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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공화국과 張勉] (7) 尹潽善과의 갈등/金在淳 前국회의장

    1960년 8월29일 이른 아침 張勉총리를 비롯해 제2공화국 장관들이 서울역으로 모여들었다.이들은 ‘尹潽善대통령이 휴가 겸 민정시찰을 떠나니 모두 나와 전송하라’는 대통령 비서실의 전갈을 받고 나온 참이었다.이윽고 ‘관1호’차를 타고 尹대통령 부처가 등장했다.尹대통령은 張勉내각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오전 8시 특별열차 편으로 떠난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서는 한동안 수군거림이 일었다.“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나오라고 ‘지시’하는 짓은 무엇이며,그렇다고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張내각은 또 뭐냐”하는 말들이었다.한마디로 “尹潽善은 월권한 것이고 張勉은 제 밥그릇도 못챙긴다”는 평이었다. 張勉정부 출범 닷새 후에 일어난 이 간단한 삽화는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민주당 신·구파의 대결이라는 큰 구도 말고도 ▒권위주의적인 尹潽善과 다툼을 싫어하는 張勉의대조적인 성격 ▒처음 도입한 내각책임제를 양쪽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듯한 미숙함들이 이 삽화에는 들어 있다. 제2공화국은 의회가 정치의 중심인 내각책임제였다.대통령은 의전적인 의미의 국가원수에 불과하며,총리야말로 행정권 담당자인 동시에 국정(國政)에관한 총괄적인 책임자였다.그러므로 尹潽善대통령은 국민과의 접촉을 자제하고,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 尹대통령은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에 수록)에서 “틈틈이 민정시찰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밝혔듯이 자주 거리로 나섰다.도로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가 지방시찰에 나설 때면 으레 특별열차가 동원되곤 했다. 문제는 대통령과의 잦은 접촉이 국민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느냐에 있었다.정치학자들은 “국가통치의 중심이 총리인지,대통령인지 국민들이 혼동을 일으킨다”면서 “이같은 혼란은 정치안정에 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또 “尹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상관없이 李承晩대통령이 누린 권위를 자신도 유지하고 싶어한 듯하다”는 풀이도 뒤따른다. 尹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으며 張勉내각의 정책과 배치되거나,그것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불쑥불쑥 내곤 했다. 60년 10월10일 許政과도정부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張정부가 경질하자 尹대통령은 구파의 입장을 반영해 ‘유감’을 표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張내각에서 “왜 정치에 관여하는가”라고 항의하자 그는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다음해 1월12일 尹대통령은민·참의원 합동회의 치사를 통해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그는 “한 개인,한 당파가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張勉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張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했다.새해 들어 사회가 안정돼 가고 따라서 경제건설에 주력하려는 마당에 ‘국가적 위기’‘난국’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분개했다.朱耀翰·金永善 등 張내각의 핵심 각료들은 尹대통령이 내각을 붕괴시키는 명분을 쌓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張勉과 尹潽善의 갈등은 3월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일명 청와대 4자회담)에 이르러 극점에 다다른다.그 전날 밤 서울에서는 반공법·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횃불데모가 있었다.張勉정부 때의 마지막 대규모 시위로,밤에 횃불을 동원한 방식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23일 오후 8시 청와대에는 張勉총리·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白樂濬참의원의장이 모였다.張내각의 국방장관인 玄錫虎와 이미 신민당으로 분당한 구파의 金度演 柳珍山 梁一東 趙漢栢 徐範錫도 자리를 같이했다.참석자들이 남긴 회고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어서 각기 조금씩 다르지만 그 윤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張총리는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논의하자’는 연락을 받고청와대로 갔다.처음엔 그런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전개되더니 어느결에 ‘정권문제’로 화제가 바뀌었다.이윽고 尹대통령이 “혼란한 정국을 극복할자신이 있느냐”면서 은근히 총리 사임을 종용하더라고 회고했다. 반면 尹대통령은,참석자들이 張총리에게 “거국내각이라도 만들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했다고 밝혔다.이에 張총리는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더라는것.그러나 尹대통령은 모임이 서로를 이해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고 술회했다. 한편 柳珍山은 “尹대통령이 ‘현상유지책만으로 안된다면(정국을 담당할인물을)한번 바꿔 봐야 할 게 아니오’라고 일격을 가하자 張총리가 얼굴이창백해져 변명을 했다”면서 張총리가 끝내 궁지를 면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참석자들은 밤 11시30분쯤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내린 것은없었다.다만 이 모임에서 나온 말들은 일절 발설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다음날 白樂濬이 회담 내용을 공표하는 바람에 각 신문은 ‘尹대통령이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대서특필했다.張정부와 신파가 격노한 것은 당연했다.李錫基 민주당 원내총무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야당 대표들만 불러 놓고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말한 사실은 언어도단이다.청와대는 음모를 꾸미는 곳이다.尹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식의 정치간섭을 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張勉과 尹潽善 사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경이 됐다.내각책임제에서 반목하고 갈등하는 총리와 대통령의 관계는 ‘정치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했다.5·16쿠데타가 발생한 뒤 힘을 합쳐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두 사람은 최소한의 연락마저도 유지하지 않는다.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 張내각 외무부 정무차관 金在淳 前국회의장 金在淳전국회의장(76·월간 ‘샘터’ 발행인)은 張勉내각에서 외무부와 재무부의 정무차관을 지냈다.5·16쿠데타 후 ‘혁명검찰’에 의해 ‘반혁명죄’로 구속돼 복역하다 주체세력내 지인의 도움으로 열달 만에 풀려났다.이후 공화당에 참여했고 金泳三정부에서 국회의장직을 사퇴하며 정계를 떠났다. 그때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유행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金전의장은 “張勉정부는 탄환 대신 투표용지로 세운 민주정부인데 지키지를 못해 아직도 국민 앞에 죄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주당이 비록 신·구파로 나뉘어 있었지만 해공(申翼熙)·유석(趙炳玉)이 계실 때는 張勉박사와의 사이에 조금도 틈바구니가 없었다”고 강조했다.그 예로 19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뽑을 때도 張勉이 趙炳玉에게 3표차로 석패했지만 아무런 잡음이 없었음을 들었다. “민주당 신·구파가 대통령 후보,당 대표 자리를 놓고 표대결을 벌이지만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밝힌 金전의장은 “국무총리 인준때해위(尹潽善)가 상산(金度演)을 먼저 지명한 것은 배신”이라고 단정했다. ‘7·29총선’후 대통령은 구파에서,총리는 신파에서 나눠 맡기로 했는데尹潽善을 대통령으로 먼저 뽑고 나니 구파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그는 “학생·시민이 피 흘린 대가로 정부가 들어섰는데 구파가 민의를 거슬러대통령·총리를 독점하려던 게 배신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尹대통령의 정치 간섭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張총리의리더십 부족이라는 평가에 대해 金전의장은 “그것이 張박사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해위의 월권을 막으려면 사사건건 따지고 싸워야 하는데 張박사는 누구하고 다투는 분이 아니어서”라는 설명이다.그는 “훗날 되돌아보니 張박사처럼 책임을 맡은 분이 겸양만을 내세우는 게 꼭 옳으냐는 생각도 들었다”고아쉬워했다. 金전의장은 “사실 해위는 張박사와 신파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몇가지 사례를 소개했다.가령 59년 전당대회때 尹潽善이 최고위원으로 뽑힌 것도 신파에서 “점잖은 분이니 밀어주자”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張박사는 나를 평소에 ‘재순군’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껴주셨다”고 회고했다.金전의장은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아져야이루어지는 것인데 당시는 張박사 같은 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상황에 이르지못했다”면서 “정말 아까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용원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제2공화국과 張勉](5)경제개발 5개년계획(下)/金立三씨

    1961년 봄은 張勉정부에게 마냥 장밋빛이었다.새해 들어 실업률은 줄고 세수(稅收)와 외환·금 보유고는 늘어나는 추세였다.4월혁명후 ‘부정축재 처리’에 걸려 전전긍긍하던 민간 경제계는 1월10일 ‘경제협의회’를 구성해 경제개발에 적극 동참할 태세를 갖추었다.게다가 각종 시위도 60년 말부터 눈에 띄게 잦아들어 사회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張勉정부는 ‘경제제일주의’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3월1일에는 전국적으로 국토건설사업이 막을 올렸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확정 단계에들어섰다. 그 3월에 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점검하고자 미국에서 찰스 울프박사 일행이 내한한다.세계적인 사회과학 연구기관인 랜드(RAND)연구소 소속의 울프박사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장기계획의 타당성을 조사하러 온 것이다. 당시 5개년계획 작성을 맡은 산업개발위원회에는 朱源위원장(훗날 건설부장관 역임)을 비롯한 쟁쟁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었다.런던정경대학원(LSE)에서 재정학과 경제발전론을 배운 金立三은 개발계획 가운데 재정·조세 부문을담당했고 한국은행에서 파견된 李經植(부총리 역임)은 거시경제 부문을 맡았다.崔珏圭(부총리 역임)도 그때 재무부 수습행정관으로 파견나와 있었다. 울프박사에 대한 브리핑을 金立三이 하게 됐다.그는 5개년계획에서 전력·석탄·비료·시멘트·화학섬유·정유·철강·농업을 중점 육성산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또 연간 목표성장률을 6.1%로 잡았는데,이처럼 목표치를 높인근거로 ▒張勉정부의 경제개발 의지가 확고하며▒한국의 교육열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력을 양성했음을 들었다. 金立三은 “울프박사가 우리의 계획에 전반적으로 찬성했다”면서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져 성장 잠재력이 높다고 평가해 모두들 만족했다”고 회상했다. 張勉정부와 미국은 울프박사의 평가를 토대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함께 노력한다.양국의 이같은 자세는 최근 발굴한 미 국무부 문서 여러곳에서도 확인된다. 61년 4월11일 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장기경제계획에 대한 원조를 발표하자張勉정부가 이를 무척 반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또 한국정부가 미국 고문단(울프박사 일행을 의미)과 상의하여 분주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 4월13일 이임(離任)인사차 張勉총리를 만난 매카나기 주한미대사는 “張총리가 울프박사의 건설적인 충고를 받아들이겠으며,경제개발5개년계획이미래의 열쇠이므로 전력을 다해 실시하리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국무부에보고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61년 4월 그 내용이 일부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張勉정부는 정식발표를 미루고 있었다.그해 7월 張총리가 미국을 방문,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원조를 확실하게 약속받으려고했기 때문이다. 5월 들어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 등 실무진이 먼저 미국에 건너가 정상회담에 앞선 교섭을 하던 중 5·16쿠데타가 터지는 바람에 張勉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국민 앞에 선보이지조차 못한 채 역사의 그늘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쿠데타 세력은 5월27일 장면정부의 부흥부를 ‘건설부’로 이름을 바꿨으며7월22일에는 ‘건설부’를 폐지하고 다시 경제기획원을 신설하는 등 일련의조치를 취한다.그리고 이날 ‘종합경제재건5개년계획’(1962∼1966년)을 발표한다. 5·16후 두달엿새만에 공개된 이 5개년계획이 순전히 쿠데타세력의 작품일수 있을까.그동안 숱하게 쏟아져 나온 5·16주체들의 증언·회고록과 그들이 집권한 기간에 나온 공식문서들은 한결같이 “張勉정부에게는 참고할 만한경제정책이 없어 모든 걸 백지에서 시작했다”는 투로 주장한다. 그러나 李起鴻(당시 부흥부 기획국장)을 비롯해 張勉정부의 5개년계획에 간여한 이들은 “기존의 계획을 검토하는 데만도 1년은 걸릴 것”이라면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한다.계획 수립의 실무 핵심이었던 金立三은 “그들은 張勉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가져갔다.방법론은 물론이고 세부항목까지 거의 같은데 달라진 부분은 성장목표를 연 6.1%에서 7.1%로 높인 것뿐”이라고 증언했다. 金立三이 이처럼 자신있게 말하는 까닭은 ‘물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물증’이란 그가 지난 40년 가까이 소중하게 보관한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이란 책자이다. 모두 717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등사본으로 제작한 이 책자는 표지에 ‘단기 4294년(1961년)5월 건설부’가 발간한 것으로 돼 있다.이 때의 ‘건설부’란 쿠데타 후인 61년 5월27일부터 7월21일까지만 존재한 부서 명칭이어서 이 책자가 5월 27∼31일 사이에 배포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張勉정부 출범 18일만에 쿠데타 모의를 시작한 세력은 ‘거사’에 성공한 지 10여일만에 앞선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는,또한차례의 ‘조급증’을 보인 것이다. 金立三은 “책 내용 가운데 바뀐 부분은 표지와 총론(總論)일부”라고 지적하고,張勉정부가 자유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한 데 비해 쿠데타 세력은 “한국경제체제는 자유기업제도와 정부에 의한 경제정책의 병존이며 이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총론에 못박았다”고 밝혔다. 1961년 5월은 張勉정부가 겨우 집권 8개월째에 접어든 때였다.4월혁명에 뒤따른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이제 막 경제발전의 날개를 펴려던 민주정부는 느닷없는 총칼에 유린당했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張勉정부가 기울인 경제개발의 노력,그리고그후의 경제성장에 실질적인 토대를 닦은 사실은 이제 역사의 공정한 평가를받을 시점에 와 있다. - 5개년계획 핵심 역할 金立三 전경련고문 金立三 전경련고문(77)은 미국 미네소타대와 영국 런던정경대학원을 마치고1959년 6월 귀국해 산업개발위원회에 보좌위원으로 들어갔다.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작성에 핵심 역할을 한 그는 62년 5월 정부기관을 떠나 그뒤로민간경제 부문에서 일해왔다. 金고문은 ‘朴正熙시대의 경제성장 신화’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먼저 “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군사정권의 그것은 외형상 비슷하지만 그 이념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張勉정부가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반면 쿠데타세력은 처음부터 ‘지도받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워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는 통로를 열어놓았다는 설명이다. 이어 재계가 61년 1월 경제협의회를 구성하면서 張勉정부의 ‘경제제일주의’에 화답하는 ‘윤리제일주의’를 채택했지만 이같은 정신이 빛을 볼 겨를도 없이 쿠데타를 맞았고 이후 정경유착의 악습에 이끌려갔다고 주장했다. “경제면에서 張勉정부의 치적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는 金고문은 “특히 군사정권 초기와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는 정치와 달리 인과응보 법칙에 따라 정확히 움직이는데 군사정권은 장기개발 계획의 필수전제 요소인 경제안정 개념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군사정권의 무모한 개발 추진에 외화는 고갈되고 인플레까지 겹쳐 결과적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고 단정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도약의 호기를 맞았는데 군사정권이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성장이 3∼4년 늦어졌다”고 비판한 金고문은 “오늘날 IMF의 간섭까지 받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잉태됐다”고 강조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 이는 ‘朴正熙 향수’에 대해서는 “실상을 정확히 몰라서인데다 일부 인사들이 부추겨 일어난 현상”이라고 잘라말하면서 “지금 (朴正熙)거품이 잔뜩 끼었는데 사그라진 뒤 국민에게 남을 공허감은 어떻게메우겠는가”라고 우려했다. 金고문은 ‘한강의 기적’의 원류는 張勉정부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張勉정부가 만든 여러 계획을 보면 평가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 [제2공화국과 張勉] (3) 경제개발 5개년계획(上)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단군 이래 첫 종합국토개발계획이었고 5·16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큰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이 사업은 더욱 큰프로젝트의 서막일 뿐이었다.‘경제 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의 청사진은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년)에 집약돼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면 흔히 朴正熙정권의 전유물처럼 여긴다.그 전에는 우리 사회에 경제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거나 있다손치더라도 경제관료들이 이를 구상하고 기획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들 믿는다.이는 쿠데타세력이 5·16 직후 일관되게 이같은 주장을 편 데다 박정희시대 18년 동안 모든공식적인 문서를 저들 뜻대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 때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장면정부는 ‘완성된’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갖고 있었다.다만 발표 직전 쿠데타를 당해 국민에게알릴 기회를 놓쳤을 따름이다. 장면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일부 수치만 바뀐 채 골격이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고,군사정권은 이를 자신의 작품인 양발표한 뒤 그대로 실천했다.따라서 60년대 경제성장의 밑그림은 장면정부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이 처음 등장한 때는 자유당정권 말기였다.李承晩정권의 강압정치에 실망한 미국은 1957년 중반 金顯哲 부흥부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아야 원조를 계속하겠다고 통보했다.마침 국내의 일부 젊은 경제관료들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구미에서 경제·행정 부문 선진이론을 배우고 귀국해 행정부의 실무책임자로서 국가 발전에정열을 불태우던 그룹이다. 劉彰順(미 헤이스팅스대) 李漢彬(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車均禧(미 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丁渽錫(미 밴더빌트대 경제학과) 崔昌洛(〃대학원 경제학과) 鄭韶永(미 워싱턴주립대 경제학박사) 등이 대표적인 이들로 모두 훗날경제부서 장관을 역임한다. 李起鴻(77·전 월간 ‘코리아 비지니스 월드’발행인)은 당시 부흥부 기획과장이었다.미 컬럼비아대 경제학 석사인 그는 세계적인 석학 넉시 교수에게서 경제개발 이론을 배웠다.넉시는 ‘경제개발’ ‘개발도상국’ 같은 개념을 처음 도입한 학자이다. 미국이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요구하자 이기홍은 밤샘을 거듭하며 그 개요를 만든다.그러나 이때의 경제개발안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묵살된다.57년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함께 경무대로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필요성을설명하자 이승만은 “그것은 스탈린 사고방식 같은데….불구대천의 원수인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한다.(이기홍 회고) 이후 宋仁相이 부흥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은 은밀하지만 활발하게 추진된다.宋장관은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세계은행 부설 경제개발연구소(EDI)에서 연수를 받은 터라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회고록에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경제발전 목표를 설정하고,그 달성을 위해 나라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宋장관과 이기홍과장은 미 대외원조처(USOM) 간부들과 협의해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할 조직인 산업개발위원회(EDC)를설립했다.세계적으로 경제개발위원회라고 통용되는 기구지만 국내에서는 ‘경제개발’이란 개념이 생소하다는 이유로 산업개발로 이름붙였다. 산업개발위원회(산개위)는 58년 4월1일 부흥부장관 자문기관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송장관이 위원장을 겸임했다.위원은 22명이었지만 고문과 보좌요원을 두도록 해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을 두루 끌어들였다.비용은 전액 미국에서 제공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예컨대 부흥부의 연간 운영예산이 9,600만환인 데 견줘 산개위는 6,000만환이었다.봉급도 높아 연구원 평균 월급이국무위원(4만2,000환)보다 많은 5만환 정도였다. 산개위는 59년 봄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년)을 국무회의에 내놓는다.그러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던 이승만정부는 1년이 지나도록 심의조차 하지 않다가 60년 4월15일에야 승인한다.마산에서 金朱烈군의 시신이 발견돼 2차시위가 일어난 지 나흘 뒤,4·19혁명이 일어나기 나흘 전이었다.아마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내세운 듯하다.자유당정권이 이처럼 경제개발에 늑장을 부린 데 대해 이한빈은 그의 논저에서 “한국 사회를위하여 커다란 불행이었고 한 토막의 역사의 풍자”라고 비판했다. 4·19혁명∼許政과도정부∼장면정부 출범이라는 격변 속에서도 산개위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하는 본연의 임무를 꿋꿋이 수행했다.장면정부는 출범한 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60년 9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부시책으로 채택한다고 공표했다.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자유당정권의 ‘3개년계획’을 토대로 하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닌 별개의 것이었다.산개위에서 ‘3개년계획’과 ‘5개년계획’을 작성하는 데 실무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金立三전경련고문(77)의설명은 다음과 같다. “거시적인 면에서 3개년계획은 산업 각 부문을 고루 발전시킨다는 ‘균형성장이론’에 토대를 둔 반면 5개년계획은 특정 부문에 투자를 집중해 전체적인 성장을 이끌어가는 ‘전략 부문 중점투자’이론을 채택했다.작성 방법도 전혀 달라 5개년계획은 노동력은 풍부하면서 자본이 부족한 나라에 적합한 새 모델을 적용했다.” 자유당정권의 계획과 장면정부의 계획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를 金고문은 “선진이론을 꾸준히 연구해 우리 실정에 맞게끔 다듬어 나간 데다 정부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개위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새로 만드는 동안 장면정부는 경제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60년 9월 장면총리 명의로 크리스천 허터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에이드 메모아르(일명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는 당시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개발 계획 당시 부흥부 기획국장 李起鴻씨 李起鴻씨는 1956년 12월 부흥부 기획과장으로 출발해 장면정부에서는 부흥부 기획국장을 역임했으며 63년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공직을 마감했다.그 7년동안 경제개발 계획의 큰 틀을 짜고 방향을 제시하는 주역 노릇을 했다. 61년 5월 기획국장인 그는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金泳祿 재무부 이재국장과 함께 워싱턴에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미 정부에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다가 5·16쿠데타 발생 소식을 들었다. 李전차관보는 “그해7월 張勉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돼 있었다”면서 회담에서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미국측 의사를 확인해 보려고 실무교섭단으로 미리 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관리들이 우리가 가져간 제1차 5개년계획 시안을 보고 ‘구매품목 표’라고 놀리듯 말하긴 했지만 상당한 호의를 갖고 격려해 주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5개년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귀띔을해줘 다시 한번 장면정부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엿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李전차관보는 “5개년계획이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집행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아직 없다”고 개탄하면서 朴正熙정권의 왜곡사례를 들었다. 60년대 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미 하버드대의 콜 박사와 합작으로 한국경제발전사를 기술했는데 5개년계획의 작성 배경이나 장면정부의 경제시책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62년 1월 군정이 선포한 5개년계획의 구성과 방향만을 논했다는 것이다. 그 후 80년대에 콜 박사를 자주 만나게 돼 “장면정부의 5개년계획을 포함하지 않고서 어찌 공정하고 객관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그러자 콜 박사가 “5개년계획이 장면정부에서 상당히 진척된 것은 알지만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꾸로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느냐”고 공격하더라는 것이다. 李전차관보는 “국가연구기관인 KDI가 집권층인 군 출신들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테지만 학문적 양심을 저버린 것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그런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5개년계획을 박정희정권 때 시작한 것으로 아는 데는 나처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이크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李전차관보는 경제개발계획,국토건설사업 등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한 자세한 소개도 곁들인 회고록 원고를 최근 마무리지었다.그 내용은 ‘경제 근대화의 숨은 이야기’(보이스 간)라는 제목으로 이달 안에 출판될 예정이다.李容遠
  • [제2공화국과 張勉](2)-국토건설사업(下)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국토개발이라는 고유목적 외에도 공공사업을 통한 고용증대,산업활성화,국가 인재충원제도 확립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적,제도적 파급효과를 거두었다. 국토건설사업본부(이하 본부)는 중앙청 서남쪽의 목조 2층 건물에 자리잡았다.민(民)과 관(官)이 함께 참여한 이질적인 집단이지만 당대 엘리트를 모은 데다 대우도 좋아 본부는 활기차게 돌아갔다.본부 간사이던 朴敬洙씨(69·작가)는 “월간 ‘사상계’에서 받은 봉급이 일반직장인보다 훨씬 많았는데본부는 그 두배 정도를 주었다”고 회고했다. 본부가 처음 한 일은 국토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지휘·감독할 일꾼을 뽑는 것이었다.국무원사무처(총무처 격)는 ‘병역을 마친 30세 미만의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국토건설추진요원(이하 건설요원)을 공개 모집했다.석달 동안건설현장에서 근무하고 나면 국가공무원 4∼5급이나 지방공무원 3∼4급으로임용한다는 조건이었다.말하자면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것인데 이는 해방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모집공고가 나자 대졸자 ‘1만수천명’(당시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증언)이지원했다.그 무렵 전국에 대학이 63군데,대학생 정원이 9만7,819명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다.합격자는 사무직 1,614명,기술직 452명 등 모두 2,066명이었다.여성도 21명 포함됐다. 건설요원들은 61년 1월9일부터 교육을 받았다.교육장에는 종교인 咸錫憲과朴鍾鴻 서울대 교수 등 당대의 지성들이 나와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이들은 2월27일 중앙청광장에서 수료식을 가진 데 이어 각 군(郡)에 15∼17명씩 배치돼 3월1일부터 현장근무에 들어갔다. 국토건설사업은 전국 각지에서 커다란 성과를 불러왔다.건설현장에는 배고픈 국민들이 새벽 5시쯤부터 몰려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섰다.하루 일을 끝내면 이들은 품삯으로 돈과,쌀·보리·비누·광목 같은 물건을 섞어 받고 만족한 표정으로 귀가했다.품삯에 현물(現物)이 포함된 까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이 사업의 주요 재원이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잉여농산물을 품삯으로 지급하면서도 다른 산업에 미치는 효과를 계산했다.쌀·보리는 정미소에서 찧었고 면화는 방직공장에 보내 광목으로가공했다.유지(乳脂)는 비누로 만들었다.따라서 건설현장에 나온 국민은 구하기 힘든 생필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정미소나 방직공장·비누공장 등은 가동률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그만큼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은 정교했다고평가해줄 만하다. 국토건설사업은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나갔다.일부 지역에서 잡음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3월30일 농림부는 25일까지의실적을 공개했다.2만6,089정보에 조림(造林)을 해 계획의 50%를 달성했으며,산·바닷가의 흙·모래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고자 나무를 심거나 돌을 쌓는 사방(砂防)사업도 목표의 51%인 2만8,958정보를 끝마쳤다. 국토건설사업은 이같은 업적말고도 공무원 공채의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당시는 공개 채용 없이 기관장이 발탁해 쓰면 시일이 지남에따라 자동 승진하는 구조였다. 정헌주옹(84)은 “건설요원 선발 이후 공무원사회에 공채제도가 자리잡았다“면서 그 뒤 일반기업체에도 퍼져 나갔다고 회고했다.또 “공채가 공고되자 61년 들어 대학가에서 시위횟수가 크게 주는 등 사회안정에도 큰몫을 했다”고 강조했다. 첫 공무원 공채는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이는 당시 재무부 예산국장이었고 그 뒤 숭전대총장·부총리를 역임한 李漢彬의 논저 ‘사회변동과 행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전부총리는 건설요원 채용이 “관료제에 새로운 사회세력,특히 젊은이들을 흡수하는 기본적인 통로로서 활용됐으며 이 젊은이들은 점진적으로 승진해 관료제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활력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공무원 공채 1기’는 5·16쿠데타 후에도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우리 사회 정·관계,경제계를 주도하는 인물로 성장했다.鄭寅用전부총리,金泰鎬국회의원(내무장관 역임),崔同燮전건설부장관,金昌甲전교통부차관,朴進球울주군수들이 ‘1기 출신’이다. 그러나 장면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기는 바람에끝을 맺지 못했다.사업을 이어받은 쿠데타세력은 61년 말 “연인원 2,500만명을 고용해 계획의 94%를 완수했다”고 공식발표했다.장면정부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그 과정은 安京模전교통장관(82)의 증언에서 분명해진다.안옹은 본부 기술부 차장으로 일하다 5·16세력에게 불려가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브리핑했다.이후 같은 업무를 계속하다 64년 교통부장관,67년 수자원개발공사사장으로 발탁돼 소양강댐 충주댐 안동댐 대청댐 등을 직접 건설했다. 60년대 국토개발의 주역인 안옹은 “장면정부도 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할 수있었다”고 단언하고 그 근거로▒정부 의지가 굳건했고▒미국이 적극 지원했으며▒사업에 참여한 관료들이 능력을 갖추었음을 들었다.그는 쿠데타세력이 국토개발에 성공한 것도 장면정부의 사업계획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張勉총리의 생애▒1899년 8월28일=인천세관에 근무하는 張箕彬과 黃누시아 사이에 장남으로출생.본관 玉山,호는 雲石▒1906년=인천성당 소속 박문학교 입학▒14년=수원농림학교 입학▒16년 5월20일=金商集의 딸 金玉允과 결혼▒17년=수원농림 졸,서울 중앙기독청년학관 영어학과 입학▒20년=청년학관 수석 졸업,도미▒21년=뉴욕 맨해튼가톨릭대 입학▒25년=맨해튼대 졸업(교육학),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로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시복식’에 참석 후 8월 귀국▒29년=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에 전념▒31년=동성상업학교 교사 시작▒36년=동성 교장으로 취임(광복 때까지 근무)▒46년=민주의원·입법의원으로 피선▒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 당선,9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12월 맨해튼대에서 명예법학박사 받음▒49년=초대 주미대사 부임▒50년=6·25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에 큰몫▒51년=2월에 제2대 국무총리 취임,11월 제6차 UN총회 한국수석대표▒52년=총리 사임▒55년=申翼熙 趙炳玉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최고위원 피선▒56년=민주당 후보로 부통령 당선.9월에 피격,경상▒59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피선,▒60년 3월15일=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낙선▒4월22일=李承晩 규탄하며 제4대 부통령직 사임▒7월29일=서울 용산 갑구에서 국회의원 당선▒8월19일=국무총리 인준▒8월23일=1차 조각 마치고 내각 출범▒61년 3월1일=국토건설사업 기공▒5월16일=쿠데타로 정권 빼앗김▒이후=신앙생활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거,국민장으로 포천 가톨릭묘지에 안장됨■張勉은 누구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張勉이 갖는 위치는 독특하다.그는 4월혁명의 결과로 태어난 제2공화국의 총리였다.尹潽善대통령이 있었지만 내각책임제였기에 제2공화국을 장면정부라고 부른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훌륭한 인격자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무능하고 나약했다”는 평도 따른다.이는 5·16세력이 조작해 전파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장면은 어떤 사람인가.장면은 부모 양쪽 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세례명 요안인 그는 인천성당 소속인 박문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해 이후 해방 전까지 신앙인·교육자로서 충실한 삶을 산다[연표 참조].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면모는 5·16이 나자 피신처로 선택한 곳이 수녀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그만큼 그의 신앙심은 남다른 측면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장면은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였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길을 택했다.따라서 그가 이끈 민주당 신파 출신 중에는 기나긴 朴正熙시대에도뜻을 굽히지 않고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이들이 유난히 많다.金大中대통령을비롯해 金相敦 鄭一亨 鄭憲柱 金判述 金應柱 吳洪錫 등이 그들이다. 해방 후 장면은 미 군정하의 민주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한다.건국 직후 열린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법통(法統)을 인정받은 것과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6·25때 UN군 파병에 큰몫을 한 것은 그를 전국적인 지도자로 부상케 했다.그 결과 제2대 총리로 취임하지만 이제는 정치적으로 너무 성장한 그를 李承晩이 견제하는 바람에 1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퇴한다. 그후 야당지도자로 변신해 55년 창당한 민주당의 최고위 지도자 중 한사람이 됐고 56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됐다.부통령 시절인 1956년 9월28일 장면은 명동 시공관에서 암살범의 저격에 왼손을 맞았다.그런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민주당 최고위원인朴順天은 훗날 회고록에서 “그때 지켜본 장박사의 모습은 태연자약했고 너무도 의연했다”면서 거인다운 풍모를 소개했다. 4·19혁명 후 제2공화국을 맡은 장면은 8개월23일 만에 쿠데타를 만나 정권을 빼앗긴다.교과서에 나오는,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던 그의 꿈은 좌절되고 그는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을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회고록 표현)이라며 신앙생활에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서거한다.李容遠
  • 르윈스키 돈방석에…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전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가 금주부터이어질 TV 회견과 회고록 출간등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여 돈방석에 앉게됐다. 28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르윈스키는 3월5일 출간되는 ‘모니카의 이야기’북미 출판권을 가진 세인트 마틴 출판사로부터 선금으로 60만달러를받았으며 베스트 셀러가 되면 추가 보너스를 받는다.영국등 외국 출판사가제공한 로열티를 포함할 경우 출판 수입은 훨씬 더 늘어난다. 또 영국 데일리 미러,파리 마치,호주의 뉴 에이지,독일의 빌트지등과 인터뷰 계획이 잡혀있으며 빌트지는 회고록 발췌권등으로 20만 달러를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르윈스키는 섹스스캔들을 돈벌이에 이용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홍보행사를 하지 않는 대신 영국등지에서는 10여개 이상의 도시를 돌며 사인회나 라디오회견등을 계획해 두고있다. 출판업계는 고(故)다이애나비의 전기를 집필해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만든 인기작가 앤드루 모튼이 쓴 ‘모니카의 이야기’가 출간될 경우 적어도 1∼2주는 베스트셀러에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르윈스키는 또 오는 3일 미 ABC방송과 회견에서는 한 푼도 받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4일로 예정된 영국 ‘채널 4’와의 회견으로 60만 달러를 받았으며 방영권 판매에 따른 수입의 70% 이상을 받기로 계약돼 있다.
  • [제2공화국 張勉](1) 국토건설사업(上)

    1961년 2월27일 오후 2시.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앞 광장은 꽃샘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열기로 가득찼다.국토건설에 앞장설 이 땅의 젊은이 2,000여명이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갖는 자리였다.녹회색 모자와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이 도열한 주위를 가족·친지 그리고 ‘형들이 가는 길 우리도 따르리’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남녀 중고생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단상에 앉은 尹潽善대통령 張勉총리 등 3부요인도 기대와 흥분에 찬 모습들이었다.尹대통령이 “국토건설사업은 모든 산업건설의 기간이 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이 사업의 중심인물이 되리라고 크게 기대한다”고 치하한 데이어 張총리도 “이 사업에 여러분이 가진 젊은 의기와 예지를 송두리째 투입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굳게 믿는다”고 격려했다. 수료식을 마친 국토건설사업 요원들은 삽 한자루씩을 멘 채 서울시가를 행진했다.咸錫憲·張俊河 등 당대의 지성인들과 장면내각의 金永善재무장관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등 각료들이 대열을 이끌었고 국회의원도 여러명 가담했다.장면정부에 사사건건 트집을 일삼던 민주당과 신민당의 소장파 의원들이합세한 것은 이변이었다. 이날의 시가행진은 장면정부가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또 그 대열에 지식인들과 여야 정치인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함으로써국토건설사업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쌀 한가마에 1만4,000∼1만7,000환(현시세 17만4,400원) 하던 시절에 장면정부는 61년 한해에만 400억환을 투입하고 연인원 4,50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국토개발 사업을 벌이겠다고 공표했다.‘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군사혁명을 스스로 불러들였다’고 알려진 제2공화국의 장면정부,그 나약하고정쟁만 일삼았다는 정부가 정말 이처럼 원대한 포부를 가졌을까.계획을 세웠더라도 실제로 집행할 능력은 있었을까. 그러나 국토건설사업은 민주당이 추진한 경제정책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었다.1960년 4월혁명의 결과로 그해 8월 출범한 장면정부는 국정의 중점을 경제발전에 두었다.장면은 60년 8월27일 총리 취임후 민의원(民議院)에 나가취임인사 겸 시정연설을 하면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적 건설을 수행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마지 않는다”고 말했다.그가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경제 안정을 기한 후에야 정국안정을 바랄 수 있고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경제발전 방안으로 두 가지 큰 틀을 구상했다.하나는 장기목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이고 다른 하나가 국내경기를 단시일에 활성화하는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국토건설사업이 국민 앞에 실체를 드러낸 때는 60년 11월28일이었다.정부는 이날 ‘국토건설사업’이라 이름붙인 대규모 공공사업계획을 발표하고 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그 규모는 단군이래 첫 국토종합개발답게 가히 ‘혁명적’이었다.소양강댐·춘천댐·남강댐 건설을 비롯해 발전소 및 도로 건설,농지개간,수자원개발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다목적인 계획이었다.장면정부는 60년 12월 경제4부장관회의를 열어 61년분 제1차 추가경정예산에 사업비 280억환을 계상하기로 결정했고 이어 61년 1월에는 국토개발특별회계법을 제정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6·25가 휴전으로 끝맺은 지 10년이 채 안돼 전쟁의 상흔이 국토 곳곳에 남았고,이승만정권 말기의 폭정(暴政)탓에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장면정부는 무슨 힘이 있어 이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을까. 그 무렵 국가재정은 절반 가까이를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장면정부는 국토개발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함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기에 자신있게 청사진을 마련할 수 있었다.미국 정부가 국토건설사업을장면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꼽고 이를 적극 지원하였음은,대한매일이 이번에처음 공개하는 일련의 미 국무부 문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면정부는 출범후 곧바로 국토건설사업 준비에 들어갔다.먼저 국토건설사업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책임자를 물색했다.장면정부가 지목한 적임자는‘사상계’ 사장인 장준하였다.올곧은 지식인의 표상이자 반독재 민주투쟁의 상징인 그가 한때 국토개발에 앞장선 사실을 지금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4월혁명후 장준하는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필진을 주축으로 학계·언론계·문화계·경제계의 주요인사 30여명을 모아 ‘국제연구소’를 운영했다.‘국제연구’를 내걸었지만 새 시대에 걸맞은 국정운영을 연구하는 데 주력했다. 이렇다 할 정책연구기관이 없던 시절이라 국제연구소는 정책의 산실로 떠올랐고,연구위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국토개발이었다.정책 수립에 골몰하던 장면정부가 장준하와 그를 뒷받침하는 국제연구소 멤버들에게‘구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사상계에서 일하다 장준하를 따라 국토건설사업에 참여한 朴敬洙씨(69·작가)는 “장면정부가 출범 직후인 60년 8월말 장준하선생에게 국토건설사업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고 기억했다.장준하는 거듭 사양하다가 결국 ‘국토개발은 시대적 의무’라는 명분에 져 수락하게 된다. 국토건설사업본부는 총리 직속이었지만 실제로는 관민이 함께 운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성격의 독립기구였다.본부장은 장면총리가 겸임했고 장준하는 수석부장으로서 본부장 대리 구실을하는 기획부장을 맡았다.또 사상계편집위원인 申應均과 李萬甲이 관리부장·조사연구부장으로,일제때 한강철교를 설계한 崔景烈이 기술부장으로 들어왔다.박경수씨는 간사로 임명됐다.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 팀이 사업본부 지휘부를 형성함으로써 장면정부는국토개발에 필요한 두뇌와 함께 지식인층의 지지를 얻었고 그 기반 위에서자신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국무부문서에 나타난 ‘국토건설’ 펑가 ‘제2공화국과 張勉’연재에 정치학 박사 전상숙 씨(이화여대 강사)가 동참합니다.田박사는 지난 97년 8월부터 1년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1960∼63년에작성된 미 국무부 한국관련 문서 1만여점을 조사·연구했습니다.그 축적을토대로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 사료를 통해 당시 미국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어떻게 평가했는지,이에 따른 대한(對韓)정책은 무엇이었는지를깊이 있게 분석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장면정부가 물려받은 경제상태는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빈약한 자원에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대량파괴,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방비,그리고 부패하고 허약한 관료집단이 주원인이었다.장면정부는 뉴딜정책과 같은공공사업을 통해 이같은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곧 1960년 11월발표된 ‘국토건설사업’이다. 장면정부는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고,미국도경제원조가 장면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나섰다.이같은 사실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 소장한 미 국무부문서(RG59)중 여러건에서 확인된다. 매카나기 주한미대사가 61년 3월11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A)에는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측 평가가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장면정부하의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식량부족과춘궁기(보릿고개)·대졸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토건설사업이 큰 도움이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아울러 경제발전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머지않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시위를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이 때문에 미국은 장면정부의 시책 가운데 국토건설사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이보다 열흘 앞선 보고서(B)에서는 매카나기와 한국 金永善재무장관의 대담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다.김장관은 국토건설사업이 시작됐음을 알린 뒤 미국이 이미 제공한 지원금 2,000만달러를 유용하게 사용할 것임을 약속했다.이어 경제개발을 위해서도 한·일간의 전면적인 외교관계 수립은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미국측도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빨리 이루어지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이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이뤄 일본이한국에 경제원조를 하도록 함으로써 동북아 안보이익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보여준 것이다.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측 지원이 변함 없음은 매카나기의 후임인 마셜그린 대리대사가 4월18일 장면총리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전문(C)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그린은 국토건설사업에 1,500만달러를 추가 원조하기로 결정했음을 통보하면서 지원금의 구체적인 사용처도 명시하고 있다. 이같은 한·미간의 국토개발 노력은 그러나 5·16으로 중단돼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됐다.
  • 오늘부터 4개면 증면… 28면 발행

    2월1일부터 4개면을 늘려,28개면을 발행합니다. 98년 11월11일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뒤,혁신된 지면에 대한 독자들의 관 심이 높아지고,상세한 정보에 대한 요구가 증대됨에 따라,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증면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증면에 따라,사회면이 2개면에서 3개면으로 늘어납니다.착한 이웃과 용기있 는 시민의 이야기를 자주 실을 계획입니다.또한 지역행정뉴스면을 늘려 더욱 많은 지역 소식을 전국에 알립니다. 독자 의견과 외부 인사 칼럼을 더 많이 싣기 위해 오피니언면을 늘렸습니다 .늘어난 문화면에는 대중문화와 레저,종교계 소식 등을 담습니다.증권시세 정보도 더욱 충실하게 전하겠습니다. 이번 증면과 함께 차례로 연재되는 [현 대사 재조명]장기 시리즈 ‘제2공화국과 張勉’,‘金信장군 회고록’,‘南北 교섭秘史’는 공익정론지 대한매일의 새로운 업적이 될 것입니다.
  • 고르비,은행 파산 전재산 날려

    [뮌헨 AP 연합]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지난 여름 러시아금 융위기때 은행 파산으로 예금 8만달러를 몽땅 날려 거의 빈털털이 신세가됐 다. 고르바초프는 29일 발행된 분트와의 회견에서 “돈을 몽땅 다 잃었다.더이 상 부자가 아니다.1년치 수입이 러시아 부자의 하루밤 유흥비에도 못미칠 것 ”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때문에 자신의 재단 직원들에게 월급조차 주지 못하고 있 는 상태.그는 내년 10월 독일통일 10주년에 출판하기 위해 집필중인 회고록 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아쉬움 남지만 후회없는 36년”/충주시의회 李淸 사무국장

    ◎정년퇴임기념 책 발간 화제/공직생활 일기형식 수록 36년 공직생활 끝에 오는 31일 정년퇴임하는 충북 충주시의회 李淸 사무국장(62)이 최근 공직생활을 정리한 ‘아쉬움은 남고 후회는 없다’(도서출판 두오)를 펴내 화제다. 李국장은 일기를 바탕으로 쓴 300여쪽 분량의 회고록에서 ‘일이야 죽이 되든 말든 시키는 대로만 하자’는 보신주의를 공직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꼽았다. 그는 60년대에는 공무원 이름 앞에 ‘흐지부지’‘먹도둑’ 등을 붙여 공무원 별명을 지었다고 공무원의 시대상을 소개했다. 李국장은 또 “큰 상은 상급기관의 상급자가 타는 것이 관례화돼 있다”며 훈격의 높낮이는 공적에 따라 차별돼야 하는데도 직급에 따라 정해지는 것은 문제라고 공직사회의 나눠먹기식 상훈제도를 꼬집었다.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건으로 직원들과 밤을 새워 수습한 공로로 받은 자신의 녹조근정훈장도 부하직원들과 간부들 덕에 어부지리로 받은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규정과 지침은 주민을 위해 만들어져야 진가를 갖는다”며 공직사회의 전시행정 탈피를 강조했다. 20여명의 기관장과 공직생활을 함께한 그는 지방자치단체장은 ●먼 앞날을 내다보고 ●원만한 인간성을 갖춰야 하며 ●말뿐 아니라 주민과 함께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책은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사례로 들고 있어 60년대 초반 이후 시대변천에 따른 지방행정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 高大 석좌교수된 朴銖吉 前 유엔대사(인터뷰)

    ◎“35년 외교경험 후학들에게 전수할터” “35년간의 외교관 경험을 이제는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남은 힘을 기울이렵니다” 지난 1일 사표를 낸 朴銖吉 전 유엔대사가 27일 작별 인사차 외교통상부에 들렀다. 제네바와 캐나다 유엔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朴전대사는 “고시 13회 동기인 洪淳瑛 장관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직했다”고 밝혔다. 초임 외교관 시절 사통팔달로 뻗어있는 미국 LA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국민소득 80달러의 가난한 조국 생각에 눈물 흘렸다는 그는 “재능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후배들에게 우리 외교를 물려주게 돼 마음 편하게 외교계를 떠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朴전대사는 그동안 외교관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 사건을 꼽았다.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였던 그는 金賢姬를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바레인 정부와 피말리는 줄다리기를 벌였었다. 유엔대사 시절 안보리 의장을 맡기도 했던 朴전대사는 “비록 이사국이 교대로 맡는 의장직이지만 발언권도 투표권도 없는 옵서버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감회가 남달랐다”고 토로했다. 朴전대사는 이제 모교인 고려대 석좌교수로 새 인생을 설계한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그가 맡은 과목은 국제기구론’. 앞으로 1년 동안 유엔 안보리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회고록을 집필할 구상도 하고 있다.
  • 親日의 군상:10/前 홍익대 총장 李恒寧씨(정직한 역사 되찾기)

    ◎“부일의 과오 민족앞에 눈물로 참회”/1939년 ‘고교’ 합격… 일제말 하동·창녕군수 4년 역임/군청 직원들 앞세워 죽창으로 농민 위협하며 쌀 공출/해방 후 35년간 교육계서 근신… 기회있을 때마다 사죄 “일제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河東)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保身)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竹槍)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謝罪)드립니다” ‘참회’는 아름답다.진솔한 참회는 숭고하기조차 하다.왜냐하면 보통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냈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소위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 중에서도 더러는 자신의 친일전력을 참회한 바 있다.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崔麟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주십시오”.그의 진실한 참회 한 마디가 사람들을 울린 것이다.파인 金東煥은 반민족행위를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玄錫虎(일제때 충남 광공부장,2공화국에서 국방장관 지냄,88년 작고)는 회고록 ‘한 삶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한 바 있다.친일행적을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참회·사죄한 인사도 있다.홍익대 총장을 지낸 李恒寧(84·학술원 회원)씨가 그 주인공이다.그는 다소 껄끄러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의외로 단번에 허락했다.가을빛이 완연한 정릉 자택으로 그를 찾아가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하동군민들에게 사죄한 것은 언제,어디서 하신 말씀입니까? ▲91년 7월10일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에서 인사말로 한 것인데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됐더군요. ­주최측에서 그런 얘기를 해달라고 주문을 하던가요? ▲아닙니다.제 스스로 한 얘깁니다.그 자리에 서니까 50년전의 일이 생각도 나고 군민들을 직접 뵈니까 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얘기가 저절로 나옵디다. ­처음 주최측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가 있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없을 수야 없지요.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해방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었습니다만 ‘죄의식’때문에 (군민들을) 찾아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일제 앞잡이로 군민 괴롭혀 ­‘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일제말기 하동·창녕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돼 군민들을 괴롭힌 행위를 말합니다. 李씨는 1934년 경성(京城)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후 예과 3년,본과 3년의 6년 과정을 마치고 40년 졸업했다.본과 3학년 때인 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李씨는 대학 졸업후 1년간 시보(試補)생활을 거쳐 1941년 6월 하동 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다.1년 뒤인 42년 7월 그는 창녕(昌寧)군수로 전보돼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군수는 어떤 경로로 됐습니까? ▲당시 대학을 나와도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재학중에 고시(考試)공부를 해서 (군수가)됐습니다. ­당시 고시공부는 주로 직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보 생활은 어디서 했습니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했습니다.국회 부의장을 지낸 尹吉重씨가 저와는 고시 동기생인데 尹씨는 총독부 농림국에서 시보생활을 했습니다. ­군수의 대우는 어땠습니까? ▲당시로선 비교적 많은 봉급을 받았습니다.일제말기에는 일본인에게만 주던 가봉(加俸)을 조선인들에게도 지급해 봉급차이도 없어졌습니다. ­하동군수 시절 식량공출(供出)문제로 고생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공출제도’가 시행됐습니다.그런데 하동에선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많아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1942년부터 공출제 시행 ­공출미 할당은 어디서,누가 결정하였습니까? ▲당시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있던 金大羽씨가 군수회의를 소집한 후 각 군수에게 강제로 할당해 주었습니다. ­하동군에 할당된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군 양곡담당 기수(技手)에게 물어보니 재고가 6,000석이라고 하더군요.그 내용을 金大羽씨에게 보고했더니 ‘기수 말은 못 믿겠다’며 재고량의 무려 5배인 3만석을 할당하더군요. ­최종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할당량의 1할 정도인 3,000석 가량을 공출했습니다. ­다른 군의 사정은 어땠습니까? ▲대개 할당량의 절반 정도는 달성했었습니다.그 때 제가 있던 하동군이 꼴찌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죽창’ 얘기는 왜 나온 겁니까? ▲당시 군민들이 집안 곳곳에 쌀을 감추어 두니까 군청직원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만한 곳을 쿡쿡 찔러본 것을 두고 한 얘깁니다. ­죽창으로 사람을 해친 사례도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그러나 ‘공출독려반’들이 죽창을 들고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위협은 됐을 겁니다. ­하동군수에서 1년만에 창녕군수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승진은 아니지요? ▲예,군세(郡勢)로 보면 오히려 좌천인 셈이지요.부진한 공출성적이 문제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학병권유,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의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독려했습니다.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그같은 일은 당시 군수의 기본적인 직무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요.그러나 그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자리를 직업으로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 ○고등관리 이상 관리는 친일파 ­항간에는 일제말기에 군수 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 관리들과의 차별대우는 어땠습니까? ▲고급관리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일제말기에는 임금차이도 거의 없었습니다.총독부 내에 ‘계림구락부’라는 고등문관시험 출신 고등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저도 시보 시절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해방후 그는 45년 10월까지 창녕군수로 계속 근무하다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한 달만에 사표를 썼다.이유는 자신은 일제때 관리를 지낸 몸이라는 것.이후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부산 동래구 범어사 입구 청룡초등학교였다.“해방후 민족앞에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려했습니다.그러나 이미 딸린 아이가 다섯이나 돼 혼자 이 문제를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낮에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범어사 河東山 스님 밑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지난 81년 홍익대 총장을 그만둘때까지 그는 35년간 교육계에만 몸담았었다.그 나름의 ‘근신’이었다. 60년대초 그는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했었다.또 80년 봄에는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글을 발표,지식인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거듭된 ‘참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상습적 양심선언가’라고 비아냥거렸다.그러나그의 ‘참회’는 앞뒤,체면안가리고 솔직하다.사실왜곡이나 자신을 미화한 구석도 없다. “사죄를 하고나니 마음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묻는 말에 뭘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그의 얼굴 가득히 ‘뉘우친 자’의 평화감과 여유가 넘쳐 흘렀다. ◎日帝下 군수는 어떤 자리였나/군행정 최고 실권 가진 실력자/고등 문관시험 합격자 임용/1년간 시보 거쳐 군수부인/면장·군청직원 인사권 가져/초임은 초등교사의 약 3배 일제하 공직자 관등(官等)은 네 종류였다.최상급은 일황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親任官)으로 조선내에서는 조선총독·정무총감 두 사람뿐.그 다음이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순.주임관 이상을 고등관(高等官)으로 쳤는데 현 사무관(5급)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다.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합격자가 임용됐다.고문(高文)출신자의 경우 1년간 시보 시절에는 판임관 6급(군청 과장급)대우를 받다가 군수로 정식 임용되면 주임관 7등급 대우를 받았다.초임 연봉은 1940년 7월1일 기준 1,650원.(당시 초등학교 교사 초봉은 월 45원) 군수는 면장 이하 군청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군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영감(令監)님’으로 불렸고 부인은 ‘마님’소리를 들었다.‘각하(閣下)’라는 용어는 도지사급의 칙임관들에게 붙였다. 李恒寧씨는 “사법과 출신의 법관들은 판결문 작성 등 잡무가 많았으나 군수는 도장찍는 일 밖에 없어 편했다”고 회고했다.
  • 親日의 군상:7­1/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저항 포기… 親日로 명맥 이은 세도가 집안/고관대작 다수 배출… 화려한 가문 자랑/중시조 雄烈 ‘한일병합’후 男爵 받아/尹 전 대통령 숙부·사촌중 변절자 많아 우리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세도가 집안의 하나로 尹致暎 전 공화당의장서리(96년 작고) 가문을 들 수 있다.尹潽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집권당 의장서리,장관,서울대 총장 등 장·차관급 이상만 13명에 학자·의사가 60여명이나 나왔다. 尹씨 가문은 한말 尹雄烈에 의해 중흥된 후 자손도 번성하여 400여명에 이른다.尹雄烈의 아버지 取東은 늘그막에 웅달산에서 기도를 하고 첫 아들을 얻었대서 이름을 雄烈이라 지었다.15년 뒤 태어난 동생은 ‘영웅(英雄)’이라는 말에 맞추기 위해 英烈이라 지었다. 雄烈은 致昊·致旺·致昌 3형제를,동생 英烈은 致旿·致昭·치성·致昞·致明·致暎 등 6형제를 두었다. 열(烈),치(致)에 이어 다음 항렬은 선(善),구(求),영(榮) 순이다.선(善)자 항렬의 유명인사는 致昊의 아들 永善·璋善,致旿의 아들 日善·明善·昇善,致昭의 아들 潽善·源善,致明의 아들裕善 등이다.구(求)자 항렬에서는 日善의 아들 錫求·鐸求,潽善의 아들 商求·同求 등이 있다.번성한 자손과 함께 이 집안에서 배출한 유명인사들의 면면을 한번 훑어보자. 중시조격인 雄烈은 1856년 무과에 급제,한말 군부대신을 지냈다.동생 英烈은 연안부사·삼남토포사·육군참장(參將,현 준장에 해당)을 지냈다.雄烈의 장남 致昊는 학부(學部)·외부협판(協辦,현 차관)을,2남 致旺은 초대 육군의무감(육군소장 예편)·대한의학협회장을,3남 致昌은 초대 주영공사와 주터키대사를 지냈다. 英烈의 아들 중 장남 致旿와 차남 致昭는 대한제국 시절 각각 학무국장과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3남 致성은 일본육사(11기)졸업 후 군부 군무국 교육과장을,4남 致昞은 육군 보병 정위(正尉,현 대위에 해당)로 예편하였다.막내 致暎은 해방 후 초대 내무장관과 서울시장, 3공에서 공화당 의장서리를 지냈다. ○부귀영화에 장수까지 致旿의 장남 日善은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致昭의 장남 潽善은 서울시장·대통령을,3남 源善은 민선 경기도지사를 지냈다.致明의 아들裕善은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보사부 의정국장·국립의료원장을 지냈다.3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永善과 재미 원로 피아니스트 琦善은 모두 致昊의 아들들이다. 또 日善의 차남 鐸求는 원자력병원장을 역임한 후 동생 鍾求와 함께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보통 집안에서는 한명 나오기도 힘든 큰 벼슬아치가 이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속출하였다.그리고 장수(長壽)집안으로도 유명하다.중시조(中始祖)격인 雄烈(72세),英烈(86세)형제와 致昊(81세),致旺(88세)이 70,80세를 넘겼고 永善(92세),日善(91세),潽善(93세) 등은 망백(望百·91세) 이상 장수했다.부귀영화에 장수까지 겸했으니 한 가문으로서야 더 바랄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 집안의 역사가 이렇게 화려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친일’은 이 집안 중흥의 1등공신 雄烈(1840∼1911)로부터 시작된다.1856년(철종 7년) 무과에 급제,1861년 충청 감영의 중군(中軍)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그는 1880년 별군관으로 朴永孝·金玉均 등과 함께 수신사 金弘集을 따라 일본을 다녀온 후 이듬해 일본식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1882년 별기군과의 차별대우를 참다못한 구식군대가 반란(소위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그는 시위대에 쫓겨 원산을 거쳐 나가사키(長崎)로 줄행랑을 쳤다.도중에 원산에서 주민들에게 발각됐으나 한 일본인 승려의 도움으로 피신했다고 한다.도쿄 체류중 그는 ‘조야신문(朝野新聞)’(1882년 9월2일)과의 인터뷰에서 구식군대의 반란은 조선 내 수구파들이 세력을 잡기 위한 ‘폭거’라고 주장했다. 갑신정변 무렵 귀국한 그는 개화당 정권에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1886년 능주(綾州)로 귀양갔다.그후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다시 집권하자 경무사·군부대신을 지내다가 1896년 소위 ‘춘생문(春生門)사건’에 가담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일제말기에 지조 꺾어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서 궁내부 특진관·군부대신을 지낸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은사금 2만5,000원과 남작(男爵)작위를 받았다.그의 작위는 장남 致昊가 습작(襲爵)하였다.致昊는 1913년 ‘105인사건’의 확정판결로 실작(失爵)되었으나 이는 ‘충순(忠順)치 않은 행위’(‘조선귀족령’ 제7조),즉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박탈당한 다른 사람(남작을 거절하고 순국한 金奭鎭 등)들과는 구분된다. 雄烈·英烈 두 형제 중 친일 경력자는 동생인 英烈의 집안에 많다.英烈의 장남 致旿는 한말 중추원 참서관(9품)·학부(學部,현 교육부)학무국장을 역임했는데 한일병합 후 중추원 부찬의·찬의(1910∼15년)를 지냈다.차남 致昭 역시 한말 중추원 의관을 거쳐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1924∼27년,주임관 대우)를 지냈다.특히 致昭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14일 당시 쌀 120가마 값에 해당하는 2,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내고 같은해 9월9일 결성된 ‘애국경기도호(號)’ 군용기 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지냈다. 3남 致성은 일본육사를 마치고 구한말 정부에서 육군기병 부령(副領,현중령에 해당)으로 예편한 후 한일병합 후에는 실업계로 진출,분원자기 취체역(중역)·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특별위원을 역임했다.막내 致暎은 미국 유학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歐美)위원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그러나 그 역시 일제 말기에 가서는 지조를 꺾은 것으로 보인다. 친일 잡지에 그의 이름으로 된 글이 실려 있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1941년 9월7일)했다.또 그해 12월20일에는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美英)타도 대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그는 회고록 ‘윤치영의 20세기’에서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 명의의 글은 이름을 도용당한 것이라며 “일제 전시하여서 명예훼손 소송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그의 건국포장 서훈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밖에 致旿의 아들 중에도 친일 경력자가 더러 있다.교토제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 지낸 장남 日善은 일제가 주최한 ‘미영타도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한 적이 있다.또 도쿄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차남 明善은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정부에서 총무청 통계과장·국무성 사무관·간도성(間島省) 차장을 지냈다.4남 昇善은 관동군사령부에서 대위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 가문과 사돈 맺은 아이러니/尹致昌 결혼 당시 심한 반발로 한때 감금되기도 자손이 많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안은 친일 가문은 물론 독립운동가 가문과도 더러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雄烈의 3남 致昌은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孫貞道 목사의 장녀 孫眞實과 결혼했다.초대 해군참모총장·국방장관을 지낸 孫元一 제독, 재미 원로의사 孫元泰(84세) 박사,YMCA 회장을 지낸 여성계의 원로 孫仁實(81) 등은 모두 眞實의 동생들이다.독립운동가 진영은 이들의 결혼을 거세게 반대하며 한때 致昌을 감금하기도 했었다. 致昊의 차남 光善(6·25때 납북)은 독립협회의 창건자이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을 지낸 南宮檍의 딸 南宮慈卿과 결혼,4남3녀를 두었다.致昊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집안 딸 중에는 독립운동가 당사자와 결혼한 사람도 있다.致旺의 장녀 善姬는 2차대전 때 OSS 대원으로 활동한 張錫潤(95) 전 내무장관과 결혼하였다.이밖에 致昭의 차남 浣善의 부인 李順貞은 한말 탁지부 대신 李容稙의 딸이자 ‘을사조약’후 자결,순국한 충정공 趙秉世 선생의 외손녀다.
  • 反民특위 강제 해체/‘6·6사건’의 의미(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미완의 단죄’로 민족사 굴절/제헌국회,48년 반민족처벌법안 통과/화신재벌 朴興植 등 검거 재판대 세워/본격 활동 앞두고 李承晩이 강력 제동/조사대상 30%만 기소… 결국 흐지부지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을 벌인 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러나 이 특위는 李承晩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이듬해 6월6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반민특위 활동의 미완성은 이후 49년 동안 우리 현대사 굴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1949년 6월6일 아침 8시.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경찰을 가득 태운 2대의 드리쿼터가 들이닥쳤다. 습격대 지휘자는 尹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尹을 비롯한 40여명의 경찰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 직원들을 연행했다.반민특위 金尙德 위원장과 金相敦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항의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金부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장 權承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 역시 안하무인의 경찰에게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지휘권자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호통도 소용없었다. 연행된 사람은 모두 35명.특경대원 24명,직원 및 경호원 9명이었다.직원을 면회온 민간인 2명도 엉뚱하게 같이 끌려 갔다.연행자 중 22명이 입원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날의 ‘6·6사건’은 해방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이었다.경찰력이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특위를 사실상 해체,李承晩 독재의 길을 열었다.친일파 제거에 실패함으로써 헌정사 왜곡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입법부가 행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48년 9월29일.올해가 50주년이다.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李承晩 독재는 물론,이후 군사정권도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제헌국회는 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반민특위 위원은 각도 출신국회의원 중 선임됐다.金相敦(서울) 趙重顯(경기) 李鍾淳(강원) 朴愚京(충북) 金明東(충남) 吳基烈(전북) 金俊淵(전남) 金尙德(경북) 金孝錫(경남) 金庚培(제주·황해) 등이었다.金炳魯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權承烈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부,李元鎔 총무과장이 이끄는 중앙사무국이 각각 구성됐다.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5일 공식업무를 시작했다.특위는 1월8일 화신재벌 朴興植을 검거하는 것을 필두로 전광석화같이 친일파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일제 경찰 출신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이들 출신으로 추산된다.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李承晩도 반민특위가 눈엣가시였다.李承晩은 盧德述 崔燕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6·6사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특위는 49년 8월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활동을 끝냈다.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른 나라의 사례/佛,나치협력 3만∼4만명 처형/시민법정 설치… 9만5천여명 시민권 박탈/中·대만 정부 친일파 漢奸 색출 상당수 처벌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처리가 있다.뉘른베르크재판에서는 22명의 1급 전범이 기소되어 나치군 원수 괴링 등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7명이 종신형∼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도쿄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기도 고이치(大戶幸一) 등 18명에게는 종신형∼금고 20년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친일파 문제와 비슷한 것은 유럽국가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중국·대만의 한간(漢奸·친일파)재판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멸망 직후인 44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4개의 훈령을 내렸다.이 훈령에 따라 조사받은 인원은 150만∼200만명.드골은 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나치협력자로 처형됐다고 밝히고 있다.드골은 작가,언론인,학자 등 나치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엄히 다스렸다.현대사가 로베르 아롱은 “3만∼4만명이 재판에 의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민족반역자로 사형당했다”고 추정했다.프랑스는 형사재판권이 없는 시민법정도 설치,9만5,000명을 ‘비국민’으로 판정해 시민의 권리를 박탈했다. 덴마크는 1만4,000명,네덜란드는 4만명,벨기에는 5만명, 노르웨이는 2만명의 나치협력자를 각각 민족반역자로 무기에서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중국과 대만정부도 2차대전이 끝난후 친일파 제거에 나섰다.한간재판은 중국공산당 정부와 장제스(蔣계石)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46년 4월부터 48년 9월까지 따로 진행되었다.중국·대만정부에 의해 한간으로 판명된 상당수 인사들이 처형됐지만 개별처리 사실만 알려질뿐,전체적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특위 총무과장 역임 李元鎔옹/“민족정기 바로서는 날 두눈 감기전 보았으면” “金大中 대통령이 명실공히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되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과 조사관을 역임했던 李元鎔옹(78)은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반민특위에관계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타계한 현실에서 그는 당시 특위의 고위 중앙요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서울 공대 전신인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48년 10월 반민특위 구성때 민간인 신분으로 행정실무를 주도했다.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 ­현재의 심경은. ▲오늘 이 땅위에 사는 구세대 치고 일제의 학정과 인간 이하 대우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일본의 관헌에게 우리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던 애국지사를 밀고,또는 체포해 넘긴 반역자가 있었습니다.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두 눈을 감기전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 못한 이유는. ▲국내사정에 어두운 李承晩 대통령이 친일파들의 간계에 현혹되어 경찰력을 동원,하루 아침에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습니다.제헌국회의 결정에 따른 헌법기관이 불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헌정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기게 됐지요.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金泳三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치로 내걸어 혹시 하며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실효없이 용두사미격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라도 관계 각료나 관련 인사들이 모여서 기구를 만들어 과거에 처단치 못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해야 합니다.그래야 이 나라의 기초가 탄탄해집니다.金대통령은 해박한 경제관과 탁월한 국제 외교력을 겸비했습니다.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많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해주는 데도 힘써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그것이 경제 등 다른 난국의 극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반민특위 활동 일지 ▲48년 8월5일=제헌국회,‘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 ▲9월7일=‘반민족행위 처벌법’ 국회 통과 ▲9월29일=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반민족행위 조사특위(반민특위)’구성동의안 국회 가결 ▲10월1일∼11일=반민특위 10명 조사위원 선임 ▲10월23일=반민특위 1차위원회 ▲49년 1월5일=반민특위 사무실 개소,업무 개시 ▲1월8일=화신재벌 총수 朴興植 1호 체포 기록 ▲1월13일=崔麟 검거 ▲1월25일=盧德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검거 ▲2월7일=崔南善 李光洙 검거 ▲2월15일=李承晩 대통령,반민처벌법 개정 필요성 특별담화 ▲3월28일=李琦鎔 朴興植 등 반민자 첫 공판 ▲5월하순∼6월초=정부,1·2차 국회 프락치사건 발표 ▲6월6일=경찰,반민특위 습격,조사요원 불법체포,특경대원 무장해제 ▲6월26일=金九 선생 암살 ▲8월31일=반민특위 공식해체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鄭周永 회장 새달 9일 訪北 의미

    ◎南北 민간차원 經協 활성화 신호탄/남북관계 개선 획기적 계기… 정상회담 실현 기대/분단후 처음 민간인 판문점 통한 왕래 물꼬도 터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다음 달 9일 판문점을 통해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게 됐다.앞으로 남북한의 민간차원의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또 민간차원의 교류가 활성화되면 정부차원의 교류도 자연스럽게 활발해 질 전망이다.나아가 남북간의 정상회담 가능성도 보다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남북 분단이후 민간인이 판문점을 통해 방북(訪北)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최근 리틀엔젤스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 것도 중국을 거쳐 이뤄졌다.90년대 초 남북간 고위급(총리)회담은 판문점을 통해 이뤄졌지만 정부간의 회담이었다.민간차원의 방북은 제 3국을 거치는 방북만 있었다.이번 방북은 결국 정부간의 접촉에서도 제 3국보다는 판문점을 거쳐 교류나 회담이 이뤄질 수 있는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그동안 북한은 판문점을 통한 방북 허용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해왔다. 북한 당국은 鄭명예회장의 ‘새로운 방식’에 의한 방북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강경파인 군부는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그 동안 판문점을 화해의 장(場)이 아닌 대결과 냉전의 장으로 이용해온 탓이다.북한의 군부는 鄭명예회장의 방북이 이뤄지면 판문점이 화해의 장으로 바뀌는 데다 북한 주민들이 한국측에서 소를 지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기 때문에 반대해왔다.하지만 날로 악화되고 있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군부의 입김을 약화시켰다는 분석이다. 鄭명예회장은 방북하면 금강산 개발 등도 논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鄭명예회장의 방북은 남북간 정상회담의 가능성도 그 만큼 높여줄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북한은 이에 앞서 지난 20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통해 오는 7월26일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대회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통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회를 거친 뒤 1개월이 지난뒤 1차 대의원대회를 열어 국가주석을 선출해왔다.때문에 빠르면 8월 말쯤에는 金正日 당 총비서를 국가주석으로 선출할 것으로 관측된다.그렇게되면북한에도 명실상부한 국가주석이 등장하게 돼 남북한 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는 외형상의 ‘격’은 맞게된다는 지적이다. 康仁德 통일부장관은 지난 20일 도산아카데미 초청 조찬간담회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지만 북한의 당 총비서와는 만날수 없다”고 말해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 총비서를 만나는 것은 격은 맞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었다.이에 따라 鄭명예회장의 방북이 무사히 이뤄지고 북한에 국가주석이 등장하게 되면 분단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의 그림이 구체화 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조심스런 전망이다. ◎鄭씨 70년만에 소떼 몰고 고향으로/구제역 발생·북 미온반응으로 한때 긴장/수송 트럭 100대는 북한에 두고 귀환 “자유의 다리를 건너고 싶다”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70년 만에 ‘소몰이 목동’으로 고향을 찾는다.우여곡절 끝에 소 1,0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거쳐 내외 언론의 플래쉬를 받으며 북녘 고향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한민족의 화합을 위해 한사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열정일 지도 모른다. 鄭 명예회장이 고향 통천을 멀리하고 남녘으로 내려와 이룬 ‘세계 최고급의 자동차’를 몰고 고향 땅을 밟겠다던 염원을 마침내 이루게 됐다.그는 얼마전 자신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다이너스티를 타고 자유의 다리를 건너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소박한 꿈’은 지난 4월 금강산 개발사업 등을 논의하러 북한을 방문했던 현대실무단(임직원 3명)에 의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이후 鄭명예회장은 “소 1,000마리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각계에 전달했다.처음엔 반응이 좋았다.그러나 때마침 중국에서 발생한 구제역(소·돼지에 발생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북한전역으로 확산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鄭회장의 구상이 차질을 빚는 듯했다. 정부는 차로 소를 수송할 경우 수송차량 등이 구제역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했다.북한도 소떼의 판문점 통과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鄭회장의 염원은 ‘꿈’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 수송차량을 북한에 두고 오기로 한 것도 이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鄭회장의 소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그가 어린 나이에 고향 산천과 부모를 뒤로 했던 것도 소때문이었다.鄭회장은 금강산 자락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에서 태어났다.그가 호가 아산인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어려서부터 찢어지게 가난했던 당시 상황과 부모의 한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는 통천에서 두번 가출에 실패한 뒤 소 판 돈 70원을 훔쳐 마지막 가출을 시도했다.남쪽에 내려와 그는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구었다.그래서 그의 남행은 소와 떼어 내 생각할 수 없다. 소 한마리만 있었으면….鄭회장이 충남 아산 목장에서 소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지도 모른다.그는 94년 서산목장에 150마리의 한우를 방목하기 시작했다.이후 목장을 방문하면 축사를 먼저 둘러보곤 했다.이제는 1,700마리를 웃돈다. ‘북한으로 시집가는 鄭회장의 소들’은 논밭갈이에 사용될 것으로 알려졌다.鄭회장의 소는 1,000만 이산가족의 염원을 가슴에 안고 굳게 닫힌 북녘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어쩌면 그의 방북은 인간 鄭周永과 분단시대의 상황이 빚은 이 시대의 축복이자 불행이다.
  • 엘리트 대학교육의 병폐/金承玉 고려대 교무처장(기고)

    현대를 민중의 시대라고 한다.정치 지도자를 선출할 때나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역할을 보면 일견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민주주의 모범국가’라는 미국에서도 몇몇 엘리트 그룹들이 국가정책을 좌지우지하고 민중을 끌고 나가는 것을 종종 지켜볼 수가 있다.또 세계의 어느 나라나 민선 대통령은 줄리어스 시저나 알렉산더 대왕에 못지 않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국가 운명 결정권 장악 한 나라의 정책들은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중의 뜻에서라기 보다는 엘리트 그룹의 이익과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있게 된다.현재 우리나라에 닥친 환란만 봐도 그렇다.엘리트 그룹은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결정권을 쥐고 있으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엘리트 그룹은 건전한 국가의 기틀이 되지만 오만하고 썩은 그룹이라면 그 나라는 썩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엘리트 그룹은 어떤가.이땅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좌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이 구치소로 직행하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의 엘리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한국의 엘리트 그룹은 상당수가 검증을 받지 못한 채 국가 요직에 기용됐다.우리나라는 한국전쟁 후 민주주의가 싹트기 전에 군사정부가 들어섰고 자신들의 정부가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이에 대한 보상으로 수재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위 ‘스카이대학(서울·고려·연세대)’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그 수하에 두기 시작했다. 특히 모 대학 법학과와 정치학과 출신들이 주로 동원되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이들 수재들의 정책은 군사정권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정당사만 봐도 그렇다.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정당의 각 지방 위원장은 아직도 지방당원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기 보다는 대부분 당수에 의해 선택된다. 서구에서는 한 정치인이 지방자치 선거를 거쳐 중앙 정부에 이르는 동안 몇번이고 검증 절차를 거치게 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군사정권 유지 이바지 관료직도 결국 집권당수에게 순종하는 수재 엘리트로 채워진다.군사정부이던 민간정부이던 이같이 한 사람에 의해 요직이 지명되는 한 검증된 엘리트는 없고 출세지향적인 엘리트만 양산될 뿐이다.이들은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없고,의리는 있으나 책임감과 정의감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보아왔다. 더욱 위험한 것은 엘리트들이 여러 사회계층이나 여러 학교,다양한 교육풍토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몇개 학교나 학과에서 양산됐다는 점이다.같은 선생에게서 같은 말만 듣고 배운 이들은 생각의 틀이 좁고 제한적이기 쉽다.또 두텁지 않은 엘리트층은 서로 ‘보완과 견제’라는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정권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는 ‘콜맨’이 되기 쉽상이다. ○다양한 엘리트群 길러야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그동안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무엇인가를 정리하여 회고록을 쓰기도 전에(쓸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지만)구치소로 향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다양한 학교를인정하고 다양한 계층을 발굴하여 다양한 엘리트 그룹을 기를 때가 된 것이 아닌가.
  • ‘돌아온 영웅’ 싱글러브 前 주한미군 참모장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대북정책 북 오판 방지에 역점둬야 마땅/주한미군 한반도서 전쟁억지 역할 수행 【崔哲昊 기자】 카터 대통령시절 주한미군 참모장이었던 존 K.싱글러브 예비역 소장(77)이 9일 베트남 참전 한국군과 미군용사들에 대한 기념사업차 오랜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한국전쟁은 물론 월남전에서도 한국인들과 함께 공산주의와 싸운 미국의 전쟁영웅 싱글러브씨는 지난 50년동안 한국을 지켜본 사람으로써 다시 찾은 한국에 대해 “한국을 한마디로 말할 때 내게 떠오르는 단어는 ‘자랑스러움’과 ‘애정’이라고 밝혔다.그는 지난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인권정책이 주한미군의 철수로까지 이어지자 이 정책이 실책이라고 공개비판했다가 예편됐었다. ○92년 김 대통령 처음 만나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새로 출범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다시 방한한 소감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金대통령이 선거전 시기에 친북성향의 인물로 비쳐지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는 것이다.내가 본 金大中씨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는 지난 92년 金대통령을 처음 직접 만났다.한 세미나자리에서 처음 보고 며칠 뒤 조찬을 함께 하면서 깊이있는 대화를 나눴다.나는 그자리에서 그가 당시 盧泰愚정부가 주한미군과 미국에 친밀함을 보이지 않은 것에 비판하면서 친미성향적 말을 한 것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또 盧泰愚 대통령이 북한과 대면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우유부단함을 지적했었다.金大中씨의 당시 이 비판은,과거 정권이 그를 용공으로 몬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친구들에게 김대통령이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얘기하자 그들도 김대통령이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카터는 매우 연약한 인물 ­새 정부가 취해야할 대북정책은. ▲상식적으로 행동하지않는 金正日이 그가 저지르는 과격행동으로 인해 북한이 어떤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오판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한미군철수 반대 건으로 퇴역했는데 미군주둔의 의미와 철군시기는. ▲미군의 철수문제는 전적으로 한국민의 판단에 달렸다고 본다.다만 미군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직접적으로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철군을 주장한 카터가 지금은 대북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카터는 매우 연약한 사람이고 좌익주의자들로부터 조종 당하는 인물이다.그가 북한에 가서 金日成을 만난 것은 최악의 실수이다.그가 행했던 많은 외교정책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얼마전 회고록에서 한국전은 충분히 예견된 전쟁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내용을 강조했다던데. ▲나는 군에서 제대한 이후 회고록을 썼다.거기서 나는 6·25전쟁이 미국정보기관의 판단착오가 가져온 중대한 결과라는 분석을 실었다.즉 CIA에 의해 북한내부 깊숙히 침투됐던 공작원들이 金日成군대가 전쟁준비를 마쳤고 언제든지 남침할 것을 경고했는데 CIA정보분석자들은 이를 소홀히 취급했다. ○전역후 회고록 등 집필 ­전역이후 최근까지의 근황은. ▲전역직후 많은 시간을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가 하면 지난 80년대 레이건 대통령시절 공산주의에 핍박받는 전세계 나라를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주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한국은 IMF구조조정 시대에 살고 있다.한국민에게 조언을 한다면. ▲미국에서도 대공황시절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내 어머니의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나는 시간당 25센트를 받으며 일도 해봤다.우리도 그 고난을 이겨냈다.한국도 그런 정도의 고난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본다.
  • 정주영 명예회장 회고록/역대 정권 조목조목 비판

    ◎‘흥청망청’ 부추긴 문민정부/6공은 ‘돈 받고 뒤통수 치기’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솔출판사)를 곧 펴낸다. 정명예회장은 현재 막판 교정작업이 진행중인 이 회고록에서 역대정권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강도높게 비판했다.그는 “김영삼 정부는 ‘신한국’이니 ‘세계화’니 하며 빛좋은 개살구 같은 허랑한 말로써 피땀 흘려 벌어들인 달러를 마구 낭비하게끔 부추겼고 더욱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달러를 빚으로 끌어다가 국민경제를 망쳤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또 “외국언론으로부터 ‘포니 수준을 못 따라오는 한국의 정치수준’이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우리나라 대부분의 권력은 무분별,무경우,무소신,무경험,몰염치,무능력이 전부였다.6공에는 3백억원의 돈을 바치고도 90년 불공평한 세무조사를 받고 정부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며 역대정권과 정치자금을 비판했다.
  • 사라진 청와대 독대/박성래 외국어대 교수·과학사(서울광장)

    ○예로부터 경계의 대상 “청와대 투명하게 독대 없앤다”­ 11일자 서울신문의 첫머리 제목이다.독대란 임금이 신하를 다른 사람이 배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이런 만남은 조선 시대에는 흔히 참소의 기회로 이용되고,그렇게 오해되는 수가 많았다.당연히 옛 사람들은 독대란 것 그자체를 좋지 않게 여기는 수가 많았다. 적어도 형식상 조선 시대까지의 임금은 절대권력을 휘두른 권력자였다.그의 마음 돌아가는 데 따라 세상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뀌고 흔들리는 것이당연한 일이었다.그런데 임금이란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기는커녕,오히려 대체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그런 임금에게 혀끝이 날카로운 인물이혼자 찾아가 세치 혀를 놀리는 날이면 세상이 피바다로 변하는 수가 없지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독대란 신하들로서는 경계의 대상이었다.실제로 숙종 43(1717)년 7월 좌의정 이이명의 독대 사건은 당시 한바탕 소란을불러 일으킨 적도 있다.그런데 그날 노론의 대표격이던 이이명이 숙종과 만나 어떤이야기를 나눴던가는 확실하지 않다.그날 낮에 임금은 그를 불러들였고,대궐로 들어가면서 그는 분명히 “일이 상규와 다르니 승지와 사관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모름지기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옳겠다.”한 것으로 당시 ‘실록’은 전한다.하지만 승지와 사관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임금과 이이명은 독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대 직후 임금은 건강을 이유로 세자에게 청정할 것을 명했다.분명히 임금은 그 독대에서 좌의정 이이명에게 그의 뜻을 전했고,이에 대해 상의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당시 세자란 다름아닌 장희빈의 아들로 뒤에 경종이 된 인물이다.오랜 동안 세자 자리를 지키고는 있었지만,정치적으로 그리 튼튼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그리고 당시 지배층은 장희빈과 민비,세자와다른 가능한 후계자등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임금에게 이상한 소리가 전해질 것을 몹시 두려워하며 서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판국이었다.좌우간 이이명의 독대는 당시 정국을 뒤흔드는 엄청난 효과를 보였고,이이명 자신에게도 결코 유리한것은 아니었다. ○때론 정국 뒤흔들기도 1717년의 독대가 조선 시대의 유일한 독대는 아니다.유명한 학자 우암 송시열은 1659(효종 10)년 3월 11일 효종의 부름을 받고 독대한 일이있다.이 일은 뒷날 자신의 회고록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규장각에 남아 있는 ‘독대설화’라는 17쪽 짜리 책이 그것이다.효종 때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송시열이 효종 임금과 독대해 나눈 대화는 북벌에 관한 것 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그는 이 자리에서 임금에게 이율곡등의 위패를 문묘에 모시는 문제를 공론이라며 거론했고,또 소현세자의 세자빈과 관련된 억울한 일을 풀어주려는 요청도 했다.온갖 정치적 문제들이 거론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도 폐지 반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송시열의 독대는 그리 심한 비판을 받지 않았는데,한 세기 뒤의 이이명의 독대는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이다.아니,독대란 조선 초기에는 그저 범상스럽기까지 한 관행이었던 것으로도 보인다.세종 7년 8월 사간원에서 올린 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적에는 사관을 두어서 임금의 행동을 반드시 적고,그때의 사실을반드시 기록하여,후세에 공도를 보였습니다.지금 우리 나라에서는…육조·대간이 조계한 뒤에 독대하여 실정을 아뢰도록 하는데,이는 진실로 성대의 아름다운 법입니다.그러나 사관이 참여하지못하니 그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을 어떻게 해서 후세에 전하겠습니까.전하께서는 이제부터 윤대할 때에 사관도 참여하도록 하시기를 원합니다.” ○청와대 관행 정착 기대 하지만 세종은 사관을 참석시키자는 말을 거절했다.그래도 세종 때에는 별 반발이 없었다.성종과 중종 때에도 독대는 있었고 아무 말썽도 없었다.선조 때의 이율곡은 임금과의 독대가 흔히 있는 일이었고 또 바람직한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청와대가 독대를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가능한 한 중요한 모든 모임에 통치사료 비서관을 참석시켜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발상인 것으로 보인다.말하자면 사관을 동석시킨다는 뜻이라 하겠다.조선 시대에는 임금과 대신의 만남에는 반드시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게 되어 있었고,그런 경우 이를 독대라 하지 않았다.부디 한번잘 먹은 생각을 오래 지켜 주기만 바랄 따름이다.
  • 클린턴 측근의 ‘배신과 의리’

    ◎잇단 돈·섹스스캔들 이키스·캔터 온몸 방어/전 보좌관 스테파노풀로스 사임 거론 등돌려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권좌가 흔들릴 때 신하들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듯 스캔들로 곤경에 처한 클린턴 대통령이 과거 최측근들의 처신으로 웃다가 우는 형국에 처했다. 백악관은 스캔들 이후 누구보다 조지 스테파노풀로스가 보인 행태에 섭섭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클린턴 대통령의 ‘젊은 분신’,‘휘핑보이’(왕자를 대신해 매맞는 소년)란 말을 들으며 줄곧 대통령 고위 정치보좌관을 지내다 지난해 2기 출범 때 백악관을 떠난 스테파노풀로스는 스캔들 폭로 첫날에 대번 “사실이면 사임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후에도 클린턴에게 의심을 두는 듯한 논조를 견지하고 있다. ABC방송의 정치분석가인 그의 논조는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완전 안면몰수하고 클린턴을 매도하는 그런 ‘배반자’ 단계는 아니지만 아무튼 클린턴을 온몸으로 방어하던 백악관의 스테파노풀로스완 너무 다른 모습인 것이다.37살의 나이에 회고록 집필 선금 만으로 3백만달러를받게 된 것도 모두 클린턴과의 인연 덕분인데 너무 야멸차다는 말을 듣고 있다. 반면 백악관비서실 차장으로 있다가 스테파노풀로스와 같이 백악관을 떠난 해롤드 이키스는 클린턴 대통령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충신’.지난해 미언론들은 이키스가 백악관을 떠나면서 비서실장을 시켜주지 않는데 앙심을 품고 선거자금관련 서류를 한보따리 챙겨가지고 나갔다고 대서특필 했었다.선거자금 의회청문회에서 이키스가 클린턴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배반자 역을 하리라고 언론과 야당은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이키스는 예상과는 반대로 “부시나 레이건 등 공화당 대통령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백악관에서 선거자금 모금활동을 했을 뿐이다”며 공화당에 역공을 퍼부었다.이번 섹스 스캔들이 터지자 백악관에 제일 먼저 달려오고,힐러리 여사가 정중히 도움을 요청한 충신은 이키스와 미키 캔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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