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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없는 자의 눈물이 지닌 역설적 힘

    힘없는 자의 눈물이 지닌 역설적 힘

    맹강녀는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여성이다. 만리장성 부역에 징발된 남편을 찾아 나섰으나, 공사현장에 닿았을 때 남편은 이미 죽고 없었다. 맹강녀는 성벽 앞에서 울기 시작했고, 열흘 만에 만리장성이 무너졌다. 무너진 성벽 속에서 남편의 유골이 나왔다. 중국 작가 쑤퉁(44)의 소설 ‘푸른 노예’가 ‘눈물’(문학동네)이란 제목을 달고 번역·출간됐다.‘쌀’(아고라)과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에 이어 올해만 세 번째 책이다. 지난해 출간된 ‘이혼지침서’(아고라)와 올 가을에 나올 ‘무측전’(비채), 현재 번역중인 ‘양귀비의 집’ ‘흥분’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쑤퉁이 한국에 몰려오고 있다.‘눈물’은 신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다시 쓰기 위해 영국 케논게이트 출판사가 기획, 전 세계 30여개 출판사가 함께 출간하는 ‘세계신화총서’ 작업의 하나로 나왔다. 쑤퉁이 선택한 신화는 중국 4대 민간설화 중 하나인 ‘맹강녀 이야기’이고, 설화의 재해석을 위해 집어 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눈물이다. 소설에서 눈물은 금기다. 가장 비루하고 허약한 것들의 상징이나, 황제가 법으로 금지할 만큼 전복적인 것 또한 울음이고 눈물이다. 우는 것을 금지당한 사람들은 귀로 울고, 입술로 울고, 유방으로 운다. 울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아이들은 일어나 걷기를 포기한다. 주인공 비누는 머리카락으로 운다. 남편 완치량이 노역에 끌려갔을 땐 손가락과 발가락으로도 울었다. 재산도 권력도 갖지 못한 민초, 그중에서도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 그 여인의 가장 연약한 눈물이 가장 강하고 거대한 성벽, 절대왕정의 하늘을 찌를 듯한 치세를 무너뜨렸다. 눈물의 반역엔 세상의 모든 허약한 것들이 동참한다. 풍뎅이들, 흰나비떼들이 울고, 수천 마리의 청개구리들이 함께 운다. 바람과 구름은 허공에서 울부짖고, 풀과 나무는 산언덕에서 흐느낀다. 약한 것들의 연대는 강한 것들의 강고함을 허문다.“가난하고 힘든 백성들은 눈물을 갖고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소설은 비통하고 슬픈 이야기라기보다는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이야기”라고 쑤퉁은 썼다. 쑤퉁의 알레고리는 눈물을 넘어 확장된다. 전쟁으로 말이 씨가 마르고 사냥이 금지되자, 귀족들은 말을 대신할 말인간, 사냥감을 대신할 사슴인간, 멧돼지인간을 길들이고, 전국 각지에서 말 노릇, 사슴·멧돼지 노릇을 하러 사람들이 몰려든다. 고위관리에게 끌려간 비누는 ‘눈물탕약’을 제조해 바친다. 권력질서가 창조한 비통한 삶의 양태가 극악하다. 전 2권, 각권 95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5)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Ⅱ

    광해군은 성공적인 분조 활동을 통해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 부왕 선조의 견제 때문이었다. 왜란 초반, 이렇다 할 대책 없이 의주까지 파천하기에 급급했던 선조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매듭지으려 했던 명군 지휘부는 ‘광해군 즉위’를 들먹이며 선조를 계속 압박했다. 위기에 처한 선조는 왜란을 치르는 동안 모두 15번이나 양위(讓位)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명의 압박에 맞서고, 광해군과 신료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기 위한 정치적 몸짓이었다. 명의 이중적 태도도 광해군을 괴롭혔다. 명 조정은 광해군이 유능하다고 칭찬하면서도, 정작 그를 왕세자로 승인해 달라는 요청은 거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해군은 안팎 곱사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1593년 1월 벽제전투에서 패한 직후, 명군의 최고책임자인 병부상서 석성은 심복 심유경(沈惟敬)을 서울의 일본군 진영으로 보냈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협상 끝에 일본군이 남쪽으로 철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강화협상에서 드러난 명의 본심 이후에도 4년이나 더 계속된 강화협상에서 양측이 내세웠던 요구조건은 복잡했다. 고니시는 ‘명나라 황녀(皇女)를 천황의 후궁으로 주고, 조선 영토 가운데 4도를 떼어주고, 무역을 허락하고,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야만’ 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심유경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해야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고 했다. 도저히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의 차이였다. 하지만 명군 지휘부는, 벽제전투 패전과 갈수록 불어나는 전비(戰費) 부담에 대한 명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했다.’는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다. 일본군 또한 일단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나 숨을 고르면서 명의 태도를 지켜볼 심산이었다. 일본군의 서울 철수는 양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일시적 성과’였다. 이윽고 1593년 4월20일, 한강변에서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남쪽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보호하기 위해’ 명군 장졸들이 조선군을 막아서고 있었다. 명군 지휘부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조선 장수 변양준(邊良俊)을 붙잡아 목을 쇠사슬로 묶은 뒤 난타했다.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추격전을 지휘하던 전라감사 권율(權慄)은 이여송에게 소환되었다. 명군 지휘부의 지침을 어기고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추격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명군의 ‘에스코트’ 아래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온 일본군은 남해안에 머물면서 철수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명군도 삼남의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일본군을 견제하려 했을 뿐 전의(戰意)를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광해군, 무군사를 이끌며 민심을 파악 그것은 석성을 비롯한 명군 지휘부에게도 수렁이었다. 황제에게는 ‘심유경의 활약’ 덕분에 일본군이 곧 물러나고, 전쟁이 끝나 동정군(東征軍)이 개선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일본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삼남에 주둔해 있는 명군 지휘관들은 군량과 군수물자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이었다. 그 와중에 죽어나는 것은 조선 민중이었다. 싸울 의지는 없이 그저 장기 주둔에 들어간 명군의 민폐가 극심했다. 곳곳에서 군기가 풀어진 명군 장졸들에 의해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었다. 한편에서는 일본군에게 시달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명군에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우리 편’으로 여겼던 명군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컸다. 민중들 사이에서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명군 주둔지역의 민심은 불온해졌다. 지방에 주둔한 명군들이, 조선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하자 명군 지휘부는 선조와 조선 조정을 쪼아대기 시작했다.1593년 10월, 명군 지휘부는 광해군에게 삼남으로 내려가 명군에 대한 접대업무를 총괄하라고 요구했다. 요구의 배경에는 ‘무능한 선조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깔려 있었다.1593년 윤 11월, 광해군은 다시 남행길에 올랐다. 그는 1594년 8월,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곳곳을 순행했다. 특히 1593년 12월, 전주에서 왕자 시절 사부(師傅)였던 박광전(朴光前)으로부터 전라도 지역의 전황(戰況)과 민심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박광전은 광해군에게 위기에 처한 전라도의 실상을 알렸다. 일본군이 비록 거제도 일대에 주둔해 있지만 진해와 고성을 거쳐 섬진강으로 진입할 경우, 전라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박광전이 특히 강조했던 것은 ‘민심 수습’이었다. 그는 당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대부분 전라도에서 징발하고 있던 현실, 각종 세금과 노역 때문에 도망하는 백성이 속출하고 있던 상황을 알린 뒤, 포악한 지방관들을 처벌하여 지역 민심을 위로하라고 촉구했다. 비록 명군 지휘부에 떠밀려 이루어졌지만,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민초들의 참상을 직접 보았던 것은 광해군에게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가 즉위 이후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던 것은 분명 그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명, 광해군을 흔들다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상은 확고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 조정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1594년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명 조정에 주청(奏請)했다. 광해군이 전란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워, 온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명 조정은 조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광해군이 맏이가 아니라 둘째이므로 그를 책봉하면 ‘장유(長幼)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자 선조는 다시 보낸 주문에서 ‘맏아들 임해군은 자질이 평범한 데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 놀라는 증세가 생겨 왕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정황을 들어 광해군을 승인해 달라고 호소했다. 명은 다시 거부했다.1604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주청사(奏請使)가 베이징에 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명 예부(禮部)는 조선에 보낸 답신에서 ‘광해군은 현명하다. 현명한 사람은 차례를 뛰어넘는 참월(僭越)한 행위를 하지 않는 법’이라고 운운하며 광해군에게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명 조정이 광해군을 거부했던 데에는 물론 속사정이 있었다. 당시 명의 신종이 정귀비(鄭貴妃)와의 사이에서 난 주상순(朱常洵)을 염두에 두고 맏아들 주상락(朱常洛)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미루고 있던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 명 예부는 차자 광해군을 섣불리 승인해 줄 경우 신종이 맏아들을 밀어내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명분을 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명의 태도는 조선을 흔들기 위한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이미 1418년 태종이 맏아들 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뒤의 세종)으로 왕세자를 교체했을 때 명은 군말 없이 그것을 승인했었다. 충녕대군의 전례를 볼 때 명의 태도는 분명 이중적이었다. 조선의 요청대로 따라주는 것이 관행이었던 ‘왕세자 책봉’ 문제에서도 ‘상국(上國) 행세’를 톡톡히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승인 요청을 계속 거부해 광해군의 애간장을 녹일 대로 녹인 뒤, 큰 은혜나 베푸는 것처럼 책봉을 허락하여 생색을 내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원’해 주고,‘자격도 안 되는’ 광해군을 인정해 준 자신들의 ‘은혜’를 강조하여 조선을 길들이려는 속셈이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명이 조선에 과거보다 훨씬 버거운 존재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실제 누르하치의 도전이 거세짐에 따라 ‘길들여진’ 조선을 이용하고픈 명의 유혹도 커져만 갔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대우경영진 중형 선고 의미/ ‘황제경영’ 풍토 철퇴

    대우 분식회계 사건이 법조계 안팎의 관심을 끌어왔던 것은 분식 회계가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사회의 관행이었다는점 때문이었다.검찰이 이 부분을 사기죄로 기소하더라도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릴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따라서 이번 유죄 판결은 관행화되어 온 분식회계에 쐐기를 박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분식회계는 사기= 법률적으로 사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두가지 요건이 필요하다.자신이 변제할 능력이 없음에도 상대를 고의로 속여 돈을 빌려가야 한다.판례도 두가지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해왔다. 이 때문에 검찰과변호인측도 재판 과정 내내 분식 회계를 대출 사기로 연결지을 수 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검찰은 “대우그룹관계자들은 대우그룹이 분식회계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고,변호인측은 “피고인들의회계에 밝지 못해 김우중 회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며반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피고인들이 빚을 얻어 빚을 갚는 경영상황에서도 방만한 경영을 하며 은행 대출을받고 회사채를발행한 행위는 명백한 사기행위”라고 못박았다. ■부도덕한 기업윤리 단죄= 재판부가 판결문을 통해 거듭 강조한 부분은 전문경영인의 기업윤리 문제다.재판부는 ‘오너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전문경영인은 없다’는 한국적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피고인들은 궁색하게도 전문경영인이란 이유로 모든 책임을 피하려 든다”면서 “오히려 전문경영인들이기 때문에 관행이란 이름으로 대주주 등이 저지르는 횡포에 맞서야 했다”고 지적했다.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대주주나 오너의 횡포에 대항하지 못한 것은 자리 보전에 급급해 국민과 국가 경제에 해를 끼치는 일도 할수밖에 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꼬집었다. ■천문학적인 추징금= ㈜대우 임원들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데 대해 부과한 26조여원의 추징금은 사상 최고액이다.지난 97년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에게 선고된 2,200억여원과 2,600억여원의 추징금이 이전까지의 최고액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우의 추징금 기록은당분간 깨지기 힘들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집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벌금형은 벌금을 납입치 않을 경우 형으로 환산해 노역장에 유치할 수있지만 추징금은 불가능하다.추징금 집행은 유죄가 인정된㈜대우 임원들의 본인 명의 재산 범위내에서만 가능하다.추징금 집행 시효는 판결 확정일로부터 3년.이 기간에 은닉재산이 발견된다든지,발견할 가능성이 있다든지 하면 시효가 계속 연장된다.㈜대우 임원의 은닉 재산이 계속 발견된다고 해도 26조원의 추징은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
  • 2200년의 침묵깬 진시황릉 비밀

    지난 74년 봄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 땅이던 진천에서 가뭄이 극심해 주민들이 우물을 파고 있었다.간절히 바라던 물 대신 사람 크기의 인물상(俑·용)등이 나타나자,주민들은 이를 마구 부수며 우물을 파내려 갔다.마침 신화사의기자가 고향인 이 곳에 들렀다가 부서진 용에 관한 기사를써,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지도부의 관심을 모았다. 이로써 2,200여년만에 진시황릉 1호갱(坑)이 발굴된 것이다. 진시황릉은 이 ‘사건’ 말고도 과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1644년 이자성의 난 때 난민들이 역시 우물을 파다가,병사모양 흙인형인 토용(土傭)을 보고는 “귀신”이라며 놀라기절하는 일이 발생,한동안 이 곳에서는 땅을 파지 않기도했다. 진시황릉에 관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다.‘부활하는 군단’(일빛).‘마왕퇴의 귀부인’‘구룡배의 전설’등으로 국내에서도 꽤 알려진 웨난(岳南)의 새 책이다. 책은 여불위와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노애 등의 얽히고설킨 스토리 등 읽을거리를 중간중간에 넣어 흥미를 배가시킨다.예컨대 출토된 청동검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원전 222년 자객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의 고사를 인용한다. 또 진시황릉 기원전 247년,진시황제가 13세 때 공사가 시작돼 무려 39년동안 지어졌다고 사실을 덧붙인다.아울러 진시황릉을 지을 때 동원된 사람들은 법가사상을 따른 진나라의혹독한 법령 때문에 양산된 범죄자들이었으며,그들은 죽기전에는 노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적어,당시 사회상을 엿보려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다. 발굴 때 벌어진 주민과의 갈등,발굴 이후의 도난사건 등도빼놓지 않아,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진시황릉의 과거와 현재를 절로 알게 된다.곳곳에 화보 도표 등을 충실히 넣은 점도 눈길을 끈다.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갱은 모두 4곳.길이 230m,너비 62m의1호갱에는 전차 40여대와 인물 및 말 조각품 등 6,000여개의 유물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이 곳에서 20m 가량 떨어진 2호갱에서는 전차 89대와 말 70여개,병사모양의 토용 900여개가 발견됐다.잇달아 3·4호갱이 모습을 드러냈고,4호갱은 공사가 미완성인 상태였다.이는 진시황 사후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 때문에 공사를 더이상 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이들 4개 갱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8,000여점에 이른다. 책 자체만으로는 저자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와 폭넓은 고전에 대한 이해가 돋보이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중국의 것이 최고”라는 식의 중화주의적 태도가 여러곳에서드러나 거부감을 주는 게 흠이다.2권은 1권에 비해 고대사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다소 떨어진다.1·2권 각 1만2,800원. 박재범기자 jaebum@
  • ‘기억과 망각’ 獨·日 전후청산 차이점 비교

    2차대전후 독일과 일본은 여러가지로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패전과 전범처단을 위한 국제군사재판,황폐와 혼란속에서 이룬 경제부흥과 고도성장,그리고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으로의 용틀임 등등.그러나 ‘과거사 극복’과 관련해서는 두 나라가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외신보도에 따르면 일본정부가 극우단체의 ‘난징대학살’ 부인 집회를 허가,중국과 외교분쟁이 우려된다는 것이다.같은 날짜 기사에서 독일정부는 나치 강제노역피해자 배상금으로 100억마르크(6조원) 규모의 기금마련을골자로 하는 법안을 승인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독일이 과거사를 ‘기억’하면서 반성해 왔다면,일본은 ‘망각’과 부인으로 전후 50년을 일관해 왔다. 이처럼 일본과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서 양 극단의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최근 나온 ‘기억과 망각’(다나카 히로시 외 지음,이규수 옮김)은이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이 책은 지난 92년 일본 도지샤(同志社)대학 인문과학연구소가 개최한 공개심포지엄 ‘과거 극복과 두 개의 전후-일본과 독일’의 발제와 토론을 정리,단행본으로 묶은 것으로 필자는 일본내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인사들이다. 전후청산에 관한 일본과 독일의 극명한 차이점은 두 나라에서 행해진 전범재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나치전범을 재판한 뉴른베르크재판(1946.5∼48.11)은 전범 처단과정에서 ‘인도(人道)에 대한 죄’라는 새로운 국제법상의 개념을 도출,독일을 ‘반성의 길’로 유도했다.반면 도쿄재판(1946.5∼10)은최고 전쟁책임자인 일황을 면책하고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부대를 면죄하면서도 군 위안부와 강제연행 등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않았다. 도쿄재판을 주도한 미국은 일본의 침략전쟁 책임을 일본 육군수뇌부에게 돌리고 아시아권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였다.일본은 미국의 지원하에 일황을 위시해 천황제를 지탱해낸 궁중그룹과 해군·관료·재벌을 살리기 위해모든 전쟁책임은 육군에 있다는 왜곡된 ‘역사상’을 조작, 육군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보존’의 길을 택하였다. 독일(구서독)은 뉴른베르크재판 뿐만 아니라 자국의재판소를 통해 현재까지 9만여명의 나치 관계자들을 재판에 회부,7,000건 정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반면 일본은 도쿄재판 등 타자에 의한 재판 이외에 스스로에 대해 판결을내린 적이 없다. 독일은 52년 유태인 피해자에게 34억여 마르크를 배상한 것을 시작으로 인종·신앙·세계관 등에 구애없이 90년까지 총 864억여 마르크를 지불했다.그러나 일본은 자국민 중심으로 배상원칙을 세워 외국 국적자는 배상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일본군의 잔학행위는 주로 해외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그 실상을 거의 모르고 있다. 지난 87년 독일의 저널리스트 랄프 졸타노는 ‘제2의 죄-독일인 됨의 부담’이란 책에서 “히틀러시대 독일인이 범한 죄가 ‘제1의 죄’라면,‘제2의죄’는 1945년 이후 ‘제1의 죄’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부정한 것을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일본은 ‘제2의 죄’는 커녕 ‘제1의 죄’조차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삼인 펴냄 값 8,500원. 정운현기자 jwh59@
  • ‘일제 강제징용’ 일인들이 진실추적

    ◎일 시민단체,기슈광산의 ‘은폐 캐내기’ 광복절 앞두고 내한활동/근로자 875명 한푼 안주고 노역강요/생존자 7명 만나 눈물의 증언 채록/‘왜곡된 역사 바로잡는 계기됐으면’ 일본의 한 시민연구단체가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확인하는 추적작업을 벌여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월 결성된 ‘미에현(삼중현) 기슈(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 그 단체.모임을 이끄는 일본인 사학자 사토 쇼진씨(좌등정인·50)와 교포2세 역사학자 김정미씨(48·여)는 최근 광복절을 앞둔 시점에 때맞춰 내한,강원도 평창군 구석구석을 뒤져 최동규(78)·추교화(76)씨 등 7명의 생존징용자들을 만나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채록했다. 당시 소유주였던 이시하라(석원)산업이 패전후 미군정청에 보고한 문서에 근거하면 문제의 기슈광산은 2차대전 종전 직전까지 모두 875명의 조선인들이 일했던 곳.이시하라산업은 보고서에서 강제징용 사실을 완강히 부인한채 조선인 근로자들에게 퇴직금과 연금을 정당하게 지불하는 등 “할만큼 했다”고 강변했다.그러나 이 모임은 일부 생존자들의 증언과 보상문제와 관련한 일본내 재판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따라 지금까지 징용됐던 어느 누구도 퇴직금은 커녕 일체의 보상을 받지못한 상태로 확신하고 있다.이들이 기슈광산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1926년 이곳에서 일본주민들에 의해 조선인 근로자 2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때로부터.이유는 단지 “식민지인들이 건방지게 군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현지답사와 당시 조선인 근로자의 징용을 담당했던 생존자(나고야 거주) 인터뷰 등으로 사실을 확인한 이들은 곧바로 생존징용자 찾기에 나섰다.그러나 당사자들 대부분이 징용당한 사실조차 확인해 주기를 꺼려 작업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지난해 10월부터 4차례에 걸쳐 강원도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지금까지 인제군에서 4명,평창군에서 7명 등 모두 11명만 만날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사토씨는 “얼마 남지않은 생존징용자들이 사망하기 전에 사실을 밝혀야 한다”면서 “묻혀버린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한·일 양국 국민들이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조사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조사활동은 1차로 오는 10월중 도쿄에 본부를 둔 아시아문제연구소의 학술지 등에 발표한뒤 계속된 조사로 드러나는 사실은 각종 문헌과 사진·증언 등으로 구성,자료집을발행할 예정이다. 아시아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열린 국제역사교과서학술회의에서 독도가 명백한 한국땅임을 주장하기도 했던 사토씨는 “우리 모임은 역사적 진실을 아는 일본인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조사를 벌이는 것”이라면서 “독도문제나 정신대문제·징용자문제 등은 결국 일본이 천황제라는 잘못된 제도를 신봉하기 때문이며 천황제의 굴레를 벗지 않고서는 일본인들이 침략책임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모임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산하 현대사연구소와 긴밀한 협조아래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현재 일본의 학자와 시민·공무원 등 2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 극동의 관문 하바로프스크(시베리아 대탐방:39)

    ◎승무원들,중간역 「반짝 시장」서 돈벌이/차창밖엔 입영행렬… 징집제도 우리와 비슷/아루르주 경계 지나니 어느덧 극동지역에 밤 12시20분,치타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열차를 탔다.노보시비르스크를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로시아호 8번」 특급열차였다.출발지만 다를 뿐 모스크바발 「로시아 2호」와 「로시아 8호」는 같은 특급열차로 하루씩 번갈아 동시베리아를 지나간다. 역에서는 군사도시답게 입영하는 젊은이 수십명이 열지어 기차에 오르고 있다.러시아는 우리같이 의무병제도다.현재 복무기간은 18개월인데 옐친정부는 이를 2년으로 늘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입대연령은 만 18세.15세가 되면 주거지에 신고를 하고 17세때 1차 신체검사를 받고 입대 직전 한번 더 신체검사를 받는다.징집면제제도도 있어 우리와 비슷한 면제대상기준이 마련돼 있다.부모 한쪽이 없거나 영세민,결혼해 자녀가 3명이상 혹은 어린 자녀가 있을 시,대학생 등은 입영이 면제된다. ○만 18세되면 군입대 간밤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이튿날아침 7시30분.체르니세프스키역에 도착했다.어느덧 평원이 사라지고 조그만 언덕·강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동시베리아·극동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인 「소프키」라고 부르는 낮은 산들이 나타나며 우리여행도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시켜주고 있다.차창밖 산천이 우리나라와 흡사한 모습을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기차는 북진을 계속,금광지대인 모고차를 지나 아무르주 경계를 향해 나간다.마침내 시베리아가 끝나고 극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도중 실카강변에 있는 스레친스크시는 19 15년 시베리아철도의 아무르선이 완공되기 전까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당시 모스크바에서 싣고 온 화물과 승객은 이곳에서 실카강의 증기선으로 갈아타고 아무르강을 따라 하바로프스크로 갔다.이후 아무르노선이 완공되며 중요성을 상실,지금은 인구 불과 1만명의 쇄락한 도시가 됐다.하지만 지금도 이 스레친스크에서 모고차까지의 치타 동북부지역일대는 유명한 금광지대이며 식품가공·가구 등 소규모 산업지대가 만들어져 있다. 모고차시는 아무르선 건설 때 만든 도시다.아무르철도는 이 부근에서 아무르강을 따라 거의 나란히 달려 하바로프스크까지 연결된다.한때 모고차시는 시베리아 「금광의 수도」로 불릴 정도로 금광이 많은 곳이다.모고차란 도시이름도 「황금의 바닥」이라는 뜻의 예벵키어다.하오6시20분 마침내 치타주의 마지막역인 말러 코발리역을 지났다.「작은 대장장이」란 뜻의 이름이다.이로써 시베리아와는 작별을 고했다. 북동진을 계속하던 열차는 아무르주의 스코보로디노에서 남쪽으로 급회전해 하바로프스크로 연결된다.특히 치타에서 모고차까지 구간은 지난해 마지막으로 전철화된 곳이다.대시베리아철도중 하바로프스크에서 우수리스크까지는 유일하게 전철화가 안된 곳으로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우수리스크부터 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은 최근 전철화가 끝났다.실개천·나무·작은 들판등 대자연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식당음식 점점 비싸 식당칸의 음식값은 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더 비싸지더니 아무르주로 들어서며 똑같은 메뉴가 다시 10%이상비싸졌다.민망한 듯 식당칸 주인은 『중간도시에서 음식재료를 계속 사야 하는데 재료값이 동으로 갈수록 더 비싸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오지수당으로 임금이 높아지면서 물가도 따라 오른 것이다. 아무르주에 이르러 아무르강은 마침내 대하로 변하며 중·러국경을 이룬다.마찬가지로 하바로프스크부터 아래쪽 연해주 남쪽으로는 우수리강이 양국국경이다.아무르주의 첫번째 역은 예로페이 파블로비치.하바로프스크주를 정복해 건설한 예로페이 파블로비치 하바로프스크장군의 이름을 딴 마을이다. 아무르주의 스코보로디노역은 북쪽 BAM철도의 수도로 불리는 튄다역으로 연결되는 교차역이다.그리고 튄다를 통해 야쿠츠공화국의 금광중심지인 알단지구로 연결된다.이 아무르∼야쿠츠철도는 1925∼37년에 건설됐다. 승객서비스에는 관심도 없던 우리 객실의 승무원 부부는 스코보로디노역에 기차가 도착하자 「본업」인 자기영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노보시비르스크에서 싣고온 콜라·맥주·치즈·버터 등 각종 물건 수십상자를 웃돈을받고 이곳 상인에게 넘기는 일이다.빈병도 모아 넘기는데 러시아인은 기차를 탔다 하면 내릴 때까지 보드카를 마셔대기 때문에 빈병수입 또한 만만치 않을 것같다. ○동해까지 2천8백㎞ 밤중에 지난 스바보드늬역은 1912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왕자의 이름을 딴 알렉세예프스크이던 것을 혁명 뒤 「자유」라는 뜻의 스바보드늬로 바꾼 곳.제야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블라고비센스크로 연결되며 한때 금광행정본부가 있던 곳이다.블라고비센스크는 아무르 제일의 도시로 중국과 국경인데다 항구도시란 이점으로 인해 활발한 국제무역도시가 됐다.겨울에 아무르강이 얼어붙으면 강을 걸어 양국 무역상이 오가는데 시베리아에서 제일 큰 중국시장이 성행하는 곳이기도 하다.아무르강은 제야강과 합쳐진 지점에서 동해까지 거리가 2천8백24㎞,그 이전의 상류까지 합하면 4천4백㎞를 흐르는 장강이다. 국민학생 수십명이 식당칸으로 우르르 몰려간다.여름방학을 맞아 부리야트·치타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해안의 사나토리(휴양소)로 가는 학생들인데 각학교에서 우수학생을 선발해 1개월동안 휴양소로 보낸다고 한다.인솔교사는 1개월 경비가 1인당 1백만루블인데 특별히 주정부와 후원하는 보험회사에서 반반씩 부담한다고 설명한다.소련시절에는 청소년동맹이다 해서 방학이면 무조건 국가경비로 단체여행을 보냈는데 이제는 돈 있는 집 자녀가 아니면 이런 장기여행은 꿈꾸기 힘들다. 아무르주를 지나 하바로프스 크라이(대주)로 진입하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1시간이 더 추가돼 7시간으로 벌어진다.곧바로 「유태인이 살지 않는」 유태인자치주 예브레이로 들어섰다.이곳 역시 웃지 못할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 제2부 시베리아 횡단철도/“출발” 모스크바(시베리아 대탐방:16)

    ◎총길이 9,288㎞… 러시아의 대동맥/시경계 벗어나면 별장 「다차촌」이 눈앞에/출발 1시간만에 차창밖은 침엽수림으로/철길따라 늘어선 「베료자」 숲은 “러시아인의 정서” 서울신문 창간50주년기념 특별기획연재물 「시베리아 대탐방」은 지난 주 15회로 1부를 끝내고 이번 주 16회부터 제2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시작한다. 본사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과 사진부 송기석 특파원이 20여일동안 이 열차를 탑승,철도주변의 모습과 자원,자연환경 등을 컬러사진과 함께 재미있고 생생하게 전할 예정이다. 시베리아 대탐방 제2부는 주2회 수요일과 목요일에 연재한다. 하오 2시 정각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기점인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을 출발했다.출발한지 불과 35분만에 북부시경계를 벗어나 모스크바주(오블라스치)로 들어서자 곧바로 확트인 대지가 차창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그리고 대지와 숲 사이로 러시아인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재산목록 1호 「다차」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다차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별장」이지만 호사스런 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남새도 키우고 신선한 공기속에 이웃들과 보드카도 실컷 마시는 주말농장같은 곳이다. 다차의 어원은 러시아어 「다바치(받다)」에서 유래된 것.제정 러시아시절 황제 차르가 총애하는 귀족들에게 땅떼기를 선사한데서 나온 말이지만 소비에트시절 일반노동자들에게 골고루 보급돼 지금은 모스크바시민 70∼80%가 다차의 주인이다.5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 9월까지 매주 금요일 하오만 되면 다차로 향하는 시민들로 모스크바시의 외곽도로는 지독한 교통체증을 빚을 정도다.물론 주말이면 모스크바 시내는 완전히 빈도시가 되다시피 한다. 다차 마당에 나와 감자를 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러시아인들은 봄 5월15일을 기준으로 감자씨를 뿌리기 시작한다.특별한 이름이 붙은 절기는 아니지만 이날이 지나면 혹독한 추위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다차촌이 시작되며 러시아인들의 정서적인 심벌,「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난다.목재로 쓸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시베리아끝까지 줄곧 길동무가 될 나무들이다.우리의 백양목과 비슷한데 우랄에서 동시베리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고 겨울이 물러가면서 연푸른 잎을 달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베리아 횡단길에 계절의 경계를 알려주는 「잎의 화신」역할을 하게된다.우리에게는 베료스카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베료자에 예쁘고 귀여움을 나타내는 접미사 「카」가 덧붙은 말이다. 다차촌은 모스크바 시경계를 중심으로 반경 2백50㎞까지 계속된다.그리고는 황량한 대지와 베료자숲이 계속되다가 다음 도시의 다차촌이 또 나타난다.대도시 주위에는 반드시 다차촌이 형성돼있다. 출발 한시간이 지나자 푸슈킨의 이름을 딴 푸슈키노역이 지나고 역한편에 증기기관차 시절의 유물인 사일로같이 생긴 물탱크가 지나간다.높이 20여m에 붉은벽돌과 나무로 만들어 지나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시베리아철도는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간을 제외 하고는 전구간이 전철화됐다.따라서 물태크는 이제 역할이 없어진 철도의 장식품에불과하다. 우리가 탄 차는 종착역이 블라디보스토크인 「러시아2호」특급열차.방 하나에 침대 2개가 마련돼 있어 객차 한칸에 승객수는 20명안팎에 불과한 최고급 이다.격일로 홀수날만 모스크바를 출발하는데 종착역까지 계속 갈 경우 6박7일이 걸리기 때문에 좋은 이웃을 만나는게 보통 복이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까지를 시베리아철도의 제1구간으로 부르는데 이는 건설기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구간은 두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구간은 모스크바에서 세르기예프 파사드까지로 1862년에 건설됐다.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로 뻗는 최초의 철도인 것이다.이 선은 1870년에 2단계로 야로슬라블까지 연장됐다.세르기예프 파사드는 당시 러시아제국의 종교적인 수도였다.지난 91년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이름을 딴 자고르스크로 불렸으며 모스크바에 들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승지다.그 다음 야로슬라블은 종교적인 의미 외에도 모스크바에 있는 공장들을 볼가강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산업적인 고려 때문에 건설됐다.이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에서 생산된 각종 공산품들은 당시 가장 가까운 볼가강 항구인 이 야로슬라블을 통해 카스트로마·니즈니노보고르드·체복사리·카잔등 볼가강변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공급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시베리아행 열차의 종착역은 야로슬라블이었는데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시베리아철도 출발역 이름은 야로슬라블역이다.모스크바의 역 이름은 모두 행선지 이름을 따서 만든게 재미있다.예를들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는 역은 레닌그라드역이다.키예프로 가는 열차는 키예프역,백러시아로 가는 열차는 백러시아역…하는 식이다. 출발 1시간이 지나면서 차창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침엽수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침엽수·활엽수의 혼재상태가 이어진다.벌써 타이가(삼림지대)의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그리고 타이가에 가까워질 수록 침엽수의 몫이 더 많아진다. 계속되던 다차촌은 세르기예프 파사드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20년대 최대 출판단지(콤비나트)였던 프라우다신문이 종업원들을 위해 만든 다차촌 「프라브딘스키」역을 지나면서 다시 막막한 베료자숲이 대지를 수놓기 시작했다. ◎횡단철도란/수도 모스크바서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연결/1891년 첫삽,25년만에 완공… 6박7일 걸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대지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길이 9천2백88㎞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철로이다.특급열차로 달릴 경우 꼬박 6박7일이 걸리는 거리다.지구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며 시간이 바뀌는 시간대만도 7개나 지난다.일명 「대시베리아철도」로도 불리는 이 철도는 제정러시아 때인 1891년5월19일 착공돼 25년만인 1916년 쿠즈네츠∼하바로프스크 구간을 끝으로 완공됐다.물론 많은 구간은 기존 노선을 보완해 연결했다.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도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았다.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등장했고 대학·도서관·극장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2차세계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등 유럽쪽에 있던 많은 공장·문화기관들이 이 철도를 따라 대거 시베리아로 옮겨져 이 지역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지금은 최대 공업지대인 우랄지구·쿠즈네츠탄전·북부의 석유·가스산지를 유럽쪽으로 연결해 주는 러시아의 산업 대동맥 구실을 하고있다.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전노선의 전철화가 시작돼 75년 거의 마무리됐으며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구간을 제외한 전구간이 전철화됐다.현재 대시베리아철도는 연방철도부 산하에 반독립기구로 우랄철도부·옴스크철도부·사할린철도부 등 약 20개의 지방 철도부가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앞으로 전구간 복선화·전철화,그리고 바이칼∼아무르구간(BAM철도)완공과 함께 만성 적자를 탈피하기 위한 서비스 개선,경영합리화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유럽으로 가는 우리나라 화물의 일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철도를 이용해 육로로 값싸고 빠르게 운송되고 있다.앞으로 남북관계가 원만히 풀리면 직접 육로로 유럽까지 연결해줄 철도가 바로 시베리아 철도라 이 철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더 하다.
  • 구동독 미술작품 42점 일반공개

    ◎베를린 역사박물관서 4월14일까지 전시회/공산주의 정부가 주문… 화가들 강제 노역/작품엔 예술성 지키려는 고민흔적 역력 공산 동독 시절 당의 주문에 따라 그려진 회화작품 42점이 베를린의 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이 전시회는 동독의 42년 공산통치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엄선,시대에 따른 미술세계의 특징이나 표현기법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노동운동과 계급투쟁을 고증하기 위한 자료로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예술도 사회통치를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공산사회의 속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공산당의 요구대로 그림을 그려 계급이 없다는 공산사회에서 때로는 영웅이나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했던 동독 미술인들이 예술가로서의 고집을 바탕으로 예술적 세계를 지켜내려 애쓴 흔적도 담고 있어 그들이 겪어야 했던 방황과 고민·혼돈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동독이 공산국가의 합당성을 나타내는 그림들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으로부터 공산운동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전시회 개최를 명령받은 당시의 베를린 역사박물관장은 실제로 그같은 작품들이 한 점도 없는데 고민하다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이같은 주제로 작품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1백20여명의 작가들이 역사박물관으로 소환돼 공산통치를 합법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투입됐다.빌리 콜베르크,막스 링그너,빌리 지테 등이 이때의 대표적 작가들이다. 이 가운데 함부르크에서의 시민봉기 사건을 계급투쟁으로 묘사한 콜베르크의 「함부르크 봉기에서의 탤만」(1954년작)은 사회주의적 새 역사의 방향을 제시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그러나 이 작품은 마치 탤만은 옛 황제처럼 그와 얘기를 나누는 시민들은 황제의 수행원들 같은 느낌을 주고 있어 「국민들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된 예술」을 기치로 내건 공산당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인상을 풍긴다. 60년대 들어 공산당국은 작가들을 산업현장 일선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어머니의 귀향」 「국기에 대한 맹세」 등 이 시대의 작품들은 현실성을 띠기 시작했으나 예술적·미적으로는 동독 42년간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평가된다. 이같은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는 76년 지크하르트 길레의 「휴식과 구조물을 세우는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동독 미술세계에서 사라지게 됐다. 이번 전시회는 독일에서 동독 당시의 미술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음을 보여준다.이밖에도 동독에서 마지막 문화장관을 지낸 헤어베르트 쉬르머는 동독미술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이미 1만2천여 작품의 목록을 만들어놓고 있다.이 전시회는 오는 4월14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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