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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체제 「단기변화」 없을듯/군부·권력층 세대교체 가속화 예고

    북한 권력서열 2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25일 사망함으로써 인민군 내부동향과 맞물려 북한 권력의 앞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의 사망은 지난해 10월 은밀히 프랑스를 방문,폐암치료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평양으로 귀환한 시점에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하지만 북한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이른바 「혁명1세대」의 선두주자로 북한군부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오의 사망은 북한체제내 권력이동에 상당한 파급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때 김일성과 빨치산활동을 함께 한 이래 북한체제를 지탱해 온 버팀목의 일원이었다.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의 군장악을 위한 후견인역을 맡아왔다. 오진우 이외에도 지난해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강희원(72·부총리),주도일(75·평양방어사령관),조명선(72·인민군대장)등 「혁명1세대」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따라서 오의 사망은 일단 북한군부 및 권부의 세대교체를 부채질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기득권세력이지만 70대의 고령인 「혁명1세대」를 억지로 제거하지는않더라도 자연적 물갈이가 촉진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이 과정에서 군총참모장 최광,국방위원 김철만 등 혁명1세대와 김정일의 핵심측근으로 알려진 오극렬 당 작전부장,이봉원 군 총정치국부국장등 혁명2세대간의 갈등 가능성도 점쳐진다. 김정일의 군경력은 김일성대학 시절 1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그에 대한 북한군내의 불만은 치밀한 사람관리와 세뇌교육 등으로 사전봉쇄돼 왔다.더욱이 80년 당 중앙군사위원,90년 국방위 제1부위원장,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는등 김정일의 군부장악은 김일성 생전에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왔다. 또한 인민무력부·사회안전부·국가안전보위부·호위총국 등 4개 무력기구들이 상호 견제토록 하는 안전장치도 마련돼 있다.각 군사권력기구의 상하부 조직에 당조직을 배치해 감시·지도토록 한 것도 안전장치의 하나다. 때문에 군내 김의 후견인격인 오의 퇴장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김정일체제의 행로에 결정적인 변화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김이 권력승계를마무리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진우 등 혁명1세대그룹의 잇단 퇴조는 중장기적으로 북한권력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폭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대두되고 있다.
  • 범죄신고자 보호법안 마련/대검/인적사항 누설땐 징역3년

    범죄 신고자 및 법정증인이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보복을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신고자의 요청에 따라 피의자의 신병변동사항을 통지해 주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범죄신고자 보호법」이 곧 제정돼 올해안에 시행된다. 대검 강력부(김진세 검사장)가 17일 마련한 법안초안에 따르면 해당 사건 피고인의 체포·구속 및 석방과 관련된 처분내용·판결선고내용·가석방·형집행정지결정 등 각종 신병관련 변동사항을 담당 검사 및 경찰서장의 직권으로 신고자나 법정대리인,후견인 등에게 통지해 사전에 대비토록 한다는 것이다. 법안은 특히 범죄신고자나 증인의 진술·증언·자료제출 내용 등이 기록되는 조서에 인적사항은 기재하지 않고 별도의 비밀장부를 둬 특별관리토록 했다. 또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종사하는 사람이 이를 누설했을 때는 3년이하의 징역이나 5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등 엄격한 처벌규정이 신설됐다.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행시7회­옛 기획원 출신 “전성시대”/차관급에 포진한 「행정인맥」

    ◎모두5명… 1금 후속주자도 7명/행시7회/행조실·공정거래위·재경원 “장악”/옛기획원 정부 부처 차관급에 행정고시 7회와 옛 경제기획원 출신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26일 인사에서 초대 재정경제원 차관에 발탁된 이석채 전 농림수산부 차관과 주경식 보건복지부 차관,표세진 공정거래위원장,임창렬 조달청장 등 4명이 모두 행시 7회 동기생이다.또 유임된 원진식 총무처 차관도 행시 7회.임청장은 이철수 옛 재무부 기획관리실장(행시 6회)과 신명호 2차관보(6회)에 앞서 조달청장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낚았다. 행시 7회는 지난 69년 행정사무관으로 임용돼 지금까지 25년을 공직에서 지냈다.합격자 수는 55명으로 6회 45명,8회 38명,9회 27명보다는 많으나 10회의 1백88명에는 못 미친다. 연조가 안 돼 장관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논객과 소신파·실력파들이 많다.역시 7회 동기생인 한리헌 청와대 경제수석을 정점으로 관계(관계)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로 급부상하고 있다. 아직 1급이지만 이기호 총리실 2조정관,재경원의 장승▦ 1차관보·이영탁 예산실장·김영섭금융정책실장과 공정거래위의 이남기 부위원장 직대·김선옥 사무처장,조일호 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등도 차세대 차관 주자(주자)로 뛰고 있다.공직을 떠났지만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과 박경재 변호사,황두연 무역협회 전무도 7회 출신이다. 행시 7회의 급부상과 함께 옛 기획원 출신들의 요직 점령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앞으로 차관 회의를 주재하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에 임명된 강봉균 옛 기획원 차관과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등 권한이 강화된 공정거래위원장에 발탁된 표세진 전 조정관이 모두 기획원 출신이다.특히 강실장(행시 6회)은 김용진 옛 재무차관(4회)과 이환균 관세청장(6회),김시형 전 행정조정실장(1회)을 물리치고 총리실에 입성,앞으로 장관승진 후보 「0순위」를 바라보게 됐다. 예산실장을 역임한 기획원 출신 이석채 재경원 차관의 등장은 그가 한리헌 경제수석과 서울상대와 고시동기이면서 서로의 막강한 후견인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한 재경원의 역학관계에서 장관이 재무부 출신인 홍재형 부총리인만큼 차관은 기획원 몫이란 점이 강력히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인사에서 유임된 박운서 통상산업부·구본영 과학기술처 차관도 기획원 출신이다.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부처의 핵심 부처인 재경원과 통상산업부 차관을 기획원이 장악한 셈이다.기획원 출신인 한경제수석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앞으로 경제정책은 청와대와 재정·금융·세제 등 경제 3권을 한 손에 쥔 재경원의 「투톱 시스템」외에 옛기획원 마인드로 운영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재경원의 한 관계자는 『온화하고 무리없는 스타일인 홍부총리(재무부)와 뭔가 일을 벌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적극적인 성향의 이차관(기획원)의 대조적인 자세 및 조화 여부가 앞으로 옛 기획원과 재무부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국민은 정국정상화 원한다(사설)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느닷없이 의원직사퇴선언과 국회해산요구라는 극단론을 내놓은 이기택 민주당대표의 기자회견은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내각책임제도 아닌 나라에서 임기동안 국민대표권을 행사토록 대통령조차 해산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국회의 조기해산을 주장한 것은 헌정체제를 뒤흔들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그동안 그가 어디 외국에라도 가 있었다면 몰라도 국회의 무능이 이유라면 그럴수록 심기일전,유능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지 야당대표가 국민선택마저 무시하고 판을 깨자는 말을 공공연히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하다. 국정운영의 동반자인 야당의 책임자이자 그 자신 최다선의원이기도 한 이대표가 의회주의를 포기하는 내용의 선언을 했다는 것은 정치지도자로서 너무나 무책임한 자세다.야당대표라면 상황의 인식과 대안의 선택,그리고 행동의 결과에 대해 국민과 국가에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질서변화에 대응한 국제화와 개혁의 방향 같은 거대한 국가운영의 목표나 상황인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그렇다고 내년 예산안과 각종 민생법안을 둘러싸고 국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한 노력이나 정책프로그램도 발견할 수 없다.정치생명을 건 건곤일척의 투쟁주제라는 것이 오직 단 한가지,15년전의 과거사,그것도 5년전에 이미 국회에서 합의청산된 사안뿐이다.20일이상 국회를 운행정지시키고 예산처리법정시한을 일주일 앞두고 나온 그의 동반자살식 반의회주의노선은 국가운영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다.그의 말 한마디로 국가질서의 큰 틀이 흔들릴 것으로 보지는 않지만 장외투쟁과 절름발이국회,불가피한 국회 단독운영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은 세계화의 국력결집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물론 이대표로서도 야당을 이끌어나가는 데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정계를 은퇴했다는 후견인과 당내세력에 포위되어 당대표로서 체면도 서지 않는 약한 위상을 극복하려는 것이 진짜 목표인지도 모른다.당내의 권력투쟁과 선명경쟁차원에서 대여강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당내싸움은 당내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지 당원들한테인기가 있다 해서 자해적 카드를 뽑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할 야당대표로서 당원과 국민을 혼동하는 파당정치밖에 안된다.더욱이 그렇게 중대한 당노선이 당내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결정되기보다는 전적으로 이대표 개인의 즉흥적인 행동에 의해 공식화된 것은 야당식 신권위주의가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민주정당다운 공개적인 당론 결정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대표는 지체없이 이성을 되찾아 국회정상화,정치정상화의 길로 돌아가기 바란다.
  • 스웨덴국왕 내한

    카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이 스웨덴 과학기술 사절단의 후견인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비공식 방문하기 위해 13일 상오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했다.
  • 스웨덴국왕 13일 내한

    스웨덴국왕 카를 구스타프 16세가 한·스웨덴 과학기술협력 증진을 위한 스웨덴 과학기술 사절단 후견인 자격으로 13일부터 19일까지 방한한다고 외무부가 10일 밝혔다.
  • 혼인 풍속(연변 조선족 1백년:4)

    ◎간소해진 전통혼례… 잔치는 1주간/신부 혼수 갈수록 많아져… TV·냉장고는 필수품 한국인은 어디 가서 뿌리를 내려 살더라도 혼인만은 인륜지대사로서 정중하게 전통성을 지키는 것이 관례다.특히 한국과 가장 인접해 사는 중국 조선족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최근 자유화의 물결로 인해 연변이 놀라울 만큼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혼인풍속의 변이만 보더라도 고금의 차이가 실감난다. 과거 연변에서는 혹간 연애결혼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통혼례 의례를 따랐다.선보기가 끝난 다음에는 남자 측에서 부모나 후견인이 여자집으로 가서 청혼을 한다.그러면 여자쪽에서 궁합을 보고 좋으면 허혼한다.남자집에서 신랑될 사람의 사주단자를 신부집에 보내면,신부집에서는 연길을 신랑집으로 보낸다.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했다.사돈보기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즉,신랑쪽의 부모가 음식을 차리고 신부네 집으로 가서 사돈끼리 혼인날짜와 혼담을 나누는 방법이다.사주단자나 연길을 생략한 형식이지만 이 두 제도를 복합한 간이형식이라고도 할 수있다.그리고 혼인전에 신랑쪽에서 납폐를 보낸다.고향이 남쪽인 사람들은 남자쪽에서 혼수감을 준비하지만 북쪽 사람은 여자쪽에서 혼수감을 마련한다.예단도 준비한다. 혼인 당일 신랑이 신부집으로 간다.가까운 친척 3∼5명이 상객으로 함께 간다.연변에서는 「우시꾼」이라 한다.신부집에 도착하면 「대반」의 안내를 받아 전안례를 치른다.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상위에 놓고 부채로 세번 들이민다.이때 짓꿎은 사람들이 『썩 들이밀어! 좀 더』하고 음담을 하여 장내를 웃긴다. 나무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에 관한 유래담이 한국에서는 채록된 것이 없다.그런데 연변의 향경선생이 쓴 「내가 본 민속반세기」에 소상히 나온다. ○전안례의 유래 전해 「옛날 한 사람이 봄 가을에 기러기때 내리는 자리에 옹노(새나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놓고 기러기를 잡으려고 했다.하루는 옹노에 기러기가 잡혔나 해서 가보았다.그랬더니 기러기 두마리가 잡혀 죽어 있었다.자세히 보니 기러기 한마리는 확실히 옹노에 걸려 죽고,다른 한마리는 옹노에 걸려 죽은 기러기의 목에 자기 목을 걸고 죽어 있었다.더 자세히 보니 옹노에 걸려 죽은 기러기는 수컷이고 목에 자기 목을 걸고 죽은 기러기는 암기러기였다.기러기잡이꾼은 이 부부기러기의 애절한 사랑의 죽음을 아쉽게 여겨 작은 널조각으로 관을 만들고 죽은 기러기 한쌍을 사람 무덤처럼 묻어주었다.그리고 그 무덤에다 「열녀 기러기묘」라고 쓴 비를 세웠다.기러기잡이꾼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기러기옹노를 없애버리고 나무를 깎아서 한쌍의 기러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자기 딸이 시집갈 때 신랑신부가 그 나무기러기를 가져가게 하여 서로 바꾸게 했다」 전안례가 끝나면 연변에서는 교배례가 없고 신랑은 큰 상을 받는다.신부는 뒷 골방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이때 신랑을 따라온 우시꾼은 딴 집에서 상을 받는다.신랑이 상음식을 갈라서 부모님께 보내겠다면 뜻대로 하게 한다.큰 상에는 삶은 닭에 붉은 고추를 물려 쌀사발에 담아 놓는데 액막이와 생육을 상징한다.신랑이 큰 상을 받을때 신랑이 우시꾼을 불러 상차림을 보게 한다.상을 얼마나 잘 차렸는가 보라는것이다.신랑이 먹는 밥그릇에는 삶은 달걀 두개를 밥에 묻어두는데 신랑은 한개를 먹고 나머지 한개는 신부에게 물린다.여기서도 부부의 금실이 좋음을 의미한다. ○「신방엿보기」 사라져 신부는 가마를 타고,신랑은 말을 타고 떠난다.남의 천금을 가져온다는 관념에서 음식을 주는 대로 먹고,점잖게 신부를 데려온다.신부를 태운 가마가 신랑집 마당에 들어설 때 대반이나 인접하는 사람만으로는 교군꾼을 달래기 힘들다. 『신부가 너무 무거워서 인제는 가마를 내팽개치겠다』 『신랑집에서 대접이 뜰뜰하니 가마를 메고 돌아가겠다』 하고 입씨름을 벌이며 가마를 일부러 흔들어 댄다.그러면 신랑의 어머니가 나와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제발 이번만 용서하십시오』 하고 손발이 닳도록 빌면서 술과 고기 안주를 내 오고 돈푼도 넣어준다. 신부가 받는 큰 상은 신랑이 받았던 큰 상과 비슷하다.이때 신부측 우시꾼은 애를 먹이며 우쭐대고 주정하는척 한다.신랑측에서는 이러한 억지나 무례한 짓에도 거의 무조건 좋은 말로 달랠 뿐이다.아무리 남존여비라지만 이날만은 여존남비로 역순 된다.이튿날 신부는 시집 어른들에게 예단을 놓고 큰 절을 올린다.지금은 이튿날 신랑신부가 음식을 차려서 부모 가까운 친척과 함께 신부집으로 가서 인사를 한다.옛날엔 삼일만에 떠나는 「삼일」이지만 지금은 다음날로 바뀌었다.돌아온 뒤에는 시어머니나 동서 되는 사람이 신부를 데리고 일가친척을 돌아다니며 소개한다.이것을 연변에서는 「집보기」라 한다.신랑신부 다루기나 신방엿보기 습속은 해방전까지는 지속되었으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다 하여 없어졌으며 다만 신랑 친구들이 좀 지껄이다가 마는 정도다. 오늘날 혼인잔치에서 변수로 나타난 모습은 혼인잔치가 하루에 끝나지 않고 여러날 계속된다는 것이다.예컨대 혼인날 일주일이나 열흘전부터 오늘은 아버지 직장의 손님을,내일은 어머니 직장의 손님을,모래는 또 관계되는 직장 손님들…이렇게 하다가 혼인 당일은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을 청하는 것이다.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손 대접이 푸짐한 정서가 다시 살아난 듯 하다.또 하나의 다른 변수는 신부가 마련하는 혼수가 기하급수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70년대 후반부터 생긴 이러한 경향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와서는 더더욱 심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처음에는 신부가 이불 두채,옷장 하나쯤 갖추면 만족했지만 차차 늘어나서 이불 네채,옷장 두개로 늘더니,지금은 이불 여덟채에 최신식 옷장·찬장·컬러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녹음기 등을 갖추어야만 한다.신부들은 마치 경쟁이나 하듯 남보다 더 차려가려고 한다.이렇게 푸짐한 혼수감이 준비된 신부를 얻은 신랑들은 수지맞는 편이다. ○약혼해도 정식부부 이처럼 혼인풍속도가 달라진 것은 아마도 가치관의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한국의 사정도 강건너 불보듯이 아니라 70∼80년대에 직접 겪었다.고난과 가난을 겪은 전세대들의 가치관과 핵가족의 주인들이 될 현재의 젊은이들 간에는 그만큼 괴리가 생겨난 것이다. 또 하나 기성세대가 고민하는 혼인풍속도는 현행 제도가 약혼후 행정기관에 신고만 하면 혼인증서를 발부하는 문제다.법적으로는 약혼으로 정식부부임을 증명받은 셈이다.전통적 관례에 따르면 혼인식이 끝나야 정식부부가 되고,달이 차지 아니한 아이를 출생하면 당연히 혼전 경험으로 인정되어 핀잔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현행제도와 관례 사이에 파생되는 갈등이 고민이다.성문란의 원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은 본국이나 연변이나 마찬가지다.
  • 중국의 한반도외교 변화(북핵타결 이후:8)

    ◎「대북부담」 벗었으나 「대부」지위 퇴색/“북·미교류 당분간 큰 진전 없다” 판단/「한국카드」 구사… 영향력 유지 노릴듯 중국의 북한 핵문제타결에 대한 공식반응은 이를 환영하며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은 변함없다는 것이다. 지난 20일 진건외교부대변인도 정례기자 설명회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한반도의 비핵화및 평화와 안정, 그리고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등 한반도 기본정책은 일관적이며 변함 없다고 확인했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의 유일한 후견인으로 자처해 왔으며 지난 92년3월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 이후 국제사회와 북한 사이의 대결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중국은 이 과정에서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대결을 청산하고 미국·일본 등과 관계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것을 유도해 왔다.그러한 중국에 핵문제의 타결은 북한이라는 외교적·경제적인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일본 등과 함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내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앞마당이며 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완충지겸 울타리로 여겼던 북한에 경쟁국 미국과 가상적국 일본 등 서구세력들이 밀려 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과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기본정책은 한마디로 현상 유지.한반도의 변화가 중국의 경제발전과 사회주의적 체제유지라는 국가적 기본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현재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한반도가 통일상태든 분단상태든 중국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를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비핵화,당사자 참여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외교적인 수사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중국정부가 북·미사이의 문제해결에 대해 환영을 표시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국가적인 기본목표에 당분간은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과 자신감에서라고 볼 수 있다.특히 중국은 북·미 관계개선이 여러 차례의 단계를 거쳐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이러한 계산과 자신감은 인권문제를 비롯,서로 해결해야 될 난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다 북한도 체제유지를 위해 아주 제한적으로 교류의 폭을 열어 나갈것이라는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외교적인 기조 역시 별다른 변화는 예상되지 않는다.다만 북한의 사회주의체제 붕괴 방지가 대외정책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이며 북한과 미·일 등과의 관계개선이 중국의 통제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각종 외교활동은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북·중 두나라 사이에 강화되고 있는 공산당과 군의 상호방문 등 인사교류도 이런 점에서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특히 북한과 미·일 등과의 교류의 폭이 넓어질수록 당과 군을 매개로 한 이념적 동질성과 유대및 교류는 더욱 강조될 것이다.한반도에서의 북한중시 정책이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대미·대일 교류의 속도와 깊이 조절을 위해 「한국카드」를 이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중국이 허용하는 속도와 범위 이상의 관계증진을 시도할 때 한국과의 정치·외교적인 관계심화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이다.이와 함께 동북아에서의 영향력회복을 바라고 있는 러시아와의 협조를 통해 일본과 미국에 대한 견제와 세력균형 외교의 시도도 전망된다.이점에서 한반도에서 4강의 「각축외교·경쟁외교」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핵컨소시엄 러시아의 역할/「비원자로」 기술지원 큰 관심/“북원전 건설 경험”… 참여폭 확대 기대 북한의 경수로 건설 지원을 위한 국제컨소시엄 구성논의가 구체화됨에 따라 과거 북한에서 원전건설을 실제로 주도한 경험이 있는 러시아의 기술제공,참여폭 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러측도 현재 당초 러시아제 원자로가 채택되도록 막후노력을 경주했던 입장에서 한발 후퇴,비원자로계통의 기술지원 쪽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5일 외무부 정례브리핑에서 카라신 대변인은 러시아의 컨소시엄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 『현재 북·미 합의내용을 분석중이며 합의이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러정부의 입장을 정리할 것』이라고만 답했다.그러나 이는 『러시아제 경수로 제공 제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던 북·미 합의 직후의 논평에서 상당히 후퇴한 발언이어서 주목을 끌었다.방일중인 러외무부의 발렌틴 예로무첸코 아시아 제2국장은 24일 『러시아는 국제컨소시엄에서 기술분야의 지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이러한 입장변화는 일단 한국형 경수로의 채택사실이 기정사실화 됨에 따라 취해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아울러 경수원자로 2기건설비용 40억달러중 약 30%를 차지하는 원자로 비용을 뺀 나머지 부대시설,인력 등에서도 참여 여지가 많다는 계산인 것으로 보인다.원전 건설비용은 원자로계통 30%,안전비용 30%를 제외한 나머지는 부지비용및 비원자로 비용으로 구성된다.무엇보다 러시아는 지난 85년부터 5년여에 걸쳐 북한에 원전걸설을 실제로 했던 경험이 있어 컨소시엄에서 다소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옛 소련은 지난 85년12월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원전건설을 위한 북·소 경제기술협력협정」에 의거,옛 소련이 개발한 VVER-440원자로 4기 건설을 위해 기술지원·원전설비·장비·기술자료 등을 북한에 제공키로 했다.이에따라 옛 소련은 91년말 소연방 해체로 이 협정시효가 중단되기까지 북한에서 부지선정,원전부대설비 공급,기술자료 제공,인력지도를 해왔다. 특히 89년 함경남도 신포및 평안북도 태천지구를 건설부지로 선정,단지조성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당시 발표됐다.새로 건설될 경수원전 부지와 관련,러원자력부의 한 고위관리는 25일 『원전부지로는 리히터지진계로 8등급 이하 지역이어야 한다』고 전제,당시 옛 소련이 선정한 신포·태천지구중 한곳이 그대로 결정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다.당시 북한은 이곳에 44만㎾ 짜리 원전 4기를 건설하려 했고 이번에 1백만㎾ 짜리 2기 건설을 요구한 것도 이 용량에 맞추었기 때문이다.이 관리는 특히 『이지역이 기초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단계여서 공사기간을 2∼3년 단축시킴은 물론 경비절감 효과면에서도 이점이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이 원전 건설협정에 따라북한측은 ▲건설부지 선정및 제공 ▲전력수요 예측및 지질조사 ▲건물시공 등을 책임지고 소련은 ▲건설부지 선정에 기술지원 ▲북한내 시설재료의 생산지원 ▲원전설비 설치,운전지원 ▲원전건설시 북한내 관련기술 지원 등과 함께 ▲전문가 파견 ▲북한기술자 교육 ▲기술정보 제공을 맡도록 했다. 의무사항으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원전설비,핵연료 등에 대한 안전조치 강구 ▲군사목적으로의 전용금지를 비롯해 ▲소련기술자들에 대해 모스크바와의 통신시설(전화·텔렉스) 제공및 거주지 보호를 책임지도록 했다. 물론 북한 경수로건설에는 원자로를 비롯,비원자로계통 특히 인력·부품·설비 지원면에서도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하다.언어,지리적 이점,통일 후 남북한 원전간 호환성 등을 감안할 때 나오는 결론이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경험이 귀중한 자료로 활용돼 자신들의 참여 폭이 커졌으면 하는게 러측 관계자들의 주문이다.
  • 등사후 대비 강택민 체제 정비/오늘 개막 중국 4중전회 전망

    ◎정치국·군사위 개편 집중논의/경제분야보다 정치개혁 역점 25일부터 북경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진 중국 공산당 14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전회)는 강택민체제의 강화를 위한 당조직의 개편및 정비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룰 전망이다. 포스트 등소평시대를 대비,당의 조직을 강의 지휘체계아래 정비해 나가는 한편, 개방의 심화에 따라 약화·이완되고 있는 공산당의 조직을 강화해 나가는 방안의 모색이 이번 회의의 최대 현안이 되리라는 것이다. 당의 조직정비,주요인사문제,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개혁,반부패운동등 정치부문의 논의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반면에 경제문제는 사실상 형식적인 논의에 그칠 전망이다. 중국 공산당의 최고 정책결정권자들이 경제문제보다 등사망이후의 중국공산당 결속과 안정을 확보하는 일을 더 시급한 과제라고 보고 있으며 강체제의 안정성에도 불구,완벽한 장악력은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풀이된다. 이번 당대회의 정치적 의미는 1백89명의 중앙위원이나 1백30명의 후보위원에 끼지 못한 각 성과 시의당 책임자들도 참가하도록 결정됐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가 형식적인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는 전망은 당지도부조차 경제성장속도,각 성간의 균형발전문제,중앙과 지방간의 재정및 조세부담문제등에 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경제문제는 그간 추진해온 기조를흐트러뜨리지 않고 추진해 나가며 경제문제가 당 내부의 결속과 안정을 해치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사실 올 4중전회는 시기를 당겨올 상반기중에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경제문제를 둘러싼 이견등으로 계속 순연돼 왔다. 강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당의 건설문제는 크게 일부 간부의 연소화,농촌조직의 강화,사상교육강화등으로 요약된다.간부의 연소화 추진은 지난6월 군부내에 친위세력을 심기위해 강택민이 장성19명의 승진인사를 단행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이런 맥락에서 친강택민세력 보강을 위한 정치국원의 충원(현재22명)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또 군부에 대한 확실한 장악을 위해 지호전국방부장겸 당중앙군사위 위원(65)을 신설된 당중앙군사위 비서장에 임명하는 문제와 등소평의 경호책임자중 한 사람인 왕서림해방군총정치부 부주임(64)을 중앙군사위위원으로 승진시키는 방안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는 사실상 군의 인사권등 실권을 쥐고있는 기관이다.등소평을 대신해 강택민의 군부내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유화청정치국상무위원과 장진국방대학교장이 부군사위 주석직을 맡고 있으나 유와 장이 79,80세의 고령으로 실질적인 집무가 어려워 좀더 젊은 군부내 강택민 대리인이 나올 것으로 기대돼 왔다. 강체제 강화를 위한 당의 제도개혁으론 정치국의 권한 강화와 당의 상부조직에 의한 하부조직 감독강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또 반부패투쟁의 확대조치와 간부의 연소화조치의 확산을 통해 반대세력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도록 하기 위한 방안도 이번 회의를 통해 심도있게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 「합리화」 지정 끝내야/정종석 경제부차장(오늘의 눈)

    정부가 쓰는 경제용어에는 일반인들이 선뜻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 적지 않다.대규모 기업집단(재벌),시장 지배적 사업자(독과점 업체) 등을 비롯해,지금은 이해가 쉬워졌지만 가격현실화(인상)도 처음에는 무슨 뜻이냐는 반응을 불러일으켰었다. 산업합리화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부실기업에 세금감면과 금융지원 혜택을 주는 내용의 이 용어가 어떻게 나왔는 지는 정확히 모른다.부도를 내자니 그 이후의 연쇄도산과 대량 실업 등을 감당키 어려워 특혜를 주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여러가지 고민을 하다가 정부 주도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의미에서,어저쩡하게 이 단어를 택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부실 건설업체인 (주)한양을 합리화 업체로 지정하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고충을 읽게 된다.5·6공 시절의 대대적인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양산됐던 합리화 업체와 관련된 특혜시비가 문민정부에서도 재현됐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는 달리 종자돈(시드머니)이나 한은 특융은 배제됐다.그러나 채무탕감액이 1천억원,세금감면액은 6백88억원에 이른다.당국이 『개별 기업에 대한 산업합리화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유달리 강조한 것은 그만큼 특혜시비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과연 합리화 지정만이 회생의 영약이냐는 점이다.5·6공 때 교통정리한 부실기업 83개 중 합리화 업체로 지정돼 각종 혜택을 받은 기업은 한양을 포함해 모두 46개이다. 구상대로라면 이 중 90% 이상은 기사회생을 했어야 하지만 지금 딱히 성공사례로 꼽을 만한 기업은 드물다.그나마 살아났다는 기업도 대부분 부동산 값이 올랐거나 업종별 경기순환에 따라 우연히 덕 본 경우가 많다.합리화가 만능의 「마이다스의 손」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부실기업은 어느 정부에서나 항상 골칫거리이다.죽이자니 후유증이 크고,살리자니 특혜논란이 뒤따른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부의 다짐대로 앞으로는 어떤 경우이든 적자생존과 시장경제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정부도 더 이상 빚을 탕감해 주고 개별 기업의 후견인 역할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산업합리화」와 같은 야릇한 용어의 뜻을 알기위해 국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주한 외교관들이 본는 「김정일타도」 전단

    ◎“전단은 일과성… 권력승계 영향못줘”/소수 지식층 “존재알리기 저항” 추정/군이 김정일 강력지시… 건강이 변수 북한의 평양시내 외교단지에 「김정일 타도」 전단이 대량으로 살포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외교단지에 있는 한 서방공관이 이를 수집,본국정부에 전문으로 보고하면서였다.전단은 19일 밤부터 20일 새벽 사이에 살포됐고,김정일의 세습은 사회주의 건설에 어긋난다고 비난하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같은 전단 살포 사실이 오래 지난 뒤면 몰라도 북한 주민들에게 곧바로 알려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평양외교단지 거주 경험이 있는 한 주한외교관은 관측했다.익명을 요구한 이 외교관은 『외교단지가 평양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북한 주민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때문에 전단 살포를 「찻잔 속의 태풍」쯤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북한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주한 외국공관 외교관은 평양에 공관을 두고있는 러시아와 동구권 국가,중국등 모두 15명 안팎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한외국공관 업무를 맡고있는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평양에서는 일반인의 외교단지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어 있다고 들었다』면서 『접근이 가능한 아주 소수의 지식인들이 국제사회에 자기들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저지른 것 같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다시말해 조직적인 권력투쟁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간혹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주한 외교관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북한에서 전해들은 조직적인 저항에 대한 소문등을 털어놓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지난해 초 원산의 대학가에 나붙은 김정일 비난 대자보와 10여명 정도의 지식인으로 구성된 김정일 비난 모임이 낙서·토론등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동아시아지역 출신의 한 외교관은 『어느 체제건 반대 세력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하면서 『북한의 권력승계엔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비난 전단의 살포와 승계이상설을 연계하길 거부했다. 이처럼 북한에 근무한 적이 있는 외교관들은 전단살포를 일과성의 사건으로 바라봤다. 최근 중국의 북한전문가를 만나고 온 한 인사는 『중국 지도층이 김정일의 건강 상태를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그러나 리더십 경력등으로 볼때 김정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게 중국의 판단이었다』고 말했다.이 인사는 또 북한군부의 동향에 대해 『혁명1세대인 오진우가 후견인인 만큼 쿠데타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분석했다』면서 『중국은 김정일의 건강문제와 김일성의 사체처리만 끝나면 권력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체제를 유지하려는 혁명1세대와 보다 개방 폭을 넓히려는 혁명3세대 사이의 갈등과정에서 이러한 반대세력의 움직임이 변수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한 서방외교관은 『비록 간헐적이지만 북한 내부의 저항은 결국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라면서 지식인들의 저항이 개방의 확대와 연결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김정일 타도」 전단… 정·관가 시각/「김정일세습」 이상징후 추측도/정부/채널 총동원,후속정보 수집에 주력/여야/“일단 사태추이 지켜보자” 신중 반응 정부는 물론 여야 정치권은 평양 시내 외국공관 단지에 「김정일 타도」 전단이 살포된 것에 대해 북한 권력체계의 이상조짐이 본격화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고 보면서 추가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 ○…정부는 이번 사태를 일단 김정일후계체제 구축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로 분석하고 다각적인 대비책 마련에 나섰다.외교및 정보채널을 총동원,후속정보 수집에 주력하는 한편 북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청와대는 현재 반금정일전단이 뿌려졌다는 사실밖에는 다른 후속정보가 없어 북한 내부사정을 정확히 진단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그러나 특수계층만 들어갈 수 있는 외국공관단지에 권력세습을 반대하는 내용의 전단이 뿌려진 것만으로도 김정일후계체제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로 보고 있다. 통일원은 전단사건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날 아침 일찍부터 북한방송을 청취하며 북한내부동향을 예의주시.이번 사건을 점진적인 개방을 유도하는 김정일과 혁신적인 개방정책을 요구하는 일부 엘리트계층간의 노선싸움이라고 보는 분석이 나오는가 하면 이런 움직임이 오히려 김정일의 입지를 강화시켜 권력승계를 재촉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실정. 외무부는 이번 사건에 너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신중한 생각이며 해외공관에 긴급전문을 보내 북한관련 정보수집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 ▷정치권◁ ○…「김정일타도」전단이 아직 북한의 권력관계에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지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신중한 반응. 민자당의 박범진대변인은 이날 당무회의가 끝난 뒤 『한국은 김일성사망후 새로운 남북관계등을 고려,북한의 정세변화를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는 상태』라면서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라고만 언급. 이날 당무회의 토론에서도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회의에 참석했던 일부 당무위원들도 『김정일타도 전단은 과거에도 이따금 있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군부와 당에 반금정일 분위기를 조직화할 구심이 있느냐하는 문제』라고 조심스런 반응. 민주당은 미국 국무부가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을 예로 들며 정부의 정확한 정보수집과 신중한 발표를 주문. 박지원대변인은 『이는 김정일 건강이상설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정부가 이미 밝혔듯 대화로써 북한정권의 안정과 평화적인 핵문제 해결등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므로 조용히 북한의 변화를 주시할 것』이라고 논평. 외교통인 조순승의원은 『북한내 반체제 세력은 김일성생전에도 있었으며 문제는 반체제세력의 존재보다 김정일의 건강이상유무』라고 피력.
  • 「쿠바난민 홍수」 재발에 쐐기/미의 입국 불허 의미

    ◎“올7천명 넘어 위기” 판단,정책변경/카스트로 불만세력 내부폭발 노림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9일 발표한 쿠바난민의 입국 일절불허방침은 일단 대규모 난민유입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지난해 미국으로 들어온 쿠바 탈출자는 3천6백여명이었으나 올해들어서는 8개월도 채 안된 현재 7천2백명을 넘었다.이 며칠사이엔 하루 5백명을 웃도는 등 경고수위를 훨씬 넘고 있었다. 지금까지 미국은 카스트로 공산정권치하의 쿠바탈출인들을 「자유의 투사」로 간주해온 66년 제정된 쿠바조정법에 따라 처리했다. 1백44㎞의 해협을 건너 플로리다에 당도한 쿠바난민들은 특별한 중범죄자와 전염병자가 아닌이상 정치적 망명으로 간주,미국내 친인척 및 후견인의 보호를 조건으로 미국내 체류를 허용해왔던 것이다. 최근의 쿠바난민러시는 지난 80년대 「마리엘 보트난민사건」의 재현을 우려할 정도로 심각해져 18일에는 로즈 차일즈 플로리다주지사가 난민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지난 80년 5개월동안에 쿠바의 마리엘항을 떠나 미국으로 몰려간인원은 12만5천명이나 되었고 당시 카스트로가 조장한 이 난민가운데는 상당수의 정신병자와 범죄자가 포함되었었다. 이번 경우에도 쿠바당국은 자국민들의 출국을 방조하고 있었다. 클린턴의 정책전환에는 카스트로정권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이상 「귀순자」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이같은 저항세력이 내부에서 결집해 폭발력을 가지도록 유도하려는 전략도 깔려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과 더불어 세계에서 「유이」한 스탈린식 공산국가인 쿠바는 구소련의 와해를 계기로 실업률 40%,상품교역량 75% 감소,전력배급제,공장조업중단등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쿠바인들의 대탈출과 함께 발생한 최근의 반정부 폭동 등은 카스트로체제붕괴의 본격적인 신호로 풀이되고 있다. 미국은 해상에서 구조한 쿠바난민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미해군기지에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기지는 이미 아이티난민 1만5천명으로 차있어 쿠바난민들을 계속 수용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다.어쨌던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쿠바난민들은 유사시 카스트로 정권 전복의 전위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쿠바난민사태와 클린턴행정부의 정책전환은 향후 한반도의 상황변화에 따라 북한주민들의 남한유입가능성을 상정해 볼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 김일성,「후계자 정일」 의도적 찬양

    ◎“강한 배짱·신념 소유자” 공사석서 자주 칭찬/「지도력」에 만족… 세습체제에 대한 지지 강조 김일성은 마음 편히 눈을 감았을까.그는 생전에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일의 능력을 얼마나 신뢰했을까. 김일성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뒤 아들의 통치능력과 성품을 높이 인정하고 후계체제를 낙관하는 발언들을 기회가 있을때마다 해왔다.아들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공사석을 통해 얘기해 온 것이다. 그는 올해 초 『김정일 조직비서만큼 신념이 강하고 배짱이 센 사람은 처음 보았다(평양방송 94·3·10)』고 말해 김정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표시했다.3일 뒤 노동신문은 김일성이 『항상 수수한 잠바 차림으로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 온다』며 아들의 검소한 생활을 본받을 것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또 지난 해 3월에는 『김정일 동지가 혁명 사업을 훌륭히 계승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모든 일이 잘 돼 나가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잘 돼 나갈 것』이라며 김정일이 주도할 북한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지난 92년 2월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아 김일성이 직접 지었다는 「광명성 찬가」라는 한시에서 후계자에 대한 평가는 극치를 이룬다.이 시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으며 만민이 그를 칭송하고 있다』고 주장,김정일에 대한 더 할 수 없는 신뢰와 애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김정일에 대한 이 같은 평가가 김일성의 진심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문란한 사생활과 돌출적인 행동에 대해 수차례 질타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지난 해 18년만에 동생인 김영주를 부주석으로 복권시켜 김정일의 후견인 역활을 맡긴 것은 그가 김정일의 지도력과 권력 계승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아들을 자랑하는 「팔불출」역을 자임했던 이유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후에 있을 반발과 혼란을 막고 안정적인 세습체제 구축하기 위한 「의도성 칭찬」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북한 언론이 틈나는대로 보도한 김일성의 김정일에 대한 찬사를 소개한다. 『김정일 동지와 같이 권위있는 철학가,이론가가 있는데 대해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올해 유난히 김정일에 대해 자주 언급해 김일성이 후계체제를 비롯한 통치권 인계작업과 신병정리에 어느 때보다도 높은 관심을 보였음을 엿볼 수 있다.
  • 북의 대외정책(김일성 사후:3)

    ◎중국식개방·대미­일 수교 주력할듯/지도체제 「단일」·「집단」 따라 정책 변화/내부동요 우려,당분간은 “현상유지” 김일성의 사망은 폐쇄와 고립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대외정책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전기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다만 변화의 방향과 속도는 앞으로 북한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절대권력자의 공백에 따른 사회혼란을 막기 위해 북한은 우선 새로운 대외정책을 추구하기 보다는 대외관계의 안정을 통해 내부의 동요를 막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이를 위해 북한은 김일성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 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사회가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할 것으로 관측된다.또 활발한 초청·방문외교활동을 추진하면서 김정일체제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유도할 것에 틀림 없다.남북정상회담및 북·미고위급회담에 집착하는 것도 실질적인 성과보다는 체제안정의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같은 조치는 체제안정을 위한 긴급처방의 성격이 짙다.장기적으로 북한이 어떤 대외정책을 추진할 것인지는 향후 권력체제의 향배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분석된다. 앞으로 치열하게 전개될 권력투쟁과정에서 김정일이 절대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단일지도체제를 세우게 된다면 북한은 평화·자주·친선이라는 주체외교노선의 기본이념 아래 김일성의 외교노선을 지속하면서 점진적인 대외관계 개선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과의 협력강화를 최대당면과제로 삼아 적극적인 관계개선에 나설게 확실하다.국제사회의 유일한 후견인인 데다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절대적인 존재여서 중국과의 관계강화는 북한권력의 장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중국 역시 시장경제확대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안정이 긴요한 만큼 대북지원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중국이 재빨리 김정일체제를 승인하고 나선 것도 북한의 혼란이 중국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다만 김정일체제에서의 북·중관계는 과거 김일성과 등소평사이에 이뤄진 인간적 우호관계에 이르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권력기반의 안정을 위해다소 불편해진 러시아와의 관계개선도 서두를 전망이다. 대미관계에 있어서도 진행중인 북·미고위급회담을 통해 핵문제를 적절히 활용,미국과의 수교를 앞당기려 할 것으로 분석된다.즉 김정일체제가 확고히 구축될 때까지 핵개발의혹을 유지하면서 미국과의 협상을 지속시켜 인권문제등을 거론않는 상태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끌어내려 할 것이다.아울러 무산된 남북정상회담을 조속히 재개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한 뒤 미국과의 정상회담도 서둘러 추진하려 할 공산이 크다.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미국과의 협상진척상황과 보조를 맞춰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일본 사회당 정권의 출범을 북·일관계개선의 호기로 삼아 조총련등을 적극 활용,일본과의 수교회담을 추진할 가능성도 높다. 한편 김정일의 지배체제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공존하는 집단지도체제가 형성된다면 북한의 대외정책은 상당한 혼란이 따를 것으로 분석된다.특히 강경론자들이 득세하거나 집권하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대외개방정책이 후퇴할 가능성마저 배제하기어렵다.김정일이 최고권력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집단지도체제가 구성된다면 강경파의 원칙론을 의식,명분을 앞세운 대서방외교정책을 전개,국제사회에서 경직된 자세를 보일 수도 있다.게다가 핵개발을 가속화 함으로써 국제적인 압력에 정면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유학파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권력의 핵심에 대거 포진하게 된다면 북한의 개혁·개방속도는 가일층 빨라질 수 있을 전망이다.이들 온건·개방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북한의 대외정책노선이 완전히 수정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포기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앞으로 몇년동안 북한의 대외정책은 불안전한 권력구조 때문에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다만 장기적으로 볼 때 폐쇄체제에서 오는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개방정책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으리라는 것이 관계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 개방파·「혁명소조」출신 친위그룹 주도/김정일의 적과 동지들

    ◎당 김용순·황장엽­적 「프라하 3인방」 포진/평일모자·빨치산출신 「잠재적」 반발세력 김정일이 일단 북한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 확실시됨에 따라 그의 친위세력들이 대거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김일성이라는 절대권력자의 사망으로 인한 권력의 진공사태를 메우기 위한 필연적인 수순이다. 따라서 앞으로 김정일체제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긴 하나 당분간 북한정국은 친김정일 세력과 잠재적인 반대세력간의 물밑 암투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친김세력과 반김세력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특수체제의 성격상 쉽지 않다. 우선 김일성 생전에 김부자간 권력세습에 대한 공개적인 반발은 곧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에 김정일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내연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다.그리고 김정일 친위세력은 대부분 김일성 추종세력과 겹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지난 72년 당중앙위 비밀 전원회의에서 공식 후계자로 낙점된 뒤 꾸준히 자신의 시대에 대비해온 것은 사실이다.당·정·군에 걸친 주요 포스트에 은밀히 자신의 세력을 심어온 것이다. 이같은 그의 측근세력은 크게 ▲3대혁명소조를 중심으로 한 소장 저변 친위세력 ▲당·정·군의 이른바 혁명2세대 간부 ▲혁명1세대 중 김정일과 잦은 사적인 교유를 갖는 인물군 ▲친족세력 등으로 대별된다.이들은 상당부분 중첩되는 것도 특징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노동당쪽에선 김용순·김기남·김국태·황장엽 등이 눈에 띈다.이중 대남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용순은 외교 및 대남관계 핵심브레인으로 등장할 전망이다.「주체사상」의 최대 이론가인 황장엽과 김정일의 각종 연설문 등을 대필해온 김기남 등은 김정일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우상화작업을 선도할 이론과 실무책임자로 부상할 공산이 크다. 김정일의 권력안정에 핵심적 열쇠를 쥐고 있는 군쪽에선 오극렬대장과 김강환·김두남 두 전현 당군사부장이 대표적 측근이다.이들 중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오증흡의 아들인 오극렬이야말로 군부내 「혁명2세대」 중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로 차기 인민무력부장이 유력시된다는 관측이다.그는 김정일의 비호하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 88년 오진우인민무력부장과의 마찰로 군총참모장직을 재임 10년만에 최광에게 넘겨준 바 있다. 행정 및 경제분야에선 프라하공대 출신의 3인방인 강성산·연형묵·박남기 등과 전현직 국가계획위원장인 김달현·홍석형 및 최영림 등이 측근인사로 거명된다.이들은 대부분 조심스럽지만 개방노선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있는 대표적 테크노크라트들이다. 이밖에 김정일을 위해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해온 3대혁명소조를 이끌고 있는 장성택도 빼놓을 수 없는 측근이다.그는 김정일의 친여동생인 김경희의 남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김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고 있는 측근세력과는 달리 반김세력들은 수면하에 잠재해 있다.더욱이 어차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북한권력의 속성상 측근세력중에서도 김정일세가 약화될 경우 언제라도 등을 돌릴 인사가 상당하다는 관측이다.이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잠재적 반김 세력들로는 군부와 당에 걸친 이른바 「혁명1세대」그룹 일부와 군부내 소장 및 중견 장교층,그리고 김성애·김평일 등 족벌세력들이다. 김정일의 권력장악에는 오진우를 정점으로 최광인민군총참모장과 이을설호위총국장·백학림사회안전부장·김철만 국방위원을 비롯해 「혁명1세대」의 막내격인 김광진차수 등 빨치산 원로급들의 협조가 절대적이다.그러나 이들중 상당수는 그동안 김일성이 카리스마에 눌려 침묵을 지켰으나 내심 김정일의 노선과 지도력에 회의를 품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때문에 이들 중 일부가 동구유학을 다녀온 중견장교들과 연계해 김정일체제가 대외적 고립과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표면적으로는 후원세력이나 언제든지 등을 돌릴 가능성도 있는 인물들로는 친삼촌인 김영주와 계모 김성애,이복동생 김평일 등 족벌세력들이다.특히 김정일과 후계경쟁에서 밀려나 18년의 은둔 끝에 지난해 일약 부주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김영주는 일단 김의 후견인역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당정에 걸친 추종세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요주의 인물이라는 관측이다. ◎매부 장성택 가장 신임… 요직 앉혀/작년 재기한 숙부 영주의 향배에 관심/김정일과 족벌내 역학관계 김일성은 생전에 자신의 아들 정일을 둘러싸고 빚어지고 있는 가족간 갈등에 대해 심히 우려했었다고 전해진다.그만큼 김정일과 다른 가족간 대립이 심각했고 이는 자신의 사후 정권존립 자체에 위험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김정일과 자신의 후처 김성애,자신의 친동생 김영주,김성애와 사이에 난 아들 즉 김정일의 이복동생 평일과의 관계였다. 지난 72년 이후 20여년간 후계자로서의 정권 정지작업을 다져온 김정일에 있어서 가족관계는 철저히 적과 아의 개념이 분명했다.권력장악의 걸림돌이냐 추종세력이냐가 그 기본선으로 특히 김일성과 자신의 생모 김정숙(49년 사망)사이 관계인 「기본가지」와 계모 김성애(김일성과 56년 결혼)와의 관계인 「곁가지」를 철저히 구분했다. 따라서 김정일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것은 친 여동생으로 북한 여성계의 참모역할을 하는 당 경공업위원장인 경희와 그의 남편 장성택이다.그는 실세로 불리며 중앙당 27개 부서 가운데 3대혁명소조부·근로단체부·청년사업부 등 핵심 3개부서를 맡고 있다.이밖에 신임하는 사람으로는 자신의 브레인으로 사상적 부족함을 메워주는 가정교사 황장엽(전 김일성대총장으로 사상담당 당서기·김일성의 조카사위),양형섭(최고인민회의 의장·김의 4촌동생 김신숙의 남편),김정숙 민주조선 책임주필(김의 4촌동생)등이 있다. 김정일이 배척,김일성의 우환거리를 제공했던 이들과의 「가족화해」를 시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져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지난해.70년대 초반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10년간의 당조직위원장을 지내며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다 75년 김정일에 의해 사실상 숙청된 김영주가 재등장한 것.당내 막강한 지원세력까지 김정일에 의해 「여독청산」란 이름으로 거의 제거돼 은둔생활에 들어간 그는 지난해 7월17일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준공식에김부자등과 모습을 나타내고 이어 며칠뒤 당정치국서열 7위로 부상했다. 또 지난 71년 여맹위원장이 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 김정일에 의해 73년 여사칭호를 박탈당하고 친동생 김성갑마저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던 김성애도 마찬가지.80년 이후 줄곧 공식행사에 얼굴을 못내민채 평양근교 별장에서 두문불출해 오다 지난해 11월 노동신문에 쿠바여성대표단을 맞는 사진이 나오고 이어 여맹전원회의에서 「김정일지도자를 받들자」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지난달 김일성과 함께 카터 전미국대통령을 맞으며 내외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계의 뉴스거리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한편 김평일은 김정일로부터 가장 박대를 받아온 인물.김일성을 닮은 건장한 체구와 카리스마적 얼굴,원만한 성격이 김정일로 하여금 그를 권력의 언저리에서 감시의 대상으로 올려 놓았던것. 불가리아 대사로,핀란드 대사로 겉돌며 북한주민들로부터 동정을 받았던 그가 최근 북한으로 돌아가 군요직을 맡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그 하나다. 이같은 김정일의 관용이 김일성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는 단순한 배려로 그치고 김일성이 사망한 지금 다시 이들을 숙청하거나 「안거」토록 할는지는 분명치않다. 일단은 복권된 이들 친족들이 「조카의,의붓아들의,형의,처남의 대권에 도전하지 않고 적극 밀어주겠다」고 약조한 끝에 나온 족벌정치강화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김정일족벌의 정확한 향배는 11일 이후 김정일이 정식 권력승계절차를 마치고 통치를 행사함에 따라 조만간 드러날 전망이다. ◎올들어 공식행사 6차례만 참석/「친필서한」은 부쩍 늘어… “충성경쟁 유도”/김정일 최근 어디서 뭘했나 김정일은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 김일성을 예우하는 차원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몇가지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1백58∼1백62㎝로 추정되는 단신에다 그의 연설문이 육성으로 단 한 차례도 방송되지 않을 정도로 말을 더듬는 콤플렉스가 있어 대인 기피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정일의 최근 행적 가운데 특별히 눈에 두드러지는것은 없다.평소보다 활동이 눈에 띄게 뜸했다거나 아니면 왕성했다거나 하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김정일의 최근 행적에서 그의 권력승계 여부를 확인하는 단서를 찾기란 힘들다는 얘기이기도 하다.공식적인 자리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대신 뒤에서 조용히 기반을 다져 권력승계에 대비해온 것이다. 김정일이 올들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섯차례에 불과하다. 새해 벽두에 근로자들과 신년모임을 가진데 이어 2월 28일에는 조총련 책임부의장인 허종만과 면담했다.뒤이어 3월 5일에는 북한군 협주단 공연을 관람했고,4월 6일에는 최고인민회의 9기 7차회의에 참석했다. 4월 25일에는 군창건절을 맞아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564군부대를 시찰했고,5월 6일에는 조총련 제1부의장 이진규와 「친선담화」를 나눴다.지난달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처럼 의례적인 공식활동을 하면서도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정책지도 활동이라 할 수 있는 「현지지도」 및 외빈접견 활동은 김일성이 사망할때까지 단 한차례도 갖지 않았다. 올들어 김정일의 보이지 않는 행적 중 눈에 띄는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친필서한」을 보내는 숫자가 예년에 비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친필서한이란 김정일이 주민들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고,이들을 고무·격려하기 위해 직접 쓰는 편지이다.지난 90년 11월 1일 「조선중앙통신사」 당원들에게 보낸 것이 효시이다. 올들어 지난 5월초까지 7차례의 친필서한을 보냈다.예년의 1년치와 맞먹는다. 전문가들은 친필서한이 잦아지고 있는 것을 김정일의 「인덕정치」를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속셈으로 보고있다.사상적으로 취약한 새 세대들에게는 김정일에 대한 「대을 이은 충성」을 확고히 하고,핵문제로 국제적 압력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청년 군인들에게는 김정일 체제 수호를 위한 긴장감을 불어 넣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이후 김정일의 외형적인 행적에서 변화를 찾는다면 생산현장에 대한 「현지지도」가 줄어든 대신 군관련 행사 참여가 늘고 있는 점이다.군후방일꾼대회·전승기념탑 제막식·공병대회 등에 참석하고,전승기념 퍼레이드를 관람하는 등 군관련 행사에는 매우 활발하게 참여했다.지난해 4월 국방위원장으로 선임된 이후 당연한 결과로 지적되고 있으나,권력승계에 대비해 군부를 미리 장악하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 로드 차관보 「클린턴 아주외교」 비난 서한/미 행정부 파문 확산

    ◎“제재위주는 장기적으로 미에 손해” 지적/국무부 위상 회복 겨냥… 장관 조기경질설 【도쿄 연합】 빌 클린턴 미행정부의 대아시아 외교정책이 「배려가 결여됨으로써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고 각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비난했던 윈스턴 로드 미국무차관보(동아시아·태평양담당)의 서한 내용이 밝혀졌다고 일 요미우리(독매)신문이 17일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이 서한은 로드 차관보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에게 보낸 것으로 미행정부안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서한의 내용이 표현은 부드러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속으로는 일본과 중국등에 대해 강경일변도의 외교정책을 취하고 있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시정을 요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위상이 격한된 국무부의 실지회복도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제1의 아시아통으로 알려진 로드 차관보는 이 서한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정책의 우선순위도 매기지 않은채 의회등 일부 국내세력의 사정에 맞추어 일방적인 제재조치를 취하는 행태』를 취하고 있다면서 이같은 외교노선이 아시아의 거부반응을 초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요미우리는 이 서한이 나온 지난달부터 크리스토퍼 장관의 경질문제가 재부상해 월터 먼데일 주일대사의 국무장관 기용,로드 차관보의 조기사임설까지 나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로드 차관보의 서한 요지. 클린턴 정권의 대아시아 외교정책의 당초 과제는 미국 전체외교에서 차지하는 아시아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었다.그러나 현재 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언제부터 국제적인 후견인이 되었는가」라는 비판이 강해지면서 미국의 플러스 이미지가 무너지고 있으며 각국은 미국의 아시아개입에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원인은 미국의 일방적이고 적대적인 정책에 있으며 이 점이 분노와 우려를 촉발하고 있다.특히 일본과 중국에서의 대미 불쾌감이 크다.미국으로서는 일본과 중국이 국제적인 규범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데 대해 문제가 될 것이지만 아시아와 다른 지역의 국가들로서는 오히려 미국은 국내용으로 외교정책을 구사함으로써(아·태지역의)평와와 번영을 해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시아지역에 있어서 미국의 경제안보 확보와 민주화 촉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로 보강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결과를 초래해 그때그때 정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시아 국가들이 지니고 있는 불쾌감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시장,미국자본과 기술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것이 기본적인 것이다.
  • “이런 민원 이런곳에 호소하세요”

    ◎불편신고센터/기관 업무협조로 복합민원 일괄처리/국민고충처리위/행정기관에 의한 권익 침해문제 해결 일상생활에서 때론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않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결책을 잘 몰라 불편을 감내하고 있는 실정.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민원 해결을 위해 중앙의 정부합동민원실을 비롯해 각 시·도에 민원불편신고센터·민원봉사실 등을 설치,운영하고 있다.또 문민정부 들어서 각 민원담당부서에서는 친절하고 신속한 민원해결을 위한 각종 아이디어를 앞다투어 내고 있으나 홍보 미흡으로 이용자가 많지 않은 편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의 도움말로 알아두면 편리한 중앙부처및 지방민원기관을 소개한다. ◇민원불편신고센터=내무부와 각 시·도에 설치되어 복합민원을 민원인이 단 한번 방문,접수하면 모든 절차를 민원주관부서 담당공무원이 행정기관 내부의 업무협조를 통해 직접 처리하는 「민원1회방문처리제」를 실시한다.전화및 팩스번호는 표와 같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서울 정부종합청사 맞은편에 위치해 행정기관의처분으로 권익을 침해 당한 국민의 신고접수가 있을 경우 관계 행정기관과 신청인을 상대로 조사해 이를 토대로 심의·의결한뒤 신청인에게 결과를 통지한다.전화 (02)735­0124∼30.팩스(02)735­6091. ◇서울시=시청과 각 구청 대표전화 국번에 120번을 누르면 행정과 관련된 모든 사항과 생활불편을 신고할 수 있고 각종 고발도 가능하다. ◇경상북도=여권발급기관인 도청이나 시·군청에 1회 방문하여 여권을 발급받는 「여권1회방문발급제」를 실시하고 있다.(053)941­3001 ◇충청북도=민원인이 민원을 제출하면 그 민원이 끝날 때까지 계장급 공무원으로 구성된 8백명의 후견인이 민원처리상황을 관리하는 「민원후견인제」를 운영하고 있다.(0431)52­3000 ◇전라북도=전국 어디서나 원하는 민원을 처리할 수 있는 「전화민원우송제」를 실시,전북 각 행정기관이 계좌를 개설한 우체국에 온라인으로 수수료를 입금하면 우편으로 원하는 민원서류를 우송해준다.(062)222­3001 이밖에 ▲부산시 (051)469­3001) ▲광주시 (062)223­3000 ▲경기도 (03 31)42­3001 ▲강원도 (0361)54­3001 ▲충청남도 (042)251­2250 ▲경상남도 (0551)83­3001 ▲전라남도 (062)222­3001번 등의 민원상담실로 전화하면 민원상담이 가능하다.
  • 김일성,핵·경제 직접 챙긴다

    ◎“강성일변도 김정일 행보에 제동” 분석/후계체제 부각 불구 「승계」 늦어질듯 최근 북한의 공식후계자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작업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김일성친정체제가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관계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김정일이 올들어 공개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김일성은 전면에 나타나는 횟수가 두드러지고 증가하고 있다. 정부당국도 이점을 주목하고 있다.김영삼대통령이 방일중인 25일 주일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지난 1월 방북한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목사에게 김일성이 『현재 북한은 1백% 내가 장악하고 있다』고 언급한 사실을 소개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이같은 움직임에 비추어 북한은 선전적 차원에서는 김정일후계체제를 계속 강화할 것이지만 주석직이나 당총비서직 등 최고위직의 이양은 당분간 유보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는 김일성이 김정일의 정권장악능력에 대해 퍽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김주석이 김정일과의 후계다툼에서 밀려나 운둔상태에 있던 친동생 김영주를 지난해 하반기 일약 부주석으로 복귀시킨 사실에서도 이같은 징후가 엿보인다. 이처럼 올들어 김일성이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 김정일 건강이상설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현재로선 확인키 어렵다.다만 지난해 김정일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등 일련의 강성일변도의 핵게임을 김일성이 그다지 탐탁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더욱이 북한경제가 바닥세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점 역시 김일성을 전면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김영주의 복귀나 김일성의 처 김성애의 공식활동 재개 등은 김일성 사망시 김정일의 권력장악을 가족체제로 보완하기 위한 안전장치로도 볼 수 있다.한마디로 고령인 김일성의 노회한 「유언체제」인 셈이다. 민족통일연구원 허문령연구위원은 김영주등의 후견인적 역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우선 김일성 자신의 사망시 북한인민의 지지기반이 취약하며 정책수행능력이나 통치기반장악력이 떨어지는 김정일을 혈족중심으로 후원토록 한다는 분석이다. 한편 북한의 각종 매체들을 통한 김정일에 대한 외견상의 우상화작업은 올들어 극에 달한 느낌이다.그에 대한 호칭만 해도 「어버이」 「수령」등 김일성과 거의 동급으로 사용되고 있다.심지어 휴전선일대의 대남확성기방송 청취과정에서 김정일에 대해 「주석」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사례가 지난 10일부터 총27차례이상 수집될 정도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은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무산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이 불만족스럽게 끝남으로써 국제사회의 강경대응분위기가 조성된 이후에도 연일 김정일의 지도력을 부각시키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 “북,개방확대속 「세습」 굳힐것”/민주평통 토론회 주제발표 요지

    ◎현 체제변화 난망… 경제제일주의엔 한계/북 개혁파 입지 강화위한 대북정책 필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16일 하오 서울 장충동 사무처 회의실에서 최근 열렸던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이후의 북한정세 평가와 전망에 관한 토론회를 가졌다. 이재근 서울신문 통일안보연구소장,유석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등이 토론에 참가한 이날 토론회에서 민족통일연구원의 허문령연구위원과 중앙대 신창민교수가 각각 「북한 권력구조 변동과 대내외정책」,「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한 북한경제실상과 개방화 전망」에 대해 주제를 발표했다. 주제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허문령연구위원=북한이 이번에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를 노동당 정치국원과 부주석으로 기용한 것은 체제옹호를 위한 내부결속용인 동시에 김일성 사후 김정일체제를 위한 「후견인」용이다. 김용순,김달현 등 온건 개방지향적 관료의 퇴조와 양형섭,홍석형 등 보수파 약진이라는 인사조치의 배경은 김정일이 주도한 제3차 7개년계획 등 대내외정책 실패에 대해 실무책임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문책한 것으로 보인다. 김부자 세습체제는 3대혁명역량의 전반적 약화에도 불구하고 완전고용제 실현,정보차단과 사상통제,친인척 및 충성분자 요직 기용 등으로 상당히 안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내년에도 김일성 사망등 특수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는 한 현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다만 내년에 핵무기 개발의혹이 해결되고 남북대화가 활발히 전개될 경우 북한은 김정일의 주석직 이양을 통해 권력승계에 막바지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김부자 세습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대내단속을통한 대외개방 확대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그러나 북한의 의도와 달리 체제유지에 실패할 경우 북한은 내란과 더불어 주변4강의 대북한 간섭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대북정책 기본방향은 북한내 개혁지향적 세력의 입지를 강화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신창민교수=북한은 최근 수년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해온데다 올해 냉해까지 겹쳐 주민들에게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따라 경제계획의 실패를 자인했다.이에 따라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상황으로부터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앞으로 2∼3년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농업,경공업 및 무역제일주의로 나갈 것을 표방하고 있다. 이상의 3가지 「제일주의」정책은 뚜렷한 정책대안을 제시했다기 보다 식생활문제나 낮은 생활수준 등으로 인한 내부적 동요를 막으면서 시급한 외화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뜻이 담겨있다.경제계획의 실패를 국제환경의 변화와 과다한 군비지출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으나 자력갱생을 표방하는 대내지향적 경제성장도모와 사회주의체제가 내포하고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해선 변화의 조짐이 없다.따라서 새로운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측의 경제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의사종교집단화되어 있는 북측체제가 쉽게 무너지리라 보기는 어렵다.필자는 북측의 1인당 소득수준이 현재 남측의 7분의 1상태에서 5분의 1상태를 넘어서면서 통일이 이룩될 것이라는 예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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