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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이든 천세든 뭐 어때?… K드라마의 위험한 경제논리

    경복궁이든 천세든 뭐 어때?… K드라마의 위험한 경제논리

    이달 방송 끝난 ‘21세기 대군부인’제후국 사용 천세·구류면류관 논란역사 자문을 보조인력 치부하는 환경전화 몇마디로 끝내는 작품 다반사팩트 챙기는 제작자 책임의식 절실K콘텐츠 화제성 점점 커지는 상황한국 문화·역사 낯선 해외 수용자왜곡된 방송물 사실로 인식 우려 커 “배경이 창덕궁인지 경복궁인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20년 이상 드라마 역사 자문을 맡은 조경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수부장이 최근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준비하는 한 작가에게 들은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흥선대원군의 중건 때까지 약 270년간 정궁(正宮)으로 쓰이지 않던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조 편수부장은 24일 “제작 환경에서 역사 자문을 ‘작가 보조인력’으로 치부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달 종영한 ‘21세기 대군부인’ 논란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발단은 지난 15일 전파를 탄 11회 방송분이었다. 즉위식 장면에서 신하들이 제후국 임금에 쓰는 ‘천세’(千歲)를 외치고, 즉위하는 이안대군(변우석 분)이 제후국의 ‘구류면류관’(옥구슬 9줄)을 쓴 점이 화근이었다. 소셜미디어(SNS)를 중심으로 논란이 커지자 주연 배우 아이유·변우석까지 나서 사과했다. 연출자인 박준화 감독도 지난 19일 “변명할 여지가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2020년 tvN ‘철인왕후’는 주인공이 조선왕조실록을 “한낱 지라시”라고 표현해 지탄을 받았다. 2021년 JTBC 드라마 ‘설강화’는 1980년대 독재 권력의 상징이었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를 미화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드라마 자문을 여러 차례 맡았던 최형국 수원시립공연단 상임연출은 “민감한 역사 문제가 얽힌 오류는 시청자가 납득하기 어려워 체계적 자문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중국처럼 조공·책봉 관계의 역사적 의미를 아는 나라 출신이라면 ‘21세기 대군부인’ 장면을 통해 한국이 자주국이 아니라고 인식할 우려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설정의 섬세함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다. 허구의 창작물이라도 매우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지만, 방송가가 ‘제작 효율성’을 이유로 이 작업에 미흡했다는 것이다. 조 편수부장은 “논란이 된 ‘천세’ 장면에는 대한제국의 역사가 반영되지 않았는데, 그러려면 극이 어떤 설정을 따르는지 명확히 설명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도 “허구의 이야기라도 사실 간의 ‘미싱 체인’(사슬의 빈틈)을 끼워 넣는 것인데, 경제 논리로 섬세한 미장센과 검수를 경시했다”고 꼬집었다. 문화가 곧 ‘경쟁력’인 시대인 만큼 탄탄한 감수·자문이 필요하지만 시스템은 중구난방이다. 최 상임연출은 “전문가 한두 사람에게 모든 자문을 맡기고 몇십만원만 지급하는 등 체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군들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니고 포졸들은 삼지창만 들고 다니는 장면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고 꼬집었다. 조 편수부장도 “제대로 된 대본을 보여주지도 않고 전화로 몇 마디 물어보고 끝내려는 제작진이 부지기수”라며 “자문하는 사람은 직책 이름도, 정해진 계약서 형식도 없다”고 말했다.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논란의 폭발성 역시 함께 커지고 있다. 한국 문화·역사가 낯선 해외 수용자는 콘텐츠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인식의 틀을 짜기 쉬워서다. ‘21세기 대군부인’도 지난 18일 기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디즈니 플러스 TV쇼 부문 글로벌 4위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뉴욕에서 7년째 거주 중인 한국인 A(27)씨는 “허구·과장을 전제한 한국사 드라마에서 논란이 된 장면을 본 뒤 ‘이게 정말 있었던 일이냐’고 묻는 동료가 많다”고 전했다. 결국 각종 정보를 학습한 시청자가 오류를 직접 찾아내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도 늘었다. ‘21세기 대군부인’ 문제의 장면 송출 직후 엑스(X)에는 “황제국이 대체 어디길래 ‘천세’를 외치고 있느냐”는 지적이 빗발쳤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류재웅(22)씨는 “시청자 눈에도 문제가 보이는데, 제작진은 자문도 받지 않는 것이냐”고 말했다. 직장인 김민규(29)씨도 “시청자인 나도 즉위식 장면을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쳤는데, 제작진에겐 감수가 대수롭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제작자가 책임 의식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드라마 ‘정도전’(2014) 등을 연출했던 김형일 전 KBS 드라마국 책임프로듀서(CP)는 “정통 사극이 아닌 퓨전 드라마더라도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은 제작진이 알아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작가들이 역사 속 호칭, 공간, 의상 변천 등을 배울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역사왜곡 논란이 주로 국민 정서와 직결된 오류에서만 증폭된다는 건 역사학자들에게 씁쓸한 대목이다. ‘21세기 대군부인’이나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2021)처럼 논란이 된 장면들은 동북공정 문제로 얽힌 중국이나 식민 지배의 응어리가 남은 일본과 관련됐다. ‘조선구마사’는 역사왜곡 논란 끝에 방영 2회 만에 폐지됐는데, 역사학계 일각에선 ‘선교사들에게 중국 음식이 아니라 전주비빔밥을 대접하는 장면이었어도 논란이 됐겠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명량’(2014)에선 조선군 주력 함선인 판옥선이 일본군 함선을 직접 들이받는 황당한 장면이 나오는데도 별다른 논란은 없었다.
  • 아이유·변우석 사과했는데…침묵한 MBC “대군부인 전편 몰아보기” 강행

    아이유·변우석 사과했는데…침묵한 MBC “대군부인 전편 몰아보기” 강행

    MBC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이 역사 고증 오류 및 왜곡 논란으로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은 가운데 MBC가 ‘전편 몰아보기’ 편성을 예고했다. 21일 공개된 MBC ON 편성표에 따르면 ‘21세기 대군부인’은 오는 2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다음 날 새벽 1시 10분까지 연속 방송된다. 총 12회 전편이 약 14시간 40분 동안 이어지는 구성이다. ‘21세기 대군부인’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대중들의 큰 질타를 받고 있다. 특히 지난 15일 방송된 11회 속 왕위 즉위식 장면이 가장 큰 논란이었다. 독립적인 입헌군주제라는 세계관 설정에도 왕이 제후를 상징하는 ‘구류면류관’을 착용하고 신하들이 황제국에 예속됐을 때 쓰는 ‘천세’를 외쳐 조선 시대 제후국의 사대 예법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시청자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 지위를 훼손한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며 거세게 비판했고,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논란이 거세지자 주연배우 아이유, 변우석은 사과문을 올렸고, 박준화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도 고개 숙였다. 유지원 작가도 뒤늦게 MBC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반면 작품을 편성한 MBC는 현재까지 별도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21세기 대군부인’은 2022년 MBC 드라마 극본 공모 장편 시리즈 부문 당선작이다. 방송사 대응을 둘러싼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MBC는 지난 2021년 SBS ‘조선구마사’ 역사 왜곡 논란 당시 ‘뉴스데스크’ 등을 통해 “단 2회 만에 방송 폐지”, “시청자에게 혼쭐난 ‘조선구마사’”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네티즌들은 “내로남불”, “시청자 눈치 안 보네”, “기싸움 하는 건가” 등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 [씨줄날줄] 만세와 천세

    [씨줄날줄] 만세와 천세

    ‘대한독립만세’가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3·1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이 이렇게 함께 외쳤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만세(萬歲)라는 표현을 황제국의 전유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국권 회복에 나선 민중의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우리는 황제국’이라는 의미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TV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이 ‘고증 논란’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작가는 “즉위식에서 천세를 산호(山呼)하는 장면은 역사적 맥락을 세심히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이라며 사과했다. 앞서 일부 네티즌은 “극중 신하들이 자주국의 상징인 만세 대신 제후국이 쓰는 천세를 외친 것이 중국에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만세가 황제 전용 표현으로 쓰인 것은 한고조 유방이 아버지 일화를 이야기하자 신하가 다 같이 만세를 외쳤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후 송나라의 충신 구준이 주변에서 자신을 향해 만세라고 외쳐 유배된 사건 등이 쌓이면서 황제만 쓸 수 있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황제를 뛰어넘는 권력을 틀어쥐었던 명나라 말기의 환관 위충현도 구천구백세에 그쳤을 뿐 끝내 만세로 불리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천세는 ‘천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라는 뜻임에도 만세에 비하면 격이 떨어진다. 천세는 중국에서 황제의 형제나 황제의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황제가 왕의 작위를 하사한 인물도 천세라 불릴 수 있었다. 천세가 제후의 호칭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여기에 기반한다. 네티즌 지적대로라면 ‘21세기 대군부인’은 제목부터 우리와 중국의 책봉·조공 관계를 전제한다. 황제의 적자를 중국에선 왕이라 부르지 대군이라 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중국의 황제국 시절과 대등한 위치라고 자부하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황제국이니 제후국이니 하는 논란부터가 우리가 아직 중국 중심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실례가 아닐까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 아이유·변우석 이어 ‘대군부인’ 작가도 사과 “역사적 맥락 못 살폈다”

    아이유·변우석 이어 ‘대군부인’ 작가도 사과 “역사적 맥락 못 살폈다”

    MBC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이 역사 고증 오류 및 왜곡 논란 속 종영해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주연 배우에 이어 작품을 집필한 작가가 공식 사과했다. 작가 유지원씨는 19일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고증 논란으로 시청자 여러분께 실망과 심려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유씨는 “혹 더 큰 불편을 드리지 않을지 조심스러운 마음에 이렇게 말씀드리기까지 시간이 지체되면서 더 많은 분께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고 전했다. 그는 “‘21세기 대군부인’은 가상의 입헌군주국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라며 “조선 왕실이 굳건히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상상 아래 우리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면서 “그러나 조선의 예법을 현대에 적용하고 가상의 현대 왕실을 그리는 과정에서 철저한 자료 조사와 고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즉위식에서 지적받은 구류면류관과 천세라고 산호하는 장면은 조선 의례를 현대에 적용하면서 고려했어야 할 역사적 맥락을 세심히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이라며 “이 밖에도 시청자분들께서 보내주신 의견들 모두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고개 숙였다. 유씨는 “제 고민의 깊이가 부족함으로 인해 상처받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사과의 말씀 올린다”며 “시청자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비판과 지적을 마음에 새기고, 작가로서 부족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겠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21세기 대군부인’은 2022년 MBC 극본공모전 당선작으로, 유씨는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아이유·변우석 등 톱스타 캐스팅으로 방송 전부터 화제였고 시청률도 높았지만,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과 함께 세계관 설정, 역사 고증 문제 등으로 방송 내내 구설에 올랐다. 특히 지난 15일 방송된 11회 속 왕위 즉위식 장면이 가장 큰 논란이었다. 독립적인 입헌군주제라는 세계관 설정에도 왕이 제후를 상징하는 ‘구류면류관’을 착용하고 신하들이 황제국에 예속됐을 때 쓰는 ‘천세’를 외쳐 조선 시대 제후국의 사대 예법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시청자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 지위를 훼손한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며 거세게 비판했고,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논란이 거세지자 지난 16일 종영 후 아이유, 변우석은 사과문을 올렸고, 박준화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도 고개 숙였다. 아이유는 “여러분께서 지적해 주신 드라마 속 여러 역사 고증 문제들에 있어 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연기에 임한 점 변명의 여지 없이 반성하고 사과드린다”고 했고, 변우석은 “더욱 신중하고 깊이 있는 자세로 작품에 임하는 배우가 되겠다. 죄송하다”고 했다. 제작진은 “세계관 설정과 역사적 고증 이슈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21세기 대군부인’은 로맨스물인 동시에 역사물의 성격을 지닌 드라마로,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역사적 맥락이 교차하는 부분에 대해 신중하고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했으나 정교하게 세계관을 다듬고 더욱 면밀하게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재방송 및 VOD, OTT 서비스에서 ‘천세’를 외치는 장면의 오디오와 자막을 수정하겠다고 전했다. 박준화 감독은 “촬영장에도 고증해 주시는 교수님이 있었고 작가님이 대본을 쓸 때도 고증을 받은 걸로 안다. 판타지다 보니 현실과 다르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며 “스태프와 연기자 등의 부족함보다는 최종적으로 판단 착오와 실수를 범한 제 연출 책임이 가장 크다”고 사과했다.
  • 아이유 “다 내 잘못” 눈물의 사과… ‘21세기 대군부인’은 최고 시청률 종영

    아이유 “다 내 잘못” 눈물의 사과… ‘21세기 대군부인’은 최고 시청률 종영

    가수 겸 배우 아이유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을 둘러싸고 불거진 각종 논란에 대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유는 자신의 생일이자 드라마 최종회 방영일이었던 지난 16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팬들과 함께 MBC 금토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의 마지막 회를 함께 관람하는 단체 관람 이벤트를 진행했다. 그는 가상의 입헌군주제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성희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상영이 모두 끝난 후 무대에 오른 아이유는 마이크를 잡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요즘 앨범도 준비하고 있고 드라마도 끝을 향해 가는 중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어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실망을 끼쳐 드리거나 미흡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건 정말 내 잘못이 맞다”면서 “최근에 조금 생각이 많았다. 진짜 내가 더 잘했으면 될 일이다. 여러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 만큼 더 책임감 갖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한 시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상황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방송 초반 제기된 연기력 공방부터 후반부 역사 고증 논란까지 주연 배우가 짊어져야 했던 심적 부담감을 드러냈다. 작품은 연일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화려하게 막을 내렸지만 주연 배우로서 느낀 무거운 책임감에 눈물을 보였다. 아이유는 “여러분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 이유가 있고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라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더 혼내주시고 다그쳐달라. 그럼 더 이야기를 듣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 뒤 팬들을 향해 90도로 깊이 숙여 사과했다. 같은 날 방송된 ‘21세기 대군부인’ 최종회는 전국 시청률 13.8%(닐슨코리아 전국 가구 기준)를 기록하며 동시간대 1위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흥행 면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거뒀지만 종영 직전 터진 고증 오류는 오점으로 남았다. 특히 지난 15일 방영된 11회에서 이안 대군(변우석 분)의 즉위식 장면이 도마 위에 올랐다. 대한제국 시기의 자주독립국 황제를 표방하는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에서나 쓰이던 ‘천세’를 외친 점이 지적됐다. 또한 이안 대군이 착용한 면류관 역시 황제의 상징인 십이면류관이 아닌 제후의 복식인 구류면관이었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극 중 여주인공 성희주가 한국 전통 다도 방식이 아닌 중국식 다도법을 행하는 장면까지 연달아 송출되며 논란이 이어졌다. 파장이 커지자 제작진은 16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제작진은 “애정을 갖고 드라마를 지켜봐 주신 많은 분께 세계관 설정과 역사적 고증 이슈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왕의 즉위식에서 왕이 ‘구류면류관’을 착용하고 신하들이 ‘천세’라고 산호하는 장면이 우리나라의 자주적 지위를 훼손한다는 시청자 여러분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어 “조선의 예법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세심하게 살피지 못해 발생한 사안”이라며 “‘21세기 대군부인’은 로맨스물이자 대체 역사물의 성격을 지닌 드라마로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역사적 맥락이 교차하는 부분에 대해 신중하고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했으나 세계관을 정교하게 다듬고 면밀하게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과오를 시인했다. 제작진은 향후 재방송과 VOD, OTT 서비스 등에서 관련 자막과 오디오를 신속히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 [씨줄날줄] 베이징 톈탄과 서울 환구단

    [씨줄날줄] 베이징 톈탄과 서울 환구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어제 베이징의 톈탄공원을 함께 걸었다. 천자(天子)가 ‘아버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공간이다. 고대 중국은 세상의 근원인 하늘이 특정인에게 지상의 인간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천명(天命) 사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톈탄으로 초대한 배경에도 ‘중국 지도자가 하늘과 소통하는 유일한 중재자’라는 상징성을 과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 시진핑 주석이 2017년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번째 베이징 정상회담 때 쯔진청을 친교의 장소로 고른 것도 궤를 같이한다. 중국 건국 이래 외국 정상을 쯔진청으로 초대해 공식 만찬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 언론은 전에 없던 환대라며 국빈 방문을 넘어선 ‘국빈 방문 플러스’라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쯔진청은 명·청 시대를 잇는 황제의 공간. 환대를 가장한 ‘천자 외교’에 다름 아니었다. 황제의 제단인 톈탄은 크게 환구단과 황궁우로 이루어져 있다. 환구단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중심이라면 황궁우는 일월성신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1420년 세워진 톈탄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우리 제천 의례는 상고시대 이후 줄곧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됐다.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던 환구단 제천 의식은 조선 세조 10년(1464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명나라와 책봉·조공 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의 왕은 더이상 ‘하늘의 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구단이 부활한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창건하고 황제에 즉위한 1897년이다. 서울광장 동남쪽에 있는 환구단도 환구단과 황궁우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면서 환구단은 헐리고 1913년 철도호텔이 들어섰다. ‘황제국’의 역사를 지우려는 의도가 담긴 것은 물론이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황궁우만 남고 환구단 자리에는 여전히 조선호텔이 있다. 미중 정상회담이 우리 역사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서동철 논설위원
  • 게임 IP 활용, 국가유산 친근하게 알린다

    게임 IP 활용, 국가유산 친근하게 알린다

    “게임 지식재산권(IP)이 국가유산에 다가가는, 친근하고 따스한 통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조길현 데브시스터즈 대표) 국가유산과 전 세계 누적 이용자 3억명을 돌파한 데브시스터즈의 모바일 게임 IP ‘쿠키런’이 만나 특별한 전시를 꾸렸다. 국가유산청은 데브시스터즈와 9일부터 서울 덕수궁 돈덕전에서 ‘쿠키런: 사라진 국가유산을 찾아서’를 연다. 돈덕전 1~2층을 전관 개방하는 최초 전시다. 이번 전시는 대한제국 황실 유산 40여 점뿐 아니라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5인이 쿠키런과 협업해 특별 제작한 작품, 3점의 상상화도 함께 선보인다. 대중에게 친숙한 IP를 활용해 국가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전시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장소이자, 황궁 정비 초기의 임시 정전이었던 덕수궁 즉조당에 걸려 있던 경운궁 현판을 만날 수 있다. 경운궁은 덕수궁의 원래 이름으로 현판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로 만들었다. 대한제국 선포와 관련된 여러 행사와 작업들을 기록한 책인 대례의궤와 1904년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과정을 기록한 경운궁중건도감의궤 등도 전시됐다. 마지막은 국가무형유산 옥장 김영희 보유자의 ‘대한국새’ 복원품이 장식한다. 대한국새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제작했지만 한국전쟁 중 행방이 묘연해져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보인부신총수’(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된 국새의 종류와 수량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책) 등에 기록이 온전히 남아있어 복원이 가능했다. 다섯 발톱 용뉴(용모양 손잡이)는 조선의 귀뉴(거북이모양 손잡이)를 대신해 황제국의 위상을 드러낸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 “쿠키런 친근하고 따스한 통로되길”…3억명 이용 게임과 만난 대한제국 유산

    “쿠키런 친근하고 따스한 통로되길”…3억명 이용 게임과 만난 대한제국 유산

    “게임 지식재산권(IP)이 국가유산에 다가가는, 친근하고 따스한 통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조길현 데브시스터즈 대표) 국가유산과 전 세계 누적 이용자 3억명을 돌파한 데브시스터즈의 모바일 게임 IP ‘쿠키런’이 만나 특별한 전시를 꾸렸다. 국가유산청은 데브시스터즈와 9일부터 서울 덕수궁 돈덕전에서 ‘쿠키런: 사라진 국가유산을 찾아서’을 연다. 돈덕전 1~2층을 전관 개방하는 최초 전시다. 이번 전시는 대한제국 황실 유산 40여 점뿐 아니라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5인이 쿠키런과 협업해 특별 제작한 작품, 3점의 상상화도 함께 선보인다. 대중에게 친숙한 IP를 활용해 국가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전시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장소이자, 황궁 정비 초기의 임시 정전이었던 덕수궁 즉조당에 걸려 있던 경운궁 현판을 만날 수 있다. 경운궁은 덕수궁의 원래 이름으로 현판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로 만들었다. 대한제국 선포와 관련된 여러 행사와 작업들을 기록한 책인 대례의궤와 1904년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 등도 전시됐다. 마지막은 국가무형유산 옥장 김영희 보유자의 ‘대한국새’ 복원품이 장식한다. 대한국새는 1897년 황제국 선포와 함께 제작된 대한제국의 대표 국새지만 한국전쟁 중 행방이 묘연해져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보인부신총수’(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된 국새의 종류와 수량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책) 등에 기록이 온전히 남아있어 복원이 가능했다. 다섯 발톱 용뉴(용모양 손잡이)는 조선의 귀뉴(거북이모양 손잡이)를 대신해 황제국의 위상을 드러낸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 땅과 곡식의 신에게 바치는 사직제례악 116년 만에 공연

    땅과 곡식의 신에게 바치는 사직제례악 116년 만에 공연

    “황제는 태사지신(太社之神)께 감히 고하옵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은 커서 만물을 싣고 있고, 공은 높아 백성을 생존케 하시었습니다. 바라옵건대 흠향하시옵고, 복록을 내려 도와주시옵소서.” 지난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 황제가 신에게 첫 번째 술잔을 올린 뒤 제사의 연유를 고하는 축문을 낭독하자 무대 양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한자어로 된 홀기(笏記)의 내용을 한글로 풀어쓴 자막이 떴다. 이어서 순서를 안내하는 집례의 지시로 수안지악(壽安之樂) 연주와 열문지무(烈文之舞) 춤이 뒤따랐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부터 제사에 쓰인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마지막 ‘망료’까지 모든 과정은 정적이고 단순했지만 정해진 절차와 예법에 따라 절도 있게 진행되는 의례가 주는 경건함은 특별했다.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대제에 쓰이던 사직제례악이 복원돼 116년 만에 무대에 오른다. 국립국악원은 11일과 12일 오후 7시 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사직제례악 공연을 최초로 선보인다. 공연에 앞서 이날 전체 시연 장면이 언론에 공개됐다.역대 왕들의 제사인 종묘제례와 더불어 사직제례는 조선 시대 왕이 직접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 종묘제례악과 달리 사직제례와 사직제례악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폐지돼 명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1988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현 사직대제보존회)이 사직제례를 복원한 이후에도 사직제례악은 오랫동안 제 모습을 찾지 못했다. 국립국악원은 2014년 ‘사직서의궤’(1783)와 일제 강점기 왕실 음악 기구였던 ‘이왕직아악부’의 음악 자료 등을 토대로 사직제례악을 복원했지만 결과만 발표하고 일반 관객 대상 공연은 하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대한제국 시기 예법을 기록한 ‘대한예전’(1898)의 내용에 따라 복원한 사직제례악이다. 황제국의 제례는 규모와 복식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황제의 복식은 이전 왕의 복식에 비해 화려하고, 특종과 특경 등 악기도 추가됐다.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복원한 악기인 관(管), 화(和), 생(笙), 우(竽)도 등장한다. 120여 명의 장악단원·무용단원이 참여하고 천장과 바닥에 LED 스크린을 설치하는 등 규모도 커지고 화려해졌다. 중앙대 이대영 교수가 연출로 참여했다.
  • 술 취해 환구단 발길질한 30대 1심 집행유예

    술 취해 환구단 발길질한 30대 1심 집행유예

    술에 취해 국가지정문화재 환구단을 훼손한 30대 남성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이준철)는 문화재보호법 위반·건조물침입·공용물건손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39)씨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27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으로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환구단의 일부 및 내부 공용물건이 손상돼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A씨가 범행을 인정·반성하고 있고 환구단 수리가 완료돼 피해가 복구된 점과 중구청이 A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을 양형에 고려했다. A씨는 지난해 8월 술에 취한 상태로 서울 중구에 있는 사적(史蹟) 환구단의 나무문을 걷어차 침입하고 내부의 위패와 단상, 나무병풍 등을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환구단은 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꿀 무렵 황제국의 예법에 따라 건축해?897년 황제 즉위식을 올렸던 곳이다.
  • 가을에 즐기는 궁궐·종묘… ‘궁중문화축전’ 10일 개막

    올해로 6년째인 궁중문화축전이 처음으로 가을에 열린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오는 10일부터 11월 8일까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등 4대 궁궐과 종묘에서 행사를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매해 4월에 열린 궁중문화축전은 지난 5년간 약 250만명이 즐긴 국내 최대 전통문화 축제다. 올해는 코로나19 영향으로 개최 시기를 가을로 연기하고, 온라인 행사를 대폭 늘렸다. 개막일부터 18일까지는 현장 행사를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오프라인 주간’이다. ‘경회루 판타지-궁중연화’ 공연, 한방향첩을 만들어 보는 ‘창덕궁 약방’, 궁궐의 식생활 문화를 체험하는 ‘경복궁 생과방’ 등이 열린다. 현장 행사는 사전 예약해야 관람할 수 있다. 온라인 프로그램은 궁중문화축전 유튜브에서 진행된다. 영조·사도세자·정조의 이야기로 구성한 음악 드라마 ‘시간여행 그날, 정조-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 다큐멘터리 ‘왕국에서 황제국으로’ 등이 공개된다. 게임 콘텐츠를 궁궐에 접목한 ‘랜선 어린이 궁중문화축전’도 선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문화재재단(www.chf.or.kr), 궁중문화축전(www.royalculturefestival.org)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조폐공사, ‘명성황후 어보(御寶)’ 기념메달 공개

    조폐공사, ‘명성황후 어보(御寶)’ 기념메달 공개

    한국조폐공사는 지난 8일 서울 경복궁 건청궁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실의 어보(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 및 어책을 주제로 한 ‘조선의 어보 기념메달’ 시리즈 완결판인 4차 ‘명성황후책봉금보’의 실물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8일은 명성황후 시해 124주기로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건청궁에서 시해됐다. 조폐공사 관계자는 “명성황후책봉금보는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비를 명성황후로 책봉하면서 올린 금보로 황제국 의장에 걸맞게 금으로 제작하고 손잡이는 용 모양으로 디자인해 격을 높였다”며 “이번 메달 제작에는 무형문화재인 김영희 옥장이 참여해 용뉴(용 모양의 손잡이)를 생생하게 재현했다”고 말했다. 어보 기념메달 윗면에는 용을 유물의 약 30분의 1 크기로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황제를 상징하는 용무늬와 위변조를 막을 수 있는 잠상(숨은 이미지) 및 홀마크를 담았다. 아랫면에는 ‘황후지보’(皇后之寶‧‘황후의 보물’이라는 뜻)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기념메달은 금(중량 37.5g), 금도금(31.1g), 은(31.1g) 총 3종으로 1800개 한정 수량으로 제작된다. 판매가격(부가세 포함)은 개당 금 308만원, 금도금 38만 5000원, 은 29만 7000원이다. 오는 25일까지 한국조폐공사 온라인몰, 현대H몰, 더현대닷컴, 농협은행과 우체국 전국 지점, 풍산화동양행에서 선착순 예약 판매한다. 조폐공사는 이날 조선의 어보 기념메달 시리즈 판매 수익금 일부를 미국 데이튼미술관 소장 국외문화재인 ‘해학반도도’ 보존·복원 사업에 지원하는 계획도 발표했다. 조선시대 궁중 장식화인 해학반도도는 바다·학·복숭아 등을 그리고 바탕은 금박으로 처리한 가로 734.4㎝, 세로 224.4㎝ 크기의 12폭 병풍이다. 조폐공사는 지난 4월 조선의 어보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1억원을 문화재청,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간 후원 약정에 따라 기부한 바 있다. 조용만 조폐공사 사장은 “조선의 어보 기념메달은 2017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 왕실의 유물인 어보의 가치를 알리고 국외 문화재 보호를 위한 기금 조성을 위한 사업”이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제품을 통해 국위 선양과 문화외교에 기여하고 국외 문화재 보호에도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서울비즈 biz@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 육군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 육군박물관

    정확히 100년 전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비록 모양새는 조촐하여도, 제대로 된 임시헌장이 발표되었고 여기서 공표한 건국강령에 따른 국체(國體)는 지금 대한민국이 따르는 민주공화정 그대로였다.반면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이 1899년 8월에 반포하였던 ‘대한국 국제’에서는 조선은 황제국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주권을 가진다고 규정하여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조항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하니 당연지사 지금 우리나라의 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분명하고 또 분명한 셈이 된다. 바로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이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으로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창설되어 중국군, 연합군 등과 함께 항일전선에서 투쟁하였다. 의병, 독립군, 광복군 그리고 현재의 대한민국 육군으로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육군박물관으로 가 보자.아마도 봄나들이 공간으로 서울 시내에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 육군박물관은 서울 시내 노원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편하다. 그냥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 내리기만 하면 된다. 육군사관학교의 규모는 149만 6979㎡(약 45만평)에 달해 캠퍼스 크기로는 여느 일반 대학들을 한번에 압도한다. 바로 이처럼 드넓은 육군사관학교 내부에 육군박물관이 있어 방문객들은 육사 교정을 천천히 가로 질러 산책하는 여유로움도 한껏 느낄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전문박물관. 전시유물로만 13,341점에 이르러육군박물관은 원래 1956년 10월 3일에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개관한 이후 2001년 3월 19일에 이르러서는 문화관광부에 육군박물관으로 공식 등록하였다. 당연히 육군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전문박물관으로 다른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전문 군사 관련 유물 등을 대거 소장 전시하고 있다. 현재 육군박물관에는 13,341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데 이중 역사 유물로는 4.999점, 현대 유물로는 5,544점, 그리고 기타 기념자료 2,798점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무기, 군사 관련 박물관으로 최고 수준이어서 관람객들은 연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현재 육군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무기류, 장비류, 서화류, 복식류, 기치류 등 다양한 군사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데 크기는 연건평 1,815평에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이고, 2개의 전시실 이외에도 사무실과 학예실 및 278석을 구비한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관람실인 2층 제1전시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와 장비 등을 도검·궁시·화약병기·군사장비·회화·전적류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3층 제2전시실에는 고려, 조선, 대한제국의 군대, 의병, 독립군, 광복군, 대한민국 육군의 발전 과정과 이들이 의병항쟁, 독립전쟁,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사용했던 무기와 장비 그리고 주요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육군박물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추천하는 방문지야? - 꼭 가보길 권한다. 드넓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을 마음껏 품을 수 있고 볼거리도 풍부하다. 2. 누구와 함께? - 어린 자녀들과 함께. 군인의 꿈을 품는 청소년이 있는 가정이라면 3. 가는 방법은? - 미리 견학신청을 해야 한다. 당연히 무료. - 관광시간 : 화ㆍ목ㆍ금 오전 10시~12시, 오후 2~4시(수요일은 10시~12시) 전화통화가 어려울 경우 이메일로 문의 가능. kma0520@kma.ac.kr 4. 놀라는 점은? - 육군사관학교의 깨끗한 조경. 외부 군사 무기 전시품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생각보다 관람객들이 많지는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관람품 구입 코너, 육사기념관, 화랑대 7. 관람시 주의사항은? - 군사 시설이어서 통솔자의 안내를 따라야 한다.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s://kma.ac.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서울 시립 북서울 미술관, 서울 시립 과학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육군박물관은 전문 군사박물관으로 방문 가치가 아주 뛰어난 곳이다. 미리 견학 신청을 해서 나들이를 다녀 온다면 뜻깊은 하루가 될 듯. 제대로 된 진짜 박물관.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올해는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모르는 사람 많아 안타까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올해는 3·1운동 기폭제 된 고종 승하 100주년…모르는 사람 많아 안타까워”

    ‘황사손’ 이원이 말하는 고종 승하 100주년“올해가 고종광무태황제 승하 100주년입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인 것을 알면서도 만세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고종 황제의 붕어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황사손으로서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21일 오전 6시30분쯤 일제에 의해 독살되셨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이지만 해마다 이날 정오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에 가서 제향을 봉행합니다. 고종 황제가 당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나라를 잘 못 이끌었다는 오해를 아직도 받고 있습니다. 역사교육이 잘 못된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21일 정오 고종 왕릉인 남양주서 ‘홍릉제향’ 봉행 그를 만나면 무엇부터 질문할까 고민했다. ‘군주국이 아닌 나라에서 황위 계승자 제1순위로서의 삶’을 먼저 물어볼까하다 ‘고종 사망 100주년의 소회’를 물었다. 황사손(皇嗣孫·(대한제국)황실의 적통을 잇는 후손) 이원(57·본명 이상협)은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만감이 교차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5대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총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도 겸하고 있다. 고종의 증손자인 이원 총재는 2005년 영친왕계의 이구 황태손이 타계한 이후 3년상을 치르고 그의 계자(系子)로 입양돼 황가의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고종 황제의 승하 당시 어땠나요. -> 고종이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역적 매국노들은 눈엣가시 같은 고종을 독살했든 겁니다.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서 한약·식혜·커피를 드시고 30여분만에 시해되셨습니다.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황제는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켰고, 사후에 보니 혀와 치아가 타 없어지고,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으며,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살됐다는 확실한 증거 기록입니다. “고종, 21일 아침 6시 한약·커피·식혜 마시고 승하심한 경륜 후…혀·치아 타 없어져 독살 시해 증거고종 시해 이유…항일독립 망명정부 차단하려고”- 고종 승하에 백성들은 왜 ‘만세(萬歲)’라고 외쳤을까. -> 만세가 요즘이야 축하나 환호할 때 외치는 소리이지만, 그때만 해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경칭이었고, 죽음이란 단어를 꺼렸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수장이었던 황제가 억울하게 독살당하자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백성들이 공분을 일으킨 것입니다. 고종의 항일 투쟁의 뜻을 기리는 백성들이 인산일(因山日·왕과 왕가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앞서 자발적으로 모여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인산일에 맞추려다 국장날 소요는 예가 아니다고 미루고, 전날인 3월2일은 일요일이어서 하루 늦췄다고 합니다. 결국 1일로 날짜가 맞추진 것이 3·1독립만세운동입니다. - 고종의 독립운동 가운데 일반인이 잘 모를 법한 이야기는. ☞ 고종 황제는 1897년 황제국을 선포한 것도 지금보면 여러모로 의미있는 일입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1894년 갑오개혁때 공식적인 국문 즉 ‘나랏글’로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근대 문명의 초석이 된 겁니다. 한글을 이용한 잡지와 신문 발간도 적극 권장했지요.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도 출간도 가능했던 겁니다. 또 일본보다 2년 빠른 1884년 미국 에디슨전기회사와 협약해 창덕궁에 전기등소를 설치하고 종로에 전차를 도입했습니다. 종로를 아시아에서 가장 번쩍이며 화려한 명소로 탈바꿈시키셨던거죠. 친일역적 매국노들이 고종 황제를 철저히 암군(暗君·어리석고 아둔한 군주)으로 묘사했지만 최근 학자들에 의해 개명군주(開明君主)로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고종, 한글 공식 나랏글 선포…개명군주 역할 많아대한광복군정부 수장…항일 구국 독립운동 구심점- 대한광복군정부에 대해 설명하면. ☞ 고종 황제는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황위에서 강제로 퇴위되셨습니다만 1914년 이상설(1871~1917)을 중심으로 설립된 첫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수장이 되어 항일구국 운동을 지원하셨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다시 대한민국국군의 모체가 됩니다. 간접적인 독립활동에 한계를 느끼신 황제는 이상설과 이회영(1867~1932)의 계획 아래 중국에 망명해 항일구국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려 하셨습니다. 이런 망명 계획을 첩보로 입수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민병석·송병준·이완용·윤덕영·한상학이 고종의 망명을 차단하려고 암살을 한 겁니다. - 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에서 황사손의 역할은. ☞ 가장 대표적인 직무는 종묘대제·사직대제·환구대제(대한제국 황실 선포 및 국태민안 기원 제사)·조경단대제(조선왕실 시조 즉 전주이씨 시조묘 제사) 그리고 연중 66회의 왕릉제향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연간 70번 거행되는 제사에서 왕과 왕비 신위에 술잔을 처음으로 올리는 제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왕실 초헌관은 조선시대 때부터 국왕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만 이구 황태손 저하를 이어 제가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그 유구한 역사·문화적인 유산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으며, 대한제국황실이 그 정통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공화국이 된 나라에서 황제 계승자라는 직위는 다른 분들에겐 사실 설명하도 이해를 잘 못하는, 그래서 외로운 면이 있습니다. “황사손 역할, 연중 70회 대제·제향 초헌관 맡아유구한 역사 계승…대한민국 정통성 뒷받침 자부”- 황실 최고령인 이해경씨 환국은. ☞ 제게는 고모님이 되시는 해경 황녀님은 1930년 태어나셨서 올해 구순이 됩니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왕자이신 의친왕(1877~1955)의 5녀입니다. 조선왕실 법도로 보면 의친왕의 공주가 되고, 대한제국 황실 법도로 보면 황녀가 됩니다. 195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신 이후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한국학 사서로 조선의 기록을 많이 발굴해 내셨습니다. 1996년 정년퇴직하신 이후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고 계십니다. 뉴욕의 한인사회 주요 행사에 참석하시며 교민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들었습니다. 뉴욕에서는 황녀라는 호칭보다 ‘한국 공주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독립한 조국이 있는데 이역만리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더 늦기 전에 환국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환국시 친모이신 의친왕비가 생활하셨던 안동별궁이나 사동궁이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황실의 상징성을 고려해 이구 황태손 저하와 영친왕비, 그리고 덕혜옹주께서 기거하셨던 창덕궁 낙선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황사손으로 보람을 느꼈던 일은. ☞ 2017년과 작년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 관계자들과 오하이오주에 사는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호러스 알렌 박사 후손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소개되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관계자들은 저를 ‘His Imperial Highness’(저하)로 경칭해 놀랐습니다. 또 알렌 박사의 고향에선 ‘한국의 황태자가 온다’는 소문에 알렌 박사의 증조카 며느리의 집에 동네사람들이 저를 만나려 몰려왔습니다. 그들도 저를 ‘Your Highness’로 높여 불러주었습니다. 한 이웃은 오찬 음식점까지 자신의 자녀들을 데려와 소개시켜주면서 “오늘 한국의 황태자를 알현하는 것은 저희 가족에게는 큰 영광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서의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됐고 또한 큰 위로도 받았습니다. 황사손에 대한 마땅한 영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해외왕실교류수석위원이신 김영관 박사는 제1위 황위 계승자이니 영어로 ‘The Crown Prince His Imperial Highness’(황태자 저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고, 현재 영어로는 그렇게 호칭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알렌 후손들로부터 환수된 문화재는 서울시에 기증하였습니다. “황실 최고령 이해경 황녀, 늦기 전에 환국해야사직대제·환구대제·왕릉제향 유네스코 등록 추진”- 앞으로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은. ☞ 올해는 특히 국민을 섬기며 대한민국의 문화 융성에 이바지하려고 합니다.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이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즉, 민주공화정에서도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의 직계손이 제향에 초헌관으로 참여함으로서 그 뿌리와 원형이 인정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직대제와 환구대제 그리고 왕릉제향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올해도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뉴욕한인축제나 에딘버러축제에서 어가행렬을 재현하는 행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종묘제례악이나 어가행렬은 단순한 제례의식의 절차를 뛰어 넘어 대한민국만이 보유한 역사·종교·문화 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지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우리의 역사문화 유산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 알렉 박사의 후손들을 올해 직접 방문해 작년에 환수하지 못한 나머지 유물 환수와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은 발굴할 계획입니다. 이런 여정을 영상으로 남길까합니다. 그는 황사손이라고 하지만 궁궐이 아니라 서울 성북동의 한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황사손이 되기 전에는 그도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상문고와 뉴욕공과대(NYIT)를 마치고 미국 케이블사 홈박스오피스(HBO)의 PD로 일하다 1990년 귀국했다. 금강기획을 거쳐 현대방송 PD, 현대홈쇼핑 디지털방송본부장으로 있다가 황사손으로 선정됐다.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했는데, 미련이 많겠다’고 하자 그는 “하늘의 부름이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고려 국왕 머물던 ‘왕립호텔’… 경사지에 지은 입체적 건축

    [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 고려 국왕 머물던 ‘왕립호텔’… 경사지에 지은 입체적 건축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사학자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새해를 맞아 ‘김봉렬과 함께하는 건축 시간여행’을 시작합니다. 전통 건축의 과거를 통해 내일을 바라보는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김 총장이 직접 ‘시간여행’의 가이드로 나섭니다. 첫 번째 주제는 고려 행궁(行宮)의 원형이 담긴 경기 파주 ‘혜음원’입니다.●도둑 소굴에서 행궁으로 지난해는 고려 건국 1100주년이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대고려전’을 개최 중이다. 474년 동안이나 건재했으며, 활발한 대외 무역으로 ‘코리아’의 어원이 되었던 고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은 고려청자와 금속활자, 그리고 팔만대장경 정도다. 뒤이은 조선 왕조가 고려의 기록을 지워버렸던 탓도 있고, 주요 문화유산들이 북한 땅 개성에 밀집돼 깊은 연구가 불가능한 까닭도 컸다. 지난 천 년의 마지막 해, 1999년에 경기 파주의 후미진 경사지에서 낯익은 글자를 새긴 기와 한 조각을 발견했다. ‘惠陰院’이란 글자였는데, 바로 이곳이 학계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혜음원 터였다. 이후 10여차례의 발굴 정비작업을 거쳐 최근 웅장한 전모를 드러낸 이곳은 고려시대의 큰 사원터이며, 국왕이 행차해 머물던 행궁터였다. 고려는 국가적 도로망을 개척했고, 곳곳에 교통시설인 ‘역’과 숙박시설인 ‘원’을 운영했다. 종종 원과 함께 불교 사찰을 세워 운영을 맡겼는데, 이를 묶어 ‘사원’이라 불렀다. 혜음원을 때에 따라 혜음사라 부르는 까닭이다. 혜음원은 남경 개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의 고향인 개성에 수도를 두어 ‘개경’으로, 옛 고구려의 평양을 ‘서경’으로, 그리고 신라의 경주를 ‘동경’으로 삼아 ‘초기 삼경제’를 운영했다. 중기에 들어 동경 대신 지금의 서울을 ‘남경’으로 삼아 ‘중기 삼경제’를 시행했다. 1104년에 남경에 궁궐을 짓고 1129년에 서경에 대화궁을 새로 지었다. 국왕은 세 수도를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세 궁궐에 일정 기간 머무는 순주제를 시행할 수 있었다. 삼경제와 순주제는 황제국의 예법이었다. 개경과 남경 사이는 새벽에 출발해서 부지런히 걸어도 도중에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거리이다. 혜음원은 개경에서 남쪽 50㎞, 남경에서 북쪽 20㎞ 지점이며 큰 고개인 혜음령 바로 아래 위치한다. 이곳에서 숙박하고 이튿날 혜음령을 넘으면 남경에 닿는 최적의 요지였다. 당시 이 일대는 “산이 깊고 수풀이 무성해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고, 도적들이 숨었다 떼로 나타나 사람들을 해친다”고 할 만큼 험한 곳이었다. 이에 행인들은 동행자를 모으고 무기를 들고 고개를 넘었는데, 그래도 1년에 수백 명이 살해당한다는 과장(?) 보고도 있었다. 1120년, 묘향산의 승려 백여 명이 비용을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만에 사찰과 여관의 복합체인 ‘사원’을 완성했다. 1차 완공 직후, 국왕의 남경 순행에 이용하려고 행궁 증축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혜음원신창기’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당대의 대 문장가 김부식이 쓴 글이다. 이 무렵 고려 조정은 묘청 등의 서경파와 김부식 등의 개경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마도 남경 개발은 서경천도론을 외치는 서경파에 대한 견제책이 아니었을까. 혜음원 건립은 신도시 남경을 발전시킬 필수적인 기간 사업이었다. 민생을 명분으로 창건했지만 결국 행궁을 건립해 국왕의 남경 순행을 도모하기 위한 다각적인 포석이었다. 그 결과 “개암나무 숲이 변하여 아늑한 절이 되었고, 무서운 길이 평탄한 길로 바뀌었다. (사원과 행궁은) 아름다워서 가히 볼만하다”고 자찬했다.●경사지 건축의 유기적 미학 혜음원과 더불어 남한에 남겨진 몇몇 고려시대 건축지들이 발굴돼 왔다. 팔만대장경을 제작 보관했던 강화의 선원사터, 삼별초 항쟁지였던 진도의 용장산성 궁궐터, 고려 법상종의 최대 사찰인 원주의 법천사터가 대표적이다. 또한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개성의 고려 정궁, 만월대도 꼽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경사지에 자리잡은 대규모 건물군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중국에서 발전한 동아시아의 건축 제도는 평지 입지를 전제로 만들어진 모델이었다. 남북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위에 주요 건물들을 세우고, 좌우 대칭으로 부속 공간들을 만든다. 중심과 대칭, 기하학적 구성 등은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며 평면 위에서 쉽게 완성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궁궐이나 대형사찰, 심지어 신라의 궁궐과 사찰들도 평지 위에 세운 까닭이다. 그러나 확인된 고려 궁궐이나 대형사찰은 모두 경사지에 자리잡았다. 만월대뿐 아니라 평양 대화궁과 피난 궁궐인 강화 고려궁터도 급한 경사지다. 경사지에 건물을 세우려면 대지를 여러 개의 좁고 긴 수평 단들로 나누어야 한다. 만월대는 적어도 15단 이상, 용장산성 궁궐은 10개의 수평 단으로 조성했다. 혜음원 역시 9개의 좁고 옆으로 긴 단 위에 30여동의 건물을 세웠다. 평지의 건축과 달리 경사지 건축에서는 중심과 대칭 등 기하학적 질서를 구현하기 어렵다. 그 대신 높낮이가 다른 여러 건물들의 조화와 긴장감, 지형을 따라 전개되는 극적인 구성들이 돋보인다. 이러한 유기적 질서의 전통은 조선시대 창덕궁에도 전해졌다. 평지에 자리한 경복궁이 기하학적 질서를 따랐다면, 경사지에 조성한 창덕궁은 유기적 질서가 살아 있다. 자연 지형을 이용한 유기적 질서야말로 고려가 창조한 한국적 전통이고, 그래서 창덕궁을 가장 한국적인 현존 궁궐로 평가한다. 혜음원은 이 입체적인 건축에 더해 또 하나의 질서를 부여했다. 물을 강력한 조경 요소로 활용한 것이다. 경사지 건축에서 배수 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잘못하면 한쪽으로 물이 넘쳐 건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혜음원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곳곳에 크고 작은 연못을 만들었고, 이들을 길고 굽은 배수로로 연결하고 있다. 고여 있던 물이 배수로를 따라 흐르고, 곳곳에 만든 작은 폭포에서 떨어진다. 고인 물의 거울효과, 떨어지는 물의 음향효과가 대단했을 것이다. 넓고 큰 배수로 때문에 곳곳에 다리와 뜬 계단을 설치했다. 전성기 혜음원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재건해 본다. 수십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10여개의 마당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고, 높고 낮은 지붕들이 대조를 이루며 입체적인 실루엣을 이룬다. 객원과 사찰, 행궁이라는 복합 용도에 맞추어 담장이 곳곳에 경계를 이루고, 또 여러 개의 문들이 통로를 이룬다. 수직적으로 높고 낮음뿐 아니라 수평적으로도 막힘과 뚫림이 연속된다. 바닥의 연못과 수로에는 물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물보라를 튀기는 작은 폭포 소리들이 들린다. 경사지의 건축은 이처럼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며 환상적이다.●처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다 고려는 어떤 나라였나. 남북으로 분열된 중국 대륙의 국제적 상황을 이용해 그들과 대등한 외교를 벌이며, 황제의 나라를 자임했던 정치 조직체였다. 남경 건설과 순주제 실시는 그 자부심의 발로였다. 상업을 장려해 국내 유통은 물론 중국을 넘어선 지역과도 활발하게 교역했던 경제 공동체였다. 상업 활동을 위해 도로와 역원을 정비했고, 혜음원은 그 대표적인 시설이었다. 처음에는 객원과 사찰을, 그 뒤에 행궁을 지은 것은 고려 사회의 우선순위가 정치보다 경제였음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고려는 실질적 사고에 충만하고 전문 기술을 숭상했던 실용적 사회였다. 여러 분야의 연구 개발이 활발해, 원산지인 송의 청자보다 한 차원 높은 고려청자를 만들었고 목판 인쇄의 한계를 뛰어넘은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건축 분야 역시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을 예로 들자. 깊은 소백산 오지에 있는 무량수전은 결코 고려의 대표작이 아니라 흔한 지방 건축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정교한 아름다움을 넘어설 현존 건물은 없다. 역설적으로 지방 건축이 이러할진대, 대표작들이 즐비했을 개경의 건축은 어떤 수준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건축가들은 산지가 대부분인 이 땅의 잠재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려운 경사지에 입체적인 건축을 실현할 지식과 능력이 있었다. 비록 고려의 건물들은 다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만, 남겨진 석단과 초석만으로도 충분하다. 혜음원 현장에 가 보시라. 크고 작은, 높고 낮은 석단들로 조합된 대지에서 이미 건축적 운율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곳곳의 연못과 배수로, 계단과 작은 다리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짜여 있는지, 고려 건축가들의 과학적 사고와 계획 능력을 실감할 수 있다. 고려의 건축은 거의 모든 지상 건물은 사라지고 기단과 초석의 흔적만 남은 폐허들이다. 완성된 건축물에서 최종의 생각을 읽는다면, 고려의 폐허에선 1000년 전 고려인들의 처음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그들의 자부심과 창조력과 실용정신을 만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근대의 새벽을 깨운 마지막 왕조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근대의 새벽을 깨운 마지막 왕조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회 정동(대한제국을 기억하며)편과 제22회 서초동(우면산의 가을)편이 2회 연속 진행됐다. 추석 연휴 특별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이번 미래투어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달 26일 정동과 덕수궁 일대, 29일은 서초동 우면산 일대에서 각각 열렸다. 한가위 연휴와 맞물린 황금주말을 맞아 서울미래유산의 향기를 맡고자 하는 참가자들이 대거 몰렸다. 사전 온라인 예약이 일주일 전에 매진돼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시스템 40개가 동났다. 예약 없이 현장을 찾아온 러시아와 루마니아 출신의 금발머리 외국인 여학생 2명은 진행자가 양보한 이어폰을 사이좋게 사용했다. 2회 차를 1개 지면에 갈무리했다.정동투어는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시청역 4번 출구에서 시작했다. 서울시의회(옛 국회의사당)~성공회성당(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세실극장~주한영국대사관~유림면~덕수궁~정동극장~작은형제회 한국관구(프란치스코 수도원) 순서로 진행됐다. 추석 연휴를 맞은 정동과 덕수궁에는 근대 새벽을 느끼려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특히 이날 코스 중 성공회 성당에서는 정창진 신부가 사대문 안에 조성된 유일한 묘역인 지하 세례자 요한 성당의 조마가 주교 유해를 참배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또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프란치스코 정동수도원도 요한 수도원장이 나서서 내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앞둔 성당 내부를 공개했다. 이날 코스 중 세실극장, 주한영국대사관, 유림면, 정동극장,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에 어울리는 한복 차림으로 능숙하게 답사단을 안내했다.정동과 덕수궁은 대한제국에 대한 처연한 기억이 머문 곳이다. 대한제국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13년 동안 존재했던 이 땅의 마지막 왕조다. 우리가 세운 첫 황제국이자 마지막 황제국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다. 대한제국을 인정하지 않는 일제가 자신들이 합병한 나라를 조선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우리도 덩달아 패망한 나라를 조선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또한 1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기를 ‘대한제국 시기’라고 하지 않고 ‘구한말’이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덕수궁 전신)이 자리한 정동은 근대의 고향이다. 이 땅에 근대정신을 알린 학교, 병원, 외국공관, 종교시설이 빼곡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옛 독일공사관(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옛 러시아공사관, 하비브하우스(미국대사관저), 영국대사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등이 120여년 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종은 왜 경복궁과 창덕궁을 버리고 대한제국 황궁으로 경운궁을 선택했을까.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에게 경운궁은 기회의 땅이었다. 외국공사관에 둘러싸여 신변 안전에 유리하다고 여겼다. 중국과 일본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적소라고 여겼다. 1년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아관파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근대국가를 열겠다는 일념에 가득 차 있었다.원래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보다 3배 이상 넓었다. 옛 경기여고 터는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이었고, 정동극장과 예원학교 자리에는 황실의 생활공간인 수옥헌이 있었다. 지금의 경향신문사와 서울역사박물관 사이에 세워진 구름다리(홍교)는 옛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다리였다. 경운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는 개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대한제국은 정동에서 불길이 타올라 정동에서 꺼졌다. 고종은 경운궁 동문 대안문(대한문) 앞에 환구단(웨스틴조선호텔)과 황궁우를 세워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제의 격을 과시했다. 서울시청 광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 서울 도심의 방사상 도로망이 이때 구축됐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기울어진 국운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1900년 선원전 화재에 이은 1904년 대화재로 경운궁 주요 건물이 홀랑 타버렸다.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을 중건하는 동안 본궁에서 떨어진 중명전에 머물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 경운궁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첫 황제였던 고종의 궁이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한 고종이 1919년 68세로 회한의 임종을 맞은 궁이다. 새로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부왕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바쳤다. 이때부터 고종황제의 칭호는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됐다. 덕수궁 시대의 시작이다. 한때 황궁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경운궁은 나라를 잃은 ‘뒷방 늙은이’의 거처로 급전직하했다. 경운궁 시대가 그냥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을 기해 3·1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돼 대한민국의 국통을 세웠다.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된다.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전성기가 담긴 10년간의 경운궁 시대(1897~1907)와 덕수궁 이태왕이 기거한 12년간의 덕수궁 시대(1907~1919)는 분리돼야 한다. 덕수궁에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대한제국의 혼이 깃들어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 [TV 하이라이트] 1000년 전 고려로 시간여행… 문화·통일을 배운다

    [TV 하이라이트] 1000년 전 고려로 시간여행… 문화·통일을 배운다

    ■고려건국 1100년 특별기획 원 코리아 2부(KBS1 토요일 밤 9시 40분) 북한 개성의 만월대 발굴현장을 들여다본 1부에 이어 2부 ‘코리아, 고려를 만나다’에서는 10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남녀가 혼인을 하면 남편이 한동안 처가에서 산다. 사위는 장인과 장모를 부모처럼 섬기고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낸다. 유산은 성별 구분 없이 균등하게 나눈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고려인들의 생각은 외교에도 투영됐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원과 책봉,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를 지키는 등 실리적인 외교노선을 취했다. 외부로는 국왕, 내부로는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부르면서 국가적 자부심과 외교적 실리를 챙겼다. 세계가 우리를 부르는 이름 ‘코리아’의 어원은 바로 고려, ‘꼬레’다. 고려 수도 개성, 현재 남과 북의 수도인 서울과 평양은 모두 고려시대에 개발된 신도시다. 2018년 현재 우리에게 가장 유의미한 고려의 유산은 무엇일까. 어떤 외세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뤄낸 완전한 통일이 아닐까. 소통과 평화, 하나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려 500년 역사를 현재에 되살려 그 단초를 찾는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의 비극 서린 산책길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의 비극 서린 산책길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0회 홍릉산책(홍릉수목원) 편이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과 회기동, 성북구 종암동과 하월곡동을 넘나들며 진행됐다. 정릉천을 경계로 동대문구와 성북구가 갈리고 정릉천과 중랑천 사이 천장산 자락에 홍릉수목원을 비롯해 의릉, 북서울 꿈의 숲, 배봉산 등이 안겨 서울 동북부의 허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날 홍릉수목원은 33도를 기록하는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하면서 피톤치드가 충만한 삼림욕까지 즐기는 일석이조의 피서지였다.참가자들은 고려대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정릉천~한국국방연구원(KIDA)~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홍릉수목원(국립 산림과학원)~카이스트 서울캠퍼스~옛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인재캠퍼스~수림문화재단~세종대왕기념관 코스를 걸었다. 다들 “서울의 부도심에 이런 울창한 숲과 고즈넉한 시가지가 남아 있다는 게 경이롭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땅 향기가 살아 있는 홍릉수목원의 그늘은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다만 주말에도 개방하는 홍릉수목원과 세종대왕기념관 이외 다른 공공기관은 휴관 중이거나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서울미래유산 해설자로 첫 데뷔한 숲 전문가 임혜란 해설사는 해박한 생태지식과 구수한 입담으로 투어단을 이끌었다.홍릉수목원이 있는 청량리는 조선시대 능행과 농경 제례의 상징공간이었다. 청량리는 태조의 건원릉이 있는 왕실 최대 묘역 동구릉으로 향하는 능행길이자 능행행차를 통해 왕실의 존엄을 내보이는 홍릉 묘역이었다. 또 청량리 일대는 농경사회의 수호자인 왕이 몸소 경작의 시범을 보이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다. 사대문을 둘러싸고 형성된 성저십리(성 밖 10리)를 뜻하는 동교, 서교, 남교, 북교 등 교외지역 중 청량리와 왕십리로 대표되는 동교지역의 위상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까닭이다. 능행은 선왕의 기억과 권위에 기대 효를 다하는 왕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문상외교, 문상정치와 뿌리를 같이한다. 왕의 견문을 넓히고, 도성 밖 사대부나 지방 백성과 소통하는 중요 행사였다. 왕은 최대한 천천히 가면서 피지배 계층에게 권위를 보이고, 민원을 청취한 뒤 덕을 베풀었다. 민원이 있는 백성은 꽹과리를 두드리며 소란을 피워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억울함을 고한다. 이때 왕은 소란죄로 가볍게 처벌한 뒤 민원을 듣고, 우선 처리해 주는 ‘능행정치쇼’를 벌였던 것이다. 정조는 배봉산(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옛 수원(화성시)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12차례 한강을 건너는 효행을 선보였다. 정조의 능행잔치는 조선 최대의 볼거리, 즐길거리였다. 이 덕분에 정조는 세종대왕과 함께 백성이 인정하는 ‘대왕’의 반열에 올랐다. 1883년 서울을 방문했다가 능행을 구경한 독일인 마예트는 ‘코리아의 수도 서울 견문기’에서 “시내가 구경꾼으로 가득 차서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길에는 집 창문이나 대문간, 뜰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로 메워졌다”면서 “도로는 깨끗하게 치워졌고 길 중간에는 붉은 흙이 깔려 있었다. 왕은 말을 타지 않고 지붕이 있는 가마를 탔다”고 능행 풍경을 묘사했다.홍릉이 먼저인가, 청량리가 먼저인가. 우문이지만 헛갈리는 사람이 많다. 당연히 청량리가 주인이요 홍릉은 객이다. 홍릉은 청량리에 22년간 잠깐 깃들었다가 떠났을 뿐이다. 그러나 신라의 고찰 청량사에서 유래한 청량리라는 유구한 지명은 홍릉이라는 19세기 비극의 장소성에 밀렸다. 비명에 간 명성황후는 지아비 고종을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진짜 홍릉’으로 떠나고 없지만 나라와 국모를 잃은 당대인의 가슴속에는 청량리보다 ‘빈 홍릉’이 각인됐다. 옛 홍릉의 기억이 청량리라는 장소를 지배하게 됐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돼 이제는 홍릉이 청량리를 떠올리게 한다. 장소의 역사란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 22년간 이뤄진 고종·순종의 숱한 홍릉능행 덕분에 청량리라는 작은 마을이 유명해지고 서울 동북방의 중심지로 떠올랐다.능행의 정치사에서 흥릉은 일개 황후 능에 불과했지만 조선 말, 대한제국 초에는 개국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능가하는 역사의 무대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 고종의 황후 능이요,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의 친모 능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군인에 의해 비명에 간 황후의 장례식이 2년 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에 치러졌다는 시간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국장 1개월 전인 1897년 11월 22일 최초의 근대국가이자 황제국인 대한제국으로 국호와 연호를 바꾼 점도 놓쳐선 안 된다. 명성황후의 죽음 자체보다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이 더 컸다. 국장은 3개월을 넘기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시간을 끌면서 배일, 극일을 모색한 끝에 1896년 아관파천에 이어 1897년 대한제국 탄생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명성황후의 비극적 시해와 홍릉 조성은 대한제국의 탄생 및 멸망사와 궤를 같이한다. 홍릉은 어렵게 얻은 장지였다. 안감천(성북구 안암동)과 회암(양주시 회암동) 등 모두 7곳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고종의 마음에 차지 않아 다른 7곳을 골랐고 그중 연희궁 터(연희동 일대)와 청량리가 부각됐다. 권세를 누린다는 연희궁보다 ‘평안하고 길한 땅’으로 평가된 청량리가 선택됐다. 동구릉에서 멀지 않고, 참배도 쉬운 점이 점수를 땄다.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에 따르면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은 대략 4800명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황후 장례식이기 때문에 역대 어떤 왕의 국장보다 성대했고, 수행 인원이 많았다. 상여가 가는 코스는 경운궁(덕수궁)~청계천 혜정교~흥인지문~동관왕묘(동묘)~보제원(제기동)~한천교~청량리 홍릉으로 이어졌다. 홍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국고를 털었다. 절과 민가 92호에 보상비 3만냥을 주고 철거했으며, 무연고 묘와 연고 묘 450총을 이장하는 비용 2만 2000냥, 홍릉 아래 전답 수용에 4만 6000냥을 지불했다고 기록돼 있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애통해한 고종을 노국공주를 잃은 고려 공민왕에 비유한다. 3년간 국상을 치르면서 수없이 홍릉길을 오간 고종이 1919년 67세를 일기로 숨지자 금곡 홍릉에 합장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사별한 지 24년 만에 저승에서 만나 해후했다. 청량리 홍릉 옛 황후능 터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비석 한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홍릉은 전설로 남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도봉(창포원의 붓꽃) ●일시 : 7월21(토) 오전 10시~12시 ●집결 장소 : 도봉산역 2번 출구 ●신청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혹서기인 7월28일부터는 저녁 6 시부터 8시까지 야간에 진행됩니다.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369년 임나 설치?… ‘일본서기’보다 빠른 ‘고사기’에도 안 나온다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369년 임나 설치?… ‘일본서기’보다 빠른 ‘고사기’에도 안 나온다

    일제는 서기 369년 신공(神功)왕후가 신라를 공격해서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해 562년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를 한국 점령의 명분으로 삼았다. 한국점령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라는 논리다. 지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을 흘려들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세기 전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막강한 국력의 중국이 만에 하나 ‘과거사 복원’을 주창하고 나선다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다. 369년에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에 나온다.●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들 의문은 이런 내용이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점이다. 서기 369년에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리고 가야 전역을 점령해서 임나를 설치한 것이 사실이면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을 리 없다. 일제가 이에 대응해서 만들어 퍼뜨린 것이 이른바 ‘삼국사기 불신론’이다.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도 임나 운운하는 말이 일절 나오지 않자 삼국유사도 가짜로 몰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국사기 불신론은 일제가 한국을 점령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의 주요 논거 중 하나였다. 역사에서는 369년에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369년에 야마토왜가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리고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를 설치한 일이 실제 있었다면 그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369년조 기사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해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임나일본부’설은 물론 ‘임나=가야’ 따위의 논리는 다 허구가 된다. 그럼 서기 369년조의 기사, 즉 ‘일본서기’ 신공(神功·진구) 섭정 49년(369년)조의 기사를 살펴보자.●369년에 생긴 일 일본서기에는 이렇게 나온다. ‘49년 봄 3월, (신공왕후가)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녹아별(鹿我別·가가와케)을 장군으로 삼고 구저(久·백제사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건너가서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습격하려 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군사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사백(沙白)·개로(蓋盧)에게 다시 상표를 올려 군사를 더 청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신공왕후는)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수이다)에게 정병을 주어 사백·개로와 함께 보냈다. 이들이 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比自)·남가라(南加羅)·탁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야마토왜에서 황전별 등의 장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리고 이로 인해 가야 7국을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렸는데, 가야가 점령당했다”는 이상한 논리다. 일본서기는 야마토왜군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곳까지 무인지경으로 휘몰아쳐 점령했다고 말한다. “이에 군사를 서쪽으로 돌려서 고해진(古爰津)에 이르러 남쪽 오랑캐인 침미다례(彌多禮)를 정벌하고 백제에 하사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 및 그 왕자 귀수(貴須)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이때 비리(比利)·벽중(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네 읍이 자연히 항복했다”고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에 나온다. 일본과 남한의 ‘임나=가야’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모두 경상도와 전라도로 비정한다. 예를 들어 탁순은 대구 또는 창원이고 침미다례는 제주도 또는 전라도 강진이라는 식이다. 이를 입증하는 객관적 근거는 없다. 이들 지명을 한국의 옛 지명과 비교해서 한 글자라도 비슷한 글자가 있으면 갖다 맞추는 식이기 때문이다. ●근초고왕 부자의 충성 맹세? 일본서기 신공왕후 조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백제왕 부자의 충성 맹세다. 일본과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이 백제왕 부자가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라고 주장한다. 일본서기는 백제왕 부자가 야마토왜의 장수들과 고사산(古沙山)에 올라서 신공왕후에게 맹세했다는 충성 맹세문을 싣고 있다. “만약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까 두렵습니다. 또 나무를 잡고 있으면 물에 쓸려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서 맹세하니 영원히 썩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천추만세까지 끊이지도 않고 다함이 없이 서번(西蕃·오랑캐가 사는 땅)이라 칭하면서 봄가을로 조공하겠습니다.” 근초고왕 부자는 실제로 신공왕후에게 이런 충성 맹세를 했을까. 일본서기는 2년 후인 신공(神功) 51년(371)에도 백제왕 부자가 야마토왜에서 온 사신에게 “귀국(貴國·야마토왜)의 큰 은혜는 하늘처럼 무겁습니다.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겠습니까? 성왕(신공왕후)께서 위에 계셔서 해와 달같이 밝으며 신(臣)이 아래에 있어서 산악같이 굳습니다. 영원히 서번(西蕃)이 되어 끝까지 두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다”라고 땅에 이마를 대고 맹세했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의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야마토왜는 황제국이자 신공은 황제고, 백제는 야마토왜의 제후국이자, 근초고왕은 신하다. ●너무 다른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 그럼 일본서기의 이런 내용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임나를 설치했다는 369년과 백제왕 부자가 야마토왜의 사신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절했다는 371년 백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삼국사기를 살펴보자. ‘삼국사기 근초고왕 24년(369)조’는 고구려 고국원왕이 기병 2만으로 치양(雉壤)까지 내려오자 백제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 군사 5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말하고 있다. 같은 해 11월에는 근초고왕이 한수(漢水)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했는데, 모두 황제의 색깔인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백제왕 부자가 야마토왜의 사신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371년에 삼국사기는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가 3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근구수왕이 태자 시절 고구려 군사를 수곡성(水谷城)까지 추격하다가 “금일 이후 누가 다시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는가”라고 감탄했다고 말한다.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백제왕 부자는 야마토왜의 사신들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충성을 맹세하는 ‘못난 왕가’지만 삼국사기의 근초고왕 부자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중흥군주 일가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내용은 너무 다르다. 둘 중 하나는 거짓임에 분명하다. 어떤 게 거짓일까.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검증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살펴보려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 검증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야마토왜에서 신라를 깨뜨리고 가라 7국을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는 369년조 기사를 보자. 369년은 신라 내물왕 14년인데, 삼국사기는 기사 자체가 없다. 이 해 신라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가 일부러 기사를 빼먹은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왜(倭) 관련 기사가 49회 나오는데, 이 중 33회가 침략 기사다. 모두 기록했다. 그러나 369년에는 아무런 기사도 없다. 야마토왜군이 신라를 공격한 일 따위는 없었다는 뜻이다. 또한 369년에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면 그해 가야왕실이 망했든지 최소한 가야국왕이 바뀌었어야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제5대 이시품왕이 346년에 즉위해 407년까지 왕위에 있다가 아들 좌지왕에게 물려주었다고 나온다. 369년에 나라가 망하거나 왕통이 바뀌는 일 따위는 있지 않았다. 그럼 371년의 삼국사기 기사를 보자. 삼국사기는 근초고왕 부자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고 말한다. 중국의 ‘위서’(魏書)는 근초고왕이 이 사실을 위나라 효문제에게도 알렸다고 말한다.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사건은 삼국사기와 중국의 위서에도 나오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근초고왕 부자가 야마토왜의 사신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절했다는 일본서기 기사는 일방적 넋두리일 뿐이다. 더구나 369년에 임나를 설치했다는 이 기사는 일본서기보다 8년 전인 712년 편찬된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이 중요한 내용이 ‘고사기’에 실리지 않았을 리 없다. 369년에 야마토왜가 가야를 정벌하고 임나를 설치한 일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371년에 백제왕 부자가 야마토왜의 사신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일 따위는 더욱 없었다. ‘임나일본부’도 ‘임나=가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임나=가야’라면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 이해 불가다.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는 지면개편 등으로 21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전략적 요충지 강릉에서… ‘김씨 왕국’ 원대한 꿈 품었을까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전략적 요충지 강릉에서… ‘김씨 왕국’ 원대한 꿈 품었을까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인천공항에서 서울과 평창을 거쳐 강릉을 잇는 경강선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대관령국도에 의존하던 강릉과 영서(嶺西)의 교통은 앞서 1975년 왕복 2차로의 영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이후 대관령고개를 넘는 대신 여러 개의 터널로 이은 4차로 확장공사가 2001년 마무리되면서 영동고속도로는 훨씬 편안해졌다.이제 서울역에서 KTX 열차에 올라 1시간 40분이면 강릉이다. 하지만 지하터널로 백두대간을 지나는 경강선을 타면 결정적인 여행의 재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대관령 고개 너머에 펼쳐진 강릉시내와 동해바다의 장관이 그것이다. 대관령에서 강릉을 바라보면 산과 바다가 제법 멀리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동지방에서는 드물게 토지는 넓고 비옥하다. 강릉 도심의 서쪽은 태백산맥의 준령이 가로막고 북쪽은 야트막한 산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겨울바람을 차단한다. 그 남쪽으로는 남대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조선시대 강릉도호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吉地)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발굴조사에서는 심곡리와 홍제동, 옥계면 현내리와 주수리 등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초당동을 비롯한 신석기시대 유적은 헤아리기 어렵다.강릉은 예(濊)의 옛 땅이었다. 이때부터 하슬라((河瑟羅)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이곳에서 빈번히 맞부딪친다. 고구려에는 남쪽에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이었고, 신라에도 북방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일 수밖에 없었다. 하슬라가 신라의 영역에 완전히 편입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시대라고 한다. 이후 하서소경(河西小京)과 명주(溟州)로 잇따라 이름과 지위가 바뀐다. 하서는 하슬라의 한자식 표기다. 고려시대에는 1263년(원종 4년) 강릉도, 1308년(충렬왕 34)에는 강릉부, 1389년(공양왕 1) 강릉대도호부로 변화를 겪는다. 오늘날에도 흔히 쓰이는 임영(臨瀛)은 공양왕이 붙인 강릉의 별호(別號)다. 대도호부 체제는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강릉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적 해변 휴양도시로 완전히 거듭나고 있다. 강릉은 태백산맥과 동해바다, 경포호만으로도 아름다움의 극치다. 여기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그 역사가 남겨 놓은 다양한 전통문화, 이 도시의 새롭고도 특별한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는 ‘커피 문화’는 여행자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강릉이 가진 흥미로운 역사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주인공은 김유정과 김주원 부자(父子)다. 태종무열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모두 생몰 연대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통일신라가 하대로 접어드는 8세기 중·후반을 살았다. 김유정이라면 낯설어도 김무월랑과 연화부인에 얽힌 설화라면 익숙한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남대천 월화정 설화’를 가장 자세히 적어 놓은 글은 ‘홍길동전’을 지은 강릉 출신 고산 허균의 ‘별연사고적기’(鼈淵寺古迹記)라고 한다. 김무월랑은 강릉에 머무는 동안 연화부인과 사귀었다. 그런데 무월랑은 경주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었다. 연화부인은 편지를 써서 연못에 던졌는데 잉어가 물고 갔다고 한다. 어느 날 경주의 무월랑 집에서는 잉어를 시장에서 사 왔는데 배 속에 연화부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고려사’ 악지(樂誌)에 나오는 ‘명주가’(溟州歌)의 배경설화이기도 하다. 강릉 남대천 남쪽의 바위 언덕 위에는 월화정(月花亭)이 있다. 무월랑과 연화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이름 지은 정자다. 1933년 강릉대도호부의 객사인 임영관의 부재를 가져다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월화정은 1936년 대홍수 때 남대천이 범람해 휩쓸려 간 것을 2003년 복원한 것이다. 연화부인의 집이 이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연화정은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강릉중앙시장과 마주 보고 있다. 중앙시장은 이제 강릉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옛 동해북부선 다리는 최근 인도교로, 철로를 걷어낸 시장 골목은 ‘월화거리’로 새 단장했다. 김유정과 연화부인의 혼인은 중앙귀족과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지방호족의 결합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아들이 강릉 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해 통일신라를 다룬 각종 사서(史書)에는 그의 이름이 예외 없이 등장한다. 선덕왕이 785년 후사(後嗣) 없이 죽자 군신(群臣)은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김주원이 때마침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해 건너지 못하게 되자,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며 상대등 김경신을 추대했으니 곧 원성왕이다.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김주원은 명주로 낙향했는데, 원성왕은 786년 그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했다. 식읍(食邑)은 강릉은 물론 오늘날의 통천·양양·삼척·울진·평해에 이르렀다고 한다.강릉 성산면 보광리 대관령 중턱에는 명주군왕 김주원의 무덤이 있다. 다만 당초의 무덤인지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전한다. 지금의 무덤은 조선 명종 때 강릉 부사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후손 김첨경이 복원한 것이다. 이름처럼 왕릉을 방불케 한다. 군왕이라는 호칭은 좀 낯설다. 원성왕은 당나라로부터 선덕왕의 ‘검교태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檢校太尉 鷄林州刺史 寧海軍使 新羅王)의 작위를 물려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를 두고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원성왕이 스스로 황제국의 제후라는 것을 내보여 대외적 입지를 강화하면서 국내적으로는 특정 지역 세력을 군왕에 봉하는 일종의 봉작제(封爵制)로 황제적 지위를 행사하려 했다는 학계의 시각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종기는 김주원의 아들인데 작위를 물려받아 왕이 됐다. 김정여는 김종기의 아들인데 처음 조정에 벼슬해 상대등에 이르렀고, 명원공에 책봉됐다. 김양은 정여의 아들인데 김명의 난(亂) 때 신문왕을 도와 사직을 안정시켰고 명원군왕에 추봉됐다’는 대목이 보인다. 김주원 말고도 아들 김종기와 증손 김양이 군왕에 오른 것이다. 김주원 집안이 신라왕의 책봉을 받는 군왕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인 국가를 추구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주원은 당나라의 수도를 모방해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의 수도를 정했는데, 오늘날 남대천 북쪽의 장안동이 그 흔적이라는 것이다. 당나라의 장안은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천자(天子)의 국도(國都)를 통칭하는 일반명사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김주원의 꿈은 원성왕의 그것보다도 컸다. 명주군왕묘는 강릉시가 제작한 관광지도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무덤 입구의 숭의재(崇義齋)는 김주원을 기리는 사당이다. 정문에는 삼왕문(三王門)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세 사람의 군왕, 곧 김주원, 김종기, 김양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겠다. 무덤 일대를 돌아본 전체적 인상은 이렇다. 강릉 김씨 종중의 기념물이라는 시각을 덜어내고 객관적 역사를 부각시키면 훨씬 더 진정성 있는 문화유산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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