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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12·12 쿠데타(1979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유혈 진압에 관여한 전직 대통령(최규하·전두환·노태우)들이 마지막까지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씨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이 더욱 요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씨는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기 때문에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이후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에 넘겨진 전씨는 1심에서 유죄를 받은 후 항소해 오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둔 상황이었다. 5·18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와 발포 명령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게 협조하기는커녕 끝까지 재판으로 ‘진실’을 다투다 사망하면서 당시 상황은 미궁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전씨보다 한 달 앞서 별세한 ‘동지’ 노 전 대통령(제13대)은 12·12 쿠데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지원했다. 그는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왜곡했다. 아들 재헌씨가 최근 광주를 잇달아 찾아 사죄했지만, 노씨는 5·18 당시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비롯해 5·18의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2006년 10월 침묵을 지킨 채 사망한 최 전 대통령(제10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건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권한대행을 포함해 10개월 정도 국가원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역사적인 순간에 최고 결정권자였던 만큼 당시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12·12 쿠데타에서 신군부의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 연행을 사후 재가한 과정, 5·18 당시 광주 시민에 대한 발포가 대통령의 최종 결정인지 신군부의 독자적 행동인지 등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 정부 “가족장으로 진행”… 보훈처 “현충원 안장 불가”

    정부 “가족장으로 진행”… 보훈처 “현충원 안장 불가”

    전두환 전 대통령 장례와 관련해 정부가 지원이나 조문, 조화는 일절 없을 것이라고 23일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전씨 장례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가족장으로 치르게 됐다. 23일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은 전씨의 장례 절차와 관련 논의 끝에 “가족장으로 진행한다”면서 “행안부에서 (장례 방식을 전하는) 별도의 자료 배포와 같은 발표는 없다”고 밝혔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 역시 “청와대 차원의 조화와 조문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한 달 전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당시 문재인 대통령 명의로 조화를 보내고,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빈소를 조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빈소 설치와 운구, 영결식, 장지 등 모든 장례 절차를 가족들이 자체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현행 국가장법에 따르면 국가장은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 결정을 거쳐야 하며, 전·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에게만 해당된다. 다만 국가장 대상자와 관련해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전씨의 경우 ‘공훈’과 ‘추앙’ 모두 결격사유가 상당하다는 걸 감안하면 정부 결정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와 송영길 대표가 국가장은 물론 조문도 반대하고 있는 데다가 전씨가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 후신인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조차 논란 끝에 조문하지 않기로 결정할 정도로 분위기가 냉랭하다. 전씨는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 대상이 아닌 데다, 형법상 내란죄 등의 혐의로 퇴임 후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 국립묘지 안장자에서 제외하는 국립묘지법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도 불가능하다. 국가보훈처 역시 “국립묘지 안장 배제 대상”이라고 못박았다. 유족 측인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도 이날 기자들에게 “가족장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전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 3권에서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그냥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행안부 관계자는 “장지를 포함한 장례 전 절차가 사적 영역으로 정부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묘역 조성을 위한 관련법 검토나 관계부처 협조 요청은 없을 것”이라며 “유족 측이 대체부지 등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직 대통령 가족장은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에 이은 세 번째 사례가 된다. 이 전 대통령은 1965년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한 뒤 야당 반발로 정부가 국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하자 유족들이 이를 거부하고 가족장으로 치렀다. 윤 전 대통령은 1990년 유족의 뜻에 따라 평소 다니던 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치렀다.
  • 떠나는 날까지… 전두환측 “5·18 사죄했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

    떠나는 날까지… 전두환측 “5·18 사죄했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전씨의 시신은 6시간이나 지난 오후 3시 15분쯤 빈소가 차려진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도착했다. 강원 인제군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 지 정확히 33년째 되던 날 전씨는 눈을 감았다. 장례식장 앞에서는 전씨의 과오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민단체 전두환심판국민행동 상임고문인 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씨는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말 황망하기 짝이 없고 유가족은 41년 동안 시대의 아픔을 은폐했다”면서 “아들들의 목숨을 강제로 빼앗기고 시신을 받았던 부모들의 심정을 꼭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전남 영암군에 사는 안충원(20)씨는 “개탄스러워 서울까지 오게 됐다”면서 ‘반성하지 않는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유튜버들도 빈소를 찾아 휴대전화로 라이브 방송을 했다. 보수 성향의 일파만파애국자총연합 등은 광화문 일대에 분향소를 설치할 장소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문은 오후 5시부터 시작됐지만 전씨 측근인 5공 인사들은 그전부터 하나둘씩 빈소로 들어갔다.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 하나회 출신 고명승 전 예비역 육군 제3군사령관에 이어 전씨가 백담사에 머물 당시 주지 도후스님, 하나회 출신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도후스님은 빈소를 떠나며 “2년간 같이 수행했다. 왕생극락하시라고 기도해 드렸다”고 말했다. 하나회 막내였던 강창희 전 국회의장을 시작으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이명박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의 조화 행렬도 이어졌다.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앓은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5분쯤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전씨 부인 이순자씨와 간호사가 발견해 외부에 있던 경호팀에 알렸다. 경찰 과학수사대가 범죄혐의점 분석을 위해 현장을 검증했으며 전씨 시신에 대한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검사도 이뤄졌다. 언론에 알려진 시점은 1시간쯤 뒤인 오전 9시 46분이었다.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자택 앞에서 ‘전씨가 사망 전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및 유족에게 따로 남긴 말은 없는지’를 묻는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전씨의 유언은 자신의 회고록에 담긴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아 있고 싶다’는 내용으로 전해졌다. 전씨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될 것으로 보인다.
  •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 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와 달러 가치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수백여 명을 죽였고, 과오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정치적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두고 정치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이란 것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적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 시대에 발현됐을 뿐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전두환 빈소에 측근들 조문…5·18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

    전두환 빈소에 측근들 조문…5·18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전씨의 시신은 6시간이나 지난 오후 3시 15분쯤 취재진을 피해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도착했다.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 지 정확히 33년째 되던 날 전씨는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전씨의 빈소는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특실 1호실에 마련됐다. 세브란스병원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빈소가 다소 늦게 차려졌지만 오후 4시쯤부터 전씨 측근인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고명승 전 육군 제3군사령관 등이 조문했다. 빈소 앞 전광판에는 전씨의 영정 사진과 함께 배우자 이순자씨를 비롯해 상주 이름이 올라왔다. 입관은 오는 25일 오전 10시, 발인은 27일 오전 8시로 공지됐지만 장지는 공란으로 남겨졌다.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앓은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5분쯤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이씨가 가장 먼저 발견해 외부에 있던 경호팀에 알렸다. 언론에 알려진 시점은 1시간쯤 뒤인 오전 9시 46분이었다. 전씨 사망 소식에 취재진이 자택으로 몰려들었고 ‘전두환 회고록’을 쓴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오전 10시 50분쯤 전씨의 연희동 자택 앞에 나와 브리핑을 했다. 민 전 비서관은 전씨가 4년 전 발간한 회고록에 그가 남긴 유언에 해당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면서 미리 준비한 원고를 펼쳐 읽었다.전씨는 회고록에 ‘통일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고 적었다. 민 전 비서관은 전씨가 평소에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려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했다. 민 전 비서관은 전씨가 사망 전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및 유족에게 따로 남긴 말은 없는지를 묻는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씨가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유감의 뜻을 표했다면서 “그냥 막연하게 사죄하라는 것은 마치 옛날에 원님이 사람 붙잡아 놓고 ‘네 죄를 네가 알 터이니 이실직고하라’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전씨의 사망소식에 전씨 측근 인사들도 속속 전씨 자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을 받던 전씨를 변호한 정주교 변호사도 자택을 찾았다. 이씨의 조카인 이용택 전 국회의원은 전씨가 “생전에 국립묘지에는 안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일파만파애국자총연합 등은 광화문 일대에 분향소를 설치할 장소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전두환 미납 추징금 956억원 환수 미궁으로···5·18 재판도 중단

    전두환 미납 추징금 956억원 환수 미궁으로···5·18 재판도 중단

    1997년 유죄가 확정되면서 2000억원대 추징금을 부과받았던 전두환(90)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미납 추징금 956억원은 환수가 어려워졌다. 20여년 만에 그를 다시 법정에 세웠던 5·18 민주화운동 관련 형사재판도 중단될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23일 기준 전체 추징금 2205억원 중 1249억원(57%)을 집행했고 미납 추징금은 956억원(43%) 남아 있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상 추징금은 채무와 달리 당사자가 사망하면 상속되지 않고 집행 절차가 중단된다. 다만 검찰 관계자는 “추가 환수 가능성은 아직 단정하기 어려워 관련 법리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1997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죄 유죄 판결로 추징금이 확정되자 314억원만 납부한 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완납을 미뤘다. 2013년 본격 환수가 시작된 뒤 검찰은 지난해까지 추징금 1235억원을 집행했다. 올해는 가족 명의의 임야 공매 낙찰가 10억여원 등 모두 14억원을 추가 환수했다. 이외에 전씨는 지방세 9억 8200만원도 미납 중이다. 서울시는 2018년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압수한 그림 9점과 현재 자택에 남은 병풍, 가전제품 등을 공매할 계획이다. 지방세는 체납자가 사망하더라도 압류할 재산이 있다면 징수권이 유지된다. 현재 진행 중인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훼손’ 재판 항소심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지법 형사1부(부장 김재근)는 오는 29일 결심공판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씨가 재판 도중 사망하면서 절차에 따라 공소 기각을 결정할 전망이다. 전씨는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 신부에 대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지난해 11월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회고록과 관련해 5·18 단체들이 전씨와 아들 재국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은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민사소송은 피고가 사망해도 유족이 소송을 계속할 수 있다.
  •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과거사 진실 안 밝힌 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재판 중에 사망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12·12 쿠데타(1979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유혈 진압에 관여한 전직 대통령(최규하·전두환·노태우)들이 마지막까지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씨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이 더욱 요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씨는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기 때문에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이후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에 넘겨진 전씨는 1심에서 유죄를 받은 후 항소해 오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둔 상황이었다. 5·18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와 발포 명령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게 협조하기는커녕 끝까지 재판으로 ‘진실’을 다투다 사망하면서 당시 상황은 미궁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전씨보다 한 달 앞서 별세한 ‘동지’ 노 전 대통령(제13대)은 12·12 쿠데타 당시 자신이 지휘하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지원했다. 그는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왜곡했다. 아들 재헌씨가 최근 광주를 잇달아 찾아 사죄했지만, 노씨는 5·18 당시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비롯해 5·18의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2006년 10월 침묵을 지킨 채 사망한 최 전 대통령(제10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건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권한대행을 포함해 10개월 정도 국가원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역사적인 순간에 최고 결정권자였던 만큼 당시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12·12 쿠데타에서 신군부의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 연행을 사후 재가한 과정, 5·18 당시 광주 시민에 대한 발포가 대통령의 최종 결정인지 신군부의 독자적 행동인지 등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 “전두환, 독방 아닌 집에서 편안하게 죽음 맞이” 분노의 광주

    “전두환, 독방 아닌 집에서 편안하게 죽음 맞이” 분노의 광주

    전두환 사망에 5·18 단체 ‘원통’일말의 사과나 반성 없이 숨져“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한 가운데 5·18 단체는 분노했다. 전씨가 90세로 숨질 때까지 자신의 과오와 관련해 일말의 사과나 반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5·18 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재판이 학살 책임자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심판’이 되길 기대했지만, 전씨의 죽음으로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며 원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들은 “전씨가 죽더라도 5·18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오월 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만고의 대역죄인 전씨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씨는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항소해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명예훼손 사건 피해자 측 법률 대리를 맡은 김정호 변호사는 “재판이 지연되며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 법률적으로 5·18 당사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죄에 대해 확정판결이 내려지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광주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결국 전씨의 죗값을 묻지 못한 법의 한계에 분노를 표출했다. 기우식 참여자치21 사무처장은 뉴스1과의 통화에서 “전씨가 교도소 차가운 독방이 아니라 따뜻한 집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고 밝혔다. 박재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찬탈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씨의 죽음에 명복을 빌 수가 없다”며 “끝내 사죄 한마디 하지 않고 죽은 자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씨는 군사 반란을 통한 집권, 5·18 유혈 진압, 철권통치와 인권 탄압 등 많은 사건에 대해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사과하지 않았다. 특히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십년 동안 사과 요구가 이어졌지만 그는 한 번도 미안한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전씨는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쓰는 등 시간이 지나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5·18 최초 발포 명령자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전씨가 끝내 입을 다문 채 숨지면서 결국 이 문제는 영구 미제로 남을 우려가 커졌다.
  • “죄를 이실직고하라는 거냐” 전두환측, 취재진과 언성

    “죄를 이실직고하라는 거냐” 전두환측, 취재진과 언성

    23일 사망한 전두환씨의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이 고인 관련 브리핑 도중 취재진으로부터 5·18민주화운동 관련 질문을 받고선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언성을 높였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전두환씨가 사망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남긴 말은 없느냐’라고 취재진이 묻자 “형사소송법에도 죄를 물으려면 시간·장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물으라고 돼 있는데, 그냥 막연하게 사죄하라는 건 옛날 원님이 사람 붙잡아 놓고 ‘네 죄를 네가 알 터이니 이실직고하라’는 것 아니냐”라며 반발했다. 그러면서 “육하원칙에 따라 그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몇월 며칠 몇시에 어디서 어떤 부대를 어떻게 지휘했고 누구에게 어떻게 집단발포 명령을 했는지, 그것을 적시한 다음 사실이냐 아니냐 묻고 거기에 대해서 사죄하라고 그래야지 무조건 사죄하라고 그러면 그게 질문이 되느냐”라고 따졌다. 이어 “광주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그런(사죄) 말씀은 이미 하신 바가 있다”라면서 “백담사 계실 때에도 그렇고, 여기 연희동에 돌아오신 뒤로도, 사찰에 가서도 기도와 백일기도 하시고 여러 차례 했는데 더 어떻게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발포 명령이라는 건 없었고, 보안사령관이 발포 명령을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라면서 “사죄의 뜻을 밝힌 건 (전씨가) 대통령이 된 후 광주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충분히 못 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유감스럽다는 말을 한 것이지 발포 명령했다고 사죄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민 전 비서관은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재판 항소심이 진행 중인 전두환씨의 회고록과 관련해 자신이 초고를 받아 집필에 관여해 원고를 완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 신부를 가리켜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이달 말 항소심 선고를 앞둔 상황이었다. 민 전 비서관은 2019년 한 인터뷰에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 등 구체적인 표현은 자신이 작성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러나 검찰 기소부터 1심 재판이 진행되는 지난 3년 동안엔 사법기관에서 이러한 주장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지난 8월 항소심 재판에서 2014년 봄 전두환씨로부터 “민 수석만큼 내 삶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딨느냐.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면서 구술을 중심으로 한 초고를 수정해 회고록을 완성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면서 다만 전두환씨의 생각을 넘어서지는 않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전두환씨가 조 신부에 대해 정확히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회고록 초고와 조 신부에 대한 전씨의 평소 발언, 생각을 토대로 기술했다는 것이 민 전 비서관의 주장이다.
  • 5·18 진상규명 ‘첩첩산중’...남은 가족들 반성 없어

    5·18 진상규명 ‘첩첩산중’...남은 가족들 반성 없어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을 계기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전 전 대통령을 제외한 남은 가족들도 반성이나 사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와 12·12 및 5·18 사건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및 특별조사위원회 등을 거쳤지만 진상규명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상처 치유는 현재진행형인 상황이다. 1980년 5월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명령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헬기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위권 발동을 내세우며 발포명령자를 부정해왔고, 1995∼1997년 이어진 검찰수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기소하지 못했다. 전두환 등 피고인 5명은 5월 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인 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우선 1980년 5월 20일 오후 10시 30분 광주역에서 계엄군의 첫 발포,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께 옛 전남도청 앞에서의 첫 집단 발포의 명령자가 누구였는지는 광주학살의 책임 소재를 가릴 핵심이다. 생사도 확인되지 못한 행방불명자를 재조사하고, 이들의 암매장 장소를 찾는 한편 유해 발굴과 수습에 대한 조사도 중요하다. 광주시가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는 82명으로, 이 가운데 6명은 2001년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의 무명열사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됐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 대비해 군 보안사와 국방부 등 관계 기관들이 구성한 4·11 연구위원회의 진실왜곡과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도 과제다. 결국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무소속 최경환 의원 대표 발의)에 따라 구성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얼마나 진실규명의 성과를 낼지가 관건이다. 지난해 5월 5·18 40주년에 맞춰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실무진 구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돌입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는 실정이다. 한편, 전두환 씨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발포 명령을 정당화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광주 시민사회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5·18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목소리도 높다.이 가운데 전 전 대통령의 유족인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 등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역사적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해 비난을 샀다. 부인 이씨는 지난 2017년 3월 출간한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12·12, 5·17, 5·18에 대한 편집증적 오해와 정략적인 역사 왜곡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전율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씨는 5·18에 대해서는 ”당시 수사책임자인 동시에 정보책임자였던 그분은 결코 발포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발포 책임을 부인했다. 12·12에 대해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7월 말 광주사태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남편에게 후임이 되어줄 것을 권유했다“며 정권 찬탈이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전씨의 5·18 관련 언급에 대해서도 ”국회 청문회 등에서 사과한 것은 5·18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이씨는 전 전 대통령이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죄 재판을 받으러 광주를 오갈 때에도 동행하면서 사과 요구 등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도 사과 요구에 답하지 않았다. 유가족은 전 전 대통령이 미납한 추징금과 관련해서도 끝까지 뻔뻔한 태도를 고수했다. 지난 2013년 검찰이 미납 추징금 관련 비자금 수사를 벌이자 장남 재국씨는 일가족 명의의 입장문을 내고 미납 추징금을 자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정부가 추징금 환수를 위해 연희동 자택을 공매에 넘기자 이에 반발, 소송전을 벌였다. 결국 대법원에서 자택 중 본채에 대해서는 공매에 넘길 수 없다는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장남 재국씨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나 국정감사에 불려 나와 사과하기도 했다. 차남 재용씨는 양도소득세 포탈 등의 혐의로 처벌받으면서 부과된 40억원의 벌금을 내지 않고 ’황제 노역‘을 하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전방 고지에 백골로…” 어차피 국립묘지 못 가는 전두환 유언

    “전방 고지에 백골로…” 어차피 국립묘지 못 가는 전두환 유언

    23일 사망한 전두환씨의 유언은 ‘북녘땅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그냥 백골로 남아 있다’는 내용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자신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다. 오랜 기간 전두환씨를 보좌해온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전두환씨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설명했다. 민 전 비서관은 “전방 고지라는 게 장지인데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장지가 결정될 때까지는 일단은 화장한 뒤 연희동에 그냥 모시다가 결정되면 그리로 하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 전 비서관에 따르면 전두환씨는 오전 8시 45분쯤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졌다. 당시 자택엔 부인 이순자씨밖에 없어서 응급처치를 받지 못하고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군사 반란을 통해 정국을 장악한 뒤 계엄령을 선포한 그는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바람을 짓밟았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다. 그는 대통령 퇴임 뒤 재산 헌납을 약속하고 백담사에 칩거했으나 이후 복귀하고도 재산 헌납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1996년 내란목적살인죄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추징금 2205억원이 선고됐는데, 이 추징금은 여전히 완납되지 않았다. 그는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전두환씨는 내란죄 등으로 실형을 받았기 때문에 군인 또는 전직 대통령 자격에 따른 국립묘지 안장이 불가능하다. 국립묘지법은 ‘국가유공자법 제79조 제1항 제1호부터 제4호까지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을 안장 대상자에서 제외하고 있다. 전두환씨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긴 했지만, 사면이 ‘결격 사유 해소’ 요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법무부의 유권해석이다. 앞서 지난 10월 별세한 노태우씨도 같은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훈처가 밝힌 바 있다. 보훈처에 따르면 현재 대전현충원에 조성된 국가원수묘역 4기 가운데 3기가 남아있다. 1기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안장돼 있다. 서울현충원에는 남은 묘역이 없는 상태다.
  • “광주는 폭동” “전재산 29만원”…논란의 어록 남긴 전두환

    “광주는 폭동” “전재산 29만원”…논란의 어록 남긴 전두환

    23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군부 출신으로 수많은 논란의 어록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후인 2003년에도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해 공분을 샀다. 1997년 법원이 뇌물 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2205억원의 추징금 납부를 명령하자 “예금자산이 29만 원밖에 없다”며 버티기로 일관한 일화도 유명하다. 다음은 생전 고인이 남긴 주요 발언들. “나도 인간인데 동네북처럼 두들기지 마라. 노태우가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나를 도청하다니 내가 빨갱이냐”(1988년. 대통령 퇴임 후 백담사로 가기 전)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인들이 되레 불안을 느꼈다.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1996년 2월 26일 비자금 사건 첫 공판에서)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1996년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 직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심판하고 있으나 현실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96년 8월 5일 비자금 뇌물 수수, 12·12 사태 및 5·18 사건으로 10개 죄목으로 기소된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사형‘ 구형 후)“지금 대통령께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신다고 하는데 대통령 본인의 역사부터 바로잡으시길 바란다” (1997년 4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예금 자산이 29만원밖에 없다”(1997년. 추징금 2205억원 중 532억원을 납부한 뒤) “나 자신의 인권도 탄압받고 짓밟히면서 살아왔다. 내가 인내심이 있고 성질이 좋아 이렇게 살아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속병이 나서 제풀에 죽었을 것이다”(1999년 1월 13일. 자택을 방문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대통령 퇴임 후의 마음고생을 토로하며)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2003년 2월 KBS 인터뷰)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2008년 4월 9일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취재진 앞에서)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2014년 8월 9일, 병상에 누워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연희동 자택에서)전두환 회고록 서문에서 전 전 대통령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도, 12·12와 5·17이 내 사적인 권력 추구의 출발점이라고 단정되고 있겠지만,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낸 것은 시대적 상황이었다(2017년 4월 ’전두환 회고록‘ 서문에서) ”내가 광주에 내려갔다면 작전 지휘를 받아야 했을 현지 지휘관들만큼은 나를 만났거나 봤어야 했는데 그런 증언을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2017년 4월 ’전두환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2017년 4월 ’전두환 회고록‘에서)
  • 전두환 전 대통령(1931~2021) 연보

    전두환 전 대통령(1931~2021) 연보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다음은 전 전 대통령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 연보. ▲ 1931년 1월 18일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출생 ▲ 1951년 = 육군사관학교 11기 입학 ▲ 1955년 = 육군 소위 임관 ▲ 1959년 = 이순자 여사와 결혼(슬하에 3남 1녀 둠) ▲ 1961년 =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쿠데타 지지 시위 주도 ▲ 1963년 =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과장 ▲ 1967년 =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 1969년 = 육사 11기 중 첫 대령 진급 ▲ 1970년 = 육군 제9보병사단(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월남전 참전 ▲ 1973년 = 육군 준장 진급 ▲ 1976년 =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 1977년 = 육군 소장 진급 ▲ 1978년 = 육군 제1사단장. 북한 제3땅굴 발견해 ‘5·16 민족상’ 수상 ▲ 1979년 =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태 수사. 수도권 지역 무장병력 6000명 동원 육군본부·국방부·수경사·특전사 등 점거해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하는 등 12·12 군사반란 주도▲ 1980년 =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3김(김영삼·김종필·김대중) 가택 연금 또는 구속. 전국 대학에 휴교령. 국회 봉쇄.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 광주 투입,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삼청교육대 설치. 육군 대장 진급 뒤 예편. 민주공화당·신민당 등 강제해산.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 골자로 한 8차 개헌 실행.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 선거 당선. 대통령 취임 ▲ 1981년 = 민주정의당 입당, 초대 총재로 추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대통령 취임 ▲ 1982년 = 한국프로야구 창설. 국풍 81 개최 ▲ 1983년 =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 사망 ▲ 1984년 = 홍수 피해 북한에 식량지원 ▲ 1985년 =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첫 이산가족 상봉 성사 ▲ 1986년 = . 3저 호황(원유가격 하락·달러 가치의 하락·국제금리 하락)으로 무역수지 흑자 전환.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 ▲ 1987년 =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발생. 4·13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6월 민주항쟁 전국 확산.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6·29 선언 발표해 직선제 개헌 요구 수용 ▲ 1988년 = 대통령 퇴임. 백담사 첩거. 민주정의당 탈당 ▲ 1989년 = 국회 ‘5공 비리 청문회’ 참석 ▲ 1990년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복귀 ▲ 1994년 =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 1995년 = 검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 헌법재판소, 불기소 처분 취소. 검찰,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 설치 후 재수사 개시. 사전구속영장 발부돼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 ▲ 1996년 =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 1심에서 사형과 2259억원 추징금 선고. 항소 후 2심에서 무기징역 감형과 추징금 2205억원 선고 ▲ 1997년 = 대법원 2심 선고 확정. 특별사면 후 석방 ▲ 1999년 =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 2003년 = 법원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자산 29만원’ 기재. 검찰, 진돗개 2마리, TV·냉장고·피아노 등 경매 처분 ▲ 2004년 = 이순자씨, 추징금 200억원 대납 ▲ 2006년 = 세무 당국을 상대로 80억원대 증여세 부과 취소소송 제기▲ 2013년 = 대검찰청, 고액 벌과금 집행팀 마련. 서울중앙지검에 전씨 미납 추징금 1672억원 집행을 위한 전담팀 구성. ‘전두환 추징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별법 일부개정안) 국회 통과. 전씨 추징금 환수 시효 2020년 10월까지로 연장 ▲ 2017년 = 회고록 출간. 조비오 신부 유족 등이 사자 명예훼손 혐의 형사고소. 광주지법 전두환 회고록 출판·배포금지 결정. 회고록 5·18 일부 내용 삭제 재출간 ▲ 2018년 = 알츠하이머 진단 사실 공개하며 첫 공판 불출석 ▲ 2019년 = 광주지법 형사재판 3차 공판, 이순자 여사와 함께 출석 ▲ 2020년 11월 30일 = 사자명예훼손 혐의,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유죄판결 ▲ 2021년 8월 9일 =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 출석 ▲ 2021년 11월 23일 사망
  • [글로벌 In&Out] 제정러시아계 폴란드 귀족 얀콥스키 일가와 한반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제정러시아계 폴란드 귀족 얀콥스키 일가와 한반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든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했다. 1863년 1월,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당시 농과대학에 다니던 미하일 얀콥스키를 비롯한 수만명의 폴란드 청년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봉기는 진압당했고 미하일은 체포됐다. 귀족이었던 그는 사형을 면했지만 귀족 지위를 박탈당해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1864년쯤 시베리아 도착 후 광부가 된 그는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동남쪽에 있는 아스콜드섬 금광의 관리자가 됐다. 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인 말고도 한인들도 많았다. 이들은 홍호자(紅?子)라는 중국인 비적으로부터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총을 들고 홍호자들과 싸웠다. 사격술이 뛰어난 미하일은 한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네눈이’라는 별명으로 북한 지역까지 이름을 떨쳤다. 1879년 그는 귀족으로서 명예회복됐으나 연해주를 떠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 서남쪽에 있는 시데미 반도에서 농장을 설립해 한인 노동자를 많이 고용했다. 1912년 미하일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하일의 사업은 1879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인 유리가 계승했으나 1차 세계대전과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직후 러시아 내전이 벌어졌다. 귀족이고 부르주아지였던 얀콥스키 가문은 노농정권과 싸웠던 백군의 편을 들어 반혁명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1922년 적군의 승리가 시간문제가 되자 얀콥스키가는 망명하기로 한다. 하지만 유럽이나 만주를 망명지로 택한 많은 백색파와 달리 그들은 한반도로 떠난다. 1922년 10월, 한반도에 도착한 얀콥스키가는 러시아에서 가져온 재산을 다 팔고 미하일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사격술을 살려 사냥꾼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20년대 공업화가 한반도와 만주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살 곳을 잃어가고 있던 호랑이들이 북한과 만주의 산에서 내려와 민가의 가축이나 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리는 사냥으로 돈을 많이 벌어 청진 근처의 땅을 사서 집을 지었으며 한국인들과 함께 호랑이, 사슴, 멧돼지 사냥도 하고 작은 농장도 운영했다. 유리에게는 발레리라는 아들이 있었다. 열한 살 때 러시아를 떠난 발레리는 북한에서 자랐다. 그는 평양의 전문학교에 다녔으며 함경도 사투리를 잘 구사했다고 한다. 발레리도 아버지처럼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1940년 어느 날 사냥허가서를 받으러 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관이 김일성이라는 ‘호랑이’를 잡아 달라고 의뢰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3년간 이어진 얀콥스키가의 한반도 생활은 해방과 함께 끝났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북한 주둔 일본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얀콥스키가는 다시 망명하지 않고 소련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발레리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참모부를 방문해 동생들과 함께 소련군에 입대했다. 해방 후 그들은 평양과 청진에서 소련군 통역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일제 패망 후 소련이 얀콥스키 일가의 배경, 북한에서의 활동을 조사한 결과 일제 통치기관인 우체국 근무, 라디오 도청 등 그들이 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소련군 정치경찰은 ‘국제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원’으로 간주해 발레리와 그의 동생, 아버지를 체포해 유죄를 선고한 뒤 1947년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호송했다. 발레리는 1952년 풀려난 뒤 산림보호원으로 일했으며 1960년대부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신문, 라디오 등을 통해 소개했다. 2010년 사망한 그는 실화집과 회고록 등 총 15권 이상의 책을 남겼다. 그 저서는 지금도 근대 북한의 자연과 사회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반도와 얽힌 한 러시아 가문의 역정이 흥미롭다.
  • “상상 속에서 아버지 죽여” 윌 스미스, 어두웠던 어린시절 고백

    “상상 속에서 아버지 죽여” 윌 스미스, 어두웠던 어린시절 고백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사실 밝혀 할리우드 유명 배우 윌 스미스(53)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사실을 고백했다. 3일(현지시간) CNN 등에 따르면 윌 스미스는 오는 9일 출간되는 회고록 ‘윌(Will)’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이중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며 아버지와의 복잡한 관계 등에 대해 털어놨다. 윌 스미스는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폭력적이었지만 내 모든 연극, 발표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며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이면서도 내 영화 시사회에서만큼은 멀쩡했다”고 밝혔다. 윌 스미스는 9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모습을 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 옆 부분을 세게 때려 어머니가 피를 토하는 것을 봤다”며 그 일로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나는 상을 받거나 온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마다 그날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사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윌 스미스의 부모는 2000년 이혼했고, 아버지는 2016년에 사망했다. “어머니의 원수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윌 스미스는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할 때 겪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가 병든 아버지를 화장실에 데려가다가 계단 꼭대기에서 멈칫거렸는데, 그 때 ‘어두운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나는 언젠가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했다”며 “내가 충분히 자라서 강해졌을 때, 난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죽이곤 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수십년에 걸친 고통과 분노가 진정되자 나는 머리를 저은 뒤 아버지를 모셨다”고 밝혔다. 윌 스미스는 “결국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제대로 사랑했는지에 따라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윌 스미스는 필라델피아, 브루클린,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신간 설명회를 앞두고 있다.
  • 신동빈 “창업주 도전·열정 DNA 깊이 새겨 미래 롯데를”

    신동빈 “창업주 도전·열정 DNA 깊이 새겨 미래 롯데를”

    “새로운 롯데를 만들어 가는 길에 신격호 명예회장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도전과 열정의 DNA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명예회장님의 정신을 깊이 새기면서 모두 의지를 모아 미래의 롯데를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진행된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신 명예회장님은 대한민국이 부강해지고 우리 국민이 잘살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는 기업을 만들고자 노력하셨다”며 이같이 말했다. 롯데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신격호 창업주의 도전정신을 계승하고자 롯데월드타워에 흉상과 ‘상전 신격호 기념관’을 설치했다. 이날 비공개로 열린 기념관 개관식에는 신 회장을 비롯해 장녀 신영자 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송용덕·이동우 롯데지주 대표, 4개 부문(BU)장 등 임직원 1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관은 680㎡(약 206평) 규모로 롯데월드타워 5층에 들어섰다. 미디어 자료와 실물 사료로 롯데의 역사를 소개하고 초기 집무실을 재현했다. 창업주가 생전에 신었던 낡은 구두와 돋보기, 펜과 수첩 등의 집무 도구, 명함과 파이프 담뱃대, 롯데백화점 초기 구상도, 롯데월드타워 기록지 등을 볼 수 있다. 초기 집무실도 재현됐다. 집무실에는 창업주의 경영 철학으로 알려진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거화취실’(去華就實)이 담긴 액자와 한국 농촌의 풍경이 담긴 그림이 걸려 있다. 신 회장은 기념관 방명록에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모두에게 꿈을 주는 기업 롯데를 만들어 가겠다’고 썼다. 100주년 당일인 3일에는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의 출간이 예정돼 있다.
  • 신동빈 롯데 회장 “유지 받들어 모두에게 꿈을 주는 기업 만들겠다”

    신동빈 롯데 회장 “유지 받들어 모두에게 꿈을 주는 기업 만들겠다”

    “새로운 롯데를 만들어가는 길에 신격호 명예회장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도전과 열정의 DNA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명예회장님의 정신을 깊이 새기면서 모두 의지를 모아 미래의 롯데를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진행된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신 명예회장님은 대한민국이 부강해지고 우리 국민이 잘살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는 기업을 만들고자 노력하셨다”며 이 같이 말했다. 롯데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신격호 창업주의 도전정신을 계승하고자 롯데월드타워에 흉상과 ‘상전 신격호 기념관’을 설치했다. 이날 비공개로 열린 기념관 개관식에는 신 회장을 비롯해 장녀 신영자 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송용덕·이동우 롯데지주 대표, 4개 부문(BU)장 등 임직원 1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관은 680㎡(206평) 규모로 롯데월드타워 5층에 들어섰다. 미디어 자료와 실물 사료로 롯데의 역사를 소개하고 초기 집무실을 재현했다. 창업주가 생전에 신었던 낡은 구두와 돋보기, 펜과 수첩 등의 집무 도구, 명함과 파이프 담뱃대, 롯데백화점 초기 구상도, 롯데월드타워 기록지 등을 볼 수 있다.초기 집무실도 재현됐다. 집무실에는 창업주의 경영 철학으로 알려진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거화취실’(去華就實)이 담긴 액자와 한국 농촌의 풍경이 담긴 그림이 걸려 있다. 신 회장은 기념관 방명록에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모두에게 꿈을 주는 기업 롯데를 만들어 가겠다’고 썼다. 한편 롯데월드타워 1층에 설치된 흉상은 좌대 포함 185㎝ 높이로, 청동으로 제작됐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동대문 DDP 대형인체조각 등으로 알려진 김영원 조각가가 제작했다. 흉상 뒤에는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강병인 서예가의 글씨로 담아냈다. 100주년 당일인 오는 3일에는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의 출간이 예정돼 있다.
  • [씨줄날줄] 민간 방북과 한반도 평화/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민간 방북과 한반도 평화/박록삼 논설위원

    1994년 6월 한반도는 전쟁을 코앞에 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1988년 미국의 정찰위성이 북한 영변 원자로 부근에서 핵 재처리 시설을 확인한 뒤 북핵 문제는 시작됐다. 북한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전후해 3년 동안 핵 재처리를 중단했고, 핵 원료량과 핵시설 리스트 등을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 이상으로 충실히 제출했다. 심지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을 인정한다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북미 대화는 시작됐지만 상호 신뢰는 없었다. 미국은 IAEA의 특별사찰 수용을 추가 요구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맞섰고, 1994년 5월 영변에서 핵연료봉 반출을 시도했다. 그러자 다음달 미국은 영변을 정밀 타격하는 외과수술식 공격(Surgical attack)을 계획했다. ‘한반도 1차 핵위기’였다. 이때 지미 카터(97) 미국 전 대통령이 평양을 전격 방문한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 회고록에 따르면 카터가 6월 1일 먼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방북 의사를 밝혔다. ‘밑져야 본전’으로 여긴 클린턴의 재가 속에 카터는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을 만났다. 대동강에서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핵 재처리 문제를 협상하고 핵 폐기 수순도 밟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나아가 그해 7월 25~27일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결과까지 만들어 냈다. 북핵 타격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또 다른 방북이 있었다.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다. 같은 해 10월 다시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 서해안 공단 사업 등에 합의했다. 1001마리 소떼를 몰고 간 정 회장의 모습을 두고 프랑스 철학자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2년 뒤 남북교류협력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와 같은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나왔다.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결과물 없이 위태롭게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는 이렇듯 민간의 염원과 헌신을 주춧돌로 다져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시간 지난달 29일 바티칸 교황청에서 프란체스코 교황을 만나 “북한을 방문해 주신다면 한반도 평화의 모멘텀이 될 것”이라고 요청했다. 교황 역시 “초청장을 보내 주면 평화를 위해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을 만난 바이든 미 대통령 역시 “좋은 제안”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문 대통령과 프란체스코 교황은 2018년에도 같은 요청과 같은 답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북한의 화답이다. 부디 북한이 여러 고려를 뛰어넘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담대한 결정을 내리길 바랄 따름이다.
  • 광주시, 노태우 전 대통령 분향소 설치 안 한다…5·18단체, 국가장도 반대

    광주시, 노태우 전 대통령 분향소 설치 안 한다…5·18단체, 국가장도 반대

    광주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 기간 청사내에 분향소를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국기의 조기 게양도 하지 않는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27일 시의회의장과 공동명의의 성명을 내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한 정부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국기 조기 게양 및 분향소 설치를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시장은 성명에서 “고인은 5·18 광주학살의 주역이었고, 발포명령 등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생전에 진정어린 반성과 사죄는 물론 5·18진상규명에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아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시장은 또 “고인은 국가 폭력에 목숨을 잃은 무고한 시민들, 5·18유가족들,아직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행방불명자들을 끝내 외면했다”며 “전두환 등 5·18 책임자들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이끌어내고 그날의 진실을 끝까지 밝혀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도 이날 성명을 통해 “정부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가장 결정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헌법을 파괴한 죄인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르기로한 결정은 유감스럽다”며 “노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실세로서 1980년 5월 학살에 단 한번도 사죄하지 않았고, 2011년 펴낸 그의 회고록에는 5·18의 원인을 유언비어에 현혹된 시민들의 탓으로 돌렸다”며 국가장 거행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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