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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광복 73년에도 아직 갈 길 먼 독립유공자 발굴과 예우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광복절 경축사에서 “묻힌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마지막 한 분까지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고, 그 공적을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에도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9월 독립운동 사료에 대한 국가 입증 책임을 강화하고, 포상 심사 기준 재검토 등을 담은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확대 계획안’을 내놓았다. 지난 6월엔 ‘수형(옥고) 3개월 이상’이라는 기준 조항을 없애고, 당시 사회 구조상 관련 공식 기록이 많지 않은 여성은 일기, 회고록, 수기 등 직간접 자료도 폭넓게 인정하는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 개선안’을 확정했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고(故) 안맥결 여사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안 여사는 한 달여 만에 가석방됐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해 이번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혁명군으로 활약한 조부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더니 70년이 넘은 중국 법원의 재판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어느 후손의 한탄은 보훈처가 누구를 위한 기관인지 되묻게 한다. 그동안 소외됐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도 시급하다. 지난 1년간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이 발굴돼 이 중 26명이 이번에 서훈을 받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전체 포상자 1만 5000여명 중에 2%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차별을 딛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여성 애국지사들의 항일 역사가 온전히 복원될 때 광복의 의미가 더욱 빛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 주도해야… 野와 협치는 필수”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 주도해야… 野와 협치는 필수”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을 주도해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국익을 위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협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불가능합니다.”남재희(84) 전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논객이자 정치평론가로 손꼽힌다. 서울신문 주필 등 언론인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과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관 재임 당시에도 노동계의 무노동 부분임금을 지지하면서 ‘비판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웅숭 깊은 진보적 색채의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에서 만난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북핵 등 국제 정세와 한국 정치에 대해 막힘 없이 의견을 풀어냈다.→요즘 북·미 회담을 보면 마치 외줄타기 하는 광대를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미국이나 북한이나 최고도의 전략 전술을 발휘하는 거다. 미국은 회담 과정에서 두 개의 목표가 있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북핵의 제거다.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서 ICBM 해결은 끝난 것 같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 활용할 카드가 생긴 셈이다. ‘내 업적은 ICBM을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북핵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계속 북핵 협상에 낙관적인 이유다. 하지만 북한에게 핵은 유일한 밑천이다. 핵 하나만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불가침협정, 수교, 원조 등 여러 가지를 다 해결해야 한다. 협상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도 3년 중에 1년은 전쟁을 하고 나머지 2년은 전쟁과 협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그러나 둘 다 판이 깨지는 걸 원치 않으니 결국 긴장 완화로 향할 것이다. →주한미군 주둔 인정 여부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도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직접 이야기한 건 아니다.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을 미리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주둔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것이다. 국제정치의 큰 흐름으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중간자로서 우리의 역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부시가) ‘디스 맨’이라고 지칭했다. 우리 식으로는 ‘이 자’에 해당한다.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당시 재임했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도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해 ‘크레이지’(Crazy)라는 표현을 썼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강경화 외무장관 등을 계속 특사로 보냈다. 그 덕분에 아직 미국과의 관계는 부드러운 것 같다. 우리 입장에서 미국의 국익이라는 미국 정부의 기본 라인은 건드릴 수 없다. 2000년대 말 집권한 일본 민주당 정권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자주외교를 시도했다. 그 일본 민주당 정권은 단명했다. 미국 외교 라인과의 마찰이 한 요인이 됐다는 게 국제정치학계의 정설이다. 미국을 벗어난 자주외교는 쉽지 않다.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출범 초에 ‘혁명적 상황에서 만들어졌으니 혁명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는데.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부는 혁명적 상황을 비혁명적인 해법으로 일관했다. 군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방치했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최소한 반 정도는 혁명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 조류에 씻겨 내려간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는 긍정적으로 본다. 기무사 해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방선거 압승 이후 여당의 폭주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정치 지형은 보수가 강하다. 이는 남북이 분단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향력도 엄청났다. 그에 반해 진보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정치 지형만 놓고 보면 어쩌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 온 것이다. 진보 정부라도 제대로 된 진보가 아닌 약한 진보다.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낙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책임이 있는 자유한국당은 ‘연옥’을 거쳐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청와대의 협치내각 구상은 어떻게 보나.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인 이해찬 의원 관련 기사를 가리키며) 이 의원이 자꾸 말을 잘못한다. 협치하자고 하면서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고 이야기하면 되겠나. 여당이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면 야당을 슬슬 구슬러야 한다. 끌어들이지 못할망정 도발하는 건 맞지 않다. 이 의원은 문 대통령과 갈등을 빚거나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나(이 의원)는 (예전에) 총리였고, 넌(문 대통령) 민정수석이었고, 난 (운동권) 선배고 넌 후배’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인터뷰가 끝난 직후 이 의원이 문 대통령을 ‘문 실장’이라 지칭한 보도가 나와 논란이 일었다). →연동형비례대표제 등 개헌을 통한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활발하다. -인구 대비 적정 국회의원 수는 우리나라가 500명 정도이지만, 단원제를 감안하면 350명 정도가 적정 숫자다. 의원수를 현재보다 늘리는 데 대해 국민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숙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유럽식 선진 정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15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제안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도는 상대방보다 약간의 표만 더 받으면 권력의 전부를 갖는 거다.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라는 게 정치학의 기본 아닌가. →빈부 격차 심화가 사회 정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의견도 많다. -일본 파나소닉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은 “땅은 공기나 물과 같다”고 말했다. 하늘이 주고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땅을 독과점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땅의 독점을 통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빈부 격차가 심화한다면 당연히 정부가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만 종부세 인상 등은 ‘오리털 뽑듯이’ 올려야 한다. →얼마 전 한 언론(프레시안)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을 썼다. -노 의원과도 술자리를 갖는 등 잘 어울렸다. 내가 인정하는 ‘구라’는 3명이다. 소설가 황석영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리고 노 의원이었다. 구라는 과장과 재치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황석영은 소설가로 1급, 유홍준은 미술평론으로 1급, 그리고 노 의원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으로 1급이었다. 한국 정치 언어의 품격을 높인 그가 그런 선택을 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남재희는 누구 언론인 출신 4선 국회의원·장관… 운동권 딸들로 인해 우여곡절도 193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1952년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2년 수료 후 1954년 같은 대학 법학과에 재입학했다. 1958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민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을 지낸 뒤 서울신문에서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했다. 이후 1979년 서울 강서구에서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3대까지 내리 4선을 지냈다. 보수당 의원 시절 운동권 딸들 덕분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1981년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장녀 남화숙(현 미 워싱턴대 교수)씨가 시위 도중 연행되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사퇴서를 썼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반려했다. 차녀인 남영숙 주노르웨이 대사도 시위 전력으로 옥고를 치렀다. 1986년 하나회 멤버 중심의 군 고위 장성과 현직 국회의원들의 취중 난투극으로 알려진 ‘국방위 회식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정계 은퇴 뒤에는 집필과 강연 등을 이어 오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진보열전’ 등이 있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남재희 전 노동장관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국면 주도해야”

    남재희 전 노동장관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국면 주도해야”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을 주도해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국익을 위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협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는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남재희(84) 전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논객이자 정치평론가로 손꼽힌다. 서울신문 주필 등 언론인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과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관 재임 당시에도 노동계의 무노동 부분임금을 지지하면서 ‘비판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웅숭 깊은 진보적 색채의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에서 만난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북핵 등 국제 정세와 한국 정치에 대해 막힘 없이 고견을 풀어냈다. -요즘 북·미 회담을 보면 마치 외줄타기 하는 광대를 눈 앞에 둔 듯 하다. 연일 냉·온탕을 오가고 있는데 어떻게 될까. =미국이나 북한이나 최고도의 전략 전술을 발휘하는 거다. 미국은 회담 과정에서 두 개의 목표가 있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북핵의 제거다.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직후 일본 국제정치학자가 ‘북한 문제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할 시도는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핵 장착 미사일의 제거이고, 그 다음이 북핵일 것’이라고 분석하던데 맞는 이야기다.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서 ICBM 해결은 끝난 것 같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 활용할 카드가 생긴 셈이다. ‘내 업적은 ICBM을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북핵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계속 북핵 협상에 낙관적인 이유다. 하지만 북한에게 핵은 유일한 밑천이다. 마지막 카드를 내놓는 건데 최고가로 흥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은 핵 하나만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불가침협정, 수교, 원조 등 여러가지를 다 해결해야 한다. 협상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 1년 간 전쟁이 벌어진 뒤 나머지 2년 간은 협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공산권 협상은 전쟁과 협상이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이뤄진다. 공격하면서도 대화하고 대화하면서도 공격을 가하는 ‘타타담담(打打談談) 담담타타(談談打打)’가 그것이다. 나라도 마지막 카드는 쉽게 버리지 않을 거다. -판이 아예 깨질 가능성은 없나. =트럼프가 ICBM을 이용해 중간선거를 막더라도 여러 난제들이 있다. 북핵 말고도 이란·시리아 등 중동 문제도 복잡하다. 동북아 전체로 봐서도 러시아와 중국 등과 해결할 문제가 간단치 않다. 그러니 북한 문제가 추가적으로 악화되는 걸 원치 않는다. 쾌도난마 식으로 북한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없다. 북한도 판을 뒤엎을 처지가 못 된다. 국제 사회의 공론도 무시 못한다. 북한을 괴멸시키는 대신 북한의 생존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바뀐 상태다. 그러니 결국 북미 긴장이 풀리는 방향으로 갈 거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우호적이라는 점도 북에게는 큰 힘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북한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쿠바의 경우 결국 카스트로 형제들이 다 물러나고 다른 이들이 집권하고 있다. 쿠바 모델이 북에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주한미군 주둔 인정 여부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도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직접 이야기한 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심증을 가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을 미리 인정하지는 않을 거다. 주둔의 불가피성은 이해하지만 바겐 포인트를 스스로 버릴 이유가 없지 않냐. 협상할 때는 미군 철군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주한미군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국제정치의 큰 흐름으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중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디스 맨’이라고 지칭했다. 우리 식으로는 ‘이 자’에 해당한다.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당시 재임했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도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해 ‘크레이지(Crazy)’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 식으로는 ‘괴짜’ 정도에 해당한다. 노 전 대통령이 미국 입장에서는 까다롭고 불쾌했다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강경화 외무장관 등을 계속 특사로 보냈다. 그 덕분에 아직 미국과의 관계는 부드러운 것 같다. 다만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미국의 국익이라는 미국 정부의 기본 라인은 건드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6월 계간지 ‘황해문화’ 발간 100호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개번 맥코맥 호주국립대 태평양아시아학과 교수의 진단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맥코맥 교수에 따르면 2000년대 말 집권한 일본 민주당 정권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자주외교를 시도했다. 그때 나온 말이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이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제국주의 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한 정치인이다. 방한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까지 꿇은 사람이다. 그러나 일본 민주당 정권의 단명은 미국 외교라인과의 마찰이 한 요인이 됐다는 게 국제정치학계의 정설이다. 일본보다 외교력이나 경제력이 약한 한국은 더 말할 게 없다. 미국을 벗어난 자주 외교는 쉽지 않다.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다. 사대에 대해서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대는 약소국의 생존 전략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조선은 사대 정책을 펴왔지만 그걸 욕하기는 어렵다.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외교를 이끈 변영태 외교부장관이 퇴임 뒤 사석에서 “중국 주변국 중 화교가 자리를 못 잡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리 조상들의 사대외교가 능수능란하고 현명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설명하더라. 노예근성을 갖자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미 관계에서도 자존심만 내세울 건 아니다. 현실감각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였다가 전향했던 박진목씨가 과거에 언론인들과 친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평양 밀사로 가서 이승엽 당시 국가검열상과 협상을 벌였던 인물이다. 박씨의 지론은 “과거 남로당이 생각을 잘못 했다. 그 막강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물리친 미군을 상대로 남로당 몇몇이 ‘물러나라’고 투쟁했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중국이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는 중국의 부상과 동북아 정세를 일컬어 ‘빙하를 움직이는 일’(Moving Ice Glacier)라고 표현한다. 강대국 입장에서 빙하는 한반도다. 빙하가 움직이려면 몇 십년 몇 백년이 걸린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출범 초에 혁명적 상황에서 만들어졌으니 혁명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는데.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부는 혁명적 상황을 비혁명적인 해법으로 일관했다. 군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방치했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최소한 반 정도는 혁명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 조류에 씻겨 내려간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는 반 쯤은 혁명적인 색깔을 드러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기무사 해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쿠데타의 원조인 기무사를 이번 기회에 해체해 개편해야 한다. 최근 경제가 안 좋다. 근로시간 단축이나 최저임금 상승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적인 경기 하락이라는 해외 요인이 더 크다. ‘삼성 투자 구걸’ 논란도 일종의 소아병적 반응이다. 대범하게 바라봐야 한다. -지방선거 압승 이후 여당의 탈주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정치 지형은 보수가 강하다. 이는 남북이 분단됐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는 북한에서의 상층 인텔리들이 월남을 하면서 남쪽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개신교만 해도 평안도 출신의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가 주역이 되고, 함경도 기반의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는 소수가 됐다. 예장을 대표한 한경직 목사도 보수적인 색채가 매우 강했다. 미국의 영향력도 엄청났다. 미국이 길러낸 군, 학자, 언론 등 분야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국 문화가 압도적이다 보니 보수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에 반해 진보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한국전쟁으로 일단 궤멸됐다가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사형당하면서 더 위축됐다. 4·19 혁명 이후 잠시 머리를 들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또 다시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정도가 진보의 명맥을 이은 것이다. 정치 지형만 놓고 보면 어쩌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온 것이다. 진보 정부라도 제대로 된 진보가 아닌 약한 진보다. 김대중 정부는 아주 약한,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조금 약한 진보 정부다. 이에 반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강한 보수였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낙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박근혜 정부가 완전히 망치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막말정치를 일삼으면서 보수가 힘을 못 쓰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책임이 있는 한국당은 연옥을 거쳐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엄청난 자정 노력 숙청, 반성 등 재생을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했지만 연옥을 안 거치니 안 되는 거다.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점잖게 나가고 있지만 위기에 부딪혔을 때 어떤 행태를 보일 지 지켜봐야 한다. -그렇기에 평소 협치를 강조한 게 아닌가. 청와대도 협치내각을 구상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인 이해찬 의원 관련 기사를 가리키며) 이 의원이 자꾸 말을 잘못 한다. 협치하자고 하면서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고 이야기하면 되겠냐. 여당이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면 야당을 슬슬 구슬러야 한다. 같은 표현이라도 ‘개혁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이렇게 자극하면 될 일도 안 된다. 한국당과의 협치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더라도 그런 입장을 취해야 한다. 끌어들이지 못할 망정 도발하는 건 맞지 않다. 이 의원은 문 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껄끄러운 관계로 가면 안 되는데 문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나(이 의원)는 (예전에) 총리였고 넌(문 대통령) 민정수석이었고, 난 (운동권) 선배고 넌 후배’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개헌을 통한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활발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10년 전 쯤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전 세계 인구 대비 적정 의원수는 우리나라가 500명 정도이고, 단원제를 감안하면 350명 정도가 적정한 것으로 나온다. 의원수를 현재보다 늘리는 데 대해 국민들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숙제다.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의원이 정치 일성으로 의원수를 줄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안철수는 끝났다’고 주변에 이야기했다. 의원 수를 줄이자는 건 정치를 전혀 모르는 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유럽식 선진 정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15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했을 것이다. 나도 국회의원에 5번 출마해서 4번 이겼다. 상대방보다 약간의 표만 먹으면 권력의 전부를 먹는 거다.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이다. 이건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라는 게 정치학의 기본 아닌가.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서는 4년 중임제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5년 단임제 역시 무리하게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1987년 개헌 과정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유력 정치인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통령이 되기 위한 속내로 5년 단임을 지지한 측면이 강하다. 지금은 속도가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이젠 10년이 아닌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내각책임제는 우리 현실에서는 절대 안 된다. 국회의원들이 서로 자리다툼에 골몰해 내각이 몇 개월 만에 무너지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싸움하다가 볼일 못 볼 수 있다. 제2공화국 당시에도 헌법에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이 분명히 구분돼 있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면 전 총리는 권력을 놓고 서로 암투를 일삼았다. -경제 면에서는 빈부격차 심화가 사회정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의견도 많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헨리 조지를 언급하며 강조한 것처럼 지대추구의 특권이 용인되는, 곧 땅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건 큰 문제다. 일본 파나소닉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은 “땅은 공기나 물과 같다”고 말했다. 하늘이 주고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땅을 독과점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땅의 독점을 통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면 당연히 정부 정책으로 해결돼야 한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많이 올리지도 않았지만 종부세 인상으로 벼락을 맞았다. 속도는 알게 모르게 해야 한다. ‘오리털 뽑듯이 올린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원래 오리털은 펜촉으로 쓸 용도로 뽑았다. 오리털을 뽑으면 상처는 안 나지만 오리는 매우 아파한다고 하더라. 그래도 오리털은 뽑아야 한다. -얼마 전 한 언론(프레시안)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을 썼다. =노 의원보다는 심상정 의원과 더 가깝다. 하지만 노 의원과도 술자리를 갖는 등 잘 어울려 다녔다. 내가 인정하는 ‘구라’는 3명이다. 소설가 황석영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리고 노 의원이었다. 구라는 과장과 재치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황석영은 소설가로 1급, 유홍준은 미술평론으로 1급, 그리고 노 의원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으로 1급이었다. 한국 정치 언어의 품격을 높인 그가 그런 선택을 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MB 퇴원 후 첫 재판… “김소남에게 공천헌금 2억원 받아” 김백준 자술서 공개

    MB 퇴원 후 첫 재판… “김소남에게 공천헌금 2억원 받아” 김백준 자술서 공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2008년 4월 총선 전후로 김소남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공천헌금 2억원을 받아 건넸다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의 자술서가 법정에서 공개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정계선) 심리로 7일 열린 이 전 대통령의 공판에서는 2008년 총선 당시 공천헌금과 관련된 검찰 측 서증조사가 진행됐다. 지난달 30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수면무호흡증과 당뇨·고혈압 등의 지병에 대한 진료를 받고 지난 3일 퇴원한 이 전 대통령도 재판에 출석했다. 이 전 대통령은 법정의 방청성 쪽 난간을 짚으며 약간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법정에 들어섰다. 머리가 부쩍 하얗게 샌 모습이었다. 재판부가 별도로 이 전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묻지는 않았고 이 전 대통령 측도 병원 진료와 관련된 의견을 따로 밝히지 않은 채 재판이 시작됐다. 이 전 대통령의 퇴원 후 첫 재판이어서인지 이날 법정에는 과거 친이계 의원들도 여럿 참석했다. 재판을 여러 차례 방청한 이재오 전 특임장관을 비롯해 주호영 자유한국당 의원, 이춘식·임동규·안경률 전 한나라당 의원이 방청석을 지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재판에서 2008년 총선 당시 공천헌금에 대한 혐의가 다뤄졌고, 친이계 인사들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서증조사 자료 화면을 유심히 지켜봤다. 2008년 총선 당시 언론기사나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의 회고록 등을 통해 “이번 공천은 이재오·이방호가 다 한 것”이라는 취지의 언급과 기사 속 사진을 통해 자료화면에 이 전 장관이 몇 차례나 등장했다. 검찰은 이날 이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이 “2008년 3월 김소남 의원으로부터 ‘이명박 대통령께 부탁해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게 해달라’는 말을 듣고 이를 이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이후 김 의원이 비례대표로 당선됐다”며 자필로 적은 자술서를 공개했다. 지난 1월 30일 작성된 자술서에서 김 전 기획관은 “2008년 3~4월쯤 김소남 의원으로부터 청와대 앞 도로에서 5000만원씩 4번에 걸쳐 합계 2억원을 받아 대통령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병모 청계재단 사무국장에게 전달했다”면서 “돈을 받기 전후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소남이 인사를 했다’고 말씀드렸고, 이병모와 함께 집무실에 찾아가 돈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김 전 기획관은 자술서를 쓴 다음날인 지난 1월 31일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이 같은 사실을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 전 의원이 공천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과 관련해 “김 전 의원은 주로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게 직접 (공천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가끔 저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 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탁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김 전 의원이 총선 전후로 네 번에 걸쳐 5000만원씩 총 2억원을 건넸는데, 이에 대해 김 전 기획관은 “김 전 의원이 청와대 연무관이나 무궁화동산 부근에 와서 저에게 전화를 해 ‘저 왔어요’하면 제가 연풍문으로 나가 길 건너 인근 도로가에서 기다렸다. 그러면 김 전 의원이 시간 맞춰 차를 타고 와 제가 있는 도로가에 서행하면서 창문을 내린 다음 저에게 검은 비닐봉지를 줬다”고 진술했다. 당시 5만원권이 발행되기 전이라 1만원권으로 5000만원씩 담았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김 전 의원은 총선에서 실제로 비례대표 7번을 배정받아 당선됐다. 김 전 기획관은 “대통령 취임 전 최시중, 이상득, 천신일 등 주요 핵심 멤버들이 공천자 선정회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천신일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소남 의원을 적극 추천했다”면서 “저는 2008년 3월 다른 업무보고 관계로 대통령 집무실에 갔을 때 ‘김소남이 공을 들이고 있다’고 했더니 이 전 대통령이 저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전 기획관 스스로도 김 전 의원에 대해 경력 등 여러가지 면에서 부족했다고 인정하면서 “비례대표 7번으로 공천해줄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김 전 의원이 도대체 이 전 대통령과 어떤 관계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2020년 美대선 가상 대결… 바이든, 트럼프 눌렀다

    2020년 美대선 가상 대결… 바이든, 트럼프 눌렀다

    온건파로 ‘중도 표심’ 확장성 장점 오바마, 81명 지지 후보 명단 공개 하원 도전 한인 2세 앤디 김도 포함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이 2020년 미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에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대통령을 7% 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을 저지할 대항마로 부상한 바이든 전 부통령은 지난해부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행보를 이어 왔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일(현지시간) 모닝컨설트와 공동으로 실시한 대선 가상대결 여론 조사 결과 바이든 전 부통령이 44% 대 37%로 트럼프 대통령을 이겼다고 보도했다. 설문은 지난달 26~30일 1993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바이든 전 부통령을 택한 응답자 가운데 민주당 비중은 80%였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응답자의 78%는 공화당 소속이었다. 30여년간 상원의원을 지내고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으로 재임한 바이든 전 부통령은 온건한 이미지로 중도 성향 유권자를 품을 수 있는 확장성이 장점으로 꼽힌다. 2016년 미 대선 때도 유력 주자로 분류됐으나 장남인 보 바이든 전 델라웨어 법무장관이 뇌종양으로 사망한 2015년 그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자금 모금을 위한 슈퍼팩(특별정치활동위원회)을 창설한 데 이어 11월에는 ‘약속해요 아빠: 희망, 고난, 그리고 목표의 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내 북투어를 진행했다. 올 3월에는 한 정치 행사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고교생이었다면 그를 체육관 뒤로 끌고 가 흠씬 두들겨 팼을 것”이라고 말해 설전을 벌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싸움이 벌어지면) 그는 금방 나가떨어져 엉엉 울 것이다. 사람들을 협박하지 말라”고 트윗으로 반격했다. 한편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오바마 전 대통령이 14개 주 81명의 민주당 후보자 명단을 공개해 이들을 지지하며 본격 선거캠페인에 나섰다고 워싱턴포스트 등이 보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성명을 내 “다양하고 애국심이 있으며 관대한 이들 민주당 후보가 미국을 대표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하는 한인 2세 앤디 김(뉴저지)도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는 오바마 정부 당시 2011~2015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라크 및 이슬람국가(IS) 담당 보좌관과 나토 사령관 전략 참모를 지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적극 지지 의사를 밝힌 후보 중에는 첫 흑인 여성 주지사에 도전하는 스테이시 에이브럼스(조지아)와 J B 프리츠커(일리노이) 등이 포함됐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김균미의 세계는 지금]정상회담과 통역…‘비밀 유지의 의무 vs 국익’

    [김균미의 세계는 지금]정상회담과 통역…‘비밀 유지의 의무 vs 국익’

    마리나 그로스와 이연향. 미국과 러시아의 헬싱키 정상회담과 북한과 미국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활약한 미 국무부 소속 여성 통역관들이다. 정상회담이 끝나고 나서 진행되는 공동기자회견을 보다가 통역하는 사람들한테 관심이 갈 때가 있다. 통역을 아주 잘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자회견의 통역 수준이 아니라 단독 정상회담의 유일한 배석자였다는 이유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공개되지 않은 정상 간 대화 내용 중에 혹시라도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들이 포함됐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렸다. 확대정상회담은 배석자들이 있어 오간 내용을 정리해 기록으로 보관한다. 단독정상회담도 최고위급 관리가 배석해 대화내용을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통역들만 배석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15분간 배석자 없이 단독정상회담을 했다. 지난 16일에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90분 동안 양측의 통역 2명만 배석한 채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도 한때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 미 의회와 언론의 이목은 온통 푸틴 대통령과의 단독정상회담에 쏠려 있다. 미 민주당 의원들 “통역, 청문회 나와라” 트럼프 대통령이나 백악관에서 정상 간 오간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면 통역을 의회 청문회에 불러내 무슨 얘기를 나눴고, 약속했는지 밝혀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러 정상회담이 끝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의 조사결과보다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더 신뢰하는 듯한 발언으로 미 국내에서 거센 역풍이 일자 바로 발언 내용을 정정했다. 또 회견에서 미국인 사업가와 외교관 등에 대한 러시아 사법 당국의 조사를 허용해달라는 푸틴의 요청에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가 비난 여론이 예사롭지 않자 21일(현지시간) 백악관이 나서 트럼프 대통령이 조사 요청을 거절했다고 해명하면서 90분간 단독회담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확인하자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통역의 의회 청문회 출석 요청은 민주당 소속 일부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주장이고,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통역관들의 직업윤리에도 어긋난다는 의견이 많다. 공화당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저지할 것으로 보여 현재로서는 통역관의 의회 청문회 출석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때아닌 의회 청문회 출석 요구로 그림자 역할을 해온 미 국무부 소속 러시아어 통역인 마리나 그로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로스는 2008년 러시아 소치를 방문했던 로라 부시 전 대통령 부인과 지난해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 등의 통역을 맡았던 베테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스는 이번 트럼프와 푸틴 단독회담 직전 언론에 공개된 장면에서 트럼프 옆에 앉아 발언 내용을 노트에 적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의원들은 그로스의 노트에 특히 관심이 높은 데 실제로 노트에 적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 국무부에는 그로스와 이연향씨를 포함해 모두 12명의 통역관과 16명의 번역 전문가가 소속돼 있다. 아랍어, 불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전문가들이다. 배석자 없는 단독정상회담, 양날의 칼인가 4명의 미국 대통령과 7명의 국무장관의 아랍어 통역관이자 선임고문을 지낸 게말 헤랄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통역까지 불러 단독회담 내용을 확인하려 든다면 단독정상회담에서 어떤 대통령들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통해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겠나 싶다. 중요한 외교적 카드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상회담은 개인 간의 대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약속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퇴임 후 회고록을 통해서라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당시 통역만 배석하고 대화를 한 다음에는 하루에 두 번 기억을 되살려 핵심 참모들에게 회담 내용을 알려줬다고 한다. 회담 후 양측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펴 협상이 결렬되거나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리기 위해 기록은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회담 전 대통령이 통역에게 대화내용을 정리해 제출하라고 지시하는 때도 있고, 통역이 회담이 끝난 뒤 최고위급 관계자들에게 브리핑하기도 한다. 물론 대통령이 직접 비서실장과 핵심 참모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배석자가 있는 경우에도 통역의 노트와 내용을 비교해 회담 내용의 정확도를 높이려 노력한다고 한다. 미·러 정상회담을 둘러싼 논란이 통역의 의회 청문회 출석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이를 계기로 보완책을 마련하자는 논의가 일게 될지 주목된다. 김균미 대기자 kmkim@seoul.co.kr
  • ‘5.18 명예훼손’ 전두환 재판 또 연기…8월 27일 첫 재판

    ‘5.18 명예훼손’ 전두환 재판 또 연기…8월 27일 첫 재판

    회고록을 통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故) 조비오 신부를 비난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87) 전 대통령 재판이 또 다시 연기됐다. 12일 광주지법에 따르면 재판을 맡은 이 법원 형사8단독 김호석 판사는 이날 전 전 대통령 변호인의 기일변경(연기) 신청을 받아들였다. 당초 오는 16일 열릴 예정이었던 첫 공판기일(재판)을 8월 27일로 연기됐다. 전 전 대통령 측이 이번 재판에 대해 연기 신청을 한 것은 지난 5월에 이어 두 번째다. 전 전 대통령은 당초 지난 5월 28일로 예정된 첫 재판을 앞두고 같은 달 25일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기 신청을 했다. 재판부는 당시 연기 신청을 받아들여 첫 재판을 오는 16일로 연기했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펴낸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조비오 신부의 주장을 거짓이라며 ‘사탄의 탈을 쓴 신부’라고 비난,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지난 5월 3일 불구속 기소됐다. 이혜리 기자 lee@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교정직원 눈높이로 재구성한 ‘높으신 그분’들의 감방생활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교정직원 눈높이로 재구성한 ‘높으신 그분’들의 감방생활

    전직 대통령 둘이 한꺼번에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재임 중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전임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 송파구 문정동 서울동부구치소에 각각 수감 중이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해 네 명째다. 앞뒤 대통령이 나란히 수감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전·노 두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불행한 역사다. 어떤 이는 분노하고, 어떤 이는 안타까워한다. 지지 여부를 떠나 투표로 뽑은 대통령이 구속돼 있는 것을 보는 국민은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신상필벌’과 ‘법 앞에 평등’이라는 원칙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의 수감생활을 두고 ‘특혜’라거나 ‘스위트룸’에서 감옥생활을 한다는 등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옥생활을 힘겨워한다. 불면증을 호소하기도 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법무부와 구치소 등 교정당국과 변호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교정직원의 시선을 빌려 ‘높으신 분’들의 감방생활을 재구성해 봤다. sunggone@seoul.co.kr■수인번호 716의 생활 고정식 사이클 40분 타는 분…못 먹고 못 잔다는 보고 없어 그날 나는 밤늦게까지 그분(77)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교도소가 이전한 이후 가장 고위급 수감자이자 논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3월 22일 영장이 떨어졌지만, 그분이 들어온 시간은 다음날인 23일 0시 3분이었다.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단독실도 준비해야 했고, 검찰의 수사를 위해서 조사실도 만들어야 했다. 10여명이 넘는 전담팀도 꾸려졌다. 구치소 직원들의 관심사는 그분이 제대로 잠을 자고, 먹는가였다. 전직 대통령들은 물론 대부분 수감자는 첫날 잠을 잘 못 잔다. 그러나 그분이 그날 밤잠을 못 잤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적응을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석 달이 넘게 지난 지금 그분의 감방생활을 보면서 당초 내 판단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 재판정에 들어설 때도 교정직원의 부축을 받고, 벽에 손을 기대는 등 건강이 우려할 정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감방생활을 잘할 것으로 봤던 내 예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지는 모르겠다. 그분은 지난달 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7부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구치소에 와서 지난 두 달간 잠을 자지 않고도 살 수 있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면서 구치소 생활의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건강 문제로 필요할 때만 출석하겠다는 ‘불출석 사유서’를 냈지만,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판을 강행하자 법정에서 한 얘기란다. 이를 두고 “3일 동안 밥을 안 먹고, 잠을 안 자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 보도도 있었다. 둘 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분이 하루만 밥을 안 먹어도 구치소는 난리가 난다. 바로 ‘불식(不食)보고’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며칠 굶었다는 보고는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3일씩 식사를 못 했다니…. 그분의 입이 짧은 것은 맞다. 집안 내력으로, 위장장애가 있단다. 언론에 나온 얘기다. 실제로 밥을 남긴다. 재판을 앞두고는 특히 그렇다. 그래도 불식은 아니다. 그분은 바쁘다. 아침에는 변호사가 면회를 오고, 오후에는 김윤옥 여사와 아들, 딸 등 가족이 돌아가면서 면회를 온다. 가끔은 특별면회를 오는 분들도 있다.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등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거기에 재판에도 나가야 하니 하루가 짧다고 할 수도 있다. 운동은 걷기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구치소에 온 기증 물품 가운데 고정식 사이클이 몇 대 포함돼 있어서 그분이 계시는 곳에도 한 대가 설치됐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목격됐다. 일반인과 공용인데 일반 수감자가 타지 않을 때 탄다. 시간은 대부분 40분 안팎이다. 그 나이에 테니스를 친다더니 운동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은 구치소에 있는 최서원(최순실)씨도 자전거를 가끔 탄다. 건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심각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원래 당뇨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 다녀오라고 해도 그분의 말처럼 ‘특혜’를 받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인지, 견딜만 해서인지 안 간다. 그분은 동부구치소의 가장 높은 12층 단독실에 있다. 단독방 수감자들은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는데 그분은 방에 책은 쌓여 있지만, 거의 보지 않는다. 유일하게 읽는 책은 성경이다. 대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쓴다. 아마 재판을 준비하는 것 같다. 나중에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변호인과 숙의해 재판에서 반전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는 느낌도 받는다. 역시 그분은 쉽게 포기하는 분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재소자들은 수감 중 몇 번씩 수감 태도가 바뀐다. 최초 입감 때의 예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처럼 이 예상도 안 맞을 수 있다. ■수인번호 503의 생활 하루 10~20통 편지 받는 분…억울해선지 요통 탓인지 꼿꼿 1년 4개월 전에 이곳에 온 그분(66)은 요즘 감방생활이 자리를 잡아 가는 듯하다. 면회도 사절하고, 재판도 거부하면서 일체의 외부 접촉을 하지 않는다. 서울구치소 3평짜리 독방에서 그분은 읽고 쓰기를 반복한다. 1시간쯤 걷기 운동을 하고, 가끔 체조를 하지만, 격한 운동은 하지 않는다. 허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그분이 왔을 때 감방생활을 견뎌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여성인 데다가 임기 중 탄핵을 당해 수감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분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러다가 쓰러지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내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한다. 동부구치소에 있는 또 다른 그분보다 훨씬 감방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1년 4개월이라는 수감생활을 통해 나름의 방식을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많이 읽는다. 초기 ‘꼴’, ‘바람의 파이터’ 등 만화를 즐겨보기 시작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일본의 대하소설 ‘대망’, 박경리의 ‘토지’, 김주영의 ‘객주’, 이병주의 ‘지리산’과 ‘산하’ 등 소설을 읽다가 요즘은 체조 등 건강 관련 책도 본다. 초기에는 이런저런 요구도 많았다. 지금은 체념한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침대다. 요통이 있으니 침대를 넣어 달라고 했다가 거부당했다. 이는 특혜로 비치기 때문이다. 구치소에서는 수감자에게 특혜를 베풀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식사는 대부분의 범털 재소자들이 그렇듯이 많이 먹지 않는다. 3분의1쯤 먹고 남긴다. 그러나 거른 적은 없다. 짠 음식을 싫어해 김치도 씻어서 먹는다. 잠은 자다가 깨는 경우가 많다. 요통 때문이라고 하지만, 수면 문제는 담당 직원도 쉽게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대부분 허리 때문일 것이다. 지난달 27일에는 허리 때문에 서울성모병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5월 9일에 이어 두 번째다. 발가락을 다쳐서 다녀온 적도 있으니 그분은 그래도 병원 출입은 잦은 편에 속한다. 얼굴은 주기적으로 부었다가 빠졌다가 한다. 허리 외에도 뭔가 더 이상이 있다는데 알 수는 없다. 그분이 죄수복을 입은 모습뿐 아니라 이런 얼굴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글을 쓰는 것은 그의 주요한 하루 일과 중의 하나다. 어디선가 그가 수필가로 등단했던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직접 쓴 글을 보지는 못했다. 높으신 분들이 그렇듯이 나중에 회고록 등 책을 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자세는 꼿꼿하다. 동료 얘기를 들으니 동부구치소에 계신 그분의 측근이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감옥생활을 제법 잘하지만, 일반인과 섞이는 것은 싫어한다. 대신 최서원(최순실)씨는 뜻밖에 일반 재소자들과 잘 섞여 지낸단다. 이곳에서는 그 정도는 범털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특혜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분은 재판도 거부하고, 유영하 변호사 등 변호인단을 몇 번 만난 외에는 외부와 단절했다.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 부부나 박근령씨 등의 접견도 거부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보지만,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세상 소식은 하루에 10~20통쯤 오는 편지를 통해서 얻는다. 그 정도로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재판이 종료되면 어떤 변화를 보일지 알 수 없지만, 다른 구치소에 있는 분보다는 쉽게 적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5·18때 계엄군 비인도적 살상 무기 납탄사용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비인도적 살상무기인 납탄을 시민에게 발사했다는 미국 인권단체 보고서가 나왔다. 5·18기념재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동아시아도서관이 소장한 한국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에서 이같은 내용이 담긴 북미한국인권연맹 보고서를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북미한국인권연맹은 미국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북미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관련 인권운동단체다. 이 단체는 5·18 직후 미국 국적 의사 2명을 한국에 파견해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진압 실태를 조사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의사들은 1980년 6월 22일부터 약 1주일간 광주에 머물면서 사상자가 치료받은 병원을 돌아다니며 실태조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5·18재단이 UCLA 도서관에 보관된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의사들은 ‘계엄군이 국제협약으로 전쟁에서도 사용을 금지하는 연성탄(soft bullet·납탄)을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계엄군이 비인도적 살상무기를 사용했다는 의혹은 1980년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院牧)으로 재직하며 항쟁 참상을 기록하고 세계에 알린 찰스 베츠 헌틀리(한국명 허철선) 목사도 제기했다. 헌틀리 목사는 회고록 가운데 5·18을 서술한 대목에서 “계엄군이 사용한 총알은 환자 몸 안에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온전한 총알이 몸에 박힌 것이 아니라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파편들로 쪼개져서 환자들의 팔, 다리, 그리고 척추에 꽂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보고서를 발굴,번역한 최용주 5·18재단 비상임연구원은 “정치적 선입견 없이 외부 시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5·18재단은 광주에 거주하면서 항쟁 과정을 지켜본 미국인 선교사의 증언록 2건, 일본에서 활동하는 퀘이커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1980년 8월 광주·서울을 방문해 작성한 보고서 분석 자료도 이날 함께 공개했다. 분석 결과는 5·18재단 누리집(http://518.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조니뎁 근황 “앰버 허드와 이혼 후 우울증...아침마다 술 마셔”

    조니뎁 근황 “앰버 허드와 이혼 후 우울증...아침마다 술 마셔”

    할리우드 배우 조니 뎁이 이혼 심경을 털어놨다. 22일(한국시간) 미국 매체 롤링스톤 측이 배우 조니 뎁(56·Johnny Depp)과 인터뷰를 공개했다. 조니 뎁은 이번 인터뷰에서 배우 앰버 허드(33·Amber Laura Heard)와 이혼한 뒤 심경을 밝혔다. 그는 “앰버 허드와 이혼 후 자존감이 낮아졌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아침에는 항상 보드카를 마셨고, 많은 담배를 태웠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오래된 타자기로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흘러 해당 페이지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글을 썼다”고 덧붙였다. 조니 뎁은 또 지난해부터 이어진 자산관리회사 TMG와 분쟁도 언급했다. 그는 “재정적 위기를 겪고 있다”라며 “몇 년 동안 약 6억 달러(한화 6600억 원 수준)를 잃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힘든 시기다. 내 인생에서 떨어질 수 있을 만큼 떨어진 상황”이라며 참담한 심경을 밝혔다. 한편 영화 ‘럼 다이어리’를 통해 인연을 맺은 조니 뎁과 앰버 허드는 지난 2015년 2월 결혼했다. 결혼 1년 만인 2016년 앰버 허드는 조니 뎁으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 결국 지난해 8월 이혼했다. 사진=인스타그램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데스크 시각] 네 번의 협상, 네 번의 실패/안동환 국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네 번의 협상, 네 번의 실패/안동환 국제부 차장

    1985년 11월 19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제네바 서쪽 호숫가의 19세기 저택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첫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레이건이 74세, 그해 소련 최고 권력자가 된 고르바초프는 54세였다.회담 사흘 전 도착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와의 첫 만남을 앞두고 피곤해했다. 그는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같은 늙고 보수적인 소련 지도자들의 ‘복화술’ 같은 대화에 넌더리를 냈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는 소련 전문가 잭 매틀록 주체코 미 대사와 정상회담 리허설까지 마쳤다. 두 사람은 첫날 회담부터 핵무기 경쟁을 놓고 격돌했다. 고르바초프는 핵군축을 원하면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인 ‘스타워스 계획’부터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이튿날 회담에서는 흥분한 고르바초프가 “소련인을 순박한 민족 취급 말라”고 소리쳤다. 그날 밤 레이건은 “그는 정말 호전적이었고 젠장, 나도 단단히 버텼다”고 일기에 썼다. 마지막 날인 11월 21일 미·소 정상은 ‘핵전쟁 반대’라는 원론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제네바에서 단 하나의 핵탄두도 제거되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실패한 협상’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처음 만난 제네바 회담은 후대에 냉전 종식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그들은 1년 뒤 1986년 10월 11일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다시 핵무기 감축 담판을 벌였다. 두 정상은 이틀간의 회담에서 ‘양국 핵무기 전량 폐기’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사적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결렬됐다.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은 회고록을 통해 “백악관·국무부·국방부 관리들도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대통령의 꿈(고르바초프도 동의한 꿈)은 완벽한 망상”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고 전했다. 4년 뒤 1991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서명하고, 마침내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백악관 출입 기자였던 데이비드 호프먼이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를 인터뷰하고, 방대한 비밀문서들을 토대로 쓴 800쪽 분량의 책 ‘데드 핸드’(Dead Hand)가 복원한 ‘팩트’들이다. 데드 핸드는 소련이 구축한 ‘자동 핵보복 시스템’ 명칭이다. 호프먼은 그들의 협상은 실패했지만 처음으로 산더미 같은 문제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합의의 단초가 됐다고 평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1985년 겨울부터 1988년 봄까지 네 번 만났고 그 어떤 조약에도 서명하지 못했지만 냉전을 끝냈다. 두 사람은 훗날 “성급하지 않았고 속내를 털어놓으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2일 세기의 회담을 통해 서로를 향한 한 발을 막 내디뎠다.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웃으며 돌아선 두 사람의 발걸음은 무거울 것이다. “우리한테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이 때로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 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김 위원장의 인식은 정확하다. 한반도 냉전의 유물인 비핵화 협상은 이제 시작됐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남·북·미 간 극도의 상호 불신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신뢰 구축 노력이다. ‘공포의 균형’은 전쟁을 억누를 뿐이지만 ‘이익의 균형’은 평화를 만들어 낸다. 하물며 미·소 정상은 서로의 ‘데드 핸드’로 악수했지만 역사적 전환점을 이끌어 냈다. ipsofacto@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막말의 달인’ 아닌 ‘협상의 달인’ 트럼프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막말의 달인’ 아닌 ‘협상의 달인’ 트럼프

    지난 한 주는 숨막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화요일 ‘북·미 정상회담’이었고, 하루 뒤 이어진 ‘지방선거’는 향후 정국의 향방을 제시했다. 4년마다 한국인을 들었다놨다 했던 월드컵은 명함도 못 내민 한 주였다. 지방선거가 크게 회자되었지만 세인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북·미 정상회담에 쏠렸다고 해야 할 듯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한반도의 내일이,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담긴 일 아니던가.김정은과 트럼프의 만남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종잡을 수 없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그간의 냉소와 막말을 버리고 연이은 칭찬 세례를 펼친 것이다. 그중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일러 “뛰어난 협상가”라고 추켜올린 대목은 협상의 대가이자 ‘거래의 기술’ 저자이기도 한 트럼프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1987년 미국에서 출간된 ‘거래의 기술’은 이듬해 한국에서도 처음 출간되었다. 자기계발서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던 당시에도 적잖이 팔렸고, 북·미 정상회담은 ‘죽었던 책’을 다시 살려냈다. ‘거래의 기술’은 일종의 회고록이다. 트럼프는 성서 다음으로 ‘거래의 기술’을 좋아한다고 자화자찬했는데, 자신의 삶에 ‘성공을 위한 11가지 지침’을 버무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11가지 지침은 ‘크게 생각하라, 항상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라, 선택의 폭을 최대한 넓혀라, 발로 뛰면서 시장을 조사하라, 지렛대를 사용하라, 입지보다 전략에 주력하라, 언론을 이용하라, 신념을 위해 저항하라,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라, 희망은 크게 비용은 적당히, 사업을 재미있는 게임으로 만들어라’다. 여느 자기계발서와 차별성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트럼프는 이 11가지 지침에 따라 막대한 재산과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쟁취했다. 실제로 막말의 달인이라는 선입견을 제거하고 ‘거래의 기술’을 읽어 보면, 트럼프는 요즘 말로 ‘허세 쩌는’ 사기꾼이 아니라 ‘대단히 치밀하고 집요한 협상가’이자 말 그대로 ‘거래의 달인’이다. 언론마저 길들이려 했던 트럼프의 생각 중 한 대목이다. “언론은 항상 좋은 기삿거리에 굶주려 있고, 소재가 좋을수록 대서특필하게 된다는 속성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중략/ 나는 일을 조금 색다르게 처리했으며, 논쟁이 빚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내가 관여한 거래는 다소 허황돼 보이기도 했다. /중략/ 신문이 나를 주목하게 되어 내 기사를 쓰지 못해 안달을 하게 됐다.”사실 트럼프는 언론의 속성이 아니라 대중의 속성을 영악할 정도로 깊고 넓게 알고 있다. 긍정적인 기사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헐뜯는 기사”가 나와도 상관없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비판적인 기사일지라도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트럼프는 자신을 “늘 남보다 크게 생각해 왔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사업도 최대 규모로 벌였고, 관련한 시설도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속으로는 “장관에 압도당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동안 입에 달고 살았던 “우리는 환상을 팔고 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막말을 일삼는다고 트럼프를 호락호락하게 보면 안 된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그가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세간의 평은 다르지만, ‘거래의 기술’에 따르면 그는 지금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익을 쟁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데스크 시각] 북한이 친미 성향의 태국과 같이 된다면/이제훈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북한이 친미 성향의 태국과 같이 된다면/이제훈 정치부 차장

    지난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2003년 자신의 회고록 ‘마담 세크러터리’(Madam Secretary)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생각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했다.김 위원장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중국식 개방에는 관심이 없으며,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스웨덴 모델이나 전통적 왕권이 강력히 유지되는 태국의 모델에 관심이 높다고 밝힌 것으로 돼 있다. 스웨덴은 북한과 수교한 몇 안 되는 유럽 국가로 수년간 북한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만큼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인 메릴 뉴먼이 2013년 북한에서 억류됐을 때도 영사 조력을 추진했을 정도다. 태국 역시 동남아에서 전통적인 친미 국가로 분류된다. 2014년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다소 관계가 소원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해마다 태국군과 코브라골드 연합훈련을 실시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다. 미국 역시 태국의 군부정권을 묵인하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18년 전 북한은 미국에 수교만 된다면 자신들이 더 ‘남조선’보다 친미 성향을 가진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의사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어떤 입장을 갖고 대외 관계를 이끌어 갈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친미 성향으로 적당한 선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때로는 이용하는 일종의 ‘미ㆍ중 간 균형자’가 북한의 생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은 북한으로서는 모든 것을 다 거는 일생일대의 도박판이 될 수도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이 강조하는 완전한 비핵화(CVID)를 받아들일지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 국무위원장이 궁극적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고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꿈꿨던 개혁개방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이라는 용어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지난 1일 만나 친서를 전달한 것도 이런 김 국무위원장의 생각이 실현되는 첫걸음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남·북·미가 싱가포르에서 만나 65년 된 구시대의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종전선언을 통해 새로운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기대감도 흘러나온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고 북·미 양국이 서로 이익대표부 설치에 합의한다면 남북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트럼프타워가 평양 대동강변에 들어서고 맥도날드와 코카콜라가 진출하는 것일까? 우리가 원하는 북한의 개혁개방은 통일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북한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다면 이를 묵인할 수 있다는 것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00년 6·15 정상회담 합의문에서는 남측의 남북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당시에도 정부는 2국가 2체제, 2개 정부를 통한 연합에 무게를 뒀다면 북한은 낮은 단계라도 1국가 2제도의 연방에 더 무게를 실었다.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순간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북한의 개혁개방을 환영한다는 말 대신 친미 성향의 공산국가나 왕조국가가 북한에 있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 할 때다. parti98@seoul.co.kr
  • 트럼프가 염두에 둔 美蘇 군축협상… ‘2년 밀당’ 있었다

    트럼프가 염두에 둔 美蘇 군축협상… ‘2년 밀당’ 있었다

    미·소 1985년부터 5차례 회담 레이건·고르비 첫 회담 빅딜 무산 2년 만에 부분 무기 감축 합의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 정상회담을 일회성이 아닌 여러 차례 열 수도 있다는 입장을 지난 1일(현지시간) 밝혔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수차례 회담을 통해 타결했던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협상 모델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전략무기 감축 협상을 위해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였다. 전 세계가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 ‘빅딜’을 고대했지만 두 정상은 전략무기 감축 등 주요 의제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후속 정상회담을 이듬해인 1986년 미국과 1987년 소련에서 열자는 데만 의견을 일치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아쉬움만 남긴 회담이었지만, 40년간 대치하며 서로를 비방해 온 양국의 정상이 처음으로 우정과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전환점이 된 회담이었다는 후대의 평가가 나왔다. 레이건은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와 나는 화학작용을 일으켜 우정과 대단히 유사한 뭔가를 만들어 낸 게 분명하다”고 밝힌 바 있다. 두 정상은 그로부터 1년여 만인 1986년 말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두 번째 회담을 가졌지만 역시 이때도 합의는 도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1년이 흐른 1987년 말 워싱턴 회담에서 양국은 핵탄두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을 폐기하는 내용의 중거리핵무기폐기협정(INF)을 체결했다. 처음 정상회담을 가진 뒤 2년여 만에 부분적인 전략무기 폐기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두 정상은 1988년에도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재회하는 등 매년 회담을 가졌다. 이후 미·소 정상회담은 레이건의 후임인 조지 H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간 회담으로 이어졌다. 1989년 몰타 회담에서는 냉전 구조의 종언을 선언했고, 1991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드디어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1)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데이비드 레이놀즈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저서 ‘정상회담’에서 “1985년 11월 서리 내린 제네바에서 시작돼 여러 차례 거듭된 양국 정상의 만남으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개됐던 냉전은 핵무기의 폭발음이나 비명소리로 끝나지 않고 다정한 악수와 함께 끝나게 됐다”고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첫 정상회담을 평가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진전된 비핵화·회담 기대감… 김정은, 적대관계 끝내자고 쓴 듯

    트럼프 첫 임기 내 비핵화 약속 가능성 반대급부로 완전한 체제보장·투자 요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는 비핵화 및 북·미 간 적대관계 해소에 대한 의지가 담겼을 가능성이 크다. 친서의 세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김 위원장의 훈령을 받고 온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뉴욕에서 회담한 뒤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언급한 점에 비쳐 볼 때, 미측도 만족할 만한 진전된 내용이 포함됐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일 “폼페이오 장관에게 친서 내용을 먼저 파악하라고 했을 것이고 만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직접 받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요구해 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받아들이고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내인 2020년까지 비핵화를 완성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의지가 친서에 적혀 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자신들이 바라는 체제보장의 청사진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체제보장’(CVIG)을 해 달라, 그러면 우리는 뭐든지 다 이행하겠다는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밝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누차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미국이 확실한 체제 안전 보장만 해 준다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혀 왔다. 6·12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친서에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싱가포르에서 만나 양국 관계 개선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다. 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트럼프 모델에도 큰 관심이 있다’는 원론적 얘기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모델은 핵폐기를 신속하고 과감히 이행하고 체제보장과 민간 자본을 통한 경제 지원을 해 주는 일괄타결 방식이다. 이와 함께 친서에는 수십년간 지속된 북·미 간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의 역사적 이정표를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18년 전인 200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미국에 보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했을 때도 양측은 친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북·미 협상 과정을 지켜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친서에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한다는 확신이 서면, 북한은 미국의 안보 관심(핵·미사일)을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공개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허무하게 끝난 ‘조·올의 꿈’… 북·미 18년 만에 다시 꿈꾼다

    허무하게 끝난 ‘조·올의 꿈’… 북·미 18년 만에 다시 꿈꾼다

    2000년 10월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입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을 방문했다. 북한 권력 서열 2위로 김 위원장의 최측근이자 군부를 대표하는 실력자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북한 고위급 인사가 미국 땅을 밟은 것이다.조명록은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이튿날 북·미 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밝힌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뒤이어 같은 달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평양을 전격 방문해 김 위원장을 면담하고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전격 합의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북핵 문제 해결과 북·미 적대관계 청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성사됐다면 한반도의 운명을 바꿨을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은 같은 시기에 터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그해 11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으로 물거품이 됐다. 그후 북한은 6차례 핵실험을 통해 핵무력을 완성했고 지금에 와서야 다시 북·미 정상회담이 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18년 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지금이야말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라는 얘기가 나온다. 조명록의 뒤를 이어 31일 북한 고위급 인사로는 18년 만에 미국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은 조명록과 올브라이트가 못 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도정의 마지막 단계인 김영철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만남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18년 전 조명록의 방미가 이뤄진 때는 미국의 ‘페리 프로세스’ 발표로 북핵 위기가 누그러지고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선언에 이어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 문제의 획기적 진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시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4·27 남북 정상회담과 5·26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한 것처럼, 당시에도 한국 정부의 활약이 빛났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의 대화 의지를 확인한 김대중(DJ) 당시 대통령은 회담 직후 황원탁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백악관에 급파해 클린턴에게 회담 결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북·미 관계를 개선하려면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반응은 좋았다. 7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아지역안보포럼을 계기로 북·미는 즉각 첫 외교장관 회담을 열어 김정일의 미국 특사 파견 문제를 협의했다. 김정일은 그로부터 석 달 뒤 특사 파견을 결정했다.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0월 9일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조명록은 군복 차림으로 클린턴을 만나 김정일의 친서를 전달했다. ‘북한 인민과 군대가 안보에 아무런 위협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미국이 우려하는 안보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며 관계 정상화를 희망한다는 요지의 친서였다. 클린턴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김정일의 메시지도 전달했다. 이에 클린턴은 “먼저 사전 조율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며 올브라이트의 평양 방문을 제안했다. 이런 북·미 공감대를 바탕으로 올브라이트는 미국 고위층 인사로는 처음으로 2000년 10월 23일 오전 7시 평양 땅을 밟았다.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 스탠리 로스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로버트 아인혼 비확산담당 차관보, 찰스 카트먼 한반도평화회담담당 대사, 잭 프리처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국장 등 선발대 50여명과 기자단 57명 등 210여명이 수행했다. 올브라이트의 첫 일정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방문이었다. 김정일 면담은 방북 둘째 날 있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첫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올브라이트는 회고록에서 “도착 첫날 점심식사를 하던 중 오후에 예정된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김 위원장을 만나기로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에게 클린턴의 친서를 전달하고 3시간가량 회담했다. 그는 김정일에게 “북한 미사일과 관련한 만족스러운 합의 없이 내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권유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잘못이며, 미사일 문제는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면서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가 못 해낼 일은 없다”고 밝혔다.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시리아와 이란에 미사일을 수출하는 것은 외화벌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회담 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의 안내로 5·1경기장에서 열린 집단체조와 카드섹션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평양 군중의 일사불란하고 거대한 매스게임을 보고 놀라는 올브라이트의 표정은 큰 화제가 됐다. 공연 중간에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저것은 우리의 처음 미사일 발사입니다만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북·미 관계 개선을 향한 복합적인 메시지가 담긴 말이었다. 북·미 회담은 시간문제로 여겨졌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은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반대했다. 우파 전문가들도 북·미 정상회담을 반대했다. 올브라이트는 “그간 추진해 오던 미사일방어(MD) 계획을 클린턴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수포로 돌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기 말의 클린턴은 정치적 반대를 물리칠 동력을 상실했다. 더 큰 문제는 중동 평화협상이었다. 12월이 다가오며 클린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문제를 매듭짓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김정일에게 회담 장소를 평양이 아닌 워싱턴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거부했다. 결국 클린턴은 북·미 회담을 포기하고 12월 21일 아침, 우리 정부에 “평양을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고 알려왔다. 29일에는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진 심각한 폭력 사태에 클린턴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게 되면서 방북 일정을 잡기가 애매해졌다”며 평양 방문 포기를 공식 발표했다.훗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은 나에게 김 위원장의 ‘시간 개념 부족’을 탓했다. 만일 김정일이 조명록의 방미를 한 달만 앞당겼어도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였다”고 밝혔다. 새로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2001년 3월 워싱턴을 방문한 DJ에게 “대북한 정책 검토를 끝내기 전까지는 북한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첫 북·미 정상회담 추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지만 18년 전과 지금은 다른 측면도 많다. 당시는 미국 정권 교체기였지만, 지금은 한·미의 대통령이 모두 임기 초반이다. 18년 전보다는 북·미 정상회담 합의를 지킬 ‘시간적 변수’가 유리한 셈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생태 돋보기] 2차원 생물다양성의 기억/정길상 국립생태원 생태기반연구실장

    [생태 돋보기] 2차원 생물다양성의 기억/정길상 국립생태원 생태기반연구실장

    5월은 주변이 녹음으로 덮이는 싱그러운 계절이다. 그래서 참으로 바쁜 달이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과 성년의 날 등 기념할 만한 날들이 계속된다. 하나 더 있다. 5월 22일 ‘생물다양성의 날’이다. 1992년 리우협약 이후 매년 전 세계가 생물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각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연다.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의 보답인지, 최근 연구 결과 숲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쉽지만 우리 노력에 대한 보답은 아닌 듯하다. 이 현상은 19세기 말부터 진행돼 왔다. 각 나라의 숲 면적 증가는 인간개발지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유한 나라는 숲 면적이 매년 1.3% 증가한 반면 그렇지 않은 나라는 0.7% 증가에 그쳤다. 단순한 돈 문제는 아니다. 유럽에서 사회가 정상적일 때 벌채가 사라졌으며, 인간사회의 인식 전환과 더불어 숲의 균형이 이뤄졌다. 한 나라의 삶의 수준이 높아지면 숲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지역이 발전함에 따라 숲이 늘어났고, 열대의 13개 나라에서도 순수하게 숲이 늘어났다. 농업기술 발달로 농업생산에 대한 압력이 낮아져 숲을 개간해 경작지로 만들 필요를 줄였고, 생산력이 낮은 경작지를 숲으로 환원토록 내버려둔 결과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잘사는 나라일수록 천연자원관련 제품 수입이 늘어났다. 결국 제품을 수출하는 나라에서 숲의 보전, 증가는 이뤄내기 힘든 일이 돼 버린다. 매년 남한 면적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열대우림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일 게다. 숲이 증가하는데 지난 40년간 생물다양성은 50% 줄었다. 가장 큰 원인은 인간에 의한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다. 숲의 양적 증가만으론 생물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밤에 우리가 밝혀 놓은 불빛은 밤에 활동하는 곤충을 교란할 뿐 아니라 낮에 날아다니는 곤충 다양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돼 직접적 피해와 구조적 피해가 나타나고 있다. 누구 하나가 편리를 얻게 되면 누군가는 편리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편리를 얻기 위해 큰돈을 쓰면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또다시 더 큰돈을 써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생물다양성의 날인 오늘도 이 땅에서 사라지는 생물이 있을 것이다. 숲에 나무가 많다고 우리 식량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나비는 꿀을 빨아야 하며 우리는 곡식을 먹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책에서나 느끼는 2차원 생물다양성 시대를 살고 있으며 회고록에나 나올 생물이 늘어나고 있다. 헝클어진 실타래 같지만 결코 혼돈이 아닌 것이 바로 생태계요 그 속의 삶이다. 그 실타래 속으로 우리 자신을 되돌리는 노력이 전 지구적 생태균형과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길이다.
  • 전두환 “건강 나빠 광주지법까지 못 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87) 전 대통령이 오는 28일로 예정된 광주지법 첫 재판에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1일 광주지법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 변호인은 이날 재판부 이송신청을 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이송 사유로 ‘고령에다 건강 문제로 멀리 광주까지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없다.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 광주가 아닌 곳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일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 전 대통령 사건 첫 공판기일은 28일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 제202호 법정이다. 재판은 컴퓨터로 무작위 배당돼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호석(41·사법연수원 33기) 판사 심리로 진행된다. 재판부가 이송 신청을 받아들여 서울에서 재판하게 되면 재판이 연기되고 재판부 배당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 재판부가 이송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판은 그대로 진행된다.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전 전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으면 재판을 연기하고 전 전 대통령에게 다시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보낼 수 있다. 전 전 대통령이 특별한 이유 없이 출석을 계속 거부하면 재판부는 구인장을 발부해 강제 구인할 수 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령이고 진술할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출석하지 않고 대신 서면 진술서를 낸 전례로 볼 때 전 전 대통령의 불출석 가능성이 크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펴낸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한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주장,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희생자 명예훼손’ 전두환 “몸 안 좋아 서울서 재판 받겠다”

    ‘5·18 희생자 명예훼손’ 전두환 “몸 안 좋아 서울서 재판 받겠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87)씨가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재판을 광주가 아닌 서울에서 받겠다고 주장했다.21일 광주지법 등에 따르면 전씨의 변호인은 이날 광주지법에 재판부 이송 신청을 냈다. 전씨 측은 이송 사유로 ‘고령에다 건강 문제로 멀리 광주까지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없다. 재판 공정성을 위해 광주가 아닌 곳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씨는 지난해 7월 광주지법에서 진행 중인 ‘전두환 회고록’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과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가기 전 같은 이유로 재판부 이송 신청을 했다가 취하한 적이 있다. 지난 3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씨의 사건 첫 공판기일은 오는 28일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 제202호 법정이다. 그러나 전씨 측의 이송 신청에 따라 당일 첫 재판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재판부가 이송 신청을 받아들여 서울에서 재판하게 되면, 재판이 연기되고 재판부 배당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 재판부가 이송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판은 그대로 진행된다.재판이 진행되더라도 전씨가 출석하지 않으면 재판을 연기하고 전씨에게 다시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보낼 수 있다. 민사나 행정재판에서는 피고의 출석 의무가 없고 대리인이 대신 출석할 수 있지만, 형사재판에서 피고인 출석은 의무 사항이다. 전씨가 특별한 이유 없이 출석을 계속 거부하면 재판부는 구인장을 발부해 강제 구인할 수 있다.앞서 전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도 ‘고령이고 진술할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출석하지 않고 서면진술서만 냈다.전씨는 지난해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한 고(故)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해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미 광주지법은 전씨의 회고록 중 상당 부분에 ‘허위 주장이 있고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다’는 등의 이유로 회고록 출판 및 배포 금지를 결정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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