다.서울고법은 “‘예우배제’에 앞서 유족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은 절차상 하자가 인정된다”며 서씨의 손을 들어주었다.이에 대해 보훈처는 작년 12월 대법원에 상고,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 특별1부에 계류중이다. 보훈처와 유족간에 독립유공자 예우문제를 놓고 소송으로 비화한 徐椿(창씨명 大川滋種·1894∼1944)은 어떤 사람인가?그의 아들이 소장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일제하 언론인 출신으로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초기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로서 공적을 인정할만 하다.특히‘2·8독립선언’에 참가한 사실이나 초창기 일제의 통치정책,특히 경제정책을 비판한 사실 등은 인정된다.그러나 그가 일제말기에 친일논조의 기사를쓴 사실도 부인할수 없다. 서춘은 1894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났다.‘매일신보’(1944.4.6)에 난 그의 부음기사에 따르면,그는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東京)고등사범 박물학과에 적을 두었다가 중도에 자퇴하고 동양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후 다시 경도(京都)제대 경제학부에 입학,대정 15년(1926년)에 졸업한 것으로나와있다.‘2·8독립선언’의 동지이자 나중에 같이 친일대열에 섰던 춘원李光洙는 “그는 재사(才士)이기보다는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에 가입,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이었다.1917년 연말 망년회 모임에서 그는 李琮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역설하였다.이듬해 연말 그는 도쿄기독청년회 주최로 도쿄YMCA 강당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연사로 나서 미국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 원칙아래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崔八鏞 등과 함께 1919년 2월 8일을 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의하고 국내 민족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1월 중순 宋繼白을 서울에파견했다.2월 8일 도쿄YMCA 강당에서는 예정대로 독립선언식이 열렸고 그는현장에서 체포돼 그 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출판법 위반혐의로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독립유공자공훈록’ 제2권) 한편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 동양대학과 경도제대 경제학부를 졸업(1926년)한 후 귀국하여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이듬해 2월 그는입사 4개월만에 경제부장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그는 일제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경제평론가로 자리를 굳혔다. 초창기 그는 일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주로 썼다.당시 그는 동아일보는 물론 각종 잡지에도 활발히 경제평론을 기고하였으며 각종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 초빙되어 경제와 교양·상식에 관한 계몽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민족진영 인사들의 변절행진이 시작되자 그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그는 “현대전에서교전국간의 경제전이라는 것은 환언하면 협력전이다.협력! 이것은 정신의 힘이다.정부가 국민정신 총동원주간을 설치했으므로 한사람 한사람이 총후(銃後,후방)용사다.국민총력이 있고서야 총후가 공고하다”(‘四海公論’1938년 6월호)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공공연히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내선일체론자들로 구성된 ‘방송선전협의회’의 강사로 일하면서 친일파로서 모습을 드러냈다.1938년 그는 일제가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내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천하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후원하기 위해 군관민 각 방면 유력자들로 조직된 ‘목요회(木曜會)’의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40년대 들어서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 주요 친일단체에서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또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반도청년 제군,제군에게는 이제 절호의기회가 온 것이다.내선일체,이것이 제군이 취할 절호의 기회다….1.대군(大君,일황)을 위해 태어나고,2.대군을 위해 일하고,3.대군을 위해 죽는다는 정신을 갖지 않는 자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될 수 없는 것이다.…우리 일본의 대화혼(大和魂)에서 말한다면 대군을 위해 죽는 일은 신자(臣子)된 자의 본분임과 동시에 죽는 그 사람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다”(‘총동원’1939년 10월호)며 지원병 출진을 권유하였다. 19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다시 ‘성은(聖恩)에 감읍(感泣)하며’라는 글에서 “소화 18년(1943년) 5월 13일!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멸사봉공의 열의에 불타는 반도 1,500만 민중은 이날 또다시 광대무변한 성은에 감읍하여 마지 않을 감격과 광영에 우뢰같은 환성을 폭발시켰다”(‘春秋’,1943년 6월호)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하였다.학도병 권유 역시 빠지지 않았다.그는 학도병 지원 권유 조직인 경성익찬회 산하 종로익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또 학도출진격려대회에서 연사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그는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조선청년을 사지(死地)로 내모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의 변절은 ‘약육강식’을 합리화한 제국주의 논리를 수용한데서 비롯됐다.그는 일본유학 당시에도 “…노국(露國,러시아)이 침략하자 일본은 자위상 드디어 조선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요컨대 약자가 강자에게 병탄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은 생물상의 원칙이다.…”며 이같은 의식세계를 드러낸바 있다.그런 그는 일본이 청일·러일전쟁에 이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승리하자 조선독립에 대한 희망을 접고만 셈이다.그는 오히려 일제권력과 타협,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겉으로는 ‘실력양성론’을 표방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일제의 강압통치를 인정한 것이다.그는 식민지하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에 입사한지 10개월만인 27년 8월 그는 평안도 출신들이 대세를 이루던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취체역(중역)겸 주필에 임명되었다.1940년 동아.조선이 폐간되자 그는 다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로 자리를옮겨 친일언론지의 논설책임자가 되었다.1944년 4월 5일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이 자리에 있었다.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록한 ‘공적조서’에는 ‘변절여부’를 확인하는항목이 있다.서춘의 경우 이 항목에 저촉되는 사람이다.따라서 1963년 그에게 추서된 대통령 표창은 심사과정에 하자가 있다고 하겠다.‘친일’문제는유족의 주장대로 친일기사의 건 수로만 따질 문제는 아니다.그런 식이라면춘원 이광수도 포상해야 한다.춘원은 ‘2·8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알려진인물이다. 이 소송사건은 엄격히 말해 그가 친일을 했느냐,안했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예우박탈’을 둘러싼 행정절차 문제에 관한 것이다.따라서 서씨의 유족이 최종심에서 승소를 한다고 해도 서씨의 친일문제를 둘러싼 논란은여전히 남는 셈이다. ‘2·8독립선언’ 80주년이 되는 오늘 도쿄 현지에서는 원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갖는다.‘2·8선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소송이 진행중인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재 그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鄭雲鉉 jwh59@
  • 대한광장-통일과 평화를 위한 삼각관계

    국민의 정부는 남북관계에 포용정책을 취하고,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며,다시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6자회담으로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도모한다고 한다.‘2+4+6’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구도는 남한·미국·일본을 한 축으로,북한·중국·러시아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것으로 짝수의 균형감이 있어보인다.더욱이 한때 ‘북방 삼각관계’대 ‘남방 삼각관계’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대치적인 균형을 설명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실상 한걸음만 들여놓고 보면 이러한 형식적인 균형 이면에는 매우비균형적인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이것은 무엇보다 최근 보도된 ‘미국의대 북한 전쟁계획’(이하 ‘계획’)에서도 그러하다.먼저 6자회담에 성원이될 수 있는 러시아와 일본을 비교해보자.‘계획’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997년 미·일 안보지침 개정 이후 일본은 한반도 유사시의 중요한 개입자가 되었다. 일의대수(一衣帶水)관계에 있는 남한과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사거리 내에있으며,올해부터 일본군과 한국군은 통합훈련을 하며또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은 통합작전을 하게 된다.또 오키나와는 한반도 전시에 가장 중요한 후방기지가 된다.이에 비해 러시아는 ‘계획’에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의 문제가 너무 많아 한반도 상황에는 거의 개입할 수 없는 실정이다. 즉,일본은 4자회담의 당사자가 아니지만 중국보다 한반도의 안보에 더 많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지난번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이일본에 가서 제국주의 시절의 과거사문제를 소리 높여 지적한 것은 과거사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다름아닌 북한을 빌미로 미국과 일본이 동맹하여 자신을 포위하고 있다는 우려,그야말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인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4자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의 위치는 더욱 비균형적이다.남한에는 미군 3만5,000여명이 주둔하고 있고,북한과 미국은 정전협정상의 ‘휴전중인 적대국’이다.즉,미국은 남북 양측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중국이 미래의 강대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현재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계획’에서도 중국은 한반도의 전쟁이 단기간일 경우 묵과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2+4+6’의 관계는 균형적이라기보다 실제로는 남한·미국·일본의 남방 삼각이 압도하고 있으며 북방 삼각은 작동 자체가 의문시되는 형국이다.그렇다면 게임은 끝난 것인가.그렇지는 않다.지난번 북한의 미사일·인공위성사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또 1994년의 전쟁시나리오(OpPlan 5027)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전쟁은 남한에도 치명적인 위험을 준다. 따라서 평화의 길로 가기 위해 우리는 북방삼각 대 남방삼각의 대결이 아닌 새로운 융합의 삼각관계가 필요한 것이다.그것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북·미관계를 진전시키며,한·미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현재와 같이 적대적인 북·미관계의 진전없이 남북관계의 본질적인 개선은 불가능하다.현재 ‘남북기본합의서’가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에 따른 법률의 정비와 남·북·미가 같이 참여하는 평화 삼각체제의 수립만이 한반도를 평화로 인도할 수 있다.우리의 안전을 위해 남방삼각의 협력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그 끝을 장담할 수 없다.남방삼각의 안정만큼 남·북·미 삼각의 새로운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 99‘경제 화약고’진단-중국

    금융권과 국영기업의 부실은 중국 경제의 목줄을 죄는 ‘시한 폭탄’이다.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계산한 부실채권은 전체의 20% 규모.중국 은행의 전체 자본금의 5배가량인 2,000억달러이상이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적자 국영기업 살리기에 쏟아넣은 돈과 정실 대출로 금융권은 ‘초(超)부실상태’.지난 11일 파산한 광둥 국제신탁투자공사(GITIC)가 대표적인 예다. 155억 위안에 달하는 대외 부채의 지불연기 결정으로 중국금융의 대외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중국내 관영 언론매체들조차 부실 금융이 경제발전과 안정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부실 국유기업의 청산없인 금융권의 부실 해결은 어렵다.그러나 대량실업등 사회·정치적 파장때문에 본격적으로 칼을 대기 어려운 형편이다. 현재 중국 경제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수출에 의존한 제조업의 성장.지난해 주변국가들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국제경쟁력이 약화됐지만 7.8%의 성장률을 보였다.그러나 수출여건이 더욱 어려워지면 위안화의 평가절하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20일엔 위안화의 심리적 최후방어선인 달러당 8.28이 깨지는 등 평가절하우려가 증폭되기도 했다.그럴경우 수출경쟁국인 주변 동남아국가의 화폐가치 절하경쟁을 유발,세계 금융시장의 혼란을 일으킬 위험은 높다.李錫遇 swlee@
  • ‘99년은 개혁완성의 해(4회)-언론분야

    제도적 견제가 없는 언론이 60년대 이후 독재권력을 합리화하는 권력기구로 전락하면서 언론개혁운동이 태동하였다.산발적 활동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못한 상황에서 언론시장 왜곡도 골이 깊어졌다.90년 이후 신문경쟁은 과열되고 방송의 폐해도 늘어났다.최근엔 일부 유력언론이 해묵은 냉전논리를 끌어와 자사 이기주의로 이용하기도 했다.게다가 IMF한파로 광고수주가 어려워진 일부 지방신문의 사이비 취재행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에 38개 시민단체가 연합전선을 편 가운데 지난 해 8월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상임공동대표 金重培)’가 출범,본격적인 언론개혁운동에 나섰다. 金大中대통령이 지난달 기독교방송 창사기념회에서 지적한 내용이나 朴智元 공보수석의 강도높은 발언 등으로 볼때 정부도 언론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중 무게는 방송에 놓인다.방송개혁위원회(위원장 姜元龍)가 출범한 이후방송의 공익성에 대한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표명은 이를 뒷받침한다.이와 관련,의제설정을 끝내고 현안정리에 돌입한 방송개혁위의 발걸음은 눈길을 끈다.통합방송법 국회상정 유보에 대한 방송계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띄운방송개혁위는 ‘발등의 불’부터 끄느라 분주하다.거의 매일 실행위원회 분과 회의를 열고 관련단체를 불러 청문회를 열고 있다. 크게는 공익성 강화를 내세우고 발전·제도·기술 등 분과별 논의된 자료를 바탕으로 개혁의 틀을 다지고 있다.姜元龍위원장은 그동안 합의된 내용을바탕으로 지난 14일 개혁의 기본방향과 규제기구인 방송위원회의 위상과 직능 등을 발표했다.논란이 많은 케이블TV와 중계유선방송의 통합문제,위성방송 시작 시기 등 현안을 정리하면서 작업을 구체화한다는 전략이다. 한편 정부가 내세운 신문개혁의 줄기는 ‘시장원리’에 맡긴다는 것이다.사기업이란 측면에서 직접 메스를 대면 ‘언론탄압의 빌미’를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철저한 적자생존의 논리에 맡겨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언론시장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감안한다면 너무 막연하다.嚴柱雄 언론노련정책실장은 “제작 측면에서는 여전히 자사 이기주의적 편파 왜곡보도,경영측면에선 편법대출이 횡행하는 등 기형적인 언론구조에서 무슨 원리가있느냐”면서 “이는 자칫하면 언론개혁의 선명성을 흐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정부로서도 강제구독이나 광고강요 등 불법적인 관행을 근절하겠다는원칙은 밝혔다.특히 ‘언론재벌’의 경우 판매망의 정상화나 소유지분을 제한하는 입법으로 개혁 환경을 조성한다는 방침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정부 관계자도 “필요하면 언개련이 입법청원한 정간법개정안도 받아들이겠다”고 밝힌바 있다. 이와 관련, 시민단체나 학자들의 움직임은 주목에 값한다.언개련은 다양한민의를 모아 언론계 숙원이던 정간법을 지난해 11월 입법청원한 것을 비롯,방송개혁 실행위원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신문과 방송을 아우르는 언론개혁의 전면전에 나선 상태다. 언개련의 金周彦사무총장은 “당면과제는 정간법 개정 관철과 방송개혁위활동으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수용자 주권시대를 여는데 중점을 두고있다”고 밝혔다.이를 위해제도개선본부에 있는 방송법 특위와 정간법특위의 활동에 무게를 두었다. 언개련의 정간법 개정안의 골자는 ●재벌언론과 언론재벌의 소유제한●경영의 투명성 확보●편집권 독립●언론중재위원회에 시민·사회단체 추천인 참가 등이다.언개련 관계자는 “소유제한 문제는 언론사 사주의 반발이 거셀것으로 보여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편집권 독립이나 공동판매제 등은 어느 정도 낙관하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수용자운동은 통합방송법안에 들어있는 시청자프로의 제작방법이나 단일한시청자단체의 목소리를 담은 구체적 대안을 만들고 미디어교육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허울뿐인 방송사 시청자위원회의 권한과 활동을 강화한다는 지침도 만들었다. 이밖에 18일 변호사 30여명이 참가하는 ‘언론피해 법률지원본부’를 가동하고 지난 해 1월 국회를 통과한 정보공개법의 실현도 주요 사업의 하나로삼고 있다.언론개혁의 중심체로 떠오른 언개련의 활동은 주목을 요한다.李鍾壽 vielee@
  • 日 자민-자유 聯政 출범 보수세력 다시 뭉쳤다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 자민당과 자유당의 연립정권이 14일 발족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는 이날 자유당 노다 다케시(野田毅)간사장을자치상에 기용하는 소폭의 개각을 단행,연립정권을 출범시켰다. 집권 자민당은 97년 9월 사민당,신당 사키가케와의 연립해체 이후 16개월만에 연립정권에 복귀했다. 양당은 이에앞서 13일 자위대의 유엔 다국적군 참가,유엔평화유지군(PKF)법 개정을 통한 후방지원 활동,중의원 정수 50명 삭감,부(副)대신제 신설 등에 합의했었다. 개각에선 20명인 각료수를 18명으로 줄이기로 한 양당 합의에 따라 운수상이 홋카이도(北海道)개발청장관,문부상이 과기처장관,건설상이 국토청장관,관방장관이 오키나와개발청장관을 각각 겸무토록 했다. 이번 연립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보수세력의 재집결.93년 자민당을 탈당했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를 비롯,보수 본류(本流)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는 자유당과의 연립으로 집권 자민당은 보수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8월북한 탄도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초강경 자세로 선회한 대북(對北)정책도 보다 강경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달초 방한한 노로타 호세이(野呂田芳成)방위청장관의 “북한이 미사일 실험발사를재실시하면 일본의 경수로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언급도 이같은 흐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방위문제도 마찬가지.양당이 유엔 다국적군 참가나 유엔평화유지군(PKF)법개정 등에 합의,자위대의 해외 활동의 폭이 크게 넓어지게 된데다 군비증강논의도 보다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다만 ‘자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실력행사만 가능하다’는 헌법 9조의 기존 해석을 자민당이 끝까지 고수,자유당의 헌법해석 변경이나 헌법수정 주장을 잠재웠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marry01@
  • 日, 자위대 유엔평화軍 파견 허용

    │도쿄 黃性淇 특파원│연립정권 출범을 앞두고 정책협의로 진통을 겪고 있는 일본 집권 자민당과 자유당은 7일 유엔평화유지군(PKF)에 대한 자위대의참가 동결을 해제키로 합의했다. 양당은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적극 참여한다는 입장에 따라 92년 제정된 PKO 협력법에서 동결시킨 자위대의 참가를 허용하기로 했다.해제 법안 제출시기는 자민당은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관련 법안의 정기국회 통과후를 주장하고 있고 참의원에서 양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정등을 감안,앞으로 조정해나가기로 했다. PKF는 분쟁당사국 군대의 철수와 정전감시 등을 주임무로 하는 부대로 일본은 PKO 협력법 제정당시 야당측이 자위대가 분쟁에 휘말려들 수 있음을 우려해 강력히 반대하자 별도의 법률을 마련할 때까지 동결시키기로 했었다. 양당은 지난 6일 정책협의에서 자위대의 유엔 다국적군 참가와 관련,무력행사를 하지 않는 후방지원에는 적극 협력키로 하고 구체적인 협력내용은 정부가 사안별로 결정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marry01@
  • 日자민-자유 ‘자위대 다국적군 참여’ 논란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 집권 자민당과 자유당이 안보정책과 각료지분을 둘러싼 이견으로 연립정권 수립에 난항을 겪고 있다. 28일 오전으로 예정됐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와 오자와 이치로(小 澤一郞) 자유당 당수와의 회담은 자유당측의 요구로 연기됐다. 오자와 당수는 이날 “자민당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열의도 없다 ”고 비난하자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관방장관은 “자유당이 자위대의 유 엔군 참여를 둘러싸고 헌법해석 변경을 계속 요구하면 연정합의를 백지로 돌 릴 수도 있다”고 맞서는 등 양당은 날카로운 신경전을 폈다. 양당은 지난달 연립정권 수립합의 이후 몇차례 정책협의를 통해 유엔이 다 국적군을 결성할 때 후방지원에 한해 자위대를 참여시킨다는데는 거의 의견 접근을 보았다.현재 양당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문제는 후방지원의 성격 및 내용 규정이다. 자유당은 유엔 다국적군이나 평화유지군(PKF)에 의료나 수송,통신 등의 비 전투행위는 물론 전투행위에도 일부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이공격을 받을 때만 집단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기존 헌법해석도 바꿀 필요가 있으며 자민당이 연립정권 수립 때 이를 명확히 해 야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자민당은 전투행위에는 자위대가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회담이 연기된 배경에는 자유당에 배정될 각료자리에 대한 오자와 당수측의 불만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자유당은 부총리를 포함한 각료 두 자리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자민당은 “부총리는 곤란하며 오자와 당수 1명 만 자치상으로 기용하겠다”는 입장이다. [ marry@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유엔 다목적군 결성때 日 자위대도 파병키로

    ◎자민당,오늘 안보원칙 발표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유엔의 다국적군이 결성될 때 자위대도 의료,통신 등 후방지원에 한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27일 보도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이같은 안보 기본원칙을 28일 열리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자유당 당수와의 회담에서 표명키로 했다. 자민당은 또 현재 의료지원 등 비전투행위에 국한하고 있는 자위대의 유엔평화유지활동(PKO)도 정전감시나 병력철수 등 PKO의 주력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 환율 하락/바이어 ‘離韓’ 대이동/1,200원대 붕괴 파장

    ◎대부분 업종 채산성감소 수출전선 암운/對日경쟁력 상실 車·반도체 등 타격 심각 원­달러 환율의 최후방어선으로 믿었던 1,200원대가 무너지자 수출전선에는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앉아서 입은 환차손은 물론 수출단가 상승으로 가격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높아진 수출단가에 바이어들이 모두 돌아서고 있다”며 발을 구른다. 22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국내 수출업체가 갖고 있는 외화는 대기업 85억달러,중소기업 45억달러 등 130억달러에 이른다. 1,371원을 기록한 지난 9월의 원­달러 평균환율과 최근 환율을 비교하면 약 2조원의 환차손을 입은 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수출단가 상승으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일본과의 경쟁이 치열한 자동차와 가전,반도체는 물론 대부분의 업종에 적색경보가 울리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완성차 업계는 12월 들어 환율 1,200원선이 위협받으면서 해외 현지의 판촉활동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주문자상표부착(OEM)방식으로 수출하는 부품업계는 바이어들이 수출단가 인상을 거절해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다. 가전은 경쟁상대인 일본제품과의 가격차가 사라진 상황이다. 그동안 5∼25%정도 싼값에 수출을 지탱해 왔으나 더 이상 여력이 없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관계자는 “유럽에 이어 미국에서도 일본 제품과 경쟁하기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 기계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특히 중고 공작기계 수출업체의 경우 일본 제품과 20∼30%정도 가격차가 나야 경쟁이 가능한 데 환율하락으로 수출이 더욱 힘들게 됐다”고 밝혔다. 공급과잉 상태의 석유화학 부문도 타격이 심각하다. 시장상황을 감안해 수출단가를 내려야 하지만 환율하락 때문에 오히려 값을 올릴 상황이 되다보니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 없다는 설명이다.
  • 살벌한 분위기… 관광객 발길 끊겨/金 중위 사망 JSA 현지르포

    ◎선글라스 낀채 경비 선 병사들은 마치 ‘마네킹’/北 접촉·술파티 등 군기문란 상상하기 어려워 16일 오전 휴전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군사정전위 본회담장 등 건물 주변은 金勳 중위 사망사건 재조사 때문인지 을씨년스럽고도 삼엄했다.선글라스를 낀 채 경비를 서고 있는 우리측 병사들은 사진의 한장면처럼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이들의 모습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북한 경비병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술을 마시는 등 군기문란이 성행했다는 최근의 폭로내용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북한측 장교들과 미군장교들이 종종 스넥 파티를 했다는 ‘공동 일작장교 회의실’도 굳게 잠겨져 있었다. 金중위 사건이 화제가 되면서 판문점은 더욱 썰렁해졌다.하루 300∼400명의 관광객으로 북적대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金榮勳 중사가 다녀왔다는 북한측 제1초소는 군사분계선과 몇걸음도 안되는 지척에 있었다.우리측 경비병 소대막사로부터도 불과 20m도 떨어지지 않았다.이 곳 규정에는 해가 지고나면 3명 이상이 함께 다녀야 한다.규정 준수여부를 관리 감독해야 할 金중사 자신이 이를 어겼으니 당시 군기상태가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나본 몇몇 군 관계자들의 말은 달랐다.특조단의 최종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최근 전역자 등의 입을 빌려 알려진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세였다.혹독한 훈련과 엄한 군기속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군기문란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 이들의 하소연이다.한 관계자는 후방의 친지와 부모로부터 신변을 걱정하는 전화도 많이 온다고 전했다.군 사령관 등 군 고위 관계자들도 사기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판문점에서 남동쪽으로 1.4㎞ 떨어진 유엔사 경비대대 주둔지 ‘캠프 보니파스’ 주변에는 ‘최전방에서’라는 구호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늘 긴장속에서 북한군과 대치해야 하는 이 곳 장병들에게 미군들이 붙여준 부대 별칭이라고 한다. 바로 이 곳에서 벌어진 ‘군기문란 사건’을 놓고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 경비병 北 접촉 10개월 방치/나사 풀린 民·軍 수사기관

    ◎귀순자 통해 2월에 ‘40명 포섭’ 알아/“과장 진술”“구체적 혐의 없다” 무시/관련자 소환 등 조사않고 미온 대처 민·군 수사기관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경비병들이 북한 대남심리전 특수요원들과 접촉한다는 귀순자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10개월이 지나도록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9일 국방부에 따르면 전 북한군 상위 변용관씨가 지난 2월3일 귀순한 뒤 JSA내 우리측 경비병 40여명과 접촉해 포섭공작을 했다고 진술했다.하지만 안기부 국방부 경찰청 기무사 정보사 등 5개 기관은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하는 등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변씨는 2월3일부터 9일까지의 5개기관 합동신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판문점내 2초소와 북측 4초소 부근 군사분계선상에서 남한경비병들을 몰래 만나 선물을 교환하는 등 포섭활동을 펴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한국군 경비중대 4개소대 152명이 북한 공작조의 포섭대상이며 개인적으로 A일병,B일병,C일병과 직접 접촉했다.98년 2월 현재 한국군으로 북측 공작요원과 접촉하고 있다.2소대 김모상병과 친숙하게 만나 공작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합동신문조는 ‘변용관이 한국군과 접촉,대화만 했음에도 실적을 인정받기 위해 포섭된 자라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변씨의 진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군 기무사도 2월12일 변씨를 독자적으로 조사,‘한국군 경비병 3명을 직접 만났으며 또다른 4명을 포섭했다는 동료 특공조원의 보고서를 봤다’는 내용과 함께 이들의 이름까지 진술받았으나 ‘아직 포섭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관련자들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무사 관계자는 “변용관이 우리측 경비병 3명을 1∼2회 만났지만 그 이상 접촉하려 하면 피했다고만 말할 뿐 구체적인 혐의 내용을 제시하지 못해 특이 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고 적극 수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JSA내 우리측 경비병들의 대공 근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지난 2월18일 유엔사측에 기무사 요원이 상주해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무사는 또 지난 6월부터 金勳 중위 사망사건에 대한 정밀 재수사를 실시한 육군 검찰부로부터 수사협조나 협의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해 군 검찰의 수사가 허술하게 진행됐음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군 수사당국은 JSA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병사들은 수사대상이 아닌 데다 구체적인 혐의나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군 수사 관계자는 “이번에 구속된 당시 부소대장 金모중사는 변용관도 전혀 거론하지 않아 조사하지 않았으며 지난 6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미18의 무사 행정관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고 말해 金중위 사망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극히 미온적이었음을 시인했다. ◎김훈 중위 의문사 일지 ●2월3일=판문점 대표부 소속 북한군 변용관 상위 귀순. ●2월24일=金勳 중위(JSA 소대장) 권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 ●2월25일=金중위 부대 공동경비구역에서 후방으로 빠지는 날. ●4월∼11월=金중위 아버지 金拓 예비역 중장,군 수사당국의 자살발표에 의혹 제기,국회 국방위에 탄원서 제출 등 진상규명 활동. ●10월26일=국회 국방위,金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 소위원회 구성. ●11월27일=육군본부 고등검찰부 金중위 사망사건 최종수사 결과 발표.자신의 권총으로 자살 결론. ●12월3일=국방위 소위,JSA 소속 金영훈 중사(28)가 북한군과 자주 접촉했다는 참고인 진술 확보. ●12월4일=기무사령부,金중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2월9일=국방부,金중위 사건 전면 재조사 착수.
  • “타살 가능성” 재수사 급선회/국방위가 보는 사건 개연성

    ◎“경비병 北 왕래 金 중위사건과 연루” 제기/“타살 단정말고 차근차근 수사” 신중론도 ‘金勳 중위 사망사건’ 파문이 커지고 있다.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전면 재수사로 방향을 틀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병들의 북한 왕래사건과 맞물려 안보공방으로 번질 조짐이다. 국회 국방위 ‘金勳 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소위’(위원장 河璟根 의원)는 9일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차 결론은 전면 재수사로 마무리됐다. 국방부측의 ‘자살단정’ 결론을 뒤엎는 데 초점을 맞췄다. 먼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을 문제삼았다. 소위는 “군이 金상호일병의 권총을 金중위 권총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육군본부의 재수사과정에서도 입증하지 못한 부분이라고 했다. 총기 수불대장 작성과정에서의 몇가지 허점도 짚었다. 동기부여로 이어갔다. 타살 가능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첫째,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병의 북한 왕래사건을 문제삼았다. 金중위와 같은 부대 부소대장 등이 연루된 사건이다. 河위원장은“재수사 요구에 핵심부분”이라고 분명히 했다. 두 사건과의 연결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북한 개입 가능성도 빠트리지 않았다. 북한군 상위가 귀순한 데 대한 보복차원이라는 전제를 깔았다. 자민련 李東馥 의원은 “북한이 우리군 장교를 살해토록 교사했다는 개연성은 없느냐”고 의문을 표시했다. 河위원장도 “심증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군수품 유용사건에도 연관의혹을 제기했다. 이날 발표문에는 빠졌지만 앞서 참고인 신문에서 불거졌다. 자민련 李의원은 “金중위가 이를 파헤치려고 했다면 대행수단으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소위위원들은 “이들 부대에서 군수품을 몰래 빼내 후방에 팔아넘기는 사례가 잦다”고 주장했다. 수사를 맡은 金영열 1군단 수사과장도 시인했다. 의원들은 관련의혹을 제기하며 참고인들과 공방을 벌였다. 미군과 우리 군의 차이점을 대비시켰다. 미군측은 최초 사건보고에서 ‘자살로 추정되나 더 조사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우리 군은 처음부터 ‘자살사건’으로 단정한 보고서를 냈다며 신랄히 추궁했다. 신중론도 개진했다. 국민회의 林福鎭 의원은 소위에서 “국방부의 당초 金중위 자살결론이 성급했다는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긴 하지만 국방위 소위의 성격상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말자”고 말했다. 여당 의원들은 사건이 이전 정권에서 일어난 일임도 상기시켰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中)

    ◎삼탑진의 ‘노병’들 숙연한 묵념/“외롭게 죽어간 김학규 장군” 눈시울 붉혀/의연하고 용감했던 그날의 동지들 추모/옛 서안 사령부 터엔 재개발 앞둔 건물만 광복 투쟁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독립유공자협회 일행들의 여정은 장쑤성(江蘇省)쉬저우(徐州)에서 안후이성(安徽省)푸양(阜陽)으로 이어졌다.베이징(北京)출발 4일째인 10월10일이었다.푸양까지는 400리 남짓.당시 푸양은 쉬저우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국군의 최전방 거점.적진 깊숙이 뛰어들어 병력을 교란시키고 갖가지 정보를 모으는 일은 광복군의 몫이었다.산타쩐(三塔鎭) 샤오자오쭈앙(小棗庄)마을.제법 번화한 푸양시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반세기전과 다름없는 중국 농촌 그대로였다.‘마지막 독립군’들의 지하공작 본부가 이곳에 있었다.노 광복군들의 눈시울은 금세 붉게 젖었다.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숙연한 묵념이 이어졌다.“지하공작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살해된 韓聖洙 동지의 명복과 독립운동의 영웅이면서도 쓸쓸한 말로를 맞았던 광복군 제3지대 사령관金學奎 장군을 위해” “금방이라도 ‘이 사람들!’하고 외치며 나타날 것만 같은 옛 동지들…”.일본군에서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일본 專修大 졸업생 韓聖洙씨는 상하이에서 정보를 캐다 희생됐다.“韓동지는 체포된 뒤에도 일본말을 쓰지 않아 통역을 거쳐 심문받았다.난징(南京)형무소에서 목이 잘려 죽을 때까지 일본인들을 꾸짖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곳서 주로 활약했던 광복군은 20여명.일행중엔 광복회 부회장을 지낸 金祐銓 회원,全履鎬 회원 등 학병 출신과 일본 점령지역을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했던 金國柱 부회장,金九 선생 비서로 일했던 鮮于鎭 선생 등이 끼어있었다. 43년부터 해방때까지 지하공작 활동을 벌였던 金國柱 부회장은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 등 일본 점령지역을 오가며 정보를 캐고 거주 한국인들을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일본 헌병에게 불심검문 받고 유창한 중국어로 딴전 피웠던 기억,가까스로 마련한 군자금 등 이들의 기억은 끝없이 이어지는듯 했다. 일행은 당시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의 미국 첩보기구 전략사무국(OSS)을 오가며 광복군과의 군사협력 등 연락업무를 맡았던 金祐銓 회원의 무용담을 들으며 산시성(陝西省)의 시안(西安)으로 향했다. 시안은 광복군이라면 영영 잊을 수없는 대일 항전의 聖地.충칭에 이어 두번째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터 잡았던 곳이다.사령부 건물은 시안시 중심부 난위엔먼(南院門) 부근에 있었다.지금은 ‘시안시 공산당 위원회’ 건물과 번화한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광복군 시안시대의 본거지였던 얼부지에 4호는 간이건물에 음식점들이 빽빽히 들어선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 역시 쉬저우나 푸양,린촨(臨泉)에서 처럼 광복군의 자취가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었다.“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 다음 세대들에게 독립군의 투쟁 정신과 역사를 전할 수 있었으면…” 이 다음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며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린곳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시안을 뒤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직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노 광복군들은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했다. ◎광복군 총사령부/1940년 重慶서 발족 두달만에 西安으로 옮겨 광복군 총사령부는 광복군들에겐 따스한 고향이요 용기의 원천이었다.총사령부의 운명은 조국의 처지만큼 순탄치 않았다.총사령부가 발족된 것은 40년 9월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였다.나라 잃은 군대에게는 편안한 나날이 없었다. 태어난 지 두달여만인 그해 11월말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옮긴다.시안은 중국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던 전략 거점지.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위해서였다.일본군 점령지역이 가까워 정보수집과 한국인 포섭 등이 가능했다. 총사령부라고 해야 시안시 난위엔먼 지역과 얼부지 부근의 허름한 주택이 고작이었다.그나마 42년 9월에는 비워 주어야 했다.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중국이 광복군의 행동을 통제하려했기 때문이었다. 2년여의 시안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광복을 맞았다.충칭시 쩌우룽로(鄒容路)에는 총사령부로 쓰였던 건물이 있다.의혈 남아들의 집결지였던 그 곳은 지금도 허름한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다. ◎白波 金學奎 장군 광복군 제3지대장/일군 맞서 눈부신 전과울린 광복군 대부 광복군 제3지대장 白波 金學奎 장군은 총사령관 李靑天,참모장 李範奭과 함께 광복군의 대부였다. 李範奭 참모장이 지대장으로 지휘한 제2지대가 유격전을 주로 폈다면 金學奎 장군의 제3지대는 정면에서 맞서 싸웠던 광복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장군이 항일전선에 투신한 것은 1919년.19살의 나이로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32살이 되던 32년까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40년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족하자 핵심 참모로 참여한다. 그러나 사령부에만 안주하지 않았다.중국군 인맥을 활용,일본군서 탈출한 젊은이들을 린촨(臨泉)의 중국 중앙군관학교로 모아 주도록 했다.그들을 모아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서 독립의 간성으로 양성했고 제3지대를 창설했다. 광복후 白波는 평생 몸바쳐 싸웠던 조국에 돌아 왔지만 李承晩 정권과 불화를 빚으며 옥고를치렀다.67년 돌보는 이도 없이 67세를 일기로 서울의 모래내 한켠 판자집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군 OSS/미국식 훈련… 한반도 상륙 준비 정예부대 OSS는 한때 전략사무국이란 이름으로 운영됐던 미군의 최정예 첩보기구.적진 깊숙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첩보요원을 침투시켜 군사 정보를 탐지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광복군 OSS’는 미국식 OSS요원 훈련을 받은 40여명의 정예 광복군들.45년 3월부터 광복될 때까지 중국에 파견된 OSS의 지원을 받아 특수훈련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등 연합군은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했고 한반도 사정에 밝은 광복군 OSS요원들을 침투시켜 교두보를 확보하게 할 계획이었다. 훈련장은 광복군 제2지대 사령부를 겸해 시안에서 남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뚜취쩐(杜曲鎭) 쓰포춘(寺坡村)에 있었다.일행들이 현장을 찾았을때 훈련장 터는 농촌마을을 이루고 있었다.이곳서 가까운 終南山 산기슭위에는 반갑게도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원측법사의 사리탑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젊은날 ‘지옥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며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아로새기던 곳.“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金柔吉 부회장과 광복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石根永 회원은 회고했다. 광복군 OSS 요원의 활약은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광복군들은 조국 광복을 감격과 함께 회한을 안고 맞았다.스스로의 힘으로 찾지못한 광복이었기에 자결권 제약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쓰포춘의 OSS 훈련장을 뒤로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들은 “광복군의 한반도 상륙이 성사됐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4(공직 탐험)

    ◎회의·보고·훈련… 훈련… “24시간이 짧다”/자신의 철학 지휘에 반영/병사 인성교육까지 담당/권한 큰만큼 책임도 막중 전방부대 연대장인 L대령은 아침 7시 사무실로 출근한다. 숙소는 영내에 있는 연대장 관사. 간부식당에서 아침을 들고 사무실 주변을 한번 살펴보면 8시. 일직사령으로부터 밤사이 일어난 상황보고를 듣는 일로 일과가 시작된다. 야간경계 때 이상 징후가 없었는지,기상상황,헬기 비행에 필요한 시계,풍향 등이 빠짐없이 보고된다. 부대의 전방과 측후방의 동향,적진동향,사단에서 보내온 첩보사항도 포함된다. 이어 아침회의를 갖는다. 인사,정보,작전,군수 등 연대 참모들이 모두 참석한다. 오전 회의가 끝난 뒤 훈련중인 휘하 대대 한곳을 찾아가 훈련상황을 체크하고 다른 부대장들로부터 부대 상황을 보고받는다. 오후 2시에 오전에 종합한 연대 상황을 사단장에게 전화로 보고한다. 사단장 K소장은 고향선배다. 술자리에서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지만 업무보고 때는 절대 그런 티를 못낸다. 사단장은 바로 자신의 1차 고과평가자이다. 일처리에 한치의 허점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오후에 월동준비를 하고있는 부대 한 곳을 방문한 뒤 훈련중인 대대 한 곳을 더 참관한다. 요즈음 L대령이 휘하 대대의 훈련에 특히 관심을 쏟는 것은 RCT(Regiment Combating Training)가 몇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 육사 2년 선배기수가 이번에 장군 진급심사에 들어갔다. 자신의 연대장생활을 마무리하는 이번 RCT훈련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는 몇년 뒤에 있을 자신의 장군 진급심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아는 선배들 찾아 진급운동하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군인의 최고목표는 싸워이기는 것이다. RCT는 가상적을 상대로 실전과 똑같은 병력과 화기로 작전을 펴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종합평가받는 자리다. 예를 들어 부대에 포탄 1만발이 있는데 1만5,000발이 소요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간 실격이다. 보통 5∼6개 연대가 참가해 순위가 매겨진다. RCT가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여기서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지휘방식과 철학을 펴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성격이 직선적인 L대령은 적진 돌파 때 우회보다는 정면돌파를 택한다. 그리고 포병보다는 보병에 더 의존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작전 스타일도 평가단에 의해 정밀분석돼 군기밀로 보관된다. 실병력이 많지 않은 후방의 동원사 연대장도 지휘관으로서의 중요성은 마찬가지. 서울 근교 동원사단의 Y대령은 자신의 생활철학을 부대운영에 100% 반영하는 지휘관이다. 소위 ‘갑종’ 간부후보 출신으로 임관 30년째를 맞은 그는 장군진급이 안될 경우 이번 연대장 보직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러면 사령부 연구원으로 옮겨 1년 남짓 있다 정년퇴직해야 한다. 정년퇴임이 가까워졌다고 지휘관 임무를 게을리할 수는 없는 일. 그의 신조중 하나는 휘하 장병들을 제대 후 ‘자식 군에 보냈더니 사람됐다’는 소리듣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휴가자들이 돌아올 때 돈을 3만원 이상 못 갖고 오게 한다. 군에서 주는 1만5,000원 내외의 월급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트레이닝복도 군에서 지급하는 두벌 외에 병사들이 자기 돈으로는 못사입게 한다. 유명 메이커의 비싼 운동화를 신고 다니다 걸리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흡연구역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영창이다. 그는 “질서를 지키고 돈 아껴쓰도록 가르치는 것도 훈련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병사들의 자유를 너무 옭아매는 지침들 같지만 이도 연대장 마음이다. 계급사회니까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는 “권한이 너무 커 함부로 쓰기가 두렵다”는 말도 한다. 이런 권한을 가진 사람이 대령이다.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3(공직 탐험)

    ◎잦은 전속·이사… 태반이 주말 부부/부대 보조비 턱없이 부족/주머니돈 들여 품위유지/집없는 대령 50% 넘어 K대령은 출근을 위해 정모를 눌러 쓴 뒤 거울 앞에서 “오늘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 다짐하고는 힘차게 방문을 나선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이마가 반지하 셋집의 출입문에 부딪히면서 정모와 함께 ‘국가와 민족에의 충성’도 날아간다.전방에 근무하다 집 값이 비싼 수도권으로 옮긴 대령들의 비애를 다룬 일화다. 육본 과장인 L대령은 육사 32기.금년으로 임관 22년째를 맞았다. 아직 자기 앞으로 집 한칸 없다.“군에 있는 동안은 집 걱정 안해도 돼 굳이 내 집을 가질 필요성을 못느꼈다”고 말했다.동료들도 집 없는 이가 태반이라고 소개했다. 아내와 고2,중3짜리 자녀 등 그의 가족은 지금 육본 계룡대 20평 아파트에 산다.물론 육본을 떠나면 비워줘야하는 집이다.육본 서울 사무소에 근무하는 자신은 국방회관의 3평 남짓한 숙소에 살며 주말이면 가족한테 내려간다.15평에 살 때는 아이들 침대를 놓을 수 없었는데 2년 전 20평짜리로 옮기면서 몇 ㎝ 차이로 침대가 방에 들어가 아이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이들 교육문제.잦은 이사 때문이다.두 아이 모두 국민학교만 7번 옮겼다.지금까지 총 이사횟수는 18번.81년 결혼 후 서울 성수동을 시작으로 용주동,수색,진해 육군대학,경기도 금와,외국유학,다시 서울로,대전으로.그의 가족은 이사를 ‘밥먹듯’했다. 중소도시 이상 부대에 근무할 때는 가족들이 군인아파트에 입주해 살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김없이 셋방살이였다. 수당까지 합하면 L대령의 연봉은 4,500여만원.적지 않은 액수다.게다가 제대하면 연금을 받으니 “굳이 재산 모을 욕심 안낸다”는 게 그의 말이다. 사실 대령만 돼도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는 않다.전방부대로 가면 부대내 관사를 받는다.또 부대 지프 외에 쏘나타 승용차,운전병,사무실 당번,관사 당번,주임 상사 등의 ‘수발’을 받는다.하지만 전방부대에 근무하는 대령들 중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이는 거의 없다.아이들 때문이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령의평균 연령은 43.5세.자녀들이 중학교 이상 다닐 나이이다.부대 따라 이리저리 함께 다닐 형편이 못되는 것이다.그래서 가족은 서울 등 대도시에 남고 본인만 부대 관사에 살며 주말에 서로 오가야 한다.그래서 “두 살림을 벌여 돈 모은다는 건 거짓말이다”고 말한다.이같은 이중생활로 추가되는 생활비 부담은 월평균 50만원이 넘는다. 부대 지휘관으로 나가면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폼’을 잡는다.하지만 폼에는 돈이 따라야 한다.병사수에 따라 지급되는 부대 보조비는 지휘관 품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수도권 후방 연대장인 Y대령은 “축구공 한개값이 2만∼3만원이다.연대 축구시합 한번 하려면 축구공 20개는 사야 한다.한달에 나오는 연대보조비가 50만원이니 내 호주머니 돈 안쓰고는 부하를 통솔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부대를 지휘하면서 많든 적든 빚지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병참,병기 등 업자를 상대하는 경우에는 뒷돈 챙길 기회도 없지 않겠지만 옷벗을 각오를 먼저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Y대령은 “지역 유지들이 모이는 방위협의회에 나가면 간혹 밥이야 그냥 먹지만 그외에 뒷돈 생길 건더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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