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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1)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1)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인왕산에 살면서 위항시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도와주던 임준원의 집에서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시인은 홍세태(洪世泰)와 유찬홍(庾纘洪)이다. 홍세태의 제자 정내교는 스승이 임준원의 집에 얹혀 살았던 이야기를 ‘임준원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유공(유찬홍)의 호는 춘곡(春谷)인데, 바둑을 잘 두었다. 홍공(홍세태)의 호는 창랑(滄浪)인데, 시를 잘 지었다. 이 두 사람의 명성이 모두 당시에 으뜸이었다. 유공은 술을 좋아했는데, 한꺼번에 몇말씩 마셨다. 홍공은 집이 가난해서 양식거리도 없었다. 준원은 유공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좋은 술을 마련해두고 양껏 마시게 했다. 또한 홍공에게는 여러 차례 재물을 주선해주어 양식이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었다. 유찬홍은 초기의 국수(國手)로 알려진 전문기사이다. 홍세태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까지 가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역관(譯官) 시인이다. 유찬홍(1628∼1697)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가장 가깝게 지낸 홍세태(1653∼1725)가 전기를 지어 주었다.(홍세태가 일본에 가서 역관으로 활약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소개한다.) 유찬홍은 9세에 병자호란을 만나 강화도로 피란갔다가 포로가 되어 청나라까지 종으로 붙잡혀 갔다. 집안사람이 돈을 주고 사온 기구한 운명의 인물이다. 홍세태는 전기 첫줄부터 유찬홍의 암기력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암기력 뛰어난 천재… 훈장에 매 맞으면서도 바둑 몰두 유술부(庾述夫)의 이름은 찬홍, 고려 태사 금필(黔弼)의 후손이다. 이웃에 서당 훈장이 있었는데, 학생 수십명이 모였다. 술부도 그곳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빼어나서 외우기를 잘했다. 여러 학생들이 반을 나누어 과업을 받고 상벌(賞罰)을 계획 세운 뒤, 훈장이 여러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이소경(離騷經)’을 외우는 학생이 있으면 상을 주겠다.” 술부는 집으로 돌아와 ‘초사(楚辭)’를 찾아 옆에다 끼고, 학사 정두경(鄭斗卿)의 집을 찾아가 문지기에게 말했다.“들어가서 공을 뵙고 ‘유찬홍이란 자가 ‘초사’를 배우고 싶어 왔다고 전하소.” 정공은 평소에 약속하지 않고 만나는 것을 몹시 꺼렸는데, 이때 만나서도 매우 간단히 가르쳐줬다. 술부는 곧 돌아와서 ‘이소경’을 읽었다. 날이 밝자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술부도 소매에서 ‘초사’를 꺼내들고 훈장 앞에 나아가 돌아앉아 외웠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자 훈장이 크게 놀랐다. 술부는 자기의 재주를 스스로 믿고 다시는 공부에 힘쓰지 않았다. ‘초사’는 글자 그대로 초나라 풍의 노래를 모은 책. 굴원(屈原)의 글 25편을 중심으로 제자 송옥(宋玉)의 글 등 몇편이 더 실려 있다. ‘이소경’은 그 첫번째 노래이다. 경(經)이라는 글자가 붙을 정도로 시인들에게 존중받으면서도 까다롭기로 이름난 글이다. 훈장은 어린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내준 셈. 유찬홍은 겁도 없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정두경을 찾아가 숙제를 풀어 달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뜻도 모르고 그저 외우려 애썼지만, 유찬홍은 뜻을 알아야 외우기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찬홍은 그 이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자기 신분의 한계를 이미 알았던 것이다. 정내교는 유찬홍이 국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따금 바둑 두는 사람을 따라 노닐며 그 솜씨를 다 배웠다. 아침에 강할 때마다 훈장은 목찰로 그의 오른쪽 손가락을 치면서,“너에게 글 읽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둑 두기를 좋아하는 그의 버릇은 더욱 심해져서, 바둑 잘 두는 사람들과 겨루더라도 감히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일시에 국수로 치켜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전문적인 기사라든가 교육기관이 없었다.‘이따금 바둑 두는 사람을 따라 노닐며’ 배웠다. 그가 공부하지 않는다고 훈장에게 매 맞으면서도 바둑 배우기에 힘쓴 것을 보면 1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수를 인정하는 제도가 따로 없어, 자타가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이기면 하루아침에 역시 최고가 되었다. 정내교는 어떤 사람의 평을 빌려 “신기(神棋)로 이름난 덕원군(德源君)이 늙게 돼서야 윤홍임(尹弘任)이 겨우 이겼는데, 술부는 (소년 후배로서) 한창 강성한 때의 홍임을 압도했다. 술부야말로 덕원군의 맞수이다.”라고 했다. 바둑천재로 불렸던 이창호가 9세에 조훈현의 제자로 바둑계에 입문해 20세에 국수위를 스승으로부터 쟁취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유찬홍이 술을 잘 마시고 바둑까지 잘 두자 사대부와 고관들이 그를 불러 함께 놀았다.‘다투어 윗자리에 불러 바둑 두는 것을 보려고 해 그저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바둑돌을 하나 놓으면 사람들이 옆에 울타리같이 둘러서 구경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더욱 거만해지고 술만 취했다 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위항시인들의 모임에서만 그를 환영했다. 그럴수록 술을 더욱 즐겨, 집안사람과 살림도 돌보지 않았다. 술이 떨어지면 이따금 남의 집까지 들어가 술을 뒤져 마셨다. 술에 취하면 아무데나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하루는 술에 취해 이웃 여자의 집에 들어갔다가 소송당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귀양갔다. 홍세태는 ‘유찬홍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재주를 지녔지만 쓰일 곳이 없었으므로, 그 울적하고 불평스러운 기운을 모두 바둑과 술에 내맡겼다.(줄임)당세에 쓰였더라면 어찌 남들보다 못했으랴만, 가난하고 천한 생활로 괴로워하다가 끝내 떨치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슬프다.(줄임)술부로 하여금 자기가 전업했던 바둑을 바꾸어 원대한 사업에 힘쓰게 했더라면 볼 만했을 것이다. 어찌 이에서 그쳤을 뿐이겠는가?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사는 세상 오다 정내교는 천재 유찬홍이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지 못해 과거시험도 못보고 바둑이나 두며 살았던 것을 아쉬워했다.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은 생각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바둑을 하찮은 재주로 여기거나 심심풀이로 생각했다. 아무리 잘 두어도 ‘동네바둑’으로나 여겼다고 할까. 유찬홍 이후부터 국수로 인정받는 전문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둑은 병법이나 학문과도 관련돼 사대부들이 즐겼지만, 바둑을 소재로 쓴 글은 많지 않다. 기보(棋譜)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바둑을 소재로 한 글도 많지 않으며, 전문기사를 주인공으로 한 전기도 몇편 되지 않는다. 김윤조 교수는 ‘조선후기 바둑의 유행과 그 문학적 형상’이라는 논문에서 순조(純祖)의 장인으로 대제학까지 지낸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예를 들어 바둑이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소개했다. 수원유수(종2품)로 부임했던 그의 종숙부 김이도는 1813년 3월12일 공무를 처리하고 밤중까지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밀쳐두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김조순 자신은 1819년 동짓달 하순에 ‘기자(者) 김한흥(金漢興), 가자(歌者) 군빈(君賓), 금자(琴者) 익대(益大)’와 사냥꾼 한 사람을 데리고 봉원사로 놀러갔다. 그들을 ‘절기(絶技)’라고 불렀는데, 전문기사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동원되는 연예인이자 한시도 떨어져 있기 힘든 관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01년부터 6년 동안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던 심노숭은 ‘기장 고을에서 서울의 어느 귀인(貴人)에게 1년에 1000벌 이상의 바둑돌을 바친다.’고 기록했다. 심노숭은 그 부당성을 고발한 것이지만, 바둑 열기가 무척 뜨거웠음을 반증한 것이기도 하다. 유찬홍보다 선배였던 삭낭자(索囊子)는 상대가 고수건 하수건 한점만 이기는 삭낭자기법으로 손님을 끌어들여 먹고 살았다. 반면 유찬홍 이후의 국수들은 많은 상금으로 생활을 보장받았다. 보성 출신의 정운창(鄭運昌)은 국수 김종기를 꺾으러 평양까지 걸어가 사흘을 문밖에서 버티며 도전했다가 이겨, 순찰사에게 은 20냥을 상으로 받았다. 어느 정승은 그에게 상화지(霜華紙) 200장을 상금으로 걸기도 했다. 그러나 국수 유찬홍은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술을 마셨으며, 시를 지어 울분을 토했다. 한강 물로 술 못을 삼아 마음껏 고래같이 마셔봐야지. 그런 뒤에야 내 일이 끝나리니 죽어버리면 곧바로 달게 잠들 테지. 그대들도 보았겠지. 이 뜬 세상을 만사가 한바탕 꿈이란 것을. 그는 죽어야 신분 차별이 끝나는 중인이었기에, 술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부귀를 맘껏 누렸던 사대부들은 늘그막에 ‘만사는 일장춘몽’임을 느꼈지만, 그는 차별받는 이 세상이 차라리 ‘한바탕 꿈’이기를 바랬다. 국수가 돼서도 벽을 넘지 못했던 17세기 중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Book Review] 조선 최고 문장가 박지원 21세기 부활

    “나는 이것이 바로 저것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해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은 산천이며 기후가 중국 지역과 다른데도 글 짓는 법과 문체를 중국에서 본뜬다면 아무리 고상해도 거짓될 뿐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이덕무의 문집 ‘영처고’의 서문으로 쓴 글이다. 조선시대 편협한 사고방식과 고루한 중국 답습에 빠져 있던 양반네들에게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는 그의 일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의 문집 ‘연암집’ 완역판(신호열·김명호 옮김, 돌베개 펴냄)이 처음으로 나왔다. 남북한을 통틀어 연암집 완역은 이번이 처음으로 연암 연구사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3권으로 정리된 이 책에는 연암의 한시, 서간문, 비문, 서문, 발문, 소품문, 한문소설 등이 빠짐없이 수록돼 있다. 특히 198행에 이르는 장편 한시 ‘해인사’를 비롯,40여편의 한시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완역된 연암의 문집은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이 있다. 또 1960년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번역·출간한 ‘박지원 작품 선집’이 연암 연구에서 일종의 텍스트 역할을 했지만 부족한 면이 많았다. 이번 완역판은 한학의 대가인 우전 신호열(1914∼1993) 선생이 1978년부터 ‘연암집’ 강독회를 열면서 구술한 국역 초고를 그의 제자인 연암 전문가 김명호(54) 성균관대 교수가 정리해 세상에 선을 보였다. 사제간의 학문적 열정이 연암집 완역이라는 결실을 일궈낸 것이다. 김 교수는 고전 국역 전문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의 의뢰를 받아 2년여 작업 끝에 2005년 ‘국역 연암집’(전2권)을 발간했으나 이번에 4000여개의 주석을 붙이고, 교정까지 더해 전3권의 완역판을 새로 냈다. 김 교수는 연암집 완역과 함께 연암의 소설 10편, 산문 75편, 시 15수 등 모두 100편의 대표작을 뽑아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는 제목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을 동시에 펴냈다. 김 교수는 ▲문예성, 역사성, 현대성 ▲개성, 인간미 ▲시기별 안배 등을 작품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연암이 조선 후기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였던 점을 감안,‘호질’ ‘허생전’ ‘일야구도하기’ 등의 소설을 1부로 구성했다. 2부에 서문, 비문, 서간문 등 연암의 대표적인 산문들을 배치했다.3부는 한시들로 마무리했다. 연암집 완역판이 전공자들을 위한 학습서인 반면 ‘선집’은 일반인들이 부담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보급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김 교수는 “연암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이 그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강렬한 매력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탈근대를 외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현대에도 연암의 문학은 전혀 낡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연암집 완역에 이어 곧 ‘연암 평전’까지 완성할 예정이어서 연암 박지원의 삶과 문학이 어떤 형태로 그려질지 주목된다. ‘연암집’ 545∼593쪽, 각권 2만 5000원.‘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554쪽,1만 8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9) 조선백자 기름받이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9) 조선백자 기름받이

    TV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 국왕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종종 고려청자가 등장합니다. 조선시대라도 국왕이라면 귀한 청자 술병과 술잔쯤은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조선왕조로서는 고려청자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이라기보다는 극복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소품 담당자가 잘 몰랐던 탓이겠지요. 고려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조선의 지배층에게 화려한 고려청자는 과거의 소수 귀족이 자행한 부패의 산물로 낙인찍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가 앞장서 장려한 백자에는 구시대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백성들에 대한 정치적 약속이 담겨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장식을 배제하고 덤덤하게 절제와 품격을 드러내는 조선백자는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이념의 형상화니, 선비다운 절조와 자부심이니 하고 다양한 의미가 부여됐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백자에도 서민적인 생명력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소탈하고 재미있다는 것이 조선 후기 백자가 가진 특징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지만 백자 기름받이는 그런 단계를 훨씬 뛰어넘은 듯합니다. 여성의 신체곡선과 가장 닮았다는 고려청자 매병(梅甁)의 풍만한 어깨선조차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기름받이는 젊은 여성의 가슴을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했습니다. 기름받이란 글자그대로 등잔 아래 걸어 두어 심지에서 떨어지는 기름이나 찌꺼기를 받는 데 쓰는 일종의 그릇입니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노끈을 달아 등잔대에 매달 수 있도록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지요. 처음엔 쇠뿔을 자른 뒤 속을 파내어 만들기도 했지만, 오래 쓰면 기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아 나중엔 백자로 만든 것이 유행했습니다. 백자 기름받이는 침을 뱉는 그릇과 비슷한 모양의 타구형(唾具形)도 있었다지만, 유방형(乳房形)이 더욱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가슴 모양의 기름받이는 뒤집어 보지 않고 등잔대에 제대로 걸어 두었을 때는 형태의 사실성을 별반 느낄 수 없다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도공은 어떻게 하면 막 성숙한 여인의 가슴과 똑같이 빚을까 고심했겠지만, 쓰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꼭 기름받이를 염두에 두고 한 얘기는 아니겠지만,“중·후기 백자는 간결·소탈하고 단정·정직하며 유머와 해학이 있다.”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설명은 그래서 돋보입니다. 나아가 가슴 모양으로 빚은 조선백자 기름받이는 등잔대가 쓰여질 절조 있는 선비의 사랑방이나, 마당 깊은 안채에서도 본연의 자연스러운 인간미를 잃지 말라는 익살 속에 교훈을 담아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dcsuh@seoul.co.kr
  • 포스트모더니즘 거장 보드리야르 잠들다

    |파리 이종수특파원|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적 이론가인 프랑스 사회학자 겸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6일(현지시간) 파리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78세. 그는 실재와 가상세계,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독창적인 ‘시뮬라시옹(가장)’ 이론을 통해 현대사회를 탁월하게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9년 프랑스 서부 랭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독일학을 전공했지만 전공에 맞는 학과가 없어 1966년부터 낭테르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당시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배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68년 5월 혁명을 경험한 뒤 1970년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한 ‘소비의 사회’를 출간하면서 마르크시즘과 이별한 뒤 독자 노선을 걸었다.이 시기 “대중은 더 이상 사회질서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모자”라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또 삶을 변화시키려는 좌파의 주장이나 정치적 선택에 무게를 두던 지식인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때문에 정치적 허무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전통적인 과학사상에 대한 비판과 보이는 세계 이면의 잠재성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학문적 방법론을 개발했다. 때문에 그의 사상체계는 ‘거리낌없는 지식인’‘유토피아의 파괴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단정적으로 분류하기 힘들다. 그는 ‘시뮬라시옹’과 ‘유혹’을 주요 징검다리로 해서 소비가 중심이 된 현대사회와 그를 지배하는 미디어 비판에 앞장섰다.‘시뮬라시옹’은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고, 그 결과물이 ‘시뮬라크르’다.“현대 사회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복제 시대”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상품을 소비할 때 그 기능이 아니라 그를 통한 위세·권위 등의 기호를 소비하는 셈이다. 그의 시뮬라시옹 이론은 70년대 이후 문화이론과 미디어·예술·사회 분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그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글쓰기 외에 사진작가로도 유명하다. 도쿄와 서울에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2005년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vielee@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전기를 지으면서, 이 두 지역의 민속을 이렇게 구별하여 설명하였다.“서울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종로 남쪽부터 남산까지가 남부이다. 장사꾼과 부자들이 많이 산다. 이익을 좋아하고 인색하면서도, 수레와 집은 서로 사치를 다툰다. 백련봉 서쪽부터 필운대까지가 북부이다. 대체로 가난하고 얻어먹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의협스러운 무리들이 자주 있어, 의기로 사귀어 노닐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흔쾌히 허락하고 남의 어려움을 잘 도왔으며 근심을 함께 하였다. 시인 문장가들이 계절을 따라 노닐며 자연속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마음이 내키면 시를 읊었는데, 많이 짓는 것을 자랑하고 곱게 짓기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 북촌은 고관들이 주로 사는 가회동, 안국동, 재동 일대를 가리키지만 북부는 중인과 경아전들이 주로 살던 인왕산과 백악이 이어진 산자락을 가리킨다. ●‘물좋은´ 내수사 경아전 자리 스스로 물러나 임준원은 대대로 서울 북부에 살았던 경아전이다. 신선 같은 모습에다 말솜씨까지 좋았는데, 젊었을 때 최기남(崔奇男·1586∼1669)의 서당에서 시를 배웠다. 최기남은 집이 너무 가난해 선조의 셋째 사위인 신익성(申翊聖)의 궁노(宮奴)가 되었다가 한문을 배워 서당 훈장으로 이름이 났던 위항시인이다. 임준원 역시 시를 잘 짓는다고 칭찬들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한데다 늙은 어버이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실용성 없는 한시만 계속 배울 수는 없었다. 정내교는 그가 큰 돈을 번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임준원은) 드디어 뜻을 굽히고 내수사(內需司)의 서리가 되었다. 임용되어 부(富)를 일으키니, 재산이 수천냥이나 모아졌다. 그러자 ‘내겐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탄식하더니,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 집에서 지냈다.” 내수사(內需司)는 조선시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개국 초에 함흥지역을 중심으로 한 태조 이성계 집안의 사유재산과 고려왕실에서 물려받은 왕실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으므로, 본궁(本宮)이라 불리기도 했던 관청이다. 본래 면세특권을 부여받은 내수사전(內需司田)과 각 지방에 흩어져 일하는 수많은 노비·염전 등을 보유한데다, 왕실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계속 확대했다. 그 폐단이 커지자 “군주는 사재(私財)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워 내수사를 없애자고 건의했지만,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어놓으려는 왕은 하나도 없었다. 신익성의 아버지 신흠(申欽)은 영의정까지 지내 국가재정에 훤했는데,‘휘언(彙言)’이라는 글에서 “내수사는 수입이 국가의 일반재정과 맞먹었다. 그곳의 형세가 안전해 양민(良民)과 사천(私賤)이 많이 도망해 들어갔으며,(그 재정은 內需가 아니라) 태반이 내수(內竪)의 개인적 용도로 허비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방대한 재정을 왕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사에 관련된 개인들이 사취한다는 뜻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내수사 노비들이 나라 안에 돌아다니며 거둬들인 돈과 베를 내시들이 주관한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막연히 알지 못해, 임금의 사치심만 날로 더하게 한다.”고 폐단을 논했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그곳의 관원 10명은 모두 왕의 심복인 내시였다. 그러다보니 서리 8명이 방대한 재정을 자기 집안의 살림처럼 운용하며 많은 재물을 빼어돌린 것이다. 내수사에 관련된 죄인을 잡아가두는 감옥인 내사옥(內司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비리가 많았는데, 그나마 1711년에 폐지되었다. 서리도 전문직이기 때문에 한문을 잘 알아야 했고, 선발시험도 보았다.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9월3일 기록에 “전에는 서리를 임명하기 위해 고강(考講)·제술(製述)·서산(書算)을 시험한 뒤에 후보자로 참여시켰는데, 지금은 해이해졌다.”는 구절이 있다. 언제부턴가 읽기, 짓기, 쓰기, 셈하기 등을 시험 보아 적임자를 뽑지 않고, 청탁에 의해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아전 이윤선(李潤善·1826∼1869)이 26년 동안 호조에서 근무하며 기록한 ‘공사기고(公私記攷)’를 분석하여 ‘조선후기 경아전 서리 연구’라는 논문을 쓴 원재영 선생은 호조 아전들이 임용되기 위해서 보통 1500냥 내지 1900냥을 주었다고 했다.‘탁지지(度支志)’에 기록된 서리의 월급은 무명 3필, 쌀 1석5두, 보리 1두5되에 불과했다. 이윤선은 자신의 서리직을 정석찬에게 거금 1800냥에 팔았다가 6개월 뒤에 다시 1900냥을 주고 복직하였다.1847년부터 1855년까지 9년 동안에만도 부동산 투자에 1000냥을 들였으며, 아들에게 공부방을 마련해주고 독선생을 모셨다.11살 난 아들 용석(容錫)이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다고 대견해 한 것을 보면, 아들에게는 사대부 못지않은 교양까지 갖춰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호조 아전들은 다양한 명목의 화폐나 현물을 수시로 받았다고 했으니, 고관 못지 않은 요직이었다. 내수사가 있던 마을을 내수삿골이라 불렀는데, 인왕산 밑자락인 지금의 종로구 내수동이다. 종합청사 뒷길이 내자동길인데, 내수동에서 내자동을 거쳐 사직단으로 이어진다. 내자시(內資寺) 역시 궁궐에서 사용하는 식품과 옷감을 조달하던 관청이어서 경복궁 앞에 있었다. 관원들은 승진하면 다른 관청으로 전근하지만 아전들은 평생 한 관청에 있었으며, 대를 이어서 그 일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경복궁 앞의 관청에 소속된 아전들은 출퇴근하기 좋은 인왕산에 많이 살았다. ●가난해 경조사 못 치르는 이들도 지원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어떻게 수천금을 벌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서리직을 팔았다는 기록도 없고,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남부의 중인들 같이 이익을 좋아하거나 사치하지 않았으며, 인색하지도 않았다. 정내교는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큰 돈을 벌어들인 방법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설명하였다.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는 집에서 지냈다. 문학과 역사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날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찬홍·홍세태·최대립·최승태·김충렬·김부현 같은 시인들이 있었다.” 임준원은 좋은 날이나 경치가 아름다워질 때마다 여러 사람을 불러모았다. 시를 짓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흩어졌다. 정내교가 “서울에서 재주가 좀 있다고 이름난 사람들이 그 모임에 끼이지 못하게 되면 부끄럽게 여겼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름난 위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임준원의 집에 자주 모였던 시인들은 대부분 궁노(宮奴) 최기남의 제자들이다. 임준원은 물론 형조 아전 최승태는 그의 아들이고, 김부현은 그의 외손자이다. 홍세태는 역관, 김충렬은 홍문관 서리, 유찬홍은 역관이었다. 문학사에서는 이들의 모임을 낙사(洛社)라고 불렀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 가운데 가난해서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찾아왔다. 평소에도 그의 집을 드나들며 어버이처럼 모시는 자가 몇십명이나 되었다. 그가 육조거리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관리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욕을 해대는데, 그 여자는 슬프게 울기만 했다. 그가 그 까닭을 묻고는 “그까짓 얼마 안되는 빚 때문에 여자를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불량배를 꾸짖었다. 그 자리에서 빚을 갚아 주고는, 차용증을 찢어버린 채 가버렸다. 여자가 쫓아가면서 이름과 주소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가르쳐 주지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부모가 죽은 것 같이 곡을 했다. 더 이상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되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떠나셨소?” 하고 우는 자들도 많았다. 한 늙은 과부가 와서 상복을 만들어 놓고 갔는데, 육조거리에서 구해 준 그 여자였다. 정내교뿐만 아니라 성해응도 임준원의 전기를 짓고, 홍문관 대제학 남유용도 지었다. 남유용은 정내교의 전기를 읽어보고 ‘요즘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라면서 전기를 지었다. 첫 줄에서 ‘호(豪)’라고 표현했는데, 부호(富豪)라는 뜻도 되지만 호걸(豪傑)이라는 뜻도 된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도왔던 그의 이름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남유용의 ‘임준원전’을 통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최기숙 지음

    한문 문체에 ‘전(傳)´이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독특한 행적을 기록하고, 거기에 교훈적인 내용이나 비판을 덧붙인 글을 가리킨다.‘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최기숙 지음, 서해문집 펴냄)는 조선 후기 문인들이 남긴 ‘전´ 중에서 중인·평민·천민이 주인공인 것들을 모아 ‘전´의 작가와 주인공들이 나눴을 법한 대화를 재구성한 책이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홍양호·김조순 등 권세 있는 집안 사람들이 남긴 ‘전´뿐만 아니라 성대중·이덕무 같은 서얼 출신의 저자, 조희룡·유재건 등 중인 출신과 정래교·김희령·김낙서 같은 평민 작가의 ‘전´까지 두루 살핀다. 타고난 지위와 명예가 없는 조선의 마이너리티는 사대부 문인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 중에는 학식이나 문장, 인품이 사대부 못지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풍류패를 이끈 이패두와 거지 두목의 이야기를 담은 성대중의 ‘개수전´, 미인을 돌처럼 본 미소년 이야기인 조희룡의 ‘천흥철전´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1만 1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김종면 기자의 책 안 세상 책 밖 풍경] 진화하는 출판마케팅

    “엉엉…. 네가 외국에 오래 살더니 미쳤구나. 감히 나와 이혼해?” 지난달 서울 종로 영풍문고 매장을 찾은 사람들은 한 여성의 울부짖음에 화들짝 놀랐다. 울음의 주인공은 배우 정유란씨. 미국 작가 리즈 펄의 자전적 에세이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펴낸 출판사 여름언덕이 책 홍보를 위해 마련한 모노드라마에서 깜짝 연기를 펼친 것이다. 출판사들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저자 사인회나 미술전시 같은 이벤트를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서점 매장을 연극무대로 삼기는 처음이다. 책만 잘 만들면 된다는 것은 옛말. 이제 신간홍보가 책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이를 반영하듯 출판마케팅 기법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책 홍보를 위해 별도의 비디오북까지 만들어 파는 미국 등의 수준에는 못미치지만 우리 출판마케팅 기법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인터넷 마케팅이다. 네이버 등 주요 포털·검색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마케팅은 신문의 서평이나 광고를 보완하는 새로운 마케팅 방식으로 뿌리내렸다. 특히 대형 출판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얼리 리뷰어(early reviewer)’제도는 최근 부쩍 주목받고 있다. 출간되기 전 초고나 가제본 상태의 책을 읽고 인터넷에 후기를 올려 원고편집과 마케팅에 참고하도록 하는 이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위즈덤하우스다. 2005년부터 ‘도서평가단’이라는 이름으로 얼리 리뷰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위즈덤하우스는 현재 70명의 회원(위즈덤피플)이 홈페이지내 북로그에 서평을 올리고 있다. 어린이책 브랜드인 스콜라의 경우,50명의 초등학생이 별도로 ‘도서탐험대’를 만들어 활동중이다. 위즈덤하우스의 정은선 인터넷 사업팀장은 “얼리 리뷰어는 단순한 모니터가 아니라 ‘필드 마케터’의 역할을 하는 자연스러운 입소문 군단”이라며 이들의 활동이 매출신장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얼리 리뷰어의 글을 과연 진정한 의미의 서평이라 할 수 있을까. 전문가의 편협한 ‘터널 비전(tunnel vision)’으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객관적인 정보와 지식을 전해주는 서평 본래의 기능을 다하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변형광고’나 ‘유사광고’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요즘 출판사 사람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종이신문 서평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북 섹션은 아무도 안 읽는다.”는 자조의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만큼 책 소비자들이 종이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상황이 그러니 출판 마케터들이 인터넷 서평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얼리 리뷰어의 글이 주목받는 서평 대중화 시대, 날로 영악해지는 출판마케팅은 우리에게 또 어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까. jmkim@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경기 파주 고령산

    [산이 좋아 산으로] 경기 파주 고령산

    옛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새 것을 찾는 마음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할 때가 많다. 산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잘 알려진 산이나 잘 닦인 산길을 찾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 길이나 옛날에 걷던 한적한 오솔길이 그리워지곤 한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영장리와 경기도 양주시 백석면의 경계에 있는 고령산(622m)은 한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 주능선이 북동쪽으로 뻗어가면서 양주시의 말머리고개를 경계로 챌봉, 장흥계곡과 이웃하고 북서쪽으로는 박달산과 인접해 있다. 남쪽으로도 긴 능선이 뻗어 내려 형제봉을 지나 고양시 목암고개까지 연결되지만 군사시설 때문에 접근하지 못한다. 산세가 부드럽고 조망이 좋아 정상 앵무봉에 서면 불국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등 서울의 주요 산군들이 펼쳐진다. 산기슭 나지막한 곳에는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된 고찰 보광사가 있다.1634년 주조한 보광사 범종과 조선 후기 편찬된 ‘양주목읍지’에는 각각 ‘고령산(高嶺山)’과 ‘고령산(高靈山)’이라 표기돼 있으나 ‘한국사찰전서’에는 두 가지 표기가 모두 실려 있다. 고령산은 계명산이나 개명산(開明山) 등 지도마다 다른 이름으로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아 지난해 산림청은 ‘고령산’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줄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고령산에는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산길들이 나 있다. 그 중에서 보광사를 들머리로 삼는 경우가 가장 많다. 보광사를 지나 도솔암을 거쳐 앵무봉까지 올랐다 원점회귀할 수도 있고, 반대편 서쪽 능선을 타고 내려올 수도 있다. 보통 2∼3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주변 산군으로 능선 산행을 길게 이어갈 수도 있다. 산길이 험하지 않고 부드러운 육산이라 산악자전거 코스로도 인기가 높다. 서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통해 헬기장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취재는 보광사에서 출발해 도솔암을 거쳐 앵무봉에 올랐다가 서쪽 능선을 타고 다시 보광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소개한다. 산행 들머리가 되는 보광사에 닿으려면 되를 엎어놓은 것처럼 가파르다는 됫박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벽제삼거리에서 서울시립공동묘지를 지나 됫박고개를 넘어서자마자 보광사 입구에 닿는다. 사찰 안에서 중앙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고령산을 배경으로 보광사 호국인불이라 불리는 거대한 석불입상이 서 있다. 그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그마한 다리 보광3교를 건너면 도솔암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계곡을 끼고 그대로 능선을 따라 오르면 된다.25∼30분 정도 적당히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도솔암이다. 낙엽 깔린 고운 흙 위에 살짝 눈 내린 오솔길, 빈 나뭇가지 아래 갈지자를 만들며 오르는 맛이 제법이다. 도솔암까지 가는 동안 두 번 정도 널찍하게 쉴 공간이 있다. 아늑한 둥지 같은 도솔암에는 이름처럼 몇 그루 단아한 자태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등산로 인접 지역이 지뢰매설 지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길로만 가야 한다. 도솔암에서 20분쯤 더 오르면 헬기장이 나온다. 거기 서면 앵무봉 정상부가 동그랗게 솥뚜껑을 엎어 놓은 듯 보인다. 나뭇잎을 말끔히 털어낸 참나무 잔가지가 빽빽하게 들어선 맨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숨을 한번 고르고 정상부까지 5분 남짓 꽤나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 된다. # 여행 정보 보광사 입구에는 산채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그 중 맨 끝에 있는 꼭대기산장(대표 유진명)이 유명하다. 산채정식 8000원, 겨울철 별미 산토끼탕은 4만 5000원, 꿩탕은 4만원이다. 페치카 장작불에 직접 구운 군고구마와 커피는 무료다. 꼭대기산장 031-948-7066. 글 사진 이영준(월간 MOUNTAIN 기자)
  • [K-리그] 단일리그 복귀·6강PO… 팔꿈치 가격땐 즉시 퇴장

    ‘확 달라졌어요∼!’ 올해 K-리그의 가장 큰 변신은 단일리그로 복귀했다는 점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최근 3년 동안 시행됐던 전·후기리그를 폐지했다. 그동안 각 팀들이 전기 아니면 후기에 집중하는 바람에 시즌 막판 흥미가 떨어졌던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팀당 26경기씩 모두 182경기가 정규리그로 열린다. 이와 함께 포스트시즌 티켓이 2장 더 늘었다.4강 플레이오프에서 6강 플레이오프로 확대된 것. 이에 따라 ‘가을 잔치’는 모두 6경기가 됐다.1위는 홈앤드어웨이로 열리는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한다.4·5위와 3·6위 팀들이 단판승부로 6강 플레이오프를 갖는다. 여기에서 승리한 팀들이 2위와 격돌하기 위해 다시 경기를 펼친다. 전기와 후기 사이에 개최하던 컵 대회도 정규리그와 병행해 치르게 된다. 새달 14일 킥오프하는 컵 대회는 주중에, 정규리그는 주말에 개최하는 방식이다.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성남과 전남은 6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한다. 나머지 12개 팀이 2개조로 조별리그를 펼치며 플레이오프를 통해 우승팀을 가린다. 플레이오프를 포함, 모두 65경기가 열리며 결승전은 단판 승부. K-리그는 아시안컵과 FIFA청소년(20세 이하)월드컵이 열리는 7월 잠시 중단됐다가 8월4일에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재개된다. 심판 판정은 더욱 엄격해진다. 선수 안전을 위협하는 팔꿈치 가격 등은 즉시 퇴장당할 수도 있다.고의적인 경기 지연 행위에 대해서도 즉시 경고 조치를 취한다. 또 상대 선수에게 징계를 내리라고 심판에게 요구하는 선수는 경고를 받게 된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원과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 자손은 정5품까지의 관직에 한정한다.”고 규정했다. 양첩 자손은 그나마 한정된 벼슬에라도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천첩 자손은 벼슬할 기회가 없었다. 뛰어난 서얼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정조는 서얼금고법에 해당되지 않도록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잡직(雜織) 관원을 뽑았다. 규장각을 설치한 뒤에,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정무직이 아니어서 기득권층의 반대도 없었고,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서얼 학자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효과도 있었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네사람이었다. 당대에 가장 명망있는 서얼 출신의 이 네학자를 4검서라고 불렀다. 유득공은 조선의 문물과 민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 2권1책을 지었으며, 대를 이어 검서로 활동했던 그의 아들 유본예가 부자편이라고 할 수 있는 2권2책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지었다. 바로 서울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들 부자는 필운대 꽃구경을 서울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유득공은 ‘경도잡지’ 유상(遊賞)조에서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 밖의 버들,(무악산)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水石)을 찾아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대부분이 인왕산 일대이다.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에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유득공이 어느 봄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 구경을 하다 시를 지었다.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빠졌으니 육각봉 어구에서 또 한차례 술잔을 잡네. 날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 새벽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 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 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뜸이라. 아스라한 봄날 도성 사람바다 속에서 희끗한 흰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유득공은 역시 검서였던 친구 박제가와 늦은 봄이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을 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일품이었다. 육각현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시인은 그렇게 새해를 시작하고, 또 한해를 보내며 늙어간다. ●정조도 필운풍류에 취하다 한세대 앞선 시인 신광수는 도화동에서 복사꽃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구경했다. “필운대 꽃구경이 장안의 으뜸이라.(雲臺花事壓城中)” 하고는,“삼십년 전 봄 구경하던 곳을/다시 찾은 오늘은 백발 노인일세.(三十年前春望處,再來今是白頭翁)”라고 끝을 맺었다. 반악은 진(晉)나라 때의 미남 시인인데, 그도 나이가 들자 흰머리가 생겼다. 자신은 서얼 출신이라 벼슬 한번 못하고 늙었지만, 반악 같이 잘 생기고 재주가 뛰어난 시인도 나이 들자 흰머리가 생기지 않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고전들은 모두 검색이 가능하다. 한글로 번역한 책에서 ‘필운대’ 제목을 찾으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시 2편과 이덕무가 지은 시 1편만 나온다. 제목은 아니지만 필운대를 노래한 시는 다산 정약용과 정조대왕의 작품이 더 있다. 모두 유득공 부자가 필운대 꽃구경을 장안의 명승으로 소개한 정조-순조 시대 인물들이다. 이 당시에 필운대 꽃구경이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이름난 유흥지였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필운대 꽃구경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백단령 차려 입은 사람은 모두 시 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 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에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필운화류(弼雲花柳)’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은 다른 시들과 같이 필운대의 번화한 꽃구경 인파를 노래했다. 뒷부분에선 그 가운데 시인과 독서인을 찾아내고, 장안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하는 속에서 글 읽는 젊은이에게 벼슬을 주어야겠다는 왕자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이 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왕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지 않아 원문 검색만 가능한 문집 가운데는 위항시인들이 지은 시도 많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지 못한 위항인들의 시까지 합쳐 60년마다 편집한 ‘소대풍요(昭代風謠)’나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엄청난 양의 필운대 시가 실려 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해마다 수천명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하며 시를 짓기에 분량은 많아졌지만, 해마다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운대풍월’이란 말 속에는 천박한 풍월, 판박이 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의정 채제공의 화원 구경기 이 시대에 필운대풍월뿐만 아니라, 꽃구경을 하고 산문으로 기록하는 유행도 있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도성 안팎의 화원에 노닐며 지은 글이 여러편 있다. 필운대 부근의 조씨 화원을 감상하고 ‘조원기(曹園記)’를 지었다. 주인 조씨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심경호 교수는 “조하망(曹夏望)의 후손이었던 듯하다.”고 추측하였다. 계묘년(1783) 3월10일, 목유선과 필운대에서 꽃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가마를 타고 갔더니 목유선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필운대 앞 바위에 자리를 깔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얼마 있다가 목유선이 이정운과 심규를 이끌고, 종자에게 술병을 들게 하여 사직단 뒤쪽으로 솔숲을 뚫고 왔다. 처음에는 필운대 꽃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모였다. 그러나 인파가 몰려 산속이 마치 큰 길거리 같이 번잡해지자, 채제공은 곧 싫증이 났다. 동쪽을 내려다보자 서너곳 활터에 소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동산 안의 꽃나무 가지끝이 은은히 담장 밖으로 나와 있어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목유선에게 “저기는 반드시 무언가 있을 거야. 가보지 않겠나?”고 물었다.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널빤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점잖은 손님들이 꽃구경을 하겠다고 들어서자 주인이 집 뒷동산으로 인도하였다. 화원에는 돌층계가 여덟개쯤 깔려 있었는데, 붉은 꽃·자주 꽃·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항주·윤상동 같은 관원들도 꽃구경하러 왔다가 채제공이 조씨네 화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따라와서 술잔을 돌리고 꽃을 평품하며 시를 지어 즐기느라고 달이 동쪽에 뜬 것도 몰랐다. 이듬해 윤3월13일에도 채제공은 친지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육각현 아래 조씨네 화원에 찾아가 꽃구경을 했다. 석은당에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눕히고 채발을 뽑아 서너 줄을 튕겨 보았다. 곡조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윽한 소리가 나서 정신이 상쾌해졌다. 얼마 뒤에 조카 채홍리가 퉁소 부는 악사를 데리고 와서 한두곡을 부르게 하자, 술맛이 절로 났다. 채제공은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퉁소 소리에 맞춰 노래하였다. “아양 떠는 자는 사랑받고, 정직한 자는 미움을 사는구나. 수레와 말이 달리는 것은 꽃 때문이지. 소나무야 소나무야. 누가 너를 돌아보랴?” 모두들 맘껏 흥겹게 놀다가 흩어졌다. 채제공은 북저동 명승에 노닐고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를 지었다. “도성의 인사들이 달관(達官·높은 벼슬아치)에서 위항인에 이르기까지 노닐며 꽃구경을 했다.(줄임)국가의 백년 승평(昇平)의 기상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위항인들의 경제력이 사대부 같이 되자, 유흥문화도 함께 즐겼다는 뜻이다.(화원 이야기는 심경호 교수가 쓴 논문 ‘화원에서 얻은 단상-조선후기의 화원기’를 많이 참조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책꽂이]

    ●현대 정신의학 잔혹사(앤드루 스컬 지음, 전대호 옮김, 모티브 펴냄)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정신과 의사는 ‘미친 의사’나 수용소를 지키는 ‘벌레소굴의 의사’ 정도로 인식됐다. 미국 뉴저지주의 트렌턴 주립병원 원장을 지낸 이 책의 주인공 헨리 코튼이야말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의사인지 모른다. 코튼은 정신질환의 원인이 신체 부위의 국소 감염이며 이것이 일으킨 패혈증을 제거해야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소신에 따라 코튼의 병원에서는 환자들로부터 수천개의 치아를 뽑았고 수백건의 편도절제술이 이뤄졌다. 의학계의 새로운 치료법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이 책에는 인간의 정신을 의학의 실습도구로 삼은 의사들의 잔혹한 이야기가 실렸다.2만 1000원.●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한영우 등 지음, 푸른역사 펴냄) 그동안 학계에서는 실학을 주자학이나 성리학과 반대되는 학문으로 이해해온 게 사실이다. 실학을 근대지향, 민족지향, 실용지향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견지해온 것이다. 이런 시각에는 조선시대 자체를 ‘암울한 시대’혹은 ‘봉건사회’로 보려는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이같은 생각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학이 봉건과 근대를 가르는 잣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 다시 말해 근대 찾기에 매몰돼 실학을 오해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실학의 개념과 본질을 밝힌 연구서.1만 6500원.●빈이 사랑한 천재들(조성관 지음, 열대림 펴냄)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빈을 가리켜 “2000년에 걸쳐 국가를 초월한 수도”라고 했다.18세기에서 20세기 초, 빈은 유럽 최고의 예술가와 지성들이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경쟁하는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였다. 이 책은 몽환적 에로티시즘의 화가 클림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음악가 모차르트와 베토벤,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 오토 바그너 등 빈에서 활동했던 천재 6명의 삶을 다룬다.1만 6000원.●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정민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변동을 다룬 책. 한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조선의 18세기를 문화사적인 의미에서 ‘벽치(癖痴)의 시대’로 규정한다. 무엇인가에 미친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어간 시대라는 뜻이다. 관상용 집비둘기를 키우면서 비둘기에 관한 잡다한 기록들을 모아 ‘발합경’이란 경전을 지은 유득공, 밀랍으로 매화를 만드는 데 빠진 이덕무,‘옥해(玉海)’라는 200권짜리 백과사전을 제몸처럼 아낀 이의준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2만 3000원.●행복은 창문으로 들어온다(김현숙 지음, 꽃삽 펴냄) 척수성 근위축증(SMA)에 걸려 사망선고를 받은 아들 임해성군을 헌신적인 사랑으로 건강하게 키우는 어머니의 자전적 기록. 모든 것을 이기는 모성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처음에는 아이가 죽을까봐 두려웠고 그 다음에는 장애아가 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 다음에는 장애인을 낳았다는 사실이 나를 죄인으로 살게 했다.”고 말한다. 해성군은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의 실제 주인공.1만원.
  • [신나는 과학이야기] 공룡부터 곤충까지 없는게 없네

    [신나는 과학이야기] 공룡부터 곤충까지 없는게 없네

    지구의 나이는 몇 살일까? 인간이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지 몇 년이나 되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고, 각종 동식물과 만나고 싶다면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으로 가보자. 국내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자연사박물관인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는 지구의 생성과정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 광물, 화석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공룡은 엉덩이 뼈의 모양으로 용반류와 조반류로 나눌 수 있고, 먹이의 종류로 육식 공룡과 초식 공룡으로 나눌 수 있다. 외관상으로 육식 공룡과 초식 공룡을 구분하려면 이빨이나 발톱의 모양을 비교해보면 된다. 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육식 공룡은 고기를 잘 찢을 수 있는 이빨과 먹잇감을 공격하기 쉬운 뾰족한 발톱을 가지고 있다. 반면 안킬로사우루스와 같은 초식 공룡의 이빨은 풀을 잘 뜯어먹을 수 있는 형태이다. ●명왕성은 왜 태양계 행성에서 제외됐을까 2006년 8월24일 국제천문연맹(IAU)은 명왕성을 태양계 행성에서 제외하고,‘소행성 134340’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국제천문연맹이 내린 행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르면, 행성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충분히 큰 질량을 가짐으로써 자체 중력에 의해 둥근 모양을 지니며, 자신의 궤도 영역에서 중력적으로 지배적이어서 주변의 다른 천체들을 제거한 천체이다. 명왕성은 자신의 궤도 가까이에 있는 카이퍼대(Kuiper Belt) 천체를 끌어들일 만큼 충분한 중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행성에서 제외돼 왜소행성(矮小行星,dwarf planet)으로 분류됐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어떤 화석일까 온도가 매우 높은 마그마의 바다였던 원시지구에 원시비가 내려 원시바다가 형성되었고, 이후 시아노박테리아(남조류)가 산소를 만들어내 다양한 생물이 번성할 수 있게 됐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는 시아노박테리아의 표면에 세립의 퇴적물 입자가 한층 한층 쌓여 층모양의 구조를 이루는 화석을 말한다. 지구 생명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열쇠로 알려져 있어 더욱 유명하다. 세계 여러 곳의 후기 선캄브리아대 지층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원생대층에서 발견된다. ●곤충이 거대해질 수 없는 이유는 영화에서 거대한 곤충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곤충은 거대해질 수 없다. 곤충은 단단한 외골격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몸집의 크기가 커지면 외골격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따라서 내부 근육으로 외골격을 지탱하기 힘들게 되어 곤충이 거대해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곤충은 폐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기문(숨구멍)을 통한 기관호흡을 한다. 만약 곤충의 몸집이 거대해진다면 이러한 호흡 방식으로는 충분히 호흡하기 어렵게 된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가는 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지하철 2호선 신촌역 혹은 3호선 홍제역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방문할 수 있다. 홈페이지(http://namu.sdm.go.kr)나 전화(02-330-8899)로 문의하면 된다. 지구환경관, 생명진화관, 인간과 자연관의 관람을 통해 지구의 신비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김경은 영동중학교 교사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중인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권율과 이항복의 집이 필운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이다.1537년 3월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用卿)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中宗)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한양 주산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 공용경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이름 지었으며,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고 설명했다. 운룡(雲龍)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북악(백악)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 공용경이 지은 이름들은 별로 쓰이지 않았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살았던 집터에 ‘필운대’라는 이름으로 전할 뿐이다. 순조 때의 실학자인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필운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필운대는) 성안 인왕산 밑에 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그는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는 육각현(六角峴)이 있으니, 이곳도 역시 인왕산 기슭이다. 필운대와 함께 유명하다. 종로구 필운동 9번지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필운대 바위 앞에 서면 경복궁과 백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 해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가 없다.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구름만 깊었구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가객 박효관 영의정과 교류 그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 박효관을 비롯한 일행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유원 일행과 함께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기며 한시를 바위에 새기는 일을 돌봐주었던 듯하다. 위항의 가객이었던 박효관은 필운대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마련해 노래 부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유원도 시조에 관심이 깊어 당시 대표적인 시조 45수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했다.20종 이상의 시조집을 조사하여 45수를 뽑아내고 한시로 번역해 감상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므로 위항의 가객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악부(樂府)에도 관심이 많아, 칠언절구 100수의 연작시로 ‘해동악부(海東樂府)’도 지었다.(박효관의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필운대에 모였던 가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정선과 위항시인 칠송정서 풍류 인왕산에 오래 살았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인왕산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1676년 1월3일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부근에 있던 동네이다. 그런 인연으로 젊은 시절에는 난곡(蘭谷)이라는 호를 썼다. 청운동 일대에는 장동 김씨들이 살았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6형제가 다방면에 이름나 6창(昌)이라고 불렸다. 정선은 그 가운데 셋째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에게 글을 배웠다. 김창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제자백가와 시문(詩文)·서화(書畵)에 달통한 학자였다. 정선이 7세였던 1682년에 북악산 남쪽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선이 육각현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후배 조영석이 “농은당에서 육강현을 바라보았다.”고 썼다. 육강현은 육각현을 소리나는 대로 쓴 듯하고, 농은당은 김창흡의 형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집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왼쪽에 크게 그려진 집이 바로 농은당이고, 언덕 너머 솔숲 사이의 큰 바위가 필운대, 그 너머 고개가 바로 육각현이다. 송석원시사 동인 박윤묵이 장혼의 집에 들렸다가 주인이 없어 육각현에 올라가 지은 칠언율시가 전한다. 육각현 위에 세운 칠송정(七松亭)이라는 정자가 바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였다. ●중인, 대원군을 움직이다 칠송처사 정훈서의 소유였던 칠송정에는 송석원시사의 선배인 정내교(鄭來僑·1681∼1759) 때부터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 한동안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가 1840년대에 위항시인 지석관이 수리하여 다시 옛모습을 찾았다. 박기열·조경식·김희령 등이 칠송정과 일섭원에 모였는데, 이 무렵에는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불렸다. 육각현 칠송정이 장안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뒤부터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며, 수많은 중인 서리들이 그의 사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천하장안’으로 불렸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네 사람이었다. 개화파 지식인 박제경(朴齊絅)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그 실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형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오도영을, 호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김완조와 김석준을, 병조에는 박봉래를, 이조에는 이계환을, 예조에는 장신영을, 의정부 팔도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윤광석을 뽑아서 맡겼다. 이들은 모두 대대로 아전 일을 보았던 집안의 후손들이어서 전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당하면 곧바로 판단하여 처리하였다. 대원군이 하나같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박제경은 대원군의 아전 정치를 비판적으로 기록했지만, 이 책에 평을 덧붙인 위항시인 차산(此山) 배전(裵琠)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위항시인으로 이름난 여러 명의 행정능력을 이렇게 칭찬했다. 운현궁에서 신임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민간의 기이한 재주꾼들이다. 윤광석·오도영·장신영 등은 글재주를 사랑할 만하고, 기억력도 놀랍게 총명하였다. 무리 가운데 뛰어나게 민첩하여, 사리를 훤하게 통달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도영과 장신영이 육각현 칠송정시사에 드나들며 시를 지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사업을 벌이던 대원군은 위항시인들의 시사를 격려하기 위해 칠송정을 수리해 주었다. 대원군은 박효관·안민영 등 가객들과도 친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는데, 박효관이 위항시인들보다 더 총애를 받자 칠송정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오횡묵(吳宖默·1834∼?)이 백운동에 집을 짓고 모임터를 옮겼다.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뒷골목이 바로 백운동 골짜기였다. (정선이 인왕산에서 그린 그림들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주말탐구] 윷놀이

    [주말탐구] 윷놀이

    윷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즐겨온 으뜸 놀이다. 윷놀이는 전국에서 일년내내 이어지고, 특히 설날에는 집 안은 물론, 골목마다 윷판이 벌어진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윷놀이가 이처럼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윷패의 우연성과 윷말쓰기의 합리성이 윷판에서 어우러져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때문일 것이다. 윷은 또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며 재미를 더해 왔다. 윷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들여다봤다. 올 설에도 가족끼리 둘러앉아 잡고 잡히는 말 싸움을 하며 함박 웃음을 웃어보자. 윷놀이를 해 본 사람은 말한다. 너무너무 재미 있다고…. 전국종합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유래와 의미 윷놀이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많으나 정설은 없다. 다만 중국의 ‘북사(北史)’‘태평어람(太平御覽)’이란 책에 부여의 윷놀이가 소개돼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윷놀이가 시작됐다고 추측한다. 특히 19세기 중반 ‘동국세시기’에는 고려말 이전에 현행 윷판과 같은 것이 쓰였다고 적혀 있다. 윷판은 29개 밭으로 구성된다.20개는 원으로 9개는 원 안에 십자 모양으로 배열돼 있다. 김문표(1568∼1608)가 ‘중경지’ 사도설조에서 윷판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바깥 둥근 모양은 하늘을, 안의 십자는 땅을, 윷판을 이루는 밭은 별자리를 뜻한다고 했다. 특히 윷판 중앙 밭은 북극성이라 불렀다. 하늘이 땅바닥까지 둘러싼 모양인 셈이다. 윷판·윷말에는 자연의 섭리도 숨어 있다. 윷판에서 말은 북(出口)에서 떠나 동을 거쳐 중앙이나 남, 서로 이동한다. 이는 춘분(春分)·하지(夏至)·추분(秋分)·동지(冬至) 때 태양의 궤도를 본뜬 것이다. 네 윷말은 사계절을 가리키고, 둥근 나무 토막이 엎어지거나 젖혀지는 것은 음양을 나타낸다. 윷패에서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상징한다. 가축의 크기와 빠르기에 따라 윷패의 밭 수와 윷말의 움직임이 결정된 것이다. ●놀이방법의 변화 윷놀이 원칙은 진화를 거듭했다. 윷패가 도·개·걸·윷(사진법)에서 도·개·걸·윷·모(오진법)로 바뀌었다.1950년대부터는 ‘뒷도(백도)’가 생기면서 육진법으로 변화했다. 뒷도란 윷 하나를 특정하게 표시해 이것만 젖혀지면 윷말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뒤로 한밭 물러선다. 예를 들어 도 자리에 있던 윷말이 뒷도를 하면 한 밭 후진해 참먹이(出口)로 직행하는 것이다.‘맞춤나기’도 새로 생겼다. 참먹이에 이른 말이 반드시 도를 쳐야 나가는 규칙이다. 상대방이 뒤를 바짝 쫓다가 오히려 덜미를 잡히거나 끝내 도를 내지 못해 판이 뒤집히는 일도 벌어진다. 강원도에서는 윷 두 개에 각각 ‘서’‘울’이라고 적는다. 두 윷이 함께 젖혀져 개가 되면 윷말을 윷판의 중앙 밭으로 옮긴다. 서울에 대한 동경이 엿보인다. 경상도에서는 ‘자동임신’‘자동유산’ ‘퐁당’ 밭이 있다. 자동임신 밭에 이르면 한 동이던 말이 두 동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말이 들어가면 죽는 자동유산, 퐁당 밭을 반드시 둔다. 높은 수익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안동민속박물관 박장연 학예실장은 “윷말이 윷판을 움직이는 방향도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화투놀이의 시계방향에서 포커놀이의 시계 반대방향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생활양식은 좌측이 우선이라 문서나 가사도 모두 좌서(좌서)로 썼다. 그러나 서양 문물이 도입되고, 한글기록시대로 접어들면서 윷말이 윷판을 돌아가는 방향이 달라졌다고 한다. ●지역 특성 윷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우선 윷의 종류부터 가락윷과 밤윷, 콩윷으로 나뉜다.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는 주로 가락윷을 쓴다. 가락윷에는 장작윷과 싸리윷이 있다. 장작윷은 길이 20㎝, 지름 3∼5㎝의 소나무를, 싸리윷은 길이 10㎝, 지름 2㎝ 싸리나무를 쪼개 만든다. 요즘에는 구하기 쉬운 아카시아나무로도 많이 제작한다. 경북 안동에서는 윷놀이를 할 때 윷판이 없다. 머릿속에 그려놓은 윷판에다 윷말을 놓는 것이다. 이를 ‘건궁윷말’이라 부르는데 윷판 29밭의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충청도에서 가락윷으로 놀 때는 윷 4개 가운데 최소한 하나를, 던지는 사람의 어깨 높이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그러지 않거나 돗자리 밖으로 2개 이상 나가면 ‘낙방’또는 ’낙’이라고 보고 무효로 친다. 밤윷은 전라도와 제주도에서 주로 사용한다. 새끼손가락 정도의 굵기로 길이는 3㎝ 안팎이다. 전라도에서는 윷을 담아 던지는 용기가 종지나 접시여서 ‘깍쟁이윷’이라고도 한다. 윷을 놀 때는 멍석에 그어놓은 선을 넘도록 힘차게 던져야 한다. 선 안으로 한개라도 떨어지면 ‘낙’으로 안 된다. 윷가락 4개가 모두 멍석 밖에 떨어져도 무효다. 제주도에서는 윷 4개 가운데 하나라도 세로로 2∼3초간 서게 되면 던진 편이 승리한 것으로 친다. 콩윷이나 팥윷은 콩이나 팥을 절반으로 쪼개어 만든 것으로 북부 지방에서 많이 사용한다. ●세계의 윷놀이 윷은 인도·페르시아·중앙아시아·동북아시아·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민속학자 김광언씨는 ‘동아시아의 민속놀이’에서 “인도의 파치시(Pachisi)가 중국의 저포 놀이를 거쳐 우리에게로 건너와 윷이 되었다.”고 말한다. 파치시는 왕·코끼리·말·양이라 불리는 네 개의 말을 십자 꼴로 벌려 놓은 3×8의 밭 위로 옮기는 놀이다. 중국의 저포 놀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윷놀이와 닮은 점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놀이판의 밭이 29개로 윷놀이와 같았다. 일본의 윷놀이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 국문학자 김사엽씨는 “윷놀이에서 한 개가 엎어지고 셋이 잦혀진 것을 이르는 일본말 ‘고로’는 곧 우리말 ‘걸’을 가르킨다.”고 설명했다. 윷과 비슷한 놀이를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도 즐겼다. 콜로라도·뉴멕시코·유타주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뼈 윷이 나왔다. 로스앤젤레스 서남박물관에는 밤윷만한 것부터 가락윷까지 서너 종류가 있다. 특히 파라과이 볼리비아의 차코(Chaco)부족은 이 놀이의 이름을 ‘윷’이라 불렀다고 한다. 놀이학자 스튜어트 컬린은 “윷놀이는 판 위에서 주사위를 갖고 하는 모든 놀이의 조상 또는 원형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윷점 쳐보세요 선 조들은 한 해의 운수나 풍흉을 알아보려고 윷점을 쳤다.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지만 윷점은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설 풍속이다. 윷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마을이 편을 갈라 윷을 놀고 그 결과를 가지고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산과 들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편을 갈라 윷을 논 뒤 들 쪽이 이기면 벼농사가, 산 쪽이 이기면 밭농사가 잘될 것으로 여긴다. 다른 하나는 새해 윷가락 4개를 세 번 던져 나온 괘로 개인의 일년 운수를 점치는 방법이다. 첫 번째 말을 상괘, 두 번째 말을 중괘, 세 번째 말을 하괘라 부른다. 상괘는 묵은해를, 중괘는 새해 설날을, 하괘는 정월 대보름을 나타낸다. 점괘를 얻을 때 도는 1, 개는 2, 걸은 3, 윷과 모는 4로 간주한다. 그래서 모두 64괘가 나온다.‘척성법(擲成法)’이란 책에 이같은 운수 풀이가 적혀 있다.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이 펜실베이니아대학 고고학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1895년에 저술한 ‘한국의 놀이’에서 “정월 초에 서울의 시장에서는 작은 책 한 권이 팔리는데 그것은 윷점과 관련이 있다. 여러 장에 걸쳐 세 개가 한 조인 숫자의 순열이 한자로 인쇄되어 있다. 그 옆에는 한국어로 그 의미가 설명되어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세 번 윷을 쳐서 모두 ‘도·도·도’가 나오면 건(乾)으로 111의 점괘를 얻는다. 이 괘의 점사는 ‘어린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다(兒見慈母).’는 내용이다. 나약한 아이가 포근하고 편안한 어머니를 만나듯 어려운 일에서 벗어나 행복한 일이 많이 생길 좋은 괘다. 세 번 윷을 쳐서 ‘도·윷·도’가 나오면 141(大過卦)인데 ‘나무에 뿌리가 없다(樹木無根).’라는 뜻이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죽음을 의미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나쁜 괘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상고’에는 “정월 초하룻날 아낙네들이 (윷을)던져서 길흉을 점쳤다. 세 번 던진 뒤 주역의 64괘를 본받아 점사를 붙였다.”고 기록돼 있다.18세기 말 유득공의 ‘경도잡지’도 윷점을 상세히 소개한다.
  • 성남~광주~곤지암 : 꼬불꼬불 길이지만 ‘유쾌한 샛길’

    성남~광주~곤지암 : 꼬불꼬불 길이지만 ‘유쾌한 샛길’

    강릉을 포함한 영동지역은 영동고속도로와 이 도로를 우회진입할 수 있는 3번국도(경충국도)를 이용한다. 여주까지가 짜증나는 구간이지만 이곳만 지나면 대부분 정체구간에서 벗어난다. 경충국도를 염두에 두는 경우 서울 북부지역 거주자들은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거나 명절이면 한가해지는 서울 중심도로를 이용해 일단 성남까지 가야 한다. # 광주가는 길(약도 (1)) 경충국도 모란시장 진입로는 해마다 심각한 교통체증현상이 빚어진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넘으면 이 국도의 체증구간을 건너뛸 수 있다. 서울 복정동 사거리에서 남한산성 방면으로 차를 몰다 표지판을 보고 산성으로 진입, 매표소 2곳을 지나면 삼거리길(43번국도)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광주시청을 지나면 경충국도 광주인터체인지를 탈 수 있다. 남한산성순환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남한산성입구 표지판에서 좌회전하지 말고 직진하면 이 도로가 산성순환도로.3∼4㎞정도 가면 터널이 나오고 곧바로 고가도로 아래 경충국도와 광주방면으로 나누어지는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광주로 향하는 이배재고개가 나온다. 길이 높고 굴곡이 심하지만 지름길이다. 고개를 넘어 현대아파트 사거리에서 좌회전(45번국도)하면 경충국도 장지인터체인지다. 분당신시가지에서 출발하는 귀성객들은 분당열병합발전소를 지나 광주시 오포면으로 직진해 안내표지판을 따라 경충국도로 진입하는 것이 낫다. 용인지역은 죽전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광주방면으로 직진한다. # 샛길로 곤지암까지(약도 (2)) 광주시청앞(43번국도)에서 청사를 등지고 오른쪽은 경충국도, 왼쪽은 퇴촌방향이다. 오른쪽으로 500m가량 지나면 파발교 못미쳐 샛길이 나오고 이 길(500∼600m)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300m가량 지나 우회전한다. 이곳부터는 직진이다. 길 초입 오른쪽에 광주소방파출소가 있고 왼쪽으로는 광주기도원.1㎞정도 지나면 389번 지방도와 200m가량 겹치고 삼육재활원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초월갈비집이 보인다.1㎞정도 지나 337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곤지암 표지판과 함께 소머리국밥집들이 눈에 들어오면 곧바로 경충국도다. 좌회전하면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가 나온다. 이천 하이닉스반도체공장을 지나면 영동고속도로 이천 IC가 나온다. 다음은 여주군이고 명성황후기념관 옆으로 영동고속도로 여주 IC가 보인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세종이 당호를 지어준 비해당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혼인하면서 경복궁에서 살림을 내어 나간 뒤에, 인왕산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1442년 6월 어느날 경복궁에 들어가자 세종이 물었다. “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이 시경에서 증민(蒸民)편을 외워 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됨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이 시는 노나라 헌왕(獻王)의 둘째 아들인 중산보(仲山甫)가 주나라 선왕(宣王)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에 윤길보(尹吉甫)가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인데,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따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이 즉위한 뒤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비해(匪懈)’ 두 글자에 담아 집 이름으로 내려준 것이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짓는 문인들의 관습이 유행하자 조선에서도 그런 풍조가 생겼는데, 안평대군은 무려 48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냈다.48경은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매화 핀 창가에 흰 달빛(梅窓素月)” “대나무 길에 맑은 바람(竹逕淸風)” 등의 네 글자로 명명되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먼저 그리고 안평대군이 칠언 화제시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인왕산 기슭 비해당으로 초청하여 48경을 함께 즐기며 차운시를 짓게 했다. 우리 조상들은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 그대로 산과 물을 즐겼는데, 안평대군은 한강가에도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담담정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 안평대군은 서적만 1만권을 소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서화·골동품을 수집하였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를 보면 안견(安堅)의 그림 30점, 일본 화승 철관(鐵關)의 그림 4점,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 명품 188점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곽희(郭熙)의 작품이 17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은 안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문인 학자들에게 인심을 얻자,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안평대군까지 처형하고는 이 정자를 빼앗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다.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가 되었다. ●몽유도원도를 인왕산에 실현한 별장 무계정사 1447년 4월20일 밤에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가,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밖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입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몇 굽이 시냇물을 따라 벼랑길을 돌아가자 신선마을이 나타났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로 소개한 뒤에, 무릉도원은 중국과 조선 문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처음 가본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깨닫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그림이 바로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도연명 이후에 많은 문인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고,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청학동(靑鶴洞)을 찾아 글을 지었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 된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에 치지정(致知亭)에 올라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유영봉 교수 번역) 세간의 어느 곳을 무릉도원으로 꿈꾸었던가? 산관의 차림새가 오히려 눈에 선하더니 그림으로 보게 되니 정녕 호사로다 천년을 전해질 수 있다면 ‘내가 참 현명했구나’ 하리니. 안평대군은 꿈속에 거닐던 복사꽃 동산을 인왕산 기슭에서 실제로 찾아 별장을 지었다. 안평대군과 사육신의 문장은 상당수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이 그 별장에서 지은 시 아래에 안평대군의 글이 덧붙어 있어, 별장 지은 사연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묘년(1447) 4월에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들과 비교해 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칸으로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이에 잡언시 5편을 지어 뒷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비하고자 한다.” (유영봉 교수 번역) ●안평대군 죽은뒤 무계정사 철거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집 이름은 글자 그대로 ‘무릉계에 자리한 정사’라는 뜻인데, 한시 5수 뒤에 “경태(景泰) 2년 신미”라고 쓰여 있어 1451년에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연대는 유영봉 교수가 최근의 논문 ‘비해당 사십팔영의 성립 배경과 체제’라는 논문에서 밝혀냈다. 수성동에 있던 비해당에서 인왕산 기슭을 넘어 무계정사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안평대군은 꿈속에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별장을 지어 문인학자들을 초청하고 시를 읊거나 활을 쏘며 놀았다. 하지만 단종실록 원년 5월19일 기사에는 이곳을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고 하며 안평대군을 비난했다.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란 뜻이다. 계유정난 직전에도 수양대군 파에선 안평대군이 무계정사 지은 뜻을 왕권탈취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인 10월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고 사간원에서 아뢰었으며,10월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 가운데 첫번째가 바로 이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의 문신 23명이 참여하여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6년 뒤에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종과 안평대군이 아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으며, 성삼문·이개·박팽년 등의 사육신은 3년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현전까지 폐지되었다. 무계정사는 곧 무너지고, 지금은 안평대군의 예언 그대로 그림만 1000년을 남아 전한다. 자하문터널 위 부암동사무소 뒷길을 따라 올라가다 돌계단을 오르면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긴 바위가 나타나고, 그 뒤에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오래된 건물이 서있다. 주소로는 종로구 부암동 329-1,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인데, 이곳이 바로 무계정사 터이다.
  • [열린세상] 초상(肖像)/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어떤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그린 그림이 초상이다. 옛날부터 쓴 말은 아니다. 초상이라는 말을 쓰기 이전에는 진영(眞影)이나 영정(影幀), 화상(畵像) 따위로 불렀다. 그런데 얼굴 그림은 내면적 정신세계를 담아야 그 진가가 인정되었다. 이를 전신(傳神)이라 했고, 마음까지 아우른다는 뜻에서 사심(寫心)이라는 말도 썼다. 초상을 흔히 휴머니즘에 충실한 예술로 일컫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고대부터 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를 제대로 그려 널리 퍼뜨린 시기는 조선시대다. 이 시대 초상의 유행은 국가가 유교를 정치적 지도이념을 삼은 데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나 조상의 뿌리를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인격에서 찾으려 한 흔적이 초상 곳곳에 배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면, 엇비슷한 이미지의 걸작 초상 두 점을 만날 수 있다. 도암 이재(陶庵 李縡·1680∼1746)와 그 손자 채(采·1745∼1820)의 상이다. 한 가족의 유전적 혈통을 속일 수 없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 만큼 두 얼굴이 서로 닮았다. 골상(骨像)부터가 닮아 할아버지와 손자 얼굴이 길다. 고요히 생각하는 정려(靜慮) 어린 눈매가 온유한데, 단아(端雅)한 입술은 수염 속에 감추었다. 얼굴에 어울리는 코가 역시 기다랗지만, 날카롭지 않은 콧날이 섰다. 이들 두 초상에서는 한산 모시에나 보임직한 올곧고도 정갈한 체취가 우러난다. 이는 곧 선비의 풍모가 아닌가. 할아버지 이재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손자 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로 부총관(副總官)을 겸임한 학자이자 행정가였다. 두 초상 얼굴에는 유풍(儒風)이 그윽하다. 최근 문화재청이 전국 박물관과 개인이 소장한 31건의 초상을 한꺼번에 보물로 지정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가운데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의 초상이 들었다고 한다. 국권을 빼앗긴 풍운의 시대를 살면서, 그때그때 들은 소문을 그대로 적은 수문수록(隨聞手錄)의 역사 이야기 ‘매천야록(梅泉野錄)’ 저자의 초상이다. 더구나 서화가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자신의 사진관에서 찍은 매천 초상사진을 포함시켜 일괄 지정했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매천 초상의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에 두 얼굴이 똑같다. 매천은 사팔뜨기 사시(斜視)로 묘사되었다. 왕조의 마지막 시대 구한말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눈을 뜨고는 응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볼썽사납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잔잔한 인품이 눈가를 스친다. 옳은 일에 뜻을 굽히지 않는 지사(志士)의 절개를 가슴에 품어들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사진이 일상화하기 훨씬 이전에는 보잘것없는 사진틀 카메라옵스큐러가 초상의 데생을 도왔다고 한다. 이어 사진기가 얼마만큼 보급되었던 1850년대에 사진이 들어온 중국에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 무렵 서양의 사진가들이 찍은 작품을 모아 엮은 책 ‘중국의 얼굴’을 들추면, 청조 말엽을 폭정으로 이끌었던 서태후(西太后·1835∼1908)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꾸민 초상사진이 나온다. 그러나 서태후가 관음보살로 분장한 초상사진이 어디 걸렸더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요 며칠 전 두 사연의 외신기사를 읽었다. 하나는 프랑스 국민들이 노숙자의 아버지로 기리는 아베 피에르 신부(1912∼2007)의 선종(善終) 기사다. 다른 하나는 2차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을 미국인들이 여태 위대한 인물로 꼽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의 초상을 지금도 걸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터이다. 우리도 초상 주인의 훌륭한 전기(傳記)를 읽는 마음으로 사진을 걸어두는 날이 오길 기다려 보고 싶다. 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 선비답게 산다는 것/안대회 지음

    중국 송대의 문인 소동파는 “맛있는 음식은 창자를 썩게 하는 독약”이라고 했다. 음식을 적절히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얘기라면 조선 실학자 성호 이익의 절식철학도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을 “천지간의 좀벌레 한 마리”쯤으로 여긴 성호는 그릇에서 한 홉의 쌀을 덜어내는 절약을 실천했다. 조선 사람은 먹어도 너무 먹는다고 한 그의 비판이 과연 당시 사정에 맞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그의 지적은 글만 읽는 선비들은 특히 새겨둘 만하다. 명지대 국문과 안대회 교수가 쓴 ‘선비답게 산다는 것’(푸른역사 펴냄)은 그런 옛 선비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과 사유의 흔적을 담은 책이다. 책에서 만나는 선비들의 면면은 실로 다양하다.13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흠영(欽英)’이라는 일기를 쓴 유만주, 세상과 인연을 끊고 취미생활에 몰두한 골동품 마니아 김광수, 조선후기 여항(閭巷)문인을 대표하는 천민시인 홍세태 등 선비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책꽂이]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안인희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독일 등 알프스산맥 이북쪽에 전해 내려오는 북유럽 신화를 소개. 신화의 주인공들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지혜의 신 ‘오딘’은 애꾸눈이고 재판과 맹세의 신 ‘티르’는 외팔이 신이다. 난쟁이도 등장한다. 신들은 거인 ‘이미르’가 죽고 난 뒤 그의 살 속에 생겨난 구더기로 난쟁이를 만들었다. 난쟁이들은 땅 속에 살면서 귀한 돌들을 모아 가공해 보물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됐다고 한다. 책은 저주받은 반지가 난쟁이에게서 신들을 거쳐 거인 등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이어지는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영화 ‘반지의 제왕’ 등 북유럽 신화가 문화산업의 콘텐츠로 활용된 현상도 다룬다. 전2권 각권 1만 3000원.●한국 상인(공창석 지음, 박영사 펴냄) 우리나라 최초의 대상인은 졸본 사람 연타발. 그로부터 신라의 진골 상인 김태렴, 해상왕 장보고, 개성상인에 이르기까지 한국 상인의 맥을 살핀 책. 저자(경상남도 행정부지사)는 조공설을 비롯해 발해견제설, 동대사 대불 개안 축하설, 무역촉진설 등 이 사절단의 성격과 관련된 견해를 소개한다.3만원.●섹스와 공포(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그리스인들이 섹스를 신격화했다면, 로마인들은 그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스인들에게 섹스는 즐거운 파티였던 반면, 로마인들에게 그것은 ‘유사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공쿠르상 수상작가인 저자는 서구문명사는 성이 공포와 저주로 변질된 역사이며, 그 뿌리는 고대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제국의 형태로 로마세계를 재정비하던 시기라고 주장한다.1만원.●피고인에게 술을 먹여라(서태영 지음, 모멘토 펴냄) 1985년 ‘인사유감’ 필화사건을 겪은 판사 출신 저자가 말하는 법조풍경 이야기. 암울한 시기 시국사범에게 거의 일정한 형량이 내려진 것을 빗댄 ‘정찰제 판결’과 전관예우 문제 등을 다뤘다. 저자는 ‘고통대행업자’인 변호사는 돈 받는 만큼의 괴로움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법률마트 시대의 휴머니스트 비망록’이라는 부제가 붙었다.1만원.●트랜스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애덤 로버츠 지음. 곽상순 옮김, 앨피 펴냄) 영·미권의 손꼽히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비평가이자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프레드릭 제임슨. 그의 대표작 ‘정치적 무의식’을 통해 조명한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순한 미학적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만 2500원.●제왕의 리더십(박종기 등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고려시대에는 측근정치가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국왕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부분이 조선에 비해 큰 편이었다. 고려시대 국왕은 빠른 정치적 결정을 위해 측근정치를 폈지만 포용력을 통해 그 폐단을 막을 수 있었다. 코드인사로 대표되는 현 정권의 지나친 자파세력 중심 정치운영은 광해군시절 ‘북인의 비극’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곁들인다. 한국사의 대표적 제왕들의 국가경영 양상을 살피고 있다.1만 8000원.
  • 유관순 열사 ‘민족소녀’ 모습으로

    유관순 열사 ‘민족소녀’ 모습으로

    문화관광부는 6일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한 재제작 유관순 열사 영정을 새 표준영정으로 지정했다. 견본채색 전신좌상(가로 120㎝ 세로 200㎝)으로 기존 영정에서 나타났던 수심 깊은 중년부인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청순하고 진취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항일 민족소녀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영정속 유 열사는 3·1운동 직전,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 앉아 태극기를 쥔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렸다.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룻바닥 등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사실성 있게 재현했다. 유 열사의 얼굴 부분은 안면근육의 조직을 선과 점을 따라 표현하는 조선후기 초상화법인 육리문법(肉理紋法)을 사용해 피부질감과 색감을 최대한 살린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86년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은 지정이 해제된다. 새로 지정한 표준영정을 관보에 고시해 확정되면 이달 중 천안시 소재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될 계획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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